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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익 목사 준비중

삭개오의 환희

by 【고동엽】 2021. 11. 27.

삭개오의 환희

 

 

 

 

                                       19:1-10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오늘 성경은 삭개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삭개오의 이야기는 우리들이 어려서부터 너무 많이 듣고 읽어서 잘 아는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 지방을 지나실 때 삭개오를 만나게 됩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시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서 고난을 당하시게 됩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원래 “청결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 부모가 아들을 낳아놓고 큰 기대를 하고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삭개오가 부모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세리로 입신을 해서 나중에는 세리장까지 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지방의 세무서장 쯤 되었습니다. 여리고는 베레아지방에서 요단강을 건너는 통상인들이 지나는 길목입니다. 그래서 여리고에서 모든 상품의 통관세를 징수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막강한 공권력을 이용해서 세리가 자유롭게 세금을 부과하고 징수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세리는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는 이 글을 쓰면서 삭개오를 부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허가낸 도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창녀와 같이 세리를 불결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이 삭개오가 마침내 예수를 만나고 변화를 받고 회개하여 성경에 삭개오에 대한 스토리로 기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이제 예루살렘에 가셔서 십자가를 지게 되는데 마지막으로 세리가 구원받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인간이 변화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욕망의 자아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욕망덩어리로 뭉쳐있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이전의 삭개오는 순전히 욕망 덩어리였습니다. 그는 무작위로 착취했습니다. 자기 동족이건 이방인이건 자기의 직분을 이용해서 재물을 모으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를 로마인들 보다 더 악랄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라도 해서 축적하려고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배고프면 식욕을 느낍니다. 그것은 사람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배가 고프면 도적질해서라도 먹습니다. 또 사람은 피곤하면 잠자고 싶어집니다. 그것도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루 24시간 중 1/3은 자고 1/3은 일하고 1/3은 쉬어야 합니다. 그래야 균형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최고의 고문이 잠을 안 재우는 일입니다. 또 사람에게는 가지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사람은 움켜쥐고 싶고 소유하고 싶고 누리고 싶은 욕망이 다 있습니다. 이 욕망이 참 무섭습니다. 삭개오는 이 욕망에 아주 집착해 있었습니다. 성공하고 싶은 욕망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공하려고 지칠 줄 모르게 힘쓰고 애씁니다. 그리고 성공을 위해서 엄청나게 투자도 하고 모험도 합니다.

 

 또 사람에게는 성적 욕망도 있습니다. 매력적인 대상을 보면 다시 보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다봅니다. 그것은 아주 자연적인 것입니다. 상대가 매력적인 이성이면 더 뒤를 돌아다보게 됩니다. 그때 아내들은 남편에게 왜 남의 여자를 처다 보느냐고 불만스런 말을 하게 되는데 아내들은 그런 남편이 정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매력적인 이성이 지나가는데도 남편이 쳐다보지도 않으면 그 남편은 어딘가 병들어 있는 중입니다. 당연히 쳐다보아야 합니다. 다만 남자들은 눈치 있게 보아야 합니다. 남자가 또는 여자가 매력적인 상대가 지나가면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적으로 정신적으로 아주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쳐다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의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는 그가 성자이든지 아니면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욕망에 사로잡혀서 한 평생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욕망의 자아에서 빨리 깨어나야 사람이 성장하고 성숙해져 갑니다.

 

 

 

 

선한 자아

 

 

 

 

자연인 상태의 욕망에서 눈을 뜨고 성장하게 되면 선한 자아의 눈을 뜨게 됩니다. 이 선한 자아가 이웃을 보고 사회를 보고 공동체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눈입니다. 삭개오에게도 미력하나마 동족의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나름대로 동족에게는 세금을 적게 매기고 적게 거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동정심을 삭개오는 동족애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양심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양심적으로 살아간다고 믿습니다. 아주 악한 사람에게도 이런 의식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두개의 욕망이 자랍니다. 하나는 질서를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 욕망입니다. 그래서 질서를 파괴하고 법을 무시하고 내 이익을 우선시 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인격이나 사회성이 성장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결국 사회에서 파괴자로, 탈선자로, 범죄자로,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또 하나는 나를 절제시키고 사회적 질서를 따르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때 내 안에서 선한 자아가 성장합니다. 그래서 질서를 지키고 사회적으로 양심이 착한 사람이 됩니다. 이런 사람이 많은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회에서 질서를 지키고 협동하고 솔선하며 인격이 성숙한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한 가지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착하면 다른 사람에 비해서 일이 더 많아지고 더 많이 일이 부과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직장에서 아주 착한 직원이 있으면 상사들은 이 착한 사원을 믿고 더 많이 더 어려운 일을 맡깁니다. 집에서 여러 며느리 중에 막내며느리가 더 착하고 믿을 만하면 시어머니는 막내며느리에게 일을 더 시키고 중요한 일을 더 많이 맡깁니다. “네가 가장 착하다”고 말하면서. 그때 한 가지 고민이 생깁니다. “그러면 나는 계속 착하야 하나, 아니면 착하기를 포기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세상은 착하게 살면 이렇게 피곤해지는 세상입니다. 착하고 이해 많고 양보 많이 하고 살면 더 많이 이용당하고 더 피곤해지는 세상입니다. 그때 나도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그렇게 갈등을 하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손해를 무릅쓰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계속 살아가게 되면 그 사람은 성숙한 자아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손해만 본다는 마음으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포기하면 이기적인 미성숙 자아를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이 세상에 미성숙한 자아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한때는 착하게 살자 하고 굳게 약속도 하고 다짐도 했던 사람들이 중도에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이를테면 힘든 방법을 버리고 쉬운 삶의 방법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세상을 착하게 살면 배나 더 힘이 듭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착하게 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산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다른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 이 삭개오도 그런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도 한때 선하고 착한 자아를 가지고 살 것인가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내 동족에게 이렇게 못할 짓을 해도 되는가 하는 자책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그는 더 쉬운 방법을 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부정한 수입을 챙기는 그 일에 심혈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영적 자아

 

 

 

 

그런데 다행히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만은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나가 놀다가도 밤에는 온 가족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인간은 때가 되면 영적인 고향 즉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영적인 고민이라는 것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물질로, 명예로, 명성으로 다 채워 보려고 하지만 언젠가 부터는 그 채움이 그런 것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있습니다. 좀 일찍 깨닫고 늦게 깨닫는 것뿐이지 모든 사람은 그것을 다 알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삭개오는 무작위로 재산을 모으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에게도 할 말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남달리 키도 작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무시도 당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의 앞잡이를 마다하지 않고 동족을 상대로 해서 세금을 거둬들이는 그 못된 일에 뛰어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자비하게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거둬 로마에 바치고 자신은 적당히 남기는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충실하게 세금을 거둬 로마에 바쳤으면 그 신분상의 약점이 있는 사람인데도 세리 장까지 올라갔겠습니까. 삭개오는 아마 충성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인생도 어느덧 황혼기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때 삭개오는 그동안 쌓아놓은 재산도, 지위도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목적 삼았던 물질도, 지위도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에게 찾아온 공허감은 무엇으로 메울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거기다 동족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가까이 해 주는 사람 한사람도 없고 내부적으로는 공허감이 물밀 듯 밀려들고 그는 그때 비로소 잊고 있었던 영적 공허감을 절절히 느꼈을 것입니다. 그가 영적 공허감을 얼마나 절절하게 느꼈는가를 어디서 알 수 있는 가하면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간 일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공허했으면 동네를 지나가시는 예수를 보기 위해서 뽕나무위로 올라갔겠습니까. 사람은 영적 자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영적 자아의 샘을 채워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리고 이 영적 자아의 갈증을 느끼는 사람만이 뽕나무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뽕나무에 올라가면 누구든지 다 예수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영적 자아의 눈을 뜨게 됩니다. 그 뜨인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렇게 연약함을 알고 깨달을 때 다가오십니다. 내가 그런 연약함을 느끼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보완하심도, 돌보심도, 격려하심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착하다는 착각 때문에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나는 우월하다는 착각을 가지고 살게 될 것입니다. 이 나의 자아가 깨지는 경험, 그것이 복된 경험입니다. 깨질 때 눈이 뜨입니다. 마리아의 옥합이 깨질 때 향기가 진동했습니다. 기드온의 300명 용사들의 항아리가 깨질 때 횃불의 불빛이 밝혀졌습니다.  

 

 삭개오는 모든 자존심 체면 불구하고 누가 비웃더라도 감수하고 예수를 보기 위해서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고 영적 자아가 더 이상 고갈상태로 살아갈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뽕나무에 올라갔더니 예수께서 그를 올려다보셨습니다. 그러자 삭개오는 순식간에 뛰어 내려와 무릎을 꿇고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동안 떼먹은 것 4배로 갚겠습니다, 그리고 재산을 처분하여 동족에게 내 놓겠습니다“하고 회개했습니다. 욕망의 자아가 깨지니까 이런 회개도, 용기도, 변화도, 결단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을 지나다가 환상 속에서 다가오시던 예수를 만나고 이 자아가 깨졌습니다. 그동안 그는 자기의 율법신앙이 100번 옳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하고 돌아다녔습니다. 그 교만한 자세로 다메섹 거리를 지날 때 하나님이 그를 깨트리셨습니다. 그의 교만한 자아를 부수셨습니다. 눈앞의 안개가 걷히고 자아가 깨지면서 그는 순간 자신의 죄를 보았습니다. 자신의 무능을 보았습니다. 또 자신의 교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죄인 중 괴수입니다, 나는 모든 사도보다 더 작은 자입니다.        

 

 

 인간은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의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곧 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길입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나의 무능을 깊이 깨달아야 절대적인 하나님을 철저하게 인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까. 내가 온전하며 지은 죄가 별로 없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앞에 나의 낮음을, 죄인 됨을, 무능함을, 불결함을 고백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비로소 나의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큰일을 할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들이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가장 깊이 의존하는 사람이 될 때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의 인생에 깊이 들어와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됨을 고백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예배를 통해서 고갈된 에너지를 공급받고 보충 받는 길”입니다. 신앙생활은 예배생활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에 감사와 찬양과 헌신으로 응답하는 시간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자리로 나아갈 때 다시 살아납니다. 반면에 우리들이 분주함으로 예배의 자리를 잃어버리고 살아갈 때 내 영혼은 메마르고 시들어 갑니다. 신앙인의 위기는 자신의 위기가 아니고 예배의 위기입니다. 예배생활이 감격이 없을 때 내 영혼이 피곤해지고 내 신앙은 건조해집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까닭은 하나님의 그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배 자들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절하며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고로 그 영광을 본 사람은 예배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리고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적시시고 우리의 얼굴에 빛이 나게 하시고 우리의 사역에 빛이 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들이 은혜로 새롭게 태어나고 죄로부터 해방 받게 되고 모든 상처들로부터 치유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날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고 나서 느꼈을 환희를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까. 얼마나 기쁘고 감격하고 환희로 벅찼으면 전 재산을 내 놓고 떼먹은 것 은 4배로 갚겠다고 회개를 했겠습니까. 적어도 내 재산을 내 놓는 일에는 그만한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욕망의 자아는 어느 날 이렇게 송두리째 깨져야 합니다. 마리아의 옥합이 깨어졌듯이, 기드온의 항아리가 깨어졌듯이, 내 욕망의 자아도 깨져야 삭개오가 경험했던 그 환희가 찾아옵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에 꿈과 환상을 심어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인류구원에 대한 환상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치유 받고 잃었던 능력을 회복하고 에너지를 충전시키고 새 힘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 자연스럽게 하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예배로, 감격으로, 소망의 복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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