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가 무너져야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수 6:8-21)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불쌍히 보시고, 위대한 지도자 모세를 통하여 430년의 종살이를 마감하게 하고 애굽에서 건져내 홍해를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향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만 건너면 완전히 애굽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줄로 생각했고 모든 것이 끝난 줄로 생각했습니다. 이젠 완전 자유! 완전한 독립! 완전한 해방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첫 작업에 불과했습니다.
이제부터 정신을 차려야 하고, 용기를 내어야 하고, 담대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광야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 배고픔을 당해야 했고, 추위에 떨기도 했으며, 때때로 죽음의 위기를 수도 없이 넘기는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너무 힘들고 고달플 때는 애굽을 생각하기도 했고, 자기들을 인도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나안을 향해 계속 나아갔습니다.
결국 많은 고생과 방황 끝에 가나안 땅 입구까지 왔습니다. 백성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은 실망하고 낙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방향과 목표를 잃어버렸습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이렇게 귀합니다. 나라뿐이 아니지요! 교회의 지도자도, 가정의 지도자도 정말 귀한 분들입니다.
자! 위대한 영도자 모세가 죽었습니다. 절망과 좌절가운데 빠져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지도자를 예비하셨다가 세우셨습니다. 그가 바로 본문의 주인공 여호수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단강을 건너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길목에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가는 입구에 장엄한 철갑성인 여리고 성이 딱 가로막고 서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여리고 성이 장애물입니다.
우리도 지금 천성 문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데 많은 여리고 성과 같은 장애물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 신앙생활을 가로막는 장애물, 우리들의 축복을 가로막고, 사업을 가로막고,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먼저 여리고 성을 어떻게 무너뜨렸는가를 알아보고, 그 다음 우리 안에 여리고 성이 무엇인가를 같이 알아보려고 합니다. /할/
①여리고 성은 어떤 성인가?
지난주에도 여리고 성의 삭개오 설교를 했습니다. 여리고는 그 당시 작은 소읍으로 요단강 대평원 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로써, 그 전략적 위치 상 매우 중요한 가나안의 방어 거점으로써 군사시설의 요충 지대이며, 따라서 가나안 중부로 통하는 교통의 중심지입니다.
여리고는 '향기 나는 곳'이란 뜻으로 종려나무와 삼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사람들은 '종려나무의 성읍, 향기 나는 성읍'이라고도 부른 답니다.
그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 공격이 어려운 그런 요새랍니다. 즉 여리고 성은 가파른 경사지 정상에 쌓았으며, 적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밖으로 3-4미터의 높이의 장애물들을 설치했을 뿐만 아니라, 그 밑은 깊은 낭떠러지가 있으므로 군사작전상 절대 공격 불가능한 그런 천연요새입니다.
성서고고학자 '브라이언트 우드' 박사는 특히 이 여리고 지역에 관한 고고학 연구의 최고 전문가로 손꼽히는 분입니다. 이 분의 논문을 보면, 당시 여리고 성의 자세한 상태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여리고 성은 이중 벽으로 되어있습니다. 먼저 외벽은 5m 정도 높이의 기초성벽 위에 두께 2m, 높이 7m의 진흙벽돌 벽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5m 사이를 두고 그 안에 내벽이 또 세워져있습니다. 그 내벽은 두께가 4m, 높이는 10-14m나 되었습니다. 이런 여리고 성은 막강한 군사력으로도 무너뜨리기 힘든 난공불락의 그런 성이었습니다.
1절을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여리고 사람들이 성문을 굳게 닫은 것은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굳게 닫힌 성문을 부수고 공격한다든지 성곽을 넘어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세상도 문이 굳게 닫혀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아파트 벨을 눌러도, 주택을 돌아다녀도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문만 아니라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삽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갈 틈을 주지 않습니다.
본문의 굳게 닫힌 견고한 성은 무너질 수도 없고, 무너져서는 안 되는 성입니다. 그런데 무너졌습니다. 여하튼 여리고는 여호수아의 군대에게 포위 된지 일주일만에 그 기초마저 깡그리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성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점령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경험한 또 하나의 기적이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할/
②여리고 성이 무너지기까지는 몇 가지 신앙의 위대한 법칙이 있습니다.
⑴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무너뜨렸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언약서입니다. 사람의 약속도 믿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약속은 깨어지기가 쉽습니다. 왜? 인간의 마음이 조석변개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약속은 믿을 수 없지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믿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오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었습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또 16절 '일곱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여리고 성이 아무리 견고하고 굳게 닫쳤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붙이셨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셨다는 것은 곧 승리를 보장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도 보장된 승리가 있고 축복이 있는 줄 믿습니다. /아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건의 핵심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저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성을 돌았기에 그 성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선포의 말씀을 믿고 성을 돌았기에 그 성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백성이 싸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나팔을 불었을 뿐이요, 그 성을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돌았을 뿐입니다. 그 때 싸운 것은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었고, 여호와의 군대가 싸웠습니다.
수5:13절에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군대 장관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있었다는 것은 싸울 태세를 이미 갖춘 모습입니다. 바로 여리고의 전투태세가 완료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세밀하게 준비해 놓고 기다리십니다. 이렇게 준비해 놓고 계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로 믿고 믿음으로 행하면 지금도 여리고는 무너집니다. /믿/아멘!/
히11:30절에 '믿음으로 7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다'고 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향기가 나는 여리고 성에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은 오직 믿음의 힘입니다. /할!/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자들, 여리고 성에 들어간 사람들은 다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던 사람들은 하나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믿음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고, 이 믿음의 보상은 우리가 믿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후 약 1,500년이 지난 후에 예수님께서 그 여리고 성을 지나가시게 되셨습니다. 그때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향하여 '보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자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시니 그의 믿음대로 눈이 밝아졌습니다.
소경이 눈을 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호수아가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지 약 1,500년 후에, 다시 믿음의 사람에게 역사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히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첫째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 하나님은 엘로힘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믿/
그 다음, 하나님이 지금도 역사하심을 믿어야 하고, 그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좋은 것으로 상주시는 분이심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어디에서 생길까요?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롬10: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 모세에게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땅은 약속의 땅입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약속해 주신 땅입니다.
그 땅은 믿음으로 가는 곳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주변의 적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행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 하면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공격하고, 도전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아멘!/
▶호랑이가 토기를 보았습니다. 질풍같이 달려가서 토끼를 물었습니다. 토끼는 호랑이 입에 물려 있는 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자식이 누구를 건드려? 이 것 놔! 짜식아!' 너무나 큰 소리에 호랑이는 깜짝 놀라서 물었던 토끼를 놓고 말았습니다.
'조심해!' 토끼가 또 큰 소리를 지르자 호랑이는 놀라서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이튿날 호랑이는 또 토끼를 보았습니다. 또 달려가서 토끼 앞에 섰습니다. 그 토끼가 또 소리를 질렀습니다. '짜식아! 내가 어제 그 토끼야!' 호랑이는 또 놀라서 또 도망갔습니다.
다음 날 호랑이는 다른 토끼를 보고 달려가서 물으려고 하자, 그 토끼가 말했습니다. '이 짜식아! 너 소문 다 났어!' 호랑이가 또 놀라서 도망쳤다고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이스라엘은 자기들보다 훨씬 강한 여리고 성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땅을 주실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약속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
⑵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할 때 여리고는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여리고 성의 주위를 돌라고 명하십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생각할 때 어처구니없는 일이요 웃기는 일입니다. 3절에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장 일곱 명이 일곱 양각 나팔을 손에 들고 제일 앞서 가고, 그 뒤에 언약궤가 따르고, 그 뒤에 백성들이 따르면서, 여리고 성을 매일 한 바퀴 씩 육일 동안을 돌았습니다. 그리고 제 칠일에는 일곱 바퀴를 돌았습니다.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6일 동안은 하루에 한바퀴씩 돌고, 제 칠일에는 일곱 바퀴를 돈 것은 절대적인 순종의 모습입니다. 사실 그들은 왜 육일 동안은 하루에 한 바퀴씩 돌고, 제 칠일에는 일곱 바퀴를 돌아야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지지 않고 절대적으로 순종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왜 오늘은 한 바퀴를 돌아요? 왜 오늘은 일곱 바퀴를 돌아요?'하고 묻지도 않았고,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순종을 보이자 여리고 성은 저절로 무너졌습니다. /아멘!/
사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침묵하며 순종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육일 동안이나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비합리적인 일을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행한다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기적은 순종하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아멘!/
⑶'언약궤'를 메고 성을 돌았습니다. 그 때 성이 무너졌습니다.
4절에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여호수아는 지도자지만 결코 하나님의 법궤를 앞서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항상 예수를 앞세우고 자신은 그 뒤를 따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법궤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앞서 가는 법궤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앞서 가신다고 생각했고, 또 내 뒤에 있는 법궤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내 뒤에 계신다'고 믿어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가지고 행할 때 이 법궤는 항상 맨 앞쪽 아니면 한가운데에 위치했습니다. 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할 때는 법궤는 앞서갔습니다. 그리고 때때로 그들이 머물 때는 이 법궤는 가운데에 위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가 앞서갈 때에는 '앞서 가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했고, 법궤가 한가운데 위치할 때는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언약 궤! 하나님의 말씀(십계명)이 담겨 있는 궤! 말씀을 붙들고 가라'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나아간다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공 비결은 확실한 약속의 말씀과 그에 대한 믿음과 순종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십시오. 어려운 때일수록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붙드십시오. 그 말씀이 '승리의 깃발'을 줄 것입니다. /아멘!/
⑷'나팔'을 불 때 무너졌습니다.
4절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절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나팔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처음 만나는 시내산 장면에 보면 큰 나팔 소리와 함께 하나님께서 강림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강림하시고, 임재 하신다는 표징으로 나팔소리가 울려나곤 하였습니다.
첫째 날도 제사장 일곱이 나팔을 불었습니다. 둘째 날도, 셋째 날도, 넷째 날도, 다섯째 날도, 여섯째 날도 그리고 일곱째 날은 아침 일찍 일어나 일곱 바퀴를 돌며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 나팔을 불 때 여호수아의 구령에 맞춰 모든 백성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절대 복종하는 모습이고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또한 질서 있는 행동이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성도들의 신앙을 크게 축복하십니다.
나팔 소리와 백성의 고함 소리가 한데 어우러지면서 뇌성벽력처럼 들렸습니다. 그 순간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사장 일곱만이 나팔을 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모든 제사장들의 대표이며 백성의 대표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악기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타악기입니다. 두드리고 흔들어서 소리를 내는 악기로써, 큰북, 작은북, 탬버린 등이 있고, 둘째는 현악기입니다. 이것은 줄을 뜯어서 소리를 내는 악기로서 비파, 거문고 등이 있고, 셋째는 관악기입니다. 이것은 입으로 부는 악기로써 수염소 뿔로 만든 나팔을 들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그 나팔을 분 것입니다.
▶구약 시대 나팔을 부는 경우는, 시간을 알릴 때, 소식을 전하기 위해 불었고, 또한 전쟁의 시작과 끝을 알릴 때 불었습니다. 본문의 경우는 승리의 나팔이었고 선포의 나팔이었습니다.
살전4:16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신다'고 했습니다. 지상 종말과 주님의 재림 때에도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팔'이라는 점입니다. 군악대나 경찰 악대가 부는 나팔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팔입니다. 여리고 성 정복 당시의 경우도 모든 백성이 다 나팔을 분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별된 일곱 제사장만 불었습니다. 그 나팔 소리를 들으며 백성들은 행군했고, 마지막 날 일곱 바퀴를 돌 때에는 나팔소리와 함께 우렁찬 함성으로 소리를 쳤던 것입니다.
이 나팔 소리는 승리의 함성이었고, 믿음의 함성이었습니다. 우리도 이제 복음의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을 움직이는 곳에는 복음의 나팔이 울려 퍼져야 합니다.
마24:31절에 보면 마지막 주님 재림 때 예수님은 천군 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오신다고 했습니다. 계11:15절에 보면 일곱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이 세상은 여리고 성과 같이 무너지고 주님이 다스리는 새날이 온다고 했습니다. /할/
⑸질서 있는 행동이 기적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8-9).
그들이 여리고 성을 돌 때 무질서하게 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8-9절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진행하며 후군은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더라'
하나님은 질서의 주님이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질서대로 하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 '무장 군인'은 직분자를 말합니다. 장로들이, 권사님들이, 집사님들이 앞장서야 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서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법궤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배경 삼아 목사들은 항상 나팔 소리를 외쳐야 합니다. 복음 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뒤를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질서입니다. 무엇이든지 질서대로 하고 법대로 해야 합니다. /믿/
▶조(趙)나라에 유능한 사냥꾼 왕량(王良)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와 사냥을 나가든 그들 도와 최고의 사냥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유능한 사냥꾼이었습니다. 원칙을 지키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던 왕량은 조나라 모든 귀족들이 그와 함께 사냥 나가는 것을 꿈꾸는 대상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영입 인사 대상 1번이었습니다.
당시 조나라 왕의 총애를 받던 신하 폐해(嬖奚) 역시 왕에게 간청하여 그를 데리고 사냥을 나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조나라 왕은 총애하는 신하의 청을 들어주며 왕량에게 그를 도와 사냥을 나가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런데 폐해는 웬일인지 종일토록 그와 사냥을 다녀도 단 한 마리의 사냥감도 잡지 못했습니다.
폐해는 돌아와 왕에게 말했습니다. '왕량이란 사람은 천하의 수준 낮은 사냥꾼입니다.'
왕량은 그 말을 듣고 바로 조나라 왕에게 나아가 폐해와 한 번 더 사냥을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냥에서는 아침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10마리도 넘는 사냥감을 잡게 했습니다.
폐해는 임금에게 나아가 보고했습니다. '천하 최고 수준의 사냥전문가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전속 사냥꾼으로 지정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왕이 왕량을 불러 폐해의 전속 사냥꾼이 되어주기를 명하자, 왕량은 그 자리에서 거절하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처음 저 폐해란 신하와 사냥을 나갔을 때 정말 원칙대로 수레를 몰아 사냥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루 종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사냥에서는 온갖 변칙으로 수레를 몰아주었는데 한나절에 10마리의 사냥감을 잡았습니다. 저 사람은 원칙대로 모시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오로지 반칙으로 모셔야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반칙으로 모셔야 능력을 발휘하는 그런 사람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질서를 지키는 자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승리자로 세우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여리고 성이 보여주는 교훈입니다. /아멘!/
⑹'침묵'할 때 무너졌습니다. 침목이 힘입니다!(10).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여기 '너희 음성을 들리지 말며'는 원래 원문에는 '왁자지껄 떠들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시끄럽게 하지말고 침묵하라는 것입니다. 그 속에 불 신앙과 부정적인 언어들이 터져 나올까봐 미리 입 단속을 하신 것입니다. /할/
여러분, 그 당시 시끄럽게 떠들어대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럼으로 침묵하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배워야합니다. 교회에서도 주의 일만 하려면 시끄러운 교회가 있습니다. 무슨 일만 하려면 일도 하기 전에 이런 저런 잡음 때문에 일이 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의 일을 하면서 잡음이 생겨나지 않도록 입을 다무는 침묵훈련이 필요합니다. 원망해서도 안 되고, 불평을 해서도 안 됩니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침묵할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할/
오직 하나님의 나팔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오직 하나님의 법궤만 바라보면서 하나님 명령에 순종을 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건 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침묵 훈련'입니다. 왜냐하면 '침묵을 배우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고전14:28절에서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했고, 솔로몬도 전5:2절에서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고 했습니다. 다윗도 시141:3절에서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했습니다. /할/
옛날부터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침묵이 힘입니다. /아멘!/
⑺이스라엘의 끈기가 참 부럽습니다. 끈기, 인내가 절대 필요합니다. /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돌았습니다. 마지막 날까지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징조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쉬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는 대로 순종했습니다. 무너질 때까지 돌았습니다. 믿음은 끈기를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여리고 성을 계속 돌게 하셨습니다. 또 돌고, 또 돌고 또 돌고 또 돌아야 합니다. 또 불고, 또 불고, 또 불고 또 불어야 합니다. 신앙훈련은 늘 반복입니다. 말씀 훈련도, 기도 훈련도 늘 반복입니다. 사실 인생은 단순한 반복입니다. 먹고 자고, 자고 먹고 늘 반복입니다. /할/
⑻기다림의 인내 뒤에 승리가 왔습니다.
이스라엘을 보면 반복적으로 13 바퀴를 돌고 났을 때 기적이 일어났고 승리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여리고 성을 도는 시간보다 돌고 나서 기다리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하루에 한 바퀴 돌고 나서 나머지 시간은 기다림의 시간이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승리의 순간까지, 성공의 문턱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기다림의 인내 뒤에 승리가 주어졌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조급히 서둘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농부도 씨를 심는 날은 하루이지만, 싹이 나기까지는 몇 일을 기다려야 합니다. 열매를 따기까지는 몇 달을 기다려야 합니다.
마더 테레사는 하루에 4시간 가량을 기도하던 수녀였습니다. 기도하는 그에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기도합니까?' 그가 대답했습니다. '말하지 않고 그 분이 말해주시기를 기다립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수녀님이 기다리는 동안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나요?' 수녀가 말했습니다. '하나님도 기다리시지요' 기도는 말하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리고 성을 도는 시간보다 돌고 나서 기다리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성공은 기다림의 결과입니다. 조급하지 마십시오. 기다리고 또 기다리십시오. /할/
▶거북이 한 마리가 부산에서 서울로 출발했습니다. 한참을 가다보니 지렁이 한 마리가 가고 있었습니다. '어디 가니?' '서울 가' '나도 서울 간다. 내 등에 타라' 그리고 지렁이를 태우고 서울로 올라가고 있는 데 굼벵이를 만났습니다.
'어디 가니?' '서울 가' '나도 서울 간다. 내 등에 타라' 그래서 거북이 등에는 지렁이와 굼벵이가 같이 타고 있었습니다. 굼벵이가 지렁이에게 말했습니다. '꽉 잡아! 되게 빠르다. 번개같아. 잘못 하면 떨어진다.'
굼벵이 눈에 거북이는 정말 빠릅니다. 그러나 토끼눈으로 보면 거북이는 느림보입니다. 우리 보기에 문제가 큰 것이지,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커도, 아무리 난공불락이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면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릴 줄 아는 인내를 키우십시오! 그리하면 길이 보이고 여리고가 무너집니다. /아멘!/
⑼여리고의 기적은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6일 동안 일찍 일어나서 성을 돌았습니다(12). 그러나 제 7일에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성을 일곱 바퀴 돌았습니다(15).
성을 일곱 바퀴를 돈후에는 제사장들을 나팔을 길게 울려 불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크게 소리 질러 외쳤습니다. 그때에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성을 일곱 바퀴 돌고, 일곱 제사장들은 크게 나팔을 울려 불고, 백성들이 크게 소리 질러 외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통성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새벽제단을 쌓을 때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고, 향기 나는 곳에 들어가려는 우리를 가로막는 높고 견고한 여리고 성은 우리가 새벽에 일어나 부르짖어 기도할 때 무너져 내릴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향할 때, 그들 앞에 놓인 제일 처음 장애물은 홍해였습니다. 그런데 그 홍해가 갈라진 것이 새벽이였습니다. 그 새벽에 애굽의 군대들이 다 홍해에 수장되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다윗의 나라를 괴롭히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가 블레셋이였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이 이 블레셋을 완전히 물리친 것도 새벽이었습니다(삼상30:17).
시46:5절에 '하나님은 새벽에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러나 새벽에는 더욱더 우리를 도우십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도 새벽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 간 것은 새벽입니다. 이렇게 새벽에 하나님의 역사가 많이 일어납니다. 새벽은 이렇게 가로막는 담을 허는 능력이 있습니다./믿/
▶기도는 능력이 나타납니다. 야곱의 얍복강가의 기도는 20년 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에서의 복수의 마음을 사라지게 했고, 모세가 기도하자 여호수아의 군대가 아멜렉을 물리쳤으며, 한나가 기도하자 아들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또 다윗이 기도하자, 반란을 일으켰던 아히도벨이 스스로 목매어 자살했고, 다니엘이 기도하자 사자의 입이 막혔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하자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고, 또 기도하자, 다시 비가 내렸습니다. 엘리사가 기도하자 죽은 소년이 영혼이 돌아 왔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영원까지 이르기 때문입니다. /아멘!/
③여리고가 무너질 때 기생 라합은 살아났습니다(17).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그리고 23절을 보면 '정탐한 소년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 부모와 그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내고 또 그 친족도 다 이끌어내어 그들을 이스라엘 진밖에 두고'
이 말씀의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돌고 돌기 이전의 일입니다. 여리고 성을 점령하려면 여리고 성에 대해서 샅샅이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일을 해도 알 것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두 사람의 정탐꾼을 변장을 시켜서 여리고 성안에 들여보냈습니다.
그 정탐꾼들이 샅샅이 조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당국에 간첩이 나타났다고 신고가 들어갔습니다. 군병들이 정탐꾼의 뒤를 좇습니다. 그 정탐꾼들은 도망을 쳐 성벽 위에 있는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의 첩자인줄 벌써 알면서도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인해서 간담이 녹았습니다. 지금 겁에 질려서 야단이 났습니다. 당신들의 하나님이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하였고 광야를 지나오면서 당신들을 대적한 족속들이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을 다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당신들에게 준다는 것도 나는 알고 믿습니다. 당신의 그 하나님이 분명히 당신들에게 가나안 땅을 줄 것입니다. 나는 확실히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 때 정탐꾼이 '그러면 우리를 숨겨 주십시오'라고 하자, 라합은 정탐꾼을 지붕 꼭대기에 숨겨 주었습니다. 즉 믿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군병이 쫓아왔습니다. 라합은 '그런 사람들이 왔었는데 벌써 성문을 통해서 나아갔습니다' 그 말을 듣고 군병들은 정탐꾼이 도망했다는 곳으로 쫓아간 다음에 저녁이 되자 성문이 닫혔습니다.
붉은 줄을 달아매어 그 성벽에서 두 정탐꾼들을 내려보내면서 '산에 가서 숨었다가 저 사람들이 찾다가 찾지 못해서 돌아가거든 그 때 가십시오' 그 때 정탐꾼은 라합에게 '우리가 이 성을 점령하고 들어올 텐데 우리를 달아 내려준 이 붉은 줄을 반드시 창문에 매어 놓으십시오. 누구든지 이 집안에 들어 와 있으면 삶을 얻고 누가 잘못하여 당신의 생명을 해친다면 그 사람이 당신의 생명을 대신할 겁니다. 만약에 집을 벗어난다면 우리는 책임을 지지 못합니다'라고 약속을 합니다.
그리고 정탐들이 돌아가 성을 7일 동안 돌고 성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고 침공하려고 할 때 여호수아가 하는 말이 17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은 기생 라합의 집안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절대 손을 대지 말라. 그 나머지는 완전히 쓸어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붉은 줄을 맨 집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피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피의 십자가를 믿고 거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믿고 교회 생활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여리고 성에 들어가서 진멸 할 때 기생 라합을 비롯해서 부모형제 친족까지 전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영접했고 믿음으로 구원 얻은 기생 라합은 다윗의 고조모가 되었습니다. 다윗의 할머니의 할머니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다윗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할/
그렇습니다. 믿음이 그 견고한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축복의 문을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 성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건강입니까? 사업입니까? 믿음 붙잡고 씨름해 보세요!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 같이 다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먼저 내 안에 신앙의 여리고 성이 딱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내 안에 들어 있는 여리고가 무섭습니다. 우리 이 시간에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는 여리고 성이 몇 가지인가 같이 생각해 보면서 하나하나씩 무너뜨리며 하나님의 기적의 주인공들로 바꿔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④우리 안에 있는 여리고는 무엇인가? 그것이 무너져야 행복 천국을 누리게 됩니다.
⑴우리 안에 가장 큰 여리고는 '불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실존과 능력을 의심하거나 과소평가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울 왕이 왜 망 한지 아십니까? 불 신앙 때문에 망했습니다. 아담이 왜 무너졌습니까? 불 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십니다. 지금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불 신앙을 찍어 버리고, 믿음으로 굳게 서시기를 바랍니다.
히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막9:23절에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아멘!/
⑵우리 마음속에 여리고는 '게으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게으름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회학자인 '펙크'는 '게으름은 악의 주요 원인이요, 심리적인 병의 원인이요, 인간관계에 있어 실패하는 주요 원인'이라고 설파했습니다. 사실 게으름 때문에 인관 관계가 많이 실패합니다. 게으름 사람은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게으름의 태도는 자꾸 내일로 미루는 태도입니다.
여러분! 마귀가 성도를 파괴시키는데 사용하는 무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내일로 미루는 게으름입니다. 현대 신종 마귀는 바로 내일 마귀랍니다. '예수 믿는 것도 내일! 교회 가는 것도 내일! 기도하는 것도 내일! 열심 내는 것도 내일!'
모든 것을 안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지말고 해도 내일 하자고 속삭입니다. 오늘날 성도 가운데 내일 마귀에게 사로잡힌 교인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잠24:33절에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우리 오늘 '좀더 자자! 쉬자! 놀자'하는 게으름의 여리고 성을 쳐 부시고, 내일로 미루는 사탄의 전략도 찍어 버리고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시기를 축원합니다. /할/
⑶우리 안에 여리고는 우리 속에 있는 '정욕'입니다.
심리학자 프로이드는 '모든 인간은 정욕의 지배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의 생활 속에 주님의 능력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는 정욕에 의해 지배당하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갈5:17절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약4:1절에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이 정욕 때문에 이웃과의 싸움이 일어나고, 형제간에 다툼이 일어나고, 또 자기와의 싸움이 일어납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연약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하신 성령의 역사 없이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육체의 정욕에 의해 인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사 삼손도 한때 이 정욕으로 넘어져 머리를 깎기 우고 힘을 잃어 적군의 포로가 되어 눈이 뽑히고 맷돌을 가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가롯 유다도 이 정욕에 포로가 되어 예수를 배신했습니다.
여러분! 정욕은 환상이요 착각의 세계입니다. 또한 순간적이요 찰라적인 것입니다. 영원한 기쁨은 그 정욕을 이길 때 있습니다. /아멘입니까?/
⑷분노, 혈기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가로막는 여리고 성입니다.
분노는 죄입니다. 때로는 싸움의 원인이 되고, 살인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첫 번째 살인자 가인이 이 분노 때문에 자기의 동생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엡4:26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잠12:16절에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약1:20절에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할/
⑸하나님이 가장 슬퍼하시는 것이 인간의 '교만'입니다.
교만은 일종의 자기 숭배입니다. 또 거만은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잘난 체 하는 것입니다. 또 오만은 도를 넘어 사람들을 업신여기며, 하나님까지 무시하는 자입니다.
하나님 보좌 가까운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루시퍼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대적자인 마귀가 되었는지 아십니까?
한마디로 하나님과 똑같이 영광과 찬송을 받고자 하는 교만과 자기 숭배 때문에 하늘 보좌에서 쫓겨나 사탄의 괴수가 된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만 믿습니다. 자기가 최고요 자기가 다라고 착각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철저한 겸손의 종교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저 높고 귀한 하늘 보좌 버리시고 이 낮고 천한 곳에 오시면서 겸손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기면서 '너희들도 이렇게 하라'고 겸손의 덕을 보여주셨습니다.
삼하22:28절에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잠16: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약4:6절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 잠29:23절에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할/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교만을 벗어야 합니다.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칼까지도, 체질까지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내 모습 이대로! 죄진 그대로! 허물된 몸 그대로, 병든 몸, 실패한 삶! 그대로 주님 앞에 왔나이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런 기도가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할/
⑹내 속에 있는 '탐욕'도 무너져야 심령 천국이 옵니다.
탐욕은 과한 욕심을 말합니다. 사람이 욕심이 없이 살수는 없지만 욕심이 과하면 욕이 됩니다. 그래서 재물 욕, 명예욕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은 실수하기 쉬운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부하인 아간이라는 사람은 결국 이 탐욕 때문에 망했습니다.
골3:5절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약1: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탐심이 있는 곳에 만족을 모르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기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며 불법을 행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간이 손 된 물건이 어떤 물건입니까? 하나님께 받쳐진 물건입니다. 여기에 손을 댔다면 탐욕에 눈이 먼 사람입니다. 수6:18절을 보면 그렇지 않아도 '전리품에 손을 대면 이스라엘에게 재앙이 내린다'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물건에 손을 덴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입니다. 말씀을 무시했다는 것은 말씀하신 하나님을 무시한 것입니다. 결국 아간은 자기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고 결국 온 집안이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탐욕이 있다면 이웃도 하나님도 안보입니다. 탐욕이 우상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대로 살아야 합니다. /믿/
오늘날도 보면 이 탐욕 때문에 그 인생이 그만 욕되게 끝나버리는 사람들이 너무 나 많습니다. 권력에 탐욕을 부리다가, 물질에 탐욕을 부리다가, 명예에 탐욕을 부리다가, 그만 욕을 당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탐욕은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마지막을 욕되게 만들고 추하게 만듭니다. 바울은 갈5:16절에서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또 24절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할/
⑺이기주의, 인본주의도 무너져야 심령천국을 이룹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사람을 속여서라도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려는 욕심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기주의입니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나만 배부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나만 수지맞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기가 나오고 속임이 나오고 불법이 나오고 변칙, 편법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속이는 저울을 미워하신다'고 잠11: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왜 저울을 속입니까? 자기에게 이익을 더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내가 이익을 많이 남겼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누군가를 그만큼 더 손해 보였다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오늘 큰 횡재를 했다는 말은 누군가가 큰 손해를 보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도 알고 보면 이 같은 자기주의, 이기주의의 태도들 때문입니다. 나만 잘되고, 나만 잘 먹고 살면 된다는 이기심 때문에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우리 안에 불 신앙적인 여리고는 많이 있습니다. 시기심도, 남을 헐뜯는 험담도, 의심과 불평도 다 우리 안에 신앙의 여리고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무너져 내릴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런 것들을 다 내려놓을 때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은총을 받습니다.
롬8:28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할/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여리고를 맡기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무너지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은 하나님께서 해결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여리고라는 큰 장벽을 만났던 것처럼 우리 신앙 길에도 이런 여리고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이든지 사람이 앞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판단이 앞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론이 앞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할/ 그러면 반드시 무너지고 말 것이며 끝내는 정복할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끝이 아닙니다. 예수만 믿으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인 줄 생각하셨을 줄로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시험이 오고, 어려움이 오고, 환난이 옵니다. 광야를 걷기도 해야 하고, 때로는 요단을 건너기도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여리고와 같은 큰 장벽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말 것은 하나님을 믿고 나가면 점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때 승리하는 한 주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수 24:14-15) (0) | 2022.02.11 |
---|---|
지금은 우리가 '씨를 심을 때'입니다! (갈 6:7-9) (0) | 2022.02.11 |
스데반의 설교와 순교! (행 7:1-60) (0) | 2022.02.11 |
삭개오의 행복! (눅 19:1-10) (0) | 2022.02.11 |
부활하신 주님이 갈릴리에 오셨습니다! (요 21:1-14) (0) | 2022.02.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