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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성본회퍼 /허호익 교수

by 【고동엽】 2021. 10. 27.

세속성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리신 화해자. 이것은 먼저, 온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 신 없는, 하나님 없이 세상이 되어 버렸으며, 세상의 어떤 노력으로도 세상이 이 저주를 없앨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 세상의 세속성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일회적으로 그 표징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여전히 하나님과 세상의 화해의 십자가이므로, 하나님 없는 세상은 동시에 하나님의 자유한 행위로서의 화해의 표진 아래에 서 있다.

 

화해의 십자가는 하나님 없는 세상 한복판에서, 즉 철저한 세속성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유를 말한다. 화해의 십자가의 선포는 자유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 선포는 '그리스도교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 사이의 구분과 긴장과 갈등이 극복되었음을 선포하며, 이 화해 곧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 안에서 믿음을 가지고 전심으로 행동하며 살아가도록 우리를 불러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숭배하려는 헛된 시도들을 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선포를 통해서만 참된 세속성 안에 생명이 있을 수 있다.

 

즉 이 선포에 반대되는 것에 생명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속적인 것들이 어떤 가정된 자율성에 근거를 두고 그것과 나란히 하는 것에 생명이 있는 것오 아니다. 오히려 참된 세속적인 삶이 가능하고 실재라고 한 그리스도의 '그 선포 안에, 그 선포와 함께, 그 선포 아래에' 생명이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선포 없이는 혹은 그 선포에 맞서서는, 세상이 하나님 없는 것이며,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그 자신에게로 남겨졌음을 깨달을 수 없다. 오히려 세속적인 것은 신격화에 대한 자신의 억누를 수 없는 열명을 항상 충족시키고자 애쓸 것이다. 그리고 세속적인 것이 그리스도의 선포와 나란히 자신의 법을 설정하는 모든 곳에서, 그것이 완전히 스스로에게 희생되고 말며, 결국에는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놓게 될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세속적인 것은 세속적이기를 멈춘다. 세속적인 것은 자신에게로 된던져져서 세속적인 것을 원하지도 않고, 세속적으로 될 수도 없으며, 오히려 세속적인 것의 신격화를 거의 발작적으로 혹은 절망적으로 추구한다. 이러한 세속적인 삶의 결과는 거짓된 절반의 세속성, 내키지 않는 세속성으로 타락하는 것이다. 그것은 참되고 완전한 세속성을 추구하려는 자유와 용기가 결여되어 있으며,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실재로의 세상이 되도록, 즉 그 사진이 신 없음 속에서 하나님과 화해된 세상이 되도록 할 수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선포에 의해서만 참된 세속성이 있을 수 있다.

 

 

 

1943년 베를린에서 출한간 <윤리학> 가운데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계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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