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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은 또 다른 축복입니다! (시 50:14-15)

by 【고동엽】 2022. 2. 9.

환난은 또 다른 축복입니다! (시 50:14-15)

 

영성학에 보면 성공자와 실패자를 이렇게 분류해 놨습니다. 성공자는 '인격과 습관을 따라 일을 하고, 실패자는 늘 자기의 감정을 따라서 일을 한다.'고 전제하면서 몇 가지를 덧붙여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한 번 나 자신과의 비교 해 보면서 체크해 보겠습니다.
⑴일을 하면 기분이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기분이 좋아야 일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쪽에 속합니까?
⑵책임을 따라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분이 내켜야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⑶원리와 원칙에 따라 결단을 내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분과 감정에 따라 결단을 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⑷믿음의 눈으로 일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눈으로 봐야 시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⑸열정과 추진력을 가지고 자기를 창출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누가 추진력을 주기를 기다립니다.
⑹어떤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내가 주역이다.'라는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어디 가든지 구경꾼이고, 변명 전문가이고, 책임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⑺어떤 사람은 문제가 생겨도 기어이 해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문제 앞에 너무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⑻어떤 사람은 평생을 하루같이 한결 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조석변개' 변화가 심합니다.
⑼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제만을 보지만, 성공하는 사람들은 목표만을 봅니다. 다만 그 목표 속에 하나님의 뜻만 보고, 그 목표 속에 하나님의 영광만을 보고 달려가는 자들입니다. /할/ 그런데 이런 성공자의 일을 하다보면 어려움도 고난과 환란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저는 환난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제목 소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두 순탄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살이가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못합니다. 때때로 그리고 갑자기, 그것도 한꺼번에 어려운 일들이 생기기도 하고 환란이 오고 시련이 오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이웃의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사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치고 그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는 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이라고 할 때, 한문에 사람 인자를 보면 서로 의지하고 기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더불어 같이 함께 사는 존재입니다. /할/
그래서 우리는 살다가 남의 도움이 필요하여 도움을 청할 때가 있습니다. '돈 좀 꾸어주세요' 하고 돈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합니다. 또 지식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물어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을 좀 쉽게 하려고 힘이 있고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리 쉽게 들어주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거절을 당하고는 창피한 마음, 섭섭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현실은 어렵고 자기가 자신을 바라보니 너무 초라해지고 환경은 절망적이고 그러다 보면 열등감에,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멘!/ 본문을 보세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할/
우리는 본문 속에서 하나님의 신비한 기도의 약속을 듣게 됩니다. 우리는 평안할 때도 기도해야 하지만 환난 중에는 더 많이 기도해야 됨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기도할 때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사업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기도할 때입니다.
본문은 환난 중에 하는 기도로써 세 단계의 비밀을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⑴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⑵내가 너를 건지리라! ⑶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할/ 이 말씀은 기도하는 자에게 기도에 원리를 잘 설명해 주신 귀한 말씀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본문을 가리켜 '기도신학의 전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⑴'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이것은 기도의 서론입니다. ⑵'내가 너를 건지리니' 이것은 기도의 본론입니다. ⑶'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이것은 결론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르짖고, 응답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기도의 총결편'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응답 받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여기서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아멘!/

 

1. 왜 우리에게 환난이 오는가?

 

①자기의 잘못으로 '죄 값'으로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고난은 누구든지 다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야곱은 자기 욕심에 빠져 형 에서의 장자 권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빼앗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고향에서 살수가 없어 먼 밧단 아람으로 도망을 갑니다. 그는 여기서 몇 년간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면 저들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어길 때 하나님께서는 가차없이 저들에게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쟁의 시달림 속에, 나라의 재앙 속에, 외국에 포로로 잡혀가는 환난 중에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 사건이 성경에서 많이 나옵니다.
개인적으로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못하면 이런 환난이 옵니다. 교만하다가 당하는 경우도 있고, 욕심 때문에 당하는 경우도 있고, 불 신앙 때문에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②믿음을 지키려고 자원해서 당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이것은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입니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고난에 동참하는 것인데 이 고난을 불행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큰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5:10-12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 하였느니라' /할/
의를 위하여 즉 믿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그것을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의로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자원해서 이 환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난은 자기가 알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당하는 환난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있습니다. 구약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이런 고난을 받았습니다.

 

③사단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사단과 마귀와 귀신들이 대적들의 배후에서 역사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원수 마귀는 지금도 여러 가지 역사로 우리로 하여금 환난과 고통 속으로 이끌고 갑니다.
벧전5:8-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하셨습니다.


④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고난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든지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든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요9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가 나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누구의 죄입니까? 부모 때문입니까? 아니면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참으로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일까?
⑴인간의 존엄성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죄의 고통 이전에 가졌던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 주기 위해서 입니다.
⑵미래의 행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현재의 고통에서 미래의 기쁨과 감격을 보여 주었습니다.
⑶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주님을 통해서 어두운 영혼에게 새로운 광명의 빛이 비치게 하셨습니다.
요9:6-7절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주님은 왜 이 소경에게 치유역사를 이렇게 행하셨는가? 평범한 인간의 지각으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은 부분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주님의 숨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보기 위함입니다.
⑴실로암으로 '가서' 왜 실로암까지 가라고 했는가? 실로암 샘물이 효능이 있어서 그러한가? 아닙니다. 주님이 능력이 모자라서 그러한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 예루살렘 성 동문 밖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샘 실로암으로 '가서'씻으라고 했는가? 그것은 주님이 보내심에 대한 순종을 시험한 것입니다(창22:2).
그가 실로암으로 가는 순종의 행위는 곧 신앙고백입니다. 그 눈에 흙을 발라서 실로암까지 가는 동안에 그를 보는 사람들에게 비소와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경된 몸으로 갈 때 넘어지고 자빠지는 고통도 감수해야 합니다. 이러한 환경적인 어려움을 감수하고 순종하는 행위를 시험해 본 것입니다.
⑵가서 '씻으라'고 했습니다. 씻는 것은 믿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 가서 씻는다고 낫겠는가? 나도 가서 씻어 보고 목욕도 해 보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경된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었습니다. /할/
⑶'밝은 눈'은 순종에 대한 응답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순종하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왜 실로암으로 보내었는가? 실로암은 '보냄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실로암에는 주님의 약속이 있는 곳입니다. 모리아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곳입니다. 니느웨는 요나에게 약속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세상에 모든 길은 막혀 있어도 실로암으로 가는 길만은 열어 놓아야 합니다. /아멘!/
여러분의 실로암은 오늘 이 자리 예배드리는 처소입니다. 그리고 나가서 전해야할 세상입니다. /믿/
⑷다시 '왔더라'고 함은 감사의 표시입니다. 그가 먼저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받은 바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기 위한 표시입니다. 성전 미문에서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는 고침을 받고 제일 먼저 성전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받은 바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했습니다. 주님은 감사를 잃어버리고 가버린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마17:17)고 책망했습니다. /할/

 

⑤애매한 고난도 있습니다.
이런 환난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전혀 모르고 애매하게 당하는 경우입니다. '애매하다.'는 말은 '전혀 나와 상관이 없는 것 같은데 억울하고 부당하게 당하는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 없이 왜 이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그런 말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나의 잘못과는 상관없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있고, 이웃의 화제로 내 사업에까지 미치는 고난이 있고, 악한 자의 손길로 말미암아 내 사업이 부도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로 영화롭게 하리라!' /할/

 

2. 환난 중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①'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기도해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환난을 당합니다.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환난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도 환난을 당하고 믿는 사람도 환난을 당하지만 우리에게는 한 가지 약속이 있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 약속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환난 중에 절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환난 중에 기도하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시46:1절을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할/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환난 중에 큰 도움을 받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환난 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는 고백입니다. /믿/
시29:10-11절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여기 홍수는 인생살이의 고난의 때입니다. 홍수는 좋은 것이 아닙니다. 파괴하는 힘과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한숨쉬게 하며 눈물짓게 만듭니다. 인생에 있어서 홍수는 시련이요 환난입니다. 낭패와 실망입니다. 괴로움이고 탄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홍수만 바라보고 탄식만 할 것이 아닙니다. 그 홍수를 다스리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아멘!/
여기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신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어떠한 고난의 홍수가 다가오든지 그 홍수 위에는 하나님께서 좌정하고 계시면서 홍수를 다스린다는 말씀입니다. /할/
참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사람들이 등 따습고, 배부른 때는 하나님께서 아무리 믿음의 문을 두드려도 문을 안 열어줍니다. 그러나 홍수가 다가와서 모든 것을 쓸어가게 되면 그때는 누구를 막론하고 홍수를 수레 삼고 찾아보시는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은 '왕으로 좌정하신다,'고 했습니다. 홍수 위에 여호와께서 떠내려 온 것이 아니라 왕으로 좌정하신 것입니다. 왕은 다스릴 뿐 아니라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는 홍수 위에 좌정하시면서 홍수를 다스리는 왕이 되십니다.
그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여호와를 올바르게 알면 환난의 홍수를 만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고난 위에 좌정하시어 그 고난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부르짖었습니다. 소경 바디메오가 부르짖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자기 딸의 문제를 안고 나와 부르짖었습니다. 사마리아의 열 문둥병자들이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은 홍수를 만나 그 환난 중에 예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어 병을 고쳐 주시고 그들의 영혼도 건져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홍수 위에 좌정하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파도를 견딜만한 힘, 홍수를 견딜만한 힘, 그 힘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홍수 속에서도, 파도 속에서도 '평안의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할/ 또 시30:11절을 보세요!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아멘!/
기도가 축복입니다. 기도가 응답입니다. 아이들이 잘 놀다가 넘어지면 '으-앙'하고 웁니다. 왜 그렇습니까? 엄마보고 '나 넘어졌으니 잡아 일으켜 달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고 하신 하나님,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라!' 하나님께서 건지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영혼을 잘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 환난 날에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기도입니다. 환난 중에 부르짖었다는 말은 하나님께 가까이 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복입니다.
약4:8절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시73:28절에도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습니다. /할/

 

②환난 가운데 기도 중에 회개의 기도가 중요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주께 자복하는 기도가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합니다. 개인도 그렇고 국가도 회개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세계가 지금 신종 풀로 초비상사태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리는 인류의 재앙으로 보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무시 못 할 사건입니다.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큰 사고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오래 전에 김현옥시장이 지은 아우아파트가 무너졌습니다. 지금도 삼풍백화점의 붕괴사고는 우리들의 머리에 생생합니다. 그 당시 삼풍백화점의 붕괴사고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 민족은 지금 무서운 심판을 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전 국민이 회개하라는 신호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할 것인가? 모든 양심이 썩어있습니다. 한강 성수대교 다리사건도 다 양심이 썩어 일어난 사건입니다. 백화점이 무너진 것이 아니고 성수다리가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양심이 무너진 증거라고 했습니다.
자원이 모자라면 수입하면 됩니다. 그러나 양심은 수입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민족이 사는 길은 양심을 바로 세우는 길입니다. 경제 회복이 시급한 일이 아니라, 또 세상사가 시급한 것이 아니라 양심은 바로 세우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양심은 바로 세우면 세상사를 저질로 이뤄버립니다.
양심을 세우는 것은 회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됨을 알고 회개하는 것이 최고의 양심입니다. /할/
잃어버렸던 양심, 잃어버렸던 신앙, 불순종과 교만했던 마음들은 하나님께 내려놓아야 합니다. 회개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불순종과 교만했던 마음들은 하나님께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회개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하면서 우리의 신앙의 자세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할/

 

③환난 날에 성도들은 담대해야 합니다.
요16:33절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할/ 주님이 우리들에게 환란을 당하더라고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결국 세상에 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고난에 맥없이 무너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결코 환란에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는 말입니다. /믿/
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기에 그 이겨놓은 길을 믿음으로 가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긴다는 확신과 믿음으로 모든 고난과 환란과 역경과 시련과 세상과 삶에 앞에서 담대함을 선포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담대함입니다. 주눅 들지 말고 어깨가 처지지 말고 당당하게 세상과 고난과 환란 앞에서 '세상을 이기신 예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선포하며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아멘!/
▶사흘 동안 굶은 호랑이가 있었습니다. 호랑이는 먹이를 찾아다니다가 드디어 토끼를 발견하고 미소를 띄우며 한발에 낚아챘습니다. 그런데 겁이 없는 토끼가 대뜸 하는 말이 '이거 놔 임마' 그럽니다. 순간 어안이 벙벙해진 호랑이는 얼떨결에 토끼를 놔주고 말았습니다. 상상도 못할 황당한 말에 호랑이는 망치로 얻어맞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음 날 충격 속에서 숲 속을 방황하던 호랑이가 다시 토끼를 발견하고 이번에도 한발에 낚아챘습니다. 그러자 토끼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나야 임마' 그럽니다. 또 다시 큰 충격을 받은 호랑이는 토끼를 그만 놔주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머리를 주어 박으며 후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다음 날 호랑이는 또 토끼를 잡았습니다. 이번엔 그 토끼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호랑이는 다른 토끼의 말을 듣고 쇼크를 받아 그만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토끼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문 다 났어 임마!'
물론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이런 담대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대적하는 무리에 대하여, 심지어는 풀리지 문제 앞에,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인생의 고난과 역경에 대하여' 담대해야 합니다. /할/
수1:9절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할/아멘!/

3. 환난 중에라도 성도는 감사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14절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오늘 본문의 배경을 한 번 짚어 보아야 합니다. 그 당시 감사를 잃어버린 이스라엘에게 대한 하나님의 책망입니다. 본문 7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거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라는 이 선언은 '당신을 하나님으로 대우하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한 곤혹스런 하나님의 자기 설명'입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가장 시급한 문제가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믿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그럼 어떻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지 않았을까요? 아이러니 하게도 그들의 제사 즉 예배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선택받은 백성의 최고의 가치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런데 선민이라고 자부하던 그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문제였습니다. 그들의 제사는 외면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왔고 또 많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들이 드리는 번제와 희생제가 항상 제단에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물을 인하여는 책망할 것이 없으나 다른 면에서는 책망할 것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저들이 드리는 예배에 무언가 결핍된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저들이 예배 때마다 하나님께 비둘기를 드리고 염소를 드리고 수소를 드렸는데 무엇이 모자라서 하나님께서 이런 책망을 저들에게 하실까요? 그건 바로 '감사의 상실'입니다. 저들의 제물에 저들의 마음과 정성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감사와 서원을 잊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인 큰 문제였습니다.
시50편의 키워드는 '참 예배'에 있습니다. '무엇이 참된 예배인가' 하는 겁니다. 예배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희생제를 드렸습니다. 그 제물에 대해서는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서원 했던 지난날의 애틋한 신심이 점점 형식화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신앙의 문제였습니다. 마음이 담겨있지 않은 제사, 중심이 쏠려있지 않은 예배를 하나님은 원치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때로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았을 때 받아서 기분 좋은 선물이 있고, 받아도 기분 나쁜 선물이 있습니다. 순수한 선물 속에는 감사가 깃들어 있지만 순수하지 못한 선물, 즉 이권관계나 뭔가 계산된 의도가 깃들어 있거나 그 이상의 무엇을 요구하는 반대급부가 들어있는 선물은 그리 탐탁하지 않습니다.
주고받음에 있어 진정 중요한 것은 그 물건의 크기나 액수가 아니라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이 담긴 것이면 얼마 안 나가는 물건에도 기분이 좋아지지만 마음이 담기지 않은 것이면 비싼 것이라 해도 기분이 별로 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을 향해 그런 마음을 느끼고 계십니다. 저들은 어김없이 때를 맞춰 당신께 제물을 가지고 나아와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저들 마음속에 감사가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점점 저들의 예배와 섬김이 형식화되고 건성화 되어가고 있음을 아신 겁니다. 그래서 저들을 향해 '진정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고 간절함으로 드렸던 네 서원을 갚으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할/
예배의 정신은 감사입니다. 본문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할/ 감사란 곧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는 정신입니다.
고등어 한 손을 사다 드려도 부모가 맘 편하게 받는 자식이 있는가 하면 소갈비를 사와도 마음 편하지 못한 자식이 있습니다. 이게 참 우러나오는 마음인지 아닌지 부모는 알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헌금을 드려도 하나님께서 편하게 받으시는 예물이 있을 것이고 편치 못하게 드리는 예물이 있을 것입니다.

 

①'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이 말씀은 감사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우리가 손해입니다.
22-23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나님을 잊은 자는 내가 찢어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여기 '찢어 버린다.'는 말은 '심판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내 건강을 찢으시면 큰일입니다. 하나님이 내 사업장을 찢으시면 큰일입니다. 하나님이 내 행복을 찢으시면 큰일입니다. 어떤 자를 찢는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잊는 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잊은 자가 누구입니까? 감사를 잃은 자입니다. 감사를 잃은 자는 예배를 떠난 자입니다. 봉사와 헌신을 떠난 자입니다.
우리 감사를 회복하십시다. 본문의 진리는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감사를 회복하라'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아멘!/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칩니다. 11월은 감사의 계절입니다. 셋째주간이 우리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절로 드리는 주간입니다. 그런데 감사는 감사할 수 있는 조건 가운데 드리는 감사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감사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감사할 수 없는 가운데 감사하는 것이 진짜 감사입니다. /할/
▶오래 전에 미국의 유명한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딸이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세계적인 종으로서 언제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증거하시는 목사님이십니다.
그런 목사님의 딸이 교통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는데 그때 목사님이 하나님께 이렇게 감사했다고 합니다. '우리 딸을 교통사고로 잃어버릴 수도 있었는데 목숨 잃지 않았으니 감사합니다. 우리 딸이 두 다리를 다 잃어버릴 수도 있었는데 왼쪽 다리만 잃고, 오른쪽 다리가 남았으니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부인을 향하여 '여보! 우리 딸에게 성한 두 팔과 이목구비가 있지 않소, 우리 잃어버린 것은 헤아리지 말고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합시다.' 이 얼마나 멋있는 신앙인의 고백입니까?
사실 사람들은 잃어버린 것과 없는 것을 헤아리게 됩니다. 그리고 슬퍼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잃어버린 것, 없는 것은 바라보지 말고 있는 것에 감사합시다. '하나님, 아직 이만큼 남아 있으니 감사합니다.' /아멘!/
어떤 목사님의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감사하는 것만큼 믿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만큼 행복합니다. 감사하는 것만큼 다릅니다. 감사하는 것만큼 강합니다.' 누가 진짜 믿는 사람입니까?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진짜 행복한 사람입니까?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진짜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구별된 사람입니까?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진짜 강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아멘!/
본문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오늘 이 설교는 나 자신을 향해 하는 설교입니다. 감사에 인색했던 저 자신을 향해 주는 메시지입니다.

 

②'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여기서 '네 서원을 갚으라'는 말은 하나님께 약속한 서원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이제 그 서원을 갚으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서원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며 약속'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말씀을 받을 때 아멘으로 화답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아멘은 '그렇게 살겠습니다. 그렇게 믿겠습니다.'라는 신앙의 고백이고 서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서원을 갚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바르게 살겠노라'고 약속한 것을 지키며 사는 태도입니다. /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서원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이런 것 이렇게 하겠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이것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서원은 잊어버리고 안 갚습니다. 서원은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입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약속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한 약속은 더 중요합니다.

 

③환난을 새롭게 인식하고, 환난을 삶의 위대한 도전으로 살아갑시다.
사람은 환란과 고난을 통해서 강해집니다. 고난은 확실히 사람을 강하게 만듭니다. 약1:2-4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덴마크는 1864년 프랑스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전함으로 남부의 기름진 땅, 두 주를 잃어버렸습니다. 또한 그동안 전쟁을 치르느라고 국내 경제는 도탄에 빠졌고, 사회는 혼란이 가중되어 덴마크는 국가의 존폐 위기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전쟁에서 패전하여 돌아온 남자들은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길거리 가서 주정을 부리고 여자들은 살아가기 위에 외국인에게 몸을 팔아야 했습니다. 덴마크 국민들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고난에 부딪쳤습니다.
그런 위기 앞에 역경에 도전을 부르짖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룬드비 목사님이십니다. 그는 나라가 온통 혼란한 가운데 분연히 일어나 '하나님을 사랑하자, 나라를 사랑하자, 자연을 사랑하자'라는 삼애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농민 학교를 세워 성경을 기초로 한 정신적 자원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패전하여 돌아온 공병대대령 출신인 '달라스'도 '밖에서 잃은 국토 안에서 찾자!'라는 슬로건을 걸고 같이 국민들에게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을 모아 광막한 늪지대요, 동토의 땅인 유틀란트 반도를 개간하여 나무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유틀란트 반도는 북국의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황막한 땅이라 모든 사람들이 버려진 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달라스 대령은 포기하지 않고 버려진 땅에 기도와 믿음과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무를 심자마자 죽었습니다. 그러나 달라스 대령은 절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연구하며 심고 또 심었습니다. 드디어 달라스 대령의 숙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집념의 연구를 통해 알프스의 전나무를 접붙여 동토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우수한 품종의 나무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달라스 대령은 그 나무들은 광활한 모든 해변에 심었습니다. 그 결과 그 나무들이 자라 울창한 숲을 이루게 되자 북부에서 불어오는 냉한 바람을 막았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 모래땅에 들어가 거센 고난과 싸웠습니다.
그 후 덴마크는 백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농업국가로 발전하게 되었고, 이 배경을 통해 자원을 양성하여 공업국가로 번영하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덴마크는 그룬드비 목사와 달라스 대령이 심어준 신앙의 위대한 힘 아래 환난을 이기고 찬란한 역사를 이룬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고난을 축복으로 바꿨습니다. 환난과 역경을 감사로 바꿨습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새롭게 인식하고 삶의 위대한 도전으로 삼아야 합니다. 평안한 삶에는 발전이 없습니다. 신앙 생활하는데 있어서 평안하고 형통한 삶이 계속되면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거센 시련이 있어야 매달려 금식하고 철야하며 기도함으로 얕은 신앙이 아닌 깊은 신앙을 갖게 합니다. /아멘!/
고난은 극복하기 위해 싸울 때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고 새로운 신앙생활이 창조됩니다. /믿/아멘!/ 그래서 환난 날에 기도하라고 주님이 가르치고 계십니다. 기도는 축복입니다. 기도는 약속입니다. 기도는 응답입니다. /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환난은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세상 사람들은 환난 앞에 두려워 하지만 우리의 믿음의 사람들은 다릅니다.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떤 환난이나 곤고가 와도 그 환난을 통하여 절망하지 말고 믿음의 법칙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업의 문제도 가정의 문제도, 자녀들의 문제도, 물질의 문제도, 교회의 문제도, 개인의 문제도 기도로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환난은 하나님을 가까이 찾게 되고 길이요,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되는 비결입니다.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환난 날에 나를 찾으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아멘!/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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