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돌보는 중보의 삶(4)
딤후 4:1-5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내가 누군가를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참 고상한 삶이고 복 받을 일이고 성숙한 삶입니다. 내가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돈을 주는 일도 참 소중한 일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도 소중한 일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는 일도 소중한 일입니다. 그래서 중보의 삶은 참 소중한 삶입니다. 그런데 이 중보의 삶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일들은 모두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시적이라는 점입니다. 아주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중보의 삶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가장 고상하고 근본적인 중보의 삶이 있습니다. 그것이 전도하는 일입니다. 내가 예수를 알므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얻고 천국을 소유한 것이 가장 근본적인 삶입니다. 누군가 나를 그런 길로 인도해 주었다면 그것이 진정으로 근본적인 중보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전도의 삶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 부모가 이 구원을 모릅니다. 이 길을 모르면 결정적으로 멸망이라는 것이 주어집니다. 이 문제가 작은 문제입니까.
여러분은 이 멸망이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장차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멸망당해서 지옥으로 던져진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오죽하면 지옥이라고 했겠습니까. 여러분은 찜질방 불가마라는 곳을 가 보셨을 것입니다. 저도 엊그제 불가마를 가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들어가니까 참 좋았습니다. 따뜻하고 그곳에 누우니 어긋났던 등뼈가 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절로 참 시원하다 하고 감탄사를 내뱉으며 내 몸을 찜질방 불가마 달구어진 바닥에 맡겼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한 10여분 있으니까 그곳은 더 이상 좋은 곳이 아니었습니다. 숨이 막히고 혈압이 오르고 땀이 온몸을 적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만 나갈까 더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나는 마음만 먹으면 그곳을 나갈 수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나갈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은 지옥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일 그곳이 아무리 좋은 곳이라 해도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곳은 찜질방 불가마가 아니고 지옥입니다. 지옥은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마치 불가마와 같은 곳입니다. 그래서 지옥입니다. 그런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지옥에서는 지금 리모델링이 한창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순전히 한국 사람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불가마에서 하도 연단 받아 놓아서 지옥불이 효능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지옥에서는 불가마 열을 높이느라고 공사 중이라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 온돌문화에 익숙해서 만일 지옥에 간다고 해도 훨씬 참고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 부모가, 내 자식이, 내 이웃이 이 불가마에서 지옥에서 나오지 못하고 고난 받는 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부모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도움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 부모를 구원받게 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그렇다면 전도는 이 세상에서 최상의 중보의 삶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너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고 권하라고 했습니다. 이 일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제일 먼저 할 일입니다.
가까이 지내는 목사님 한분이 늦게 예수를 믿고 목회자가 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늦게 예수를 알고 나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격하는지 모릅니다. 예수를 늦게 믿은 것이 그렇게 아깝고 억울하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내가 예수를 몰랐더라면 결국 멸망을 당했을 것이 분명한데 그 점을 생각하면 아찔하고 끔찍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분이 아주 일찍부터 교회에 다녔던 절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친구야 정말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 맞지, 암 맞고말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멸망 받아 지옥 가는 것도 맞지, 물론이지, 지옥가면 불가마 같은 곳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고 고생하는 것도 맞지, 암 물론이지, 그런데 너 내 친구 맞아, 맞지, 나는 네 친구지, 야 이 나쁜 놈아 네가 내 친구냐, 그렇다면 너는 천국가고 나는 지옥가란 말이냐, 너 왜 나를 전도 안했어, 이 나쁜 자식아“ 하고 욕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 절친한 친구라면 그 친구가 장차 구원받지 못해서 멸망하고 구제받을 수 없는 불가마 속에 던져진다는 것을 알면서 그냥 있어도 되는 것입니까. 내 부모가, 내 형제가, 내 이웃이, 내 절친한 친구가 그렇게 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놔 둘 수 있다는 말이냐고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중보의 삶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전도하는 중보의 삶입니다.
먹을 것을 주는 것도 소중한 일입니다. 어려울 때 위로하는 일도 소중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중보의 삶, 최상의 선물은 전도해서 구원받게 하는 일입니다. 돕고 위로하고 사랑하고 돈 몇 푼 도와줘서 위기를 모면하게 하는 것도 소중한 일이지만 이 전도의 삶은 그것들을 훨씬 능가하게 하는 중보의 삶입니다. 영혼을 돌보는 중보의 삶이야말로 아주 근본적으로 사람을 치유하고 문제를 해결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전도의 삶에 눈을 떠야 합니다. 전도를 하려면 다음의 몇 가지 점을 착안해야 합니다.
1. 가까운 상대부터 - 요 1:41-42
전도는 마음을 전하기 가장 쉬운 사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아주 가까운 상대부터 간절한 마음으로 접근하여 그 영혼을 돌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시대는 의외로 전도를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내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전도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가까운 사람에게 한번도 전도에 대해서 이야기 안한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남들에게는 전도를 잘 했는데 정작 내 가족에게는 한번도 권해본 적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이 12살 때 아버지 주머니 돈을 훔치기 시작해서 타락생활을 합니다. 14살 때 어머니가 죽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새벽 두시까지 노름에 빠지고 다음날은 술에 취해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교도소를 전전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교회의 모임에 참석하게 됩니다. 그날 예배 중에 부르던 찬송소리에 예수를 영접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한 말이 있습니다. “그동안 왜 나에게 예수 믿으라고 말해준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가까운 친구 5명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한 친구를 5년 만에 영접시키고 두 친구를 10년 만에 영접시키고 또 한 친구를 25년 만에 영접시킵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고아들을 위해서 일평생을 바칩니다. 그분이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입니다.
요 1:41절을 보면 안드레가 먼저 예수를 영접합니다. 그리고 안드레는 자기 형제 베드로를 예수께로 인도합니다. 베드로를 만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제부터 네 이름을 게바라 하리라 하고 이름을 바꾸어 주시고 제자로 택하십니다. 전도는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대상으로 정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2. 대상자 연구 - 행 17:22-23
전도는 그냥 막연하게 하면 안 됩니다. 전도하려면 전도의 대상자를 깊이 알기 위해서 연구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전도 대상자의 관심이 무엇인지 취미와 직업과 가족관계와 특기는 무엇이고 지금 고민하고 있는 점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알고 종합해서 접근해야 합니다. 정주영씨는 어느 날 모임을 갖게 되면 모이는 대상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사전에 알아 놓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화할 때 사전에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대화를 이끌어 가면 상대방이 놀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가 푹 빠지고 팬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공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무엇인가 남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행 17:23절을 보면 바울이 고발되어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증언합니다. 그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하고 말합니다. 그 말은 바울은 이미 아덴 사람들의 성향, 생각, 습관, 관심을 미리 다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적을 알지 않고 어떻게 적을 이길 수 있습니까. 적을 알면 백번 싸워 백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는 대상을 먼저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용기 있는 접근 - 요 4:7
일단 내가 전도해야 하겠다 하는 대상을 정했으면 자주 만나고 전화하고 연락해서 관심을 나누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렇다고 어느 날 작심하고 하루 동안에 수십 통씩 매일 전화 공세를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일단 대상을 정했으면 대상을 연구하고 고상하게 접근하면서 상당기간 기도하다가 때가 되었다 싶으면 어느 날 용기 있게 고백하고 대시해 나가야 합니다.
요 4:7절을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가십니다. 우물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십니다. 그때 한 여자가 물을 길으러 옵니다. 그 여자는 창녀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과감하게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접근입니다. 상대를 정했으면 접근하는 하는 것입니다. 그곳이 어디든 적절한 기회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 접근하는데 필요한 것이 용기입니다. 전도에 가장 필요한 것이 용기입니다. 접근해서 자신 있게 예수를 전하는 일에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용기는 참 중요합니다. 어느 고등학교 학생이 지갑을 소매치가 당했습니다. 차비도 없습니다. 정류장에 있으니까 어느 여학생이 왔습니다. 이 남학생은 용기를 내어 여학생에게 차비를 좀 달라고 했습니다. 참 용기 있는 학생입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은 더 용기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여학생이 남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시간 있으세요?” 그러자 이 남학생은 얼굴에 웃음을 띠면서 말했습니다. “시간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자 이 여학생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걸어가세요.”
4. 아낌없는 투자 - 갈 6:7
거둘 때는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많이 투자한 사람이 많이 거둡니다. 마찬가지로 전도는 심은 노력만큼 거두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전도에 눈을 뜨게 되면 동시에 투자하는 눈도 떠야 합니다. 투자하지 않으면 전도가 되질 않습니다. 전도 대상자가 정해졌으면 그때부터 그의 애경사에 참석하고 위로하고 축하해주고 시간을 투자하고 선물을 하고 식사를 같이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남들에게 그렇게 까지 해야 하느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런 사고를 가지고 있는 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기는 틀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지극히 자기이익 중심자입니다. 그러니까 이기적 신앙인으로 살고 생산이나 새싹의 열매나 신앙상의 응답생활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갈 6:7절을 보면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전도는 한 영혼을 구원하고 거듭나게 하는 농사치고는 가장 중요하고 고상한 농사입니다.
5. 간증 말하기 - 행 10:2
전도는 이론으로 설득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전도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간증으로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방법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동기를 말하고 과정을 말하고 그 만남을 통해서 내 삶이 변화된 것을 소상하게 전하는 것이 가장 좋은 전도법입니다.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에 나타나는 잔잔한 감동들, 행복한 이야기들, 체험한 이야기들을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고 난 이후 방치하다 시피 살아가던 가정과 가족중심으로 살아가게 된 내용들을 꾸밈없이 대화해 가다보면 상대방이 마음으로 감동받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한번 같이 휴가를 가서 그 삶을 직접 보여주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면 상대의 부인은 아마 감동받고 감탄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정중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 가족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에 서로 충실하고 자상하고 따뜻하게 살아가는 모습, 그것이 신앙인의 가정이고 삶입니다. 그 삶이 이 땅에 천국을 이루고 병든 세상을 치유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삶입니다. 내 가정을 섬기는 사람은 너를 섬길 수 있게 됩니다. 그 삶을 그대로 보여주면 그것이 내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 나의 변화된 삶의 간증이 되는 것입니다. 행 10:2절을 보면 “고넬료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보시고 감동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삶이 간증의 삶입니다.
그리고 전도자에게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세상에는 말 몇 마디하고 간증 몇 마디에 넘어올 사람이 없습니다. 전도는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1년을 공들여도 전혀 꼼짝도 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낙심 말아야 합니다. 눈먼 사람에게 무지개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듯 영적 소경인 무지한 사람에게 천국을 믿게 해 주고 하나님을 보여주고 구원을 알게 해 주고 보여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도자에게는 열매를 얻을 때 까지 끝까지 인내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6. 성령 의지 - 고전 2:4
마지막으로 전도는 영적 사역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전도는 내 말재주나 언변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전도는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을 내가 거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전도할 때는 반드시 성령에 의지해야 하고 기도해야 나의 전도가 열매가 맺힙니다. 성령이 함께 하셔야 상대방이 변화를 받습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사람은 서로 늘 신세지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려울 때 도움 받아야 하고 아플 때 위로받고 간호 받아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도와주는 삶이 고상한 삶입니다. 그런데 그 위로와는 비교도 안 되는 아주 고마운 삶이 있습니다. 그것이 전도 받아 천국을 소유하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도움입니다. 세상에 이 보다 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영혼을 돌보는 중보의 삶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우리들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타이타닉 호가 침몰한지 4년 후에 한 젊은이가 어느 모임에서 간증을 했습니다. 그 젊은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때 타이타닉 호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부서진 배 조각을 붙잡고 표류하고 있었는데 내 옆에 존 하퍼 목사님도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예수를 믿습니까.’. ‘나는 아니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은 다급한 목소리로 ‘예수를 믿으세요,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요.’ 그리고 그는 파도에 휩쓸려 물속에 가라앉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물 밖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내게 또 물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를 믿으십니까.’ 그때 나는 여전히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파도에 휩쓸려 물속에 잠겼고 다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존 하퍼목사님이 전도한 마지막 사람입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물질을 통한 섬김의 삶( /6)행 4:32-37 (0) | 2022.01.07 |
---|---|
직업을 통한 섬김의 삶/ (5)골 3:22-4:1 (0) | 2022.01.07 |
위로와 돌봄의 삶/ (3)벧전 4:7-11 (0) | 2022.01.07 |
솔로몬의 중보의 기도/ (2)왕상 8:27-30 (0) | 2022.01.07 |
성숙한 신앙 성숙한 삶/ (1)행 12:1-5 (0) | 2022.01.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