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죽지 말고 삽시다
시편 42:1-5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고난과 슬픔이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수없는 쓰라린 고통을 맛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낙심하고 마음으로 실망합니다. 이러한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실의를 어떻게 극복하고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가 이것은 우리의 과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 현실을 볼 때마다 좌절하고 실망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가 죽어서 나약해지고, 무감각해지고, 창의력을 상실하고, 우울증에 빠져서 자신을 비관하면서 살아가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사람이 실의에 빠지게 되면 매사에 의욕을 상실하고 자신감이 없어 무기력한 사람이 되고 모든 일을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봅니다.
창조력을 상실합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창조적인 능력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의에 빠지면 창조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심지어 천재적인 사람도 실망에 빠지면 자기 안에 잠재하고 있는 능력을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실망한 사람은 결국 정신적, 육체적 환자가 됩니다.
실망한 사람은 뚜렷한 이유없이 여러 가지 피로감, 우울증에 빠져 혼자 울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실의에 빠지면 무감각한 사람이 됩니다. 좋은 일이 있어도 좋게 느껴지지 않고 무관심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밤이면 불면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장래의 계획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을 자학하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요즘 많은 사람들이 불안한 직장 생활, 위태위태한 사업 때문에 얼굴에서 생기를 잃어버리고 좌절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감을 잃는 것은 실패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마음속에는 창의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 창의력을 상실하게 될 때 이 사람은 역사 속에 무능한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최근에 전 세계 목사들이 탈진상태라는 것이 하나의 큰 화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교회는 안되고 교인들에게 시달리니까 탈진합니다. 마치 사업하는 사람들이 사업이 안되니까 채무자들에게 시달리면서 탈진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족 가운데 실의에 빠져 우울한 사람, 진학에 여러 번 실패해서 낙심된 우리의 자녀들이 무기력하고 힘이 빠졌을 때 어떻게 이들에게 기를 살려줄까 이것이 우리의 큰 과제인 것입니다. 나도 기죽지 않고 살아야 되겠지만 남편과 아이들의 기를 살려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기를 살릴 수 있을까? 스스로 생각해볼 때 내가 무슨 일로 기가 죽어있나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내면을 깊이 살펴보면 그 기를 죽인 것은 어떤 외적인 환경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육신의 문제나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내 영혼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내 영혼이 살면 모든 기가 살아나지만 내 영혼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되지 않았다면 기가 죽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5절)
문제는 내 환경, 사업이 아니라 내 영혼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 영혼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기를 받지 않으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육체는 밥이 들어와야 기가 살고 우리 심령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야 기가 삽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한 시인이 낙심된 채 고통 가운데 지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한 때 거룩한 성일을 지키며 성전에서 열심히 봉사했던 사람입니다. 주일이면 많은 사람들을 인도해서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교회 직분을 내놓고 외로운 산장에서 절망적인 고통과 질병 가운데 투병하고 있습니다. 병세가 악화되고 고통 가운데 마음이 점점 낙심되는데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너 그때 열심히 믿지 않았느냐 너 그때 좋았지 않았느냐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너를 외면하고 있느냐 네가 그토록 열심히 믿은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비웃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3절)
이 사람은 지금 우울증에 빠져 있습니다. 눈물이 그의 양식이요, 완전히 실의에 빠지고 낙심된 상태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믿는 사람들이 왜 기가 죽어 있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첫째,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시인이 낙심된 원인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시인은 ‘나’라는 말을 너무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를 14번, ‘나를’을 16번, ‘나의’를 21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데 너무 바빴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보면서 반성하고 회개하는 일은 좋지만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지나치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므로 큰 실망에 빠집니다.
지금 혹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낙심하는 분이 있습니까 직장에서 물러난 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나, 과거의 꿈이 다 깨어져버리고 산산조각이 난 나, 사라져버린 과거를 회상하면서 실망하는 분이 있습니까 주께서 주시는 위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라”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나 자신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 62:1-2)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실망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무능함, 무력함에서 오는 실망감입니다. 그러나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느 대학교 직업 상담소에서 실패자가 되는 10가지 지름길이라는 재미있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1. 난 못났다고 인정하라.
2. 자기 자신이 무능한 사람이라고 항상 비난하라.
3. 모든 일에 불평거리를 찾아라.
4. 날마다 없는 것과 부족한 것만 찾아라.
5.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단점을 부지런히 살펴라.
6. 조금만 어렵거나 힘들면 빨리 포기하라.
7. 얼굴은 항상 무기력하고 낙심된 모습을 보여라.
8. 한번 실패하면 이젠 끝장이라고 믿어라.
그러면 당신은 반드시 실패자가 될 것이다.
자신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남을 보면서 나를 보지 말고 나를 보면서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리고 자기를 창조적인 존재로 인정하십시오.
둘째, 과거를 보지 말고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4절)
마치 여인들이 사추기가 넘어서 앨범을 펴놓고 ‘아, 그때가 좋았는데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나’ 하고 자꾸 과거를 회상하면서 우울해하고, 실망하고, 좌절하는 모습입니다.
그가 다시한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상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한마디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5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또 하나의 감동이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6절)
‘주를 기억하나이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서 어느 도피처에서 주님을 기억하고 낙심을 극복해가는 것입니다. 수없는 낙심과 좌절이 휘몰아오지만 주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낙심하는 것이 있고 기억하고 낙심을 극복하는 것이 있습니다. 4절은 지난날 자신의 화려했던 때를 기억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라서 성일에 교회로 갔다’ 이 때는 자기 위세가 있었고, 자기가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를 기억하고 마음이 상하는데 이제는 낙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던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언제나 주신 말씀은 ‘너 애굽의 종 되었던 때를 기억하라’라는 말씀입니다. “네 하나님께서 큰 손과 편 팔로 너를 인도했던 때를 기억하라” 잘되었던 때를 기억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너를 환난 중에 구해주시고, 너를 돌보시고, 너를 살려주셨던 때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때 너희들이 종으로서 채찍에 맞고 시련을 겪었으나 하나님께서 큰 손과 편 팔로 너희를 인도해서 광야로 이끌어내지 않았느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기억해야지 과거에 자기 화려한 것을 기억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인도해 준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세계관은 언제나 미래를 향해 있습니다. 성경은 희망적인 미래에 대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날이니라” 그래서 성경의 인생관은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전진합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이 태양이 떠오르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양인의 하루는 아침에 시작하여 저녁으로 끝이 납니다. 이는 빛에서 어둠으로, 생명에서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지금은 좋은데 나중이 안좋습니다. 부정적이며 비관적인 인생관과 역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더 좋은 세계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며 기도하여야 합니다.
종교개혁이 한창이던 어느날 마르틴 루터는 궁지에 몰려 몹시 상심하고 낙심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루터의 아내는 상복을 입고 루터에게 나타났습니다. 루터는 “누가 죽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예, 하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요?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지혜로운 그의 아내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당신이 그토록 기가 죽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당신이 낙심하고 무기력한 것을 보니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이 틀림없소” 그때 루터가 ‘아, 그렇다. 하나님께서 생존하시는데 내가 왜 기가 죽었단 말인가’ 무릎을 꿇고 “오 주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급해 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오니 나를 살려주소서. 나에게 힘을 주소서.’ 드디어 그는 하나님의 기를 받아 종교개혁을 완성해 갑니다.
하나님은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를 도와주십니까? 도와주심을 바라는 자를 도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눈을 들어 산을 보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우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자연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보아야 합니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8절)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희망을 주는 것은 기도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앞뒤가 막히고 세상 살기가 힘들어 낙심이 되어 기가 죽어 있을 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이 말씀을 상고하십시오.
제가 존경하는 하는 한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거창 고등학교를 세운 정영창 선생님이십니다. 그 분은 한국 역사 속에 하나의 살아있는 순교자와 같은 정신적인 지도자입니다. 그가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미국에 남아서 거기에서 활동할까 하다가 ‘전쟁 이후에 폐허가 된 한국 땅에 돌아가서 내가 인재를 양성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한국 땅에 옵니다. 때마침 거창에 빚더미에 올라서 폐허가 된 학교가 하나 있다는 것을 알고 1958년 빚으로 넘어가는 학교를 그가 맡게 되었습니다. 막상 학교를 맡기는 했지만 빚을 갚을 길이 없어서 빚쟁이들의 독촉에 학교가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찬송, 담요 하나를 가지고 거창읍에서 40리 떨어진 웅안현 산 마루턱 언덕에 있는 굴 속에 들어가 일주일 동안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미국 유학을 다녀와서 이 민족을 위해서 새로운 고등학교 교육을 해보려고 하는데 이 학교가 이렇게 되어서 어떻게 교육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 하나 할 수가 없습니다. 빚에 쪼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간절히 사흘동안 금식하면서 매달려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으로 “하나님, 이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으니 아무런 확신이 없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제가 일주일 금식기도 마치고도 응답을 안하시면 서울에 올라가 동아일보에 하나님 안계신다고 광고를 내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협박할 수 있는 담대함으로 기도를 하고 나니까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으면서 시원하더랍니다. 그가 찬양을 부르면서 하산해서 학교에 오니까 편지가 왔는데 조은복이라는 크리스챤 미국인 성도가 2050$을 보내주어 당시 부채를 정확하게 청산했습니다. 그리고 1971년 학교를 운영하면서 학교 본당 건물이 낡고 볼품이 없어서 “하나님, 기왕에 교육을 시작했사온데 본관 건물이 이것이 뭡니까 이것이 학교라니 부끄럽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했더니 미국 수정교회 로버트 슐러 목사가 22만불을 보내주어 학교를 제 궤도에 올렸습니다.
무슨 일로 불안해합니까 무슨 일로 낙심이 됩니까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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