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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스럽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 눅 13:18-19

by 【고동엽】 2021. 12. 25.

부담스럽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누가복음13:18-19

 

설교방송 (설교본문)

 

 

 

작년 에, 전에 담임목회하던 교회의 장로님 한 분이 3년 가까이 간암으로 투병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때 장로님의 연세가 막 60이 되시던 해였는데, 세상을 떠나시기 마지막 몇 개월은 참 많은 고통을 겪으시기도 했습니다. 돌아가시기 3일 전에 장로님의 간곡한 심방 부탁을 받고, 이미 그 교회를 떠난 뒤였지만 제 아내와 같이 심방을 갔습니다. 그 때 저는 그 장로님을 마지막 뵈었는데, 저는 그 때 뵌 장로님의 모습, 함께 나누었던 말씀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체격이 좋으셨는데,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야위셔서 가죽만 남으신 듯했고, 흑달증세로 얼굴이 까맣게 되셨는데,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고 계셨습니다. 많은 대화는 할 수는 없었고, 가끔씩 몇 마디 주고받는 대화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장로님이 있는 힘을 다해서 제게 기도부탁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 지금 죽으면 안 됩니다. 건강회복해서 10년만이라도 더 살았으면…." 그때, 장로님의 깡마른 두 볼에는 어느 새 금방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한 참을 그렇게 우시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지금 하나님 앞에 가려니까, 제가 그동안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서…, 정말 부끄러워서 못 죽겠습니다." 하시는 겁니다.

 

 

 

저는, 장로님의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한 인간이 그가 어떻게 한 평생을 살았던지 결국은 그 삶은 하나님 앞에 있는 삶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아하, 인생은 사명(使命)이구나"하는 것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장로님이 하신 그 말씀은 그 후에 저에게 굉장히 중요한 '한 가지 문제'를 던져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렇다면 장로님의 인생은 장로님 말씀 그대로 정말 부끄럽기만 한 인생이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 장로님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면서 '아무것도 한 것 없는 부끄러운 인생이었다고 생각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만일 나에게도 지금 내 인생의 죽음이 닥쳐온다면, 장로님과 같은 동일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을까?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서 정말 부끄러워서 못 죽겠다는 동일한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죽음을 목전에 둔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전제(奠祭)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時刻)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義)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니,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라." 그렇다면, 이 고백은, 위대한 선교사의 삶을 살았던 바울 혼자만의 고백일 수밖에 없는가? 아니면, 사도 바울보다 더 멋진 고백을 하면서 내 인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마칠 수는 없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어떤 고백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게 평가하고 생각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복음적인 그 기준을 가지고 계십니까?

 

 

 

저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 스트레스의 정도(程度)가 지나쳐서 늘 패배의식을 가지고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한 번 곰곰이 검토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때, 자녀들이 '어떤 인물'이 되기를 기도합니까? 여러 가지 내용과 다양한 표현들이 많겠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들 딸 세상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위대한 인물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솔직한 우리의 기도가 아닙니까? 그 위대(偉大)함의 의미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다 공감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녀들이 늘 기도하는 것처럼 그런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아직은 아니지만 그런 위대한 인물이 되어 가고 있습니까?

 

 

 

문제는, 우리의 그와 같은 기도와 기대(企待) 때문에, 내가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그 기대치와 삶의 현실 사이에서 오는 패배의식과 절망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우리는 늘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무조건 위대해져야만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반드시 출세해야 하고, 성공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남보다 더 뛰어나야 하고, 할 수만 있으면 2등, 3등이 아니라 꼭 1등해야만 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우리를 언제나 그렇게 만드시는 분인 줄로 생각합니다.

 

 

 

만일 지금 내가 그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그 스트레스가 정말 복음적(福音的)인 것인가를 한 번 물어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일등(一等)만 기억해주지 이등(二等)은 기억해 주지 않는다"는 어느 기업의 광고 카피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무한 경쟁 시대의 현실을 잘 표현해주는 말입니다. 우리를 기 죽이는 광고 카피입니다. 우리에게 불안감을 주고, 절망감을 주고, 스트레스 받게 하는 말입니다. 불행하지만, 우리는 예수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등만 기억해주시지 이등은 기억해 주시지 않는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그릇된 비복음적인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그로 인해 우리가 받고 있는 삶의 스트레스, 절망감, 패배의식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등(一等) 하느냐, 이등(二等) 하느냐, 아니면 꼴찌를 하느냐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런 상대적인 평가와 기준으로 우리 인생을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성공하느냐, 출세하느냐, 일등을 하느냐, 이등을 하느냐, 꼴찌를 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릴 때마다 정말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저와 여러분의 삶의 자리인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최선을 다하여 일등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최선을 다했지만 이등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은 이등에도 만족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정말 최선을 다했지만 꼴찌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때로 꼴찌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의 바벨론 포로시절 느부갓네살 왕 때,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꼴찌를 자청한 용감한 신앙인들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들의 생명을 삼키는 풀무불 속에 뛰어든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神像)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 17-18). 이들은, 오히려 꼴찌인생을 택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관심을, 오늘 본문 누가복음 13, 18-19(마 13, 31-32; 막 4, 30-32)절에 나오는 예수님의『겨자씨 비유복음』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이 겨자씨의 비유복음을 두 가지 전통적인 관점에서 이해해왔습니다. 그 하나는, '성장(成長)이라는 관점'입니다. 씨앗 중에 가장 작은 씨앗인 겨자씨가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낸다는 겁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들도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비유복음을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成長)을 말씀하시기 위한 비유라고 생각했습니다. 성장의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 비유를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이라는 관점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매우 피상적인 이해에 불과합니다.

 

 

 

또 하나의 관점은, '대조적(對照的)인 관점'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겨자씨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라 하십니다. 그런데, 그 겨자씨가 심긴 후에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면, '큰 나물'(무)이 되고, 가지도 내고 공중의 새들도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땅 위의 가장 작은 씨앗과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 된 '큰 나물'에 대한 '대조적인 관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겨자씨의 비유복음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 자라 큰 나물이 된 겨자나물에 대한 대조적인 관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하나님의 나라, 헤 바실레이아 투 쎄우』를 말씀하시면서, 왜 하필이면 겨자씨의 비유복음으로 말씀하셨을까를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 비유복음을 말씀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는 그저 단순하게 성장(成長)하고, 그 성장의 정도를 보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성장한다는 대조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말씀하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겨자씨와 겨자나물의 성장과 대조적인 크기보다, 훨씬 더 큰 성장(成長)과 대조(對照)를 보여줄 수 있는 다른 것으로,『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으면 더 적절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점입니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조금 신경을 써서 답(答)을 생각해 보시고 각자 답을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겨자씨 비유복음』을 들었을 때, 그들이 놀라고 기뻐했겠습니까? 아니면, 실망하고 낙심했겠습니까? 아니, 이 비유복음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비유복음을 들었을 때, 유대인들은 언제나 그 말씀에 기쁨으로 응답했겠습니까? 아니면, 실망하기도 하고 예수님의 그 비유복음을 오히려 거부했겠습니까?

 

 

 

저는, 후자(後者)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복음은 언제나 그들에게 탐탁찮은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들이 기대하지 않고, 바라지 않는 대안적(代案的)인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지혜로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꿈꾸고 있던 하나님의 나라는, 에스겔서(겔 17, 22-23)와 다니엘서(단 4, 1-12)에 나오는 백향목(柏香木) 같은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백향목은, 세계적인 유명한 나무입니다. 그 높이가 36m정도 자라고, 나무의 몸통둘레가 9-12m까지 자라는 대단한 나무입니다. 유대인들은, 백향목을 가장 크고 아름다운 나무로 보았고, 그 나무는 언제나 중심(中心)에 우뚝 서고, 다른 모든 것보다 더 크고 장대해서 그들이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의 표상을 말해주는 상징적인 나무라 여겼습니다. 이스라엘은 백향목 같이 온 세계의 중심(中心)에 서고, 땅 끝에서도 그 중심에 선 나무를 볼 수 있는 최고(最高)의 나무로서 이스라엘,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고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같은 백향목과 같은 하나님의 나라, 크고 강대했던 다윗 왕국과 같은 강대한 이스라엘의 미래를 꿈꾸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반문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비교할 대상을 찾으십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막 4, 30-32)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과 그림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하고 꿈꾸던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 그림과는 전적(全的)으로 다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외모로 보기에도 아름답고, 늠름하고, 잘 생긴 백향목 같은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찌보면 그것과는 정반대로, 초라하기 그지없는 "겨자풀"이나 "푸성귀"로 보이는 그런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겨자 나물은, 다년생 나무가 아니고 일년생 초본, 풀에 불과합니다. 다 자라야, 겨우 1.5m나 2m정도 밖에 자라지 않는 초본(草本)과에 속한 나무입니다. 그 굵기도 겨우 손가락 굵기 정도밖에 안되는 정말 볼품없는 나물 같은 나무입니다. 겨자나무(나물)는 나물인지 나무인지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는 그런 식물입니다.

 

아무리 크다는 것을 강조한다 해도 그저 나물과 나무 사이에 있는 존재입니다.

 

 

 

저는,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하나님의 나라』의 깊은 진리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꿈과 기대와 가치관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은, 겨자나물 같이 초라한 내 삶을 부정하고, 백향목 같이 위대한 삶을 꿈꾸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내 삶의 자리를 그대로 긍정하는 데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됩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백향목 같이 온 세계의 중심에 서야만 하고, 그 어느 것보다 높은 높이를 자랑하는 그런 세속적인 위대한 나라가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나라입니다. 실망스런 나라입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 비유말씀대로 표현하면, 내가 땀 흘려서 충분히 경작할 수 있는 작은 텃밭 "내가 소유한 그 채소밭"에서 조용하고, 작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가장 작은 씨앗인 겨자씨가 채소밭에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고, 공중의 새들도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되는 것처럼, 낭만적(浪漫的)이고, 자연적(自然的)이고, 목가적(牧歌的)이고, 사랑이 가득한 그런 나라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는 저희 둘째 아들레미가, 여름방학을 하면서 학교생활통지표를 가지고 왔습니다. 요즘 초등학교의 통지표를 보면, 아이들의 학업발달을 숫자로 표시하지 않고,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전체 10 과목을 공부하고 있는데, 담임선생님이 얼마나 정확하게 아이를 이해하고 파악하고 계시는지, 그 통지표를 보면서 많이 놀랐습니다. 그러면서, 아직도 학교에 한 번도 찾아가서 인사드리지 못했지만, 선생님께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우리아이의 행동 특성 및 종합의견을 보면서 저는 참 기뻤습니다. 제가 기뻐했던 이유는, 우리아이가 완벽한 아이라서가 아니라, 아직도 여전히 문제가 있고 미완성의 아이이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있고 소망이 있고, 객관적으로 아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선생님이 이렇게 기록하셨습니다. "행동이 매우 민첩하고 순발력이 뛰어나며 명랑하여 친구들과 즐겁게 학교생활에 임합니다. 두뇌가 명석하여 학습내용을 빨리 이해하므로 전 교과 성적이 고루 우수합니다." 그 다음이 제가 가장 기뻐했던 이유입니다. "수업시간 시 산만하고, 가끔 장난을 심하게 치는 경우가 있으므로 2학기에는 고쳐야겠습니다." 저는, 우리아이의 문제를 기뻐합니다. 긍정합니다. 그 이유는, 그 문제를 넘어서, 그의 인생 속에서 이루질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저는 우리 아이들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과 기업인 사랑하는 딸과 아들을 축복하시되,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그들의 인생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이것이, 우리아이들을 위한 저의 기도제목 전부(全部)입니다. 사랑하는 제 아이들을 위한 저의 기도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매우 단순해졌습니다. 위대한 인물 되게 해주십시오. 세계적인 인물 되게 해주십시오. 언제나 중심에 서는 사람 되게 해주십시오. 우뚝 솟은 인물 되게 해주십시오. 저는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인생인 자기 채소밭에 심겨진 겨자씨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겨자나물처럼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고, 가지를 내어서 공중의 새들도 와서 깃들일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사는 자들이 되기를 기대하고 축복합니다. 저는 정말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내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인생텃밭 채소밭을 긍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현재의 삶의 자리, 지위, 신분을 긍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병든 몸도 긍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요함과 가난도 긍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 남이 알지 못하는 아픔과 눈물, 외로움이 있다 해도 그것까지도 긍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크지 않다고 부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높지 않다고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혹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과 같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절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내 인생의 채소밭에, 내 삶의 자리에, 겨자씨와 같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 씨앗이 심겨져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자리가, 인생의 채소밭이, 어떤 모양의 밭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길쭉하던지, 동그랗든지, 세모났던지 아무 상관없이 그곳에 겨자씨와 같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 씨앗이 심겨져 있기만 하면, 분명히 내 인생 속에도 우리 주님이 꿈꾸시는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가장 작은 씨앗 같은 복음이지만, 그것이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고 가지를 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공중의 새들도 와서 내 인생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 깃들이며 안식하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채소밭에도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인 겨자씨가 심겨져 있습니까? 주님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며 도전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저와 여러분의 가슴과 삶 속에서 꽃이 피고, 작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하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내 삶 속에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옥에 갇힌 여기 있는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먹을 것을 주고, 영접하고, 옷을 입혀주고, 돌보아 주는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언제나 높아지고, 중심에 서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고, 변방으로 가고, 어디서나 나지막하게 자랄 수 있는 겨자나물 같이 우리 안에서 조용하게 그러나 힘있게 생명력 있게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와 같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시기 위하여,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텃밭을 사용하기를 기대하고 원하십니다. 그 주님의 부르심(召命)과 기대(企待)에 복음적으로 응답(應答)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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