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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육신의 능력(딛 2:11~14) / 임영수 목사

by 【고동엽】 2021. 11. 29.

성육신의 능력 (딛 2:11~14)

 

임 영 수 목사

 

 

 

옛날 로마시대에 황제 숭배가 있었습니다. 그 시대 황제는 신적 존재로 숭배 되었습니다. 그러한 황제가 어느 지방 도시를 방문하면 그 지역 전체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세금감면, 도로건설, 극장건립과

 

같은 특혜가 베풀어졌습니다.

 

 

 

오늘 디도서 본문에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사는 지구라는 항성을 방문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지구 방문으로 인해 특별한 혜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 황제가 줄 수 있었던 세금감면, 도로건설, 외국권력으로부터 해방이 아니라 인간 구원입니다.

 

 

 

디도서에서 말하는 인간 구원은 베드로전서에서와 같이 “낡고 무의미한 삶의 틀에서 해방‘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세상의 욕망과 하나님의 부재 상태에서 해방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살아 갈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전연 관심조차 갖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법을 어기며, 율법과 삶의 규범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에 지배를 받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사물에 대한 잘못된 표상들이 그들의 욕망을

 

더욱더 부추깁니다. 그들은 오로지 세속적인 사물, 소유물, 먹고 마시기, 성적 만족감에만 집착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데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신중함, 의로움, 경건함으로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디도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현현(Epiphany)으로 베풀어지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본문에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그 은혜는 우리를 교육하며, 경건하지 않음과 속된 정욕을 버리고, 지금 이 세상에서 신중하 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게 합니다.” (표준 새 번역개역)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구원의 은총이 무신론의 공허한 활동과 기질에 따른 노예화에서 인간을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세속적 욕망, 다른 사람의 눈치, 체면에 의해서 자신의 삶을 결정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자유롭게 살도록 성령님을 통해 교육시킵

 

니다.

 

 

 

디도서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해방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세 단어로 표현하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신중함 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하여 건전한 사고를 갖는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 목적에 맞는 것 적당하며 예의바름 입니다.

 

즉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정욕에 사로 잡혀 있을 때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우선 자기중심대로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실재와는 거리가 멉니다. 실재를 바르게 보지 못할 때 헛된 환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쉽게 좌절하고 상처를 받게 됩니다. 인간의 불행은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데서 비롯됩니다.

 

 

 

신중함으로 교육받은 사람은 참된 실재를 인식하게 되고, 현재를 바르게 의식하고, 매순간 온전히 현재에 머물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온전히 현재의 상태에 머물지를 못합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둘째 아들의 비유에서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은 현재에 존재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대표적인 표상입니다. 그는 아버지 집에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실재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다른 나라를 그리워합니다.

 

그 곳에 가면 자신의 정욕대로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 그를 더욱더 아버지를 떠나가게 만듭니다. 결국 그는 환상의 세계로 달려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 곳에는 그를 진정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삶의 비참성 가운데서 실재를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참된 실재의 삶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는 비로소 허구와 실재를 바르게 보게 됩니다. 그가 전에 그렇게 동경하던 그 화려함, 멋짐, 아름다움이 얼마나 가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디도서의 저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로마 사회를 바라보게 될 때 로마 사회가 만들어 놓은 만족을 추종하는 삶이 얼마나 허구적이며 실재가 아닌 가상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동역자 디도에게 그 사실을 서신으로 상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신중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은 망상과 허영, 정욕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입니다. 신중하게 사는 그리스도인은 그가 상상하는 대로 세상과 사람이 바뀌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합되게 살아가려는 부담으로부터도 자유롭습니다.

 

 

 

그 다음은 의로움 입니다.

 

의로움은 삶의 질서, 즉 사회질서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생명의 질서에 따라 올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올바르고 공정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치품을 점점 더 많이 가짐으로써, 즉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하여 더 많은 돈을 벌면서 자신들의 외적 상황을 지금보다 더 낫게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다른 사람의 작은 배려를 얻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노력하며 애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 자신을 희생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고유한 존엄성에 상응하지 않는 것을 좇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6)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달리 번역하면 “자기 영혼에 해를 끼친다면”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 호의, 물질적인 것을 다 얻었다 하더라도 결국 자기를 잃어버리게 되면 심한 공허감, 허탈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사는 삶에는 자유가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유가 없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시대의 분위기가 외적인 명성만을 전부로 여긴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다른 영원한 실재를 감지한 그들은 모든 명성이 가상임을 폭로했습니다.

 

그들은 당 시대 사회의 헛된 짓들을 함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부터 해방 되었습니다.

 

 

 

안셀름 그륀은,

 

사람들은 “60세가 되어서야 자기 자신에게 속아서 삶을 빼앗겼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빼앗았다고

 

깨닫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올바르고 조화롭게 진정한 자아와 일치하며 살아가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상실하게 됩니다.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사람은 의롭게 살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올바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웃에 대해서도 올바르지 못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삭개오는 당시대에 의롭게 살아가지 못한 사람의 대표적인 표상입니다.

 

그는 작은 키에 자신을 잃어버린 상실감,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공허를 재물과 권력으로 채워보려고 했습니다. 그는 세리장으로서 백성들의 재물을 불법한 방법으로 착취했습니다. 어느날 그리스도께서 그 지방을 방문했을 때 삭개오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택이 내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의 집안 구석 구석에 빛이 비췄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두운 영혼에도 빛이 비췄습니다. 그는 그 빛 가운데서 자유하는 새로운 사람으로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욕심에서 해방되었고, 자신의 삶을 열등감과 정욕에 사로잡혀 결정하지 않고 새로운 자아의 사람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자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진정 재물의 노예에서 주인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는 이웃에게 새로운 존재로 다가갔습니다.

 

이웃은 그에게 더 이상 착취의 대상이 아닌 도와주고 협력하며 살아가야할 그의 형제 자매였습니다. 그의 집과 그의 마음에는 재물이 쌓여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머무는 곳이 되었습니다. 자유인으로서 삭개오는 주님 앞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드디어 예수님께로부터 그에게 구원이 선포됩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마지막으로 경건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는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를 파멸의 소용돌이에서 떼어 놓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 입장에서 보게 만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를 우리 안에 있는 내면의 샘과 접하게 해줍니다.

 

그 샘은 결코 마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그 샘에서 갈증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우리를 우선 진실로 생기 있게 만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아가면 우리는 인간의 비극 전체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비극이란 인간이 자신을 보지 않으며 살아가고 환상을 좇으며 자신의 정당한 요구를 외면한 채 항상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은총과 함께 나타나십니다. 그 분이 내가 사는 도시에 나의 일상생활 안에 나타나십니다. 왕이 지방 도시를 방문할 때 그 도시 전체가 왕을 맞기 위해 단장하고 꾸미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에는 하나님의 사랑어린 깊은 배려가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사랑으로 어루만지시고 그의 사랑으로 나의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을 비추시며 그 사랑의 빛으로 내 영혼의 구석구석을 밝혀 주기 위해 오신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의 삶은 모든 면에서 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나는 더 이상 내가 사는 도시가 사람이 살 수 없고 더럽고 궁핍해서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무가치한 곳이라고 한탄하지 않게 됩니다.

 

나의 열등감에 대해서도 한탄 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인 나에게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사랑을 지니고 나타나십니다. 즉 나의 내면의 도시에서 거리를 활보하고 어디에서나 호의와 동의를 선포하십니다.

 

그 때 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닿지 않거나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긍정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정의 빛 가운데서만 실재적인 것과 비 실재적인것을 분별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과 된 후에 서로 상반되는 현상이 일어나게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비 실재적인 것들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사항들이 달라집니다.

 

 

 

그전에는 소박한 것, 유행의 풍조에 따르지 못하는 것, 양이 적은 것, 겉으로 아름답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전에는 소위 사회에서 상류층들이라고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들의 축에 끼여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러한 것들이 모두 비 실재적인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무엇이 진정 값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그 구원의 은혜는 우리를 하나님 없이 살던 삶에서와 정욕의 노예적인 삶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새로운 자유인으로 살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시대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자유인으로 부름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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