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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별 편◑/이정익 목사 명설교(385편)

사역의 은사 (3)

by 【고동엽】 2021. 11. 29.

사역의 은사  (3)

 

 

 

 

                                      12:6-13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

 

                    는 일로 .....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

 

                    고 주를 섬기라.

 

 

 

 

 은사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은사 즉 카리스마톤 (Kalismaton)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 곧 은혜의 선물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용어를 서간서에서 16회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이유는 그 은사를 활용해서 섬기고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은사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오늘은 “사역의 은사”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본문에 나와 있는 대로 “남을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위로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등은 모두 사역의 은사를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사역을 할 때 꼭 필요한 은사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은사들을 행할 때는 “즐거움으로, 부지런하게, 열심히” 하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은사

 

 

 

 

쉽게 말하면 전도를 잘 하는 은사입니다. 이 전도의 은사는 말 그대로 전도를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전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책임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전도를 잘하는 능력이 있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들은 전도하는 일에 즐거움을 얻고 행복함을 얻고 보람을 얻습니다. 그것은 내가 은사를 받았기 때문이고 은사가 활용되기 때문입니다. 이 은사는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전도의 은사가 없는 분들은 “전도하라” 하면 겁부터 먹습니다. 그리고 회피하려고 합니다. 회피만 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불평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장소도 좁은데, 전도할 사람도 없는데” 하고 불평을 합니다. 은사가 있고 없고가 이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은사가 있는 분들은 무슨 일이든 즐거움으로 행복함으로 행동함으로 사역합니다.

 

 

 어느 교수부부는 토요일이면 전도를 위해 나갑니다. 나가서 100 사람을 전도하면 한두 사람 정도 결신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 결심자들을 얻을 때 그렇게 기쁨과 행복함과 만족함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은사가 열매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도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개발해야 합니다. 말씀의 은사, 가르침의 은사, 양육의 은사, 행정의 은사, 전도의 은사 등 내게 주어진 은사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들도 나에게 어떤 은사가 주어졌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활용해야 합니다. 확인도 없이 주일날 한 시간 예배드리는 것으로 끝나는 삶은 너무 안일한 삶입니다. 교회성장학에서는 건강한 교회는 전체 교인 중 전도의 은사자가 10%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그 교회가 생동감을 잃지 않고 정체가 되지 않습니다. 전도자들의 전도상에서 경험한 간증을 들으면 얼마나 감동적이고 새롭습니까. 그 체험이 전달될 때 다른 분들도 도전받게 되고 바람이 새롭게 일어나는 법입니다.    

 

 

 

 

구제의 은사

 

 

 

 

본문은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은사 중에서 구제하는 일, 나누는 일, 베푸는 일은 특별한 은사입니다. 내 것을 누구엔가 준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많이 가지고 있다고 다 나누고 베풀고 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많이 가진 사람이 더 인색할 수 있습니다. 잘 사는 동네에서 적십자 회비를 안낸다고 합니다. 많이 가지고 있는 분들이 커피 한잔 안사는 분도 있습니다. 참 지독합니다. 주님 일을 위해서 물질을, 재산을, 자원을, 시간을, 재능을 활용하고 즐겁게 드리고 삶은 참 행복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은사라고 했습니다. 주일 하루를 바치고, 11조를 드리고, 하루 종일 봉사를 하는 일은 대단한 은사입니다. 그런 분은 드리는 삶에 기쁨을 누리고 행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받을 때 보다 나눌 때 더 큰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나에게 많이 주신 것은 많이 활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재능을 주신 것은 활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활용할 때 행복함이 주어집니다. 기독교 역사는 나눔의 역사이고 기부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부는 기독교에서 발생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죽을 때는 다 놓고 갔습니다.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정신 때문입니다. 어느 노부부가 하버드 대학에 가서 총장 찰스 엘리엇을 찾았습니다. 전쟁에서 죽은 아들을 추모하는 뜻으로 학교에 기부금을 내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행색이 너무 초라하고 누추했습니다. 보기에 큰 액수를 내 놓을 것 같지 않아서 일부러 바쁜 척 했다고 합니다. 이분이 총장의 무례함을 보고 그냥 돌아가 캘리포니아 남부로 갔습니다. 전 재산을 투자해서 그곳에 대학을 설립했습니다. 그 대학이 스탠포드 대학입니다. 그분이 캘리포니아에서 주지사를 지내고 상원의원을 지낸 릴랜드 스탠포드씨입니다. 이런 일은 아무나 못합니다. 거기에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하고 나누고 베푸는 은사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고넬료는 로마인이었고 군대의 백부장이고 예루살렘한 주둔군 장교였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였다고 했습니다. 마침내 그 구제가 하늘에 상달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입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고전133절을 보면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구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경우는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곧 서운하고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51~11절을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남이 헌금하는 것을 흉내내다가 스스로 시험되어 불행하게 되는 모습이 나옵니다. 내가 기쁜 마음으로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 때문입니다.

 

 

 

 

섬김의 은사

 

 

 

 

이 섬김의 은사는 하나님의 일에 무엇이 부족한가를 알고 그 필요를 조용히 충족시켜 주는 능력을 섬김의 은사라고 합니다. 오늘은 개인주의, 불화, 갈등이 심화되어 가는 시대입니다. 그런 시대에 우리들이 받아야 할 은사는 이 섬기는 은사입니다. 이 은사가 있는 곳에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나누고 대접하는 은사도 섬기는 은사입니다. 아브라함이 남을 섬기고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사렙다 과부의 섬김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던 여인들이 정성을 다해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연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하는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옥합을 깨트리는 섬김, 얼마나 향기로운 섬김의 모습입니까.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이 지극 정성으로 주인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주인의 며느리 간택권까지 주어졌습니다. 요셉이 종으로 팔려간 애굽의 보디발의 집을 지극 정성으로 섬겼습니다. 감옥에서도 지극 정성으로 섬겼고 총리직도 그렇게 섬겼습니다.  

 

 섬김의 은사는 참 중요한 은사입니다. 상대를 평안하게 해 주는 은사입니다. 이 은사가 발휘될 때 누구보다 은혜를 입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먼저 내 마음이 행복하고 내 마음에 천국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이 시대 가장 필요한 은사는 이 섬김의 은사입니다. 이 은사가 발휘되면 모든 갈등도 원망도 자랑도 시비도 다 사라질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정에서, 교회에서, 우리 이웃에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이 섬김의 은사자들이 나타나서 그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 일을 그리스도인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이 섬김의 은사는 내가 나를 위한 행동이 아니고 남을 돕는 은사입니다. 이 은사는 내가 누군가에게 조금만 도우면 바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행동의 신앙입니다. 조금 모자란 사람에게 조금만 지원하고 필요를 채워주면 곧 일어서게 하는 은사입니다. 참 좋은 은사입니다.

 

 막2장을 보면 한 중풍병자를 들것에 들고 예수께 가서 고쳐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 네 친구가 그를 돕고 섬기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섬김은 마침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놓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백부장도 중풍병에 걸린 자기의 종을 위해서 예수께 찾아가 내 종을 고쳐달라고 간구하여 마침내 종을 고쳐 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갈 때 구레네 시몬이 그 십자가를 받아 자신이 지고 갔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인수하여 자기 무덤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지체부자유자들을 돌보는 보육원에 가 보면 냄새가 많이 납니다. 아이들이 몸이 뒤틀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용변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냄새가 나고 밥을 떠서 입에 들어가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보육교사들은 그 아이들의 옆에서 지켜보고 도와줍니다. 그런데 감동스러운 것은 그 아이들이 밥을 먹다가 흘리면 집어서 자기 입에 넣습니다. 천사가 따로 없습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천사의 마음입니다. 자기 부모인들 그렇게 하겠습니까. 호스피스 자원 봉사자들은 말기 암환자들을 돌봅니다. 어느 분은 그 영혼들을 바라볼 때 그렇게 불쌍하게 여겨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번이라도 손이 더 가게 되고 종말을 순조롭게 맞이하도록 기도하고 영혼구원을 위해서 그토록 기도하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 마음에 그 마음을 주셨습니다. 가족들도 아내도 부모도 자식들도 못하는 일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 섬김의 일을 해 내는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남들 앞에 나서는 일도 중요합니다. 앞에 나서서 진두지휘를 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앞에 나서기보다 남을 내 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돕는 일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축구경기에서 골을 넣는 사람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골을 넣도록 어시스트 해 주는 역할도 중요한 일입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도 중요지만 금메달을 따도록 협력하는 사람들은 더 좋은 역할입니다. 어떤 때는 누군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고 큰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자들에게 이 은사가 요구됩니다. 이런 섬김자는 섬김의 일을 할 때 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자유합니다. 행복함이 주어집니다. 즐거움을 얻습니다. 그 즐거움과 행복함은 어디에서 다른 일로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힘들어도 마다하지 않고 그 섬김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괴테의 시에 “앉은뱅이 꽃의 노래“ 라는 시가 있습니다. 들에 핀 한 송이 앉은뱅이 꽃이 양의 젓을 짜는 순진한 시골 소녀의 발에 밟혀 시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앉은뱅이 꽃은 조금도 서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지막지한 사내들의 손에 꺾이지 않고 맑고 청순한 시골 소녀의 발에 밟혔기 때문에 꽃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보람이 사람을 행복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보람 때문에 물질을 나누고 베풀고 봉사하고 섬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하늘이 주는 마음입니다. 행복은 반드시 무엇인가 주어져서 얻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게서 나갔는데도 오히려 더 행복한 것이 은사의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사의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리더쉽의 은사

 

 

 

 

이것은 다스리는 은사이고 지도하는 은사입니다. 본문은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질서를 다스리고 지키고 유지하고 여론을 정리하고 불평을 조절하는 역할이 모두 다스리는 은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불평을 부채질하고 조장하고 불 지르는 분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불평들을 잠재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일하도록 이끌어 내는 사람도 있고 일꾼을 발굴하고 키우고 이끌어 일하게 만들고 또 늘 새로운 비전을 심어주고 아이디어를 생각하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은사자들이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늘은 불평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뒤에서 부채질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 무책임한 사람들입니다. 불평하고 시비하는 사람은 리더가 될 수가 없습니다. 자질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리더는 반드시 앞에서 이끌고 가는 사람만 리더가 아닙니다. 뒤에서 낙오하지 않게 보살피는 사람도 훌륭한 리더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내가 예수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끌고 예수께로 나아가 소개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이 회심한 후 어쩔 줄 몰라 할 때 그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도들에게 인사를 시키고 안내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사울로 하여금 대 사도의 길을 가게 만들었습니다. 모세의 성공 뒤에 여호수아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말없이 언제나 그림자처럼 모세를 따라 다녔고 제 2인자로 만족하면서 도왔습니다. 이들이 모두 보이지 않는 리더들입니다. 어찌 보면 이 사람들이 진정한 리더들인지도 모릅니다.

 

 

 

 

행정의 은사

 

 

 

 

특별히 행정적인 은사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관리를 하고 장단기 계획을 짜고  연구하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늘 일을 능률화 하고 효과를 이루는 방안을 연구합니다. 이런 분들은 행정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남들이 하루 종일 할 일을 이런 은사자들은 앉아서 조금만 힘쓰면 금방 계획을 만들어 내 놓는 분들이 있습니다. 모세의 장인이 이드로가 하루는 모세가 사역하고 있던 곳을 방문합니다. 모세가 재판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서 백성들이 재판을 받으려고 줄지어 서 있고 모세 혼자서 진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이드로가 한마디 조언을 하였습니다. “그대 혼자서 이 일을 하지 말고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두어 그들로 재판하게 하고 그대는 그들이 하지 못하는 일만 하도록 해 보라“. 모세가 그 조언을 곧바로 시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은사는 다 각각 다릅니다. 은사를 발휘하게 되면 나도 쉽고 재미있고 남들을 섬기게 되는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백성들에게 다 은사를 주셨습니다. 활용하라 주신 것입니다. 활용해서 모두를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슨 은사를 받았습니까. 제임스 스미스는 “자신의 은사를 발견해냄으로서 당신은 진정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모두 얼굴과 개성이 다 다르듯이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도 역할도 다 다릅니다. 그 다른 은사들이 모여 함께 일할 때 그 공동체가 잘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그렇게 움직여지도록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각각 다른 은사들은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 롬126~8절을 보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가르치는 일이면 가르치는 일로,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모범을 보이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시범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난으로 죽음으로 그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청지기 인생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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