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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에서 본 `성육신의 주체와 내용`

by 【고동엽】 2021. 12. 18.
열왕기 35 / 왕하 12:1-7 / 2009.11.29 / 개역개정판

1 예후의 제칠년에 요아스가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간 통치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시비아라 브엘세바 사람이더라
2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
3 다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
4 요아스가 제사장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성전에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모든 은 곧 사람이 통용하는 은이나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이나 자원하여 여호와의 성전에 드리는 모든 은을
5 제사장들이 각각 아는 자에게서 받아들여 성전의 어느 곳이든지 파손된 것을 보거든 그것으로 수리하라 하였으나
6 요아스 왕 제이십삼년에 이르도록 제사장들이 성전의 파손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는지라
7 요아스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성전의 파손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제부터는 너희가 아는 사람에게서 은을 받지 말고 그들이 성전의 파손한 데를 위하여 드리게 하라


요아스는 남왕국 유다의 왕입니다. 그의 아버지 아하시야가 북왕국 이스라엘의 장군이었던 예후에 반역되어 함께 죽습니다.
그때에 할머니되는 아달랴가, 예후가 바알신당을 훼파하고 바알신 섬기는 것을 다 제거하는 것을 보고 아하시야의 자손들을 전부 죽이고 나중에 보시면 그 바알신당을 재건하고, 섭정을 하여 정치권력을 틀어쥡니다.
요시아는 그 죽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납니다. 그의 고모가 살려내죠. 그래서 7살에 왕위에 올라서 40년간 통치를 합니다. 극적으로 목숨을 구하고 제사장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왕위에 복귀하고 아달랴를 제거하고 그 왕권을 되찾은 셈이죠.
그래서 오늘 우리 본문에서 본 바와같이 12장 2절에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 고 하는 대로 대표적으로 성전을 준수하고 보수하는 일에 진력한 것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시행하려고 애를 썼는가, 를 이렇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여호야다 제사장이 죽자, 다른 유다 방백들의 강권과 요구에 타협해서 아세라 우상을 섬기게되고 그일로 결국은 심판을 받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아람와 하사엘이 쳐들어 왔을 때, 나가 싸우다 중상을 입고 심복들의 배반으로 인하여 무참하게 죽습니다.
그러니까 열왕기의 평가는 결국 하나님 눈밖에 나와서 좋지않은 결과로 인생을 끝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요아스의 문제를 이렇게 길게나마 설명하는 이유는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요아스의 인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왕의 인생을 논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느부분에서는 신자답게 살기도 했다 얘기할 수도 있고, 신자답기 위해서 애도 쓰고.. 그게 신앙인들의 현주소죠.
그러나 잘한것보다 못한게 더 많다고 늘 자책할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이 신자들의 현실일 것입니다.
너무 이런 부정적인 측면을 들추어서 죄송하지만 이 문제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현실이 스스로 점검해 보아도 만족치 못하다,, 하나님앞에 벌받아 싸다, 라는 생각이 자꾸드는 것은 사실 우리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영위케 하고 연장케 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냐, 라는 문제를 계속 확인하고 물어보게 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로마서 8장에 보시면, 보기보다 이 요아서의 인생을 우리가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 하는 성경의 아주 중요한 선언이 나옵니다.
로마서 8장 35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다시 말하면,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없다, 그 사랑을 방해할 수없다 이런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 선언속에 36절에 보는 바와같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라는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인용은 중요합니다.
이 인용은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며 도살 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가 '주를 위하여' 라는 조건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이 굉장히 헌신적이고 신앙을 지키는 순교자적 고난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혀집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37절이 36절은 무얼로 받느냐하면 그러나로 받음으로써, 앞에 있었던 내용과 이제 얘기하려는 내용이 반대의 입장에 있다는 것을 접속사가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에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 그럼 그 앞은 무엇이었느냐, 그 앞은 절망이었다, 라고 얘기해야 맞습니다.
어떤 절망?, 죽임을 당하며 도살달 할 양 같은 절망이었다고 얘기해야 됩니다.
주를 위하여 라는 단서가 붙음으로써 우리는 이 구절이 부정적으로 읽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가를 인용한 시편44편을 찾아가 보십시다. 22절 입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의 인용의 그 전체 문맥이 뭐냐하면, 걱정 말아라 너희는 너희 자신이나 또는 환경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단다, 너희가 속한 환경이 아무리 너희를 위협하고 반대를 해도,
또 너희 자신이 스스로 믿음을 지킬만한 실력이 없을 지라도,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너희를 끊을 수있는 것은 없단다,
이것이 지금 로마서 8장의 가장 중요한 그 분위기입니다.
근데 그기서 무슨 얘기를 하냐하면, 우리가 종일 죽게 되었고 도살할 양 같이 되었지만 그래도 걱정할 것이 없단다, 이렇게 인용하고 있는 것이거던요. 그런데 왜 주를 위햐여냐 이거죠.
이 시편44편은 1절부터 보면,
"1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2 주께서 주의 손으로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 박게 하시며 주께서 다른 민족들은 고달프게 하시고 우리 조상들은 번성하게 하셨나이다 3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
지금 1절에서 3절까지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종되었던 애굽 땅에서 해방을 얻고 약속의 땅에 들어와 기업을 얻고 잘 살게 되었는가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그 종되었던 애굽땅에서 구원해 내셨고, 우리 칼로 뺏지않은 땅, 우리가 얻어낸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해서 주신 땅, 우리 칼과 우리 활로 빼앗은 땅이 아닌 땅을 주셨나이다.
그래서 4절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맞습니다.
하나님은 옛날에 이렇게 하신 하나님이시고 우리 백성을 사랑하시고 구원을 베푸신 능력의 하나님이시니 오늘 우리에게도 구원을 베푸시옵소서,
"5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6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정확히 앞에 있었던거죠 3절에 있었던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습니다" 이거던요.
반복되죠. 7절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 8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지금 열왕기라는 역사서가 제 1차 독자를, 포로로 잡혀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1차 독자로 아마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이방민족에 포로가 되었는가, 우리는 왜 이나라 사람들의 종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나라다운 영광과 승리를 누리지 못하고 오늘날 이런 현실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그때 요아스의 생애는 이 따위로 살았으니까 우리나라가 망했지, 우리가 오늘 이모양 이꼴로 되었지, 라는 결론을 정당화시키는 사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로마서 8장에서는 우리의 못난 것과 세상의 반대함이 아무리 클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있는 것은 없다 는 것을
얘기하면서 하필 시편44편을 인용해서 시편44편이 어쩌면 유다사람들이나 이스라엘사람들이 ㄲㅕㄲ었던 어떤 역사적인 어려움속에서, 그리고 또 포로기까지 확장해서 저들의 절망과 슬픔속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알기로 하나님은, 옛날에도 우리 조상들을 구원하실 때에 우리 조상들이 능력이 있어서 애굽을 나온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능력을 베푸셔서 구원하셨다고 얘기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었던 땅과 허락했던 영광과 승리들과 복들이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심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신 분으로 바뀌지않는 한, 하나님이 유일한 하나님이신 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이 이렇게 실패되고 포기되어 끝날일은 없지않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잘못으로 오늘 이런 슬픔과 비극적인 결과를 당했다할 지라도 이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옛날에 행하셨던 구원과 축복을 주실 분 아닙니까?
그래야 하나님이 하나님이시죠.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당하는 절망들은 우리를 절망키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그 결과를 인도하여 내는 과정에 생긴 하나의 과정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오늘의 죽임, 도살할 양같음은 주를 위한 것일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갖다 붙이고 있다 그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무슨..뭐라해야 되냐하면,,,말이 안되는 우기는 짓이 아니라 앞뒤가 안맞는 게 사실이죠.
그러나 우리가 앞뒤가 안맞는 것을 갖다 묶을 수있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예수를 주셨다는 것이 무엇인가에서,
기독교 신앙의 진수가 그 빛을 발하는 자리다, 이거죠.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을 일반적인 종교심을 가지고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혼합을 시킵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이 이겁니다. 신자다워야 한다는 것은 당연히 맞는 말입니다.
신자다워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을 성립시키는 조건은 아닙니다.

기독교신앙을 성립시키는 조건은 하나님의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자비로우심, 의로우심, 선하심, 이것이 기독교 신앙을 성립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를 기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인과 법칙으로는 있을 수없는 결과를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선하심 그의 전능하심 그의 위대하심이 기독교 신앙을 성립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이유가 없고 과정이 납득이 안가는데 결과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한 승리 영광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허락한다 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린 요아스의 생애를 우리의 생애와 별로 구별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자된 현실도 뭐 오십보 백보입니다.
그러나 요아스의 생애를 놓고 이것이 끝이 아닐 것이다 라고 포로기의 성도들이 무엇을 보고? 출애굽사건을 보고 출애굽을 허락하신,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이 왜 바벨론을 깨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못하랴? 라고 믿을 수 있었다면, 이미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된 역사를 갖고있는 신약 성도들,,,더 가죠, 그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능력과 성의를 보는 측면에서는, 시각에서는, 자리에서는, 시편 44편에서 우리가 주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요, 은혜의 하나님이요 능력의 하나님입니다 라는 이 선언을 이 믿음을 우리야말로 더 크게 더 분명하게 갖어야만 마땅하고 갖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으로 가 보시겠습니다.
"23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아브라함을 의로 여겼다, 믿음으로 의로 여겼다 그것은 무얼 위하여 했다구요?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위하여 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아브라함과 같이 부르실 후손입니다.
아브라함을 순전히 믿음으로 부르신 것 같이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믿음으로 부르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부른다는 것은 아브라함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그에게 자격과 조건을 묻지않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부름입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을 그렇게 부르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부르실 것입니다.
요시아의 생애가 이스라엘의 운명을 결정 짓지 못하는 것처럼, 그의 실패와 그의 잘못으로 이스라엘과 유다가 포로로 진멸해서 끝나지않고 다시 구원함을 얻고 그리스도가 오시고 신약백성으로 이어지는 것같이 같이!..왜요 왜 같이라는 말을 쓸 수 있죠?
모세 시대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요아스의 하나님, 예수그리스도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그 하나님이 동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듯이 홍해를 가르듯이 그리고 가장 중요하고 그앞에 있는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갖었던 것보다 더 큰 역사를 하나 가지고 있죠.

그 아들을 보내신 것같이.. 지금 24절 식으로 얘기하자면, 예수 우리주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인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이' 라는 역사를 하나더 갖고 있죠.
죽은자를 살린다는 것은 뭐죠?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자를 해결하는 자인것이죠.
저에게 있어서 신앙의 싸움은 언제나 이 싸움입니다. 내 믿음이 하나님앞에 열랍될 것인가?
이 모양으로 사는 것도 신앙이라고 할 수있는가 ? 이것은 늘 제게 떠나지않는 질문거리이고 자책입니다.
이 정도로 사는 것 갖고 신앙인이라할 수있는가, 내 신앙고백이 유효한가, 라는 질문을 하죠. 그기에 대해서 성경이 하는 얘기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 우리를 죽음에서 살리실 이, 매일 도살할 양같이 되어있고, 죽음앞에 놓여있는 우리를 하나님은 고쳐 놓을 수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기서 생명을 만들어 내시는 이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하려는 얘기입니다. 조금 더갈까요? 로마서 6장 4절로 가십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 이,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과 같이, 이게 기독교 신자의 가장 큰,, 큰 믿음의 내용이요 희망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 오늘 우리를 보면 죽은자의 생애를 방불케 하죠. 요아스의 생애를 놓고 보자면, 신복들에게 칼 맞아 죽는 자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비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책임과 한계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전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반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은혜와 사랑이 가지는 승리와 영광과 부활의 반전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을 유지케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현실이 무엇일까요? 자책일 것입니다.
믿음의 현실은 뭐죠? 의심입니다! 왜 믿음의 현실이 의심이죠? 약속은 갖고 있으나 현실로 나타나지 않거든요.
기다려야 되기 때문에 믿는 것은 지금 결과가 드러나지 않는 것들입니다.
결과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됩니다.
결과가 현실이 아니면 우리의 현실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의심할 지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의 중간중간에 하나님이 확신을 준다는 것, 저도 압니다 .
그러나 확신이 연장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큰 기쁨과 확신이 있었는데 어느날 문득 다시 전혀 아무런 증거도 아무런 확인도 받아보기 못했던 사람같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같은 때가 수도없이 많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늘 하나님께로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려야 됩니다.
자기를 쳐다보고 자기의 느낌에 의존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같은 6장 11절에도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럽니다. 이건 무슨 말이죠? 당신의 느낌을 근거하지마라 이겁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인가에 근거하라.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며,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풍부하신분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우리의 신앙의 근거를 놓지않으면 우리는 하루를 버티지 못합니다.
같은 로마서 8장에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아멘입니다.
이것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겁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다, 그게 우리를 안심시키며 우리의 신앙을 보존케 합니다.

그렇지않다면 우리는 자기격려 자기최면밖에 없습니다.
그렇지않다면,,, 그러니까 얼마나 종교라는 것이 얼마나 자기격려 자기최면에 불과한가를 알지않습니까.
그렇죠?
말하자면 나는 믿어서 기뻐,,라는 얘기는 참으로 애매한 말입니다. 본인이 자기 최면속에 들어갔다는 뜻일 수도 있고, 우리가 오늘 살펴보는 바와같이 하나님이 하나님되심 때문에 나는 나의 불안과 자책과 절망을 나는 하나님앞에 모두 벗어 던질 수있어 라고 얘기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아무렇지도 않다. 태평하고 한 점의 의심도 없다,그런 믿음의 경지는 사는 동안은 없습니다.
그런건 없습니다. 그 여러분들이 가지는 현실적인 신앙의 확신은 성경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그렇게 설명한다는데 전부 붙들려 있어야합니다. 혹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우리 목사님도 그렇다고 그러시더라,, 아 이게 조금의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죠.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요아스의 생애와 방불한 우리의 실존으로 본다, 이렇게 얘기할 수있습니다.

그러나 우린 요아스를 요아스의 생애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전혀 다른 식으로 평가합니다. 빌립소서 1장으로 가죠.
"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또는 주 안의 형제들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사도바울의 이 고백은 굉장히 놀랍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도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자되어 이제 감옥에 갖혔으나 담대합니다. 그는 갖혀 있어도 겁이 없습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고 죽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내몸에서 존귀히 되는 것외에는 나는 관심없다.
나는 나의 매임이나 혹은 이 일로 인하여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고 비난하는 문제에 있어서 상관없다.
저들이 나를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으로까지도 그리스도가 전파되니 나는 기뻐할 뿐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변경을 해 보십시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종이지만, 당시에 사도바울을 비난했던 사람들처럼
그는 늘 아프고 늘 사로 잡힙니다. 그는 형통한 길로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우리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보는 바와같이 여러번 매를 맞기도 하고 강도에 위험을 당하기도 하고, 동족에 위협을 당하기도 하고, 굶기도 하고, 춥기도 하고, 헐벗기도 합니다.
파손도 당하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합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종으로써의 어떤 보란듯한 증거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뭐라 생각하느냐하면, '그것이 사도된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 고난들이,,,
자! 우리는 우리의 생애가 보란듯하지않기 때문에 내 생애가 신자된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앞에 인정받는 것인가에 대하여 의심을 가집니다. 내가 하나님앞에 인정을 받고 있다면, 하나님은 형통한 길을 열고 나를 유효한 인생으로 인도하여 능력있고 효율성이 있는 인생을 걷게할 거라고 기대하는 겁니다. 이렇게 밤낮 아프고 가난하고 못 배우고를 더 지나서, 내마음에 확신이 없고 전전긍긍하고 자책하고 절망하는 것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정도 갖고는 신자일 리가 없고 하나님이 열랍한 인생일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잠깐 바꿔놓고 생각해 봅시다.
사도바울이 그 얘기입니다. 사도바울은 열심은 갖고 있지만 한번도 형통한 현실을 못 만나고 있습니다.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자기가 세운 교회에서 배척을 받습니다. 그의 사도권이 부정되곤 합니다. 도전을 받습니다.
그 편지를 보면 괜찮았는데 만나보면 영 사람이 신통한데가 없다 라는 비난도 받습니다.
사단의 가시가 주어져있고 늘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마음에 소원이 있고 안타까움이 있으나, 뭐 당시대에 사도바울이 자신이 이렇게 유명해 질줄은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요. 우리의 가는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뭐가 다르냐.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일들이 누구의 눈에도 그럴듯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말 죽어버렸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죄인의 친구로 오셨다라는 표현대로 그는 가난한 자로 오시고 그는 죄인중에 섞여있고 병자들과 환자들속에 있습니다. 그를 따르는 자들이 그런 자들이고 그는 늘 그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면 우리가 신통한 길을 걷지못하고, 늘 사회에서 쳐진 자들속에 감추어져 있는 자들속에, 실패자들속에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더 괴롭힙니다. 내가 가진 신앙이 참된 신앙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내 신앙이 그 힘을 쓸 틈을 받지 못한다 라고 생각할 수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려고 하는 말은 이겁니다.
예수 우리 주를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요, 그를 죽여서 부활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며 모든 세상을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으로 전복시키듯이, 우리의 생애를 세상적인 보란듯한 과정과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끌고 가고 계시다는 것을 성경이 확인시키려고하고 있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에 대해서 절망하며 부정하는 모든 것이 다 성육신의 연장입니다.
지금 비립보서 1장21절을 보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
'내 삶은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런겁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인생에 성육신을 연장하는 것이 내 삶이다. 죽는 것은 그 성육신이 더한 것이다.
성육신보다 더한 것이다. 부활이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죠.
여러분의 자책, 여러분의 소외감 여러분의 절망, 여러분들의 답답함들은 다 성육신입니다.
초월자가 그 무한이 그 유한한 속에 들어있는 그 답답함을 생각해 보십시요.
돌을 떡으로 만드실 수있는 이가 굶주려야했던 사실을 기억해 보십시요.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들을 놓치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어떤 것, 죽음, 고난, 세상의 어떤 권세, 그 무엇도 우리주 예수그리소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라는 겁니다. 우리 인생의 우리 눈으로 보는 실패 파탄 무의미 허망함 게으름 무책임 무엇도 뒤집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핵심은, 근거로 늘 어디로 가야하냐하면 한탄으로 가는게 맞습니다.
하나님 찾아와 주십시요. 나는 죄인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평생동안 반복해야되는 고백이며 찬송입니다.
우린 여길 놓칩니다.
그럼 우린 어쩌고 싶은겁니까? 더이상 하나님을 부를 필요가 없는 신앙인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죠?
하나님을 위하여 보란듯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겁니다.
어떻게요? 더 잘생기고 더 가지고 척! 뭘 꺼내놓고 하나님이 이 시대 뭐가 필요하실때, 얼마요?! 하나님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이건 얼마나 모순되는 얘기들 입니까?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신앙을 과소평가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책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별것 아니라는 것이죠.
여러분, 성육신은 그 당시에 별것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무한이 유한을 찾아오실 지 몰랐습니다.
제자들 마져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실을 또한 숨기라 하셨습니다.

여러분 숨기고 사십시요. 여러분을 부르고 여러분을 인도하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그 인생을 걸어십시요.
거기가 성육신의 연장인 줄 아십시요. 여러분이 서있는 곳에 하나님의 통치와 기적과 죽은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기적의 손길이 찾아오시는 자리인줄 아십시요. 누가 잘난 줄알고 큰소리 치거든 감탄하십시요.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길을 걸어십시요. 신앙인이 되십시요! 하나님이 여러분의 생애를 살게 하십시요!
하나님이 거기 찾아오시고자 여러분을 부르셨고 함께 하십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의 생애와 여러분의 존재와 붙들어 매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 취소시킬 수도, 실패케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지키사 하나님이 승리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요 작정이요 기쁘신 뜻인 것을 확인합니다.
우리 자신을 믿음으로 달래게 하여 주십시요. 우리주 예수그리스도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우리를 끊을 자 없음을 기억케하사 우리의 탄식과 우리의 절망을 믿음으로 기도로 찬송으로 바꿔놓는 생애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님이 교통하심이 하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의
생애에 자랑을 영광을 기억하고 믿음으로의 순종을 약속하고 돌아가는 심령 심령들 위에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이다. 아멘.


출처 : 자료바구니(기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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