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당시의 평화는 만져지는 평화입니다. 가이사 아우구스투스가 17년간의 로마내전을 끝내고 평화를 선물했습니다. BC 44년에 줄리어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고 나서 17년간 내전이 일어납니다. 그 17년간의 내전은 카이사르를 암살했던 세네카 일당을 진압하는데 폼페이우스와 안토니우스와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라 불리는 옥타비아누스가 삼자동맹을 맺어서 세네카와 부르투스 일당들, 13명의 암살자들을 진멸하는 전쟁이 첫 전쟁입니다. 그 전쟁이 끝나자마 폼페이우스와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또 붙어서 전쟁을 치룹니다. 준결승전입니다. 폼페이우스는 제2의 삼두정치의 지배자로써 강력한 군장이었습니다. 이 폼페이우스를 물리치기 위해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전쟁을 합니다. 이게 준결승전입니다. 결승전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붙었는데, 이 전쟁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합니다. 그리고 나서 BC 27년에 드디어 로마의 황제와 같은 프린티스엑스 황제가 됩니다. 그때부터 로마는 지중해 일대의 모든 해적들을 다 소탕했습니다. 지중해 일대의 해적들이 다 소탕됐기 때문에 뱃길을 아무리 가도 안전했습니다. 육로도 안전했습니다. 산과 들도 안전했습니다. 로마가 통치 혜택을 입히는 모든 것은 절대 안전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로마제국의 혁혁한 성과들을 기분 좋지 않게 쳐다보는 곳이 딱 한 군데, 로마의 속주였던 유대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만, 갈릴리 사람들만 로마의 승리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들은 너무나 독특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가 와서 예루살렘에서 온 세계를 다스릴 나라를 건설한다고 믿었습니다. 로마제국보다 더 멋진 나라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신정국가를 꿈꾸던 유대 열심당원들은 로마제국의 군사적 승리나 지중해 일대의 혁혁한 평화에 전혀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의 7개의 속주 중에서 오직 시리아 속주, 시리아 속주의 한 작은 식민지가 유대입니다. 유대는 총독이 오지 못했습니다. 유대는 프라이토리온 이라는 장관, 빌라도는 유대장관입니다. 빌라도는 총독이 아니라 프라이토리오 장관입니다. 속주와 속주의 총독은 높은 7명밖에 없는 사람, 그런데 장관은 속주 총독 밑에 있는 특수한 분야의 행정관입니다. 빌라도는 유대장관입니다. 전문용어가 프라이토리온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재판 받으실 때 브라이도리온에 앉습니다. 브라이도리온, 이 말은 즉 장관의 자리에 앉는다는 뜻입니다. 유대지방 사람들만 로마제국의 평화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왜? 메시아가 와서 온 세계만민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온 세계 만민들의 칼과 창과 병기를 빼앗아서 비무장 시민집단을 만들어 줄 날을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 일을 먼저 한 나라가 로마제국입니다. 로마제국은 어떻게 평화를 구축했느냐면 로마제국과 각축하던 모든 나라를 정복하자마자 무기를 다 빼앗고 로마제국의 지방자치단체로 만들면서 시민권을 다주었습니다.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로마제국의 적대국들은 시민권을 얻는 대신에 로마제국에게 무기를 다 반납했습니다. 그걸 무니시피아라고 합니다. 영어로 municipal 하면 지방자치단체라는 뜻입니다. 로마제국은 적국을 무장해제 시키고 그 무장 해제된 나라에게 무기를 빼앗는 대신에 공정한 로마제국의 법치를 선물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제국에게 정복당한 모든 나라도 불만이 없습니다. 왜? 옛날에 총칼을 들고 로마제국과 맞서야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왜? 무기를 반납하자마자 로마제국의 법치가 선물로 주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세계 만민이 다 기뻐했습니다. 특히 그리스가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이 너무 기뻐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너무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과 갈릴리 사람들 유대인들만 이 로마제국의 평화를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2장 1절에 보니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여기가 바로 로마제국의 통치를 즐거워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나옵니다. 모든 사람의 숫자를 세는 이유는 뭡니까? 세금을 내게 하기 위해서죠. 세금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통치해 줄 테니 너희는 통치에 대한 안전보장세, 모든 세금은 안전보장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전보장을 느끼면서 라면을 살 때 10% 세금을 주잖아요. 안전보장을 느끼면서 우리가 옷을 사기 때문에 10%, 모든 세금은 10%가 올라갑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막대한 강도질입니다. 우리가 라면을 사먹을 때 왜 10% 세금을 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세금을 내기 위해서 인구를 조사한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머리에서는 사무엘하 24장, 인구조사를 하다가 큰 벌을 받았던 다윗의 이야기를 순식간에 깨닫게 만듦으로써 좋은 일이 아니란 생각을 금방 했습니다. 보십시오. 로마제국의 세계 통치는 강제로 물리적으로 눌러서 얻는 평화입니다. 로마제국의 평화는 힘을 가진 자가 힘이 약한 자를 눌러서 획득한 평화입니다. 로마제국은 평화입니다. 로마제국에게 평화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사실상 힘의 포기를 통해서 얻은 일종의 적막강산 같은 그런 평화입니다. 그래서 가이사 아우구스투스가 호적령을 내린 이 상황은 성경적 맥락에서는 매우 사탄에게 격동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인구조사는 사단의 격동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 이게 바로 성경의 아이디어입니다. 즉 사탄적 통치를 집행하는 사람만 인구조사를 한 겁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참된 평화가 필요하다, 그런 기대감을 고조시킨 후에 2장 8절입니다. 다윗과 같은 왕, 세금 매기지 않고 모든 백성을 평화롭게 만들어주는 공평과 정의의 화신, 그 다윗의 이상왕이야말로, 다윗 계보에서 온 그 왕이야말로 가이사 아우구스투스의 천하를 호령하는 통치를 대치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이사 아우구스투스가 호적령을 내려 만삭된 여자까지 움직이는데 매우 부조리한 일이죠? 그런데 만삭이 된 아주머니까지 호적을 하러 올라간 그 부조리한 상황이 미가서 5장 2절을 성취시키는 도구가 됩니다. 이 말은 나에게 선한 의도를 갖지 않는 직장상사의 명령마저도 나에게 선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 말은 관료적 부조리한 질서를 무한히 참으라는 말이 아니라 가끔 그런 수가 있다는 겁니다. 항상 그렇진 않습니다. 대부분이 손해입니다. 가끔 그런 수가 있다는 겁니다. 대부분 나쁜 명령은 나쁜 결과를 갖습니다. 그런데 나쁜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미가서 5장 2절, 즉 내게 주신 하나님 뜻이 성취되는 경우가 있는데, 지금 중국 공산당 치하에서 시달리는 중국기독교, 북한체제에서 시달리는 북한기독교인들, 나쁩니다. 나쁘지만 그 나쁜 공산체제의 억압을 피해서 순전한 기독교, 진짜 기독교인만 남게 됐습니다. 중국은 허드슨 테일러가 뿌려놨던 중국 내지선교의 결과가 중국 공산당이 누르고 누르고 정말 감옥까지 가두는데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기독교, 하나님이 쓰실만한 기독교가 지금 중국에서 나옵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진짜 감옥가면서 예수 믿는 거거든요. 기복적인 신앙 때문에 예수 믿는 게 아니거든요. 중국과 북한이 오히려 원시 기독교에 가까운 날것 기독교, 포장 안 된 기독교를 보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은 포장 안 된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정말 우리 스스로도, 뭐가 잘못됐는가를 늘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는데, 내가 거스를 수 없는 부당한 명령, 그것이 때때로 하나님 뜻을 이룰 수 있다는 한 가닥 위안이 가끔은 우리에게 부당한 명령을 참아낼 힘을 주시긴 하지만, 항상 그런 게 아닙니다. 대부분이 호적하러 가지 말아야 합니다. 보이콧을 해야 합니다. 가끔 갈 수밖에 없는 때는 하나님 뜻이 이뤄지는데, 미가서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 말씀이 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베들레헴으로 터벅터벅 걸어갔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여기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나온 목자들은 서구 사회에서 나온 그런 멋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목자들은 법정에서 증언할 수 없는 인물들입니다. 왜냐하면 목자들은 6,7개월 동안 떨어져 문명 바깥에서 살았기 때문에 목자들의 말은 법정에서도 채택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목자들은 짐승과 교합하는 자, 동성연애자, 날강도와 똑같은 말입니다. 그렇게 악명을 들었던 목자들은 문명 바깥에 살았고 가족관계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목자들인데,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다시 말해서 철야근무를 하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이 이 목자들을 선택하여 최초로 성탄절 소식을 위탁했다는 말은 정말 하나님은 인간의 총체적 관료적 피라미드 사회, 인간이 구축한 이 엄청난 높고 영광스럽고 유능한 사람들이 차지하는 거대한 로마 제국적 힘의 숭배질서를 우리 하나님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 로마제국의 힘의 숭배 질서도 인정하지 않지만 유대종교의 거짓된 종교질서도 인정하지 않는 것도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목자들에게 천사를 보냈습니다. 아마 가브리엘 천사일 겁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우주 특급 배달부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하나님이 정말 믿을 수 없는 메시지를 맡길 때나 우주특급배달을 맡기는데, ‘주의 사자가’ messenger입니다. angel입니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그렇습니다. 목자들은 영광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영광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주의 영광 앞에 놀라 두려워 떨었습니다. 이 놀람, 이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놀람, 거룩한 영광을 둘러 비췸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절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절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려고 연출된 어떤 교회의 예배당 입당식에 갔는데, 8천 800평의 예배실에 갔는데, 동시에 7천2백 명이 들어오는 예배당입니다. 엄청 유명한 사람들이 시를 써서 읊어대는데 너무 코미디 같아서 제가 끝까지 못 있다가, 여기에 누가 왔느냐면 모 여대 발레 지도교수인데 6억 받아서 감옥 갔다 온 사람, 최근 관악구 S 대학에 소프라노 아이들을 때리고 폭력배인 여자교수, 그 사람들이 나왔어요. 전부 감옥 갔다 온 사람들이 앞에 서서 하는데, 제가 코미디의 마지막 순서를 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그 자리에 제가 테이프 커팅을 한다고 가위를 받고 하얀 손수건을 받았는데 CTS가 사진 찍으러 오는데 금방 제가 피했습니다. 거기 나오면 가향교회 목회가 안 될 것 같아요. 저는 거기에 정식초청 받은 게 아닙니다. 정식초청 받은 분 따라 다니다가 YS, 국회의장 2명, 정세균 대표, 나경원, 박진, 국회의원 30명, 장관이 쭉 와서 앉았는데, 테이프를 자르고 있는 거예요. 제가 이 순서를 참석하다가 언제쯤 뛰쳐나가는 것이 가장 좋을까 하다, 1층 앞에 있었는데 계속 노인들과 훌륭한 분이 오다보니까 자리를 계속 양보하게 됐습니다. 마침 마지막 자리를 양보하다 보니까 있을 데가 없어서 왔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바로 왔는데, 사람들이 몇 만 명이 모여 열광을 하는데, 성전에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을 닮은 강대상, 하늘 입구는 천상을 향하여 있고 천정은 하늘을 지향한다, 부채꼴 모양의 지붕은 한없는 은혜와 축복이 항상 있을 것임을 의미한다, 그렇게 쭉 쓰여 있는데 저는 아무리 봐도 전혀 이게 느껴지지 않는 겁니다. 여기에 엄청난 인간의 영광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국회의원 20명과 장군들과 국회의장들을 불러서 올 수 있는 건 영광이 맞죠.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들이 자기 담임목사가 나타나니까 멀리서 교인들이 환호성을 지르는데, 저도 어떻게 정신만 약간 팔면 저리 되는가 싶어서 혹시 바라보고 있었는데, 저는 도저히 안 됩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왔는데, 제가 성탄절 예배를 준비하다가 말구유에 누워 있는 예수님, 그런데 이 담임목사님이 시를 썼는데, 이렇게 비싼 건물을 지어놓고, 이 한 없이 천한 말구유에 한 번 다녀가십시오. 예수님, 한 번만 다녀가면 어떻게 해요? 거기서 살아야죠. 저는 이걸 가져온 겁니다. 이 험한 낮고 천한 말구유에 한 번 다녀가시면 님을 따르리이다, 이렇게 써 놨는데 김소월 시 같기도 하고요. 비오는 날 천둥번개 칠 때 이곳에 피하셔서 잠시 쉬어가실 수 있는지요, 자 이용도 같습니다. 다음 꿈에라도 야곱 사닥다리 놓아 한 번 다녀가신다면 주님 저 버림 받은 영혼 찾아가신 바쁘신 주님 발길 멀리서 뒤따라가겠습니다, 김소월 같은 느낌이 들어요. 새 성전 여리고 뽕나무 같이 되게 하시고, 이렇게 썼는데 시가 또 너무 절찬입니다. 그렇게 엄청나고 그렇게 호화롭고 으리으리한 건물을 지어 놓고 이렇게 겸손한 시를 쓰셔서 몇 만 명이 모여서 박수치는 걸 보고, 제가 어디가 잘못 됐을까? 내가 혹시 양진일 목사한테 악령 받은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의 영광이란 건 이런 겁니다. 목사님 나오실 때 와 하고, 평양에서 보는 원색 한복 입은 60명이 서서 와 하고, 우리 목사님이 나오십니다, 나오십니다, 하면서 카메라를 찍어대는 것이 영광인데, 그런 영광에 익숙한 사람들은 가브리엘 천사가 동반한 영광은 별로 놀람과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무대효과를 최대한 극대화하기 위하여 우리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질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그들에게 영광을 둘러 비취게 하심으로 성탄절을 이 세상 모든 관료적 질서의 완전한 전복을 꾀하십니다. 이 세상의 관료적 질서, 다시 말해 인간의 영광 정점으로부터 시작해서 영광의 갈무리를 얻어먹으려고 붙어 있는 중간 관료자들부터 저 밑바닥, 저 끝도 보이지 않는 그 목자들의 마음에 영광을 끼치심으로 이 세상의 시스템 작동원리를 와해시키려는 뜻이 분명히 있는 겁니다. 성탄절은 거룩한 전복과 와해의 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게 믿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살과 피를 가진 우리가 황량한 황무지에 있으면서 황무지 같은 삶을 살면서 여기가 낙원이라고 아무리 자기한테 믿음을 심어줘도 낙원이 아니거든요. 영하 14도에 있으면서 우리 영상 22도라고 믿을 수 없는 거거든요. 배가 굶주려 있으면서 우리가 배부르다 할 수 없듯이 이 세상에 실제로는 목자의 삶의 지경은 잠자지 못하는 철야, 노동 기본권도 보장받지 못하는 열약한 노동조건이거든요. 그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 사는, 남들이 잠잘 때 자지 못하는 그 사람, 철야 노동 3교대에 와 있는 것과 같은 그 불쌍한 노동자, 육체노동자, 법정에 설 수도 없는 그 사람들에게 가브리엘 천사의 영광이 비췄다는 말은 성탄절이야 말로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성탄절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성탄절은 선택받은 사람을 위한, 택함을 받은 사람에게 오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2장 14절 보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중에만 평화입니다. 헤롯대왕에게는 평화가 아니고 가이사 아우구스투스에게는 평화가 아닙니다. 이 세상 관료적 질서 중간층 이상에 속하여 이 세상의 작동원리에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성탄절은 평화가 아닙니다. 성탄절은 시므온과 같은 사람, 84년 동안 메시아의 위로를 기다렸던 안나 할머니 같은 사람, 숨넘어가기 직전까지 메시아적 통치의 혜택을 받기 위하여 그렇게 끝가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 할아버지 같은 사람, 그 사람에게 평화이지, 가이사 아우구스투스나 헤롯대왕 같은 사람에게는 평화가 아닙니다. 성탄절은 선택적인 축제절기입니다. 절대로 만민에게 동시 다발적으로 똑같은 의미를 가진 성탄절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이 세상의 관료적 질서를 와해시키려는 하나님의 전복과 와해의 날입니다. 성탄절은 쉽게 말해서 말구유에 누워 있는 아이에게 인류의 미래가 있다고 믿고 절하는 파격적인 상상퍼포먼스입니다. 이건 완전 행위예술입니다. 강보에 누워 있는, 여관에 들어가지 못하고, 의료보험 혜택도 받지 못하고 아이를 그냥 들판에서 낳은 그 아이에게 인류의 미래가 있다고 믿은 것은 목자들이나 믿을 수 있는 일입니다. 연립주택 이상 사는 사람들에게는 못 믿습니다. 이 세계가 이렇게 파격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상상력은 목자들밖에 없기 때문에 목자들에게 이 소식이 온 겁니다. 이건 절대로 안정적으로 삶의 주도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말구유에 누워 있는 아이가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왕이 된다는 믿음이 생길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너무 이 세상의 관료적 질서 위계의 상층부에 사는 사람과 너무 절친하게 살고 그 사람들의 세계관을 내면화시키면 이런 파격적인 소식을 들을 때 실제로 믿음이 안 생깁니다. 아직도 이런 말씀이 제게는 놀람과 파격이 되고 신선한 상상력이 되지만 만일 우리가 이 교회 목사님 같은 분이 이 본문을 본다면 목자를 전혀 다르게 해석해버리지 않는 한 전혀 은혜가 안 되는 겁니다. 실제로 이건 metaphorical 하게 하면 안 됩니다. 진짜 이스라엘 목자는 너무 슬프고 고단한 비정규직 노동자로써 의료보험도 안 되고 사대보험도 안 됩니다. 고용률로도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우리 하나님의 성탄절에 평화를 느꼈습니다. 그들은 강보에 누워 있는 아이에게 절했습니다. 맞습니다. 강보에 누워 있는 아이에게 절하는 사람들은 이 세계의 밑바닥, 이 세계 질서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 이 세계 피라미드 질서를 승인하지 않고 다른 질서를 꿈꾸는 사람에게만 놀라움으로 다가옵니다. 목자들은 바로 이 세상의 떨거지, 이 세상에서 주물을 만들다가 버림 받은 outcast입니다. 주물을 부어 만들다, cast into입니다. 주물을 부어 만들다, 주물을 부어 만들다가 쓸데없어 버리는 걸 영어로 cast out 이렇게 말합니다. cast out의 반대로 동사형을 명사로 만들면 outcast 가 됩니다. 쓸 데 없어 버려진 것들, 목자들은 쓸 데 없어 버려진 것들, 더 심각하게 이 본문을 생각하면, 초대교회에 노예와 여자와 어린아이밖에 없었다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초대교회에 기독교전도자의 말을 듣고 다닌 사람들은 여자와 노예와 어린아이 밖에 없었다, 켈수스라는 사람이 로마의 지성입니다. 로마의 지성인 켈수스가 기독교를 공격하면서, 기독교의 가장 수치스러운 점은 기독교의 창시자인 목수가 교육받지 못한 무지렁이다, 두 번째 그는 사형수다, 이때 246년에 켈수스란 사람의 <기독교 반박>을 재반박한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이란 사람인데, 오리겐이 쓴 책 중에서 <켈수스를 반박함>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란 책입니다. 거기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의 기원이신 예수님은 무식한 분입니다, 교육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육체노동자가 맞습니다, 그분 주변에는 항상 문둥병자가 따랐고 귀신들린 자가 따랐고 여인들이 따랐습니다, 지금 기독교 전도자를 따라다닌 사람 모두다 노예들밖에 없습니다, 갑바도니아에서 온 노예들, 저 지방에서 집을 잃고 패잔병들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전쟁에서 돌아와서 연금혜택을 받지 못하고 교회에 몸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퇴역군인들, 여자, 노예들 대부분이 200년간 초창기 기독교의 핵심세력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리겐이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켈수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러나 100년이 못 되어 로마는 여자 노예들과 퇴역군인들이 믿는 이 기독교를 로마황제가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말을 오리겐이 합니다. 정말로 100년이 못 되었잖아요? 313년, 246년경이거든요. 여러분, 우리교회가 이런 사람들에게 친화성을 잃어버렸다는 말은 우리교회가 기존세상 로마 제국적 힘의 숭배질서에 너무 깊이 가담해버렸다는 겁니다. 교회가 비주류 비타협적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숨통을 열어주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대안공동체가 아니라 이 세계의 잘못된 공동체의 기생충, 패러사이틱 커뮤니티가 돼버렸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말을 해봤자 별 의미가 없어요. 여러분은 이미 비주류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별로 의미가 없을 겁니다. 여러분은 삶을 살기 때문에, 이건 사실 사랑의 교회 가서 해야 합니다. 그때 가서 하기로 하고 생략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들을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은 이미 누가 보더라도 비주류입니다. 누가 봐도 우린 비주류이고, 우리는 이걸 보이콧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문제는 이 보이콧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우리 스스로 확신을 못합니다. 비산동에서 비산 먹고 살다가 끝나려는지, 아니면 더 커지려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죽고 나서 더 커질 수도 있고요. 우리가 이 세상과 사별하고 나서 우리 하늘이 세대에 가서 크게 번창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아무리 번창해도 이건 우리가 이 세상의 관료적 온순한 질서, 로마제국적 질서에 대해서는 대항명제인 것은 맞습니다. 그래서 결론 맺습니다. 천사들이 전해준 메시지는 목자만이 들을 수 있었는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이것이 목자의 말이거든요. 천사들이 목자에게 전해준 말인데, 목자의 말은 법적 증언능력이 없지 않습니까? 법적 증언능력이 없는 사람의 증언을 성경에 싫었기 때문에 성경은 목자들과 여인들과 로마제국과 유대교가 일심단결 하여서 가장 소외시켰던 목자들의 말, 여인들의 말, 법적 증언 능력도 없는 여인들의 말을 1장에 배치하고 법적증언능력도 없는 목자들의 말을 2장에 배치함으로써 로마제국과 유대교가 꿈꾸고 구축한 모든 세상 질서를 다 뒤엎어버리려는 것이 하나님 원래 뜻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중요한 말을 목자들과 여인들의 입에 위탁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성탄절은 잘 안 믿기는 기쁜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비무장아집, 로마제국 같이 철병거로 무장한 철의 왕국, 강력한 군사력으로 구축한 평화가 아니라 로마제국의 평화, 그런 평화가 아니고 어떤 평화입니까? 사람의 마음의 영토에 들어가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사람에게 자발적인 복종과 순종을 일으키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주는 평화,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평화, 다른 사람을 눌러야만 오는 평화 말고,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이 세상과 정과 욕심을 못 박았을 때만 오는 우주적 평화, 이 평화를 선물한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내다 본 경배였다, 예수님은 어떻게 평화를 가져왔습니까? 자기 몸을 하나님께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 제물로 드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몸을 살과 피로 주는 그런 성만찬적 삶을 통하여 평화를 창출한 분이다, 결론 맺습니다. 로마제국은 다른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드라큘라적인 힘을 축척하여 다른 사람을 눌러서 오는 평화를 구축했다면 우리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자기의 살과 피를 다른 사람의 음료와 생명의 떡으로 내놓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셔서 구축한 평화, 이것이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의 평화로다, 성탄절은 성만찬에서 완성됐습니다. 성만찬의 핵심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살과 피를 내놓는 거룩한 식인종주의다, 거룩한 사육제다, 내 살과 피를 내 옆구리의 피를 다른 사람에게 내놓는 절기가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평화다, 결단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이 주는 평화를 마음속에 선물로 받은 사람만이 우리 또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이런 성탄절의 평화가 여러분에게 가득 넘치기를 간절히 빕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성탄절에 이 엄청난 기쁜 소식을 목자들 입에 위탁하시고 여인들 입에 위탁하셔서 이 세상의 질서를 완전히 뒤엎어버리신 예수님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도 이 세상 살면서 이 거대한 세상에 로마제국의 황제를 정점으로 펼쳐지는 힘의 숭배질서와 폭력과 무력과 경제력과 권력의 숭배질서에서 우리가 소외되는 것이 두려워 때때로 낙담할 때 있사오나 하나님 사랑과 섬김의 질서로 위대한 전복을 꿈꾸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공감하지 못하여 마음이 싸늘할 때도 있으나, 하나님 근본적으로 형제자매들을 허락하시고 성령의 때때로 주시는 감동으로 이 세상을 보이콧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니 감사합니다. 성탄절의 기쁨이 환히 넘쳐서 놀라서 강보에게 싸인 아이에게 절하는 천사 목자들의 겸허한 마음을 허락하여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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