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여자가 이르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
대림절 마지막 주간에 하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모든 국지적 갈등, 모든 국지적 분쟁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마리아와 유대는 모든 국지적 갈등의 대표적인 쌍방입니다. 다시 말해서 국지적 갈등이라 함은 상대적으로 약간 우위에 선 자와 상대적으로 약간 열등한 상대 사이에 있는 갈등입니다. 다시 말해서 절대적으로 옳지 않거나 절대적으로 옳은 자들의 갈등이 아니라 둘 다 비슷한, 그러나 약간 정당성이 더 있는 자와 정당성이 덜 있는 자의 갈등이 사마리아와 유대인의 갈등입니다. 이 갈등이 필요 없는 갈등이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갈등이 필요 없다? 갈등이 불가피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갈등의 요인이 있지만 살육전쟁으로 이어질 필요는 없는 겁니다. 그저께 미국에서 이라크전쟁 종전기념식을 했는데, 약 9년간 진행된 전쟁입니다. 미군 4437 명이 죽고, 이라크 민간인 11만 명이 죽고, 930조원의 돈이 들었습니다. 그럼 이라크가 더 평화로워졌는가? 아닙니다. 이제 이라크는 끝을 알 수 없는 전쟁 속에서 부족전쟁과 파벌전쟁으로 앞으로 2,30년 동안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담 후세인같이 강력한 군주가 다시 등장할 때까지는 또 이라크는 국지적 분쟁으로 끝나게 됩니다. 미국이 이라크에 대해서 가졌던 비교우위는 아마 자유의 가치 인권의 가치를 좀 더 주창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이라크의 갈등이 한 군대가 25만 명을 동원해서 멸절시켜야 할 만큼 절대적인 선과 악이 아닙니다. 그런데 미국은 이라크를 악의 축이라고 공격했고, 이제 이란을 공격하기 위하여 모든 전쟁 준비를 끝내고 있습니다. 왜 이란이 그다음 전쟁 타깃이 되는가? 이란이 핵무기를 외국에 빼돌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국가입니다. 그래서 지금 파키스탄과 이란의 핵무기가 미국 국방성 정책의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이런 잦은 이란의 핵위협에 대한 언급은 반드시 그 다음에 군사행동을 유발시켰기 때문에 아마도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국지적 전쟁, 절대선과 절대악이 아닌, 그런 갈등들이 메시아가 오면 해결해줄 거란 믿음이 구약성경의 믿음이고 사마리아인의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시작이 약간 이상한 본문이었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이건 누가 하는 말이건 무례한 말입니다. 갑자기 우물가에서 여인과 대화하던 예수님이 여인에게 한 말입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한번 보십시오. 낮 12시에 물 길러 오는 여인, 전통적인 셈족의 여인들과는 달리 남자와 거뜬하게 수작을 감당하는 여인, 다시 말해서 신학논쟁을 일삼는 그러면서도 상당히 자기 아이덴티티를 분명하게 드러낸 여인이 사마리아여인입니다. 제가 2주전에 말했죠? 차도르와 부르카로 얼굴을 가려서 눈만 드러내는 것이 셈족의 관습입니다. 그 이유는 셈족이 평민들이 자기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법입니다. 얼굴을 환하게 드러내면 여성의 성적 individuality, 개별성과 성적 아이덴티티가 금방 드러나기 때문에 유력자와 귀족들과 지주들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평민들은 아내를 보호하기 위하여 차도르와 부르카를 차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셈족이라는 독특한 사회의 문화적 관습입니다. 여성의 인권을 억압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적 아이덴티티, 얼굴 전체를 드러내면 예수님 당시에 산헤드린이라고 하는 탈무드 법에 의하면 간음죄를 범한 것입니다. 성적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면서 남자와 대화하는 것이 간음죄입니다. 그래서 여자를 음욕을 품고 쳐다보는 그 행위가 간음이 된다고 했던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셈족의 독특한 문화입니다. 음욕을 품고 계속 한 여자를 쳐다보는 것 자체가 간음죄가 될 만큼 남성들, 유력자들, 유력한 남성들이 평민의 아내를 빼앗을 수 있는 사회가 그 당시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말을 거는 순간 행실이 바른 여자들은 대꾸를 하면 안 됩니다. 물을 달라고 하면, 물을 주겠다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물을 떠주면 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렇게 하지 않고 말을 받았습니다. 유대인 남자인 당신이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요? 어림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니까 예수님이 10절에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라고 반격을 가하십니다. 이때까지도 물을 분명히 얻어 드시지 못했습니다.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입니다. 그랬더니 11절에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이 여자가 생수, 하나님 선물이라고 하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는 그 멋진 물이 우물 근처에서 나오는 바로 그 물, 깊은 두레박이 있어야만 길어 올릴 수 있는 그 물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랬더니 그 생수를 두레박도 없는데 어떻게 얻겠습니까? 하니까 예수님께서 13, 14절에 갑자기 어려운 말을 합니다. 야곱의 우물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여기서 예수님이 주도권을 잡은 이유는 부서져 망가져버린 이 여인의 마음을 알았다고 봐야 합니다. 이 여인은 지금 정상적인 사회에서 고립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정오에 물 길러 오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사회 동아리에 끼지 못했습니다. 낮12시에 물 길러 오는 것은 정상사회가 버린 사람인 겁니다. 목마름으로 물 길러 오는 사람들은 여인의 사회에서는 적어도 배제된 사람입니다. 낮12시에 물 길러 오는 이 여인이 인생이 매우 힘들고 부서진 걸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여인의 영적갈증을 주목했습니다. 자기는 육체적 갈증 때문에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삶이 사무치게 간절한 영적 갈증에 처해있는 걸 보고, 네가 오히려 생수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인정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생수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중요합니다. 내가 기갈에 처해서 갈증에 처해서 우물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정오 12시입니다. 나보다 더 영적갈증에 처한 사람을 보니까 내 갈증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갈증을 잊고 예수님은 여인의 갈증에 빨려 들어갔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지금 보니까 생수가 필요합니다, 나는 지금 목이 말라서 H2O가 모자라서 왔는데 당신은 생수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선물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여인이 말합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여자가 다소곳해졌습니다. 이제 유대 남자인 당신이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이런 이분법이 약간 해소됐습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 여인이 밥 하는 걸 싫어합니다. 물 길러 오는 노동을 귀찮아합니다. 그러니까 더 놀라운 것은 물을 마시고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건 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목마른 사람, 살아야 할 사람 모두 목이 마릅니다. 그런데 한 번 마시자마자 목이 안 마르려면 죽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이 여인이 동화적 구원,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을 피할 도피적 구원을 원하는 겁니다. 이 세상의 일상적 질서로부터 멀찍이 잠적해버린 구원, 다시 말해서 물 길러 오는 수고도 필요도 없는 구원, 다시 목이 마르지 않는 구원, 그런 구원을 원합니다. 이 여인은 확실하게 예수님과 그렇게 성적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남자니 여자니 이런 말을 하면서 예수님 말에 계속 대꾸와 수작을 계속 당당하게 펼쳐낸 이 자매님이 부서진 사람인 걸 예수님께서 완전히 아십니다. 오늘 본문이 말합니다. 물 기르러 오는 수고를 싫어하는 이 여인, 일상생활을 힘들어하는 이 여인, 밥하는 수고를 힘들어하는 이 여인은 부서진 가정의 소유자인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무리할 만큼 도발적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진짜 어려운 본문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 본문을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상담하다가 힘드니까 여 교우를 보고 자기가 예수님 닮았다고 생각하면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건 절대로 함부로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이 여인의 불행한 가정을 꺼내는 겁니다. 그랬더니 여인이 대답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답변합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문제는 18절입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너무 지나치게 멀리 나가셨습니다. 이 본문 때문에 알렉산더 클레멘트 오리겐이라는 교부가 이 지점 때문에 도저히 이걸 예수님의 인격과 관련시킬 수 없어서 이걸 allegorical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이 실제 사람을 이렇게 무례하게 대했을 리 없다, 예수님이 이렇게 무례한 분일 수 없고 이렇게 무대포일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지금 allegorical, 사마리아 사람의 영적인 상황을 진단하기 위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실제상황이 아니라 풍류적 상황이다, 이걸 allegorical interpretation, 풍류적 해석 또는 allegorical이라는 말을 씁니다. 사마리아 사람 자체가 이 과부와 같습니다. 남편 다섯이란 말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읽고 있는 모세오경을 가리킵니다. 모세오경만 남편으로 알고 그것만 달달달 암송하는 사마리아 사람의 영적궁핍, 영적 갈증상태, 영적 결핍상태를 가리키기 위하여 예수님은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고 남편이 있는데 남편이 아니다, 이런 무례하게 들리는 말씀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들이 교부들의 해석입니다. 이 말은 이 대화를 문자적으로 들었을 때 너무 도발적이고 무례해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allegorical 해석을 싫어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allegorical 해석을 할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맞아요. 요한복음 5장에 가면 38년 된 병자가 있습니다. 이 38년 된 병자를 똑같이 allegorical하게 해석합니다. 38년 동안 불순종한 이스라엘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allegorical 해석을 통해서 예수님의 성품을 약간 멋지게 보이려고 하는 업적을 인정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고 예수님이 이렇게 도발적이고 무례한 면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예수님답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말끔한 교양인은 아닙니다. 실제로 손도 안 씻으시고 잡수실 때도 있고, 안식일에 밀밭 서리하다가 들켜서 몰래카메라에 찍힌 적도 있고,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미끈한 분은 아닙니다. 특히 누가복음 6장 1-3절에 나오는 그 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이 굉장히 대담한 분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안식일에 남들 예배드리러 갈 때 아무리 배가 고프더라도 안식일에 배가 너무 고파서 밀밭에 가서 밀을 서리하시다가 드디어 걸리셔서 신문에 나시고, 예수님은 무례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곡을 찌르는 분이셨기 때문에 이런 대화가 가능했다고 저는 믿는 편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이 말은 예수님과 여인이 벌였던 대화의 수준을 보면 납득됩니다. 왜? 이 여인은 이미 얼굴을 바짝 내놓고 이렇게 긴 대화, 그 당시 수준으로서는 완전히 궤도를 뛰어 넘었습니다. 왜? 남자가 말을 걸 때 여자가 이렇게 말을 많이 받는 것 자체가 이건 그 당시 기준으로 볼 때 간음하는 여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담한 짓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남편 문제, 남편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대담하게 자기 말을 받고 이렇게 논쟁을 벌일 만큼 거리낌 없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이 불러오라는 말은 바로 무엇이냐? 예수님이 이 여인이 지금 영적인 갈증이 얼마나 심한가, 당신이 남편 다섯을 전전한 사건은 당신의 품행이 방정치 못한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이런 방황이 있었다는 걸 인정하는 따뜻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편이 다섯 명 있었다는 말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렇게 받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4장 28절에서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여자가 처음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주도권을 잡는 유일한 순간입니다. 그랬더니 동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네 말로 인함이 아니라고 하면서 이 여인의 법적 증언능력, 다시 말해서 이 사람의 그런 증언, 이런 의미 있는 전갈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특히 4장 42절에 이런 말을 합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라고 말하면서 이 여인의 증언 자체를 무효화합니다. 이 여자가 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와보라, 하는데 왔습니다. 와서 동네 사람들이 다시 이 여인을 배제하는 겁니다. 사마리아 남자들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마리아 남자들이 여자를 배제합니다. 이 말은 사마리아 여인은 실제로 배제된 사람입니다. 실제로 그는 사마리아 사람 중에서 가장 비참하게 배제된 사람입니다. 다섯 명의 남편을 전전하여 그는 사람들로부터 오해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오해받는 결정적인 약점인 남편문제를 꺼내어 그 여자를 복권시킨 것이고, 그 여자를 재해석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 당신의 다섯 명의 남편 편력은 품행이 방정치 못한 것이 아니었다, 당신은 하나님의 생수를 찾아 헤맨 것이다, 이렇게 말해줌으로써 당신의 인생문제는 남편 편력, 남성편력이 아니라 여자의 구원은 절대로 남자에게서 오지 않는다, 여자의 구원은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 말을 하기 위하여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을 한 겁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이걸 해석함으로써 이 본문을 allegorical 하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렇게 밀고 나갔습니다. 이렇게 읽었을 때 예수님의 무례해 보이는 그 말은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고 복권의 말씀이었고 위로의 말씀이었고 그 여인을 오히려 당당하게 만드는 말씀이었다고 보는 겁니다. 오히려 사마리아 남자들은 이 여자를 보고, 네 말 때문에 믿는 게 아니라고 다시 한 번 배제와 배척의 논리를 구사했지만 우리 예수님은 이 여인의 대화를 무시하지 않고, 간음죄를 범하였다고 오해받을 수 있을 만큼 기탄없는 대화를 함으로써 우리 예수님은 이 여인을 사람답게 대접했고, 이 여인의 말과 진실, 이 여인의 진실과 문제제기를 진지하게 경청한 겁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은 고대 셈족 사회에서 남성을 통해서만 공민권을 인정받았던 혹독한 불평등 사회에서 여자가 겪는 고통이었습니다. 남자의 이름으로 등록된 여자만이 공민권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이사야 4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여자 7명이 한 명의 남자를 붙들고 ‘지참금 가져오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여자라고 내 이름을 올려만 달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대 이스라엘 사회가 남자들의 아내로써만 여자의 존재를 인정했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은 남자에게 부속된 인물이 아니라 여자 그 자체, 사마리아 여자 그 자체로써 인정을 합니다. 남편이 없는 그 여자, 하나님을 향한 생수의 갈증 상태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품행이 방정치 못한 여자라는 그 말로는 정의할 수 없는 깊은 갈증이 있는 겁니다. 사람한테는, 이 여자는 그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 대담한 자유부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이 사람이 매력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남편 다섯 명을 편력하려면, 그만큼 이 분이 멋진 부분이 있는 겁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이런 일련의 대화가 셈족 사회의 지독한 남성중심의 사회, 여인의 운명을 남자라는 방정식을 넣어서 해석하려고 하는 그런 악한 풍습에 대해서 우리 예수님은 그렇다, 남편 없는 홀로 있는 단독자로서 난 당신의 인생을 이렇게 정의한다, 당신은 하나님을 향한 갈증 때문에 다섯 명의 남편을 편력한 것 같다, 당신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로 갈증을 풀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예배만이 당신을 다섯 명의 남편이라는 수렁으로부터 건져줄 것이다, 이런 암시를 하고 유도하는 겁니다. 당신은 하나님 선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생수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예수님의 논리인 것입니다. 그랬더니 19절에 처음으로 이 여자가 처음으로 자기의 마음속을 환히 탐조하고 완전히 공감해주는 예수님을 보고, I have found a prophet in you. 나는 당신 안에서 선지자를 봅니다, 당신은 선지자입니다, 당신은 내 마음에 모든 복잡한 문제들을 간파 했습니다, 내 마음을 정확하게 통찰했습니다, 당신은 선지자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참 기가 막히죠? 예수님은 무례한 말을 한 게 아니라 선지자적 통찰력을 구사했다고 저는 말합니다. 그랬더니 이 여자가 말합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했죠? 4장 9절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의 갈등이 제1갈등, 그다음 남자와 여자의 갈등이 제2갈등입니다. 일종의 이중적 갈등구조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 남자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사마리아와 유대가 서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적개심이 넘쳤고 분단구조가 있었습니다. 그 분단구조를 이렇게 사뿐히 넘어버립니까? 남자와 여자의 갈등을 이렇게 사뿐히 넘어버립니까? 남자와 여자의 해묵을 갈등 구조를 이렇게 사뿐히 넘어버립니까? 남자와 여자의 갈등을 넘어버릴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유대인의 갈등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이렇게 사뿐히 넘습니까? 이렇게 놀람을 표현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매님 제가 목이 말라서 제 목마름으로 이 우물에 왔지만 자매님을 가만히 보니 자매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선물과 생수가 필요한 분이군요, 이렇게 상대방의 필요에 자신의 필요를 덮어쓰기 해버립니다. 상대방이 가진 필요 때문에 자신의 필요를 망각하는 상태가 예수님께 일어난 겁니다. 이 경지는 정말 깊은 경지인 것 같은데, 제가 실감이 안 납니다. 예수님은 마음씨가 좋은 분입니다. 얼마나 마음씨가 좋으냐면 자신의 필요로 그 긴한 갈증, 그 목마름 때문에 제자들이 황급하게 물 길러 가고 음식 사러 갈 만큼 배가 고픈 상태였는데, 그 기갈에 처한 예수님이 더 큰 기갈에 처한 그분을 보고 그 말을 하는 건 이건 너무나 체질적으로 착한 마음을 가진 이렇게 동정심이 있는 거거든요. 내 불행을 응시하다가 내 고통을 응시하다가 나보다 더 큰 고통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니까 고통의 위계질서 안에 수그러드니까, 당신은 진짜 하나님 선물이 필요한 분입니다, 당신이 진짜 생수가 필요한 분입니다, 나는 H2O가 필요하지만 당신은 성령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위로가 필요합니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대화, 어떤 수준에 가야지 되는지 모릅니다. 정말 저는 모릅니다. 너무 깊기 때문에, 너무 착한 마음씨, 너무나 선하신 분이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 갈등과 내 문제와 내 고통과 내 불행을 잊어버릴 만큼 상대방의 불행에 동정하고 공감하고 몰입하는 대화가 예수님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기 때문에 겉으로 볼 때는 무례했지만 이 여인에게는 무례하게 들린 게 아니라 내 정신을 간파해주시고 나를 동정해 주시는 말로 들었단 겁니다. 그러니까 교부들이 이걸 무례하다고 봤다는 것은 약간, 어리석은 것은 아니지만 더 깊이 이 본문을 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부들의 그런 해석도 틀렸다고 말을 할 순 없습니다. 다만 저는 이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수준이 납득이 된다는 뜻입니다. 납득이 된다는 말은 무례해 보이는 대화가 내 정신과 영혼의 폐부를 찔러대는, 정곡을 찌르는, 통찰력 넘치는 동정과 공감을 의미했다고 여자가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당신은 통찰력이 정말 기가 막힙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랬더니 이제 드디어 선지자가 된 분에게 할 수 있는 이슈가 예배문제, 선지자급 인물에게는 주제가 더 높아집니다. 갑자기 생수문제에서 갈증문제에서 영원한 갈증, 예배문제로 옮겨갑니다. 어떻게요? 다시 사마리아와 유대의 갈등을 끄집어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그리심산입니다.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정통성이 있다, 이건 길게는 천년간 계속된 갈등, BC 921년부터 시작된 갈등입니다. 짧게는 에스라 느헤미야 때부터 있었던 갈등 600년 동안의 갈등입니다. 더 짧게는 BC 125년에 예루살렘 제사장 요한 히르카루스 1세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리심산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배드리는 그 현장을 급습해서 테러를 했습니다. 지금 이슬람하고 똑같습니다. 지금 이슬람 사람들 테러가 옛날 유대인 테러입니다. 요한 히르카루스 1세가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 산,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릴 때 그 예배당 성전을 파괴했고 사람을 다 죽였습니다. 그 상처가 지금 이 사람이 기억하는 겁니다. 우리는 신명기 27장의 모세께서 말씀하신 그 그리심산에서 시므온족속과 유다족속과 레위족속이 올라가서 축복을 예언했던 그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리려고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예루살렘에서만 예배드려야 한다고 주장합니까? 이 산과 저 산의 신성성을 다투려고 합니까? 우리는 신명기 27장 때문에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모세가 예언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아니다, 예배는 예루살렘 성에서 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 논쟁에서는 둘 다 틀렸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장소의 신성성이 예배를 담보하는 게 아니다, 예배자의 마음중심이 참된 예배와 거짓 예배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은 이 논쟁을 피해갑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4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장소의 신성성을 다투는 자들이 논할 바가 아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종교다원주의를 옹호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산과 같은 존재, 이산과 저산, 특정한 산의 신성성을 옹호하는 종교, 그런 종교적 타당성이 우리는 익숙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을 믿거나 찰스 피니를 믿거나, 순복음교회를 믿거나 웨슬레를 믿거나,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산과 저 산 장소의 신성성에 대해서는 분명히 양보를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특별한 가산점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 그건 중요하지 않는데,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말함으로써 어떤 산이 중요하지 않고,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사람과 거짓과 혈과 육으로 예배드리는 자의 차이가 더 크다, 라고 말합니다. 이게 너무 중요합니다. 영이라는 말은 성령에 이끌려서, 즉 자기 부인의 능력으로, 다시 말해서 하나님 말씀 듣고 순종할 태세로 예배드리는 자, 이것이 바로 영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 이 진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진리가 아닙니다. 명제적 진리가 아닙니다. 이 진리는 인격적 항구유일성, 인격적인 견고성, 인격적인 동일성을 가리킵니다. 내가 거짓된 자아를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내가 경건하지 않은데 경건하다고 예배드리는 건 옳지 않습니다. 이건 누가복음 18장 9절에서 세리와 바리새인이 올라가 기도하는데, 세리는 진실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쳐다보지 못하고,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이게 진실로 예배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자기를 의롭게 보이게 하면서 자기의 의롭게 날조된 자아상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니까 하나님은 그런 자를 의롭다고 하지 않고 그냥 보냈습니다. 그런데 세리가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진실, 자기에 대한 참된 이해를 가지고 나아갈 때 이 모습 이대로 나가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예배자로 받으신다는 겁니다. 이건 참 중요합니다. CS 루이스의 작품 중에서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라는 중장편 소설이 하나 있습니다. CS 루이스의 작품 중 제일 안 알려진 소설인데, 라는 작품입니다. 얼굴이라는 말은 참된 자아란 뜻입니다. 거기에 옹깃이라고 하는 영국을 방불케 하는 나라에 얼굴 못생긴 여자가 있습니다. 얼굴 못생긴 옹깃 왕국의 여왕이 얼굴 잘 생긴 여동생을 시기하는 내용입니다. 얼굴 못 생긴 그 여왕이 얼굴이 못 생긴 그 모습을 국민이 아는 걸 너무나 두려워하고 실망할까 싶어서 자기 얼굴을 가리면서 늘 행차합니다. 사람들은 옹깃 여왕의 얼굴을 모릅니다. 다만 아름다운 분이라고 달 알고 있는데, 그렇게 가면을 쓰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니까 한 번도 하나님이 응답을 안 해주는데, 그런데 가면을 벗고 얼굴 못생긴 걸 인정합니다. 내가 동생을 질투한 것, 내가 못 생긴 것에 대한 두려움, 다 말하니까 드디어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자기 얼굴로 나아가는 사람만이 응답받는다는 그 내용이 라는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입니다. 영과 진리라는 말을 할 때 진리로 가득 찬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인격적인 진실성으로, 즉 세리 같은 정직함으로 그런 뜻에 해당합니다. 옹깃 여왕이 가면 벗은 그 모습으로, 이게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의 차이보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과 거짓과 혈과 육의 만족감으로 예배하는 사람의 차이가 훨씬 크다는 겁니다. 그래서 최근 산성을 쌓으신 M자 들어간 그분의 기독교와 우리의 차이는 깨끗한 불교와 우리의 차이보다 더 큰 것처럼 보일만큼 똑같은 기독교인데도 그분의 기독교와 우리 기독교가 너무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모든 하는 일마다 하나님께 엄청 기쁨을 안겨주는 선물을 드리듯이 도시를 하나님께 바쳐버리고 뭘 바쳐버리려고 하는데, 그분이 뭘 바칠 때마다 사단이 나고 큰 전도의 문이 막힙니다. 그게 바로 거짓입니다. 거짓된 자의 기독교입니다. 내가 의롭지 않은데 의롭다는 생각을 한다거나 내가 하나님께 악한 일을 하면서 내가 하나님께 기쁨을 선사한다고 믿는 거짓된 자아관을 가지고 예배드리면 응답이 안 일어납니다. 진짜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사마리아와 유대인의 갈등보다 거짓과 진리의 갈등, 영과 육의 갈등을 더 크게 보셨습니다. 여러분, 성탄절은 거짓된 내 모습과 참된 내 모습의 갈등이 해소되는 날입니다. 그리심산에 있는 내 모습과 예루살렘성에 있는 내 모습의 차이가 아니라 혈과 육으로 거짓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과 참된 자아를 가지고 사무치는 진실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차이가 큽니다. CS 루이스 <나니아 연대기> 6권에 나올 겁니다. CS 루이스를 종교다원주의자라고 오해하게 만든 작품입니다. 한 이교도 원숭이가 구원을 받아서 아슬란 왕, 예수님을 상징하는 큰 사자왕을 독대했습니다. 원숭이가 말합니다. 나는 한 번도 당신께 아슬란 이름으로 기도한 적이 없는데, 나는 샤샤라고 하는 우리 민족의 신 이름으로 기도했는데 어떻게 내가 구원을 받았냐고 물었더니 아슬란이 말합니다. 네가 정직으로 성실로 자비로 삶을 살면서 샤샤의 이름을 불렀다 하더라도 그건 아슬란에게 드려진 기도고 아슬란을 사실 부른 것이다, 네가 정직하게 살면서 어떤 신의 이름을 부르면 그건 나를 부른 것이다, 그러나 네가 거짓된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부를 때 그건 거짓된 신을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라고 말하면서 구원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그 점이 바로 CS 루이스를 종교다원주의자 논란으로 끌어가는 부분인데, 종교다원주의가 아니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와 거짓과 육으로 예배하는 자의 차이에 대한 설명을 문학적으로 멋지게 한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우리의 육성, 우리의 사무치고 부서지는 음성들, 우리의 용서하지 못하는 갈등들, 그 육성을 가지고 예배드려야지, 해결 안 됐는데 갑자기 성자처럼 하면 안 됩니다. 분노와 야수적인 복수심과 이런 것들이 좋지 않지만 그것 다 빼고 성자처럼 내 모습을 가장해서는 실제로 예배는 안 드려집니다. 제 딸이 당산역에서 컴퓨터를 가져가다가 아주 무례한 한국 남자를 만나서 컴퓨터를 떨어뜨린 것 같아요. 너무 기분이 안 좋았는지, I hate this entire country. 하면서 영어를 하면서 왔길래, 네가 저주 기도가 지금 필요한 것 같다, 저주 기도문은 시편 109편에 있으니 그 기도문으로 그 남자를 저주하여라, 그러니까 문자로 I Love you Dad, 저주하고 싶을 땐 저주하는 것이 네 진실에 가깝다, 이렇게 얘기했는데, 무례한 아저씨가 처녀의 팔을 붙들어서 컴퓨터를 깼으니까, 고장나면 60몇 만원이 또 드는데, 이런 생각을 하니까 굉장히 기분이 나빴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때 우리의 인격적 항구유일성으로 또는 진실한 그 모습으로 예배드릴 때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달래고 어루만지시고 고치신단 말이에요. 그래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은 이 산과 저 산의 헤게모니 갈등보다 더 중요하다, 그게 중요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여기는 보편주의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중 누가 구원의 계시를 받았느냐, 여기서는 예수님은 양보하지 않습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사마리아 여인이 보고 있는 사마리아 오경 가지고는 안 된다, 구원의 출처를 유대인이라고 못 박음으로써 특수성을 고집했습니다. 우리가 세계만민에게 구원이 다 똑같이 동등하게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개념에선 맞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특수한 민족을 선택하셔서 특수한 민족에게 더 많은 계시를 밝고 분명하게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성경이 계시를 배타적으로 확실하게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성경과 유대인으로부터 구원이 온다는 것, 유대인들의 계시개념에서 구원이 온다는 것, 이걸 우리 예수님은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핵심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붙잡았던 배타적 주장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입니까? 전 세계 만민에게 평등하고도 논란 없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입증하기 위하여 이렇게 배타적인 주장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건 굉장히 역설입니다. 다시 말해서 배타적 주장은 기분이 나쁘지만 그 배타적 주장이 전달하려고 하는 사랑의 진실은 세계 만민에게 아무런 차별없는 메시지, 남자와 여자, 종과 자유자, 아무도 차별하지 않는 그 멋지고 보편적인 아버지 하나님 사랑을 전달하기 위하여 그 사랑의 하나님 보편적인 하나님이 최고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배타적 주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로부터 구원이 난다는 말은 여전히 진리입니다. 김세윤 박사님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책에 보십시오. 모든 진리는 배타성을 띄고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류가 배타성을 띄고 있기 때문에 부부관계가 유지됩니다. 배타성을 띄지 않으면 부부관계가 유지 안 됩니다. 배타성을 띈 사람만이 계약의 신실성이 유지됩니다. 결론 맺겠습니다. 성탄절은 이 산과 저 산의 낮은 단계의 갈등을 해소하고 영이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절기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갈등의 당사자들과 절대선과 절대악의 갈등이 아니라면 여러분께서는 이 성탄절날 이 산과 저 산과 그리심산과 예루살렘성의 갈등 정도는 가뿐히 넘고, 남자와 여자의 경계를 가뿐히 넘고,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의 갈등을 가뿐히 넘는 화해의 아이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멋진 성탄절 맞이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갈등하는 존재고 각축하는 존재이며 원수를 맺는 존재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께서 이 성탄절에 오셔서 우리 마음에 그리심산에 예루살렘 시온산의 갈등 정도를 너끈히 해결해주셔서 우리가 평화의 성탄절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대림절 마지막 주간에 하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모든 국지적 갈등, 모든 국지적 분쟁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마리아와 유대는 모든 국지적 갈등의 대표적인 쌍방입니다. 다시 말해서 국지적 갈등이라 함은 상대적으로 약간 우위에 선 자와 상대적으로 약간 열등한 상대 사이에 있는 갈등입니다. 다시 말해서 절대적으로 옳지 않거나 절대적으로 옳은 자들의 갈등이 아니라 둘 다 비슷한, 그러나 약간 정당성이 더 있는 자와 정당성이 덜 있는 자의 갈등이 사마리아와 유대인의 갈등입니다. 이 갈등이 필요 없는 갈등이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갈등이 필요 없다? 갈등이 불가피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갈등의 요인이 있지만 살육전쟁으로 이어질 필요는 없는 겁니다. 그저께 미국에서 이라크전쟁 종전기념식을 했는데, 약 9년간 진행된 전쟁입니다. 미군 4437 명이 죽고, 이라크 민간인 11만 명이 죽고, 930조원의 돈이 들었습니다. 그럼 이라크가 더 평화로워졌는가? 아닙니다. 이제 이라크는 끝을 알 수 없는 전쟁 속에서 부족전쟁과 파벌전쟁으로 앞으로 2,30년 동안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담 후세인같이 강력한 군주가 다시 등장할 때까지는 또 이라크는 국지적 분쟁으로 끝나게 됩니다. 미국이 이라크에 대해서 가졌던 비교우위는 아마 자유의 가치 인권의 가치를 좀 더 주창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이라크의 갈등이 한 군대가 25만 명을 동원해서 멸절시켜야 할 만큼 절대적인 선과 악이 아닙니다. 그런데 미국은 이라크를 악의 축이라고 공격했고, 이제 이란을 공격하기 위하여 모든 전쟁 준비를 끝내고 있습니다. 왜 이란이 그다음 전쟁 타깃이 되는가? 이란이 핵무기를 외국에 빼돌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국가입니다. 그래서 지금 파키스탄과 이란의 핵무기가 미국 국방성 정책의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이런 잦은 이란의 핵위협에 대한 언급은 반드시 그 다음에 군사행동을 유발시켰기 때문에 아마도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국지적 전쟁, 절대선과 절대악이 아닌, 그런 갈등들이 메시아가 오면 해결해줄 거란 믿음이 구약성경의 믿음이고 사마리아인의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시작이 약간 이상한 본문이었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이건 누가 하는 말이건 무례한 말입니다. 갑자기 우물가에서 여인과 대화하던 예수님이 여인에게 한 말입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한번 보십시오. 낮 12시에 물 길러 오는 여인, 전통적인 셈족의 여인들과는 달리 남자와 거뜬하게 수작을 감당하는 여인, 다시 말해서 신학논쟁을 일삼는 그러면서도 상당히 자기 아이덴티티를 분명하게 드러낸 여인이 사마리아여인입니다. 제가 2주전에 말했죠? 차도르와 부르카로 얼굴을 가려서 눈만 드러내는 것이 셈족의 관습입니다. 그 이유는 셈족이 평민들이 자기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법입니다. 얼굴을 환하게 드러내면 여성의 성적 individuality, 개별성과 성적 아이덴티티가 금방 드러나기 때문에 유력자와 귀족들과 지주들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평민들은 아내를 보호하기 위하여 차도르와 부르카를 차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셈족이라는 독특한 사회의 문화적 관습입니다. 여성의 인권을 억압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적 아이덴티티, 얼굴 전체를 드러내면 예수님 당시에 산헤드린이라고 하는 탈무드 법에 의하면 간음죄를 범한 것입니다. 성적 아이덴티티를 드러내면서 남자와 대화하는 것이 간음죄입니다. 그래서 여자를 음욕을 품고 쳐다보는 그 행위가 간음이 된다고 했던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셈족의 독특한 문화입니다. 음욕을 품고 계속 한 여자를 쳐다보는 것 자체가 간음죄가 될 만큼 남성들, 유력자들, 유력한 남성들이 평민의 아내를 빼앗을 수 있는 사회가 그 당시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말을 거는 순간 행실이 바른 여자들은 대꾸를 하면 안 됩니다. 물을 달라고 하면, 물을 주겠다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물을 떠주면 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렇게 하지 않고 말을 받았습니다. 유대인 남자인 당신이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요? 어림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니까 예수님이 10절에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라고 반격을 가하십니다. 이때까지도 물을 분명히 얻어 드시지 못했습니다.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입니다. 그랬더니 11절에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이 여자가 생수, 하나님 선물이라고 하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는 그 멋진 물이 우물 근처에서 나오는 바로 그 물, 깊은 두레박이 있어야만 길어 올릴 수 있는 그 물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랬더니 그 생수를 두레박도 없는데 어떻게 얻겠습니까? 하니까 예수님께서 13, 14절에 갑자기 어려운 말을 합니다. 야곱의 우물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여기서 예수님이 주도권을 잡은 이유는 부서져 망가져버린 이 여인의 마음을 알았다고 봐야 합니다. 이 여인은 지금 정상적인 사회에서 고립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정오에 물 길러 오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사회 동아리에 끼지 못했습니다. 낮12시에 물 길러 오는 것은 정상사회가 버린 사람인 겁니다. 목마름으로 물 길러 오는 사람들은 여인의 사회에서는 적어도 배제된 사람입니다. 낮12시에 물 길러 오는 이 여인이 인생이 매우 힘들고 부서진 걸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여인의 영적갈증을 주목했습니다. 자기는 육체적 갈증 때문에 왔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삶이 사무치게 간절한 영적 갈증에 처해있는 걸 보고, 네가 오히려 생수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인정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생수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중요합니다. 내가 기갈에 처해서 갈증에 처해서 우물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정오 12시입니다. 나보다 더 영적갈증에 처한 사람을 보니까 내 갈증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갈증을 잊고 예수님은 여인의 갈증에 빨려 들어갔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지금 보니까 생수가 필요합니다, 나는 지금 목이 말라서 H2O가 모자라서 왔는데 당신은 생수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선물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여인이 말합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여자가 다소곳해졌습니다. 이제 유대 남자인 당신이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이런 이분법이 약간 해소됐습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 여인이 밥 하는 걸 싫어합니다. 물 길러 오는 노동을 귀찮아합니다. 그러니까 더 놀라운 것은 물을 마시고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건 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목마른 사람, 살아야 할 사람 모두 목이 마릅니다. 그런데 한 번 마시자마자 목이 안 마르려면 죽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이 여인이 동화적 구원,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을 피할 도피적 구원을 원하는 겁니다. 이 세상의 일상적 질서로부터 멀찍이 잠적해버린 구원, 다시 말해서 물 길러 오는 수고도 필요도 없는 구원, 다시 목이 마르지 않는 구원, 그런 구원을 원합니다. 이 여인은 확실하게 예수님과 그렇게 성적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남자니 여자니 이런 말을 하면서 예수님 말에 계속 대꾸와 수작을 계속 당당하게 펼쳐낸 이 자매님이 부서진 사람인 걸 예수님께서 완전히 아십니다. 오늘 본문이 말합니다. 물 기르러 오는 수고를 싫어하는 이 여인, 일상생활을 힘들어하는 이 여인, 밥하는 수고를 힘들어하는 이 여인은 부서진 가정의 소유자인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무리할 만큼 도발적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합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진짜 어려운 본문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 본문을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상담하다가 힘드니까 여 교우를 보고 자기가 예수님 닮았다고 생각하면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건 절대로 함부로 본받아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이 여인의 불행한 가정을 꺼내는 겁니다. 그랬더니 여인이 대답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답변합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문제는 18절입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너무 지나치게 멀리 나가셨습니다. 이 본문 때문에 알렉산더 클레멘트 오리겐이라는 교부가 이 지점 때문에 도저히 이걸 예수님의 인격과 관련시킬 수 없어서 이걸 allegorical로 해석합니다. 예수님이 실제 사람을 이렇게 무례하게 대했을 리 없다, 예수님이 이렇게 무례한 분일 수 없고 이렇게 무대포일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지금 allegorical, 사마리아 사람의 영적인 상황을 진단하기 위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실제상황이 아니라 풍류적 상황이다, 이걸 allegorical interpretation, 풍류적 해석 또는 allegorical이라는 말을 씁니다. 사마리아 사람 자체가 이 과부와 같습니다. 남편 다섯이란 말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읽고 있는 모세오경을 가리킵니다. 모세오경만 남편으로 알고 그것만 달달달 암송하는 사마리아 사람의 영적궁핍, 영적 갈증상태, 영적 결핍상태를 가리키기 위하여 예수님은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고 남편이 있는데 남편이 아니다, 이런 무례하게 들리는 말씀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들이 교부들의 해석입니다. 이 말은 이 대화를 문자적으로 들었을 때 너무 도발적이고 무례해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allegorical 해석을 싫어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allegorical 해석을 할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맞아요. 요한복음 5장에 가면 38년 된 병자가 있습니다. 이 38년 된 병자를 똑같이 allegorical하게 해석합니다. 38년 동안 불순종한 이스라엘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allegorical 해석을 통해서 예수님의 성품을 약간 멋지게 보이려고 하는 업적을 인정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고 예수님이 이렇게 도발적이고 무례한 면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예수님답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말끔한 교양인은 아닙니다. 실제로 손도 안 씻으시고 잡수실 때도 있고, 안식일에 밀밭 서리하다가 들켜서 몰래카메라에 찍힌 적도 있고,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미끈한 분은 아닙니다. 특히 누가복음 6장 1-3절에 나오는 그 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이 굉장히 대담한 분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안식일에 남들 예배드리러 갈 때 아무리 배가 고프더라도 안식일에 배가 너무 고파서 밀밭에 가서 밀을 서리하시다가 드디어 걸리셔서 신문에 나시고, 예수님은 무례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곡을 찌르는 분이셨기 때문에 이런 대화가 가능했다고 저는 믿는 편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이 말은 예수님과 여인이 벌였던 대화의 수준을 보면 납득됩니다. 왜? 이 여인은 이미 얼굴을 바짝 내놓고 이렇게 긴 대화, 그 당시 수준으로서는 완전히 궤도를 뛰어 넘었습니다. 왜? 남자가 말을 걸 때 여자가 이렇게 말을 많이 받는 것 자체가 이건 그 당시 기준으로 볼 때 간음하는 여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대담한 짓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남편 문제, 남편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대담하게 자기 말을 받고 이렇게 논쟁을 벌일 만큼 거리낌 없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이 불러오라는 말은 바로 무엇이냐? 예수님이 이 여인이 지금 영적인 갈증이 얼마나 심한가, 당신이 남편 다섯을 전전한 사건은 당신의 품행이 방정치 못한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서 이런 방황이 있었다는 걸 인정하는 따뜻한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편이 다섯 명 있었다는 말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렇게 받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4장 28절에서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여자가 처음으로 동네 사람들에게 주도권을 잡는 유일한 순간입니다. 그랬더니 동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네 말로 인함이 아니라고 하면서 이 여인의 법적 증언능력, 다시 말해서 이 사람의 그런 증언, 이런 의미 있는 전갈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특히 4장 42절에 이런 말을 합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라고 말하면서 이 여인의 증언 자체를 무효화합니다. 이 여자가 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와보라, 하는데 왔습니다. 와서 동네 사람들이 다시 이 여인을 배제하는 겁니다. 사마리아 남자들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마리아 남자들이 여자를 배제합니다. 이 말은 사마리아 여인은 실제로 배제된 사람입니다. 실제로 그는 사마리아 사람 중에서 가장 비참하게 배제된 사람입니다. 다섯 명의 남편을 전전하여 그는 사람들로부터 오해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오해받는 결정적인 약점인 남편문제를 꺼내어 그 여자를 복권시킨 것이고, 그 여자를 재해석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 당신의 다섯 명의 남편 편력은 품행이 방정치 못한 것이 아니었다, 당신은 하나님의 생수를 찾아 헤맨 것이다, 이렇게 말해줌으로써 당신의 인생문제는 남편 편력, 남성편력이 아니라 여자의 구원은 절대로 남자에게서 오지 않는다, 여자의 구원은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 말을 하기 위하여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을 한 겁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이걸 해석함으로써 이 본문을 allegorical 하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이렇게 밀고 나갔습니다. 이렇게 읽었을 때 예수님의 무례해 보이는 그 말은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고 복권의 말씀이었고 위로의 말씀이었고 그 여인을 오히려 당당하게 만드는 말씀이었다고 보는 겁니다. 오히려 사마리아 남자들은 이 여자를 보고, 네 말 때문에 믿는 게 아니라고 다시 한 번 배제와 배척의 논리를 구사했지만 우리 예수님은 이 여인의 대화를 무시하지 않고, 간음죄를 범하였다고 오해받을 수 있을 만큼 기탄없는 대화를 함으로써 우리 예수님은 이 여인을 사람답게 대접했고, 이 여인의 말과 진실, 이 여인의 진실과 문제제기를 진지하게 경청한 겁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은 고대 셈족 사회에서 남성을 통해서만 공민권을 인정받았던 혹독한 불평등 사회에서 여자가 겪는 고통이었습니다. 남자의 이름으로 등록된 여자만이 공민권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이사야 4장 1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여자 7명이 한 명의 남자를 붙들고 ‘지참금 가져오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여자라고 내 이름을 올려만 달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대 이스라엘 사회가 남자들의 아내로써만 여자의 존재를 인정했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은 남자에게 부속된 인물이 아니라 여자 그 자체, 사마리아 여자 그 자체로써 인정을 합니다. 남편이 없는 그 여자, 하나님을 향한 생수의 갈증 상태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품행이 방정치 못한 여자라는 그 말로는 정의할 수 없는 깊은 갈증이 있는 겁니다. 사람한테는, 이 여자는 그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 대담한 자유부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이 사람이 매력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남편 다섯 명을 편력하려면, 그만큼 이 분이 멋진 부분이 있는 겁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이런 일련의 대화가 셈족 사회의 지독한 남성중심의 사회, 여인의 운명을 남자라는 방정식을 넣어서 해석하려고 하는 그런 악한 풍습에 대해서 우리 예수님은 그렇다, 남편 없는 홀로 있는 단독자로서 난 당신의 인생을 이렇게 정의한다, 당신은 하나님을 향한 갈증 때문에 다섯 명의 남편을 편력한 것 같다, 당신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예배로 갈증을 풀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예배만이 당신을 다섯 명의 남편이라는 수렁으로부터 건져줄 것이다, 이런 암시를 하고 유도하는 겁니다. 당신은 하나님 선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생수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예수님의 논리인 것입니다. 그랬더니 19절에 처음으로 이 여자가 처음으로 자기의 마음속을 환히 탐조하고 완전히 공감해주는 예수님을 보고, I have found a prophet in you. 나는 당신 안에서 선지자를 봅니다, 당신은 선지자입니다, 당신은 내 마음에 모든 복잡한 문제들을 간파 했습니다, 내 마음을 정확하게 통찰했습니다, 당신은 선지자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참 기가 막히죠? 예수님은 무례한 말을 한 게 아니라 선지자적 통찰력을 구사했다고 저는 말합니다. 그랬더니 이 여자가 말합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이에 갈등이 있다고 했죠? 4장 9절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의 갈등이 제1갈등, 그다음 남자와 여자의 갈등이 제2갈등입니다. 일종의 이중적 갈등구조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 남자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사마리아와 유대가 서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적개심이 넘쳤고 분단구조가 있었습니다. 그 분단구조를 이렇게 사뿐히 넘어버립니까? 남자와 여자의 갈등을 이렇게 사뿐히 넘어버립니까? 남자와 여자의 해묵을 갈등 구조를 이렇게 사뿐히 넘어버립니까? 남자와 여자의 갈등을 넘어버릴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유대인의 갈등이 없기라도 한 것처럼 이렇게 사뿐히 넘습니까? 이렇게 놀람을 표현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매님 제가 목이 말라서 제 목마름으로 이 우물에 왔지만 자매님을 가만히 보니 자매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선물과 생수가 필요한 분이군요, 이렇게 상대방의 필요에 자신의 필요를 덮어쓰기 해버립니다. 상대방이 가진 필요 때문에 자신의 필요를 망각하는 상태가 예수님께 일어난 겁니다. 이 경지는 정말 깊은 경지인 것 같은데, 제가 실감이 안 납니다. 예수님은 마음씨가 좋은 분입니다. 얼마나 마음씨가 좋으냐면 자신의 필요로 그 긴한 갈증, 그 목마름 때문에 제자들이 황급하게 물 길러 가고 음식 사러 갈 만큼 배가 고픈 상태였는데, 그 기갈에 처한 예수님이 더 큰 기갈에 처한 그분을 보고 그 말을 하는 건 이건 너무나 체질적으로 착한 마음을 가진 이렇게 동정심이 있는 거거든요. 내 불행을 응시하다가 내 고통을 응시하다가 나보다 더 큰 고통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니까 고통의 위계질서 안에 수그러드니까, 당신은 진짜 하나님 선물이 필요한 분입니다, 당신이 진짜 생수가 필요한 분입니다, 나는 H2O가 필요하지만 당신은 성령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위로가 필요합니다, 라고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이런 대화, 어떤 수준에 가야지 되는지 모릅니다. 정말 저는 모릅니다. 너무 깊기 때문에, 너무 착한 마음씨, 너무나 선하신 분이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 갈등과 내 문제와 내 고통과 내 불행을 잊어버릴 만큼 상대방의 불행에 동정하고 공감하고 몰입하는 대화가 예수님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기 때문에 겉으로 볼 때는 무례했지만 이 여인에게는 무례하게 들린 게 아니라 내 정신을 간파해주시고 나를 동정해 주시는 말로 들었단 겁니다. 그러니까 교부들이 이걸 무례하다고 봤다는 것은 약간, 어리석은 것은 아니지만 더 깊이 이 본문을 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부들의 그런 해석도 틀렸다고 말을 할 순 없습니다. 다만 저는 이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수준이 납득이 된다는 뜻입니다. 납득이 된다는 말은 무례해 보이는 대화가 내 정신과 영혼의 폐부를 찔러대는, 정곡을 찌르는, 통찰력 넘치는 동정과 공감을 의미했다고 여자가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당신은 통찰력이 정말 기가 막힙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랬더니 이제 드디어 선지자가 된 분에게 할 수 있는 이슈가 예배문제, 선지자급 인물에게는 주제가 더 높아집니다. 갑자기 생수문제에서 갈증문제에서 영원한 갈증, 예배문제로 옮겨갑니다. 어떻게요? 다시 사마리아와 유대의 갈등을 끄집어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그리심산입니다.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정통성이 있다, 이건 길게는 천년간 계속된 갈등, BC 921년부터 시작된 갈등입니다. 짧게는 에스라 느헤미야 때부터 있었던 갈등 600년 동안의 갈등입니다. 더 짧게는 BC 125년에 예루살렘 제사장 요한 히르카루스 1세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리심산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배드리는 그 현장을 급습해서 테러를 했습니다. 지금 이슬람하고 똑같습니다. 지금 이슬람 사람들 테러가 옛날 유대인 테러입니다. 요한 히르카루스 1세가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 산,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릴 때 그 예배당 성전을 파괴했고 사람을 다 죽였습니다. 그 상처가 지금 이 사람이 기억하는 겁니다. 우리는 신명기 27장의 모세께서 말씀하신 그 그리심산에서 시므온족속과 유다족속과 레위족속이 올라가서 축복을 예언했던 그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리려고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예루살렘에서만 예배드려야 한다고 주장합니까? 이 산과 저 산의 신성성을 다투려고 합니까? 우리는 신명기 27장 때문에 그리심산에서 예배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모세가 예언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아니다, 예배는 예루살렘 성에서 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 논쟁에서는 둘 다 틀렸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장소의 신성성이 예배를 담보하는 게 아니다, 예배자의 마음중심이 참된 예배와 거짓 예배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은 이 논쟁을 피해갑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4절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장소의 신성성을 다투는 자들이 논할 바가 아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종교다원주의를 옹호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산과 같은 존재, 이산과 저산, 특정한 산의 신성성을 옹호하는 종교, 그런 종교적 타당성이 우리는 익숙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을 믿거나 찰스 피니를 믿거나, 순복음교회를 믿거나 웨슬레를 믿거나,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산과 저 산 장소의 신성성에 대해서는 분명히 양보를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특별한 가산점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 그건 중요하지 않는데,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말함으로써 어떤 산이 중요하지 않고,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사람과 거짓과 혈과 육으로 예배드리는 자의 차이가 더 크다, 라고 말합니다. 이게 너무 중요합니다. 영이라는 말은 성령에 이끌려서, 즉 자기 부인의 능력으로, 다시 말해서 하나님 말씀 듣고 순종할 태세로 예배드리는 자, 이것이 바로 영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 이 진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진리가 아닙니다. 명제적 진리가 아닙니다. 이 진리는 인격적 항구유일성, 인격적인 견고성, 인격적인 동일성을 가리킵니다. 내가 거짓된 자아를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내가 경건하지 않은데 경건하다고 예배드리는 건 옳지 않습니다. 이건 누가복음 18장 9절에서 세리와 바리새인이 올라가 기도하는데, 세리는 진실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쳐다보지 못하고,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이게 진실로 예배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자기를 의롭게 보이게 하면서 자기의 의롭게 날조된 자아상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니까 하나님은 그런 자를 의롭다고 하지 않고 그냥 보냈습니다. 그런데 세리가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진실, 자기에 대한 참된 이해를 가지고 나아갈 때 이 모습 이대로 나가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예배자로 받으신다는 겁니다. 이건 참 중요합니다. CS 루이스의 작품 중에서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라는 중장편 소설이 하나 있습니다. CS 루이스의 작품 중 제일 안 알려진 소설인데, 라는 작품입니다. 얼굴이라는 말은 참된 자아란 뜻입니다. 거기에 옹깃이라고 하는 영국을 방불케 하는 나라에 얼굴 못생긴 여자가 있습니다. 얼굴 못생긴 옹깃 왕국의 여왕이 얼굴 잘 생긴 여동생을 시기하는 내용입니다. 얼굴 못 생긴 그 여왕이 얼굴이 못 생긴 그 모습을 국민이 아는 걸 너무나 두려워하고 실망할까 싶어서 자기 얼굴을 가리면서 늘 행차합니다. 사람들은 옹깃 여왕의 얼굴을 모릅니다. 다만 아름다운 분이라고 달 알고 있는데, 그렇게 가면을 쓰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니까 한 번도 하나님이 응답을 안 해주는데, 그런데 가면을 벗고 얼굴 못생긴 걸 인정합니다. 내가 동생을 질투한 것, 내가 못 생긴 것에 대한 두려움, 다 말하니까 드디어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자기 얼굴로 나아가는 사람만이 응답받는다는 그 내용이 라는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입니다. 영과 진리라는 말을 할 때 진리로 가득 찬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인격적인 진실성으로, 즉 세리 같은 정직함으로 그런 뜻에 해당합니다. 옹깃 여왕이 가면 벗은 그 모습으로, 이게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의 차이보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과 거짓과 혈과 육의 만족감으로 예배하는 사람의 차이가 훨씬 크다는 겁니다. 그래서 최근 산성을 쌓으신 M자 들어간 그분의 기독교와 우리의 차이는 깨끗한 불교와 우리의 차이보다 더 큰 것처럼 보일만큼 똑같은 기독교인데도 그분의 기독교와 우리 기독교가 너무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모든 하는 일마다 하나님께 엄청 기쁨을 안겨주는 선물을 드리듯이 도시를 하나님께 바쳐버리고 뭘 바쳐버리려고 하는데, 그분이 뭘 바칠 때마다 사단이 나고 큰 전도의 문이 막힙니다. 그게 바로 거짓입니다. 거짓된 자의 기독교입니다. 내가 의롭지 않은데 의롭다는 생각을 한다거나 내가 하나님께 악한 일을 하면서 내가 하나님께 기쁨을 선사한다고 믿는 거짓된 자아관을 가지고 예배드리면 응답이 안 일어납니다. 진짜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사마리아와 유대인의 갈등보다 거짓과 진리의 갈등, 영과 육의 갈등을 더 크게 보셨습니다. 여러분, 성탄절은 거짓된 내 모습과 참된 내 모습의 갈등이 해소되는 날입니다. 그리심산에 있는 내 모습과 예루살렘성에 있는 내 모습의 차이가 아니라 혈과 육으로 거짓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과 참된 자아를 가지고 사무치는 진실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차이가 큽니다. CS 루이스 <나니아 연대기> 6권에 나올 겁니다. CS 루이스를 종교다원주의자라고 오해하게 만든 작품입니다. 한 이교도 원숭이가 구원을 받아서 아슬란 왕, 예수님을 상징하는 큰 사자왕을 독대했습니다. 원숭이가 말합니다. 나는 한 번도 당신께 아슬란 이름으로 기도한 적이 없는데, 나는 샤샤라고 하는 우리 민족의 신 이름으로 기도했는데 어떻게 내가 구원을 받았냐고 물었더니 아슬란이 말합니다. 네가 정직으로 성실로 자비로 삶을 살면서 샤샤의 이름을 불렀다 하더라도 그건 아슬란에게 드려진 기도고 아슬란을 사실 부른 것이다, 네가 정직하게 살면서 어떤 신의 이름을 부르면 그건 나를 부른 것이다, 그러나 네가 거짓된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부를 때 그건 거짓된 신을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라고 말하면서 구원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그 점이 바로 CS 루이스를 종교다원주의자 논란으로 끌어가는 부분인데, 종교다원주의가 아니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와 거짓과 육으로 예배하는 자의 차이에 대한 설명을 문학적으로 멋지게 한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우리의 육성, 우리의 사무치고 부서지는 음성들, 우리의 용서하지 못하는 갈등들, 그 육성을 가지고 예배드려야지, 해결 안 됐는데 갑자기 성자처럼 하면 안 됩니다. 분노와 야수적인 복수심과 이런 것들이 좋지 않지만 그것 다 빼고 성자처럼 내 모습을 가장해서는 실제로 예배는 안 드려집니다. 제 딸이 당산역에서 컴퓨터를 가져가다가 아주 무례한 한국 남자를 만나서 컴퓨터를 떨어뜨린 것 같아요. 너무 기분이 안 좋았는지, I hate this entire country. 하면서 영어를 하면서 왔길래, 네가 저주 기도가 지금 필요한 것 같다, 저주 기도문은 시편 109편에 있으니 그 기도문으로 그 남자를 저주하여라, 그러니까 문자로 I Love you Dad, 저주하고 싶을 땐 저주하는 것이 네 진실에 가깝다, 이렇게 얘기했는데, 무례한 아저씨가 처녀의 팔을 붙들어서 컴퓨터를 깼으니까, 고장나면 60몇 만원이 또 드는데, 이런 생각을 하니까 굉장히 기분이 나빴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때 우리의 인격적 항구유일성으로 또는 진실한 그 모습으로 예배드릴 때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달래고 어루만지시고 고치신단 말이에요. 그래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은 이 산과 저 산의 헤게모니 갈등보다 더 중요하다, 그게 중요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여기는 보편주의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중 누가 구원의 계시를 받았느냐, 여기서는 예수님은 양보하지 않습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사마리아 여인이 보고 있는 사마리아 오경 가지고는 안 된다, 구원의 출처를 유대인이라고 못 박음으로써 특수성을 고집했습니다. 우리가 세계만민에게 구원이 다 똑같이 동등하게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개념에선 맞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특수한 민족을 선택하셔서 특수한 민족에게 더 많은 계시를 밝고 분명하게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성경이 계시를 배타적으로 확실하게 계시를 받았기 때문에, 성경과 유대인으로부터 구원이 온다는 것, 유대인들의 계시개념에서 구원이 온다는 것, 이걸 우리 예수님은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핵심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붙잡았던 배타적 주장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입니까? 전 세계 만민에게 평등하고도 논란 없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입증하기 위하여 이렇게 배타적인 주장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건 굉장히 역설입니다. 다시 말해서 배타적 주장은 기분이 나쁘지만 그 배타적 주장이 전달하려고 하는 사랑의 진실은 세계 만민에게 아무런 차별없는 메시지, 남자와 여자, 종과 자유자, 아무도 차별하지 않는 그 멋지고 보편적인 아버지 하나님 사랑을 전달하기 위하여 그 사랑의 하나님 보편적인 하나님이 최고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배타적 주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로부터 구원이 난다는 말은 여전히 진리입니다. 김세윤 박사님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책에 보십시오. 모든 진리는 배타성을 띄고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류가 배타성을 띄고 있기 때문에 부부관계가 유지됩니다. 배타성을 띄지 않으면 부부관계가 유지 안 됩니다. 배타성을 띈 사람만이 계약의 신실성이 유지됩니다. 결론 맺겠습니다. 성탄절은 이 산과 저 산의 낮은 단계의 갈등을 해소하고 영이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절기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갈등의 당사자들과 절대선과 절대악의 갈등이 아니라면 여러분께서는 이 성탄절날 이 산과 저 산과 그리심산과 예루살렘성의 갈등 정도는 가뿐히 넘고, 남자와 여자의 경계를 가뿐히 넘고,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인의 갈등을 가뿐히 넘는 화해의 아이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멋진 성탄절 맞이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고맙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갈등하는 존재고 각축하는 존재이며 원수를 맺는 존재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께서 이 성탄절에 오셔서 우리 마음에 그리심산에 예루살렘 시온산의 갈등 정도를 너끈히 해결해주셔서 우리가 평화의 성탄절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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