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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박종순 목사 설교집 (12)

by 【고동엽】 2022.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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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실패한 관리자들

자료원 :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구 절 : 창세기 1:26-31

인구문제를 연구한다는 어떤 사람이 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창세기 1:28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다"고 했기 때문에 인구폭바가에 대한

전적인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원의 고갈이나 인구의 폭발 책임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망상일뿐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창조는 모든 것이 다 좋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는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았습니다. 그러기에 창세기 1장을 보면 "여호

와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여섯번씩이나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

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는 모두가 유익합니다.

하루살이 곤충도 유익하고 심지어는 사람 몸에 잔털까지도 유익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넉넉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번성하고 충만해도 쓰기에 넉넉한 자원을 만드셨고

살아가기에 아무 불편없는 환경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자원이 고갈되고 환경이 파괴되기 시작한 것은 창세기 3장의

타락사건 이후부터 입니다.

 

3:17하반절을 보면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라고 했고 18절을

보면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부터 땅은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땅은 인간이 살기위해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으리 관리하라고 맡겨 주셨습바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땅을 관리하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인을 잘못 만난 농장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어려서 자란 곳은 농촌이었습니다.

저는 늘 가까이서 두 사람이 농사짓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농사를 마치 예술품을 만들듯이 짓곤했습니다. 논에 짓느

니 농사나 밭에 짓는 농사 모두가 얼마나 정성을 다 하는지 잡초가 자

랄 겨를이 없습니다.

 

못자리를 만들어도 미장할 때 쓰는 도구를 가지고 가서 다듬고 매끈

하게 만든 후에 거기에 종자를 뿌립니다. 그는 매년 모범농군으로 표

창을 받곤했습니다.

 

그에 비해 다른 한사람으니 잡초로 우거져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날이면 날마다 술이 취해 얼굴이 물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농사가 될

턱이 없습니다.

 

그는 농사가 귀찮다면서 몽땅 팔아 도시로 나가 술장사를 시작한다고

그 동네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몇년 후에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

니다.

 

지구의 점하나만도 못한 작고작은 논이나 밭도 주인을 잘 만나야 기

름지고 소출이 많은 법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들은 지구관리에 실패

했습니다.

 

인간은 한마디로 파괴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형상을 파괴했습니다. 양심을 파고했고 하나

님과의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양심을 파괴했고 하나님의

과의 관계를 파괴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에덴동산을 파괴했고 환경마

저 파고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지구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파괴자입니다. 인간이 파괴의 도구가 된 것은 사단이 그 배후

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파괴자입니다. 인간이 파괴의 도구가 된 것은 사단이 그 배후

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네 가정을 파괴하고 그들의 믿음을 파괴하고 행복한 삶도 사단이

파괴하도록 사주했기 때문입니다.

 

1972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국연합 인간환경회의가 열렸었습

니다. 그리고 거기서 인간환경 선언문을 선포했습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92년 6월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유엔환경개발회의

가 열리기까지 사람들은 계속 지구를 살리자는 구호를 외치면서도 계

속 지구를 파괴해 나왔습니다.

 

지구환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만일 인류가 10년내에 지

구를 살려내지 못한다면 끝장이 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바니다.

 

지금 지구 도처에서는 매1분마다 6개의 축구장 크기만한 열대림이 파

괴되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 30년 안에 지구상

에 있는 열대림 3분의 2가 소실될 것이라고 합니다.

 

[조나단 포리트]는 "우리가 지구를 살려내는데 주어진 시간은 앞으로

10년정도 뿐이며 이것은 마지막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

다.

 

오존층의 파괴로 이상 기온 현상이 일어나면서 지구는 사막화되어 가

고 있는가 하면 빙하가 녹아내려 바다 수면이 점점 높아져가고 있기

때문에 지구의 땅넓이는 점점 좁아져가고 있다고 합니다.

 

열대림이 소실됨에 따라 1년에 5만종, 하루에 140여종의 무척추동물

이 멸종해 가고 있으며 결국 다른 생물이 그런 식으로 죽는다면 인간

도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은 잦은 한발과 홍수의 교차현상을 일으키고 태

풍까지 잦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지구가 죽어갑니까?

 

마구 버린 중금속, 마구 뿌려대는 D.D.T , 살충제,농약, 공장폐수,

쓰레기, 프레온가스, 자동차 매연, 합성세제 등 결국 우리가 버리는

몹쓸 것들 때문에 지구가 병들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20:19을 보면 어느 성을 점령하더라도 그 성에 있는 나무는

도끼로 작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무가 사람이 아니기 때문

에 그것들을 공격하거나 작벌해선 안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땅과 나무가 인간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설명해 주

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왜 인간들이 지구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고 지금도 만들어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인간성이 타락하고 썩었기 때

문입니다. 그에 대한 역사적 증거를 댈 수 있습니다.

 

창세기나 출애굽기에 의하면 그 당시 애굽은 중동지역의 곡창이었습

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 동안 그곳에 살면서 먹고 살 수 있었던

것도 그 나라가 비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집트는 한발고 흉년이 반복되는 사막입니다. 식량

도 외국에서 수입해다 먹고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던 가나안 땅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젖

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닙니다.

 

백향목으로 울창했던 레바논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풀 한포기도 나무 한그루도 물주지 않으면 자라지 않는 황무지

기 되어 버렸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이 그렇게 만든것입니다.

자연은 인간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썩으면 자연도 썩고

그 자연이 죽으면 인간도 그곳에 발붙이고 살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

다.

 

환경학자들은 [환경난민]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습니다. 환경난민

이란 그곳에 살 수 없는 환경위기 때문에 쫓겨난 사람들을 말합니다.

 

조나단 포리트는 그가 쓴 [지구를 구하자]란 책 속에서 우리는 지구

를 단기간 빌려쓰는데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개인의 책임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이 지구는 저저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

리고 인간을 만드신 후 거기 살면서 지구를 제대로 관리하라고 얼마동

안 맡겨주신 것입니다.

 

고고학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몇억만년이라고 추측합니다만 그러나 그

것은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이 지

구 위에서 지금까지 살면서 공부하고 장가들고 자식 낳고 그리고 일하

면서 살다가 얼마 후엔 땅에 묻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땅을 잠시 빌려쓰는 인간이라면 그 땅을 제대로 관리해야

합니다. 내 잘못 때문에 오존층에 구멍이 뚫리고 땅이 중금속으로 죽

어가면 안됩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인의 큰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몇가지 실천방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새사람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시편 104:30을 보면 "주의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성령의 능력으로 새사람이 되면 땅도 새로와 진다는 것입니

다.

 

지구회의 환경회의 구호나 표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들이 변해서 새사람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양심이 되살아나고 가치관이 되살아나면 더불어 환경도 땅

도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양심이 제디로 살아있다면 어떻게 공장폐수를 강으로 내보낼 수가

있으며 쓰레기를 몰래 버릴 수가 있으며 공해물질을 버릴 수가 있겠습

니까?

 

양심이 되살고 윤리가 되살고 도덕성이 되살려면 성령님의 능력이 역

사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둘째, 환경보존에 앞장서야 합니다.

 

찬송소리만 크고 기도소리만 크다고 훌륭한 믿음은 아닙니다. 훌륭한

믿음은 생활 솟에서 드러납니다.

 

철야기도 다녀와서 남몰래 연탄재나 오물을 길거리에 버린다면 그건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성령받고 은혜 받았다면서 산업폐수를 강으로 흘려보낸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생활입니다.

 

조금 불펴하고 귀찮더라도 환경을 보존하고 지구를 살리는 일이라면

따르고 실천해야 합니다.

 

예를들면

* 물자를 절약해야 합니다.

* 버리는 것은 함부로 아무렇게나 버려선 안됩니다.

* 태울 수 있는 것과 태울 수 없는 것들을 구분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쓸 것은 써야 합니다.

* 화장실의 정화조같은 경우 자주 청소를 해서 그것들이 생활용수로

스며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 제아무리 펑펑 쏟아지는 수도물이라고 하더라도 아껴 써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일부터 기독교인은 실천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15:23이하를 보면 써서 먹지 못하는 물을 먹을 수 있도록

고친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한 나무를 모세가 물에 던

졌을 때 쓴물이 단물로 변했습니다.

 

땅을 고치고 물을 치료하고 인간성을 고치는 방법은 매튜헨리가 말한

대로 십자가를 통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2:19절 이하를 보면 여리고 지방 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

해 밭에 씨를 뿌리지만 토질이 나빠서 곡식이 자라지도 못하고 결실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엘리사 선지자에게 알렸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사가 새그릇

에 소금을 담아 오라고 하더니 그것을 물 근원에 뿌렸습니다. 그 때문

에 물이 치료되었고 그후로 농사가 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린 이 사건 속에서 소금을 물에 뿌렸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소금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5:13에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였습니

다. 기독교인이 곧 소금입니다.

 

우리는 맛이 잃은 소금입니까, 맛있는 소금입니까? 우리는 쓴물을 단

물로, 죽어가는 땅을 생명이 기식할 수 있는 땅으로 만들 책임이 있습

니다.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1천만 기독교인들이 마음만 하나로 묶

고 생각만 합친다면 우리가 사는 환경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잠시동안 빌려 쓴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쓰거나 포

기해서는 안됩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로 깨끗하게 관리해야 합니

다. 하나님이 주신 세계를 참 아름다운 세계로 만듭시다.

 

발행일 : 921007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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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하나님의 대사들

자료원 :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구 절 : 에스겔 33:7-11

본문의 요지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경고하라는 것입니다.

에스겔 33:1-6을 보면 파숫군의 사명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파숫군이란 높은 성루에 올라가 적군의 침략이나 기습여부를 살피는

사람입니다. 만일 적의 기습을 발견하게 되면 급히 나팔을 부어 긴급

사태를 전체 성민에게 알려야 합니다.

 

그때, 나팔소리를 듣고도 경비를 하지 않다가 성이 함락된다면 파숫

군의 책임이 없습니다. 그러나 파숫군이 적의 기습을 알아차리고도 나

팔을 불지 않음으로 그 성이 점령당한다면 그 파숫군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7절을 보면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 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파숫군이며 하나님이 주신 말

씀과 경고를 마치 파숫군이 나팔을 불 듯 외치라는 것입니다.

 

남의 나라에 주재하면서 정치, 경제, 문화를 대표하는 외교관을 대사

라고 부릅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서 보내신 대사였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흩어져 사는 하나님의 대사들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라"는 말씀은 나의 대사가 되라는 것

입니다.

 

우리는 이 민족과 사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대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1. 복음의 대사가 되사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시다라는 사실이 복음입니다>

 

나는 그 복음 때문에 구원받았고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늘도 존재

하는 것입니다. 세계도처에 선교사들이 흩어져 전하는 복음도 바로 예

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미국의 원주민이 인디언인 것처럼 뉴질랜드의 원주민은 마우이 족입

니다. 그들은 키가 작고 몸집이 뚱뚱합니다. 그리고 얼굴이 검고 투박

합니다.

 

그들의 반가운 인사법은 코를 맞대로 부벼대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선교하는 한국선교사가 어느날 선교하러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반갑다

고 저마다 코를 부벼대는데 어느 한사람의 코가 몹시 헐어 있더랍니

다.

 

보나마나 그 사람의 코를 맞대로 부벼 댔다가는 틀림없이 세균이 옮

아 코가 헐게될 것 같더랍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 코만 외면해 버린다

 

 

 

면 얼마나 상처가 클까 싶어 "에라 모르겠다", "믿습니다" 두 마음으

로 코를 부벼 댔다는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자기 코를 맞대로 부벼대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마우이

족들이 저마다 선교사 부인한테 다가와 코를 맞대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온 몸도 다 내주셨는데 선교를 위해서라면 별로 잘 나지도 못

한 코, 못 부벼 댈 것도 없다면서 내밀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대사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안하면

안되는 것이 복음의 대사입니다. 만일 위가 복음의 나팔을 불지 않는

다면 이민족이 멸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피값을 책임져야 합

니다.

 

본문 33:6을 보면 "파숫군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

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함으로 그 중 한사람이라도 제함을 당하면 그

죄를 내가 파숫군의 손에서 찾으리라"고 했습니다.

 

파숫군이 나팔을 불지 않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값으

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수년 전 지방 국도를 차를 타고 달리는데 마주오던 승용차가 대낮인

데도 헤드라이트를 깜박거리며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함께 탔던 사람

에게 저 차가 왜 저러느냐고 물었더니 전방에 교통경찰이 있다는 신호

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안 일입니다만, 운전자끼리는 서로 그런 신호를 해 준다는 것

입니다.

 

그런 신호는 바람직한 신호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하고 외쳐야 할 신호는 전방에 교통경찰이 있다는

정도의 소식이 아닙니다.

 

그 소식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하라고 주신 명령입니다.

 

전방에 멸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며, 지옥이 입벌리고 있다는

뉴우스입니다. 믿으면 살고 안믿으면 죽는다는, 그래서 지금 당장 믿

으라는 그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의 대사가 됩시다.

 

2. 기도의 대사입니다.

 

바울사도들은 바알신에게, 몰렉신도들은 몰렉신에게, 불교도들은 부

처에게, 회교도들은 알라신에게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합

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본 틀이 지켜져야

합니다.

 

첫째,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응답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꾸밈없이 솔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내용도,고백도, 음성까지도 꾸미면 안됩니다.

넷째,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다섯째, 개인기도는 길어도 상관이 없습니다만 대표기도는 그것이 새

벽이건 주일 낮이건 주일 밤이건 수요일이건 부흥회때건, 사람이 많든

적든 짧게 해야 합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철 주일 낮 예배후 성가대가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

다. 땀을 흘리며 열심으로 연습하는 성가대원을 격려하기 위해 성가대

대장 장로님이 아스케익을 사들고 와서 하나씩 나눠 주었습니다.

 

지휘자가 장로님에게 잠깐 축복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런

데 그 기도가 창세기로 시작하더니 그칠 줄 모르고 길어졌습니다. 문

제는 아이스케익이 녹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방에서 쭉죽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나니까 아이스케익은 온데간데없고 꼬챙이만 남았더라

는 조크가 있습니다. 대표로 하는 기도는 길면 안됩니다.

 

여섯째, 쉽게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운 문장이나 문법의 구성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쉽

게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일곱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해 할 사명을 받은 파숫군들입니다.

기도는 쉬면 안됩니다.

기도는 영혼의 숨소리이기 때문에 기도소리가 작아지고 줄어든다는 것

은 영혼의 숨이 가물거린다는 것이 됩니다.

 

기도를 쉬는 것은 영혼의 기관이 정지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영이 병

들게 됩니다.

 

기도를 소홀히 하거나, 기도를 멀리하거나, 기도를 게을리 하는 것은

그 영이 병들어가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네 가정과 자녀

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 그리고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나팔소리가 시들해지면 안됩니다.

 

지난 6월 7일-11일까지 인천제일교회 사경회를 인도했습니다.

1990년도에 사경회를 인도했던 교회인데 두번째 초청이 있어서 인도

를 하게 됐습니다.

 

집회가 끝나는 목요일 저녁설교 후에 헌금순서가 있었습니다. 목요일

저녁설교는 우리의 신앙과 삶을 환경과 건겅을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

는 분은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 능력이 오늘밤 역사하신다는 내용이었

습니다.

 

헌금이 끝난 후 저더러 축복기도를 해달라면서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저에게 쪽지 하나를 전해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이시영집사 남편이

피 토하는 병으로 위기를 겪고 있으니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쪽지내용은 간단하지만 환자자신은 집회참석을 못하고 그 부인만 참

석을 한 느낌이었습니다. 헌금 감사 기도시간에 기도를 했습바니다.

피가 멎게 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라고.....

 

그 다음 주간 인천제일교회 담임목사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 내

용은 이시영집사 남편이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기적이 일

어났다는 것입니다.

 

계속 피를 토해 혈소판이 5만 이하로 내려가면 죽게되는데 5만까지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요일 저녁 그 기도시간 이후부터 혈소

판이 계속 올라가 27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담당의사들이 이것은 기적이라면서 퇴원해서 잘 먹고 요양하면 된다

는 결론을 내려 퇴원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날 밤 기도의 대사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 것입니

다.

 

기도하면 될 것을 기도 안해서 안된다면 그것은 내 잘못입니다.

도무지 안될 일이 기도해서 됐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믿고 기도합시다. 그래서 굴러 떨어져가는 신앙의 혈소판이 올라가게

합시다.

 

3. 신앙의 대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스라엘을 향하여 경고하려고 하신

목적을 그들로 하여금 올바른 신앙을 정립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게 바른 믿음에 대하여 말하라는 것입니

다.

 

우리 모두는 믿음의 대사들입니다. 나의 믿음은 나만의 믿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믿음은 다음과 같은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첫째, 부부간에 서로 영향을 줍니다.

베드로전서 3장을 보면 믿지 않는 남편이라도 아내의 단정하고

정결한 행위를 보면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

런가 하면 남편의 신앙과 인격때문에 아내가 예수를 믿게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남편의 불신과 부덕때문에 아내까지 지옥가는 사람이 있

는가하면, 여자 잘못 만나서 신앙과 인생도 망가진 사람이 있는 것입

니다.

 

둘째, 부모와 자식간에 서로 영향을 줍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언행과 신앙을 보고 배웁니다. 돌연변이가 있

기 합니다만.대부분 부모의 신앙과 삶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게 됩니

다. 훌륭한 신앙의 부모 밑에서 훌륭한 자녀가 양육됩니다.

 

모세는 어머니 요게벱의 영향을 받고 자라 훗날 민족 지도자가 되었

고 사무엘 역시 어머니 한나의 영향을 영적, 정치적 지도자가 된 것입

니다.

 

그런가 하면 자녀 때문에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부모들도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입니다.

 

셋째, 이웃끼리 서로 영향을 줍니다.

이웃이란 나와 더불어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입니

다. 친구, 이웃집, 동창, 동네사람 등이 거기 포함됩니다.

내가 어떤 믿음생활을 하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고 나쁜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손해나 상처를 줄 수도 있

고 유익과 덕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는 믿음의 대사입니다.

 

지금 미국 대통령선거 열기로 정치가 뜨거워져가고 있습니다. 특히

그 가운데 억만장자라고 소문난 무소속 페로의 화제가 전 매스컴에 오

르내리고 있습니다.

 

1991년 4월 대통령 후보로서가 아니라 기업인으로 페로가 일본을 방

문했습니다.

 

일본과의 합작회사를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합작회사를 설립하고

축하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관례대로 술을 따라 건배를 하는 순서가 됐습니다. 그때 페로씨가 물

었습니다.

 

"잔 속에 들어있는것이 술인가?"라고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물잔으로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마시지 않아도 되니까 형식으로 건배만 하자고

하자 그는 "술을 마시지 않는데 마시는 척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

이다"라며 거절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로부터 페로씨가 좋아졌습니다. 그야말

로 신선한 바람을 쏘인 기분입니다.

 

교회가면 예수님 은혜를 들먹거리고 기독교인 행세를 하는가 하면,

천주교에 가서는 주님을 찾고 천주교인 행세를 하고, 절에 가선 부처

님 은공을 찾고, 회교사원에 가선 알라신을 숭배한다는 정치가나 지도

자를 우리는 신뢰할 수 없습니다.

 

페로씨 같은 사람들이야 말로 믿음의 대사들이 될 수 있는 사람들입

니다.

 

신앙이란 역사나 정황을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믿음을 올바로 지키고 그 믿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증거되고 선포되어야 합니다.

내가 사는 곳마다 예수님이 드러나고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대사가 됩시다.

 

발행일 : 921008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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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칭송하며 선포하며

자료원 :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구 절 : 시편 145:1-10

 

 

시편 145편은 [다윗의 찬송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 시편입니다. 다

윗은 본문에서 자신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고백을 노래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그가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는가 그리고 그 하나님

께 대한 자신의 고백과 결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1. 먼저 다윗의 신관을 살펴봅시다.

 

본문에 드러난 다윗이 하나님 신앙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145편의 서두는 "왕이신 나의 하나님"으로 시작됩니다.

다윗은 4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한 명왕이었고 현군이었습니다. 물론

그에게도 몇가지 실책이 있었고 잘못이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비밀과

흑막에 쌓인 근대정치의 암울한 정황에 비긴다면 다윗의 실수나 잘못

은 문제시 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남북왕조의 역대 왕들 가운데 다윗만큼 선정을 베풀고 백성

의 신임과 존경을 받은 왕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왕을 마치 국부처럼 높이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본문 1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존경

받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라는 고백은 하나님 말고 다른 왕이 있을 수 없

다는 것이며, 하나님만이 영원한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고대 정치구조 안에서 왕과 신하의 관계는 대통령과 백성이라는 관계

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생사가 왕의 손에 달려 있었고,

소유의 여탈도 왕의 재량권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능과 재량권을 송두리채 하나님께

돌려드린 후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위대한 지혜와 신앙이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자신이 모처럼 획득한 왕권과 통치능력을 포기해 버리

고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른다면, 손익득실 면에서 볼 때 어리석은 결

단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롭고 위대한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유는 왕

의 보호와 인도와 공급을 받고 살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걱정이 많고 고민이 많습니까. 그것은 내가 책임진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가능하면 공적인 책임을 맡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책임은 그만큼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모든 것을 맡기고 그 보호아래

살지 않으시렵니까?

 

2) 광대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3절에서 시인은 "여호와는 광대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시인의 하

나님을 광대하시다라고 노래한 것은 다음의 세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스스로 광대하시다는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서나 어떤 힘에 의해서 광대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광

대하십니다. 하나님의 존개 자체가 [스스로 있는 자]이시기 때문에 그

의 능력이나 크심도 스스로 있는 것이지 타력에 의해 정립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둘째, 영원히 광대하시는 것입니다.

정권이 길다든지 나라가 크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제한적입니다.

예를 들면 세계를 지배했던 초대강국이었던 로마도 지금은 별 볼일 없

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해지는 날이 없다던 영국도 지금은 껍질만 남았습니다. 즉 이 지상에

영원히 광대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정권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권세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삶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은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말씀의 은사라는 것도 이 세상에서만 필요합니다.

천당가서 누구를 가르치거나 설교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병고

치는 은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천당에는 병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방언의 은사도 땅에서만 필요합니다. 천당가면 모두가 다 신령한 언

어를 사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크신 팔에 나를 맡기지 않으

시렵니까?

 

셋째, 끝없이 광대하시는 것입니다.

미국이나 소련이 제아무리 넓고 커도 끝이 있습니다. 바다가 제아무

리 깊고 넓어도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광대하심은 끝이 없

습니다. 광대하심 뿐만 아니라 사랑도 끝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에베소 3:19에서 "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고 했습니다.

 

넓고 길고 크고 높다는 것은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은 한마디로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능력도 광대하시고 사랑도 자비도 용서도 광대

하십니다. 그 광대하심 때문에 오늘 내가 사랑받고 용서받고 축복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광대하신 하나님을 믿고 사는 우리들의 마음과 삶의 태도입니

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광대하신 분인데 내 마음은 왜 그리 협소합니

까?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는데 왜 내 사랑은 국한적이고 편협합니까?

하나님의 용서는 무제한적인데 나의 용서는 선택적이고 부분적입니까?

만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때 나의 일부분만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만일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실 때 일부만 용서하신다

면 어떻게 될까요. 만일 하나님이 산소를 주실 때 충분한 양을 주시지

않고 일부분만 주신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알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배웁시다.

 

3)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8절을 보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셨고 다윗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린 여기서 은

혜를 받는 다윗의 태도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으리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비하했습니다.

인간세계에서 다윗은 제일 큰 자입니다. 제일 높고, 제일 강하고 제일

큰 왕입니다. 그러한 그가 "지극히 작은자 보다 더 작은 나"라고 자신

을 낮춘 것입니다. 그는 은혜받기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야고보 4:6 을 보면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

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5에서도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자들

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의 내용들을 8절이하에서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며 선대하시며 긍휼

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은혜는 좋은 것입니다.

많을수록 더 좋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1:28 을 보면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찌어다"라고 했습

니다. 나를 높이지 말고 은혜를 구합시다.

나의 능력이나 소유를 과대포장하지 말고 은혜를 받읍시다. 그것이 평

안하게 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2. 다윗의 결단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하나님은 왕으로 광대하신 분으로 그리고 은혜를 주시는분으로

고백하면서 자신이 어데게 살 것인가를 결단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을 나의 주로 높이겠다고 합니다.

1절에서 "내가 주를 높이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주로 높인다

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높이라고 권하지 않고 내가 높이

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를 높이면 주님이 나를 높여 주십니다. 내가 주를 낮추면 주

는 나를 지옥에 멸하십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인 [크리스 조이스] 는 자신이 최근에 저술한 [정

신과 의사처럼 생각하라 (Think Like a Shrink)]라는 책에서 정신역학

요법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신병 환자가 신속하게 치료되기 위해서는 일체의 자기 방어를 포기

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방어를 하려고 할 때 나타나는 세가기 유형

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무력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대개가 수동적이며 문제의 본질에 집중하지 않고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둘은 감정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밑바닥의 고통을 숨기기 위해 감정을 이용합니다. 상

사한테 야단 맞고난 후 분노의 감정을 피하기 위해 운다는 것입니다.

 

셋은 지성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핑계를 만들고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기

위해 지능적인 합리화를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조이스에 의하면 환자가 일체의 자기방어를 포기할 때 그 치료가 단

기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론을 영적 삶에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일체의 자기 과시

나 방어를 유보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의지하고 신뢰할 때 영혼의 고통

이 사라지고 생명력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약사들의 말에 의하면 한꺼번에 심장약,위장약, 간약, 췌장약, 변비

약, 설사약, 신경통약을 먹을 수는 없다고 합니다. 내가 한꺼번에 많

은 것을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은 높이고 그를 경배하

기만 하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2)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겠다고 합니다.

본문 1절 -10절 사이에서 시인은 주님을 송축, 칭송, 찬양, 노래

한다는 말을 무려 일곱차례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위를

영원히 계속 하겠다고 말합니다.

 

세계 어느나라 사람보다 한국사람은 노래를 좋아합니다. 그러기에 노

래방, 노래연습장이 우후죽순처럼 성업중이라고 합니다.

 

노래방이 뭔가 궁금해서 어느 분에게 물었더니 30분이나 한시간 동안

악보를 받아서 칸막이 된 방에 들어가 돈을 내고 노래를 부른다는 것

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 교회에 나오면 돈도 안내고 오르간과

피아노 그리고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를 수 있을텐데...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영원히 송축합시다.

성가대에게 권합니다. 다윗처럼 주님을 영원히 송축하는 신앙으로 찬

양하기 바랍니다. 찬양과 송축은 호흡이 있는 생명체가 해야할 당연할

의무입니다.

 

시편 150:6을 보면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찌어다" 라

고 했습니다.

 

3) 주의 능하심을 선포하겠다고 합니다.

4절을 보면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라고 했고 6절을 보면

신관도 중요하고 고백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찬송도 중요하고 기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한 선포의 신약적 의미는 선교이며 전도입니다. 우리는 주

의 복음을 만방에 선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회사가, 직장이, 그리고 다양한 일터와 만남이 선포의 현장

이 되어야 합니다.

 

에디슨은 "주님을 아낌없이 찬양하기에는 영원도 너무다 짧으니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복음을 선포하고 전파하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70-80년 세월이 너무나 짧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얻

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입을 열어 선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멸망할 것입니

다. 그리고 나는 그 피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칭송합시다.

그리고 선포합시다.

복음선포는 우리에게 해야할 종말적 사명입니다.

 

발행일 : 921008

분 류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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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사람

자료원 : 충신교회 박종순목사

구 절 : 고린도후서 12:1-9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늘을 셋으로 구분했습니다. 첫째 하늘은 날

짐승이 날아다니는 하늘이고 둘째 하늘은 달과 별 그리고 해가 떠 있

는 하늘이고 세째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신령한 하늘이라고 생각했

습니다.

 

첫째, 하늘보다는 둘째 하늘이 높고 둘째 하늘보다는 세째 하늘이 높

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셋째 하늘은 에녹이나 엘리야같은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이 올라가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사도는 바로 그 세째 하늘에 올라가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본

분은 그가 세째 하늘에 올라간 신비한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의 바울의 세째 하늘 경험이 주는 간증과 교훈을 발

견하게 됩니다.

 

1. 그런 경험을 말하는 것은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영적체험은 환상과 계시를 통한 것이었습니다. 즉, 그는 신령

한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계시는 그리스도인

이라면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직접 날마다 하나님의 모습을 직접 뵉고 그 음성을 듣는다면 얼

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것은 무익한 자랑이라고 못박고 있

습니다.

 

바울이 가장 자랑했고 자랑스럽게 여긴 것은 신비한 체험이 아닙니

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그의 자랑이었습니다. 즉,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자랑이라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계시자랑, 환상자랑, 병고치는 자랑은 결국 자기를 과사히게 되기 때

문에 그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 안에 능력받았다는 사람들과 병고치는 사람들과 기

적을 행하는 사람들이 병자를 고치고 능력을 행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들은 말로가 좋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예수의 복음자랑은 퇴색하고 자기 자랑쪽으로 세월이 지날수

록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병자를 수없이 고쳤다는 어느 권사

님은 천당 갔더니 자기 집이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너는 세상에서 예수 이름으로 병고치고 능력행하면

서 영광은 다 받고 잘 살았기 때문에 받을 상이 없다"고 하더랍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하지 않았습니다만, 경고를 주는 이야기임엔

틀림없습니다.

 

성령께서 주신 은사는 본인이 간직하고 복음 전하는데 사용해야지 그

 

 

 

것을 자랑하는 것은 무익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은사를 받았든지 어떤 능력을 받았든지 우리는 다음의

기본틀에서 벗어나면 안됩니다.

 

첫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내가 받은 은사나 가진 것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내가

그 영광을 받거나 그 영광을 가로채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도 주셨지만 영광은 양보하지 않습니다.

 

둘째, 성경대로 활용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활용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제아무리 능력을 받고 은사가 충만하다고 해도 성경에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셋째, 교회에 덕을 끼치고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은사받은 사람들일

수록 성령 충만한 사람들일수록 교회 덕을 세우고 교회의 지도자에 순

종해야 합니다.

 

넷째, 함부로 그 은사를 남용해선 안됩니다. 사도행전 2장의 경우 성

령을 충만히 주신 것은 복음 전하라고 주신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다양한 은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그 은사도 역시 복음

을 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전하지 않고 함부로 은사를 남용하거나 남발하면 하나

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부득불 자랑한다고 하는 본문의 말씀은 어쩔수 없어서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겸손이 아닐 수 없습니다.

 

2.세째 하늘에 이끌려 갔습니다.

 

2절 중간을 보면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두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는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가]라는 대명사로 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경험한 신비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세째 하늘에 올라갔다면 그것은 최고의 하늘인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2절 끝을 보면 그가 몸안에 있었는

지 몸 밖에 있었는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요즘으로 말하면 입신상태

를 의미합니다.

 

4절을 보면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

고 했습니다.

이쯤되면 자기 이름과 그 사건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자랑하고도 남은

이있습니다.

 

요즘 은혜받았다는 사람들은 바늘만한 신비를 체험하고도 황소만큼

부풀려 떠벌리는 일들이 많습니다. 천당 갔다왔다는 사람도 있고 죽었

다가 깨어났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직접 통화를 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구실만 있

으면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자기를 과시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엄청난 신비를 체험하고도 자기이름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우린 여기서 배울 것이 많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내가 자꾸

드러나면 안됩니다.

 

둘은 이끌려 갔다는 것입니다.

2절 셋째 줄에서도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갔다"고 했고 4절에서

도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자기가 세째

하늘을 구경하러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이끌려 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 삶의 인도자가 하나님이시며 그 인도를 절대 순종하고

살아나온 바울의 삶을 한마디로 설명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 어디서나 이끌림을 받는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가고 싶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선택하

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의 결과를 따라 주시는 선물이며 은혜

입니다.

 

귀신의 영이나 사단의 능력은 내가 노력하고 힘씀으로 접신이나 강신

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내가 노력한다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낙원을 구경했고 그곳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계시를 받았습

니다면 그는 하나님이 이끌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점이 바울

의 위대한 점이며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3. 자랑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5절을 보면 그런 것들은 자랑할 수는 있으나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

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쓴 서신들 속에서 위대한 교훈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

가 쓴 서신들도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

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 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등 13권에 달합니다.

 

그런데 그는 단 한번도 자기 자신이 행한 기적이나 능력을 언급하거

나 쓴일이 없습니다. 바울도 기적을 많이 행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9:17 을 보면 아나니아에게 안수받고 성령충만을 체험했습

니다.

 

사도행전 14:8 이하를 보면 루스드라지방에서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는 한마디로 그를 고쳤습니다.

 

사도행전 16:25이하를 보면 빌립보옥 중에 갇혀있을 때 기도하다가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28:1이하를 보면 멜리데 섬에서 독사에 물렸으나 죽지않고

기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적과 능력들은 바울 자신은 그가 쓴 편지들 속에서

단 하가지도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울을 수행했던 의사인 누

가가 쓴 사도행전에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입이 없어 말을 안한 것도 아니고 문자를 몰라서 그것을 남기

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자랑하면 자기 인기나 위신이 급상되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에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자랑하고 약한 것들만을 자랑

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일어나 걸으라는 한

마디로 고쳤습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마음을 꿰뚫고 그들

이 돈 감춘 사건을 들춰내는 능력을 행했습니다.

 

사도행전 9:32 이하를 보면 룻다지방에서 중풍병으로 8년을 누워 고

생하던 애니라는 사람을 고치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사도행전 10:44을 보면 그의 설교만 들어도 방언을 하는 역사가 일어

났습니다 .

 

사도행전 9:36 이하를 보면 욥바에서 다비다라는 여자가 죽어 그 시

체를 다락에 뉘어 놓았는데 기도하고 살려낸 기적도 행했습니다.

 

사도행전 5:15-16을 보면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 그림자만 환자위에

덮이면 병자들이 고침받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기록

역시 베드로가 쓴 베드로 전후서에서는 없습니다. 누가가 쓴 사도행전

에만 언급이 되어 있을뿐입니다.

 

우리는 바울과 베드로의 능력과 기적을 대하는 자세 속에서 실로 많

은 것을 깨닫고 배우게 됩니다. 주님만 자랑하는 것은 성령충만이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사단의 유홀입니다. 주님만 자랑합시다.

 

위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다시한번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올바르게

관리하는 자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모든 은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둘째,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셋째, 교회 덕을 세우고 순종해야 합니다.

넷째, 함부로 은사를 남용해선 안됩니다.

 

환청, 환상, 계시, 병고치는 능력, 영서,속삭임 등 이런 것들을 이미

주신 성경말씀보다 더 높이고 남용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다섯째, 함부로 기도해 준다로 머리에 손을 얹거나 아무나 찾아 다

니면서 안수받는 것을 금해야 합니다.

 

가장 바람직한 기도생활은 내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위해 기도 전문가처럼 기도해 준다든지 전문가를 골라

기도를 받으러 돌아 다니는 것은 금해야 합니다.

 

안수기도는 그 사람이 받은 은사나 능력을 전수한다는 긍정적 요소가

있는가 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귀신의 영을 전수한다는 부정적

요소도 있기 때문에 함부로 안수를 하거나 받으면 안됩니다.

 

여섯째,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병고치는 은사 받았다고 왕진의사처럼 돌아다니면 안됩니다. 예언은

은사를 받았다고 점쟁이로처럼 안됩니다.

 

능력의 은사 받았다고 전능자처럼 굴면 안됩니다.

신령한 섹례를 듣고 보았다고 해서 함부로 입을 열고 말을 옮겨선 안

됩니다.

 

영적인 세계, 신비한 세계에 깊이 들어갈수록 마귀의 역사가 나를 강

하게 공격하고 틈타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깨어라 근신하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하신 그 말씀의 대상은 불신자나 초

신자가 아닙니다. 신앙의 깊은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조심해야된다는 것입니다.

 

말씀만 붙잡고 신앙생활을 하면 냉냉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신비한 세계를 사모하고 신령한 생활을 힘쓰다 보면 고무풍선처럼 붕

붕 뜨는 단점이 있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충신교회의 신앙생활)은 지적이면서 영적이고 영적

이면서 지적인 조화와 균형에 있습니다. 신령한 은사로 충만한가하면

그 은사를 조절할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말씀을 실천하는가 하면 깊이 있는 기도와 영

적은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받았다고 고무풍선처럼 들뜨는

것보다는 말씀의 능력에 사로잡혀 그대로 살고 열심으로 전도하고 교

회에 봉사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합니다.

 

세째하늘에 올라갔던 바울이 그 사실을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

은 이유는 장차 우리가 다 들어가서 직접 보고 경험할 세계이기 때문

이었습니다.

 

성령충만하고 능력 넘치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신령한 힘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가 됩시다.

그리고 그 체험과 능력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도합시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데 그 능력을 쏟읍시다. 할렐루야

 

발행일 : 9201006

분 류 : 설교

 

 박종순목사 설교집.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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