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좇아 살 것인가? (롬 8:5-15)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배가 고픈 호랑이가 산중에서 여우를 만났습니다. 호랑이는 배고 푼 김에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 여우를 잡아먹고자 덮치려고 합니다. 여우는 큰일이 났습니다.
그래서 한 꾀를 생각해 냈습니다. '호랑이 형님! 잠깐 기다리시오! 내가 이 산중에 제왕으로 있는데 나를 잡아먹으면 아마 큰 소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호랑이가 생각하기를 제 딴에는 자기가 이 산중에 제왕으로 알았는데 이 여우가 제왕이라니 약간 혼란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묻자 여우는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내 뒤를 바짝 붙어서 따라오십시오! 산 속에 있는 짐승들이 벌벌 떨 것입니다.'
호랑이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여우의 뒤를 따라 산 속을 따라 다녀보았더니 아닌 게 아니라 모든 짐승들이 다리야 날 살려라 도망을 칩니다.
이때 여우가 '보셨지요! 형님 제 체면도 있으니 한번만 봐 주십시오!' 호랑이는 여우의 말을 듣고 여우를 놓아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산 짐승들이 누구를 보고 도망갔을까요? 여우를 보고 도망간 것이 아니라 여우의 뒤를 바짝 따라온 호랑이를 보고 도망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약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권세가 크고 무섭습니다.
이 사실을 바로 깨달은 사도 바울은 롬8장에서 제일 먼저 선포한 말씀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 '부부와 같이 몸이 둘이지만 마음이 하나인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예수를 신랑으로 성도를 신부로 비유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과 우리와의 사이에 가장 깊은 관계를 묘사한 말씀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란 말은 사도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말입니다.
본문 1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좌함을 받지 않는다"고 했고, 고후5;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두 아들과 함께 공원을 한가롭게 산책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벌 한 마리가 날아와서 큰 아이의 얼굴 주변을 맴돌면서 윙윙거리기 시작하자 큰 아이는 무심결에 벌을 쫓는다고 손을 내저었더니 깜짝 놀란 벌이 갑자기 큰 아이의 눈덩어리에 따끔하게 침을 쏘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큰 아이는 퉁퉁 부어오른 눈언저리를 손으로 쥐고서 아파 죽겠다고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런데도 벌은 이번에는 작은 아이의 얼굴 주변을 어른거리기 시작하자 아이는 겁을 먹고 아버지 뒤에 숨으면서 말하기를 '아빠! 벌이 나를 쏘려고 해요' 그러자 아버지는 '얘야, 겁먹지 말아라. 이미 저 벌은 네 형을 쏘았기 때문에 그 벌에는 더 이상 침이 없단다. 너를 쏘려고 해도 쏠 수가 없단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큰 아이의 얼굴에 박혀있는 벌의 침을 뽑아내어 작은 아이에게 보여주면서 '보아라. 여기 벌의 침이 있잖니! 저 벌이 너를 위협할 수는 있지만 더 이상 침으로서 너를 해치지는 못한단다.'
여러분! 죄의 침은 사망, 곧 죽음입니다. 그러나 죄는 무서운 침을 이미 쏘아버렸습니다. 죄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침을 쏘았습니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죄는 사망의 침을 이미 쏘았기 때문에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사망의 침으로 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15;55절에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새로운 피조물로 정죄 받지 않는 새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정죄'는 법정 용어로서 '당신은 이런, 이런 죄를 졌으므로 죄인이기에 몇 년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정하는 것이 정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우리의 죄의 값을 치르셨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이 없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의 값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할/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내 안에 있는 육신의 법, 육신의 본능을 이길 수 있는 두 가지 비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1절에서 말하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악한 원수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수 마귀가 우리를 정죄할지라도 우리는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그 두 번째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하기 때문입니다. 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성령이 내게 임하면 이 성령의 권능이 나를 괴롭히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시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와 사망의 법의 통치를 받는 불쌍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른 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저주에서부터 해방되는 구원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입니다. 이것은 소속감을 의미합니다. 전에는 우리가 마귀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소속이 달라진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탈북자들이 많이 넘어 왔는데 그들이 북한 땅에 있는 동안 그들은 북한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필사의 노력을 해서 휴전선을 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은 북한의 모든 사슬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전에는 죄와 사망의 종으로 살았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살게 되니까 정죄함도 없고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바울은 영을 좇아 사는 사람들이 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제목 소개!▶
사람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육을 좇는 사람과 영을 좇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육을 따라 사는 사람이 있고,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육의 사람, 영의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육신을 좇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루 종일 육신의 일만, 즉 세상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는가? 무엇을 좇아 사는가?'에 따라 우리가 누구인지가 결정됩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24시간 동안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24시간 동안 세상을 생각하면 세상 사람입니다.
교회 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시간 예배드리고 나서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영을 좇은 사람은 영의 일만 생각합니다. 산에 가서 기도만 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직장에 가서 열심히 일하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돈을 벌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세상일에 얽매여 바쁘지만 틈만 나면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너무 좋아서 혼자 미소를 짓습니다. 그러나 육신을 좇는 사람은 육신의 생각만 합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만 생각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5절에서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6절은 5절의 결과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여러분 무엇을 좇아 살겠습니까? 사망의 길을 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육신을 좇아 사십시오. 아니면 생명과 평안을 원하십니까? 영을 좇아 사십시오, /할/
여기 '생각'이란 말은 '마음'이란 단어와 똑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한다.'는 말은 '마음을 두다, ∼∼에 애착을 둔다.'는 뜻입니다.
▶생각이 인생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선하게 되거나 악하게 되는 것이 남에게나 환경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의 운명은 그 생각이 결정합니다. '선하게 살아야지' 하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 됩니다. '내가 공부해야지'하는 생각 때문에 공부를 하게 됩니다. '남에게 사랑을 베풀어야지'하는 생각이 마음 속에서 우러나면 그 사람은 남에게 선과 자비를 베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생각이 바로 그 사람을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아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생각이 주님과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생각이 같았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다윗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윗을 보고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인데 하나님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말은 그 생각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다스리시면 우리의 인격전부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내 생각 따로 있고 하나님의 생각 따로 있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가 없습니다. 우리 속의 모든 생각을 다 주님께서 지배하시고 다스리시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자기 욕심의 본능을 따라 삽니다.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정욕에 매여 삽니다. 교만과 욕심 더러운 마음에 매이면 결국은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육신을 쫓는다'는 것은 항상 육신의 정욕을 생각하고 그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엄청난 복은 곧 생각하나의 차이입니다. 내가 믿는다는 것은 믿음을 생각하는 것이고 내가 산다는 것은 예수를 생각하는 것이고 이것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생각을 마음에 심느냐에 따라서 열매 즉, 운명이 달라집니다. 생각은 씨앗과 같아서 행동으로 싹이 나고 습관으로 뿌리내리고 품성을 자라서 인격이라는 열매를 맺고 운명이라는 결과를 추수하게 됩니다.
우리가 '회개한다'는 말도 '생각을 갈아넣는다'는 뜻입니다. 생각을 바꾸어 넣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가 잘못 가는 길에서 돌아서는 것은 생각이 바뀌어야 가능합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고는 불의한 길에서 돌아 설 수가 없습니다.
사55:7절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려면 먼저 불의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행복한 사람, 불행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행복한 사람은 항상 행복한 것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해지고 불행한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해집니다. 행복과 불행은 환경으로 인한 것이 아니요, 자기의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에 애착을 둡니다. 세상일에 보다 애착을 두게 됩니다. 영을 좇는 사람은 성령의 일에 애착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에 애착을 두고 하나님의 사업에 애착을 둡니다. 바울은 골3:2절에서 우리에게 당부하기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삶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그 결과 죄와 사망이 그 삶을 지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나 영을 따르는 삶은 정반대의 모습을 하게 됩니다. 성경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갈5: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영의 사람들은 생명과 평안을 잃지 않기 위해서 육신의 일을 포기해야 합니다. 욕망을 따라 행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1. 육신의 일을 생각했을 때 어떤 결과가 옵니까?
①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6절은 단언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갈5:21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②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사람과 사람 사이도 원수를 맺고 사는 것은 좋은 일이 못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원수진 일이 있으면 풀라고 했고, 바울도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헐벗거든 입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과 원수를 맺고 살 수 있겠습니까?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은 7절의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과 원수 맺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③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2. 그런데 영의 생각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오는가?
①생명의 복을 주십니다. 생명 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은 생명이 우리 안에 있기에 오늘 이 자리에 나오는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온 천하를 얻어도 생명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②평안의 복을 받습니다. 세상 살면서 제일 큰복은 평안의 복입니다. 복중에 복은 평안입니다. /아멘!/ 대부분의 사람들의 육체나 정신이나 영혼까지도 평안을 잃을 때 병드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평안을 잃은 사람의 얼굴을 보십시오, 의욕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매사가 폐쇄적이고 부정적입니다.
여러분 평안이 없습니까? 영을 좇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6절에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영을 좇아 살면서 마음에 평안, 가정의 평안, 삶의 평안이 넘치는 생활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할/
▶어느 장로님이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사업 상 어떤 불이익이 와도 일요일은 골프를 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왜 이런 고백을 했겠습니까? 지난날 성령의 생각대로 따르지 않고 주일날 장로가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데 사업상 어쩔 수 없이 골프 모임에 가서 골프를 쳤지만 자기 마음에 평안이 없다는 것을 체험했기에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가끔 주일 예배를 빼먹고 가족이 모여, 산으로, 들로, 바다로 소풍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들을 보면서 성령께서 얼마나 탄식하시겠습니까? 성령이 탄식하시는데 그들의 마음이 평안할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의 사람입니다. 성령이 이끄는 대로 살면 가정도 축복이 따라옵니다. 6절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아멘!/
③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받습니다(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절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됩니다.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을 나의 생명의 구주로 바로 영접해야 합니다. 요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권세가 큰 권세입니다. 이 권세로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믿/
3.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영을 좇아 사는 길입니까?
①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살아가는 길입니다.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길이나 간다고 해서 목적지에 도착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는 길이 있고, 사는 길이 있습니다. 성도는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살아야 하늘로부터 영적인 큰 평안을 얻고, 살아가는 길에 걸림돌이 없게 됩니다.
시119:165절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할/ 이 복이 큰복입니다. 여러분 왜 사람들이 무너지고 망합니까? 바로 인생의 길목에 장애물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이, 어떤 사람은 자식이, 어떤 사람은 물질이,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면 하나님이 다 교통정리 해 주십니다.
사람은 항상 법을 어길 때 문제가 됩니다. 교통 법규도 어기면 사고가 납니다. 조금 빨리 가려고 신호등을 무시한다든지 또 쉽게 가려고 중앙선을 넘어서 달리다 보면 아주 빨리 저 세상으로 가게 됩니다.
신앙에도 지켜야 할 법도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마음속에, 생활 속에 신앙의 빨간 신호등이 켜질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3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할 때 신앙의 신호등이 켜졌습니다.
그러나 새벽에 닭울음소리에 베드로는 통곡을 했습니다. 그 통곡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수제자가 된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는데 그 풍랑이 요나에게 신앙의 신호등입니다.
발람이라는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다가 그의 당나귀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이 신앙의 신호등을 켰습니다.
신앙의 신호등을 무시하고 살아가다가 패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도 신앙의 신호등을 무시하고 신앙의 중앙선을 넘어 달려가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법도대로 사는 것이 영을 좋아 사는 길이요,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축복의 비결입니다.
시119:105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아가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영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②하나님 편에서 사는 자가 영을 좇아 사는 자입니다.
수24장에 이스라엘이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에게 큰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은 점령했지만 앞으로 그 땅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신앙의 진로가 걱정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모아 놓고 여호수아가 당부한 내용이 14-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한마디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편에 서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까?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때는 하늘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시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 편에 설 때는 3년 6개월이나 닫힌 하늘 문도 열어주셨고, 응답의 복도 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도 마25장에서 우편과 좌편을 구별하시고 재림하실 때는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별하듯 하는데 우편에는 양을, 좌편에는 염소를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편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 '복 받은 자들이여,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으라'고 했습니다.
우편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성령 님이 계신 곳이요,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줄을 잘 서야 합니다. 정치판만 줄을 잘 서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도 줄을 잘 서야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어떤 시련과 고난과 역경의 바람이 불어올지라도 하나님 편에서 사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주님이 붙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바로 영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다. /할/
③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이 영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⑴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고, 성령의 인도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원래 아버지란 말은 '생명을 주신 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육신의 생명을 주신 분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예수 믿는 것들은 촌수도 없는 상놈들'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런 말을 합니까? 아버지도 아들도 손자도 똑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고 상놈들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도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무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경은 영의 촌수가 없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히12:9절에 '모든 영의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⑵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때, 어린애들처럼 기쁘게 아버지를 부르며 섬겨야 한다는 교훈이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⑶사랑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러야 합니다. /할/
갈5: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좇아 살 때 이런 능력이 나타납니다.
⑴세상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 행1: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권능을 받아야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⑵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됩니다(15).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여기서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양자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책임지듯 하나님도 하나님의 자녀만 보호하시고 축복의 상속자로 삼아주십니다.
고대 헬라 로마에서는 양자의 제도가 널리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양자란 법적으로 당당한 아들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친아들과 똑같은 권리가 있습니다. 당시 로마의 법에 따르면 양자는 양부의 재산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모든 지휘까지 상속받습니다. 아버지의 것이 다 아들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무수한 보화가 다 우리들의 것입니다. /믿/
▶그뿐만 아닙니다. 성령을 좇아 살 때 어떤 현상이 또 일어나는가?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성령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가 말할 수 없이 우리의 삶 속에 충만한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저 공기 속에 산소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 공기 속의 산소를 사람들이 마시고 살아갑니다. 또 식물들과 물 속의 물고기들조차도 그 산소를 마시고 숨을 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산소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으나 참 중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 하늘에는 온갖 전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물론 전파도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전파들이 온갖 정보, 소리, 화면, 뉴스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공중에 떠 있는 전파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이 세상에는 성령의 열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성령이 하시는 일 가운데 또 중요한 일은 '눈을 뜨게 하는 일'입니다.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해서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보게 하고, 믿게 하고, 체험하게 하십니다.
⑶자기 자신을 보게 하십니다. 이 눈이 열리기 전에 자신을 보면 모두 자기위주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만하고 자만하고 큰소리치게 됩니다. 남의 흉만 보게 됩니다. 자신을 보는 눈이 아직 뜨여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뜨게 하신 눈으로 자신을 보면 자신의 무능이 보이고 무지가 보이고 죄가 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무능하면서도 교만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호언장담하던 사람입니다. 그 말은 그만큼 그는 자만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기질을 타고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그리고 곧 바로 그는 실수하고 실패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나서 비로소 그는 자신을 보는 눈이 활짝 뜨였습니다. 그 뜨인 눈으로 자신을 보니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초라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예수께 대답하기를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하고 고백했습니다.
또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바울도 예수를 만나기 전에 얼마나 기고만장했습니까? 그래서 유대교에 충성하기 위해서 얼마나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섰습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바울은 자신이 가장 의로운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그가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바울이 이 신비의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그 뜬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봅니다. 바라보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자시의 모습이 엉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까지 추구하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 이제는 예수를 전하는 사람으로 일생을 바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이 눈을 떠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바르게 진단해 보고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까지 가야 새 사람이 되고 진실한 신앙인이 됩니다. /아멘!/
⑷남을 보게 하십니다. 성령은 나 자신을 보게 하는 것 뿐 아니고 남을 보는 눈도 뜨이게 하십니다. 이 눈을 뜨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을 보는 눈이 뜨이면 그의 영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이 눈이 뜨여야 신앙이 성숙해 집니다.
이 눈을 뜨고 보니까 남이 아픔이 보이고 남의 필요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봉사자가 되고 구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이해하는 자가 됩니다. 신앙의 성숙입니다. /할/
⑸깊은 곳을 보게 하십니다. 이 눈을 뜨게 되면 평소에는 생각도 없고 개념도 없고 관심도 없던 것들이 신기하게도 눈에 보이고 눈에 들어옵니다.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이 성령의 인도를 받고 보니 그것이 눈에 보입니다. 생각이 납니다. 느끼게 됩니다. 깨닫게 됩니다. 감동으로 비추어집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해서 깊은 의미를 알고 깨닫고 보게 하십니다.
구약의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애굽으로 노예로 팔려 갑니다. 가서 온갖 수난을 당하고 살다가 마침내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산전수전 다 겪은 후에 요셉은 마침내 애굽의 총리로 나타납니다. 말이 쉽지 그 과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눈앞에 자기를 노예로 판 형들이 나타났습니다. 순간 눈에서 불이 났을 것입니다. 형들이 자기를 알아보고 떨고 있습니다. 당연히 떨일 입니다. 지금 요셉이 말 한마디면 자신들은 말 한마디 못하고 죽을 판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 형들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습니다.
이 대목이 요셉 이야기의 하이라이트입니다. 그때 형들을 대하는 요셉의 모습이 요셉의 인생가운데서 가장 극적인 장면입니다. 그때 요셉이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45:48절을 보면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으로 팔았다고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또 창50:20절을 보면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이 대목을 보면 요셉의 진면목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지난날의 고난을 해석하는 이 혜안이 얼마나 깊습니까? 요셉은 깊은 곳을 내려다보는 통찰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눈이 열린 눈입니다. 열려도 그냥 열린 것이 아니고 활짝 열렸습니다. 그때 요셉의 눈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형제들은 그 날 요셉의 손에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열린 눈으로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역사를 보았고 자신을 그런 과정을 거쳐서 여기까지 먼저 보내신 이유를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복은 하나님이 도우시는 손길을 보는 눈을 가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언제나 이렇게 조용히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지도 모르고 우연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우연과 섭리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⑹이 때부터 헌신과 봉사의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납니다.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 마음이 뜨거워지고 기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일어나며 충성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할 때 그 성령 님이 우리 인생 길에 스승이 되어 주십니다. 요14: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기도하는 것이 생각나게 됩니다. 충성할 것이 생각나게 하십니다. 잘못된 길을 갈 때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성령을 좇아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이것이 바로 영을 좇아 사는 자의 생활입니다. /할/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될까요?
⑺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어 주십니다. 인간의 사고는 부정적이며 제한적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할 때 10명은 인간적 사고로 판단하다가 망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주신 사고를 하게 되면서 약속의 성취를 보게 되었습니다.
⑻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됩니다. 인간의 가장 큰 본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좋은 인생을 사는 길이며 인생이 왜 사는가에 대한 궁극적인 목적을 제대로 발견하면 나머지 문제는 저절로 해결이 됩니다.
마6: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할/
⑼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큰복입니다. 원래 우리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을 사모하며 살게 만드셨습니다. 전3:11절 "하나님이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런데 죄가 이 은혜를 무너지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다시 회복이 됩니다. 시107:9절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할/
⑽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갈5:22-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④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영의 사람입니다.
환란 날에 성도가 살길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히11:6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⑴그러나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요일4:5절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⑵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요일3:9절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일5:4절을 보세요!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⑶믿음의 사람들은 자기 관리가 잘 되어야 합니다. 유다서 20-21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사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아멘!/
⑷모든 것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려도 믿음으로 드려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오직 믿음의 관계입니다. 세상은 수단과 방법으로 살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일 만큼은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물질이 있다고 봉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이 있다고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어야 충성하고, 헌신, 순종, 봉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좇아 살기를 소원합니다. 믿되 큰 믿음으로 살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믿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주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것이 영을 좇아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좇아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 땅에 많은 길이 있을지라도 생명으로 가는 길, 평안으로 가는 길, 축복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한 길 뿐입니다.
영을 좇아 살아가는 길입니다. 영을 좇아 살 때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영을 좇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사십시오, 하나님 편에 서십시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믿음을 좇아 살아가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이 형통한 복을 주실 것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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