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4:12~20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또는 내가 정당히 너희를 대접하므로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에게 자신이 전하 복음만이 진실한 것이다,하는 얘기를 하는 것이죠.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문제에 대하여 갈라디아교회에게 언성을 높이고 있는 중입니다. 17절에 나오는 지금 읽은 개역개정에서는 '그들이'로 되어있고 개역성경에는 '저희는' 으로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된다, 또는 하나님의 제대로된 백성이 되기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된다 하는식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외의 것을 요구하는 자들을 지금 통틀어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이 왜 문제인가를 지금 1장부터 길게 설명해오고 있는 중에 앞에서는 지금 이 복음은 사람이 만든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은혜로 주신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조건을 갖다 붙이는 것은 복음을 오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쫓아올라가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다 하는 것을 전에 얘기했죠. 1장 4절과 6절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1장 4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지금 성탄절이 코앞에 와 있습니다만 예수는 하늘로부터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지, 우리가 쫓아올라가 붙잡아 온 분이 아닙니다. 예수를 자꾸 증언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6절에도 보듯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그러죠. 3장 1절에서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여기서 도 온전하게 그 갈라디아교인들을 공박하는 근거는 은혜에 속한 것이냐 너희에 속한 자격과 조건에 속한 것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물론 이 문제는 늘 우리에게 혼돈을 불러일으키거나 미묘한 착오를 불어일으키곤 합니다. 신자답게 됐다는 것과 신자가되는 방법은 다르습니다. 전혀 은혜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때문에 우린 책임있게 신자 노릇을 해야 합니다. 이 둘은 혼돈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현실적으로 경험하다시피 자격이 없을 때에 그 자격없는 것을, 그 답지못한 것을 은혜를 입을 수없는 조건으로 지적하는 것은 늘 일어나는 우리안에서의 오해들입니다. 우리 스스로도 신자답게 살지못하며 나는 은혜받을 자격이 없고 하나님이 나를 외면했을 것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자신속에서 조건을 자꾸 확인하려는 그 본성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니까 이 문제는 확실히 해야할 것입니다.
오늘은 그 사도바울이 그런 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고 은혜에 속한 것이라는 얘기를 율법과 대비시켜서 설명하고 우리의 자격과 조건이전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의 선물이라는 얘기를 하던 중에 오늘 4장 12절이하에서는 이것이 어떻게 전 인격을 동원한 전 인격을 항복시킨 문제였었는가하고 갈라디아교인들의 심정에 호소하는 장면입니다.
온늘 본문12절에 보는바와 같이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라고 말머리를 시작하죠.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이 무슨 뜻일까요. 너희가 나라는 사람이 멋있고 위대해서 내말에 승복을 했거나 나라는 사람에 지지자가 되거나 행위된것이 아니지않느냐, 복음이 내 전인격을 통하여 너희에게 전달되고 증언된 것은 너희가 알지않느냐 이 얘기입니다. 너희가 내가 너희를 시험할 만한 것을 내 육체에 갖고 있었을 때에 너희가 날 왜 영접했느냐 나를 사람으로 보*지않고 천사로 너희가 인정하지않았느냐. 여기서말하는 천사는 그런 의미에서 외형적인 구비조건에서의 천사는 아니겠죠. 그 전달된 복음의 능력과 내용이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으로 저들이 사도바울을 복음의 사자로 이해했던 것을 저들에게 기억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오늘날에도 어느 교회에서나 반복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목사로 부름을 받고 목사로 사역을 한다는 것은 외형적으로 하나님께서 꼭 약점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너무 멋있고 너무 훌륭하면 혼돈하게 됩니다. 사람이 멋있는 것과 그가 전하는 것과 혼돈이 됩니다. 아 여러분 저도 늘 그런 마음에 잊지않고 갖고있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우리 교회에 모이고 내 설교를 듣는 것은 저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탓이지 내가 멋있어서나 혹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하는 것을 늘 확인합니다. 왜냐하면 아침마다 거울을 보거던요?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 그 성경에 나오는 보암직도하고 먹음직한 데가 없는데 이렇게 열심히 나와서 아멘 할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보통 뭐 도구로만 쓰거나 기계로만 쓰거나 무슨 스피커로만 쓰시지는 않습니다.
우리안에서 공명을 일으키시는 것 같습니다. 저도 전 인격을 걸고 생애를 걸고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저에게 맡기시고 저에게 항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의 깊이를, 영광을 제가 먼저 납득한 탓이죠. 하나님께서 그 공명으로 여러분들을 만나신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슨얘기를 하냐하면 20절에 보는바와같이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
사실 고함을 지른다는 그렇게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사람이 이렇게 자꾸 중요한 말을 할수록 무게를 가지고 싶고 영향을 미치고 싶어면 톤을 낮추하는 것 아닙니까. 예전에도 한번 인용했는데 모래시계에서 저를 가장 감동시켰던 대사, 고현정이 아버지에게 막 대드니까 '얘야 남에게 네 뜻을 전하고 싶거든 목소리를 낮추어라 ' 그러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모래시계가 가졌던 그 당시에 우리의 충격은 꽤 컸었습니다.그 이전에 드라마들하고 뭐가 달랐느냐하면 그게 사람들이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했거든요. 나오는 배우들이 우리나라 보통 그때까지의 드라마에서는 중요하고 꼭 필요할 때마다 언성을 높이고 인상을 써야 됐던데 비해서 그 드라마에서 그 처음으로 목소리를 낮추고 표정을 웃고 중요하고 무서운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 아마 제 기억으로는 그게 효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바울은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논리를 떠나서 그 마음에 넘쳐흐르는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함과 우리를 찾아오시고 허락하신 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작정하시고 우리를 흔드시는 복음의 뜨거움을 그가 참아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목소리를 높이겠다고 고함을 지름으로써 처음 갈라디아교인들이 사도바울을 만났을 때 복음이 어떤 위력으로 저들의 영혼을 흔들었는가 저들의 인격 전체를 흔들었는가를 이제 비교하는 17절에 있었던 그들이 혹은 저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내는 것과 비교해보라 하는 것과 만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서 우리가 가장 쉽게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들이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지금 우리가 증거하려는 이 내용에 앞서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단에 빠진 이들의 가장 큰 약점은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고 보통 인간의 성정으로는 갈 수없는 그것은 발을 디디고 가는 자리가 아니고, 어떻게 날라간 자리같은데에 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신비와 복음의 능력을 논할지라도 우리가 육체안에 있고 아! 마음에 땀과 피가 있는 사람으로써의 자리를 놓치지않는 건전함이야말로 기독교신앙을 분별하는 중요한 잣대입니다. 우리가 울고 웃고 하는것은 사람이 가지는 실제적인 진심을 표현하는 최고의 수단입니다.
그걸 넘어서서 멋있게 말을 다하고 웃고 다안다는듯이 이렇게 눈을 가늘게 뜨고 ,,그렇게 안됩니다.
전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의 목소리를 표현하는 것, 그가 목소리를 높이고 싶다라고 외치는 그 그 끓어오르는 거룩한 분노라고 얘기할 수있고, 거룩한 진심이라고 할 수있는 이 심정을 말하자면 목사가 당연히 가져야되고 신자가 가져야된다 그렇게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면하기위하여 기독교를 전하거나 기독교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환경과 조건속에서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을 붙잡는 것 이외의 것과 바꿀수 없다라고 우리의 현실을 바치는 사람들로써 신앙을 사는 사람들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부림이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소원하는 것만큼 우리가 다하지 못하는 몸부림이 있죠!
우리의 진실은 찬송과 환희와 그런 예배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눈물과 한숨과 절망 절규로도 나타나는 것이며, 우리가 누구에게 기독교를 전하고 믿음을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도 우리가 더 이상 설명할 수없는 가슴을 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진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히얀하게 사도바울의 생애를 보면 그에게 이렇게 언제나 사단의 가시를 주어서 그가 맡은 일의 중요함과 그 짝할 수없는 유일한 진리를 전하는 사도에게 오히려 방해가 되는 일 장애가 되는 일, 짐으로 준 일들로 그의 생애를 채웠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듯이 우리가 약할 때 그리스도께서 강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고후12장 7절이하의 말씀입니다.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1)머물게 하려 함이라 헬, 장막으로 덮게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
우린 돌이켜 이렇게 얘기할 수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세운 교회 사도바울이 가르친 성도들은 한번 가르침을 받고 그다음엔 다시 흔들리지않았다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사도바울쯤 되는 사람이 증언하고 목숨을 걸고 세우고 가르친 성도들도 흔들리고 심지어 사도바울 자신에 대하여 의심을 갖게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는 것들이 고린도전서 전후나 이 갈라디아서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 진리 맡겨진 복음의 위대함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의 전 생애에 걸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자신을 이 자리에 놓았다하고 고백하는데 그것이 우리 잘 아는바대로 그가 히브리인중에 히브리인이고 할례를 받고 바리세인이고 로마시민권자이고 하는 모든 세상적인 준비에서 다른 사람만 못지않은 그의 구비조건들 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보다 다른 많은 것들, 그가 더많이 옥에 갖히고 그가 더많이 핍박을 당하고 그가 더많이 오해를 받고 육체에 가시가 있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실패한 일들이야말로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쓰신 일이요 그를 사용하시는 방법이요, 그에게서 요구하는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멋진말 멋진 능력 멋진 결과보다 중요하게 바울의 이 언성을 높이는 이 안타까움과 비명 절규를 요구하고 계시다는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죠. 그래서 이 고린도후서 11장에 보시면, 23장 이하의 여러분 잘 아시는 사도바울의 생애에 걸친 여러 난관들을 그가 겪었던 곤란들을 나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나 이렇게 고생했다 나 너희들 때문에 이렇게 고생했다가 아니라 이 고생한 것이 내가 사도인 증거다 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23절에 다시 보시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자기를 반대하던 자도 오늘 가라디아서로 비교를 하자면 바울이 전한 이 복음 이외의 것을 전하게 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고하더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다 나는 진짜다 뭘로 아느냐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하여, 라고 뒤에 나열한 모든 것들이 사도된 증거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되면 더 능력있고 더 효과가 있고 더 결과가 있고 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가 이 세상에서 형통하고 이 세상에서 좀더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앞에 더많이 쓰여질 것이라는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울고 한숨쉬라 거럽니다. 그걸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열한 내가 사도이고 그리스도 일꾼인 것이 맞다의 맨 마지막 증거가 뭐냐하면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3)애타지 아니하더냐 헬, 타지 않더냐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그러니까 내가 사도인 증거가 뭐냐하면 그가 얼마나 큰 일을 했는가 그로 말미암아 어떻게 큰 일이 일어나는가 심지어 사도바울에게서 손수건을 빌려다가 병자에게 놓아도 낳았었다구요. 그러나 그것만이 사도 직분의 증거가 아니라 걱정하는 거라 걱정한다는게 뭐죠? 해결이 안되는 거죠 사도바울쯤 돼도 그가 소원하는 것들이 해결이 안되어서 걱정하고 애타해야됐던 것들이 있더라는거라니까요. 그래서 그가 뭘 자랑하느냐 한번 볼까요.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는 데 그 약한 것중에 하나를 이걸 예를 듭니다.
'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33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이게 뭐 자랑거리겠어요? 광주리타고 도망간 게 참으로 비겁할 수있고 못났을 수있고 하나님의 종으로써 위대하고 능력있는 자가 아니죠. 예를 들자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거둔 승리하고 비교할 수가없죠. 그러나 왜 이걸 나열하고 있죠?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셔요.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과 한숨속에서 일하시고 우리의 뒤쳐진 것같고 실패한 것같고 삼켜진 것같은 데서 일하신다고 바울이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때 뒤로 뒤로 물러서지 마시라고요. 쓰임받고 있다는거을 아시라고요.
저는 한동안 여러분들을 신앙적으로 책임있게 하기위해서 대통령을 위한 기도에 대해서 대단히 시비를 걸은 사람입니다. 대통령이 예수 잘 믿어서 나라 잘 다스려가지고 날 걱정없게 살게 해 주십시요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을 많이 뭐라고 했었죠. 요즘와서는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합니다. 정치적으로 듣지마세요. 나이가 드니까 큰 틀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생각이 더 납니다. 나 하나 잘 하는 것보다 사회가 안정되고 사회가 안정되어서 국가가 얼마나 중요한가 까 정치하는 사람들이 잘 했으면 좋겠다가 책임을 떠넘기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어른으로써 손주를 본 사람으로써 저절로 생기더라는 겁니다. 저절로 그 누가 가슴아픈 사연속에 있는 분이와서 자기 삶의 고통을 논하던 중에 그래도 그래도 자기가 최악은 아니래요. 그래서 최악이 뭐냐 그랬더니 전쟁이래요. 전쟁난 것, 가끔 뉴스에서 무슨 이라크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난 것보면 그건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정말 최악이죠. 그것보다 아직 자기가 낫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보니까 우리가 걱정하고 우리가 애타하는 것들은 참으로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걱정하고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다만 나만 나 편하자고 내 책임을 누구 책임자에게 떠 넘기는식의 기도가 아니라 알고 보니까 내가 누구하나를 돌려놓을 수없고 누구하나를 변화시킬 수없지만 내가 안타까워하고 내가 속상해하고 내가 기도하는 것이 그게 큰 일이더라고요. 우리가 아는 사도바울의 위대함 우리가 아는 엘리야의 위대함에 그것이 절반이더라고요. 절반은 우리가 좋아하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은 나타나는 일들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이상으로 감추어지고 지는 것같고 걱정하고 마는 도무지 아무것도 없는 유냐무냐하는 상태에 있는 것속에서 일을 하시더라- 사도바울의 고백이죠.
아까 우리가 12장에서 봤던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사도바울 보고 가시 빼달라 그러지 말래요. 안 빼주셨다고요. 아 그러니 오늘 저녁에 사도바울이 갈라디아교인들에게 하는 얘기속에서 우리가 무슨 결론에 도달하죠? 바울이 갈라디아교회교인들에게 가지는 열심, 그 교인들이 자신에게 눈이라도 빼어 줬을 것같고 사도바울도 물론 목숨이라도 줄 각오로 갈라디아교회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중간까지 좋았던 그 잘되었던 일들이 지금 결과에 와서 의심이 생긴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단계에 왔습니다. 사도바울이 할 수있는 일은 언성을 높이는 일 밖에 없습니다. 비명을 지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수가 있느냐고 가슴을 찢는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건강하고 여러 기적을 이루면서 등장하여 일하는 것 이상으로 이렇게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시도 바울의 생애를 조명하고 그리고 우리에게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아무일도 못한다고 능력이 없다고 쓸모없다고 누가 나를 기억하겠냐고 생각하실 때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쓰고 계신다고 기억하셔야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통하여 일하시며 여러분의 안타까움과 여러분의 무력해보이는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셔야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이 저 마게도냐를 향해가고 배를 타고가고 풍랑을 만나고 가이사앞에까지 기어코 간 모든 전도여행들과 방불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네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라는 약속인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생애와 존재와 여러분 삶의 조건들을 하나님께서 쓰시는 줄을 아는 오늘의 이 바울의 고백이요 성경의 증언이요 하나님의 약속인 줄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여러분을 얕보*지못하게 하십시요. 여러분 스스로가 여러분 생애와 존재와 예수 믿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복음의 비밀들을 여러분안에 붙잡고 씨름하며 안타까워하며 괴로워하며 한숨쉬며 기도하며 나아가 하나님께서 이루신 그 모든 역사가 사도바울이라는 이름과 방불한 이름으로 그러나 우리의 이름은 아무도 모르는 이름으로 되었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속에서는 동일한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로 쓰여지고 있다는 걸 기억하시는 오늘의 말씀 여려분들의 생애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이요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또 다른 영혼을 찾아가시는 하나님의 자녀된 마당에 이 세상에 어떤 것도 하나님을 막거나 방해할 수 없음을 선언합니다. 우리의 약한 것 우리의 미련한 것 으리의 어리섞은 것 게으런 것까지도 하나님 우리가 약할 그때에 하나님이 강하시다는 사실앞에 내려놓습니다. 으리가 우리를 부끄러워하며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하며 뒤로 물러갔던 것들 이제 내려놓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속에 우리의 생애를 맡겨 나하나 서있는 자리 내가 만나는 한 영혼 내가 하는 한마디의 말 내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능력의 능력이 찾아오심이라 아는 신앙인으로 충성하게 하시옵소서. 나를 통하여 일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이나라되고 이시대 되고 우리의 자손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출처 : 자료바구니(기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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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또는 내가 정당히 너희를 대접하므로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에게 자신이 전하 복음만이 진실한 것이다,하는 얘기를 하는 것이죠.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문제에 대하여 갈라디아교회에게 언성을 높이고 있는 중입니다. 17절에 나오는 지금 읽은 개역개정에서는 '그들이'로 되어있고 개역성경에는 '저희는' 으로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된다, 또는 하나님의 제대로된 백성이 되기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된다 하는식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외의 것을 요구하는 자들을 지금 통틀어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이 왜 문제인가를 지금 1장부터 길게 설명해오고 있는 중에 앞에서는 지금 이 복음은 사람이 만든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은혜로 주신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조건을 갖다 붙이는 것은 복음을 오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쫓아올라가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다 하는 것을 전에 얘기했죠. 1장 4절과 6절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1장 4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지금 성탄절이 코앞에 와 있습니다만 예수는 하늘로부터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지, 우리가 쫓아올라가 붙잡아 온 분이 아닙니다. 예수를 자꾸 증언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6절에도 보듯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그러죠. 3장 1절에서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여기서 도 온전하게 그 갈라디아교인들을 공박하는 근거는 은혜에 속한 것이냐 너희에 속한 자격과 조건에 속한 것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물론 이 문제는 늘 우리에게 혼돈을 불러일으키거나 미묘한 착오를 불어일으키곤 합니다. 신자답게 됐다는 것과 신자가되는 방법은 다르습니다. 전혀 은혜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때문에 우린 책임있게 신자 노릇을 해야 합니다. 이 둘은 혼돈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현실적으로 경험하다시피 자격이 없을 때에 그 자격없는 것을, 그 답지못한 것을 은혜를 입을 수없는 조건으로 지적하는 것은 늘 일어나는 우리안에서의 오해들입니다. 우리 스스로도 신자답게 살지못하며 나는 은혜받을 자격이 없고 하나님이 나를 외면했을 것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자신속에서 조건을 자꾸 확인하려는 그 본성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니까 이 문제는 확실히 해야할 것입니다.
오늘은 그 사도바울이 그런 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고 은혜에 속한 것이라는 얘기를 율법과 대비시켜서 설명하고 우리의 자격과 조건이전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의 선물이라는 얘기를 하던 중에 오늘 4장 12절이하에서는 이것이 어떻게 전 인격을 동원한 전 인격을 항복시킨 문제였었는가하고 갈라디아교인들의 심정에 호소하는 장면입니다.
온늘 본문12절에 보는바와 같이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라고 말머리를 시작하죠.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이 무슨 뜻일까요. 너희가 나라는 사람이 멋있고 위대해서 내말에 승복을 했거나 나라는 사람에 지지자가 되거나 행위된것이 아니지않느냐, 복음이 내 전인격을 통하여 너희에게 전달되고 증언된 것은 너희가 알지않느냐 이 얘기입니다. 너희가 내가 너희를 시험할 만한 것을 내 육체에 갖고 있었을 때에 너희가 날 왜 영접했느냐 나를 사람으로 보*지않고 천사로 너희가 인정하지않았느냐. 여기서말하는 천사는 그런 의미에서 외형적인 구비조건에서의 천사는 아니겠죠. 그 전달된 복음의 능력과 내용이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으로 저들이 사도바울을 복음의 사자로 이해했던 것을 저들에게 기억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오늘날에도 어느 교회에서나 반복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목사로 부름을 받고 목사로 사역을 한다는 것은 외형적으로 하나님께서 꼭 약점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너무 멋있고 너무 훌륭하면 혼돈하게 됩니다. 사람이 멋있는 것과 그가 전하는 것과 혼돈이 됩니다. 아 여러분 저도 늘 그런 마음에 잊지않고 갖고있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우리 교회에 모이고 내 설교를 듣는 것은 저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탓이지 내가 멋있어서나 혹은 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하는 것을 늘 확인합니다. 왜냐하면 아침마다 거울을 보거던요?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 그 성경에 나오는 보암직도하고 먹음직한 데가 없는데 이렇게 열심히 나와서 아멘 할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보통 뭐 도구로만 쓰거나 기계로만 쓰거나 무슨 스피커로만 쓰시지는 않습니다.
우리안에서 공명을 일으키시는 것 같습니다. 저도 전 인격을 걸고 생애를 걸고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저에게 맡기시고 저에게 항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의 깊이를, 영광을 제가 먼저 납득한 탓이죠. 하나님께서 그 공명으로 여러분들을 만나신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슨얘기를 하냐하면 20절에 보는바와같이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
사실 고함을 지른다는 그렇게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사람이 이렇게 자꾸 중요한 말을 할수록 무게를 가지고 싶고 영향을 미치고 싶어면 톤을 낮추하는 것 아닙니까. 예전에도 한번 인용했는데 모래시계에서 저를 가장 감동시켰던 대사, 고현정이 아버지에게 막 대드니까 '얘야 남에게 네 뜻을 전하고 싶거든 목소리를 낮추어라 ' 그러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모래시계가 가졌던 그 당시에 우리의 충격은 꽤 컸었습니다.그 이전에 드라마들하고 뭐가 달랐느냐하면 그게 사람들이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했거든요. 나오는 배우들이 우리나라 보통 그때까지의 드라마에서는 중요하고 꼭 필요할 때마다 언성을 높이고 인상을 써야 됐던데 비해서 그 드라마에서 그 처음으로 목소리를 낮추고 표정을 웃고 중요하고 무서운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 아마 제 기억으로는 그게 효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바울은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논리를 떠나서 그 마음에 넘쳐흐르는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함과 우리를 찾아오시고 허락하신 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작정하시고 우리를 흔드시는 복음의 뜨거움을 그가 참아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목소리를 높이겠다고 고함을 지름으로써 처음 갈라디아교인들이 사도바울을 만났을 때 복음이 어떤 위력으로 저들의 영혼을 흔들었는가 저들의 인격 전체를 흔들었는가를 이제 비교하는 17절에 있었던 그들이 혹은 저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내는 것과 비교해보라 하는 것과 만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서 우리가 가장 쉽게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만나면 그 사람들이 대단한 열심을 가지고 지금 우리가 증거하려는 이 내용에 앞서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단에 빠진 이들의 가장 큰 약점은 상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고 보통 인간의 성정으로는 갈 수없는 그것은 발을 디디고 가는 자리가 아니고, 어떻게 날라간 자리같은데에 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신비와 복음의 능력을 논할지라도 우리가 육체안에 있고 아! 마음에 땀과 피가 있는 사람으로써의 자리를 놓치지않는 건전함이야말로 기독교신앙을 분별하는 중요한 잣대입니다. 우리가 울고 웃고 하는것은 사람이 가지는 실제적인 진심을 표현하는 최고의 수단입니다.
그걸 넘어서서 멋있게 말을 다하고 웃고 다안다는듯이 이렇게 눈을 가늘게 뜨고 ,,그렇게 안됩니다.
전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의 목소리를 표현하는 것, 그가 목소리를 높이고 싶다라고 외치는 그 그 끓어오르는 거룩한 분노라고 얘기할 수있고, 거룩한 진심이라고 할 수있는 이 심정을 말하자면 목사가 당연히 가져야되고 신자가 가져야된다 그렇게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면하기위하여 기독교를 전하거나 기독교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환경과 조건속에서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을 붙잡는 것 이외의 것과 바꿀수 없다라고 우리의 현실을 바치는 사람들로써 신앙을 사는 사람들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부림이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소원하는 것만큼 우리가 다하지 못하는 몸부림이 있죠!
우리의 진실은 찬송과 환희와 그런 예배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눈물과 한숨과 절망 절규로도 나타나는 것이며, 우리가 누구에게 기독교를 전하고 믿음을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도 우리가 더 이상 설명할 수없는 가슴을 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진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히얀하게 사도바울의 생애를 보면 그에게 이렇게 언제나 사단의 가시를 주어서 그가 맡은 일의 중요함과 그 짝할 수없는 유일한 진리를 전하는 사도에게 오히려 방해가 되는 일 장애가 되는 일, 짐으로 준 일들로 그의 생애를 채웠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듯이 우리가 약할 때 그리스도께서 강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고후12장 7절이하의 말씀입니다.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1)머물게 하려 함이라 헬, 장막으로 덮게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
우린 돌이켜 이렇게 얘기할 수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세운 교회 사도바울이 가르친 성도들은 한번 가르침을 받고 그다음엔 다시 흔들리지않았다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사도바울쯤 되는 사람이 증언하고 목숨을 걸고 세우고 가르친 성도들도 흔들리고 심지어 사도바울 자신에 대하여 의심을 갖게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는 것들이 고린도전서 전후나 이 갈라디아서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 진리 맡겨진 복음의 위대함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그의 전 생애에 걸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자신을 이 자리에 놓았다하고 고백하는데 그것이 우리 잘 아는바대로 그가 히브리인중에 히브리인이고 할례를 받고 바리세인이고 로마시민권자이고 하는 모든 세상적인 준비에서 다른 사람만 못지않은 그의 구비조건들 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보다 다른 많은 것들, 그가 더많이 옥에 갖히고 그가 더많이 핍박을 당하고 그가 더많이 오해를 받고 육체에 가시가 있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실패한 일들이야말로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쓰신 일이요 그를 사용하시는 방법이요, 그에게서 요구하는 것이라 하는 것입니다.
멋진말 멋진 능력 멋진 결과보다 중요하게 바울의 이 언성을 높이는 이 안타까움과 비명 절규를 요구하고 계시다는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죠. 그래서 이 고린도후서 11장에 보시면, 23장 이하의 여러분 잘 아시는 사도바울의 생애에 걸친 여러 난관들을 그가 겪었던 곤란들을 나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나 이렇게 고생했다 나 너희들 때문에 이렇게 고생했다가 아니라 이 고생한 것이 내가 사도인 증거다 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23절에 다시 보시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자기를 반대하던 자도 오늘 가라디아서로 비교를 하자면 바울이 전한 이 복음 이외의 것을 전하게 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고하더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다 나는 진짜다 뭘로 아느냐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하여, 라고 뒤에 나열한 모든 것들이 사도된 증거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되면 더 능력있고 더 효과가 있고 더 결과가 있고 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가 이 세상에서 형통하고 이 세상에서 좀더 여유가 있으면 하나님앞에 더많이 쓰여질 것이라는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울고 한숨쉬라 거럽니다. 그걸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열한 내가 사도이고 그리스도 일꾼인 것이 맞다의 맨 마지막 증거가 뭐냐하면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3)애타지 아니하더냐 헬, 타지 않더냐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그러니까 내가 사도인 증거가 뭐냐하면 그가 얼마나 큰 일을 했는가 그로 말미암아 어떻게 큰 일이 일어나는가 심지어 사도바울에게서 손수건을 빌려다가 병자에게 놓아도 낳았었다구요. 그러나 그것만이 사도 직분의 증거가 아니라 걱정하는 거라 걱정한다는게 뭐죠? 해결이 안되는 거죠 사도바울쯤 돼도 그가 소원하는 것들이 해결이 안되어서 걱정하고 애타해야됐던 것들이 있더라는거라니까요. 그래서 그가 뭘 자랑하느냐 한번 볼까요.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는 데 그 약한 것중에 하나를 이걸 예를 듭니다.
'31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33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이게 뭐 자랑거리겠어요? 광주리타고 도망간 게 참으로 비겁할 수있고 못났을 수있고 하나님의 종으로써 위대하고 능력있는 자가 아니죠. 예를 들자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거둔 승리하고 비교할 수가없죠. 그러나 왜 이걸 나열하고 있죠?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셔요.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과 한숨속에서 일하시고 우리의 뒤쳐진 것같고 실패한 것같고 삼켜진 것같은 데서 일하신다고 바울이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때 뒤로 뒤로 물러서지 마시라고요. 쓰임받고 있다는거을 아시라고요.
저는 한동안 여러분들을 신앙적으로 책임있게 하기위해서 대통령을 위한 기도에 대해서 대단히 시비를 걸은 사람입니다. 대통령이 예수 잘 믿어서 나라 잘 다스려가지고 날 걱정없게 살게 해 주십시요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것을 많이 뭐라고 했었죠. 요즘와서는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합니다. 정치적으로 듣지마세요. 나이가 드니까 큰 틀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생각이 더 납니다. 나 하나 잘 하는 것보다 사회가 안정되고 사회가 안정되어서 국가가 얼마나 중요한가 까 정치하는 사람들이 잘 했으면 좋겠다가 책임을 떠넘기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어른으로써 손주를 본 사람으로써 저절로 생기더라는 겁니다. 저절로 그 누가 가슴아픈 사연속에 있는 분이와서 자기 삶의 고통을 논하던 중에 그래도 그래도 자기가 최악은 아니래요. 그래서 최악이 뭐냐 그랬더니 전쟁이래요. 전쟁난 것, 가끔 뉴스에서 무슨 이라크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난 것보면 그건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정말 최악이죠. 그것보다 아직 자기가 낫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보니까 우리가 걱정하고 우리가 애타하는 것들은 참으로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걱정하고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다만 나만 나 편하자고 내 책임을 누구 책임자에게 떠 넘기는식의 기도가 아니라 알고 보니까 내가 누구하나를 돌려놓을 수없고 누구하나를 변화시킬 수없지만 내가 안타까워하고 내가 속상해하고 내가 기도하는 것이 그게 큰 일이더라고요. 우리가 아는 사도바울의 위대함 우리가 아는 엘리야의 위대함에 그것이 절반이더라고요. 절반은 우리가 좋아하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은 나타나는 일들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이상으로 감추어지고 지는 것같고 걱정하고 마는 도무지 아무것도 없는 유냐무냐하는 상태에 있는 것속에서 일을 하시더라- 사도바울의 고백이죠.
아까 우리가 12장에서 봤던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사도바울 보고 가시 빼달라 그러지 말래요. 안 빼주셨다고요. 아 그러니 오늘 저녁에 사도바울이 갈라디아교인들에게 하는 얘기속에서 우리가 무슨 결론에 도달하죠? 바울이 갈라디아교회교인들에게 가지는 열심, 그 교인들이 자신에게 눈이라도 빼어 줬을 것같고 사도바울도 물론 목숨이라도 줄 각오로 갈라디아교회로 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중간까지 좋았던 그 잘되었던 일들이 지금 결과에 와서 의심이 생긴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단계에 왔습니다. 사도바울이 할 수있는 일은 언성을 높이는 일 밖에 없습니다. 비명을 지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수가 있느냐고 가슴을 찢는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건강하고 여러 기적을 이루면서 등장하여 일하는 것 이상으로 이렇게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시도 바울의 생애를 조명하고 그리고 우리에게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아무일도 못한다고 능력이 없다고 쓸모없다고 누가 나를 기억하겠냐고 생각하실 때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쓰고 계신다고 기억하셔야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통하여 일하시며 여러분의 안타까움과 여러분의 무력해보이는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셔야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입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이 저 마게도냐를 향해가고 배를 타고가고 풍랑을 만나고 가이사앞에까지 기어코 간 모든 전도여행들과 방불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네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라는 약속인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생애와 존재와 여러분 삶의 조건들을 하나님께서 쓰시는 줄을 아는 오늘의 이 바울의 고백이요 성경의 증언이요 하나님의 약속인 줄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여러분을 얕보*지못하게 하십시요. 여러분 스스로가 여러분 생애와 존재와 예수 믿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복음의 비밀들을 여러분안에 붙잡고 씨름하며 안타까워하며 괴로워하며 한숨쉬며 기도하며 나아가 하나님께서 이루신 그 모든 역사가 사도바울이라는 이름과 방불한 이름으로 그러나 우리의 이름은 아무도 모르는 이름으로 되었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속에서는 동일한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로 쓰여지고 있다는 걸 기억하시는 오늘의 말씀 여려분들의 생애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이요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또 다른 영혼을 찾아가시는 하나님의 자녀된 마당에 이 세상에 어떤 것도 하나님을 막거나 방해할 수 없음을 선언합니다. 우리의 약한 것 우리의 미련한 것 으리의 어리섞은 것 게으런 것까지도 하나님 우리가 약할 그때에 하나님이 강하시다는 사실앞에 내려놓습니다. 으리가 우리를 부끄러워하며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하며 뒤로 물러갔던 것들 이제 내려놓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속에 우리의 생애를 맡겨 나하나 서있는 자리 내가 만나는 한 영혼 내가 하는 한마디의 말 내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능력의 능력이 찾아오심이라 아는 신앙인으로 충성하게 하시옵소서. 나를 통하여 일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이나라되고 이시대 되고 우리의 자손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출처 : 자료바구니(기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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