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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 정체성 회복과 일치를 위한 현실적 제안 / 이승구교수

by 【고동엽】 2021. 11. 5.
한국장로교회 정체성 회복과 일치를 위한 현실적 제언

칼빈 출생 500주년을 기념하면서 모든 진정한 교회의 하나 됨을 강하게 주장하고, 그런 이해에 근거해서 (이 문제와 관련해서 수 없이 많이 인용된 바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던 칼빈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우리의 논의의 출발점을 위해 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일에 학식을 가진 자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대로 하지 않고 유보적으로 행동한다면, 자신들의 죄 많은 일들에 사로 잡혀서 전체 교회의 안전과 경건에는 무관심한 지도자들, 사적인 평안으로 개인적으로 만족하고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지도자들에게 가장 무거운 비난이 가해질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분리되어져 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필요하다면 나는 열개의 바다라고 해도 기꺼이 건널 것입니다.1


나는 언제나 말과 행동으로 내가 일치를 얼마나 열망하는 지를 증언하였습니다.2


교회의 일치를 워하던 칼빈의 마음, 그것을 위해 자신의 헌신을 다짐하는 칼빈의 마음을 잘 알도록 하는 이 편지의 어귀를 오해해서는 안 되기에 다시 칼빈의 글을 몇 가지 인용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전절에서 천주교회의 모습을 언급한 후에] 교황 제도(popery) 하의 상황이 이러하니, 거기에 교회가 얼마나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how much of the church remains there)? 말씀의 사역 대신에 거짓과 버무려진 애곡된 조직이 로마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여기에는 순수한 빛이 꺼져버렸고, 또 일부는 막아 버렸다. [천주교회에서는] 주의 만찬 대신에 추악한 신성 모독 행위(the foulest sacrilege)가 도입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견딜 수 없는 수많은 미신으로 퇴락하였다. 기독교는 진리의 가르침이 없이는 있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가르침은 완전히 매장되었고 제거되었다. 공식적 모임은 우상 숭배와 불경건의 학교가 되어 버렸다.3


그러므로 칼빈은 미사와 잘못된 천주교적 가르침이 있는 상태 그대로의 교회와는 연합하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제네바 교회의 청원에 따라서 사돌레 추기경(Cardinal Sadoret)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내가 말하는 교회의 일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자신들이 교회의 머리들이고 신앙의 기둥들이라고 떠벌리는 사람들과의 평화를 원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부인함으로써 그것을 달성할 수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4 그러므로 바르게 생각하는 이들은 누구나 칼빈이 말하는 교회의 일치가 성경적 진리에 동의하는 교회들의 일치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5
이와 같은 칼빈의 생각을 토대로 해서 나는 한국 장로교회의 현실적 분리와 일치 추구 문제와 관련해서 아주 현실적인 3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1) 우리 모두의 폭 넓은 교제의 장으로서의 한장총과 장로교 신학회의 의미, (2) 신정통주의적 입장의 지닌 교단들의 하나 됨을 위한 제언, (3) 정통주의적 개혁파 신학을 지닌 교단들의 하나 됨을 위한 제언.


1. 폭 넓은 교제의 장으로서의 한장총과 장로교 신학회의 의미


장로교회에 관한 한 한국장로교총연합회(이하 한장총)와 한국장로교신학회는 상당히 폭 넓은 교제의 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주 놀랍고 흥미롭게도 KNCC에 속해 있는 장로교 교단들과 한기총에 속해 있는 장로교 교단들이 모두 같이 한 장총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저 장로교 사람들의 이기주의를 표현하는 것이 되지 않으려면, 한장총에 속해 있는 모든 교단들은 자신들이 형식적으로나마 가지고 있는 공동의 신앙 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좀더 충실할 것이 요구된다. 기존의 모든 이들이 이에 충실한 노력을 한다면 이것은 한국 교회 안에서 이단 문제를 정리하는 데 큰 기여가 될 것이다. 장로교회에 관한 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그런 집단들은 모두 장로교회적 입장에서는 이단이라고 정의하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로 다른 교단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식으로 이를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수교 장로교회나 기독교 장로교회에 속해 있다고 하려면 적어도 공동의 신앙 고백서라고 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한장총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기여가 이 점에 있을 것이다. 즉, 관련되어 있는 장로 교단들이 모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한 장총의 책임과 기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따르려는가가 회원 교단이 되는 중요한 요건으로 명백히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충실하지 않은 교회들이나 개인들은 적어도 장로교회적이지 않다는 것이 명백히 선언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에 충실하면 장로교회라고 하면서도 사실은 이단적인 개인과 집단들을 명확히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관련해서 이 땅의 있는 모든 장로교회들이 다시 깊이 새겨야 할 몇 가지 요점만을 열거하면 다음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 가운데서 1항 마지막에 있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시던 과거의 방식들은 이제 중지되어 버렸다”는 진술과 6항 중에 진술된 “이 성경에다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 아니면 인간들의 전통에 의해서이든 아무 것도 어느 때를 막론하고 더 첨가할 수가 없다”는 말을 깊이 새겨야만 한다.6 이와 같은 노선에서 성경적인 개혁신학자들은 아주 온건한 형태의 예언 인정의 논의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박하여 왔다.7 이런 문제에 대한 좋은 개혁신학자의 한 사람인 로버트 레이몬드 교수의 강한 입장을 들어 보라: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예언자들과 방언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고 믿는 것은 그만큼 그가 성경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으로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오직 성경의 위대한 종교 개혁적 원리를 버려 버린 것이다.”8 그는 다른 개혁 신학자들과 함께 “신약 선지자들의 영감은 그쳐졌으므로, 선지자직도 그쳐졌고,” “선지자적 직임은 가르치는 직임 속으로 편입되어졌다”고 한다.9 한마디로 개혁파 신학에서는 오늘날에는 선지자(예언자)가 없고 성경에 의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여 온 것이다.10 물론 오순절파에서는 오늘날도 예언이 있다는 식의 주장을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계속 주장해 왔다. 그러므로 이 책의 주장은 정통파 교회, 적어도 장로 교회의 가르침과는 대척적인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로교 신학(개혁 신학)의 입장에서는 이 책의 주장을 비성경적이며 반성경적인 주장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에 다 어떤 계시의 내용을 더 하려고 하는 이런 주장은 그런 식의 잘못을 범하는 다른 이들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로, 우리들의 예배 문제에 있어서 웨스트민스터 정신이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개혁파 선배들은 그들이 진리로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보증이 있는 예배의 요소들만을 사용하고,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들은 모두 제거하고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예배의 방식과 요소들에 대해 하나님 말씀의 공인이 있어야만 한다”는 원칙에 충실했던 것이다.11 신학과 교리에서만이 아니라 예배에서도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덧붙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개혁파 선배들은 강조했다.12 예를 들어서, 칼빈은 “나는 성경에서 도출된 따라서 전적으로 신적인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한 인간의 제도들만을 시인할 뿐이다”고 말한다.13 그리고 벨직 신앙 고백서(1561)에서는 아주 분명히 천명하기를 교회의 치리자들은 “우리의 유일하신 선생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을 떠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인간적 창안물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사람들이 도입하여 그 어떤 방식으로든지 양심을 얽어매고 강요하는 것들 모든 법들을 거부한다”라고 하였다.14 또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1647) 제51문에서는 십계명 제 2계명과 관련해서 가장 직접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형상으로 써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외에도 “그의 말씀 가운데 정하지 아니한 어떤 다른 방법으로 예배하는 것”이 금해진 것이라고 단언하였던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은(westminster divines) 예배에 관한 문제를 양심의 자유의 문제로 파악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양심은 그 누구도 규제할 수 없고 오직 양심의 주님(Lord of conscience)이신 하나님께서 내신 법에만 매일 수 있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지 않으신 것을 행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51문에 대해 설명하면서 윌리암슨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를 두지 않은 것들이 종교적 가르침과 예배의 영역에 도입될 때마다 제 2계명을 위반하게 된다. 또한 성경에 기초를 두지 않은 예배가 오늘날 얼마나 성행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 수많은 개신교 교회들을 방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15 이렇게 선배들의 귀한 노력과 피흘려 세운 성경적 전통으로부터의 일탈을 다시 바로 잡기 위해 우리의 장로교 선배들이 예배를 위해 하여 온 노력들을 잠시 점검해 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기독교회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에 대해서도 우리는 주께서 규정하시고 제시해 주신 것을 존중하며 그것에 충실하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예배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와 통제에도 순종해야 한다는 말이다.
섯째로, 기도할 때에 소리내어 기도할 경우에는 알려진 언어로 해야 한다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조항에도 충실할 필요가 있다.16
그 외에도 행위언약과 은혜 언약 등 개념을 사용하면서 제시한 우리 선배들의 언약 신학적 이해에 한국 장로교회가 과연 충실한지를 다시 깊이 있게 물어야 한다. 이에 충실할 때 우리는 세대주의적 가르침에 휘둘지지 않고 우리 성도들을 참된 언약 공동체의 지체로 섬겨 갈 수 있는 것이다.


2. 신정통주의적 입장의 지닌 교단들의 하나 됨을 위한 제언


기장과 통합측은 그 들 안에 다른 목소리를 지닌 분들이 있지만 둘 다 기본적으로 신정통주의적 입장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려고 하고 있다. 그런 두 교단이 좀더 심각하게 하나됨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그들 밖에 있는 이들로서는 의아스러운 생각이 든다. 기장이 출발할 때부터 고전적 자유주의 보다는 신정통주의의 신학적 입장에 동의하면서 시작하였다는 점을 생각할 때(김재준과 김정준의 신학적 입장을 생각할 때), 그리고 지금도 오영석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분들이 이런 입장에서 신학적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이 분들이 왜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통합측과 좀더 심각한 일치를 향한 논의를 하지 않는가가 의아스럽다. 특히 외국에서 이 두 교단을 볼 때는 둘 다 상당히 바르트 사상에 동감을 보이는 이 두 교단이 현실적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매우 의아하게 볼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마도 그것은 신학적 이유 때문 보다는 교회 정치적 이유 때문에 나뉘어져 있다고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신정통주의적 입장에 상당히 동감하는 이 두 교단의 일치를 향한 심각한 논의를 요청한다.


3. 정통주의적 개혁신학을 표방하는 장로 교단들의 하나 됨을 위한 제언


이와 연관해서 매우 의식적으로 개혁파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를 주장하는 교단들이 진정한 하나 됨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제언을 하지 않을 수 없다.17 이들이 나뉘어져 있는 것은 그야 말로 정치적 이유 때문에 나뉘어져 있는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로교회라는 정치체제가 같고 지향하는 신학이 모두 개혁파 전통주의인데도 그런 교단들이 사분오열되어 있는 것은 외부에서 볼 때는 그야 말로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칼빈은 자신의 신학을 거의 그대로 지향하는 이 교회들이 나뉘어져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속한 각각의 교단들은 참으로 개혁파 전통신학에 충실하고, 그런 입장에서의 교회와 개인의 삶을 이루어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특히 교단 정치에 있어서 참으로 개혁파적인 원칙에 충실하려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중요한 것은 (1) 신학적으로 참으로 정통파 개혁신학에 충실하려는 노력이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 충실한지, 우리가 과연 성경적 사상에 충실하고 그 결과로 공교회의 신조에 충실한지, 언약 신학의 진전을 잘 이해하고 그에 근거한 언약 공동체 사상에 충실한지, 그리고 우리가 과연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 사상에 충실한지를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후에 (2) 교회 정치 문제에 있어서 개혁파 정통주의가 지향해온 장로교 사상에 충실하려는 노력이 나타나야 한다. 모든 직분자들의 평등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실천을 하고 있는지, 모든 사람들의 지혜를 물어 가는 그런 사상에 충실한 회의를 하고 있는지, 총회가 폐회됨과 함께 파회된다는 사상에 충실한지, 더 높은 기관은 있지 않고 더 많은 분들의 지혜를 모으는 확대 회의체에 대한 존중이 있는지를 묻고, 그런 노력을 더 해 나가야 한다. 그러한 개별적 노력 위에서 우리들의 가시적으로 하나 되려는 노력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이런 연합과 일치의 노력에서 우리는 참으로 기도하면서 조심스럽게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두 교단이 연합하여 결국 세 교단이 되는 전철를 되밟은 것이기 때문이다.


4. 결론: 결국은 사람이 문제이다.


이글을 마무리 하면서 결국은 사람이 문제라는 해 묵은 말을 다시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결국은 각자가 과연 성경과 하나님의 뜻과 성령님께 충실한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모든 교만이 제거되고, 우리의 욕심이 제거된 그 곳에서만 진정한 일치의 길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가 욕심을 가지고 있는 한 하나 됨은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 됨은 결국 진리 안에서의 하나 됨이다. 그러므로 모든 교단을 우선 하나로 만들고자 하는 형식주의적 발상은 결국 참된 교회의 말살과 질식을 낳을 것이다. 우리의 가시적 하나 됨보다는 진리 안에서의 영적 하나 됨이 우선한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 영적으로 하나 되어 성경의 가르침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충실한 분들은 결국 하나의 교회를 향해 나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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