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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익 목사 준비중

사랑의 차원

by 【고동엽】 2021. 12. 7.

사랑의 차원

 

 

 

 

 

 

 

 

                                           요일 4:19-21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

 

 

 

                           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

 

 

 

                           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주님께서 강조하시고 가르쳐 주신 사랑의 정신에 대해서 연속으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사랑은 너무 수준이 높고 뜻이 크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음미하지 않고는 이해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랑은 자신을 위주로 해서 살아가서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흉내조차 낼 수가 없는 그런 높고 깊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이 발휘되려고 하면 나를 초월하고 내가 극복되고 반드시 이웃과의 관계에서만 발휘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랑의 의미가 이렇게 깊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사랑을 정의하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원래 이 말씀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을 조심하라는 교훈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극성이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지주의자들의 이론과 모습을 보면서 유혹을 받았습니다. 저들의 모습과 저들이 강조하는 이론이 더 높아보였고 깊은 진리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으로 자기들만 우월하고 순결하다고 자만하고 과신하고 교만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 이외에는 교제도 하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들만 모여서 교제하고 사랑을 나누고 그랬습니다. 본문은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그 잘못된 사랑을 경계하게 하고 올바로 사랑의 정신을 새롭게 정의해서 본문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두 가지가 이루어져야 완성됩니다. 하나는 대신관계이고 또 하나는 대인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사랑의 관계가 건강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직적인 관계가 건전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깊은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져야 그것이 완성된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사랑의 모습을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절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부수었습니다. 아주 유감없이 자신의 몸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완성된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랑이 완벽한 사랑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그래서 이 세상에서 관계의 삶이 중요합니다. 특히 오늘 같은 시대에는 이 관계의 삶을 원활하게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오늘은 모두 자기위주의 삶을 살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 관계에 갈등을 유발하기가 참 쉽습니다. 그렇지만 이 관계에서 가장 성숙된 정신을 발휘하고 그 관계에서 섬김의 정신을 발휘할 수 있어야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이제 새로운 계명을 또 다시 준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미 구약성경에도 여러 번 나와 있습니다. 그럼에도 새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신 것은 지금 너희들은 너희들 너희들끼리만 교제하고 유대인들끼리만 사랑하고 교제할 뿐 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은 상종도 하지 않는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지적입니다. 우리끼리만 유대인끼리 교제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끼리, 내 가족만, 가까운 친구들만 모여 친교하고 가까이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자연히 울어 나옵니다. 수고하지 않아도 훈련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슨 강조하여야 할 사랑입니까.

 

 

 

 

 주님께서 새로운 계명을 주신다고 하신 것은 네 이웃 모두가 사랑의 대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좋은 사람만 사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쉽고 편하고 좋겠습니까. 좋은 사람끼리, 가까운 사람끼리, 마음이 잘 맞는 친구끼리 서로 사랑하고 친교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사랑과 친교와 교제는 수고 없이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할 수 없는 나의 이웃을 사랑할 수 있어야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발휘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음의 정신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발휘될 수 있습니다.

 

 

 

 

 

 

 

 

“너를 위해서 내 필요를 포기할 때”

 

 

 

 

 

 

 

 

사랑은 너를 위해서 나를 포기하는 삶입니다. 오늘 관계가 악화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는데 그 원인을 들여다보면 나를 너무 강조해서 그렇습니다. 내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 내 뜻이 너무 강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무 강한 사람이 집안이나 집단이나 교회 안에 있으면 관계가 악화되거나 균열이 생깁니다. 그것은 내 몫을 다 채우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려면 내 자존심이나 내 체면 그리고 내 몫을 다 챙기면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나를 축소하는 것이고 나를 배제하는 것이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왜 나의 몫을 포기해야 하는가 하면 그 동기가 내 옆에 있는 지체들을 세우고 사랑할 목적 때문입니다. 왜 내 이웃에 있는 지체들을 사랑해야 하느냐 하면 그것이 사랑이고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내 옆에 있는 지체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네가 삽니다, 내가 작아져야 너를 세울 수 있습니다. 내가 작아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이렇게 힘든 일인데도 성경은 여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힘든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하면 내가 하려고만 하면 성령께서 힘을 주십니다. 그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불가능한 것 같은데 가능합니다. 어려울 것 같은데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신비하게도 약한 우리로 하여금 위대한 일들을 해 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가 두 아들을 공비에게 무참하게 희생을 당했습니다. 1948. 10. 21. 여수반란사건 때 동인과 동신 두 아들이 예수쟁이 아들이라고 해서 공비들에게 납치당해서 총살당했습니다. 반란사건이 진압되고 살인범 안대선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살인범을 볼 때 눈에서 불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손양원 목사가 총살형 날이 다가올수록 고민이 커졌습니다. “내 아들은 이미 죽었다, 저 살인자를 미워하고 사형을 받는다 해도 내 아들은 다시 살아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기도를 바꾸었습니다. “내가 저 죄수를 사랑하게 하소서, 저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맨 정신으로 내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 살인범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한동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살인범을 구출하기 위해서 탄원서를 내고 구명운동을 펼쳤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담당관이 감동해서 사형에서 구출합니다. 그리고 안대선을 손대선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 살인자를 죽은 아들들을 대신해서 양아들로 호적에 입적 시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자본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성령의 감화로 내 마음을 죽이고 축소하고 비우게 하고 부정하게 하시니까 가능한 일입니다.

 

 

 

 엊그제 어느 TV를 보니까 살인마 유영철에게 한날한시에 어머니, 아내, 아들 셋이 희생된 어느 가장이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하면 좇아가서 그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그렇게 한들 이미 세상을 떠난 세 목숨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그를 그렇게 미워한다고 내게 무슨 위로와 유익이 오겠는가. 그래서 기도하면 자꾸만 그 영혼이 불쌍해지는 마음이 들어 이미 용서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고 무거웠던 마음의 십자가가 내려지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때로 이렇게 위대해 질 수가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면 이렇게 위대한 일을 해 낼 수가 있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존재입니까. 내 어머니, 아들 아내를 한날한시에 죽인 살인범을 용서합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것이 신앙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힘을 주시고 성령이 내게 그런 능력을 주셔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 힘을 사랑의 힘이라고 합니다. 나를 축소하고 내 몫을 축소시키면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일은 신앙 안에서 살게 되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내가 신앙 안에서 하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흉내도 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나에게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얼마든지 위대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나를 축소하고 내 몫을 포기할 때 나타나는 정신입니다.

 

 

 

 

 

 

 

 

 

“외모로 보지 말고 영적인 눈으로 볼 때”

 

 

 

 

 

 

 

 

복음서에 보면 우물가의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정숙하지 못한 여인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그 우물가의 여인을 바라볼 때 사람들은 그의 육신에 초점을 맞추어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동족들 까지도 그 여인을 정죄하였고 경멸하였고 멀리 하였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그 여인이 사마리아 여인이라는 이유로 그 여인과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그 여인의 육신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언뜻 보이는 것이 부정한 것만 보이고 정숙치 못한 모습만 보이고 불결한 모습만 생각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여인에게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그를 정죄하고 부정한 여인으로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육신을 보신 것이 아니고 그 여인의 초라한 영혼을 보셨고 그 여인의 남루한 심령과 비굴해진 자존심을 보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을 불쌍하게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다가가셔서 영적인 갈증을 풀어주셨고 그 여인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 여인의 직업이나 출신이나 남편이 다섯이나 되는 것을 보지 않고 지금 그 여인의 영혼상태가 너무나 초라하고 남루한 것을 보셨습니다. 그러니까 정죄하기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먼저 솟아나와 그 여인을 보호해주고 문제를 풀어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때로 사람들을 흉보고 부족한 부분을 판단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가가기를 꺼려하게 되고 대화조차 하기 싫어지게 되고 접근하기가 싫고 그래서 상대를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들의 겉모습만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의 영혼을 본다면 그가 불쌍해서 그렇게 조소 섞인 눈으로만 보지 않게 될 것입니다.    

 

 

 

 

 TV를 보면 “한번 꼭 만나보고 싶다“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거기 나오는 주인공은 대부분 아이를 잃어버렸던 어머니가 나오고 잃어버린 아이가 자라서 어머니를 찾는 내용이 대다수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오래전에 헤어진 가족을 만나게 되면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때 당사자들만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함께 당사자 못지않게 많은 눈물을 흘립니다. 그때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들의 겉모습을 보아서 눈물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들의 내면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를 잃어버린 후 눈물로 지샌 어머니의 내면의 아픔, 그 어린 아이를 찾아 헤매느라 몸살을 앓았던 모습, 어린 아이가 엄마를 잃어버리고 헤맸던 그 아픔의 세월, 그러다가 오늘 30년 만에 만나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가족들의 내면의 아픔을 보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내 가족도 아니지만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람을 겉에 나타난 모습만 보지 말고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게 됩니다. 그 영혼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솟아나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물가의 여인을 보고 침을 뱉었고 욕을 했고 상종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것은 그 여인의 겉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의 내면을 보셨습니다. 그의 상한 영혼을 보았고 초라해진 마음을 보셨고 갈급한 심령을 보셨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상종하기를 꺼려하였지만 주님은 그 여인에게 다가가서 위로하셨고 영혼을 고쳐주셨습니다. 사랑이 뭐냐 하면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말이 아니고 행동할 때”

 

 

 

 

 

 

 

 

사랑은 말이 아니고 행동이고 실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성경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동이 없으면 이론가가 되고 바리새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요일 2:4-6절까지 보면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서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본문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했습니다. 사랑은 곧 행동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행동은 곧 믿음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제자가 와서 물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까” 그때 대답하기를 “지금 네 앞에 있는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3:27절을 보면 “지금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절대로 이웃으로 하여금 내일까지 기다리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지금이 사랑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때인가 하면 내가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황은 언제나 변합니다. 기회는 자꾸만 사라집니다. 사람들은 자꾸만 죽습니다. 아이들은 자라 버립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도 언제 상실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들이 언제 상실될지 모릅니다. 또 나에게 내일이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내일은 엄밀히 말하자면 나의 날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일을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한다면, 도움을 줘야한다면, 섬겨야 한다면 오늘 지금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설 것이라는 점을 늘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지극히 순리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순리적인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사랑은 곧 나의 축소이고 부정이고 행동입니다. 그리고 행동은 곧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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