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무엇이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가?
본문: 롬 16:1-16
롬 16:1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요 우리의 자매인 뵈뵈를 여러분에게 추천합니다. 2 여러분은 성도의 합당한 예절로 주님 안에서 그를 영접하고, 그가 여러분에게 어떤 도움을 원하든지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고, 나도 그에게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4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해 준 사람들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이방 사람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5 그리고 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도 문안하여 주십시오.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를 믿은 첫 열매입니다. 6 여러분을 위하여 수고를 많이 한 마리아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7 나의 친척이며 한 때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사도들에게 좋은 평을 받고 있고,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입니다. 8 주님 안에 있는 나의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10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을 받는 아벨레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아리스도불로의 가족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11 나의 친척인 헤로디온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주님 안에 있는 나깃수의 가족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12 주님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주님 안에서 수고를 많이 한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13 주님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14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15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네레오와 그의 자매와 올름바와, 그들과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16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2015년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저는 엄청난 은혜를 받았습니다. 힘은 많이 들었습니다. 큰 터널을 빠져나오는 기분입니다. 그저 설교를 듣기만 했던 분들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제가 쓴 설교문을 보면서 어이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만드느라 그렇게 고생했던 말이야?’ 그러나 그렇게 일년을 보낸 지금 로마서는 제 삶을 또 한번 뒤집어 놓고 있음을 느낍니다. 놀라운 구원과 생명의 주님이 그렇게 분명하고 실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년 내내 로마서를 묵상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묵상한 내용의 십분의 일도 다 설교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만약 일년동안 로마서 강해설교를 들었는데, 별로 남는 것도 없고 삶의 변화도 없다면, 30-40분 설교 듣고 한 주간 살고 또 30-40분 설교 듣고 또 한 주간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언제 시간을 내어 새번역 성경 로마서를 펴 놓고 올해 일년 강해설교를 이어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가 여러분의 인생을 변화시켰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서 마지막 장인 16장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인사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에서는 26명의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며 문안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언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생소한 이름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도 은혜가 있습니다. 이 인사를 통하여 로마교회가 어떤 교회였는지 알 수 있으며, 교회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인사에 눈에 뜨이는 이름이 있습니다. :13에 나오는 루포와 그 어머니가 그렇습니다. 루포라는 이름이 낯익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던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이 루포였습니다.
막 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
구레네 시몬을 말할 때, 굳이 아들들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그 아들들이 초대교회 당시에 교인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구레네 시몬의 아들 루포가 바로 로마서에 나오는 루포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인사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로마 교회가 인종이나 계층 또 성별 면에서 참으로 다양한 구성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도 있고 많은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노예들도 있었고 귀족들도 있었습니다. :10 아리스도불로는 많은 학자들이 헤롯대왕의 손자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고, :11의 헤로디온도 역시 헤롯대왕 가문과 연결된 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가장 어울릴 수 없는 이들, 도저히 하나 되기 어려운 사람들이 한 교회, 하나된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되기 어려운 이들이 하나되는 곳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뵈뵈라는 여성을 처음 언급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사도바울이 쓴 로마서 편지를 직접 로마로 가지고 가서 교회에 전해준 사람이 뵈뵈입니다. 본문에 총 9명의 여성이 등장합니다. 전체 3분의 1입니다. 바울이 살고 있던 시대는 유대인 남자들이 아침마다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하며 기도하던 시대였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입니다.
:4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에 대하여는 “그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살려 준 사람들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7에 나오는 안드리니고와 유니아는 함께 감옥에 갇혔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핍박의 시대, 고난의 시절을 함께 보낸 당시 성도들의 분위기였습니다.
여러분은 함께 고난을 받았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지금이 핍박의 시대라면 우리는 오늘 서로를 끌어안고 울 것입니다,
중국교회 지도자들을 만날 때, 일본 교인들을 만날 때, 그렇게 좋은 이유는 고난입니다.
북한 지하교인을 만나면 우리는 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바로 믿으려 한다면 어려움을 각오해야합니다. 이 시대의 영적인 어려움은 핍박의 시대 보다 결코 못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정말 믿음으로 살았다면 지금도 만남이 감격일 것입니다,
영성일기를 읽으면서 울 때가 있습니다.
치열하게 믿음으로 살아보려는 싸움을 보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회에서 만나도 데면데면하다면 믿음으로 치열하게 살지 못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주님 앞에 설 때를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주님으로 인하여 고난당한 사람이 가장 복되다 여김 받고 감사할 것입니다. 로마 교회에서 고난당한 성도는 어떤 대접을 받았겠습니까? 불쌍하고 복도 없는 사람이라 여겨졌겠습니까? 가장 귀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15을 보면 네레오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에 대하여 전하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도미티안 황제의 사촌인 집정관 클레멘스의 비서였습니다. 클레멘스의 아버지는 네로 황제 때, 로마의 대회재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덮어 씌웠고 무자비하게 박해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 클레멘스는 기독교인들이 고문당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원형 경기장에서 야생동물들에 던져져 몸이 갈기갈기 찢기면서도, 또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서 죽어가면서도 이들은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죽어가면서도 찬양하게 하는 것일까, 기뻐하게 하는 것일까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고민하던 그는 기독교인들을 접촉해 복음을 듣게 되었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던 것입니다. 이 일을 뒤에서 주선한 사람이 바로 네레오였다는 것입니다.
로마 교회는 이처럼 아내와 남편 자녀를 잡아가고 죽이던 원수까지 받아들이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한국도 손양원목사님이 계십니다.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 삼았습니다.
기독교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용서와 사랑의 사람입니다.
이 말씀이 이루어진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한 몸 공동체입니다.
로마 교회 안에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된 요인이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도대체 무엇이 모든 것을 초월해서 하나가 되게 하였으며, 서로 사랑하게 만들었을까요?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을 보면 ‘주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 라는 말이 9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로마 교회는 그저 하나의 기관이나 조직체가 아니었습니다.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로마 교회 교인들은 로마서를 읽기 전에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복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롬 15:15 그러나 내가 몇 가지 점에 대해서 매우 담대하게 쓴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서, 여러분의 기억을 새롭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로마 교회가 이처럼 놀랍게 하나된 것이 그들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들이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정말 십자가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인지는 교회를 통하여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이 진정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그 사람이 공동체 내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하나되는 열쇠는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롬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여러분, 어느 교인이 싫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빌립보 교회 여성 지도자들이었던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하신 말씀이 그 해답입니다.
빌 4:2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가지라!”
그렇습니다. ‘주 안에’ 있으면 누구와도 하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 하시면서 우리가 영적으로 메말라지는 원인이 주 안에 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요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영적으로 메말랐기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율법주의자가 비판하고 정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 임재 안의 교회] 라는 책을 썼는데, 그것은 선한목자교회를 10년 동안 목회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성경대로 믿음의 실험을 했던 보고서입니다. 한국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참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너무나 큰 장벽 앞에 선 느낌이며, 무거운 돌덩어리에 눌린 느낌입니다. 과연 이 땅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울 수 있을까요? 이런 갈급함을 가지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교회가 새로워지는 비밀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주 안에 거하기를 힘쓰라!”
초대 교회는 문제가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에 의한 핍박,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구제로 인한 히브리파 그리스도인과 헬라파 그리스도인 갈등,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이단 등, 그런데 오히려 더욱 든든하게 세워졌습니다. 그것은 오직 부활의 주 예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많은 문제를 통하여 오히려 복음의 영광이 강하게 드러났던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회복해야 할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당회로 모입니다. 당회는 교회 리더들을 세우는 중요한 회의입니다.
교회 일꾼을 세우는 것은 내적인 교회를 건축하는 일입니다. 예배당 건물을 건축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될지는 어떤 리더를 세우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리더를 세울 때, 잘해야 합니다.
큰 교회를 세우려면 행정의 은사가 있는 성도, 말을 조리 있게 잘 하는 성도, 리더쉽이 있는 성도, 공부를 많이 한 사람,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 몸인 교회를 세우겠다고 한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재능이나 능력 있는 교인들이 없으면 답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재능과 능력은 많으나, 주님 안에 거하지 못하는 지도자들 때문에 문제가 되는 교회는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가장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을 꼽으라면 가룟 유다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여러분은 사랑으로 소문났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힘들다, 어렵다, 답답하다” 고 말합니다.
하바드대 교육대학원 죠세핀 김 교수 왜 다 들 ‘죽겠고 미치겠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살자가 많고 정신병 환자가 많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고생이 고생인지 모르고 삽니다.
예수님을 믿고도 ‘힘들다 죽겠다’가 입에 달리면 예수님을 교리로만 믿고 있지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김범석목사님 “여자가 아기를 임신하면, 자궁에 태아가 착상되는 순간부터 여자의 몸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납니다. 감정에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주님이 임하시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몸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변화됩니다. 마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감출 수도 꾸밀 수도 없습니다.
만약 주님을 영접하고도 마음의 변화, 삶의 변화가 없다면 죽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주 예수님과 동행할 때, 환경 여건과 상관없이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더 이상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고 은밀한 죄가 사라지게 됩니다. 고난이 축복이라고 여겨지게 됩니다.
이런 성도들이 모일 때, 그 공동체를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신부’, ‘성령의 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주님께서 임재하여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 공동체 속에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도록 하나님께서 계획하셨습니다.
:16에 바울이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십시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입맞춤은 무엇입니까? 주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입맞춤입니다.
곧 입맞춤할 수 없는 이를 향한 입맞춤입니다,
혹시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에서 인사할 수 없는 사람,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까? 누구에게나 다 자신에게 아픔과 상처와 억울함을 준 대상들이 있습니다. 조금 심하게 이야기하면 원수 같은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여러분에겐 그처럼 도무지 하나될 수 없는 사람과 하나된 간증이 있습니까?
인도선교사였던 스탠리 죤스는 우리들이 하나되려면 ‘그 무엇’이 아니라 ‘그 누구’를 목표로 해야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교육, 봉사, 찬양, 선교, 그 무엇이 아무리 훌륭하고 고귀한 것이라도 그것으로 모이면 반드시 분열을 가져옵니다. 그것은 기독교 역사 말해 주고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이면 놀라운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서로 다른 것은 오히려 아름다운 조화를 경험하게 해 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 주님 안에 거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왜 영성일기를 쓰게 하시나요?” “복음서와 사도행전, 서신서에서 읽는 그대로 주님과 동행하며 살게 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영성일기를 쓰자고 한지 5년이 지났습니다. 주 3회 이상 일기를 쓰는 이들이 505명, 주 1회 이상 쓰시는 분이 1,080명입니다. 이 정도 교인이 영성일기를 쓰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지금 선한목자교회 분위기입니다. 만약 2,000명이 영성일기를 쓰게 된다면 어떤 분위기가 될까요?
저는 한국교회 새롭게 부흥될 수 있다고 믿어집니다.
고 하용조목사님께서 목회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녹음으로 들었습니다.
“우리 온누리 교회에서 주일 예배 때, 교인들이 손을 들고 찬양하게 하기까지 7년이 걸렸습니다. 큐티를 하게 하는 일은 또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모릅니다. 일대일 양육은 포기하려고 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안 따라오니까. 남자 성도들을 구역장으로 세우는 거 너무 힘들었어요.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고민했을 정도예요. 어떤 사람은 남자 구역장 시키면 다른 교회로 가겠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일대일 양육의 벽이 뚫렸어요. 남자 리더쉽을 세우는 벽이 뚫렸어요. 큐티가 정착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같은 이 교회가 가능해진 거예요.“
여러분, 주님을 정말 믿읍시다.
가정 공동체도 오직 주님 안에 거하기만 힘쓰시기 바랍니다.
속회와 교회 내 모든 소그룹 공동체, 모두 다 주님 안에 거하기만 힘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온전히 서는 것은 다른 교회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다 주 안에 있어 다른 사람의 상처를 품어주고, 복수하고 싶은 사람 용서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여 주는 공동체가 세워지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주님이 그것을 이룹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가 바로 그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됨의 기적 /본문: 롬 15:1-13 (0) | 2022.01.29 |
---|---|
주님이 하셨습니다!” /본문 : 롬 15:14-33 (:14-19) (0) | 2022.01.29 |
절망은 사랑에 대한 배신이다! (시 6:1-10) (0) | 2022.01.29 |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엡 1:3-14) (0) | 2022.01.29 |
너무나 놀라운 약속! (요 14:7-18) (0) | 2022.01.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