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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0:25-37 /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 : 이웃 사랑 / 배정훈 교수

by 【고동엽】 2021. 12. 7.

미국에서 제가 일했던 교회는 약 70명 정도의 작은 교회로서 저는 그곳에서 유치부부터 청년부를 총괄하는 교육목사를 담당하였습니다. 특별히 전도사는 없고, 교사들이 각 파트를 맡고 제가 전체를 총괄하였습니다. 저는 매일 1학년부터 6 학년까지인 아동부를 위하여 프로그램을 만들고, 매주 설교를 영어로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전부 20명 정도였는데 한 학년에 여러 명인 아이들이 있기도 하고 때로는 남, 여 각각 한 명씩 있는 학년도 있었습니다. 이민 교회는 무슨 모임이 있든지 모든 가족이 모입니다. 교사회의를 해도 전 가족이 모이고, 구역예배를 하여도 모두 모이고, 성가대 모임을 해도 모두 모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른들이 모일 때는 이 아이들이 늘 함께 모이게 됩니다.

저는 이렇게 모임이 있으면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곳에 나갑니다. 아이들의 모임의 최종 목표는 어른 예배와 친교활동에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있다보니 아이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관계의 여러 특징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서로 끼리끼리 모이게 됩니다. 무슨 모임이 시작 되면 대장 되는 아이들은 어린 아이들을 껴 주기도 하고, 때로는 그 모임에 들어오지 못하게도 합니다. 그 모임에 들어가려면 가장 큰 아이들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어떤 아이들은 이 아이 마음에 들기 위하여 교회에 올 때마다 장난감을 하나씩 들고 와서 상납을 합니다. 아이들이 많지 않다 보니 서로 모이다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들을 제외시키려고 합니다. 그냥 놓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아이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기득권이 생기면 얼마나 악해 지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것이 바로 그 왕따라는 것입니다.

저의 큰 아이가 딸인데 자기 또래 여자는 혼자입니다. 늘 윗 학년 여자들과 어울려야 하니 늘 소외가 됩니다. 어릴때부터 6년간 이 모임에 있다 보니 항상 소외를 당합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이 아이를 소외시키는 재미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예슬이는 아침에 교회를 가려고 나서면 이러한 걱정을 하면서 교회를 갑니다. "오늘은 누가 나의 이웃이 되어줄까?" 아이가 교회에 갈때마다 여러번 소외되어 어울리지 못하는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때는 부모이면서 목사인 내가 있는데도 저희들끼리 모여서 딸 아이를 소외시킵니다. 저희끼리 모여서 눈치껏 Joy Out, Joy Out 하면서 소외시키는 즐거움을 누립니다. 그럴때 우리 아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다음주에 설교 할 때 저 아이들이 서로 사랑하라고 그래." 목사인 부모도 그 사이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저 부모로서 저의 마음은 너무 아팠습니다.

저는 교회를 생각하면 이 사건이 늘 마음에 와 닿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모임이 현대 교회의 축소판이기 때문입니다. 소외 당하는 자들이 교회를 찾아 올 때, 어느 공동체에 소속되지 못하면 그 외로움 때문에 부르짖습니다. 오늘은 누가 나의 이웃이 되어 줄까? 누가 따뜻한 말을 건네줄까? 저도 8년만에 다시 한국에 나와 교회를 처음 나오니 아무도 모르는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오래 나온 사람들은 이것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익숙해진 교회생활을 통하여 기득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이 질문은 두가지 다른 입장의 질문을 담고 있습니다. 교회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은 주일날 교회에 나오면서 생각합니다. 오늘은 누구를 나의 이웃으로 삼을까? 누구는 너무 멋있으니 같이 있으면 내가 초라하니까 나의 이웃이 아니고, 누구는 말이 너무 많아서, 누구는 같이 있으면 내가 나아 보이니까 오늘은 그 사람을 친구로 삼자. 누가 나의 이웃의 자격이 있을까 칼을 들이 대고 주변의 사람들을 하나씩 평가 합니다. 이것은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누구를 이웃삼을까하는 행복한 선택의 소리이지만, 또 다른 소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웃이 그립고 소외당함에 한이 맺혀서 누가 나의 이웃이 되어 줄까 하는 외로운 부르짖음을 토해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교회를 찾아 오는 사람들의 질문을 다루고 있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고 계십니까?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을 했습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말하며 너는 이 본문을 어떻게 읽느냐? 그러자 그 유명한 율법의 핵심을 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을 모르는 유대인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을 분명히 잘 알고 있는데 적용이 문제입니다.

29절에 보니 율법사가 예수께 질문을 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이 질문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예수님 주님이 말씀하시는 성경을 보니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저는 정말 이웃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이웃을 알기만 하면 내가 이웃을 섬길 수 있을 텐데 저는 이웃이 누구인지 통 알지를 못합니다. 그러니 이웃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시면 제가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질문이 아닙니까? 누가 이웃인지 제발 가르쳐 주십시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 마음속에 대고 물어 보아야 합니다. 정말 이웃이 누구인지 몰라서 하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이러한 현대인의 마음을 간파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누가는 29절 앞에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이렇게 물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질문이 어째서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것이 됩니까?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할 때 여러분을 옳게 보이려고 합니까? 겉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도 의식적으로 그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자기도 모르는 이 율법사와 같은 의도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사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율법사는 예수님이 자신의 질문에 따라, 당신은 정말 이웃이 누구인지 모릅니까? 이 사람은 이웃입니다. 이 사람은 이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이웃입니다. 이렇게 이웃을 설명하고 나면 율법사는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 바로 저는 그 이웃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당신이 옳습니다. 라고 말씀하실 것은 기대하는 것입니다.

즉, 이미 자신이 지금까지 이웃 사랑한 것이 옳다는 소리를 듣기 위하여 이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누가 이웃인지 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행한 것이 옳다는 말을 들으려는 질문입니다. 오늘날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 겸손히 순종할 자세 보다는 제가 바로 그와 같이 행한 사람입니다 하고 자랑하고 교만해지기 위하여 교회를 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바로 이와 같은 율법사의 질문을 염두에 두고 나타난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율법사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사의 질문이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면, 에수님의 대답은 누가 바로 당신의 이웃입니다라는 형식으로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37절에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입니다.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무엇입니까? 율법사의 관심은 자신이 아닙니다. 사랑을 실천할 자신의 완벽함을 전제하고, 사랑의 대상을 문제 삼습니다. 자신은 문제없고, 다른 사람들의 받을만한 자격이 문제입니다. 대상이 나의 이웃임을 알기만 하면 사랑은 실천하는데 나는 문제없지만, 이웃이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서 문제라는 것입니다. 나는 문제없고 이웃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는 자신이 살아하지 않는 거ㅗㅅ은 생각하지 않고 남의 자격만 문제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이웃이 문제가 아니다. 누구든지 이웃이 될 수 있다. 너는 더 이상 이웃을 선택할 칼자루를 쥐지 않았다. 문제는 네가 그 모든 이웃을 향하여 이웃이 될 준비가 되었는가 그것을 확인하라. 사람이 어떤 자리에서 서있든지 이웃을 주시면 감사함으로 사랑을 실천하라. 이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을 설명하려고 주어진 것입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은 강도만난 이웃입니다. 이웃이 고난받아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태로 우리 곁에 나타난 것이 사랑을 시작하는 출발점입니다. 이 이웃을 보는 사람들의 견해가 다릅니다. 대표적인 유대인인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지나가다가 이것을 보고 지나친 이유는 무엇입니까? 언뜻 생각하면 지나가다가 좌우를 살피고, 내가 이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여야 하지만, 보는 사람이 없으니까 에라 모르겠다 도망가자 이랬을 것 같은데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율법을 지키려고 한 것을 무시하게 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죽을 지경이 된 사람은 이웃이 아니라고 여긴 것이 문제입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이웃은 이방인이 아닌, 유대인을 의미하며, 죽음에 임박한 사람은 자신에게 제의적인 부정을 유발하기에 그들에게는 더 이상 이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나가다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나의 이웃인가? 그들에게 부정의 극치는 죽음입니다. 시체와 다름없는 사람은 제사라는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대상입니다. 그들은 강도만난 사람이 나의 이웃이 아니라고 여겼기에 그를 버려두고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고 외면했습니다. 그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사랑할 대상은 어제든지 하나님이 보내 주시면 순종해야 하는 것이고, 내가 누구든지 이웃으로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이웃이 누구인지를 고르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이웃을 전적으로 사랑할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실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습니까? 몇단계에 걸쳐서 사랑을 실천합니다.

첫째는 여행중 만나는 사람이 우리의 이웃입니다. 따로 이웃사랑을 위해 다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사람을 살다가 만나는 사람들중에 우리의 이웃을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십니다. 나의 삶의 현장에서 고난받고, 위기상황에 잇는 사람을 향하여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주십니다. 내 가슴에 타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사랑하짖 않고는 어쩔 수 없는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음성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내가 사랑할 사람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 주시고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는 그 사람들을 하나님이 보내주신 것으로 알고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맵니다. 위기에 대하여 긴급조치를 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을 원상복귀 시키는 것이 나의 임무입니다.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는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것이 나의 할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막 주인에게 보호를 요청하고, 부비가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주기로 약속합니다. 여행을 포기하고 이웃 사랑을 위하여 일하는 전문가가 될 수도 있지만 나의 생업이나 일은 그대로 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응급조치가 끝났다면, 정상적인 상태로 복귀하기까지 필요한 재정을 담당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난당하고 위기가운데 잇는 이웃이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기까지 무조건적으로 행하는 것이 바로 이웃사랑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인생의 여정 중에 만난 사람들이 고난가운데 울부짖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들이 나의 이웃이 아니라는 핑계를 대고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질문만 고집한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관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누가 이웃인지 가리는 선택권은 없습니다. 단지 여행 중에 우리에게 붙여주는 사람들, 우리에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신 대상이 있다면 바로 그 자리가 사랑을 실천할 자리입니다. 위기 속에서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응급처치를 통하여 원상복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한 사랑의 실천만이 자아도취와 이기심에서 벗어나 진정한 주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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