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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복! (마 5:1-12)

by 【고동엽】 2022. 2. 9.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복! (마 5:1-12)

 

산상보훈은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모든 설교의 요약이며 인간윤리의 최고봉입니다. 그래서 산상보훈은 그리스도인의 황금률입니다. 이 교훈은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는 윤리적인 교훈이요, 그 속에 복음이 담겨져 있는 황금률'입니다.
유명한 문필가 톨스토이는 '성경이 다 없어진다 해도 산상보훈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인도의 위대한 민족 지도자였던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위하여 영국과 싸우다가 2,338일을 감옥에서 보낸 사람입니다. 그는 비록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평생에 산상보훈을 애독했고, 심지어 인도인들에게 '우리가 살길은 이 교훈대로 사는 길'이라고 말하면서 자기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마5-7장을 읽어주었다고 합니다. 간디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생활 기본으로 삼았고, 이 정신으로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대항하며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르신 산은 갈릴리 호수를 에워싸고 있는 '햇틴'산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성지 순례를 다녀오는 목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갈릴리 바다 서북쪽 가버나움 근처에 예수님이 친히 올라가셔서 여덟 가지 복을 가르치셨다고 해서 그 산을 팔 복 산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이 팔 복 산에는 팔 복을 기념하여 팔각으로 지어진 팔각 예배당이 있는데, 천장은 팔각으로 되어 있고, 그 한 면마다 여덟 가지 복을 차례로 기록하여 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에 있으면 여덟 가지 복 가운데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팔 복에서 이 세상에 있는 기존의 전통적인 개념들을 바꾸어 놓고 새로운 의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세 가지입니다.
①행복의 개념을 새롭게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이 여덟 개의 복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모두 '마음의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고 녹슬지 않고 없어지지 않고 누가 빼앗아 갈 수 없는 복이 있다면 그것은 마음이 복입니다. /믿/ 이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②다음은 보상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보상에 대해서 오해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상하면 모두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축복하면 또 물질적이고 보이는 것을 생각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기복신앙'입니다. 산상수훈은 바로 그 점을 바로잡아 주고 있습니다. 팔 복을 보면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얼마나 멋있는 보상입니까?
③미래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셨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미래입니다. 미래는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고상한 자본입니다. 그래서 미래는 희망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죽어 가고 있는 사람에게 천국이 훤히 보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왜 죽음이 두렵겠습니까? 지금 한창 뛰어가고 있는 마라톤 선수에게 골인 지점이 눈앞에 보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왜 중도에서 포기하겠습니까?
천국 없는 기독교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천국 없는 종교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천국 없는 예수를 왜 믿겠습니까?
팔 복의 결론은 천국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12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할/ 그렇습니다. 천국 없는 기독교는 상상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기독교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우리 동양 권에 복은 '돈이 많고, 건강하고, 출세하고, 자녀들을 많이 낳고' 이것이 복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는 복은 천국을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유한다는 것은 우리가 죽어서 들어가는 천국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기 천국은 지역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입니다. 즉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보호와 인도입니다.
여기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말씀이 눅6장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로 나옵니다. 그러면 여기 마음이 가난한 것이 무엇인가? 성경이 그 주석을 달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마다 그 견해가 다릅니다. 실제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없습니다. 고금동서 어느 문헌에도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한 곳이 없습니다.
'집이 가난하다, 나라가 가난하다. 그 사회는 문화와 지식이 빈곤하다.'는 말은 할 수 있지만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애매 모호한 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저도 마음이 얼마나 해야 가난한 건지 모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령의 가난은 영적인 가난'을 의미합니다. /아멘!/ 심령은 '영'으로 또는 '마음'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심령'을 빼고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뻐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착취를 당하는 식민지 백성으로서 모두가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선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와는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저들이 고대하고 기다리는 메시아는 정치적으로는 로마 제국의 통치에서 자유와 독립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시각으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난에서 부요를 줄 수 있는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수많은 사람에게 먹이시는 기적을 베풀자 왕으로 추대하려고 난리를 피었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말씀하신 첫 번째 복이 물질적 가난에 대한 것이었다면 성도들은 먹지 못해 굶주리는 기아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물질적 가난에 국한되었다면 교회는 어떤 구제도 행할 의무가 없게 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심령이 가난한 자, 마음이 가난한 자'는 무엇을 말합니까?
⑴물질의 가난을 뜻하지 않습니다. 요3장에 니고데모는 유대의 높은 관원(국회의원 정도)이고, 또 율법선생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높은 계급과 신분과 재산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무명의 나사렛 청년 예수님 앞에 나와서 그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물음을 던질 만큼 마음이 가난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 이 가난한 마음 때문에 니고데모는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가난은 영적인 가난입니다, 영적인 갈급함, 사모함을 말합니다. 거지가 먹어도, 먹어도 먹고 싶은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도, 받아도 갈급 함으로 사모하십시오, 이런 사람이 천국을 소유하게 됩니다.
⑵지식이 가난한 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바로 섬길 수가 있습니다. 무식한 것이 여기서 말하는 가난이 아닙니다.
⑶심지가 약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도 아닙니다. 마음이 가난하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쉽게 마음이 갈대와 같이 이리 흔들, 저리 흔들거리는 마음 약한 사람들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그런 가난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어떤 가난을 말하고 있는가?
⑴하나님 앞에서 죄와 자기의 무능력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깨어진 마음'입니다. 구약의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모세입니다. 그는 살인자의 모습으로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치기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그의 삶은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호렙산에서 '네 백성을 탈출시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저는 아닙니다.' 네 번씩이나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손을 문둥병에 걸리게 했다가 고쳐 주시기도 하고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게 되는 기적도 보여줍니다. '이런 기적을 내가 보여 줄 테니 네가 가라' 그래도 모세는 못 가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왜? 그의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신약에서는 베드로가 있습니다. 밤이 맞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순종하였더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의 거룩한 영광을 보면서 자기의 죄와 무능과 연약함을 깨닫고 '주님!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말하는 영적인 태도, 진실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백하는 태도, 이것이 겸손한 성도의 자세입니다.
⑵겸손한 마음입니다. 성경에 보면 겸손한 마음과 교만한 마음을 가진 두 사람이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교만한 마음의 대표자는 바리새인이었고,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한 자는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주님! 저는 일주일에 한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도 꼬박, 꼬박 냅니다. 저는 저 세리와 다른 사람입니다. 저는 정의팝니다.' 자기를 들어내고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주님! 저는 주 앞에 아무 것도 내 놓은 것이 없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세리는 자기의 죄와 무능력을 내어놓고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사모했습니다. 이것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세리의 기도를 받으셨지만 바리새인의 기도는 외면하셨습니다.
성경은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 욥22:29절에서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시10:17절에서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했고, 또 시147:6절에서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잠3:34절에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으며, 잠22:4절에서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하셨습니다.
⑶가난한 마음을 단순한 마음입니다. 복잡한 마음도 아닙니다. 두 마음도 아닙니다. 오직 한 마음입니다. 신앙은 두 마음을 품으면 흔들립니다. 약1:8절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할/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간 두 마리 다 놓칩니다. 한 마음을 품으십시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히12: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아멘!/
⑷마음의 가난은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를 말합니다. 의지한다는 말은 순종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믿음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초가 되어 주시고 언덕이 되어주시고 발판이 되어주십니다. /아멘!/
⑸가난한 마음은 구하는 마음입니다. 탕자가 재산이 있고 건강이 있을 때는 먼 외국에 가서 자기 마음대로 허랑 방탕하게 살다가 재산을 다 날리게 되었을 때, 비로소 아비 집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왜 아비 집으로 갔습니까? 눅15:17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굶어 죽게 되니까 아비 집에 가서 구했습니다. 그래요! 가난하게 되면 무엇을 구하려는 강력한 소원을 품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가령 끼니가 없는 정도로 가난한 사람은 '먹을 것만 있었으면, 밥이라도 실컷 먹어 봤으면' 강력히 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가난하게 되면 영의 안식처인 하나님의 나라를 강하게 구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⑹내려놓은 마음입니다. 비운 마음입니다. 욕심도 탐심도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산상보훈의 모든 교훈은 오늘 팔 복의 이 첫째 복을 이루지 않고서는 둘째 복도, 셋째복도, 아니 전체 산상보훈의 황금률도 이룰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할/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을 살 때에 애통하며, 슬퍼하며, 탄식하며 살면 안됩니다. 빌립보서의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늘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또 데살로니가 전서의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대로 항상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아무리 절망 속에 있더라고,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를 기다리며, 소망으로 눈이 반짝여야 합니다. 피할 길을 주시고, 이길 힘으로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소망 가운데 기뻐해야 합니다. 애통하고, 슬퍼하고, 탄식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애통함은 세상 속에서 늘 탄식하며 슬퍼하며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슬퍼하고, 죄에 대하여 탄식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애통은 보통의 애통이 아닙니다. 아주 절망적인 애통을 말합니다. 창37:34절에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이 죽였다는 말을 듣고 애통하였다는 그런 애통입니다.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이것이 애통입니다. 자식의 죽음 앞에 애통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죽음의 애통은 이 세상의 어떤 애통보다 더 큰 애통입니다. 이런 절망적인 애통을 하는 자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애통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애통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 적이고 육신 적인 애통히 있는가하면 차원 높은 애통 즉 두 번째 신령한 문제를 위한 신령한 애통히 있습니다. 세상 적인 애통, 육신 적인 애통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⑴병들어 애통하는 애통히 있습니다. ⑵물질의 손해로 인한 애통히 있습니다. ⑶자존심이 상하여 일어나는 애통히 있습니다. ⑷정든 사람과 이별의 애통히 있습니다. ⑸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망신을 당해서 우는 애통히 있습니다. ⑹소망이 끊어져 절망하는 애통히 있고,
⑺그밖에 우울한 성격 탓으로, 일시적인 불행으로 그리고 자기의 성질에 못 이겨 애통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런 애통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위로와 축복이 있는 애통히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애통을 통하여 '천부여 의지 없어 손들고 왔나이다'하며 주님 앞에 나오면 이것도 복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애통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①자신의 죄로 인해 참회하는 애통입니다.
2천년 전 예루살렘 성문 밖 골고다 언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힘겹게 오르고 있었습니다. 무자비한 채찍에 맞아 갈기갈기 찢어진 몸에서 흐르는 피로 온몸을 물들었습니다. 짓눌러 씌워진 가시관의 가시가 박힌 머리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아픔과 함께 흘러내리는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고통으로 짓누르는 십자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쓰러지고 또 쓰러지는 예수님을 채찍으로 내려치는 로마병정의 무자비함! 그 쓰라린 채찍질에도 쉽게 일어서지 못하는 예수를 위하여 로마병사는 그 곁에서 함께 따르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함께 지도록 했습니다.
이 처절한 십자가의 길에는 백성들과 여인들이 함께 따르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많은 여인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였습니다. 그 무거운 고통의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던 예수님께서 여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눅23:28)' 이 한마디 주님의 음성은 울던 여인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슬피 울고 있었을까요?
첫째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님이 그토록 처참한 지경에 빠진 것이 불쌍해서 울었습니다.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한없는 동정의 눈물이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께 사정없이 잔인하게 채찍질하는 로마군병들 때문에 원망하며 울었습니다.
셋째는 주님을 위해서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던 제자들이 한 사람도 보이진 않음을 안타까워하며 울었습니다. 그러니까 용기 없는 제자들의 야속함을 아쉬워하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들이 한심해서 울었습니다. 이렇게 슬피 울며 따르던 여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딸들을 위하여 울어라'고 하십니다. 고난 받는 나의 아픔을 애처롭게 생각하며 나를 바라보지 말고, 아직도 죄 가운데서 방황하고 있는 너와 네 자녀들의 죄를 인하여 애통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약에 태초에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먹는 배반이 없었다면 십자가는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계속되는 죄악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 고난의 주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늘도 죄 중에 빠져 허덕이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긍휼이며 자비입니다. /믿/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오늘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계속 짓고 있는 나 자신과 우리들의 자녀들을 위해 가슴을 치며 슬피 울어야' 합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받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51:3절에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②다른 사람의 불행을 애통해 하는 마음입니다. 이웃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애통하는 삶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애통입니다.
③그 다음에 우리가 교회가 부흥을 위하여 애통해야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면 여러분이 복을 받습니다. 교회는 애통하는 자들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믿/
또 우리가 무엇 때문에 애통해야 합니까? 자신의 부족함을 애통해야 합니다. 신앙의 부족함을 놓고 애통해 합시다. 왜 이렇게 내가 신앙이 나약할까? 여러분 다 양보하여도 신앙은 양보하지 마십시오, 신앙은 일대일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축복은 탐내는 자의 것입니다. 욕심을 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욕심내셔야 합니다.
또 우리가 자기의 인격적인 부족도 애통해야 합니다. 왜 내가 게으르고 나태하고, 방탕하면, 술 취하고, 죄짓는 생활에서 헤매는가? 이 애통히 있어야 합니다. 또 자기의 삶의 궁핍도 가난도 애통해 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가난해서 하나님의 일을 못하겠습니다. 복을 주십시오, 하나님께 많이 드리겠습니다. 이런 애통은 세상 적인 애통히 아닙니다. 신령한 애통입니다.
▶'별들의 고향'으로 유명한 작가 최인호씨의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라는 또 다른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서문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나는 통곡하며 살고싶다. 나는 대충 대충, 생활도 대충 대충, 만남도 대충 대충, 일도 대충 대충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모든 일에 통곡하는 그런 열정을 지니고 살고 싶다. 어찌 사랑뿐이겠는가? 나는 친구도 통곡하고 사귀고 싶다, 꽃 한 송이를 보아도 통곡하며 보고 싶다. 내 아들딸들의 통곡하는 아버지이고 싶다. 아내와도 늙어 죽을 때까지 통곡하며 살고 싶다. 하나님도 통곡하며 믿고싶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간과 사물에 대한 깊은 애정과 정열과 감격이 있는 삶을 살겠다는 작가의 각오입니다. 통곡이 없고 눈물이 없는 것, 눈물이 말라 버린 사람, 감동과 정열이 없기에 진실도 없습니다. 물론 위로도 없습니다. 비인간적이란 말이 무엇입니까? 눈물이 없고 감격과 감동이 없다는 말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어떤 위로입니까? 창조주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전능자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시126:5-6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계7:17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할/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는 ⑴부드럽고 온유하다는 것 ⑵관용, 관대한 마음을 가지는 것 ⑶자제 즉 '셀프 콘트롤' 자기가 자기를 억제할 수 있는 것 ⑷인내, 오래 참는 것, ⑸겸손함입니다.
▶성경에 보면 온유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①참으로 온유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②모세를 보겠습니다. 민12:3절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친히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 앞에 온유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온유한 자가 됩니까? ①하나님 앞에 온유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온유는 ⑴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노아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⑵하나님의 섭리에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따르는 자입니다. 욥이 그런 사람입니다. 욥1:1절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모든 것을 잃었지만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셨다가 하나님이 가져가시니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②이웃에 대한 온유가 있어야 합니다. 온유는 대게 상대적인 뜻이 많습니다. 먼저 이웃에 대한 성도의 자세는 ⑴부드러워야 합니다. 말에도, 행동에도, 모든 표정에도 부드러워야 합니다. 인기 있는 정치인들은 표정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늘의 스타입니다.
⑵이웃에 대한 참는 것도 온유입니다. 성날 일이 있고, 괴로운 일이 있고, 중상하고 모략 하여도 참습니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무시당하는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사람들이 따라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무시할 때도 있습니다. 속상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참으십시오, 참을 때 온유해 집니다. 온유의 다른 이름은 인내입니다. 참으면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약1:4절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고, 또 히10:36절에서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할/
⑶이웃에 대한 관용의 마음도 온유입니다. 주님은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쳐죽인 사람들까지도 용서해 주었습니다.
악은 악으로 갚는 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악을 선으로 갚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벧전3:9절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하심이라'
▶우리는 사랑의 원자탄을 쓴 손양원 목사님을 잘 압니다. 6.25 직후 자기 아들 둘을 죽인 빨갱이 청년을 용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감옥소에 가서 탄원을 해서 풀려나게 했고, 자기의 양자로 삼아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누가 줍니까? 하나님이 주십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행위야말로 이 세상에서 성도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며 자랑입니다.
⑷죄를 범한 자에게도 온유해야 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갈6:1절의 말씀을 보세요!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세상 사람들은 죄진 자에게 돌을 던집니다. 주님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도 용서하셨습니다. 돌을 들고 서 있는 관중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먼저 죄 없는 자가 돌을 들어 저 여인을 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나와 보라고 하세요. 사람들은 자기의 허물과 죄를 대단히 너그럽게 관용을 베풀면서도 이웃에 대한 죄는 결코 용서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자는 모든 허물을 덮어주는 자입니다.
⑸우리는 공동체의 하모니를 위하여 온유해야 합니다. 온유하지 못한 자가 공동체 즉 단체에 들어오면 그 단체가 깨어집니다. 바울은 교회 공동체의 생활원리를 엡4:1-3절에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아멘!/ 하나가 되는 데에 중요한 것은 온유한 태도입니다. 온유한 자는 양보가 있고, 이해가 있고, 협조가 있고, 열심히 있고, 희생과 봉사가 따릅니다.
③우리는 우리 자신 앞에 온유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잠4:23절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또 잠14:29절에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온유는 셀프컨트롤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억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혈기가 날 때 그것을 억제해야 하고, 분이 날 때 욕심이 날 때, 고통이 날 때 참아야 합니다.
잠언을 쓴 솔로몬은 '큰 성을 빼앗는 자 보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큰 용사'라고 했습니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귀한 신앙의 덕목이요, 인격의 품위입니다. /믿/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이것은 내가 가서 땅을 빼앗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능동적으로 차지한다는 말이요, 수동적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곧 '가나안 땅'을 의미하는데 우리들의 가나안은 저 영원한 천국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말은 '네가 그 땅에서 범사가 다 형통하게 잘 된다'는 말입니다. /할/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주님의 팔 복을 자세히 음미해보면 점점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처음 천국 문에 설 때에는 심령이 가난해야 하고, 즉 겸손한 마음이어야 하고, 천국 문이 열리면 그 일보로 자기 죄를 회개하는 애통함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 단계는 마음이 온유해야 되고, 그 후 방향을 의로 향하라고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경은 의에 대한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님은 마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고, 마5:20절에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의란 무엇입니까? 보통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의란 옳은 것, 올바른 것, 사람이 행하여야 할 바른 도리, 또는 잘못이 전혀 없는 것을 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의란 세상 적인 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렇다면 의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주님을 모시는 삶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에녹처럼, 요셉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게 한 사람입니다. 요셉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렸고, 다윗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의는 하나님께서 '옳게 보심'입니다.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은 무엇입니까? 원어적인 뜻을 보면 '자비, 인자, 사랑, 친절, 따뜻한 마음', 더 나아가서는 '변함 없는 사랑'으로 변역 됩니다. 본래 긍휼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는 용서해주고 싸매어 주는 긍휼이 없습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긍휼은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무한히 용서하시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 마음을 받아야 베풀 수 있습니다.
▶사랑을 말할 때 상대를 따라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①나보다 높은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부모나, 스승, 상관에게 하는 사랑은 존경, 공경, 경외라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②나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친구, 연인, 동료들에게 하는 사랑을 우정, 애정, 연정이라고 합니다.
③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향한 사랑을 가리켜 긍휼, 인자, 또는 자비라는 말을 씁니다. 그래서 본문에 나오는 긍휼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 이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최대 긍휼은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시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긍휼입니까?
①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⑴'어려운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약한 자, 고통을 겪는 자, 가난한자, 외로운 자를 불쌍히 여기는 무한한 동정심이 있어야 합니다. 즉 자신과 무관할지라도 적극적으로 그의 입장에 서서 그를 이해하고 그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병들어 고통 받는 자의 입장에서, 어려움 속에서 고생하는 자의 입장에서, 그런 의미에서 긍휼은 사랑의 구체적인 설명이요, 실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멘!/
⑵'원수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나를 학대하고 못살게 하고 적대시하는 사람, 또 온갖 죄악을 저지를 사람들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②긍휼은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③긍휼은 편견이 없는 넓은 마음입니다. 눅10장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주셨습니다. ▶여기서 사마리아 사람의 세 가지 귀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⑴긍휼의 대상이 누구냐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⑵긍휼은 자기의 이익과 체면을 생각했다면 그는 결코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이익과 생활이 없는 일에 시간과 돈과 정열을 다 쏟아 놓았습니다. 돈이 더 필요하면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요즘 이런 사람이 있다면 병신으로 보던지 미친 사람으로 볼 것입니다.
⑶긍휼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긍휼은 가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에 있어야 합니다. 긍휼은 구체적으로 형통입니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많이 흘리고 감격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도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그런데 행동이 없습니다. 이것은 긍휼이 아닙니다. 긍휼은 구체적으로 말없이 행동하는 것이요, 아무도 모르게 실행하는 믿음이랍니다.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청결이라는 원어 '카타로스'는 '깨끗하다, 순수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말은 때묻고, 더러운 옷을 세탁해서 깨끗하게 만든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옷처럼 죄로 물들기 쉽고, 때묻기가 쉽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늘 씻어내야 합니다. /할/
⑴말 그대로 '깨끗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몸에 있는 눈은 하루에 한 2만 5천 번 정도 깜빡거린다고 합니다. 깜빡거리면서 눈물샘에서 나온 깨끗한 액으로 안구를 계속해서 씻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먼지 하나라도 남아 있지 않도록 깨끗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밝게 만물도 보고 사람도 보고 글도 보는 것입니다. 청결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 눈을 이런 식으로 닦는 것처럼 깨끗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⑵나누어짐이 없는 진실된 마음, 하나된 마음입니다. 마6: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순결의 정신은 일편단심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의 돈과 명예가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두 마음을 품은 것이 됩니다.
⑶청결하다는 말은 정직하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말은 그 사람이 정직하다는 말로 이해합니다. 신용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용 있는 사람과 거래를 합니다.
⑷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청결한 마음입니다. 시119:104절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할/ 악을 어떠한 모양이라도 버리는 마음입니다. 죄를 미워하므로 죄를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는 그 마음이 청결한 마음입니다.
겔36:26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할/
▶청결한 마음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결되지 아니한 마음과는 교제하지 않으십니다. 히12:14절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살전4:3절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어떻게 그 청결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 ⑴주님의 보혈로만이 가능합니다. 미국 침례교회 목사인 '로버트 로우리'는 찬송가 184장에서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라고 찬양했습니다. /아멘!/
⑵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사1:18절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⑶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집니다. 딤전4:5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할/ 기도가 참 중요합니다. 다윗은 범죄하고 나서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여러분,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영광스러운 일인지 아십니까? 모세도 하나님을 뵙게 해 달라고 기도했고, 빌립도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본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⑴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의미입니다(동행). 누가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까?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해서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창39:2-3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⑵교제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거하는 교제입니다. 요15: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아멘!/
⑶하나님의 형상을 마음에 이룬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제일 많이 쳐다보는 사람을 닮습니다. 부부가 닮는 이유는 밤낮 쳐다보며 살기 때문입니다. 시17:15절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9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 '화평케 하는 사람'은 원어 적인 뜻은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평화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평화를 누리는 사람'도 아닙니다. '평화를 유지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소극적인 의미에서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 이 세상을 보다 평화로운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살롬'이고, 헬라어로는 '에이레네'이고, 영어로는 '피스'입니다. 이 말은 우리말 성경에는 '화평, 화목, 평안, 평강' 등으로 평화를 조금씩 다른 어휘로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근본 뜻은 다 같습니다.
유대인들의 인사법은 '살롬'입니다. 이 인사 속에는 '평화 자'란 그런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 인사 속에는 '당신에게 나쁜 일이나 악한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는 당신에게 선한 일,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뜻도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살롬이란 말은 '분쟁이 없는 것' 뿐 아니라 그 속에 '더 선한 것들을 베풀라'는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는 말입니다. /할/
▶성경에서 말하는 화평이란 크게 네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⑴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평입니다. 롬5: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할/
⑵모든 사람과의 평화입니다. 히12:14절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또한 롬12:18절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하십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목이 없다는 것은 쉽게 표현하면 전쟁입니다. 전쟁은 서로 피곤한 일입니다.
⑶믿는 형제와의 화평입니다. 마5;23-2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음이 생각나거든 재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⑷우리 마음속에 평안입니다. 요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할/ ▶그러기 위해서는,
⑴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과 화평을 이루는 비결은 순종의 삶입니다.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는 삶입니다.
⑵이웃과의 화목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이면 먼저 화목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분파를 절대 허락지 않습니다. 예수의 사람으로 똘똘 뭉쳐야 합니다. 남을 절대 비방해서는 안 됩니다. 또 절대로 나쁜 말을 전달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말을 다 빼고 나쁜 말만 전달해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평화의 사신입니다. 분쟁, 불화, 갈등이 있는 곳에 예수 믿는 사람이 들어가면 화목은 이루어야 합니다. 성 '프란시스'의 기도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할/
⑶내 자신과의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를 모셔들인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나 자신 속에 평화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내 자신이 불안하면 큰일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면 그 사람은 수지맞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인정해 주시니까 가는 곳마다 형통한 축복 자가 되었습니다.
⑴절대적인 보호를 받게 됩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습니다.
⑵천국을 상속받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땅에서 벌써 천국 열쇠를 받은 자들입니다. 마16:19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할/
⑶형통의 복을 받게 됩니다. 시122:6절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할/ 형통이란 히브리어에 보면 '일이 잘된다, 번창해진다, 안전하다, 견고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막힘이 없다.'는 뜻입니다.

 

▶10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여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말은 의롭게 살기 위해 고통을 받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핍박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신 후 곧이어 '나를 인하여 핍박을 받을 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산상 팔 복 가운데 '복이 있나니'하는 말씀이 두 번 반복되는 곳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에게 뿐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에게는 갑절의 복이 부여됩니다. 예수께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신 후 곧 이어 '나를 인하여 핍박을 받을 때 복이 있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면 여러 가지 핍박이 따릅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따돌림을 당하고 억울함을 당하고 병신, 쪼다 취급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핍박을 받을 때, 오히려 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담대히 주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라고 예수께서 우리를 격려하고 계십니다. /아멘!/
▶왜 성도가 핍박을 받는가? 몇 가지를 알아보겠습니다.
⑴성도는 세상의 불의에 동참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미워합니다.
⑵불신자를 향하여 죄인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미움을 받았습니다.
⑶성도는 우상 숭배를 배격하기 때문에 미움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 황제를 섬길 것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섬길 것인가?' 양자택일의 위협을 받았을 때에 단호히 황제 숭배를 거절하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핍박과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⑷성도는 주님 뜻대로 살기 때문에 미움을 받았습니다. 주일 낮 예배만 참석하는 것으로는 미움을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녁 예배, 수요예배, 철야, 구역예배, 새벽기도에 나오다 보니 미움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를 별나게 믿는다.'는 이유에서입니다.
⑸주께 십일조를 드리다가 핍박을 받고 감사헌금 때문에도 핍박을 받습니다.
⑹성도는 불신자들에게 임할 무서운 심판을 예언하다가 미움을 받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천국에 가지만 믿지 않는 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타는 지옥 불에 떨어진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당신, 천당 가봤어'하고 핏대를 세웁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습니다. /아멘!/
▶의를 위한 핍박이 아닌 것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일을 잘못 처리한 결과로 어려움이나 공경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것은 핍박이 아닙니다. 그것은 처벌입니다.
⑴우리의 실수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은 핍박이 아닙니다. ⑵어떤 정치적인 이유로 누구를 반대하기 위하여 받는 핍박은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 아닙니다.
⑶자신이 미련해서 받는 핍박도 본문의 의 때문에 받는 핍박이 아닙니다.
⑷광신적인 열정 때문에 받는 고난도 본문의 의가 아닙니다.
⑸대의명분을 위해 받는 고난도 있는데 이것 역시 본문의 의가 아닙니다. 정치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혼합시켜서 그것이 마치 의를 위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받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치에 참여하고, 미디어 법에 반대하고, 노사문제에 개입하고, 어떤 정당에 반대하다가 투옥을 당하고 고문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민주화를 위해서 분신자살을 합니다. 그것은 그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희생된 것뿐입니다. 잘 분별하는 영의 지식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할/


▶예수 때문에 받는 핍박의 보응은? 11-12절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핍박을 허용하는가?
⑴핍박은 진정한 성도를 구별하시는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토마스 와슨은 '가짜 성도는 예수님을 따라서 감란 산까지는 갈 수 있으나 갈보리까지는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⑵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성품을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핍박은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성품을 완성하는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히12:10절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서양 속담에 '흐르는 시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시냇가의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돌들이 있기 때문에 시냇물은 흘러가며 노래를 창조합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고난의 아픔이 창조적인 인격을 완성해 나갑니다. 시119:67절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⑶핍박은 주님을 만나는 체험의 계기가 됩니다. 단3장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칠 배나 더해진 풀무불 앞에서 외쳤습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욥은 환란 중에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했으며, 요16:33절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승리의 약속이며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천국에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라톤 경기는 이미 고대 그리이스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 올림픽 경기에 있어서도 마라톤은 하이 라이트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던 로마 시대에도 마라톤 경기가 있었습니다. 고전9:25절에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하는 말씀이 있는데 마라톤 경기를 빗대어 한 말입니다.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한 자에게 월계수 나무로 만들어진 관이 씌워졌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박수와 찬사를 받았습니다. 월계수 나무로 만들어진 영광스러운 관이 시간이 지나면서 잎은 시들고 가지는 마르고, 조금 있으면 잎이 다 떨어지고 바싹 마른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됩니다. 이때쯤 되면 박수와 찬사를 보내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잊혀지게 됩니다. 이를 가리켜 고린도전서에서는 '썩어질 면류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썩어질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하여 달음질을 합니다.
집권자들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충성스럽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다가 훈장이라는 것을 고안해 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고한 사람에게 박수와 찬사를 보내며 훈장을 달아주는 것입니다.
레닌이 공산혁명을 할 때에도 사람들의 가슴에 훈장을 달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훈장을 가슴에 달기 위하여 담대하게 혁명에 가담했습니다. 히틀러는 용감한 군인에게 철 십자가 훈장을 달아 주었습니다. 병사들은 이 철 십자가 훈장을 가슴에 달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세상의 모든 영광과 상급은 시간과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썩어질 세상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은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썩지 않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화로운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롬8:18절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있습니까? ⑴기쁜 마음을 가지십시오, ⑵더욱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세상 것 다 잃었어도 믿음 하나만 붙잡고 있으면 모든 것이 다 회복됩니다. 요일5:4절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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