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인 명설교편◑/추천(가) 명설교 300편

고난은 왜? 이적은 또 왜? (행 28:1-10)

by 【고동엽】 2022. 1. 6.

고난은 왜? 이적은 또 왜? (행 28:1-10)

 

 

지난 주일, 제자훈련 강사로 오셨던 분이 돌아가는 길에 큰 교통사고를 당하셨는데, 모두 운전자가 사망하였으리라 여겼던 사고에서 아주 경미한 부상을 당하고 무사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이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도 장로 부인 권사님들이 기도원에서 3일 금식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중앙선을 넘어오는 덤프 트럭과 충돌하는 대형 교통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사고에 비하면 피해는 너무나 적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지켜주셨음을 깨닫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어느 분이 “왜 큰 사고에서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아예 사고가 나지 않게 해주시지 않으셨을까요?” 하는 말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웃었지만 정말 생각해 볼 질문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아마 그런 생각을 평소에 하셨던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성도들이 고난 중에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과 같은 일들을 통해서 보호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을 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는데, 애초에 그런 어려움이 없게는 못해주시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지난 주일 이상춘 장로님께서 주일예배에 함께 참석하여 모든 교인들이 뜨거운 박수를 쳐드렸습니다. 2006년 7월 간암 3기 진단받은 날 장로님은 수술받고 침상에서 병마와 싸우기 보다는 마지막 남은 심지를 주의 일을 위하여 태우다가 하나님께 가리라 결단하고 퇴직 후 섬기던 여주교도소로 가셨습니다. 그 후 기적과 같은 4년 동안 참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엄격하셨던 교정 공무원이시라고 들었는데, 미소천사로 사셨습니다. 수많은 재소자가 장로님 통하여 새 삶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말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간의 혈관이 터져 병원으로 후송 가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장로님을 부르시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장로님 마음에 ‘하나님 내가 다시 일어나서 교우들과 함께 예배 드릴 수 있는 역사를 보여주세요.’ 하나님이 정말 함께 하시고 역사하셨음을 보여달라는 간절한 기도에 믿어지지 않을 회복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결국 교우들과 함께 예배 드리시고. 그래서 우리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도록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올려드린 것입니다. 장로님의 암투병 그리고 그 암 중에도 사역하시는 일이 하나님이 아니시면 도무지 할 수가 없는 역사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마음에 질문이 생기기를 ‘간암되시고 난 다음에 이런 기적적인 역사를 주시는 것도 너무 놀랍지만, 아예 암에 걸리지 않게 해 주시면 훨씬 더 좋았을 걸.’ 그런 생각도 듭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수많은 이적들을 행하여 성도들을 고난에서 건져 주십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고난을 주시고 이적을 주시는 것입니까? 아예 고난 자체를 주시지 않으시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섭리에 대하여 귀한 깨달음을 주십니다.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14일 동안 죽을 고생하였던 바울 일행 276명이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멜리데(Malta)섬에 상륙하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멜리데 섬 원주민들이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까? 276명이라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조난을 당해서 들어오는데다가 거기에는 로마 군인도 있고 죄수들도 있었으니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될지 그들도 처음에는 난감했을 것입니다. 비가 오고 날은 추워 조난당한 자들을 동정하여 불을 피워 주었는데, 사도 바울이 땔감 나무를 불에 넣기 위해 집어드는 순간 독사가 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순간 멜리데 섬 사람들은 바울이 대단히 큰 죄를 지어 신의 노여움을 산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풍랑에서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으나, 독사에게 물려 결국 죽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바울이 붓지도 않고 죽지도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태도가 180도 바뀌어 신이라고 부르며, 멜리데 섬의 제일 높은 사람인 보블리오(Poblius)가 집으로 초청하여 대접을 하였습니다. 마침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바울이 들어가 안수하여 기도하니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섬 안의 다른 병자들도 너도 나도 와서 바울을 통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멜리데 섬 사람들의 대접이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군인들도 있고 죄수도 있는 276명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난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통해 이적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바울을 '신'이라고 부르며 일행들을 잘 보살펴주었을 뿐 아니라, 겨울이 지나 로마로 떠날 때가 되자 배에서 먹을 음식과 입을 옷까지 준비해 주었습니다.
사실 유라굴로 광풍에서 276명이 다 구원받은 일도 기적입니다. 선원들도 믿을 수가 없었던 일입니다.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싸개로 보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런 일을 보면서 하나님은 고난 중에도 이적을 베풀어주셔서 하나님의 사람을 보호하시고 도움을 받게 하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이 남습니다. 이런 이적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왜 풍랑은 막아주시지 않으셨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선원들이 겨울을 유흥가에서 보내려는 의도로 무리한 항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났지만,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셔서 뵈닉스까지 잘 가서 편안하게 겨울 잘 지내고 로마로 가게 할 수도 있었지 않겠습니까?
풍랑을 만나 죽을 고생을 하게 하고 겨우 목숨은 살려 주신 후 멜리데 섬에 올라갔을 때, 이적이 일어나 뱀에 물려도 살고 병든 자들을 고치게 하셔서 잘 대접받게 하시고, 로마로 가게 하셨다. 왜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고난을 주시기도 하고 기적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당할 때 이적을 볼 때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할 때, 이미 있던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따뜻한 대접을 받습니다.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16절에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자유를 누립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들어갔을 때 분명히 재판을 받을 죄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감옥에 들어가지 않고 군인 한 사람과 함께 따로 지내도록 허락받았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자유인처럼 삽니다. 23절에 보면 마음껏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집에 사람들이 마음대로 찾아오고 그래서 로마에서 복음을 마음껏 전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사도 바울은 로마에 살았던 적도 없고 아는 일가 친척도 없었으며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을 죄인의 신분이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증인이 무려 275명이나 함께 로마로 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폭풍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보았던 275명이 한결같이 자기들 입으로 하나님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말하라 말라 했겠습니까? 자기들이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얼마나 이야기하고 싶었겠습니까? ‘사도 바울 이 사람이 보통 분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고 저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은 놀라운 능력이 있는 것을 우리들이 다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몇 번 씩이나 죽을 뻔했습니다. 이 사람 때문에 다 살았고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아마 275명이 광고하고 다녔다면 로마가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에 대한 대접이 달라졌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죄인 취급을 받지 않고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비밀이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 일행이 유라굴라 풍랑을 피하게 하여 뵈닉스 항구에 무사히 도착하여 겨울을 잘 보내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군인들과 선원들, 그리고 많은 승객들이 유흥도시 뵈닉스에서 3개월 동안 지내면서 온갖 쾌락을 즐기지 않았겠습니까? 그랬다면 편안한 여행은 했을지 모르지만,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게 될 때, 누가 바울의 고백과 증거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었겠습니까? 복음 증거는 사도 바울 혼자 하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이 무슨 관심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섭리가 참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로마에 도착하기 이전에 바울의 일행에게 왜 그렇게 극심한 시련을 주셨는지 이제는 좀 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왜 고난을 허락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통하여 더 유익한 것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무슨 유익입니까?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증거되는 유익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적은 왜 일으키시는 것입니까?
역시 십자가의 예수님의 증인을 세우시려고 이적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275명 다 살려 주셨습니다. 그들 중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사람도 버리지 않고 다 살려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증인을 만드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는 흉악한 사람이 있었다고 합시다. 그들도 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으니 오히려 그것이 얼마나 큰 증거가 되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에 한 사람도 소홀히 생각하는 사람이 없고, 하나님이 쓸데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없습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고난이 닥치기도 하고 놀라운 기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 모든 이유는 오직 하나 우리로 하여금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의 증인되게 해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통해서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진짜 살아계시구나, 예수님 십자가 복음이 참 복음이구나.’ 하는 것을 증거하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고난이 오든 이적이 오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고난과 이적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냐 역사하시느냐 하는 것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고난은 하나님이 안 계신 증거요 이적이 일어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라고 여깁니다. 아닙니다. 고난이냐 이적이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증인을 세우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닥쳤다고 낙심할 것도 없고 이적이 일어났다고 흥분할 것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증거하시려는 성령님께 민감하면 됩니다.

에베소서 6장 16절에서 마귀가 불화살로 공격을 하여 성도도 넘어뜨리려고 역사하니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고 했습니다.
엡 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여러분,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있습니까? 믿음의 방패가 제대로 된 방패인지 아닌지 잘 점검하셔야 됩니다. 마귀가 불화살을 쏘았는데 방패로 막았다고 막았는데 뚫고 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믿음의 방패를 가지기는 했는데 제대로 된 방패를 가져야 됩니다. 제대로 된 방패인지 아닌지는 무엇을 믿느냐고 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믿음을 하나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어서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면 하나님이시구나. 고난이 오면 하나님이 안계시구나. 무엇을 가지고 믿음을 삼으려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 삼으려고 하는 사람은 지금 가짜 방패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종이 방패 들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불화살을 쏘면 그것은 견디지를 못합니다. 왜? 하나님의 능력은 마귀도 얼마든지 흉내 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방패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춘 믿음은 믿음의 방패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이적으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자는 미혹 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마귀도 얼마든지 이적을 행할 수 있습니다.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능력인 것처럼 역사하는 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표적이나 기사나 이적만 보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거나 이적만 추구하면 반드시 실족합니다. 마지막 때가 오면 다 넘어갑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리고 고난이 오면 한 순간에 다 무너져 버립니다.
믿음의 방패를 가지려면 믿음을 하나님의 성품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사랑이시고 지혜가 충만하시며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에 초점을 맞추어야 마귀의 불화살 공격을 능히 이길 믿음의 방패가 됩니다.

욥은 믿음의 방패를 가졌던 전형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큰 복을 주시자 사단은 욥을 참소하기 시작합니다.
욥 1:9-11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지금도 마귀는 이렇게 우리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참소합니다. “잘 될 때나 믿는 것이지요. 이적이 일어날 때나 믿는 것이지요. 고난만 당해 보세요. 어려움만 겪게 해보세요. 다 하나님 욕하고 하나님 어디 계시냐고 하고 떠나가지요.” 그렇게 마귀가 우리 믿음을 조롱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욥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이 본성상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두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은 아니다!” 그리고는 사탄이 욥을 시험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욥 1:1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여러분, 사단이 우리를 참소해서 우리 믿음을 하나님이 점검하시려고 때때로 우리에게 고난을 주셔도 시험을 주셔도 하나님은 다 사단에게 맡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절대 손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어떤 어려움과 시험이 있다 할지라도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절대 마귀가 손 대지 못하도록 지켜주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아야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하셔도 끝까지 지켜주시는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 중에 정신 놓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면 깨닫게 됩니다.
욥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말할 수 없는 시험이 자기에게 닥쳐왔을 때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왜? 욥은 하나님의 능력에다 초점을 맞추어서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도무지 하나님을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형편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자기 재산 다 날아가고 자식들 다 죽고 자기 몸에는 악창이 났어도 그는 사랑의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욥 1: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이런 믿음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욥은 고난이냐 축복이냐를 보고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을 믿기로 결단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욥은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기에게 있던 많은 복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었습니다. 내가 태어날 때 알몸 밖에 무엇이 있었나? 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자기 몸은 그대로니 “하나님 찬송 받으세요!” 고백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믿음이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방패입니다. 욥이 믿음의 방패를 제대로 가지고 있었으니까. 마귀가 욥의 입에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비난하고 원망하도록 그렇게 역사했지만, 오히려 욥의 입에서는 하나님께 찬송이 나왔지 않습니까? 그래서 욥이 나중에 갑절의 복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신실히 믿어야 됩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든 이적을 경험하든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로 인해서 예수님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증거되도록 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어느 자매가 보낸 상담 편지를 받았습니다.“저는 교회에 다니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이렇게 시작하는 메일이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쯤부터 우울증으로 인해서 자살도 하려고 했었고, 스트레스로 몸, 마음이 모두 망가져서 아무런 소망도 없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참 많이 원망했었고, 신은 없다고 믿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제가 5살 때 이혼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교도소에 가기 일쑤였습니다. 7살이었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빠는 없고 아빠 편지만 있어서 참 많이 울었답니다. 그때도 아버지는 교도소에 갔습니다.
저는 그 이후 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에게서 전화 한 번, 따뜻한 말 한 번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둘째 새 엄마와 잠깐 살았었지만 동생을 임신하고는 친 엄마와 자기 중에 엄마를 결정하라고 다그치셨고, 주저하면서 대답을 못하자 저를 할머니에게로 돌려보냈습니다.
아빠가 너무 무서웠지만 그래도 사랑했는데, 고등학교 기숙사 사감 선생님께 상담한 것을 알고는 심한 욕설을 하며 엄청나게 화를 내셨습니다.
견딜 수 없어 친 엄마에게‘너무 힘드니까 데려가 달라.’고 했을 때, 엄마는 거절하였습니다. 수련회를 갔다가 정말 엄마를 용서해야지 결심하고 연락하였을 때, 미안하다며“엄마가 다시 전화 걸께.”라는 말을 끝으로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집에서 혼자 울고, 너무 힘들어서 차에 뛰어들려고도 하고, 창문에서 떨어지려고도 하고, 손목도 그어보고, 약도 먹어보려고 하고, 유서도 써놓았습니다.
부모님을 용서하고, 원망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엄마도 힘들고, 아빠도 힘드니까 나라도 힘내야지. 그러나 잘 되지 않았습니다.
부흥회를 참석하면서 .친 엄마가 계속 생각 났습니다. 너무 외롭고. 정말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런 나 자신이 너무 싫었습니다.
저는 단 한번도 나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저도 언젠가는 예수로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이 메일을 읽고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 설교는 어쩌면 이 자매를 위해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이들이 너무나 쉽게 빠지는 함정이 있습니다. 고난을 주목하느라고 여전히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어느 경배와 찬양 집회에 소록도에서 오신 노인들의 간증과 찬양 순서가 있었습니다. 10여 명 모두 70세 전후의 노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시각 장애자들이었습니다. 10살 전후로 문둥병이 들었고, 그 합병증으로 30세 전후로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은 하나님께 넘치게 감사하는 고백과 찬양을 드렸습니다. 한 분이 이렇게 간증을 시작하였습니다.“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너무 감사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그가 감사한 것은 나병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영원한 소망을 갖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자기를 버린 부모와 형제를 원망했던 것 조차 회개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자리에서 가장 감사를 넘치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고난이냐 이적이냐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 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정말 믿고 다시 상황을 보면 전혀 새로운 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반드시 함께 하시는 주님을 알게 됩니다.

이랜드그룹 회장이신 박성수 장로가 창업 10년쯤 된 어느 날, 지난 10년을 회고하다가 중요한 하나님의 교훈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10여 년 동안 몹시도 괴롭히던 동료 세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의 괴롭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랫동안 참고 인내하면서 그리스도의 본을 보여 줌으로 결국은 그 세 사람이 참으로 많이 변화되어 지금은 그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인물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분은 자신이 이러한 인내와, 오래 참음과 본을 보인 일에 대해서 늘 뿌듯함과 자랑스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마음 속에 이렇게 질문하시더랍니다. ‘너는 누가 가장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을 받은 박성수 장로님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많이 변화되어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세 사람을 변화시키시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 세 사람이 투입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도 허락하시고 또 이적도 행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난과 이적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서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지금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시려고 하십니다.
여러분, 마음 열고 “주님 그렇게 하십시오! 제게 어떤 일이 있든지간에 저를 통해서 예수님이 증거되기 원합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주님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십시다.
은혜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역사를 찬송합니다.
주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감사하게 하소서.
찬양하게 하소서.
믿음의 방패를 듭니다.
고난이 오든 이적이 나타나든 오직 예수님이 증거되기 원합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과일향♡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