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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연구 총정리〓/바울 신학(김세윤)

바울신학 제15강 (김세윤 교수)

by 【고동엽】 2021. 11. 12.

바울신학 제15강

 

지난 시간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 이해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공관복음서를 보면 예수의 공생애 동안 다른 존재들에 의해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이 선포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이제 다른 존재들에 의해서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의 선포를 하겠다.

 

3.다른 존재들에 의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의 선포

 

1)세례때(막1:11,12)

 

“너는 내가 기뻐하고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이 하늘로부터 퍼졌다. 그런데 예수의 세례와 시험에 대해서 나의 글에서 자세히 언급했다.

 

여기서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이 말은 시편2:7에서 왔고 사42:1과의 혼합 인용이다. 시 2:7은 삼하 7:12-14까지에서 나오는 나단의 신탁에 전승에 의거한 등극시로서 다윗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 아들로 선언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전통성 있게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고 사 42:1은 “주의 고난 받은 종의 노래”의 첫 노래의 시작으로서 주의 종의 부르심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심오한 시2:7-나단의 신탁-과 모든 유대 메시야 사상의 가장 중요한 뿌리인 삼하 7:12이하의 전승에 속하는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들인 메시야 사상을 낳은 나단의 신탁의 전승의 일부인 시2:7에서는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야됨-다윗의 아들됨-에 대한 자기 이해를 얻었을 것으로 집작할 수 있고 그런데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됨은 사42장 이하에 기록된 “주의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메시야적 사명이다. 이렇데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됨은 정치적 전사적 왕으로서 물리적 왕국을 재건하는 메시야가 아니라 사 42장에서 53장까지 기록된 “주의 고난받은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메시야라는 자기 이해를 얻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2)시험

 

바로 이 세례 직후에 시험이 나오는데 이 시험은 두 갈래로 전승-마가판,Q판-되었다. 내용은 똑같다. 사단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 이해를 시헌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결같이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일 것이라는 것이다. 정치적 왕으로서의 하나님 아들-메시야-이 되든가 아니면 하나님의 권위를 자의적으로 행세하는 메시야가 되든가 이런 식-주의 고난받은 역할이 없는-으로 메시야가 되라는 시험을 하는 것이다.

 

예수가 시험을 물리쳤다는 소리는 자기가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들로서 메시야인데 그런 메시야로서 무슨 일을 하느냐? 주의 고난받은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라는 원래 세례때에 부르심에 신실함으로 결심하여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친 것으로 되어 있다.

 

“너는 내가 기뻐하고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시2:7/사42:1

나단의 신탁(삼하7:12) ?????????????시편2:7⇒이사야42:1-53장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

?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메시야)왕

 

3)베드로의 신앙고백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베드로의 고백이 막8:29/눅9:20에는 그냥 “당신은 메시야이다. 그리스도라고”만 되어 있는데 마16:16에는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로 해석해 놓았다. “당신은 그리스도,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메시야를 하나님 아들로 마16:16에서 해석해 놓은 위에서 나단의 신탁 전승 때문에 그렇다. 나단의 신탁에 의하면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들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메시야를 하나님 아들로 부연(해석)해 놓았다. 여기서도 세례 때와 시험때의 경험이 베드로를 통해서 되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축복을 하고 “자신을 어떤 의미로 메시야인가?” “메시야로서 어떤 일을 감당할 것이냐?”를 설명한다. 곧 자기가 죽임-고난 받는 주의 종의 역할-을 감당할 것을 설명하자 베드로가 자기는 그런 의미로 하나님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예수에게 대항함으로서 예수께서 “사단아 물러가라”고 한다. 그래서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께서 다시 한번 고난받은 주의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하나님 아들로서의 메시야 됨에 대한 시험을 받고 이것을 처음 시험 물리쳤듯이 베드로의 시험도 물리치는 장면이다.

 

4)예수이 성전 죄목

 

또 막9:7과 병행절에 나오는 변화산에서의 하늘의 음성-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은 헤례 때의 하늘의 음성의 재확인이다. 바로 예수의 메시야적 과업이 달성될 순간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르심에 대한 재확인이 되어진다. 또 예수가 내 쫓는 악령들에 의해서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이 고백되고 선포된다(막3:11/5:7등). 예수는 악령들에게 조용하라고 명령한다. 악령들에 의해서 그는 하나님 아들됨이 선포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또 산헤드린에서 재판(막14:61/마태 병행절) 받을 때에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당신이 메시야냐? 축복받을 이-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묻는다. 그래서 예수의 재판이 그의 하나님 아들됨에 관한 제판임이 들어난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죄목때문에 그런다. 예수의 죄목은 성전을 때려 부수고 새로 짓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예수가 산헤드린에 체포되어서 재판 받은 죄목이 막 14:58에 의하면 성전 죄목이다.

 

증인들이 나서서 “이 자가 성전을 때로 부수고 사흘안에 새로 짓는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즉 성전을 모욕,성전을 공격,성전을 위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유대법에 의하면 사형감이다. 이것이 예수의 재판 받은 죄목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묵비권을 행사하자-대제사장이 다시 묻는다. “네가 그러면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냐?” 이것이 바로 나단의 신탁에 근거해서 그런다. 나단의 신탁에 의하면 다우시의 아들이 다윗의 왕위에 오르고 하나님 아들로 선포되고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는다. 그러니까 예수가 대 제사장-유대 신학자들-들의 눈에 보았을 때, 성전을 새로 짓겠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나단의 신탁을 주장한 것이다. 곧 자기가 다윗의 아들,메시야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다우시의 아들,메시야의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묻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은근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식으로 대답을 하고 스스로를 인자로 표현해서 말을 한다.

 

5)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 주위 사람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 주의 사람들이 예수를 놀린다.“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의 고통에서 내려오라(마27:43)”

막15:39/마27:54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로마의 백부장이 하나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게 공관복음에 보면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을 선포하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고백되고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위에 의해 쫓겨난 악령들에 의해서 인지도고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이 그의 원수들(유대의 지도자들에)의해서 문제거리가 되고 재판거리가 된다. 그의 하나님의 아들됨이 십자가에 달림과 관계되어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보면 지금까지 공관복음이 자료들-예수의 간접기독론,예수가 은근히 하나님 아들이라고 부른 점, 다른 존재들에 의해서 예수가 하나님 아들됨이 인정됨-을 survey했는데 그것을 결론지으면 다음과 같다.

 

결론

 

공관복음들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의 하나님 아들됨을 은근히 나타냈고 특별한 경우에는 그것에 대해서 후에 분명히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예외적인 경우에 다른 존재들에 의해서 그의 하나님 아들됨이 인정되었다. 이 점은 곧 복음서들의 신빙성을 간접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이 쓰여질 당시는 이미 예수를 하나님의 앋르로 고백하는 것이 교회의 중심 고백들 중에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관복음서들에서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이 아주 예외적인 경우들-하나님에 의해서거나,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베드로에 의해서거나(마16:27에 의하면 혈육은 너에게 그것을 가르쳐 줄 수없다)또는 초인적인 통찰력을 가진 사단(시험때) 악령들에 의해서나 고백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일사저으로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됨을 분명히 주장했다고도 하지않고 일상적으로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가 하나님 아들로 고백되엇다고도 공관복음서는 스지도 않고 있다.

 

4.예수가 어떤 의미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았느냐?

 

예수가 성전을 부수고 새로 짓는자라고 주장했다. 곧 나단의 신탁을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성전을 위협하는 행위느 그리고 자기가 메시야로서 나단의 신탁을 성취할 자로 이 성전을 때려 부수고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한 행위는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신명기법 13장 17장 18장에서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것이었다. 곧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고 주장하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아닌데도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백성들을 오도하는 거짓 선지자를 사형에 처하라는 법이다. 바로 이러한 신명기법에 의해서 유대 지도자-산헤드린-들은 예수를 사형받아야 마땅하다고 빌라도에게 공식적으로 넘겨 주었다. 성전을 모독한 자들은 자기들이 사형에 처할 수도 있다. 원래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형권이 박탈되었다. 사형권은 로마의 집행관(총독,관리)에게만 주어졌는데 그러나 예외저인 경우 곧 성전을 공격했다든가 하나님을 욕도게 하는 경우는 유대인들에게도 사형권이 주어졌다. 로마의 정부가 유대인들에게 권리를 인정해 주었다 그래서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너희 법대로 처리하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발뺌을 하는 것이다. 산헤드린이 자신들의 공의로 예수를 처형할 수도 있었으나 신명기법에 의하면 그들은 돌로 쳐 죽여야 하는 사형법을 택해야 한다. 이럴 경우 산헤드린 지도자들이 두려워한 것은 예수 운동이 종결되지 않고 예수가 진짜 선지자로 추앙받을 것으로 두려워했다. 왜 그러느냐면 중간사 시대에 강력하게 대두되는 사상이 “진정한 주의 종은 고난을 받는다” 당대의 패역한 세대에 의해서 고난을받는다. 진정한 선지자, 진정한 의인은 당대의 믿음없는 세대에 의해서 고난받는다는 사싱이다. 이것을 보통 PASSIO IUSTI라고 한다.

 

만약 당시에 인기와 신망을 얻었던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돌로 쳐 죽이면 예수의 추종자들 눈에는 그것 자체가 예수의 의인됨,진정한 선지자됨이 더 확인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이 자기들의 법대로 서형을 집행하지 않고 예수가 나단의 신탁을 주장한 점은 곧 그가 메시야 이것은 다윗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나단의 신탁에서 유래하는 민속베이야 사상에 의하면 다윗의 왕국을 재건할 왕, 그리고 이방민족들을 정복할 전사로서의 메시야라는 주장이다. 이것을 빌라도에게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주면 빌라도는 어쩔 수 없이 예수를 로마 황제-가이사-에게 반란한 자로 취급을 하고 이렇게 되면 그를 로마 법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신21:23에 의거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은 자로 판명이 된다. 이렇게 되면 예수의 유대인 추종자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의 저주받음이 판명되기 때문에 예수 운동이 종결될 것이라고 하고 빌라도에게 억지로라도 압력을 넣어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킴-시켜서 이것을 본 제자들은 곧 하나님께서 예수가 옳다고 인정했음을 깨닫고 예수의 모든 주장이 옳다함을 깨닫고 그러므로 우리의 CONTEXT에 서 예수의 하나님 아들이라고 주장한 것도 옳다. 그가 주의 고난받은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하나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옳다 라는 깨달음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이 나오고 예수가 주의 고난받는 종으로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다(사53장). 이 예언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했다는 신앙고백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으므로 우리 죄문제를 해결한 의미로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었다. 곧 우리 구원자였다. 그러므로 메시야였다는 신앙고백이 발생한 것이다.

 

5.바울 전(pre-pauline)의 교회에서 예수를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했는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더불어 이와 같은 신앙고백이 발생한 것을 롬1:3,4절에서 이 신앙고백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가를 가장 잘 살펴볼 수가 있다.

 

롬 1:1-4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다” 바울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데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복음을 여러가지로 정의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복음이다.

 

이때는 저자의 속격이다. 하나님이 복음의 저자이다. 복음이 인간이 만들어 낸 이야기도 아니고 인간이 제시하는 구원의 수단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하나님의 사건,신적 힘(능력)을 가진 것이다.

 

둘째로 복음을 구원사적으로 정의했다(2절)

 

하나님께서 성경에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미리 약속한 것을 성취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약성겨에서의 구원의 약속에 대한 성취이다. 또는 구원의 예언에 대한 성취이다. 그러면 3절의 내용이 무엇인가? 내용적인 정의이다. 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에 있다. 여기까지가 복음의 여러 정의이다.

 

그 다음에 바울은 또 복음을 롬 1:16에 또한번 정의한다. 복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더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롬 1:3에서는 기독론적으로 정의되어 잇는데 여기는 구원론적으로 정의되어 있다. 이것이 어떻게 설로 연관되어 있는가를 나중에 보겠다. 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한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자주 요약을 한다. 가장 유명한 갈 1:16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로 부르셨다. 그때에 그의 아들을 나에게 계시하셨다. 그의 아들을 이방인들 가운데서 복음으로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서-ευαγγελιμαι-여기서도 하나님의 아들을 복음이라는 말로 간단히 요약한다. 그래서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 아들이다.

 

그 다음에 바울은 그러면 하나님 아들은 어떤 분이냐를 롬 1장 3절과 4절에서 두 부분으로 신앙고백을 말한다.

 

3절에 보면 이 아들은 어떤 분이냐면 εκ σπερματος Δαυιδ(다윗의 씨로부터 난 자들), του γενομενου κατα σαρκα(육신적으로는) 그 다음 4절에는 του ορισθεντος υιος θεου εν δυνμει κατα πνευμα αγιωσυνης εξ αναστασεως νεκρων 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모든 신학자들이 인정하듯이 아주 초기-유대 기독교의 신앙고백-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 이것을 복음이라고 인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지금 κατα σαρκα 와 κατα πνευμα αγιωσυνης가 있다. 바울이 만든 신앙고백이 아니고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고백인 것을 어떻게 아느냐면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은 성령을 κατα πνευμα αγιωσυνης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το αγιων πνευμα 하든지 το πνευμα το αγιων 하든지 아니면 αγιως라는 형용사를 쓴다. 그런데 여기 αγιωσυνης는 완전히 셈족 언어를 직역한 것이다. 이것은 셈족 언어를 모어로 쓴 그리스도인들이 증거라는 표시이다. 그래서 바울이 지은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가 지었다.

 

또 다른 하나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윗 아들임을 강조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윗 아들임이 강조된 cicle은 유대인들 세계에서 그렇다.

 

또 하나는 κατα σαρκα , κατα πνευμα바울은 위에 본문처럼 대조하지 않는다.

 

바울에게 있어서 πνευμα와 대조되는 σαρκα는 항상 하나님과 적대하는 인간으로서의 σαρξ 이다.

 

여기서는 이런 의미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냥 육신의 측면에서 인각으로서라는 뜻이다. 규범적인 뜻이 아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σαρξ가 πνευμα와 대조될 때는 항상 부정적으로 나온 것은 아니다. 더러는 히브리어의רשׁב를 그냥 번역해서 인간을 말할 때 쓰기도 한다(흔치는 않지만). 그러나 πνευμα 와 대조해서 쓰일때는 이것을 항상 하나님께 대항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할 때 σαρξ라고 한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자체로서 살겠다고 자기 주장을 하는 존재로 보았을 때 인간을 σαρξ라고 한다. 지금 여기에는 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이것은 유대인들의 어법이다.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이것은 바울전에 셈족 언어를 쓰는 예루사렒 교회의 신앙고백-아주 오래된 것,최초의 것-을 바울이 여기서 인용한 것이다. 이것이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정확히 κατα σαρκα 와 κατα πνευμα αγιωσυνης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쉽지 않다. 상당히 어렵다5). 아무튼 “육신의 영역에서 본다면”하고 대충 보면 다윗의 씨로부터 나왔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이다. κατα σαρκα 는 이해가 간다. 그런데 κατα πνευμα αγιωσυνης가 이해하기 어렵다. 성령에 의거해서 그런지 성령의 힘으로 그런 말인지 아니면 ㅇ여적인 평면에서 그렇다는 말인지 상당히 어렵다.

 

우리말 어순이 틀렸다.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다”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어순 중 능력으로 인정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εν δυναμει 는 υιου θεου에 붙는 말로서 형용사구이다.

 

그래서 ‘능력을 행사하는 하나님 아들’ 곧 ‘절대 주권을 행사하는 하나님 아들’로 인정되었다는 말은 등극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언제부터? 여기에 나오는 εξ 또는 εξ αξαστασεως 는 죽은자들 가운데 부활한 때부터를 말하는 때를 말할 수도 있고 원인-죽은자 가운데 부활함으로 말미암는 원인-을 말할 수도 있다. 아니면 둘의 의미가 다 있을 수도 있다.

 

원래 육신적인 평면에서 다윗의 아들로 난 사람을 하나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일으켜서 능력을 행사하는 하나님 아들로 세우셨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εξ αναστασευς의 신앙고백은 나단의 신탁이 예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나단의 신탁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צר? σπερμα)를 일으킨다고 되어 있다. ‘내가 그를 일으키겠다’고 되어 있다. 이 말이 70인역에서는 αναστησω 히브리어는 יתמי קהו(내가 그를 일으킨다)로 되어 있다. 일으켜서 다윗의 왕 위에 앉히고 그를 나의 아들로 선언한다. 나단의 신탁에서 다윗에게 약속하기를 ‘네 수가 다하면 너의 씨(σπερμα)를 일으켜서 네 왕위에 앉히고 그를 나의 아들로 만든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단의 신탁 한 마디가 한 마디가 이 신앙고백을 이루게 된 것이다. 롬 1:4에서 일으킨다는 말이 αναστασευς 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셔서 라는 의미이다. 이 신앙고백을 만든 초대교회에서는 다윗의 씨,가문에서 난 예수를 죽은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부활시키심으로 나단의 약속의 성취로 보았다. 그래서 예수가 은근히 자기를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단의 신탁을 통해서 성취해서 새로운 성전을 지을 분으로 은근히 기르쳤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셔서 나단의 신탁에서 약속한 다윗이 씨를 일으키는 일을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약속대로 그를 자기 아들로 다윗의 왕위에 앉혔다는 말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육신에 있는 동안에도 다윗의 씨로서 나단의 신탁의 성취자로서 하나님 아들로 선언될 분이었다. 그러니까 육신에 있는 동안에는 예수감추어진 하나님 아들이었다. 익명상태의 하나님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를 죽은자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일으키셔서 하나님 아들로 만방에 선포한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예수가 익명성을 떨쳐 버리고 이제 전권(능력)을 행사하는 하나님 아들로 되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최초의 신앙고백-한편은 나단의 예언을 근거하고 한편은 나단의 예언을 성취한다고 은그히 주장한 예수의 자기 이해 또 자기 주장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의 빛에 주셔서-이렇게 해석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신앙고백을 만든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예수가 나단의 신탁을 성취한 의미로 하나님 아들로 보았다. 다윗의 왕위를 또는 다윗의 왕조를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육적이고 영적인 측면에서 제거한 하나님 아들로 보았다. 그런데 3절에서 του γενομενου εκ σπερματος Δαυιδ κατα σαρκα 여기서 바울이 복음은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복음은 3절에 περι του υιον αντον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그의 아들은 του γενομενου εκ σπερματος Δαυιδ (육신에 의하면 다윗의 씨로부터 낳았다). 이것은 신앙고백에 대한 바울의 서문이다. 이 서문이 효과가 무엇인가? 이것을 볼려면 갈4:4-6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갈4:4 “때의 충만함이 왔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냈다(του υιον αντον-그 아들을 보냈다) ”

 

그래서 그의 아들이 여자의 몸에서 낳았다. 율법 아래 생성되었다. (γενομενον εκ γυναικος γενομενον υπο νομον)

구조가 롬 1:3-4절과 똑같다.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인데 그의 아들이 다윗의 씨에서 낳았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는데 그 아들은 여자의 몸에서 낳았다. 갈 4:4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서 여자의 몸에서 낳게 했다는 사상은 선재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태초부터 하나님과 같이 존재하신 그의 아들을 세상으로 보냈다.(εξ αναστασευς). 세상으로 보내서(εξαπεστειλεν) 여자의 몸-인간이 되게 -에서 낳게 했다. 율법 아래 낳게 했다. 즉 유대인이 되게 했다. 그래서 선재 사상과 성육신 사상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롬 1:1-4에서도 똑같은 논리로 바울이 초대교회 신앙고백에 이와같이 서문을 달음으로서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그 아들은 다윗의 씨에서 낳았다고 서문을 담으로서 선재사상과 성육신 사상을 내포하는 것이다. 원래 이 신앙고백 자체(2절)만 보면 선재사상이 없다. 다윗의 씨로 낳았다.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을 행사하는 아들로 등극시켰다. 이 원래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고백(2절)을 보면 선재사상이 없던지 아니면 불분명하든지 그렇다. 바울이 이렇게 서문을 달음으로서 말미암아 이 선재사상이 비로소 분명해진다(갈4:4).

 

6. 선재사상(Pre-exsistence)

 

그래서 나는 주장하기를 M.Hengel의 유명한 논문 하나에서 “예수의 하나님 아들의 선재사상은 바울 신학과 요한 신학에 중요하게 등장을 하는데 (소위 지혜신학의 일부로 등장) 이것은 초대 교회에서 바울의 공헌이이다고 처음에 제시를 했다. 그후 조금 있다가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내가 조금 생각을 해보니까 Hengel이 처음에 맞았다. 그런데 어덯게 해서 바울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재 사상을 초대 교회에서 제일 먼저 이것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되고 그것이 대해서 신앙고백하고 천명하였는가? 그 방법(key)은 ‘지혜신학’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지혜신학-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선재사상을 발달시킴-은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에 의거해서 바울이 예수의 선재사상을 발달시켰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 기독론에 있어서 바울의 공헌이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이제부터서 이것을 보려고 한다.

 

바울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바울은 예수를 그리스도로,하나님 아들로,고백하는 자들을 핍박하는 자로서 다메섹을 가는 도중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우편에 높임받은 하나님의 아들로 제시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계시를 말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쓴다(갈1:6).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이 예수를 자기에게 계시했는데 이 때의 예수를 ‘그이 아들을 나에게 계시’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여 하나님 영광 가운데에 높임 받아 나타나는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체험했다. 그의 신적 영광이 너무 찬란해서 바울은 그를 주라고 부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전 9:1에 그렇게 말하고 있다.

 

주라는 칭호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나 둘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진 예수를 말한다. 비슷하게 행 9:5/22:8/26:15에서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의 빛 가운데 나타난 예수를고 부른다(당신이 누구냐?). 그래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의 빛 가운데 나타난 예수를 主로, 하나님의 아들로 체험하는 것이다(갈1:16). 이것과 일치하는 것이 행 9:20이다6).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계시(체험)받고 바울이 선포하기 시작한 복음을 행 9:20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요약한다. 이것은 갈 1:16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의 아들을 계시한 것은 ινα ευαγγελιζωμαι αντον εν οτις εθνεσιν(이방인들 가운데 그의 아들을) ευαγγελιζωμαι 는 ευαγγελιον과 같은 어원에서 나오는 동사인데 조금 과장해서 복음으로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서-ευαγγελιζωμαι는 원래 선포한다는 말이다. -로 할 수 있다. 바울은 분명히 복음이라는 말을 염두해 두고 쓴 것이다. 왜? 지금 바울은 갈 1:11부터 자기가 받은 ευαγγελιον의 계시를 두고 말한다. 갈라디아 교회에 선포하는 것은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받은 ευαγγελιον을 말한다. 그래서 ευαγγελιζωμαι는 ευαγγελιον을 염두해 두고 쓴 동사이다.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나에게 계시하셨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이방인들에게 그의 아들을 ευαγγελιον으로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바울의 증언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누가가 바울의 다메섹 도상이 사건을 그리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은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과 직결되어 있다. 그래서 심지어 누가도 그 전승에 신실-보통 누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잘 안씀-해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하고 그 체험을 복음으로 선포하는 상황 속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으로 바울이 다메섹 도상 직후 계시 받은 복음을 요약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의 체험에 의거해서 자기가 핍박하던 교회의 신앙고백이 복음임을 깨닫게 된다(예수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가 그리스도,주다. 그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고 초대교회에의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들을 바울이 수용하게 된 것이다. 초대교회의 아들 기독론에 그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롬 1:3-4의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곧 나단의 신탁의 성취자로서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 발전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아들인 인간 가운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높인 분이 아니고 태초부터 하나님 아들로 선재하신 분이다고 바울은 예수의 본질에 대해서 새로운 통찰력을 첨가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증명하려고 롬 1:3-4절과 갈 4:4을 비교한 것이다. 갈 4:4에 하나님의 선재 사상이 나타나듯이 롬 1:3에도 바울이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는 서문을 달음으로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으로 하여금 비로소 선재사상을 끼게 만들었다. 그런데 바울의 편지들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재사상을 나타내는 문구들이 여러곳에 나온다. 그것이 주로 보냄의 형식과 더불어 나타난다. 그 하나가 갈 4:4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그래서 여자의 몸에서 낳게 했다” 롬 8:3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골 1:13f에 선재사상이 나타난다. 곧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이 세상으로 보냈다. 최근에 J.Dunn이 “바울의 서신에는 진정한 의미로 예수의 선재 사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1세기-사도시대 신학관계- 말에 속하는 요한복음에서 비로소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선재사상이 나타난다”고 이런 주장을 상당히 강력하게 했다. 다행히 많은 학자들이 이 주장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나는 두가지로 주장을 한다. 첫째 바울의 선재사상이 있다. 둘째 이 선재사상은 요한복음, 히브리서에도 있지만 초대 교회에서 바울의 공헌이었다. 바울의 공헌이 초대교회에 널리 퍼져서 요한복음에도 나타나고, 히브리서에도 나타난다.

 

바울의 공헌이라는 것에 대한 증명

 

앞서 말한대로 이것은 원래 주장하기를 M.Hengel 교수가 그의 “Christology and N.T.Chronology”라는 논문에서 말했는데 나중에 몇 년 후 그의 책 “Son of God”에서 이 전제를 철회하고 ‘시리아(안디옥)의 바울 당대의 교회에서 얻어진 통찰력’이라고 애매하게 표현한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요한복음에도 나오고 히브리서에도 나오고 또 앞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선재사상을 표현하는 것이 지혜신학인데 이 지혜신학이 마태복음에도 나온다. 그래서 바울서신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들이라는 칭호와 그 뒤에 숨어 있는 외경적인 지혜신학이 신약 전체의 전승에 전 과정에 폭넓게 나온다. 이런 것을 감안해서 M.Hengel이 나중에 이런 식으로 애매하게 표현했다.

 

그런데 나는 주장하기를 “만약에 하나님 아들의 선재사상,그리고 선재 사상의 배경을 이루는 지혜 신학이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초대교회에서 초창기 사건(AD 32-34)-과 관계가 있다면 이 하나님 아들의 선재사상이 바울의 공헌일 가능성이 크다는 식으로 증명하려고 한다. 지금 설명해야할 것이 선재사상과 이것의 배경을 이루는 지혜신학이 바울 다메섹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증명하려는 것이다7).

출처 : 잭슨빌 교회개혁포럼

글쓴이 : JaxHope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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