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연 변화될 수 있을까
누가복음 19장
제가 20대 초였습니다. 조금씩 철이 들고, 인생이 진지해지기 시작하면서, 제 마음을 무척이나 괴롭혔던 그런 질문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정말 변할 수가 있나? 내가 과연 변할 수가 있을까? 그런 질문이었습니다. 내 안에서 내가 좋아할 수 없는 내 약점을 발견할 때 마다 이 질문은 늘 절 다시 괴롭힙니다. 나는 과연 변할 수가 있을까? 한 해가 다 지나가고 연말이 되면 새해를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결심을 하죠. 내가 좀 새로운 삶을 살아야지. 그러나 저는 제 인생이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새해의 한 주간이 흘러가게 되면 마치 이 속담을 입증하듯, 작심삼일이라는 속담을 입증하듯 새해의 결심이 다시 물거품처럼 꺼져버리고, 옛날의 내 모습으로 다시 내 삶이 돌아올 때 마다 이 질문은 다시 저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변할 수가 있나? 나는 정말 변할 수가 있을까? 바로 그 무렵 저는 제 친구들의 초청을 받아서 선교사님을 모시고 성경 공부하는 어떤 모임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때 모인 20,30명 남짓한 사람들은 성경을 가운데 열고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열띤 토론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 앞에 펼쳐진 성경 말씀이 누가복음 19장이었습니다. 교회에 나온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이야기, 그러나 교회 처음 나온 저는 사돈의 팔촌까지 뒤져도 예수 믿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났던 저에게는 매우 생소했던 이야기. 삭개오라는 사람의 이야기. 삭개오라는 인물이 예수님 만나고 변화되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거기 모인 내 또래의 사람들은 삭개오의 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삭개오의 얘기를 하면서 쭉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간증을 하고 있었습니다. 삭개오처럼 나도 변했다고. 삭개오처럼 나도 인생이 변화되었다. 그 중에는 제가 잘 아는 저의 친구 두, 세사람도 섞여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가 진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저들의 얘기가 사실 그대로 정말 저들이 변해버린, 변화의 이야기라면, 나도 변할지 몰라. 어쩌면 나도 변할 수가 있을 거야.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변화의 희망을 걸었던 밤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그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 우선 우리는 이 사람의 정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가 누구였는가? 그리고 둘째로 그를 변화시켰던 기회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를 변화시켰던 그가 만날 수 있었던 기회. 그리고 세번째로 그를 변화시킨 결단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는 누구였습니까? 삭개오라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성경은 이 사람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에 이하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이 먼저 삭개오였다고 말합니다. 삭개오. 삭개오라는 이름이 먼저 알고 보니까 청결하다는 뜻이예요. Clean 청결하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날 이 사람의 집에 들어갔더니,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 죄인의 집에 예수가 들어갔다. 청결하다는 이름의 뜻과 달리, 그는 동네에서 소문난 죄인이었습니다.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인생을 살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까요. 꼭 제 얘기 같군요. 저도 아주 이름은 괜찮습니다. 제 이름으로 말하면 저희 어머니가 제 아버님이 무여독남 외아들이신데, 장남으로 태어났으니까 귀한 집 자식이었죠.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막대한 요금을 지불하고 서울 시내에 이름을 제일 잘 짓는 사람 집에 가서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제 이름을 지어 가지고 오셨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어렸을 때 시원찮은 행동을 할 때마다, 이놈아 네 이름은 비싼 이름이야.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아니? 이동원. 동녘 동자, 으뜸 원자. 동쪽에서 제일 잘난 사람이야. 근데 저는 이름하고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기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회적 기대. 우리가 다 좋은 이름을 가지고 자라나고 있잖아요. 우리 부모가 나를 낳아 주시고, 네게 좋은 이름을 붙여 주시면서, 좋은 인생을 살라고 주신 이름은 우리 모두의 사회적 기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회적 기대를 미치지 못하고 인생을 살고 있다는 열등감을 저마다 다 갖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 이 사람은 세리장이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세금을 거두고 다니는 사람들의 권력은 대단하죠. 장사하시는 분들 세금처리 되거나, 세금 국세청에서 조사 나오시면, 얼마나 힘드십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세리장이었습니다. 권력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권력. 권력은 사람들이 탐하는 것인지요. 권력. 니체라는 철학자는 인간이 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의지가 권력에 대한 의지다. Will to Power 권력에 대한 의지. 권력은 정치인들만이 탐하는 것이 아니더라구요. 집안에서 고부 싸움이 한창일 때, 거기에도 권력의 문제가 있습니다. 누가 곳간 열쇠를 쥐는야. 이것도 권력에 대한 싸움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항상 권력에 대한 사모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리장이니까! 그런데 권력이 이 사람을 행복하게 못했던 모양입니다. 권력으로 행복을 살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권력으로 인생의 의미를 살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어느 날 자기의 동네를 지나가는 어떤 낯선 사람을 몹시도 만나고 싶어합니다. 또 이 사람은 부자였습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랬습니다. 부자라. 부자 얼마나 좋은 이름입니까? 부자. 부자되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십니까? 증권투자도 하고, 오르락, 내리락 증권에 얼마나 신경을 쓰십니까?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우상이 있다면 만물일 것입니다. 돈 입니다.
어떤 청년들이 모여서 지도자와 대화를 하면서, 서로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청, 지도자가 질문을 던지기를 너희들은 인생을 사는데 뭐가 제일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아마 남자들만 모였던 모양이예요. 한 청년이 대답하기를 뭐니 뭐니해도 머니죠. 돈이죠. 옆에 사람한테 물어봐죠. 옆에 사람 , 저는 인생을 살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여자. 저에는 여자가 필요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저는 돈과 여자가 둘 다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지도자가 대답하기를 그러면 돈, 여자를 가져 가라. 돈도 필요하고 여자도 필요하다면 돈, 여자를 가져가라. 돈이라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것입니까? 이 사람은 부자였어요. 돈을 가지고 있었어요. 근데 돈으로 행복을 살 수가 없어요. 돈으로 인생의 의미를 살 수가 없고, 돈으로 인생의 목적을 살 수가 없고, 돈으로 죽음 건너편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우리 나라에서 최고 부자를 20분동안 만나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일본에 암 수술을 받으러 가기 직전이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을 떠나 가셨습니다. 한국인의 부자의 대명사. 제가 그분을 만나면 이 질문을 오랫동안 묻고 싶었습니다. 제 가슴에 묻어둔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회장님 평안하세요? 근데 저는 이분의 뜻밖의 의외의 대답을 오랜 시간이 지나간 지금도 잊어버리지 못할 거예요. 아니 제가 살아 있는 한 잊어버리지 못할 겁니다. 평안이라니,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초조하고 불안하오. 한국의 제일가는 부자의 대답이었어요. 제가 이 분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어느 날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저는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있어요. 예수님, 하나님, 제가 이분에게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 받는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삭개오는 권력도 부요함도 있었고, 또, 이런 사회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결할 수 없었던 인생의 문제를 끌어안고 어느 날, 자기의 동네를 지나가는 어떤 분을 몹시도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기회가 왔습니다. 그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기회. 기회를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에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신다” 예수가 지나 가신다. 예수가 지나 가신다. 저 갈리리에서 요단강 저 동편의 데가볼리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마다, 인생이 변했다고 사람들이 소리치며 그를 따라다니는 저 예수. 예수가 우리 동네에 와서 우리 곁에 지나가신다. 열 두해를 혈루증을 앓면서,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재산을 탕진했지마는 그러나 고쳐지지 않는 병 때문에 인생에 대한 절망 속에 살던 한 여인이 지나가는 나사렛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더니, 자기 병이 순식간에 치료되었다고 소문난 치료자 예수, Healer Jesus! 예수가 지나가신다. 예수가 지나가신다. 기회였습니다. 기회.
제가 지난 주일 저녁에 유승준을 만났습니다. 유승준. 온누리 교회에 갔다가 유승준이하고 한 15분 같이 차 마시면서 대화를 했습니다. 저는 정말 예수님이 좋아요 그러더라구요. 너 그 마음 변하면 안돼. 인기가 너에게 그런 진정한 삶을 줄 수가 없어. 같이 기도해 줬어요. 돈으로 인기로 살 수가 없었던 인생의 의미, 그런데 그런 인생의 의미에 굶주리고 있었던 삭개오에게 놀라운 기회, 천재일우의 기회. 놓칠 수 없는 기회. 기회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그래서 빅토르 위고는 기회는 인생의 가장 위대한 자산이다. 그랬습니다. 기회.
누군가가 기회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옛날 희랍에,그리스에 시락쿠스라는 거리에 이상한 동상 하나가 있었다고 그래요. 그 동상은, 그 동상은 날개가 있는데, 날개가 어깨 죽지에 와서 달린 것이 아니라, 발에 가서 달려있어요. 그리고 앞머리는 아주 무성하고, 뒷머리는 대머리고 사람이 머리 벗어지는 것도 여러가지죠. 어떤 사람은 뱅뱅 돌아가면서 머리가 벗어지는 분이 있습니다.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운데만 쏙 빠지시는 분이 있습니다. 속알머리가 없는 분이죠. 어떤 사람은 아무데나 빠집니다. 버르장 머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 분은 앞에 앞에 머리가 이렇게 많아. 뒤에 머리가 없고, 이 동상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누가 그대를 만들었는가?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기회. Appotunity 기회. 기회. 그대는 왜 날개를 발에 달고 있는가? 더 빨리 빨리, 빨리 날으고 싶어서. 걷고 싶어서. 그대의 앞머리는 왜 이렇게 무성한가? 내가 올 때 쉽게 사람들이 붙잡을 수 있도록. 그대의 뒷머리는 왜 대머리인가? 다시는 붙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기회는 그런 것입니다. 기회. 놀라운 기회. 예수가 지나가신다. 구원자 예수. 치료자 예수. 그를 만난 사람들마다 이상하게 인생이 바뀌었다고.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지금 죽어도 천국갈 수가 있다고. 인생의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가 없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그 놀라운 예수. 예수가 지나가신다. 놀라운 기회죠.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 왜 지나가고 있었을까요? 우리가 이 얘기를 읽으면 성경의 이야기로는 참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어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이 자기 권력과 자기 명예와 자기의 부를 가지고도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예수를 만나고 싶었다고. 그래서 예수를 기다리는 얘기라고.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한참동안 읽다보면 결론이 바뀝니다. 왜냐면요, 삭개오가 이렇게 아마도 이 사람은 키가 작았어요. 키가 작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들끓고 있었고, 그 군중 Crowd 속에서 키 작은 삭개오가 쉽게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어요. 그렇지만 만나야만 했었습니다. 만나지 않으면 안되겠다. 이런 것을 구도의 갈증이라고 합니다. 구도의 열망. 이런 마음을 가지고,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만나고자,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세리장이 세무서장이 뽕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체면의 옷을 벗어 던지고 올라간 것입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를 만나야 겠다.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를 반드시 만나야 겠다. 내가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나는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 나는 무엇이라도 할 수가 있겠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죠.
근데 얘기를 읽다보면 성경 이야기는 이렇게 변합니다. 아마 삭개오가 나무 위에서 예수님이 내 앞에 지나가봐라, 소리칠거야. 예수님. 그냥 이렇게 부르면 실례일거야. 앞에다 뭐라고 붙여야지. 인류의 위대한 스승 예수여. 그 말은 좀 형식적인가, 나사렛 예수여, 나사렛 예수는 예수님이 별로 좋아하지 않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천하게 부르는 용어야. 어떻게 부를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이렇게 부를까. 아니면 위대한 휴머니티안 예수여. 한번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앞에 딱 뽕나무 앞에 오더니, 삭개오가 부르기 전에 삭개오를 올려다 보더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삭개오야. 어. 이때 삭개오가 받았을 충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저분이 내 이름을 알아. 나를 만나지도 않고 나를 이름을 부르는 저 예수. 예수는 누굴까? 아마 우리 자매님 같으면 어머 하고 놀랐겠죠. 어떻게 알아 저분이 내 이름을. 저는 성경을 읽다가 늘 저를 감동시키는 부분이 예수님이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마리아야.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귀신들린 여자, 욕심 많았던 여자. 그래서 이름도 막 달라 마리아. 막 달라 마리야. 그래도 그 욕심이 해결되지 않고 있었던 여자. 그런데 예수님이 이 여인을 만나주시고, 성녀로 바꿨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 부활의 소식을 모른 체 동산에 묻혀있는 줄 알고, 예수님이 묻히신 동산에 올랐던 이 여인. 새벽이었는데, 동산 관리하는 사람인줄 알았어요. 어디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마리아야, 마리아야, 깜짝 놀라 보았어요.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죽은줄 알았던 예수의 음성.. 마리아야, 삭개오야, 나사로야,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는 예수, 그는 우리를 60억이라는 거대한 하나의 인류 덩어리로 취급하지않고, 우리 개인개인을 알고 이해하고 찾아오십니다. 나의 좌절을 이해하시고, 나의 고독을 이해하시고, 나의 방황을 이해하시고, 나의 삶의 그런 슬픔을 이해하시고, 내 인생의 벽 같은 인생의 삶의 벽 앞에서 나갈 길이 없는 출구가 없는 벽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내 모습, 내 답답한 내 모습을 아시는 그 예수. 찾아와서 그는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와. 빨리 내려 오너라. 속히 내려 오너라. 속히 내려와.
자, 여기쯤 읽으면 우리가 이 이야기는 삭개오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얘기가 아니예요. 예수님이 삭개오를 만나고 싶어하는 얘기.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은 아마 이런 생각도 했을지 몰라요. 나도 예수라는 분을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 알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 아십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알고 싶어 하시는 것 보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더 알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시는 것보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더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래서 성경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 분의 미션을 그분의 사명을 설명하는 놀라운 대목마다 이런 말씀이 반복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설명하는 이 대목마다 인자가 온 것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삭개오를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동네까지 찾아 오신 것입니다. 삭개오를 찾으시던 주님은 오늘 이 밤에 당신을 찾습니다. 여러분을 찾습니다. 친구들에게 초대받아 오셨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초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찾고 계십니다. 그것 아십니까?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잃어버려다구요. 그렇습니다.
대답해 보실까요. 여러분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인생의 목적은 어디입니까? 살다가 살다가 죽으면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모르신다고요. 그래서 인생은 방황이 아닙니까. 인자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잃어 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60억의 인구 가운데 인류의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나란 개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나를 아시는 분. 나를 이름으로 아시고, 나의 좌절과 내 눈물과 내 고독과 내 갈등을 이해하시며 내가 살아온 인생의 History와 나의 Carrier를 아시고 내 모든 삶의 발자취를 기억하시고, 아시는 그분. 당신을 포기할 수 없어 하시는 그 분. 당신을 만나고 싶어서 오늘밤 당신 곁에 조용히 그분은 지금도 다가오십니다. 이 기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삭개오 곁에 지나가고 있었어요.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자. 우리는 마지막으로 삭개오를 변화시킨 결단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삭개오가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변화되었습니다. 자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삭개오야 이리 내려 오너라. 삭개오야 이리 내려오라고. 근데 성경에 보시면 삭개오가 어떻게 응답을 했습니까? 6절에 보시면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요. 삭개오야 속히 내려와. 삭개오는 이렇게 응답했다구요. 급히 내려와. 다시 한번요.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너라. 자, 삭개오는 어떻게 응답했다구요. 급히 내려와. 예수님도 급하고, 삭개오도 급하십니다. 꼭 한국 사람 같습니다. 우리가 다 급한 사람들 아닙니까? 바쁜 사람들. 그런데 여러분 신앙의 결단도 그렇게 급하게 하실수록 좋아요. 신앙의 결단도 급할수록 좋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급한데 신앙만은 자꾸 급하지 않게 미뤄 두시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사람이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런지 알 수가 없다고. 사람이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런지 알 수가 없다고. 그래서 오늘이 은혜 받을 만한 때고,바로 지금이 구원 받아아 할 시간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급할수록 좋아요.
어떤 빵집 운영하는 사람이 하도 가게가 안되니까, 꾀를 짜내서 이렇게 빵집 앞에 광고를 붙여 놓았습니다. 내일 오시면 거저 드리겠습니다. IQ 낮은 멍청한 사람이 그 이튿날 와서 저 빵 거저 먹으러 왔습니다. 그러니까 빵집 주인이 다시 읽어 보십시오. 내일 오시면 거저 드립니다. 아니 어저께도 내일이었습니다만, 우리집 표어는 그 날, 그 날 유효합니다. 내일이라는 시간은 다시 우리들에게 찾아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바로 지금이 구원 받을 만한 시간이예요. 급히 내려와서.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합니다. 자기 집에 영접한 거예요. 그러나 삭개오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만 영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집으로 모셔드리면서, 이미 삭개오라는 사람은 자기 전 존재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자기의 마음속으로, 자기의 영혼 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받아 들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집에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그러니까,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어떤 목사님이 교인 한 분이 교회에 나왔다, 안 나왔다. 그러시는 분이 있어요. 신앙이 참 신앙이 없으니까, 가끔 나왔다, 안 나왔다. 그래서 한번은 찾아 갔었요. 전화 걸어도 안되고, 밤에 가면 있겠지, 밤중에 아파트로 습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아무개 목삽니다라고 문을 두드리니까, 목사님 음성을 듣자 마자, 갑자기 조용해 지더래요.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는 거예요.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그러니 어떻게 해요. 할 수 없이 아무개 목사 다녀갑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다 성경구절을 하나 써놓았어요. 요한 계시록 3장 20절. 나중에 목사님 가시고 난 다음에 그 분이 문 열고 보니까 쪽지 하나가 있단 말이죠. 아무개 목사 다녀갑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이게 뭘까. 성경을 찾아보았어요.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너에게로 들어가리라. 좀 미안했겠죠. 그래서 그 다음 주일날 교회에 갔어요. 그래도 차마 목사님 뵙기는 어색하고 그래서 목사님 사무실에다 이 교인이 쪽지 하나를 남겨놓고 갔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도 오늘 교회 다녀갑니다. 그 아래에다 창세기 3장 10절 그랬대요. 목사님도 희한하거든요. 교회는 가끔 나오는데 어떻게 창세기 3장 10절을 다 알까. 그래서 뭔가 목사님도 찾아 보았더니, 창세기 3장 10절에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문을 두드리시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면서 내 마음속에 찾아오시겠다고, 내 마음의 문을 노크하시는 예수님. 우리 박광현 형제가 Nock. Nock. Nock.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을 찬양했어요.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너에게로 들어가겠다.
삭개오는 마음의 문을 열고 자기 가정의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오시자 마자, 이 집에 오시자 마자, 삭개오가 예수님을 모셔다 놓고 이런 고백을 합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누구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업 잘한 사업가가 자기 재산의 한 4분의 1 정도를 환원하는 것은 훌륭한 사업가의 윤리로 평가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4분의 1 정도가 아니라, 재산의 절반을 나눠주겠다고. 이게 사실이라면 변한 거죠. 이 사람은 굉장히 변한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것입니다. 이 사람을 앞에 놓고 예수님이 너 재산 절반 나눠. 앞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 뭐 이렇게 소위 도덕적인 설교를 한 것이 아니예요. 너 이제부터 착한 사람 돼야 돼. 이런 말씀하신 것이 아니예요. 이런 도덕적인 윤리를 설교하지 않았는데도, 이 사람이 자발적으로 인생을 바꾸겠다고, 선언합니다. 변한 것 아니예요. 무엇이 변화시켰을까요. 무엇이. 도덕이 변화시킨 것 아니예요. 도덕이.
여러분, 기독교는 도덕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단순한 도덕적 종교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기독교가 부도덕한 종교라는 말은 아닙니다. 기독교에는 도덕이 포함되어 있지만 기독교의 수준은 도덕의 수준이 아닙니다. 저도 교회에 처음 나갈 때, 기독교와 도덕이 비슷한 것으로 알았어요. 그냥 착한 사람으로 살면 되는 것 아니예요. 뭐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 아니예요. 모든 종교마다 선을 가르치는 것 아니예요. 그런데 성경을 공부해 보니까 아니더라구요. 제가 3년 동안 왔다 갔다 했는데, 교회를 그냥. 처음에 나가서 3년 동안은 그냥 왔다 갔다 그랬어요. 그런 어느 날 갈라디아서라는 성경을 공부하다가, 우리 교회 나가는 사람들의 말로 말하면 제가 깨졌습니다. 깨졌어요. 갈라디아서 2장 마지막절에서 우리가 이런 말씀을 공부하고 있었어요. 바울이라는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을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잘 이해가 안가더라구요. 이 말이 무슨 뜻인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는다. 만약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을 지켜서 가능하다면, 예수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다. 잘 이해가 안가시죠. 저도 잘 이해가 안갔으니까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도덕이라는 단어하고 성경에서 젤 비슷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이 율법이라는 말이예요. 율법. 왜냐하면, 율법은 많은 계명으로 이루어 진 것이 율법인데, 결국 율법은 두가지 이거든요. 두가지 예요. 아주 짤막하게 요약하면 두가지예요. 하라, 하지말라. 뭘 하라. 여호와를 공경하라. 하나님만 섬기라. 안식일을 지켜라. 뭐 하라,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라. 하라. 하지말라 두가지. 근데 이 말씀의 뜻이 뭐냐하면 너희가 하나님이 하라는 것 하고, 하지 말라는 것 안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네 행동이 합격, 의롭다. 합격 받을 수가 있다면 예수는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었다. 십자가에 갈 필요도 없었고, 돌아가실 필요도 없었다. 어, 이 말씀이 무슨 뜻이야. 도대체 이 말씀이 무슨 뜻이야. 라는 질문이 제 마음 속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그 말씀의 뜻을 더 생각하다가, 제 인생을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 누구나 도덕을 추구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이 하라는 것 하고, 하지 말라는 것 안 하는 것이 좋은 일인 것은 아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지금까지 성경 조금 공부해 보니까,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 나는 다 했더라구요. 하지 말라는 것 이미 했어요. 성경에 보면 형제를 보고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했다. 미움은 살인의 동기가 아니라 살인의 시작이래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 음욕은 간음의 동기가 아니라 간음의 시작이래요. 나는 간음한 사람이예요. 나는 살인한 사람이예요. 나는 율법을 지켜야 할 자가 아니라, 이미 율법을 깨트렸어요. 그러니까 죄인이죠. 율법을 깨트렸고, 죄인이고,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가 없어요. 나는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더라구요. 노력해도 발버둥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해도, 나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는 사람. 그래서 내 행동으로는 내 최선을 다해도 나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될 수가 없는 자, 그러나 이걸 깨닫는 그 순간, 그 순간 저에게 또 하나 깨달아진게 있어요. 맞아 내가 나를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최선을 다해도 내가 나를 고칠 수가 없고 나를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거야. 예수는 나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떨구신거야. 그 예수 믿으면 내가 용서받고 새사람이 되는 거야. 갑자기 십자가의 사건이 제 마음속에서 깨달아 지더라구요. 아~~ 예수님이 그래서 오셨구나. 내가 나를 구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물속에서 나를 스스로 구할 수가 있다면 구원자가 필요가 없어요. 근데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보내시고, 그는 죄 때문에 내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시고, 붉은 피를 철철 떨구시면서 나를 믿기만 하라. 네가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되.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복음인 것입니다. Good News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자 마자 그래서 삭개오가 이 변화된 모습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을 하자마자 예수님이 뭐라고 그랬는지 아세요. 그 다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고,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야. 그 말을 바꾸면 이런 얘깁니다. 오늘 네가 구원을 받았고, 오늘부터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나님의 딸이야. 네가 죄 용서받고 하나님이 아들과 딸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수가 있다. 삭개오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고, 삭개오가 한 결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가 있다면 오늘 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 이 자리를 떠나 갈 수가 있습니다. 기도 하십시다.
조용히 머리 숙여서 기도하는 이 시간에 제가 초청 받으신 분들에게 묻고 싶어요. 또 교회 그 동안 계속 나왔지마는, 기독교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이해하실 수가 없었던 분들도 포함됩니다. 목사님 말씀 듣고 보니까, 저도 정말 예수님을 만나고 싶고, 정말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고 싶어요. 저도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고, 변화되고 싶어요. 이런 마음이 생기시면 한번 손 올렸다 내려 주세요. 제가 기도해 드릴께요. 손 번쩍이요. 네. 네. 네. 괜찮아요. 아주 부끄러운 손 아니거든요. 아주 거룩한 손, 아름다운 손. 결심의 손. 번쩍 다시 한번 올려주세요. 손 번쩍 괜찮아요. 괜찮아요. 번쩍 올리시고요, 자리에서 잠깐만 일어나 주세요. 제가 기도해 드릴께요. 자리에서 잠깐만 일어나서, 괜찮아요. 우리 많이 일어나, 다 일어나서요. 괜찮아요. 우리 많은 분들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결심한 분들은 다 일어나세요. 그리고, 자 다 일어나 주시고, 너무나 아름다운 순간, 너무나, 감격적인 순간, 오늘밤 우리들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이 잔치를 열었어요. 여러분이 저희와 똑같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어서 오늘 이 잔치를 열었거든요. 자, 일어서신 분들 저를 따라서 기도하세요. 먼저. 저를 따라서. 제 기도가 여러분의 마음속의 기도와 같다면 저를 따라서 기도하세요. 아직 결심하지 않은 분도 지금 결심하실 분도 같이 일어나세요. 괜찮아요. 지금 결심하실 분도 같이 일어나세요. 우리 일어나서 저와 같이 기도 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기도할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같이 기도하고 싶으신 분 따라서 하세요.
하나님 아버지, 다른 우리 성도들도 같이 기도를 도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성도님도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하나님 앞에 와서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변화되고 싶습니다. 구원받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저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피 흘리신 예수님. 그 피로 저의 죄를 씻어 주시옵소서. 부활하신 예수님. 살아계신 예수님. 제 마음속에 오시옵소서. 나의 구주와 주님이 되어 주십시오. 저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네,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밤 이웃 초청 생명의 잔치 첫날밤, 우리 많은 이웃들이 이렇게 주님앞에 나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 기쁘시죠. 이들을 받아 주시옵소서. 안아 주시옵소서. 그리고 저들의 모든 죄가 다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 졌다고, 말씀해 주시옵소서. 저들이 이제 용서받은 자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것을 확증시켜 주시옵소서. 이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었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딸이다. 이렇게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마음속에 모든 의심은 다 사라지게 도와주시옵소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로 주님을 높여 드리며, 주님을 따라가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저들을 축복합니다. 저들을 받아 주시옵소서.
누가복음 19장
제가 20대 초였습니다. 조금씩 철이 들고, 인생이 진지해지기 시작하면서, 제 마음을 무척이나 괴롭혔던 그런 질문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정말 변할 수가 있나? 내가 과연 변할 수가 있을까? 그런 질문이었습니다. 내 안에서 내가 좋아할 수 없는 내 약점을 발견할 때 마다 이 질문은 늘 절 다시 괴롭힙니다. 나는 과연 변할 수가 있을까? 한 해가 다 지나가고 연말이 되면 새해를 바라보면서 사람들이 결심을 하죠. 내가 좀 새로운 삶을 살아야지. 그러나 저는 제 인생이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새해의 한 주간이 흘러가게 되면 마치 이 속담을 입증하듯, 작심삼일이라는 속담을 입증하듯 새해의 결심이 다시 물거품처럼 꺼져버리고, 옛날의 내 모습으로 다시 내 삶이 돌아올 때 마다 이 질문은 다시 저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변할 수가 있나? 나는 정말 변할 수가 있을까? 바로 그 무렵 저는 제 친구들의 초청을 받아서 선교사님을 모시고 성경 공부하는 어떤 모임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때 모인 20,30명 남짓한 사람들은 성경을 가운데 열고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열띤 토론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들 앞에 펼쳐진 성경 말씀이 누가복음 19장이었습니다. 교회에 나온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이야기, 그러나 교회 처음 나온 저는 사돈의 팔촌까지 뒤져도 예수 믿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났던 저에게는 매우 생소했던 이야기. 삭개오라는 사람의 이야기. 삭개오라는 인물이 예수님 만나고 변화되었다는 이야기. 그런데 거기 모인 내 또래의 사람들은 삭개오의 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삭개오의 얘기를 하면서 쭉 돌아가면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간증을 하고 있었습니다. 삭개오처럼 나도 변했다고. 삭개오처럼 나도 인생이 변화되었다. 그 중에는 제가 잘 아는 저의 친구 두, 세사람도 섞여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가 진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저들의 얘기가 사실 그대로 정말 저들이 변해버린, 변화의 이야기라면, 나도 변할지 몰라. 어쩌면 나도 변할 수가 있을 거야.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변화의 희망을 걸었던 밤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그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 우선 우리는 이 사람의 정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가 누구였는가? 그리고 둘째로 그를 변화시켰던 기회에 대해서 말하려고 합니다. 그를 변화시켰던 그가 만날 수 있었던 기회. 그리고 세번째로 그를 변화시킨 결단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는 누구였습니까? 삭개오라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성경은 이 사람의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에 이하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이 먼저 삭개오였다고 말합니다. 삭개오. 삭개오라는 이름이 먼저 알고 보니까 청결하다는 뜻이예요. Clean 청결하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날 이 사람의 집에 들어갔더니,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 죄인의 집에 예수가 들어갔다. 청결하다는 이름의 뜻과 달리, 그는 동네에서 소문난 죄인이었습니다.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인생을 살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까요. 꼭 제 얘기 같군요. 저도 아주 이름은 괜찮습니다. 제 이름으로 말하면 저희 어머니가 제 아버님이 무여독남 외아들이신데, 장남으로 태어났으니까 귀한 집 자식이었죠.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막대한 요금을 지불하고 서울 시내에 이름을 제일 잘 짓는 사람 집에 가서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제 이름을 지어 가지고 오셨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어렸을 때 시원찮은 행동을 할 때마다, 이놈아 네 이름은 비싼 이름이야. 돈이 얼마나 들었는지 아니? 이동원. 동녘 동자, 으뜸 원자. 동쪽에서 제일 잘난 사람이야. 근데 저는 이름하고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름이라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기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회적 기대. 우리가 다 좋은 이름을 가지고 자라나고 있잖아요. 우리 부모가 나를 낳아 주시고, 네게 좋은 이름을 붙여 주시면서, 좋은 인생을 살라고 주신 이름은 우리 모두의 사회적 기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회적 기대를 미치지 못하고 인생을 살고 있다는 열등감을 저마다 다 갖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 이 사람은 세리장이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세금을 거두고 다니는 사람들의 권력은 대단하죠. 장사하시는 분들 세금처리 되거나, 세금 국세청에서 조사 나오시면, 얼마나 힘드십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세리장이었습니다. 권력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권력. 권력은 사람들이 탐하는 것인지요. 권력. 니체라는 철학자는 인간이 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의지가 권력에 대한 의지다. Will to Power 권력에 대한 의지. 권력은 정치인들만이 탐하는 것이 아니더라구요. 집안에서 고부 싸움이 한창일 때, 거기에도 권력의 문제가 있습니다. 누가 곳간 열쇠를 쥐는야. 이것도 권력에 대한 싸움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항상 권력에 대한 사모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리장이니까! 그런데 권력이 이 사람을 행복하게 못했던 모양입니다. 권력으로 행복을 살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권력으로 인생의 의미를 살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어느 날 자기의 동네를 지나가는 어떤 낯선 사람을 몹시도 만나고 싶어합니다. 또 이 사람은 부자였습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랬습니다. 부자라. 부자 얼마나 좋은 이름입니까? 부자. 부자되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십니까? 증권투자도 하고, 오르락, 내리락 증권에 얼마나 신경을 쓰십니까?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우상이 있다면 만물일 것입니다. 돈 입니다.
어떤 청년들이 모여서 지도자와 대화를 하면서, 서로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청, 지도자가 질문을 던지기를 너희들은 인생을 사는데 뭐가 제일 필요하다고 생각하니? 아마 남자들만 모였던 모양이예요. 한 청년이 대답하기를 뭐니 뭐니해도 머니죠. 돈이죠. 옆에 사람한테 물어봐죠. 옆에 사람 , 저는 인생을 살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여자. 저에는 여자가 필요합니다. 세 번째 사람은 저는 돈과 여자가 둘 다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지도자가 대답하기를 그러면 돈, 여자를 가져 가라. 돈도 필요하고 여자도 필요하다면 돈, 여자를 가져가라. 돈이라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것입니까? 이 사람은 부자였어요. 돈을 가지고 있었어요. 근데 돈으로 행복을 살 수가 없어요. 돈으로 인생의 의미를 살 수가 없고, 돈으로 인생의 목적을 살 수가 없고, 돈으로 죽음 건너편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우리 나라에서 최고 부자를 20분동안 만나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일본에 암 수술을 받으러 가기 직전이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을 떠나 가셨습니다. 한국인의 부자의 대명사. 제가 그분을 만나면 이 질문을 오랫동안 묻고 싶었습니다. 제 가슴에 묻어둔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회장님 평안하세요? 근데 저는 이분의 뜻밖의 의외의 대답을 오랜 시간이 지나간 지금도 잊어버리지 못할 거예요. 아니 제가 살아 있는 한 잊어버리지 못할 겁니다. 평안이라니,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초조하고 불안하오. 한국의 제일가는 부자의 대답이었어요. 제가 이 분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어느 날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저는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있어요. 예수님, 하나님, 제가 이분에게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 받는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삭개오는 권력도 부요함도 있었고, 또, 이런 사회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결할 수 없었던 인생의 문제를 끌어안고 어느 날, 자기의 동네를 지나가는 어떤 분을 몹시도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기회가 왔습니다. 그를 변화시킬 수 있었던 기회. 기회를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절에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신다” 예수가 지나 가신다. 예수가 지나 가신다. 저 갈리리에서 요단강 저 동편의 데가볼리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마다, 인생이 변했다고 사람들이 소리치며 그를 따라다니는 저 예수. 예수가 우리 동네에 와서 우리 곁에 지나가신다. 열 두해를 혈루증을 앓면서,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재산을 탕진했지마는 그러나 고쳐지지 않는 병 때문에 인생에 대한 절망 속에 살던 한 여인이 지나가는 나사렛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더니, 자기 병이 순식간에 치료되었다고 소문난 치료자 예수, Healer Jesus! 예수가 지나가신다. 예수가 지나가신다. 기회였습니다. 기회.
제가 지난 주일 저녁에 유승준을 만났습니다. 유승준. 온누리 교회에 갔다가 유승준이하고 한 15분 같이 차 마시면서 대화를 했습니다. 저는 정말 예수님이 좋아요 그러더라구요. 너 그 마음 변하면 안돼. 인기가 너에게 그런 진정한 삶을 줄 수가 없어. 같이 기도해 줬어요. 돈으로 인기로 살 수가 없었던 인생의 의미, 그런데 그런 인생의 의미에 굶주리고 있었던 삭개오에게 놀라운 기회, 천재일우의 기회. 놓칠 수 없는 기회. 기회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그래서 빅토르 위고는 기회는 인생의 가장 위대한 자산이다. 그랬습니다. 기회.
누군가가 기회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옛날 희랍에,그리스에 시락쿠스라는 거리에 이상한 동상 하나가 있었다고 그래요. 그 동상은, 그 동상은 날개가 있는데, 날개가 어깨 죽지에 와서 달린 것이 아니라, 발에 가서 달려있어요. 그리고 앞머리는 아주 무성하고, 뒷머리는 대머리고 사람이 머리 벗어지는 것도 여러가지죠. 어떤 사람은 뱅뱅 돌아가면서 머리가 벗어지는 분이 있습니다.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운데만 쏙 빠지시는 분이 있습니다. 속알머리가 없는 분이죠. 어떤 사람은 아무데나 빠집니다. 버르장 머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 분은 앞에 앞에 머리가 이렇게 많아. 뒤에 머리가 없고, 이 동상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누가 그대를 만들었는가?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기회. Appotunity 기회. 기회. 그대는 왜 날개를 발에 달고 있는가? 더 빨리 빨리, 빨리 날으고 싶어서. 걷고 싶어서. 그대의 앞머리는 왜 이렇게 무성한가? 내가 올 때 쉽게 사람들이 붙잡을 수 있도록. 그대의 뒷머리는 왜 대머리인가? 다시는 붙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기회는 그런 것입니다. 기회. 놀라운 기회. 예수가 지나가신다. 구원자 예수. 치료자 예수. 그를 만난 사람들마다 이상하게 인생이 바뀌었다고.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지금 죽어도 천국갈 수가 있다고. 인생의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가 없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그 놀라운 예수. 예수가 지나가신다. 놀라운 기회죠.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 왜 지나가고 있었을까요? 우리가 이 얘기를 읽으면 성경의 이야기로는 참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어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이 자기 권력과 자기 명예와 자기의 부를 가지고도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예수를 만나고 싶었다고. 그래서 예수를 기다리는 얘기라고.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한참동안 읽다보면 결론이 바뀝니다. 왜냐면요, 삭개오가 이렇게 아마도 이 사람은 키가 작았어요. 키가 작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들끓고 있었고, 그 군중 Crowd 속에서 키 작은 삭개오가 쉽게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어요. 그렇지만 만나야만 했었습니다. 만나지 않으면 안되겠다. 이런 것을 구도의 갈증이라고 합니다. 구도의 열망. 이런 마음을 가지고,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만나고자,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세리장이 세무서장이 뽕나무에 올라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체면의 옷을 벗어 던지고 올라간 것입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예수를 만나야 겠다.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를 반드시 만나야 겠다. 내가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나는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 나는 무엇이라도 할 수가 있겠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죠.
근데 얘기를 읽다보면 성경 이야기는 이렇게 변합니다. 아마 삭개오가 나무 위에서 예수님이 내 앞에 지나가봐라, 소리칠거야. 예수님. 그냥 이렇게 부르면 실례일거야. 앞에다 뭐라고 붙여야지. 인류의 위대한 스승 예수여. 그 말은 좀 형식적인가, 나사렛 예수여, 나사렛 예수는 예수님이 별로 좋아하지 않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천하게 부르는 용어야. 어떻게 부를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이렇게 부를까. 아니면 위대한 휴머니티안 예수여. 한번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앞에 딱 뽕나무 앞에 오더니, 삭개오가 부르기 전에 삭개오를 올려다 보더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삭개오야. 어. 이때 삭개오가 받았을 충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저분이 내 이름을 알아. 나를 만나지도 않고 나를 이름을 부르는 저 예수. 예수는 누굴까? 아마 우리 자매님 같으면 어머 하고 놀랐겠죠. 어떻게 알아 저분이 내 이름을. 저는 성경을 읽다가 늘 저를 감동시키는 부분이 예수님이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마리아야.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귀신들린 여자, 욕심 많았던 여자. 그래서 이름도 막 달라 마리아. 막 달라 마리야. 그래도 그 욕심이 해결되지 않고 있었던 여자. 그런데 예수님이 이 여인을 만나주시고, 성녀로 바꿨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 부활의 소식을 모른 체 동산에 묻혀있는 줄 알고, 예수님이 묻히신 동산에 올랐던 이 여인. 새벽이었는데, 동산 관리하는 사람인줄 알았어요. 어디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마리아야, 마리아야, 깜짝 놀라 보았어요.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죽은줄 알았던 예수의 음성.. 마리아야, 삭개오야, 나사로야, 사람들을 이름으로 부르는 예수, 그는 우리를 60억이라는 거대한 하나의 인류 덩어리로 취급하지않고, 우리 개인개인을 알고 이해하고 찾아오십니다. 나의 좌절을 이해하시고, 나의 고독을 이해하시고, 나의 방황을 이해하시고, 나의 삶의 그런 슬픔을 이해하시고, 내 인생의 벽 같은 인생의 삶의 벽 앞에서 나갈 길이 없는 출구가 없는 벽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 내 모습, 내 답답한 내 모습을 아시는 그 예수. 찾아와서 그는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와. 빨리 내려 오너라. 속히 내려 오너라. 속히 내려와.
자, 여기쯤 읽으면 우리가 이 이야기는 삭개오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얘기가 아니예요. 예수님이 삭개오를 만나고 싶어하는 얘기.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은 아마 이런 생각도 했을지 몰라요. 나도 예수라는 분을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 알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 아십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알고 싶어 하시는 것 보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더 알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하시는 것보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더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래서 성경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 분의 미션을 그분의 사명을 설명하는 놀라운 대목마다 이런 말씀이 반복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설명하는 이 대목마다 인자가 온 것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삭개오를 찾아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동네까지 찾아 오신 것입니다. 삭개오를 찾으시던 주님은 오늘 이 밤에 당신을 찾습니다. 여러분을 찾습니다. 친구들에게 초대받아 오셨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초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찾고 계십니다. 그것 아십니까?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잃어버려다구요. 그렇습니다.
대답해 보실까요. 여러분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인생의 목적은 어디입니까? 살다가 살다가 죽으면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모르신다고요. 그래서 인생은 방황이 아닙니까. 인자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잃어 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60억의 인구 가운데 인류의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나란 개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나를 아시는 분. 나를 이름으로 아시고, 나의 좌절과 내 눈물과 내 고독과 내 갈등을 이해하시며 내가 살아온 인생의 History와 나의 Carrier를 아시고 내 모든 삶의 발자취를 기억하시고, 아시는 그분. 당신을 포기할 수 없어 하시는 그 분. 당신을 만나고 싶어서 오늘밤 당신 곁에 조용히 그분은 지금도 다가오십니다. 이 기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삭개오 곁에 지나가고 있었어요.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자. 우리는 마지막으로 삭개오를 변화시킨 결단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삭개오가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변화되었습니다. 자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삭개오야 이리 내려 오너라. 삭개오야 이리 내려오라고. 근데 성경에 보시면 삭개오가 어떻게 응답을 했습니까? 6절에 보시면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요. 삭개오야 속히 내려와. 삭개오는 이렇게 응답했다구요. 급히 내려와. 다시 한번요.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너라. 자, 삭개오는 어떻게 응답했다구요. 급히 내려와. 예수님도 급하고, 삭개오도 급하십니다. 꼭 한국 사람 같습니다. 우리가 다 급한 사람들 아닙니까? 바쁜 사람들. 그런데 여러분 신앙의 결단도 그렇게 급하게 하실수록 좋아요. 신앙의 결단도 급할수록 좋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급한데 신앙만은 자꾸 급하지 않게 미뤄 두시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사람이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런지 알 수가 없다고. 사람이 하루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런지 알 수가 없다고. 그래서 오늘이 은혜 받을 만한 때고,바로 지금이 구원 받아아 할 시간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급할수록 좋아요.
어떤 빵집 운영하는 사람이 하도 가게가 안되니까, 꾀를 짜내서 이렇게 빵집 앞에 광고를 붙여 놓았습니다. 내일 오시면 거저 드리겠습니다. IQ 낮은 멍청한 사람이 그 이튿날 와서 저 빵 거저 먹으러 왔습니다. 그러니까 빵집 주인이 다시 읽어 보십시오. 내일 오시면 거저 드립니다. 아니 어저께도 내일이었습니다만, 우리집 표어는 그 날, 그 날 유효합니다. 내일이라는 시간은 다시 우리들에게 찾아오지 않을지도 몰라요. 바로 지금이 구원 받을 만한 시간이예요. 급히 내려와서.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합니다. 자기 집에 영접한 거예요. 그러나 삭개오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만 영접한 것이 아니라, 자기 집으로 모셔드리면서, 이미 삭개오라는 사람은 자기 전 존재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자기의 마음속으로, 자기의 영혼 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받아 들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집에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그러니까,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어떤 목사님이 교인 한 분이 교회에 나왔다, 안 나왔다. 그러시는 분이 있어요. 신앙이 참 신앙이 없으니까, 가끔 나왔다, 안 나왔다. 그래서 한번은 찾아 갔었요. 전화 걸어도 안되고, 밤에 가면 있겠지, 밤중에 아파트로 습격을 했습니다. 그래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아무개 목삽니다라고 문을 두드리니까, 목사님 음성을 듣자 마자, 갑자기 조용해 지더래요.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는 거예요.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그러니 어떻게 해요. 할 수 없이 아무개 목사 다녀갑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다 성경구절을 하나 써놓았어요. 요한 계시록 3장 20절. 나중에 목사님 가시고 난 다음에 그 분이 문 열고 보니까 쪽지 하나가 있단 말이죠. 아무개 목사 다녀갑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이게 뭘까. 성경을 찾아보았어요.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너에게로 들어가리라. 좀 미안했겠죠. 그래서 그 다음 주일날 교회에 갔어요. 그래도 차마 목사님 뵙기는 어색하고 그래서 목사님 사무실에다 이 교인이 쪽지 하나를 남겨놓고 갔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도 오늘 교회 다녀갑니다. 그 아래에다 창세기 3장 10절 그랬대요. 목사님도 희한하거든요. 교회는 가끔 나오는데 어떻게 창세기 3장 10절을 다 알까. 그래서 뭔가 목사님도 찾아 보았더니, 창세기 3장 10절에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문을 두드리시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면서 내 마음속에 찾아오시겠다고, 내 마음의 문을 노크하시는 예수님. 우리 박광현 형제가 Nock. Nock. Nock.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을 찬양했어요.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너에게로 들어가겠다.
삭개오는 마음의 문을 열고 자기 가정의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오시자 마자, 이 집에 오시자 마자, 삭개오가 예수님을 모셔다 놓고 이런 고백을 합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누구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업 잘한 사업가가 자기 재산의 한 4분의 1 정도를 환원하는 것은 훌륭한 사업가의 윤리로 평가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4분의 1 정도가 아니라, 재산의 절반을 나눠주겠다고. 이게 사실이라면 변한 거죠. 이 사람은 굉장히 변한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것입니다. 이 사람을 앞에 놓고 예수님이 너 재산 절반 나눠. 앞으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 뭐 이렇게 소위 도덕적인 설교를 한 것이 아니예요. 너 이제부터 착한 사람 돼야 돼. 이런 말씀하신 것이 아니예요. 이런 도덕적인 윤리를 설교하지 않았는데도, 이 사람이 자발적으로 인생을 바꾸겠다고, 선언합니다. 변한 것 아니예요. 무엇이 변화시켰을까요. 무엇이. 도덕이 변화시킨 것 아니예요. 도덕이.
여러분, 기독교는 도덕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단순한 도덕적 종교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기독교가 부도덕한 종교라는 말은 아닙니다. 기독교에는 도덕이 포함되어 있지만 기독교의 수준은 도덕의 수준이 아닙니다. 저도 교회에 처음 나갈 때, 기독교와 도덕이 비슷한 것으로 알았어요. 그냥 착한 사람으로 살면 되는 것 아니예요. 뭐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 아니예요. 모든 종교마다 선을 가르치는 것 아니예요. 그런데 성경을 공부해 보니까 아니더라구요. 제가 3년 동안 왔다 갔다 했는데, 교회를 그냥. 처음에 나가서 3년 동안은 그냥 왔다 갔다 그랬어요. 그런 어느 날 갈라디아서라는 성경을 공부하다가, 우리 교회 나가는 사람들의 말로 말하면 제가 깨졌습니다. 깨졌어요. 갈라디아서 2장 마지막절에서 우리가 이런 말씀을 공부하고 있었어요. 바울이라는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을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잘 이해가 안가더라구요. 이 말이 무슨 뜻인가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는다. 만약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을 지켜서 가능하다면, 예수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다. 잘 이해가 안가시죠. 저도 잘 이해가 안갔으니까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도덕이라는 단어하고 성경에서 젤 비슷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이 율법이라는 말이예요. 율법. 왜냐하면, 율법은 많은 계명으로 이루어 진 것이 율법인데, 결국 율법은 두가지 이거든요. 두가지 예요. 아주 짤막하게 요약하면 두가지예요. 하라, 하지말라. 뭘 하라. 여호와를 공경하라. 하나님만 섬기라. 안식일을 지켜라. 뭐 하라,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라. 하라. 하지말라 두가지. 근데 이 말씀의 뜻이 뭐냐하면 너희가 하나님이 하라는 것 하고, 하지 말라는 것 안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네 행동이 합격, 의롭다. 합격 받을 수가 있다면 예수는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었다. 십자가에 갈 필요도 없었고, 돌아가실 필요도 없었다. 어, 이 말씀이 무슨 뜻이야. 도대체 이 말씀이 무슨 뜻이야. 라는 질문이 제 마음 속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그 말씀의 뜻을 더 생각하다가, 제 인생을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 누구나 도덕을 추구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이 하라는 것 하고, 하지 말라는 것 안 하는 것이 좋은 일인 것은 아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지금까지 성경 조금 공부해 보니까,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 나는 다 했더라구요. 하지 말라는 것 이미 했어요. 성경에 보면 형제를 보고 미워하는 자는 이미 살인했다. 미움은 살인의 동기가 아니라 살인의 시작이래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 음욕은 간음의 동기가 아니라 간음의 시작이래요. 나는 간음한 사람이예요. 나는 살인한 사람이예요. 나는 율법을 지켜야 할 자가 아니라, 이미 율법을 깨트렸어요. 그러니까 죄인이죠. 율법을 깨트렸고, 죄인이고,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가 없어요. 나는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더라구요. 노력해도 발버둥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해도, 나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는 사람. 그래서 내 행동으로는 내 최선을 다해도 나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될 수가 없는 자, 그러나 이걸 깨닫는 그 순간, 그 순간 저에게 또 하나 깨달아진게 있어요. 맞아 내가 나를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최선을 다해도 내가 나를 고칠 수가 없고 나를 구원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거야. 예수는 나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시고,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떨구신거야. 그 예수 믿으면 내가 용서받고 새사람이 되는 거야. 갑자기 십자가의 사건이 제 마음속에서 깨달아 지더라구요. 아~~ 예수님이 그래서 오셨구나. 내가 나를 구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물속에서 나를 스스로 구할 수가 있다면 구원자가 필요가 없어요. 근데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보내시고, 그는 죄 때문에 내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시고, 붉은 피를 철철 떨구시면서 나를 믿기만 하라. 네가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되.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복음인 것입니다. Good News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자 마자 그래서 삭개오가 이 변화된 모습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을 하자마자 예수님이 뭐라고 그랬는지 아세요. 그 다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고,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야. 그 말을 바꾸면 이런 얘깁니다. 오늘 네가 구원을 받았고, 오늘부터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나님의 딸이야. 네가 죄 용서받고 하나님이 아들과 딸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수가 있다. 삭개오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고, 삭개오가 한 결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가 있다면 오늘 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 이 자리를 떠나 갈 수가 있습니다. 기도 하십시다.
조용히 머리 숙여서 기도하는 이 시간에 제가 초청 받으신 분들에게 묻고 싶어요. 또 교회 그 동안 계속 나왔지마는, 기독교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이해하실 수가 없었던 분들도 포함됩니다. 목사님 말씀 듣고 보니까, 저도 정말 예수님을 만나고 싶고, 정말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고 싶어요. 저도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고, 변화되고 싶어요. 이런 마음이 생기시면 한번 손 올렸다 내려 주세요. 제가 기도해 드릴께요. 손 번쩍이요. 네. 네. 네. 괜찮아요. 아주 부끄러운 손 아니거든요. 아주 거룩한 손, 아름다운 손. 결심의 손. 번쩍 다시 한번 올려주세요. 손 번쩍 괜찮아요. 괜찮아요. 번쩍 올리시고요, 자리에서 잠깐만 일어나 주세요. 제가 기도해 드릴께요. 자리에서 잠깐만 일어나서, 괜찮아요. 우리 많이 일어나, 다 일어나서요. 괜찮아요. 우리 많은 분들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결심한 분들은 다 일어나세요. 그리고, 자 다 일어나 주시고, 너무나 아름다운 순간, 너무나, 감격적인 순간, 오늘밤 우리들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이 잔치를 열었어요. 여러분이 저희와 똑같이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싶어서 오늘 이 잔치를 열었거든요. 자, 일어서신 분들 저를 따라서 기도하세요. 먼저. 저를 따라서. 제 기도가 여러분의 마음속의 기도와 같다면 저를 따라서 기도하세요. 아직 결심하지 않은 분도 지금 결심하실 분도 같이 일어나세요. 괜찮아요. 지금 결심하실 분도 같이 일어나세요. 우리 일어나서 저와 같이 기도 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기도할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같이 기도하고 싶으신 분 따라서 하세요.
하나님 아버지, 다른 우리 성도들도 같이 기도를 도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성도님도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하나님 앞에 와서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변화되고 싶습니다. 구원받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저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피 흘리신 예수님. 그 피로 저의 죄를 씻어 주시옵소서. 부활하신 예수님. 살아계신 예수님. 제 마음속에 오시옵소서. 나의 구주와 주님이 되어 주십시오. 저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네,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밤 이웃 초청 생명의 잔치 첫날밤, 우리 많은 이웃들이 이렇게 주님앞에 나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 기쁘시죠. 이들을 받아 주시옵소서. 안아 주시옵소서. 그리고 저들의 모든 죄가 다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 졌다고, 말씀해 주시옵소서. 저들이 이제 용서받은 자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것을 확증시켜 주시옵소서. 이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었고,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딸이다. 이렇게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마음속에 모든 의심은 다 사라지게 도와주시옵소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로 주님을 높여 드리며, 주님을 따라가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저들을 축복합니다. 저들을 받아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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