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교회를 세우라! (벧전 2:1-10)
오늘 우리가 읽은 베드로서는 로마의 폭군 네로 황제의 박해가 시작될 무렵에 기록된 책입니다. 네로는 A.D 64년에 로마의 대화제의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전가시키고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네로의 박해는 지방으로까지 번져 당시 식민지였던 소아시아 지방까지 확산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에 흩어져 사는 성도들에게 그들의 삶 가운데 직면하는 박해와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띄운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어디를 보아도 '네로의 박해를 피해 산으로 들로 도망가라'는 말씀은 하나도 없고 '교회 생활, 신앙생활을 잘 하라는 권면이요, 신앙 성숙을 가지라'는 권면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 이전 감사예배를 드리면서 ◀제목소개!▶
우리가 일반적으로 교회라고 할 때 머리에 들어오는 개념은 먼저 건물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무리'가 곧 교회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져야 한다.'는 말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건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답게 되려면 '내가 신령해져야 한다.'는 말로 나를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그렇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크고 웅장한 교회건물을 가리키며 '그 교회 참 크다.'고 합니다. 잘못된 생각입니다. 가정은 집이 아니고 그 집에서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곧 부부를 중심으로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의 집단을 가정이라고 합니다.
1.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인데 '에크' 즉 나왔다는 말과, '크레시아' 즉 부름을 입었다는 합성어로써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세상에서 나온 무리들의 모임'입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 밑에다 성막을 중심해서 열두 지파가 각각 그 주위에 진을 치고 하나님 앞에 모여 한 집단을 이루어 살았던(민2장) 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곧 '에클레시아'이며 부르심을 입고 나온 사람들의 모임으로 신약성경에서는 이를 '광야 교회'라고 했습니다(행7:38).
한마디로 교회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불러 일정한 장소에 모인 거룩한 회중을 가리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의 회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신령한 성도가 되어질 때 오늘 제목처럼 신령한 교회를 세울 수가 있습니다.
교회는 신앙본질을 찾아 계속적인 개혁을 해나가는 곳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교회를 사업적인 측면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를 비판합니다. 교회를 사업단체로 오해하고 비판하기도 하고, 구제를 많이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사회 불의에 저항하지 않는다고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되는 본질은 신령한 공동체라는 사실에서 찾아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과는 다릅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맛 볼 수 없는 신비한 것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열두 제자를 부르셨고 3년 동안 같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신 일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하루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신앙을 고백할 때 주님이 기뻐하시면서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칼빈은 '교회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하는 장소'라 하여 교회를 어머니같이 섬기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또한 에밀 부루너는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으며, 칼빈은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무엇인가?
①예수님이 당신의 몸을 희생하며 세우신 곳이 교회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할 때, 주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신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고백한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 천년 역사상 교회를 박해하고 잘된 나라, 잘된 사람이 없으며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 치고 망한 자가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초가 되신 곳이므로 존귀합니다. 고전3:11절에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②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거룩한 집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곳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죽어 가는 인생에게 구원과 영생의 길로 안내하는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 바로 거룩한 성전입니다.
③교회는 거룩한 성례(세례와 성찬)가 집행되며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는 자에게 은혜 주시고 속죄함 받게 하시며,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치료해 주십니다. 이 성전에 나와 찾는 자에게 만나주시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주시고 구하는 자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④교회는 높고 낮은 사람, 죄인과 의인들이 함께 나와서 겸허하게 예배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곳입니다.
⑤교회는 천국종합병원과 같은 곳으로 만민이 치료받는 곳입니다. 지금도 신유의 은사는 예수의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나는 치료하는 여호와이니라!' /할/
⑥교회는 신령한 학교와 같이 배우는 곳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배우고, 세상사는 법을 배우고, 성경 말씀을 배우는 곳입니다. 좋은 학생은 겸손히 잘 배우는 학생입니다.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행하는 것이 신앙의 삼박자입니다.
⑦교회는 군대 훈련소와 같이 훈련을 받는 곳입니다(딤후2:3).
우리 모두는 십자가의 군병입니다. 구세군이란 교파도 이 정신에서 생겨났습니다.
첫째, 군인은 강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땀 흘려 훈련받은 군인은 전쟁터에서 피를 적게 흘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철저한 신앙훈련을 잘한 성도는 세상에서도 은혜와 축복의 삶을 누리지만 천국 가서도 후회할 일이 없습니다. 기도의 눈물, 봉사의 땀, 희생의 피가 마르지 않는 신령한 훈련을 받으셔야 성령 충만합니다.
둘째, 군인은 군기를 잘 지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야 합니다.
셋째, 군인은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성공적인 교회생활은 순종과 복종뿐입니다. 불순종하는 자는 이유가 많지만 순종하는 자는 이유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절대 순종하다가 샘 줄기의 근원인 복을 받았고,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여 만선의 복을 받았습니다.
⑧교회는 날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행2:1-4).
모여서 예배드리고 기도할 때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곳입니다. 다양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야 합니다(고전12:8-10). 그러기 위해서는 초대교회 마가의 다락방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믿/
⑨교회는 남을 섬기는 봉사의 도장입니다(막10:45). 칼빈은 교회 사명에 대해 정의하기를,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둘째 성례가 집행되고, 셋째 성도들이 교제하고, 넷째 말씀으로 훈련받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신학적인 교회의 사명은 네 가지로 봅니다. ⑴케리그마: 선교적 사명, ⑵디아코니아: 봉사적 사명, ⑶코이노니아: 친교적 사명, ⑷만민의 기도하는 집: 속죄적 사명입니다.
⑩교회는 현대판 노아의 방주요, 천국의 모형입니다(고전1:18).
세상 끝 날에도 방주 안에 이름을 두고 방주 안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 구원과 천국과 영생을 보장받습니다. 천국 건설의 요소는 기도와 사랑의 봉사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성공하려고 하기 전 먼저 교회생활에 승리하셔야 다른 것에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교회생활에 승리해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여 이 땅에서 천국생활 하다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는 영원한 안식의 주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2. 신령한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①주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신령한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세우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세우십니다. 참된 교회는 사람들이 다스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다스리십니다. 참된 교회의 주인은 목사와 성도들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주님 자신이십니다. 주님께서 피를 흘리셔서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바람과 불과 같이 역사하셔서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과 귀와 마음이 항상 교회를 향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교회를 세운다고 착각하기 쉽고, 우리가 교회를 다스린다고 생각하기가 쉽고, 우리가 교회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교회를 마치 회사나 기업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큰 착각입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세우시는 집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항상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하면서 교회를 겸손하게 섬겨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②신령한 교회는 은혜가 충만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는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행4:32절에 '무리가 큰 은혜'를 입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 서에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라고 축원을 했습니다. 은혜란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에게 거저 주시는 좋은 선물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죄 사함의 선물, 구원의 선물, 기쁨의 선물, 평안의 선물, 기도의 선물, 말씀의 선물, 사랑의 선물, 교제의 선물, 봉사의 선물, 희생의 선물' 등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충만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신령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성도들이 은혜를 사모해야 하고 그래서 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③신령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특징도 기도와 함께 말씀이 충만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6:4). /할/ 우리 참 행복한 교회는 기도와 함께 말씀이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④신령한 교회는 사랑이 충만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덧입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서로 사랑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⑤신령한 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강림으로 시작한 교회였고 성령의 충만으로 이어진 교회였습니다.
성령 충만은 반드시 방언이나 은사 체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 충만이 반드시 감정적 흥분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예배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받아서 느끼고,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받아서 생각하고,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받아서 말하고,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받아서 글을 쓰고,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받아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받아서 죄를 회개하고,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받아서 말씀을 깨닫고,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받아서 기도하고,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받아서 찬양하고,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받아서 봉사하고,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받아서 전도하고,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받아서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 충만은 거의 다 가슴과 입으로 말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가슴과 입에서 회개가 터져 나왔고, 가슴과 입에서 기도가 터져 나왔고, 가슴과 입에서 찬양이 터져 나왔고, 가슴과 입에서 전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성령 충만했던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는 방언이 터져 나온 것이 아니고 회개가 터져 나왔고, 기도가 터져 나왔고, 찬양이 터져 나왔고, 전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할/
우리 참 행복한 교회는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은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눅10:13절에 우리 주님이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⑥신령한 교회는 날로, 날로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초대 교회를 보세요! 행2:47절에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 하게 하시니라' /할/
부흥이란 말은 본래 숫자적인 증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숫자적인 증가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부흥이란 말은 본래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흥의 한 모델이 겔37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곳에 나타난 부흥은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부흥이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죽었던 사람들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또 구원받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의미했고 제자 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이와 같은 영적이고 도덕적인 부흥이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숫자적인 증가도 따랐습니다. 우리 참 행복한 교회가 이 일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전도지에 우리 교회를 '작지만 큰 교회'라고 했습니다. /할/
3. 우리 교회가 신령한 교회가 되기 위해 몇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되게 하여 주소서>라는 작가 미상의 글이 있습니다.
말씀이 있으면서 행동이 있는 교회/사랑이 있으면서 순교가 있는 교회/모임이 있으면서 역사가 있는 교회/기도가 있으면서 능력이 있는 교회/감사가 있으면서 찬송이 있는 교회! 연약한 자들에게 힘이 되게 하시고 실패한 자들에겐 희망이 되게 하사 살아있는 교회로 부흥하게 하소서! /할/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전 감사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교회의 다짐이 있습니다.
⑴꿈과 비전을 갖자! 성경은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비전은 한마디로 부흥입니다. 그리고 이 성전 터를 교회 터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하려고 하는 자에게 능력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천국의 소망을 꼭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한 비전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위해 건강도, 물질도, 지위도, 범사에 형통함도 소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의 소망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겠다는 꿈이 있고 미래지향적인 교회가 신령한 교회입니다.
⑵일 년 365일 예배드리는 교회가 신령한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 예배요 교회에서 가장 정성을 드려야 할 부분도 예배요, 성도들의 가장 급한 것은 예배의 축복입니다. 예배드리는 자체가 복입니다. 예배 때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는 응답이 있습니다. /할/
히10:25절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⑶더불어 사는 공동체가 신령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성도들이 모여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예배를 드리며,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극장이 아니고 헌금은 입장권이 아닙니다. 모두 함께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배우며, 찬양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이 교회입니다. 시133:1절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⑷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교회가 신령한 교회입니다. 롬14: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⑸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가 신령한 교회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사랑은 혀끝이 아니라 손끝입니다.
⑹주는 교회가 신령한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를 세워나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4. 본문에서 '신령한 교회'를 세우는 몇 가지 비결을 알아보겠습니다.
①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에서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장을 막는 요소들을 말하고 또 하나는 신앙의 성장의 방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2절을 보겠습니다.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이 자라고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성장이 없으면 발전이 없습니다. 자라지 못하면 힘을 쓸 수가 업습니다. 자라나야 합니다. 개인이 성장하고, 교회가 성장하고, 나라가 성장되어야 큰 소리를 치고 할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 일본에서 우리나라 독도를 자기들의 땅이라고 치밀하게 계획하고 교과서에 싫고 미국에 로비를 하여 독도의 표기를 자기 나라에 유익하도록 만들어 놓자 우리 한국 사람들의 분노가 치솟았습니다. 그런데 미국 부시가 방한을 앞두고 독도표기를 원점으로 복귀시켰습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느낍니까? 나라가 힘이 있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일단은 부시가 우리의 손을 들어준 것도 한마디로 우리나라가 자랐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사업이 성장되고, 지위가 올라가고 기반이 다져져야 뭘 해도 할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이 성숙되지 않고서는 신령한 세계를 맛볼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의 신앙이 자라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그런데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1절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여기서 다섯 가지를 버려야 우리의 믿음과 인격이 자랄 수 있다고 했습니다.
①악독: 남을 해치기 위해 품는 독한 마음을 말합니다. 독한 마음을 품으면 독한 말이 나오고 눈빛이 독해지고 행동이 포악해 집니다. 요즘 세상이 얼마나 악독합니까? 저만 잘 살겠다고 사람들을 잡아다가 팔아먹습니다. 쉽게 일확천금을 노립니다. 그래서 대낮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고 남의 담을 넘어 들어가 칼을 겨누고 금품을 빼앗아 갑니다.
②궤휼: 속임수를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파멸시키고 악을 행하기 위해 속이는 것입니다.
③외식: 원래 이 말은 '마스크'에서 유래된 말로, 마스크를 쓴 가면 배우들의 태도를 가리킬 때 외식이라고 합니다. 위장된 자기 모습입니다. 예수님 당시 외식에 대표자들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주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외형적으로는 잘 꾸몄습니다. 거룩한 예복으로 입었습니다. 그런데 속은 썩었습니다. 마치 회칠한 무덤 같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속에는 썩는 것, 냄새나는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겉으로만 위장하는 것을 가리켜서 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 외식을 버려야 신앙이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④시기: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견디지 못해 마음으로 행동으로 방해하는 행위가 시기인 것입니다.
⑤비방: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악담하는 것 그리고 거짓 사실을 퍼트려 곤경에 빠지게 하는 것이 비방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을 좋게 말하지 않고 악평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내가 예수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것들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을 때, 우정이 무엇인지 몰랐을 때 가지고 있던 못된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예수 믿고 난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된 지금도 가지고 있다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입니다.
버리라는 것은 멀리 던져 버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찾을 수 없도록 다시 만날 수 없도록 멀리 던져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버려야 신앙의 성숙과 인격의 성숙이 옵니다.
여러분! 이런 것들 때문에 참으로 아름답고, 풍성해야 할 성도들의 교제가 얼마나 깨어지고 있습니까? '악독, 궤휼, 외식, 시기, 비방하는 말'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인들의 교제를 단전시킬 뿐 아니라 나 개인의 인격성장과 신앙 성장에도 지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들의 신앙 성장을 위해서 본문에서 이런 것들을 버리고 영적인 것을 사모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사모하라고 합니까? '순전하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신령하고 순전한 젓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젖은 태어난 어린아이가 먹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아이들이 젖을 먹음으로 무럭무럭 자라나게 됩니다. 성도들은 어린아이들처럼 말씀에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럭무럭 자랄 수가 있습니다. /믿/
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순전'하다는 것은 '거짓이 없는, 섞인 것이 없는' 순수한 젖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순전함은 가짜가 섞이지 않음을 의미하고 신령한 젖은 하나님의 말씀, 성경으로 무장함을 뜻합니다.
건강한 아이들은 젖을 무척 사모합니다. 젖은 잘 먹는 어린이는 튼튼히 자랍니다. 그런데 편식하는 어린이는 꽈배기처럼 육체가 말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육신의 양식을 잘 먹는 자가 건강하듯이 우리 신앙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늘 읽고, 듣고 묵상하는 자가 신령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믿/
여러분, 말씀을 많이 읽으십시오! 말씀을 많이 읽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계1: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할/ 또 모이기에 힘써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자꾸 들어야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은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자에게 몇 가지 은혜의 단계를 주십니다.
⑴십자가의 용서를 맛보는 단계입니다. 죄의 용서를 맛보는 것이 신앙의 첫 단계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의 보혈이 저와 여러분의 죄를 다 씻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⑵하늘의 평화를 맛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절대 다릅니다. 하늘이 주신 신령한 은사를 맛본 사람은 이 세상 것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⑶성령의 능력을 맛봅니다. 성령의 능력을 맛본 사람은 하늘에 권세가 생기고 확신이 옵니다. 또 죄의 유혹도 물리치고 세상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 힘을 받으십시다.
⑷내세의 능력을 맛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소원은 저 천국,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저 천국의 능력을 맛보면 이 세상에서 사는 세계가 달라집니다.
나사로는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습니다. 그는 부자의 밥상과 장막을 부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로는 세상에서 천국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내세의 능력을 맛본 자는 현재 천국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믿/
▶제가 알고 있는 선배 목사님 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일찍이 외국유학을 마치고 한국 교회의 중진 목사님으로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내세 천국에 대하여는 신앙적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백혈병으로 죽었습니다. 병상에서 죽어 가는 아들의 최후의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목사님과 가족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들이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아버지!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나는 더 좋은 하늘나라 예수님 곁으로 가요! 지금 천사가 나를 데리러 왔어요, 울지 말고 나를 위해 찬송을 불러주세요'
아들의 소리에 깨달은 목사님은 울음을 그치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찬송소리를 듣고 아들이 눈을 감았습니다. 아들의 최후를 지켜본 목사님은 그때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고 그 뒤 크게 회개하고 변화를 받아 지금은 큰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저 천국의 하늘나라를 간절히 소원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②신령한 집을 세우라!(4-5)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여기서 말하는 집은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를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신령한 집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을 말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살아 있는 성전으로 오셨고, 이제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거하시는 살아있는 성전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신령한 젖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는 말씀이라면 신령한 집은 그리스도의 성숙한 인격을 나타내는 성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삼일만에 살리셔서 택하심을 입은 산 돌을 세우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산 돌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핍박하고 내버렸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셔서 보배롭고 존귀한 산 돌이 되게 하시고 신령한 집을 세우는 기초 돌로 삼으셨습니다.
6절에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건물을 짓는데 모퉁이 돌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결정적으로 그 모퉁이 돌 때문에 건물이 세워집니다. 다른 모든 벽돌들은 이 모퉁이 돌에 의지해서 세워집니다. 그 돌을 기초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위에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교회의 기초 석은 예수님이십니다. 고전3:11절에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서 예수님은 산 돌로 소개하던 베드로는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로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우리가 모퉁이 돌은 아니지만 이 모퉁이 돌을 의지하고 세워진 작은 하나의 돌입니다. 여기 '산 돌'이라는 비유는 얼른 생각하면 잘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돌이라는 것은 생명이 없는 무생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생수를 주셨던 것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비유했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또 동시에 돌처럼 견고하신 분이라는 뜻으로 산 돌이라고 했습니다.
모퉁이 돌 되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작은 벽돌 된 우리들이 세워질 때 하나님의 성전이 이루어집니다. 그리니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교회의 머릿돌은 예수님이시고 그리고 이 교회를 형성하는 하나 하나의 지체들이 바로 우리 성도들입니다. /믿/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어야겠습니까?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그분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분은 진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도 진실해야 합니다. 그분은 온유와 겸손한 분이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본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제 교회가 얼마나 큰 건물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산돌 성도가 얼마나 많으냐고 중요합니다. 이제 우리는 살아 계신 주님이 거하시는 신령한 집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③신령한 제사를 드려라!
5절 중반 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구약에서는 제사장이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봉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재물이 되셔서 그 피로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친히 피 흘리신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우리 자신이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신령한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제사장은 본래 라틴어로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중보자'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나 제사장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곧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중보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당신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는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모든 인간을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제사장들이 되었습니다.
⑴제사장에게는 특권이 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갈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 개인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가졌습니다. 이것이 굉장한 특권입니다. 아무 때나 우리는 하나님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곧 교제입니다.
여러분! 대통령을 만나는데 얼마나 수속이 복잡합니까? 아무나 못 만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 때나 어디서든지 하나님과 만나 교제할 수가 있습니다. /할/ 깨달은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다는 특권! 이것이 신령한 성도의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아멘!/
⑵제사장에게는 특권과 함께 책임이 수반됩니다. 제사를 드려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어떤 제사를 드려야 합니까? 구약 때처럼 양을 잡고 소를 잡아 바쳐야 합니다. 그런 제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함께 끝장이 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제사들 드려야 합니까? 롬12:1절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내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즉 나의 삶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또 드릴 제사가 있습니다. 히13:15절이하에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우리는 지금 찬미의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내 몸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요, 주님 앞에 찬양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 모두는 거룩한 제사장들입니다. 우리 모두 이 거룩한 제사장의 특권을 빼앗기지도 마시고 포기하지도 마십시오, 9절을 보세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택함 받은 족속입니다.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저와 여러분들을 벌써 택해주셨다가 하나님 앞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가톨릭처럼 교황을 중보자로 세우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제사장의 직분을 주셨습니다. 아무 때나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할 수 있고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아무 때나 예배드릴 수 있다는 축복입니다. 이것이 귀한 축복입니다. /할/
⑶한 걸음 더 나아가서 '거룩한 나라의 백성'이라고 강조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곳은 거룩한 나라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시민이 되었습니다.
미국 사람들, 일등 국민임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하늘나라는 미국하고는 상대가 안 됩니다. 그런 거룩한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어깨를 쭉 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잠시 잠깐 있다가 가는 나그네길에 어려움도 많고 시련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저 하늘나라에 있음을 깨닫고 훌훌 털어 버리고 다시 한 번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절대로 망하게 놓아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롬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할/
그런데 여러분, ▶거룩한 백성은 거룩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성전 삼으시고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술도 끊고 담배도 끊어야 합니다. 고전10: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또 ▶거룩한 백성은 거룩한 의복을 입어야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금관제목을 입었습니다. 금빛이 찬란한 옷입니다. 지난날의 우리들의 죄악 된 모든 불의는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 받고 다시 의와 거룩함으로 태어나서 양심의 빛을 바라야 합니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빌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여쁘게 보시고 새로운 양심으로 비쳐주십니다. 집나간 탕자! 깨닫고 돌아와서 내 사람 된 것처럼, 세리 삭개오가 예수님 앞에 변화된 것처럼 우리도 날마다 변화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거룩한 백성은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덕! 한 마디로 '기쁜 소식, 복된 소식,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그 입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라고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기 위하여 저와 여러분을 택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덕은 생명을 살려내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보십니다. '전도란 나를 어두움에서 빛 가운데로 옮겨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신령한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신령해 지면 교회는 자동적으로 부흥되어집니다. 교회가 부흥되면 여러분의 사업도, 가정도 자녀들도 다 형통해 집니다.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우리 교회를 신령한 교회로 세우시기 바랍니다. /할/ (대예배(이전감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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