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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 명설교편◑/추천(가) 명설교 300편

골방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 / 마 6:5-8

by 【고동엽】 2021. 12. 23.

골방에서 기다리시는 하나님/ 마 6:5-8

 

 

교회를 다니시는 분들에게 가끔 질문을 던져 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특별히 어렵다고 느끼는 것이 어떤 것이 있습니까?" 그러면 놀랍게도 많은 분들이 기도가 어렵다고 대답을 합니다. "기도가 제일 힘들어요. 어떻게 기도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1분만 기도하고 나면 할 말이 없어요. 목사님 기도를 꼭 해야 됩니까?" 이런 이야기들을 가끔 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위급할 때 신을 찾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막상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하면 생각보다 쉬운 게 아닙니다.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 어떤 면에는 솔직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감을 가진 육체를 입고 땅에서 사는 아주 미천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시공의 세계에 갇혀 있습니다. 따라서 영이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하나님은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아야 알 수 있고, 들어야 깨닫고, 손으로 만져야 느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눈을 감고 있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손을 휘둘러 봐도 잡히는 것도 없습니다. 들리는 음성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는 것,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기도가 이렇게 어렵다 보니 잘못된 기도를 하는 일들이 많이 발생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나라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바른 기도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 본문 말씀은 바로 유대 사람들이 잘못하고 있는 기도를 지적하시고, 무엇이 참된 기도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드리는 기도가 어떤 면에서 잘못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이 크게 두 가지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는,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린다고 하면서 실상은 사람에게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에게 기도를 하느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설명을 들으면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을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이 5절에 그렇게 지적하시지 않았습니까? '또 너희가 기도 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결국 그들은 사람에게 기도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오래 전부터 기도의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좀 더 철저하게 가르치고, 또 기도를 더 잘하도록 하기 위해 그 방법을 궁리하면서 열심을 지나치게 많이 낸 덕분에 이상한 방향으로 갔습니다. 기도를 세트(set)화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내용과 형식, 시간까지 모두 규격화 시켰다는 말입니다. 좀 더 종교적인 용어로 빌면 의식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마다 제품을 만들듯이 기도를 만들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기도가 소위 '쉐마' 라고 하는 것인데, 신명기 6장 4절에 있는 구절을 그대로 반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들으라. 주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하나인 하나님이시니.' 이런 말씀을 하나의 기도문으로 규격화 해서 그것을 계속 외우도록 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여러 가지 중요한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슬픈 일을 당한다, 기쁜 일을 만난다, 여행을 한다.' 하는 식의 일들 말입니다. 그런 일들 하나하나에 해당하는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심지어 '밥 먹기 전에 하는 기도, 밥 먹은 후에 하는 기도, 취침시간에 하는 기도, 아침에 하는 기도.' 이런 식으로 기도를 요란하게 만들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그대로 하게 했습니다. 내용만이 아닙니다. 시간까지 세트화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시간으로 9시, 12시, 3시는 기도시간으로 정해 놓았습니다. 이런 기도 문화가 예수님 당시에 온 세상에 만연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예수님 보시기에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기도였습니다.

 

이런 기도에 유대나라 사람들이 익숙해지자 자기도 모르게 점점 외식에 빠졌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한번 이렇게 상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예루살렘 거리입니다. 시간이 12시가 되었습니다. 기도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흔히 유대나라 사람들이 하듯이 두 손을 들고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럼 일반 사람들은 한 1,2분 그저 '쉐마'를 외우고 눈을 뜨고, 또 평상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 경건하다고 소문이 나 있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일부러 손을 높이 들고 오래 시간을 끄는 것입니다. 계속 같은 기도를 반복하면서 시간을 질질 끌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 '아, 저 바리새인 참 기도 많이 하시는구나. 참 경건하신 분이다. 참 존경이 간다.' 하는 소리를 수근거립니다. 그런 소리를 기도하면서 듣는 것입니다. 벌써 자기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시간을 끌면서 손을 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맛을 알게 되자 어떤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일부러 기도시간이 가까워 오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장 바닥이나 회당거리, 아니면 큰 도시 모퉁이에 서서 기다리다가 기도시간이 되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을 아주 꿰뚫어 보시고 5절 끝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저희는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사람 앞에 기도하는 것이요, 사람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유대나라 기도가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주님께서 기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 입니까? 여러분 우리도 그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기도할 때는 왜 그렇게 유달리 길게 해야 합니까? 다 사람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교포 사회에 가면 가끔 이런 장면을 봅니다. 미국 사람들도 있고 한국 사람들도 있는 식당에 몇몇이 들어가서 식사를 하는데, "누구 기도 좀 합시다." 하면 벌떡 일어나서 큰 소리로 기도를 합니다. 거기가 어디 교회당입니까? 주변 사람들이 쳐다봅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과시하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 믿음이 좋다. 미국 사람들은 식사할 때 기도도 잘 안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식사한다.' 이것을 은근히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라도 짧게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오래 합니다. 제가 볼 때는 바탕이 무엇인가 잘못된 기도입니다. 평소에 가정에서는 기도 안 하던 사람이 강대상에 서서 대표 기도 할 때는 왜 그렇게 기도가 깁니까? 집에서는 5분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이 강대상에만 서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모세를 지나 선지자들을 거쳐, 나중에는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는 요한계시록의 예수님 재림까지 죽 훑는 장로들이 가끔 계십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장로님들이 아직 한 분도 안 계십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1부 예배 때 기도하시는 권사님들을 가만히 봐도 얼마나 기도를 은혜스럽게 잘 하시는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면에서는 좋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는 장로님이 올라와서 기도했다 하면, 벌써 한숨 소리부터 먼저 나옵니다. '아, 한참 기다려야 되겠구나.' 왜 그렇게 합니까? 사람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경건하게 보이거나, 기도를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생각밖에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또 주님이 지적하신 유대인들의 기도에 잘못된 것은 중언부언하는 기도였습니다. 7절에 주님께서 그렇게 잘 지적해 주셨습니다. '또 기도 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아느니라.' 중언부언이 무엇입니까? '바타로 게오'라는 헬라어 말인데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의미가 있는 말이라도 생각을 담지 않고 계속 지껄이는 것을 일컬어서 중언부언이라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유대나라 사람들이 규격화된 기도, 세트가 된 기도를 계속 반복하면서 '그것을 수없이 반복하면 하나님이 설득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면, 그 기도는 틀림없이 중언부언의 기도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중언부언하는 기도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요인들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많이 반복합니까? 시간을 오래 끕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설득 당할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합니까? 주님이 보실 때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반복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반복하셨습니다. 성경에는 3번 밖에 반복이 안 나왔지만 우리가 볼 때에 그렇게 긴 시간 3번만 반복해서 기도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힘을 다하여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말씀 한마디만 하셨겠습니까? 다섯번만 하셨겠습니까? 10번, 20번도 반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기도를 반복하실 때마다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방울에 피가 섞였습니다. 자기의 전인격, 모든 힘을 다 그 말 한마디에 담아서 하나님 앞에 드린 기도였습니다. 이렇게 기도는 아무리 반복해도 중언부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자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그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한국교회를 가만히 보면 중언부언 하는 기도가 너무 많습니다. 끝없이, 무슨 말이든지 주어 대가지고 이어가야 기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를 유창하게 한다고 하는 분들을 가만히 보면 단어 하나에 형용사 10, 20개를 갖다 붙입니다.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며, 사랑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 그래 놓고 그 다음에 '언제든지 진실하시고 온 땅에 충만하시고' 하면서 한참 갖다 붙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래야 들으신다고 생각합니까? 그건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모독입니다. 한마디를 해도 왜 내가 이 말을 하는가를 알고 기도해야 됩니다.

 

이상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해놓고는 사람 보고 기도하고, 인격자 되신 하나님 앞에 중언부언 기도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이것을 지적하시면서 드디어 예수님은 어떤 기도가 참 기도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중요한 두 가지를 우리에게 교훈하셨습니다. 귀를 기울이십시오. 우리의 기도가 다시 힘을 얻고, 우리의 기도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할 수 있기를 원하고,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골방에서 우리를 만나시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이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골방에서 하나님은 만나기를 원합니다. 6절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하나님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즉 응답해 주실 것이다.' 골방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단 둘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밀실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서든지 우리는 골방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고 내가 그분과 상대할 수 있는 여건만 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골방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란한 곳을 피하여 산이나 저 들판에 가셔서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산이 골방이었습니다. 들판이 골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골방을 좋아하실까요? 왜 하나님은 하필이면 골방에서 기다리시고 계실까요? 여기에 기도의 심오한 차원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루 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들과 교제를 하면서 사람 따라 교제의 방법도 다르고 내용도 다르고 질도 틀립니다. 유명인사를 만나 교제하려고 할 때는 어느 정도의 어떤 절차가 있지 않습니까? 마음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가까운 친구들도 그 나름대로의 내용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자주 만나는 사람 가운데 쉽게 '나하고 아무도 없는 조용한데 가서 이야기 좀 하자.'고 하면서 끌고 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나 붙들고 '나하고 조용한데 가서 둘이만 이야기 합시다.' 하면 따라올 것 같습니까? '이 친구가 안 좋은 생각하고 있나?' 하고 의심을 받을 확률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골방에서 만나자는 게 아무에게나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경우가 어떤 것일까요? 사랑에 빠진 연인들입니다. 그렇죠? 그 연인들은 사람이 없는 데만 찾아 다닙니다. 단둘이 앉아서 아무도 방해 받지 않고 마음과 마음을 열고 사랑을 주고 받기 원하는 것,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부부사이라도 특별히 참 사이가 좋은 잉꼬 부부 같은 경우는 단둘이 앉아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를 원합니다. 가끔 보면 함께 파티를 하다가도 둘이서 살그머니 빠지는 부부들이 있지 않습니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부부 가운데서도 별로 애정이 없는 부부는 골방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어쩌다 "여보, 나하고 조용한 데 가서 둘이서만 이야기 하자."고 말하면은 부인은 화를 내면서 무슨 비밀이라고 그렇게 으슥한 데 가서 이야기 하자고 그러느냐고, 여기서 이야기 하면 된다고 아마 핀잔을 줄 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골방에서 만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충분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골방에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골방에서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골방이라야 우리가 마음을 온전히 영이신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잡하고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 우리의 생각이 산만해서 흩어지는 곳은 하나님 앞에 우리 마음을 진심으로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왔다 갔다 하면서 입으로는 기도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싫은 것입니다. 기도 할 바에는 온전히 마음을 바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무지무지하게 사랑하십니다. 그분 만큼 우리를 끔찍하게 사랑하시는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그 사랑을 가득 우리에게 주기를 원합니다. 어디서 주시겠습니까? 어디서 그 마음에 있는 그 뜨거운 사랑을 다 우리에게 쏟아 주시겠습니까? 골방에서 입니다. 방해 받지 아니하는 곳에서, 단 둘이 앉아서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골방을 좋아하십니다.

 

기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와 마음을 열고 사랑을 주고받기 위해 만든 하나님 자신의 아이디어 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만든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들어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너무나 소중한 은혜의 채널입니다. 골방에서 하나님이 기도하는 우리에게 그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마음껏 보여주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부르면 벌써 하나님은 우리 앞에 계십니다. 우리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스바냐 선지자가 3장 17절에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중에 거하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우리 앞에 그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시는 전능자시라. 그 하나님이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면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우리를 보시면서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마음으로 우리를 진정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시면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뻐하시고 즐거워 하시는 하나님이 골방에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을 만나는 것이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사람만 쳐다보고 살면 못 삽니다. 여러분, 24시간, 일주일, 365일, 매일 사람만 상대하고 인생을 산다고 가정해 봅시다. 숨이 막혀 못 삽니다. 답답해서 못 삽니다. 마음에 상처 때문에 견디지 못합니다. 우리는 인간보다도 더 위대한 존재를 자주자주 만나야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자주 올려다 보아야 합니다. 이 거짓되고 더럽고 냄새 나는 세상에서, 한 사람도 믿을 수 없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진정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자주 만나야 합니다. 그분을 만날 때 우리가 치유 받습니다. 그분을 단둘이 만나 그 놀라운 사랑을 내 마음에 가득히 채울 때, 내 눈에 눈물을 씻고 다시 한번 웃으면서 세상을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만 보면 안됩니다. 세상만 보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면 마귀가 됩니다. 결국 세상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천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를 만나야 됩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맛보아야 합니다. 그 맛으로, 그때 얻는 능력 가지고 우리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에게 골방이 있고 그 골방을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을 가만히 주목해 보십시오. 다른 데가 있습니다. 삶은 힘든 것 같고, 그의 어깨에 지워진 십자가는 몹시 무거운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얼굴에 기쁨이 잔잔히 흘러가는 것을 봅니다. 여유가 있습니다. 평안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 사람을 쫓아가서 가만히 살펴 보십시오. 그에게는 골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를 잠잠히 보시며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 그 분을 만나는 재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웃지 못하는 환경에도 그 사람은 웃고 있습니다. 기뻐하고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자기가 겪은 이야기 한 토막을 써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기상이 좋지 않아서 비행기가 계속 흔들리고 사람들은 긴장하고 있습니다. 벨트를 매라는 신호가 나옵니다. 그런데 뒤에서 자꾸 웃는 소리가 들립니다. 누군가가 자꾸 웃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돌아보았더니 어떤 사람이 귀에 리시버를 끼고 있더랍니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들으니 재미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안 웃는데 자기 혼자 웃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긴장하고 있는데도 자기는 즐거운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목사님이 깨달았답니다. '저 사람하고 나하고 다른 점이 무엇인가? 저 사람은 듣는 것이 있고 나는 듣지를 못한다. 그것이 틀리구나.' 여기에 큰 진리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긴장합니다. '경제가 어려워진다. 미국경제도 지금 밑바닥을 치고 있다. 지진이 일어나서 수십 만 명이 죽어가고 있다. 한국도 절대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다. 앞으로 2015년이 되면 전세계의 인구의 반이 물 부족 사태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복제인간이 생겨서 이제는 나중에 윤리적으로 인간가치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듣는 소리마다 즐거운 소리가 없습니다. 자, 이런 세상을 살면 우리 가슴이 답답해지지 않습니까? 안전벨트를 매도 안심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이 긴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나 혼자 웃습니다. 찬송합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무엇이 있는 것입니까? 골방이 있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하나님의 살아계신 음성을 듣는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 앞에는 온 세상이 소돔 고모라 같이 더러워져도 실망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 그의 나라가 승리합니다. 할렐루야. 내 앞에 있는 문제가 산더미처럼 높아 보이지만 하나님보다 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오면 문제도 작아 보입니다. 낙담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가 있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을 내가 방금 만나고 나오는데 왜 내가 낙담합니까? 그러므로 골방에 들어갈 땐 마귀 얼굴을 하고 들어가던 사람이 나올 땐 천사의 얼굴을 하고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절대 과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골방에서 기다리시는 이유를 여러분이 아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를 시작하면서 부른 찬송이 있습니다. 그 찬송작가는 맹인으로서 월 포드 목사님입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정말 지겹다.' 가장 즐겁다고 했습니다. 맹인입니다. 세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기도하는 그 시간만은 가장 즐겁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 근심 걱정에 얽매인 나를 부르사 내 진정 소원 주 앞에 낱낱이 바로 아뢰어 큰 불행 당해 슬플 때 나 위로 받게 하시니 기도하는 그 시간이 정말 즐겁다.'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골방을 가지고, 골방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통해서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는 사람은 이 말이 절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한 인생을 살면서 남녀가 사랑에 빠져서 연애할 때 만큼 행복한 때가 없지 않습니까? 그때 그 연애를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대리 연애를 시키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죠? 진정 사랑하는 사이에 사랑을 주고 받는 그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대신하라고 하는 법이 있습니까? 없지요. 우리는 그런 것을 남에게 시키지 않습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젖어 봅니다. 그 하나님의 크시고 전능하시고, 성실하시고, 자비로우신 모습 앞에 우리 모두가 나 자신을 잊어 버리는 흥분과 행복을 맛봅니다. 그 일을 남에게 맡깁니까? 남에게 맡기면 안됩니다. 가끔 보면 "저를 위해 기도 많이 해 주십시오." 하고는 자기는 기도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 대리 기도 시키는 것 아닙니까? 그 사람은 그 바보입니다. 기도가 무엇인지 몰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행복과 그 기쁨을 왜 남에게 빼앗기느냐 그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살아가야 될 세상, 너무나 험악한 세상입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사람만 보고 살 수 없습니다. 가슴이 터집니다. 세상만 쳐다보고 신문만 쳐다보고 살지 마십시오. 그렇게 살다가는 모두 짐승처럼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기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면서 또한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면서 기도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8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이 잘 알지 못하시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수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르기 때문에 내가 계속 말을 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고 또 하나님께서 알 수 있도록 설득시킨다고 하면 그것은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시편 139편 4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내 혀에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 없나이다.'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이 모르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다 헤아리고 계시는 분이고 태초부터 마지막까지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하나님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에 무슨 슬픔이 있는지 아십니다. 내 안에 있는 상처가 무엇인지 아십니다. 내가 그에게 지금 말하고 싶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분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똑 같은 소리를 자꾸 반복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전도서 5장 2절입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니라.' 말을 하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말을 반복하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한 마디를 해도 내 모든 전심을 담아서 하나님 앞에 드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무엇입니까? 내가 말을 많이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오히려 거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것을 주시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수단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선한 것을 다 우리에게 안겨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어떻게 줄꼬? 어떻게 해야 이 좋은 것을 옥 목사가 받아서 제대로 누릴 수 있도록 할까?' 하나님의 고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거나 막 안겨주면 안 되는 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린애들에게 아무거나 안겨줍니까?

 

요즘 돈 좀 벌어서 재산이 있다고 해서 애들에게 돈을 갖다 막 집어 주었더니,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대형교회에 어느 목사 아들까지 지금 히로뽕을 맞고 잡혀 들어갔지 않습니까? 미국에 보내서 전부 다 갱이 되고 마약 중독자들이 되지 않았습니까? 밤마다 가서 춤이나 추고 말입니다. 도대체 그런 애들을 어디에 쓸 겁니까? 왜 그런 꼴이 되었습니까? 함부로 주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 100만원이 1000원짜리 만큼도 못합니다. 그러니 인간이 되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을 항상 주시면 좋겠지만, 천만에 말씀입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내가 주고 싶은 것을 어떻게 주면 좋을까?' 그래서 우리에게 유익한 하나님의 선물을 주시는 방법으로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알면서 기도 하라고 그러십니다. 무엇이 필요한 줄 다 알면서 기도하라고 그러십니다. '하나님, 왜 알면서 그러십니까?' 하면 '잔소리 하지말고 기도해.', '하나님, 내 형편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몇 번째 기도합니까?' 하면 '잔소리 하지 말고 계속 기도해' 하십니다. 다 알면서도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손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직도 내 환경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계속 골방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 보면 내 자신이 변해버립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인자 하심과 그 긍휼하심에 나도 모르게 사람이 바뀌어 버리고 생각이 바뀌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한번 체험했더니 지금까지 '다오,다오' 하면서 욕심부리던 것이 나도 모르게 사라지는 것을 봅니다.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던 십자가가 하루 아침에 가볍게 여겨집니다. 나도 모르게 불평하던 입에서 찬송이 나옵니다.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처럼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해 버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오냐 알았다 내 뜻대로 할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설득 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 자신이 기도를 통해 변화 받아야 됩니다. 변화되면 평범한 것들이 비범한 것으로 바뀌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 자주 일어납니다. 짧은 외마디 기도가 놀라운 위력을 나타내는 일들을 우리는 가끔 체험합니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은 골방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면서 우리보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 두 가지 사실 안에 기도의 중요한 본질이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골방을 자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줄을 알지만 내가 왜 기도해야 되는가를 여러분이 깊이 인식하고 깨달아야 됩니다. 그래야만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너무나 바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10년 전에 비해서 우리의 생활 템포는 배나 빨라진 기분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도할 시간이 점점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너무 바쁩니다. 너무 재미 있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시간을 빼앗는 것들이 주변에 수두룩합니다. 이런 것들을 마귀는 최대한 이용해서 시간을 계속 좀먹어 갑니다. 기도할 시간은 점점 없어집니다. 골방에 들어간 지가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한 주간을 그냥 보내버립니다. 여러분 이것은 불행한 이야기 입니다. 진짜 바빠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골방기도는 바빠서 못하는 법은 없습니다.

 

어느 기록을 보니 7,80년 살다가 가는 서구인들에게는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전체 6개월이나 된다고 합니다. 광고를 보고 우편물을 뜯고 하는 시간이 전생애 중에서 8개월이라고 합니다. 분실물을 찾아 다니는데 1년 반이 걸립니다. 줄서기 하는데 5년을 쓴다고 합니다. 약간 과장된 통계 같지만 의미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시간에 우리는 골방에 얼마든지 갔다 올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을 집중해서 '하나님, 아버지' 하고 찾고 나의 영혼이 그의 거룩한 존전을 바라보면 그 시간이 골방이 되는 것입니다. 줄을 서고 있는 시간에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못할 것 없습니다. 신호등 앞에 기다리는데 불과 1,2분도 안 되겠지만 그 시간도 나에게는 골방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면 얼마든지 흘려 보낼 수 있는 시간이지만 '하나님을 꼭 만나야 돼, 골방에 가서 하나님과 만나서 내가 은혜를 받아야 돼.' 하는 마음을 갖는 사람은 아무리 세상이 요지경처럼 돌아가는 바쁜 환경이라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운전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골방기도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골방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 시키는 은혜의 샘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기적의 현장입니다. 여러분, 골방기도는 우리의 공허함을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채우고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대신하며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의 성실하심으로 공급 받는 축복의 채널이 된다는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우리의 모든 삶이 항상 골방에 계시는 하나님과 주파수를 맞추고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는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힘입고 이 세상을 살면 우리 모두 얼마든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어떤 슬픔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천상을 나는 거룩한 주의 백성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골방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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