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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숭실대 기독교학과 정기학술심포지움 발표논문

by 【고동엽】 2021. 11. 29.
구약성서의 정치와 종교




김회권 교수(숭실대 인문대 기독교학과)


I. 현실정치 권력의 유혹에 직면한 종교
2007년 연말 대선을 앞두고 한국교회의 일각에서는 세속 정치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크게 흐리는 정교일치적 요동을 보여주었다.1) 당시 망우리의 한 교회는 교회 홈피에 특정 후보의 배너를 걸어놓고 공공연히 그 특정후보를 위한 선거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 외에 특정 교계연합 단체는 음양으로 특정 후보를 지지하여 일반시민들로부터 정교분리는 헌법정치의 근본으로 돌아가라는 질타를 받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대선이 끝나 새정부가 출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종식되지 않고 있다. 강력한 종파적 확신을 가진 지도자가 특정종교를 편애한다(특정도시 성시화, 특정도시 봉헌)는 혐의를 걸고 경쟁관계에 있는 종교의 신자들이 대규모 거리시위에 나서기까지 하고 종교차별 금지법이라는 법의 제정필요성이 공론의 쟁점으로 떠오를 정도가 되었다. 이기심들이 다투는 진창이요 엄연히 계급적, 계층적, 파당적인 세력들의 각축과 쟁변의 현장인 현실정치에 종교적 신념의 그릇된 표현은 사회통합을 해치는 폐단이 될 때가 있다. 특히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라는 대의명분에 충실하기보다는 현실정치적 차원의 소소한 실언이나 실책으로 복음의 본질을 흐리는 기독교회의 행동은 극히 자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올해 내내 공적인 논란거리가 된 이명박 정부의 종교편향이나 차별이니 하는 사태를 보면서 기독교회나 신자가 현실정치에 관심을 갖고 일정한 견해를 밝히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나, 정교한 성서적 신학적 지침 아래서 현실정치에 종교적 신념을 적용하지 않으면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 운동의 방해물이 될 수 있음을 확연히 깨닫는다.
이 논문은 기독교회와 현실정치의 바른 관계를 모색하기 위하여 구약성서의 정치와 종교 관계를 탐구한다. 이 논문은 구약성서의 정교관계를 탐구함으로써 한국교회의 정치권력화 혹은 한국교회의 정치권력과의 결탁을 경계하고자 한다. 편의상 이 글은 구약성서의 정치와 종교의 관계를 왕과 예언자의 대립과 갈등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한다. 구약성서의 대부분에서 현실정치 세력을 대표하는 왕과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대변하는 예언자는 긴장과 갈등의 관계에 놓여있었다. 현실정치권력의 전제화, 사유화, 그리고 파당화에 대한 예언자의 비판과 탄핵이 줄을 이었다는 것이다. 이 글의 마지막은 나사렛 예수 안에 합류된 왕의 길과 예언자의 길의 통합된 양상을 다룰 것이다.


II. 구약성서의 정치와 종교
종교를 대표하는 예언자들은 현실정치권력을 대표하는 왕과 긴장과 대립의 맥락에서 만나, 그들을 설득하고, 그들과 쟁변하였다. 참된 예언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왕의 권력과 대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였다. 사무엘, 나단,2) 엘리야, 아모스, 이사야, 그리고 예레미야 등이 바로 왕권과 대립한 예언자들이었다.3)




1. 사울과 사무엘의 대립과 갈등(삼상 13, 15장)
사무엘상 13장과 15장은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과 사무엘의 갈등과 대립을 다룬다. 이 두 장은 예언자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왕 사울을 영적 권위로 질책하고 마침내 폐위시켜버리는 과정을 보도한다. 사무엘서가 이스라엘 왕권을 예언자의 권위 아래 두려는 예언자들의 역사관에 의해 기록된 역사서이긴 하지만 적어도 분명한 것은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에서 왕과 예언자의 갈등과 대립은 아주 왕국 초기부터 있었다는 점이다.4) 사무엘상 13장은 사울 왕이 블레셋 족속과의 전쟁을 앞두고(1절) 사무엘이 오기 전에 먼저 제사를 집전하고 전쟁을 개시한 행위를 드세게 책망하는 사무엘의 영적 권위를 부각시킨다. 사울이 40세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2년 만에 블레셋과의 전쟁에 돌입한다(1절). 사울은 먼저 이스라엘 사람 삼천 명을 택하여 그 중에서 2천 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 산에 진치게 하고, 1천명은 아들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진치게 하였다. 온 이스라엘이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대를 친 것과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울이 지휘하는 길갈의 전쟁사령부로 모여들어 사울의 휘하로 들어갔다(4절). 그런데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인 블레셋 사람들의 병력은 엄청났다. 병거를 탄 병사 삼만 명, 마병 육천 명이요, 그 외 보병으로 출전한 백성이 해변의 모래 같이 많았는데 그들이 올라와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을 쳤다(5절). 이스라엘 사람들은 블레셋 군대의 이 충격적인 육박을 보고 절망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기 시작했으며(6절), 심지어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Gad)과 길르앗 땅으로 도주하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사울은 즉각 전투를 개시하지 못했다.
8절은 즉각 전투에 돌입하지 않고 사울이 길갈에 머물고 있는 이유를 제시한다.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길갈에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했기에 그는 사무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시간에 전쟁에 참여하려고 모인 백성들이 사울의 휘하를 이탈하기 시작했다.5) 그렇다면 왜 사울은 사무엘이 내려와 제사를 드릴 때까지 본격적인 전쟁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을까? 본문에는 명시적인 이유가 발견되지 않지만, 사무엘과 사울 사이에 전쟁에 돌입하기 전에 길갈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는 묵계가 있었을 가능성이 유일한 이유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사무엘의 영적 권위가 아직도 사울의 군권을 압도할 만큼 여전히 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사시대의 거룩한 전쟁 전통에 매여있던 사무엘은 사울이 자신의 군사적 용맹으로 전쟁하지 않고 하나님의 신(神)으로 전쟁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에 전쟁에 착수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은 전면전에 돌입하기 전에 사울 왕과 백성들이 자신이 집전하는 제사에 참여하여 헌신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무엘이 이레가 지나도록 오지 않자 백성들의 전의는 급격하게 상실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사울은 친히 번제와 화목제를 집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않을 수 없었다(9절). 사울이 드린 번제가 끝나자마자 사무엘이 도착했다(10절). 황급하게 사울이 사무엘을 문안했으나 사무엘은 인사를 거절하고 노기 띤 음성으로 ‘왕이 무슨 일을 했소?’라고 다그쳐 물었다(11절). 사울은 정직한 변명을 제시했다. ‘당신이 정한 날에 오지 아니하시고,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내가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나는 스스로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이제까지 야웨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라고 생각하여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습니다’(11절하반절-12절). 그러나 사무엘의 반응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냉정하고 가혹하게 터져 나왔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야웨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13절). 사무엘은 사무엘 자신이 길갈에 내려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전쟁에 착수하는 것이 야웨의 명령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왕의 행동은 망령된 행동이었다고 단죄했다. 사울에 대한 사무엘의 심판언어는 이내 최후 심판으로 발전된다.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야웨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야웨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야웨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14절). 즉 왕이 야웨의 명령을 어겼으므로,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합당한 백성의 지도자를 구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사무엘서 저자는 여기서 사울의 폐위 과정이나 그가 심판을 초래한 행동의 의미 등에 대하여 자세한 부연설명을 제시하지 않고 하나의 원칙을 천명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그는 백성들이 주도해서 뽑은 왕에 대한 불신임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에 대한 예언자적(신적) 신임을 대조시킨다. 사울적 왕권, 즉 민중추대형 왕권과 하나님의 신적 지명으로 출범한 왕권을 대조시키고 있다. 현실정치적으로 보면 사울의 행동은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사무엘서 저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치명적이다. 사무엘서 저자는 민중추대형 왕은 언제든지 야웨 하나님의 위로부터 오는 명령을 민중적 근거를 바탕으로 언제든지 거절하고 배척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첫째, 유력한 민중들이 주도하여 추대한 왕은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전쟁의 착수시점을 임의로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무엘서 저자는 전쟁의 착수 시점은 사무엘과 같은 영적 지도자의 후견과 감독이 필요한 사항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둘째, 사무엘서 저자는 하나님에 대한 의뢰와 의존보다는 백성들의 수에 전투력의 향배를 찾는 사울의 인간중심적인 전쟁 이해와 전쟁 영도력이 하나님의 전쟁 전략에는 걸림돌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차피 이스라엘의 전쟁은 병력의 수나 군사적 우위가 지배하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지가 지배하는 전쟁이라는 것이다. 흩어진 백성들의 마음을 잡아놓기 위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 치명적인 판단착오를 일으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울의 왕권에 대한 사무엘의 영적 압도와 견제는 사무엘상 15장에서 계속 심화된다. 이 장은 사울의 아말렉 공략과 사울과의 두 번째 불화를 다룬다. 사무엘은 사울이 자신을 통해 기름을 받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음을 상기시키며 자신을 통해 전달되는 야웨의 말씀을 들으라고 요구한다. ‘이제 왕은 야웨의 말씀을 들으소서.’ 그것은 아말렉 정벌 원정에 관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출 17장:8-16)로 그들을 징벌하려고 하신다. 이 징벌의 대행자가 사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2절). 사무엘은 사울에게 일종의 전멸전쟁, 즉 헤렘 전쟁을 시행할 것을 명한다(3절). 사무엘의 격려를 받고 출정한 사울은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Shur)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유린하고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다(7-8절). 그런데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진멸하지 않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만 진멸하였다(9절). 헤렘 전쟁법을 어긴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헤렘법을 어기고 전리품의 일부를 남기고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둔 사무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사무엘을 통해 전달된다(10, 16-19절). 야웨께서 아말렉 정벌이 전리품 약탈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벌 대행 전쟁임을 망각한 채 값진 전리품을 탐하다가 아간의 죄를 범한 것이다(수 7장).


결국 사무엘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 언어는 극한으로 치닫는다. 사울이 야웨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야웨께서도 이제 사울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23절 하반절). 사무엘은 최후 심판을 통보하고 사울을 떠난다. “야웨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28절).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29절). 이처럼 현실정치권력인 왕에 대한 예언자의 견제와 비판은 이스라엘 왕정 초기부터 서슬퍼런 기개를 과시했다. 정치세력과 하나님의 정의는 유착될 가능성이 제로(zero)였다.


2. 다윗을 견제하고 질책하는 예언자 나단
다윗 왕에 대한 예언자 나단의 관계는 예각적인 갈등과 대립보다는 견제와 우정어린 책망의맥락 안에서 틀지워졌다. 사무엘하 7장에서 다윗이 예루살렘에 모셔온 하나님의 법궤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하자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의 제안을 거절하시고 하나의 역제안을 하신다. 하나님께서 오히려 다윗에게 “집”(영원한 왕조)을 지어 주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집을 지어주는” 행위는 고대 가나안 바알신화나 에누마 엘리쉬에 따르면 승리한 신에게 복종을 맹약하는 하등 신들의 자발적 공경 행위였다. 승리한 신만이 집(궁궐)에 들어가 “안식”할 권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윗은 자신의 제국 건설과 연전연승의 전쟁 승리가 혼돈과 파괴의 세력들을 제압하시고 질서정연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승리의 지상 구현이라고 생각하고(시 89:1-14) 있었다.6) 자신은 야웨에 의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왕으로서 이 야웨의 승리에 동참한 것이라고 간주했다(89:25). 그래서 다윗이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들의 신들을 무찌르고 승리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를 승리하신 신적인 대왕으로 선포하고 ‘안식처’인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나선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던 것이다.
야웨께서 이스라엘 사방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다윗 왕이 자신의 궁궐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1절),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싶은 의향을 넌지시 나단 선지자에게 비춘다(2절). 어느 날 다윗은 선지자 나단에게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라는 말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궁궐인 성전 건축 의향을 내비친다. 이런 제안에 나단은 일견 우호적으로 응대한다. ‘야웨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3절). 그런데 이 말 뒤에 다윗의 후속 응답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곧장 4절부터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전달된 메시지가 제시된다. 그 날 밤에 야웨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였다(4절). 거절의 뜻을 담은 신탁이 임한 것이다. 신탁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당신 자신을 위해 궁궐을 지어달라고 채근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 다윗 왕국을 견고하게 하고 안정되게 해 줄 것이다. 셋째, 다윗 왕조는 영원한 왕조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5절은 다윗의 제안을 거절하는 하나님의 반문이다.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의욕과잉이라는 것이다. 6절은 출애굽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한 곳에 고정된 성전에 현존하지 않고 장막과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이동해 온 기동성 넘치는 하나님임을 밝힌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다’(6절).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 지파(혹은 사사)들 누구에게도(대상 17:6)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라고 말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7절). 기동성이 넘치시는 하나님께서 특정지파의 한 복판에 고착된 거주장소를 가질 의향이 없으시다는 것이었다. 다윗의 성전건축 제안은 거절된 것이다. 궁중 예언자 나단은 감히 왕의 제안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절한 것이다. 성전은 다윗의 전제군주화를 촉진시켰을 프로젝트였음이 틀림없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나단은 다윗의 전제군주화를 막은 것이다.


사무엘하 12장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마저 전사케 한 다윗의 범죄를 면책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대언하는 예언자 나단의 모습을 보여준다. 궁중 예언자이자 다윗의 특급 참모역할을 해 주던 선지자 나단이 다윗 왕을 거칠게 책망한다. 야웨께서 범죄한 다윗에게 나단을 보내셔서 다윗의 죄를 지적하시고 책망하신다. 나단은 다윗에게 한 성읍에 두 사람, 부자와 가나한 자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다윗의 양심을 회복하려고 한다(1절). 이야기의 두 주인공은 양과 소가 심히 많은 부자와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2-3절). 그 가난한 자에게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심지어 주인의 음식을 나눠 먹으며 주인의 잔으로 물을 마시며 주인의 품에서 잠을 잘 정도로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 암양은 주인에게 딸같은 존재였다(3절). 그런데 어느 날 그 동네의 부자 집에 손님이 오자 부자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자기 양과 소를 아껴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대접해 주었다(4절). 이야기가 이 지점에 이르자 다윗은 그 부자의 행동에 크게 분노하며 그는 죽여야 할 악인임을 야웨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기에 이르렀다(5절). 이런 식으로 다윗이 의분을 표출하자 나단은 즉시 다윗의 양심을 향해 비수를 찔렀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6절).
6절 하반절부터 12절까지는 다윗에게 쏟아진 하나님의 징벌과 심판 신탁이다. 6절 하반절은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배반하게 되었는지 말한다. 다윗의 배은망덕에 대한 규탄이 이어진다(7-8절). 8절 하반절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무한 탐욕을 크게 책망하신 후다극도의 실망감과 배신감을 표명하신다(8-9절). 10-12절은 하나님의 심판신탁이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10절). 다윗의 죄는 인간에 대한 죄 이전에 하나님을 업신여긴 죄였다. 하나님을 업신여긴 죄에 대한 응보로 칼이 다윗 왕가를 지배할 것이다.
11절은 다윗에게 더욱 모욕적이고 비참한 심판선언을 담고 있다. 야웨 하나님 당신 자신이 다윗 자신과 그의 왕실에 재앙을 일으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이 보는 앞에서 그의 아내들을 빼앗아 그의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다윗의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할 것이다(11절; 비교. 8절). 12절은 심판 신탁의 결론이다.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나단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이 다윗을 세차게 타격하자 다윗은 즉시 자신의 죄를 자백했다. ‘내가 야웨께 죄를 범하였노라’(13절). 과연 나단의 신탁대로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야웨께서 치시자 그가 심히 앓다가 죽었다(15절). 이처럼 나단은 다윗 왕의 개인적 범죄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책망하고 그 죄가 다윗 왕가와 이스라엘에게 미칠 파급을 적나라하게 선언했다. 다윗은 예언자의 책망을 영접하고 회개했다는 점에서도 후대의 어떤 왕들보다 더 겸손하고 모범적이었다.


3. 아합 왕과 예언자들의 갈등7)
아합과 엘리야
열왕기상 17-19장은 북이스라엘 왕 아합과 예언자 엘리야의 갈등을 다룬다. 예언자 엘리야를 통해 선포된 예언을 통해 오므리-아합 왕조는 사실상 급격하게 몰락한다. 당시의 이스라엘은 오므리와 아합의 혼합주의 종교정책, 시돈과 두로에서 시행되던 지주제도의 도입(미 6:16) 등으로 야웨의 진노 아래 고통을 겪고 있었다. 가뭄과 기근이 온 이스라엘을 지배했다(왕상 17:1-7). 엘리야도 이 기근과 가뭄의 희생자로서 기아선상에 시달렸다(17:8-16). 그는 이스라엘의 기근과 가뭄을 초래한 아합 왕의 우상숭배죄를 여러 차례 규탄하여 아합 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로 단죄받았다(왕상 18:17). 그러나 엘리야는 물러서지 않고 이세벨과 아합의 우상숭배가 바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가증한 짓임을 분명하게 선언했다(18절). “괴롭게 하는 자”라는 말(17-18절)은 맹세의 맥락들에서 사용되는 말인데 특별히 어리석은 맹세를 하거나 맹세를 깨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이다(수 6:18과 7:25의 아간; 삼상 14:29의 요나단). 엘리야는 아합에게 “괴롭게 하는 자”의 낙인을 찍는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의 계약을 어겼기 때문이다.


가뭄과 배교 사이의 관계(18절)를 명시적으로 밝힘으로써, 엘리야는 아합과 엘리야 자신의 갈등을 한 차원 높은 대결로 변형시킨다. 아합은 지방 산당들에서 숭배되는 바알들을 추종했다고 정죄되고 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나타나 바알과 아세라 신의 홈그라운드인 갈멜산에서 야웨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지? 바알이 참 신인지? 기도대회를 통해 가려보자고 제안하고 아합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왕상 18장). 이 기근과 가뭄을 끌낼 참 하나님이 어떤 신인지 가려보자는 것이다. 결국 이 갈멜산의 기도대회에서 제단을 태우는 불로 응답하신 신은 야웨임이 판명되었다. 엘리야는 거기에 참석했던 백성들의 힘을 빌어 850명의 바알-아세라 선지자들을 죽였다. 그러나 이세벨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고 오히려 엘리야는 유대 광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내몰렸다. 결국 엘리야는 호렙산 동굴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또 바알 숭배를 척결하시려는 하나님의 국제정치적 환경조성을 위해 헌신한다. 아람의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을 왕으로 옹립하고, 사마리아에 가서 님시의 아들 예후를 북이스라엘 왕으로 옹립하고, 그리고 엘리사를 자신의 후계 예언자로 세우라는 명령을 받고 사명의 장도를 떠난다. 이 세 사람은 나중에 북이스라엘의 바알 숭배를 척결하는 데 쓰임받는 인물들이다.
아합에 대한 예언자 엘리야의 도전과 탄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열왕기상 21장의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아합의 전제적 왕권과 정면으로 맞선 엘리야의 예언자의 탄핵과 심판 이 결정적으로 터져나온 계기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전래 사상에 의하면 어떤 왕도 이스라엘 자유 농민의 땅을 빼앗거나 강제로 매입할 수 없다(레 25:23-25). “형사취수법”(兄死娶嫂, levirate law)(신 25:5-10)은 조상으로부터 상속받은 토지는 매매되지 않고 가족의 선산으로 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가리켜 준다.8)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매입하기를 원했으나 나봇이 팔려고 하지 않았다. 아합은 이 일로 크게 낙심하게 되고 그의 이방 출신 아내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비책 마련에 몰입한다(5-14절). 이세벨은 왕을 지지할 가능성이 농후한 이스르엘의 토착적인 두 집단들(귀인들)에게 편지를 보낸다(왕하 19:1 참조). “귀인들”은 왕으로부터 토지를 하사(下賜)받아 점유하고 있는 귀족들이다. 거짓 증인들을 동원한 거짓 재판정을 구성하기 위함이었다. 소환된 두 증인들(신 17:6; 19:15) 명백하게 포도원을 팔기를 거절하는 나봇의 맹세를 야웨의 이름을 남용하는 죄라고 왜곡한다. 그러자 그 현장은 이내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죄와 왕께 대한 반역죄(출 22:28; 레 24:14-16)를 취조하고 재판하는 법정으로 바뀐다. 10절의 마지막 말들은 이 법률적인 어릿광대극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힌다. “저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라.” 돌로 쳐죽이라는 명령의 언급은 거의 후렴구처럼 반복된다(10, 13, 14, 15절).
17-29절은 아합의 이 폭정에 대한 예언자적 탄핵을 보도한다. 아합과 이세벨의 죽음이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 내용이다. 아합과 이세벨의 죽음에 대한 예언에 야수적 충격을 더하는 주장은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았다는 주장이다. 아합이 “악”을 행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악”으로 되갚으실 것이다(20-21절).


아합과 익명의 예언자들
열왕기상 20장에는 원수(아람)의 전멸 명령(헤렘)을 어긴 아합 왕에 대하여 한 익명의 예언자가 심판 선언을 통고하는 상황을 다룬다.9)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왕은 시종일관 아합 왕으로 소개된다(2, 13, 14, 34절). 주동자인 아합의 반동자인 엘리야는 일시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이 이야기에 많이 등장하는 익명의 예언자들에 의하여 대체된다.
이스라엘을 도우신 하나님이 야웨임을 알리기 위해 치러진 두 전쟁들(13, 28절) 이야기들은 협상과 조약들에 의해 둘러싸여 진다: 협상(1-11절)-전쟁(12-21절)-전쟁(22-30절)-협상(31-34절). 하나님의 신적 기습의 도움으로 아람 왕 벤하닷을 생포하고 숙적 아람에 대하여 승리한 아합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자비로운 군주가 되어 패배한 아람 왕을 선대한다. 이스라엘의 상인들이 다메섹에서 상업용 공간과 거주지를 공급받도록 결정되었다. 아합은 이런 일련의 조약의 조건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벤하닷을 풀어 준다. 두 번씩이나 이스라엘을 공격해 온 아람 왕에 대한 이 외교적 관용은 독자들의 마음에 불안을 일으킬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람 왕을 살려주는 아합 왕의 자비로운 외교 행위는 거룩한 전쟁법에서 규정된 대적(對敵)전멸법의 위반으로 드러난다. 이 이야기 속에 숨겨져 있었던 신적 진멸법(盡滅法)의 위반(42절)은 여리고와 아간의 운명을, 사울과 아각(삼상 15장)의 이야기를, 그리고 아간의 범죄(수 7장)를 생각나게 한다. 이 상황에서 동무 예언자에게 매를 맞고 붕대로 얼굴을 가린 한 예언자가 아합에게 나타난 것이다(35-43절). 36절에 따르면 동무 예언자를 치기를 주저한 예언자는 사자에게 물려죽었다. 아합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으므로 이 죽임당한 예언자의 운명을 따를 것임이 암시되었다. 형제 관계에 있는 왕(아람 왕)을 죽이는 일만큼이나 동무 예언자를 치는 것도 원통한 일이지만, 이 두 가지의 하나님의 명령들 중 하나만 불순종해도 그 결과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 변장한 익명의 예언자는 아합에게 “재판 비유”를 들려줌으로써 왕이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심판하도록 의도한다(비교. 삼하 12:1-4; 14:5-7). 한 달란트나 되는 많은 양의 은(39절)이 석방 보석금으로 정해진 것을 보면 갇혀있는 죄수가 고위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 죄수를 지키는 과업을 받은 사람이 그를 지키지 못하여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할 상황에 내몰리자 왕에게 읍소하게 된 것이다. 아합은 40절에서 “네가 스스로 결정하였으니 그대로 당하여야 하리라”고 대답한다. 예언자는 이 아합의 판결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합도 자신이 결정한 바를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41-42절은 포획당한 적군의 인적 및 물적 전리품을 전적으로 진멸하도록 명령하는 거룩한 전쟁의 원칙을 아합이 위반했음을 공포한다. 하나님께 “바쳐져야(헤렘) 할 사람”(42절)벤하닷을 그냥 풀어준 것이다(13, 28절). 결과적으로 익명의 예언자는 아합과 그의 백성들은 벤하닷을 대신하여 이 치명적인 신적인 진멸법(盡滅法)의 위력을 맛보게 될 것임을 선포한다.


아합과 미가야 벤 이믈라
열왕기상 22:1-40은 미가야 벤 이믈라라는 예언자들 통해 아합을 파멸시키는 하나님의 계략을 보도한다. 아합 왕이 아람에게 빼앗긴 길르앗 라못을 회복하기 위하여 전쟁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야웨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자신의 사돈이었던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까지 합류시켜 출정하려고 한다. 이 때 임전(臨戰)시 하나의 신탁을 얻어내는 평상적인 관습(왕상20:13-14, 28; 삼상 23:1-4)이 동원된다(5절). 먼저 400명의 예언자들에게 문의하자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승전을 선사하실 것이며 따라서 왕은 길르앗 라못을 회복할 것이라고 선언한다(6절). 그런데 두 번째 의견을 구하는 여호사밧의 의례적인 질문이 갈등을 도입한다(7-15절). 여호사밧의 신중한 태도에 영향을 받은 아합은 항상 자신에게 항상 불리하고 위협적인 예언을 하여 감옥에 가둬둔 미가야 벤 이믈라의 의견을 묻기에 이른다. 미가야가 소환되는 동안에 이미 아합의 영향 아래 있는 400 명의 예언자들은 그들의 긍정적인 신탁을 한층 더 열렬히 지지하고 있다. 미가야와 있게 될 나중의 갈등 상황에서 이 400 명의 예언자들을 대표할 대변인으로 소개되는 시드기야도 백절불굴(百折不屈)의 공세성의 상징물을 가지고 그들의 의견을 지원한다(11절). “상서로운 예언을 하라”는 경고(13절)를 받은 미가야도 예상을 깨고 400인의 선지자와 한 목소리를 낸다(15절). 그래서 시드기야와 미가야에 의하여 중복적으로 지원받은 아합 왕은 마침내 전쟁 돌입과 승리를 향하여 순항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때 이 전쟁보도문의 진행을 가로막고 아합과 미가야 사이의 적대감을 강화시키고 더 나아가 아합과 하나님 사이의 적대 관계를 확정하는 제 삼의 갈등 상황이 도입된다(16-23절). 정작 아합 왕이 미가야가 진실을 숨기고 있다고 판단한 나머지 미가야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미가야는 두 가지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참 메시지를 전달한다. 전쟁 패배와 아합의 몰락, 죽음을 예고한 것이다.


17절에 나오는 미가야의 환상은 두 가지 항목의 정보들을 제공한다. 첫 번째 환상은 왕의 죽음을 암시하는 목자의 부재(不在) 상황과 평화롭게 귀가하는 백성들의 대조적인 귀향 장면이다(왕을 “목자”라고 부르는 구절들인 삼하 5:2과 스가랴 13:7 참조). 두 번째 환상, 즉 하나님의 천상 보좌의 환상(욥 1:6-12; 사 6:1-8)은 전쟁 패배의 궁극적 원인을 제시한다. 이 천상 음모는 10-12절에서 반영된 아합의 지상 보좌에서 회의하는 장면을 반어법(反語法)적으로 상쇄하고 있다. 미가야의 예언대로 아합 왕은 길르앗 라못 회복 전쟁에서 패배하여 적군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에 의해 전사하기에 이른다. 아합 왕은 예언자의 탄핵, 심판, 경고에 둘러싸인 채 마침내 파멸에 이르렀던 것이다. 미가야 벤 이믈라는 하나님의 어전 회의에 참여하여 지상 왕들과 왕조들의 운명을 가르는 신탁의 중개자였던 것이다(렘 23:18-22). 초월적인 준거를 갖고 지상의 정치권력을 견제했던 것이다.


4. 여로보암 2세와 아모스의 대립과 갈등(아모스 7:10-17)
주전 8세기 예언운동은 인간 왕들의 정치에 대한 환멸과 탄핵을 연료로 삼아 발진(發進)한 과격한 신정통치적 이상의 견인차였다. 예언자들의 눈에 비친 왕정시대는 사사시대의 영적 도덕적 무정부 상태와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전제왕권을 인간 왕들은 하나님의 직접적 통치를 방해하는 장애물들임이 드러났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어전회의에서 의논된 의제(agenda)를 지상의 왕들과 지배층에게 전달하는 거룩한 전령들이었다. 아모스가 활동하던 주전 8세기는 곡식 시장의 왜곡, 거대한 지주와 농지 탄생, 채무 급증, 히브리 자유 자작 소농들의 몰락과 채무노예화 가속화를 목격하였다. 임금의존 노동자들의 증가는 이스라엘과 유다 사회의 기초를 붕괴시키고 있었다. 여로보암 2세 재위시 지진이 일어나기 전 2년 전에 사마리아의 종교적 수도격인 벧엘에 유다의 농촌 드고아 출신 아모스가 출현하였다. 그는 벧엘 성소 앞에서 성소에 출입하는 경건한 예배자들을 향하여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산사태가 오고 있음을 고지한다.10)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함을 친히 맛보게 될 사태가 다가오고 있다.”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흑암”을 선포하였다.
아모스 7:10-17은 드고아 출신 아모스가 벧엘에 가서 당시의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의 통치를 위협하는 심판예언을 토해낸 상황을 보도한다. 여로보암 2세는 현실정치적으로 유능한 왕이었고 부국강병책을 통해 왕국 중흥의 기틀을 다진 왕으로 평가되었으나 하나님의 눈에는 악하기 그지없는 왕이었다. 여로보암 2세는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포로로 잡혀갈 것이다. 이 거침없는 예언에 벧엘 제사장 아마샤가 나서서 반발하자 아모스는 그에게마저 무서운 심판 선언으로 응대했다. 여로보암 2세에 대한 아모스의 거룩한 도발은 그 자신이 정치권력과 대립과 갈등을 마다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신명기적 예언자 전통에 굳건히 서 있는 인물임을 입증한다.


5. 유다 왕들11) 과 이사야의 대립과 갈등
아하스와 이사야
이사야의 본격적인 공적 활동은 유다 아하스 때 발생한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기간에 일어났다. 앗수르 제국의 남서진을 막기 위해 아람(시리아)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을 맺어 예루살렘을 에워쌌다. 이 상황을 보도하고 있는 열왕기하 16장, 역대하 28장, 그리고 이사야 7장에서도 이 동맹세력들의 유다 침략의 목적을 뚜렷이 말하지 않고 있다. 이사야 7장에서는 “저항하는” 아하스에 대한 두 동맹군의 입장이 유다 왕 아하스를 폐위시키고 다브넬이라고 불리는 정체불명의 인물을 왕으로 세우는 것임을 말하고 있을 뿐 그들의 전쟁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말하고 있지 않다. 앗수르 자료들을 성서 본문들과 함께 읽어보면, 당시의 국제정치 맥락상 이 시리아-에브라임 동맹이 앗수르 제국의 서남진을 봉쇄하려는 시리아-팔레스틴 지역 왕국들의 공동 방위체제 구축 정도의 의미를 가졌을 것이라는 점을 추정해 볼 수 있다.12) 앗수르 제국이 주전 740년경부터 시리아 북쪽 소왕국들을 차례로 정복했으며 주전 735-734년에는 블레셋 평야를 거쳐 애굽 강(the Brook of Egypt) 앞에까지 진출하여13) 상업 및 군사적 활동을 위한 교두보까지 마련해 두었기 때문에 시리아-팔레스틴 지역의 소왕국들을 정복하는 일은 시간문제로 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국제정치적 맥락에서 볼 때 앗수르 제국의 제국주의적 확장의 일차적 피해지역으로부터 약간 벗어나 있던 유다는 시리아-에브라임보다는 앗수르의 범람과 팽창에 대한 위기감을 덜 느꼈을 것이며 이 동맹에 가담하는 일을 주저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다를 공격하는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 기획되었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람은 북이스라엘의 도움을 받아 반앗수르 전선 가담을 설득하는 목표를 넘어서서 아예 아하스 대신 벤 다브넬이라고 하는 인물(아람 이름을 가진 사람)14) 을 왕으로 세워 사실상 다윗 왕조의 대를 끊으려고 했다. 이런 계획을 가진 시리아-에브라임 동맹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에워쌌던 것이다(1절). 예루살렘과 가까운 에브라임 산지에 주력 군대를 주둔시키고 성을 함락시킬 듯한 기세로 육박하는 시리아-에브라임 동맹군 앞에서 아하스 왕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2절). 2절의 “떨다”라는 동사(nûă‘)의 주어는 3인칭 남성 단수인 아하스의 마음인데 왕의 떠는 마음이 백성들에게 전염되어 함께 떨게 되었다.15)
3-9절은 스알야숩 예언으로 아하스를 도우시려는 하나님의 비상한 노력을 보도한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사야와 그의 아들 스알야숩은 전쟁과 같은 장기간의 위기상황을 염두에 두고 상수도를 예루살렘 성내로 끌어들이려는 수도 공사 현장에서 왕과 대면한다(3절). 이사야는 아하스 왕에게 시리아-에브라임 동맹군을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그 이유는 침략군 세력이 두려워할만한 수준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두 동맹국 왕을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라고 말한다. 이와 동시에 이사야는 스알야숩의 이름을 통해 이 두 나라의 군사적 패주를 암시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으라고 설득한다(왕하 16:7-9; 대하 28:16). 3절이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을 강조한 것을 보면 이사야가 벌써 시리아-에브라임 동맹이 형성되는 초기부터(3년 전부터) 이 군사동맹의 실패와 좌절을 예언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16) “스알야숩”의 문자적 뜻은 “오직 남은 자만 돌아가리라”라는 뜻이다. 전쟁의 상황에서 “남은 자”는 항상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를 가리킨다. “남은 자만 돌아간다”는 불길한 예언은 고대 근동의 전쟁결과를 보고하는 문서에 관용어법으로 자주 등장하는 “남은 자”와 “돌아간다”의 결합이다.17) 여기서 두 연합군 군사중 오직 소수의 군사들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이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18) (사 17:1-7). 그래서 3절에만 구원신탁에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서너 개의 명령어가 등장한다.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두려워 말라.” “낙심치 말라.” 특히 “두려워 말라”는 분명히 구원신탁이다. 이 명령은 다른 세 개의 명령동사들로 둘러싸여 있다. “두려워 말라”라는 구원신탁의 경우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혹은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라는 말이 부착되는데, “임마누엘”이라는 아이의 이름에 부착되어 있다. 양식비평적인 입장에서 보면 “두려워 말라”라는 계명은 “임마누엘” 예언과 합하여 구원신탁을 완성한다. “두려워 말라”라는 구원신탁은 “거룩한 전쟁” 개시 맥락에서 사용된 “두려워 말라” 양식과 비교된다. 즉 “두려워 말라”는 권고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으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19)


4절 하반절-5절에는 왜 이사야가 아하스 왕에게 두 왕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고하는지 보다 구체적인 이유들이 나온다. 첫째, 아람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 왕 베가(Pekah)가 아하스에게 노할지라도 그들은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성기를 지난 한물간 세력들이라는 것이다.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는 이미 심판의 불에 타고 있는 쇠락한 나라들이라는 것이다. 혹은 거의 다 타버린 부지깽이라는 것이다.20) 이사야는 두 나라의 정세와 세력의 추이를 정통으로 숙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사야는 현실정치적 통찰력(political sagacity)과 신앙적인 확신을 통합하여 아하스에게 지혜로운 길을 권고한 것이다. 둘째, 아하스를 폐위시키고 예루살렘을 차지하려는 그들의 계획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기 때문이다.
5-6절은 이사야가 두 왕국의 유다 침략 의도를 상당히 자세하게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3-4절의 명령(“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아하스를 만나 그에게 이르기를)을 듣기 전부터 이사야는 시리아-에브라임 동맹세력의 음모와 악한 꾀들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 동맹이 유다의 국내정세에 끼치는 파급효과를 차단하려고 애써 왔던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에게 이 동맹군의 계획들이 악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그들이 공공연히 유다의 다윗 왕조를 멸절시키고 벤 다브넬이라고 하는 정체불명의 아람식 이름을 가진 인물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베풀어주신 확실한 은혜(헤세드)를 무효화하겠다는 결의 아닌가?(시 89:3-5, 28-29, 34) 다윗 왕조는 삼하 7:12-16이래로 야웨 하나님의 봉신왕조로서 야웨의 계약적 돌보심과 보호 하에 있는 집이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정통신학인 이 다윗-솔로몬 왕정신학 전통의 계승자였기 때문에 다윗 왕조가 끊어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팔레스틴을 정치적으로 장악하려는 앗수르 제국의 정치적 야심에 대한 현실정치적 통찰(두 동맹국 세력의 미약함에 대한 통찰) 위에 이러한 신학적 확신까지 겸하여 가진 이사야는 시리아-에브라임 동맹군의 필연적 실패와 좌절을 확신하였다. 이사야는 유다의 지도층, 귀족, 상류사회의 타락과 부패를 가혹하게 공격하였지만(1:3-9; 38:6-10) 유다의 초지일관 왕정신학과 시온신학21) 의 신봉자로 남아 있었다.
7절에서 이사야는 다윗에게 베푼 하나님의 거의 일방적인 약속 때문에 결국 시리아-에브라임의 도모가 서지 못할 것을 직관적으로 깨달았음을 보여준다. “이 악한 시리아-에브라임 동맹의 악한 도모들은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헤세드가 지탱하고 있는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파괴하려는 이 두 왕국의 도모는 좌절될 것이다. 8-9절에 따르면 그들의 도모는 좌절될 뿐만 아니라 그 두 왕국 자체가 곧 멸망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사야는 여기서 아하스에게 단지 정적주의적인 수동적 경건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역사 주재를 믿으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9절 하반절은 아하스의 영적 파탄을 예기하고 간접적으로 책망한다. 만일 이상의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믿지 못하면 아하스와 유다는 정녕 굳세게 서지 못할 것이다. 다윗의 집은 영적 및 정치적 주체성을 확보하지 못할 것이며 동맹국의 힘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9절 하반절의 “믿지 아니하면”은 직역하면 “머물지 않으면(신실하지 않으면)”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아하스가 하나님을 굳게 믿어야 그의 왕국의 입지가 견고해 지고 안전보장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표현은 다시금 “네 집과 네 왕국이 내 앞에서 굳세게 되리라”(삼하 7:16)고 말하는 다윗 언약을 상기시키고 있다. 다윗에게 베푼 하나님의 약속을 알아야 8절 상반절과 9절 상반절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다윗 언약을 중심으로 유다의 안전보장의 근원을 추적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유다의 머리는 예루살렘이요 예루살렘의 머리는 야웨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다윗 계열의 아들, 유다 왕이다.” 유다의 머리는 예루살렘이요 예루살렘의 머리는 야웨 하나님이시다. 예루살렘을 굳게 지키기로 약속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두 왕국들의 궁극적 후견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이다. 다윗 계열의 아들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신실함을 보여줄 것을 약속하셨다(시 89:2; 시 2:7). 이사야의 논리는 “만일 다윗의 후손 왕이 이 약속을 기억한다면 아하스 왕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요약하면 이사야가 요구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약속)에 대한 믿음과 영접, 약속에 신실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믿는 자 안에서 창조해주시는 상황초월적인 확신을 의미한다.22) 그런데 아하스와 다윗 왕가가 두 침략군의 세력을 과대평가하여 다른 더 큰 외국 군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도(왕하 16:5-10) 다윗 왕조에게 걸려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다. 이런 불신앙에 대하여 대파멸이 올 것이라는 경고가 발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결국 7:15-25은 아하스가 스알야숩 예언을 믿지 않아 굳게 서지 못하면 오히려 유다 자체가 대파국적 몰락을 경험하여 오직 소수만 남는 아주 작은 나라로 축소될 것임을 증거한다. 아하스가 스알야숩 예언을 믿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열왕기하 16:5-10을 보면 아하스는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에게 군사원조를 요청하며 스스로 앗수르의 봉신으로 자신을 속박하였음을 알 수 있다.23) 여기서 비로소 우리는 시리아-에브라임 동맹군을 “무서워하지 말고 동요하지 말라”는 이사야의 충고가 어떤 현실정치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었던가를 알게 된다.


히스기야와 이사야
이사야 39장은 36-38장의 경건하고 신중한 히스기야 이미지와는 약간 다른 히스기야를 보여준다. 이 장은 치명적인 질병에서 기적적인 치유를 맛본 후 15년을 더 살 수 있게 된 히스기야가 다시 바벨론 제국과의 동맹정책을 기획하다가 나라를 대파국적 재난으로 몰아넣는 과정을 보도한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후에 또 다시 강대국을 의존하려는 히스기야의 태도는 미래의 대재난 즉 바벨론 침략을 잉태한다. 여기서 이사야는 히스기야를 국가적 멸망을 자초한 불충스러운 왕이요 경거망동에 가까운 행동으로 비판을 받는 인물로 규정한다.
1절은 39장을 38장 다음에 일어난 사건으로 읽도록 유도한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딘이 히스기야의 치유를 계기로 히스기야에게 위로의 사절을 보낸다. 이 때가 주전 705년 경이다. 므로닥발라단과 히스기야 둘은 앗수르 제국을 향한 공동의 저항정신을 공유하는 사이다. 바벨론 왕이 “글과 예물”을 히스기야게 보냈다는 말이 주목을 끈다. 단지 위로 사절만을 보낸 것이 아니라 “정치적 아젠다”를 보낸 것을 의미한다.
2절에 나타난 히스기야의 반응은 이런 추측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든다.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절단을 아주 기뻐하여 맞이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유다의 모든 무기창고와 보물창고, 그리고 은금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들을 보여준다. 이 상황은 주전 705년 어간에 실제로 일어났던 므로닥발라단의 반앗수르 동맹 정책과 관련된 일일 것이다. 이 때 므로닥발라단은 히스기야에 반앗수르 동맹결성을 제의하였을 것이다.24) 3-4절은 히스기야의 바벨론 사절단 환영 상황에 끼어드는 이사야를 보여준다. 이사야는 관찰자의 시점을 떠나 즉각 따지듯이 히스기야 왕에게 힐문한다(3절).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이사야의 추궁하는 듯한 질문에 히스기야는 변명조의 대답을 한다.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여기서 원방을 강조하는 것은 유다에게 대하여 위협적 적대세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가나안 원주민들과의 통혼과 동맹을 금지하는 신명기의 원칙(신 7:1-3)에 따르면 “원방”에서 오는 나라와 화친을 맺는 것은 금지당하거나 정죄당하지 않는다. 여호수아에게 화친을 맺자고 달려온 기브온 세력들도 “원방”에서 온 것처럼 꾸미지 않았던가?(수 9:6, 13-15).


4절에서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에게 또 한번 더 추궁하듯이 묻는다.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이 간결한 질문에는 엄중하고도 가혹한 질책이 들어 있다. 어떤 나라가 특정 국가의 사절단에서 궁전을 속속들이 보여주는 행위는 침략행위를 자초하는 행위라는 암시가 들어있다. 이런 함의가 깃든 날카로운 이사야의 질문에 대하여 히스기야가 대답한다.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보물은 보이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 이 거침없는 대답은 히스기야가 냉혹한 현실적 국제관계에 얼마나 무지하고 순진한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있는 것을 다”와 “보이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다”라는 표현은 히스기야가 바벨론의 사절단을 감동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필사적이었는가를 짐작케 해준다. 히스기야가 바벨론의 호의를 얻어 동맹관계를 맺으려고 안간힘을 썼음을 보여준다. 이사야의 자세한 심문은 이 어리석은 행동의 국제 정치적 함의들을 깊이 연구해 보는 하나의 기회를 제공한다. “바벨론”(1, 3, 7절)과 “다, 혹은 하나도 빠짐없이”라는 말들의 반복은 역사의 지평선에 점차 떠오르는 바벨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모든 것”을 빼앗길 불길한 미래를 강조한다. 또 다른 한편 히스기야의 대답(3절)은 중차대한 요점을 노정시킨다. 즉 그들은 “먼 나라”에서 왔다는 주장인데 이것은 열왕기상 8:46에서 예견된 “포로된 땅” 즉 “먼 땅”의 불길한 메아리로 들린다.
5-7절은 히스기야의 경거망동한 친바벨론 외교 관계 및 동맹 추구정책이 초래할 미래의 재난을 예고한다. 미래에 유다 왕실에 있는 모든 소유와 히스기야 왕의 열조가 그 때까지 쌓아둔 모든 보물들과 귀중한 역사적 상속물들이 모두 바벨론으로 송출되어 남을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2절에서 왕궁의 모든 보물들을 다 보여준 히스기야의 행동은 바벨론의 유다 왕국 약탈과 침략행위를 돕는 시뮬레이션 실연(實演)이었음이 드러날 것이다. 어떤 점에서 바벨론 유배는 히스기야의 경거망동한 친바벨론 동맹외교 정책이 자초한 국가적 재난이라는 것이다. 7절은 유다 왕실을 이을 법통이 끊어질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사태가 전개될 것임을 예고한다. 히스기야의 후손들 중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될 것이다. 왕자 중 몇몇이 바벨론 왕의 환관이 된다는 말은 자칫하면 왕조의 법통이 끊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사야의 히스기야에 대한 책망과 비판은 가혹하고 엄중했다.


6. 유다 왕들과 예레미야의 대립과 갈등(예레미야 21-38장)25)
시드기야와 유다의 왕들과 예레미야(21-23장)
21:1-10의 단락을 여는 첫 예언은 유다가 바벨론 군대들에 의하여 임박한 포위의 위협에 직면했을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사건을 다룬다. 이것은 아마도 B.C. 588년 혹은 B.C. 587년 초기의 일이었을 것이다. 애굽을 의지하여 바벨론의 정치적 지배에 대하여 공공연히 반항함으로써 그와 나라의 운명을 이미 확정지은 후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로부터 어쩌면 구원의 확신과 지지의 말씀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확실하고 단호하게 어떤 지원하는 말이나 희망의 메시지를 제공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는 바벨론에 대한 충성을 철회하는 왕의 행동은 심각하게 오도되었으며 그와 그의 왕국을 파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대한 바벨론의 포위의 결과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파괴적이며 유다의 정치적 사회적 대파국(大破局)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확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하는 예루살렘과 유다 왕국을 보호하는 대신에 큰 분노와 노여움으로 그들을 대적하여 싸우실 것이기 때문이다(5-6절). 야웨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지 않을 것이며 대신에 그들을 대적하여 싸우실 것이라는 것이다(사 28:20-24; 29:1-8 “시온을 공격하시는 야웨의 이상한 행동”).


왜 예레미야는 바벨론에게 반역하는 시드기야에게 그렇게 전적으로 대적하는 것처럼 보였을까? 무엇보다도 예레미야는 왕이 취하는 외교적인 행동이 도저히 성공할 가망이 없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애굽과의 정치적인 동맹을 반대하는 예레미야의 설교 밑에 작용하는 이유에 대한 보다 더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왕정의 본질과 왕의 의무들에 대한 예레미야 자신의 확신들(21:11-14) 때문에 시드기야의 정책에 더욱 더 적대적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시드기야가 정의를 수호하고 압제 당하는 자를 보호하는 전통적인 왕들의 의무들에 너무나 크게 이탈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지지를 유보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 악한 왕들과 거짓된 낙관주의의 깊은 유착관계에 대한 예레미야의 비판이 그로 하여금 시드기야의 반바벨론 반역정책의 성공가능성을 부정했으며 더욱더 비판적이었다는 것이다.26) 예레미야는 유다에서 얼마나 쉽게 대중적인 감정들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을 남용하여 다윗 왕조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로 변질해 버리는가를 목격하였다. 이런 정황은 다윗 왕조에 대한 예언자의 깊은 의심과 때로는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다윗 왕조는 거짓된 믿음의 대상이 되었고 환영(幻影)을 추구하는 근거가 되었다.27)
22:10-12의 짧은 예언은 살룸(여호아하스)의 폐위와 애굽으로의 유배 사건(B.C. 609년)에 의하여 촉발된 예언을 가지고 왕정 제도에 대한 예레미야의 이해를 좀더 자세히 부연한다. 요시야의 죽음 이후에 살룸은 약 3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다가 애굽 왕 느고(Neco)에 의하여 폐위되고 그의 동생 엘리야김(야호야김)이 왕위에 올랐다. 살룸의 폐위와 유배에 대한 예레미야의 짧은 애가는 왕들에 대한 예레미야 자신과 백성들의 태도에 대하여 중요한 사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너희는 죽은 자[요시야]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간 자[살룸]를 위하여 슬피 울라(22:10).” 22:13-19은 살룸 대신에 왕위에 오른 여호야김에 대한 정죄를 내뿜는다. 여호야김은 B.C. 609년에 살룸이 애굽의 느고에 의해 폐위되고 애굽으로 유배되기 전에 유다의 왕위에 올랐다(왕하 23:24). 그 자신은 요시야의 또 다른 아들이었는데 열왕기하 23:35에서 역사가는 여호야김이 많은 양의 은과 금을 애굽에게 조공으로 바쳤다고 보도한다. 그는 일반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강요함으로써 은과 금을 강제로 짜내었던 것이다. 예레미야의 비난의 주요 요점은 자신의 왕위를 유지하고 왕실을 지키기 위하여 백성들로부터 혹독한 세금을 강요하였다는 사실에 맞춰져 있다. 그의 비난은 또한 왕궁 복합건물의 확장을 위하여(22:13-15) 재원을 낭비하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여호야김은 백향목으로 궁궐의 창문들을 중건하였던 것이다. “불의로 자기 집을 짓는 왕”(13절)이라는 생각 속에는 아마도 말장난(語戱)이 내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레미야의 예언자적인 정죄의 구체적인 요점은 그 왕이 많은 자유 시민들을 자기의 궁궐 확장 및 중건 공사에 임금도 주지 않고 강제로 동원하여 사실상 노예 신분으로 강등시켰다는 사실이다(22:13).
여호야김과 관련하여 지적할 만한 또 하나의 사실이 남아 있다. B.C. 605년의 갈그미스(Carchemish) 전투에서 애굽 군대가 바벨론 군대에게 패배한 후에 여호야김의 동맹군이자 지원자인 애굽 자체가 이제 패배당하여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서진(西進) 원정의 야심들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었음이 분명해 졌다. 일단 유다가 바벨론의 정치적인 지배 아래 복속된 지역으로 끌려들어 온 후에도 여호야김이 그 새 종주(宗主) 아래서 그의 왕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비열한 방식으로 그의 권력을 유지했음을 가리킨다. 그에 대한 예레미야의 거친 정죄는 성서 전체를 통하여 한 통치자를 향하여 가해진 비난들 중에서 가장 정확하게 겨냥된 비난들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그러나 네 눈과 마음은 탐남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강포를 행하려 할 뿐이니라”(22:17).


이 정죄의 예언은 18-19절에서 여호야김을 기다리는 수치스러운 종말에 대한 날카롭고 생생한 묘사로 진행된다.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밖에 던지우고 나귀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19절).


여호야긴에 대한 예레미야의 입장(22:24-30)
여호야김은 B.C. 598년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대들의 포위 위협 아래 놓여 있었을 때 죽었다. 그 후 그의 아들 여호야긴(고니야)이 대신 왕위에 올랐다. 그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항복하기 전에 오직 약 석 달 동안만(왕하 24:8) 예루살렘에서 왕노릇하다가 폐위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왕하 24:15). 그는 37년 후에 답답한 감옥살이에서 풀려났다(왕하 25:27-30). 여호야긴에 대한 또 하나의 예언자적 위협이 22:28-30에서 제시되어 있다. 이번에는 그 위협은 시적인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은 왕의 폐위와 유배를 슬퍼하는 백성들에게 들려진다. 여기서 여호야긴 왕은 깨어져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버려진 항아리에 비유된다.28)


다시 시드기야와 대결하는 예레미야(예레미야 32:1-15)
이 단락의 역사적인 무대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어떤 집에서 연금상태에 처해져 있지만 방문자들을 맞이하는 것마저 방해받지는 않고 있는 상황을 보여 준다(2절). 이 가택 연금과 같은 억류는 확실히 예루살렘 성을 향한 심각한 위협에 의해서 촉발되었을 것이며 또한 동시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거민들의 사기를 한층 더 꺾어 놓을지도 모른다는 예루살렘 당국자들의 염려에 의하여 촉발되었을 것이다. 비록 이 사건의 역사적인 무대가 애굽으로부터의 공격 위협 때문에 바벨론 군대들이 잠시 동안 예루살렘 성을 봉쇄한 포위망을 철수시켰을 때였을 가능성이 있을 지라도, 본 단락에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상황은 예루살렘이 이미 수개월 동안이나 포위 상태에 있어 왔다는 것이다. 만일 이 단락에서 보도되는 사건이 바벨론 군대들의 포위 봉쇄선이 잠시간 해제되었을 때 일어났다면 그것은 예레미야와 예레미야가 사라고 요청을 받았던 밭이 있었던 아나돗의 친족들간의 통신과 연락의 자유를 설명하게 되며 또한 왜 갑자기 상업적인 거래가 갑자기 중요해 졌는지 그 이유를 제공할 수 있었다. 본 단락은 또한 하나의 보다 더 중요한 신학적인 특이점을 제공한다. 우리가 34장의 보도에서 배우듯이 포위 장애물의 잠정적인 철수는 예루살렘 거민들 사이에 엄청난 희망과 안도의 물결을 불러일으켰다. 비록 오해와 설익은 기대였음이 드러났지만 그들은 이 포위의 해제에서 그들의 시련이 끝났으며 그들의 도시와 삶에 대한 위협세력이 제거되었다는 하나의 표적을 보았다. 근거 없는 낙관주의와 애굽의 군사적 지원에 대한 오도된 과대평가에 근거한 그러한 거짓된 희망에 대항하여 예레미야는 진정한 희망의 유일하고 신뢰할 만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지와 목적에 대한 앎에 의해서만 확정될 수 있는 희망이었다.
예레미야가 아나돗으로부터 그의 사촌 하나멜의 방문을 받았던 때는 바로 바벨론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포위망을 잠시 해제하였을 때였을 가능성이 제일 크다. 하나멜은 예레미야의 근족(近族) 선산(레 25:25-31을 참조하라.)의 일부였던 밭의 매매를 성사시키려 왔다. 그 밭을 살 수 있는 권리는 우선 그 소유자의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떨어졌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그러한 고통스러운 때에 이 구매의 특권을 기꺼이 고려하였던 가장 가까운 친족이었음이 틀림없다. 아나돗에 있는 그 밭을 살 것인지를 결정하면서 예레미야는 불원간 정상적인 경제적 및 사회적인 활동이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결국 아나돗의 밭을 사는 것이 정상적인 경제적 및 사회적 활동이 재개되면 이익을 가져다 줄 거래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믿음의 발걸음으로 그는 그의 구매 행위가 그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장래의 의도들(15절)에 관련하여 하나의 보다 더 광범위하게 상관성이 있는 표지로서 하나의 예전적인 의미(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믿게 만드는 행위-역주)를 가졌다고 느꼈다. 그 표지의 심오한 의미는 사실상 이 구매행위가 단도직입적인 상업적인 거래처럼 보이는 단순성 때문에 거의 가려져 버렸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는 여호야김 (예레미야 36장)
본 단락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담을 한 두루마리의 준비, 강독, 파손, 그리고 새로운 두루마리의 교체를 둘러싼 상황을 상당히 상세하게 구술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저항하는 여호야김이 말씀 두루마리를 파괴하자 하나님께서 똑같은 말씀을 다시 예레미야에게 허락하셔서 바룩이 두루마리에 기록하기에 이른다. 여호야김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전령으로서 예레미야의 역할을 대적하고 전적으로 무시했던 것이다. 예레미야는 그 왕이 바벨론 왕을 대적하기 위한 헛된 시도 속에서 왕국의 안전을 희생시키면서 까지도 무모하게 모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감지하고 바벨론에 대한 저항의 무용성과 필연적 좌절을 역설했던 것이다. 예레미야는 어떤 조건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여호야김에 대한 전면적인 탄핵과 비판에 투신한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 비전(렘 1:10-14)에 따라 그는 썩고 병든 유다 왕국을 부서뜨리고 파괴하는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받고 있다.


예레미야와 시드기야(예레미야 37-38장)
예레미야 37-38장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39-45장에서 하나의 후속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시드기야가 그의 조카 여호야긴을 대신해서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오른 후 느부갓네살에게 반역한 후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취급한다. 그 때에 유다 왕국과 왕정 자체의 몰락이 일어났고 유다는 그 이후 뒤이어진 고통스러운 세월들을 보냈다. B.C. 588년과 B.C. 586년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들이 예레미야의 예언 활동의 가장 극적인 결말을 형성하였다. 예레미야가 겨냥하여 예언을 선포하였던 사람들과 소수의 유력한 정치 지도자들은 매순간마다 아니 결국은 결정적으로 예루살렘과 그 거민들의 생명을 구원해 줄 것 같은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모든 조치들을 무엇이든지 시도해 볼 열의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진실로 완고하게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청종하기를 거절하였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사실을 고집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 한 가운데 시드기야가 있었다.
예레미야와 유다의 정치지도자들 사이에 벌어졌던 갈등 안에서 그 갈등을 촉진시킨 다수의 요인들이 지적될 수 있다. 예레미야 37-38장에서 드러나듯이 가장 두드러진 요인은 시드기야 왕의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태도였다. 그는 예레미야의 상황 진단에 대하여 반 정도만 확신하였던 비교적 결단력이 모자란 인물이었다. 예레미야에 대한 그의 대답은 바벨론에 대한 모든 고분고분한 태도와 충성심을 철회할 결심을 단호하게 굳힌 일단의 완고하고 저돌적인 궁중 참모들과 신하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 게다가 유다의 노회(老獪)하고 유혹적인 남쪽 국경의 이웃인 애굽은 그 자신의 유익들을 위해서는 유다의 반(反)바벨론 반역을 부추기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순전히 정치적인 요인들 외에 거짓된 종교적 확신이 유다 지도층 사람들로 하여금 또한 예레미야의 메시지에 저항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전에 히스기야 시대에 산헤립으로부터 예루살렘을 구원해 내셨듯이(왕하 18-19장) 필요하다면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반드시 유다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예레미야와 왕권과의 대결을 담고 있는 이 일련의 복잡하게 얽힌 갈등들 중 첫 번째 기사(37:1-10)는 B.C. 587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한 바벨론의 포위망이 잠시 해제되었을 때에(34:8-22) 있었던 시드기야와 예레미야의 대화를 다룬다. 이것은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나라를 위하여 기도를 부탁하는 호소를 중심으로 전개된다(3절). 예레미야가 예언하였던 심각한 위협이 사라졌다고 전제한 시드기야가 사신을 예레미야에게 보낸 행동(3절)은 아마도 화해 조처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의 파괴의 위협은 여전히 유효하며(9절) 그 위협적인 파괴를 피할 어떤 길도 없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었을 때에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고 또 한 차례 상의하였던 사건에 대한 기사가 38:1-28에서 뒤따라 나온다. 비록 세부적인 면에서는 약간의 다른 점들이 있을지라도 37장에서 보도된 사건의 중복 기사라고 간주될 정도로 37장과 많이 닮았다. 여기서도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사람들을 바벨론 노선으로 투항하도록 부추기는 반역죄를 범했다고 정죄당하고 있다.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바벨론 전선으로 투항하라고 부추긴(2절) 예레미야의 독려의 매국적인 성격은 상당히 분명하다. 이미 군사적으로 승리할 희망이 전혀 없었던 유다의 정황을 냉정하고 현실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예레미야는 추가적인 광범위하고 불가피한 유혈의 참극을 초래하느니보다는 바벨론 포로살이의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편이 더 낫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시드기야는 항복하는 길이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길임을 반 이상 확신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두 장들의 신학적인 논지(論旨)는 밝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어리석음이다.




III. 나사렛 예수 안에서 합류된 왕의 길과 예언자의 길
사무엘상 8-12장(8:6-18)에는 인간 왕들을 비판한 구약 예언자들의 초월적 준거가 엿보인다. 여기에는 인간 왕정이 시작되는 경과가 소개되고 있다. 인간 왕이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등장하기 전에는 “사사(師士)”라고 불리던 제한적이고 임시적인 지도력을 행사하던 지도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렸다. 이런 “사사(師士)”와는 달리, 상비군과 관료조직을 유지하기 위하여 백성들을 상대로 징병과 징세를 강요할 수 있는 전제적(專制的) 지배자로서의 “왕”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왕이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신정통치를 위협하는 존재로 소개된다. 사무엘상 8:6-18(특히 11-18절)과 사무엘상 12:12-13은 왕의 전제군주화에 대한 모든 종류의 예언자적인 경고로 가득 차 있다. 징병권, 징용권, 납세권 등 일단 한번 뽑힌 왕은 야웨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유농민들을 임의로 지배할 것이라는 경고인 것이다. 여기서 사무엘은 자신과 같은 순회 지도자(사사)에 비하여, 인간 왕은 거의 전제권력을 소유한 지배자로 발전될 위험이 있음을 알린 것이다. 왕을 그토록 열망했던 이스라엘 지유농민들은 마침내 자신이 세운 왕 때문에 부르짖는 날이 올 것이다(18절) 이처럼 인간 왕은 사사 시대의 지도자들에 비하여 훨씬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고 권위를 위임받은 전시(戰時) 대비 지도자였기 때문에 지배자로 변질될 가능성이 많은 존재였다(삼상 8:19-20; 삼상 12:14-15). 이런 전제권력을 행사할 지도자의 출현이 이스라엘 사회에 끼칠 악영향을 사무엘 선지자는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와 같이 예언자들은 인간 왕이 언제나 하나님의 권력을 빙자한 전제군주로 변질될 수 있음을 늘 의식하고 그들의 권력남용과 권력강제를 비판하고 견제하였던 것이다(삼상 8장; 호 8:3-4; 13:8).
그리스도인들이 주(主)와 스승으로 섬기고 모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그가 당대의 정치적 갈등과 분쟁의 한 복판에서 격랑을 일으킨 분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세상 권력과 정치에 대한 근원적 공격이었다.29) 하나님의 다스림은 인간의 정치의 소멸을 가져오기 때문에 모든 세상 권력자들은 거의 필사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저항한다(정사와 권세, 보좌와 주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하나님의 통치로 세상권력에 희생당하고 죽임 당한 사람을 구출해 내는 대항정치운동이었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였다"는 예수의 선언은 하나의 중립적인 사실을 알리는 행위가 아니라 사람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거짓된 왕들을 보좌로부터 끌어내리는 정치운동이요, 앙시엠레짐(구체제)의 붕괴를 촉진시키는 운동이었다. 장로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헤롯당, 열심당원, 사두개인, 로마 총독부 등 여섯 개의 정파들과 집단들은 원래 각각 사이가 나쁜 세력들이었으나 예수를 대적하는 일에는 한 패거리가 되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한결같이 권력의지의 화신이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종교와 정치의 권력의 힘에 의지하여 사람을 지배하고 부당한 이익을 누리는 세력들이었다. 이에 비하여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권력의지의 영원한 포기였다(빌 2:6-11). 자신을 위한 권력을 영원히 포기하신 것이다. 그는 유대 광야에서 40일간 굶주리면서 하나님 아들, 즉 메시야로 살아가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직접 시험하셨다. 여기서 시험의 본질은 권력을 휘두르는 메시야(카리스마, 기적 능력, 특권적 권능 호소형 메시야)가 될 것인지 아니면 비권력적 메시야가 될 것인가를 결정짓는 시험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가? 마귀와 예수님 사이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정의가 다르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특혜적 권능과 권력을 휘두름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명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길을 간다. 예수님의 경우 하나님의 아들됨은 굶주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하여 복종함, 특혜 대신 비특권적 겸손, 그리고 부귀영화권세 대신에 하나님에 대한 복종을 위한 자기희생을 의미하였다. 예수님에게 아들됨은 배타적인 충성심이었다. 여기서 그의 일생을 특징지운 예수님의 신적 겸손과 자기비하가 시작된다. 마귀에게 절하지 않은 결단이 그로 하여금 권력자형 메시야의 길 대신에 수난과 모욕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메시야가 되게 하셨다.


이처럼 나사렛 예수는 구약성경에서 일관되어 흐르는 이상적인 왕도인 메시야적 왕도를 100% 육화시킨 왕이었다. 마가복음 10:35-45이 보여주듯이 예수님은 이상왕(메시야)의 관점에서 인간 왕들(지도자)의 통치행위를 예리하게 분석한다. 예수님은 여기서 인간 왕에게 위임된 지도력이 필연적으로 지배력(권력남용과 권력강제)으로 변질된 점을 직시한다. 예수 당시의 세계는 로마제국의 가이사(Caesar)의 권력(공포, 권력, 폭압)강제와 권력남용 아래 신음하고 있었다. 좀 더 국지적으로 보자면, 팔레스틴은 헤롯 가문과 로마 총독 빌라도의 권력강제와 권력남용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전세계적으로 모든 단위의 인간 왕(지도자)들이 하나님이 맡겨주신 권한사용의 한계를 넘어 권력남용과 강제적인 사용에 경도되었음을 간파한다. 예수님의 12제자들도 이런 권력남용과 권력강제로 특징지워지는 ‘왕’이 되려는 야심을 공공연히 표출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스승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을 도외시한 채, 영광중에 인자의 나라(메시야의 나라)가 임하면, 왕이신 예수님의 옆자리에, 즉 큰 자리에 앉으려고 각축하는 제자들을 불러 놓고, 예수님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섬기는 메시야 왕도를 가르치신다. 예수의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이 곧 하나님 나라가 영광과 권능 중에 임할 때, 즉 예수가 왕으로 등극할 때, 자신들을 왕 좌우편에 앉혀달라고 청탁하자, 10제자들이 격분한다. 이내 제자공동체는 “누가 크냐?,” “누가 왕이신 예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을 것인가?”하는 문제로 논쟁을 벌인다. 이 다툼의 상황 속으로 예수님이 끼어든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예수 자신의 지도력, 즉 섬기는 지도력(牧民愛衆型 지도력)의 본질을 보여준다. 이 마가복음 10:35-45 단락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표현은 예수님은 당시의 로마제국과 헤롯 가문의 통치 본질을 권력강제적 통치(kata-kurieuaw[임의로 주관])와 권력남용(kata-exousiazaw[권력 남용])이라고 정의하는 장면이다. 41절의 “소위 이방인의 집권자들”이라는 표현은 아주 흥미로운 표현이다. 원전의 문장을 직역하면 이렇다: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예수는 권력강제와 권력남용을 통하여 지배하는 사람들은 소위(순전히 외견상의) 집권자들일 뿐이다. 그들은 실제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즉 다스리지 못한다. 그들은 강제로 지배하고 억압적으로 내려 누를 뿐이지, 마음의 승복이나 복종을 얻어내지 못한다. 예수는 자신이 대안적인 지도자라는 자의식을 공적인 맥락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다. 예수는 에스겔 34장의 빛 하에서 자신을 선한 목자(“자신이야말로 선한 목자”라고 규정한다. 요한복음 10:10-15 원전에 보면 강조 목적 즉,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 목적 때문에 ego라는 일인칭 대명사가 사용되고 있다. “나는(ego)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1절).........나는(ego) 선한 목자라(14절).”
예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은 그가 목자없는 양같은 무리들의 선한 목자가 되기를 자청하였기 때문이었다(막 6:34). 결국 예수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주장하는 성서적인 맥락을 이해하려면, 에스겔 34장(특히 2-24절)을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에는 거짓 목자들, 삯군 목자들, 이리 떼들의 행태가 자세히 묘사된다. 거짓 목자들인 이스라엘 목자들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않는다(2-3절). 그들은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린다(4, 8절). 목자의 돌봄을 받지 못한 양들은 산과 높은 멧부리 곳곳에 유리되었고,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5-6절).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의 참 목자가 되셔서 흩어진 양을 찾아 구출하신다(12절). 양들을 만민 중에서 끌어내며 열방 중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시되, 좋은 꼴로 먹이신다(13-14절). 잃어버린 자를 찾으며 쫓긴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어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신다(16절). 하나님은 다윗 같은 이상왕을 보내셔서 양들을 찾아 구출하고 먹이실 것이다. 그 다윗이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실 것이다(23-24절). 이처럼 예수님의 지도력은 선한 목자의 지도력이다. 예수님은 목자없는 양같은 민중들을 위하여-자기의 인권과 권리를 지킬 수 없는 체제 밖의 사람들-민망히 여기시고 그들을 위하여 목숨을 던진 선한 목자다. 그런데 예수님의 권능과, 놀라운 지혜의 말씀과 성경해석, 그리고 병자들과 어린아이들, 여인들, 이방인들에 대한 자비심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예수님은 그 시대의 권력강제와 남용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던 지배자들과 어떻게 그토록 다를 수 있었을까? 빌립보서 2:5-11은 예수님의 지도력의 진정한 근원을 보여준다. 예수는 철두철미 자신(메시야 비밀)을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친정통치만 선포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진실로 하나님 아버지를 완벽하게 대표하고 대신한 메시야임을 증명하였다. 예수가 반역한 천사들의 세계, 즉 영적인 세계에 대한 통치권까지 구사하게 된 근거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한없이 낮춘 메시야, 그리스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a man after God's heart)였다. 그는 첫 아담과 달리 하나님과 동등됨을 강탈할 그 무엇으로 간주하지 않고(something to be robbed/grasped),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며, 곧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예수님의 길은 자기비움, 권력의 비절대화였다. 소위 집권자들은-겉으로 볼 때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지만 실은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는 권력강제자들, 임의주관자들임-권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강제로 움직이려고 하지만, 예수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완벽하게 낮춤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지도자다. 성서적인 정치는 희생과 섬김을 통한 정치였다. 이 메시야 왕도는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이 인간 왕들을 비판할 때 의존했던 바로 그 준거가 된 왕도였다.




V. 결론
우리는 이상에서 구약성서의 정치와 종교의 길, 왕과 예언자의 길이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과 메시야적 왕도 실천에서 합류되기까지는 항상 대립과 갈등의 궤도를 걸어왔음을 보았다. 왕은 현실정치권력을 대표하는 자로서 늘 권력남용, 권력강제, 권력의 사유화 유혹에 시달려 왔으며 왕의 정치적 오판이나 윤리적 도덕적 타락은 국가적 재앙임을 살펴보았다. 예언자들에게 비난받는 왕들의 죄악들은 대개 유사하였다. 민중 압제, 자유농민의 땅 박탈과 소작인화, 강대국과의 군사동맹을 위한 백성들을 향한 가렴주구 정책, 거짓된 종교와의 결탁, 우상숭배, 도덕적 타락과 윤리적 일탈 등의 죄를 인하여 왕들은 하나님의 탄핵을 초래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사실은 구약예언자들이 전제화하고 왕권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대언할 때 그들이 항상 가장 격렬하게 규탄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남발된 거짓 예언자들의 거짓된 안전보장 교리였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거짓된 안전보장 교리야말로 유다와 이스라엘 왕실이 정치적 오판과 학정과 압제의 정치를 행하며 죽음의 길로 치닫게 만든 가장 해악스러운 교리였다. 한국교회는 현실정치에 대하여 엄중한 예언자적 감시를 통하여 현실정치 세력의 민족파멸적, 민중압제적인 전제권력화를 막아야 할 예언자적인 의무에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늘 진리의 척도로 삼는 왕도와 예언자의 바른 관계는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 정치 안에서 정립되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1) 조지 W. 부시 대통령 체제 아래 지난 8년간 미국에서 작동한 불건전한 정교일치적 양상을 분석한 배덕만, 『미국 기독교우파의 정치운동』(서울:넷북스, 2007)(특히, 9-16쪽)을 참조하라. 기독교우파와 이명박 정부의 정교일치적 관계에 대한 비판과 혐의는 올 봄 5-6월 내내 한국사회를 달군 쟁점이었다(각 종 중앙일간지의 사설 등). 저자는 미국 우파의 정치참여가 보여준 우려할만한 사항을 몇 가지 지적했는데, 난해한 문제들을 협소한 신학적 전망으로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과, 복음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간의 균형감 잃은 동일시, 미국사회에 대한 손쉬운 신적 재가와 승인 등이 지적되었다(115-118쪽).
2) 사무엘상 24장에는 인구조사를 실시하려던 다윗에게 대드는 사람은 예언자가 아니라 요압이다(삼하 24:3 “내 주 왕은 어찌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대상 21:3 “어찌하여 이스라엘로 죄가 있게 하시나이까?”). 다윗의 인구조사는 성전 건축 시도와 함께 전제군주화의 첫 길이었다. 이스라엘은 야웨 하나님께 직접 속한 백성이라는 사사 시대의 전통(삼상 8장 사무엘의 강론이 강조하듯이)을 떠나 다윗은 이스라엘을 왕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신민으로 격하시키려고 한 것이다. 이 사건은 다윗의 재위 초기 시절에 일어났을 법한 사건인데 이 사건이 성전 터를 매입하게 된 계기가 되었기에 아마도 다윗 왕의 치세 말년에 일어났던 것처럼 보도되고 있다. 사사 시대에서 왕국시대로 진입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전제적 권력(징발권, 징세권)을 휘두르는 왕의 휘하에 따라 움직이는 왕의 백성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는데 하나님께서 신속하게 개입하여 다윗 시대에는 이 일이 일어나지 못하였다. 예언자 갓(Gad)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세 가지 심판 시나리오를 대언하여 선택하도록 촉구하는 역할만 한다(삼상 24:11-14; 대상 21:9-14).
3) 구약성서에는 정치권력의 일부로 흡수된 종교권력의 예도 보여준다. 아합 왕을 위해 거짓 예언을 선포하는 시드기야를 비롯한 400인의 거짓 예언자들, 이세벨의 식탁에서 먹던 아세라-바알 선지자 850명, 여로보암 2세를 지지하던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 유다 왕들을 맹목적으로 지지한 호군적(護君的) 예언자이자 예레미야의 적수 하나냐 등은 정치권력의 일부로 기능하던 종교세력의 사례들이다.
4) Raymond Brown,『신명기 강해』, 정옥배 역(서울: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1997), 260.
5) 독자들은 여기서 “언제 사무엘이 다시 사울에게 길갈에 먼저 내려가서 이레 동안을 자신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10:8(“너는 나보다 앞서 길갈로 내려가라 내가 네게로 내려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리니 내가 네게 가서 네가 행할 것을 가르칠 때까지 칠 일 동안 기다리라”)의 그 사무엘의 길갈 관련 명령은 이미 11:14-15(“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서 사울을 왕으로 삼고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에서 종료되고 성취된 것처럼 보인다. 더군다나 10:8은 사울이 왕으로 옹립되는 초기에 일어난 사건이며, 13장 사건은 왕이 된 지 2년 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따라서 사울이 10:8의 그 명령 때문에 길갈에서 사무엘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무엘이 또 다른 맥락에서 사울에게 2년 전의 그 명령을 다시 한번 내렸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으나, 본문에는 그런 추정을 가능케 하는 실마리가 발견되지 않는다.
6) Foster R. McCurley, Ancient Myths and Biblical Faith(Philadelphia: Fortress, 1983), 149-60; J. D. Levenson, Creation and the Persistence of Evil: The Jewish Drama of Divine Omnipotence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8), 78-99.
7) 열왕기서 전체에 걸쳐서 예언자들은 대체로 왕들을 탄핵하고 왕위를 위협하는 활동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역사를 추동해가는 핵심인물로 활동한다. 여기서는 다루지 않으나, 왕국 분열시기에 활동한 르호보암의 학정을 비판했던 실로의 예언자 아하시야는 여로보암 1세의 권력 장악과 몰락, 더 나아가서 그의 운명을 함께 나눠 가질 북이스라엘 왕국 자체의 형성과 멸망을 예고했다. 또한 열왕기상 13장에 나오는 “유다에서 올라온 하나님의 사람”은 스물 세 장이나 후에(왕하 22장) 나타나게 될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예견하는 한편 당대의 북이스라엘 태조 왕 여로보암의 배교죄를 격렬하게 규탄한다.
8) 리처드 넬슨, 『현대성서주석시리즈 열왕기서』, 김회권 역(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 229.
9) 학자들은 이 장에 나온 사건들은 아람과 아합이 맺은 외교 관계에 대하여 기록한 성경의 다른 부분들과 하나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은 아마도 좀 더 후대 즉 여호아하스 시대에 일어난 일들로 보려고 한다(넬슨, 윗책, 215). 그러나 이 장의 신학적 주제에 초점을 맞춘다면 역사성의 문제는 잠시 제쳐둘 수 있을 것이다(Burke O. Long, "Historical Narrative and the Fictionalizing Imagination," VT 35(1985), 405-16).
10) Julius Wellhausen, Prolegomena to the History of ancient Israel (Cleveland & New York: Meridian Book, 1961), 470.
11) 웃시야 왕의 성전 출입과 제사 집전 시도에 대한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 집단의 반발과 저항을 다룬 역대하 26:16-23에 따르면 유다 왕국을 유례없는 번영으로 이끌었던 웃시야의 권력은 막강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 때 어떤 예언자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는데 제사장 아사랴와 용맹한 제사장 80인을 데리고 웃시야의 성전 출입을 막았다(대하 26:17-18). 민수기 16장의 고라, 다단, 아비람의 제사장직 도전 사건을 방불케 한 웃시야의 분향 시도 사건은 야웨 하나님에 대한 교만한 범죄로 규정되었다. 이처럼 고대 이스라엘/유다 왕국에서 왕의 전제권력에 대한 견제는 예언자들의 독점물은 아니었던 것처럼 보인다(참조. 삼하 24:3 요압의 반대).
12) J. Alberto Soggin,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Israel and Judah(trans. John Bowden; Valley Forge, PA: Trinity International Press, 1993), 237-238.
13) Soggin,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Israel and Judah, 238.
14) 학자들은 이 다브넬이라는 인물이 트랜스 요르단 지역의 고관 귀족이라고 보거나(Soggin, ibid, 239) 심지어 트랜스 요르단 출신의 아내와 아하스 사이에 태어난 왕자일 것이라고 추정한다(W. F. Albright, “The Son of Tabeel[Isaiah 7:6]”: BASOR 140[1955]: 34-35).
15) J. M. Miller와 J. H. Hayes는 아하스의 주된 공포와 불안은 유다 왕국이 시리아-에브라임의 반앗수르 동맹에 가담하는 것을 더 좋아했던 대다수의 유다 유력계층 백성들의 내부반란 가능성 때문이었다고 말하는데 이 점이 그들과 저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주석가들과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다(J. M. Miller & J. H. Hayes, A History of Ancient Israel and Judah[Philadelphia: Westminster, 1986], 343).
16) J. J. M. Roberts, “Isaiah and His Children,” in Biblical and Related Studies presented to Samuel Iwry(eds. Ann Kort & S. Morschauser; Winona Lake, IN: Eisenbrauns, 1985), 195.
17) 사 10:20-23에서 “스알야숩”의 의미에는 약간의 신학적 차원이 더해진다. 이 단락은 북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하나님 및 히스기야 왕에게 돌아올 것을 예언한다. 7:3의 스알야숩 예언의 신학적 전용이 일어난 셈이다(Hae Kwon Kim, The Plan of Yahweh in First Isaiah[Michigan UMI dissertation series: 2001], 197-207).
18) 사 7:3의 스알야숩 예언의 아하스와 유다를 위한 구조예언적 성격과 시리아-에브라임 동맹군에 대한 심판예언적 성격에 대한 보다 더 자세한 주석적 논의를 참조하려면, 저자의 The Plan of Yahweh in First Isaiah, 194-195쪽을 보라.
19) G. von Rad, Der Heilige Krieg im Alten Israel(Zürich: Zwingli-Verlag, 1951), 70-72.
20) W. Robertson Nicoll, The Expositor’s Bible: Isaiah(New York: Funk & Wagnalls Company, 1900), 105.
21) 시온신학에 대한 이사야의 의존을 고찰하려면, J. J. M. Roberts의 두 논문을 참조하라: “The Davidic Origin of the Zion Tradition,”JBL 92(1973): 329-344; idem, “Yahweh’s Foundation in Zion(ISA 28:16),” JBL 106/1(1987): 27-45.
22) Hendrikus Berkhof, Christian Faith (trans. S. Woudstra; Grand Rapids, IN: Eerdmans, 1979), 441.
23) 열왕기하 16:9의 기록에 의하면 앗수르는 아하스의 요청에 따라 출병하여 두 동맹군을 패퇴시키고 유다를 “구원”하는 것처럼 보이나, 역대하 28:20-21의 기록에 의하면 앗수르는 유다를 도와주지도 않고 오히려 유다를 공격하였다.
24) 여기서는 이사야서의 저자의 주요 관심은 바벨론 주도의 반앗수르 동맹전선이 언제 기획되었느냐를 알려주는 데 있지 않고 바벨론과의 우호적인 동맹정책이 바벨론의 침략을 초래하였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있다. 강대국을 좋아하고 강대국에 의존하게 되면 그 강대국은 침략자와 정복자로 돌변하여 유다를 멸망시킬 재난으로 바뀐다는 역사신학적 원리를 천명하는 데 있는 것이다.
25) 예레미야와 유다 왕들의 대립과 갈등을 다루는 이 단원은 로날드 클레멘츠, 『현대성서주석 시리즈 예레미야』, 김회권 역(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2), 199-226, 316-335쪽에 크게 빚지고 있다.
26) R. E. Clements의 Isaiah and the Deliverance of Jerusalem (Sheffield: University of Sheffield press, 1980), 63-65.
27) 22:1-9은 유다 왕실에 대한 예언자적 위협을 담고 있다. 예레미야 당시 유다 왕국 내에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의 종 다윗을 인하여” 유다를 축복하시고 보호하셨던 것처럼 미래에도 계속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광범위한 대중적인 믿음이 유포되어 있었는데 예레미야는 이 대중적인 믿음을 공격한다. 다윗 왕조에 얽힌 나단 언약을 상대화하거나 무효화하는 듯한 과격한 발언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왕정 제도의 신적 기원과 그것의 잠재적인 유익들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정이 유다(그리고 이스라엘)의 안녕(安寧)을 무한정하게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28) 21:1-23:8은 거짓 예언들을 비난하는 다섯 가지 예언들을 담고 있는데 거짓 예언은 왕정에 우호적이거나 맹목적인 지지를 보낸 호군적 애국적 정치담론이었다. 21:1-23:8에 있는 일련의 신랄한 정죄들은 명확하게 유다의 왕정이 유다에 닥친 재난에 가장 무거운 죄책을 져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29) 한스 요아힘 크라우스는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행위 자체가 기존의 세계에 대한 복된 공격이며, 가장 으뜸되는 정치참여라고 말한다. 그는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이항대립시키는 루터파적인 두 왕국론을 의식하여 열광주의적 정치관(즉 하나님 나라 복음을 그냥 현실정치에 적용하려고 하는 토마스 뮌쩌식의 열광주의)을 비판하나, 하나님 나라의 세상체제 전복성을 역설한다(『조직신학. 자유의 나라-하느님 나라』, 박재순 역[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6], 47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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