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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사는 자의 축복! (히 11:6)

by 【고동엽】 2022. 2. 7.

믿음으로 사는 자의 축복! (히 11:6)

 

인생을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크든 작든 어려움 속에 삽니다. 가정에도, 나라에도, 사업장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항상 어려움이 있는 줄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교회에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없는 교회는 이상한(?) 교회입니다. 시험이 없는 교회는 이상한 교회입니다. 교회도 끊임없이 문제가 있고, 시험이 다가오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통하여 이 어려움을 통하여 인격이 성숙하고, 신앙이 성숙되고,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가 발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이 짧은 기간에 이렇게 발전한 것은 일제 강점기의 어려움과 6·25사변의 엄청난 어려움, 그 이후에도 계속 4·19과 5·16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그 어려움 속에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벌써 30년은 넘은 것 같습니다 만은 오래 전에 호남선 이리(지금은 익산) 역에서 대 폭발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리 시내 전체가 완전히 파괴되어 6·25사변의 전쟁터 같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당시 이리가 망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끝날 줄 알았던 이리는 그 후에 도시계획을 잘 세워 도로가 넓어지고 지금은 발전하여 중부지역에서는 산업이 가장 성장하는 큰 도시가 되었습니다.
또 몇 년 전의 영주 땅에 사라 호 태풍이 몰아쳐 영주시를 싹 쓸어갔고,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그때 영주사람들은 일제히 일어나서 강의 물줄기를 돌려버렸습니다. 영주를 덮는 그 물을 가로막고 물이 지나가는 그 넓은 곳을 메워서 지금은 신 영주라고 하는 큰 도시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특히 성도는 어려움을 잘 타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독수리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독수리는 바람을 잘 타는 것이 특징입니다. 바람이 불 때, 바람을 잘 이용해서 바람을 타고 위로 올라가는 새가 독수리입니다. 성도는 어려움이 있을 때, 좌절하지 않습니다. 어려움을 타고 잘 이용하면 더 큰 기적과 능력과 축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사실 고난이 좋지 않은 것은 틀림없습니다. 어려움이 없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을 잘 다루고, 잘 감당하고 어려움 시험을 잘 이기면 안 당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백 배의 은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높이뛰기 할 때, 그냥 뛰면 별로 많이 못 뜁니다. 그러나 장대 하나라도 잡으면 엄청나게 높이 뛸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의 장대라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은 굉장한 것입니다.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나와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태초 이후로 믿음의 사람을 쓰셨고, 믿음의 사람은 복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할/아멘!/ ◀제목소개!▶

 

히11장은 믿음 장이라고 부르는데 본 장에는 믿음으로 산 신앙의 영웅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돈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랑과 쾌락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명예와 권세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도 믿음으로 사는 신비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히11장은 온통 '믿음으로'라는 단어로 충만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이 없이는, 믿음으로', 온통 '믿음으로'라는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수많은 선진들이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본문 1-2에서 정의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본문에 소개된 선진들은 '신앙의 선배들'을 말하는데 그분들이 '바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선진들 중에 노아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심판을 바라보고 방주를 예비했다고 했습니다.
창6장에서 홍수로 땅과 인간을 심판하시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노아는 그때부터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바라보고 방주를 예비했습니다. 당시 노아로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볼 수 없었고, 구원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믿음의 근거가 되어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구원받는 보상이 실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120년 후 하나님이 물로 세상을 심판하자 노아의 8식구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당했지만 오직 그때를 바라보고 순종하여 방주를 지은 노아의 8식구만이 구원받은 실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금 보지 못하는 것들은 불 수 있게 하십니다. 믿음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위대한 '구원 계시'를 방주를 통해서 나타내 주었습니다. 방주는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세에 교회 안에 들어온 자들만이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믿/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기쁘시게 여기십니다. 반대로 믿음이 없는 자를 보시고 슬퍼하십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런데 이 믿음을 설명하려고 하면 마땅히 설명하기가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알기는 알 것 같은데 이것을 요령 있게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께 맡긴다. 의지한다. 주님이 나의 구세주다.'는 등 많이 알고 있지만 더 깊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라고 할 때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사실 믿음이 '이것이다.'라고 딱 하나만을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주제가 믿음입니다.

 

1. 믿음의 또 다른 이해는 무엇인가?

 

⑴믿음은 '빛'으로 오신 예수를 품고 사는 것입니다. 빛은 생명입니다. 믿음은 그러니까 생명입니다. 요8:12절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빛은 '생명이고, 사랑이고, 길이고, 진리'입니다. 이것이 요한 복음의 주제입니다. 이 빛을 받아들여서 빛을 품고 살아가면 그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빛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영의 양식을 주고, 은혜를 주고, 믿음을 더해 줍니다. /할/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 빛을 품고 살아갈 때 '불의를 멀리하게 되고, 죄를 멀리하게 되고, 멸망에서 멀어지고, 심판에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을 빛의 자녀라고 합니다. 그러나 빛 되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을 '어두움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⑵그런데 그 믿음은 '질'로 나타납니다. 생명이라고 모두 똑같지 않습니다. 어두움에 묻혀서 살아가는 생명도 있고, 그 빛 가운데 거하는 생명도 있습니다. 어두움에 묻혀서 살아가는 생명은 살아 있으나 실은 죽은 영혼이고 무의미한 생명입니다. 사람도 보면 변화 받은 사람이 있고 변화를 받지 못한 옛사람 그대로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 생명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우선 질이 다릅니다. 모양이 다릅니다. 내용이 다릅니다. 색깔이 다릅니다. 품위가 다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영혼은 질이 다릅니다. 고품격입니다.
여러분, 질이 무엇입니까? 사람은 질이 좋아야 합니다. 물건도 질이 좋아야 합니다. 그래야 값이 있습니다. 우리가 질을 따질 때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품질입니다. 이것을 '아가도스'라고 합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신앙이든, 사랑이든, 불문하고 품질이 좋아야 합니다.
거짓말하고 사기 치고 허풍떠는 사람들을 가리켜 '질이 나쁜 사람'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품질이 좋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국산품이 자꾸만 외면을 받는 것도 이 품질이 좋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다음은 '모양'입니다. 이것을 '칼로스'라고 합니다. 질을 말할 때는 품질만 좋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모양도 좋아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씨가 곱고 품질만 좋다고 모두 인기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새 젊은이들은 마음씨만 보지 않습니다. 품질도 좋고 모양새도 아름다워야 그게 고루 갖춘 미인으로 봅니다. 그래서 얼굴 짱, 몸 짱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신앙도 '질'입니다. 여기서 질이 좋다는 말은 품질과 모양이 다 같이 좋다는 말입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에게 10년 동안 전도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어느 날 남편은 밤늦게 술에 취해서 들어오면서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또 술상을 차리라고 합니다. 얼마나 밉겠습니까?
부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 꼴입니다. 그런데도 이 부인은 아무 소리하지 않고 술상을 차렸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의 친구들이 의아해합니다. 자기의 부인들은 그 정도면 난리가 날 일인데 아무 소리하지 않고 순순히 대접을 잘 해주니 궁금해서 물었답니다. 이 믿음 좋은 부인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제 남편에게 10년을 전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제 포기하고 보니 나는 천당에 갈 것이고 저 사람은 지옥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살 동안만이라도 편안하게 대접을 잘 해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미래가 확실한 사람은 살아가는 모습이 다르고, 길도 다를 뿐 아니라 생각하는 것도 다릅니다. 약속된 미래를 보고, 믿고 살기에 오늘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약속된 미래가 있는 사람은 오늘 조금 어렵고, 고되고,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한 것이 별로 문제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사도 요한은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한집에서 살고 있지만, 한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두 사람의 생의 질이 같을 수가 있습니까? 천국과 지옥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빛이고, 질이고 소망이고 미래입니다.
⑶믿음은 '싸우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싸우는 것이고, 전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은 기쁨이 아닙니다. 행복도 아닙니다. 그것은 전쟁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모르고 살아갈 때는 아무 것도 아니고, 거리낄 것 하나도 없던 것들이 예수를 믿고 보니까 모두가 양심에 걸리고, 죄책감이 생기고,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옛날에는 적당히 살았고, 적당히 먹었고, 적당히 눈도 감았었는데, 그래서 마음에 거리끼는 것도 별로 없었고, 사탄과 싸울 일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탄과 한통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알고 나니까 모두와 싸워야 합니다. 모두가 부딪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들이 싸우게 됩니다. 자신과 싸우고, 세상과 싸우고, 원수 마귀와 싸우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기로 했으면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세탁을 하듯이 한꺼번에 깨끗하게 씻어서 다시는 죄 속에 빠지지 않도록 해 주시면 좋겠는데, 내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 하는 확신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죄의 속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투기가 일어나고, 음란이 솟아나고, 욕심이 터져 나오고, 시기와 부패한 마음이 자꾸만 솟아나옵니다. 그때마다 마음에 의심이 생깁니다. 자신에 대해 '내가 왜 이러나, 내가 아직도 가짜가 아닌가?' 하고 의구심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사도 바울 같은 분도 "내 속에서 내가 원하는 선을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7:19)하고 탄식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경건을 연습하라고 했습니다. 딤전4:7절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죄는 습관입니다. 거짓말을 쓰기 시작하면 습관이 되고 나중에는 양심이 무뎌지고 끝내는 죄를 지을 용기까지도 생깁니다. 그런데 경건을 연습하면 경건 생활이 내적으로 습관화됩니다. 신앙생활은 용기입니다. 용기 없는 사람은 이 핑계 저 핑계해서 회피하지만, 용기 있는 사람은 결단하고 싸워 이기는 자입니다.
⑷믿음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주님은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고, 나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기만 하면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 믿음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안 믿는 것이 불신입니다. 믿으면 역사가 일어나고, 믿지 않으면 철저하게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⑴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믿는 믿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분은 성경 66권속에서 우리를 향한 32500가지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확실히 믿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살전2:13절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⑵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사랑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손끝에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를 위해 아낌없이 드리는 헌신이 있어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가 수지맞습니다.
롬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잠8:17-18절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믿음이 없으면 노아처럼 살 수 없습니다. 이 믿음 때문에 노아 식구들은 세상을 심판하신 대홍수에서도 살아났습니다. 노아 홍수 때 정말 잘난 사람, 능한 사람 등 모든 사람이 죽었습니다. 안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충분한 시간, 충분한 자격, 충분한 배려가 다 되어 있었습니다. 하루 이틀도, 한, 두 달도 아니고 너무나 충분한 시간 노아가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노아 홍수 때 그 잘난 사람들이 다 죽은 것은 믿음이 없기에 죽었습니다.
노아는 믿음이 있으니까 그 배를 만들고, 그 배를 타고 그 배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살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브라함처럼 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타고 난 것이 아니라 다 커서 성인일 때 하나님께 부름 받고 그가 민족의 조상이 되고, 혹은 그 가문의 족장이 되고, 열 국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되게 하신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이 되어도 되어야 합니다. 학생들이 공부 잘해서 꼭 합격이 되어야 하고, 농부는 농사를 지어 가을에 결실이 잘 되어야 하고, 우리는 건강하게 되어야 되고, 사랑하게 되어야 됩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이 잘 되어야 됩니다. '무엇을 되게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그 가문과 그 나라와 그 하나님의 믿음의 모든 계통의 족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사라 처럼 할 수 없습니다. 사라는 '무엇을 해낸 여자'입니다. 사라도 한 때 자기 스스로 안 된다고 판단하고 포기했던 여인입니다. 그래서 하갈은 남편에게 보내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 불 신앙이 지금도 중동에 화약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사라야 내가 너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하겠다.'고 하자 처음에는 하도 말 같지 않으니까 웃었습니다. 웃으니까 '네가 왜 웃느냐?'고 하자 사라가 마음을 고쳐 먹고 '내가 하겠습니다' 그렇게 고백을 바꿨습니다.
사라는 비록 단산했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삭을 낳았고 이삭으로 말미암아 한 민족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래서 사라는 열 국의 어미가 된 것입니다. /할/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망이 없던 사라에게 출산의 능력을 회복해 주셨듯이 잃어버린 우리의 능력을 회복하기만 하면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사라는 해냈습니다.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 낸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3. 믿음을 가진 자의 행위는 무엇인가?

 

①믿음의 첫 번째 행위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96:6절에서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음이 그 성소에 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 없이 인간들에게 복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예배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예배는 하루나 이틀만 드리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계속 반복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돋보이게 된 결정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반복된 예배입니다. 창13:4절에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브라함은 가나안으로 이주하자 말자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창13:4절의 말씀에서 두 단어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이 두 단어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영적 반복을 발견하게 됩니다. 삶은 반복입니다.
'반복이 끊어지면 끝입니다.' 밤낮 그 예배가 그 예배인 것 같아도 계속 반복하여야 합니다. 반복이 끊어지면 죽음입니다. 심장은 일생동안 다른 일을 하지 않습니다. 두근두근 하면서 계속 피를 온 몸에 공급하는 일을 합니다. 평생 한 가지만 반복합니다. 위는 평생 음식을 받아 드려서 소화시켜 내려보내는 일의 반복입니다. 이는 평생 씹는 일의 반복입니다.
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세끼 계속 먹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밥에 싫증을 느끼면 이미 공동묘지가 가깝다는 증거입니다. 자동차를 타면 바퀴는 폐차 처분되는 순간까지 계속 구르는 일만 합니다. 지루해하지 않습니다. 반복이라고 짜증내지도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단순하게 예배를 반복하는 작은 행동이 하나님께는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믿/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그에게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인 동시에 예배는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예배의 내용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른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의 축복이 있습니다. 시29:2절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안식이 변하여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에디오피아의 한 고관인 내시가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모습을 '홀연히 길을 갔다'고 했습니다.
'홀연히 길을 갔다'는 표현은 '기쁨이 가득한 채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사람을 만나려 나온 것이 아닙니다. 습관적으로 나온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귀한 자리에 나왔기 때문에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의 자세가 정말로 중요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레 목사가 열심히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 중에 두 사람이 졸고 있었습니다. 이때 웨슬레 목사는 안타까워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불이야! 불!' 그 때 졸던 교인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어디야! 불난 곳이' 두리번거렸으나 불난 곳은 없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엄숙하게 '여러분, 불은 지옥 불을 말한 것입니다.' 그 소리에 졸던 사람들이 정신을 바로 바짝 차리고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⑴예배는 정한 시기에 드려야 합니다. 민28:2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나의 예물, 나의 식물되는 화제, 나의 향기로운 것은 너희가 그 정한 시기에 삼가 내게 드릴지니라"
'하나님이 정한 시기'는 공 예배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과 약속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우리를 잘 지켜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와 만나려고 할 때, 약속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하나님께 약속한 시간을 우습게 여깁니다.
하나님은 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지금도 행위 록에 체크하고 계십니다. 예배는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고 드려야 합니다. 또한 예배시간도 생명처럼 지켜야 합니다. /믿/
성도 여러분!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정말 예배다운 예배를 드려 보십시오, 우리 모두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아멘!/
⑵정한 장소에서 드려야 합니다. 민28:7절에 '성막을 거룩한 곳'이라고 말씀하고 번제물을 거룩한 곳에서 드리라고 했습니다. 성막이 오늘날 교회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곳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장소에서 거룩한 제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의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실 때도 지정한 장소인 모리아 산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으로 3일 길을 가서 드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3일 길을 가면서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은 것은 위대한 신앙입니다. 왜 3일 길을 가서 번제를 드리라고 했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3일 길은 무엇을 말하며 어디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여 세운 교회가 3일 길입니다.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 우리 참 행복한 교회가 바로 3일 길의 모리아 산입니다.
참 행복한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이곳에 정한 장소 모리아 산을 주셨습니다. 본 교회를 지키는 것, 이것이 복 받는 비결입니다. /믿/
⑶예배는 정한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는 하나님께 아무 짐승이나 드린 것이 아닙니다.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짐승을 드렸습니다. 소를 드렸고, 양을 드렸습니다. 염소를 드렸습니다. 비둘기를 드렸습니다. 형편 따라 드렸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를 드렸고, 번제를 자원하여 드리기 때문에 자신의 형편에 맞게 예물을 드렸습니다. 비둘기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비둘기를 드리면 안 됩니다. 가난한 자가 빚을 얻어서 소를 드려도 안 됩니다. 형편대로 최선을 다해 드리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거룩하게 드리는 것입니다. 거룩이 무엇입니까? '준비'라는 말입니다. 예배드리기 전에 준비가 필요합니다. 준비 없는 예배는 은혜가 없습니다. 가정에 심방을 갔을 때에도 예배 준비가 되어 있으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토요일부터 준비하고 주일날 예배드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여러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으로 준비하시고, 정한 예물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는 마음도 있습니다. 물질을 준비한 예배와 준비 없는 예배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봉투를 담아 가정을 소원을 쓰십시오, 주의 종이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심방을 받는 자세도 바로 해야 합니다. 주의 종은 하나님의 영권 대사요, 대리자로 성도들의 가정을 방문하는 것입니다. /믿/
행10:25절에 보면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의 심방을 받을 때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백부장이면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실력도, 지식도 대단한 인물입니다. 당시 베드로는 유대인으로 어부 출신입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베드로를 주님을 모시듯 했습니다.
그 날 그 집에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성령의 불이 임하였고, 방언이 터졌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이 고넬료의 가정의 예배를 받으시고 복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예배를 생명처럼 지키는 성도에게 찾아오십니다.
요4:23절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모이기에 힘쓰십시다. 모여서 말씀을 받아야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옵니다. '주일예배, 저녁예배, 삼일예배, 금요철야, 구역예배 새벽예배' 등 모든 공 예배는 모여서 예배드리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미국의 록펠러를 하나님 앞에 8살 때부터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크게 복을 받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 받쳤습니다.
맨하탄 안에 교회를 지었는데 지금은 명소가 되어 세계인들이 찾고 있습니다. 록펠러는 미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가장 잘 짓겠다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지어 받쳤습니다. 그랬더니 지금은 그 교회가 명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를 더 축복하였습니다. 록펠러 당대에만 복을 주신 것이 아니라 아들과 손자, 증손자, 고손자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그 재단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섬기고 예배 중심의 삶을 살면 자손만대까지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믿/
⑷예배는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4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여러분! 하나님은 예배 중심의 삶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정한 시간에 정한 장소에서 정한 예물을 정성껏 하나님께 드리고 예배 중심의 삶을 살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생애를 책임져주십니다. /아멘!/

 

②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행위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삶'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생활입니다. 신앙의 승리는 우리 주님과 함께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롬6:5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적장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유다의 통일왕국을 이루는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나아만 장군은 문둥병을 고쳤고, 욥은 시험을 이겼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38년 병자 된 병을 고쳤으며 소경 바디매오는 눈을 떴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롬8:28).
그런데 주님과 연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⑴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생활입니다.
롬6:6절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같이 내 자신의 옛 모습인 욕심, 탐심, 교만, 혈기, 독, 모든 죄악과 나쁜 습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눈은 비록 앞 강단을 향하고 있지만 마음의 눈은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담당하신 채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십자가에 지난 한 주간동안 저질렀던 잘못, 실수, 욕심, 혈기, 분노, 미움, 비평, 불만 등을 하나 하나씩 주님의 십자가에 매달리기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내 자신을 죽일 수 있을 때 우리는 주님과 연합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자기의 죄를 고백할 때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⑵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삽시다.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을 위한 죽음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지는 것은 죽기 위함이 아니라 새 삯을 내어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자기 부정, 자기 자아를 죽이는 것을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새롭게 살기 위함입니다.
고후5: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룬 자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과 생각과 생활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마음이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빌2:5-8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죽기까지 낮아진 마음! 종의 형체를 가진 마음입니다. 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높아지고 많이 가지는 것은 성공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는 자는 누가 얼마나 섬기고 살았느냐에 따라 성공이 결정됩니다. 섬기는 것은 자존심, 손상으로 보지 마십시오, 이는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덕목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연합을 이루는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사는 삶,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능력을 주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기쁘시게 여기십니다. 믿음은 예배를 동반한 삶이요, 예배에 동반한 성도들은 예배시간에 주님의 십자가에 같이 죽고, 다시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과 동행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셉이 형통한 복을 받은 것은 주님이 늘 그와 함께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믿음으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우리는 히11:6절인 본문에서 두 가지 진리입니다.
▶하나님 그 분이 반드시 살아 계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좋은 것으로 상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대로 되어 집니다.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할/
욥이 다시 새롭게 복을 받은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렸기 때문입니다. 욥42:9절에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십시다. 그리하면 복을 받습니다. 시37:4절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아멘~!/

 

4. 큰 믿음의 소유자들이 다 되자!

 

▶다윗의 유언도 믿음의 대장부가 되라고 했습니다.
왕상2장에 보면 다윗이 죽으면서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이 있습니다. 그 유언의 첫 번째 당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2절에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으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다윗은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기면서 '힘써 대장부가 되라'고 했습니다. 힘써 믿음의 대장부가 되라는 유언입니다. 어떤 사람이 대장부일까요?
⑴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대장부입니다. 큰 생각으로 희망이 넘쳐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상상력이 현실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생각의 폭을 넓히는 것이 아파트 평수는 넓히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⑵큰마음을 가진 사람이 대장부입니다. 마음은 생명의 근원입니다(잠4:23). 그런데 잠23:7절에서 보면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큰마음을 가진 자가 큰 위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⑶큰손을 가진 사람이 대장부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잠시 왔다가 잠시 후에는 떠날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물질보다는 신앙을 더 생각하고, 땅보다는 하늘을 더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마6:20절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5.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의 보상은 너무 많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누리는 축복도 많습니다. 기도의 응답의 축복도 있습니다. 치유되는 축복도 있습니다. 임마누엘로 함께 하는 축복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축복은 좋은 것으로 상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골3:24절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그렇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를 섬기는 가장 확실한 이유는 유업의 상을 약속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상을 탐내야 합니다. 상은 무조건 좋은 것입니다. 상 받고 기분 나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실 상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에서 모세의 고백을 들어보세요! 24-26절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할/
⑴이 상급은 어떻게 받아집니까? 마16:27절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고전3:8절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그래서 직분자들은 그 직분을 바로 감당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고전9:17절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⑵대접하고 베푸는 자의 상급이 큽니다. 마10:41절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⑶하늘나라에 상급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⑴자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⑵생명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⑶썩지 아니할 면류관이 있습니다. ⑷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⑸의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뛰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상 주심을 바라보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하나님을 찾는 삶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나부터 찾습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삶의 자세를 바꿉시다. 삶의 우순 순위를 하나님께 둡시다. 그 분을 찾을 때 우리는 이기는 자로 살 수 있습니다.
계21:7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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