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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전쟁에서 이기는 법

by 【고동엽】 2021. 12. 11.

인생 전쟁에서 이기는 법
삼상 14장 1-7절

< 소극적으로 살지 마십시오 >

2004년에 개봉된 ‘인크레더블(The Incredibles)’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영어로 ‘크레딧(credit, 믿음)’이란 단어에서 파생된 ‘크레더블(credible)’은 ‘믿을 수 있는’이란 뜻이고, ‘인크레더블(incredible)’은 ‘믿을 수 없는’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영어에서 형용사는 100% ‘~한 것’ 혹은 ‘~한 사람’이라고 명사로 전용될 수 있습니다. 결국 ‘인크레더블스(incredibles)’라는 말은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초능력을 가진 가족 얘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자살하려고 고층빌딩에서 몸을 던집니다. 그때 초능력을 가진 밥(Bob Parr)이 그를 구해줍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밥을 상대로 살고 싶지 않은 자기를 구해주었다고 소송을 냅니다. 또한 열차 추락을 막다가 오히려 열차에 있던 수많은 부상자들로부터 집단소송을 당합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결국 밥은 영웅 일을 때려치우고 보험회사 월급쟁이로 평범한 삶을 삽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밥은 점점 평범한 삶에 지쳐갔습니다. 초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니까 직장상사의 괴롭힘과 늘어만 가는 뱃살로 스트레스가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아내 몰래 친구와 볼링을 친다고 속이고 영웅 일을 하지만 스트레스는 풀리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악당이 그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접근합니다. 결국 그 악당의 꾐에 빠져 밥은 외딴 섬에 갇힙니다. 그 갇힌 남편을 구하려고 초능력을 가진 아내와 아이들이 나서고 결국 가족들이 합세해 사악한 악당들을 물리친다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잠재된 능력을 발휘해 선하게 사용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줍니다.

사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능력과 은사가 있습니다. 그 능력과 은사를 감추고 소극적으로 살거나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면 그 인생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능력과 은사를 가지고 남을 섬기며 살면 문제도 이길 수 있고, 세상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자신에게도 큰 행복과 보람이 주어질 것입니다.

< 인생 전쟁에서 이기는 법 >

지금도 사단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처럼 달려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악당인 사단을 이기고 인생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1. 끝까지 남아야 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과 블레셋 군대가 믹마스에서 대치할 때 벌어진 일입니다. 당시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객관적 군사력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3장 5절 말씀에 의하면 블레셋은 병거(전차) 삼만 량과 마병(기병) 육천 명을 보유하고 있었고, 백성도 해변의 모래같이 많았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형편없었습니다. 사무엘상 13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전력을 묘사할 때 ‘병사’란 표현은 없고 ‘백성’이란 표현만 있습니다(삼상 13:7,15,16,22). 즉 정규군이 아닌 민병대라는 말입니다. 또한 사무엘상 13장 2절 말씀에 의하면 처음에 모인 백성들 중에서 사울은 삼천 명만 택하고 남은 백성은 그냥 자기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왜냐하면 도저히 전투병으로 쓰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먼저 게바에 있는 블레셋의 수비대를 쳤습니다. 그 일로 전쟁이 벌어지자 블레셋의 엄청난 군사력에 겁을 먹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굴, 수풀, 바위틈, 은밀한 곳, 웅덩이를 가릴 것 없이 숨을 곳을 찾아 다녔고(13:6), 어떤 사람은 요단강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피신했습니다(13:7). 또한 사울에 의해 선택되었던 3천 명 중에서도 상당수가 도망가고 6백 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13:15).

게다가 남은 6백 명의 전투력도 한심했습니다. 사무엘상 13장 22절 말씀을 보면 그 6백 명 중에 칼이나 창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직 사울과 요나단에게만 칼과 창이 있었습니다. 상대방은 전차로 무장했는데 이스라엘 민병대는 몽둥이만 가졌다는 말입니다. 최후까지 남은 정예부대가 그 정도라면 그 전투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투였습니다. 그래도 최후까지 남은 6백 명이 있었기에 결국 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사울은 그 남은 6백 명을 보며 깊은 감동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결국 축복받는 사람은 힘들고 어려운 자리에서도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켜주는 사람입니다. 그처럼 사명을 위해서라면 제일 앞에 서고 두려워서 도망가는 일에는 제일 뒤에 서야 합니다. 현실이 힘들면 누구나 포기하고 후퇴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그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결국 인생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구세군 창설자 윌리엄 부쓰 장군은 한때 너무 심령이 지쳐 목회를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여보! 목회를 포기하면 우리가 비서 일이나마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소. 그러나 가망은 없어도 희망은 잃지 맙시다.” 그때 윌리엄 부쓰 장군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지금의 구세군이 있게 된 것입니다.

교회를 섬기다 보면 그런 고갈을 경험할 때가 있고, 사업을 하거나 자녀를 키울 때도 그런 고갈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때 넘어지지 않겠다!”고 항상 마음의 대비를 해야 합니다. 그처럼 현실이 어렵고 가능성은 없어도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고 나가면 반드시 더 나은 순간은 찾아올 것입니다.

2. 앞서서 행동해야 합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울이 기브아 변경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 머물렀고 함께 한 백성은 육백 명 가량이며.”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생사를 걸고 대치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사울 왕은 기브아의 변경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 남은 백성 육백 명과 함께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는 최전방에서 싸우려고 하지 않고 후방의 석류나무 아래에 앉아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울의 성향은 체질적입니다. 나중에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하자 사울은 다윗에게 “너는 당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삼상 17:33). 그렇다면 자신이 나가 싸워야 했습니다. 사무엘상 10장 23절 말씀을 보면 사울은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 이상 컸습니다. 그렇다면 골리앗과 신체적으로 맞설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지만 그는 구경만 하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처럼 구경만 하면 문제는 커지고, 축복 체험도 없게 됩니다.

인생전쟁에서 이기고 교회생활을 잘하려면 구경꾼에서 참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한 영혼을 교회로 인도하고, 한 가지 이상의 봉사에 참여하면 교회로부터 얻는 축복체험은 엄청나게 달라질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더 많이 얻으려면 더 많이 드려야 합니다.

정신과 의사 칼 융(Carl Gustav Jung)은 말했습니다. “삶의 큰 문제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길은 섬김이다. 섬김을 작정하고 실천할 때 아무리 힘든 문제도 사라진다. 섬김은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 그처럼 문제가 생기면 다른 사람들을 더 섬기겠다고 작정하십시오. 문제에 집착하면 문제는 점점 커지지만 그때 섬기는 일에 나서면 문제는 점점 작아집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욱 참여하고 헌신하며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영화 인크레더블에는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밥이 차를 주차할 때 이웃에 사는 꼬마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밥이 말합니다. “꼬마야! 뭘 기다리니?” 꼬마가 말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을 기다려요.”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을 기다리며 평생을 낭비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 행동도 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기다림에는 2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수동적인 기다림(passive waiting)’이고 또 하나는 ‘앞서 행동하는 기다림(proactive waiting)’입니다. ‘수동적인 기다림’은 석류나무에 앉아 무엇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나 일이 잘 풀리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행동하는 기다림’은 놀라운 일이 일어나도록 땀을 흘리고 행동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도는 비전을 향해 행동에 나서야 합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일이 잘못되면 환경을 탓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환경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원하는 환경을 찾아봅니다. 그래서 원하는 환경을 찾지 못하면 원하는 환경을 만들어냅니다. 그처럼 일이 되기만 기다리지 않고 일이 되도록 일어서는 사람이 인생 전쟁에서 최종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전투력이 열세일 때 가만히 있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리함을 알고 본문 1절에서 요나단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자기 병기를 든 소년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의 부대로 건너가자.” 본문 6절에서도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고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 사람들을 ‘할례 없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할례는 유대인들이 가장 자부하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린 육체적 징표’입니다.

그때 본문 3절 말씀을 보면 아무도 요나단이 블레셋 진영으로 간 것을 몰랐습니다. 그처럼 수만 명이 진 치는 적진에 오직 두 명만이 뛰어드는 것은 만용 같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본문 6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중요한 것은 사람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떤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 사랑’을 감정적인 사랑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첫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그처럼 첫눈에 반할 수는 있지만 첫눈에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감정 이상의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감정은 움직일 수 있지만 그 감정이 사랑을 지속시키지는 않습니다.

사랑은 감정의 산물이 아니고 깊이 이해하고 몸과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도랑 속에 갑자기 빠지는 것처럼 첫눈에 갑자기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키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상대의 뜻과 성격도 알고, 상대의 개념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계시가 아닙니다. 잘 알지 못하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적인 사랑은 자기중심적인 사랑입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사랑의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 사랑을 알아줘요!” 그 고백만 들으면 진짜 사랑 같고 사랑의 경험에 통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알아달라는 사랑은 이미 틀렸습니다. 사랑은 평소에 행동으로 느끼게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진정한 사랑은 알아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주는 것입니다. 사랑을 자신의 감정을 알아달라는 것으로 오해하면 그 관계는 좋게 되기가 힘듭니다.

그런 감정을 가지고 사랑의 의미를 알기 전에 결혼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결혼한 뒤에 철이 들면서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결혼 전의 감정적인 사랑에 대한 기억이 너무 크면 사랑에 대한 오해도 클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날 크게 싸우고 나면 쉽게 결론을 내립니다. “옛날의 그 사랑은 죽었다!” 그러나 옛 사랑은 죽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있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은 조금씩 성장시켜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헌신하고 참여할 때 사랑이 깊어집니다. 헌신이 없는 사랑은 곧 사라집니다. 사랑은 열정이 아니라 헌신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하려면 이런 고백을 자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어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사랑과 헌신을 포기하지 않고 감사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런 성숙한 사랑의 고백을 할 줄 아는 사람이 결국 인생 전쟁의 승리자가 됩니다.

4. 후원자가 있어야 합니다.

요나단의 말이 끝나자 병기 든 자가 요나단에게 말했습니다. 본문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병기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7절).”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왕자님! 무모한 일입니다!”라고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라고 병기 든 소년이 말했을 때 요나단이 얼마나 큰 격려가 되었겠습니까?

어려울 때 누군가 믿음의 말과 사랑의 후원을 해주면 얼마나 큰 격려가 되는지 모릅니다. 차를 오래 몰면 바퀴에 바람이 빠집니다. 그때 바람을 넣어주어야 안전합니다. 그처럼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바람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영혼에 생명의 바람을 넣어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영혼에 생명의 바람을 넣습니까? 2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님을 통한 방법이고, 또 하나는 사람의 격려를 통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격려에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초능력을 가진 인크레더블스(incredibles)는 될 수 없어도 병기 든 소년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후원자들이 되십시오. 신앙생활에서 “누군가 날 성원해주고 날 위해 기도해준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런 성원과 기도가 있으면 세상살이가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왜 목회자가 그토록 많은 상처를 받으면서도 마음의 병에 걸리지 않고 오히려 정신적으로 더 건강합니까? 성령님의 위로가 있고, 영혼을 살리는 말씀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 목회자를 위해 기도해주고 가끔 격려의 말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아주 생소한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The 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 목사로서 이제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소리 없이 저를 위해 기도해주고 후원해준 손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3일 후에는 교회 옆의 스포츠 센터와 계약날짜가 끝납니다. 우리가 재정이 필요해 스포츠 센터에 임대를 내주었지만 그 일로 인해서 토지세와 건물세를 매년 몇 백만 원씩 내야 합니다. 그곳을 우리가 쓰면 세금을 낼 필요도 없고, 그곳이 100평이니까 임시 선교센터로 쓰든지, 아니면 본당으로 쓰든지 해서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선교사들이 잠깐 기거할 원룸도 만들 수 있고, 강의실도 2개 이상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보증금 6500만원을 스포츠 센터에 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현재 가진 재정은 턱없이 부족하고 날짜가 촉박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문제를 가지고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혼자 고민하며 기도하는데 며칠 전에 저희 선교사역을 후원하는 한 집사님이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목사님! 선교센터의 비전을 위해 제가 돕고 싶지만 큰돈이라 감당하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요새 약사를 위한 전문직 신용 대출이 있는데 교회에서 제 명의로 6500만원을 대출 받으시면 제가 샛별교회에 십일조를 해서 그 대출 이자를 대신 갚겠습니다.”

그 메일을 받고 너무 감동이 되었고 모든 심신의 피로가 다 사라졌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집사님! 그렇게 해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니까 너무 그 집사님에게 큰 부담을 드리는 것 같았습니다. 선교라는 소중한 비전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분에게 언제 갚게 될지 모르는 엄청난 빚을 안겨드리고 그렇게 한다는 것이 과연 옳으냐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그때 우리 교단에서 강조하는 선교원칙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저희 교단은 바자회를 통해 선교하지 못하게 합니다. 바자회(bazaar)란 자기가 안 쓰는 것을 기증해 팔아서 헌금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뜻은 좋지만 하나님은 ‘쓰다 남은 것’을 통한 선교보다는 ‘정성스럽게 구별한 것’을 통한 선교를 원하십니다.

또한 우리 교단에서는 빚을 내어 선교하지 말고 자기가 현재 가진 것 중에서 최선을 다해 헌신함으로 선교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깊은 고민 끝에 이런 메일을 보냈습니다. “집사님! 너무 고맙고 힘이 됩니다. 그런데 집사님에게 너무 큰 짐을 지워드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감사하게 받겠지만 집사님 명의로는 돈을 빌리지 않을게요. 나중에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다른 극한 상황을 만나면 그때는 죄송한 부탁을 드릴게요.”

그때 전혀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 제안을 거절하기는 정말 쉽지 않아서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그 제안을 꼭 수용하고 싶었습니다. 이자도 대신 내준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렇지만 그 빚 때문에 집사님이 마음고생을 할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아파서 다른 뚜렷한 대책도 없으면서 그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물질은 받지 못해도 그 마음을 받고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또한 나중에 더욱 다급한 상황이 생길 때 의뢰할 집사님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든든한 느낌도 생겼습니다.

3일 전에는 대천에서 목회하시는 한 목사님이 수세미 농사로 얻은 물질을 선교센터에 쓰라고 저희에게 보내왔습니다. 한 번도 뵙지 못한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말씀으로 교제를 해서 그렇게 먼 사이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처럼 교파를 초월해 기도해주는 목사님들의 사랑과 격려와 후원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지난 한 주간은 은밀한 후원의 손길들을 생각하면서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한 주를 보냈습니다.

모든 위대한 역사의 이면에 감추어진 진리가 있습니다. 그 위대한 역사 뒤편에는 한 사람의 신실한 후원자가 꼭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바울이 유럽선교를 성공적으로 이룬 데는 두아디라 성 출신의 자주 장사로 자신의 부를 바울을 위해 썼던 루디아의 역할이 컸고, 그 외에도 바나바, 실라, 디모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후원자들이 있어서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혼자 할 수 없고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저는 한국에서 교회개척과 더불어 교단까지 개척하는 입장이기에 동역자가 더 필요합니다. 저희 기독교 선교연맹은 홍콩,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에서는 우리나라의 장로교와 같은 메인 교단이고, 복음적이고 밸런스를 갖춘 좋은 선교 중심적인 교단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도 우리 교단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 여러분들이 동역자가 되어 기도의 손을 모아주십시오.

< 적극적으로 이기려고 행동하십시오 >

조용한 격려와 후원은 영혼을 일으키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됩니다. 사랑은 화려한 말에 있지 않고 조용한 손끝의 헌신과 행동하는 믿음에 있습니다. 왜 본문에서 요나단은 자기 계획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을까요? 만약 그랬으며 사람들이 “안 된다! 무모한 일이다!”라고 하며 힘을 뺐을 것입니다. 비전의 장벽도 높은데 부정적인 말까지 들리면 역사가 일어나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비전을 너무 가볍게 발설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전은 대개 현재의 처지로는 달성하기 힘든 목표이기에 비전을 가볍게 발설하면 반드시 부정적인 얘기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비전을 이루려면 비전을 가볍게 발설하지 말고 먼저 비전을 품고 여물게 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 과정이 없는 비전은 환상이 아니라 공상으로 끝납니다. 그런 공상이 계속되면 망상이 됩니다. 비전은 속으로 강하게 품되, 때가 되면 그 비전을 꼭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상황에서만 발설해야 합니다.

비전을 이루는 2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공무원처럼 7급, 5급, 3급, 1급, 차관을 거쳐 장관이 되는 방식이 있고, 또 하나는 평소에 내공을 닦아서 갑자기 장관으로 발탁되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처럼 현재의 모습이 초라해도 계속해서 영적 내공을 닦으면 언젠가 하나님이 발탁해서 크게 쓰실 때가 옵니다. 그러므로 절대 지금의 모습에 실망하지 마십시오. 꿈은 이루어진다고 믿고 땀 흘려 준비하면 반드시 꿈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공적인 작품인생이 되기를 원하면 요나단이 되든지, 아니면 병기든 자가 되든지 둘 중에 하나는 꼭 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변화되고 일어서면 세상도 변화되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런 변화의 초석이 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능과 소유와 지위도 주시고 교회 일도 맡겨주셨습니다. 그 일을 힘든 의무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특권으로 알고 감사하며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시기를 원합니다. 그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자신도 좌절하게 됩니다. 인크레더블에서 밥은 초능력을 가졌지만 그것을 가지고 남을 돕는데 사용하지 못하니까 좌절감을 가졌습니다. 그처럼 자기 것을 가지고 남을 돕는데 사용하지 못하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쁘게 행동하는 것보다 좋은 일에 나서지 않는 것을 더 안타깝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나쁜 일을 하는 것도 비극이지만 더욱 큰 비극은 좋은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입니다. 이제 소극적으로 지지 않으려고만 행동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이기려고 행동하십시오. 그래서 요나단과 병기 든 소년처럼 석류나무 아래에서 벗어나 문제의 장벽을 타고 올라가 문제를 극복하고 인생 전쟁에서 승리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http://www.john316.or.kr (이곳 클릭)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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