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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하나님! (사 41:8-16)

by 【고동엽】 2022. 2. 8.

야곱의 하나님! (사 41:8-16)

 

역사는 항상 작은 손길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바다가 썩지 않는 것은 3%의 소금 때문이고, 역사는 창조적 소수가 이끌어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영국의 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세계의 운명을 장악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노아의 대홍수 이후 노아의 8식구는 세 시대의 주인공이 되었고, 아브라함은 혈혈단신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오늘의 유대인의 조상이 되었고, 온유한 자의 표상인 모세는 지팡이 하나로 이스라엘을 건져내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는 풍운아가 되었으며, 기드온의 삼백 용사는 메뚜기 때와 같이 몰려오는 미디안과 아말렉의 연합군을 삼키어 버렸습니다.
또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오늘의 기독교를 형성하였고, 바울은 소수의 작은 전도대로 오늘의 구라파의 역사를 바꿔 놓았습니다.
여러분, 무관심한 대중보다 잘 조직된 그리고 헌신하는 소수가 '강산도 고치고 역사의 운명'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아멘!/
감리교를 세운 요한 웨슬레는 무너져 내리는 조국 영국을 바라보면서 외치기를 '내게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열두 명을 붙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영국의 운명을 바꾸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꺼져 가는 영국을 재건하는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죤 낙스목사는 '스코틀랜드를 내게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게 죽음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아프리카의 선교사 리빙스톤은 사자에게 물린 후 '내가 나의 사명을 다 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나를 불러가지 않는다.'고 외치며 본국 선교 부에 연락하기를 '나를 아프리카 보다 더 험한 곳에 보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할/
역사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셔도 그 핸들을 잡게 한 인물은 언제나 소수이고, 언제나 그들은 고독했고,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했습니다. 개인은 약합니다. 그러나 창조적 인 소수는 강합니다. 이 시대는 창조적인 소수를 기다립니다. 창조적인 소수는 가정에도 있어야 하고, 지역사회에도 있어야 하고, 교회에도 있어야 합니다. /아멘!/
이 창조적인 소수는 자기의 희생을 아파하지 않습니다. 또 가족이나 이웃의 인정을 얻으려고 웃음을 팔지도 않습니다. 오직 자기의 헌신과 희생을 보람으로 알고, 역사의 심판과 하늘나라의 상급만이 그의 관심사요, 그의 인생에 하나님만을 좌표로 삼고 사는 자들입니다. /할/ 우리 모두 창조적 소수 안에 드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제목 소개!▶

 

하나님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평안하기보다는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란 없습니다. 다만 성장의 범위, 즉 '얼마나 자랐느냐? 얼마나 성공했느냐? 얼마나 인격적으로 자랐느냐?' 이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비록 한때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참회하고 성장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대열에서 제외시키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 들어 있는 믿음을 깊이 보십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귀한 것입니다. 믿음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충성, 사랑, 또 믿음은 능력, 또 믿음은 부활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 믿음은 구원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부활은 다시 '일어선다. 깨어난다.'는 의미요, 구원은 하나님 편에서는 '건져내는 것'을 의미하고, 인간 편에서는 '건짐 받는'것을 의미합니다. 죄에서, 사망에서, 질병에서, 실패에서, 어두움에서 건짐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한 마디로 믿음 하나 잘 붙잡기만 하면 우리 모두 수지맞습니다. /믿/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서로 부르는 호칭에서부터 그 긴밀성과 유대 성이 드러납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출3:6,15)'고 하나님은 직접 당신을 소개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은 이해가 가는데 '야곱의 하나님'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대명사요, 이삭은 순종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사기꾼, 약탈자입니다.
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해가 갑니다. 또 온유한 민족의 해방자 '모세의 하나님!' 또 큰사랑을 받은 지혜의 사람인 '다니엘의 하나님!' 한없는 꿈의 소유자 '요셉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해가 되고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하나님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야곱은 사기꾼이고, 욕심쟁이며 거짓말 잘하는 협잡꾼이었는데도 그 사람을 가리켜서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라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미지에 아무리 손상을 입는다 할지라도 야곱을 두둔하고 사랑하고 축복함에 있어서는 하나님 자신의 이름과 야곱의 이름을 묶어서 사용함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시46:7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라고 했고, 오늘 본문 속에서도 '나의 택한 야곱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지렁이 같은 야곱아 네가 너를 도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의 출생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그 아비의 고향 땅에서 리브가를 아내로 데려왔는데 아내가 아이를 갖지 못함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쌍둥이를 주셨는데 형이 에서요 동생이 바로 지렁이 같은 야곱입니다.
형 에서는 장자로 태어났고, 야곱은 숙명적으로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둘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으르렁거리고 싸우는 형제였습니다. 창25:22-23절을 보면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 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 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하나님은 야곱이 자기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야곱의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아니 그 보다 더 그가 생기기 전부터, 창세 전부터, 하늘과 땅과 바다가 생기기 전부터 하나님은 야곱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야곱뿐만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선택한 백성들입니다. /믿/
이 교리를 가리켜서 기독교 신학에서는 '선택의 교리, 선택의 신학'이라고 합니다. 야곱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장자의 축복을 사모한 사람입니다. 에서보다 늦게 나오면서도 형의 발꿈치를 붙들고 늘어졌던 진념의 갓난아이가 바로 야곱입니다.
이들이 자라면서 형 에서는 사냥을 좋아하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로 자라기 시작했고, 야곱은 주로 어머니 치마폭에 쌓여 조용히 사색하는 자였습니다.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어떻게 하면 장자의 명분을 차지할 수 있을까?' 어떤 학자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 주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하루는 야곱이 부엌에서 어머니를 도와 팥죽을 끌이고 있는데 형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왔습니다. 높은 산을 탔으니 얼마나 시장했겠습니까? 더욱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죽을 보니 자기도 모르게 군침이 넘어갑니다.
참다 못한 에서가 동생에게 팥죽 한 그릇을 달라고 하니 야곱은 형의 배고픔의 약점을 이용하여 팥죽을 주는 값으로 장자의 명분을 달라고 했습니다. 형 에서는 참을성이 없고 육신 적이요, 감각적인 망령된 자였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가장 귀한 것을 세상 적으로 가장 값싸게 팔아버린 치명적인 어리석음을 범한 자'로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형의 약점을 이용해서 교활한 수법으로 장자의 축복 권을 빼앗아 버린 집념의 사나이였습니다. /할/

 

▶그럼 야곱이 그토록 탐냈던 장자 권이 갖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⑴육적으로는 아버지의 상속권을 물려받을 수 있는 자리가 그 자립니다. 우리 한국 사람도 장자에게 부모의 유산을 많이 물려줍니다.
이스라엘과 우리나라와 비슷한 풍속이 많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상여 나가는 것이 비슷합니다. 곡식을 채로 까부는 것도, 여자들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는 것도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이삭이 갑부였습니다. 이삭은 그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재산만 물려받은 것만으로도 큰 부자인데 하나님은 이삭이 가는 곳마다 100배의 복을 주심으로 큰 부를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그 부모의 재산 3분의 2를 몽땅 자기 것으로 상속받을 수 있는 명분자가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야곱은 이 육적인 축복보다는 또 다른 축복을 바라보았습니다. 무슨 축복인가? 영적인 축복을 더 크게 바라보았습니다.
⑵이스라엘의 장자에게는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권한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구약의 모든 사람에게 이 특권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장자에게만 제사의 특권이 있었습니다. 에서는 배가 고프다는 사실 앞에서 자기의 장자 권을 생각할 때, 하등 중요한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금 당장 배가 고픈데 장자의 권한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한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할 수 있는 예배 권을 소홀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권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권한은 배고픈 현실에 비하면 너무나 하찮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장자의 권한을 팥죽 한 그릇에 쉽게 넘겨주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영적인 축복인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이 마음을 하나님이 귀하게 보셨습니다. /아멘!/ 여러분, 모든 하나님의 축복은 예배를 통해서, 제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믿/
⑶장자권의 축복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숨어 있었습니다.
마1:2절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이 장면에서 사실은 야곱 대신 에서가 들어가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에서가 빠지고 야곱이 들어갔습니다.
에서는 바로 이 특권을 박탈당한 것입니다. 메시아를 탄생시킨 이 놀라운 족보를 계승할 수 있는 특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아니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예수! 예수가 무어가 그리 중요한가?' 내가 지금 먹고살아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내가 자식을 키운다는 사실 앞에서, 내가 인생을 즐긴다는 사실 앞에서, 예수님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에서의 문제이고 그의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에서처럼 삶의 우선순위를 혼동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문제를 바울은 히12:16절에서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여기서 망령이란 말은 노망이란 말로도 사용하는데 본래의 뜻은 '믿음에서 떠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영혼을 버린 사람, 그가 바로 에서입니다. 우리는 절대 에서처럼 살아서는 안됩니다. /믿/


▶또 보겠습니다. 창27장에 보면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앞을 잘 보지 못합니다. 이제 이삭도 숨을 내몰아 쉬면서 인생의 나그네의 길을 마감하고 하늘나라 본향을 향하여 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이때 이삭이 마지막 축복 기도를 하려고 에서를 찾는데 야곱이 그 축복 기도를 가로채기 위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형의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변음을 해서 곧 돌아가실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 권을 가로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버지가 죽어 가면서 드리는 이 마지막 축복 기도가 그들의 최대의 축복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야곱은 마지막 돌아가시는 아버지를 속여 그 축복 기도를 받았던 지독한 사람입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욕심이 많고 쾌활하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늘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11:12절에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그러니까 하늘의 복은 남에게 빼앗기기 전에 내가 빼앗고 쟁취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 신앙 인들의 눈이 떠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눈을 떠야 합니다. /아멘!/
야곱은 세상적인 면에서 보면 쾌활하고 욕심이 많은 사기꾼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볼 때는 '거룩한 욕심쟁이'로 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축복도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욕심을 부려야 합니다. 세상의 욕심은 버릴지라도 신령한 은혜는 욕심을 부려야 합니다. /아멘!/
예수님이 팔 복중에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은혜에 대한 갈급함을 말합니다. 먹어도, 먹어도 베고픈 거지가 밥을 그리워하듯이, 들어도, 들어도 하나님 말씀에 사모하고 갈급해 하는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찾아간답니다. /할/

 

▶이제 아버지의 축복기도를 빼앗긴 에서가 시퍼런 복수의 칼을 뽑아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단단히 화가 났습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간신히 몸을 피해 이제 정처 없이 도망가는데 하란 땅에 있는 외가 집으로 피신을 갑니다.
이 때부터 야곱은 고된 영적 훈련을 받기 시작합니다. 우선 그가 지금까지는 남을 속이며 살았는데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는 반대로 그가 속으며 20년을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꾸시기 전에 20년의 고된 훈련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훈련이 중요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의 그 이름을 주시기 전에 야곱은 20년의 강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이라는 용광로를 거치게 하신 후에 은혜를 쏟아 부어 주십니다. 그럼으로 믿음의 사람들은 어떠한 고난과 역경이 와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향하는데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쫓아오고 있습니다. 진퇴양란입니다. 문제도 큰 문제입니다. 생사문제가 달려있습니다. 백성들은 아우성입니다. 그러나 지도자 모세는 그 문제 속에 해결사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할/
출14:13-14절을 보세요!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홍해라는 절망을 주신 것 같았는데 뒤에 알고 보니 그 홍해 바다는 바로의 군대를 수장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앞으로의 문제를 미리 아시고 그들을 아예 전멸시켜 버렸습니다.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진 것은 다니엘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다니엘을 모함한 사람들을 죽이려는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홍해가 꼭 필요하셨기에 그 절망을 주시고 축복으로 가는 징검다리로 삼으셨습니다. /믿/아멘!/

 

▶드디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간의 삶을 청산하고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동생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형이 듣고 400인의 군대를 몰로 쫓아 나옵니다. 깜짝 놀란 야곱은 형에게 뇌물 공세를 펴보기도 하고 또 자기 나름대로 종들을 가장 앞에 두고 그 다음 자식을, 그 다음에 레아의 행렬을, 그 다음 맨 나중에 라헬과 요셉이 뒤를 따라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형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보기 위해 혼자 남습니다. 얼마나 비겁한 가장의 모습인가? 창32:22-24절을 보면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모든 식솔들을 다 얍복강을 건너게 하고 야곱은 혼자 남았습니다. 형이 무서워 갈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비겁한 모습인가?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 비겁자 야곱에게 접근하셔서 홀로 있는 야곱을 깨뜨리는 작업을 벌이십니다. 창32:24절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여기 그가 '홀로 있다'는 말은 '고독, 외로움'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 깊은 뜻은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그러니까 자기를 돌아보는 삶의 자리'를 의미합니다.
사람이란 홀로 있는 순간에 가장 정직한 자기 모습을 나타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가면을 쓰기도 하고 위선을 보이기도 하지만 홀로 있는 순간이야말로 가장 정직하게 자기 자신의 모습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할/
신앙생활을 하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 경건의 시간을 강조하는 이유도 '자기를 온전히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성경을 보면 가장 정직하고 진실하게 자신을 드러내 놓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아멘!/

▶야곱의 이 사건을 브니엘의 사건이라고도 하고 얍복강 사건이라고도 합니다. 야곱이 홀로 그 밤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자신의 한계를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홀로 남아 있는 야곱에게 누군가가 달려들었습니다. 야곱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형이 나를 죽이려고 자객을 보냈구나!' 그렇게 생각한 야곱이 본능적으로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하여 사력을 다해 그 사람과 싸웁니다.
여기서는 씨름으로 비유했습니다. 이번 추석에도 천하장사가 탄생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씨름 선수들이 대전하는 것을 보세요! 장난치듯이 하지 않습니다.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부어 전심전력을 다합니다. 여기서 씨름을 기도로 비유했습니다. 기도는 전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할/
야곱에게 달려든 이 사람이 누굽니까? 하나님이 보낸 천사입니다. 처절한 싸움이 계속되는 순간 야곱은 이 사람이 하나님의 천사임을 깨닫고 이제 하나님 앞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사가 야곱의 환도 뼈를 쳐서 위골이 되어 힘을 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때 야곱이 취한 행동이 무엇인가? 죽게 되었다고 포기했습니까? 아닙니다. 더 매달렸습니다. 창32:26절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 말을 의역해 보면 '하나님! 나에게 복을 주소서! 당신이 없이는 살수가 없습니다. 당신의 축복이 없으면 살수가 없습니다. 이제 주님만을 의지하고 살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할/
여러분, 이 고백이 귀한 고백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야곱의 얍복강 사건을 기도의 승리로 보고 있습니다. 오늘 이 고백이 오늘 이 기도의 승리가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고 기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드디어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꿔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천사가 네 이름이 무엇이냐? 고 묻습니다. 그러자 '야곱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한마디로 내 평생 돌아보니 '가는 곳마다 문제 꾼 이었습니다. 나는 떳떳치 못한 잡니다. 사람을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사람들을 이용했고, 속였고, 사기를 쳤습니다. 나는 늘 남을 넘어지게 하고 이렇게 저렇게 이유만 대는 자로 산 자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철저하게 하나님께 항복하고 회개하는 단계를 지금 야곱이 거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도 이런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창32:28절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할/ 이 말씀은 '너는 이제부터 야곱이 아니다, 사기꾼 약탈자, 속이는 자가 아니라 너의 한계를 알고 나를 의지한다고, 오냐, 내가 너를 다스려주마 내가 너를 통치해 주마' 이런 의미도 갈려있습니다. /할/
여러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지배를 받는 자가 복된 자입니다. /믿/ 드디어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꿔졌습니다. 승리자로 바꿔졌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런 바꿈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불순종이 순종으로, 게으름이 나태함이 열심과 득심으로, 미지근한 신앙이 뜨거운 신앙으로, 한마디로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죽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으로 바꿔져야 합니다. /아멘!/

 

▶이때부터 야곱은 전적으로 바꿔지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을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도 이 사건이 해당이 됩니다. 야곱처럼 변화되는 순간, 하나님은 오늘도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믿/ 신앙은 여기까지 가야 능력자로, 축복 자로 살게 됩니다. /할/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꿔지자 그의 인생의 행로는 이제부터 순풍에 돛을 단 배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형의 마음도 눈물로 녹게 만드시고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야곱이 본문의 말씀대로 복을 받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8절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라고 부르셨고, 14절에서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할/

 

▶여기서부터 오늘 본문의 뜻을 생각해 보아야 은혜가 됩니다.


①하나님은 야곱을 세 가지 이름으로 불러 주십니다(8). 사실 야곱이 우리입니다.
⑴'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종은 주인의 명령에 죽고 사는 존재입니다. 종은 순종만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만 하면 승리자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나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한 사명, 일감을 주시고 그 일에 순종하면 우리 모두는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믿/
⑵'나의 택한 야곱아!' 우리는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 받은 존재입니다. 야곱은 성경 인물 중에 가장 치사한 인물입니다. '사기꾼, 거짓말쟁이, 속이는 자, 약탈자'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택함 받을만한 이스라엘이 된 다음에 택하신 것이 아니고 야곱으로 있을 때 택하여 불러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말씀으로 변화 받아 물이 포도주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면 포도주가 됩니다.
⑶'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종으로서 충성을 다하면, 하나님과 친구처럼 가까워져서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이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할/

 

②'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9)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멀리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멀리 도망쳐도 하나님은 끝까지 찾아오셔서 우리를 택하시고 은총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다시스로 간 요나도, 결국 하나님이 일으키신 풍랑을 통해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다시스로 가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은 아무리 도망을 쳐도 하나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끝까지 추적해서라도 회개시키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아무리 말을 안 듣고 도망치고 불순종해도 부모는 그 자식을 버리지 않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버리고 도망쳐도,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끝까지 자식을 사랑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 것입니다.
신4:31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버림을 당하면 얼마나 외롭습니까? 사람에게 버림당하는 것도 비참한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한다면 망하고 맙니다. 사울을 보세요!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를 버려서 더 이상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곧 심판을 의미하고,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사람은 결국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오면, 하나님께서 결코 버리시지 않습니다.

 

③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10)
본문은 언제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게 하는 말씀입니다. 언제 봐도 새 힘이 나고 살맛이 나서 신바람이 나게 하는 말씀이 바로 본문입니다.
⑴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놀라지 안아도 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뜨거운 풀무 불 속에서도 함께 하십니다. 무서운 사자 굴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저 포항 종합 제철소에 있는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 보라'고 하는 그런 말씀은 아닙니다. 또 어린이 대공원에 있는 '사자 우리 속에 들어가 보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풀무 불같이 뜨거운 시련 속에서도, 사자 굴같이 무서운 시험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담대한 마음으로 싸워서 승리하라는 뜻입니다. /아멘!/
⑵하나님은 우리를 굳세게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여기 '굳세게 하리라'는 말은 '믿음의 강함과 담대함'을 의미합니다. 모세의 후계자로 여호수아가 지명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마음공부입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믿음입니다. 마음이 성숙한 것이 신앙입니다. 마음을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고 한결같이 가는 것 바로 이것이 은혜입니다. 성숙이라는 것은 마음이 커지는 것이고 마음이 넓어지는 것이고, 또 마음이 깊어지고 높아지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말은 중심부라는 뜻입니다. 내 과거의 상태를 무엇이 결정했을까? 내 마음이 결정했습니다. 오늘의 나의 상태를 무엇이 결정합니까? 내 마음이 결정합니다. 내 미래가 어렵다. 내 미래가 확연치 않다. 내 미래가 불완전하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내 미래를 누가 결정할까요? 내 마음이 결정합니다.
마음만 건강하면 마음만 든든하면 마음만 강하고 담대하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마음만 너그러우면 마음에 평화가 있으면 마음에 풍요만 있으면, 죽고 사는 권세가 내 마음에 있습니다. 무릇 지키려면 내 마음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계명도 '네 마음을 다하고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입니다. 마음이 첫째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마음(생각)을 바꾸고 결단하고 일어서면 하나님이 붙잡아 주십니다. 기적은 그 때 일어납니다. 여기 '오른손'은 능력과 보호를 의미합니다.
⑶'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시121:1-2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러분! 놀라지 마세요! 두려워 마세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게 하십니다. /믿/
사43: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여기 '너는 내 것이라' 아무나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을 할 수 있으려면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사람들의 마음속에 두려움과 근심이 있습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신앙이 병들면 근심과 두려움 속에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건강한 신앙을 소유하게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④네게 노하던 자, 다투는 자, 싸우던 자, 치는 자들이 멸망할 것이라!(11-13)
얼마나 신나는 말씀입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경쟁에서 이기게 하시고, 또한 원수를 갚아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때로는 여러분에게 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욕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다 물리쳐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며,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허무한 것 같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롬12:19)고 하셨습니다.
또한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내가 너를 도우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는데 걱정할 게 뭐가 있습니까?
신28:7절을 보세요!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얼마나 혼비백산했으면 올 때는 모여서 한 길로 왔다가 도망갈 때는 일곱 길로 뿔뿔이 흩어져 갔겠습니까?
수23:10절에는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승리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요일5:4절을 보세요!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할/ 그렇습니다. 믿음의 우리의 무기입니다. 예수님이 다 이겨놓은 싸움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길 가기만 하면 됩니다.


⑤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라!(14-16)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지렁이같이 천박하고 연약한 존재도 타작 기계처럼 강력한 존재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지렁이는 땅속에서도 가장 연약하고 비천하고 무력하고 비참한 존재입니다. 이빨도 없고 다리도 없습니다. 햇볕만 강하게 받아도 죽습니다. 다른 대적의 공격을 받아도 대항해 싸울 수도 없고, 땅속으로만 도망하는 비겁자입니다.
오늘날에도 지렁이와 같은 존재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인간은 연약합니다. 비겁합니다. 떳떳하게 싸우지 못합니다. 병들고 죄짓고 억울한 일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을 택하셔서 축복하시고 능력과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누가 지렁이를 강력한 존재로 만들 수 있습니까? 누가 지렁이를 승리자로 만들 수 있습니까? 누가 지렁이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게 만들 수 있습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렁이를 택하여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할/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는 아주 튼튼하고 강한 무기로, 하나님께서는 지렁이같이 가장 연약하고 비천한 존재를 들어서 성공하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시고, 죄악과 싸워 이기게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또한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산을 내리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정도로 강력한 승리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원수와 싸워 이기고, 장애물을 다 쳐부수고, 불행과 역경을 극복하고, 승리의 깃발을 날리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가 그들을 까부른 즉 바람이 그것을 날리겠고 회리 바람이 그것을 흩어 버릴 것이로되'라고 하였습니다. 바람이 불면 모든 것을 흩어버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심판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아멘!/

 

⑥왜 우리를 축복하십니까? 그 분 안에서 즐거워하고 자랑하라고!(16)
'너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자랑을 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복 받고 능력 받고 승리자가 된 것을 반드시 자랑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왜?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즘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APT가 넓은 것입니까? 화장실이 두 개, 세 개인 것이 자랑입니까? 타고 다니는 자동차가 자랑입니까? 자녀가 자랑입니까?
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이 내가 되면 안됩니다. 그 자랑은 교만에 불과하고 허영에 불과하고 사치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랑을 싫어하십니다.
우리의 진정한 자랑의 중심은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고 그분만을 자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선민인 야곱의 후예입니다. 성경은 현재성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십니다. 오늘도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편에 있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꿔져야 합니다. 야곱처럼 거룩한 욕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는 열정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수많은 결점과 성품과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적인 역사의 주역이 되겠다고 하는 그의 믿음의 태도를 놓치지 않으시고 그를 붙잡아 세웠습니다.
우리들도 지난날의 야곱처럼 많은 약점과 실수와 고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실패할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인 일에 대하여 즉 하나님의 대한 열망과 기대와 끈기와 용기만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었듯이 우리도 바꿔주셔서 당신의 영광가운데 거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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