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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학(고광필) 4강 - 초대교부의 성경해석

by 【고동엽】 2021.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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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부 성경해석 논리

Karlfried Froehlich는 교회사는 성경 해석사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Biblical Hermeneutics in Historical Perspective ed. Mark S. Burrow & Paul Rorem Michigan:William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1), 15. David L. Puckett, John Calvin's Exegesis of the Old Testament (Kentuc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5), ix.


이 말은 교회사를 역사로 보는 견해가 아니라 성경 해석 관점에서 교회사를 이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교회사의 흐름을 성경 해석의 관점에서 보고자 하는 견해라고 이해하고 싶다. 그래서 성경 해석은 교회의 신앙과 삶을 형성하는 것이며 동시에 교회의 신앙과 삶은 성경 해석의 결과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교파 형성의 주된 요인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요인에 기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성경 해석에 기인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각 교파의 성경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그 교파에 속한 신자의 신앙과 삶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사를 보면 여러 가지 이단들이 있다. 이단으로 판정된 것은 그들의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중에 아리우스는 예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탄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등 되지 않으며 예수님을 우주의 조성자인 희랍의 데미어즈나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슈퍼맨 정도로 이해했다.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으로 규정했다.

나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에게서 나셨으며 하나님의 하나님이시요, 빛의 빛이시요,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하나님께서 나셨으나 지으심을 받지 않으셨으며,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와 한 본체를 가지신 분이시다. 그는 인류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 오셨고 성령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몸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시어서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 『개혁 주의 신앙고백집』, 김의환 목사 편역, 10-11.


그렇다면 아리우스의 잘못이 어디에 있는가? 성경을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서 해석한데 있다. 요한 복음 1:1은 예수님의 신성을 명확히 증거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리우스는 인간의 몸을 입고 탄생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등 되다고 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했다. 그렇다. 이성의 논리로 보면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등 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성의 논리에 어긋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대로 믿어야 한다. 그렇치 않고 철학적 논리를 성경의 신적 기원보다도 더 우위에 놓으려고 하면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 해석에서 논리적인 사고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논리적인 사고를 성경의 신적 권위보다 앞세우려 하는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데서 온 것이다.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할 때 성경을 올바로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도 인간의 행동은 해석된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는 것은 인식하던 인식하지 않던 간에 어떤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가령 요즈음 정치권에서 일고 있는 신당 창당이나 구당 모임이나 민주당을 고수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옳고 그름의 차원을 떠나서 그 나름대로의 정치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신앙과 삶의 규범은 성경 해석에 기인한다. 문제는 어떻게 성경을 올바로 해석해서 성경이 기록하는 말씀대로 올바른 신앙을 갖고 그대로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오늘처럼 문화적으로 다원화되고 사회적으로 혼탁하고 도덕적으로 부패되고 혼동된 세상에서 신앙으로 살기보다는 감정과 느낌으로 살려고 하는 풍조가 강한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올바른 성경 해석에 기인한 올바른 신앙과 삶은 대단히 중요하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신자로서 정체성이 불투명하다고 한다. 이것은 이들을 지도하고 교육해야 할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정체성이란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앙과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앙에 따라서 살면 개혁주의 신자의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고 자유주의 신앙에 따라서 살면 자유주의 정체성을 갖는 신자가 되는 것이다. 올바른 성경 해석과 그에 입각한 삶을 살도록 교육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장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 이런 위기적인 상황에서 초대 교부들의 성경 해석 논리를 살피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우리는 진공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과거에 기초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 해석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성경 해석 논리를 살피는 것이 필연적이다. 초대 교부들은 현대에서 말하는 해석학의 이론은 아닐 지라도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 논리를 그 시대에 맞게 정립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초대 교부들의 성경 해석 논리를 살피고자 한다.

I. 믿음의 규범(the rule of faith)

동방 교부인 이레니우스(연대 )는 이단, 영지주의와 말시온주의자들에 반대해서 올바른 성경 해석 논리로 “진리의 척도” 혹은 믿음의 규범을(the cannon of the truth/the rule of truth)를 제시하고 서방 교부인 터툴리안(연대?)은 “믿음의 규칙”(the rule of faith)을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 논리로 설정했다. 이레니우스는 믿음의 규범을 이렇게 정의했다.

교회는 비록 전세계에 걸처 퍼져있지만 ...사도들과 그 제자들로부터 이 신앙을 전수받았다. 한 하나님, 전능하신 성부를 믿는다. 그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다. 그리고 한 분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성육신 하셨다. 그리고 성령을 믿는다. 그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섭리와 강림, 사랑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수난과 죽은자로부터의 부활과 승천과, 만물을 총괄(에베소 1:10)하고 인류 전체의 모든 육체를 새롭게 일으키시기 위해 영광 중에 하늘에서 장차 나타나실 것을 선포하셨다.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 즉 우리 주요 하나님이시요 구세주이시요 왕되신 분께 하늘과... 그 발에 만물이 모두 무릎을 꿇게(빌2:10-11)하시고 모든 혀가 그를 고백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이들에게 정의로운 심판을 하시는데 악한 영(엡6:12)과 타락으로 인해 불경건하고 불의하고 사악하고 속된자들과 함께 반역의 상태로 떨어진 천사들을 영원한 불에 던지실 것이다. 그러나 의롭고 거룩한 자들과, 어떤 이들은 처음부터, 다른 이들은 회개함으로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사랑 안에서 견인한 자들에게는 은혜로써 불멸을 주시고 영원한 영광으로 그들을 두르실 것이다. 프란시스 영, 『초대 기독교 신조 형성사』, 이후정.홍삼열 역 (컨콜디아사, 1994), 26-28.

터틀리안은 믿음의 규범을 이렇게 정의 한다.

이제 신앙의 규칙에 대하여...너희는 다음과 같이 믿음을 규정한 것을 알아야 한다.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는 세계의 창조자로서 그 자신의 말씀 즉 ‘만물의 처음’을 통해 만물을 무로부터 창조하셨다. 이 말씀은 그의 아들로 불리우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족장들에게 여러 형태로 보이셨고,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셨고, 마침내 성령과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내려오셔서, 그녀의 태내에서 육이 되셨고 그녀에게서 태어나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사셨다. 그후 그는 하나님 나라의 새 범과 새 약속을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사흘 만에다시 사셨다. 그는 하늘로 들리우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그는 믿는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 자신 대신 성령의 권능을 보내셨다. 그는 영광 중에 다시 오셔서 성도들을 영생과 하늘 약속의 열락에로 이끄시고, 악인들을 정되하사 영원한 불에 던지실 것이다. 이는 모든이들이 그들의 육체의 회복과 함께 부활이 일어난 이후에 있을 것이다. 이 규칙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이고, 이단들이 제기하는 이외에는 우리 중에서는 어떤 질문도 야기하지 않은다. 윗책, 27.

이레니우스가 정의한 신앙의 규범과 터툴리안의 규범은 언어의 사용과 길이에 있어서 다소 다른 점이 있지만 내용에서 있어서는 상이하지 않다. 두 교부들은 다같이 이단에 반박하는 글에서 믿음의 규범을 말했으며 이 규범은 인위적인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레니우스는 사도들과 그 제자들로부터 전승된 것임을 강조한 반면 터툴리안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이며 이단외에는 아무도 이 진리의 규범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의 규범은 그리스도로부터 가르쳐짐울 받았고 사도들고 그 제자들에 의해서 전승된 것이다. 이 규칙은 올바른 성경 해석의 타당성을 가늠하는 논리이다. 가령, 영지주의자들과 말시온주의자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보다 열등하다는데 공통점을 갖고 있다. 구약의 하나님은 악한 하나님이며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레니우스에 의하면 이와같은 하나님의 이해는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은 한 분이 하나님이시며 동일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의 규범은 올바른 성경 해석의 논리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통교리의 시금석으로서도 사용되어졌다.


구약과 신약은 한 분 하나님의 작품이지만 구약과 신약의 관계성은 서로 상관 관계에 있다. 구약 성경은 예형(types)으로 충만하다. 구약의 예형은 신약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리스도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마13:44). 그리스도는 구약의 비유나 예형에 의해서 숨겨졌다. 숨겨진 그리스도는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알 수 없고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구약의 예형은 분명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예형은 신약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석되어져야 올바로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레니우스는 이렇게 구약은 그 자체로서 해석보다는 에언의 성취인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석되어져야함을 이렇게 말한다.

때가 오기 전에는 모든 예언은 사람들에게 수수께끼이며 모순이다. 그러나 그 때가 오며, 예언된 바가 성취되면 그 예언에 가장 확실한 해석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현재 유대인이 율법을 읽을 때 그것은 신화와 같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심이 모든 것의 해답임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율법을 기독교도가 읽을 때 밭에 묻어 놓은 보화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드러난다. R.M. 그랜트, 성서해석의 역사, 이상훈역(대한기독교회서회, 1990), 59에서 인용. Irenaeus, Adv. Haer. IV., 26.

III. 사랑의 규범(The Rule of Charity)

성 어거스틴의 성경 해석은 알레고리칼 해석과 문자적인 해석을 병행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중심으로한 allegoria(αλληγορια)의 해석과 안디옥학파를 중심으로한 Theoria(θεωρια)의 중간학파라고 한다. 어거스틴은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3장까지 주석했다. Van der Meersm는 말하기를 어거스틴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학생이었으며 그는 글자 그대로 성경 안에서 산 사람( the believing Bible student... He literally lived in Holy Scripture)이라고 했다. F. vander Meer, Augustine the Bishop: the Life and Work of Father of Church, Trans. Brain Battershaw and G. R. Lamb (London and New York, 1961), 343.
그는 창세기 주석에서 창세기는 문자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믿었으며 문자적인 의미를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고백했다. 참으로 성경 해석은 쉬운 일이 아니다. 피와 땀과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경건한 생활이 필수적이다. 아다나시우스는 성경 해석자의 자질을 on the Incarnation of the Word에서 이렇게 말했다. “In addition to study and real knowledge of the Scriptures, integrity of life, purity of soul and Christlike virtue are required.... Whover wishes to understand the mind of the sacred writers must first cleanse and purify himself by holiness of life and imitate th saints themselves by behavior smiliar to theirs”(De Incarn. Verbi, 57).

어거스틴은 그의 명저 기독교 교리 (De Christina Doctrina)는 석의 신학의 개요(a copendium of exegetical theology)이다. Collectanea Augustiniana, Melanges T.J., Van Bavel, Publes Par (Leuven University Press, 1990), 1028. 기독교 교리에서 교리에 해당하는 희랍 말은 παιδεια라는 말로서 교육이라는 말이다. 희랍사람들은 완전한 인간을 만드는 것은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교회사가인 Philip Schaff는 성 어스틴의 De Christina Doctrina (On Christian Doctrine[knowledge])는 최초의 학문적인 성경 해석학이며 고대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작품이며 그 후 지금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평가했다. A Select Library of the Nice and Pod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ed. Philip Schaff, St. Augustine's City of God and Christian Doctrine, Vol.II (Grna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79), vii. Cited as CD.


이 책은 4부로 된 것인데 처음 3부는 주후 397년 그리고 마지막 4부는 주후 426년에 완성했다. 그는 그의 재고록에서 자신의 책을 성경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저술했다고 말하고 있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어거스틴은 그의 저술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논리를 제시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며 동시에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케 하는 룰이 필요하다. 올바른 성경 해석은 성경에 기초한 경건한 삶을 형성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성경 해석자는 책임성 있는 해석과 그 해석에 의해서 살아지는 삶을 살아야 호소력이 있고 권위를 가지고 성경을 가르칠 수 있다고 했다.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은 성경으로부터 오지만 세상적인 학문이 필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학문은 성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배워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조명(divine illumination)을 통해서 도우심을 얻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하며 경건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제 I부

제 I 부에서는 성경을 해석하는 데는 두 가지 점을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성경의 저자가 의도하는 의미를 찾는 방법(mode)이요, 다른 하나는 찾은 의미를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방법을 제 I- III부까지 다루고 제 IV부에서는 둘째 방법을 다룬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모든 가르침은 사물(things)에 대해서 가르치거나 언어(signs)에 대해서 가르친다고 봤다. 사물과 언어는 상관관계가 있다. 첫째, 언어(기호)는 무엇을 표시 혹은 제시(signify)하는 사물이다 (signs are things which are used to signify something). CD, I. ii. 2, 11.


둘째, 언어(기호)는 사물이 감각에 주는 인상을 초월해서 무엇을 생각토록 하는 사물이다(A sign is a thing which causes us to think of something beyond the impression the thing itself makes upon the senses). CD, II.i.1, 5-7.


이 사실로부터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사물을 배우며 언어는 사물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사물을 이해하며 언어를 통해서 세계와 관계를 가진다. 여기서 언어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어거스틴은 현대 언어철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 해석에 있어서 언어의 중요성을 깊이 생각케 해준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성경에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제 II부

제 II부에서 어거스틴은 언어에는 자연적인 언어(natural sign/signa naturalia)와 일상적인 언어(conventional sign/ signa data)가 있다고 했다. 자연적인 언어는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지만 무엇에 대한 지식을 전달해 준다. 예를 들면, 연기라는 언어는 불을 연상케 한다. 여기서 “연기”라는 언어는 어떤 사람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불을 제시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연기는 불이 있는 곳에서 나타나는 직접적으로 경험되어지는 현상 혹은 증상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언어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 즉 사상, 감정, 이해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성경의 언어는 성경 저자의 의도, 사상, 감정을 표현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 해석에 있어서 일상적인 언어가 중요하다. 성경에 나오는 언어 중에서 해석 상에 어려움을 주는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알려지지 않거나(unknown signs) 불명료한 언어(ambigious signs)이다. 여기서 알려지지 않은 언어는 우리의 무지에서 온다. 이런한 무지는 성경의 원어를 공부함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명료하지 않은 성경 언어의 의미는 원문을 보거나 문맥을 통해서, 또한 여러 번역 본을 비교함으로써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비유나 풍유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그 비유나 풍유가 어떻게 사용되어지는 가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세상적인 지식을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제 III 부

제 III 부에서는 해석하기 어려운 언어에 대해서 다룬다. 이것은 은유적인 언어(figurative language)이다. 여기서 혼동을 일으키는 것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을 은유적으로 해석한다든지 은유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온다. 성경에 경건한 생활(purity of life)과 올바른 교리(soundness of doctrine)에 관한 것이 아닌 것은 문자적이라기 보다는 은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CD, III.10.14.


여기서 경건한 생활이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관계가 있으며, 올바른 교리 혹은 가르침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지식과 관계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을 사랑하게 하지 않은 성경 해석은 잘못된 성경 해석이라고 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 구절은 분명한 것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고 했다. CD, III.26.


이것은 성경의 통일성(the unity in the OT and NT) 을 말한다. 성경 전체와 부분은 서로 절대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신구약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제롬은 성경의 통일성을 이렇게 말했다. “모든 성경은 한 성령에 의해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 체인에 여러개의 체인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하나를 잡아 당기면 다른 것도 따라 나온다.” “All of Holy Scripture is bound togather, and it has been united by one spirit. It is like a single chain, one link attached to another, and when you have taken one, another hangs from it”( Boniface Ramsey, Begining to Read the Fathers, 40에서 인용.


후일 성경의 절대적 통일성은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졌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사물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 데 즐겨야 할 사물(thing to be enjoyed)이 있으며, 사용될 사물(thing to be used)이 있으며, 즐겨야 하고 사용될 사물(things which use and enjoy)이 있다. 우리가 영원토록 즐거워해야 할 대상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한다. 그러나 사용의 대상은 우리를 만족과 행복케 하는 것을 돕는 수단이 된다. 우리를 만족케 하고 행복하게 하는 대상(object)은 인간이 아니요 세상도 아니요 지고의 선이시요 참 인간의 행복이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만약 우리가 사용해야 할 수단을 만족케 하는 대상으로 삼으면 그 인생은 방황하게 되고 타락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서 영원한 만족을 얻고자 하지만 그것을 얻고 나면 허무하게 되고 또 다시 영원한 행복을 주는 것을 찾아야만 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용의 대상이다. 그러나 세상 것을 사랑하게 되면 영원한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세상 것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용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신다.


성경은 말하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어거스틴에 의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성경 핵심이다. 그래서, 사랑의 규칙(the rule of charity)이 올바른 성경해석의 척도이다. 올바른 성경 해석이란 하나님과 이웃 사랑 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즐겨야 할 영원한 대상이요 이웃은 하나님 사랑을 통해서 서로 교제하는 대상이다. 따라서 올바른 성경 해석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하는데 있으며 그렇게 하는 성경 해석은 설령 저자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틀린 성경 해석이 아니라고 했다. 왜냐하면 잘못된 해석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다 보면 잘못된 것을 고칠 수 있기 때문이다. CD, I.36.40.

4. 제 IV 부

제 I, II, III 에서는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 논리를 제시했다. 제 IV 부에서는 올바로 해석된 성경의 의미를 효과있게 전하고 가르치는 논리를 제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제 IV 부가 수사학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수사학적인 기술이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장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전하는 자는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 임무 뿐만 아니라 성경에 제시된 진실된 교리을 변증하고 험증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그때 그때 어?게 진리를 변증하고 험증하는가를 성경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여기에는 지혜와 웅변술(combination of eloquence with wisdom/수사학)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3-5에 보면 환난 중에 기뻐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노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라다 소망이 부끄러워하지 이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라” 사도 바울의 말은 단순한 언어 배열이 아니라 수사학적인 배열이다. 여기서 말하는 배열은 희랍어로 말하면 크리마스( κμιμαζ/climax)요 라틴어로 말하면 gradatio가 있다. 다시 말하면 처음 환난이 인내를 가져 오는줄을 알면서에서 시작하여 점차 강도가 올라가서 마지막 소망으로 끝나는 클아막스가 있다. 뿐만 아니라, ?째, 환난은 인내를, 둘째, 인내는 연단을, 셋째, 연단은 소망이라는 절은 다음 절의 세단락, ?째, 희망을 부끄럽지 않게 한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은바 된다, 셋째, 성령을 통해서 마음에 부어진다와 댓구를 이룬다. 이것은 κομματα 혹은 περιοδος 라고 부르는 수사학적인 배열이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목회자는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명료성이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가르쳐서, 듣는 자를 기쁘게하여 마음을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가르치는 스타일이 다양할수록 효과가 있다. 가령, 장례 예배 설교와 결혼 예배 설교는 똑같은 설교이지만 설교자의 무드나 목소리의 톤이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인정한 것을 희망함으로써 살아가며 희망한 것을 사랑으로 소유하게 된다. CD, I. 37. 41, 38, 42.


성경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세상적인 수사학적 지식, 인간 이해가 필요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설교 하기전이나 설교를 듣는 대상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얻고 성령님이 듣는 자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었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자는 자기가 해석한 것을 삶에서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권위를 가지고 가르칠 수 있다. 앎과 삶이 일치가 되어야 권위를 갖고 가르칠 수 있으며 설득력있게 전달 할 수 있다. 경건한 사람이되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가르칠 수 있다.
정리하면, 어거스틴의 성경 해석은 성경의 문맥에 따라서, 풍유적 문자적인 해석을 병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삼중적인 의미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것은 원인론적(aetiological meaning of Scripoture), 유비적(analogical meaning of Scripture), 풍유적(allegorical meaning of Scripture)인 성경의 의미이다. 어거스틴과 동시대 교부인 John Cassian은 삼중적인 의미를 조금 다르게 구분했다. 성경의 도덕적인 의미(tropological meaning), 풍유적인 의미(allegorical meaning), 영적인(anagogical meaning) 의미이다. 도덕적인 의미는 글자 그대로 경건한 생활을 가르치는 의미이며 풍유적인 의미는 숨겨진 의미로서 역사적 사건 배후에 숨어 있는 모형론적인 의미이며 영적인 의미는 천상적인 비밀스러운 의미로서 하나님과 인간이 연합되는 의미를 말한다.

그리고 올바른 성경해석은 사랑의 규범(The rule of charity)에 의해서 지배된다.

IV. Allegoria(αλληγορια)에 의한 해석

초대 교부들은 성경의 의미는 두 의미 혹은 두 차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문자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이다. 이것은 초대 교부들의 믿음의 조항(the article of faith)이다.


풍유 해석학(allegorical Hermeneutics)은 주후 2-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생겨난 성경해석 방법으로서 영적인 의미를 ?고자 하는 방법이다. 이 성경 해석 방법을 지명 이름을 따 알렉산드리아 학파(The Alexandrian School)의 성경 해석학이라고도 한다. 이 학파의 대표적인 사람은 클레멘트(Clement)와 오리겐(Origin)이다. 클레멘트와 오리겐이 살았을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당대의 석학들이 사는 중심지였으며 당시의 최고의 도서관(70만 장서)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 도시는 플로틴누스와 암모니우스 사게우스에 의해서 창시된 신 플라톤주의, 바실데스의 영지주의, 필로의 사상을 따른 헬라적 유대주의와, 클레멘트와 오리겐의 플라톤주의가 한데 엉켜 끓고 있는 도시였다고 한다. Justo L. Gonzalez,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1 Vol. (Nashville: Abingdon Press, 1970), 187.

풍유적인 성경 해석학의 선구자는 헬라적 유대인 필로(Philio)로서 그는 희랍 철학을 이용하여 성경을 해석하고자 했다.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자적인 의미는 성경의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없고 풍유적 해석을 통해서만 성경의 깊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다. Donald A. Hagner, "Philo," New Dictionary of Theology, 509-10. 풍유는 비유법의 하나로 본뜻은 뒤에 숨기고 비유하는 말만으로 숨겨진 뜻을 암시하는 방법, 속담 혹은 격언이라고 한다. 한자로 풍자는 “빗되어 말할 諷”과 “깨우칠 諭라”는 의미로서 빗대어서 말함으로 깨우치는 수사학적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直喩는 수사법의 하나로서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에 직접적으로 빗대어 나타내는 수사법으로서 “같다” 혹은 “처럼”이라는 표현을 쓴다. 隱喩(metaphor 숨을 隱)는 수사법의 하나로서 원뜻은 숨기고 유추나 공통성의 암시를 따라 다른 사물이나 관념으로 대치하여 나타내는 방법으로써 예를 들면 “A는 B”이다에서 A는 원 관념이고 B는 보조관념이다. 또한 은유는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서 그 이상을 초월하는 영적인 의미를 표현할 때 쓰는 표현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비유는 직유의 연장이다. 그러나 풍유는 은유의 연장이다. 비유나 직유에서는 중요시 되는 표현이나 물체가 분리되는 반면에 은유와 풍유에서는 중요시되는 것이 그 의미지 자체와 동일시 된다. 마태 복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5:13)에서 기독교인과 소금은 은유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로 여겨진다. 요한 복음 “나는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 15:1)에서 예수와 포도나무는 하나로 묵여져 있다. 한 단어 혹은 문장으로 구성된 은유는 풍유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연장되어 세부적인 이야기로 되었을 때는 풍유가 된다. 시편 80:8-15에서 나오는 “애굽에서 옮겨진 포도나무”는 풍유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포도나무)에게 행하신 바를 명백하게 말한다. 은유는 잠언 5:15-23에서 ?을 수가 있다(월터 C. 카이저. 모세스 실바 공저, 성경해석학 개론, 강창헌 번역[도서출판 은성, 1996], 150). “Allegory is a narrative in which the agents and action, and sometimes the setting as well, are contrived so as to make coherent sense on the literal or primary level of signification, and also to signify a second, correlated order of agents, concepts, and events”( A glossary of Literary Terms, 5th ed. M.H. Abrahams, Holt, Rinehart and Winston, INC., 4). Parable is a short narrative.


가령 창세기 2: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의 주석을 이렇게 했다. 분리할 수 없는 정신이나 특별한 감각에 의해서 완전하게 된 것이 아니다. 하늘과 땅의 합침 즉 한 정신의 이데아와 다른 감각에 의해서 완전하게 된다. 여기서 하늘은 정신(mind)을 의미하고 땅은 감각(sense)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정신에 의해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은 하늘에 있으며 감각에 의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땅에 있기 때문이다. The Works of Philo, Trans. C.D. Yonge(Massachusetts:Hendrickson Publishers, 1993), Allegorical Interpretaion, I.(1).

풍유적 성경해석의 대표자는 클레멘트와 오리겐이 있다. 그들은 성경을 믿음의 규칙에 의해서 해석하는 것을 중요시했지만 당시 영지주의 자들이나 헬라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믿음의 규칙에 의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으로 이해되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학을 제시했다.가령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보다 열등했다고 믿었다. 구약의 하나님은 선하신 지고의 하나님과 악한 신의 중간 위치에 있는 데미어즈(demiourgos)로서 자기 임의대로 중재인 역할을 한다. 영지주의자들의 가름침은 구원의 가망이 없는 육적인 사람(fleshly or hylic people)나 이미 구원에 이른 영적인 사람(pneumatics/those who grasp spiritual fullness, that is, pleroma)을 위해서가 아니라 혼적인 사람(psychics)을 위해서 가르쳤다. 이들은 단순한 문자적인 성경의 의미로부터 보다더 고차적인 성경의 영적인 의미를 가르침으로 혼적인 사람이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가미한 풍유적 성경해석 방법을 발전시켰다. 그렇다면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성경 해석학은 기독교 변증적인 측면이 있다.


클레멘트에 의하면 성경에는 한 가지 의미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며 성경의 영적인 의미는 단순히 우리의 관찰이나 경험에 의해서 발견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풍유적 해석에 의해서 발견되어진다고 봤다.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는 성경의 주된 의미가 아니라 이차적인 의미라고 생각했다. 클레멘트는 플라톤의 철학과 풍유적인 방법을 조화하여 영지주의자의 잘못된 비 성경적 지식(false gnosis)에 반대하여 성경의 진정한 지식(true gnosis)을 얻고자 했다. 여기서 진정한 지식은 로고스인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이다.


오리겐은 최초의 조직 신학자이며 성경 신학자이다. 그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클레멘트와 같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성경의 깊은 의미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며 영적인 의미라고 봤다. 그는 인간의 구성 요소를 인식론의 기초로 하여 인간이 몸과 혼과 영으로 구성된 것같이 성경의 의미도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 세 가지는 문자적인 의미(litera or physical), 도덕적인 의미(moral or psychical sense), 영적인 의미(allegorical or intellectual sense)이다. 그 중에 가장 깊은 의미는 영적인 의미(allegoria)라고 했다. Origen, First Principles, 4. 1. 11-17(For as man consists of body, and soul, and spirit, so in the same way does Scripture, which has been arranged to be given by God for the salvation of man).
세 가지 차원의 성경 의미는 성경에서 한가지 차원의 의미(문자적인 의미)를 주장한 안디옥 학파와 다르다. 문자적인 의미란 성경에 여러 차원의 의미(meaning)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차원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지 성경의 각 언어에 하나의 의의(significance)만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오리겐의 풍유적 성경 해석은 신플라톤 철학의 전제에 영향입은바가 크다. The Fathers of Church, A New Translation, Vol. 80(Washinton, D.C.: The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1989, 12. Cited as FC.
이 지상 존재하는 것은 천상의 이데아의 그림자이다. 그래서 지상의 그림자를 통해서는 천상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그림자 뒤에 숨은 영적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문자 뒤에 숨은 allegoria를 ?아야 한다.


Allegoria는 희랍에서 기원이 되어지며 신의 메시지에는 신비스러운 의미가 있기 때문에 문자적인 의미로서는 파악할 수 없다고 봤다. 그래서 풍유적인 해석(영적, 형이상학적)이 필요하다고 봤으며 영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은 신적인 기원이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신적인 것은 영원하고 비역사적이며 초월적인 진리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것은 한계성이 있고 현상적인 것이다. 오리겐도 이러한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Dan G. McCarteny,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48 (1986), 281-301. Cited as WTJ.

Paul K. Jewett에 의하면 풍유적 성경해석과 알레고리의 해석은 구분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Paul K. Jewett, Concerning The Allegorical Interpretation of Scripture, WTJ.


알레고리는 고정되고 인정을 받는 문학의 한 형식이다(an allegory is a fixed and recognized form of literature). 성경에도 알레고리가 있다. 은유적(metaphor/figure/smile)인 표현이 그 중의 한 예이다. 알레고리를 해석하는 것은 은유적인 해석(metaphorical interpretation)이다. 가령 “나는 선한 목자이다”라고 우리 주님은 말했다. 여기서 예수님은 실제로 양을 치는 목자는 이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양을 치는 목자처럼 죄악된 인간을 위해서 목슴을 버리신 선한 목자이심을 실감있게 말해준다. 이것은 알레고리를 은유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풍유적 해석은 알레고리의 해석이 아니다. 알레고리의 해석은 알레고리의 문자적인 의미를 무시하지만 은유적인 해석은 무시하지 않은다. 이점이 알레고리의 해석과 알레고리칼 해석의 차이다. 하바드 대학 희랍 문학과 철학 교수인 H.A. Wolfson은 그의 명저 파일로라는 책에서 풍유적 해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풍유적 해석은 텍스트를 텍스트와 전연 관계없이 해석하는 방법이다”(The allegorical method essentially means the interpretation of a text in terms of something else, irrespective of what that something else is). H. A. Wolfson, Philo (Cambridge, 1947), I., 134.

풍유적 성경 해석의 가장 좋은 예는 어거스틴의 사마리아 사람 비유(눅 10:29-37)에서 볼 수 있다. 어거스틴은 본문의 택스트와는 전혀관계 없이 택스트에 없는 것은 집어 넣어 해석한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고로 여행하던 사람은 아담이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하늘 도성이다. 아담은 그 축복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여리고는 달을 의미하면서 인간의 도덕성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달은 만삭되었다가 반달이 되고 결국에는 이울고 마는 특징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담을 공격한 도적들은 마귀와 그의 졸개들이다. 저들이 아담을 때리고 옷을 벗긴 것은 그의 도덕성을 갈취하고 죄를 짓게 만든 것이다. 그들은 그를 거의 죽은 상태로 내어버리고 떠났다. 그를 도와주지 아니하고 그냥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은 구원을 가져오지 못하는 구약의 제사장과 사역자들이다. 사마리아인이란 말은 보호자란 뜻이 있다. 따라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자신을 일컫는 것이다. 상처를 싸매는 것은 죄를 덮음을 의미하고, 기름은 소망의 위로를 의미한다. 그리고 포도주는 열심히 일할 것에 대한 권고이다. 인간을 태운 짐승은 인간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의 성육을 믿음을 의미한다. 그 사람이 옮겨진 주막은 하늘 도성으로 돌아가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잠시 쉬게 하는 교회를 상징한다.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인이 여관 주인에게 준 동전 두 개는 이 생과 장차 오는 생에 대한 약속이거나 교회에 준 두 성례를 의미한다. 여관 주인은 사도 바울이다.『성경주석학』, 헤이즈. 할러데이 공저, 김근수역(도서 출판 나단, 1993), 27-28.

오리겐에 의하면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다. 따라서 성경에는 문자적인 의미를 초월한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봤다. 세상에 있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그림자로 본 것이다. 환언하면, 세상의 모든 것은 영적인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따라서, 문자적인 의미는 성경의 깊은 의미가 될 수 없으며 감추어진 allegoria(신령한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을 주석하면서 인간의 내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나 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FC, Vol.71, 63.


이것은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영적인 의미를 더 중요시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겐은 성경에서 문자적인 의미을 무시하지 않했다.
기독교를 반박한 셀수스에 반대(Against Celsus)에서 문자적인 의미의 중요성을 세 가지로 말했다. 첫째, 성경은 사실적이고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을 가지고 있다. 둘째, 단순한 문자적인 의미는 평신도의 신앙을 북돋운다. 셋째, 문자적인 의미는 변증적인 면이 있으며 성경을 공부하도록 돕는다. Dan G. McCartney, “Literal and Allegorical Interpretation in Origen's Contra Celsum,” W TJ, Vol.48 (1986), 281-301. Against Celsus, 3.43., 1.17; 18;27; 7.60), 288-8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겐에 의하면 성경은 풍유적으로 해석해야 하며, 성경의 텍스트에 숨겨있는 깊은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과 신비적인 연합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여기서 보는바와같이 풍유적인 성경 해석은 성경의 역사성을 무시하며 성경의 문맥에 없는 것을 삽입하여 문맥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영해함으로써 성경의 본뜻을 곡해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다.

V. Theoria(θεωρια)에 의한 성경 해석 논리

Theoria에 의한 성경해석 논리를 발전시킨 학파는 안디옥이라는 지명 이름을 따서 안디옥학파(The Antiochene School)라고 불리운다. 안디옥학파는 역사적 그리고 모형론적 해석학(Literal-historical and typological hermeneutics)으로 특성 지워진다.


안디옥은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최초로 이방인이 신자를 크리스천이라고 불렀던 곳이며 동방 제국의 수도였다. 안디옥학파에 의하면 성경의 주된 의미는 역사적인 의미 즉 문자적인 의미라고 믿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성경의 깊은 의미를 풍유적인 방법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안디옥학파는 성경의 깊은 의미는 theoria(θεωρια)에 의해서 얻어진다고 봤다. Theoria는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나 희랍어로 Theoria는 “보다” “관찰하다” “묵상하다(contemplate) ”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로서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사고나 논리적인 추론이라기 보다는 이미 소유한 지혜나 지식을 관조하는 통찰력(insight)을 의미한다. 확정되지 아니하고 변화하는 것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사변이나 논리적인 추론이 필요하지만 이미 확정되고 확고 부동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W.K.C. Guthrie, A history of Greek Philosophy, Vol.6 [Cambridge: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396).

여기서 Theoria는 관찰 혹은 통찰력이라는 말로서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기초로해서 영적인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성경은 구속사이다. 구속사이기 때문에 예언과 성취가 있고 그 가운데 모형과 원형이 있다. 가령, 가인은 회당을, 아벨은 교회를, 유월절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와같이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유지하면서 그 문자가 예표하는 깊은 영적 의미 즉 theoria을 찾는 방법이다.


안디옥학파의 선구자인 Diodore of Tarsus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경은 theoria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알레고리와 테오리아의 차이 (On the Difference between Theoria and Allegory/τιs διαφορα θεωρια και αλληγοριαs))라는 책을 썼지만 아리안 주의자들에 의해 불타서 없어졌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는 시편 주석 서문에서 안디옥의 Theoria를 이렇게 정의했다.

우리는 진리를 진리를 축소시키지 않고 역사적인 사실(historia)과 단순한 문자적인 의미(lexis)에 따라서 주석한다. 동시에 영적인 해석(anagogy)이나 차원 높은 theoria을 무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역사(historia)는 theoria에 반대되지 않는다. 오히려 theoria는 깊은 영적 의미의 기초요 근본이다. 그러나 한가지 사실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theoria는 역사적인 사실이 의미하는 것을 결코 무시하지 않은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문자적인 의미 이외에 다른 의미를 삽입해서 해석한다면 결국은 그것은 historia가 아니라 allegory가 되어 버린다. Biblical Interpretation in Early Church, Trans. & Edit. Karlfried Froehlich(Philadelphia:Fortress Press, 1984), 85. “We will not shrink from the truth but will expound it according ro the historical substance(historia) and the plain literal sense(lexis). At the same time, we will not disparage anagogy and the higher theoria. For history is not opposed to theoria. on the contrary, it proves to be the foundation and the basis of the higher senses. one thing is to be watched, however:theoria must never be understood as doing away with the underlying sense; it would then be no longer theoria but allegory.”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성경에서 문자적인 의미를 무시하는 것은 결국 풍유적 해석이 된다는 것이며, theoria라는 말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 속에 있는 깊은 영적인 의미를 찾게하는 통찰력 혹은 관찰을 의미한다. Frederic W. Farra, History of Interpretation, Reprinted 1961 by Baker Book House from the 1886 edition published by E. P. Dutton, 213, 각주 3번.

Diodore는 시편 118편 주석의 서문에서 성경 해석자는 historia, theoria, allegoria, tropologia, parabola를 잘 구별해야 한다고 했다. 계속해서 말하기를 성경은 알레고리에 대해서 언급하지만 그것의 적용은 말하지 않했다. 그 예가 갈라디아서 4:25 해석이다. 사도 바울도 알레고리라고 말했지만 그의 해석은 풍유적인 해석은 아니라 문자적인 해석이라고 했다.



Biblical Interpretaion in the Early Church, “The Greeks speaks of allegory when something is understood in one way but said in another. Since one or two examples must be mentioned for the sake of clarity, let me give an example. The Greeks say that Zeus, changing himself into a bull, seized Europa and carried her cross the sea to foreign places. This story is not understood as it reads but is taken to mean that Europa carried across the sea having borarded a ship with a bull as figurehead. A real bull could not possibly swim such a distance across the ocean This is allegory. Or another example: Zeus called Hera his sister and his wife. The pkain text implies that Zeus had intercourse with her sister Hera so that the same person was both his wife and his sister. This is what the letter suggests; but the Greek allegorize it to mean that, when ether, a fiery element, mingles with air, it produces a certain misture which inluences events on earth. Now, since air adjoins ether, the text calls these elements brother and sister because of their vicinity, but husband and wife because of their mixture. Of such kind are allegories of the Greeks.
Figuration(tropologia) is present when, in describing an event, the prophet turns words with an obvious menaing into an expanded illustration of what he is saying. The figuraative expression! is then clarified by the coontinuation of the text. For instance, David says of the people: “Yor(God) removed a vine from Egypt” (Ps. 79:9, LXX; then, having identified the people with the vine and leaving no doubt by adding, “You drove away the nations and transplanted it”; he continues describing the people as if he were speaking of vine. He mentions that the vine grew and unfolded its shoots(vv. 10-12); he asks “Why have you broken down its hedge so that all who pass by on their way pick its fruits”?(v.13) and then adds: “A wild boar from the thicket has laid it waste”(v.14). Now it is quite clear that this is a covert allusion to Antiochs Epiphanes who brought great harm upon the Maccabes, yet at the same time the prophet continues his figure; speaking of the people as a vine, he calls uses this figure oof the people, calling them a vineyard and saying: “My friend had a vineyard on the hillside on fertile ground. I surrounded it with a wall and friend it in”, and so on(Isa. 5:1-2). At the very end, clarifing th figuraative character of the account, or raaather of his prophecy, he adds: "For the vineyard of the Lord of host is the house of Israel, and the man of Judah but he acted lawlessly; instead of righteousness there was an outcry”(v.7). This is figuration(tropologia).
A parabolic expression! (parabole) is easy to recognize when it follows upon an introductory “like” or “as”. To give some examples: “Like water I am poured and all my bones are scattered”(Ps.21:15, LXX). Ofen however, Scripture speaks parabollically even without this introduction. It says, for instance: “You have made my arm a brazen bow”(Ps.17:35, LXX) instead of “like a brazen bow”; or:“And when Abraham looked up with his eyes, he saw three men,” In these cases, Scripture formulates parables by way of ellipsis, omiting th word “like”. Frequently, Scripture also calls a narrative or a teaching “parable,” for instance, when we read: “I will open my mouth in a parable, I will uter from th begining”(Ps.77:2, LXX). Here author's teaching, or at least the narrative, is called a parable. Actually, the parable itself may sometimes be called a “problem.” Thus, it is possible to speak of a problem as an “enigma”(enigmata): Samson proposed such a “problem” to the Philistinians--the Philistines are in fact the Palestinian--by saying: "Out of the eater came forth food and out of the string one came forth sweetness”Judg. 14:14).


History(historia) is the pure account of an actual event of the past. It is authentic if it is not interwoven with the speaker's reflections, extraneoous episodes, characteriazations or fictious speeches as is, for example, the story of Job”(87-91).

디오도레의 의해서 배운 두 사람이 Theodore of Mopsuestia와 John Chrysostom이다. Mopsuestia는 성경의 문법적인 구조를 중요시했으며 성경을 역사적 상황에서 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성과 문자적인 의미를 무시하고 theoria를 사용하는 것은 풍유적 해석을 초래하게 된다. 안디옥학파는 성경에서 문자적인 의미가 불가능할 때 모형론적으로 성경을 해석했다.


모형(type)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τυπος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으며 닮음(resemblance), 유사성(likeness), 비슷함(similarity)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모형론적인 해석은 구약을 해석하는데 사용된 방법으로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신약은 예언의 성취라는 상관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성경은 구속사로서 구약의 사건은 암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데 기초하고 있다.
안디옥학파의 대표자는 John Chrysostom이다. 그는 성경의 문자적, 역사적, 문법적 의미를 중요시했으며 성경은 하나님이 저자이시며 동시에 인간의 언어로 쓰여 있음을 중요시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플라톤의 이데아와 그림자의 형이상학적 세계 이해에 중점을 둔다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궁극적인 실제는 세상의 사실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사상에 영향을 받고 있다.


크리소스톰에 의하면, 성경에서 인간의 이해의 한계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를 볼 수 있다. 이것을 크릿소스톰은 synkatabasis(God's gracious acceptance of human limitations/astheneia)라고 한다. R.C. Hill에 의하면, 크리소스톰에게 있어서 “sunkatabasis is always a manifestation of the goodness(philanthropia) and providential care(kedemonia, pronoia) of God"라고 했다(Prudentia 13, 1981, 3-11). 여기서 sunkatabais는 sun+katabasis의 합성어로 함께 내려오심으로 번역할 수 있으며 한계성을 가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considerateness)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의 한계성을 고려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신 것이다. 따라서, 성경 언어는 정확(concrteness)하고 단순하다. FC, Vol. 74, 17-18 .
예를 들면 창세기 3장 Homily에서 “서늘할 때 그들이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서”(창3:8)에서 하나님이 동산에서 거니신다는 말은 인간의 발을 하나님으로 간주한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제하신 분이신대 어느 한정된 곳에 국한되고 가둘 수 있는 유한한 인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사랑에 의해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묘사함으로서 아담과 이브로 하여금 자기를 반성하고 죄를 깨닫도록 함에 있다. 사실 아담과 이브는 동산에 거니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러워서 나무 뒤에 숨었으며 벗은줄도 알게 되었다. The Fathers of the Church, A New Translation, Vol. 74 (Washington, D.C.: The Catholic University Press, 1986), Homily 17, 223-24.

크리소스톰은 알레고리칼 성경 해석은 올바르지 아니하며 신자를 잘못되게 이끈다고 말했다. 그는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실례는 잠언 5:17-19, 이샤야 8:7-8, 그리고 에스겔 17장으로 든다. 이들은 알레고리이지만 크리소스톰은 은유적으로 해석한다. 갈라디아서 4:22-24에서 사도 바울의 알레고리를 은유적으로 해석한다. “바울은 언어를 잘못 사용하여 예형(豫型)을 비유라고 하였다. 바울의 진의는 이것이다. 즉 역사 자체는 명백한 의미를 소유할 뿐 아니라 다른 것도 일러준다. 그래서 비유라고 불린다. 그러나 무엇을 일러주는가? 현존하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By a misue of language he[Paul] called the type allegory. What he means is this: the history itself not only has the apparent meaning but also proclaims other matters; therefore, it is called allegory. But what did it proclaim? Nothing other than everything that now is). John Chrysostom,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4.24.


그는 안디옥학파의 theoria를 예술과 비교해서 성경의 두 가지 의미(역사적.모형론적 의미)의 관계를 보여준다. “진리가 실현되기까지는 예형(豫型)에 진리라는 명칭을 준다. 그러나 진리가 성취되면 그 명칭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繪畵(회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예술가가 왕을 스케치하지만 그 위에 도색 되기 전에는 그 그림은 왕이 아니다. 그리고 그 위에 도색이 될 때 진리 때문에 그 型(형)이 감추어지며 다시는 보이지 않게 되며 그 때 비로소 우리들은 ‘이 왕을 보라‘하게 된다”(The type is given the name of the truth until the truth is about to come, but when the truth has come, the name is no longer used.. Similarly in the painting: An artist sketches a king, but until the colars are apllied he is not called a king; and when they are put on the type is hidden by the truth and is not visible; and then we say, 'Behold the King'). John Chrysostom, In Epist. ad Phil. Hom., 10.

왕에 대한 스케치와 왕의 초상화의 관계에서 스케치는 역사적 의미요 왕의 초상화는 theoria에 의해서 드러난 스케치의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상화의 최종적인 의미는 스케치와 초상화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크리소스톰은 성경은 분명하게 쓰여졌다고 봤다. 하나님이 저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의 명료성을 강조했으며 성경의 콘택스에 의한 문자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V. 정리

초대 교부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신구약의 진정한 의미라고 믿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신구약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핵심이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성경에는 두가지 의미--문자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를 적용하는 데는 교부들간에 서로 다른 점이 있지만 두 의미가 있다는 데는 의의가 없다.


이레니우스나 터툴리안은 믿음의 규범으로, 어거스틴은 사랑의 규범으로 올바른 성경 해석의 타당성을 이야기 했다. 어거스틴은 참으로 성경 해석에 있어서 언어의 중요성, 수사학, 경건한 생활의 필요성을 대단히 강조했다. 안디옥학파는 Theoria에 의해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allegoria에 의하여 성경의 영적인 의미를 ?고자 했다. 영적인 의미를 ?는데 있어서 방벙론적인 차이가 있다. Allegoria는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의 이면에 있는 천상의 의미를 ?고자 했다면 Theoria은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통해서 영적인 의미를 ?고자 했다. 성경의 풍유적인 해석은 성경의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기 때문에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풍유 자체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성경의 풍유에 담긴 깊은 영적인 의미를 문자를 기초로 해서 은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초대 교부둘이 올바른 성경 해석에 있어서 경건한 생활을 강조한 점을 우리도 깊이 배워야 할 것이다. 성경 해석은 세상적인 문서를 해석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적인 지식을 무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모든 학문은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 배우기 때문이다. 성령의 세레를 받느다면 세상적인 지식도 성경을 해석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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