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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학(고광필) 5강 - 모형론적 성경해석

by 【고동엽】 2021.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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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론적 성경해석의 논리
(typological interpretation of the Scripture)


초대 교회사를 보면 구약 성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말하자면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이 문제가 되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성경과 철학을 혼합해서 신구약을 이해하려고 했다. 말시온(Marcion, 160) 같은 이단은 아예 구약 성경을 인정하지 않했다. 왜냐하면 구약의 하나님은 잔인하고 악한 하나님이며 단지 산약의 사도 바울 서신과 누가복음서만 인정했다. 이러한 이단을 반박하기 위해서 이레니우스(A.D. 130-200)나 터툴리안(A.D.160-225)과 같은 교부들은 진리의 척도(the cannon of the truth) 혹은 믿음의 룰(the rule of faith)을 성경해석의 원리로 삼었다. 어거스틴은 사랑의 룰(the rule of love)을 성경의 올바른 해석의 원리로 삼었다.(저자의 논문 “칼빈의 성경해석 논리”의 전반부를 참조)


초대 교부들은 구약을 고대 동방의 주변 문화들과 유사한 민간 종교 문헌으로 이해하지 않했다(종교사학적 접근). 그렇다고 해서 구약을 정경으로 인식한 유대교 및 회당의 역사적 관련서에도 보지 안했다(유대교적 접근). 초대교부들은 구약을 신약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했다(교회적 접근, <구약해석학>, 클라우스 베스터만 편집,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70). 따라서, 그들에게 성경의 의미는 “예수님은 누구인가?”하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냐에 달려있다고 봤다( James L. Kugel and Rowan A. Greer, Early Biblical Interpretation[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86], 112). 이 질문은 현대신학에서 말하는 역사적인 예수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정점을 찾고자 하는 신학적인 질문이며 해석학적인 질문이다.


따라서, 초대 교회는 두 종류의 성경 해석학파가 생겨났다.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안디옥학파이다. 전자는 풍유적 성경해석을 발전시켰으며 후자는 모형론적성경 해석의 논리를 발전시켰다. 풍유적인 성경해석은 중세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철학적으로 보면 전자는 플라톤의 철학에 영향을 입고 있으며 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입고 있다. 전자는 성경언어 뒤에 있는 숨은 의미, 깊은 의미, 영적인 의미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후자는 테오리아(θεωρια/theory/ spiritual insight))을 통한 성경의 문법적 문자적인 의미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둔다. 전자는 성경의 문맥을 무시함으로서 성경의 문맥과는 무관하는 풍류적 성경해석을 시도했으며 성경의 무시간적인 영원한 진리를 발견함으로서 구약과 신약을 조화시키고자 했다. 후자는 성경의 문맥을 중요시 하는 성경의 역사적 문법적인 의미를 중요시 했으며 구약을 신약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모형론적 성경해석 논리를 발전시켰다.


종교개혁에 와서 루터와 칼빈도 신구약은 서로 다른점이 있지만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해서 봤다.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에서 신구약을 해석하려 했으며 후자는 메시아의 구약에서 예언과 신약에서 성취라는 맥락에서 보고자 했다.


종교개혁 이후 19세기에 이르러 J. C. K. von Hofmann(1810-77)은 Weissagun und Erfullung im Alten und Neuen Testament(신구약에 있어서 약속과 성취)는 책을 통해서 구속사(Heilsgechichte)의 개념을 조직적으로 사용함으로서 구속사는 신학적인 용어가 되었다. 구속사학파는 성경이 신학의 궁극적인 자료 혹은 규범이라기보다는 구속사로 보았으며 성경은 단지 이 구속사(holy history)에 대한 증언으로 보았다(Bernad Ram, A handbook of Contemporary Theology[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66], 55). 이와같은 견해는 정통신학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구약을 약속과 성취라는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려고한 것은 신구약의 통일성을 중요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구약 신학사를 보면 초기에는 구약을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사로 보고자 했다. 그래서 역사적인 시도가 중심을 이루었다. Julius Wellhausen이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면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신학적인 관점에 중점을 두었다. 대표적인 신학자가 W. Eichrodotd와 G. von Rad이다. 전자는 구약의 언약(covenant/berith)이라는 개념으로 여화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관계성을 연결시킨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하나로 묵는 것이 언약이며 이것은 교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과정의 묘사”(description of living process/ Walther Eichrodt,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V.1, trans. J.A.Baker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1],14)라고 했다. 구약의 횡적 믿음(cross-sction of faith)을 통해서 본 견해이다. 구약에 언약이라는 개념은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지칭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Ronald E. Clements, one Hundred Years of Old Testament Interpretation[ Ph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6], 128-30). 후자는 종적 믿음을 통해서 본 시도이다. 구약에서 여호아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역사에 대한 이스라엘 신앙의 고백인 신조(credo or kerygma/ 신명기 6:20-24; 26:5-9, 여호수아 24: 2-13)에 기초해 있다. 여호아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역사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으로 표현된다. 이것이 신명기에 6:20-23에 나오는 케루그마이다. 폰 라드는 구약의 케루그마에 중점을 둠으로서 구속사의 역동적인 면을 강조하며 더 나아가서 종말론적으로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서 성취되는 케리그마에 연결시킨다(Gerhard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V.I[New York:Harper & Row, Publishers, 1962], 105-128]).
따라서, 성경의 모형론적인 해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구약의 정점으로 하는 종말론적인 구속사에 기초한다. 뿐만아니라, 모형론적인 해석은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키를 제시한다. 이 글에서는 구속사와 모형론적인 관계성을 설명하고 실제로 신약에서 어떻게 구약을 모형론적으로 해석하는가를 살펴봄으로서 모형론적인 성경해석 논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I. 모형의 어원

i)성경외의 헬라어 어휘군

튀포스(τυπος)란 어원적으로 침으로 생긴 자국, 형성된 것, (figure), 윤곽(outline)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도장이 찍힌 것,” “틀” 흔적을 남기는 “오목한 형태,” 혹은 예시(foreshadow)를 의미하기도 한다(레온하르트 고펠트, <모형론: 신약의 구약해석>, 최종태 역[새순출판사, 1991], 355). 모형이라는 말은 콘텍스트에 따라서 다양하게 사용되며 다음과같은 의미가 있다. 첫째, 원형, 대형(對型/αντιτυπος), 둘째, 모형, 모델(τυπικος), 세째, 모델, 스케치(υποτυπωσις)이다.

II.신약성경

신약성경에서 튀포스는 15번 나오며 그중에 8번이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사용된다. 상처 자국(요20:25), 우상(행7:43), 바울 서신(딤전 4:12; 디도서 2:7)과 베드로 전서(?전 5:3)에서는 믿음의 순종의 “본”으로 사용했다. 특히 히 9:24 그리고 벧전 3:21, 롬5:14, 행 7:44과 히 8:5에서는 튀포스를 해석학적으로 사용한 예이다.

III. 구속사

구속사란 자유주의 신학자 호프만이 말하는 의미에서 구속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한 구속사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려는 구속계획이 점진적인 역사적인 과정을 따라서 종말로 가는 전 과정을 말한다. 이 구속사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사의 정점이다. 따라서, 구약에서는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신약에서 오신 메시아를 말한다. 따라서, 신구약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구속사의 정점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에서 시작하여 계시록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 지어다”(계22:20-21)로 끝을 맺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로 끝을 맺는다. 역사적인 면에서 인류역사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하여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심으로 종말을 고하게 된다. 따라서, 인류역사의 의미도 하나님을 청조주와 구속주로 받아드림으로써만이 인류역사의 진정한 의미가 있으며 너와 나의 존재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시는 창조, 타락, 구속(재창조), 종말로 이어지는 역사를 구속사라고 한다. 그렇다면 구속사의 정점이 있는가? 있다면 무었이 구속사의 정점인가? 그 정점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경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a) 예수님 자증

부활하신 예수님은 성경이 메시야로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누가복음 24:27과 24:44-45에서 자증하신다. 자유주의 학자들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메시야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자증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구약은 세부분으로 되어있다. 토라(모세오경), 니빔(선지서), 케투빔(성문서)이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고 했다. 환언하면 예수님의 자기 자신에 대한 자증이다.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신구약 성경을 하나로 묵는 정점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의심과 절망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공생애에 있어서 이미 자기자신에 대해서 자증(십자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한 것을 기억나게 하고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해 주신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르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 24:44-45)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은 이미 구약에 예언된 것의 성취이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의 예언이고 신약은 그 성취이다. 구약은 오실 메시아의 예언이요 신약은 오신 메시아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

b)복음서의 증언

마태는 복음서의 시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1:1) “The book of the genealogy of Jesus Christ,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말은 희랍어 βιβλος γενεσεωσ Ιησου Χριστιου로써 the book of the generation of Jesus Christ(KJV), a record of the geneology of Jesus Christ(NIV), the book of geneology of Jesus Christ(RSV), these are the ancestors of Jesus Christ(LBV)번역했다. 직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의 시작에 관한 기록 혹은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첫 책은 하나님께서 천지와 인간 그리고 그가운데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우리의 시조인 아담의 죄로 타락한 후 구원을 약속하시고 이스라엘을 통하여 실천해가시는 구원의 톨레도( תודרלות=역사, 창 2:4; 5;1)로 구성된 시작의 책이 곧 창세기이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되는 재창조역사의 시작이다. 마태에 의하면 이 세상은 어느 특정한 사람의 세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연약한 자로서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러서 아야하는 것이다.


마가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1:1). 마가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고 마가복음의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우리 믿음의 조상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하신 메시아의 복된 소식이 어떻게 시작되 성취되어가는 역사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누가복음도 구원역사의 정점인 예수로부터 시작하여 아담,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눅3:23-38). 누가는 구약에서 시작하여 신약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신약에서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요셉의 아들 예수에서 시작하여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예수는 목수의 아들이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그 기원이 하나님이시며 구속사의 정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구석사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에서 시작하여 구속계획의 작정자이신 하나님으로 끝난다도도 볼 수 있다.


요한 복음도 태초 이전부터 계신 말씀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룬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삼위로 계신 분이시다. 하나님과 더불어 구원을 예정하시고 수행하신 분이시다. 정리하면 공관복음서 뿐만아니라 요한복음도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시작이 됨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사의 정점이 됨을 반증하고 있다. 구속사란 일반역사를 포함한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도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구원이 필요치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다 한 쪽으로 치우치고 전적으로 부패된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구원하러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시작이요 정점이요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c) 사도 바울의 증언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사도 바울은 성경의 핵심은 예 그리스도요 핵심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의 메시지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서신의 서두에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고백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메시지는 예수는 그리스도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베드로의 “주는 그리스도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는 고백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16:18) 이것은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핵심을 말해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d)히브리서 증언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려 부분과 여려 모양으로(πολυμερως και πολυτροπως/ at many times and in various ways)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εσχατου/종말에는)에 아들로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1:1-2). 여러부분과 모양이라는 말은 계시의 다양성과 시간성을 말하며 옛적과 마지막은 계시의 역사성, 점진성, 완료성을 말하며 선지자와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사에서 모형(선자자)과 원형(예수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의미를 시사한다.


오스카 쿨만은 <그리스도와 시간>라는 저서에서 복음의 중심 사상이 무엇인가를 다룬다. 복음의 중심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이다. 이 사건은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사건(historic event or historic Jesus Christ)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희랍의 순환적이며 계속해서 반복되는 사건이 아니라 유일하고 단 한번인(απαξ/ εφαπαξ/ once for all, once) 사건이다. 이 사건에 의해서 우주와 세계의 전 의미가 바꿔지는 대 변혁적인 사건이다. 결정적이고 획기적인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 인류역사의 의미가 바꿔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에파팍스나 하팍스는(롬 6:10, 히 7:27; 9:12)는 동의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구속사역에서 사용된 말이다. 구속사건의 단회적인 사실을 말할 때 사용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세계의 연대기를 주전(before Christ) 과 주후(after Christ)로 가르는 중심점이다. 구속 사건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사의 중심정임을 말해주고 있다. 구속사의 중심점은 양면성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해서 구약에서는 많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셔다. 다른 한편으로는 구약에서 예언 된 메시아가 신약에서 메시아아로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의시고 부활 하셨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이 구속사는 획기적이며 유일한 역사적 사건이다(오스카 쿨만, <그리스도와 시간>, 김근수 역[도서출판 나단, 1990, 168).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심으로 인류의 구속사는 완성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해서 인류의 구속을 계획하시고 작정하시고 시작되고 완성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신구약의 정점이다.


정리하면 성경은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서 신구약의 정점이 되심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증하신다. 신구약의 정점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핵심 메시지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구속의 메시지이다. 그래서, 설교의 핵심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바울이 전파했던 메시지가 무엇인가? 예수는 그리스고라고 전파했다(행18:5). 따라서, 모형론적 성경 해석논리는 구약과 신약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역사적인 내용들의 일치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하는 구약에서 역사적인 사건의 상응적인 관계에서 모형과 원형, 예언과 성취라는 종말론적 구속사에 기초한다.

IV. 모형론적 해석의 예

i) 대칭적 모형과 원형

사도 바울은 로마서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짖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Αδαμ ος εστιν τυπος του μελλοντος) 이라”에서 어떤 점에서 아담은 오실자의 모형인가를 한 사람 아담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대칭적 상응을 통해서 설명한다.
로마서 5: 14에서 아담은 모형이다. 어떤점에서 아담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가? 로마서 5:12-21에 보면 사도 바울의 논쟁의 초점은 어떻게 아담의 죄가 아담의 죄를 짓지 않은 후손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을 통한 구속을 다룬다. 다시말하면, 한 사람의 아담의 죄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관계성을 모형과 원형이라는 대칭적인 관계에서 해석한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죄는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오게 되었으며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이와같이 죄를 짓게 되었으며 사망이 이르게 되었다(5:12). 모든 사람은 아담안에서 죄를 지은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말인가? 그러면 아담의 죄가 부모를 통해서 유전되었다는 말인가? 만약 아담의 죄가 유전된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은 우리를 처벌할 수 있는가? 왜 죽어야 하는가? 사망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운명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공의로운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은 아담 한사람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대칭적 모형으로 해석한다. 죄를 지은 한 사람, 아담, 죄가 없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담 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죄를 전가시켰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받게 했다. 한 사람 아담은 불 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으며 순종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한 사람이다. 한 사람(ενος ανθρωπου)에서 한사람은 여러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전체로서 한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즉 인간 대표로서의 한 사람이다. 아담은 인류의 대표로서 죄를 지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를 지은 것이다. 이것이 원죄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담의 죄를 짓지 아니했지만 그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 된 것이다. 그것은 결혼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아담의 원죄가 우리에게 전가된 것이다.


한 사람 아담은 죄가 이 세상에 오게된 원인을 설명하는 모형이다. 그러나 한 사람 그리스도 예수는 한 사람 아담의 죄를 구속하는 원형이다. 여기서 원형과 모형의 관계성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대칭적이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종말론적으로 이루어지는 구속의 과정을 모형론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모형론적인 성경 해석논리는 모형과 원형과의 관계가 동일하거나 반복적인 것이 아니라 구속사에서 상응적(correspondence)이거나 정점화(intensification)에 있다. 뿐만 아니라 모형과 원형이라는 대칭적 상응관계를 통해서 구속사에서 아담의 의미가 명확해지며 동시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역사성이 명료하게 보여진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에서 보지 않을 때 암담의 의미는 인류 조상의 시초를 설명하는 하나의 신화가 될 뿐이다. 이 모형에서 예수님은 태양과 같으며 아담은 태양의 빛과 같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태양을 볼 수 없다. 눈이 부셔서 직접 볼 수 없다. 그러나 빛을 통해서 태양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태양이 없으면 빛이 없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담의 의미는 없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을 통해서 구약의 모형적인 사건은 선명해지고 분명해진다. 뿐만 아니라 모형을 통해서 우리는 원형인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볼 수 있다. 따라서, 모형은 원형을 예시해주고 원형은 모형의 의미를 선명하게 해준다.

ii)예시적 모형과 원형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심판으로 인한 구원을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예시하는 모형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αντιτυπον)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0-21). 여기서 물은 세례(원형)의 모형이다. 다시 말하면 노아의 홍수 심판으로써 구원은 종말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죄의 씻음(세례)과 부활을 통한 새생명의 모형이다. 따라서, 구약의 모형은 원형인 예수 그리스도가 현제적으로 이루시는 구원을 종말론적으로 예시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은 점진적이며, 역사적이며, 종말론적이라는 사실을 명료화시킨다. 뿐만아니라 구약의 역사적인 구속의 사건을 통해서 죄의 씻음의 증표로서 세례의 의미를 예시적으로 보여줌으로서 신약의 세례의 의미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iii) 상응적인 모형과 원형

히브리서 8:5, 9:23-24, 10:1에서 히브리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구약의 구속사에 나타난 모형과 원형의 상응적인 관계성에서 해석한다. 그 일레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 제사장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론의 반차를 ?지 않고 영원한 멜기새댁의 반차를 따른 대 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대 제사장처럼 인간이 만든 성소에서 매년 죄사함을 위한 짐승의 피뿌림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로서 단번(απαξ)에 죄사함의 길을 여셨음을 모형론적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사용되는 모형이라는 말은 원형(αντιτυπα), 모델(υποδειγματα 히9:23), 그림자(σκιαν 10:1)라는 언어를 사용한다.


구약에서 대 제사장은 레위 자손에 속한다. 레위인으로서 대제사장 직무는 오실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대 제사장 직무를 예시한다(모형). 구약의 대 제사장은 매년 성소에 들어가 속죄의 제사를 드린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에 속죄를 이루셨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짐승의 피로 속죄를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피로 속죄를 영원히 이루셨다. 레위 족속에 속하는 대 제사장직은 일시적이지만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은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대 제사장직이다. 그래서 구약의 대 제사장은 신약의 대 제사장과 속죄에 있어서 서로 상응적 관계에 있다. 구약의 대 제사장은 신약의 대 제사장의 모형으로서 그 의미는 신약의 대 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드도를 통해서 그 의미를 가지며 신약의 제사장의 의미는 구약의 모형을 통해서 그 의미가 선명해진다. 즉 대 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하고 영원한 대 제사장이심을 구약의 모형을 통해서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십자가를 예보자. 인간적인 편에서 보면 십자가는 국가 반역좌 같은 중죄를 지은 사람을 처벌하는 처형의 형틀이 되지만 우리 주님이 지셨기 때문에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 된다(고전 1:18). 이와같이 신약에서 말하는 대 제사장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구약의 대 제사장의 의미는 인간의 죄의식을 무마하고 표출(projection)시키는 신화적인 표현이 된다.

V.모형과 예언

구약은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고 신약은 오신 메시아를 선포한다. 예언과 성취라는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해서 신구약을 하나로 연결한다. 예언서에서는 선지자가 계시된 미래를 선포하는 반면에 모형은 어떤 인간적인 매개없이 순전히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실체를 통하여 미래를 가리키면서 모형의 의미를 갖는다. 모형의 의미는 당 시대에는 숨겨져 있으며 신약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회고적으로 바라볼 때 드러난다는 점에서 객관화된 예언이라고 했다(<구약해석학>, 클라우스 베스터만 편저, 235). 그러나 로마서 5:14에서 보면 아담은 오실자의 모형이라고 함으로써 모형도 사람을 통해서 예시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예언은 사람을 통해서 모형은 사물을 통?서 예시한다고 엄격하게 구분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과 성취의 관계는 직접적이지만, 모형과 원형의 관계는 간접적이다. 모형과 원형과의 관계에서 모형은 확대된 은유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직접 설명할 수 없는 구속사적인 관계성을 모형이라는 간접적인 사건, 혹은 인물을 통해서 구약의 깊은 영적인 의미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VI.정리

모형론적 성경 해석논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한 구속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사의 시작과 끝이라는 종말론적 사고에 기초한다. 구약의 모형과 신약의 원형은 반복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응적인 관계이다. 따라서 모형론적 성경해석은 성경이 제시하는 방법이다. 구약 역사의 중심적인 사실 혹은 인물과 신약에서 구원의 근본적인 사실 사이에 존재하는 모형론적인 상응을 신약의 구속사의 관점에서 재 해석하는 것이다.


모형론적 성경 해석논리를 통해서 다른 시대에 다른 언어로 쓰여진 구약과 신약의 불가분의 관계성, 즉 통일성을 설명해주며, 예수 그리스도가 신구약을 연결시키는 구속사의 정점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구원의 역사란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시기로 작정하신 구원의 역사(엡1:4)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점진적으로 어떻게 성취되어가는가를 신 구약 성경을 통해서 선명하게 보여준다.


모형론적 성경해석의 키는 안디옥학파에서 말하는 theoria가 아니라 칼빈처럼 성령님의 내적 조명이 키이다. 다시말하면, 모형과 원형의 상응관계는 테오리아에 의해서 발견할 수 있지만 그 모형과 원형의 영적인 의미는 성령의 내적인 조명과 가르침을 받아야 올바로 모형과 원형의 관계성에서 발견되어지는 의미를 파악하고 선포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성경의 올바른 의미을 깨닫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관찰이나 이론적인 분석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다양한 역사적인 사건은 구속사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한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해서 모든 구약을 다 모형론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없는 구약 이해는 구약을 하나의 종교사로, 이스라엘의 민족사로 이해하는 것일 뿐이다. 동시에 구약 없는 예수 그리스도 이해는 불명료하다. 우리는 디트리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경고를 들어야한다. “우리가 신약을 구약의 관점에서 읽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The Church stands, not at the boundaries where human power gives out, but in the middle of th village. That is how it is in the Old Testament, and in this sense we stil read the New Testament far too little in the light of the Old.[ Letters & papers from Prison, Eberhard Bethege ed. New York:Macmillan Publishing Co., INC., 1971], 282)이 세상 일들을 너무 쉽게 팽개처버린다는 것이다. 신자는 진공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살아계심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는 자이다. 따라서, 구약없이 너무 쉽게 신약을 이해하려고 하는 자세는 성경의 모형론적인 해석의 논리를 잘 이해하지 못한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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