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적 진리 (요12: 20-26)
임 영 수 목사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얼음이 녹으면 무엇이 되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예외없이 물이 된다라는 매우 상식적인 대답을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의도는 그러한 통속적인 대답이 아닌 좀 더 창의적인 답변을 기대하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여러 가지 상상적인 답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선생님이 기대했던 정답은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온다'입니다.
봄이 오면 얼음이 녹기 시작합니다. 굳게 얼어붙었던 대지가 서서히 녹으면서 새 생명의 싹들이 돋아납니다. 봄은 생명을 일깨우는 계절입니다. 봄은 생명을 잉태시키는 계절입니다. 그래서 봄에는 생명이 충만합니다. 그런데 이 생명은 땅속에서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생겨납니다. 그래서 봄은 역설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설이란 말은 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모순되는 것 같으나 그 속에 일종의 진리를 품고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의 역설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모두 내놓으셨습니다.
그는 어느것 하나도 소유할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세상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새 창조를 위해 온전히 내놓은 사건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역설 가운데서도 역설입니다.
십자가의 역설에 가장 큰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 역설의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이 역설의 진리는 기독교 신앙의 진수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 되는 과정에 하나의 역설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역설은 하나님의 희망의 약속을 의심없이 믿는 사람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현실을 넘어선 저 영원한 지평으로 열려있는 하나님의 희망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의 삶에서 감취어진 하나님의 희망의 미래가 현실로 드러납니다. 그것은 언제나 역설이라는 이성에 모순이 되는 문턱을 뛰어넘는 바보와 같은 사람의 삶에서 증명되는 진리입니다.
유월절이면 유대나라 각 처에서 예루살렘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예수께서도 유월절에 제자들과 함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유월절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이방인 그리스 사람 몇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유대교 신앙에 관심이 깊었던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유대인들과 함께 성전에서 예배하기를 원하였던 것 같습니다.
어떤 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그들은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와서 예수님에 대해 놀라운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과 비둘기파는 자들을 채찍으로 몰아내고 성전을 깨끗케 하였다는 혁명적인 소식이였습니다.
그들이 그 전부터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예수님에 대해 들은 소식은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본래 그리스인들은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민족이였습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를 말하고 가르치는 스승을 존경하며 찾아다녔습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그리스 사람들도 그러한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였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들은 그들의 마음에는 무엇인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공동체로 모시고 가서 그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를 영원한 스승으로 모시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뵐 수 있을까? 많은 궁리를 하다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비교적 그리스어에 능통 할 뿐만아니라 희랍적인 이름을 가진 빌립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빌립에게 가서 그들이 예수님을 뵙고싶다고 하였습니다.
빌립은 그들의 요청을 받고 어찌할 바를 몰라 가깝게 지내는 안드레에게 가서 그 사실을 이야기하고 그의 협조를 구하였습니다. 안드레는 빌립과 함께 예수께 가서 그 말을 전하였습니다.
두 제자의 말을 전해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거절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 영광의 때란 예수께서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에 의해 메시아로 추대 되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죽으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영광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그리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가 오신 목적에 대한 답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것은 골고다로 가시는 여정이였습니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은 그리스 사람들이 있는 그들의 공동체에 가서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며 스승의 대우를 받으며 사는 것이 더 안정되고 평안한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가야할 길이 그 길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명은 그리스 사람들의 공동체에 안주하면서 그의 생을 안온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예수님의 소명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를 여는 것입니다.
그 길은 오직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서만 이루어집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와서 막강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림으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고 믿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구도자적 삶을 통해 우주의 진리를 터득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새 시대는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눈에 십자가는 치욕, 수치, 형벌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십자가에 달린 자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얼굴과 입가에는 비웃음과 조롱의 빛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소수의 여인들만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연민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치욕과 수치, 형벌, 절망, 흑암의 시간과 장소인 십자가에서 희망의 새 아침을 보았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역설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는 비유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차가운 땅에 던져지고 그것이 흙으로 덮힙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 새 싹이 돋고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마침내 부활의 새 아침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새 역사의 장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새 생명으로 시작되는 이 현실에 참여해가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기적이되고 자신의 안전만을 도모하기 때문에 안전을 위한 욕망의 노예가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안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 창조의 사역에 새 소명의 길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야망, 욕망을 버려야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밀폐된 자아의 공간에 보존해갈 때 생명력은 자꾸 약화되고 죽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에 내놓을 때 더욱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영원히 보존해가는 길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내어 던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생명의 특성은 자신만을 위해 보존하고 지켜나가려 할 때에는 죽게 됩니다.
인간이 터득한 생명 보존법은 오히려 생명을 고갈시키고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생명 보존법은 자기중심이란 밀폐된 공간에 생명을 가두어 놓은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생명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빛 가운데 내놓는 것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졌을 때 토양이 길가와 같은 곳일 때 씨앗은 발아하지 못하고 말라버립니다.
그러나 그곳이 옥토일 때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자기 중심이란 밀폐된 공간은 씨앗이 발아될 수 없는 길가와 같은 곳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밀알 하나의 생명은 껍질 속에 있는 생명력 입니다. 그것이 껍질을 깨뜨리고 나오지 못할 때 그 생명력은 죽게됩니다. 그러나 껍질을 깨뜨리고 나올 때 그 생명력은 놀랍게 자라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본래의 성향은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서 생명을 실현시켜 가는 일입니다. 이 생명의 흐름을 방해하고 차단하는 것이 죄와 죽음입니다. 죄와 죽음은 씨앗이 썩어 발아될 수 없게 만드는 독소와 같습니다. 이것들은 왜곡된 자아, 병든 자아를 만듭니다. 병든 자아는 생명의 흐름을 차단합니다. 빛을 싫어하고 대신 어둠을 좋아하고 사랑의 나눔과 교제를 모릅니다. 신뢰의 대상을 갖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흐름을 차단시키는 죄와 죽음의 권세를 완전히 십자가에서 종막을 고하게 하였습니
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생명을 자라게 하고 풍성케 하는 참된 빛을 받아드릴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죄와 죽음으로 형성된 자아가 죽는 과정에는 상당한 아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 아픔과 고통은 야망, 욕심, 허영심, 자존심이 죽는 과정에서 오는 진통입니다.
사람들은 그 고통을 감내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과정은 참된 자기가 살아나는 과정입니다. 참된 자기가 살아나서 빛 가운데 머물게 될 때 그 때부터 의미있는 열매를 맺어갑니다. 그 열매는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1207 봄 어느날 프란체스코 베르나르돈은 홀로 말을 타고 아름다운 움브리안 시골길을 지나가면서 매력적이고도 도전적인 공상에 깊이 잠겨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게됩니다.
"프란체스코, 네가 나의 뜻을 알고 싶다면 먼저 네가 육신적으로 사랑하고 원했던 모든 것을 경멸하고 미워하는 것이 네 의무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하면 지금 네게 달콤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이 쓴 것이 될 것이다, 반면에 과거에 혐오하던 모든 것이 굉장히 달콤하고 더없는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이 말씀을 곰곰히 생각하느라 사색에 빠져있던 그는 갑자기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의 말이 깜짝 놀라서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깨어난 것입니다. 눈을 떠보니 몇 발짝 앞에 심한 나병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는 말에서 내려와 나병인에게 가서 그의 문드러진 손에 자선금을 쥐어 준 다음 악취가 나는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는 말에 올라타고 감정에 북받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느 전기 작가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가 "인간이 거둘 수 있는 최고의 승리 곧 자신에 대한 승리를 얻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프란체스코 자신이 말했듯이 주님이 그를 이기고 최고의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그는 더 이상 사랑을 노래하는 서정시인이나 스스로 원정을 떠나는 신앙의 기사에 불과한 인물이 아니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것을 경멸하고 자기가 멸시했던 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면서 거꾸로 변화되었으며, 하나님의 어릿광대, 하나님의 재주꾼, 하나님의 바보가 되었습니다.
후에 프렌체스코는 "이런 방식으로 주님은 나의 회심이 시작되도록 승낙하셨다"고 썼습니다. 거기에서부터 프란체스코의 새로운 소명은 시작되였습니다. 그 당시 프란체스코의 소명은 무너진 교회의 재건이였습니다. 그후 그에 의해 '작은 형제들'이란 수도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은 세상적 관점에서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바보가 되어야 역설적 진리를 믿고 자신을 버리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세상적으로 똑똑하고,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은 역설의 진리를 받아드리지 못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업적이 아니며 열매입니다. 열매는 자신이 죽을 때 나타납니다. 죽지 않고 살아 있을 때 업적을 남기고자 하는 야망에서 생명력이 없는 일들을 많이 만들어 놓습니다. 그러나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살아날 때 새 소명의 사람이 됨과 함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참된 소명을 발견한 사람은 그 소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게 됩니다. 그러한 삶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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