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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 그는 누구인가? (왕상 19:1-8)

by 【고동엽】 2022. 2. 7.

엘리야! 그는 누구인가? (왕상 19:1-8)

 

엘리야의 기사는 왕상17장부터입니다. 그는 누구인가?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엘리야는 길르앗의 디셉 사람으로 북 이스라엘의 최고의 선지자로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선지자입니다. 그는 엘리사의 스승이며 이스라엘의 최고의 예언자였습니다.
또 엘리야는 불의 사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당신이 필요한 인물을 세우시고 사명을 맡기십니다. 사람들은 엘리야를 '불의 사자'또는 '능력의 사자'라고 부릅니다. 또 엘리야는 말씀의 사자입니다. 그가 아합 왕에 맞서서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고 폭탄선언을 하자 그대로 적중되어 3년 6개월 동안 그 땅에 비와 이슬이 그쳤고 크게 흉년이 들었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그대로 전하기만 하면 거기에는 상상할 수 없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겔37:10).
그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암흑시대인 아합 왕 때에 부정한 정권과 맛서 싸웠던 불굴의 개혁자요, 능력의 종입니다.

 

1. 본문의 배경을 먼저 알아보자!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이 죽자 나라가 두 동강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었습니다. 남 유다는 400년 간 20명의 왕이 나라를 다스렸는데 그 중에 8왕은 선왕으로 하나님 앞과 백성들에게서 존경을 받았으나 12왕은 하나님 앞에서도 악했고, 백성들에게도 박했습니다.
또한 북 이스라엘은 240년 간 이어졌는데 19왕이 모두 나쁜 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왕 가운데 31명이 하나님 앞과 백성들 앞에서 아주 악한 왕들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악했던 왕이 바로 아합 왕입니다.
왕상16:30절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또 31절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 더 나아가 32절에는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사당 속에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33절에서도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으니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아합왕은 아무튼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해서 가장 악한 왕으로 금메달 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합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인가? 아합의 부인 이세벨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남녀 모두를 합쳐서 가장 악한 사람을 뽑는다면 이세벨이 단연 금메달입니다.
엘리야는 바로 악한 왕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활동한 선지자였습니다. 아합이 정권을 쥐고 있을 당시 아람나라가 끊임없이 공격해 왔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아람나라의 공격 위협을 막아 보고자 시돈왕의 딸 이세벨과 정략적인 결혼을 했는데 이세벨은 인물이 잘났고, 절세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이 시집을 오면서 자기 나라에서 섬기던 우상을 다 가지고 왔습니다. 이세벨은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가지고 와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을 한 사람, 한사람씩 죽이기 시작하여 하나님의 종을 많이 죽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들을 다 헐어버렸습니다.
그곳에는 갈멜산이 있었는데 이 산은 아주 전망이 좋고 비옥하고 광활한 산이었습니다. 이 갈멜산상에 있는 하나님의 제단도 헐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되자 하나님을 섬기는 일꾼들과 선지자들이 아합왕과 이세벨을 피하여 숨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때 본문의 주인공 엘리야가 아합 왕 앞에 당당히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그에게 예언을 했습니다. '당신이 만약에 회개하지 않으면, 그러니까 우상을 다 철거하고 이세벨을 처형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이제부터 하늘 문을 닫고 3년 6개월 동안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도망하여 숨었습니다. 그 이후에 아합 왕은 3년 6개월 동안 엘리야를 찾으려고 눈에 붙을 켜고 온 병력을 동원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수배를 내렸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은 것은 오직 엘리야의 예언 때문이라고 믿고 그 가뭄의 원인을 엘리야에게 돌렸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어디로 갔습니까? 그릿 시냇가로 갔습니다. 왕상17:3절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그런데 보십시오! 말씀대로 순종한 엘리야를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5-6절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 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 /할/ 그런데 그릿 시냇가도 그 가뭄에 말라버리니 이번에는 하나님이 그를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어 3년 6개월을 지내게 했습니다.
9절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과연 사르밧에 갔더니 그 과부가 나무를 하고 있습니다. 10절에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12절에 보면 '나뭇가지 두엇을 주어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아주 딱한 형편입니다. 그런 과부에게 하나님의 종이 무슨 요구를 합니까? '물을 달라'고 요구하고 물을 가지러 가는 그녀에게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 오라'고 요구합니다. 그런데 12절에 보면 그녀의 총 재산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그러니까 지금 이 과부는 자살 직전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필이면 왜 이런 집으로 인도하십니까?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그곳에 있습니다. 순종과 믿음을 시험해보시고 복을 주시려는 깊은 뜻이 잇습니다. /믿/ 엘리야는 자신에게 떡을 가져오라고 요구하면서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14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엘리야의 말대로 순종한 그 과부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합니다.
16절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하루도 부족함이 없이 하나님은 엘리야와 과부의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아멘!/
왕상18장에 이제 3년 6개월이 지나고 나니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엘리야야 이제 나가서 아합 왕을 만나라'고 지시했습니다.
엘리야는 그때 그런 상황에서 아합을 만나는 것은 기름통을 가지고 불 속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인줄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기꺼이 순종했습니다. 이런 순종이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할/
아합 왕이 엘리야를 보더니 대뜸 하는 소리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여!' 그럽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담대히 외쳤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는 내가 아니라 당신이요, 당신이 이 나라의 하나님의 종들을 다 잡아 죽이고, 하나님의 제단을 다 훼파하지 않았소! 오늘 나하고 결판을 합시다. 당신이 믿는 바알과 아세라 신상이 참신인가? 아니면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참신인가? 대결을 해 봅시다. 당신의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신 제사장 400명 도합 850명과 나와 한번 겨룹시다.' 그렇게 해서 엄청난 대결이 붙었습니다.
결단의 장소는 갈멜산입니다. 그리하여 그 날 만조백관이하 모든 백성이 구름 떼처럼 모였습니다. 엘리야는 홀로 하나님을 대신해서 갈멜산상에 섰습니다. 저쪽은 850명의 제사장들과 만조백관들과 많은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먼저 나가서 군중들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내용은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겠느냐?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거든 그를 좇을 것이요, 바알신이 참신이거든 그를 좇을 것이니라.'
엘리야의 이 설교는 비단 옛날 갈멜산의 무너진 제단 터에서만 외친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크게 고막을 울리는 말씀인줄 압니다. /아멘!/ 그들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설교를 마친 다음 엘리야는 그들에게 제안을 한 것입니다.
'너희 850명과 나 하나님의 종 엘리야 한 사람이 갈멜산에서 각각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되 불이 임하는 제단이 참 하나님 것을 증명하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하고 850명은 바알의 제단을 쌓았고, 엘리야는 다 무너진 황폐된 하나님의 제단을 눈물을 흘리면서 열두 돌을 취하여 다시 수축했습니다. 특별히 엘리야는 하나님의 제단 위에 소를 잡아서 각을 떠놓고 옆에다 도랑을 파고 물을 길러다가 채워놓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①이 대목에서 우리는 중요한 신앙의 메시지를 받아야 합니다.
왕상18:30절에 보면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들도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해야 합니다.
그 첫 번째가 예배의 회복입니다. /할/ 요4:23-24절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예배의 회복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는 것입니다.
그 두 번째는 기도의 회복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말씀 순종의 회복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일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는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삼상15:22절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②갈멜산의 대결을 보자!

▶먼저 바알 선지자들이 송아지를 각 떠서 단 위에 놓고 바알을 불렀습니다. "바알이여! 바알이여! 바알이여!" 정오가 되어도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며 부추겼습니다. '너희의 신이 잠들었는지, 잠깐 나갔는지, 명상 중인지 모르니 더 크게 부르라' 그러자 그들이 더 큰 소리로 '바알이여! 바알이여!'하고 외쳤습니다. 나중에는 칼과 창으로 자기들의 몸을 찢어 피를 흘리면서까지 바알을 불렀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바알이 잠들거나 죽은 것이 아니라 없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나라의 왕이 섬기고 장관들이 섬길지라도 우상은 응답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대답이 없습니다. 우상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만든 조각품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상에 속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해가 질 때까지, 저녁 소제를 드릴 시간이 될 때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자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불러 자기 가까이로 오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제단을 쌓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올려 놓은 다음 물을 부었습니다. 그 물은 준비해 놓은 물입니다. 그 물을 제단 위에 세 번이나 부었습니다. 거기에 넘치도록 물을 부었습니다. 그리고는 엘리야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오늘 응답하시사 여호와 주께서 참 하나님이시고, 내가 하나님의 종인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나타내 주소서. 하나님이여, 응답하소서. 주께서 참 하나님이심과 사람의 마음을 바꾸시는 분이심을 알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소서. 내게 응답하소서."
그때 하늘에서 성령의 불이, 이글거리는 불덩어리가 내려와 그 제물과 나무와 돌까지 태웠습니다. 그리고 도랑의 물도 핥았습니다. /할/ 그러자 모든 백성이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가 결사적으로 부르짖어 기도했더니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모든 것을 태웠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오늘 결단적인 기도를 합시다.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운명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아니 그것보다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오늘 만약에 당신이 불을 내리지 아니하시면 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자손손 대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 버려진 것입니다. 이런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소서!'
엘리야 제단에 하나님의 불이 떨어지자 모든 사람들은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로다.' 찬양하며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할/
▶또 다시 기도하는 엘리야를 보세요! 이제 엘리야는 갈멘산 정상에 올라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넣고 하나님 앞에 또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비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로 응답하셔서 3년6개월 동안 메마른 땅에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아합 왕이 비를 맞으면서 수레를 타고 내려왔다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약5:17-18절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디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여기서 엘리야가 땅바닥에 무릎을 꿇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항복을 뜻합니다. 그 기도를 구름이 떠올라 빗방울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한 것입니다.
기도는 영적 전쟁입니다. 기도하면 이기고 안 하면 집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야고보는 '간절히', '다시'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중단하면 무너집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내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할/
하나님 재단에 내려진 불을 바알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보여준 것이고 엘리야를 향해서는 제물을 기뻐 받으시는 증표가 된 것입니다. 또 비를 내리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회복을 실제적으로 깨닫게 한 사건입니다.

 

2. 여기서 우리는 엘리야의 제단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겠습니다(왕상18:22-40).

 

⑴홀로 쌓는 외로운 제단입니다. 22절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엘리야는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외롭게 제단을 쌓았습니다. 사람이 외로워져야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모든 것이 막이고 단절될 때 비로소 하나님만 의지하여 기도하게 됩니다.
32절에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여러분! 다 무너지고 막히고 떠나갔습니까? 이제 정말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할 때입니다.
⑵말씀의 제단입니다. 36절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엘리야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말씀의 제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큰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을 그대로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⑶기도의 제단입니다. 37절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기도는 창조의 기적을 가져오게 합니다. 인간이 도저히 할 수 없는 것, 불가능한 것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한 기도는 천국 보고를 여는 열쇠입니다.
⑷불로 응답된 제단입니다. 38절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할/ 기도하면 불이 떨어집니다. 불은 능력입니다.
⑸승리의 제단입니다. 40절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850:1 대결에서 엘리야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승리했습니다.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잡아 이끌고 기손 시내로 내려가 다 죽였습니다.

 

3. 오늘 본문은 엘리야가 승리한 뒤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①1절를 보면 아합왕도 자기마누라 이세벨에게 잡혀 사는 인간입니다. 갈멜산에서 일어난 사건을 상세하게 보고합니다.
⑴엘리야가 기도해서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송아지가 불타고 도랑의 물까지 태웠습니다. ⑵엘리야가 기도하니 하늘 문이 열리고 3년6개월 동안 메마른 대지 위에 시원하게 소낙비가 내림으로 이 민족을 살게 되었다고 보고합니다. ⑶그런데 당신을 따르는 아세라 선지자들은 기손 강가로 데리고 가서 다 죽었다고 보고합니다.
이 정도 했으면 이세벨도 '야! 엘리야가 섬기는 그분이 참 하나님이시로구나' 깨닫고 회개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엘리야가 미워서 이를 박박 갈며 길에서 뛰고 난리가 났습니다.
②2절을 보면 이세벨이 엘리야에게 '살인 경고장'을 보냈습니다. 민족을 가뭄에서 구한 엘리야를 요셉처럼 국무총리로 받들지는 못할망정 24시간 내에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당장 죽일 수도 있는데 '내일 이맘 때' 그러니까 24시간 이유가 준 것은 엘리야를 공포에 떨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말려 죽이려는 속셈입니다. 살인범은 사형시킬 때, 막상 죽는 순간을 잠깐이지만 거기까지 가는 순간 순간은 피를 말리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언젠가 TV에서 사형수들의 심리상태를 특집으로 보냈는데 그 때 그것을 보고 여간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형수들은 한결같이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마지막처럼 살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내일 이 맘 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임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이세벨의 말은 한마디로 '내가 만일 하루 안에 너를 죽이지 아니하면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야를 죽이지 않는다면 자기가 벼락 맞아 죽겠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섬기는 신들이 엘리야를 처리하지 않을 때, 자기에게 벌을 내려 달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독종입니까? 한마디로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듣자마자 그렇게 당당했고 용감했던 엘리야가 초죽음이 되어 벌벌 떨고 있습니다.
이세벨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최고의 권력자입니다. 당당히 이단선지자 850명과 대결했던 엘리야는 그 용기를 잃어버리고 나약한 여자 앞에서 벌벌 떨고 있습니다. 한번쯤 '내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절규했어야 선지자답지요, 역경이 찾아와서 선지자도 우리와 똑같은 나약한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엘리야는 자기의 몸종 게하시를 100리 밖에 두고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자기 혼자 살기 위하여 도망 간 것입니다. 엘리야는 광야 로뎀나무에 앉아서 죽기를 원하는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4절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볼 수 있습니다. 무적의 용장 엘리야도 이세벨이 선지자를 모두 죽이고 자기의 목숨을 노린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죽여 달라는 기도를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약5:17절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여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여기서 엘리야는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고독에 빠졌습니다. 엘리야의 이 모습을 보고 <키토>라는 성경학자는 '엘리야에게서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세 가지를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⑴죽음을 피하여 도망가서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간청한 것을 이해할 수가 없고 ⑵가장 생존력이 강한 로렘나무 밑에 누워서 그 나무의 의미를 모르는 엘리야를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으며 ⑶그토록 불을 토할 듯이 강했던 엘리야가 그토록 약해진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4. 여기서 엘리야의 우울증이 어디서 왔습니까?

 

①승리가 우울증의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엘리야는 엊그제 갈멜산 대결에서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 고독에 빠졌습니다. 유명한 가수들의 고백을 들어보니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있었던 무대를 내려오면 그렇게 허탈과 고독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실패후보다 성공 후가 더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성공관리가 실패관리보다 훨씬 힘이 드는 것입니다.
②공포심이 우울증의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엘리야는 이세벨이 죽이려 하자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찌할 바를 몰라서 우울해하고 고독에 빠진 것입니다.
③불 신앙이 엘리야를 우울증으로 고독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갈멜산에서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엘리야는 깜빡 잊어버렸습니다. 아무도 없고 자기 혼자만 이 널따란 광야에 버려진 것 같습니다.
우리도 이런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혼자 버려진 것 같은 고독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람들은 버리고 떠나갔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 곁을 안 떠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시27:10절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할/ 사람은 홀로 있기에 고독한 것이 아닙니다. 홀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독한 것입니다.

▶스위스 깊은 산 속에 할머니 한 분이 홀로 살고 계셨는데 관광객이 지나가다가 묻기를 '이 산 속에 혼자 살면서 얼마나 외로우십니까?' 이 때 할머니가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나 홀로 살지 않아요. 하나님이 늘 내 곁에 계시지요' 그러니까 우울증에 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면 엘리야처럼 우울증에 걸리지 않습니다.

④엘리야를 보면서 우리가 돼새겨야 할 신앙의 부분은 무엇인가?
⑴내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그러나 엘리야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팔백오십 명을 무찌른 것은 엘리야의 신앙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의롭고 도덕적으로 산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나를 통해서 온전히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것 이라는 신앙을 갖기를 바랍니다.
⑵완벽주의는 금물입니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사백 오십 인과 아세라 선지자 사백 인을 다 죽이면 악한 세력이 없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알과 아세라는 또 나타났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끊임없이 바알과 아세라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삶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다고 해서 내일부터는 영원토록 문제가 없을까요? 오늘 내 자식의 어려운 문제 해결하면 평생 문제없이 효도만 잘할까요? 사람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어려운 문제들이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랍니다.
⑶남과 비교하자 맙시다! 엘리야는 '하나님 저는 열조보다 낫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너는 너의 조상보다 똑똑해야 된다.'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할 때도 너는 누구보다 잘나야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선택하셨습니다.
문제는 내가 남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과 비교하는 것은 분명 시험에 빠집니다. 나는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5.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고독에서 벗어날까요?

 

①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십시오,
사43:1-3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본문 5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은 우울증에 빠진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로뎀나무 밑에서 자고 있는 엘리야를 어루만지셨습니다. 그리고는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을 준비해 놓으시고 엘리야를 먹이십니다.
여기서 떡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물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절망과 고독에 빠져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오셔서 새 힘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요21장을 보면 실망한 베드로가 일곱 제자와 함께 갈릴리 바다에서 다시 고기잡이로 돌아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는 한 때는 믿음이 하늘을 찌를 듯 좋았지만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그들에게 오셨는데도 베드로는 그 옛날 솜씨를 살리려고 갈릴리 바다에 가서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못 잡고 아침이 되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언덕에 나타나셔서 '얘들아! 고기가 있느냐?'고 묻자 '밤새도록 잡았지만 한마디도 못 잡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신 지 몰랐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고 하십니다. 오른편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보호입니다. 베드로가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큰 고기가 153마리나 나옵니다. 그때서야 요한이 예수님이심을 알아보고 '주님이시다.'고 소리치자 그때야 베드로가 옷을 감고 물에 뛰어 내려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벌써 숯불에 고기를 얹어놓고 떡도 얹어 놓고 그들에게 먹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때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왜 나를 떠났느냐?'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직접 찾아오셔서 새로운 도전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엘리야에게도 하나님이 오셔서 떡과 불을 주시면서 힘내라고 하십니다. 오늘 고독에 빠지고 우울증에 빠지고 절망에 빠진 자 있으면 하나님 앞에 다시 새 힘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②로뎀나무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로뎀나무는 수리아 팔레스타인 사막지대에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인데 뿌리가 깊은 나무이기 때문에 사막에서도 죽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굳세게 자라나는 나무입니다. 이런 뿌리깊은 나무 밑에서 상황에 흔들리는 엘리야의 나약한 모습은 대조를 이룹니다.
삭개오는 뽕나무에서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뉴톤은 사과나무 밑에서 만유인력이라는 만고의 진리를 발견하여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어떤 여인이 병든 남편을 두고 도망가다가 피곤하여 길가에 앉았는데 그 때 도마뱀이 먹이를 물고 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여인은 도마뱀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꼬리를 떼어버리고 도망을 갑니다. 그래서 쫓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도마뱀이 바위틈에 몸이 아파 벌렁 누워있는 자기 수컷에게 먹이는 물어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생각했습니다. '아! 나는 병든 남편을 버리고 도망가는 중인데 이 미물은 자기 짝을 이렇게 사랑하는 구나!' 이렇게 깨닫고 다시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깨닫게 하는 나무 밑에서 깨닫지 못 하는 엘리야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로뎀나무처럼 깊은 신앙의 뿌리를 내리십시오, 그리하면 어떤 상황이라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고 합니다.
▶다마레이라고 하는 장군이 적군과 싸우다가 패하여 도망하다가 자살을 하려고 칼을 들어 배를 찌르려고 할 때 개미 한 마리가 앞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큰 먹이 하나를 물고 가다가는 쓰러지고 또 물고 가다가는 또 쓰러지는 것입니다.
다마레이 장군은 그 개미가 하도 신통해서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개미는 69번을 떨어뜨리고 70번째서야 개미굴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다마레이가 크게 깨닫고 외쳤습니다. '나는 이제 겨우 한 번 실패했지 않았느냐?' 용기를 얻어 다시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그는 승리의 장군이 되었답니다. 여러분 절망할 때 고독할 때 로뎀나무아래로 오십시오!
⑴로렘나무 그늘 밑은 안식의 처소입니다.
엘리야는 그 나무 그늘 아래서 쉼을 얻었습니다.
⑵로렘나무 그늘 밑은 하나님을 만나는 처소입니다. 엘리야는 천사가 준 음식으로 기운을 회복하고 그 힘에 의지하여 40일을 걸어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러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 뵈옵고 새로운 계시를 받아 선지자로서의 용기와 비전을 다시 회복했습니다.
▶로뎀나무 그늘 밑은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입니다. 교회는 말세지말에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교회가 피난처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교회다운 구실을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환란 만날 사람들이 많습니다. 쫓기고 쫓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며 쫓기도 하며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사기를 치기도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한때는 내가 쫓는 자가 되기도 했다가 내가 쫓기는 자가 되기도 합니다. 빚을 독촉할 때가 있는가 하면 빚을 받을 자에게 독촉을 당하고 위협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도저히 이 세상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끌어안고 오는 사람들에게 '기도하다 해결 받는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 곳이 바로 피난처인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참 행복한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병으로부터 환난으로부터 피난처가 되어야 되고 모든 쫓기는 입장에서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그런 교회가 돼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멘!?
⑶로렘나무 그늘 밑은 지상 교회의 상징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음껏 쉴 수 있는 작은 로렘나무 아래 모인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곳은 우리가 마음껏 쉴 수 있는 십자가의 그늘입니다. 이곳은 우리들의 마음의 울분과 불안을 마음껏 털어놓을 수 있는 아버지의 품속입니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고 하늘의 약식을 공급하신 것을 약속합니다. 이 로렘나무는 교회의 그림자입니다.
⑷이 로렘나무 그늘 밑은 다시 사명을 붙드는 처소입니다. 8절을 보세요!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호렙산은 어떤 산인가? 사명을 받는 산입니다. 모세가 이 산 아래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을 받았습니다.
⑸어떤 사명을 받았는가? 15-16절입니다. 호렙산에 이른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굴 입구에 서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새 사명은 현재의 왕을 폐하고 새 왕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이는 혁명인 동시에 역사의 장을 바꾸고, 문화의 기틀을 다시 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집권자에게 들키는 날에는 생명을 부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목숨을 내건 사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목숨을 걸고 그 분의 명령을 지키는 자의 앞길은 절대적으로 책임져 주십니다. /할/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같이 중대한 사명을 엘리야가 승리를 거듭할 때 주지 않고, 오히려 죽기를 호소할 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만약에 승리의 흥분 에 잠겨 있을 때 이 사명을 주셨다면 그는 자기의 힘으로 하려고 했을 것이고 따라서 교만하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절망해서 절대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손에 붙들려야만 비로소 그 일이 가능했기 때문에 로뎀나무에서 그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절망하여 로뎀 나무 아래 있을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요 축복의 기회였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6. 엘리야를 회복시키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⑴마10:29절에 '참새 한 마리에도 관심을 가진 분'이십니다. 새 중의 가장 작은 새는 참새입니다. 그래서 참새는 사람들의 안중에도 없습니다. 가장 작다는 표현을 우리는 '새 발의 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중에는 그 참새 한 마리의 존재도 귀히 여기시고 계획을 하시고 먹이십니다. 참새가 죽고 사는 문제는 사람들에게는 안중에도 없으나 하나님은 그것조차도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 말은 우리의 하찮은 일과 작은 고민들도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생각, 나의 고민, 나의 애환을 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은밀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⑵마10:30절에 그 분은 우리들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신 분'입니다. '세신 바 되었다'는 말은 완료형입니다. 그 말은 '이미 옛날에 내가 하나님을 알기 전부터 우리를 살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머리털은 숫자가 많습니다. 많기 때문에 하루에 보통 50여 개씩 빠집니다. 사람들은 빠지는 머리털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빠지는 머리칼까지도 관찰하신다는 말입니다. /할/
⑶눅21:2절 이하에 보면, 그 분은 '과부의 두 동전을 크게 보시는 분'이십니다. 두 렙돈은 당시 가치 중 가장 낮은 액수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200백 원 정도로 사람들이 하찮게 무시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도 기억하신다고 하십니다. 작은 충성도 돋보기를 쓰시고 크게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게 가진 것이 많은데 인색하게 드리는 것은 자랑할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드릴 것이 없다면 몇 푼의 헌금 즉 참새 한 마리 값의 헌금이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내 마음을 다 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위대한 승리를 했습니다. 그런 그가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이 죽인다는 소리를 듣고 그만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절망과 고독과 우울증에 빠져 광야로 도망갔다가 한 로렘나무 그늘 아래서 하나님의 천사의 도우심으로 다시 힘을 얻고 호렙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어제만 해도 신앙이 샘솟다가 오늘 한 사건 속에 빠지면 엘리야처럼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로렘나무 그늘 밑으로 가야합니다. 그곳이 바로 여기 하나님의 집 참 행복한 교회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새로운 도전을 받는 자리요, 새로운 능력을 얻는 자리입니다. 우리 모두 이 자리에서 엘리야가 만난 하나님을 만나십시다. /아멘!/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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