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절의 첫 주일입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적대의 철책선 너머 인간의 마을로 오시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으셔서 연약한 아기의 몸을 입고 오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폭력과 배척의 사정권 내에 들어오셔서 인간의 철책 친 마을을 통과하여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의 진심을 보여주기 위하여 비무장 아기가 되어 오셨던 대림절에 주님 우리가 분단의 철책선을 뛰어넘고 과감하게 진입하여 화해를 일굴 사람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대림절 기간에 저희들 또한 하나님 닮아서 분단의 철책선 너머에 있는 마을로 들어가게 하시고, 분단의 철책선 너머에 있는 우리 동역자에게 들어가게 하소서. 우리가 배척당할 수 있고 폭력에 짓이겨질 수 있지만 하나님 닮아서 비무장으로 혈혈단신으로 적대의 마을에 들어가게 하여 주소서. 주님, 이런 죄인의 마을에 오셔서 상처받으셨던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극한 사랑의 모범을 묵상하면서 따뜻한 대림절을 맞이하게 하여 주소서. 주님 우리에게 어린 아이를 잉태하게 하셔서 열망하는 가정도 있고 어린 아이를 지금 잉태하기 위해서 애쓰는 하나님의 딸도 있습니다. 하나님 보살펴주셔서 복된 대림절 맞이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지방자치단체를 의미하는 단어가 municipal입니다. 지방자치단체 municipal 단어의 라틴어가 무니키피아입니다. 무니키피아라는 말은 지방자치단체라고 번역돼 있는데, 이건 원래 로마역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로마역사에서 로마제국과 한 때는 적대심의 경계를 쌓고 대적하던 도시국가를 로마가 정복합니다. 원래 도시국가였던 곳의 무장들을 다 해제하면서 평화롭게, 로마의 한 지방행정도시로 만들어버립니다. 프란체스코의 고향이었던 움베리아도 일종의 로마의 적대적 도시국가입니다. 나폴리 지역도 에투루리아라는 지방으로 적대적인 도시국가였습니다. 적대적인 도시국가가 로마에 정복당하고 지방자치단체가 됐습니다. 무니피키아가 됐습니다. 무니피키아라는 말은 무장해제된 한때의 적성도시란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세계 모든 나라가 자기 무장병력을 가지고 영토와 국가를 수호하고 있습니다. 영토와 국가를 전부다 무장단위로 수호하기 때문에 이 세계가 이런 식으로 계속 될 것이란 느낌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의 빛 안에서 보면 각 나라가 영토와 주권의 보존을 위해서 가진 이 군대가 그리스도의 지방자치단체가 됩니다. 이 군사적 무장상태가 무장해제된 날이 옵니다. 그런데 더 큰 군사적인 무력을 가진 사람이 무장해제 하지 않고 하나님은 비무장 평화의 왕이 되셔서 폭력이 쓸 데 없게 만드는 방법으로 무장해제 시킵니다. 오스카 와일드라는 사람이 쓴 작품 중에 ‘거인’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영문학에서 참 중요한 인물입니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이라는 작품도 쓰고 거인이라는 작품도 썼습니다. 아마 거인은 옛날 어린이 교과서에도 실렸습니다. 기억이 날지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보던 교과서는 60년대 보던 교과서인데, 한 마을 동네에 있는 어린아이가 거인의 집에 놀러갑니다. 그 거인은 굉장히 잔혹하고 무지몽매하고 사나워서 누구도 그 거인의 집에 놀러가려고 하지 않는데, 그 거인이 가끔은 먼 나라로 친구를 만나러 갑니다.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게 약간 암시가 되죠? 가까운 데 친구가 없지만 먼 데는 친구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데 평판이 나빴습니다. 그 집에 해람이 보다 좀 큰 어린 아이들이 들어가서 놀았는데 그 중에서 큰 아이가 있고 더 작은 아이가 있는데, 제일 작은 어린아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나무에 꽃이 피고 새가 울면서 봄이 옵니다. 거인이 있을 때는 툰드라처럼 얼었는데, 그 거인이 돌아온다는 소문이 들려서 모든 아이들이 재빨리 쏜살같이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가장 작은 어린 아이 하나가 나무에 참새처럼 덩그렇게 앉아 있으면서 도망가지 못했습니다. 거인이 와서 보니까 아이가 참새처럼 나무에 앉아 있으니까 거인이 처음에는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소리를 내면서 무섭게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작은 어린 아이가 손가락에 상처를 입고 그 나뭇가지에 참새처럼 앉아 있었습니다. 화를 내려고 으르렁하려고 보니까 비무장 어린아이, 혈혈단신으로 와 있는 그 아이가 약간은 두려움이 있지만 평화가 가득 찬 얼굴로 그 거인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거인이 너무 놀라서 어린 아이를 자신도 모르게, 비무장한 앙증스러운 아이의 모습을 자신도 감당하지 못하고 자기가 사나운 거인인 걸 잠시 잊어버리고 껴안아서 내리는데 이 아이의 손에 상처가 있었습니다.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이건 어디서 입은 상처니? 친구 집에 가서 상처를 입었어요, 그렇게 말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 거인이 병이 들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놀다가 집안에는 이제 정상적으로 봄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꽃이 피고 완전히 거인의 집 전체가 낙원으로 바뀌는데 거인이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숨이 넘어가는데 자기가 구해줬던 어린아이가 천사들의 손을 잡고 천상의 세계로 올라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탐욕과 자기폐쇄적인 배제와 이웃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탐욕의 화신이었던 거인이 비무장한 어린 아이의 평화로운 얼굴을 보면서 무장해제 됩니다. 그런 방식으로 세계를 무장해제 시키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세계는 앞으로 하나님 나라의 지방자치단체가 됩니다. 모든 군사적인 무력, 소련 러시아 미국 중국 전부 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의 지방자치정부가 되고 군사력을 가지고 국토를 경비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성탄절은 약한 자가 강한 자를 무장해제 시키는 절기입니다. 대림절은 연약한 것이 강한 자를 무장해제 시키는 절기입니다. 그런 멋진 아이가 오는 것을 앙망하면서 기다리는 절기가 대림절입니다. 대림절 또는 대강절입니다. 어린 아이를 임신한 사람을 많이 존경해줘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어른들의 무자비한 폭력과 무자비한 각축의 세계를 교화해가도록 어린 아이를 주목하는 것이 대림절입니다. 그래서 이 대림절은 어른들의 무장상태를 어린 아이의 비무장으로 해체해가는 것, 이걸 연습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어린 아이가 되어 당신에게 폭력으로 응대할 인간의 마을로 뚜벅뚜벅 걸어오셨듯이 우리가 대림절에는 분단의 철책선이 쳐진 사람들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데 폭력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1952년에 안데스 산맥 아우카 식인종 인디언 마을로 전도하러 갔던 5명의 미국 일리노이 위턴 대학의 졸업생들 이야기, 이게 바로 성탄절 정신입니다. 제임스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청년들은 안데스산맥 에콰도르 근처에 있는 식인종 마을에 전도하러 갔습니다. 총을 한 자루씩 차고 갔지만 그들은 식인종에게 몸과 사지를 다 절단당하는 고난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반항하지 않고 사지가 절단된 채 강물에 둥둥 떠내려 오는 사태를 경험했습니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 그 부인들이 가서 자기 남편들을 절단했던 식인종들을 전도했습니다. 많은 목회자도 나왔습니다. 1700명 이상의 개종자가 나왔습니다. 식인종들이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이런 것이 성탄절의 정신입니다. 성탄절 정신은 힘과 폭력에 대한 신뢰와 의존을 깨끗이 포기하는 것입니다. 힘과 폭력에 의존하는 어떠한 방식도 포기하는 것, 이게 바로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사랑의 진실, 연약함으로 무장해제하고, 강한 자들을 사랑으로 설복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오늘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로 들어가시는 것이 적대의 담벼락 적대감의 철책선이 쳐져 있는 그런 담벼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시다가 오늘 이 일을 겪었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자세히 설명 드렸듯이 4장 9절 마지막 절 보면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이건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이 말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도무지 어울리지 않으려면 굉장히 적개심이 많아야 합니다. 지금 베들레헴 가보면 4미터에서 6미터 베들레헴 방벽이 쭉 쳐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교회라고 하는 베들레헴에 가려면 4미터에서 6미터짜리 높은 방벽, 총탄자국이 나 있는 그 방벽을 가로질러서 미로처럼 따라가서 예수님 탄생장소를 가야 합니다. 팔레스타인과 유대인들이 지금 상종하지 않습니다. 상종하지 않는다는 말은 고도의 적개심이 파도치고 있는 상태입니다. 적개심이 파도치고 있는 그 마을로 예수님이 들어가시는데요. 예수님이 이 마을에 들어갈 때 당했던 모욕과 냉대와 푸대접을 누가복음 9장 5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중요합니다. 안 받아들이는 이유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 발걸음을 싫어하는 겁니다. 그 당시는 예루살렘과 갈릴리가 한 패가 돼서 중간에 있는 사마리아를 적대하고 왕따 시키고 따돌렸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 인구는 갈릴리 사람과 유다 사람 인구를 합한 것만큼 많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 활모양으로 원호모양으로 가는 게 마땅한 데 예수님은 이렇게 가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디를 가는데 이렇게 통과하느냐고 물으니까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래? 예루살렘 가는 사람은 이렇게 통과하면 안 돼, 이렇게 된 겁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 때문에 통과가 안 됐습니다. 이번에 반대로, 너 어디서 오는 길이야? 예루살렘에서 오는 길이야, 하면 통과가 안 됐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 BC 125년에 예루살렘 사람들이 사마리아에 있는 그리심산을 쑥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심산에 지어놓은 성전과 예배당을 완전히 초토화시켰거든요. 그리고 제사장을 다 죽여 버렸어요. 누가요? 요한 힐카누스 1세라는 사람이요. 그래서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 사마리아 상처가 있는, 제사장들이 학살당한 곳이에요. 그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예수님이 가는 거예요.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그때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요한과 야고보가 이런 말을 했어요. 너무 웃기죠? 이런 멍청한 말을 하니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예수님이 먼저 가니까 제자들이 뒤에서 따라오면서 이런 말을 했겠죠? 이런 멍청한 놈들, 이렇게 말을 하신 게 아니라 돌아보면서 정색하면서 왜 이런 엄청난 어리석은 말을 하느냐고 진지하게 책망을 했습니다. 어떤 중세 사본에 보니까 이런 말이 들어 있습니다. 9장 55절 끝에 고대 사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음, 이르시되 너희가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겠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노라 하시고,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정신상태는 먼저 선제공격을 당한 것에 대한 보복이죠. 선제공격을 당했습니다. 적대하고 배척하니까, 상종하지 않았단 말은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도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사람과 유대사람에게만 적개심의 파도가 넘친 것이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있었습니다. 9절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 남자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남자가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한 일은 절대로 없는 일입니다. 남자가 물을 달라고 해도 절대로 대답을 하면 안 됩니다. 그 당시 탈무드 기록에 보면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거는 행위 자체가 그 여자를 심각하게 위험하게 만듭니다. 왜 중동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중동은 원래 사막에 있는 베두인족속들입니다. 베두인 족속은 텐트에서 생활하지 안전한 가옥에서 생활하지 않았습니다. 안전한 가옥에서 생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을 환히 드러내놓으면 남자들 사이에서 여자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항상 남자들이 자기 성적인 정체성을 환히 드러내는 얼굴을 보면 간음사건이 너무 잦았습니다. 그래서 간음을 하지 못하도록 베두인 족속들 얼굴을 가려서 성적인 아이덴티티를 영원히 구분하지 못하게 눈만 내놓았습니다. 고대 베두인 족속들의 성적 난혼 상태를 막기 위하여 차도르와 부르카가 나온 겁니다. 그것이 텐트에 살 때까지는 괜찮은데 안전가옥에 와서 주택이 거리에 떨어져 있으면 풀어줘도 되는데, 그때의 악몽과 상처 때문에, 즉 자기 아내를 힘 있는 자에게 빼앗긴 많은 민중들이 법을 만든 겁니다. 힘이 없는 민중들이 만든 법입니다. 평민의 법이에요. 귀족의 법이 아닙니다. 항상 평민들이 자기 아내를 빼앗겼거든요. 얼굴을 환히 드러낸다는 말은 잠재적 간음상태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어떤 남자와 여자 사이에 남자가 말을 거는 행위가 그 여자를 치명적으로 위험하게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말을 받는 여자는 이제 7계명을 어긴 것이 됩니다. 여자를 빤히 쳐다보면서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한다는 말이 예수님 당시의 맥락을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은 전철에서 서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선남선녀 처녀총각이 서로를 빤히 쳐다봐야 합니다. 유부남, 이미 자기 아내가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 간음하는 것이지, 처녀총각은 서로를 빤히 쳐다보면서 매력을 느끼면서 상상해야 합니다. 내가 저 자매랑 손을 잡고 데이트를 하면 얼마나 인생이 행복할까? 생각을 해야 하는데, 이미 기혼자가 여자를 향하여 빤히 쳐다보는 행위가 간음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일부다처제 사회에서 얼마든지 자기 아내를 소박 맞히고 아내로 데려올 수 있기 때문에, 이것도 평민의 법입니다.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은 전부 다 유력자입니다. 모든 법은 평민이 자기 아내를 사수하기 위해서 만든 법이지, 여성을 억압하려고 하는 법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여자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왜? 여자밖에 없었기 때문에, 정오에 물을 길러 왔는데 정오에 물길러 오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전부 다 오전 6시나 오후 6시에 물을 길러 갑니다. 그런데 정오에 물 길러 오는 사람이 왔는데, 아마도 이 자매님이 얼굴을 약간 가리고 왔을 겁니다. 12시에 물 길러 왔다는 말은 이 여인이 정상적인 동아리에서 쫓겨났다는 뜻입니다. 축에 끼지 못한 겁니다. 왜? 오전 6시나 오후 6시, 여인이 물 길러 오는 그 시간에 오지 않고, 정오에 왔다는 말은 예수님에게서 상당히 이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찬스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오전 5시 40분에 갔다가 어떤 여자가 말을 하는데 오전 5시 48분에 여자들이 들이닥쳤다? 이건 매우 위험한 상태입니다. 그렇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이 얼마나 희한한지, 4장 27절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이상히 여겼던 말은 엄청 놀랐으나, 너무 놀란 겁니다. 예수님이 원래 이런 분이 아닌 겁니다. 엄청 놀랐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하고 항의를 하지 못했던 까닭은,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왜? 대화에 너무 몰입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대화가 남녀간의 수작관계를 뛰어넘는 너무 신령한 대화를 하고 있기 때문에 중단을 못 시켰어요. 원래 중단을 시켜야 하거든요. 지금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고대사회가 여성의 성적 아이덴티티를 보존하기 위해서 차도르와 부르카를 만들었습니다. 지금 프랑스사회에서 이슬람 사람들이 그걸 못 차게 하는 법이 통과됐죠? 그런데 우리가 그것이 이슬람 평민의 법이라는 걸 늘 기억해야 합니다. 여성의 인권을 억압하려는 법이 처음에는 아니었다는 것, 지금은 이것이 예멘과 아프가니스탄 같은 곳에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터키영화 중에서 <여올>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여올은 터키 말로 day, 날입니다. day입니다. 히브리말로는 day가 하욤입니다. 터키 말로는 여올입니다. 터키영화 <여올>을 여러분이 한 번 구해서 보면 그 영화는 문화인류학적으로 회교사회를 이해할 때 너무 중요한 영화입니다. 그 영화를 만일 한 번 보았다면, 아프가니스탄에 간 샘물교회 아이들이 그 영화를 미리 보고 갔다면 여인들에게 수시로 접근해서 전도를 하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하고 전통사회에서 얼마나 불쾌한 행위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이슬람 정서를 모르고 전도지를 뿌리고 말을 걸고 사영리를 가지고 무섭게 전도하는 건 이슬람사람들이 볼 때 너무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짓입니다. 분당샘물교회 전에 인터콥이라는 단체가 이미 가서 전도 집회를 했습니다. 여성들에게 무례하게 접근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되거든요. 그 사회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고대셈족의 평민들은 차도르와 부르카를 차게 함으로 자기 아내를 보호했고, 그 유력자가 아내를 빼앗아가는 것으로부터 자기 아내를 건졌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하니까 이 여자가 충격적인 수작을 걸어오니까, 수작을 건다는 말은 나쁜 말이 아닙니다. 지금은 수작을 걸어온다는 말은 데이트를 하기 위해서 말을 치근덕거리며 한다는 말인데, 원래 수작을 건다는 말은 대화를 시작한단 뜻입니다. 원래 뜻을 알려드립니다. 예수님이 수작을 걸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이렇게 상도를 벗어난 짓을 하십니까? 이런 말입니다. 괄호하고, 예수님이 목이 너무 말라 달라 그렇다, 그런 식으로 예수님은 목이 마른 표정을 짓고, 내가 말 대신 얼마나 목이 마른지 보여줄까? 그런 식으로 모습을 보였습니다. 주기 싫으면 그만둬, 이렇게 하지 않고 매우 우회적으로 신비한 방법으로 자기를 주목하도록 했습니다. 네가 만일 내가 누구인지, 이렇게 하면 되는데,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한마디로 하면 내가 누구인지인데,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예수님이 공손을 취합니다. 네가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사람이다, 내가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아쉬운 소리를 정작 해야 할 사람은 너다, 너는 지금 정오 12시에 와서 인생 전체가 목마르다, 나는 지금 물 H2O만 목마르다, 나는 하이드리겐이 모자르고 너는 인생 전체가 하나님 선물과 생수가 필요한 사람이다, 너는 살 희망이 떨어진 사람이고 나는 그냥 목이 마른 사람이다, 너와 나 중에 누가 불리한 위치이고 약자인가를 알아야 한다, 나는 하나님 선물을 주는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 선물 성령의 선물을 네게 줄 수 있는 사람인데 네가 지금 나에게 물도 안 주면서 이렇게 한다, 예수님이 갑자기 위엄을 차린 겁니다. 아름다움을 딱 차리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말을 주여라고 바꿉니다. 처음으로 남자 당신 하더니, 11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예수님의 생수는 이사야 55장 1절에 나오는 그 생수입니다. 에스겔 36장에 나오는 생수,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생수, 예레미야 31장에 나오는 물 신령한 생수입니다. 요한복음 7장 37절에 나오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할 때 그 생수입니다. 이사야 55장 1-2절에 나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은 예언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예언서가 도무지 없기 때문에 생수를 선물로 준다는 성경구절을 전혀 모릅니다. 하나님의 생수인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언서가 없는 그 여자는 하나님의 선물을 알지 못했고, 그 선물을 주실 분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은 생수를 신학적인 메타포 성령을 가리키는 말로 보지 않고, 물, 가장 깊은 심층수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이 우물은 깊고 심층수는 저 깊은 곳에 있는데 두레박도 없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 심층수를 길어 올리겠다고 합니까? 심층수를 길어 올리기 위해서는 두레박 중에서 무거운 납덩이같은 두레박이 필요합니다. 심층수는 샘물이 터져 나오는 분천의 뿌리까지 내려서 막 솟아오르는 분천수, 그게 바로 생수가 됩니다. 이 자매님은 그걸 지금 생각합니다. 분천수를 길어 올리려면 내가 가진 이 두레박으로는 안 됩니다. 깊이가 있어 무겁고 납덩이가 달려 있는 심층수를 잦아 올리는 특수두레박이 필요합니다. 특수두레박도 없는 당신이 어디서 생수를 구하겠단 말입니까? 메타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 여인이 느끼는 인생의 갈증에 자신의 갈증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끝까지 물을 못 들이키신 것 같아요. 4장 34절 보니까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물을 얻어 드시지 못한 것 같습니다. 4장 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32절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라고 했거든요. 예수님이 아까 털썩 주저앉던 그 예수님이 아니에요. 여인과 대화기 깊이 진행되면서 예수님은 원기가 회복된 거예요. 원기가 회복된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33절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우리도 강의를 가끔 해보면 굉장히 힘이 축져서 강의시간이 지나가는데, 아이들이 빠릿빠릿하고 정신이 말짱하고 상당히 아이들이 active 하게 있으면 강의하다가 힘이 나거든요. 머리가 매우 그렇고 공부할 motivation이 전혀 없는 아이들을 만나면 들어가는 순간 내 모든 힘이 다 빠져버려요. 그 인간들과 내가 같이 있는 것 자체가 모든 힘의 소진을 의미해요. 그런데 너무 간절한 앙망으로 뭔가 한마디 배우겠다고 주의를 높여서 능동적으로 있는 사람을 보면 막 힘이 납니다. 그래서 저도 목요일 오후 3시가 저한테는 참 어려운 수업입니다. 한 주간에 마지막 수업인 3시간짜리 수업이 있어요. 이 수업과 똑같은 과목이 월요일 낮 12시 반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수업은 16명의 목사님들 및 신학준비가 전혀 안 돼 있는 사람들 아마추어가 듣고, 오후 3시과목은 공부를 바짝 하려고 마음먹은 장신대에서 8명이 오고 순례자들이 모여서 집중력이 다릅니다. 뭔가 배우려고 하고, 월요일 12시 반은 수업이 2시간 30분밖에 진행이 안 되는데 시간이 너무 안 갑니다. 모든 걸 나의 지식에 의존합니다. 그런데 오후 3시 반은 질문이 너무 좋은 게 많이 나오기 때문에 내가 5시 15분에 끝내야 하는데 항상 5시 반에 끝납니다. 내가 엄청 에너지가 딸리는 시간에 들어갔는데 그 수업을 마치면 굉장히 내가 마음이 기쁩니다. 거기에 우리 양진일 목사가 앉아 있습니다. 양목사님 같은 분이 거기 앉아 있기 때문에 내가 정말 가르치는 보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을 만나면 그 인간들과 한 공간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내 인생의 짐이고 고난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을 안 만나는 게 좋습니다. 예수님과 이 여인의 관계는 내가 쉼없이 대화에 몰두했지만 내 원기를 북돋우는 신령한 대화가 가능한 자매님, 그 시대의 최고의 지성인을 만난 겁니다. 이 자매님은 그 시대의 사마리아 최고의 여신학자였고 자유부인이었고, 시대의 제약을 감히 돌파하려는 분이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아마도 차도르와 부루카를 반쯤 열고 예수님과 대화하지 않았는가?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여인을 보고 단박에 남편을 데려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 자매님이 얼굴을 확 연 것을 볼 때 남편이 있는 여자가 할 짓이 아니니까 남편을 데려오라는 남편 이슈를 꺼냅니다. 아마도 이 여인이 상당히 얼굴을 많이 보여준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가 밀착된 것이 외경에 자꾸 나옵니다.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의 깊은 우정과 사랑이 외경에 오랫동안 기록돼 있고 니쿠스 가잔차키스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을 쓸 때 외경을 많이 인용했습니다.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가 많이 밀착됐다고 비난하는 유다의 이야기가 나와요. 그 이야기는 그 당시 관습으로 볼 때 예수님이 여인들을 얼마나 친근하게 대했는가, 예수님이 얼마나 남녀차별을 과감하게 극복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베드로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켰죠? 지금은 우리가 여교우의 손을 공개적으로 잡아주는 건 가능합니다. 없을 때 감히 잡는 건 힘들지만 다 있을 때 악수하고 잡아주는 건 가능합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장모는 나이가 동갑입니다. 장모님과 대개 사위가 15살차이 났습니다. 베드로가 스무살이고 베드로 장모가 아마 서른다섯 살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굉장히 과감한 대쉬를 한 겁니다. 예수님이 또 야이로의 딸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이 남녀간의 접촉문제를 그 시대의 관습으로 볼 때는 너무 대담하게 넘어버립니다. 물론 야이로의 딸에게 갈때는 12살 처녀였기 때문에 제자 두명을 데려갑니다. 이건 예수님이 남자 여자 사이의 분단의 철책선과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에 있는 분단의 철책선 둘다를 사뿐히 돌파하고 깨부수고 들어간 겁니다. 그렇게 하니까 여자가 놀라서 이렇게 사마리아사람과 유대인 사이에 125년 동안 누적된 분단철책의 담벽락을 뛰어 넘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남자와 여자 사이에 오래된 숙명 같은 인류역사에도 오래된 이 차별을 뛰어 넘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런 식으로 이제 말이 바뀝니다. 주여 라는 말로 바뀝니다. 유대인 남자였던 당신이 주여로 바뀝니다. 예수님이 점점 대화를 주도하면서 예수님은 이제 자기 목마른 것을 잊어버렸어요. 왜? 이 여인의 기구한 인생이 가슴에 젖어들었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내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더 비참한 사람 더 배고픈 사람을 만나면 내 배고픔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걸 많이 경험하죠? 설교자인 제가 금식하는 것도, 설교자의 금식은 왜 쉽냐면 설교라는 엄숙한 일 때문에 배가 안 고픕니다. 우리가 우리 보다 더 비참하고 너무 참혹한사람들 너무 안타까운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 허기를 잊어버려요. 도와주려고 하면 에너지가 납니다. 힘이 없는 사람들은 지금 도와주려고 하면 힘이 납니다.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만나서 도와주려고 분투하다 보면 배고픈 사람, 힘없는 사람이 원기 가득 찬 자양강장제를 먹은 것처럼 진수성찬 먹은 것처럼 에너지가 넘치게 돼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자기의 목마름보다 더 절실하고도 간절한 이 자매님의 인생을 생각했습니다. 자신에게 대담하게 얼굴을 반쯤 내밀면서 대담하게 자기 말을 받아들이는 이 여인을 보고 예수님은 필시 이 여인이 남편이 없는 사람임을 짐작했습니다.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이 여자가 약간 도피주의적인 구원을 원했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말을 하는 순간 이 자매님이 다시 한 번 이걸 문자적으로 해석합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일상생활의 수고로운 노동을 원하지 않습니다. 한 번 먹고 나서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물, 신비한 마술적인 물을 원합니다. 일상생활의 수고에 대한 포기를 의미합니다. 이런 물은 없습니다. 원래 성령 충만한 것은 갈증을 영원히 기갈 시키지 않습니다. 참된 성령 충만은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을 유지시키는 충만입니다. 충만이면서 동시에 비움입니다. 내가 성령을 충만히 받자마자 내가 다시는 성령 받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성령 충만이 아니라 여전히 갈증을 유지하는 충만이기 때문에 아주 역설입니다. 모순입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에 대한 갈구를 멈추게 하는 충만이 아니라 한계의 효용을 없애버리는 충만이 아니라 한계의 효용을 여전히 남겨두는 충만 입니다. 제가 고구마를 좋아하고 옛날에 한때 붕어빵을 좋아하고 좋아한 게 많았어요. 문제는 하나 먹고 나면 붕어빵에 대한 연모하는 감정 사모하는 감정이 사라집니다. 저거 한 번 먹어봤으면 좋겠다, 하고 지나가는데 하나 사먹는 순간 붕어빵에 대한 진실은 이제 다 끝납니다. 모든 식량은 그렇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걸 먹어도 먹는 순간 더 이상 효용을 원하지 않는 한계가 있습니다. 성령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성령을 받았는데, 인격적 신령한 교제의 특징은 내가 교제를 했지만 더 이상 교제가 진전되지 않는 교제가 아니라 더 깊은 교제에 대한 욕구를 남기는 신령한 교제, 이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교제, 성도의 교제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해서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은 그런 것이 충만이 아니라 여전히 잔여분의 신비를 남겨 놓고, 또 내가 교제하고 싶은 욕구를 남겨 놓고, 우리 하나님에 대한 앎이 충분하지만 하나님을 알수록 더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남겨 놓는 충만만이 성령 충만이거든요. 그런데 이 자매님은 먹고 나서 다시는 안 먹게 해달라고 하니까 이건 비정상적인 도피주의적인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이때 벌써 남편과 이슈가 있는 걸 알았습니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상당히 진도가 빨리 나갔습니다. 여자가 말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괄호하고, 그래서 제가 이렇게 과감하게 얼굴을 벗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이건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 남편이 무엇인지, 결론 맺겠습니다. 앞으로 주일설교는 50-51분 사이에 끝내겠습니다. 오래할 필요가 없습니다. 계속 설교할 것이기 때문에 오래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1권 제 첫 페이지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 1-9권까지는 반드시 읽어야 합니다. <고백록> 1-9권까지는 단숨에 읽히는데 아마 주말에 다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400페이지 됩니다만, 고백록이 너무 절실해서 빨리 읽힙니다. 10-13권은 창세기 1-2장 주석이라서 신학자가 아니면 안 읽어도 됩니다. 1-9권은 어머니의 장례식 기사로 끝나는 9권까지는 눈물이 주룩주룩 나면서 절실합니다. 1권 첫 페이지에, 하나님 당신이 우리를 창조하신 방법이 당신을 찾지 않고는 우리가 영원히 방황하도록 만들어놓으셨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충족시켜줄 때까지 우리의 방황과 갈증은 끝이 없게 만들어 놓으셨으므로 제가 당신의 품안에서 쉼을 얻을 때까지 방황을 그칠 수 없습니다, 이런 멋진 말이 나옵니다. 아마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4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 하나님이 채워주셔야 할 절대공백이 있습니다. 절대공백은 경험으로도 해결이 안 되고, 성형수술로도 안 되고 이건 출세로도 안 됩니다. 절대공백은 제가 안 됐습니다. 사람이 심지가 곧은 사람이라 누구 밑에 가서 절을 하거나 무얼 의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성실의 법칙을 믿었기 때문에 절대로 뭔가 믿어버릴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게 성실한 저였지만, 제가 천하를 얻은 것과 같은 성취를 맛보았지만 내 마음에는 하나님이 들어와 채워주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적인 공백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절대적 허무 때문에 저는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 생에 대한 성찰이 깊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래 만들어놓았던 절대적인 하나님이 채워야할 그 빈자리 보좌, 하나님이 앉았을 때만 음악을 내고 빛을 내는 절대적 빈 보좌가 우리 마음에 있거든요. 우리 하나님이 와서 착석을 해야만 내 인생이 완성되는 그 보좌가 있단 말이에요. 그 보좌를 앞에 5명씩 교체해도 안 된단 말이에요.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남편은 여성의 공민권을 의미했고 사회적 신분을 의미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옛날엔 그랬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사회적 공민권과 우리의 사회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버팀대 지주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우리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보좌에 와서 앉아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안 된단 말이에요.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 안에 있는 절대공백에 주님을 영접하시면 생수를 들이키는 샘이 됩니다. 그 속에서 샘솟는 영생의 샘물을 많이 들이키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하나님께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영원한 갈증, 생수가 아니면 풀 수 없는 갈증을 주셨습니다. 내가 아무리 내 존재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하고 사회적 성취를 이룬다 하더라도 내가 백만장자가 된다 할지라도 내가 세상의 칭찬과 영광의 정점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이 제 속에 주신 갈증은 우리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사오니 하나님 우리 청춘의 인생을 맞이하는 우리 젊은 아들딸들이 이 생수 들이키도록 선물을 허락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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