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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하셨습니다!” /본문 : 롬 15:14-33 (:14-19)

by 【고동엽】 2022. 1. 29.

제목 : “주님이 하셨습니다!”

본문 : 15:14-33 (:14-19)

 

15:14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 마음에 선함이 가득하고, 온갖 지식이 넘쳐서, 서로 권면할 능력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15 그러나 내가 몇 가지 점에 대해서 매우 담대하게 쓴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힘입어서, 여러분의 기억을 새롭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16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내게 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이방 사람에게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방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실 제물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7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18 그리스도께서 이방 사람들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나를 시켜서 이루어 놓으신 것 밖에는, 아무 것도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 일은 말과 행동으로, 19 표징과 이적의 능력으로, 성령의 권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남김없이 전파하였습니다.

20 나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이름이 알려진 곳 말고,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삼았습니다. 나는 남이 닦아 놓은 터 위에다가 집을 짓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21 성경에 이렇게 기록한 바, "그의 일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요, 듣지 못하던 사람들이 깨닫게 될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22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로 가려고 하였으나, 여러 번 길이 막혔습니다. 23 그러나 이제는 이 지역에서, 내가 일해야 할 곳이 더 없습니다. 여러 해 전부터 여러분에게로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내가 스페인으로 갈 때에, 24 지나가는 길에 여러분을 만나보고, 잠시 동안만이라도 여러분과 먼저 기쁨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의 후원을 얻어, 그 곳으로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25 그러나 지금 나는 성도들을 돕는 일로 예루살렘에 갑니다. 26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사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낼 구제금을 마련하였기 때문입니다. 27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신령한 복을 나누어 받았으니, 육신의 생활에 필요한 것으로 그들에게 봉사할 의무가 있습니다. 28 그러므로 나는 이 일을 마치고, 그들에게 이 열매를 확실하게 전해 준 뒤에, 여러분에게 들렀다가 스페인으로 가겠습니다.

29 내가 여러분에게 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것으로 압니다. 30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그리고 성령의 사랑을 힘입어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나도 기도합니다만, 여러분도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열심으로 기도해 주십시오. 31 내가 유대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화를 당하지 않도록, 그리고 또 내가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구제금이 그 곳 성도들에게 기쁘게 받아들여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32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을 안고 여러분에게로 가서, 여러분과 함께 즐겁게 쉴 수 있게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33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2015년은 주일마다 로마서 강해 설교를 들었던 해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어야 합니까?

로마서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 로마서 강해설교를 들은 사람과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그저 듣고 안 들은 차이입니까? 로마서 강해를 들었는데 아무런 삶의 변화가 없다면 로마서 강해설교를 들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로마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하는 것입니까?

로마서 강해 마지막 부분에 와 있는 우리는 이 관심을 가지고 로마서를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십자가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밝혀주었습니다.

1장부터 8장까지 우리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우리도 함께 죽었으며, 이제부터는 부활하신 주 예수님의 영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9장부터 11장까지 유대인의 문제에 대하여 언급한 다음 12장부터 15장까지 예수님의 새 생명으로 사는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 복음을 자신의 삶에는 어떻게 적용하였는지 지극히 개인적인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때문에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16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내게 주신 것은, 나로 하여금 이방 사람에게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방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실 제물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점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정상적으로 이렇게 할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들은 가족 친지, 친구들로부터 이해받기 힘듭니다. 하물며 사도 바울 당시에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헌신한다는 것은 정말 이해받기 힘들었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 나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을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에서 목베임을 당하여 순교합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할 것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떤 처지가 될 줄 잘 알고 그 길을 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이 사도 바울 자신의 아이디어나 계획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적으로 주님의 부르심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어떤 세상이 되었습니까?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방인입니다. 지금 기독교는 온 세상에 전파되었습니다. 이 같은 세상이 올 줄 사도 바울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 붙잡혀 살았던 것입니다.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라고 하였는데, 사도 바울이 바로 그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8에서 매우 중요한 고백을 합니다.

:18 그리스도께서 이방 사람들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나를 시켜서 이루어 놓으신 것 밖에는, 아무 것도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주의 일을 하는 사역자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이 열심히 충성하는 사람이고, 둘째는 예수님께서 그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후자였습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로마서를 쓴 사도 바울의 삶이었고, 우리가 로마서 복음을 제대로 읽고 들었다면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20에서 분명한 사역의 원칙을 하나 말씀합니다.

:20 나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이름이 알려진 곳 말고,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명예로 삼았습니다. 나는 남이 닦아 놓은 터 위에다가 집을 짓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존심 문제가 아닙니다. 한 민족에게라도 복음을 더 전하려는 열정 때문에 아무도 복음 전하지 않은 민족들에게만 가련다는 것입니다.

 

이방인 선교는 당시 시대 여건 상 불가능한 일이었고 무모한 일이었으며, 늘 중단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요원의 불길처럼 세계로 퍼져갔습니다, 세계사가 그것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처럼 예수님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영성일기 세미나를 인도하러 갈 때마다 느낍니다. 지금 시대에 일기를 쓰고 살아라, 이제부터는 마음 까지 열고 살아라, 하는 세미나이니 얼마나 따분한 세미나이겠습니까? 그런데 누구나 싫어할 것 같은 이 세미나, 얼마나 뜨거운 반응인지, 제가 끌려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부흥회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런 것이라 여겨집니다. 우리가 하려는 일은 될 것 같은데 안 되지만, 주님이 하시는 일은 안 될 것 같은데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후회 없는 삶을 살려면 이처럼 주님이 이끄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 생각에 옳거나 좋아 보이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끄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부관계나 자녀 교육이나 직장생활이나 교회 생활이나 오직 주 예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우리 삶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나로 말미암아 역사하셨다고 간증할 수 있게 됩니다.

 

:22-24을 보면 사도 바울은 로마로 가고자 했고 스페인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은 당시로는 땅 끝이라고 여겨졌던 곳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방향을 틀어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합니다,

:24 그러나 지금 나는 성도들을 돕는 일로 예루살렘에 갑니다.

 

이방인 선교, 이제 막 시작이고 한도 끝도 없는 일인데, 예루살렘 교회에는 왜 간다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항상 주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마음대로 했다면 그는 바로 로마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로마는 당시 세계의 수도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먼저 들렀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께서 이끄시는 삶을 살았음을 말해줍니다.

예루살렘에 큰 기근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마게도니아와 아가야 지역의 이방인 교회가 구제헌금을 모았기에 그것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로 가서 전달한 다음 로마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구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 중심의 예루살렘 교회는 아직 이방인들에 대하여 완전히 마음 문이 열려있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이방인 선교에 대하여 의심하는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정말 주님의 역사일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 아니야?” 게다가 이방인 교인들에게 할례 받아야 한다는 등 율법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강했습니다,

주님은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도 원하셨지만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을 먼저 원하셨습니다, 15장 앞부분에서 살펴보았듯이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흉년든 예루살렘에 이방인 교회의 헌금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됨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길은 매우 힘든 길입니다. 여행이 힘든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마음이 닫혀 있는 유대인들이 힘든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30-:32까지 사도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화를 당하지 않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겠습니까?

사람의 생각으로는 갈 길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주의 성령께서 강권하셨기 때문에 간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다 아는 대로 기가 막힌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도 바울은 로마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안전하게 로마로 오게 됩니다.

 

이제 우리의 문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로마서를 읽었다면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살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시켜서 이루어 놓으신 것 밖에는, 아무 것도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있는 삶은 정말 복된 삶입니다.

 

물론 여러분에게 주님께만 순종하고 산다는 것에 두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저도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복음을 알게 된 후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순종해 보려고 애를 쓰면서 제 삶이 너무나 불안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대학원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부산제일교회로 갔습니다.

안산광림교회에서 초청을 받았을 때, 온 교인들의 허락을 먼저 구했습니다.

창천교회 부흥회를 인도하였을 때, “돌짝밭 길 외면치 않겠습니다.” 고백한 까닭에 선한목자교회로 오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순간순간 제겐 너무나 두려웠지만 오직 주님만 따라 살려 했기에 지금 여기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어제 5살짜리 아기 엄마가 고민을 상담하였습니다.

이 아이가 유치부 예배를 드릴 때 눈물이 난다는 것입니다. “엄마 나 왜 그래? 왜 눈물이 나는 거야?”엄마는 어린 아이가 은혜를 받는 것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네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그런 거야?’ 라고 대답해 주었는데, 아이는 너무나 실망하더랍니다. ‘또 그 이야기냐?’는 표정으로 말입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이 계시고 역사하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데, 아이는 전혀 감격도 안 되고 놀라운 일도 아니고 엄마가 늘 하는 이야기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놀라운 일에 대하여 왜 우리 아이는 놀라지 않고 따분하듯 듣는 것일까요?” 라고 물어왔습니다.

 

사실 제가 그랬습니다. 그것도 고등학생 때, 주님께서 제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듣고 은혜받기 보다 좌절했었습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믿는 척 할 뿐이었습니다. 신학생 때, 주님께서 다시는 음란한 것들을 보지 않겠다고 약속하라 하셨을 때, 한 시간 동안 괴로워하다가 죄송해요 하고, 일어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말할 수 없는 복음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니 그 복음이 귀한 줄 몰랐습니다.

 

여러분 주 예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아십니까?

로마서에서 놀라운 십자가 복음을 듣고도 그것으로 그치시렵니까?

 

지난 주간 영남권 영성일기 세미나가 열렸던 대구 칠성교회 장로님 한 분이 손주를 보시면서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다고 고백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느 유행가 가사 같은 이 표현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얼마나 손주가 사랑스러우셨으면 손주를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다는 것일까?

그래서 손주의 손을 만지고 뺨을 부비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제 마음이 그러합니다.

주여,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려고 하지만, 여전히 주님을 보고 싶습니다.”

주님을 더 분명히 보아야, 저는 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는 중에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다!”

 

정말 그럴까요? 우리가 정말 그렇게 사랑스러울까요?

어린 손주를 보시면서 너무나 사랑스러워 하시는 할아버지 장로님을 통하여 그렇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손주가 할아버지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일까요? 계속 돌보아주어야만 하고, 어리광이나 부리고, 해 달라는 것만 많은 손주인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리 사랑스러우니 신비한 일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확증해 주셨습니다. 어제 큐티 중 붙잡은 말씀입니다.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열쇠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니다.

 

로마서는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이루어졌음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보시면서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우리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실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런 사랑의 교제 중에 살게 된 것입니다.

주님과 이런 교제를 나누기에, 무한 반복되는 것 같은 일상을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시련의 때에도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고난의 시간이 지나가 버린 것을 깨닫게 됩니다.

 

로마서는 놀라운 성경입니다.

주님과 친밀하고 사랑이 넘치는 교제의 눈을 열어줍니다.

순종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해 줍니다.

 

예수 믿고 사는 것은 단순하고 쉬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일 예배에 오신 그 감각으로 모든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 왜 나오셨습니까? 재미있어서 오셨습니까?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오셨습니다. 편히 쉬려고 오셨습니까? 다 아니실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오셨습니까? 여러분 마음에서 주님이 이끄셔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하셨습니다!”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일 예배만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 모든 삶을 주일 예배 드리듯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길, 반대가 많은 길이라도, 고생의 길, 두려운 길이라도 생명이시고 왕이신 주님께 순종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삶에 대하여 주님이 하셨습니다.” 하고 간증하게 됩니다.

 

여러분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오직 주님께 순종만 하며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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