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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아! 하나님을 바라라! (시 42:1-11)

by 【고동엽】 2022. 2. 7.

내 영혼아! 하나님을 바라라! (시 42:1-11)

 

시편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문의 42편은 제 2권이 시작되는 첫째편입니다. 이 시편의 다섯 가지 부분들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성경이 시작되는 모세 오경과 유사한 구조를 가졌다고 주석 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우주와 인생과 역사의 기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의 핵심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올바른 관계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시편 1편에서 41편까지를 자세히 음미해보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1편에서는 의인과 악인을 나누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인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입니다. 또한 악인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시편이 두 번째 시작되는 첫째 부분인 42편은 출애굽기의 내용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는 구속의 드라마를 기록한 책입니다. 애굽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그들을 인도해 내신 주님의 행사를 보여줍니다.
이렇듯이 42편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난과 역경과 방황이 찾아올 때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인도하여 주시는가를 기록한 위로의 시입니다.
▶표제에 보면 '고라 자손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자는 다윗인데 이 시를 고라 자손에게 주어 작곡을 해서 성전에서 부르게 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마스길'은 '교훈시'라는 뜻입니다. '고라' 하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을 반역한 레위 자손가운데 중책을 맡았던 일꾼이었습니다.
본래 그들은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을 받던 자손들이었는데, 교만한 마음이 들어 지도자 모세와 아론을 물리치고 자기들이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되겠다고 반역하고 나셨다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어떤 심판인가 하면, 땅이 갈라져 삼키움을 당했습니다. 지금말로 하면 지진으로 인해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자신들의 죄를 울면서 회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회개하는 백성은 절대로 멸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건져 주셨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고라 자손들은 더더욱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하고 하나님의 종인 모세와 아론을 잘 받들면서 그 후손들이 성전에 성가대로 충성을 다 했습니다.
당시 다윗 왕 밑에서 성가대 지휘자로 명성을 날린 사람들은 '여두룬과 아삽과 헤만'입니다. 그 중 헤만은 고라의 18대 손으로 헤만의 아들들은 성전 찬양대 24반열 중 14반열에 지도자였다고 합니다.
이 시는 다윗이 가장 어두웠던 시절에 기록되었습니다. 칼빈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 핍박을 받을 때라고 했고, 어떤 학자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여러 곳으로 피신할 때 기록한 시라고도 말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의 심정과 형편을 몇 가지로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는 쫓기는 몸으로 어느 호수 옆에 앉아서 영적인 침체에 빠진 채로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의 마음에 모든 것을 쏟아 놓고 기도하며 주의 말씀을 통하여 위로와 격려를 받던 순간, 순간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바로 영적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도 다윗처럼 영적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확 열고 기도하고픈 마음과 가슴속에서 뜨겁게 울어 나오는 찬양을 드리고 싶은 이 거룩한 열망이 성도들에게 있어져야 합니다. /믿/
믿음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침체되면 만사가 꼬이게 됩니다. 오늘 다윗은 성전을 잃어버리고 목숨의 경각을 알 수 없는 슬프고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이 화살처럼 그의 영혼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3절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지금 다윗은 왕권을 빼앗긴 것에 대한 눈물이 아닙니다. 정든 고향산천을 다 버리고 객지에서 설움 받는 나그네의 슬픔을 신세 타령하는 그런 슬픔 눈물이 전혀 아닙니다.
다윗이 흘리는 눈물의 사연이 아주 기가 막힙니다. 그를 향해 대적 원수들이 비방하여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을 좀 내놓아라, 하나님을 보여라' 라는 말 때문에 그는 심히 괴롭고 슬프고 그래서 애절한 노래를 이 시편에 읊었습니다.
얼마나 황당한 질문입니까?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내놓으라니 이 얼마나 어려운 질문입니까? 10절에서도 "원수들이 비방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가 이렇게 짓밟히고 사느냐" 원수들이 조롱하는 말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기가 천대받는 것은 상관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조롱하는 원수들 때문에 속이 상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 눈물은 배고파 흘리는 눈물보다도, 버림받아 슬퍼하는 눈물보다도 더 한 차원 높은 눈물입니다.
9절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슬프게 다니나이까?" 그 당시 원수의 손에 쫓겨다니던 다윗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나를 잊은 것이 아닌가? 왜 하나님이 내 사정을 돌보지 않고 나를 주장하시고 간섭하지 않으시며 나를 구출하지 않으시는가?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실까?' 아마 다윗이 이런 영적인 침체와 곤고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고 있을 때, 십자가 아래 있던 무리들이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하면 세상 사람들은 '어디 어떻게 하나 보자' 하고 믿음의 사람들의 행동을 주시합니다.
이제 다윗은 마침내 이런 고백을 드립니다.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다윗같이 훌륭한 믿음의 사람의 생애에도 어둡고 슬픈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다윗 한 사람의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든 사람들의 동일한 체험입니다.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의 생애 속에도 다윗과 같은 통곡과 불안이 영혼을 사로잡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거스틴을 성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어느 날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를 성자라고 부르는 소리를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을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내 신앙생활은 기복이 너무 많았습니다. 나는 때때로 신앙생활을 막 시작한 유치원생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도 그러한 영적인 침체 속에서 빠져 있었습니다. 깊은 배신의 상처를 받았으며 신앙적인 회의를 느꼈습니다. 사람들은 '네 하나님이 죽었느냐?'고 조롱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병에 걸렸거나 사업에 실패하거나 무슨 일을 당하면 '하나님을 믿어도 별 것 없네' 하고 비웃고 소곤거립니다. 어째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열심히 하나님께 매달려서 복을 받아 놓고 봐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본문은 영적인 침체의 늪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다윗의 모습과 그의 생애 가운데 역사 하셔서 마침내 그를 구출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라'는 말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히12: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1.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갈급 함이 있고,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을 '안드로포스'라고 합니다. 위를 쳐다보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땅만 바라보고 땅만 생각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제 아무리 육체적인 조건들이 만족되어도 영적인 질문들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영적인 목마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1절에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팔레스틴 지방의 기후는 우리와 사정이 매우 다릅니다. 1년 중 건기가 4월부터 10월까지 계속되는데 비가 내리지 않는 이 때가 되면 모든 시내가 말라 건천이 되어 버린답니다. 이때가 되면 언덕을 넘고, 들판을 건너도 시냇물을 찾기가 힘듭니다. 찾다 지쳐버리면 목을 길게 빼고 쓰러진다고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신의 심정을 바로 이런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심정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모진 박해를 받았습니다. 로마제국 하에서 교인들은 밝은 태양 아래 살 수 없어서 지하동굴로 숨어서 살아야 했습니다.
믿는다는 이유로 자식들은 부모와 갈라져야 했고, 종들은 주인에게서 쫓겨나야 했고, 사람들은 이웃의 눈길을 피해서 그들의 신앙을 비밀히 간직해야 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신앙 때문에 그들의 생활터전을 잃어버리고 거리를 방황하게됩니다.
때로는 외딴 곳, 후미진 곳으로 추방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늘 말씀을 생각하고 암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자신들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라 하여 '사슴'표를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다윗은 정치적으로도 실패를 경험했고, 육신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도 느꼈고, 가정적인 위기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숱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가장 간절한 갈망은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다윗은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기를 둘러싼 모든 문제의 근원을 단순한 외부적인 상황이 아니라 자기의 영혼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절망의 원인을 제 삼자에서 찾습니다. 정치적인 실패로, 경기가 워낙 안 좋아서, 사기꾼에게 걸렸기 때문에, 아버지가 사업자금을 안 주어서, 이놈의 몸이 약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를 제 삼자에게서 찾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들의 절망의 원인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해서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전 역사가 하나님을 떠날 때 그들은 버림을 당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면 손해는 누가 보는지 아십니까? 고스란히 그것은 인간들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손해를 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택한 자는 깨뜨려서 당신 편에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고분고분 주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축복의 원천입니다. /아멘!/
본문의 다윗은 영리한 사람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불안과 낙심 중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다윗은 마르지 않고 흘러가는 영생의 시냇물을 사모하는 사슴처럼 갈급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았습니다. 이런 사람이 영적으로 영리한 사람입니다.
본래 사슴은 열이 높고 다혈적인 체질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동물보다 더 물을 찾는답니다. 충분한 수분을 섭취하지 못하면 극심한 갈증을 느끼는 동물이 바로 사슴입니다.
본문에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란 말씀에서 갈급하다는 말은 단순히 소원한다는 말이 아니라 대단히 강력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말은 '헐떡거리는 사모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결코 그대로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증이 있다는 것은 영적인 건강과 간절한 구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영적인 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도해야 되는 줄도 알고 말씀을 읽어야 되는 줄도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되는 줄도 알면서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심각한데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만날 것이요, 열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함에도 구하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다윗처럼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다.'는 거룩한 고백이 우리들의 입술에서 토해 내야 합니다. /믿/


①갈급하고 사모함의 모습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⑴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사모한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은 똑같은 말입니다.
⑵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100% 아멘으로 받는다는 고백입니다.
⑶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사모하고, 예배드리는 일을 제일 우선으로 삼고, 예배드리는 일을 인생의 최대의 값어치와 보람'으로 삼습니다.
시84:1,2절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 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10절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 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⑷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에게 잠8:21절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로 재물을 얻어서 그 곳간에 채우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②다윗은 어떤 하나님을 갈망합니까? 2절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생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살아 계셔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믿습니까? 그분은 우리의 생명을 지으셨고, 모든 만물의 근원이 되시며 지금도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늘에는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고, 땅 위에는 그분의 선하심으로 충만합니다. 다윗은 주위의 사람들이 '너희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죽은 것이 아니냐?'고 조롱한다 할지라도 자신은 분명히 살아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는 신앙이 깊지 못하지만 친구들이 교회를 비난하고 믿는 사람들을 욕하면 화가 날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고 했습니다.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부당한 비난을 받을 때 이 시인처럼 마음 아파하고 뼈를 찌르는 고통을 느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실한 예배를 통하여 모든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다윗의 갈망은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내가 갈망하나이다.'라는 울부짖음입니다. 우리도 이런 울부짖음이, 이러한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갈망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에서도 행여 질고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할/
여러분! 우리가 슬퍼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먼저 하나님을 향한 갈증이 없다는 사실을 인하여 울어야 합니다. 오늘 다윗은 목마른 사슴이 물을 구하듯 하나님을 구했습니다. 오늘 이 갈급한 구함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아멘!/

 

2. 낙망과 불안을 극복하고 하나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겪은 경험을 통해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이것은 불신자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의 경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낙망과 불안이 찾아옴을 볼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강해 설교가인 영국의 '로이드 존스' 목사는 영국 왕실의 주치의인 의사였다가 목사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시42편을 강해하면서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말을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설교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영혼에게 말해야 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무엇 때문에 불안해하느냐?' 여러분은 자신을 책망하고 권면하고 그리고 자신을 타일러야 합니다. 지금 침체된 상황에서 '불평 대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말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다윗도 다시 그의 영혼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5,11).
여기 '오히려'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오히려'라는 말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환난 중에서, 고통 속에서, 역경 속에서, 절망 속에서, 아픔 속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론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라!' 하나님을 바랄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신의 존귀한 모습과 내일을 열어갈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통과 절망 중에서도 불안해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고 외치는 다윗의 찬양 속에서 우리는 모든 문제의 해결방법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게 산재해있는 어떤 문제라 할지라도 우리의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순간부터 문제의 해결은 시작됩니다. /아멘!/
기독교의 세계관은 언제나 미래를 향해 있습니다. 성경은 희망적인 미래에 대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그래서 성경의 인생관은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전진합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이 태양이 떠오르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불안은 낙망의 산물입니다. 인간이 희망을 잃는다는 것은 삶에 의미를 잃는 것이요, 그곳은 곧 죽음을 뜻합니다. 불안은 죽음의 그림자이며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극복하는 길은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믿음으로 사는 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는 내가 어찌하여 낙망하여 불안해하느냐?'고 반문합니다.
우리도 하나님 안에 있으므로 모든 염려, 근심, 걱정, 불안, 초조를 다 내어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절망에 그치지 않고 그의 영혼을 향하여 외칩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지금까지 다윗은 자신만을 바라보았고, 환경만을 바라보았기에 실망했습니다. 맞습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환경만 바라보면 실망할 수박에 없습니다. 다윗처럼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역경의 배후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종교개혁이 한창이던 어느 날 마르틴 루터는 궁지에 몰려 몹시 상심하고 낙심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루터의 아내는 상복을 입고 루터에게 나타났습니다. 루터는 '누가 죽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예, 하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요?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지혜로운 그의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당신이 그토록 기가 죽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당신이 낙심하고 무기력한 것을 보니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이 틀림없소' 그때 루터가 '아, 그렇다. 하나님께서 생존하시는데 내가 왜 기가 죽었단 말인가' 무릎을 꿇고 '오 주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해 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오니 나를 살려주소서. 나에게 힘을 주소서.' 드디어 그는 하나님의 기를 받아 종교개혁을 완성해 갑니다.
우리도 환경을 바라보면 캄캄하고 어둡습니다. 그러나 그 환경을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진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할/
그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를 주시는 얼굴이며, 또한 우리를 도와주시는 얼굴이요, 우리로 하여금 찬양을 불러일으키게 하시는 얼굴입니다. /아멘!/

 

3. 다윗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했습니다.

 

6절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8절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6절에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이 나옵니다. 이곳은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길 때 방랑생활을 했던 곳입니다.
다윗은 표현할 수 없는 인생의 밑바닥에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 옛날 사울 왕에게 쫓길 때 하나님이 보호해주신 그 은혜를 지금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인생에 절망에 처할 때 이와 같이 주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난날을 돌이켜 보고 좋은 일을 생각하며 그때를 회상하면 우리 마음속에 소망이 옵니다.
▶우리는 유대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독재자 히틀러를 잘 압니다. 히틀러가 평소에 싫어한 것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유대인이요, 다른 하나는 여자였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의 가정적인 환경에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행상을 하는 떠돌이 장사꾼인데 한번 집을 나가면 한 달 내지 두 달 정도가 걸렸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 이웃에 있는 유태인과 불륜의 관계를 맺고 말았습니다.
어린 히틀러는 이 사실을 알고 어머니에게 그러지 말기를 호소했으나 어머니는 끝내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결국 한 사람의 어머니와 유태인의 불륜으로 히틀러의 마음에 원한을 품게 했고, 수많은 사람들과 유태인들을 학살하는 악독한 독재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될 수 있으면 지나간 잘못된 일들을 다 잊어버리고 즐겁고 아름다웠던 일들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처럼 지난 세월에도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해주신 그 은혜만을 기억할 때 지금 현재 낙망 중에 있다 할지라도 또 다시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좌절하고 낙심하면 그것 자체가 불 신앙입니다. 흔히들 인간의 항로들 험한 바다에 비유합니다. 물결이 잔잔한가 하면 언제 불어닥치는지 큰 파도가 엄숙해 옵니다. 삶의 고난을 가리켜 산 넘어 산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한 사건을 해결하고 숨 좀 돌리는가 하면 엉뚱한 일이 벌어지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환경에 처할 때 자신을 포기한다면 영영 돌이킬 수 없는 낙오자가 됩니다. 이럴 때일수록 먼저 자신과 하나님과의 사이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숨어 있을 때,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아담을 찾으셨습니다. 우리가 죄악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바로 깨닫기만 하면 다시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안에는 공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진노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따스한 위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늘 이야기합니다만 성도들이 겪는 시련을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되는 일종의 훈련과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어려운 시련을 하나님의 은총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어려움을 당하는 자가 있습니까? 담대한 믿음을 가지십시오, 옳습니다. 이 환란이 변하여 축복이 올 줄 믿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질 것입니다. 분명히 믿기 만하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할/

 

4. 다윗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자세를 지켰습니다.

 

9절을 보니까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이 표현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신실하심에 대한 강조 적인 표현입니다. '나는 흔들리고 불안하여 쫓기고 있지만 내가 의지할 견고한 바위가 되시는 하나님! 내가 믿음으로 기도하나이다.'
다윗은 반석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함으로서 그의 생애 속에 찾아오는 절망과 고난을 굴복하고 영혼을 소생시키는 위대한 체험을 합니다.
독일의 '마틴 부처'는 '슬픔 속에 있느냐? 기도하라. 핍박을 받고 있느냐? 기도하라. 어려움이 생겼느냐? 기도하라. 기도밖에 할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9절 중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원수들의 압제가 가져다 준 다윗의 슬픔은 과연 무엇입니까? 사울의 핍박으로 인하여 망명자 떠돌이 생활로 전락한 나그네의 피로한 신세를 한탄한 것일 수도 있고, 아들 압살롬의 배신에 대한 슬픔일수도 있습니다.
나그네는 누구도 반겨주지 않습니다. 그때 그 상황이 얼마나 고달팠으면 10절에 보니까 '내 뼈를 찌르는 칼'이라고 했겠습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도 다윗은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다윗의 위대한 고백을 읽어보자! 11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5절에 말씀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구절입니다.
'어찌하여 낙심하며'란 말은 히브리말로 문자 적으로는 '어찌하여 네가 숙이느냐'라는 뜻입니다. 슬픔의 무게 때문에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상태를 의미하고 심히 우울하고 슬픈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풀이 죽은 상태입니다. '고개 숙인 남자'란 말이 있습니다.
▶낙심이란 어떤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까? 사전에 보면 '용기와 희망과 자신감을 잃어버린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기가 꺾인 상태입니다. 낙심이란 자신감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낙심을 낙망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소망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낙담이란 말을 쓰기도 합니다. 담력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낙심이 꿈을 성취하는 사람의 적이 되는 것은 포기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낙심합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기대에 어긋나는 결과 때문에 낙심합니다. 어떤 결과가 이루어지기까지 기다리지 못해서 낙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낙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망을 당할 때 배신을 당할 때 낙심합니다.
꿈이 좌절될 때, 기도 응답이 더디 올 때 낙심합니다. 사람 바라보다가 낙심하고, 환경바라보고 낙심하고, 조건 때문에 낙심하고, 때로는 자신을 바라보고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낙심하는 경우는 다양합니다.
본문에 다윗은 왜 낙심하고 있습니까? 자식 때문에 낙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때문에 낙심하고 있습니다. 환경 때문에 낙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서 낙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낙심을 뛰어 넘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위대함이 그에게는 있었습니다.
▶이런 우화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고참 사단이 그 동안 싸움터에서 사용했던 무기들을 졸개들에게 판매했습니다. '미움, 시기, 질투, 정욕, 음란, 교만, 공포' 등 여러 무기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뜻 보기에는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도 않고 또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무기 하나에 어마어마한 가격이 매겨져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낙심이라는 무기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다가도 낙심합니다. 때로는 1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 정도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낙심하고, 기도를 포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자들의 기도를 안 들어 주시겠느냐?'고 하면서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850대 1이라고 하는 큰 싸움에서 그의 대적들을 다 멸하고 위대한 승리를 가지고 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왕상 19장에 보면 이세벨이라는 왕후가 자신을 죽이고자 한다는 소식을 듣고 광야로 도망가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이제 저는 살만큼 살았습니다. 할 만큼 했습니다. 이제 죽여주십시오' 하나님의 선지자의 말이라고 할 수 없는 낙심된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큰 은혜 받고, 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도 우리는 낙심할 수 있습니다. 영적 긴장을 풀고 있으면,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에게 덤벼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아멘!/
다윗은 자신을 가리켜 지난날의 그 좋든 믿음이 어디로 가고 낙망하느냐는 자신과의 독백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자는 신앙의 새로운 결단을 가짐으로 그는 다시 한 번 일어서는 강함을 볼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우리는 항상 자기 자신에게 말하며 살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평균 1분당 150개에서 200개의 단어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과 대화할 때에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인 1분에 1,300개의 단어를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나 자신과의 대화를 심리학자들은 'Self-Talk'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 자신에게 이처럼 빠른 속도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나 자신에게 긍정적인 대화보다 부정적이고 저속하고 패배적인 대화를 하는 것은 아닙니까? 긍정의 대화를 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감사하는 것만큼 믿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것만큼 행복합니다. 감사하는 것만큼 다릅니다. 감사하는 것만큼 강합니다.'
누가 진짜 믿는 사람입니까?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진짜 행복한 사람입니까?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진짜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구별된 사람입니까?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진짜 강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아멘!/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의 도우심 의지하세요. 낙심과 불안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변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어떤 때에도 의지할 만한 합니다.
시121:1-2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할/ 하나님은 영원한 우리의 도우미이십니다.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합니다. 보혜사란 '파라클레토스'란 단어인데 이 말은 여러 뜻이 있지만 가장 강한 뜻은 '도우시는 이'(helper)입니다. 우리 곁에 도우미가 빽빽하게 몰려 있습니다. 천군 천사가 우리의 도우미입니다. 불 칼, 화염 검을 가지고 둘러서 있습니다. 그런데도 낙심하렵니까? 하나님보다 자신을 의지할 때에 낙심이 됩니다. 자신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낙심할 수가 없습니다.
프랑소와 페넬롱은 '낙담은 겸손의 열매가 아니라 교만의 열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그렇다면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와 찬양'입니다.
행16장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점치는 귀신이 들린 여종에게로 가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러자 그 여종의 주인이 자신의 이익이 떨어짐으로 인해 바울과 실라를 모함하여 고소를 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죄도 없는데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였고, 홀연히 큰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고 모든 사람들의 매인 것이 풀리고 간수가 찾아와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찬송은 기적을 가져옵니다. 기도는 응답을 가져옵니다. 캄캄한 감옥 속에 들어갔다 할지라도 좌절도, 낙심도, 원망도 하지말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면 지진을 통해서 감옥 문이 열리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일이 잘못되어 갈 때 하나님께 찬송하십시오. 찬송은 패배를 승리로 바꾸어 줍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함으로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찬송을 부르십시오. 찬송은 곡조 있는 기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면 하나님께서 실패를 성공으로, 패배를 승리로 바꾸어 주십니다.
바람이 부느냐, 불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고통 가운데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보다도 그 사람이 거기에 대해 어떻게 대응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는 선한 결과가 나타나고 악한 사람에게는 악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의심의 열매를 맺게 되고, 믿음을 가진 사람은 담대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하여도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간구할 수 있습니다. 기도까지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정말로 끝이지만 기도하는 순간부터 인생의 새로운 역사가 전개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빌4:6-7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은 결코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시고 성령님께서 도와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풍족하며 부자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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