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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서 녹취 6

by 【고동엽】 2021. 12. 7.

이사야 1장으로 와서 본문을 보며 중요한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이사야 1장 2~3절을 보시 이사야 당시에 가장 심각한 남유다의 문제가 드러납니다. “ 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이스라엘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거역입니다. 그래서 3절에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라고 말합니다. 여기 알지 못한다는 말은 경외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머리로는 알고 입술로는 고백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겁니다.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이 말씀처럼 이사야 당시에 이스라엘 공동체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영적 인식 능력의 파탄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에 대해 인식 능력이 붕괴된 것입니다. 그 붕괴이 결과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 없음, 하나님에 대한 거역 이것이 이사야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사야 2장 22절이 이사야의 주제입니다. “누구를 의지하는 것이 구원의 길인가.” 평상시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중요한 순간에는 하나님을 망각하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강대국을 의지하고 권력, 돈을 의지하고 군사력을 의지하는 것에 대해서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정말 중요한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의지하고 있는가 질문하게 만드는 것이 이사야에서의 질문입니다. 주제 구절인 2장 22절,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를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다음 중요한 것이 5장입니다. 5장을 포도원 노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은 그 포도원에서 아름다운 포도를 결실하기 위해 수고를 많이 하십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포도원인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5장 7절입니다.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이스라엘이 맺은 것을 비교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습니다. 여기 정의가 미쉬파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미쉬파트의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셨는데 이스라엘은 포악이라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정의는 미쉬파트이고 여기 포악이라는 것은 ‘미쉬파흐’입니다. 한 글자만 다른 거죠. 하나님은 미쉬파트를 원하셨는데 이스라엘은 미쉬파흐를 결실한 겁니다. 미쉬파흐는 폭력이 난무하는 무법천지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회가 사법적 정의가 구현되는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기대하셨는데 이스라엘은 어떤 공동체를 만든 겁니까? 폭력이 난무하는 무법 천지 공동체를 만든 겁니다. 한 마디로 동물들이 살아가는 정글 같은 사회를 만든 겁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습니다. 여기 공의가 체다카입니다. 땅 신학에서 강조한 것처럼 하나님은 임차인에게 미쉬파트와 체다카를 기대하십니다. 미쉬파트는 사법적 정의, 체다카는 서로가 서로를 형제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를 기대하셨는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보여드린 열매는 부르짖음, 이것을 히브리어로 ‘체아카’라고 합니다. 여기도 한 글자만 바뀐 겁니다. 체다카를 원하셨는데 체아카를 결실한 겁니다. 체아카는 약자의 부르짖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인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한 겁니다.

 

다음으로는 7장 13~17절입니다. 예언서 개론 시간에 이 본문을 읽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앗수르를 의지하려고 하는 아하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보내십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앗수르와 같은 강대국을 의지하지 말라, 이를 의지하면 당장 앗수르가 남유다를 구원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구원자로 다가온 앗수르가 결국은 남유다를 집어삼킬 것이다, 앗수르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라, 앗수르와 동맹 맺지 말고 하나님과 동맹을 맺어라.” 이것이 이사야 7~9장의 메시지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사야 7장을 읽을 때 당대의 시대적 배경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7장 14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예언이 예수님에게 성취되었다는 것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지난 번에 봤던 것처럼 이사야 7장 14절은 16절에 걸립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아들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것도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16절입니다. 그 아들이 선과 악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판단하기 이전에 남유다를 공격하러 왔던 두 나라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고 그들의 땅이 황폐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이 예언의 핵심입니다. 이 예언은 700년 후에 예수님에게만 성취될 수 있는 그런 예언이 아니라 예언의 말씀이 선포되는 당대에, 아무리 길어도 5년 내에 성취되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예언서를 읽을 때 자꾸 구약의 예언서를 미리 ‘예’로 이해하고 그래서 몇 백년 전에 말한 것이 몇 백년 후에 성취된 것처럼만 예언서를 햬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언의 예 자는 미리 예자가 아니라 맡길 예자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한 것이고 예언이 선포되는 당대에 1차적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이사야 7장입니다.

 

다음으로는 이사야 29장 13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가 또 한번 나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가까이 하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다.” 한마디로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지만 일상의 삶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전혀 없는 겁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문제가 오늘 우리들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뜨겁게 예배합니까? 그런데 일상의 삶에서도 정말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있는가, 신실한 동행이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이사야 당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 존재, 삶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보다 맘몬을 더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를 더 반성하게 만드는 것이 29장 13절 말씀입니다.

 

 

그다음에 44장 28절을 보시면 충격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페르시아의 왕인 고레스에 대해서 “너는 내 목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사야 40장부터 55장까지가 누구를 대상으로 선포된 말씀이라고 했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온 사람들입니다. 이 본문의 말씀은 고레스 칙령 전후에 선포된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44장 끝부분과 45장 앞부분에 보면 고레스에 대한 여러 설명이 나오는데 44장 28절입니다. 하나님이 고레스를 ‘내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레스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45장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 기름 부음을 받음은 히브리어로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메시아 하면 우리는 예수님만 생각하기 쉽지만 메시아는 원래 보통 명사입니다. 예수님만 메시아가 아니라 구약 시대의 왕들, 제사장들, 예언자들 다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입니다. 여기 ‘기름 부음 받음’은 하나님의 영이 임했음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 받은,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름 받은 이들이 메시아인데 이사야 45장 1절에 보면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하나님께서 메시아라고 부르십니다. 45장 4절에 보면 여기에서의 ‘너’가 고레스입니다.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고레스에게 칭호를 주었다는 겁니다. “너는 내 목자다, 메시아다”라는 칭호입니다. 고레스는 전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고레스는 전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고레스라는 이방 왕을 통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어떻게 보면 고레스는 자신의 정치적 이익에 따라서 행동한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의 역할을 하게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 53장입니다. 고난 받는 어린 양에 대한 말씀입니다. 한국 교회는 이사야 53장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고난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라고 해석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사야 53장을 수 천년 동안 읽었던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한 번도 이 말씀을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결국 유대교와 기독교가 갈라서게 됩니다. 왜 유대교는 이 본문을 수백 수천 번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 예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유대인에게 메시아는 군사적 정치적 승리자로서의 메시아입니다. 유대인이 기대했던 메시아는 승리하고 이기는 메시아입니다. 고난받고 죽임 당하는 메시아는 유대인에게는 성립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이사야 53장에 고난받는 어린 양, 이것을 유대인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죄를 짊어지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으로 해석하였지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초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구약을 다시 읽은 겁니다. 그러면서 구약 본문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메시아를 보내주시는데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이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아 메시아를 때리고 죽이고 거부하는 그런 말씀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바로 메시아 예언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결국 유대교와 초대 교회가 갈라서게 됩니다. 같은 성경의 말씀을 보지만 해석이 달라진 겁니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받는 어린 양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이것을 단 한번도 메시아의 예언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죄를 짊어지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자들에 대한 말씀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이라는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구약을 다시 읽게 된 겁니다. 그러면서 당신의 백성을 찾아오셨지만 당신의 백성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도리어 고난받고 죽임당하는 메시아, 이것이 구약에서부터 이미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을 초대 교회는 깨닫게 된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이사야 53장을 보면 고난받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만 유대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이사야 56장 4~7절을 보면 신명기 23장의 말씀이 역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23장을 보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는 자와 없는 자가 구분되어 있습니다. 1절을 보면 고환이 상한 자, 즉 고자들은 들어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최초로 주신 명령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심낭이나 고환이 상한 자들은 생육하거나 번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고 그 누구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온전히 드러냈지만 원하지 않게 고자가 된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누구입니까? 다니엘과 세 친구입니다. 그다음에 페르시아의 술 맡은 관원장 인 느헤미야입니다. 또한 페르시아 왕궁의 신하였던 모르드개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지 않았지만 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신명기 23장 1절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이제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을 이제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내어 쫓아야 하는 건가요? 아닙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통과한 후에 신명기 23장의 말씀이 변화되어집니다. 고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심지어 이방인이더라도 여호와를 경외하고 하나님의 안식일을 준수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그도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면서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전환됩니다. 누가 이스라엘입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이스라엘입니다. 고자나 이방인도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그가 바로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그 첫 출발이 이사야 56장 4절 이하에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 58장 6~7절을 보시면 금식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국교회가 특히 사순절 기간에 금식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금식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전혀 다릅니다. 이사야 58장 6~7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고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고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내 양식을 나누어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보세요. 우리가 상상하는 금식과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내 자신이 굶는 것이 아니라 지금 굶고 있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짜 금식입니다. 헐벗은 자에게 입을 옷을 주는 것이 금식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종교 행위들은 내가 그것에 순종하게 되면 반드시 누군가가 유익을 누리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짜 금식, 참된 경건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통해서 자세하게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올해 사순절을 지나면서 금식을 할 때 개인적으로 굶는 그런 금식 말고 이사야 58장이 말하는 것처럼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는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런 금식을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사야에 대해서 나누었고 이사야가 살아왔던 주전 8세기 앗수르 제국의 급부상 그 맥락에서 이사야의 말씀을 보시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이사야가 66장까지 있는데 1~39장은 주전 8세기, 40~55장은 고레스 칙령을 전후한 바벨론 포로들에게 선포된 말씀, 56~66장은 바벨론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귀환한 사람들이 직면했던 문제에 대한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시면서 이사야를 읽으시길 바랍니다. 다음에는 예레미야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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