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16-17>--------------------------------------------------------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7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
리스도 까지 열 네 대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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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마태가 '다윗'이라는 이름이 갖는 알파벳에 기초해서 '아브라함부터 다
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
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라고 14라는 숫자에 족보를 맞춥니
다. 마태가 이 족보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영원한 나라의
건설과 영원한 나라의 완성을 지표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나라, 다윗이 이루지도 다윗의 왕가도 이루지
못했던 이 영원한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 예수를 보내셨음을 지난 시간을 통
해 알았습니다. 이 족보는 능력이 있고 남다른 가문을 소개하여 위대한 인
물이 탄생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요, 또한 이 족보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이 세우시려는 나라, 곧 영원하고 거룩한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요 우
리가 그 대상임을 족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열 네 대를 강조하는 것은 다윗에게 약속한 영원한 나라의 설립에 대한 하나
님의 뜻과 의지를 강조하기 위함이며 이 족보는 전 인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나라의 건설을 위해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그 나라의 백성
을 불러모으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심판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구원으로 부
르십니다. 하나님의 위엄하심, 통치자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으로 인해 우리
가 항복하게 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얻은 구원의 뜻은 하나님의 뜻과 목표를 이해하는 중요한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롬1:16-17 을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
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
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을 능력이라 선언하는 이유는 이 일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어떤 의지
와 능력이 동원됐는가 또한 하나님이 어떤 일들을 행하셔야 했는가에 나타나
있습니다.
또 롬 3:21-26 말씀 중에 23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우매 하나님
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보상으로 생각하면
구원을 자신에게 근거하게 되고 그렇게 됨으로 자신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넘
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보상으로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은혜로 긍휼로 하나님의 열심으로 구원을 받았음을 말해주는 구절입니
다. 계속해서 25-26절을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
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자기만 의롭다 하지 않고 예수 믿는 자를 의롭게
하기 위해 불러 들이시므로 그의 백성들을 평화롭게 하고 복되게 하여 함께
기뻐하십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과 열심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 대해 놓쳐서는 안될 부분은 우리 신앙은 우리 결정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사랑과 자비로 부르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엡 1:17-19 에 나타난 성경의 가르침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목표와 의지
를 가지셨는가 확신하자 니다. 말씀을 살펴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
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
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
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은 못난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홀로 영광을 취하지도 않으십니다.
그의 뜻과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열쇠로 보내시어
실패치 않으십니다.
엡 1:20-23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
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
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몸이 됨으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머리와 몸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장의 족보가 뜻하는 바는 이 족보를 실패한 족보로 만들
지 않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우리와 하나되어 하나님의 영원한 나
라를 세우심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행적을 추적함으로 복음서를 여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하겠습니다.
98.06.07.
마태복음 강해(3) 박영선 목사
---< 마1:18-25 >-------------------------------------------------------
18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
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
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
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
이니 가라사대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
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
라 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
예수의 출생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 누가복음과 마태복음 입니
다. 누가복음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썼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하여 마리아를 주인공으로 서술되어 있습니
다. 반면에 마태복음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상으로 쓴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
의 탄생에 대하여 요셉을 주인공으로 보고 이야기 합니다.
본문 21절에 나와있는 '예수'의 이름은 여호수아, 호세아 와 같이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라는 의미로 헬라어식 표현입니다. 그리고 예수라고 이름
해야 하는 이유가 22절에 나옵니다.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신 임마누엘의 예언의 말씀(사7:10-14)
을 보면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데서든지 높은데서든지 구하라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
찌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
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아하스가 하나님께 징조 구하기를 거절하였으나 하나님은 그에게 한 징조로
서 확증하여 주십니다. 이 내용은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우리의 구원에 관계
된 것입니다.
이 때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를 계승받고
아버지의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을 구하였으나 12지파 중 10지파가 다윗 왕가
에 등을 돌려 북왕조를 형성하고,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만 남아 남왕조를
형성합니다. 때는 기원전 735년 쯤의 일입니다.
이 시대에 임마누엘이 뜻하는 바는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심으로 북왕조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리라'는 것 입니다. 그리고 사 7:16의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바 되
리라' 는 말씀으로 유다를 두렵게 하고 있는 이 유력한 방백들의 신속한 멸
망에 관한 구체적 징조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왜 어려움과 고통을 사전에 봉쇄해 주지 않으시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미리 그들이 쳐들어 오지 못하도록 막지 않으시고 내버려 두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7:17-19 을 보면 아하스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사람을 의지하여 이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비 집에 임하게 하
시리니 곧 앗수르 왕의 오는 날이니라.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지경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리니 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
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 아하스와 그의 나라가 현재
의 위험을 모면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행악이 계속됨으로, 하나님이 앗수
르 사람들을 들어 저들을 멸하시겠다는 경고를 주십니다. "너희가 의지하고
도움되리라 생각했던 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하나님)
을 의지하라." 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보상으로 아무 근심 걱정 노력도 없이 좋은 결과가 있기
를 기대하지만 고민 안 하는 것이 꼭 복은 아닙니다.
사8: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취하여 그 위에 통용 문
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
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거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내가 내 아내와 동침하
매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마
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할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긴바 될 것임 이니
라.' 앗수르 왕에 의해 아람과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리라는 예언의 말씀
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하나님에 약속의 성취는 아니며 그 일의 단편을 보
여줄 뿐입니다. 마헬살랄하스바스는 이사야의 둘째 아들 이름으로 '침략이
신속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사8:5-8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보다 인간을 더 신뢰하기 때문에 유다 역시 형벌을 받을 것이라 말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의 침략이 위험수위까지 왔어도 멸망치는 않으
리라고 합니다.
사 8:9을 보면 하나님이 앗수르를 조종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정치, 경제, 사회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이 아니고, 죄
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근본부터 막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죄로부터 정화되어 남는 것(스알야숩)이 우선입니다. 세상을 의지하
지 않고 하나님 만을 의지하게 하시려 '마헬살랄하스바스'하십니다.
거룩과 죄를 거부함과 주 만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감사히 누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98.06.14.
마태복음 강해(4) 박영선 목사
---< 마2:1-11 >--------------------------------------------------------
1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
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
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헤롯왕과 온 예루살렘
이 듣고 소동한지라 4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
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5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또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
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
라 하였음이니이다 7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
세히 묻고 8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 보
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9박사들이 왕의 말
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10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
라 11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이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
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
마태복음은 AD55년경을 전후로 하여 쓰여졌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지 3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후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메시아를 기다리던 이스라엘인들은 메시아가 십자가를 지는 자로 오실것
이라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난 후 그를 따
르던 추종자들은 다 떠나고 열 두 제자만 남게 됩니다. 그 후에 이들은 예수
께서 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는지, 구원사역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마
태복음의 경우 4장 17절부터 예수의 생애를 기록하게 됩니다. 즉, 4장17절 이
전은 '예수는 누구신가'에 관한 것이고 4장17절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를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2장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탄생과 구약 예언들의 성취에
관한 구약의 예언에서 신약으로 이어지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메시아가 나시면 어디에서 나시는가에 대하여 나오는데 이는
구약시대에 미가선지가 한 예언의 성취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예언은 메시아를 확인하는데 있어 가문이나 출생지가 어떻게 맞았는가 하
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하는 전체적 이해에 대하여 마태가
기술한 것입니다.
이 예언은 미가서 예언의 한 구절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미가서 전체가 인용
된 것입니다.
미가라는 이름은 '미가야후'의 압축형으로 "누가 하나님과 같으랴" 라는 뜻입
니다. 미가는 BC735-710경 사이에 활동한 아하스왕 때의 선지자로 이사야, 호
세아와 동시대에 살았던 선지자입니다. 이사야나 호세아가 정치 지도자 앞에
선 선지자라면 미가는 일반 백성들 앞에 선 선지자로 공의를 시행치 않고 하
나님을 섬긴다 하면서 불의를 행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며 미3:9-12절에
서 처럼 '밭 같이 갊을 당한다'는 심판을 예언합니다. 또 미4:6-8을 보면 남
은자를 돌아오게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심판을 하되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사야 선지자의 두 아들 스알야숩과 마헬살
랄하스바스는 그 이름의 뜻이 각각 '남은자가 돌아온다'와 '심판이 속히 오리
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심판하여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정화시키심을 뜻하는 것으로 여기서 '남은
자'는 정화시켜 다시 모으겠다는 의미입니다.
마헬살랄하스바스는 악한자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은자를 불러 모
으고 난 후 악한자를 심판한다는 것이 스알야숩과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의미입
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알야숩 즉, 알곡과 같이 남은자를 불러 모으시는 역사
가 있기전에 마헬살랄하스바스(악한자에 대한 심판)를 기대하여 심판이 끝나
고 조용하게 정리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시기를 원합니다.
벼가 탈곡기 안에 들어가 알곡과 쭉정이로 나뉘어지듯이, 정화되는 것으로 죄
에서 꺼내어 거룩하게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께서 이땅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의 고단한 삶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성되
기 위한 과정이고 하나님께서 죄를 종식시키심으로 우리를 영원한 나라에 입
성시키시는 것입니다.
미4:9-10 의 예언을 보면 구원의 완성에 고난과 시련. 즉,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는 고난을 겪는 것은 이스라엘을 정화시키기 위한 하나님
의 뜻임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미4:11-13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론을 이스
라엘 백성을 탈곡하는 탈곡기로 하나님이 들어쓰셨는데 바벨론은 자기들이 하
나님을 이겼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정화시키시고
난 후 바벨론을 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미5:1-2 에 드디어 메시아
의 출현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미가서가 쓰인 이 시기는 절망적인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절망적 상
태는 하나님이 저들을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참다운 백성으로 만들고 완성시
키기 위한 정화되는 과정이 되게 하시어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는데 부족함이
없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을 배경으로 마태복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연결됩니다.
오늘 본문은 동방박사로 하여금 예수의 탄생을 헤롯왕 즉 하나님을 인정치않
는 적대 세력 앞에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느뇨' 라고 선포하게
하고 이에 놀란 헤롯이 긴장하는 장면입니다.
우리에게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왕 이시요 지금의 고난은 거룩을 위한 과
정일 뿐입니다. 우리는 예언이 이루어지는 중간에 서 있는 것으로 지금도 예
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장 큰 성취 곧 온전히 예언이 이
루어짐을 보는 감동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 주심에 자랑과 감사가 있고 인생에 있어 승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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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06.21.
마태복음강해 (5) 박영선목사
---<마2:13-15>---------------------------------------------------------
13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가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
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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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박박사가 돌아가고 헤롯이 예수를 죽이려 하여 예수의 부모가 애굽으로 피
했다 돌아옵니다. 본문 15절말씀은 호세아서 1장에 있는 구약 예언의 성취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약의 한 구절이 아니라 구약에서의 사건 전체가 인
용됨을 말합니다.
호세아는 이사야 그리고 미가 선지와 동시대에 산 선지자입니다.
이사야와 미가 선지자가 남왕조 유다에서 사역한 선지자라면 호세아는 북왕
조 이스라엘에서 사역하였던 선지자입니다. '호세아'는 '구원'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여호수아'나 '예수'와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호세아서는 북왕조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심판을 예고하는 예언서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진멸하시려는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저들을 구
원하시리라'는 것이 호세아서의 메시지입니다.
호1:2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
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호세아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불신앙으
로 떠난 이스라엘을 경험하도록 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내 고멜이 자신(호세
아)을 배신하고 떠나는 아픔을 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 배반으로
인한 하나님의 아픔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호1:4에 하나님께서 호세아의 아들(첫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하
셨습니다. '이스르엘'은 북왕조 한 지방의 이름으로 평원으로 된 나라입니다.
르호보암 때 갈려 독립되어 여로보암이 왕이 되나 하나님을 따르지 않아 폐
하여집니다. 아합 집안이 왕조를 이루고 예후로 하여금 구테타를 일으키게
하셔서 아합 집안을 진멸하시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예후를 친다는
것은 북왕조 이스라엘을 심판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르엘은 예
후의 반역을 의미합니다. 또 호1:6에 보면 여호와께서 호세아의 딸(둘째) 이
름을 '로루하마'라 하라고 하십니다. '루하마'라는 뜻은 귀여움을 받다라는
뜻인데 반해 '로루하마'는 귀여움을 받지 못하다의 뜻으로 내 백성을 이뻐하
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호1:8-9에 호세아의
아들(세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하시는데 '로암미'의 뜻은 내 백성이 아
니다, 내 백성이라 부르지 않겠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
해 하시고자 하신 말씀을 호세아 자녀들의 이름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정녕 심판하기로 작정하시고
이들을 버렸다면 이런 말을 여러 번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싫은 소리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관계를 끊겠다고 말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지금 하는 식으로 하지
말아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지적하고
경고하고 예언하고 회개를 촉구합니다. (호11:1 , 마2:15)
호11:1-7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내(하나님)가 지었고 만들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내 말을 안 듣고 불순종하여 심판하리니 앗수르로 하여금 저들을 쳐
서 멸망케 하신다고 합니다.
또한 호11:8-11은 출31:7-13과 맥을 같이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과 뜻과 의지로 선택되어지고 부름 받은 자들
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셨고 사랑하셔서 부른 백성들입니다. 이러한 백성에게
보내신 임마누엘은 스알야숩의 의미로 저들의 편을 들되 그냥 편드는 것이
아니라 정화 시킴으로 편드심을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불순종, 부패함을 극복하고 그 분의 사랑과 의지가 근거
되어 우리를 만드시고 그 뜻을 이루시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합격점에 오라는 요구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
님의 사랑과 의지이며 선택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에게 하시는 요구와 책임
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았으니 하나님의 자녀다와지라 는 것이며 그래서
복된 운명의 확인을 놓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현실생활의 어려움에 대하여 '이래도 하나님은 계속 내 편인가?' 라는 의문
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불충과 불순함을 정화시키시려 채찍을 드시지만 버리
거나 외면하시지는 않습니다. 이는 사랑의 손길이고 복 주시기 위함이며 완
성의 자리, 복된 자리에 이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롬8:31을 보겠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기독교 신앙의 승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편 드심에 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롬8:38-39의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갚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
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시거나 실패치 않으십니다.
변함없는 복된 운명이 예수를 믿는 자로서의 힘이 되고 우리에게 안심이 됩
니다. 세상의 핍박, 시험, 공격, 우리의 미련함, 연약함, 넘어짐이라는 것들
이 우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은 기독교 신자의 복이고 하나님의 사랑
이 집약되어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결국 '승리'할 것임을 믿어 하나님 사랑으로 말미암아 변함없
는 복과 승리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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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07.05
마태복음 강해(6) 박영선 목사
---<마2:16-18>---------------------------------------------------------
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
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
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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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상황을 살펴보면 별이 헤롯왕 앞으로 동방박사를 인도하여 헤롯왕으
로 하여금 이스라엘 왕이 나심을 알게 하였습니다.
헤롯왕이 박사들에게 '아기를 찾거든 내게도 알려달라' 하였으나 박사들은
헤롯에게 가지 않습니다. 이에 노한 헤롯이 두살 이하의 아이들을 죽이라 명
하는데 이것이 예레미아 선지자의 예언과 맥을 같이 하여 본문 18절의 말씀
으로 이어집니다.
예레미아 선지는 기원전 627-580년 사이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스바냐, 하
박국, 에스겔, 다니엘과 동시대에 활동한 선지자로 남왕조 유다에서 활동하
였습니다.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였고 이들에게 항복을 권면하여 매국노라는 오해와 핍
박을 받게 됩니다.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치시는 하나님의 '매' 임을 알라는
권면과 함께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서 마음 아파하며 늘 울고 애통
하여 눈물의 선지자라 불리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로 인하여 하나
님께 매를 맞고 심판을 당하지만 멸망치 않고 회복될 것이라는 말씀이 예레
미아 30-33장에 걸쳐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치시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정화시키는 과정이지 버리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도다'(렘31:15)
라마는 베냐민 지파에 있는 성읍 이름입니다. 이 말씀은 라헬의 두 아들들이
사로잡혀가자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울고 있는 장면인데 이 말씀이 오늘 본
문 말씀과 연결되어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이 죽임을 당하여 그들의 어머니가
애곡함을 예언하는 말씀으로 인용됩니다.
라헬은 야곱의 처로 라반의 둘째 딸 입니다. 야곱은 라헬에게서 요셉과 베냐
민을 낳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라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북왕조 이스라엘의 가장 큰 지파로 자리하고 이스라엘 전체를 대
표하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렘 31:27-34 새 언약에 관한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
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
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 것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 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
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
였음 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
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도망가는 이유는 무엇이고, 왜 불순종하
였습니까?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기적과 간섭이
있어도 사람의 속이 바뀌지(죄악된 본성) 않는 이상 사람은 하나님 앞에 범
죄할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 해결책으로 나온 말씀이 렘 31:33 에 있
는데 '그들의 속을 고치겠다.'고 하십니다.
롬 5:12-14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
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니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
이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
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사람은 죄를 져야 죄인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죽을 수 밖
에 없는 운명입니다.
죄를 짓지 않은 자는 죽지 않습니다. 갓난 아이도 죽을 수 있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라헬이 자신의 아들들이 붙잡혀 감으로 우는 것은 '인간이란 방법이 없구나'
하는 한탄입니다.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이 무고하게 죽는 것도 저들이 죄 아래 있고 그렇기에
사망이 저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며 인간이기에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
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원한 약속, 네 자녀를 내 백성이 되게
하리라는 약속을 하심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계십니다.
성도들의 신앙과정이 바로 이 과정이기에 현실속에 어려움이 따릅니다.
세상이 반대하는 손길과 하나님이 '이렇게 살아서 되겠느냐'라는 손길로 어
렵고 힘든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의 현실이 어려울수록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성되는 훈련과 하나님이 우
리에게 이루시려는 약속을 이루시려 간섭하시는 손길이 있다는 것을 느끼십
시오. 영원한 영광의 자리로 가는 것이며 늘 우리의 삶에도 개입됨을 알아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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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07.12.
마태복음 강해(7) 박영선 목사
---<마2:19-23>-----------------------------------------------------------
19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20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
었느니라 하시니 21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22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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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태복음 1-2장을 통하여 구약 예언의 성취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설명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네번째 예언인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라는 예언에 대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특별한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헬라 원문
을 직역하면 "선지자들의 말씀을 이룬 것이니 그것은 곧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
리라 하신 것이라" 가 됩니다. 즉 이 뜻은 '선지자들의 예언을 종합하여 볼 때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라는 말씀으로 부합된다'는 뜻이 됩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30년이 지난 지금, 옛 일들을 뒤 돌아
보며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치 않음을 염두하여 구약에 이렇
게 예언되었다는 것으로 신뢰성을 주려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는 무슨 뜻을 담고 있는 것일까요?
나사렛은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이며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 중부에 속한 산악지
대로 조그맣고 외진 마을입니다. 생의 활동적 중심지에서 비켜선 곳에 위치하
여 있기에 정치, 문화로 부터 낙후되어 있는 곳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는 교육을 받거나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한 자들의 경멸과 조롱의 표현이 내포
되어 있고 예수의 사역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마태는 선지자의 모든 예언이 이와 같음을 깨닫고 '나사렛 사람'이라 칭한다는
말씀으로 집약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메시아의 수난을 예언하는 말씀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시22:1-8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
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
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이 말씀은 다윗이 고난 중에 부르짖으며 구원
을 구하는 기도로 6-8절은 메시아의 구속사역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또 사11:1-5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
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
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
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고난을 받는가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이며 다윗왕가
는 하나님의 약속의 차원에서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루터기에서 난 싹, 잘려진 밑둥에서 난 싹 같아서 지금은 그루터기로부터 영
양분을 얻고있기는 하지만 더 이상 멋지게 클 수 없고, 큰 나무로 자랄 수 없
는 싹이라는 뜻으로 쓰여졌습니다. 격멸당하고 외면당하고 아무도 주시하지 않
는 모습으로 오실 주님을 잘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사 53:1-3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
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렇듯 구약에서 이미 고난의 메시아를 예언하고 있는 말씀이 여러 곳에 등장
하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정치적으로 구원해 낼 메시아를 기다리
는 큰 기대 속에 이러한 예언들을 놓치고 있고 그래서 메시아가 오시면 세상을
심판하시는 정복자요 왕이라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헌금이나 봉사만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생각하
는 경향이 있는데 신자된 중심과 위기를 깨닳아 영적인 것에 매달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의 작은 고난을 벗어나려는 생각 뿐으로 영
광의 메시아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우리와 동일시된 모습으로 오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나사렛에서 나셨고
처음부터 우리를 대신한 제물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방법이 이
방법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
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
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
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것은 출생지로 불림 받은 '나사렛'이라 칭함은 바로 이
부분,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사렛 예수되심을 통해서만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이 신자들에게 무엇으로 말미암는가를 확인할 때 신자된
경건한 삶의 초점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게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세상의 것들로 인해 영원, 거룩에 속한 중요한 것들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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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07.28.
마태복음 강해(8) 박영선 목사
---<마3:1-10>----------------------------------------------------------
1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2회개하라 천국
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3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
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4이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5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
례를 받더니 7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
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
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
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
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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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2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예수가 누구신가를 소개하는
장이었고 3장에서는 장면을 바꾸어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직전에 세례 요한
이 길잡이로 등장하여 사역을 예비하고 소개하는 장입니다. 본문1절에서와
같이 히브리 사람들이 말하는 '그때' 란 새로운 장면을 여는 때를 말합니다.
요한이 외치는 소리 중에 '천국', '회개', '세례'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단
어들은 기독신앙의 본질을 오해 없이 이해해야 하는 단어들 입니다.
오늘 그 첫번째 시간으로 '천국이 가까왔다' 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
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천국' 이라고 하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세상의 끝이나 종말론
적 시각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성경에서는 하나님 나라, 하늘나라를 뜻합니다.
국가의 3대요소는 국민, 국토, 주권입니다. '나라'라고 하면 우리는 물리적
인 의미로 '영토'를 떠올리지만 성경에서는 이러한 외형적, 지리적 요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통치권이 미친다.','통치권자가 임한다'라고
해석되는 것입니다. 즉, 메시아가 오신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 세상의 통치권과 하늘나라의 통
치권의 본질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 의문에 빠져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
느니라'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요한복음 5장23절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통치가 발동될 때 생명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생명과 사망은 육신이 생겨나고 죽어 소멸되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컨대 창세기에서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고 하신 말씀이 있습
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악과 금령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망은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을 의
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라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정상화 되
는 것이고, 사망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단절되는 것입니다.
<골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흑암의 권세를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흑암의 권세 속에 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생명과 빛을 부
여 받은 것입니다.
초월적 힘으로 현실에 부딪힌 난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종교의 의미를 갖는
것이 일반인들의 생각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종교에 거는 기대일 수 있습니
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종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정상화를 말합
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화목 되게 하고 의와 진리와 거룩으로 부름받고 기쁨,
영원과 형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의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이 땅에 계시고 주기도문이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영적 인식, 각성, 책임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가장 부러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신자들이 자기 맘대로 사는 것을 보고 부러워 합니다. 함부로 행동하고 술
마시고 방종하고 성수주일 안하고 놀러 다니는 그런 모습들...
지금이라도 당장에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겠다고 큰소리 쳐 보기도 하지만
하고 싶어도 무언가가 막고 있는 것을 느끼고, 마음에 걸리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는 영혼 깊은 곳에 생명이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윤리 도덕적 차원에서 잘잘못을 가리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윤리, 도덕적 문제가 아니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으로 부르는 음성을 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장 6-14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
로 옮기고 사망이 아닌 생명의 법으로 다스리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톰소여가 부러워한 사람이 허클베리핀 인 것과 마찬가지로 신
자가 부러워한 것은 불신자가 아닐까요?
하나님의 백성됨이 무엇인가 이해해야 유혹을 받아도 흔들리지 않고, 생명이
갖는 의미와 책임을 바로 알게 되며, 영적인 부활로 성령의 감각과 책임을
느끼게 됩니다.
<빌 4:4-7>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
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은 자비, 은혜, 사랑을 베푸시는 우리의 통수권자 이시고 하나님 나라
는 기쁨과 감사를 주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께 자존심을 채워달라는 기도를
함으로 응답받지 못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기쁨과 관용을 구하는 기도로
복된 것(자비, 은혜, 사랑)을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셔서 지금 이 세상에 남아 있으나 주의 나라에 속한 하
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복된 위치에 있음을 확인하시고 기쁨으로 주의 통치
권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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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7.26.
마태복음 강해(9) 박영선 목사
---<마3:1-10>----------------------------------------------------------
1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2회개하라 천국
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3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
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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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세 단어인 천국, 회개, 세례 중에 오늘은 두
번째로 회개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는 윤리 도덕
적 차원의 개과천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
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수를 믿는다 하면 도덕이나 윤리적으
로 착하게 사는 것을 생각하는데 기독교는 인격적 존재나 지식에 기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인가? 죄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사야53장6절을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
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길을 가는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다고 하여 메시아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잊고 살며, 그 마음에 하나
님 두기를 싫어하는 죄악된 모습을 사1:2-3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
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
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
다 하셨도다.'
이러한 모습들을 향하여 세례요한은 마태복음 3장에서 자기 욕심을 따라 생
활하고 자기가 주인인 삶으로 부터 돌아오라, 머뭇거리거나 방황하지 말고
돌아오라, 즉, 회개하라 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이 세례요한의 외침을 마태
는 이사야서에 나타난 구약 예언의 성취로 보고 있습니다. 사 40:3-5을 보면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
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
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
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
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이 예언은 오늘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3장1-3절에서 인용하고 있는 말씀임
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1장에서 39장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의 벌이 그들
에게 어떻게 임하는가에 관한 기록이고 40장부터 끝까지는 그럼에도 불구하
고 하나님이 다시 그들에게 찾아오시고 구원하신다는 관계의 회복을 기록하
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로 인해 바벨론의 포로가 되고 죄 값을 치르다가 바
벨론이 페르시아에 멸망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레스 왕에 의해 귀환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죄에서 정화시키기 위해 고난 중에 두
셨으나 이제 그의 백성을 정화시키시고 그들에게 직접 찾아오신다는 말씀으
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고 찾아 오실 것이니 그 길을 평탄케 하라. 그리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돌아오라 가 아니라 찾아 오시리라 입니다. 어떤 난관이
나 장애물이 있더라도 꽤뚫고 오시리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그
의 백성을 회복시키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우리의 죄'입니다. 하나님을 거
부하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것이 하나님이 찾아 오시는데 장애
가 되는 죄라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 길로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를 자신들 스스로 회복하고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찾아오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로 부터
꺼내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해 세례요한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이 일에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시고, 계획하시고, 뜻하사 열
심을 내셨습니다.
롬 5:6-8에 있는 바와 같이 우리가 원하고 요청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이 아니며 내가 회개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죄를 벗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죄의 포로가 되어 이
죄를 스스로 해결할 방법이 없는 나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죄에서 꺼내 주
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긍휼의 손길, 간섭의 손길에 장애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는데 이를 선포하는 자로 세례요한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 이미 우리를 사랑하셨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
하시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믿음은 나를 자랑하고 자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신실하
심을 확인하는 것으로 소망이 있는 것,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인식하는 것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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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08.09.
마태복음 강해(11) 박영선 목사
---<마3:13-17>---------------------------------------------------------
13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
신대 14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
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
는지라 16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
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하늘로서 소
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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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는 회개케 하는 세례요, 하나님 앞에 범죄함을 자유케 하는
세례입니다. 이러한 세례를 예수님이 받으시는 이유는 요한에게 세례받는 사
람들 즉, 하나님 앞에 범죄한 사람들과 동일시 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대속사역으로 제사장 직분과 같은 인류의 새로운 대표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죄와 사망에 처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어린양인 속죄
제물로 오신 것입니다.
롬5:12-14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
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
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
은 오실자의 표상이라' 여기서 말하는 오실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
다. 인류의 대표자라는 데서 아담과 예수님은 공통점을 가집니다. 사람은 죄
로 인해 죽습니다. 그러나 범죄치 않은 어린아이도 죽습니다. 이는 아담의
후손으로 이미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남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아담안에 있는 죄로부터 구원해 내시는 구속
주요, 속죄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아담 이후 두번째로 새 인류의 대표가 되
기위해 우리와 같이 한 인간으로 태어나고 자라셨고, 이렇듯 우리와 하나가
되시어 대표의 자격을 가지셨습니다.
롬5:12-14 과같은 말씀이 고전15:45-49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아래 참고)
또 히브리서 2:14-17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필요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원키 위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셨
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나누자' 라는 감상적이 되기 쉬
운데 명분있는 신앙행위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에베소서 2:10,14-16절에 보면 우리는 예수 안에서 지음받은 구원 얻은 자들
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교회,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아담 안
에 있을 때는 아담으로부터 죄인된 신분과 본능을 물려 받아 죽을 수밖에 없
는 신분이었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자된 현실과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로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론적, 질과 인격, 성품, 본질에 있어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된다
고 엡4:11-15에서 말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생각할 때 신앙적으로 특수
한 행동만을 생각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어 의와 거룩과 진리로 형태적으로
만 종교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되어야 하는 것
입니다. 산다는 것은 지성과 인격을 가진 존재가 삶의 현장 속에 반응하고
책임지는 것,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먹는 것, 배우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
니다. 이와 같이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만으로 신앙생활을 다 했다고 하지 않
습니다. 이런 것을 토대로 삶의 정황 속에서의 반응하고 결정하고 분별하고
책임지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 안에 있던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선택, 분별, 인격의 형태 뿐
아니라 인간이라는 거룩한 격에 있어서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간증하고 전도할 때만 천사의 모습을 하지만 실제 생활에는 교양과 상식도
없는 경우가 많은데 구원 얻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묶여 있음을 느끼고 책
임 있게 반응해야 모든 면에 튼튼해지고 부요하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7-20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
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
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구원을 얻고 나면 존재가
교양, 상식, 기도관, 선택, 분별등 전체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랜 기간동안 쌓고 고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동만 하려하
고 변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인간과 방불하게 인간의 모든 고통을 직접 체휼하
사 새 인류의 대표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4장에 있는 3가지 시험을
받으시어 아담이 실패한 시험을 만회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셨고 죄에서 꺼내시어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너는 내 안에 있으니 옛날같이 살지 말라'
입니다.
우리의 생각 방법, 기준,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변해야 합니다.
신앙생활 없이 살다가 환경이나 조건이 나빠지고 조급해졌을 때 헌금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의 책임을 때우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필요할 때 불러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요술램프가 아닙
니다.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 답게 사는 것이 근본적 책임이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세 사건이 주는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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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15:45-49]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
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
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
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98. 08.16.
마태복음 강해(12) 박영선 목사
---< 마4:1-4 >---------------------------------------------------------
1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
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
게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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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예수님이 당하시는 시험은 예수님이 어려울 때를 틈타 마귀가 와서
하는 시험이 아니라 성령에 이끌려 받으신 시험입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부터 공생애가 시작되는데 본문의 시험으로 예수께서 공생
애를 시작하려는데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어떤 부분을 공격하려는
것인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금식 하셨을
때 사탄은 돌이 떡 덩이가 되게 해보라고 시험합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신명기 8장의 말씀을 인용해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
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아담 안에서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과 화목 되어 인
정 받는 자리로 데려 가셔야 하는 새로운 인류의 대표자가 되셨습니다.
신 8:2-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
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
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헤
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40년 광야생활 동안 낮추고 주리게하여 만나를 먹이시며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십니다.
이 때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15절에 홍해를 건너는 사건이 있었고 애굽
으로 부터 벗어나자 마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을 양식이 없다고 불평 합니
다. 또 출16:1-3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있을 때만 못했다고 불평
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또 이들은 배가 고파 범죄한다는 핑계도 댑니다. 이
에 대해 하나님은 출16:4 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
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먹을 것을 책임져 줄테니 너희가 율법을 준행하지 않는 것이 외적
조건 때문인지 내적 조건 때문인지 하나님이 보겠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만나를 40년간 주며 정말 배가 고파 범죄한 것인지 지켜 보았는데 인
간은 배가 불러도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즉 죄의 원인이 환경에 있는 것
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
은 동력이 되는 떡이 아니라 존재와 행동을 올바른 데로 인도할 질서와 분별
과 생명과 권위입니다.
인류 첫 대표인 아담의 실패 현장이 창3:1-7에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 중 가장 영광스런 존재였으나 최종 결재자는 아니었습니다. 선
악과가 바로 인간의 위치와 지위를 잘 나타내는 것으로 사람이 최종 결재자
가 아님을 확인시켜주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의 선악과에 대한 불평은 '먹고 죽을 나무를 하나님이 왜 만드셨는가'
하는 것인데 이 불평은 아이가 불장난을 해서 난 불에 대해 성냥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핑계대는 것과 같습니다.
선악과 금령을 어긴 아담에 대한 창3:22-23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
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
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
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바로 아는 자가 된 것이 아니라 선악의 기준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선악을 아는 일에 자신이 주권
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준, 원칙, 목표를 정해주셔서 양보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권세와 질서 아래 복종하여 인간의 참된 대응과 복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의 기도가 원망과 아우성의 반복이 되는 것은 아담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불러내어 욕구를 채우는 요구를 한다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주 안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때를 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닮기 위한 노력으로 고급한 신자의 자리에 도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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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08.31.
마태복음 강해(13) 박영선 목사
---< 마4:5-7 >---------------------------------------------------------
5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
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
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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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님이 당하신 두번째 시험을 통해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뜻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고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요구하
고 계십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기계적인 관계나 이해관계로 얽혀있지 않습니
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교를 유용성이나 확률의 차이로 이해하려 합니다.
욥1:6-11에 보면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말씀을 뒷받침 해주는 것으로 사
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용성이나 산술적 관계로 보고 하나님을 이용하려
한다는 류의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을 살펴보면 사단이 하나님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
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
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
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시하시면 정녕 대면
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라고 말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에 의해 돌보고, 사용키 위해 키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가 되기 원하시며 그토록 우리를 사랑
하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롬1:16-17의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
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
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
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라는 말
씀과 롬4:21-22의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
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하신 말씀같이 복음은 하나님의
뜻과 생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용서가 이루어 지는 것은 믿음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잘하면 상주고 잘못하면 벌주는 형태가 아닙니다. 뿌린대로
거두는 것은 복음이라 하지 않고 율법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기계적인 관계
나 이해관계, 산술적 관계에서는 용서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고 하지요?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죄 값을
치르고 받은 구원이 아니며 우리의 믿음이 좋아서 얻은 구원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으로 얻은 구원입니다. 이를 거부하고 하나
님과의 관계를 이해관계나 산술적인 관계 혹은 기계적인 관계로 평가절하 하
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결과가 됩니다.
합3:17-19 '비록 무화가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
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
하여 기뻐하리로다' 이 말씀은 오늘 말씀의 결론이 되는 말씀이라 할 수 있
는데, 하나님은 나의 필요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 믿음의 대상이시며 아버지
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마음
깊은 곳에 내가 자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
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가지신 돈, 지위, 명예가 내게 온다
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다 라는 뜻이 되고 '하나님을 믿는다'
라든가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는 신앙의 본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우리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필요에 의한 도구로 이
해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얻으려면 얻을만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6:26에 보면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
지 아니하냐' 라고 하셨고 또 마7:9-11에서는 '너희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주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
한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
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험이란 하나님을 외곡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수단과 방법이 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자판기에 동전을 넣듯 헌금하고 기도함으
로 원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전부인 관계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는 관계,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되
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에 대해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십니까?", "하나
님 왜 나를 이 고난 속에 내버려 두십니까"라고 불평하기도 하는데 우리에게
유익하게 하시고, 고통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믿음과 항복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롬11:33-36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경륜, 거룩, 사랑, 은혜의
충만함,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분의 능력에 감탄으로 이같이 말씀하고 있습니
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게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
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
으리로다 아멘' 하나님께 조건을 제시해야 필요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것
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근거, 기초를 믿음으로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으로 부르셨고 고급한 인격으로 대우하시며 예수 그리
스도를 보내시어 우리 죄를 사하셨습니다. 이보다 더한 사랑이 어디 있겠습
니까? 사랑과 믿음으로 반응하시어 하나님의 사람된 복된 인생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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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09.06.
마태복음 강해(14) 박영선 목사
---< 마4:8-11 >--------------------------------------------------------
8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
여 9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이에 예
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
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
아와서 수종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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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당하신 세번째 시험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사단에게 하신 답변을 보면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십니다. 이 시험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
에 오신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오신 순종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이
세상을 구원시키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묘사된 신들을 보면 하나같이 변덕스럽고 편견을 가지고 있으
며 힘만 있는 존재입니다. 이런 신들에게 사람은 초월적인 힘을 빌려 목적을
이루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힘만 가진 분이라 생각
하고 하나님의 목적과 내용을 우리가 정하는 우를 범하고 그분이 가지신 힘
만 요구합니다.
이 시험에 대한 답을 찾아봅시다. 신6:10-19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
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
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
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
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
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
하지 말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명령과 증거하신 것과
규례를 삼가 지키며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
면 네가 복을 얻고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사 네 대적을 몰수히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하신 아름다운 땅을 들어가서 얻으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리라' 시험의 핵심은 하나님을 수단, 방법, 힘으로 생각하고 그분의 내
용과 목표를 생각지 아니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만 섬기라는 근거와 조건은 종 되었던 애굽에서 인도해내어 죄에서 구
원하여 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고통을 면케 해 달라가는 것이고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는 데 있는데 이것은 사람이 목표를 정하고 내용을 정
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골 3:5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라고 했습니다. 탐심은 간절히 소원
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우상숭배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해결해 주는 힘입
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우상인냥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신 10:12-13에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
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
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네가 오늘
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라고 하나님은 우상이 아닌 경배의 대상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탐심은 우상숭배다' 라는 이 말씀은
율법의 대강령이며 십계명의 요약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힘이나 수단 또는 방법이 아니라 경배의
대상으로 인생의 가치와 의미, 내용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필요
의 주인이 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 돈이나 건강, 지위, 권세를 달라고 요구하지만 하나님
은 돈, 건강, 지위, 권세가 아닌 이들을 관장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스스로가 필요한 것을 정하고 하나님은 그걸 만들어 주시는 분에 불과
하여 하나님께 부탁해서 얻는 정도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
생을 복된 길로 인도하사 영광과 존귀에 이르게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라는 뜻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부족하거나 불평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선하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을 때 기도해서 이 일이 이루어지더라 하는 사
건의 연결이 아니라 사건에 대해 하나님께 항복하고 얼마나 깊은 교제의 관
계로 들어갔는가 가 되어야 합니다. 그의 인도하심에 나를 맡기고 채우시고
목표하시는 것에 순종하고 감사하십시요.
종되었던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그분의 내용과 목표하심은 형통, 게으름, 자존심 만족이 아닌 의와 진리와
거룩과 생명의 복된 목표에 있음을 기억하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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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09.13.
마태복음 강해(15) 박영선 목사
---< 마4:23-25 >-------------------------------------------------------
23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
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25갈릴
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 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
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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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신 첫 말씀이 마태복음4:17에 나오는 '회개
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입니다. 그리고 공생애 동안에 많은 병자를 고쳤
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귀신을 쫓아 내는 장면이 꼭 등장하는데 그러다보니
'귀신론' 이 전 세계적으로 강세를 보이게 되고 그래서 신앙의 원리를 잘못
오도(誤導)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탄은 악(惡)의 주인이 되고,
하나님은 선(善)의 주인이 되는 대등한 관계로 잘못 이해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을 옹호하는 것이라는 발상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영화 '엑소시스트' 나 '오멘' 을 봐도 선과 악이 대등한 세력으로 인간은 그
사이에 끼어있는 것처럼 되어있습니다.
죄악은 새롭게 생겨난 세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의 범죄로부터
출발한 부작용입니다.
창3:14-19에 나오는 인류의 타락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겪는 재앙들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떨어진 벌입니다. 이는 고통 이전에 하나님과의 호의적인
관계가 단절됨으로 생긴 부작용입니다. 선악과 금령을 어긴 이들에게 죽음이
있으리라 했는데 육체가 죽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호의적 관계
가 끊김으로 하나님이 이들을 저주아래 두셨고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게 되고 그 영혼이 썩어져 갑니다.
롬8:19-23을 보면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
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
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
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
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
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라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자연계,
우주가 허무한데 굴복한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관
계가 단절됨으로 이 세상이 저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범죄한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하고 공격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죄
아래 있기에 이러한 일들을 당할 수는 있지만 사탄이 우리를 사로 잡을 권세
는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죄로 인해 감옥 안에 갖힌 우리들
을 죄인의 왕초인 사탄이 큰 소리치고 위협할 수는 있지만 우리를 감옥에서
꺼내주거나 오래 붙들어 놓거나 사로잡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오직 예수
님만이 우리를 구해내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감옥에 갖힌 우리를
찾아오셔서 꺼내실때에는 죄인중의 하나일 뿐인 사탄과 싸우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사탄과 싸워서 구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우리 죄를 씻어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를 화목 시키시고 감옥에서 꺼내시는 것입니다.
엡2:13-18의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
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
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
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
과 화목케 하고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은 사탄과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의 문제였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좋은 것만 생각케 하시고 좋은 길로만 인도하셔서 아무 생
각없이 인도하는 대로 쫓아가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유혹과 시험이 있고
도전받기도 하지만 우리가 선택해서 하나님 편을 드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
다. 주술적인 힘이 있으리라 기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
유의지를 주어 선택케 하셨고 책임지게 하시고 결정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죄짓는 일과 게으름 피우는 일에서 벗어나 책임으로
인식하고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책임있는 신자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 서두에 말한 '귀신론' 입니다. 이는
유아적이고 떼나 쓰면서 소원한 것을 얻어내기 위해 치성을 드리는 비열한
자리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공생애를 시작하며 하신 첫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입니다. 이 말씀은 책임있는 삶을 살아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뜻의
말씀입니다.
나약한 자리에서 일어나 성경의 요구대로 마음과 뜻을 다해 반응하십시오.
정성과 책임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답게 열심을 품고 사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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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10. 11
마태복음 강해 (16) 박영선 목사님.
---<마5:1-3>-----------------------------------------------------------
1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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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에서 11장의 말씀은 산상수훈의 말씀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
이 특별히 기억하고 찾아보는 성경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전기를 기술한 복음서 이고,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은 저
자가 목적을 가지고 전기를 기술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생애 속에 본인이 관
심갖고 목표가진 것을 골라낸 것으로 생애를 조명하고 기록을 남긴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중심으로 기술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사상
이 강하고 메시아가 오시면 자신들의 현재 상황의 어려움을 보상해 줄 것이
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셨지만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지 않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향해 마태는 하나님 백성의 조건을 말씀하
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전반부에는 '예수님이 과연 메시아 시다'라는 기록으로 되어있
고 후반부에서는 공생애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군사적, 정치적, 사
회적으로 어떤 준비를 하는가를 기대했는데 5장의 산상수훈을 서두로 "심령
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필요한 시민들
이 있는데 이들이 가져야 할 조건은 소유나 능력이 아니라 본문의 말씀처럼
[상태]라는 것입니다.
본문(마5:1-3)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형식, 내용, 조
건에 대한 말씀으로 11절에서 하나로 묶여짐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윤리와
도덕적 가치로 인정받으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서 발생한 내용과 행동들에 가치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발휘되는 덕목은 우리라는 존재가 바뀌어지고 그 행동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중심이 되는 변화의 결과로 발생된 것입니다.
마7:16-20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
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열매는 그 나무의 상태가 만들어내는 필연적인 결과입
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뀐 존재여서 본질적 변화로 인해 사랑하고 헌신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질적 변화로 인한 행동이 아니라 모습만 긁어
모아 겉만 하나님의 사람인 자도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예수가 나의 중심이 되
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열매들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빌 2:5-8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
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
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이나 희생이 초점이 되지 않
고 성부 하나님의 소원이 곧 성자 하나님의 소원이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두 인격의 관계성이 죽음, 비하,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여 기쁨으로 순종하셨
다는 밀접한 두 인격체의 서로를 향한 소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
입니다.
빌 2:1-4에서 좋은 일, 옳은 일을 할 때 댕댕거리지 말아야 함을 말씀합니다.
본질적 변화가 없으면 양보가 없습니다. 상대방의 틀린 점을 그냥 넘기지 못
하고 옳고 그름을 밝혀내어 상대를 짓누르려 하는 성품에서 벗어나 심판하지
말고 고치고 옳은 것으로 인도하고 기다리는 것이 신자의 바른 태도입니다.
기도는 주문과 다릅니다. 주문에는 대상이 없습니다. 대상을 알 필요도 없고
누구든 주문만 외어 결과를 얻으면 됩니다. 그러나 기도는 요구할만한 조건
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나의 소원을 호소하고 그 호소를 하나님의 자비하심
과 신실하심과 능력으로 보상받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5:48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라고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네 하나님 아버지를 닮으라고 말합니다.
심판에 대하여도 마7:21-23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
어가리라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
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라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
였느냐 행하지 않았느냐가 기준이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주님을 알고 주님이 우리를 아는 것이 기준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님을 안다는 말은 지식과 정보의 차원이 아닙니다. 깊은 교제를 나
눈 상태를 말하며 인격적으로 교제하고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천당을 착한 사람들의 집단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느냐의 문제가 걸려 있는 것입니다. '주를 믿고 그 분을
소유했는가'이지, 이상적이고 금욕적인 문제와는 별개입니다. 예수를 믿는것
은 가장 생명력있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의 핵심요소는 소극적이
고 무력한 것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과 진리대로 행동하는 것입니
다. 성경은 신자의 조건이나 상태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로 성품과 인격
으로 존재하며 행동하고 주변을 생명으로 압도하여 주님의 역량이 나타나는
수단이 되는 것을 신자의 책임으로 요구합니다.
신자된 표현은 멋있는 모습으로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삶의 현장, 정황속에서 주님을 모시고 신자로서 반응하며 행동하는
것입니다. 실패하면 눈물흘리고 한숨짓고 애통함으로 기도하며 하루하루 순
종과 책임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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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10. 18
마태복음강해 (17) 박영선 목사님.
---<마5:1-3>-----------------------------------------------------------
1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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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는 심령이 가난한 것이 조
건이 되어 그 결과로 복을 받는 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복된 상태의 증상으
로 심령이 가난한 표가 드러남을 의미합니다.
'행복'을 일반론에 비추어 볼 때 행복은 기쁘고 안락한 상태로서, 희열이 주
성분이 되는 능동적 행복과 안락이 주성분이 되는 수동적 행복이 있습니다.
행복한 상태에 대한 인간의 감정은 수동적이든 능동적이든 날카로운 자의식
이 없다는데 공통점이 있다하겠습니다.
어떤 때 가장 행복하냐는 질문에 어느 여자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
는 큰걸 바라지 않아요. 비오는 날, 창 밖을 내다보며 커피 한잔 마시면 그
때가 가장 행복해요" 작은 행복인 것 처럼 말했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오
히려 많은 조건이 만족되 있어야 하고 모든 것이 풍족해야 얻을 수 있는 행
복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환경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있고 희생이 있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이렇듯 자의식을 마취시키고 얻는 행복이라면 잘못된 행복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이 복이 있겠습니까마는 성경이 이것을 복으로 삼는 것
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알고 우리 영혼이 하나님 앞에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면 복이 되고, 영혼에 대해 준비하게 되는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기독교 신앙이 삶을 안락한 상태로 만들어 줄 것이라는 기대가 큽
니다. 그러나 성경이 추구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의와
진리와 거룩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앞에 부족함 없이 반응하도록 준비시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영적인 내용과 목적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반응하고 채
우도록 주님은 우리 앞에 찾아오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적으로 고급한 경지로 가기보다 문제 해결에 대해서만 관
심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
야 합니다. 물론 진리를 접하게 되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
물러 서있지 마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감각으로 하나님 면전에 서 있
음을 느껴야 합니다.
욥3:20-26에 보면 욥은 인내의 화신이나 믿음의 화신이 결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와 방불한 사람입니다. 서두에서 안락한 신앙생활을 했지만
고난과 재앙이 닥쳐 아우성 치게 되고 고통은 면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고통을 경감시키기 보다 과중시키게 되는 결과로 짐이 되고 걸
림돌이 됩니다.
욥7:17-21에 "하나님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셨고 영적 감각을 주셨기에 진리
를 외면하거나 영적 감각을 모른 척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감각하게 해 놓으시고 해결할 능력을 주지 않으시니 나도 이제 모르겠
습니다." 라고 아우성치는 욥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욥7:17-21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은 욥의 짐과 고통을 세상적으로 처리하고
난 죄책감을 대부분의 신자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인 감각과 심령의 책임은 생겼는데 해결방법이나 능력은 생기지 않았기
에 이중적 삶을 살게 되고, 때문에 고민하고 자책하다가 회개의 기도밖에 할
것이 없게 됩니다.
무능함에 대한 죄책감, 자괴감으로 좌절된 심령에 처했으나 이것은 완성으로
가는 시작임을 아십시오. 영혼이 감각하고 있는 증거이고, 하나님께서는 당
신이 양심의 책임을 감당할 능력을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영적 무력감]으
로 하나님 앞에서 초라해지는 자신의 상태를 느끼게도 되지만 완성되기까지
신실하심으로 인도되어 가는 것이고 비로소 완성되어 질 것입니다.
무력감을 느끼고 이 무력감으로 실패하고 무능하다 자책하는 절망속에 자신
을 놓아두지 마십시오.
이 감각은 하나님이 찾아오셨기에 느끼는 감각이고 하나님이 내 영혼에 간섭
하시고 영광의 자리로 데려가기 위해 시작된 감각이라는데에 감사하셔야 합
니다. 혼자 책임지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신실하심과 영원하심을
믿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통해 승리의 경험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신자된
은혜가 충만한 복이라는 것을 확인하시여 더 큰 믿음과 순종을 발동시키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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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11. 01.
마태복음강해 (17) 박영선 목사님.
---<마5:3-4>-----------------------------------------------------------
3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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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한다는 말은 자신에 대한 올바른 사실근거를 이해하는 최소한의 종교적
기준과의 거리를 실감하는 자각증상입니다. 자신에 대한 사실이해로 인간이
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라는 윤리 도덕적 기준과의 거리를 실감하게
됩니다. 이 거리를 좁혀질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증상이 '애통한다'로 표
현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신앙상 최고의 경지를 설명하는 것은 아
닙니다.
스스로 완전한 자라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마태는 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눅 6:20-26의 말씀은 마태복음의 내용을 축약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사실기록에 전체적 균형을 맞춰 쓰고 있고, 마태는 메시아가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셔야 하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그저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것을 기대하는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적 회심을 요구하는 데에 초
점을 두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마음이 겸비한 자입니다. 그리고 '배부
른 자'는 계3:14-18의 '부요한 자'와 같은 맥락으로, 주님이 볼 때 가난하고
헐벌은 자를 의미합니다.
마태가 산상수훈을 쓰면서 하고 싶은 얘기는 '누가 복된 자냐, 애통하는 자
가 복되도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 자가 느끼는 자각증상은 애통하는 것이고 심령이 가난한 것
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것이 복되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정당한 기독교
신앙에 들어가는 관문이 되고 이것이 없을 때 자랑하게 되고 자신을 부요한
자라고 여기게 됩니다.
시51:1-11'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
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
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
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
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
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
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이 시편은 참담한 심정을 토로하는 시
입니다. '내 안에는 구성 성분이 전부 [죄]입니다.'라는 고백으로 다윗이 밧
세바와 동침한 후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고 회개하며 지은 시입니다.
민족적 자존심, 종교적 자존심으로 구국 영웅이 되고 사울왕의 미움을 사서
적국인 블레셋까지 도망을 가게 되는 처지가 되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기
에 사울왕에게 복수하지 않았을 만큼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다
윗이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이 죄를 지어놓고도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았던
자신에게 놀라며 내게 있는 것은 죄뿐이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내 안의 잘못된 것을 고쳐 달라' 가 아니라 내 안의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계속해서 시51:16-17을 보면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
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이다' 원래 [제물]은 하나님 앞에 화목키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하다는 상징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제물을 자기들의 정성
으로 생각하고, 바친 조건, 지킨 율법, 종교적 열심으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신앙문제에 있어서 성공보다 실패가 많습니다. 설사 성공을 해도 조
건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롬7:15-24에 사도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고백하는데 불신자는 이렇게 비탄하지
않습니다. '뭐 그럴수도 있지, 다 그런거야' 라고 오히려 자기 합리화를 합
니다. 신자는 죄의 유혹과 핍박을 받으나 죄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죄의 법 아래 거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죄에게 나를 팔기도 합니다.
왜요? 죄를 이길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이기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죄에 대해 실패를 할 때 내 안에 선과 의를 향
한 능력과 의지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 앞에 서는 조건은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두손 드는 것 외에 조건이
없습니다.
'나는 왜 이럴까' 는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오는 자각증상입니다.
그래서 "주여 도와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
니다. '나는 다르다.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자부하게 되면 유대인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모습으로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
를 붙잡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주께 매달려 인도하심과 보호하
심을 구하고 '나를 완성의 길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라는 기도로 주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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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11.15.
마태복음 강해(19) 박영선 목사님
---< 마5:5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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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심령의 현 주소를 확인하는 증상입니
다. 그런데 정작 신자된 자각증상이나 믿은 바 된 얘기를 해 보라 하면 온유
는 언급이 되지 않습니다. 마태는 신자된 증상과 표를 '온유'로 말하고 있습
니다.
본문의 시대는 온유를 굴종이나 비굴과 혼동한 시대입니다. 힘없는 비천한
사람들이 억울함에 반발치 못하고 참을 수 밖에 없었던 것과 혼동되었던 것
입니다.
온유는 악의, 분노, 심판같은 나쁜 심령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온유의 상태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볼수 있는데 마 11:28-30 '수고하고 무
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
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
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물리적 차원의
해결이 아닌 마음의 해결책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짐 지는 법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형은 인류가 만들어낸 최악의 형벌이었습니다.
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
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
에서 구해내기 위해 죽으러 오셨습니다. 구원할 방법이 이것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렇듯 십자가형 같은 무거운 짐 지는 법을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
다.
온유의 완전한 모습을 롬15:1-3에서 보면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
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
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
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예수께서 가지시는 온유의 본질은 자기를 기쁘게 하
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능력 있는 자는 능력 있음이 다른 사람들의
열악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비교되는 것이 아니라 혜택을 입히고 주어
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후8:9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
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의 부요하심과 고귀하
심은 우리의 가난함을 확정하려 하심이 아닙니다. 부요를 풀어 우리를 부요
케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상대방이 가면을 썼다고 해서 그 가면을 벗길 필요는 없습니다. 상대의 자존
심이나 경쟁심을 건드리지 않으면 상대방도 까치발을 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시작이자 기초가 온유인데 그렇다면 가난한 자의 온유는 무엇이겠습
니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여 가지는 온유입니다. 모세의 온유
를 이해하는 단서가 되는 시 90:1-12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주여 주는 대대
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
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
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
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
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
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
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
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여기에는 두가지 내용
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생이 짧습니다. 아침에 피었다 저녁이 지는 꽃과 같
습니다.'라는 내용이 있고, 또 하나는 '그런데 내내 죄만 짓습니다. 그 짧은
기간을 알량한 자존심을 세우려는 것으로 주의 진노 중에 죽어가려 합니다.'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온유는 누가 속이고 거짓말을 했다해도 화내지 않고
오히려 힘이 있으면 참는 것입니다. 강한 자의 미덕은 야량입니다.
딤전 1:12-16에 바울 신앙의 본질이 나타나 있습니다. 위대함은 그의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자세와 심령의 상태에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핍
박하는데 압장서서 스테반(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을 죽인 자입니다. 다메
섹으로 가는 도중에 회심케 되고 스스로 이름을 고쳐 바울(작은자)이라 하였
습니다. 그리고 '나 같은 것도 구원하시고 영광 받으심에 찬송을 드립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얼마나 쓸모 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
로우신가 하여 17절에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이다 아멘'과 같이 고백합
니다. 이는 예수 믿는 자들이 가져야 할 하나님의 백성된 자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믿는 것도 스스로 확인하고 현실적으로 확인하려 듭니다.
그리고 이것을 마음의 증상으로 가지려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의 증상
은 하나님 앞에 선 은혜로 인한 자격지심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금
과 영원토록 지속되어야 하고 하나님 앞에 심판 받아야 합니다. 악과 악, 이
해와 이해관계로 싸우지만 세상 앞에서 온유해 질 수 밖에 없는 세상의 완악
함 앞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출발하는 신앙적인 확실한 근거로 사는 새로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삶,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삶이기에 하나님의 자녀
는 심령이 가난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기에 악으로 악
을 갚을 수 없고 용서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우리가 가져야 하는 마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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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11.22.
마태복음 강해(20) 박영선 목사님
---< 마5:6 >-----------------------------------------------------------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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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중생한 영혼이 가지는 거룩한 소망이고, 생명에 속
한 자들의 영광된 완성을 향한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
듭난 심령은 하나님 앞에 가난한 자요 지음 받은 자로서 가야 하는 고급한
목표로의 갈증과 소원을 가지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아니한 자들은 과시, 자
랑, 성공하는 일 밖에 욕심이 없고 생명과 진리와 거룩에 속한 감각이 없습
니다.
사도바울이 이스라엘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롬 10:1-3에 보면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의의 차이점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
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고 그의 인격적 성품적 차원에서의 동참이 우리의
소원이어야 하고 목적이어야 하는데 이스라엘 인에게는 본질 위에 덧입힌 자
기 치장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쫓는 것은 엡4:24과 같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
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의와 진리의
거룩함이라는 것으로 관념론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 라는
말씀으로 제약됩니다. 이는 하나님 안에만 있는 성품이요, 인격을 말합니다.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기 보다 성공에 주리고 목마르고, 복에 주리고 목
마릅니다. 그래서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익을 보자는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
고 있습니다. 본질 자체로의 변화가 종교로 영향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신자의 모습은 하나님의 의를 본받는 것입니다.
시 103:6-14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
여 판단하시는도다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
도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
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
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
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
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우리는 사람을 볼 때 어떤 직장에 있는가,
어떤 지위에 있는가에 더 관심이 있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는 관심을 두
지 않습니다. 이해관계로 얽혀 있는 것보다 따뜻함으로 얽혀 있는 것이 좋습
니다. 인간의 가치는 실력이나 이해관계의 유익성에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힘을 주는 것은 유용성에 있지 않습니다. 살 보람을 얻는 것은 인
간다운 멋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 시편 103편에 보면 여호와는 자비하시며
은혜로우신 모습으로 찾아 오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이쁘게 보여야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치 아비가 자식을 사랑함같이 우리를 사
랑하십니다. 세상이 우리를 부추기고 떠밀어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지만 예수
를 믿고 달라지는 것은 '왜 내가 참지 못했을까…'하는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를 믿으면 복 받는 다는 것으로 도전받는데 지금 세상에서
보상받는다는 것은 성경에 쓰여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자극하고 부추기는 본
성을 과감히 물리쳐야 합니다.
롬 3:21-26을 보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
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
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
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구원을
온통 의롭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 다우심의 한 표입
니다. 하나님 다우심의 깊고 넓고 무한하신 지혜로 가능하게 하시는 것입니
다.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에 나
타난 모습과 같이 옳고 그름이 아닌 인격이 가지는 자비와 긍휼과 아량이 많
으신 분입니다. 이것이 의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은 여기에 주리고
목말라 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는 훨씬 깊은 마음, 인간의 인간다움을
확인하며 가지는 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 3:4-9에 보시면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소망의 차원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도 육
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
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
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
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
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
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
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
로서 난 의라' 사도바울은 최고의 배경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
수를 알고 거듭나자 자기가 예수안에 얼마나 가난한 자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은 생존을 위한 수단과 가치에 있어 필요할 뿐이지 인성과
영성에 있어 비교할 가치가 없었습니다.
신자된 본질이 무엇이고, 우리 속에 세상 사람들이 갖지 않는 소망이 무엇인
가? 주를 닮아야 하는 것, 책임있는 신자로서의 분별과 노력이 있고 체험이
여러분의 신앙생활 안에 존재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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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21) 박영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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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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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구원받은 자가 구원받았다는 차원에서 가지는 동정
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에 처한 입장을 제대로 인식한데서 생
기는 마음입니다.
마 9:35에 보면 예수님의 사역이 있는데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께서 우리가 스스로의 처지를 개선할 원인을
만들어 낼 입장이 못됨을 아시고 깊은 동정심을 표하십니다. 예수 그리스
도의 자비, 깊은 동정심은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
고 우리가 초래한 입장이지만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
를 사하여 주옵시고…' 는 오해될 수 있는 소지가 있는 말입니다. 긍휼히
여김이 긍휼을 받는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죄사함을 베풀어야 죄사
함 받을 자격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누구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은 그를 심판할 자리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긍휼이 필요함
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향해 너희가 심판
하거나 고소할 자리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앞에서 나온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한 것 등은 종교적으로 치장
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내가 긍휼의 대상이 되고, 남에게 손가락질 할
수 없는 입장임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고결한 인격이나 이상을
목표로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히려 그때그때 편한대로 아첨
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본이 나쁘다, 영국이 나쁘다 하지만 누구를 막론하고 다 악합니다.
박씨성을 가진 남편이 있는 여자는 아이들에게 박씨와 결혼하지 말라고
하고, 이씨성을 가진 남편이 있는 여자는 아이들에게 이씨와 결혼하지 말
라고 합니다. 또 장씨성을 가진 아내가 있는 남자는 아이들에게 장씨와
결혼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겪어 봤거든요. 그 성씨에 대해
안다는 것입니다. 알고보면 좋은면보다 나쁜면이 더 많은 우리들이기 때
문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부모로서도 자식으로서도 부부로서도 합격점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처한 위치를 잘 설명해 주는 말씀이 요11:32-35에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
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사람이 처한 자기 자리가 죄
와 사망 안에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민망히 여기고 통분히
여길 수 밖에 없는 마음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럽고 악하고 부패했음을 자신을 통해 이해하고, 누구를 향해서
도 손가락질 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의롭기도 하고 경건하기도 하고 겸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간만에 선을 베풀었는데 반응이 신통치 않거나, 누구를
전도하는데 반응이 없으면 분노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처럼 어느 누구에게도 분노할 수 없고 욕할 수 없
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자비로 일으켰는가를 알아야 하
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긍휼로 나가
지 않으면 자기 치장에 불과합니다. 신자된 존재, 삶의 원리와 모습은 자
비하고, 겸손하고, 희생하며, 인내하고, 자비를 구하는 긍휼이 있는 것입
니다. 우리 존재의 영향이 주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심령이 되도록 하
여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여러분을 통해 발산되고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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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12.06.
마태복음 강해(22) 박영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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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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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갈라지거나 혼합되지 않은 마음으로 이중적이거나
필요에 따라 색깔을 바꾸지 않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단심(丹心) 이
라고도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추구하는 방향과 소원
의 차원에서 진실하고 외골수로 소원을 가지는 것을 말하지, 내용만으로 도
덕적, 윤리적 차원의 정직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은 순진하다는 것 하나만으로 귀엽게 느껴지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순
진하기만 하다면 이것은 걱정이요, 문제입니다. 나이값을 해야지 순진한 것
만으로는 점수를 매길수 없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수행하기 위한 권리를 사리사욕을 위해 쓰거나 부도덕한데 쓰지 않는
다는 차원에서 정직이 있어야 하고, 책임져야 하는 자리에서는 능력이 있어
야 합니다. 전체를 위해 이기적이거나 부도덕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
이 '정직'인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것은 착한 것 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속이 비고, 책임져야 하는 것도 모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된
자들이 가지는 목표를 향한 열심, 타협될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말
합니다.
시 24:3-5의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
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
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어떤자가 하나님 앞에 설 자냐 하면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
하는 자라고 합니다. 계속해서 6절에 보면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에 대한 뜻
으로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를 말합니다. 곧기만 하고 내용이
나 방향, 목표가 없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방향이 있고, 목적이 있고, 내용
이 있는 차원에서 하나님을 바라는 자세를 주님은 우리에게 교훈으로 주십니
다.
마 6:1-2을 보겠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
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
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
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
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종교라는 이름으로 하나님께 다가
가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치장, 자기증명으로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신앙심이 강한자 라 생각하고, 고급한 인격이라
자부하는 자를 외식하는 자라고 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이미 사람들에게 자
기상을 받은 자들 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가서 받을 상이 없
습니다.
본문의 배경에서 당시 최고 신앙인의 집단이며 엘리트 집단은 바리새파였습
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증명하려 했고 자랑
하려 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지적하는 것은 어떻게 하나님께 다가가야
하는 것인가이지, '난 너와 다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행위가 자기 증명이 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좇고 닮아야 하는 것
이지 사람앞에 보상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밤을 새워 공부한다는 것이 공
부를 열심히 하기 위해 밤을 새는 것이지 밤만 새우는 것이 전부가 아닌것과
같습니다.
마 5:21-22에 예수께서 우리의 행위의 뿌리를 확인시키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
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모든 행위의 근본은 마음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않았다 하더
라도 마음에 미움이 있었다면 죄입니다.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해서 죄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떻게해야 사람들이
알아주나를 생각한다면 이미 자기상을 받은 것이 됩니다.
예수 믿는 자의 삶의 방법은 이웃을 위해 희생되고 썩는 밀알이 되는 것입니
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목표로 하나님을
닮는 것이 내용이 되며 소원이 하나님께 있어야 하는 것이지 신앙적 열심 또
는 행위로 보상받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하다는 표가 이웃
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7:21-23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
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
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셨습니다.
정당한 신앙행위로 주앞에 크고, 주를 닮고 영적으로 부요하다는 것을 확인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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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12.13.
마태복음 강해(23) 박영선 목사
---< 마5:9 >-----------------------------------------------------------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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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선민사상을 기본으로한 신앙을 공격하며 참
다운 하나님의 자녀된 증상이 무엇이냐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생을 얻
고 하나님의 자녀된 커다란 증상은 화평케 하는 것입니다. 화평케 한다는 것
은 적당한 타협으로 일을 무마시켜 말썽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소극적인
처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싸움이 일어나는 근본을 해결함을 뜻합니다.
싸움은 우월감에서 비롯됩니다. 눅 18:9-14에 보면 복음서가 지적하는 신앙
인의 전유물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
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
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불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
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
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
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보면
바리새인은 '나는 저 사람들과 다릅니다. 죄를 짓지 않고 종교심도 많습니다.'
라는 우월감을 갖고 있는 자들입니다. 인간이 가지는 범죄의 배후에는 터무
니 없는 우월감이 있습니다. 바쁜 출퇴근 시간에 전철에서 길을 막고 전도하
는 사람은 왜 그렇게 무례하고 몰상식한 행동을 하는 걸까요? 그 사람은 무
지무지 중요한 얘기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야 회사
를 가야하건 말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자신이 증거한다는 우월감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두 죄 아래있고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깊은 이해를 갖고 동등한 대
우를 할 때 싸움이 없고 평등해 질 수 있습니다.
마 22:34-39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
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
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
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
셨으니' 여기서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율법중 어느 계명이 크냐는 질
문을 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질문을 하여 시비를 거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
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너희같이 사람을 시험하고 시비걸
지 않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마 18:1-6에 보면 예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아져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
씀을 하시는데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은 순진하다는 차원의 얘기가 아닙니다.
거짓됨과 악함이 어른들과 비교해서 작다 뿐이지 어린아이들도 똑같은 죄인
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아이"가 가지는 뜻은 가진것이 없는자, 남의 보
호아래 있는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월감에 젖어있지 않은 자를 의미합니다.
마 25:31-40 을 보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예수께 한 것이라고
합니다. 남의 불행을 그저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처럼 생각하고 함께 걱정하
고 도우는 자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차원에서 평등함을 안다면
처지를 우월의 개념에서 비교할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 평화가 있다는 것입
니다.
엡 2:11-18에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
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
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
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
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
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
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선민이라고
우월감에 쌓인 자들을 십자가로 화목케 하셨습니다. 스스로 한알의 썩는 밀
알이 되시고 십자가를 지시는 어린양의 제물이 되시어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동등하게 취급하신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것은 우리가 다 죄아래 있음을 알고 다 같은 불쌍한 자들임을
알고 은혜를 구하는 자리에 설 때 이것이 구원얻는 자들이 가지는 증상이 되
는 것입니다.
참다운 구원을 제대로 인식할 때 하나님의 자녀로 참다운 복과 자랑과 특권
을 누리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떤 내용과 목표를 가져야 하는지
바로 알고 분별과 실천이 있을 것입니다. 전쟁과 다툼에서 벗어나 십자가를
지는 충성으로 화목케 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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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12.20.
마태복음 강해(24) 박영선 목사
---< 마5:10-12 >-------------------------------------------------------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
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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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된 증거와 표로 아주 적절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선하다, 옳다는
것은 대접받는 요인이 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가 핍박받는 이유는 세
상에서 추구하는 의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의'를 빌 3:5-9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
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
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
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
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즉, 하나님께로서 난 의요,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난 의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기준으로 의로운
것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난 의는 별개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찾아본 바와 같이 성경이 추구하는 의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 입니다.
갈 2:16-21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
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
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
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
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
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우리가 얻는 의는 하
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는 합격점을 받는 것인데 이는 예수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인간의 성공을 대대적으로 칭찬하고 높은 점수를 줍니
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성공여부로, 인간의 능력여부로 의로움을 평가
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고,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의
죄악된 모습, 사악한 모습이 폭로되어 우리는 하나님앞에 죄인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세상사람들은 이러한 우리를 조롱하며 말하기를 '무엇이 무서워 예수를 믿느
냐' 라고 합니다.
이들은 예수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무척이나 자존심 상해하며
인간의 질을 격하시키는 행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신자의 분명한 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마태의 지적은 참다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첫째 심
령이 가난해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위치를 확인하는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에 온유가 있고, 긍휼히 여김이 있고, 마음이
청결함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가 의로 인해 핍박 받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의로
인해서 라는 것은 예수를 믿는 의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긍휼과 자비, 사랑을 갖고 있으나 세상으로부터 적대적인 감정
을 받고 삽니다. 그래서 인간 본질에 대한 도전을 받거나 반발하는 일이 있
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로 인한 핍박을 감수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고 사
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신자된 본분을 지키고 세상의 불이
익을 감수하며 의로운 싸움을 하기 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착한일을 많이
하고 산다는 정도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 1:26-29 에 보면 '내용과 평가는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감사로 갈
수는 있지만 자랑이 될 수 없음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떤 구원인가를 알 때에 감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전 1:20-21 '지
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
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
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 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다른 종교는 그
사상이 범신론(득도 : 도를 깨우침)으로 내 안의 요소들을 깨닫는 종교입니
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리안의 어떤 요소를 조합하거나 키워 구원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받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우리로부터 출
발하거나 자생한 것이 아니라 고전 1:30-31의 말씀처럼 그리스도 예수로 말
미암아 생겨난 것입니다. 즉 우리의 의와 선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
로소 생겨난 것이고 그리스도 예수안에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우리가 신자된 이유로 적개심을 갖습니다. 신자들은 저들을 용납
하여 주님안에 이끌어 와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은 의와 선을 밖으로 부터 얻었다는 것을 부인하고 적
개심을 품습니다. 이들이 가진 마음은 자신의 힘 외에 다른 도움이 필요 없
다는 것인데 이렇게 기고만장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감사와 은혜를 구하
는 겸손이 있지만 저들은 은혜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약한자가 아닙니다. 아는자입니다.
신앙적 도전을 받을 때 신자된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신자된 본분과 원리를
지켜 나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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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25) 박영선 목사
---< 마5:13-16 >-------------------------------------------------------
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
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너희
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
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
에게 비취느니라 16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
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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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된 대표적인 표현이 오늘 본문말씀에 있는 "빛과 소금"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빛과 소금된 존재를 명분에만 집착하여 행위적인 열심을 낼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될 때 신앙의 본질 자체로서의 기독교인된 모습으로
자기 성찰과 책임있는 자리에 있지 못하고 겉치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 23:1-7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
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
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
하느니라' 예수께서 바리새인을 향해 그들의 신앙이 자기치장일 뿐이라는 말
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25-28절에서는 겉만 번드르하고 표리부동한
신앙에 대한 지적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
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
득하도다 이와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행하라 하십니다. 마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
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소금은 부패를 막는 것입니다. 또한 빛은 흑암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겉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나 성품같은 속에 있는 것이 밖으
로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팔복에 있는 말씀처럼 행하게 되는데 이
팔복은 하나님의 자녀가 갖게되는 감각으로 행하는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어서 45절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시는 긍휼, 자비, 은혜의
모습이며 그렇기에 하나님의 자녀로 그 성품을 이어받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
녀라 할 수 없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은 하나님
을 사랑하는 자로서의 표현입니다. 명분과 운동으로서의 행위 중심의 신앙행
위로만 가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재로서의 책임이라는 자각과 자기성찰이
없는 것은 참된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소금이 뜻하는 것은 죄와 사슬을 끊고 죄의 폭발을 막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로 빛이 뜻하는 것은 나서서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가 아니라 빛의 역할로
서 옆에 있는 사람의 인간된 가치를 일깨워 주는 것을 의미 합니다.
마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
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
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
리라' 마태가 유대인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저들
의 명분과 능력에 대해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마 7:16-20에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고, 거짓 신앙을 구별하는 법이 씌여 있
습니다. 열매는 본질을 확인하는 표로서 설명됩니다. 사과나무와 배나무를
구별할 때 그 열매를 보고 구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제사장이라는
명분 하나로 신앙의 열매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사장은 열매가 아닌 직분
이기 때문입니다. 명분과 직분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신자들중에 신자된 표를 식사기도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인이라는 책임을 어떻게 지켜야 할 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지금
의 자리가 신자된 자리이기에 서 있으면 빛이되어 온 세상은 밝히듯이 사는
것이 신자된 표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룩과 진리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모아 일으키는 운동으로 눈에 띄게 부각되시키는 활동을 신앙이라 말
하지 않습니다. 생각하고 자기의 본분을 지키고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
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리를 이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런지
사람들 앞에 뭔가를 나타내야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 것 같이 느껴집니다.
직장, 사회, 시대에서 소금이고 빛이 되야 신자된 사명을 다하는 것이란걸
잊지 마십시오.
갈 5:16-23에 나오는 '사랑' 은 명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본질에서
필연적으로 맺어진 결실입니다. 명분을 앞세우는 것으로는 존재와 근본이 변
화되지 않습니다. 근본이 변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원수를 사
랑하게 되는 것은 감히 원수를 둘 수 없게 됨을 의미 합니다. 다 같은 죄인
이기에, 그런 우리를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대신 죄짐을 지신 주님을 생각하
면 우리도 용서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주제는 '소금이 되라', '빛이되라' 하는 '하자! 말자!'의
싸움이 아닌 소금이거나 아니거나, 빛이거나 아닌 존재의 문제입니다. 하나
님이 우리를 어디에 두셨든 우리가 형통에 처했든, 또는 고난 가운데 처했든
하나님의 자녀된 본질을 저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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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5:14-16 >-------------------------------------------------------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사람
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
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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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은 세상가운데서의 영향이 존재와 본질로 대표되
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의 '착한행실'이란 세상적인 착한행동이 아
닌 거듭난 심령으로서의 본질입니다.
엡 4:17-24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
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
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
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
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신자와
불신자의 구별을 설명하는 말씀으로 옛사람을 대표하는 것은 무지함과 감각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 믿는 사람을 특정짓는 빛과 소금에 연결되
는 단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지는 빛을 깨닫지 못함을 의미하고, 감각
없음은 썩어감을 모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신자의 병은 썩고 있는데도 감
각이 없기 때문에 방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올바른 분별입니다. 우리는 애통과 의에 주리고 목마
른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윤리성 도덕성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닌
엡4:24절에 있는 '하나님을 따라'입니다. 그래서 의와 진리, 그리고 거룩은
세상적 가치로 설명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근원으로 하는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골1:9-12에 하나님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설명하는 말씀이 있습
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
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
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
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9절의 지혜와 총명이 뜻하
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모든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의와 거룩과 선함이 혼자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
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임을 말합니다. 그
렇기 때문에 세상적인 것을 근거로 한 선함은 자기치장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마태복음은 동족인 유대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쓴 말씀입니다.
마 9:10-13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
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
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
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
러 왔노라 하시니라' 여기서 보면 유대인은 자기들이 구원을 받을 처지가
아닌 보상을 받아야 할 처지로 생각하고,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구원부터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찾아가신
것은 누가 죄인이고 누가 의인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구분
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너희 바리새인들도 다를 것이 없는 죄인이
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난 저들보다 낫다'라고 말하고
예수님은 '다를게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유대인들이 다르다는 표를 내는 것은 우
월감에서 나타나는 [다름]이지 의와 진리로 거듭난 [다름]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적 가치로 자신을 증명하는 차별은 성경이 말하는 신자됨이 아니며 우리
의 변화된 심령과 그 변화된 심령이 "하나님을 따라"라는 말과 같이 하나님
과 결부된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성경의 기준이 요13:34-35에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
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율법의 대
강령이 뭐였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주 너의 하
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입니다.
시 103편에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했고 우리의
행동이나 처지대로 갚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같이 사랑
하십니다.
본질적 신자의 됨됨이가 되기도 전에 우리는 스스로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지
만 가장 사소한 문제에서 상식과 경우를 거스르기도 합니다. 이는 기초적인
부분에 제대로 쌓이지가 못하고 행동과 열매를 먼저 따려 했기 때문에 생긴
부작용입니다.
우리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봉사등의 신앙적 표현과 비교해서 실체는 턱없이
가난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서로에 대해 깊이 알지 않는 것이 양해되어 있는지
도 모릅니다. 교회 안에서의 우리는 현재의 고통이나 고난을 숨기운채 아무
런 어려움없이 살고 있어 의롭기만 하고 이같이 은혜를 받고 있다는 표만 냅
니다. 우리는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빛이요, 소금이어야 한다고 지난주일에
도 말씀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 생명이 있어야 하고, 빛이 되어야 하는데 아무도 정직하게
그리고 책임있게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습니다. 왜요? 모두가 부정하고, 부
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회에 부정부패가 판친다면 신자들은 도대체 무
엇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까?
신자된 노릇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존재하는 그 자리에서 소금이고, 빛 임
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신자라는 특권과 책임을 인식하고 존재로서의 책임을
감수하는 여러분의 생에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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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01.10.
마태복음 강해(27) 박영선 목사
---< 마5:17-20 >-------------------------------------------------------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
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
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그러므
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
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
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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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촛점은 첫째, 예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온전
케 하려 오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너희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낫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의 무용성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으로 자신을 증명
하는 것에 대한 공격이고, 제대로 지키라는 것이지 율법 자체를 공격하신 것
이 아닙니다.
율법에는 조건과 원인이 제공되는 행위의 법칙이 적용됨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래서 그 원인에 따른 결과가 나옵니다. 이에 반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은 선물입니다.
구원이 율법적인 것이 아닌 은혜로 얻어졌다고 하니 그렇다면 율법이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기준이고 그러므로 의의 내용을 완성
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의식법과 도덕법이 있습니다. 의식법은 제사에 대표되는 법을 의미
합니다. 이 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폐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의식
법으로 가르치려 했던 것에 대한 실체(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
로 드린 산 제사)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예표하기 위한 법이었다는
뜻입니다. 이에 반해 도덕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가지는 인격과 성품, 내용이
가지는 법으로 성도의 생활안에 존속되고 완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인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왔
다." 이 둘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합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들어 본인 치장
에 바쁘고 신앙상 잘못된 생각을 했던 당시 사람들을 당황시켰던 것입니다.
도덕법의 대표되는 예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 입니다. 신앙의 본질과 내용
은 놓친채 자신이 스스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
습니다.
완전한 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보다 나아야 하고,
내적으로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가
지는 자기확인 입니다. 우리 모두가 긍휼을 구하고 낮아질 수 밖에 없는 자
리에 있고, 이웃을 심판할 수 없는 자리에 있습니다. 자기의 우월감을 증명
하는 것으로 신앙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 얻은 것을 확인했을 때 기쁨 이전에 눈물이 먼저 나옵니다.
깊은 회개의 통곡이 나옵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고
백이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구원 얻은 표는 이웃사랑이
고, 겸손이고,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갖는 눈빛입니다. 중생한 영혼이 하나
님 앞에 위치를 확인하고 그것이 이웃에 대한 따뜻함으로 나와야 합니다.
우린 다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놓치고 자기치장으로 가기
때문에 깊은 위로와 교제, 영적인 면에서 손해를 보게 됩니다.
롬8:1-8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
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
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
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
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
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
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가 이것입
니다. 우리는 의를 선택하고 죄를 선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
도로 말미암는 인격, 성품, 존재로서의 것들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사랑
하듯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엡4:24-32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
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
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
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
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 말씀과
같이 초월적이거나 신비하지 않은 일반적인 책임이며, 자동적으로 이루어지
는 것이 아닌 노력하고 애써서 해야 하는 것들을 성경은 요구합니다. 겉으로
만 갖고 있고 본 바탕이 바뀌지 아니하는 것은 신앙이 아닌 자기치장입니다.
'긍휼과 자비, 희생과 용서가 너희에게 있는가 점검해 보라' 가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신자는 자존심을 꺽고 낮은 자리에 서는 것이
고, 내 생각보다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이웃사랑 입니다. 말씀에
비추어 매일매일을 살아가야 하는데 우리는 말씀 공부만 하고, 교회에만 있
으면 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구원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의 의를 본받는 열심으로 신자로서의 반응과 책임을 다 해야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아가세요. 모두가 가야 하는 이 길에서 하나님의 백성
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해야 할 일들을 잘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되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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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01.17.
마태복음 강해(28) 박영선 목사
---< 마5:21-26 >-------------------------------------------------------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
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
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
을 드리라 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
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 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
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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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과 빛으로 상징되는 신도들의 영향력은 변화된 심령이 하나님의 심령으
로 자연스럽게 발산하는 존재로서의 영향력입니다. 이 영향력에 대하여 당시
유대인들이 어떻게 오해하고 있고, 현대 신자들에게까지 오해를 빚어냈음을
지적하시려 십계명에서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계십니다.
"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그렇다면 왜 살인하지 말라와 간음하지 말라가 체택되었을까요? 올바르게 하
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서면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신자된 모습이 드러난
다고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도덕성, 윤리성 이전에 타
인의 생명, 존재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상대
방에게 총칼을 대는 것 이전에 타인을 미워하고 악의를 품으면 이미 살인한
자 라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
여 기도하라(마 5:44)' 여기서 요구하는 것은 빛과 소금으로의 역할을 다하
는 서기관보다 나은 "의" 입니다. 이는 실제적인 의 이고, 결실이며 하나님
의 백성인가 아닌가를 확인하는 판별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그 뿌리에서부터 나오는 '의' 여야지 겉으로 드러난 것들
은 참된 의가 아닙니다.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씀이 마 23:27에 '화 있
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우리 심령에 변화가 없고 소생없이 겉으로 치장만 하여 이웃을 사랑하지 않
는다면 판별식에 걸리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보상은 하나님을 알고, 감사하고, 죄를 거부하고, 거룩을 선택
하며, 공격하는 마음이 없어지는데 있습니다. 즉, 나도 다른 사람들과 방불
한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를 믿어 얻는 행복은 마음
속에 전쟁과 미움이 사라지고, 마음의 칼을 놓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절 이하는 병행법으로 강조된 말씀입니다. 참되게 하나님을 섬
기는 자라면 이웃과의 관계가 책임있게 신앙적으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 예로 제시된 말씀이 렘 7:1-7에 있습니다.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
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너희는 이
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
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
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
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유대인들
은 성전 짓는 일에 온갖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성전을 지음
으로 신앙적으로 해야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하는 말은 "이 성전을 보라" 즉, "내 신앙을 보라" 입니다.
사 1:10-17 의 말씀은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앞에 공의를 베풀라,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랑을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이같이 베푸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
로서의 결과요,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은 심령으로부터 변화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된 증거입니다.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동참하여 이웃
앞에 자비로 찾아 갈 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들 앞에
너무도 경쟁적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 죄인들 앞에
찾아오신 것 같이 우리도 이웃들 앞에 사랑과 자비로 찾아 가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이것을 자기 것으로 키워내어 행동하는 훈련이 필요합
니다. 어린아이도 물을 어떻게 뜨는지 압니다. 깨끗한 컵에 주전자로 물을
부은 후 흘리지 않게 가져오면 됩니다. 그러나 가져오는 과정에서 흘리기도
하고, 잘 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상태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제대로 행치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이는 훈련을 통해 완성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미워하게 될 때 미워하는 이유를 보통 나 때문이라 생각지 않
고, 상대방에게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자된 심령을 가진 이에게는
사람을 미워하는 이유가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유가 내 안에 있다" 생각하고 고치려 노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변화됐지만 완성되기 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작심
삼일의 연속이지만 깨진독에 물 붓는 것과 같이 흐르기 전에 계속 채워 넣으
면 깨진 독에도 물은 채워집니다.
우리는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싸움, 빛과 소금의 이 싸움에 포기하
지 마시고 다시 일어나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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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01.24.
마태복음 강해(29) 박영선 목사
---< 마5:27-32 >-------------------------------------------------------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
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
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
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 하니라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
든 이혼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
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 드는 자도 간음 함이니라
----------------------------------------------------------------------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란 살인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미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고 사랑하는 자리까지 가야 한다는 것을 지난주에 확인했습
니다.
오늘 본문의 '간음치 말라'는 이웃을 이용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정도 밖에
되지 않음을 꾸짖으시는 말씀으로 31절 이하의 말씀은 이혼의 문제를 살펴
죄인된 성품을 깨우치고자 하심입니다.
31절에 보면 '이혼증서를 줄 것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은 신 24:1-4
을 근거로 하는 말씀입니다. 이혼을 어렵게 하여 경솔한 이혼을 금하려는 것
으로 첫 결혼의 신성함과 존귀함에 초점이 있습니다.
이혼증서를 준다는 것은 혼인의 신성함을 말하고 '이혼할 수 없다'는 명령을
못 지키는 자들에게 사이드 브레이크같은 다른 장치를 하나 더 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음으로 뿐 아니라 방법으로도 하지 못하게 한 것이지
이혼을 허락하거나 합법화한 말씀이 아닙니다.
막10:2-1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
하였느냐 가로되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
였거니와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
더라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일을 묻자온대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
편을 버리고 다른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남자만이 아내를 버릴
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남편을 버릴 권이 있어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지위와 권리가 있음을 예수께서 선언하시고 그러나 이혼을 허락지 않으심을
단호히 못박으십니다. 이웃사랑의 실천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듯 첫번째로 사
랑해야 할 대상이 남편과 아내관계 입니다.
말2:13-16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
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너희는 이르
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
께서 일찌기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
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
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
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 이혼의 큰 이유는 다른 이성이 탐나
기 때문입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남편 혹은 아내에 대해 희생과 용서가 없
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위함이 아니라 상대
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혼은 자기 위주의 이기심에 의한 죄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본문
을 통해 가르치시려는 것은 '죄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입니다. 내 이웃,
내 남편, 내 아내를 미워하는 것은 내 마음에 죄가 들어와 있기 때문인데 우
리는 사랑에 대한 책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엡 5:15-21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17,18절의 말씀처럼 주의 뜻을 이해하고 성령충만을 받음으로 그리스도를 경
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십니다. 나와 함께 구원 얻은 자라면 예수 그리
스도로 인해 얻은 자이고 구원얻지 못한자라면 나도 예전에 그와 같은 자리
에 있었던 자로서 그들에게 우월감을 가질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
자된 특징은 겸손으로 나타납니다.
부부된 본질은 책임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각자에게 사랑의 책임과 배역이
있습니다. 가정을 지키고 아내를 지키고 남편을 지키는 책임을 지키십시요.
이와 같은 부부에게 있어 기본이 되는 것(책임)을 놓치고 돈 벌러 나가는 것
에 중요성을 둔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신 책
임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덕과 진리와 사랑으로 아름다움을 가져야 하는데, 죄인된 본성으로
인해 사랑하지 못하고 파괴하는 죄가 더 많습니다. 서로 위하고 사랑함으로
가정을 지키세요.
신앙은 교회안에 오래 있는데 있지 않고 책임을 지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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