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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이사야-예레미야-에스겔 신년 통독 사경회-

by 【고동엽】 2021. 11. 29.
하나님 나라 신학연구소 신년 성경통독사경회
초청의 글




여러 곳에 흩어져 계신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신지요? 다사다난했던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신 교우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해처럼 빛나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동안 하나님 나라 신학 연구소는 지난 해 4월 5일에 출범한 이래로 이유 있는 잠행 혹은 저공비행을 해 오고 있습니다. 하도 많은 연구소들이 생겼다가 없어지는 그런 추세에 우리 연구소도 그런 유행의 일부로 보일까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또한 역량을 좀 더 비축한 후에 한국교회에 알려지는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조용히 출범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언론의 취재요청도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형제자매님들을 모시고 지난 1년의 연구소 프로그램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40여명의 형제자매님들이 24주간의 성경 개관 공부를 잘 마칠 수 있었고 16명의 교역자들이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 공부를 16주간에 걸쳐서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가능케 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기도해 주신 모든 후원자님들과 참여해 주신 형제자매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새 해에도 하나님 나라 신학연구소는 말씀 연구, 학습, 순종 훈련에 정진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 신학연구소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래라 저래라고 소리치는 거리의 아우성을 대표하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키는 자기훈련의 도장입니다. 타인의 죄를 규탄하고 구조악의 일소를 위해 분투하는 예언자적인 운동도 필요하지만 이것이 하나님 나라 신학연구소의 일차적 과업이 아닙니다. 이 연구소의 일차적 과업은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주셔서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하셔서 마침내 순종하게 하시는 메시야와 함께 가는 통독학습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에 임한 은혜를 사모합니다. 모든 인간은 길을 가는 도상의 존재입니다. 목적지를 향해 길을 가는 순례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구원의 감격이 식어버린 제자들과 목적의식과 소명감이 식어버린 제자들을 불러 모세의 글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의 글로 제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고, 그들의 여정에 함께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말씀 통독은 메시야 예수님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뜨겁게 연락되고 소통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 나라 신학연구소는 이런 말씀 통독의 사경회를 열려고 합니다. 먼저 이 연구소를 후원해 주신 이사님들과 후원자들을 초청합니다. 그리고 말씀공부에 참여했던 교우님들을 초청합니다. 이번에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서를 통독하려고 합니다. 이 세 책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아버지의 지극히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반응을 가장 심오하고 다채롭게 보여줍니다. 이 책들은 신약의 예수님과 구약의 야웨 하나님을 잘 연결시키는 책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우들이 혼자 있을 때에는 이런 책들을 잘 읽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 책을 통독함으로써 예수님을 보내실 수밖에 없었던 구약성경의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뵈오려고 합니다.




2008년 섬기는 종 김회권 목사 드림.












<수련회 상세 안내>


1. 목적
(1) 새 해 여정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초청하고 영접하기 위하여,
(2) 식어버린 구원감격과 소명감을 회복하여 새해를 보람과 희망으로 가득 채우기 위하여, (3) 하나님께 깊이 순종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권 아래 자신을 복종시키기 위하여


2. 초청대상: 하나님 나라 신학연구소 이사 및 가족, 후원자 가족, 하나님 나라 신학연구소 수료자. 본 연구소 회원에게 추천을 받은 교우


3. 기간: 2009. 1. 16(금) 오후 6시-17(토) 오후 2시
4. 장소: 장신대 세계선교협력센터(02-450-5511)(장신대역 하차 도보 10분)
5. 예상인원 : 50명(장년) / 유아, 초등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 운영(교사/베이비시터 제공)
6. 회비: 모든 숙식 제공 및 교재비 포함(50,000원, 10세이하 아동 면제)
7. 준비물: 1박 2일 외박 준비물, 성경, 필기도구, 형제들의 경우 운동 준비 등
8. 시간표
16일 금 오후 6시 도착(식사 각자 식사 해결)
7시-7시 30분 개회예배(양진일 목사, 본 연구소 연구원)
7시 30분-8시 소개 및 친교
8시-11시 이사야 통독(김회권 목사, 연구소 소장)
11-12시 이사회


17일 토요일 오전 6-8시 예레미야 통독 (김회권 목사)
오전 8-9시 아침 식사(학교식당)
오전 9-11시 에스겔 통독(김회권 목사)
오전 11-12시 종합(참여자 모두 질의 응답 토론)
오전12시-12시30분 폐회예배(김정태 목사, 사랑누리교회 담임목사)
오후 12시 30분-오후 1시 30분 점심 식사(학교식당)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을 관통하는 공통주제와 구원사의 드라마


구약성경의 3대 선지서인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은 내용이 방대하고 복잡하여 보통 교우들이 홀로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책입니다. 마치 거대한 대하와 협곡과 고산준봉들이 줄줄이 들어선 산맥같은 말씀의 지형도를 구성하는 책입니다. 쉽게 접근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지만 한번 그 세계 속에 들어가면 찬탄과 놀람을 금치 못하게 만드는 책들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씀들이 분천처럼 흐르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발산하는 아름다운 영봉들이 솟아있습니다.
이 세 책의 주제는 죄와 벌, 그리고 그 이항대립적인 모순을 초극하는 하나님의 죄사함과 회복입니다. 이사야는 주전 8세기 남 유다 왕국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시대에 걸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고 그 가운데 갖은 역경과 고난을 겪었습니다. 하나님과 등을 돌리고 사는 유다 왕국의 권력엘리트들과 지배층, 지주들과 고급관리, 제사장들, 땅을 가진 자유농민들의 배교적인 삶을 말씀으로 고쳐보고자 분투하다가 배반당하고 외면당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사야보다 약 120년 늦게 등장한 남유다 왕국의 예언자로서 지방 소재 성소의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유다 왕국의 마지막 시절의 실망스러운 왕들과 대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그도 이사야처럼 유다 왕국의 권력 엘리트들과 제사장들과 지주들과 맞서며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를 외쳤습니다. 그는 요시아, 여호아하스(살룸), 여호야긴, 여호야김, 그리고 시드기야 왕 시대에 걸쳐 예언하며 마침내 조국의 멸망과 성전의 파괴, 왕들의 유배를 친히 목격하며 애통해 하던 예언자였습니다.
에스겔은 예레미야보다 약간 젊은 예언자로서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 부시의 아들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왕족이었으며 에스겔은 중앙 예루살렘 성전 봉직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고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에 헤게모니를 빼앗긴 구 성소 소재지였던 실로(Shiloh) 성소의 전통을 이은 아나돗 성소 출신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에스겔은 25세에 즉 주전 597년에 여호야긴 왕과 함께 바벨론 포로로 붙잡혀 가서 적어도 25년간 바벨론 포로난민들 사이에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과 하나님의 회복의 가능성을 말하며 바벨론 포로들에게 하나님의 회복섭리에 대한 열망을 갖도록 격려했습니다.
이 세 예언자는 인간의 죄에 대한 격렬하고 통렬한 정죄와 탄핵을 쏟아내는 데 전문가이지만, 하나님의 대파국적인 심판과 징벌을 받고 쓰러진 사람들을 회복시켜 하나님의 은총과 죄사함의 섭리를 기대하도록 만드는 데도 전문가입니다.




이사야서


I. 이사야서의 저자
이사야서 1-66장의 저자가 한 사람인지 혹은 두 사람/세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19세기 말 베른하르트 둠(Bernhard. Duhm) 이래로 학자들의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1-39장은 대체로 앗수르 제국의 위세를 경험하던 청중들에게 선포된 예언들이고, 40-66장은 바벨론 제국과 페르샤 제국의 위세를 경험하던 청중들에게 선포된 예언처럼 읽힌다. 과연 주전 8세기 예언자가 당대의 회중들에게 약 200년이나 뒤의 일에 관하여 예언하였겠는가 하는 이유 때문에 역사적-비평적인 학자들은 40-66장을 제 2이사야(40-55장)와 제 3이사야(56-66장) 구분한다. 그들은 이사야 40-66장은 포로기가 끝날 무렵에 자신을 주전 8세기 예언자 이사야의 신학적 후예라고 자임하는 한 두 예언자(집단)에 의하여 선포되었거나 저작되었다고 판단한다. 이 경우 40-66장에 기록된 예언적 설교의 청중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바벨론 포로들이거나 그들의 후예였다(겔 37:11). 이런 역사적 정황상의 차이(바벨론 포로전 상황과 바벨론 포로 후 상황) 외에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들이 1-39장과 40-66장(40-55/56-66장)을 구분하는 것을 지지한다. 첫째, 언어적/어휘상의 차이로서 40-66장에는 “앗수르”라는 단어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한 번), “이사야”라는 단어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둘째, 신학적/이데올로기적 차이로서 1-39장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되고, 40-66장에서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구속자”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된다. 셋째, 문체상의 차이로서 1-39장에는 부분적인 전기적 이야기체 문체와 장엄한 심판문체가 주로 사용되고, 40-66장은 대부분이 운문체 예언이며 위로와 희망을 선포하는 시문들이 주를 이룬다. 후자에서는 예언 선포의 역사적 맥락이 거의 누락되어 있는 반면에 전자에서는 상당 부분에서 명시되어 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1-66장을 하나의 이사야서로 묶은 것은신학적/이데올로기적 연속성이다. 시온에 대한 야웨 하나님의 계약적 투신과 사랑(ḥesed=covenantal devotion), 즉 “시온을 향한 야웨의 계획”이 이사야서를 응집시킨다. 이 큰 공통점 외에도 크고 작은 신학적 연속성이 있다(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공평과 정의의 문제). 외경 문서인 시락서 48:24-25은 예언자 이사야를, 복되고 영광스러운 먼 미래를 미리 내다보고, 시온을 향한 희망과 축복을 예언한 예언자로 묘사한다. 이 구절은 이사야 40-66장의 이사야의 친저(親著)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이사야 40-66장이 어떻게 이사야의 이름으로 기록된 묵시(vision)의 일부로 편입되었는지를 부분적으로 설명해 준다. 하지만 이 한 구절이 역사적-비평적 연구가들의 질문들을 온전히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얼마나 많은 저자가 현재 이사야서의 마지막 저작과정에 참여하였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적어도 현재의 이사야서는 서로 다른 세 역사적-신학적 정황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1-66장의 저자가 한 사람이건 두 사람이건 현재 이사야서가 가지고 있는 심오하고 광대한 신학적 가치는 조금도 손상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단원에서 주전 8세기 예루살렘 이사야의 진정성 있는 예언들을 담고 있다고 믿어지는 이사야 1-39장의 신학을 탐구하려고 한다. 이를 위해 예언자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기의 역사적 배경, 1-39장의 정경적 구조와 메시지, 그리고 이사야 신학의 중심 주제를 다룰 것이다.


B. 주전 8세기 예루살렘의 예언자 이사야
이사야 1-39장에 기록된 예언들의 선포자 혹은 기록자 이사야는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다(Isaiah ben Amoz)(1:1). 이사야는 예루살렘에 본거지를 둔 상류계층에서 태어났으며 왕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외교정책의 추이들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을 만큼 유다 왕국 내부의 사정에 정통하였다. 넓게 말하면 그는 유다 왕실의 내부자인 셈이었다(7:3, 4; 8:2 30:1-7; 36:1-38:8, 21f.; cf. 왕하 18:3-20:19). 탈무드에 의하면 이사야는 웃시야의 사촌이었거나 아마샤 왕의 조카였다(Talmud Meg. 10b). 역대하 26:22과 32:32이 그를 웃시야 왕과 히스기야 왕의 서기관이었다고 기록한 것은 신빙성 있는 역사적 증언일 것이다. 그는 여선지자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낳았다(7:3; 14-17; 8:1). 세 아들은 스얄야숩(“남은 자만 돌아가리라”),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마헬살랄하스바스(“노략이 급속하게 임하고 약탈이 임박하게 이뤄질 것이다”)이다. 세 아들의 이름들은 당대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들을 대언하는 징조와 표적으로 간주되었다(8:18).
이사야는 유다가 야웨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파기하였기 때문에 발생되는 사회적 문제들을 폭로하고 귀족과 관료, 지주 등 상류사회의 타락과 부패를 공격하였다(1:3-9; 38:6-1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루살렘 거민이었으며 초지일관 왕정신학과 시온신학의 신봉자로 남았다. 위경인 <이사야의 승천>(The Assumption of Isaiah)에 의하면 이사야는 므낫세 치세 동안(BC 696-642)에 통나무 안에서 톱으로 켜짐을 당하여 몸이 절단되는 참사를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히 11:37).
이사야 40-66장에는 이 주전 8세기 예언자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시온을 향한 하나님의 멈추지 않는 계약적 열심과 사랑을 강조하는 파생적인 예언들만이 등장한다. 이 장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이 끝나가는 시점에 주전 8세기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이 강조했던 시온에 대한 희망을 재점화시켰던 후대 예언자(혹은 예언자들)의 말씀이다. 주전 40-55장은 바벨론 포로생활이 거의 끝나고 페르샤 제국이 들어서는 당시의 낙관주의적인 분위기에 지배당하고 있으며, 56-66장은 바벨론포로들이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이상적인 시온을 건설하려고 하다가 좌절당한 이야기가 시적인 압축어로 기록되어 있다. 두 부분 다 시온의 회복과 영광, 열방에 대하여 시온이 가져야 할 선교적 사명을 부각한다.


II. 이사야의 연대기


이사야 1:1에 의하면 이사야는 웃시야 왕 때부터 히스기야 왕 때까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하나님의 “이상”(vision)을 보았다. 존 브라이트(John Bright)의 이스라엘 역사 시대구분에 따르면 이사야의 활동연대는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웃시야(Uzziah)가 죽던 해(BC 742)(6:1; 대하 26:22)
2. 요담(Jotham) 치세(BC 750-735)(740년까지는 웃시야의 섭정)
3. 아하스(Ahaz) 치세(BC 735-715)(섭정기간 전제)
4. 히스기야(Hezekiah) 치세(BC 715-[687/6])
5. 위경 문서인 <이사야의 승천>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므낫세 치세(BC 687/6-642) 동안의 예언활동에 대한 성경적인 증언은 없다.


이사야 시대의 앗수르 제국의 왕들은 다음과 같다.
가. 디글랏빌레셀 3세(Tiglath-pileser III)(BC 745-727)
나. 살만에셀 5세(Shalmaneser V)(BC 727-722)
다. 사르곤 2세(Sargon II)(BC 722-705)
라. 산헤립(Sennacherib)(BC 705-681)


이사야 40-55장 페르샤 제국의 창건자 고레스 등장 분위기 반영-시온으로 돌아가자. 원 시온이즘의 발아기다(주전 520년부터 450년 에스라 느헤미야 등장 이전 시기).


이사야 56-66장 예루살렘 성전이 중건되고 제의공동체로서의 시온이 형성되었으나 예언 자들의 이상에는 아득하게 멀어진 현실을 보고 탄식하는 분리주의자들의
새 하늘과 새 땅 대망 사상 등장(에스라 느헤미야 이후-말라기 상황).


III. 이사야서의 역사적 배경과 무대
다윗-솔로몬 제국은 약 80년간(BC 100-920) 고대 근동을 제패하지만 솔로몬과 그 아들 르호보암 왕의 실정(失政)과 종교적 배교로 인하여 쇠퇴일로를 걷다가 급기야 분열된다(왕상 11:1-13). 외국과의 정략결혼과 동맹정책, 지역차별, 사치와 대규모 토목공사로 인한 북지파들의 민심이반과 르호보암 시대에 안착된 관료주의와 궁중 권력정치 등이 솔로몬-다윗제국의 몰락과 쇠퇴의 원인이었다. 그래서 마침내 922/21년 경 통일 이스라엘은 남북 왕국으로 분열되고 그 후 약 170년 후에 예언자 이사야는 예루살렘을 무대로 예언활동을 시작한다.
이사야는 주전 8세기 예언자들인 아모스, 호세아, 그리고 미가와 동시대 사람이었다. 그가 예언자로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할 무렵인 주전 8세기 중엽은 북쪽의 앗수르 제국이 제국주의적 정복전쟁을 남서쪽으로 확장하던 시점이었다. 앗수르 제국의 정복군주인 디글랏빌레셀 3세는 이미 주전 740-738년경에 북시리아 지역의 소왕국들을 다 정복한 상태였다(주전 740년은 웃시야가 죽던 해). 앗수르 제국은 아람의 도시국가인 하맛 (Hamath) 정복을 필두로 칼노(Calneh) 등 시리아-페니키아-팔레스틴의 소왕국들도 차례로 정복하였다(10:8-11; 36:18-20). 그리하여 그는 시리아-페니키아-팔레스틴의 작은 왕국들을 강제로 병합하여 속주로 삼아 무거운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하였다(왕하 15:19-20). 작은 왕국들은 북 이스라엘의 므나헴처럼 무거운 조공을 바쳐서 간신히 왕위를 유지하거나 아니면 저항하다가 국가적 파멸을 감수하여야 했다.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주전 740년 경 전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는 앗수르 제국의 정복일지에 유다 왕 웃시야는 조공을 바친 봉신 명단에서 제외된다(cf. ANET, 283-284).
그런 와중에 디글랏빌레셀 3세는 주전 734년경에 팔레스틴에 진출하였으며 심지어 애굽 국경선까지 육박하였다. 그는 정복일지(ana Philistia)에서 “애굽 강 앞에” 군사(무역)기지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고 자랑한다. 이 가공할 만한 앗수르의 군사적 팽창에 직면하여 많은 작은 왕국들이 반역해 보았으나 잔혹하게 진압되어 버렸다. 이 와중에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이 주도하는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 일어나고(BC 734-733), 두 나라 동맹군은 유다의 아하스 왕에게 반앗수르 연합전선에 동참하도록 강요하기에 이른다. 예언자 이사야가 처음으로 공적인 무대에 등장하는 때가 바로 이 상황이다. 이사야는 아하스와 다윗 왕실에게 시리아-에브라임 동맹국 왕들의 강요에 굴복도 하지 말고, 앗수르 원군을 요청하지도 말라고 권고하였다. 이사야의 권고 때문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유다 왕국은 시리아-에브라임 동맹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자 시리아-에브라임 동맹군은 다윗 왕조를 종식시키고 벤 다벨(Ben Tabel)이라는 아람계 인물을 유다의 왕으로 세우려고 기도하는데 이사야는 이 계획을 악하다고 비난하며 결코 성취될 수 없는 계획이라고 단죄하였다(왕하 15:37; 16:5; 사 7:1).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야웨 하나님의 다윗언약을 믿고, 즉 하나님의 주권적인 도우심을 믿고 외국 군대의 힘에 의지하지 말도록 권고한다. 그러나 아하스는 이사야의 충고를 거부하고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 때 이사야는 해방자로 출병한 앗수르가 정복자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예언들을 쏟아내었다(7:18-25; 8:1-10).


마침내 디글랏빌레셀 3세는 아람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북이스라엘의 북부 지역을 앗수르의 속주로 병탄시켜 버렸다. 급격한 쇠락을 맛본 북이스라엘의 왕 베가(Pekah)는 막대한 조공을 지불하고 간신히 파멸의 운명을 면하였다(BC 732). 베가의 왕위를 찬탈하고 왕이 된 호세아는 애굽 왕 소(So)와 동맹을 맺고 앗수르 왕 살만에셀 5세(Shalmaneser V)에게 저항하였다(왕하 17:4). 그 결과 북이스라엘 왕국은 국가적 파멸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살만에셀 5세는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3년간 사마리아를 포위하였고, 그의 아들 사르곤(Sargon II)은 사마리아를 함락시키고 많은 상류층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다(BC 722/1). 이제 유다 왕국의 정치적 독립은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 놓인 셈이 되어버렸다(5:29). 그래서 유다는 시리아와 팔레스틴의 많은 소왕국들이 애굽과 힘을 합하여 반(反)앗수르 봉기를 일으킬 때도(가자의 하눈 왕이 주도한 BC 720년 반앗수르 봉기 등) 반앗수르 봉기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다는 얼마 후 블레셋의 아스돗(Ashdod)이 주도하는 반앗수르 봉기에는 약간 참여하였던 것 같다(14:28-32). 이 때도 아마 애굽은 잠재적 후원자의 자격으로 참여했던 것 같으며 실제로는 에돔, 모압, 블레셋의 도시들이 봉기를 주도하였던 것처럼 보인다(BC 714-711). 앗수르 왕 사르곤 2세는 아스돗과 가드(Gath)를 정복하였고 이로 인하여 유다는 더욱 더 고립무원의 지경에 빠진다(ANET, 285-287; 사 20:1-2). 그러나 유다는 소극적으로 참여하였기 때문에 정복되지는 않고 조공을 바치는 봉신국가 신분을 유지하게 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전 705년에 사르곤 2세가 죽자 다시금 팔레스틴 소왕국들의 반앗수르 봉기 열기가 분출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는 유다 왕 히스기야가 반앗수르 봉기의 선봉장이 된다.
팔레스틴의 맹주격인 히스기야가 주도하고 바벨론의 므로닥 발라단과 블레셋의 일부(에그론)가 지지하는 대규모 반앗수르 봉기가 팔레스틴을 격동시켰다(왕하 20:12-19; 사 39:1-4). 여러 역사적 정황증거들을 고려해 볼 때 이 때도 팔레스틴 반역왕국들을 위한 애굽의 깊숙한 후원 약속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것처럼 보인다. 비록 앗수르 진영에서 나온 언급이긴 하지만 애굽은 유다를 돕기로 한 것처럼 보인다. 애굽 왕 다르하가 휘하의 군대가 유다 지역으로 파견되었다는 사실과 엘테크(Eltekeh) 전투에서 애굽 군대가 앗수르에게 패배하였다는 역사적 증언은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추론컨대 유다 왕 히스기야는 애굽의 명시적인 지원을 믿고 팔레스틴의 소왕국들을 동원하여 주전 705년경에 반앗수르 봉기를 주도했던 것처럼 보인다.
불안한 정정(政情)에 휩싸인 국내 상황과 북쪽 산악족속들의 문제를 처리하느라고 남서쪽 지역의 반앗수르 봉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던 앗수르의 새 군주인 산헤립은 마침내 주전 701년에 남서진 정복원정에 돌입하였다. 산헤립의 단호한 징벌 원정은 파죽지세로 팔레스틴 지역으로 육박하여 신속하게 사태를 장악하였다. 그는 북쪽의 시돈을 패배시키고 일시에 정상적인 종주-봉신 관계를 회복한다. 그는 암몬, 모압, 그리고 에돔으로부터 조공을 받아낸다. 그리고 여전히 불안정한 입장을 견지하던 에스겔론(Ashkelon)과 에그론(Ekron)을 복속시키고 유다의 히스기야를 새장의 새처럼 에워싸 버린다.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매년 바쳐야 할 조공 외에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도록 강요하며 완전 항복을 종용하였다. 히스기야는 지체없이 산헤립의 요구에 굴복함으로써 성이 함락되는 참변을 피했다(왕하 18:13-16; ANET, 288).
이사야는 시리아-에브라임 전쟁부터 이 마지막 순간까지 유다의 정치적 위기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고, 약 40년간 지속된 국가적 위기 속에서 유다 왕실과 백성들과 함께 하였다. 이사야의 신학은 이런 역사적 정황에서 배태된 정치신학적 예언들 속에 갈무리되어 있다. 이사야 1-39장은 주전 8세기 후반의 약 40년 동안(주전 740-701년) 펼쳐진 국제적 및 국내적인 정치현실에 대한 이사야의 신학적인 분석을 담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사야 40-66장은 바벨론 포로들의 귀환(주전 538년) 이후에 벌어진 시온 복귀 및 회복운동의 경과를 보여준다. 이 스물 입곱 장의 메시지 핵심를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들의 가나안 고토복귀를 명하시고 격려하신다. 하나님의 시온에 대한 열정과 투신은 확고하다. 시온은 세계열방을 향하여 확장될 하나님의 통치의 거점이요 본부다. 이스라엘은 열방들 앞에서 제사장 나라 선민, 성민으로서 영광을 얻고 열방들은 은금보화 재물을 들고 시온에 와서 토라를 배우게 될 것이다. 시온에는 하나님의 신천신지가 벌어질 것이다. 따라서 시온에 남아있는 자는 하나님의 신천신지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IV. 이사야 1-66장의 메시지와 구조
1장은 이사야서 전체(1-66장/혹은 1-39장)의 서론인데 대파국적 재난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위한 회개 촉구 메시지를 담고 있다. 주제적인 고려 하에서 편집된 2-5장은 대파국적 참변을 겪은 공동체의 역사를 신학적으로 되새김질하고 심판의 불가피성을 옹호하고 있다. 6장은 이사야의 소명설화를 담고 있는데 7-39장에 전개될 사태들을 미리 내다보고 있다. 7-12장은 대체로 연대기적인 원칙으로 편집되었고, 13-27장은 주제적 원칙에 따라, 28-39장은 대체로 연대기적 고려 하에서 편집되었다. 요약하면 이사야 1-39장은 하나님의 심판의 불가피성과 그 심판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미래를 선포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


1. 표제 및 주제적 배열: 이사야 신학의 파노라마적 전개(1장)
이사야서는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네 왕의 치세 동안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이상”(vision)들을 편집한 책이다(1:1). “이상”이란 하나님의 관점에 의해 해석된 역사적 사건들과 사태들이다. 1장은 이사야서 전체(2-39장, 혹은 2-66장)에 대한 서론으로서 주전 701년(혹은 주전 586년) 앗수르 위기가 남기고 간 후폭풍 메시지처럼 들린다. 엄청난 재난을 당하고 살아남은 자들에게도 무조건적인 위로와 번영약속은 주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재난으로부터 살아남은 자의 자기의(自己義)를 봉쇄하며 그들에 의하여 성취되어야 할 사명을 부각시킨다. 회복된 미래는 남은 자들의 회개 위에 보장될 뿐이다.


2. 유다와 이스라엘의 참혹한 현재와 대비되는 영광스러운 미래(2-4장)
이 단락은 영광스러운 미래-수치스러운 현재-다시 영광스러운 미래로 움직이며, 회복된 유다와 예루살렘의 신학적 세계사적 사명을 부각시킨다. 2장은 시온이 영적인 제국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본거지가 될 것임을 예언한다. 옛 다윗 제국의 영광은 신령한 다윗 제국의 이상으로 승화된다. 심판을 통과하여 정결케 된 시온은 세계 열방들과 열왕들에게 평화를 가르치는 토라학교가 되고 열방들의 분쟁을 조정하는 하나님의 통치 거점이 될 것이다. 시온은 시온으로 순례하는 열방들의 토라(Torah) 학습 행진을 주도한다. 시온의 토라 공부를 통하여 열방들의 살상용 무기들인 칼과 창은 생산적인 농기구로 바뀐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시온의 영적인 승화는 현실적인 시온 자체의 정화(淨化)를 전제한다. 한 때 시온은 공평과 정의의 도시였는데 지금은 유력자, 지배자, 지주들, 귀족들의 타락한 연회장이 되어 버렸고 불결케 된 창녀처럼 오염되어 있다. 예루살렘 상류마담들의 외제품 선호와 집착은 비참한 재난을 불러일으킬 것이다(3:1-13). 외국의 침략으로 국가조직이 붕괴된 후 발생한 가공할만한 무정부 상태에서 남자 인구는 지극히 희소해져 예루살렘 여인들은 결혼하기가 어려워 질 것이다(3:13-4:1). 심판을 통해 정결케 된 시온은 불심판을 거치고 살아남은 “남은 자들의 보금자리”로 부활할 것이다. 부활한 시온은 하나님 백성들의 미래 번영을 주도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할 영적인 진지요 보좌로 변화될 것이다(4:2-6). 여기서 다시 한번 남은 자들의 사명이 부각되고 있다.


3.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5-6장).


5장은 출애굽 전승(시 80)과 시내산 계약 전승을 담고 있는 노래로서 앗수르 제국에 의한 북이스라엘의 멸망(BC 722/1)과 남유다의 초토화(BC 701)가 가져다 준 충격과 그에 따른 영적인 각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공평과 정의 대신, 압제와 포학의 들포도를 맺어버린 자신의 포도원 울타리를 허물어뜨려 짐승들의 발 밑에 유린당하게 할 것이다(5:8-30; 10:5-6). 그 결과 전무후무한 용맹과 무예로 무장한 군대에 의하여 이스라엘과 유다는 유린당할 것이다(북이스라엘이 먼저). 북왕국의 재난을 목격하고도 유다 백성들은 영적인 무감각과 술취함에 빠져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결단과 계획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결단의 실체를 보여달라고 조롱한다(5:18-20). 하지만 전무후무한 재난의 형태로 하나님의 결단/계획은 그 실체를 드러낸다. 하나님은 이 오만무도한 백성들을 공격하고 낮추기 위하여 양봉업자가 벌을 부르듯이 벌떼같은 군대를 아주 멀리서 불러오신다(5:26-30). 바로 이런 영적 국가적 파탄의 위기 상황에서 이사야는 예언자로 부름받는다.
웃시야가 죽던 해에 소명(6:1)을 받은 이사야는 하늘의 어전회의를 출입하는 예언자가 된다. 이사야의 거의 모든 예언들은 주전 735-701년간에 이뤄진 앗수르 침략전쟁들과 그것들을 초래한 이스라엘과 유다의 총체적인 신학위기에 대한 신학적 분석이다. 이사야의 신학적인 상상력(묵시)과 현실정치적인 판단력은 하나님 결단1) 의 신학으로 결정화(結晶化)된다. 이사야는 주전 8세기 중반과 후반기에 이스라엘과 유다를 둘러싼 국내외적인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 결단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그 시대의 중심과제를 분석하였다. 그는 동시대의 역사를 하나님의 결단에 조응하는 믿음의 결단으로 돌파해야 할 위기로 파악하였다. 이사야는 주전 735-732년 사이에 걸쳐 진행된 시리아-에브라임 전쟁(the Syro-Ephraimite War)과 주전 714-711년 사이에 아스돗 (Ashdod)이 주도한 반(反)앗수르 반역 전쟁, 그리고 주전 705-701년에 걸쳐 유다왕 히스기야에 의하여 주도된 팔레스틴 전역의 반(反)앗수르 봉기의 경과에 개입하여 시종일관 앗수르와의 충돌을 피하라고 충고하였다. 그는 초지일관 하나님 결단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앗수르의 군사적인 팽창에 대항하여 물리적인 충돌을 기획하고 집행하려는 애굽(19:1-15; 20:1-6; 30:1-5)-블레셋(14:28-32; 23:8-9)-유다의 현실정치가들(28:14-22; 29:14-16; 30:1-17; 31:1-3)과 날카롭게 충돌하였다. 이사야는 앗수르의 남서진(南西進) 방향의 군사적 팽창은 시리아-팔레스틴-페니키아-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실행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이사야 13-23장). 대신 이사야는 참으로 강하고 평화로운 나라는 공평과 정의로 다스려지는 공동체임을 역설하였고 그의 중심 예언 중 하나는 메시야적 지도와 메시야적 백성이 함께 건설하는 이상사회의 도래에 대한 예언이었다.


4.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동안에 선포된 “구조”예언들(7-12장)
이사야는 세 아들의 이름들을 통하여(스얄야숩, 임마누엘, 마헬살랄하스바스) 시리아-에브라임 동맹군들에게 시달리는 아하스와 유다 왕실에게 구조(救助) 예언들을 선포하였다. 시리아-에브라임 동맹군들 중 “오직 몇몇 만이 살아 돌아가리라”라는 예언은 아하스왕에게는 구원의 예언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예언이다. 임마누엘 예언도 애초에는 다윗의 집에는 상서로운 예언이요, 시리아-에브라임 동맹에게는 불길한 예언이었다. 임마누엘은 다윗 언약(나단 예언-삼하 7:12-16)에 대한 재확증을 의미하였다. 마헬살랄하스바스 예언도(8:1-22) 시리아-에브라임 동맹군에게 임박한 전쟁약탈이 자행될 것을 예언하며 유다가 앗수르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암시하는 구조 예언이었다. 그러나 이 약속을 믿지 못하면 구원자요 해방자로 온 앗수르가 유다를 이내 약탈할 것이다.
아하스와 유다 왕실은 이런 이사야의 구조예언을 믿음으로 받지 못한다. 이사야의 메시야 예언시는 남북왕국 분열 현실과 영적 기개와 절조를 잃어버린 유다 왕실을 비판하고 초극하려는 예언이었다. 다윗의 치세를 재현할 한 아들(8:21-22; 9:1-7)이 왕위에 오르는 상황을 노래하는 9장은 원래는 히스기야 왕의 대관식 때 선포된 축복의 예언이었을 것이다. 이 메시야 예언시는 이사야의 정제(整齊)된 왕정신학의 진수를 보여주는 데 히스기야에게 이미 거의 국가적 독립성을 상실한 북이스라엘의 난민들을 품을 수 있을 만큼 도량이 큰 정치를 주문하는 예언으로 들렸을 수도 있다. 북이스라엘의 북쪽 지역에 대한 앗수르의 병탄에 즈음하여 선포되었을 법한 9:8-10:4은 다윗왕국적인 민족주의 정서를 고조시킨 예언이었다. 여기에는 북이스라엘 기간요원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재난과 군사적인 패배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깃들어 있다.


10장 5-34절은 앗수르의 신학적 오만에 대한 단죄를 제시한다. 앗수르도 종내 하나님의 심판대상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이미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한 상황이 전제되고 있다. 그래서 이사야는 “북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게” 호소한다. “다윗왕조의 적법계승자인 유다(시 78편) 왕국의 히스기야에게로 돌아오라”는 현실정치적 호소처럼 들리는 현실적인 예언들을 쏟아낸다. 그는 앗수르 및 애굽에 흩어진 북이스라엘의 디아스포라도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하는데 그들의 귀환은 앗수르의 굴욕적 패배 다음에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한다(10:22-34).
11장의 또 다른 메시야 예언시에서 이사야는 앗수르 제국이 사라지고 난 국제질서의 헤게모니는 바로 다윗적인 이상왕이 다스리는 메시야 왕국에게 넘어갈 것임을 예언한다. 보다 확장된 범피조물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다윗적인 이상왕국이 야만적인 제국인 앗수르 제국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한 의로운 다윗형 왕이 메시야적 치료와 회복의 역사를 향도할 것이다(11:1-12:6). 심판의 쓴 맛을 아는 사람들에게 이새의 뿌리에서 난 이 지도자는 메시야적 신정통치의 이상을 실현할 것이다(삼하 8:15). 그는 열방에 흩어진 북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동포들을 고토로 복귀시킬 것이다. 그래서 메시야 왕국에 회집된 남은 백성들은 제 2의 출애굽 구원을 경험하며 다시금 심판의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하고 열방 한 복판에서 경험한 야웨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을 찬양할 것이다(12장).


5. 열방들을 심판하시는 만군의 야웨 하나님(13-27장).
이사야의 예언의 범위는 열방임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 열방 예언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vision)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과 상관성이 있는 정치적으로나 영적으로 인접한 열방들에 대한 예언들이다. 이 단락은 바벨론 제국에 대한 예언으로 시작하였다가 온 땅에 대한 심판 후에 찾아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위로로 종료된다. 이 단락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심판-열방심판-이스라엘과 유다의 위로와 구원의 구조로 움직인다. 13-14장에서 바벨론 제국과 앗수르 제국은 영적으로 동일한 실체를 가리킨다. 아마도 주전 8세기 앗수르 제국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이 바벨론 포로들에 의하여 바벨론 제국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으로 간주되고 재편집되었을 것이다. 바벨론 포로들은 이사야의 예언 지평을 확장함으로써 후대의 비슷한 영적 정치적 정황에 탄력적으로 적용되도록 정경화를 시도하였던 것이다. 13-14장은 바벨론 제국(8세기에는 앗수르 제국)은 파멸되고 그것에 의하여 열국으로 흩어진 이스라엘은 고토로 되돌아온다는 메시지와, 시온산의 거룩한 경계를 침범한 앗수르 제국은 비참한 패배를 당할 것이라는 두 가지 중심 메시지를 담고 있다.
14:28-32은 유다를 반앗수르 동맹을 맺도록 사주하다가 이스라엘의 파멸을 보고 기뻐하는 블레셋에게 심판을 선언한다. 15:1-16:14은 오만한 모압이 임박한 파멸을 겪게 될 것이며 오히려 유다가 모압의 피난민들을 돌보아주어야 할 것을 예언한다. 여기에는 모압의 희망은 공평과 정의의 화신으로 승화된 다윗 왕조의 우산 아래 피난하는 것이라는 제국주의적인 예언이 들어 있다. 17:1-14은 북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어 유다 왕 아하스에게 반앗수르 시리아-에브라임 동맹에 가담하도록 위협하며 유다를 침략했던 아람에 대한 심판을 담고 있다. 18:1-7은 유다로 하여금 반앗수르 동맹에 가담하도록 꼬드긴 구스(에디오피아)에 대한 심판을 담고 있다. 19:1-20:6은 모든 팔레스틴 소왕국들의 반앗수르 동맹의 잠재적인 후원자 노릇을 자임하던 애굽에 대한 야웨 하나님의 장단기 계획을 담고 있다. 여기서 주전 8세기의 대적자들인 애굽과 앗수르, 그리고 그 사이에 끼여 압제받던 이스라엘이 평화로운 소통과 연합의 삼각동맹을 구축함으로써 세계 열방을 향하여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환상이 제시된다. 21:1-10은 해변 광야, 네게브 남방사막 지역에 사는 부족들인 두마, 아라비아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다. 22:1-25은 환상골짜기에 관한 경고로서 유다가 하나님 대신 동맹국들을 더욱 견고하게 의존하는 것을 심각하게 규탄하고 있다. 23:1-18은 세계 중계무역의 본거지인 두로의 부와 오만에 대한 심판을 담고 있다. 24:1-27:13은 온 땅과 이스라엘에 대한 묵시문학적 심판 후에 도래할 이스라엘을 위한 번영과 구원을 노래하고 있다. 24:1-23은 온 땅 족속들(13-23장에서 언급된 족속들)을 심판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주권적 통치를 인정하지 않는 왕국들과 땅들의 오만과 교만 때문이다. 25:1-12은 열방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 있는 모든 포학자들을 징벌하실 것이며 당신의 가난한 백성들을 위한 의식주를 공급하실 것이다. 26:1-21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 즉 하나님에 의하여 구속받은 백성들을 위하여 요새가 되시는 하나님을 노래한다. 27:1-13은 이스라엘은 물론이요 열방들과 열왕들을 유혹하여 하나님께 대적하도록 한 우주적 반역세력인 레비아탄에 대한 심판을 담고 있다. 유혹자요 대적자인 레비아탄이 무장해제당하자 야곱의 죄악이 속함을 받고 열방으로 유배된 이스라엘이 고토로 되돌아 오게 된다.




6. 유다와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예언들(28:1-33:24).
이 단락은 소위 “앗수르 단락”(the Assyrian cycle)으로 불리는데 주전 705-701년의 유다의 반앗수르 봉기 전후의 긴박한 상황에 대한 신학적 분석을 담고 있다. 28:1-29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목격하고도 이사야의 임박한 재난과 심판예고를 무시하는 유다의 영적 정치적 파탄을 예고한다. 29:1-24은 앗수르의 침략으로 엄청난 굴욕과 패배를 당하는 아리엘(예루살렘)의 현재 곤경과 그것의 뿌리가 되는 누적된 불순종과 불신앙을 단죄한다. 30:1-31:9은 전국토를 요새화하며 애굽의 군사력에 의지하여 반앗수르 동맹을 획책하는 유다 왕실을 세차게 비판하는 예언들이다. 32-33장은 앗수르 폭풍이 남기고 간 폐허 위에 움트는 역설적인 희망을 노래한다. 다시 메시야적인 왕, 메시야적 공무원, 그리고 메시야적 백성들이 각성된 가슴으로 열어갈 새 나라에 대한 비젼을 선포한다. 33장은 나라를 지키는 근본 힘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정의롭고 공평한 공동체, 왕과 관리들이 백성들을 위하여 섬기는 종이 되는 나라, 선악을 바로 구분하고 바로 대우하는 그런 사회가 어떤 외국의 침략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나라라는 것이다. 앗수르 위기는 이런 메시야적 왕, 메시야적 공무원, 메시야적 백성들이 함께 건설해 갈 메시야적 공동체에 대한 열망을 증폭시켜 주었다.


7. 열국들에 대한 하나님의 세계사적 심판과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구원 메시지(34-35장)
이 단락은 유다의 숙적들에 대한 야웨 하나님의 가차없는 보복과 심판을 다루고 하나님 백성들 중 남은 자가 열어갈 영광스러운 미래를 예고한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남은 백성들”이다. 34:1-17은 유다가 앗수르(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훼파될 때 유다를 잔인하게 약탈한 그리하여 이 예언이 선포될 당시 유다 땅을 점령하고 살던 에돔에 대한 응보적인 심판예언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노략질하는 열방들이 어떻게 징벌당할 것인가가 에돔의 참혹한 말로에 잘 드러난다. 35:1-10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드리운 저주는 이제 벗겨지고 남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원한 희락 가운데 소성함을 덧입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8. 히스기야-이사야 비망록(36-39장)
이 문학적 단락에는 주전 701년 앗수르 위기에 대한 당대의 신학적 분석(히스기야의 광신주의적 전쟁신앙 비판)과 신학적 추후 재해석(하나님의 기적적인 구원을 가져온 히스기야의 경건 칭찬)이 교직(交織)되어 있다. 이 단락은 앗수르 패권주의 시대에서 바벨론 패권주의 시대로 전환되는 과정을 다루는 역사적 간주곡이다. 비록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정복하려고 시도하였지만(주전 701년), 히스기야의 믿음은 앗수르에 대한 야웨의 극적 승리를 맛보게 하였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바벨론 병문안 사신들에게 왕국의 보화들을 보여줌으로써 바벨론 포로의 비극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히스기야가 오히려 바벨론 포로라는 재난의 원인제공자로 그려진다. 처음에는 히스기야가 믿음의 영웅으로 묘사되다가 결국에는 경거망동한 불신앙과 불경건의 원흉이자 국가적 멸망을 국난 자초 군주로 몰락한다. 바벨론 유배가 예고되자마자 이사야 40장은 이미 바벨론 포로생활이 종료되는 시점을 다루고 있다.


9. 시온으로 돌아가자-내 백성을 위로하라-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40-66장)
40-66장은 바벨론을 넘어 페르샤 제국 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해석하는 단원이다.
이사야서 2부인 40-66장은 야웨 하나님만이 오로지 구원의 원천이며 새 하늘과 새 땅 창조의 주체임을 선포한다(40:1-66:24). 그 중에서도 40-55장은 바벨론 포로기가 끝난 시점을 역사적 배경으로 삼고 선포된 예언적 시들을 묶어 놓은 문학적 수집물이다. 아주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40-55장은 바벨론의 세계제국적 도모(계획)(46-47장, 특히 46:10-11)가 좌절되고 다시 한번 이스라엘(시온)을 향한 야웨의 계획(결단)이 종국적으로 성취되고 실현되는 과정을 서사시적으로 묘사한다. 바벨론 포로생활의 세부적 정황은 생략되고 왜 바벨론 포로생활이 일어났는지-그것은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계획이었다-, 어떤 과정을 통하여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되어 다시 약속의 땅 고토로 돌아가게 되었는지를 묘사하는 데 주력한다. 바벨론 포로생활뿐만 아니라 동방(북방)으로부터 한 대리자(고레스[44:28-45:1])를 일으킴으로써 바벨론 포로살이를 종식시킨 사건 자체도 하나님의 에차(계획/결단/도모) 속에 들어있음을 강조한다. 즉 바벨론 포로생활 및 포로귀환 둘 다 이미 과거에 하나님의 말씀이 예언한 일이었고 이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39장은 왜 바벨론 포로살이라는 참담한 재난이 야기되었는가에 대한 짧고 간략한 역사적 일화(결국 바벨론 포로살이에 대한 오래 전의 예언)를 담고 있다. 39장에서 바벨론 포로생활은 아주 단편적으로 언급되었고 40장은 시작되자마자 바벨론 포로기가 끝난 시점으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39장과 40장 사이를 메울 수 있는 역사적 자료들은 바벨론 포로기 동안 지어진 시편들과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 같은 예언서들이다.


1부의 세계제국적 배경은 앗수르가 제공하고 2부의 세계제국적 배경은 바벨론과 페르샤(특히 56-66장)가 제공한다. 39장에서 바벨론 유배가 아주 간략하게 예언되자 이내 이사야는 바벨론 포로의 마지막 시기, 즉 바벨론 포로생활이 끝나가는 지점을 중심으로 회복과 위로의 예언을 전개한다. 이 이사야서 2부에서는 이방 나라나 민족들도 하나님의 세계구속역사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다(특히 42장).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사야 40-55장은 우상이 헛된 피난처, 헛된 구원의 안식처임을 역설하고(바벨론에 눌러앉아 살려고 팔레스틴 고토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은 바벨론 우상들을 섬길 가능성이 농후한 잠재적 배교 상황임을 암시) 오로지 약속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만이 이스라엘 백성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을 역설한다. 40-55장은 바벨론 포로들을 어찌하든지 이스라엘 고토로 돌아오도록/혹은 돌아가도록 설득하고 강권하는 예언들의 묶음이다.
40:1-48:22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은 역사를 주재하시는 하나님(하나님의 말씀/계획/도모)에 의하여 성취된다”는 신학적 주장을 전개한다. 야웨께서는 이제 이스라엘과 유다의 하나님(선택신앙)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주와 하나님임을 증명하신다. 이스라엘의 선택자와 창조자인 하나님은 천지창조의 주님(창조)이시다. 하나님 자신만이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임을 강조하신다. 바벨론 포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구속사적인 행위를 통하여 당신이 역사의 주님임을 증명하신다. 이제 여기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열방들 모두 야웨 하나님을 믿도록 초청받는다. 40-49장을 장별(章別)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The Holy One of Israel)이자 구속자(Redeemer)이신 하나님의 위엄이 찬양받아야 마땅하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선택되고 예비된 백성을 위하여 구원과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실 것이다(40:1-31). 야웨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열방들을 도전하신다. 그는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보호하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임을 증명하신다. 자연/삼라만상이 야웨 하나님이 참 유일하신 하나님이며 역사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임을 증명한다(41:1-29).


2. 야웨의 종이 이스라엘(또 다른 의미의 야웨 하나님의 종)을 구원할 것이며 열방을 비출 것이다(열방들이 이스라엘의 고난과 회복은 하나님 자신의 기획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땅은 야웨를 찬미하고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를 보도록 요청받는다(42:1-25). 야웨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의 불충한 종(구원할 가치도 없는)을 바벨론으로부터 다시 모을 것을 약속하신다. 그러므로 바벨론 포로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을 기대하여야 한다(43:1-44:5).


3. 야웨께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그의 주권적 다스림을 인하여-고레스를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는 목자로 임명하고 열방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을 실행하는 대행자로 임명한 것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의 증거-오로지 당신만이 참 하나님임을 선포하신다(44:6-45:8). 야웨는 역사와 삼라만상의 창조주이므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실 때 당신의 주권적 자유를 행사하신다. 열방들은 삼라만상과 역사의 창조주인 야웨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절을 할 날이 올 것이며 오히려 구원받기 위하여 야웨를 찾지 않으면 안 된는 날이 올 것이다(45:9-25).




4. 야웨는 당신의 예정하신 때에 당신의 방법대로 자유롭게 바벨론 포로들을 구원하심으로써 자신이 바벨론의 신보다 훨씬 더 우월하심을 드러내신다(46:1-13). 바벨론은 오만과 권력남용으로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한 과도한 학대와 압제행위로 인하여 몰락할 것이다. 그들이 믿는 어떤 구원의 원천도 그들을 야웨의 손으로부터 구출할 수 없을 것이다(47:1-15). 야웨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이전 예언들이 얼마나 위대하게 성취되었으며 당신의 말씀이 얼마나 신실하게 실현되었는지를 주목하고 상고해 보도록 촉구하신다. 야웨께서는 그 자신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속하신다. 그러므로 야웨는 곧 심판받아 멸망할 바벨론으로부터 도망칠 것을 촉구하신다(48:1-22).


또 다른 한편 40-49장을 주제적으로 요약하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주제들이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가) 예언과 성취도식을 통하여(과거사 해석, 장래사 및 후래사 진술 능력[야웨의 예언자들과 우상/우상의 예배자들간의 차별성]) 야웨 하나님은 역사의 기획자(계획자), 성취자, 그리고 역사의 주관자임이 밝혀진다. 긴 역사 속에서 야웨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되심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야웨의 결단/계획(말씀, 도모)의 선포와 성취도식이 강조된다. 야웨는 장래사, 과거사, 후래사를 고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바벨론 (우상)신들과의 차별성과 열국들이 섬기는 우상들과의 차별성을 과시한다(특히 46-47장). 이 <하나님 결단/계획의 신학>에 의하면 바벨론 포로살이도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요 바벨론 제국이 동방(북방)에서 일어난 한 용사(정복자)(고레스)에 의하여 멸망당하고 그 반사이익으로 이스라엘 포로들이 풀려나 팔레스틴 고토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도 결국 야웨의 계획의 일부다; (나) 야웨 하나님은 스스로 이스라엘의 선택 자, 창조자, 심판 자(거룩하신 분), 그리고 구속자(회복자)임을 주장하신다. 특히 구속자 부분이 강조된다; (다) 천지만물의 창조주요 왕일 뿐만 아니라 야웨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시다; (라) 야웨 하나님은 어떤 우상들과 다른 신들과도 비길 수 없는 절대적으로 거룩하시고 구별된 신이시다. 우상에게 이스라엘과 열국이 그들의 충성심을 우상에게 바치는 것을 질투하신다. 야웨 하나님은 우상을 조롱한다. 우상숭배자가 우상수준으로 어리석고 몽매한 상태로 전락하는 것을 경고하신다; (마) 이스라엘은 야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셨다. 이스라엘은 야웨 하나님을 찬송하고 열방의 빛이 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과 정화와 연단의 불꽃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야곱은 열방에 야웨 하나님의 창조주/왕/구속주 되심을 전파할 것이다.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낮밤과 맺은 언약과 같은 수준으로 불변할 것이다; (바) 야웨 하나님은 거룩한 용사로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전쟁을 지휘하시며 이스라엘은 야웨에 의하여 거룩한 전사처럼 강력하게 변화되어 대적들을 능히 칠 것이다; (사) 특히 대다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소경이요 귀머거리이지만 야웨의 종은 야웨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이다. 1-39장에서 다윗 계열의 이상왕이 성취하도록 기대된 모든 이상적인 역할을 야웨의 종이 감당할 것이다: (ㄱ) 그는 백성들의 언약이 되며 열방의 빛이 될 것이다(열방을 공평과 정의로 다스릴 것이다). 그는 1-39장의 이상왕보다 더 넓은 지역을 통치영역/섬김 사역의 영역으로 삼을 것이다. (ㄴ) 흩어졌던 이스라엘/유다의 포로들의 고토 귀환을 주도할 것이다. 열국과 열방은 이스라엘 포로들을 임시로 키워주고 먹여준 양부/양모와 같은 역할을 한 셈이 될 것이다. (ㄷ) 야웨의 종은 원래 이스라엘에게 기대된 구속사적인 책임들을 거의 혼자서 집중적으로 성취할 것이다. 그는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고,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관원에게 종이 된 자의 인격으로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왕적 통치를 각인시킬 것이다. 이 전체 단원을 이사야 40장이 가장 잘 압축하고 개관한다.


1.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2. 예루살렘의 심장에 대하여 말하고 그녀에게 소리쳐라:
“그녀의 노예살이가 끝났고, 그녀의 죄악은 용서받았으며, 그리고 그녀의 죄악들로 인하여 그녀는 야웨의 손으로부터 갑절의 징벌을 받았도다.”




역사의 기획자, 성취자, 주관자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된다.
3. 한 목소리가 외친다: “광야에 야웨의 길을 준비하라. 우리 하나님을 위하여 사막에 대로를 닦으라.” 4. 모든 낮은 계곡이 높아질 것이며, 모든 산과 언덕은 낮아지리라;
울퉁불퉁한 땅은 평탄케 될 것이며, 거친 곳들이 평지가 되리라. 5. 그 때 야웨의 영광이 밝히 드러날 것이며, 모든 육체가 함께 그것을 보리라. 왜냐하면 야웨의 입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6. 한 목소리가 말한다: “외치라.” 그 때 나는 말했다: “무엇을 외칠까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도다. 7. 야웨의 호흡이 불어오면 풀은 시들고 꽃은 퇴색한다; 진실로 이 백성은 풀이로다. 8. 풀은 시들고 꽃은 퇴색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실현되리라.”


왕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
9. 너는 높은 산위로 오르라, 시온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여;
예루살렘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여 네 목소리를 높혀라.
목소리를 높이고 두려워말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희 하나님을!”
10. 보라, 주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오시며 그의 팔이 그를 위하여 다스리리라; 보라 그의 상급이 그와 함께 있고 그의 일삯이 그의 앞에 있다.
11. 그는 목자처럼 그의 양떼를 먹이실 것이며,
그는 그것들을 그의 품에 안아 모을 것이며,
어린 젖먹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암컷들을 부드럽게 인도하시리라.


이스라엘의 왕은 천지만물의 창조주
12. 누가 손바닥으로 물들을 측량하였으며 손바닥으로 하늘들을 측량하였으며, 누가 땅의 먼지를 되에 담았으며 누가 산들을 명칭(皿秤)으로 달아보았으며 언덕들을 간칭(杆秤)으로 달아보았느냐?
13. 누가 야웨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혹은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지도하였느냐?
14. 누가 그에게 모사가 되어 그를 깨우쳤느냐?
누가 그에게 공평의 길을 가르쳤으며, 누가 그에게 지식을 가르쳤으며,
누가 그에게 지혜의 길을 가르쳤느냐?
15. 보라! 열국들은 물동이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 물방울과 같고,
저울 위에 달린 먼지로 간주되도다;
보라! 섬들은 미세한 먼지처럼 들려지도다.
16. 레바논은 땔감으로도 부족하겠고, 그곳의 짐승들도 번제로 쓰기에는
충분치 않도다.


우상숭배자에 대한 탄핵
17. 모든 나라들은 그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있으며
그것들은 텅 빈 것과 허무한 것보다 더 작은 것으로 간주되도다.
18. 그런데 네가 누구를 하나님과 비기겠느냐?
혹은 무슨 형상이 그와 비교되겠느냐?
19. 우상은 장인(匠人)이 주조(鑄造)하였고, 금세공 인부가 그것을 금으로
입히고 그것을 위하여 은사슬을 주형(鑄型)하도다.
20. 궁핍한 자는 썩지 않을 나무 거제물(擧祭物)을 선택하는도다;
그는 움직이지 않을 형상을 세우기 위하여 공교한 장인(匠人)을 구하는도다.


이스라엘의 창조자, 천지만물의 창조주
21.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처음부터 너희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느냐? 땅의 기초들이 놓여질 때부터 깨닫지 못하였느냐?


22. 땅의 둥그런 원 위에 앉아계신 그 분-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도다-이 하늘을 휘장처럼 펼치신 분, 하늘들을 땅의 거민들이 거주할 장막처럼 펼치는 분,
23. 방백들을 몰락(沒落)시키며 땅의 지배자들을 무(無)로 만드는 분이시다.
24. 그들이 심기자마자, 파종되자마자, 그들의 줄기가 땅에 뿌리를 내리자마자, 그 분이 그들 위에 입기운을 불면, 그들은 이내 시든다. 그래서 폭풍이 그들을 검불처럼 쓸어가버린다.
25. 거룩한 자께서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누구와 같다고 하겠으며 누구에게 비기겠느냐?
26. 네 눈을 높이 들어 보라: 누가 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였느냐? 하늘의 천체들을 수를 세시며 불러내시며 그 모든 것들의 이름을 부르시느니라. 그 힘의 능력으로 그리고 그는 강력하시기에 어느 하나도 빠진 것이 없도다.
27.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불평하느냐?: “나의 길은 야웨께 숨기워졌으며 나의 권리(재판)는 나의 하나님에 의하여 무시당하는도다.”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야웨는 영원하신 하나님, 땅의 끝들까지 창조하신 창조주임을.
그는 쇠락(衰落)하지 않으며 지치지 않으시며 그의 명철은 찾을 길 없이
심오하도다.
29. 그는 무기력한 자에게 힘을 주며, 기력이 없는 자에게 능력을 더하신다.
30. 심지어 젊은이들도 기력이 약해지고 지치고 피폐해질지라도, 젊은 사람들이 탈진할지라도,
31. 그러나 야웨를 앙망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힘을 갱신할 것이며, 그들은 독수리처럼 날개짓하며 비상하리라. 그들은 달려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쇠약해지지 아니하리라.


40장은 1-2절(주제 선포: 위로), 3-8절(3-5, 6-8절)(하나님 말씀의 역사 창조/추진력), 9-11절(야웨 하나님의 왕적 통치), 12-17절(창조주 하나님의 배타적 위엄과 왕적 권위[royal authority]), 18-20절(우상숭배자에 대한 탄핵), 21-31절(이스라엘의 창조자, 천지만물의 창조주에 대한 앙망의 위력)로 세부적으로 나눠진다. 이 주제들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40-55장에 매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 모든 주제들은 하나의 보다 더 큰 주제, 이스라엘의 왕이요 천지만물의 창조주 야웨 하나님은 신뢰할만하고 의존할만한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구원자 하나님임을 부각시킨다. 강대국에 의하여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포로생활을 거친 청중들/독자들에게 야웨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며 절대적으로 의존할만한 창조주와 왕이라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39장은 유다에게 의존할만한 친구요 동맹자로 다가온 바벨론을 소개한다.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바벨론 왕(므로닥발라단)의 힘을 의지하려고 그의 사절단에게 온갖 왕궁보화들과 무기창고 등을 속속들이 보여준다. 그의 신뢰와 협조를 끌어들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히스기야 왕은 아하스가 앗수르 제국을 친구와 동맹자로 불러들였다가 도와주러 온(?) 앗수르가 정복자로 돌변했던 불행한 역사적 전철을 그대로 답습한다. 이사야는 바벨론은 유다의 동맹자요 친구로 왔다가 유다를 정복하러 올 것임을 예언한다. 어떤 점에서 이사야 39장은 약 100년 후의 바벨론의 유다침략은 히스기야의 원죄(?)에 의하여 시작된 것처럼 말한다. 39:6-7은 히스기야의 동맹국 의존정책이 바벨론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였다고 증언한다. 바벨론의 침략을 통하여 유다는 성전 제기들과 장식물들을 잃을 것이며 왕자들은 환관으로 강등된 채 바벨론으로 유배될 것이다. 이 예언이 끝나기가 무섭게 독자들은 40장에서 이미 바벨론 포로생활이 종료된 시점으로 인도된다. 39장과 40장 사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우리는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그리고 바벨론 포로기 삶을 노래한 시편들(예레미야 애가)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포로기 전후의 모든 예언자들과 경건한 신앙인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은 하나님의 진노의 폭발사건이라고 보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이사야 42:18-25은 바벨론 포로생활이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와 당신의 백성을 향한 거룩한 전쟁(29:1-4)임을 증언한다:


“18.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19.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 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소경이겠느냐 20. 네가 많은 것을 볼찌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찌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6:9-10의 영적 완매상태) 21.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인하여 기쁨으로 그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려 하셨으나 22. 이 백성이 도적 맞으며 탈취를 당하며 다 굴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도다 노략을 당하되 구할 자가 없고 탈취를 당하되 도로 주라 할 자가 없도다 23. 너희 중에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장래사를 삼가 듣겠느냐 24. 야곱으로 탈취를 당케 하신 자가 누구냐 이스라엘을 도적에게 붙이신 자가 누구냐 여호와가 아니시냐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 백성들이 그 길로 행치 아니하며 그 율법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2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으로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매 그 사방으로 불붙듯하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




또한 에스겔서 36:20-28은 야웨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야웨의 땅을 떠나 이방 땅에서 더러운 떡을 먹으며 산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징벌경험인가를 묘사한다. 시편 137편은 바벨론의 여러 강가에서 수로(水路)(운하) 건설 공사에 동원된(겔 1:1-4) 시온의 백성들이 이방의 정복자들에게 당하는 괴로움과 시온을 향한 그리움을 가슴에 사무치는 언어로 묘사한다. 바벨론 포로살이는 바벨론의 온갖 다양하고 유혹적인 우상숭배 습속에 대한 무차별 노출을 의미하였으로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았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결국 포로살이는 하나님이 아닌 왕, 정복자적인 거짓 왕의 통치가 얼마나 견디기 힘든, 악과 고난을 무기로 한 다스림인지를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40:1은 하나님의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명령으로 시작된다. 위로한다는 말은 심판으로 얼룩진 과거지사를 능히 치료하는 위로의 말이다. 위로한다는 말은 부드럽게/정다이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전령, 예언자는 거칠고 위협적인 심판의 말 대신에 이제 위로와 희망의 언어를 말하여야 한다. 위로한다는 말과 어느 정도 대구를 이루는 표현은 “심장에 대고 말한다.”이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백성의 심장에 영접되는 부드럽고 설득력있는 말을 외쳐야 한다. 복역의 때가 끝났다고 소리쳐야 한다. 심장에 대고 말하는 것은 말하는 태도를 말하기보다는 듣는 사람의 반응과 관련된 말처럼 들린다. 하나남의 백성이 납득하도록 정말 그들이 위로를 느끼도록 설득력있고 감화력있게 외치는 것이다. 바벨론 포로생활이 끝나고 꿈같은 고토귀환이 일어나서 새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왕국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예언은 설득력있게 전파하여야 할 메시지였다. 그들이 70년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얼마나 괴로운 시기로 여겼는가를 알아야만 하나님의 위로 메시지를 더욱 깊이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사야 40:2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복역 때”(노예살이-야웨의 전쟁)라고 규정한다. 또 달리 2절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죄로 인하여 갑절의 징벌을 받는 시기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70년의 포로생활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쁜 소식인가? BC 438년 폐르샤 제국의 창시자 고레스는 바벨론 제국을 완전히 격파하고 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자신의 고국을 떠난 모든 포로들-유다 포로들도 그 중 하나-이 자기 옛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칙령을 내린다. 이것이 그 유명한 고레스 칙령(The Edict of Cyrus)이다. 예언자는 이 고레스의 칙령 사건을 그냥 새로운 제국 창건자의 우연한 정치적 판단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대사면령이라고 해석한다. 예언자는 고레스를 일으킨 것 자체는 마치 바벨론 포로 70년간을 작정하신 사건만큼이나 하나님 자신의 주도면밀한 계획임을 선포한다. 적어도 다음 세 단락들은 고레스의 폐르샤 제국의 발흥과 그의 바벨론 포로들의 고토귀환 칙령(예루살렘 성전 및 성벽 중건 공사지원)이 완전히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경륜 속에서 진행되고 추진되는 일임을 밝히 증거한다.


“41:2. 누가 동방에서 사람을 일으키며 의로 불러서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느뇨 열국으로 그 앞에 굴복케 하며 그로 왕들을 치리하게 하되 그들로 그의 칼에 티끌 같게, 그의 활에 불리는 초개 같게 하매
3. 그가 그들을 쫓아서 그 발로 가 보지 못한 길을 안전히 지났나니
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역사의 계획자, 성취자, 곧 역사의 주관자이신 야웨 하나님)


“41:25.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그가 이르러 방백들을 회삼물 같이, 토기장이의 진흙을 밟음 같이 밟을 것이니(고레스의 등장도 야웨 하나님의 역사주관능력 과시사건) 26. 누가 처음부터 이 일을 우리에게 고하여 알게 하였느뇨 누가 이전부터 우리에게 고하여 이가 옳다고 말하게 하였느뇨 능히 고하는 자도 없고 보이는 자도 없고 너희 말을 듣는 자도 없도다 27. 내가 비로소 시온에 이르기를 너희는 보라 그들을 보라 하였노라 내가 기쁜 소식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 28. 내가 본즉 한 사람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 한 말도 능히 대답할 모사가 없도다”(하나님 계획을 이해할 만한 영적인 감수성을 가진 사람을 찾고계시는 야웨-하나님 결단의 신학)


“45:1.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2.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3.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서 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줄 알게 하리라 4.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찌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5.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찌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6.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이가 없는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8.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 같이 듣게 할찌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찌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찌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9.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찐대 화 있을찐저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너는 무엇을 만드느뇨 할 수 있겠으며 너의 만든 것이 너를 가리켜 그는 손이 없다 할 수 있겠느뇨 10. 아비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났느냐 어미에게 묻기를 네가 무엇을 낳으려고 구로하느냐 하는 자에게 화 있을찐저 11.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라 또 내 아들들의 일과 내 손으로 한 일에 대하여 내게 부탁하라 12.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친수로 하늘을 펴고 그 만상을 명하였노라 13. 내가 의로 그(고레스)를 일으킨지라 그의 모든 길을 곧게 하리니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BC 538년 고레스 칙령) 14.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애굽의 수고한 것과 구스의 무역한 것과 스바의 장대한 족속들이 다 네게로 돌아와서 네게 속할 것이요 그들이 너를 따를 것이라 사슬에 매여 건너와서 네게 굴복하고 간구하기를 하나님이 과연 네게 계시고 그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 하리라 하시니라.”


“46:11.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고레스)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하나님 계획의 신학)(14:24-27)”


48:12. 야곱아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 나를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 13.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에 폈나니 내가 부르면 천지가 일제히 서느니라 14. 너희는 다 모여 들으라 나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고레스)가 나의 뜻을 바벨론에 행하리니 그의 팔이 갈대아인에게 임할 것이라 그들 중에 누가 이 일을 예언하였느뇨 15. 나 곧 내가 말하였고 또 내가 그를 부르며 그를 인도하였나니 그 길이 형통하리라
16.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 말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하셨느니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기획자, 성취자,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진면목을 만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예언과 성취사건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신뢰할만한가를 잘 보여준다: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42:9). 예레미야에 의하여 예언된 70년 바벨론 포로생활은 이제 끝나고 하나님은 새 일을 시작하신 것이다(렘 25:11). 우리는 왜 70년의 바벨론 생활이라고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BC 609년(요시야 왕 전사. 바벨론의 애굽 및 앗수르 결정적 격파시점)부터 바벨론의 팔레스틴 지배가 시작되었다고 하면 BC 538년은 거의 바벨론이 팔레스틴(유다)을 실제로 지배한 지 70년이 되는 시점이다. 아니면 70년을 상징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달리 BC 586-515[제 2 성전 완성]). 그러나 한 가지 인상적인 사실은 2절 마지막의 그녀의 죄로 인하여 갑절의 징벌을 받았다는 진술이다. 바벨론 포로생활은 단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 징벌이상의 의미도 들어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이 아주 초보적인 의미의 대속적인 사상을 잉태하는 계기가 되었지 않았나 하고 추측해 본다. 52-53장은 고난받은 야웨의 종이 세계 열방과 열왕들을 경악하게 만들며 그의 많은 지식으로 사람들을 의롭게 한다는 증언을 듣는다. 바벨론 포로생활은 이스라엘 자신의 죄악에 대한 징벌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생각이 소위 제 2 이사야의 나머지 장들(41-55장)을 읽는 데 유익이 될 것이다. 어쨌든 하나님이 예정하신 70년이 지나고 하나님의 통치 시대가 다시 시작된다(52:7). 하나님의 위로는 하나님의 왕적 다스림과 돌보심과 보호를 받는 시대의 도래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의 왕적 다스림을 고토로 돌아가서 다시 경험하게 될 것이다.




20. 그들의 이른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니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겔 36:20-28).


하나님의 위로는 또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적들에 대한 징벌과 심판을 의미한다. 바벨론의 몰락과 파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듣는 위로다. 40-55장에서 바벨론에 대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거친 심판의 언어들을 자주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의 신적 보복이 이스라엘의 정복자에게 가해질 것이며 이것이 또한 이스라엘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 다음 두 단락의 예언들은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의 한 측면을 잘 보여준다.


“41:15. 보라 내가 너로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 기계를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로 겨 같게 할 것이라 16.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것을 날리겠고 회리바람이 그것을 흩어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42:10. 항해하는 자와 바다 가운데 만물과 섬들과 그 거민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11. 광야와 거기 있는 성읍들과 게달 사람의 거하는 촌락들은 소리를 높이라 셀라의 거민들은 노래하며 산 꼭대기에서 즐거이 부르라 12.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섬들 중에서 그의 찬송을 선전할찌어다 13. 여호와께서 용사 같이 나가시며 전사 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


거룩한 용사이신 야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대적들에게 거룩한 전쟁을 집행하시며 심지어 이스라엘을 강력한 나라로 만들어 그녀의 대적들을 제압하게 하실 것이다(거룩한 전쟁 신학).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게될 위로의 실체들이 좀더 구체적으로 소개된다.
3절에서 예언자는 천상의 전령(한 목소리)으로부터 광야에 왕의 대로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듣는다. 3-5절은 광야와 사막에 왕의 대로, 즉 평탄한 길을 닦고 준비하라는 메시지다. 우주의 왕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데리고 다시 팔레스틴 고토로 돌아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왕께서 버려진 광야와 사막에 새롭게 건설된 대로를 통하여 행차하실 것이다. 그의 왕적인 영광 창조주적 영광이 광야에 건설된 대로를 지나갈 때 환히 드러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볼 것이다. 왕의 마차가 지나가려면 모든 울퉁불퉁한 길은 평탄케 되어야 하고 모든 계곡은 높아져야 한다. 광야의 대로를 행차하면서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인생은 깨닫는다. 창조주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과 피조물 인생의 덧없음과 무기력과 무능력을 깨닫는다. 사막의 대로를 달리는 행차를 앞두고 예언자는 하나님 말씀의 영속적 능력과 영원성을 고취시키는 메시지를 증거해야 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적 재난과 격랑을 넘어 결국 실현되고 있음을 증거한다. 바벨론 포로살이를 지나 다시 꿈에도 생각지도 못했던 해방과 고토귀환의 기회가 돌연스럽게 찾아올 때(시 126편) “아, 과연 하나님 말씀은 결국 역사속에서 실현되고 성취되는구나”라고 깨닫는다. 예언자는 그의 청중, 하나님의 백성이 시들고 퇴색해가는 들의 풀과 꽃과 같다는 것을 실감한다. 한 철 피었다지는 들꽃같은 백성들의 자신들의 피조물적인 제한성과 유한성을 자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의 영존성과 신적 결실성(55:8-11, 특히 10-11절)을 깨닫는다.


9-11절에서 이제 예언자(예루살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는 높은 산에 오르고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현재는 버려져 폐허가 된 유다의 성읍들에게 “네가 중건되리라”라고 외쳐야 한다. 보라 네 왕의 행차를 보라. 하나님은 이제 강력한 왕으로 임하셔서 그의 대적들을 물리적/영적 힘을 갖고 격퇴하실 것이다. 야웨 하나님은 바벨론 왕(신)에게 당한 무력한 신이 아니라 바벨론 신들을, 그의 하수인들을 아주 결정적으로 격파하실 것이며 제압하실 것이다(46-47장). 대적들을 향하여서는 그렇게 사나운(?) 거룩한 용사처럼 싸우실 것이지만 당신의 백성들을 향하여서는 선한 목자처럼 부드럽게 다스릴 것이다(10-11절). 41:11-14 또한 강력한 용사이신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신 하나님을 잘 묘사한다.


“41:11.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는 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 12.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 허무한 것 같이 되리니 13.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14.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43:14-17은 직접적으로 바벨론 세력에 대한 야웨 하나님의 승리와 격파를 묘사한다. 고레스에 의한 바벨론의 패배는 야웨의 거룩한 전쟁의 일부다.
“43:14.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으로 자기들의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15.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 왕이니라 16. 바다 가운데 길을, 큰 물 가운데 첩경을 내고 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서 그들로 일시에 엎드러져 일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선한 목자처럼 흩어졌던 당신의 백성들을 고토로 모아들이실 것이다.
야웨는 땅 끝에서부터 당신의 흩어진 양떼들을 모으신다(겔 34장-37장). 41:8-10은 목자가 어린 양을 부드럽게 인도하는 하나님 영광의 왕의 고토회복 역사를 잘 보여준다.


“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선택 및 계약신학) 9.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41:17-20은 광야와 사막의 여정 속에서 당신의 어린 양떼들을 선한 목자처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왕적인 돌보심을 잘 증거한다.


“41:17.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선택과 계약의 하나님) 18. 내가 자산에 강을 열며 골짜기 가운데 샘이 나게 하며 광야로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으로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 19. 내가 광야에는 백향목과 싯딤나무와 화석류와 들 감람나무를 심고 사막에는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을 함께 두리니 20. 무리가 그것을 보고 여호와의 손이 지은 바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가 창조한 바인줄 알며 헤아리며 깨달으리라(광야/사막에 생긴 숲의 창조주).”




40:12-17은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초라해 지는 모든 피조물들을 열거한다. 3-8절에서 자신의 영광을 밝히 드러낸 그 영광의 왕이자 하나님이 바로 천지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이 드러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왕은 우주에 비길 수 없는 절대적으로 크시고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시다. 어떤 보좌관이나 자문관도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돕지 않았으며 어떤 비길 수 있는 경쟁적인 신도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전적인 순종과 신뢰를 드려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 단락은 17-26절의 반우상숭배 단락의 전주곡이 된다. 대양, 큰 바다, 태산과 같은 큰 산, 땅, 이 거대한 피조물(세력, 국가, 조직)은 하나님의 가장 작은 저울(간칭과 명칭)에 달려도 오히려 가볍다. 이 통쾌한 억양법을 보라!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태산과 대양도 경동시장의 감초와 같은 비싼 약재를 소량으로 달아팔 때 쓰는 저울인 간칭과 명칭으로 달아도 얼마 나가지 않는 무게와 크기를 가진 미물로 전락한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의 문제를 과감하게 축소시킬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의 간칭과 명칭에 달아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태산같은 문제도 하나님의 손바닥에 붙잡히면 한 점 먼지처럼 작아진다(조나단 스위프트 목사의 걸리버 여행기). 이스라엘을 괴롭힌 앗수르, 바벨론, 폐르샤 등 열국들은 한 방울의 물처럼 보잘 것 없다! 섬들은 미세한 먼지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이처럼 위대하고 크신,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의존하여야 한다. 강대국, 열국들, 태산들, 그리고 대양들을 의지하면 안 된다. 우리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 도모와 계획, 지혜와 명철은 한없이 크고 넓고 깊고 광활하다. 그분의 지혜와 명철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따라서 우상숭배해서는 안 된다. 강대국을 의존하거나 그의 힘을 의지하려는 우상숭배에 빠져서 안 된다.
17-20절은 우상숭배자들의 어리석음을 공격한다. 누가 우상숭배자인가? 바벨론에 살면서 고토로 돌아오지 않으려는 백성들은 바벨론적인 우상숭배자가 될 수 있음을 은근히 경고한다. 왜냐하면 70년의 바벨론 타향살이 끝에 그렇게 쉽게 타향살이가 정리되고 무인지경, 버려진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17-20절은 바벨론적 삶의 양식에 대한 비판이다. 40-49장 안에서 우상숭배에 대한 예언자적인 탄핵은 가장 빈번하게 발견되는 주제다. 우상은 무능력, 무자각, 무청취 등 총체적인 공허와 허무의 상징이다. 들을 수 없고 미래사 전망/과거사 해석 등 어떤 점에서도 전적으로 무능하다. 우상은 나무나 금으로 만든 인간 수공품이다. 우상은 우상숭배자를 어리석고 무지몽매하게 만든다. 우상은 복을 주지도 화를 주지도 못한다. 그런데 인류의 정신사는 하나님을 버리고 배척할 때 얼마나 자주 심각하게 인류가 우상숭배의 유혹에 쉽게 굴복하는가를 보여준다.
적어도 다음 단락들의 우상숭배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은 포로기 청중들의 삶 속에 우상숭배적인 삶의 습속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심층적으로 침투되어 있는가를 보여준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강조는 우상숭배적인 종교가 얼마나 창궐하였으며 바벨론 땅에 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요소들에 의하여 얼마나 그 마음이 분열되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41:5 섬들이 보고 두려워하며 땅 끝이 무서워 떨며 함께 모여 와서 6 각기 이웃을 도우며 그 형제에게 이르기를 너는 담대하라 하고 7 목공은 금장색을 장려하며 마치로 고르게 하는 자는 메질군을 장려하며 가로되 땜이 잘 된다 하며 못을 단단히 박아 우상으로 흔들리지 않게 하는도다.


41:21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을 일으키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22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의 어떠한 것도 고하라 우리가 연구하여 그 결국을 알리라 혹 장래사를 보이며 23 후래사를 진술하라 너희의 신 됨을 우리가 알리라 또 복을 내리든지 화를 내리라 우리가 함께 보고 놀라리라(우상의 차별성) 24 과연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며 너희 일은 허망하며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




41:29 과연 그들(우상숭배자들)의 모든 행사는 공허하며 허무하며 그들의 부어만든 우상은 바람이요 허탄한 것 뿐이니라


42:14 내가 오래 동안 고요히 하며 잠잠하여 참았으나 이제는 내가 해산하는 여인 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 15 내가 큰 산과 작은 산을 황무케 하며 그 초목을 마르게 하며 강들로 섬이 되게 하며 못들을 마르게 할 것이며 16 내가 소경을 그들의 알지 못하는 길로 이끌며 그들의 알지 못하는 첩경으로 인도하며 흑암으로 그 앞에 광명이 되게 하며 굽은데를 곧게 할 것이라 내가 이 일을 행하여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 17 조각한 우상을 의뢰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


44:9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10 신상을 만들며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든 자가 누구뇨 11 보라 그 동류가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그 장색들은 사람이라 그들이 다 모여 서서 두려워하며 함께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12 철공은 철을 숯불에 불리고 메로 치고 강한 팔로 괄리므로 심지어 주려서 기력이 진하며 물을 마시지 아니하여 곤비하며 13 목공은 줄을 늘여 재고 붓으로 긋고 대패로 밀고 정규로 그어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 인형을 새겨 집에 두게 하며
14 그는 혹 백향목을 베이며 혹 디르사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혹 삼림 중에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택하며 혹 나무를 심고 비에 자라게도 하나니 15 무릇 이 나무는 사람이 화목을 삼는 것이어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더웁게도 하고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굽기도 하고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기도 하는구나 16 그 중에 얼마는 불사르고 얼마는 고기를 삶아 먹기도 하며 고기를 구워 배불리기도 하며 또 몸을 더웁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17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여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18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 눈이 가리워져서 보지 못하며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라 19 마음에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으므로 내가 그 나무의 얼마로 불을 사르고 그 숯불 위에 떡도 굽고 고기도 구워 먹었거늘 내가 어찌 그 나머지로 가증한 물건을 만들겠으며 내가 어찌 그 나무토막 앞에 굴복하리요 말하지 아니하니 20 그는 재를 먹고 미혹한 마음에 미혹되어서 스스로 그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며 나의 오른손에 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 하지도 못하느니라


45:15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16 우상을 만드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며 욕을 받아 다 함께 수욕 중에 들어갈 것이로되 17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입어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영세에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18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19 나는 흑암한 곳에서 은밀히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야곱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헛되이 찾으라 이르지 아니하였노라 나 여호와는 의를 말하고 정직을 고하느니라


46:1 벨(Bel)은 엎드러졌고 느보(Nebo)는 구부러졌도다 그들의 우상들은 짐승과 가축에게 실리웠으니 너희가 떠메고 다니던 그것은 피곤한 짐승의 무거운 짐이 되었도다 2 그들은 구부러졌고 그들은 일제히 엎드러졌으므로 그 짐을 구하여 내지 못하고 자기도 잡혀갔느니라 3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찌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4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5 너희가 나를 누구에 비기며 누구와 짝하며 누구와 비교하여 서로 같다 하겠느냐 6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장색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7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서 있고 거기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 8 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이 일을 다시 생각하라 9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이가 없느니라 10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우상숭배자=바벨론주의자)




마지막으로 45:20-25절은 반우상숭배 탄핵이 우상숭배애 탐닉하고 있는 열방들을 하나님에 대한 참 신앙으로 초청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준다.


45:20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아 너희는 모여 오라 한 가지로 가까이 나아 오라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능히 구원치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은 무지한 자니라 21 너희는 고하며 진술하고 또 피차 상의하여 보라 이 일을 이전부터 보인 자가 누구냐 예로부터 고한 자가 누구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느니라 22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23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 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 24 어떤 자의 내게 대한 말에 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은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를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마는 25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 하셨느니라
40:21-31은 우상 숭배의 대안적, 대항적 삶의 방향이 제시된다. 우상숭배를 피하고 참 하나님에 대한 일편단심의 신앙 안에 거하려면 (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져야 한다. (나)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 역사변혁(국가의 흥망성쇠), 사회변혁(방백은 무로 전락)의 주관자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 역사변혁의 상수(Constant)이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만이 우상숭배의 유혹에서 건져준다. (다)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거룩하심, 비길 수 없음을 알아야만 우리는 우리의 나눠지지 않은 전심의 충성심을 야웨께 바칠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이 말씀으로 온 세상만물을 창조하시고 삼라만상의 이름을 알고계심을 알아야 우리는 역사안의 염세주의 허무주의 비관주의, 피곤과 탈진,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다. (라) 하나님이 영원히 젊은 창조주 하나님, 지혜와 명철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임을 알아야만 우리는 야웨 하나님만을 앙망할 수 있다. (마) 그래야 독수리가 직승 비상하듯이 힘차게 날아오를 수 있다. 바벨론 땅에서 팔레스틴까지는 거리가 1200km 정도여서 장정이라도 피곤하여 탈진케 되는 길이다. 야웨 하나님에 대한 앙망없이는 도저히 걸어 갈 수 없는 길이다. 하나님은 걸어 갈수 없이 너무나 먼 길을 날아갈 수 있게 하신다. 신앙은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힘을 제공한다. 우상숭배는 우리의 힘을 소진시키지만 하나님만을 앙망하는 삶은 진실로 우리의 삶을 원기왕성하게 한다. 바벨론에서 다시 팔레스틴으로 돌아가는 그 길은 야웨 하나님에 대한 초점잡힌 믿음/앙망에서 솟아나는 날아오르는 힘으로 답파할 수 있다. 1200km 대장정은 소년, 장정, 젊은이의 이름으로 안 된다. 그것은 오로지 야웨 하나님에 대한 앙망함으로 완주할 수 있는 대장정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야곱은 지금 창조주 하나님/그들의 영광스런 왕을 충분히 모른다. (가) 그들은 오랫 동안 바벨론 포로살이에 익숙해져 있다. (나)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임을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돌보시려는 권념으로 충만한지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억울한 사정은 하나님께 신원되거나 수리받지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다) 그들은 1200km 고토귀환의 대장정은 영혼과 육체를 지치고 피폐케 할 과업이라고 생각한다. (라) 그들은 불평하는 비관주의자요 그들은 그들의 마음 속에 또아리를 튼 절망적인 언어에 의하여 지배당하고 있다. 그들은 위축되어 있다. 그러나 예언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야곱에게 정말 감동넘치는 약속의 말씀을 봇물처럼 터트린다. 그래도 이스라엘의 상상력의 지평은 협소화되어 있고 심히 제한되어 있다. 독수리같은 관점이 아니라 메뚜기, 지렁이같은 관점으로 자신과 현실을 본다. 하나님의 간칭과 명칭에 그들의 태산같은 근심을 달아보지 않는다. 우리는 야곱과 이스라엘의 얼어붙은 마음, 냉담해져버린 마음을 움직이려고 분투하시는 하나님의 노력을 잠깐 주목해 보자. 실의와 낙담과 좌절에 멍든 이스라엘/야곱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의향을 살펴보자.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4.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43:18. 너희는 이전 일(바벨론 포로살이)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22.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로워하였으며 23. 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 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예물로 인하여 너를 수고롭게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인하여 너를 괴롭게 아니하였거늘 24.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케 아니하고 네 죄 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26. 너는 나로 기억이 나게 하고 서로 변론하자 너는 네 일을 말하여 의를 나타내라


44장 이스라엘과 야웨의 관계: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
44:1.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2.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3.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4.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5. 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혹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리라 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7. 내가 옛날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고하며 진술할 자가 누구뇨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고할찌어다 8. 너희는 두려워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느냐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이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알지 못하노라


44:21.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아니하리라 2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23.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찌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찌어다 산들아 삼림과 그 가운데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찌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로 자기를 영화롭게 하실 것임이로다 24.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조성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25. 거짓말 하는 자의 징조를 폐하며 점치는 자를 미치게 하며 지혜로운 자들을 물리쳐 그 지식을 어리석게 하며 26. 내 종의 말을 응하게 하며 내 사자의 모략을 성취하게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거기 사람이 살리라 하며 유다 성읍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될 것이라 내가 그 황폐한 곳들을 복구시키리라 하며(예루살렘, 유다 중건 예언) 27.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28.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BC 538년 고레스 칙령)




이스라엘과 야곱을 향하신 하나님의 의향과 사랑의 결단이 이러할진대 1200km 대장정을 앞둔 이스라엘과 야곱은 자신의 다리힘이나 근력이나 의지력을 믿지 말고 이런 위대하고 희망찬 미래설계를 가지시고 다시 고토로 부르시는 야웨 하나님을 앙망하여야 한다. 우리를 보고 믿으라고 초청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어마어마한 계획을 가지시고 계신다. 어떤 야웨인가? 위에서 인용된 말씀들에 열거된 그런 위대한 계획을 가지신 야웨를 앙망하는 것, 그것은 굼벵이나 지렁이처럼 1200km를 가는 것이 아니라 독수리처럼 날아가는 여정의 힘이다. 깊은 좌절, 희망의 상실 때문에 깊어진 절망적인 낙담에 갇힌 영혼에게, 바로 우리 영혼에게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 말씀 요법을 쓴다. 하나님과 함께 날아갈 1200km, 위대한 비상을 꿈꾸며 우리는 우리 영혼에게 고요히 타이른다.


시편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성서학 연구소 이사야 강의 10강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본문: 61:1-11
같이 읽어올 본문: 60:1-22, 62:1-12, 2:1-4


I. 들어가는 말-이사야 56-66장의 신학적-역사적 정황
학자들이 이사야 56-66장을 이사야 40-55장과 구분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전자가 전제하고 있는 역사적-신학적 정황과 후자가 전제하는 역사적-신학적 정황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전자는 BC 538년 전후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거나 전제한다. 고레스가 일어나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리고 페르샤 제국을 건설하면서 바벨론에 의하여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모든 소수민족들을 자기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고레스의 칙령이 40-55장의 역사적 배경을 제공한다. 고레스 칙령은 40-55장의 예언들을 분출시킨 하나의 역사적 분기점이다. 40-55장은 왜 바벨론 제국이 고레스에게 망하게 되었는지, 왜 바벨론 포로들은 고토로 돌아가서 새로운 시온 재건에 이바지하여야 하는지, 왜 바벨론에 눌러앉아 있는 삶이 우상숭배적인 삶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다룬다. 그리고 대체로 40-55장은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희망에 찬 시온 재건 프로그램을 믿는 사람에게 다가올 감동적이고 희망에 찬 미래상을 제시한다. 청중은 바벨론에 아직 살고있거나 아니면 이제 막 팔레스틴 고토로 돌아가려는 사람 혹은 이미 귀국 도상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56-66장은 이미 팔레스틴으로 돌아가서 정착하여 살고 있는 포로귀환 공동체의 삶을 배경으로 선포된다. 56-66장 안에는 성전 예배가 이미 시행되고 있으며 안식일 제도와 희생제사 등이 이미 실행되고 있다. 56:8에 의하면 야웨는 이미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았지만 내가 이미 모은 본 백성 이스라엘 외에 또 이방인을(혹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 모아 먼저 돌아온 귀환포로 공동체(the golah[הלג] community=the assembly of the returned exiles)(느 5장)에게 속하게 할 것이다. 적어도 한 세대 정도의 시간은 흘러간 역사적 시점을 전제한다(BC 500년 전후부터-450년[에스라-느헤미야 시대 직전 혹은 동시대] 사이).
56-66장들 안에서는 구체적인 신앙적-신학적 쟁점들이 소개되고 있으며 현실에서 이뤄지고 있는 시온 회복 프로젝트(58:12)에 대한 소수파 혹은 비주류파들의 불만이 여기 저기서 노정되고 있다. 여기에는 또한 공동체 전체의 영적 타락 혹은 느슨함에 대한 예언자적 질타가 빈번하게 들리고 있으며 포로귀환의 삶에 대한 장밋빛 기대가 잿빛 좌절감으로 점차 바뀌어 간다는 좌절감과 환멸감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귀환포로 공동체 안에서는 시온 재건 및 회복 프로그램을 둘러싸고 내부 분열과 파쟁이 일어났던 것처럼 보인다(에스겔과 스가랴에서도 이런 논쟁적 분위기 감지).2) 56-66장 안에는 바벨론 포로들 중 가장 순결하고 가장 포괄적인 시온 회복 및 재건 프로그램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나 어쩌다가 소수파로 몰려 주류 공동체로부터 소외당하거나 배척받는 소수 철저한 쇄신파의 입장이 보다 두드러진다. 40-55장 안에는 소수파-다수파, 거룩파-비거룩파, 묵시적 이상주의파-현실적 교권주의파(Paul Hanson은 사독계열의 제사장 집단과 이상주의적인 레위인-묵시가들의 대결이라고 본다)의 구분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오직 구분이 있다면 우상숭배자와 야웨를 앙망하는 자 차이 정도만 드러난다(아마도 바벨론에 눌러앉으려는 사람들과 돌아오려는 사람들간의 긴장일 수도 있으리라). 이에 비해 56-66장안에는 분명히 공동체의 일방(一方)(주류) 구성원들에 대한 타방(他方) 구성원들의 비판과 견제와 단죄의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하나님의 율법을 진정으로 지키지 않는 집단에 대한 탄식과 비난이 들려온다. 물론 이런 구분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고 모든 귀환포로 공동체들이 하나님의 영광된 미래에 참여할 수 있을 것처럼 확신하는 본문들도 상당수 있다(60-62장에는 비교적 이런 구분이 희석화). 따라서 귀환포로 공동체 내부의 파쟁과 갈등을 56-66장을 이해하는 하나의 지배적인 해석의 틀(사회학적 해석)로 고정시킬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나 이런 구분은 다소간 잠정적이며 이사야서 신학의 발전과정을 좀더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 해석의 틀로서 기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40-55장에 비하여 56-66장안에는 56-66장의 예언을 산출한 공동체(소수파인 듯=배척당하는 쪽)와 그들과 대립하는 주류 재건파(이방인에게 배타적) 사이에 유지되어온 긴장을 외면하기는 어려울 것같다.3) 다음과 같은 본문들이 56-66장의 예언자(들)(종들)이 자신들의 대적세력으로 혹은 경쟁세력으로 느끼는 사람들에 대한 예언들을 담고 있다.


A. 66:5.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아 그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르시되 너희 형제가 너희를 미워하며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를 쫓아내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영광을 나타내사 너희 기쁨을 우리에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라” 하였으나, 그들은 수치를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6. 훤화하는 소리가 성읍에서부터 오며 목소리가 성전에서부터 들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 대적에게 보응하시는 목소리로다


B. 57:20.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쳐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21.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4)


C. 59:2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D. 57:3. 무녀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씨 너희는 가까이 오라 4. 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너희는 패역의 자식, 궤휼의 종류가 아니냐... 13.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으로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은 다 바람에 떠 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


여기서 무녀의 자식들(바람에 사라질 운명의 소유자들)과 우상숭배자들은 분명히 야웨를 의뢰하여 영원히 땅을 기업으로 차지할 사람들과 구별된다. 우상숭배자들은 아마도 정결한 야웨 신봉자들을 희롱하였던 것처럼 보인다(57:4).


E. 65:8.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포도송이에는 즙이 있으므로 혹이 말하기를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 하나니 나도 내 종들을 위하여 그같이 행하여 다 멸하지 아니하고 9. 내가 야곱 중에서 씨를 내며 유다 중에서 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내리니 나의 택한 자가 이를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나의 종들이 거기 거할 것이라 10. 사론은 양떼의 우리가 되겠고 아골 골짜기는 소떼의 눕는 곳이 되어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소유가 되려니와 11. 오직 나 여호와를 버리며 나의 성산을 잊고 갓에게 상을 베풀어 놓으며 므니에게 섞은 술을 가득히 붓는 너희여... 13. 이러므로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나의 종들은 먹을 것이로되 너희는 주릴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마실 것이로되 너희는 갈할 것이니라 보라 나의 종들은 기뻐할 것이로되 너희는 수치를 당할 것이니라 14. 보라 나의 종들은 마음이 즐거우므로 노래할 것이로되 너희는 마음이 슬프므로 울며 심령이 상하므로 통곡할 것이며 15. 또 너희의 끼친 이름은 나의 택한 자의 저줏거리가 될 것이니라.... 내 종들은 다른 이름으로 칭하리라




F. 66: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이 단락에는 돌로 된 성전에 대한 신학적 상대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그것은 성전과 성전예배에 대한 부정적인 신학적 평가를 담고 있다. 66:1-2은 열왕기상 8장 27절(“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을 되울리고 있다. 성전 희생제물을 드리면서 악행을 범하는 사람들은 실상 우상숭배자들과 다름이 없으며 이들은 명백하게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과 구별되고 있다.
적어도 이상의 인용단락들 중 두 단락들, 즉 65:8-15과 66:5-6은 확실히 귀환 포로공동체들 사이에 있었던 시온 회복 및 재건프로그램의 성격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을 개연성을 인정한다.5) 56-66장 전체 예언의 중심주장은 시온 재건 및 회복 프로그램은 물리적 재건 및 중건이 아니라 인적 재건(공평과 정의에 입각한 가난한 자, 이방인, 병든 자의 치료와 회복)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1-39장의 이사야의 입장을 계승한다고 보여진다. 일찍이 이사야는 시온의 안전보장은 야웨 하나님이 시온에 현존한다는 사실 자체라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야웨의 현존을 확보하는 유일한 길은 시온 거민들의 공평과 정의의 실행이다(33:14-15; 1:21-26). 공평과 정의는 고아와 과부와 같은 가장 연약한 사회구성원들을 돌보고 배려하는 정치요 일상적인 삶이다.6) 굳이 말하자면 이사야 61장의 메시야적 종은 제도적이고 기구적인 재건보다는 귀환포로 공동체의 영적 치료와 회복을 우선시한다. 그의 시온 회복 프로그램은 순서상 다음과 같다: 영적 쇄신-공동체적 계약정신 진작 및 회복을 통한 이스라엘 정체성 회복-열방 및 열국들에게 야웨의 왕권(야웨의 왕되심/유일무이한 하나님되심) 전파-열방으로부터 야웨께 선택받고 복받은 민족으로 인정-열방들도 야웨께 경배하는 세계(이사야 2장 1-4절) 도래.


II. 메시야적 종의 사역을 통한 시온 재건-61장의 시온 재건신학
우리가 공부할 61장 1-11절은 시온 재건 및 회복의 핵심은 가난한 자, 눈 먼 자, 갇힌 자(채무 노예[느 5장]), 마음 상한 자에게 치료와 회복의 해(희년)를 선포하는 것이다. 61장에는 이미 팔레스틴 정착생활이 상당히 오랫 동안 진척되어온 결과, 그것도 부정적인 결과들(마음 상한자, 눈먼 자, 포로된 자 등)이 요약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 자체로는 귀환포로 공동체 구성원들 간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논쟁적인 분위기를 부각시키는 본문은 아니다. 그것은 시온 재건 및 회복 프로그램의 주체로 자임하는 한 왕적인 인물의 사명선언(mission statement)을 담고 있다. 52:13-53:12의 야웨의 고난받는 종과 같은 특정 개인이 이번에는 일인칭 화자(話者)로 등장한다. 야웨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61:1)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규정한 그런 사역들은 실제로 BC 500년 전후의 귀환포로 공동체의 가라앉은 영적 분위기를 갱신하며 다시 한번 시온 재건(인적 및 물리적 재건) 및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열망과 열심을 일깨운다. 이런 점에서 61:1-11(60장, 61장, 그리고 62장은 40-55장과 분위기가 비슷한)은 40-55장에서 두드러지게 묘사된 영적 패기를 다시금 북돋우는 예언이다.7)




1. 본문 사역(私譯)


야웨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의 사명-의의 참나무 공동체 창조(1-3절)
1. 주 야웨의 신이 내 위에 머물러 있다. 왜냐하면 야웨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사람들을 싸매도록 나를 보내셨다. 몸이 저당(抵當)잡힌 사람들8) 에게 빚탕감의 자유9) 를, 갇힌 사람들10) 에게 석방11) 을 전파하며 2. 야웨의 은총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伸寃)12) 의 날을 전파하며, 슬퍼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로하며 3. 그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13) 을 주며 슬픔 대신에 희락의 기름을 주며, 허약한 영 대신에 찬송의 옷14) 을 줌으로써 [시온의 슬퍼하는 사람들을15) ] 복돋우도록 [그는 나를 보내셨다]. 마침내 그들은 야웨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야웨께서 친히 심으신 의의 참나무들이라고 불려지리라.


구원받은 백성들의 사명과 받을 역전된 그들의 운명-제사장 나라(4-7절)
4. 그래서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무너진 지 오래된 다시 일으킬 것이다. 그들은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곳들을 재건할 것이다(58:12) 5. 이방인들은 서서 너희 양떼를 먹일 것이요 이방인들의 자손들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6. 오직 너희들은16) 야웨의 제사장들이라 불릴 것이다. 너희들에 대하여 우리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말해질 것이다. 너희들은 열방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풍요함17) 을 먹고 배부르리라18) (60:3-7, 16) 7. 수치19) 와 능욕20) 대신에 그들은 그들의 몫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땅에서 그들은 갑절을 차지할 것이며 영원한 기쁨이 그들에게 있을 것이다.




시온 회복의 원천(8-9절)-신적 일인칭 화자(話者)
8. 왜냐하면 나 야웨는 공평21) 을 사랑하며 불의한22) 강탈행위를 증오하며 나는 진실함으로 그들의 행위들을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세울 것이다 9. 그들의 자손이 열방 중에, 그들의 후손이 만민23) 중에 알려지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야말로 야웨께 복 받은 자손인 것을 인정하리라(60:14)


메시야적 종의 희열과 희망(10-11절)
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정녕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왜냐하면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나를 덮으시기 때문이다. 마치 신랑이 사모(紗帽)를 쓰며24)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이. 11. 땅이 싹이 나오게 하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하는 것처럼 주 야웨께서 의와 찬송을 열방 앞에 움돋게 하시리라(30:17?)




2. 60-62장과 56-66장의 관계
61장은 이스라엘의 회복된 운명과 영광스러운 미래를 노래하는 60-62장의 한 부분으로서 56-66장에 흐르고 있는 공동체 내의 파쟁의식이나 분파의식에 대해서 직접적으로는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점에서 60-62장은 56-66장의 나머지 부분보다는 40-55장에 좀더 가깝다. 60-62장의 메시지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회복의 대상으로 삼는 듯한 순수한 회복의 약속을 부각시킨다(62:10-12와 40:8-11; 52:7-10). 이 약속은 죄사함의 은총에 기반한다(60:10b와 40:1-12; 44:22; 54:7-8). 40-55장에서처럼, 60-62장에서도 시온의 자녀들이 열방들과 열국들로부터 모여들여질 것을 약속한다(60:4, 9와 43:5-7; 49:12, 18, 22). 그리고 열국의 재물들이 시온으로 몰려들 것을 약속한다(60:5-7, 16과 45;14). 심지어 이방인 왕들도 야웨를 경배하는 데 참여할 것이다(61:10-11과 49:7b, 23). 예루살렘은 유례없이-물리적으로도 아주 화려하게- 영광스럽게 중건되고 회복될 것이다(60:13, 17과 54:11-12). 이스라엘은 조상들에게 주신 야웨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60:22와 49:19-21; 54:1-3). 그리고 그들은 야웨의 영원한 언약을 향유할 것이다(61:8과 54:10; 55:3). 그렇게 풍성하게 축복을 받은 후에 이스라엘은 이방의 빛이 되라는 하나님의 사명위임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60:3과 49:6).
또 다른 한편 60-62장(40-55장도 함께)은 56-66장과 다음 몇 가지 점들에서 다른 점들을 보인다. (가) 40-55장과 60-62장에서는 아주 과장적일 정도의 풍성한 구원약속들이 지배적인 주제를 이루는 비해서는 56-66장에서는 왜 40-55장안에서 약속된 구원이 아직도 실현되지 않는가를 설명하려는 예언들이 더러 발견된다. (나) 40-55장과 60-62장 안에서는 야웨의 심판은 과거가 되었는데 56-66장에는 아직도 미래시제로 표현된 심판이 부각된다. 회복에 앞서서 또 한 차례의 정결화 심판(팔레스틴에 돌아온 귀환 포로공동체를 다시 한번 정결케 하는 심판)이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다) 56-66장 안에는 하나님의 구원도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 모두에게 약속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약속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62장은 40-55장과 몇 가지 점에서 뚜렷한 차별점을 가진다. (가) 40-55장 안에서는 야웨의 구원역사가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이나 국가를 통하여 중개되는데 비하여 60-62장은 하나님의 구원이 비매개적으로 이뤄진다. 메대나 페르샤와 같은 중개자들을 통하여 야웨의 구원이 매개되지 않고 야웨 자신의 팔에 의하여 구원이 실현된다. 시온과 예루살렘에게 임할 구원은 거의 비현실적일만큼 환상적이고 천지개벽적인 변화를 전제한다. (나) 40-55장과는 달리 60-62장은 땅을 차지하는 문제에 관심을 보인다(60:21; 61:7). (다) 40-55장에서와는 달리 이 장들 안에서 우리는 열방들의 신들에 대한 논쟁적 예언들을 발견하지 못한다.
결국 60-62장과 40-55장과의 친밀성과 56-66장과의 차별성들에도 불구하고 60-62장은 포로귀환 공동체가 세계 열방에 대하여 갖는 공동체적인 선교사명을 좀더 진지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56-66장의 나머지 부분과 맥을 같이 한다.25) 56-66장의 신학적 지평은 열방과 세계이며 이제 귀환포로 공동체는 단순히 바벨론 유배로부터의 해방경험이 아니라 시온 재건 및 회복과정을 통하여 야웨 하나님의 의와 구원을 증거해야만 한다. 이런 세계선교사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메시야적 종의 사명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먼저 우리는 60-62장에 대한 개관을 통하여 61:1-11의 메시지를 유기적으로 이해해 보려고 한다.26)
60장은 재건된 성전이 열방과 열왕의 순례지가 될 것을 예언한다. 예루살렘과 시온이 세계의 영적 중심지가 될 것이며 야웨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계 만민에게 경배를 받는 온 세계의 하나님으로 인정된다. 여기서는 귀환포로공동체 내의 분파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만민 사이에 구별이 이뤄진다. 둘은 빛과 어둠처럼 구분된다(2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60:3). 그런데 열방과 열왕들이 사방으로부터 몰려오는데 열국 중에 흩어졌던 이스라엘 자손들을 안고 혹은 데리고 시온으로 몰려온다(60:4). 흩어졌던 자녀들이 돌아오면서 동시에 “바다의 풍부와 열방의 재물”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온다(60:5). 다윗과 솔로몬 시대처럼 인근 족속들(미디안, 에바, 스바, 게달, 느바욧, 다시스)은 조공예물을 바치듯이 왕께 바치는 예물들인 금과 유향, 그리고 양무리를 야웨께 바치며 경배한다. 그들은 온 세계를 향하여 야웨를 찬송한다(60:6). 그들 모두는 야웨의 영광의 집(성전)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결국 섬들과 열국들은 원방에서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손들과 은금을 실고 와서 야웨 하나님께 자신들을 드린다(60:8). 결국 60장1-9절은 이스라엘 민족과 재건된 성전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말하되 이스라엘과 만민을 구분한다.


60:1-9이 재건된 성전과 영광스럽고 보편적(국제적인) 성전예배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면, 60:10-22은 재건될(된) 예루살렘 성벽의 신학적-신앙적 의미를 노래한다. 예루살렘 성벽은 구원이며 성문은 찬송이다. 이 단락의 주제도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의 역전된 운명이다(60:10, 14, 15). 이제 이방인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쌓는 인부요 왕들은 이스라엘을 섬기는 봉사자며, 열방의 재물들은 예루살렘 성으로 실려오고 불순종하는 이방인 왕들과 백성들은 파멸의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60:10-12).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나아오며 이스라엘을 멸시하던 모든 자가 이스라엘의 발 아래 엎드리며 예루살렘을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의 시온이라고 할 것이다(60:14).
62장은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타오르기까지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열심과 이 하나님의 구원의 열심을 대변하는 파수꾼들의 영적 분투를 기록한다(62:1-6). 예루살렘은 공의를 실현하는 공동체가 되어 열방의 존경을 받으며 열방들의 기준이 될 것이다(62:10). 시온은 공평과 정의를 실현함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의 참 백성임을 증명할 것이며 마침내 시온 백성들은 “야웨의 거룩한 백성”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62:12).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60장이나 62장 둘 다 이스라엘의 역전된 운명과 미래의 영광을 말하지만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이 공평과 정의가 충만한 공동체가 되어 열국의 존경을 받으며 열국을 향도할 지도자적 공동체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는다. 61장은 바로 어떻게 어떤 인물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세계만민을 향도하는 공동체가 될 것인가를 말해준다. 야웨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의 사역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공평과 정의가 충만한 공동체가 되고 열방들과 만민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들로 하여금 야웨 하나님께 경배하도록 초청한다.


3. 해석
본문의 내적 구조와 논리를 다음과 같이 개관할 수 있을 것이다.


I. 이스라엘의 영적-신앙적 회복-의의 참나무 공동체(1-3절)
야웨의 사명위임과 그의 메시야적 종의 사명 순종(1a절): 옛 메시야적 왕의 사명 재점화
메시야적 종의 사명 선언(1b-3절)


II. 이스라엘의 사회적 회복-제사장 나라 공동체(4-7절)
폐허화되고 황폐화된 예루살렘 재건(4절)
세계 질서의 회복: 이스라엘과 열방들의 이상적인 관계(5-6절)(출 19:5-6)
-이방인들: 하나님의 제사장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육체노동자(5절)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사장들과 예배 수종자들(6절)


III. 회복의 원천-야웨 하나님의 계약적 투신. 공평과 의(8-9절)
공평과 영원한 언약에 대한 야웨의 전적인 투신(8절)
열방들과 민족들에 의하여 복받은 자손이라고 공인되는 이스라엘(9절)


IV. 메시야적 종의 희열과 희망(10-11절)
구원과 의를 인한 메시야적 종의 희열(10절)
의와 찬송의 열매가 결실할 것에 대한 메시야적 종의 확신(11절)




51:1-3과 53:11-12은 신적 일인칭 화자를 소개하는데 비하여 50:4-9와 본문은 예언자적인 일인칭 화자를 등장시킨다. 본문의 “나”는 이사야 11:1-9의 야웨의 영으로 가득찬 메시야적 인물의 또 다른 자아처럼 보인다. 11:1-9에서 3인칭으로 소개된 메시야적 인물이 본문에서는 일인칭 화자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의 “나”는 그의 사역의 본질과 근원을 미루어 볼 때 기름부음을 받은 왕적 인물이다. 40-66장의 맥락에서 보면 그는 야웨의 종인데 메시야적인 종(왕적인 종 혹은 종의 모습을 취한 왕)이다. 메시야적 종은 그의 말로 곤핍한 영혼을 위로하고 살려낸다(50:4-7). 본문은 이사야 40-66장 전체를 흐르는 하나의 신학사상인 하나님의 말씀의 창조적 권능을 잘 예증한다.
본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개관해 보면 1-3절은 메시야적 종(왕다운 종)의 사역을 말하고, 4-9절은 메시야적 종에 의하여 해방되고 치료된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하여 추진되는 시온 중건 및 회복을 말하고-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열방들을 이어주는 중보자 공동체가 된다- 10-11절은 다시 열방 앞에서 이스라엘이 경험하고 희구하는 구원의 객관적 실체를 증거한다. 그것은 열방들이 보는 앞에서 귀환포로 공동체 안에 구원(עשׁי)과 의(הקדצ), 의(הקדצ)와 찬송(הלהת)이 움돋는 것이다.
40-55장의 “야웨의 종들의 노래들”이라는 배경과 관련하여 이해하면 이스라엘의 회복은 야웨의 종(메시야적 종)의 사역(목회사역과 이스라엘의 존귀케 될 미래를 위한 희망의 불꽃의 점화)에서부터 시작된다. 1-3절은 시온 재건의 첫 단계는 인적 재건(치료와 회복)에서부터 시작된다. 야웨의 종, 메시야적 종의 지극히 인격적인 영적인 치료사역이 거대한 시온 중건 및 회복 프로그램의 첫 시작이라는 것이 중요하다.27) 메시야적 종은 자신의 사역 원천을 야웨의 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이 제도적으로는 별로 공인된 권위있는 직책을 갖지 않았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제도권의 지도직분을 갖지 못한 사람들을 담대하게 공생애의 현장으로 몰아가는 것은 위에서부터 임하는 야웨의 영이다(카타리나파, 왈도, 후스, 사보나롤라). 메시야적 종은 왜 그에게 야웨의 영이 임하였는지를 알고 있다. 그의 위에 쏟아부어진 영은 그에게 그가 섬겨야 할 사람들을 보여준다.
메시야적 종의 시야를 가득채우는 군상들이 순식간에 소개된다: 가난한 사람들, 마음이 상한 사람들, 몸이 저당잡힌 사람들, 갇힌 사람들,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을 포함한 무릇 슬퍼하는 모든 사람들, 지금 재를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들, 슬픔과 허약한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 이 사람들은 누군가? 바벨론 포로생활을 끝내고 고토로 귀환한 사람들은 일단 가난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런 의미보다 더 구체적인 의미를 가진 말일 것이다. 고토로 돌아와 “가난하게 된”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게 볼 때 뒤에 나오는 사람들, 즉 몸이 저당잡힌 사람들과 갇힌 사람들과 거의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야웨의 메시야적 종은 이미 고토로 돌아와 정착한 귀환포로공동체 안에 발생된 모순의 결과로 생겨난 비참한 사람들을 자신의 사역대상으로 삼는다. 야웨의 종은 하나님의 위로가 악한 자들과 몰지각한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을 포함하는 위로임을 암시한다(2절). 가난한 사람들, 빚 때문에 인신이 저당잡힌 사람들에게는 야웨의 은총의 해(면제년 혹은 희년)는 구원을 의미하지만 또한 그러한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지 않고 노예로 삼는 사람들(그것이 외국인 바벨론 사람들이건 내국인 이스라엘 동포건 상관없이)로 인한 원한을 풀어주는 신원(伸寃=revenge)의 날이기도 하다. 메시야적 종의 사역이 펼쳐지던 시대는 분명히 귀환한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는 위선적인 지도자들의 위선이 독기를 풍기는 시대였다. 58:3-5은 금식을 통하여 야웨의 돌보심과 인정을 받으려는 사회유력자들의 불평을 증언한다.


3 [내 백성이]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5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58:1-11은 귀환포로 공동체 구성원들의 위선과 죄악을 고발한다. 본문은 귀환포로공동체의 영적 진지성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들은 금식과 마음을 괴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본문에 소개되는 금식하는 경건한 자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금식기도와 금식참회 기도의 영적인 효험을 느끼지 못하자 그들은 불평한다. “야웨께서 왜 우리의 금식을 보지 않으며 우리의 참회기도를 열납하지 않느냐?”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찾아서 하나님을 알고 그의 의를 행하는 것을 즐기는 나라처럼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외견상으로 하나님의 규례를 지킬 뿐만 아니라 의로운 판단을 구하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금식하지만 금식의 참 정신-욕망부인과 해체, 가난한 자 피억압자들을 자유케 하는 너그러움과 자비-을 배척하고 있다. 그들은 메시야적 종과는 달리 금식의 참 정신을 배척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부인의 금식수행을 통하여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어주어야 하는데”(58:6) 그들은 그러한 사회경제적 자비를 실천하지 않았다. 아마도 58:6-9은 7년에 한번 씩 돌아오는 면제년(신 15장)에 의당 풀어주어야 할 히브리 동포 노예들을 풀어주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유력자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의 공평과 의의 요구에 따라 동시대의 가난하고 주린자 들에게 대하여 책임적인 돌봄을 제공했어야 했는데 그들은 이런 일을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가난한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말았어야 한다”(58:7). 그들은 주린 자에게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해 주어야 했다(58:10). 그러나 그들은 이런 계약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자비와 의를 배척하고 있다. 이사야 58장은 이런 귀환포로 공동체의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불순종과 일탈이 하나님의 치료를 지연시키고 있다고 본다(58:8). 그러나 현재로는 그들의 금식은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 자가당착적 경건의 외양 일뿐이다.
이러한 어그러지고 패역한 시대를 배경으로 야웨의 종, 메시야적 종의 사역은 전개된다. 괴로운 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마음 상한 자를 고치고 몸이 갇힌 채무노예들의 해방을 선언하는 야웨의 메시야적 종의 순종을 통하여 귀환 포로공동체에 치료가 임한다(58:8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평강=샬롬]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라). 진정한 금식(자기 욕망 부정의식)은 집없이 유리방황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고, 굶주린 이웃 동포들을 먹이는 신적 친절과 자비(의)의 실천에 있다. 공평의 결핍은 사회경제적인 약자들을 양산할 수 있었을 것이다(58:4; 59:1-8). 집없이 유리방황하는 빈민들이 생성된 것은 부당한 경제정책이나 법률 시행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귀환포로 공동체의 계약공동체성은 붕괴되었다. 거기에는 다시 아픔을 호소하고 괴로움을 호소하는 가난한 자들이 양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40-55장의 장밋빛 시온 재건 및 회복 프로그램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본문의 주인공인 메시야적 종은 40-55장의 시온 재건 및 회복의 관건은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데서 시작됨을 안다. 그는 시온을 회복하고 재건할 주체세력은 가난하고 헐벗은 동포들에게 신적 친절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올바른 법집행과 사회경제적인 정의를 실행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나온다고 본다. 야웨께서 인정하시는 진정한 시온 재건 주체들은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 공평, 의, 정직, 그리고 성실의 소멸을 슬퍼하며 참회하는 사람들이다(59:9-15). 그들은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들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그들을 새로운 시온, 공평과 정의 위에 재건될 시온 건설의 주체세력으로 초청한다.
1-3절에서 결국 우리는 야웨의 영이 임한 사람은 어떤 공생애를 시작할 수밖에 없는가를 본다. 야웨 하나님은 “시온의 공의가 빛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날 때까지 쉬지 않고”(62:1) 당신의 영을 보내실 것이다. 오늘날에도 진정한 하나님의 성령경험은 가난한 자, 마음 상한 자, 인신이 저당잡힌 자, 갇힌 자,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료하는 데서 시작된다. 무릇 모든 하나님의 성령내리는 경험은 가난한 자, 마음 상한 자, 인신이 저당잡힌 자, 갇힌 자, 슬퍼하는 사람들을 외면한 채 사회상층부 사람들에게로 직행할 수 없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는 갈릴리에서부터 그의 메시야적 공생애를 시작하였다. 나사렛 예수는 신비에 싸여있는 메시야적 종의 정체성을 실체화하였다. 그가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1-4을 읽고 당신의 메시야적 공생애를 시작함으로써 61:1-4은 엄청난 구원에너지를 방출하였다. 순종되고 믿어지고 영접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과 역사를 바꾸는 힘을 낸다. 보본문의 메시야적 종은 혁명가적 열정과 영성가적인 감수성을 겸비하였습니다. 그는 어쩌면 부조리한 사회에 하나님의 은총과 신원의 해를 선포하지만 또한 마음이 상한 자, 슬퍼하는 자, 인신이 저당잡힌 자들을 목회적으로 위로하고 지탱하고 치료한다.


우리가 위에서 잠시 살펴보았듯이 메시야적 종의 사역은 불순종되어지고 배척된 면제년(혹은 희년-주의 은총의 해)의 참 정신을 구현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면제년을 배척하는 세력에 대한 응징이 면제년의 혜택을 입지 못하여 여전히 옥에 갇혀있는 사람, 여전히 노예살이/무거운 빚의 멍에를 메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가 된다. 66:14-15 (“14...여호와의 손은 그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 원수에게 더하리라 15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 그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를 베푸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실 것이라)은 은총의 해와 신원의 해가 갖는 이중적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28) 실상 59:9-15a은 면제년(희년)과 같은 야웨의 계약강령이 준수되지 않는 사회가 앓고 있는 병을 잘 고발한다. 이 단락은 공평, 의, 정직, 성실의 소멸을 슬퍼하는 “우리”(메시야적 종들, 곧 56-66장의 예언을 산출한 종들) 들의 참회의 기도문이다.


59:9. 그러므로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 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하므로...11. 우리가 곰 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공평을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 12. 대저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13.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인정치 아니하며 우리 하나님을 좇는데서 돌이켜 포학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발하니 14. 공평이 뒤로 물리침이 되고 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들어가지 못하는도다 15a. 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


메시야적 종은 이런 어그러진 시대에 파송받은 왕적인 목회자요 말씀의 종이다. 이렇게 공평과 정의가 사라진 시대를 고쳐보려는 중재자가 없는 것을 보신 야웨께서 친히 자기 팔로 구원하시고 신원하신다. 그런데 메시야적 종은 친히 구원과 신원을 위해 일하시는 야웨의 중보사역을 대표한다. 59:15b-18은 메시야적 종이 야웨의 은총의 해와 신원의 날을 선포하게 된 신학적-역사적 정황을 소개한다.


59:15b.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시고 그 공평이 없는 것을 기뻐 아니하시고 16.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17.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며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 18.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대적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지난 번 강좌에서 이미 논의하였듯이 이사야서에서 야웨의 직접적인 구원은 메시야적 중보자를 통한 대리 구원을 의미할 때가 많다. 메시야적인 종의 사역을 통하여 “야웨의 팔”의 역사가 실현된다(53:1).
3절은 야웨의 팔이 일으킨 구원역사의 각론을 나열한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운명의 역전이 일어난다. 여기서 “슬퍼한다”는 말은 59:15a-19와 63:7-64:12의 참회고백 기도문에서 잘 드러나듯이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하고 뉘우치는 행위를 의미한다.29) 왜 한 때는 당신의 맹렬한 화염으로 진노의 불을 뿜었던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가 이제 자비로운 용서의 선포자가 되었는가? 57:15-16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시한다.




57:15.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16.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


야웨 하나님은 비록 지존무상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지만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하고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는 분이기 때문에 그는 시온의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신다. 하나님은 죄인과 영원히 다투지는 않으신다. 그는 비록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노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치고 당신의 얼굴을 가리웠으나 그들의 비참한 사정을 보고 고쳐주고 자신들의 영락한 처지를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신다(57:17-18). 하나님께서는 “먼 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치료)을 베푸신다”(57:19). “전에는 버림을 당하여 재를 뒤집어쓴(죄책감과 자기정죄감) 채 슬픔과 낙심 속에 있던 시온의 애통하는 자들을 희락의 기름(기름은 치료제)으로 치료하시고 찬송의 옷으로 덧입히실 것이다. 저항할 수 없는 기쁨의 환호성과 찬송(시 126편)이 시온의 슬퍼하는 자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신적 친절(의)과 구원을 덧입은 시온의 슬퍼하는 자들은 이제 영적 갱신을 겪는다. 그들은 이제 의의 참나무(상록수 숲)들이 된다. 하나님의 신적 친절과 자비를 덧입은 증인이 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의로운 삶을 사는 공동체로 거듭 태어난다(60:15). 3절의 “심다”라는 동사는 귀환포로들의 팔레스틴 고토 정착을 가리킨다(렘 1:10-12). 귀환포로 공동체들이 하나님의 말할 수 없이 큰 은혜와 위로를 경험하는 것은 그들을 의의 참나무들로 성장하도록 야웨께서 친히 심으신 역사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60:20은 의롭게 된 백성들, 즉 의의 참나무들로 심겨진(재정착된) 귀환 포로공동체들이 “다 의롭게 되어 영영히 땅을 차지할 것임을” 선포한다. 그들은 야웨께서 다시 바벨론에서 꺾꽂이해서 심은 가지다. 그 가지들은 야웨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진 공동체(귀환포로공동체는 야웨가 창조한 공동체)에서 열방 중에 야웨의 영광을 나타낼 공동체로 운명지워졌다(60:21).


4절은 메시야적 종의 사역에 의하여 소성케 된 귀환포로 공동체 구성원들이 시온 재건과 중건의 주체로 부름받고 있음을 증거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황폐하였던 성벽들을 다시 쌓을 것이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키며 폐허가 되어버린 예루살렘 성읍들을 중건할 것이다. 인적 영적 치료와 중건이 물리적 중건에 앞선다. 하나님의 치료와 구원을 실존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이 결국 사회/공동체 회복을 주도한다. 그들은 또한 길을 수축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길에서 거치는 것을 제거할 것이다(57:14; 58:12; 61:4; 참조 40:2-3). 이것은 공평과 정의 실행을 통하여 높은 곳을 낮추며 낮은 곳을 돋우는 작업을 내포한다. 결국 메시야적 종의 사역을 통하여 소성케 된 귀환포로들이 예루살렘 성벽 공사를 주도한다(느 5-10장). 모든 거대한 사회적 공동체적인 재건 프로그램도 상처받은 개개인들의 치료하는 일이 아니면 그것은 인간적인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개인의 마음의 성벽이 중건될 때 사회/국가 공동체의 성벽도 건설될 수 있을 것이다.
5-7절은 완성된 예루살렘 성벽, 회복된 시온 공동체가 세계 열방에 대하여 갖는 의미를 말한다. 귀환 포로공동체, 즉 세계 한 복판에 집어던져 본 경험을 한 귀환포로 공동체가 열방들에 대하여 갖는 정체성은 무엇인가? 3절에는 회복된 이스라엘이 야웨의 영광(야웨의 왕적 통치권)을 드러낼 의의 참나무 숲으로 정의된다. 하나님의 의를 입체적으로 증거하고 대표하는 공동체라는 말이다. 5절에서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물리적 생존을 위해 섬기는 종들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장 공동체(레위 지파)를 위한 “세속 지파”들의 경우처럼 이방인들은 귀환포로 공동체를 먹여 살리는 세속지파들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농부들이요 포도원지기가 된다. 이 말은 이방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영적 종교적 지배나 주재를 의미하기보다는 영역과 역할의 구분을 강조하는 말일 것이다. 6절은 2인칭 강조대명사 “너희들”로 시작된다(상황절).(이방인은 너희들을 위한 농부요 포도원지지가 될 것이고 이제 너희들은 그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공동체로 규정된다(출 19:5-6; 롬 15:16) 회복된 이스라엘은 열방들(과 열방의 제물들[제물은 제물드리는 자와 동일시])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제사장과 레위인들 역할을 맡은 이스라엘이 열방들의 재물을 먹고 그들을 풍요함을 먹고 배부르게 된다는 말의 구체적 의미가 드러난다. 이제 새로 시작된 성전예배는 엄청난 양의 이방인들의 제물과 예물로 넘쳐날 것이다.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복지는 크게 좋아질 것이다. 5-6절과 마찬가지로 제사장 공동체인 이스라엘과 열방들의 관계를 다루는 몇 구절들을 찾아보면 5-6절이 규정하는 이스라엘-열방 관계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A. 60:16. 네가 열방의 젖을 빨며 열왕의 유방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줄 알리라(참조 49:23[열왕은 양부, 왕비는 유모])
B. 60:3.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4.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원방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워 올것이라 5. 그 때에 네가 보고 희색을 발하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풍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열방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6. 허다한 약대, 미디안과 에바의 젊은 약대가 네 가운데 편만할 것이며 스바의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7.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여지고 느바욧의 수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8. 저 구름 같이, 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로 날아 오는 것 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뇨 9.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원방에서 네 자손과 그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니라


60:3-9은 열방의 역할을 좀 더 복잡하게 규정한다. 여기서 열왕과 열방은 흩어진 이스라엘 포로들을 마침내 회복된 성전으로 인도하는 양부와 유모 역할을 감당한다. 열왕과 열방들은 이스라엘의 흩어진 포로들뿐만 아니라 은금까지 실고 예루살렘 성전 예배에 참여한다.




C. 66:2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열방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열방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약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21. 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서는 열방들이 흩어진 이스라엘 포로들을 고토로 데리고 올 뿐만 아니라 돌아온 이스라엘 교포 출신들 중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선임될 것이 선포된다.30)


D. 60:11....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열방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열방들은 유대인들의 바벨론 포로살이를 통하여 세계적으로 알려진 야웨 하나님을 인정하고 시온으로 몰려오도록 예정되어 있다. 본문에서 열방들은 야웨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역할을 하지 그들이 어떤 복을 받는지에 대한 언급은 누락되어 있다. 사실 우리는 5-6절의 보다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의 레위인들/제사장들과 세속적 지파들간의 상호의존 관계에 대한 전(前)이해를 가져야 한다. 5-6절이-언뜻 보기와는 달리-영적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구절들로 해석될 수 없는 이유를 알게 된다.
(1)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어떤 특정한 영토를 갖지 않고(신 18:1-8; 10:6-9 참조) 전국적으로 흩어진 성읍과 촌락들에 체류자의 신분으로 붙여 사는 것이다.31) 그들은 다양한 축제 절기들에 초청받을 때(예. 14: 29; 16: 11, 14) 백성들에 의해 드려진 예물들뿐만 아니라 드려진 희생제물들에(3-5절과 8절) 의해 생계를 꾸려간다. 이스라엘의 종교적 혹은 제의적 지도력은 야웨에 의해 레위지파에게 할당되었다(10:8; 27:9, 14; 31:9-13; 33:8-11 참조). 레위지파의 책임은 “야웨의 이름으로 서서 섬기는 일”이었다 (10:8; 18:5). 이 지파의 구성원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지도하는(21:5 참조) 제사장들이 된다. 국민교육 (33:10; 31:9-13 참조)과 사법행정(17:9; 21:5) 기능들이 또한 레위인들/제사장들에게 할당되었다. (2) 레위인들은 모든 다른 이스라엘 동포들의 형제들로 소개되며 그러므로 그들이 비록 어떤 특정한 영토나 지파들의 몫인 기업을 소유하지 못한다 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땅에서 나는 모든 양식들과 혜택들을 누릴 수 있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 대신에 “레위족의 기업”은 야웨이시고 곧 백성들에 의해 드려진 예물들과 의무적 납부금들/헌물들이다. (3) 레위인/제사장의 번성은 의존적으로 실현된다. 야웨에 대한 레위인의 의존은 다른 형제 지파들이 소유하는 어떤 사유재산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세속적 지파들보다 야웨에 대하여 훨씬 더 의존적이다. 그의 번영은 하나님께 제의적 예물들을 매일 바치는 그의 동포들의 계속적 순종이라는 일상적 요인에 의존하고 있다. 실제로 세속적 지파들 또한 어떤 의미에서 의존적으로만 번영할 수 있다. 레위인/제사장들의 영적 사역의 결과 세속지파들이 유지되고 레위인들의 축복과 영적 지도의 세속지파의 번성은 의존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양자는 상호의존적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과 열방은 상호의존적이다. 일방이 타방에 대한 종교적 지배를 정당화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열방에 대하여 영적 교육과 양육의 사명을 감당하여야 한다. 이런 전제가 충족될 때 열방의 재물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몰려올 것이다. 이사야 2:1-4은 야웨의 율법을 배우러 오는 열방들의 행렬을 묘사한다. 레위인/제사장들은 열방들에게 토라를 가르쳐서 세계평화를 도모하는 신성한 영적 인도자와 선생이다.
7절은 제사장 나라인 이스라엘이 받을 복과 몫(기업)(갑절의 몫)을 말한다. 야웨를 의뢰하는 이스라엘(귀환포로들)은 제사장/레위인으로서 시온과 예루살렘을 기업의 땅으로 차지하겠고 야웨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다(57:13). 이제 열방들 한 복판에서 당한 수치와 능욕(52:13-15) 대신에 이스라엘은 갑절의 징벌에 걸맞는 갑절의 기업/땅을 얻을 것이다. 돌아간 고토에서 그들은 영원한 희락을 누릴 것이다. 시온에서 슬퍼하던 그들이 이제는 열방이 보는 앞에서 기뻐할 것이다.


8-9절은 시온 재건과 회복의 근원(원천)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하나님께서는 한 때는 심판하고 파괴했다가 이제 회복하고 중건하시는 근거가 무엇인가? 심판과 구원을 하나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는가? 8-9절은 시온에 대한 야웨의 계약적 투신(신실성)이 바로 시온 재건과 회복의 원천임을 가리킨다. 1-66장 이사야서 전체에서 드러나는 시온에 대한 야웨의 계약적 투신의 실체는 시온을 공평과 정의 위에 건설하는 것이었다(1:21-16; 5:16; 28:16-17; 32:1-8; 33:14-15). 8절은 이스라엘이 고토에 돌아와서 갑절의 몫을 받고 야웨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받게 되는 국운회복은 야웨가 공평을 사랑하고 불의에 의한 강탈 행위를 증오하기 때문이다. 시온과 맺은 언약을 영원한 언약으로 삼을 것이기 때문에 시온의 영적 자질 향상과 고양은 시온이 야웨의 언약 당사자로 남아 있으려는 한 불가피한 과제다. 이스라엘 귀환 공동체가 고토를 다시 상속하기 위한 조건이 공평과 정의가 지배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야웨 자신이 바로 시온을 공평과 정의로 재건하려는 절대주권적인 열심의 소유자시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56:1).” 또한 야웨께서 완성된 예루살렘 성벽(귀환 공동체)의 안전보장을 위하여 어떤 조치를 취하는가를 보라.


60:17 내가 [예루살렘 성벽을 위해] 화평을 세워 관원을 삼으며 의를 세워 감독을 삼으리니 18 다시는 강포한 일이 네 땅에 들리지 않을 것이요 황폐와 파멸이 네 경내에 다시 없을 것이며 네가 네 성벽을 구원이라, 네 성문을 찬송이라 칭할 것이라


60:17-18은 시온(귀환 포로공동체)을 공평과 정의 위에 다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열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본문의 메시야적인 종의 사역이 선포되는 당시의 포로귀환 공동체는 영적으로 무책임한 지도자들, 즉 소경 파수꾼, 탐욕적이면서도 짖지 않는 개, 게으르고 술에 취한 지도자들에 의하여 내적인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56:9-11; 참조 5:12). 귀환포로 공동체의 지도층 인사들과 유력자들은 59:1-8에서는 아예 평강(치료)의 길을 알지 못하는 악인들로 단죄된다.
특히 59:3-8은 메시야적 종이 돌파해야 할 불의한 사회상, 폭력과 거짓으로 얼룩진 귀환 포로공동체의 영적 일탈상태를 잘 보여준다.


59:3.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4.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하며 ...6....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 7.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8. 그들은 평강(치료)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이런 완강한 현실 앞에서 메시야적 종은 공의를 사랑하며 불의한 강탈행위를 미워하며 행위대로 진실하게 갚아주는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구현해 내도록 위임받는다. 야웨는 원래는 다윗과 맺은 언약인 영원한 언약을 귀환포로공동체와 맺는다. 영원한 언약은 다윗과 그의 후손이 하나님의 왕적 다스림(공평과 정의)(이사야 9, 11, 32장)을 지상에서 구현할 의무를 규정하는 언약이다(삼하 7:12-16). 이제 귀환 포로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다윗 언약의 당사자가 되어 하나님의 왕적 통치를 지상에 실현하도록 부름받는다. 결국 8절의 마지막 소절에서 귀환포로공동체 전체를 영원한 언약의 인간편 당사자로 불러 세움으로써 각각의 귀환포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공평과 정의를 구축하는 의무를 짐지우는 셈이 되었다(42:1-7). 결국 공평과 정의로 건설된 시온의 재건 주체들은 열방 중에 알려지게 될 것이다(9절). 그들이 건설된 새로운 시온을 보고 “시온 귀환 포로들”(그들)이야말로(원전에는 3인칭 복수 대명사가 강조적으로 사용) 야웨께 복받은 민족임을 인정하게 된다.” 완전히 중건된 시온을 보고 열방들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




62:10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의 길을 예비하라 대로를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 11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시온이 하나님께 복받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는 열방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바벨론 포로살이 70년 동안 열방들로부터 받은 수치와 조롱(신 28장)은 이제 그들의 인정과 칭찬으로 바뀌었다. 완전히 뒤역전된 운명이다. 회복된 시온은 이제 만민을 위한 깃발이 된다(62:10).32) 만민은 이스라엘을 가리켜 “거룩한 백성이라 야웨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시온을 일컬어 찾은바 된 자요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62:12)고 고백할 것이다. 또한 60:14은 시온과 열방들의 뒤바뀐 운명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를 괴롭게 하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 엎드리어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의 시온이라 하리라.”33)
그래서 10-11절에서는 회복된 아니 좀더 정확하게는 역전된 이스라엘의 운명은 메시야적 종의 환호성과 희열의 외침을 터뜨린다. 10절은 결혼 이미지를 사용하여 이스라엘과 야웨 하나님의 영적 재결합을 묘사한다. 62:4-5은 야웨와 이스라엘 사이의 영적 결합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62:4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바가 될 것임이라 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야웨와 이스라엘의 영적인 결합의 결과 의와 찬송이 열방 앞에서 움돋게 된다. 그것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의 시작이다(66:17). 야웨 하나님은 시온을 신랑 혹은 신부처럼 단장하고 시온과 결혼해 주듯이 그녀를 극진히 사랑해 주심으로 예루살렘에는 다시는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다(66:19). 의와 찬송만이 옴돋음으로써 열방은 이제 시온에서 맺힐 의와 찬송의 열매를 향유할 날이 올 것이다.






III. 결론
앞서 언급하듯이 56-66장에는 40-55장의 장밋빛 예언들이 성취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의구심과 불만이 노정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56-66장은 대체적으로 40-55장의 장밋빛 약속들이 지연되는 이유를 귀환포로 공동체의 영적 도덕적 신앙적인 실패탓으로 돌리고 있다(불법과 불의, 빈부 격차)(58장). 본문은 귀환포로 공동체의 영적 치유와 회복을 수행하는 메시야적 종의 그 부드러운 사역이 시온 중건 프로그램의 핵심임을 보여주었다. 그는 귀환포로 공동체 내부의 분열을 극복하고 귀환포로공동체를 열방들에 대하여서 제사장 나라요, 의의 참나무요, 의와 찬송이 돋아나는 공동체로 갱신시키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는다. 이 메시야적 종에 대한 예언은 당시에 살았던 실존인물에 대한 간략한 자서전적인 스케치가 아니다. 그것은 신학적 이념을 구현하는 신학적 가공인물이었다. 나사렛 예수가 와서 이 말씀을 자신의 공생애 지침 본문으로 삼을 때까지 메시야적 종의 정체는 신비로 남아있었다. 나사렛 예수는 말씀을 육신화시킨 절대순종의 사람이다.




10. 현실의 시온은 환멸과 실망이지만 하나님이 열어젖힐 새 하늘과 새 땅을 앙망하자--세계는 갱신되고 정화된 시온을 통해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56-66장)
VI. 이사야 신학의 중심 주제들
이사야 신학의 중심은 “시온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The Plan of God for Zion)이다. 아래 여섯 주제들은 이 중심 주제를 축으로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시온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사야 6장에서 선포된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BC 738) 이사야는 천상 보좌 위에 앉아계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예언자가 된다.
이사야의 6장의 소명설화는 이사야의 “하나님 결단의 신학”의 고향이다. 6장 1-7절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운명과 관련하여 심사숙고에 몰입해 있는 하나님의 어전회의 장면을 보여주고, 8-13절은 하나님의 어전회의에서 내려진 결정 즉 에차(הצע)의 내용을 전달한다. 궁중 서기관 전통(지혜문학적 전통)에 정통한 이사야는 히브리어 에차와 그와 관련된 용어들(ma'aseh, ‘abodah 등)을 신학적으로 전용하는데 그는 이 “하나님의 결단/계획”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유다의 궁중 참모들이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고 자가추진적인 외교정책을 입안하는 행위(22:8-11; 29:15-16; 30:1-5)를 비판한다. 이 개념은 하나님의 계획을 배척하고 자신들의 계획을 추진하는 유다의 궁중참모들의 이데올로기를 공박하기 위한 변증적 목적으로 이사야 자신이 창조한 신학적인 술어였다.
이사야의 하나님 결단의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안에서 벌어진 공평과 정의의 파괴는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였고 더 나아가 그 당시 중근동 일대를 잔인하게 정복하던 앗수르의 파괴적인 활동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이었다(5:26-30; 10:5-6). 하나님 결단의 신학의 가장 중요한 주장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보좌에서 내려진 하나님의 “결단/계획”은 하나님 자신의 거룩함(신적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유다의 지도자에게 앗수르라고 하는 거대 제국과의 민족주의적인 충돌을 감행하기보다는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고아와 과부의 재판을 공평하게 하고 피곤한 자에게 쉼을 베푸는 정책을 권고하였다.


1.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 굳게 서지 못하리라(7:1-25; 8장; 17장)
7:1-25과 8:1-18은 이사야의 구조(救助)예언들(다윗 언약에 입각한 하나님의 계약적 보호)을 믿지 못하는 다윗 집의 영적 파탄과 그로 인한 군사적-정치적 재난을 다룬다. 7장은 국가정책 및 정치적 맥락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믿지 못하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큰 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이 장의 요지는 “만일 다윗의 집이 하나님의 구조(救助) 간섭을 믿지 못하면 유다가 서지 못할 것이다”라고 요약될 수 있다. 만일 유다가 하나님의 구조 예언을 믿음으로 영접하지 않고 다른 거짓 피난처와 보호처를 향하여 눈을 돌린다면 하나님의 구조예언은 심판으로 돌변할 것이다. 8장은 다윗 집이 하나님의 구원약속을 믿지 못하고 강대국 앗수르를 의지하는 이유와 그것이 가져올 파괴적 결과를 다룬다. 7장에서 암시된 것처럼 임마누엘 구원 예언은 심판예언으로 반전된다.
주전 735-733년 사이에 전개된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동안에 이사야는 사시나무처럼 떠는 아하스 왕에게 신뢰할만한 구원예언들을 선포하나 그는 믿지 못하고 심히 요동한다. 이런 이사야의 확신에 찬 구원예언들(스알야숩과 임마누엘 예언)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집은 다윗 언약(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굳게 믿지 못하고 앗수르의 힘에 호소하려는 유혹에 시달린다. 믿지 못하여 “굳셈”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다. 7:15-25은 14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징조(임마누엘)가 유다에게 파괴적으로 작용할 것을 예언한다. 아하스는 불신앙으로 기울어지고 이사야는 왕의 불신앙과 완악함을 간신히 치료하는 듯이 보이지만 유다 왕실은 다윗 언약에 대한 믿음보다는 힘의 정치(power politics)에 대한 신뢰로 기울어져 간다.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 왕이 가져올 파국적 재난이 15-25절에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7-8장은 불신앙의 파괴적 결과를 세밀하고 고통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7-8장은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의 신앙과 불신앙 사건을 하나의 연결된 사건으로 보고 있다. 결국 다윗 집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 셈이다. 이사야와 그의 세 아들들은 유다를 향한 구원예언의 화신들이자 동시에 유다(다윗 왕조)의 불신앙을 고발하는 증인들이다(8:18).




2. 다윗와 같은 이상왕의 도래에 대한 학수고대(9장; 11장)
이사야서 1-66장 전체 주제 중 하나가 야웨 하나님의 왕적 통치와 그의 왕국이다. 이사야의 심판신학과 구원신학은 만군의 야웨 하나님의 왕적 통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절대적으로 높은 보좌에 앉아계신 만군의 하나님 야웨를 왕으로 대면한 이사야의 소명묵시는 그의 메시야 예언(9, 11, 32-33장)의 신학적 배경을 제공한다. 이사야서에 의하면 만군의 하나님 야웨의 왕국이 세계 속에 건설될 때 한 인간 대리자에 의하여 위임통치된다.
이사야 1-39장에서 현저하게 부각되는 야웨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있는 영적 긴장은 메시야 예언들에서 해소된다. 메시야 예언들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의 결단/계획은 이미 집행이 완료된 것으로 전제되며 그것은 하나님의 미래적 구원의지로 치환된다. 이런 점에서 다윗 왕같은 이상왕의 도래는 하나님 결단의 신학의 변증법적 합(合)이자 절정이다. 결국 알고 보면 메시야 예언들에서 묘사되는 이상사회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추구해야 할 대안-대조 공동체로 제시되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메시야 예언들은 현실비판적 및 현실초극적 기능을 한다.
8:19-23(한글개역 8:19-22)은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의 전후에 북이스라엘 왕국을 지배한 정치적 위기와 영적 곤경을 보여준다. 앗수르는 시리아-에브라임 동맹군을 괴멸시키는 과정에서 시리아를 멸망시키고 북왕국 이스라엘의 북쪽 지역을 완전히 병합하여 앗수르의 속주로 편입시킨다. 9장은 앗수르의 병탄(倂呑)으로 흑암에 빠진 스불론, 납달리(갈릴리) 지파의 구원자로서 한 이상적인 다윗 계통의 왕이 등극하는 장면을 소개한다. 10장은 자신에게 맡겨진 위임사명의 한계를 넘어서 오만한 세계제국으로 변질된 앗수르 제국에 대한 심판예언을 제시하고 11장은 앗수르 제국의 몰락이 남기고 그 빈자리에 하나님의 대안적 세계국가, 메시야의 평화의 왕국을 제시한다. 11장도 BC 732-722년 동안의 국제적 국내적 정세를 배경으로 선포된 이사야의 메시야 예언시다. 9장의 메시야 왕국의 우주적-국제적 차원이 보다 더 부각된다. 9:1-7의 속편인 11:1-9은 이상적인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만든 평화의 왕국을 한층 더 고조된 종말론적인 정조(情操)로 그리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앗수르 제국의 대안, 대조, 대항 공동체인 새 다윗 제국의 진수를 만난다.


3. 북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1: 8-9; 4:2-6; 6: 9-13; 7:3-4; 10:20-23; 28:5-6; 30:17)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을 다루는 구절들은 내용상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 BC 732-722/1년의 이스라엘 멸망기의 재난(전쟁 및 앗수르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은 북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그 미래에 대하여 언급하는 본문들이다(7장 3-4절; 10장 20-23절; 28장 5-6절). 둘째, 남유다의 “남은 자”에 대하여 말하는 본문이다(1장 8-9절과 30장 17절). 셋째, 남유다 및 북이스라엘의 포괄적인 남은 자와 그 미래를 언급하는 본문들이다(6장 11-13절; 4장 2-6절). 남은 자 사상은 시적인 암시의 형태로 이사야의 소명묵시에서 이미 발견되고 있으나 그의 예언자적 목회활동의 연대기적 순서로 보면, 북이스라엘의 멸망이 남은 자 사상을 통한 희망적 미래예언을 촉발시킨 첫 역사적-신학적 계기가 되었다. 주전 732-722/1년이 북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에 대한 예언의 역사적 시점이라고 볼 수 있고 주전 701년 산헤립의 유다침략과 거의 전국토의 초토화는 남유다의 “남은 자” 및 남북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의 연합에 대한 예언의 배경을 이룬다.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은 그의 긴 예언활동 동안에 그 자체 안에서 하나의 발전을 겪는다. 이사야의 남은 자에 대한 언급이 처음에는 그다지 깊은 신학적 차원을 갖지 않으나(처음에는 군사적 의미만 부각) 시간이 갈수록 신학적 사상/개념으로 발전해 간다. 이사야의 소명묵시(6:9-13)에서 묘사된 “거룩한 씨” 예언은 좀 더 뒤에 발전된 북이스라엘 및 남유다의 남은 자들의 미래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자적인 전망의 출발점이 된다. 이 거룩한 씨의 보존에 대한 가느다란 희망의 말씀이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4:2-6; 28:5-6; 10:20-23)-그것이 북이스라엘의 남은 자건 남유다의 남은 자건 상관없이-에 대한 예언적 전망으로 발전되었다. 북이스라엘 및 남유다의 남은 자들은 거룩한 씨로 보존되어 다음 세대의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인간편의 동반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절대적 공허(空虛)와 무(無)만을 남긴 것은 아니며 ‘거룩한 남은 씨’를 남겨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유다)의 미래는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의 불길을 통과한 “거룩해진 씨”들에게 맡겨진다(1:9-20; 30:17). 심판의 불길을 통과한 하나님의 거룩한 씨들, 남은 자들의 미래는 하나님의 꺼지지 않는 구원의 열심(salvific zeal)에 의하여 향도(嚮導)될 것이다(9:6; 37:32).


결론적으로 이사야의 남은 자 신학은 아래와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이사야의 남은 자 신학은 하나님 결단의 신학(심판신학) 속에 한 저류처럼 흐르는 변증법적인 구원신학(재난의 필연성을 인정하는 신학)이다. 둘째, 이사야의 남은 자 신학에 의하여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정통 다윗-솔로몬 제국에서 임의로 분열해 간 집단의 지도층의 멸망으로 북이스라엘 남은 백성들은 다시 다윗의 장막으로 돌아올 수 있고 돌아와야 한다(암 9:11-14).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은 남유다에 의한 북이스라엘의 흡수병합 통일이 아니라 다윗 제국적 이상과 깃발 아래 일어나 한층 더 고양된 영적 통일의 기회를 제공한다. 북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원래 이스라엘 백성의 합법적인 상속자로 남아 있으려면 야웨 하나님께로, 다윗제국의 합법적 계승자인 유다 왕과 그의 나라로 돌아와야 한다. 셋째, 남은 자 사상은 하나님의 약속의 항속적인 신실성과 유효성을 입증한다.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통해서라도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의 진실성을 입증하고 싶어하신다. 남은 자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족장상속의 합법적인 상속자들이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정치적 멸망은 하나님의 왕적 통치(메시야의 대리통치)아래로의 복속을 의미한다. 넷째, 북이스라엘 남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공동체의 성장과 번성으로 구현되고 예루살렘과 유다의 “살아 남겨진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복된 기대는 거룩한 공동체 형성과 거룩한 삶의 추구로 표현된다.


4. 앗수르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The Plan of Yahweh for Assyria)
(10:5-19; 14:24-27; 30:27-33; 13-14장; 참조. 15-23장)
6장에서 이사야는 야웨를 왕으로 묘사할 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 가득찬 그의 영광을 인정하고 확증하며 온 세상에 대하여 야웨가 절대주권을 행사하는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다. 야웨는 당신의 절대주권적 통치를 일련의 결단과 계획을 통해 관철시킨다. 이사야는 자신의 소명묵시에서 당신의 포도원 울타리를 허시고 짐승들과 도적떼들에게 유린당하도록 내버려두실 결정을 내리는 야웨의 결단을 통고받는다(5:5-6; 6:11-13). 이 야웨의 결단/계획이 이사야서 전체(좁게는 1-39장, 넓게는 1-66장)의 구속사(救贖史)를 추진시키는 중심동력이다. 야웨의 계획이 성취되는 과정에는 많은 인간 대리자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앗수르 제국은 야웨의 계획이 전개되고 성취되는 데 중심적 역할을 차지한다. 앗수르는 야웨의 계획을 성취시키는 데 두 가지 역할을 감당한다. 그 하나는 유다/이스라엘 및 전 고대 근동(애굽-시리아-페니키아-팔레스틴) 일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제국주의적 야심과 오만으로 야웨를 자극하여 당신의 절대주권적 위엄을 스스로 보호하도록 격동한다. 앗수르의 오만에 격동된 야웨는 이제 돌이켜 앗수르의 오만을 단죄(斷罪)하며 심각하게 파괴당하고 굴욕을 당한 시온을 신원(伸寃)하고 구조(救助)하기 위하여 간섭한다. 이처럼 앗수르를 향한 야웨의 계획은 야웨가 내린 결단/계획의 확고부동성(determinacy)과 탄력성을 예해(例解)한다.
이사야의 예언활동은 BC 740-701년에 걸쳐서 일어났는데 이 기간은 팔레스틴 남부지역까지 진출한 앗수르의 제국주의적인 침략과 확장이 가장 왕성하던 시기였다. 팔레스틴 남부 지경까지 진출한 앗수르의 제국주의적인 정복의지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초래하였고(10:6-7; cf. 9:8-21; 5:24-25) 남유다의 급격한 축소(1:4-9)를 가져왔다(cf. 1:8). 그러므로 이사야의 중심 메시지는 유다와 인근 국가들을 둘러싸고 있던 앗수르의 제국주의적인 정복정책과 이에 맞선 시리아-페니키아-팔레스틴(-애굽-구스) 일대의 국가들의 반응에 대한 신학적 통찰에서 배태되었다. 이사야의 예언활동의 목적 중 하나는 이스라엘과 유다 두 자매 왕국에게 왜 이러한 참담한 정치적인 파멸이 초래되었는가에 대한 하나의 신학적 근거(theological rationale)를 제공하는 것이었다.34)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적어도 세 가지 국제정치적인 위기들-시리아-에브라임 위기(8:5-8; 17:1-11; 8:1-4; 7:1-9, 10-16; cf. 왕하 16:7), 앗수르의 사르곤 II세에게 반역한 아스돗(Ashdod)의 반(反)앗수르 봉기(14:28-32; 18:1-7; 19:1-15; cf. 사 20장[ANET, 286, lines 90-112)]), 히스기야의 반(反)앗수르 봉기(30:1-7; 31:1-3; 39:1-8)-이 이사야로 하여금 그것들에 대한 분명한 입장 표명을 촉구하였으며, 더 나아가서 그것들은 야웨의 목적이라는 보다 더 큰 창조의 틀 안에서 앗수르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규정한 그의 정치적인 예언들의 역사적-신학적 배경을 형성하였다. 이스라엘 및 유다와 앗수르의 군사적 혹은 정치적 접촉은 BC 9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다(Omri, Ahab, 그리고 Jehu). BC 8세기 중반부터 앗수르는 지중해와 인접한 고대 근동 지역(Levant)에 거대한 군사적 위협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BC 747-725년).


이사야 1-39장에는 앗수르의 역할과 위치에 관한 두 유형의 본문들이 서로 병치되어 있다. 첫째, 앗수르의 등장과 그것의 군사적인 업적들과 백전불패적(百戰不敗的) 기상과 위용을 앗수르를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불러 쓰시려는 하나님의 신적 위임의 빛 하에서 다루는 본문들이다(5:26-30; 7:1-16; 8:1-4; 17:1-11 [아람과 북이스라엘]; 8:5-8; 32:9-14; 28:18-22; 29:1-4 [유다]; 14:28-32 [블레셋]; 15:1ff. [모압]; 23:6-14 [두로]; 20장(18장 참조) [애굽/구스]). 다음으로 우리는 앗수르의 오만을 단죄하고 그것의 필연적 몰락과 파멸을 강조하는 본문들을 만난다(9:1-6; 14:24-27; 10:5-27; 10:28-34; 17:12-14; 29:5-8; 30:27-33; 31:5-9; 33:1ff., 10-19, 37-35; 37:6-7, 22-29; cf. 18:4-6).
앗수르를 향한 야웨의 계획을 다루는 본문들을 좀 더 자세히 읽어보면, 그것이 시간의 경과와 사태의 진전에 따라 변증법적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식별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앗수르 제국이 야웨의 심판을 집행하는 인간적인 대리자가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야웨께서 처음에는 앗수르를 당신의 분한의 몽둥이와 진노의 막대기로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앗수르를 향하여 위협적인 예언들을 선포하시는 기준들은 무엇인가? 10:5-15, 14:24-27, 30:27-33, 그리고 13-14장이 이런 질문들을 염두에 두고 앗수르를 향한 야웨의 계획의 변증법적인 전환35) 을 깊이 있게 다루는 단락들이다. 이 구절들은 야웨의 계획의 전개 도중에 앗수르가 맡은 역할의 수행과정에서 하나님의 행위와 앗수르 제국의 대리행위 사이에 개재하는 간격을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며 어떤 점에서 앗수르 제국이 하나님의 세계심판의 유효한 대리자로 기능하며 또 어떤 점에서 자기파멸적 세계제국으로 역기능하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5. 시온을 향한 야웨의 계획(28-29장; 36-37장; 참조. 24-27장; 34-35장)
앗수르를 향한 야웨의 계획이 변증법적인 발전을 거치듯이 시온을 향한 야웨의 계획도 변증법적인 발전을 거친다. 이사야 28:14-22과 29:1-8은 이사야의 중심적 신학개념인 야웨의 계획/결단(에차/야아츠)이 이사야의 전체 선포 속에서 어떤 변증적 기능을 수행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28:14-22은 “앗수르 위기(주전 705-701년)” 동안에 이사야의 하나님 결단의 신학이 어떤 신학적-수사학적 기능을 수행하는지를 자세히 보여준다.
이사야 28:14-22은 유다의 자가추진적인 구원계획과 하나님의 대항계획의 충돌을 다룬다. 이 단락은 유다의 반(反)앗수르 봉기(BC 705-701년)에 대한 이사야의 비판적 예언을 담고 있다. 야웨를 우주의 왕으로 조우(遭遇)하였던 이사야는 시온을 향한 야웨의 에차(결단/계획)에 대한 직접적인 앎을 바탕으로 유다 왕실의 현실정치적인 결정들에 영향을 미쳐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그의 소명묵시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현실정치적 적합성에 대한 깊은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의 소명 묵시가 실제적이었던 만큼 하나님의 백성들은 현실정치적인 결정들을 내릴 때에 하나님의 결단/계획을 식별하고 그것과 조응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도 그만큼 실제적이었다. 이사야는 그의 사역의 말기에 당대의 시대정신, 즉 히스기야식 민족주의(대하 29-32장)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것이다.


요약컨대, 시온을 향한 야웨의 결단/계획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들은 두 가지 목적들에 봉사한다. 첫째, 그것들은 “앗수르 위기”를 외국과의 동맹 및 조약정책을 통하여 회피해 보려는 예루살렘의 현실정치가들을 논박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유다 왕실의 지혜자들과의 이사야의 논쟁은 아하스 시대에서보다 히스기야 치하의 그의 사역에서 보다 더 명백하게 나타난다. 둘째, 이사야의 하나님의 결단의 신학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금 시온을 공평과 정의 위에 세우시려는 야웨의 건설적인 계획에 참여하도록 초청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여기서 “믿는 자들”은 야웨 하나님의 심판의 필연성을 인정하고 그 손길을 알아차린 사람들이다. 결국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결단/계획은 앗수르의 심판대행과 유다의 마음을 완매하게 만든 이사야의 강퍅케 하는 메시지에 의하여 실행되었다. 궁극적으로 야웨의 기이한 일과 이상한 행동은 유다로 하여금 그 자신의 도덕적, 윤리적, 그리고 영적 파탄에 대한 고통스러운 인식에 이르게 하였다.
앗수르의 주전 701년 유다 침략의 보다 더 근원적인 신학적 이유는 유다 사회의 공평과 정의의 파괴였다. 그러나 그것의 보다 당면한 원인, 즉 역사적인 원인은, 산헤립에 대한 히스기야의 선행적(先行的) 반역이었다(주전 705년). 이러한 능동적인 반앗수르 반역행위는 야웨께서 앗수르의 멍에를 유다로부터 벗기시며 그것을 친히 부수시겠다는 하나님의 또 다른 결단/계획(14:24-27)에 대한 믿음의 결여에서 발생되었다. 그러한 믿음의 결핍은 히스기야로 하여금 오히려 앗수르에 대한 득의만만한 봉기를 주도하는 자충수를 두도록 유도하였다. 역설적이게도 유다에 대한 야웨의 원래의 심판 결단/계획은 야웨의 구원의 간섭에 대한 믿음의 결핍에 의하여 촉진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29:1-8은 하나님의 결단/계획이 이사야의 선포 속에 얼마나 구체적으로 착근(着根)되어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 단락 또한 특별히 하나님 결단의 신학의 변증법적 전개과정을 자세히 보여준다. 그것은 소위 “앗수르 단락”이라고 불리는 이사야 28-33장에 속해 있다. 이 장들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앗수르의 심판도구로서의 역할을 긍정하는 예언들과, 시온을 신원하실 야웨 하나님의 구조(救助)활동을 예기케 하는 예언들이 병립하고 있다. 왕정주의자요 시온신학(8:18; 14:24-27; 28:16-17)의 신봉자인 이사야는 29:1-8에서 시온에 대한 야웨 하나님의 변증법적인 결단을 선포한다. 이사야는 시온 자체의 존립을 의문시할 만큼 파괴적일 정도로 비판적이지는 않았다. 이사야 7-8장이 다윗 왕조에 대한 야웨 자신의 계약적 투신을 강조하였다면, 본문은 시온에 대한 야웨의 계약적 투신을 강조한다(시 46-48; 시 78; 시 89; 시 132). 앗수르 자신이 자신에게 맡겨진 제한적 위임사항(10:5-6)을 넘어 자신의 제국주의적인 야욕을 채우려고 하자(10:7-19), 하나님께서는 시온의 적들로부터 기꺼이 그녀를 보호하시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재난의 예고로부터 비매개적(非媒介的)인 구원으로의 돌연스러운 전환을 부분적으로 설명해 준다(29:1-4, 5-8; 30:1-5, 8-9; 31:1-3, 4-9). 어떤 인간적 공로도 야웨의 구원을 매개할 수 없다. 위협받는 시온/굴욕당한 시온/다시 구조(救助)되는 시온의 이 도식은 하나님의 구원의 초월적 기원을 강조한다.
요약컨대 이사야 28:14-22와 더불어 29:1-8은 유다의 반(反)앗수르 정책에 대한 심오한 신학적 반제(反題, theological antithesis)를 제시하며, 주전 701년의 산헤립의 유다 침공의 신학적 준거와 그 파괴적인 결과를 생생한 시적인 언어로 되울려 주고 있다. 히스기야의 반(反)앗수르 저항정책을 긍정적으로 회고하는 후대의 열왕기서(주전 6세기)나 역대기서(주전 5세기)는 히스기야의 민족주의적인(?) 치적들과 그것들 후에 발생한 산헤립의 유다 침공이라는 재난과의 인과관계를 효과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 파국적 재난을 언급하는 열왕기하 18:7-37은 “여호와께 연합하여 여호와를 떠나지 않았던” 그 경건한 히스기야 왕(6-7절)에게 “왜 산헤립의 유다 침략이라는 대파국적 위기가 몰아닥쳤는지?”에 대하여 어떤 신학적인 설명도 제시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역대기하 32:1도 산헤립의 유다 침략과 이에 맞선 히스기야의 영웅적 신앙 행위를 아주 모순된 해설을 모두(冒頭)로 하여 얼버무리고 있다. 하지만, 이사야서는 경건한 왕 히스기야의 화려한 업적들과 주전 701년의 ‘앗수르 위기’라는 재난의 신학적 인과관계를 규명하고 있다. 28:14-22와 29:1-8은 이사야가 처음부터 외쳐온 “하나님의 결단/계획”의 절정단계의 성취를 다루고 있다. 이사야 신학 중심 주제인 “하나님의 결단/계획”의 실체는 산헤립의 유다 침략을 통해 명백하게 드러난 셈이다.




6. 공평과 정의 위에 새롭게 시온을 건설하시는 하나님(32-33장)
32-33장은 앗수르 대범람이 하나님 백성들에게 남기고 간 신학적 효과가 무엇인가를 탐구한다. 앗수르 대범람은 당신의 백성들에 대한 인간 왕들의 폭압통치를 종식시키고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는 메시야 왕국의 도래를 위한 준비단계였음이 드러난다. 32장은 메시야적 왕과 그의 이상사회를 다루고 33장은 앗수르 제국의 대안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친정체제(신정체제)를 다룬다. 33장은 32장보다 더욱 분명하게 앗수르 대범람은 시온의 죄인들을 척결한 하나님의 정결작업이었음을 증거한다. 시온의 안전보장은 시온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적 현존이다. 하나님의 인격적 현존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시온 거민들의 도덕적 신앙적 자질에 의하여 담보된다. 결국 주전 701년 앗수르 대범람은 시온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다시 한번 심화된 인식을 가져다주었고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새로운 체험이 공평과 정의로 시온을 건설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계시한 사건임을 깨닫게 하였다.
32:1-20은 5:1-30에서 묘사되는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에 대하여 대항적, 대조적, 대안적 공동체를 제시한다. 비록 현실은 예루살렘의 헛된 믿음과 자만심으로 들뜬 부녀들(사회지배층과 권력엘리트)의 영적인 자아도취(알코올 도취-3장)와 사회적/공동체적 일탈행위에 의하여 아주 암울한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불과 거룩한 화염을 맛보는 앗수르 대재난을 거친 후에는 다시 수확할 수 없었던 포도원은 하나님의 번영을 누리는 포도원이 될 것이다. 앗수르 대재난의 한 가지 목적(9-14절)은 위로부터 하나님의 회복과 소생의 영(바람)이 폐허가 되어버린 땅위에 부어질 때 이뤄진다(15절). 하나님의 바람은 의를 가져오고 의는 번영과 풍요를 가져오고 의는 국가적 공동체적 안식과 안전보장을 가져온다. 앗수르 대재난의 근인(根因)은 바로 공평과 정의가 붕괴된 유다사회 자체에 있었다. 메시야적 공무원들과 메시야적 시민들과 메시야적 왕이 함께 건설하는 공동체는 공평과 정의로 유지되는 사회다. 결국 32:1-20는 앗수르와의 군사적 대결을 위하여 엄청난 국력을 낭비한 비메시야적-반메시야적 당시 유다 왕조와 유다 사회에 대한 예언자적인 비판이요 초극이었다. 앗수르 대재난을 되돌아보면서, 그리고 참다운 안전보장과 쉼과, 참다운 평화와 번영의 길이 무엇이었을까를 되돌아보면서 이사야는 32-33장의 하나님의 친정통치 및 메시야에 의한 위임통치를 노래하고 있다. 32장이 앗수르 위기를 겪기 전의 이스라엘과 유다 사회와 대조되는 사회를 노래한다면, 33장의 메시야적 공동체는 앗수르의 압제적 통치제제와 대조된다. 33장은 보다 더 직설적으로 앗수르 대재난이 유다 사회에 남겨둔 신학적 충격이 무엇인가를 하나님 나라라는 관점에서 반추하고 있다.
33장은 은혜를 구하는 기도와 시온을 극적으로 구조하시는 왕이신 야웨 하나님을 묘사하는 1-16절과 시온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의 통치의 결과를 묘사하는 17-24절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장의 주요 신학적 논지는 첫째, 시온의 죄인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야웨께서 앗수르 제국이라는 잔인무도한 침략자와 정복자를 급파하셨다는 것과, 둘째, 야웨의 심부름꾼인 침략군이 자신의 위임을 초과하여 잔인한 정복자가 되어 이제 야웨의 대적의 대적이 되어버렸다는 것과 셋째, 국제적 조약을 깨드리고 증인들을 멸시하고 사람에 대하여 전혀 자비심이 없는 잔인무도한 대적에 대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반격(反擊)이 반드시 실현되고 그 기습적인 반격 후에 시온은 다시 공평과 정의로 건설된다는 것이다. 결국 앗수르를 통한 유다 심판(시온 정화)과 앗수르 제국 자체의 징벌(심판)을 통하여 야웨께서는 시온의 거주자들이 가져야 할 품성적 자질을 확정하신다. 시온의 죄인들은 야웨와 함께 거하는 삶이 부과하는 무시무시한 영적 긴장을 체득한다(14절). “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


그들은 스스로 대답한다.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이처럼 이사야 33장은 주제적인 측면에서 이사야 1-39장의 절정을 대표한다. 바로 이런 이상사회가 이사야가 말하는 지상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다. 시온에 건설될 공평과 정의의 나라는 내부적으로 아주 자비심과 공평감으로 충만하고 외부적으로 아주 강력한 방위력을 가진 영구적으로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다. 이것이 바로 시온을 향한 야웨의 계획이다.


7. 대속사상(42, 49, 50, 53장)-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고난받는 종의 노래
학자들은(주석가들)은 42:1-9, 49:1-7(6), 50:4-11, 그리고 52:13-53:12를 흔히 “종의 노래”(servant songs)이라고 부른다. 각각의 본문을 전후 맥락에서 분리시켜 이해하기보다는 전후 맥락 안에 놓고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42:1-9은 야웨의 기뻐하심을 입은 종, 야웨의 뜻을 세상에 펼치는 종을 소개한다. 49:1-7과 50:4-11은 야웨의 뜻을 펼치기 위하여 스스로 고난을 자취하는 야웨의 특별한 종을 소개한다. 이사야 52:13-53:12은 야웨의 기뻐하심을 입은 종이 나머지 이스라엘 동포들뿐만 아니라 열방 백성들과 열왕들까지 놀라게 하면서 그들에게까지 야웨의 참 유일하신 하나님되심과 야웨의 구원을 선포하는 종을 소개한다. 일반적으로 40-55장 안에서 야웨의 ‘종’은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야곱(포로살이를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들: 자기 죄로 인하여 징벌을 받은 종)을 가리키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열왕들과 열국들을 위하여 대속적 고난을 받은 한 특별한 종(집단, 개인)을 가리킨다. 대속적인 고난 사상을 담은 이사야 52:13-53:12에 대해서는 고대 근동의 어떤 병행 본문들(parallel texts)도 발견되지 못하였다(I. Engnell 좌절)(Wheeler Robinson의 집단인격설 corporate personality). 본문은 그래서 53:1처럼 참으로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전파되지 않은 기이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본문은 바벨론 포로살이에 대한 가장 심오한 해석을 담고 있다. 바벨론 포로살이 1세대에게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공변된 심판이자 징벌이었다. 그러나 포로살이 2세대들에게는 이런 설명만 가지고는 안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포로살이 2세대들에게는 연좌법적인 논리만 아니라면 그들에게 바벨론 포로살이는 애매한 고난이었다. 여기서 바벨론 포로살이는 죄악에 대한 징벌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신학적 착상이 가능해 졌을 것이다. 종합적으로 볼 때 바벨론 포로살이는 예상하지 못한 신학적 자산을 남겼는데 그 중 네 가지가 대표적인 신학적 자산이었다.
첫째, 하나님은 세계 열방의 하나님이시며 온 세계의 주와 왕이시다라는 깨달음이다. 둘째로 이스라엘은 비특권화 세속화의 경험을 강요당하면서(열국 가운데 집어던져짐으로써, 피투적 존재[Geworfenheit]가 됨으로써) 다시금 -실상 한 차원 더 깊게-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깨달았다. 선택과 계약신학의 진면목을 세계 한 복판에 내동댕이쳐지는 경험을 함으로써 실제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세째로,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살이는 야웨의 종의 대속적인 고난(세계 열방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는 하는 데 필요한 고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데 필요한 대속적 고난)을 통하여 구속사적 가치를 가지는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야웨의 종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의 애매한 경악스러운 굴욕적 고난과 곤욕과 그의 뒤이은 회복과 존귀케 된 사건은 열방들과 열왕들을 소스라쳐 놀라게 하며 이스라엘의 나머지 백성들의 양심을 찌르는 그렇게 함으로써 죄책 고백과 속죄의 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사야 53장은 바벨론 포로생활에 대한 가장 심오한 해석을 제시한다. 이 대속적 고난 사상 앞에서는 앗수르나 바벨론 제국이 이스라엘을 침탈하고 압제하고 박해한 것은 공연히/이유없이 가한 폭력이었음이 드러난다. 이러한 대속사상은 앗수르의 유배나 바벨론 유배가 이스라엘/유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에 대한 응징이었다고 해석하는 1-39장의 입장에 비하여 분명히 진전된 신학적 입장이다. 아마도 이사야의 후계자들(자신들이 이사야의 이름 아래 묻혀도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신학적 기여는 바로 대속적 고난 사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살이의 굴욕적 경험과 70년만의 포로귀환이라는 구원대사를 겪으면서 야웨 하나님만이 온 세계 열방의 유일무이한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우상들(바벨론의 신들[벨과 느보]은 우상들에 불과)은 야웨 하나님의 적수가 전혀 못되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편단심의 충성심을 요구할 자격과 권리가 전혀 없음을 각성하게 되었다.
우리는 53장의 대속사상 잘 이해하기 위하여 소위 제 2이사야(40-55장) 안에서 (1)우선 야웨와 이스라엘의 관계(이스라엘을 종 혹은 증인이라고 규정하는 본문)를 언급하는 병행 본문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 그 후에 야웨의 특별한 종, 기뻐하심을 입은 종의 사역과 정체성에 대하여 말할 것이다(행 8장 이디오피아의 여왕 간다게의 재무장관 내시의 고뇌-이사야 53장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냐?). (3) 마지막으로 우리는 본문을 자신의 메시야 사역의 기본강령으로 삼았던 나사렛 예수가 구현한 고난받는 종의 사역을 살펴 볼 것이다.


1. 먼저 41:8-9은 이스라엘/야곱을 야웨의 “택한 종”이라고 규정한다.
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9.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야웨는 당신의 택한 받은 종을 땅 모퉁에서부터 부르며 당신의 선택 자체를 무효화하지 않는다. 과연 바벨론 포로살이 70년, 이방 땅에서 보낸 70년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야웨와의 계약관계를 무효화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본문은 단연코 “아니오”라고 말한다. 포로살이를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야웨 하나님의 종이다.


2. 42:1-7은 이스라엘/야곱을 야웨 하나님의 종이라는 일반적 관점에서 한 단계 더 진전된 관계를 말한다.
42: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리라. 세상에 공의를 세울 때까지.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5.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7.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


본문은 야웨의 특별한 종(개인)을 말한다. 그래서 앞의 본문과는 분명히 차이를 가진다. 그러나 앞의 본문과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종 야곱과 야웨의 기뻐하심을 입은 종 둘 다가 “하나님의 붙드심”을 받고 “택함을” 받는다는 점이다. 또한 본문의 야웨의 기뻐하심을 입은 종은 고난받는 종은 아니다. 오히려 9, 11장의 다윗 왕적인 이상왕에 근접하는 인물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들에게 공의를 베풀며 세상에 공의를 세우는 왕적인 존재다(royal figure). 그러면서 그는 백성들과 하나님을 중개하는 언약의 머리(다윗왕적인 역할)임과 동시에 이방의 빛이다(1, 4, 6절). 요약하자면, 42:1-7의 야웨의 종은 왕적인 존재로서 특정한 개인을 가리키는 것처럼(다윗왕적 이상왕) 보인다. 그의 주요 사명은 이방/온 세상에 공의를 세우는 것으로서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자유케 하는 사역을 감당한다(이사야 61:1-4). 그러나 이 왕적 인물로서의 야웨의 종은 고난받는 종으로서 부각되지는 않는다.


3. 42:18-19은 아주 부정적인 맥락에서 야웨의 종(소경, 귀머거리)을 언급한다(6:9-10의 이스라엘 백성=바벨론 포로살이를 겪지 않으면 눈을 뜰 수 없는 몽매한 백성들).
18.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19.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 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소경이겠느냐


본문에서는 야웨의 종이 소경들이며 귀머거리다. 그들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치 아니하며 귀는 밝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20절). 그들은 아직도 6:9-10가 선언한 영적 완매상태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야웨의 종은 야웨의 기뻐하심을 입은 종도 있지만 아직도 영적 몽매상태에 갇혀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하는 종도 있다. 이 소경과 귀머거리 같은 종들은 야웨의 고난받는 종의 굴욕적 고난을 보고 그의 종국적인 회복과 승귀를 목격하면서 나중에 참회하는 회중의 일부가 된다(53장의 “우리”)




4. 43:8-10, 43:14-21, 44:1-8, 45:4-8, 그리고 45:20-22은 이스라엘과 고레스가 야웨 하나님이 온 세계의 유일무이한 하나님임을 선포하는 증인으로 자리매김됨을 보여준다.
43:8-10도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소경이요 귀머거리로 지칭되지만 결국 열방들과 민족들 앞에서 자신들 안에 일어난 엄청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대사를 간증할 증인/종으로 소환된다. 귀머거리요 소경인 이스라엘 백성(우물안 개구리)을 세계 한 복판에 집어던져 넣음으로써(민족들과 열방들에게 노출시킴으로써) 영적인 눈과 귀를 열어준다.


8.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을 이끌어 내라 9.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은들 그들 중에 누가 능히 이 일을 고하며 이전 일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그들로 증인을 세워서 자기의 옳음을 나타내어 듣는 자들로 옳다 말하게 하라 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그러면 이스라엘은 무슨 진실을 증거하여할 증인이요 종으로 부름받았는가? 그들은 바벨론 포로살이의 창발자도 아니며 그것을 끝내어 고토로 돌아가게 하는 구원 대사의 주체도 하나님임을 알고 인정하고 믿으며 오로지 야웨 하나님만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선포하는 일에 부름받았다.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12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43:10b-12). 세계 열방들과 민족들은 아무리 많이 모여도 이 세계사의 중심사건들(제국의 흥망성쇠)을 창조하시며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열방들은 자신들의 증인들을 세워 자신이 믿는 바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 아무도(민족들과 열방들이 세운 어떤 증인들도)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가서 70년간 포로살이를 하고 그 오만한 세계제국이 멸망하고 다른 제국의 건설자(고레스)가 등장하고 그로 인하여 바벨론에 의하여 유배당한 이스라엘이 다시 고토로 귀환하게 된 이런 사건들의 시종경과를 의미있게 그리고 설득력있게 설명하지 못한다. 야웨 하나님이 세운 증인과 종만이 이런 세계사적인 변혁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으며 이 세계사적 흥망성쇠의 주도자가 야웨 하나님을 강력하게 증거할 수 있다(Walter Brueggemann의 옹호/증거 이론[advocacy theory],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야웨의 종/증인은 그의 증거를 통하여 오로지 야웨 하나님만이 세계와 역사의 주관자요 왕임을 증거해야 한다(monotheistic faith).
이와 관련하여 43:14-21은 이스라엘(바벨론 포로들은)은 자신들의 정복자요 압제자인 바벨론의 몰락을 목격하면서, 야웨 하나님이 그들의 거룩하신 자요 창조자요 왕임을 깨닫도록 기대된다. 동시에 자신들이 여전히 야웨의 택함받은 백성이요 야웨의 언약 백성임을 깨닫게 된다.


14.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으로 자기들의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15.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 왕이니라.....20.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43:14-15)


또한 44:1-8도 바벨론 포로살이로부터의 해방과 고토 귀환과 포로귀환 공동체의 번성과 성장경험이 이스라엘이 야웨의 종임을 각인시켰고-야웨만이 그들의 왕, 나아가서 온 세계의 왕임을 각인시켰고- 그러한 각인(계약관계에 대한 확증된 신념)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야웨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유일신앙적 확신을 배태하였음을 보여준다(44:21).


1.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2.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5. 혹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혹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칭할 것이며 혹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칭호하리라 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8. 너희는 두려워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느냐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이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알지 못하노라(44:1-8).




45:4-8에 의하면 고레스를 일으켜 세계제국의 건설자요 정복자가 되게 함으로써 야웨 하나님 자신이 유일하신 하나님을 온 세계에 선포하신다. 고레스를 일으켜 바벨론 제국을 몰락시킴으로써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야웨 밖에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온 세상 백성들로 알게 하실 것이다.


4.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고레스)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찌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5.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찌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6.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참조 45:12-13).


45:20-22도 예언과 성취도식을 통하여 야웨 하나님이 세계 유일의 절대적인 신임을 증명하신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덧붙여진 것은 야웨 하나님이 세계 열방에 의하여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45:21). 공의를 통한 이스라엘/만방 구원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하여 세상 구원을 말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을 받기 위한 어떤 도덕적 윤리적 자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의 신적 자비와 친절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신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을 앙망하기만 하면 된다. 마침내 세상에 공의를 베풀고 공의를 실행함으로써 하나님은 세계 열방으로부터 경배되고 신앙되어질 하나님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래서 그는 45:22에서 열방 백성들을 향하여 자신을 믿고 구원을 받도록 초청한다:


“22.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23.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 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 24. 어떤 자의 내게 대한 말에 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은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를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마는 25.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 하셨느니라.”


5. 49:1-7, 50:4-11은 야웨의 특별한 종, 고난받는 종에 대하여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야웨의 종은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지칭하면서(49:1-5)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돌아오게 하고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킬 특별한 종(49:6-7; 50:4-11)을 가리킨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 두 본문들에서는 “야웨의 종”이 고난을 겪는다는 것이다(49:7; 50:6-9). 결국 이 두 본문들에 의하면 “야웨의 특별한 종”(고난받는 종)은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 나머지 이스라엘 동포들을 위하여 특별히 고난과 굴욕적인 압제를 당한 개인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야웨의 특별한 종, 고난당한 종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열방들, 섬들, 땅끝의 사람들을 다 포괄하는 구원이다.


49:1.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2.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3.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5.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다시 야곱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모이게 하시려고 나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자기 종을 삼으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6.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7.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너를 보고 열왕이 일어서며 방백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너를 택한바 신실한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53장과 유사)




야웨는 당신의 종이 이스라엘 백성에 의하여 어떻게 배척당할 것인가와 또 어떤 방식으로 이방나라 왕들과 백성들에게 빛이 될 것인가를 묘사한다.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들은 야웨의 종을 통하여 야웨께 돌아올 것이다(49:1-26)
백성에게 미움을 당하는 자, 관원에게 종이 된 자가 열왕들과 방백들이 야웨 하나님께 경배하도록 이끈다.


50: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줄 아노라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 나와 함께 설찌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가까이 나아올찌어다 9.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뇨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에게 먹히리라 ....11.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며 너희의 피운 횃불 가운데로 들어갈찌어다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슬픔 중에 누우리라.


야웨께서는 당신의 종이 배척당하는 동안에 시온의 아들딸들이 믿음으로 걸어갈 것을 권고한다(50:1-11). 야웨의 종은 아침마다 완전순종과 완전복종을 배우고 익힌다. 그는 학자처럼 말로 어떻게 곤핍한 사람들을 위로하는지를 배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뺨때리는 사람에게 어떻게 자신의 등과 뺨을 맡기는지를 배운다. 고난의 종은 아침마다 말씀에 귀를 열어놓고 듣는 훈련을 거친 사람들 중에서 선발된다. 그러나 50:4-11에서는 왜 야웨의 종이 고난을 당하는지(뺨때림을 당하고 수염을 뽑히는지 기 이유를 알 수 없다).
야웨의 특별한 종이 고난을 통하여 혹은 고난을 거친 후에 열왕들과 열방 백성들에게 구원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이 두 본문은 이사야 52:12-53:12을 이해하는 데 통찰의 빛을 던져주는 가장 직접적인 맥락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52:13-53:12에서 야웨의 특별한 종은 한편으로는 포로생활을 거친 이스라엘과 동일시되지만(야웨의 선택받은 종), 다른 한편으로는 대다수의 나머지 이스라엘 동포들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의미의 종”인데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의롭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야웨의 구원을 선포하는 종이기 때문이다.


요약
이스라엘/야곱을 야웨의 종이라고 지칭하는 구절들을 살펴본 후 우리는 이스라엘의 “특별한 고난의 종”의 정체성과 사역에 대한 다음과 같은 잠정적이고 예비적인 이해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위의 논의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야웨가 지명한 고난의 종의 굴욕적 낮아짐과 종국적인 승귀와 존귀케 됨(열방들을 두 번씩 경악시킴으로써)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열방에게 구원과 회복(치료)이 임할 것이다(참조 49:1-57:21). 이스라엘과 열방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계획은 그의 특별히 순종하는 종, 고난과 부조리한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는 고난의 종의 순종을 통해서만 실현된다는 것은 세계종교사에 유례가 없는 진실로 성경적인 사상이다. 고난의 종은 비록 대다수의 이스라엘 동포들에게는 거절당하고 배척당하겠지만-그렇게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웨의 고난의 종을 배척한다-열방에게는 하나의 각성과 깨달음, 희망과 구원의 빛이 될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세계만방에 흩어진 당신의 백성들을 끌어 모을 뿐만 아니라 야웨의 특별한 종의 굴욕과 존귀케 됨에 연루된 모든 열방 백성들에게 구원의 소식이 전파될 것이다. “참회하는 이스라엘 동포”인 “우리”를 통하여 열방 백성들은 야웨 하나님만이 오로지 구원과 공의의 주시며 그 분만이 참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사야서의 구조
I. 표제 및 주제적 배열: 이사야 신학의 파노라마적 전개(1장)
II. 유다와 이스라엘의 참혹한 현재와 대비되는 영광스러운 미래(2-4장)
III.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5-6장).
IV.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동안에 선포된 “구조(救助)”예언들(7-12장)
V. 열방들을 심판하시는 만군의 야웨 하나님(13-27장).
VI. 유다와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예언들(28-33장).
VII. 열국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 메시지(34-35장)
VIII. 히스기야-이사야 비망록(36-39장)
IX. 바벨론 포로들에게 주는 위로와 희망(40-55장)
X. 돌아온 귀환 포로들에게 들려주시는 위로와 희망 메시지(56-66장)




주전 7-6세기 포로기 예언자, 예레미야과 에스겔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둘 다 주전 6세기 바벨론 제국에 의한 조국 유다의 멸망을 목격하였거나(예레미야) 멸망 소식을 망명지에서 들었던(에스겔) 사람들이다. 주전 586년에 유다는 하나님의 선택의 상징적인 보증들이었던 성전과 다윗 왕조를 상실하였다. 그것들의 상실은 야웨와 이스라엘 사이에 있어왔다고 믿어졌던 특별한 관계(즉 계약관계)에 대한 인습적인 이해를 뿌리 채 뒤흔들었다. 십자가 사건의 그림자가 공관복음 전체를 그림자 지우듯이, 꼭 마찬가지로 주전 586년 사건의 그림자가 예레미야서 전체와 에스겔서의 후반부를 뒤덮고 있다.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의 예상 독자들은 의심할 바 없이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두 책의 주제는 절망을 초극하는 희망, 하나님이 창조하신 희망이다. 과거는 이미 흘러갔고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오로지 이스라엘이 바라고 희망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의 폐허와 잔해로부터 하나의 새로운 이스라엘이 탄생되어, 전에는 자신들의 죄악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던 그 오래된 하나님의 약속들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엘리야-엘리사 시대가 하나님 백성(이스라엘/유다) 공동체에서 자라기 시작한 암세포를(암의 징후) 발견하는 단계라면, 아모스-호세아-이사야-미가 단계는 암 3기-4기 단계로서 암세포 제거 수술의 필연성을 역설하는 단계다. 예레미야와 에스겔 시대는 암세포 제거수술의 무용성을 인정하고 사망선고를 내리는 단계의 선지자들이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죽음을 넘어 부활과 회복을 내다본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몰락(1, 20, 25, 29, 31-33장)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이 아니면 이제 다시는 유다에게는 희망이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유다 멸망의 필연성을 역설하고 바벨론 유배의 신학적 의의를 강조한다(25장; 29:11-13). 가나안 땅에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를 바에는 차라리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거기서 다시 땅 상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약속의 땅에 살았던 시절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시절이었는지를 회상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정서를 가진 사람들에게 매국노라고 비난을 받았고 상대적으로 바벨론 정복군에게는 선대를 받았다. 이사야가 앗수르라는 대제국에게 군사적 원조도 요청하지 말고 앗수르와 군사적 대결도 벌이지 말라고 충고한 반면에(비동맹 고립정책), 예레미야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민족 전멸을 면하려면 바벨론의 멍에를 지라고 말한다. 전체적으로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유다의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지방 성소 아나돗 지방의 제사장 아비아달 가문의 아들로서 유다의 미래상을 제시함에 있어서 에스겔과 사뭇 다른 미래상을 제시한다. 그는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 계약 공동체, 영 민주주의적 공동체를 미래의 이상 사회로 꿈꾼다(렘 31-33장). 미래사회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는 예레미야 30-33장의 메시지는 예레미야서의 중심축(中心軸)을 형성한다. 그가 소명을 받았을 때(BC 627년)부터 예루살렘에 재난이 임박했을 때(BC 587년)까지 46년 동안 예레미야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그들을 영적인 자기만족감에서 일깨워 내려는 예레미야의 무서운 경고들을 들었던 터였다. 재난이 이제 막 그들을 덮치려고 했을 때 그들의 영적인 자기만족감은 절망으로 바뀌었고 뒤이어 희망의 상실감이 그들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이 절망감과 환멸감에 지배되어 있는 바로 그 백성들에게 예레미야의 희망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치지 않는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돌보셨던 거룩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정당한 분노를 옹호하였던 예레미야는, 나라가 멸망당하자 그 때부터는 그릇된 길로부터 돌이키는 백성을 능히 다시 회복시키실 하나님의 구원의지를 옹호하기 시작하였다. 뿌리를 뽑고 기초를 훼파(毁破)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 다시 건축하시고 심으시는 하나님이시다(1:10).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유다의 미래에 대한 그의 예언자적인 비전 안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나 사독 계열 제사장의 위계질서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실로(Shiloh) 성소의 적통을 이어받은 아비아달 계열의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예레미야는 아비아달을 지방으로 축출한 사독계열 제사장이 주도하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하여 신학적 역사적인 문제의식을 가진 예언자였다. 이런 점에서 에스겔과는 다른 궤적을 걷는다.
에스겔은 주전 597년에 바벨론으로 끌려가 약 10년간의 포로생활이 지난 후 예루살렘의 멸망 소식을 망명지에서 듣고 경악한다. 그는 망명지에서 아내를 잃고도 공식적인 애도의식을 거행하지도 못할 만큼 비극적 인물이었다. 사독 계열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난 에스겔은 서른 살의 나이에 바벨론 포로들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적 목회에 돌입한다. 그는 성전의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불전차를 타고 세계를 종횡무진하시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이고 절대적으로 자유하신 하나님과 부딪친다. 25세에 바벨론에 유배되어 5년 차 되던 해, 즉 그의 나이 서른 살(30세) 자기 동족들이 운하 건설공사에 동원되어 노동하던 그발강(the Kebar River)가에서 에스겔은 ‘하늘이 열리는’ 묵시(黙示, 幻像=vision) 경험을 한 것이다.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 지 오년 그 달 오일이라”(1:1-2). 그가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한 그발강 가는 바로 유다의 바벨론 포로들이 시온을 기억하는 노래(고라/자손의 시온 순례시들)를 부르며 망국의 한을 삭이던 장소였다(시편 137편). 에스겔은 조국의 멸망과 더불어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지는 경험을 하였다. 왕도 포로로 잡혀가고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되었다. 그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서 제사장으로 봉사할 희망은 아득히 멀어져 간 신기루같은 꿈이 되어버렸다. 그런 우울하고 답답한 포로생활이 5년 째 접어든 시점, 그가 고국에 있으면 성전에 나가 제사장 직무를 감당해야 할 그 나이 서른의 시점에 하늘의 불전차 보좌 위에 앉아계신 하나님을 목도한 것이다. 그는 유다 왕실은 망하고 유다 왕의 보좌는 텅 비어 있었지만, 하나님 나라의 보좌에는 이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하늘이 열리는 경험이었다. 전후좌우 평면적 차원의 모든 전망이 흑암처럼 답답하게 닫힐 때 하늘이 열리는 묵시의 경험이 시작된다. 우리는 에스겔서 전체에 걸쳐서 유다 왕조의 흥망성쇠와 상관없이 여전히 우주와 역사, 인생과 온 삼라만상을 주재하시는 왕이신 하나님을 만난다. 유다 왕의 보좌는 비어있지만 하나님은 불전차 보좌 위에 앉아 계시며 세계를 다스리신다.
역설적이게도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파멸되고 자신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포로의 신분으로 전락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에스겔은 예언자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좋고 안정된 직장(예루살렘의 제사장직)을 잃고 거룩하고 불안정한 그러나 엄청나게 역동적인 직장을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옛 세계의 멸망을 통해 새 세계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에스겔은 아주 자주 말씀의 능력에 의하여 끌어 들어올림(영적 부양)을 경험하였다. 하나님 보좌에서 역사와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예언자적 통찰력과 상상력을 획득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 보좌의 시좌(視座)를 가지고 역사를 조감하고 민족의 미래를 미리 내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 환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왕적 다스림을 확신하게 되고 이스라엘의 미래를 확신하게 되었다.
에스겔서 전반부(1-24장)는 시드기야의 반(反)바벨론 정책을 규탄하는 데 할애된다. 에스겔의 환상들은 포로기 공동체의 다면적인 문제 상황들을 잘 예시한다. 에스겔서의 전반부 예언들은 주전 597-587년 사이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벌어지는 온갖 종류의 이방종교 제의들을 규탄하고 심지어 바벨론 포로들 중 유력자들(장로들) 사이에서 만연했던 우상숭배 습속을 단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에스겔서 2부인 25-32장은 열방에 대한 심판예언을 담고 있다. 에스겔서 3부인 33-47장(특히 33-39장)은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과 갱생에 관한 예언과 약속을 담고 있다. 3장에서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부름받았던 에스겔이 33장에서 다시 한번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부름받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파멸과 심판의 대언자가 아니라 희망과 약속의 말씀을 대언하도록 부름받는다(33장).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회개와 회복의 메시지를 선포하도록 위임받은 파수꾼이었다. 파수꾼은 하나님 원인론적인 미래 전망, 현실분석, 과거 해석자다(겔 22:30). 예언자, 곧 파수군은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의 빛 아래서 이스라엘 과거역사를 해석하고 현실을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한다. 그의 메시지의 핵심은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하여야 한다”(33:10-20)였다. 34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노략질하는 거짓 지도자들에 대한 규탄을 담고 있다. 악한 짐승에게 물어뜯기고 삯군 목자에게 버림받고 유린당한 채 방치당하는 상하고 병든 양떼를 보호하는 다윗 왕의 도래를 예언한다. 현재/과거의 거짓 목자들과 미래의 다윗 같은 선한 목자가 대조된다(34:1-31). 비록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양떼들을 삼키는 거짓 목자들이지만 야웨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며, 하나님 자신이 친히 양떼들을 먹이고 돌보는 목자가 되실 것이다(요 10:11, 14: "나는 선한 목자라"). 하나님은 거짓 목자들을 심판할 뿐만 아니라 양떼들을 심판할 것이며 야웨의 마음에 합한 종 다윗을 세워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세울 것이다. 거짓 목자들은 양떼들을 잡아 먹고 수탈하며 억압하고 갈취하고 이용한다. 그래서 야웨는 그들로부터 당신의 양떼들을 빼앗아 가시고 그들이 더 이상 백성들의 목자가 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34:1-10). 야웨께서 친히 당신의 백성들을 양떼처럼 먹이고 돌보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는 당신의 양떼들 가운데 심판하시며(살진 양과 병든 양-막 6:34) 마침내 다윗(재림 다윗 유형)을 그들 위에 선한 목자로 세울 것이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숙적(에돔/세일산)은 파멸될 것이다. 에돔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이스라엘의 영토를 차지하려고 노력하였고 그 과정에서 심히 교만하였기 때문에(하나님의 영토경계 묵살) 에돔을 하나님은 심판하실 것이다. 에돔은 이 굴욕적인 심판을 통하여 야웨는 하나님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35:1-15). 대신 이스라엘의 미래는 영광스러울 것이다. 야웨께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시 약속의 땅에서 한데 모아 번영을 누리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그들의 원수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살지만 언젠가 이스라엘이 고토로 회복되어 정결케 된 후 다시 하나님이 주시는 번영을 누리는 때가 올 것이다(36:1-38). 이스라엘은 고국의 회복된 땅에서 다시 번성할 것이다(36:1-15).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고토에서 정결케 될 것이며 마침내 새언약의 수혜자가 될 것이다(36:16-18, 19-38).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은총에 의하여 정결케 되어 새언약 안에 묶인 채 하나님과의 밀접한 영적 친교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에스겔의 미래 비전의 핵은 에스겔 37장의 에스골 골짜기 비전이다. 이스라엘과 민족갱생과 통일에 대한 비전이다. 비록 현재는 이스라엘 나라가 죽어있지만(오랜 포로생활로 절망, 무덤에 있는 백성들) 그들이 야웨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영적으로 소생할 것이다(행 1:6). 소생케 된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37:1-28). 무덤 속의 부활은 분열된 이스라엘과 유다의 연합을 의미하며 이상적인 “다윗 왕”의 다스림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다. 두 막대기들로 대표되는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에스겔서의 새언약은 통일과 연합의 언약이자 하나님의 주도하에 갱신되는 언약이다(37:14-28). 마른 뼈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에스겔 마른 골짜기에서 부활할 것이며 무덤에서 뛰쳐나올 것이다(36:1-37:28). 그리하여 다윗 왕적인 이상왕의 주도 하에 열방 중에 흩어진 마른 뼈들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로 부활할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갱생되어 고토로 회복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 중요한 사실은 고토로 다시 돌아온 갱생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죄악과 상관없이 큰 전쟁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과 종말의 대전쟁을 벌이는 우주적인 반역세력인 곡(Gog)과 마곡(Magog)이 여기에 등장한다(38-39장).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적으로 갱신되고 회복되고 연합되고 통일된 후에 지상에 임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거룩한 전쟁을 치러야 한다. 갱생되고 부활한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르는 세력은 태초부터 종말까지 하나님의 다스림에 반역하는 우주적 반역세력이다. 즉 성결케 된 이스라엘은 태초부터 하나님께 반역해 온 하나님의 대적세력(신약성서의 정사와 권세와 보좌와 주관[골 2:15; 엡 6:12; 고전 15:20-28])의 지상 구현세력들과 마지막 대전쟁을 벌여야 한다. 그런데 이 전쟁의 목적은 모든 족속들이 야웨가 만유의 대주재 하나님임을 인정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 이스라엘을 멸절시키려는 우주적인 원수인 곡(Gog)과 마곡(Magog) 사이의 종말전쟁(38:1-39:29)은 갱신된 이스라엘을 연단시키는 거룩한 전쟁인 셈이다. 이 전쟁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지극히 순결하게 단련될 것이다. 비록 곡(Gog)과 마곡(Magog)이 엄청나게 큰 군대로 이스라엘을 공격하지만 야웨께서는 자연을 이용하여 그들을 패주시킬 것이며, 그리하여 대적을 포함한 만민이 야웨가 하나님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곡(Gog)은 하나님에 의하여 대패당하고 이스라엘은 곡(Gog)의 시체들을 매장할 것이며 열방들은 야웨가 하나님임을 인정할 것이다(38:17-39:29).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하나님의 군대로 부활시키는 데 결정적인 세 요소는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말씀의 대언자다. 오늘날에도 교회갱신과 개인의 영적인 갱생은 이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된 곳에서 일어난다.


4부격인 40-47장은 예루살렘 성전 회복과 사독계열 제사장직의 회복과 복권을 다룬다. 예루살렘은 세계만민을 치료하는 생명의 강을 흘러내리는 하나님 나라의 중심보좌로 복권될 것이다.
전체적으로 에스겔서 주제는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하나님의 영광(shekinah)과 회복된 성전(시편 46편, 겔 40장)이다. 예레미야와 달리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기 공동체, 혹은 포로살이 자체의 신학적인 자산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사야 40-55장도 바벨론에 눌러앉아 살려는 사람들을 겨냥하여 바벨론 우상들에 대한 가열찬 공격을 가한다. 에스겔서도 예레미야서에 비하여 유다의 바벨론 포로들이 바벨론에 영속적으로 거주할 가능성을 봉쇄하고 고토로 되돌아가서 새롭게 시작될 하나님의 새 역사를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현재는 비록 타락한 성전이지만 그래서 돌무더기로 전락한 성전이지만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시킬 것이며, 다시금 사독 계열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여호와 샴마 공동체를 이루는 데 기여할 것이다. 에스겔의 미래사회 청사진의 핵심은 예루살렘 성전과 사독계열의 제사장들이다. 에스겔은 예레미야와는 달리 거룩과 속됨을 나누고 정결과 부정을 나누는 제사장들이 미래 사회를 영도할 지도력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본다.


예레미야의 구조
I.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는 예레미야 (1장)
-예레미야의 변증법적 과업 (to root out/tear down versus to build up/plant)
II. 유다에 대한 경고들과 권계들/권면들 -유다에 대한 예언자적인 분석(2-35장).
1. 초기 예언 : 회개에의 촉구(2-6장)
2. 반성전 설교들: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지방 제사장들의 반감(7-10장)
3. 언약과 음모 (11-13장): 하나님과 유다 사이의 언약은 파기되었다. 언약파기를
외치고 멸망을 외치는 재앙 예언자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음모
4. 가뭄 예언(14-15장) 마. 재앙과 위로(16장-17:18)
5.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17:19-27)
6. 토기장이로부터 배우는 교훈들(18-20장)
7. 왕들, 예언자들 그리고 지주(땅의 백성들)들에 대한 규탄(21-24장)
8. 바벨론 유수 예언(25-29장)
9. 회복의 약속-다윗 언약의 갱신/시내산 언약의 갱신(30-33장)
10. 부록-역사적 비망록 (34-35장)
III. 예레미야의 고난과 박해(36-38장)
1. 예언 두루마리를 태우는 왕(36장)
2. 투옥되는 예레미야 (37-38장)
IV. 예루살렘의 몰락과 그 후에 일어난 사건들 (39-45장)
1. 예루살렘의 몰락(39장)
2. 그댤랴 즉위와 암살(40:1-41:15)
3. 애굽으로 도주하는 암살자들(41:16-43:13)
4. 애굽으로 망명한 사람들에 대한 비난(44장)
5. 바룩에 대한 위로(45장)


V. 열방들에 대한 심판들(46-51장)
VI. 비망록-예루살렘의 몰락에 대한 회고 (52장)


에스겔서의 구조
I.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들(1-24장)
1. 예언자 소명 환상(vision)(1-3장)
2. 예루살렘의 포위를 묘사하는 상징적인 행위들(4-5장)
3. 심판을 설명하는 예언들(6-7장)
4. 타락한 성전에 대한 환상-성전을 떠나는 야웨의 영광(8-11장)
5. 예루살렘의 바벨론 유수를 묘사하는 상징적인 행위들(12장)
6. 심판예언들(13-24장)
II. 열방들에 대한 심판(25-32장)
1. 암몬(25:1-7)
2. 모압(25:8-11)
3. 에돔(25:12-14)
4. 블레셋(25:15-17)
5. 두로(26:1-28:19)
6. 시돈(28:20-24)
7. 이스라엘에 대한 희망 노트(28:25-26)
8. 애굽에 대한 재앙 예언들(29-32장)
III. 이스라엘의 회복 예언들(33-48장)
1. 파수군(33:1-20)
2. 예루살렘 몰락이 보고되고 설명되다(33:21-33)
3. 거짓 목자들과 선한 목자들(34장)
3. 에돔에 관한 예언(35장)
4. 이스라엘 산들에 대한 예언들(36:1-15)
5. 에스겔 신학의 요약(36:16-18)
6. 국가적 회복 환상(37장)
7. 마지막 전투-곡(Gog)과 마곡(Magog)에 대한 하나님의 전쟁(38-39장)
8. 회복된 예배 공동체(40-48장)












































1) “결단” 혹은 “계획”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는 에차(הצע)인데 이것은 심사숙고 끝에 내리는 결정을 가리킨다. 이것이 정치적인 술어로 사용될 때는 만조백관을 거느린 왕이 그의 어전회의에서 내려는 중요한 결단을 가리킨다.
2) 이 문제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한 참조를 원하면 Paul D. Hanson, The Dawn of Apocalypse([Philadelphia:Fortress, 1980], 69)와 R. R. Wilson의 Prophecy and Society in Ancient Israel([Philadelphia:Fortress, 1975], 307)을 참조하라.
3) 40-55장과 56-66장을 제 2이사야와 제 3이사야로 나눈 학자는 버나드 둠(Bernhard Duhm)(1878)이다. 둠 이래로 학자들은 40-55장과 56-66장을 나눈다. 그러나 엄격하게 따지면 40-55장과 56-66장 안에는 역사적 상황을 제외하고는 많은 주제적 연결점들이 발견된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
4) 대체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평강의 소식이 전달되나 악인에게는 평강(치료)이 없다. 58:3-8과 59:1-8에는 치료를 받지 못하는 악인이 바로 금식하지만 의를 행하지 않는 위선적인 종교가들임이 드러난다. 57-59장을 긴밀하게 하나로 묵는 주제는 평강(치료)의 주제다.
5) 그러나 전체적으로 56-66장이 폴 핸슨(Paul Hanson)이 강조하는 만큼의 분명한 갈등-사독계열의 제사장 그룹과 레위인 묵시가들의 갈등-을 충분히 표시하는지는 좀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핸슨에 의하면 레위인 묵시가들이 40-55장에 근거하여 56-66장을 산출한 집단이다. 그들은 에스겔 40-48장에 근거한 사독계열의 시온 재건 프로그램에 반대하면서 좀더 유토피아적이고 급진적인 시온 건설을 기도하는 사람들로 규정된다(The Dawn of Apocalypse, 70-74, 153-159).
6) 이사야는 가난한 자에게 쉼을 주고 그들에게 의(신적 친절과 자비)를 베푸는 것이 국방력을 강화하는 것보다는 더 확실한 공동체의 안전보장임을 아주 빈번하게 역설하였다.
7) 61장과 40-55장과의 문학적 주제적 관련성은 학자들에 의하여 광범위하게 인정되고 있다. 61:1-3은 이사야 40, 42, 49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결국 소위 제 2 이사야와 제 3 이사야는 원 이사야 예언들 혹은 이전 예언 전승에 의해 영감을 받아 예언한 파생예언자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61장과 소위 제 2 이사야와의 관련성을 입증하는 단어들(표현들)은 다음과 같다: “야웨의 신”; “좋은 소식”; 환난 당한 자(the afflicted)(40, 42, 49, 61장); 감옥문을 열어젖힘; 모든 사람들을 위로함; 시온; 허약한 영(40, 42장); 공평과 의(46장); 야웨의 심으신 바 됨; 이방인들/외국인들; 야웨의 찬송; 갑절의 몫(40장); 야웨를 기뻐하다; 영원한 언약; 보응; 정원; 황폐화된 폐허들(49장); 역대에 파괴된(58장); 양떼를 먹임(49장: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관계).
8) םיובשׁ은 단순히 (바벨론에) “포로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58:6의 경우처럼 귀환포로 공동체 안에서 발생한 채무관계 때문에 몸이 구속당한(노예를 자신의 몸을 판 사람-느헤미야 5장 참조)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여진다. “갇힌 사람들”이라고 번역된 םירוסא도 거의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가리킬 것이다(참조 49:9은 ‘바벨론 포로된 자’들을 가리킨다).
9) רורד를 단순히 ‘자유’(freedom)(NIV=개역성경)로 번역하는 것은 다소 추상적인 번역처럼 보인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많은 경우에 면제년(신 15장) 혹은 희년(레 25장)과 관련되어 사용되기 때문에 우리는 “빚탕감의 자유”라고 번역한다.
10) 70인역은 םירוסא 대신에 םירוע[ל](the blind, 눈 먼 자들)이라고 읽는다(BDB, p. 824). 70인역을 따르는 누가복음 4:18은 “눈 먼 자”라고 번역한다. 70인역을 따르는 어떤 학자들은 םירוסא을 םירונס(the blind, 눈 먼 자)로 수정하기도 한다.
11) 현재 맛소라 본문의 חוק-חקפ는 그 자체로는 뜻이 통하지 않는다. BHS(BDB)의 제안(70인역 및 몇 몇 중세 맛소라 사본들의 읽기)대로 한 단어 וֹק (opening[of the eyes]) 혹은 וֹק 로 읽어야 한다. 둘 다 문 혹은 눈을 “활짝 열어젖힘” 혹은 지하감옥 같은 어둠으로부터의 “석방”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앞 소절과의 시적 대구 관계를 고려하여 후자를 취한다.
12) “신원”이라고 번역된 םקנ은 뒷 소절의 “위로하다”(םחנ)라는 동사와 어희작용(wordplay)을 일으킨다.
13) “재”(רפא)와 “화관”(garland, ראפ)은 어희작용(wordplay)을 일으킨다.
14) 찬송의 “옷”(הטעמ)은 같은 절의 뒷소절의 야웨께서 “심으신 것”/“야웨의 심으심”(עטמ)과 어희작용(wordplay)을 일으킨다.
15) 아마도 앞 절의 “슬퍼하는 모든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적시(摘示)하기 위하여 “시온의 슬퍼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이 전승과정에서 삽입된 것처럼 보인다(BHS). 이 표현이 추가되어 이 절의 시적인 음률과 평행이 깨뜨려진다.
16) 강조적 2인칭 복수 대명사 םתא이 사용된다.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달라진 운명을 강조한다.
17) דבכ를 앞 소절의 ליח과 대구어로 읽어야 하기에 여기서 재물, 풍요로운 것의 의미로 번역한다.
18) BHS의 제안처럼 וּי תת 혹은 וּא תת(הרמ=ארמ[be well-fed]의 hithpael형)로 읽는다(BDB, p. 597쪽 참조). 그러나 개역성경, NIV, RSV, 1QIsa 등은 וּר 를 ר אָ 동사의 히트파엘형으로 읽는다(BDB, p. 56). 이런 번역은 앞 소절과의 시적 대구를 깨뜨리는 읽기처럼 보인다.
19) BHS의 제안대로 תשׁב로 읽는다. 2인칭 복수 접미사나 3인칭 복수 접미사가 붙어야 할 이유가 없다. 뒷 소절의 המלכ(인칭접미사 어미 없다)과 비교해 보면 תשׁב인칭 소유접미사가 붙을 필요가 없다.
20) 7절의 첫 הנשׁמ는 7b절의 הנשׁמ 때문에 생긴 중복오사처럼 보인다. 이것은 시적인 음률을 깨뜨릴 뿐만 아니라 그 다음 단어 המלכ(능욕)와 תחת의 연결을 가로막는다. 따라서 7a절의 הנשׁמ는 삭제되어야 한다.
21) mishpat(טפשׁמ)는 법률적인 하한선을 지키도록 촉구하는 하나님의 요구다. הקדצ는 미쉬파트를 초월하고 초과하는 상황의 요구에 따른 적절한 신적 자비와 친절을 가리킨다. 따라서 הקדצ는 거의 무한책임적인 계약당사자들간의 쌍방적인 의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단어가 하나님께 사용될 때는 하나님의 구원과 거의 동일시된다(사 46:12-13). mishpat(טפשׁמ)와 הקדצ는 이스라엘을 계약 공동체로 창조하는 하나님의 원초적인 구원행위다. 하나님께서 애굽을 공평으로 심판하시고 의로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해방시켰다. 이스라엘 자체의 존재근거는 하나님의 공평과 의다. 따라서 공평과 의는 계약신학의 개념이며 계약 공동체 안에서 실행이 기대되는 신앙적 의무들이다. 공동체내의 가장 연약하고 주변화된 지체들에 의하여 공평과 의가 경험될 때 그것은 비로서 하나님에 의하여 인정받는 수준의 공평과 의다(신 10:18; 시 10:18; 렘 5:28; 사 5:16).
22) 현 맛소라의 הלוֹעב(in/by/with burning offering)(BDB, p. 750) 대신에 몇 몇 중세 맛소라 사본과 쿰란, 시리아역, 타르굼 등과 함께 הל ע[ב]로 읽는다. 마찬가지로 70인역도 우리의 읽기와 비슷하게 읽는다(εξ αδικιας=out of injustice). BDB(p. 732)에 의하면 הל ע는 잔인한 불법행위를 의미한다. 우리의 읽기가 문맥상(시적 평행) 더 잘 맞는 것처럼 보인다.
23) 에스라-느헤미야서에 두드러진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 태도(xenophobia)과 비교해 보면 56:1-7의 의견은 소수파 의견처럼 들리는 예언이다. 이 단락은 과연 이스라엘의 회복된 성전예배에 이방인들과 고자같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느냐 마느냐의 논쟁상황을 염두에 둔 하나의 의견처럼 들린다. 56-66장의 태도는 국제주의적-포용주의적이다. 이방인과 고자라도 안식일을 지키고 야웨의 언약(이방을 인도하는 빛으로서의 언약)을 지키며 야웨께 연합한 사람들이야말로 혈통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안식일을 더럽히고 야웨의 율례를 깨뜨리는 사람들보다 더욱 더 온전한 의미에서 “야웨의 백성”이다.
24) 현 맛소라 본문의 동사 ןהכי는 “제사장 노릇하다”라고 번역될 수 있는데 이 경우는 문맥상 뜻이 통하지 않는 번역이다. 그래서 우리는 BHS의 제안처럼 ןיכי(“단장하다”)으로 수정한다.
25) 특히 60:17-18(예루살렘성의 안전보장을 우의적으로 표현하는 단락), 60:21(나의 백성이 의롭게 영원히 땅/기업을 차지할 것을 예언), 61:4-6(시온 재건시 이방인들의 참여예언하는 단락)은 이사야 40-55장 주제보다 더 진전된 주제이며 56-66장에만 독특하게 부각되는 주제들이다. 이 단락들에는 의고체 문제(archailc style)도 사라진다.
26) 폴 핸슨(Paul Hanson)은 60-62장이 음률적, 문체적, 주제적인 관점에서 아주 긴밀하게 연결된 하나의 삼부작적 문학적 단위임을 증명하려고 한다(같은 책, 46쪽).
27) 메시야적 종은 단수로 되어있지만 실상 이런 비젼을 가진 신실한 야웨의 종들의 집단인격의 화신일 수도 있다(65:8-15). 따라서 여기서 야웨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 메시야적 종이 누구인지 특별히 누구인지를 밝히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지난 강의의 본문(52:13-53:12)에서처럼 본문의 메시야적 종은 나사렛 예수가 이 말씀을 자신의 공생애 사역의 강령으로 삼기까지는 신비에 둘러싸여 있는 신학적 가공인물일 뿐이었다.
28) 63:1-6은 이방인(애돔)에 대한 야웨의 복수를 다룬다. 56-66장에서 야웨는 종종 거칠고 사나운 전사 이미지로 그려진다. 63:5-6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만민을 유린하는 잔혹한 전사 야웨의 무자비한(?) 심판을 다룬다. 본문은 귀환포로공동체 안의 대적들을 향한 신원이자 응징을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29)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들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또 다른 애가형 참회기도를 들어보자.
63:15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 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찌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17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컨대 주의 종들 곧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18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19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 64:5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8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9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10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11 우리 열조가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의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무하였나이다 12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오히려 스스로 억제하시리이까 주께서 오히려 잠잠하시고 우리로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리이까






30) 우리는 66:21에서 56-66장의 예언의 배후에 있는 사람들이 교포출신 귀환포로 공동체에서 일어난 예언자들일 가능성을 열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31) (1)-(3) 항의 논의는 Patrick D. Miller, Deuteronomy(Interpretation series) 주석(김회권 역[장로교출판사간, 1999])에 크게 빚지고 있다.
32) 56:3-7은 이방인과 고자마저도 야웨 예배(성전예배)에 참여하는 길을 활짝 열어놓는다: “3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4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5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6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7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33) 60:10, 12은 이런 입장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상당히 제국주의적 종주국가로서의 자긍심이 엿보이는 본문이다: “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너를 긍휼히 여겼은즉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요 그 왕들이 너를 봉사할 것이며... 12 너를 섬기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파멸하리니 그 백성들은 반드시 진멸되리라.”
34) 벨하우젠은 심지어 BC 8세기 동안의 앗수르의 제국주의적 팽창이야말로 고대 이스라엘의 문서 예언자들의 예언운동을 촉발시킨 최초의 역사적인 사변(事變)이었다고 주장하였다(J. Wellhausen, Israelitische und jüdische Geschichte [Berlin: G. Reimer, 1958], 107).
35) BC 720-701년 동안 이사야는 시의적절하지 못한 반(反)앗수르 봉기에 대한 정죄(定罪)에 몰두한다(사 15-16장, 17장, 18장, 28-29장 참조)(J. H. Hayes and S. A. Irvine, Isaiah The Eighth-Century Prophet. His Time and His Preaching[Nashville: Abingdon, 1987],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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