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성경구속사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

by 【고동엽】 2021. 10. 21.

제목: 성경구속사 :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

(마1장 1절,12장 28절, 요1장 14절, 2장 19-22절 ,눅 1장 32-33절, 17장 20-21절, 22장 19-20절을 찾아 )

 

Ⅰ. 도입 우리는 지난 6강의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라는 강론을 통해 새 언약의 계시적 성격이 이중적으로 구성돼 있음을 살펴봤습니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새 언약의 성취가 일면 바벨론 포로귀환으로 말미암는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가리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보다 온전한 종말론적 메시아 왕국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진단은 새 언약 안에서 회복된 역사적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 과거 다윗 왕조를 몰락시켰던 각종 범죄의 타락상이 동일하게 재현되며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결과를 초래하게 했을까요? 이는 다름 아닌 죄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새 언약 안에서 약속하고 있는 '사죄'의 문제(렘31:34)가 회복된 이스라엘 속에서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 총체적으로 지향하는 핵심 사상은 고난의 종으로 일컬어지는 메시아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우선하여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주신다는 내용입니다. 이를 통해 죄로 말미암아 단절된 하나님과의 화목이 회복되고 결과적으로 참 하나님 나라로서 진정한 메시아 왕국이 실현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로 보건대, 회복된 역사적 이스라엘 안에서 여전히 시내산 언약을 위반하는 불순종의 범죄행위가 재현된다는 것은 저들 가운데서 죄의 권세가 왕노릇 하고 있음을 지적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결국 새 언약이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나라가 처음부터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니었음이 밝혀집니다. 오히려 보다 적극적으로 참 메시아의 구속으로 말미암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취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메시아의 대속적 사역으로 인해 죄의 문제가 선결(先決)될 때, 비로소 새 언약 안에서 보증하고 있는 제반 언약적 요소들이 동시적으로 충족될 것이기에 말입니다. 우리가 본 강론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로 본 사경회를 마감하려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모든 구약 언약의 총체적 성취자이시며(마1:1) 다름 아닌 새 언약의 당사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눅22:19-20, 히8:6-12, 10:15-18).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유일한 대속자"(ransom)라고 성경이 보증합니다(마1:21, 막10:45). 우리는 이제 본 강론을 통해 에덴동산의 여자의 후손언약(창3:15)에 근거해 개시된 구속사(救贖史)의 출발이 세상 역사 속에서 파란만장한 격랑의 부침(浮沈)을 거듭하는 가운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언약적 성취의 절정을 맞게 되는지의 과정을 살펴볼 것입니다. Ⅱ. 전개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만물을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지으십니다. 이는 창세전 영원하신 작정에 근거한 실제적 집행의 산물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삼위 하나님의 특별하신 목적 하에 맨 마지막에 지음을 받은 창조의 면류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자로서 만물의 통치권을 이들에게 위임하십니다. 즉 아담과 하와를 만물의 대리적 통치자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만물을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좇아 다스릴 것을 언약적 복의 형식을 통해 당부하십니다(창1:28). 우리는 이 언약적 복의 내용을 신학적으로 소위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문화명령이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가 다름 아닌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실현'인 사실을 간파할 수 있음은 성경의 총체적 계시관의 향방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합니다. 이는 문화명령의 핵심사상이 '하나님의 통치의 위임'이란 사실에서 확인됩니다. 성경계시의 총화 속에서 하나님 나라는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현재적으로 도래한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참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왕적 권세와 권능의 발휘 말입니다. 곧 각종 불치의 병이 치유되고, 사단의 세력인 귀신이 축출되며, 무엇보다도 천상의 복음이 전파되므로 죄사함의 역사가 일어나는 사실이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적으로 강력히 시행되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명백하게 확증시켜 줍니다(마4:17, 23-24, 9:1-8, 12:28, 막2:1-12, 눅17:20-21). 그런데 이들에게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단의 미혹을 받습니다. 급기야 문화명령의 온전한 성취를 위해 순종을 관장하는 보호적 기능과 장치로 주신 선악과 금령법(창2:17)을 어긴 것입니다. 거기에는 불순종의 대가로 죽음이 담보돼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단은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다 실패한 천상의 반역을 아담의 불순종의 범죄를 통해 만회하려는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권에 재차 도전을 시도합니다. 왜냐하면 문화명령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는 곧 사단의 최후적 멸망과 불못의 영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범죄는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저들이 인류의 머리요 대표자의 성격을 띠고 존재하는 것으로 인해, 모든 인류에게 죄책의 대가로 죽음을 전가시킵니다(롬5:12). 인간의 원죄사상과 필연적 죽음의 기원은 이런 식으로 유래됩니다. 이런 절대절명의 위기의 상황에서 아담과 하와의 죄를 사면하시고, 지속적으로 문화명령의 궁극적 성취를 위해 베푸신 은혜로우신 해결책이 다름 아닌 '여자의 후손언약'(창3:15)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언약의 핵심사상은 '중보자를 통한 죄책(罪責)의 사면'입니다. 여자의 후손언약을 신학적으로 '원시복음'(proto gospel), 또는 '최초의 복음'(primary gospel)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다시 말해 여자의 후손언약 안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중보자를 통해 인류의 죄를 사면하시고, 구원을 완성하시며, 이들로 인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시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의 경륜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적 사역을 일컬어 특별히 '하나님의 구속사'(redemptive history)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의 경륜은 여자의 후손언약 안에서 인류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전환시킵니다. 영벌을 영생으로 보장합니다. 그리고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실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천상적 능력입니다(롬1:16). 이제 언약적 문화명령 속에 담긴 종말론적 신정왕국의 실현은 여자의 후손언약 안에서 죄의 문제를 원인치료하는 방식을 통해 새롭게 성취가 보장됩니다. 다시 말해 당초 '창조언약의 원리'(창1:28) 속에 담긴 신정왕국(하나님 나라)의 계획은 이제 여자의 후손언약으로 말미암는 '구속의 원리'(창3:15) 안에서 새롭게 성취를 전망하며 보장받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여자의 후손, 곧 아담과 하와의 '실제적 자녀'의 출산을 통해 '후손언약'의 종말론적 성취를 아울러 확인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가인을 낳고 이르기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창4:1)라고 기뻐한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왜냐하면 가인의 출생은 여자의 후손언약을 성취하시려는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의 표명이며 동시에 보증의 표지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출생으로 말미암는 본격적인 인류역사의 개시는 여자의 후손언약 안에서 이미 계시(啓示)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의 실제적인 출발점이 되는 셈입니다(창4:1). 세상역사의 본질이 구속사인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인간의 생육과 번성으로 말미암는 세상역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구속사를 운반하기 위한 계시적 수단과 방편의 성격을 띠고 진행됩니다. 이는 동시에 구속사의 종말론적 완성이 곧 세상역사의 종말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가시적 세상종말의 시기를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는 남은 자의 충만한 수가 찰 때와 동일시 여기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롬11:25-27). 그렇습니다. 세상역사는 오직 여자의 후손언약의 종말론적 성취를 위한 계시적 통로로서 기능할 뿐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속사는 여자의 후손언약이 세상역사를 통해 성취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과정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속사를 세상역사 속에서 전개시켜 나가실 때 '선(先)언약'하시고 '후(後)성취'하시는 언약적 방식을 취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언약을 구속사 진행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를 언약적 구속사라고 부릅니다. 이후 세상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사, 곧 여자의 후손언약의 진행은 '언약과 성취'라는 구조적 틀 속에서 점진적(progressive)인 성격을 띠고 전개됩니다. 여기서 점진적이란 하나님의 구속사가 언약을 도구로 세상역사 가운데서 종말론적 성취를 향해 전개될 때 암시적-명시적, 표상적-구체적, 예표적-실체적, 모형적-원형적인 방향성을 띠고 단계적으로 진행됨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를 점진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신적 언약들은 여러 단계의 언약적 갱신과 발전과 확장(아담의 창조언약-선악과 언약-여자의 후손언약-노아의 보존언약-아브라함 언약-시내산 언약-모압언약-다윗 언약-새 언약)을 거듭하면서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의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신구약 언약의 총화이시며 성취의 당사자이십니다(마1:1, 눅24:27, 44). 특별히 고후1:20이 이런 사실을 적극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오늘 강론은 에덴으로부터 개시된 언약적 구속사의 경륜(사실은 창세 전부터 유래한 것이지만 : 엡1:3-6, 딤후1:9, 딛1:2, 마6:10)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으로 말미암는 새 언약 안에서 총체적으로 성취되는 과정을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한 새 언약의 본질은 사실상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절정을 이룬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통치 속에서 예비적 성취를 이루며, 재림을 통해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1. 예수님의 탄생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 1)구약 언약의 총체적 성취자 (1)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마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고 기술합니다. 이는 이제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 언약에 의해 줄기차게 약속돼 나온 참 자손(창22:18, 행3:25-26, 갈3:16, 삼하7:11-16)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증거함으로써 혈통적으로나 법적 자격에 있어서 명실공히 다윗 왕가의 계승자이심을 밝히 지적합니다. 사실상 다윗 왕조가 BC586년 바벨론에 의해 몰락된 이후 거의 6세기가 흐르는 동안 다윗의 왕통(王統)은 표면상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로마의 정치적 지배하에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이 오매불망(寤寐不忘)하던 다윗의 왕권을 이을 적법한 메시아가 되심을 밝히는 일은 다른 무엇에 앞서 사활이 걸린 중차대한 논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사실상 모세와 선지자들과 시편에 예언 된 구약 언약의 총체적 성취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증거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눅24:27, 44절). 그래서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의 씨'로 오신 예수님의 왕적 혈통을 객관적으로 확인시키기 위해 유대인들이 중시했던 족보의 기술을 통해 그 분의 법적 자격과 메시아적 정통성을 입증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예수님의 탄생기록은 구약의 예표적이며 예비적인 계시시대를 마감하고 구속사의 실체로서 구원의 새로운 계시시대를 여는 신기원(新紀元)적 의미가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2)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참 다윗 왕으로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통성을 밝히는 과정에서 족보의 시작을 아브라함으로부터 기술합니다(마1:2). 이는 유대인의 참 다윗 왕으로서 예수님의 왕적 정통성과 법적 합법성 및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마태의 의도적인 기술방식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누가는 동일하게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면서 아담을 거쳐 하나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눅3:23-38). 이는 누가복음의 저작 동기와 강조점이 상대적으로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눅1:1-4). 그래서 예수님을 단순히 유대인의 메시아가 되실 뿐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전(全)인류의 구원자이시며, 나아가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명백히 증거하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3)족보의 기술을 통해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통성과 합법성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전 족보의 내용을 크게 삼등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다윗까지(마1:2-6), 다윗에게서 여고냐(여호야긴)와 그의 형제들의 출생까지(7-11절), 그리고 여고냐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까지(12-16절)입니다. 이런 삼등분은 단순히 연대기적 편의성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보다 구속사적인 계시성이 깊이 개입돼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삼등분 한 족보의 내용을 반복적으로 집약해 구분하면서 각각에 구속사적 의미를 부여해서 설명합니다. 곧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다윗부터 바벨론 이거까지, 그리고 바벨론 이거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가 그것입니다(17절). 마태의 이런 구분과 표현방식은 다분히 다윗 왕조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접근해 분류한 것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 구약 이스라엘의 국가적 정체성을 신정왕국으로 이해한 데서 나와진 하나님 나라의 흥왕기, 쇠퇴기 및 회복기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4)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속자의 출현을 위한 최적의 상황을 준비하기 위해 세상역사를 섭리적으로 주관해 오셨던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이 본격적으로 구속사를 역사의 전면에 부상시키시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설명하면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4:4)라고 기술합니다. 바야흐로 구속사의 핵심사상인 여자의 후손언약의 종말론적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예비적 절정을 보았다는 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거의 4세기 동안 세상역사 속에 깊이 침잠했던 하나님의 구속사가 마치 새 봄의 마른 가지에 새 싹이 움트듯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적 작정의 때가 이르매 새 언약의 남은 성취를 위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2)자기 백성의 중보자 (1)마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갖는 구속사적 성격을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1:21)라고 선포하므로 예수님의 메시아적 중보 사역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한 마리 어린 속죄양(scape goat)으로 오신 분입니다(요1:29). 이사야는 메시아를 참 다윗 왕에 앞서 고난의 종으로 묘사합니다. 메시아의 이중적 성격과 사역을 내다봅니다(사52:13-15, 53장). 하나님께서는 실로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대속적으로 담당시키십니다(사53:5-6). 그 분의 죽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근거가 됩니다. (2)예수님의 죄를 대속하시는 중보사역(마9:12-13, 막2:17, 10:45)은 선지자들의 새 언약이 보증하고 있는 죄책의 사면(렘31:34) 및 죄의 도말(사44:22)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습니다. 다시 말해 새 언약 안에서 약속된 회복된 이스라엘의 사죄의 문제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비로소 성취될 것임을 전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성취가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속에서 선취적으로 보증됩니다. 새 언약이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말미암는 메시아 왕국의 종말론적 완성인 사실이 이에 있습니다. 그 나라는 죄의 권세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공법이 막힘 없이 시행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여호와에 대한 지식이 충만한 곳입니다(렘31:34). 3)임마누엘의 성취자 (1)아기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는 단지 중보적 사역뿐만이 아닙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명하면서 '임마누엘'의 성취로 선포합니다(마1:22-23).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언약적 구속사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곧 구약 성막계시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임재, 통치, 연합, 교통과 동행의 예표적 계시(출25:8)가 성막의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사도 요한은 보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성막의 구속사적 계시와 동일시하므로 예수님을 성막의 실체로 오신 분임을 명백히 증거합니다(요1:14, 2:19-21). 오늘날 예수님은 성령님의 내주, 교통, 후원, 조명하시는 역사(고전3:16, 6:19, 갈2:20)를 통해 여전히 우리의 왕으로, 우리와 연합돼, 우리의 전 인격과 생애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섭리적으로 주관해 가십니다(욥23:10). 그렇습니다. 임마누엘 신학은 성령님의 신비하신 사역으로 인해 성도를 예수님께 연합시켜 한 몸이 되게 할 뿐 아니라, 성도간에도 지체로서 상호 유기적으로 연합되게 함으로 우주적 보편의 교회공동체를 이루게 하십니다. (2)임마누엘 사상은 또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상은 신학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거처를 정하신다'는 사실과 동질성을 띠는 것으로,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의 행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임마누엘 신학은 언약사상의 본질인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며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과도 동일시 간주됩니다. 그리고 이 핵심사상은 본질상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인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로 마침내 현실화된다는 것이 사도 요한의 지적입니다(계21:3, 7절). 이런 의미에서 임마누엘 사상은 곧 신정왕국사상과 신학적 상응성을 띠게 됩니다. 이런 상호 밀접한 신학적 관계성은 결국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 임마누엘의 실제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곧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이 땅에 도래했음을 명백히 시사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의 구체적 실례를 예수님의 본격적인 메시아적 공생애 사역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4)새 이스라엘(교회)의 대표자 (1)아기 예수님은 동방 박사들에 의해 경배를 받습니다(마2:1-2, 11절). 이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실 뿐 아니라 이방인의 왕이신 사실을 증명합니다. 곧 인류의 왕이시며 메시아로서 구원자가 되신다는 증거입니다. (2)헤롯의 살해음모를 천사로부터 고지(告知)받고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대동해 애굽으로 피신합니다. 마태는 호세아의 예언(호11:1)을 구속사적 계시안목으로 재해석하면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사건을 예수님의 애굽 피신사건에 적용시킵니다. 다시 말해 마태는 과거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사가 예수님의 애굽 피신사건 속에서 신학적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런 시각 속에는 마태가 아기 예수님의 불가피한 애굽으로의 여행사건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출애굽사건의 연장이 되는가를 보여주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3)이런 아기 예수님의 애굽 피신 사건은 얼마 후 헤롯이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내 애굽에서 예수님을 다시 불러내셔서 나사렛에서 그 분의 유년시절을 보내게 하시는 것을 통해 출애굽사건의 재현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자 했음이 더욱 확증됩니다(마2:19-20). 이처럼 구속사 진행의 정점인 예수님의 개인적 생애는 신구약 시대를 총망라한 하나님의 백성들(교회 공동체)의 생애와 영적으로 연합돼 동일시됩니다. 교회의 통일성, 연합성, 그리고 보편성의 원리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 되듯이, 둘째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4)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구속사의 경륜 속에서 구약 이스라엘의 원형(prototype) 내지는 실체(antitype)로서 새 이스라엘의 대표자의 자격을 담당하십니다.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성공적으로 준비하시는 과정에서 40일 광야금식사건과 마귀로부터의 수시(受試)사건을 의도적으로 기록합니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의 40년 광야생활과 첫째 아담의 수시(受試)사건을 의도적으로 재현해 보이심으로 자신을 모세의 실체인 새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그리고 둘째 아담의 자격으로 오신 새 인류의 머리이신 사실을 증거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시도는 예수님 자신의 메시아적 정통성을 정당화시키며 공생애 사역의 성공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선취적 효과를 가져옵니다. 이 부분을 다음의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 준비'라는 주제 하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 준비 헤롯의 죽음과 더불어 아기 예수께서 출애굽하셔서 가나안으로 돌아오십니다. 우리는 이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인 의미를 위에서 살펴봤습니다. 향후 그 분의 사역을 통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될 새 이스라엘로서 교회를 대표하심으로 역사적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의도적으로 재현하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가나안으로 돌아오신 아기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공생애 사역을 담당하시기까지 북쪽 갈릴리 지역의 나사렛 지방에서 생활하셨습니다(마2:23). 한편 마태는 세례요한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앞서 등장시킴으로 왕이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선구자로 그를 소개합니다(마3:1). 4복음서 기자들은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각기 다른 방향과 각도에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구속사적 의미를 기술합니다만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의 선구자적 사역을 소개하는 데는 하나같이 일치를 보입니다. (막1:1-8, 눅3:1-17, 요1:15-34). 이런 사실은 그의 출현으로 인한 사역의 성격과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공개적이고 직접적이며 객관적으로 이스라엘 앞에와 전 인류를 향해 유일한 메시아와 구세주로 증거하는 선구자로서의 구속사적 사명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1)세례요한의 출현 마태는 3장을 시작하면서 단도직입적으로 세례요한의 출현을 소개합니다. 이어서 마태는 그의 갑작스런 출현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미 예언된 사40:3의 말씀의 구체적 성취로 연결시킴으로 그의 출현과 사역이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마3:3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말씀은 원래 이사야40:3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킨 말씀으로 유다 민족을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실 뿐 아니라, 더불어 귀환하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본 절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스룹바벨과 에스라 및 느혜미야가 이끈 포로귀환으로 인해 부분적이고 일차적으로만 성취됐습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은 진정한 이스라엘의 구원과 안식은 당시 이스라엘의 포로귀환 역사 속에서 도래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대부분의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이 종말론적 성격을 띠고 나타나는 것으로 인해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예표적인 모습으로 성취되지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실체화된다는 이중 구조적인 의미가 내포돼 있음을 시사합니다. 본문의 이사야의 예언도 이런 원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예언은 궁극적으로 보다 온전한 성취로서 하나님 나라인 메시아 왕국의 선포와 도래에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게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마태는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유대인들의 포로귀환의 차원을 넘어 본질적으로 죄의 노예로 전락한 인류를 구원시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오실 그리스도 예수의 선구자로서 세례 요한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마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즈음해 세례 요한의 출현을 소개함으로써 이사야의 예언이 종말론적으로 세례 요한에게서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 시기가 언제인가 하면 바로 마3:1절에서 언급된 '그 때'란 말입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어린 시절 헤롯의 살해음모로 애굽으로 잠시 피했다가 북쪽 갈릴리 인근 지역인 나사렛으로 귀환해 줄곧 그곳에서 성장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른 이유가 이에 있다고 마태는 기록합니다(마2:23). 따라서 마태가 세례요한의 출현과 사역의 시기를 '그 때'라고 지칭하는 것은 다름 아닌 충분히 장성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즈음한 시기로서 세례요한과 더불어 30세쯤 되셨을 때를 가리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탄생보다 6개월 정도 앞서 출생했기 때문입니다(눅3:23, 1:24-26).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마2장과 3장 사이는 거의 30여 년의 시간적 간격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섭리적으로 주관하시는 가운데 때가 차매 이사야에게 주신 예언의 말씀을 이제 세례 요한을 출현시킴으로 성취하고 계십니다. 마태가 이사야의 예언을 세례 요한에게 적용시키는 배경이 이렇습니다. 2)세례요한의 사역의 의의 세례요한의 사역은 당시의 역사적 환경을 고려할 때에만 바르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거의 400여 년 이상 선지자들의 음성은 침묵을 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이들 선지자들을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이 말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역사 속에서 일하지 않으셨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역사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의 구체적 성취를 그 본질적 내용으로 삼고 있기에 역사의 존속은 곧 하나님의 일하심의 외적 표식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400여 년의 침묵기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잠정적으로 중단된 시기란 의미이지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동시에 역사의 주관자로서 만물과 만사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지속적으로 섭리해 가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리로다"(시121:4).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121:8).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창조주로서 만물의 경영은 상호 불가분리의 관계성을 맺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침묵'이란 표현에 담긴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게 압박 당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그들의 죄를 정죄하고 국가적인 회개를 요청하며, 회개하지 않을 때에는 심판을 내리고, 회개의 반응을 보이면 구원을 약속하는 등의 직접적인 일하심에 더 이상 특정한 사람을 통하여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이는 다른 한편 구속사의 지속적인 진행과 절정을 위해 일반계시 역사를 섭리적으로 주관해 오신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제 그런 오랜 침묵을 깰 특별한 섭리적 작정의 때가 찾아 온 것입니다. 모든 구약 언약의 최종적 성취자이며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이 본격적으로 개시될 시기가 충만히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구속사를 잇는 중보적 선지자로서 세례요한을 예수님의 전령사로 앞 서 보내신 것입니다. 왕의 대로를 사전에 준비케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세례 요한의 예기치 않은 출현과 그의 사역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바로 이런 당시의 배경을 두고 평가되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의 일성(一聲)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리라"(마3:2)고 선포한 배경이 이렇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격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도래할 것이며 그것은 구원과 심판이 동시적으로 임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회개함이 필연적으로 전제돼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믿음의 회개로 말미암는 죄의 사면이 없이는 곧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 영적으로 참여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심판에 처해 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이 처한 유대교적 상황이 하나님 앞에서 구약의 이스라엘이 범해 왔던 불순종과 타락과 종교적 외식을 여전히 답습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음에 다름 아닙니다. 3)예수님의 수세(水洗) 마3:13-17은 '이때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이 단락과 바로 앞의 단락, 곧 세례요한의 출현과 사역이 불가불 연결돼 있음을 시사합니다. 다시 말해 세례요한의 사역의 결과로 말미암아 온 유다 지역에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크나큰 도덕적 각성이 일어나 죄에 대한 자각이 널리 펴져 있었던 때에 13-17절의 사건이 일어났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지금까지 은거(隱居)해 계시던 참 다윗 왕께서 '이때에' 비로소 사람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이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이제 주의 길이 예비되었고 그의 왕적 대로가 평탄케 된 것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메시아로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모든 준비가 끝난 때에 대중 앞에 공개적으로 나타나셨습니다. 13절의 '이때에'라는 부사 시제 속에 담긴 상황적 분위기가 이렇습니다. 13-17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는 사건과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증하는 것을 통해 그의 메시아 되심과 메시아적 사역을 공식적으로 윤허(允許)하는 사건이 소개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는 것은 그 자신이 이 물세례의 본질을 완성시키기 위해 오신 분으로서, 몸소 세례를 받으심으로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완전한 순종의 모범을 보이시려는 데 있습니다. 이제 그 구체적 내용을 살펴봅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 가에서 한창 죄사함에 이르게 하는 회개의 물세례를 베풀고 있을 즈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로 나아오십니다(13절). 이때 요한은 예수님의 세례받으심을 정중히 거절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14절). 이 말은 한편으로 요한으로서는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래서 난감한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려는 것을 만류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세례요한이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을 통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되어 질 물세례의 실질인 성령세례의 중요성을 절실히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잠시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어떻게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오히려 세례 베푸실 분으로 인식할 수 있었느냐 하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요단강가로 세례요한이 베푸는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해 나오고 있는 다른 보통의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죄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물세례'를 받을 자로 여기지 않은 이유가 어디에 있었느냐 하는 문제 말입니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식하고 증거한 것은 하나님의 사전계시에 근거하고 있음을 분명히 소개합니다. 요1:33-34입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본문에서는 분명히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인지할 수 있었던 시점이 예수님의 수세(受洗) 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요한의 물세례를 받으시고 물위로 올라올 때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예수님 위에 내려와 머무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 분의 메시아 되심을 증거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례요한이 어떻게 그 사건 이전에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렇게 예수님을 사전에 인지(認知)하고 있는 세례요한에 관한 기사를 소개하고 있는 마3:14-15의 말씀은 오직 마태 복음서에만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로 보건대 마태는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처음부터 강력히 부각시켜 강조해 나오는 것을 통해 지금 세례요한과 조우(遭遇)하고 계신 예수님의 내적, 외적 모습 속에서 보통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메시아로서의 영적 탁월함과 천상의 고결한 품성을 한껏 부각시키고 있음에 다름 아닙니다. 따라서 세례요한은 다름 아닌 성령의 감화 감동 충만 교통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내적 조명의 사역에 의해 예수님을 즉각적으로 비범한 분, 곧 자기가 선구자로서 마땅히 증거해야 할 '능력이 많은 분'(막1:7, 눅3:16)으로 직감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모친의 태중에 있었을 때 이미 경험한 바 있었던 사건의 재현(再現)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세례요한이 모친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었을 당시 마리아의 문안을 받는 자리에서 마리아의 태중의 아기 예수님과 성령의 간섭하심으로 피차 영(靈)으로 교통했었던 사실 말입니다(눅1:39-44). 이때의 상황을 누가는 특별히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44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관계는 신적 기원에 의해 저들의 전(全)생애가 주권적으로 간섭되고 있는 것으로 인해, 이제 두 사람의 본격적인 구속사적 사역과 관련해서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도적으로 역사하시는 섭리적 만남이 주선(周旋)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에 의해 받게 되신 예수님의 수세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왜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본체로서 죄인인 뭇 백성들이 받는 죄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셔야만 하셨을까요. 마3:15절 속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마태는 예수님의 수세사건 속에 담긴 구속사적인 의미를 설명합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이 말은 확실히 예수님께서 굳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다른 의미에서 되어진 사실임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뭇 백성들과 같이 세례요한의 물세례를 받으시는 것이 '모든 의', 곧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전(全)요구를 성취하는 셈이 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그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1)먼저 세례요한의 사역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계획하신 것임을 명백히 확인해 주심으로써 예수님의 사역과 상호 밀접히 연결을 시키셨습니다. 다시 말해 세례요한에 의한 예수님의 수세를 통해 요한의 선구자로서의 사역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인정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2)죄인들과 동일시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수세사건이 이후 진행될 그분의 구속사역과 내용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있음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심은 곧 그의 백성들과 연합해서 저들의 죄를 대표적이고 대속적으로 담당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고후5:14). 그래서 죄 없으신 분이 자기 백성들의 죄 책(責)을 담당하시기 위해 자원해 회개에 이르는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스스로를 죄인들과 동일시 여기셨다는 사실입니다. 자신 안에 죄인 된 그의 백성들을 대표적으로 품으시고 저들의 죄를 속량코자 대신 죽기 위해서 말입니다. 즉 예수님은 그의 백성의 머리로서 세례 받으심을 통해 그들과 하나가 되셨고 나아가 그의 백성들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속돼 새 생명을 얻을 것을 계시한 것입니다. 빌6-8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고후5:14입니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5:21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따라서 우리는 세례 받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 받음은 우리의 머리요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속하는 새로운 신분의 백성이 된다는 외적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으며, 이런 사실의 터 위에서만 비로소 세례 받은 자로서의 거듭난 인격적 삶이 확인되며 보증됨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의식은 단순한 성례전적 형식 이상의 본질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곧 이미 천국백성 된 사실과 그 나라에 소속된 자로서의 뚜렷한 천상적 정체성의 확증 말입니다. (3)예수님의 수세의 의미를 율법의 완성이란 측면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위에서 '모든 의'를 이룬다는 말의 의미가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총체적 요구에 대한 성취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물론 '모든 의'라는 표현 속에 율법이란 단어가 직접적으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란 문구는 확실히 구약에 요구된 하나님의 율법적 요구를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의 지적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등등의 그 분의 메시아적 사역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나타내며, 세례 받으심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4)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수세사건은 이로 인해 본격적인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로 작용합니다. 물론 성경 기록상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출발은 마4:1-11사이에서 소개된 마귀로부터의 시험받으신 사건 이후인 마4:17부터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먼저 보냄을 받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사건은 이로 인해 예수님의 사역이 실질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수세사건은 은밀한 중에 시행된 것이 아닌 공개적인 자리에서의 공식적인 의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수세사건은 이어 시행되는 성령의 기름부음의 상징을 통해 하나님의 최종적인 재가와 인준을 받는 것으로 메시아적 왕의 대관식이 성대히 거행되게 됩니다. 4)하늘의 재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예수께 임한 사실을 4복음서 기자는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의 사실성과 메시아 사역의 본격적인 개시(開始)를 알리는 중요한 사건 기록입니다. 특별히 요1:31-34에서는 성령이 비둘기의 형체로 예수님께 임한 사건이 갖는 의미를 명시적으로 기록하는 가운데, 성령세례의 수여자로서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 되심을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성령이 임하신 사건이 갖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살펴봅니다. (1)세례요한의 사역을 확증시키기 위함입니다. 요한의 사역은 죄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것을 통해 물세례의 실체인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인 메시아의 도래가 임박해 왔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성령이 비둘기의 모양으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임하신 사건은 예수께서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메시아가 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요1:33). 이런 의미에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그의 사역의 정당성과 합법성이 다시 한번 공인된 셈입니다. (2)예수님의 메시아적 직무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인준의 표식입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사실상 예수님께서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로서 정당하게 지명을 받으셨지만, 단지 공식적인 인준을 확인하는 임명장을 받지 않음으로 인해 실제적으로 메시아적 권한행사가 잠정적으로 유보된 것과 방불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실제적으로는 요한의 세례에 이어 즉각적으로 성령의 임재하심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메시아적 직임은 하늘의 재가를 거쳐서 실제적 권한행사로 들어갑니다. 특히 하늘로서 임한 말씀인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고 하신 내용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소명과 임무를 '대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확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고 '개인적 차원'에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역을 인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느 경우이든지 간에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과 그의 사역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재가와 인준이 떨어졌다는 사실에 모아집니다. 결과적으로 메시아로서 사역을 시작하시는 아들을 향하신 아버지의 만족하심이 충분히 계시된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일의 공증으로 성령께서 보내심을 받으신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님은 원래부터가 성령에 충만한 분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시게 되었기에 일종의 거룩한 성례전적 예식을 통해 새로운 능력을 부여받으신 것입니다. 아울러 성령의 임하심은 예수께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부여하신 메시아적 사명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가납(嘉納)하신 승인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당신의 인성적 측면에서 이 성령의 능력을 필요로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에 베푸셨던 각종 표적적 능력들과 복음적 사역을 자기 안에 계셨던 성령께 돌렸던 사실들을 생각할 때 확인할 수 있는 결론입니다(마12:28, 눅4:18, 행10:36-38). (3)세 번째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처럼 중생케 하시는 성령께서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물로 세례를 받는 의미 속에는 수세자가 가진 죄가 그와 같이 씻김을 받게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이는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사역에 의해서 그렇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행2:38). 5)예수님의 수시(受試) 사건 속에 담긴 이중적 의미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이어서 광야로 나가셔서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십니다. 이 일에 앞서 예수님의 수세사건 때 예수님 위에 충만하게 임재 하셨던 성령께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십니다(마4:1). 마가는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막1:12)'고 기록함으로써 예수님의 시험받으시는 사건이 동일한 성령님에 의해 주도된 의도적인 사건이었음을 시사합니다. 결국 마태를 비롯한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신 사건을 기록하는 것을 통해, 메시아로서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와 능력을 힘있게 발휘하심으로, 사단의 공격을 원천적으로 봉쇄시키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본격적으로 도래시키는 데 유리한 고지를 선점(先占)하게 될 것임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에 예수님께서 마12:28-29을 통해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고 말씀하신 배경이 이렇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가 능력있게 발휘되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왕성하게 펼쳐질 것을 염두에 두시고, 자칭 세상 임금으로 군림하고 있는 사단의 세력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먼저 제압하셨던 것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에 앞 서 마귀로부터 시험받으시는 사건을 기록한 배경이 이렇습니다. 성령께서 이 일을 의도적으로 주도하신 이유가 이런 사실에 기인합니다(마4:1, 막1:12-13, 눅4:1-2). 다시 말해 마귀의 세력을 먼저 제압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은혜의 왕적 권세가 힘있게 발휘되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직무와도 직결되는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요일3:8). 마태는 이런 예수님의 시험받으시는 사건을 기록하면서 '그 때'에 라는 부사 시제를 사용합니다(마4:1). 여기서 '그 때'란 내용의 정황으로 보아 바로 3:13-17에서 소개된 예수님의 수세사건과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공식적인 재가사건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 사건 직후에 지금 소개되는 예수님의 시험받으시는 사건이 일어나게 됐다는 지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에는 어떤 구속사적 의미가 포함돼 있는 것일까요. 왜 굳이 이런 시험을 받으셔야만 하셨을까요. 먼저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의 성격에 대해 알아봅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을 이해하는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우선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류의 시조인 첫 사람 아담이 당시 하나님 앞에 어떤 자격과 신분으로 서 있었는가에 대한 것이고, 다음으로는 구약의 광야교회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이 받았던 40년간의 광야시험에 관한 것입니다. (1)첫 번째 성격 우선 첫 번째 사실을 살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선악과 사건을 통해 시험 가운데 두셨습니다. 이 시험은 보상과 형벌이 대가와 조건으로 주어져 있는 일종의 율법적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창2:16-17). 본 선악과 금령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아담과 그의 후손으로 하여금 이 시험을 통하여 선과 악을 구별하게 하시려는 데 있었습니다. 즉 순종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의의 단계로 올라감으로 궁극적으로 영생하는 삶을 누리게 하셔서 악과는 영원히 상관없는 영광의 자리에 이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만이 창1:28에서 복으로 언약하신 문화명령 속에 담긴 궁극적 목표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아담의 후손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마침내 실현시킬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일에 아담은 불순종함으로 실패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허리에 속한 모든 인류 또한 아담과 더불어 실패에 동참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선악과 금령법을 어긴 형벌로서 죽음이 큰 권세로 온 인류 위에 역사하게 된 것입니다(롬5:12).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과 관련해서, 둘째 아담의 신분과 자격으로 첫 사람 아담의 실패를 회복시키는 구원자의 사명을 수행하고자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죄에 대한 대속물이 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롬5:14, 고전15:45, 막10:45).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기에 구원자로서 둘째 아담의 자격을 능히 취하실 수 있습니다. 이 자격을 취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심으로 세상 가운데로 들어오셨습니다. 따라서 무죄한 인성의 입장에서 첫 사람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기 위해 적법한 자격자로서의 시험을 성령의 인도 하에 자원해서 받으시게 된 것입니다. 이 일에 만일 예수님이 아담의 후손들과도 같이 동일하게 죄가 있는 분이셨다면, 이는 구속자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기에 결코 구세주로의 대속적 사역을 담당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본질에서 하나님이시기에 아담의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분으로서 구원자가 되시기에 합당한 자격을 가지신 유일한 분이 되십니다(행4:12, 히4:14-16, 벧전2:22, 고후5:21). (2)두 번째 성격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받으신 본 시험은 구약교회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실패를 회복시키는 성격을 띠는 것이기도 합니다. 당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교회의 자격(행7:38)을 가지고 광야에서 40년간 시험을 받았던 것입니다. 신8:2의 말씀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 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본문의 말씀으로 미루어 보건대 가데스바네아에서의 가나안 정탐사건(민13:1-2, 25-26)은 가나안을 진격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진위를 가늠해 보는 하나님의 의도적인 시험의 성격을 띠고 주어진 사건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마치 이삭을 아브라함의 나이 백세에 약속의 자녀로 주시고는 다시 그를 번제로 하나님 앞에 바치라고 명령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믿음의 신실성을 시험하셨던 경우와 동일한 방식으로 말입니다(창22:1-2). 왜냐하면 가나안 정복은 오직 하나님과 그 분의 약속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방식을 통해서만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일면 표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외견상으로는 사 백 여년 이상 노예집단과 방불한 종살이로 일관해 살아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잘 훈련되고 정비된 가나안 족속들의 삶의 모습은 자신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유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 정탐꾼은 모든 사실을 외적으로만 판단해서 부정적으로 보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가나안 정복사건을 구속사적 관점과 신앙적 통찰력을 갖고 해석했습니다. 때문에 비록 현실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열세일지라도, 지금까지 불가능한 상황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과 인도하심으로 극복하게 하셔서 이곳 가데스까지 선히 인도해 주셨기에, 앞으로도 가나안 정복을 위한 성전(聖戰)에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적 손길로 친히 간섭해 주실 것임을 믿음으로 확신했던 것입니다. 오직 말씀을 의지하는 것으로 말미암는 승리에 대한 확신 말입니다. 이런 신앙적 확신은 열 정탐꾼이 이스라엘을 가나안 족속들과 비교해서 '메뚜기' 같다는 표현으로 비하한 반면(민13:33), 여호수아와 갈렙은 "저들은 우리 밥이다'라고 아예 무시한 지적 속에 잘 표현돼 있습니다(민14:9). 이렇게 현실적으로 열악한 상황을 믿음으로 극복하는 신앙자세는 시종일관하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만을 생명의 도리와 신앙과 삶의 근간으로 붙잡고 살아가는 데서 나와지는 전인격적 신앙고백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 근거해서 결국 이스라엘은 열 정탐꾼의 보고에 동의한 나머지 가나안 정복의 직전에서 회귀해 급기야 광야에서의 40년 유랑의 생활에 접어들게 됩니다(민14:34).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대가로 주어지는 언약적 심판의 일환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 2세대에 의해 40년이 마치는 날 다시 가나안 정복의 길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신1:3). 지금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이 '광야'라고 하는 장소가 갖는 상징적 배경과 의미가 여기에 있으며, 동시에 '40'일이라고 하는 시험기간에 대한 상징적 의미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돼야 할 부분입니다. 이런 구속사적 계시사건의 연속선상에서 예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보냈던 40년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신명기 말씀에 의지하여 마귀의 시험에 대처하셨던 것입니다(신8:3, 16, 13). 이렇게 예수님은 구원자의 자격으로 자기 백성을 자신 안에 품으시고 저들을 대표해서 참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십니다. 구속 사역의 온전한 성취를 위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옛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실패했던 것을 다시금 이와 같은 방식을 재현하심으로 참 이스라엘인 신약의 성도들 안에 회복시키려고 스스로 대표적으로 시험에 참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로 인해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시는 한편, 사단을 이기는 권세를 동일한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를 통해 신약의 성도들에게 공급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미 마태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마2:15)라고 했던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을 아기 예수님의 출애굽사건에 적용시킴으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예표적 출애굽사건이 예수님 안에서 그와 생명적으로 연합될 참 이스라엘인 성도들에게 실체로 성취된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동일한 구속사적 원리 안에서 이제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죄로 인해 타락했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몸 된 교회에 연합하는 모든 성도가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새 이스라엘인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마귀로 말미암는 죄의 권세를 멸하시고(요일3:8) 친히 당신의 부활하신 생명을 그의 몸 된 교회공동체에게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을 구속사의 진행 속에서 해명해 본다면, 실패한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실패한 이스라엘을 거쳐서,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로소 하나님의 참 아들이시며 진정한 구원자로서 참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아의 모습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 된 '새 언약'의 본질적인 사상이 이런 사실에 모아집니다. 그렇습니다. 이후 예수님께서는 사단의 세 번에 걸친 시험(마4:3-11)을 오직 말씀으로 물리치심으로 메시아로서의 본격적인 사역을 위한 준비를 마치십니다. 실로 사단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는 성도의 신앙의 본질과 성격이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거기에 자신을 드리는 방식으로 비로소 성립된다는 사실을 친히 전인적으로 보여주신 모범적 사건이었습니다. 동시에 보다 본질적으로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왕권이 능력 있게 나타나는 것을 통해 마침내 사단의 권세를 패배시킴으로 이후 공생애 사역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날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와 종말론적 구속사역의 최종적 성취를 보증하고 담보하는 계시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와 새 언약과의 관계 세례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에 이끌리어 40일 광야에서의 금식과 사단으로부터의 시험받으심은 이제 예수님으로 하여금 명실공히 메시아로서 구원사역에 요구되는 일체의 필요충분 조건이 온전히 충족됐음을 시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신 사건은 첫 째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전락된 인류를 이제 둘째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안에서 의인 삼으심으로 재창조의 사역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실현을 도모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향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속죄사역은 옛 언약에 실패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는 과정에서 새 언약에 담긴 가장 중요한 중심주제입니다. 렘31:34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본문은 크게 두 가지 주제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회복된 이스라엘(33절)이 한결 같이 여호와를 알게 된다는 지적이고, 다른 하나는 사죄의 은총과 죄의 영원한 도말입니다. 여기서 앎이란 단순히 지식의 습득만이 아닙니다.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관계의 회복과 이로 인한 관계의 정상화를 가리킵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깨져버린 에덴의 당초 교제와 화목이 새 언약 안에서 다시 회복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이제 새 언약 안에서 회복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영원히 지속될 것을 보증하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결국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및 다윗 언약에서 한결 같이 약속하고 있었던 언약의 영원성은 새 언약 안에서 최종적으로 성취를 보게 될 것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런 새 언약의 영원성과 보증의 확실성을 자연법칙의 불변성에 근거해서 재차 확약하십니다(렘31:35-37). 그런데 새 언약 안에서 이런 놀라운 축복이 보장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하나님을 향해 오랜 세월 불화와 단절의 원인이었던 죄의 문제(사59:1-2)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이제 율법이 이스라엘의 마음 판에 새겨지는 것을 통해 온전한 순종이 보장되고, 이로 인해 33절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는" 언약의 중심사상, 곧 임마누엘 신학의 온전한 성취로 인해서입니다. 물론 이런 표현은 메시아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마침내 도래할 것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백성간에 연합된 일체감이 형성된다는 얘깁니다(계21:3, 엡2:14-16). 더 이상 구약 시대의 선지자나 제사장 등의 다른 중보자가 필요치 않게 된다는 지적입니다. 이미 메시아로 말미암은 화목이 회복됐기에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됐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예레미야 선지자의 새 언약 안에서는 문맥상 감추어진 메시아 사역으로 말미암는 성령의 사역, 즉 성령의 공작하시는 신비한 구원 적용의 사역이 에스겔의 새 언약인 '화평의 언약'(겔37:26) 안에서 보다 확장되고 구체화됩니다. 에스겔의 새 언약에서는 율법에 대한 이스라엘의 온전한 순종의 가능성과 확실성을 새 영으로 말미암는 새 마음의 부은 바 됨에서 찾습니다(겔36:26-27). 그러나 사실상 새 언약에 근거한 회복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상의 새 언약의 계시적 특징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지적은 새 언약의 효력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의 약속을 신실히 이행하시기 위해 바벨론 포수(捕囚)로부터 3차에 걸쳐 포로귀환을 시도하셨습니다. 스룹바벨과 느혜미아에 의한 성전재건도 시도됐습니다. 에스라에 의한 특단의 종교적 구조조정도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고토로 귀환한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 새 언약에 약속된 여타의 언약적 특징들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전히 저들은 시내산 언약을 어기며 과거 다윗 왕조를 멸망케 했던 불법과 불의를 자행하는 일을 일삼았을 뿐입니다. 포로후기 선지자들의 기록내용(학개, 스가랴, 말라기)이 이런 사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결국 이런 사실들이 의미하는 바는 새 언약의 내용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가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에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 언약 안에서 예표적 성취에 불과한 것이고, 이를 통해 보다 근원적으로 실현시켜야 할 다른 최종목표가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이스라엘'의 회복 말입니다. 1)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개시 (1)예수님의 사역 개시의 새로운 국면 마태는 마4:12에서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애 사역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그 시기를 세례요한의 투옥사건(마14:1-12)에 맞추어 기록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접하신 후에 이내 유대 지경을 떠나서 팔레스틴 최북단 지역인 갈릴리로 거처를 옮기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피행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신에는 분명한 구속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 요한도 예수님의 본격적인 갈릴리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유대지역의 초기사역을 설명하면서 "세례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요3:24)고 의미있는 표현을 덧붙입니다. 이는 세례요한의 투옥과 예수님의 사역과는 밀접한 불가분의 어떤 상관관계가 맺어져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에 있어서의 예표와 실체, 선구자와 당사자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관계성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사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그(예수님)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세례요한)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고 한 세례요한의 말을 인용해 기록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세례요한과 예수님과의 필연적 관계에 있어서 사역상의 임무교대를 염두에 두고 말한 내용입니다. 즉 예수님을 위한 세례요한의 선구자적 사역은 그 분의 등장과 본격적인 사역을 위한 일련의 준비가 완료되었기에 그는 구속사의 진행의 현장에서 사라져야 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런 식으로 지금 마태는 세례요한의 투옥사건이 하나님의 구속사 경륜에 있어서 한 과정을 마감하는 사건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는 동시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새로운 신기원(新紀元)적 국면을 맞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흥하여야 하겠고 세례요한은 망하여야 할 것'을 기록하고 있는 사도 요한의 시각이 이런 관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바야흐로 구속사역의 주체로서 예수님께서 사역의 전면에 나서실 때가 이르렀기에 주의 길을 예비한 선구자로서 세례요한의 사역은 종식돼야만 했던 것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본격적인 사역의 개시를 세례요한 의 투옥사건에 맞추어 기록하고 있는 구속사적 배경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2)갈릴리 사역의 구속사적 의미 요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세 번에 걸친 사단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마감하신 예수님은 거의 1년여에 가까운 기간을 유대와 갈릴리지역을 오가시면서 본격적인 갈릴리 중심의 공생애 사역을 위한 예비적 사역을 담당하신 내용을 확인하게 됩니다(요1:29-4:42). 이 기간동안 예수님의 사역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를 '예비적 성격'을 띤 준비기(準備期)라는 견해는 아직도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의 길을 평탄케 하는 선구자의 자격으로서 여전히 죄사함에 이르는 회개의 세례사역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요3:22-24). 24절에서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는 표현은 30절의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는 말씀과 짝을 이루어 예수님의 사역이 본격적인 단계로 접어들지 않았음을 우회적으로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비록 사도 요한이 다른 공관복음서 기자들과 같이 갈릴리 사역을 본격적인 예수님의 사역의 개시(開始)사건으로 드러내 강조하고 있지는 않지만, 유대를 중심으로 한 예수님의 사역이 세례요한의 사역과 중첩(重疊)되고 있음과 그가 아직 옥에 갇히지 않고 있음을 강조하는 내용을 통해서 암묵적(暗默的)으로 공관복음서 기자들의 관점에 동의하고 있음을 넉넉히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세례요한의 사역과 중첩되는 1년여 기간을 과도기적인 예비적 사역의 기간으로 보내시면서 본격적인 사역에 대비하십니다. 이런 상황하에서 세례요한이 당시 유대의 분봉왕 헤롯의 불륜을 고발함을 이유로 투옥돼 결국은 참수형을 당하게 됩니다(마14:1-12).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세례요한의 사역은 사실상 종식됩니다. 마태는 이상의 세례요한의 투옥사건을 예수님의 본격적인 갈릴리 사역과 연결시키는 것을 통해 사실상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공개적으로 시사합니다. 바야흐로 예수님의 메시아적 공생애 사역이 본궤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두 가지 측면에서 증거합니다. 한편은 세례요한의 투옥으로 사실상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그의 예비적 성격의 사역이 종식됐음을 알립니다(마4:12). 다른 한편으로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9:1-2)이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된 사실을 근거로 공적 사역의 개시를 증거합니다. 마4:15-16입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리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막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이는 이스라엘의 구약역사 속에서 신약시대의 갈릴리 지역이 받았던 정치적 군사적 종교적 사회문화적 멸시와 천대와 차별로 말미암은 역사적 암울함을 빗대어 예언한 내용입니다. 그렇게 당시 파란만장한 역사의 소용돌이 가운데 처해 있던, 그래서 철저히 '이방의 갈릴리'로 소외된 흑암의 지역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먼저 임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심령적으로 낮고 천하고 가난한 대로 임하는 복음의 원리를 좇아서 말입니다(마5:3-10, 고전1:26-29). 그런데 마침내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 지역을 본격적으로 공생애 사역을 위한 복음의 전진기지로 삼고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것도 세례요한의 투옥사건을 계기로 해서 말입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을 마태는 구속사적인 안목으로 직시하는 가운데 이 사건을 이사야 예언의 구체적 성취로 연결시킴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비로소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개시됐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흑암의 지역에 복음의 큰 빛이 비추게 된 것입니다(마4:16). 우리의 경우도 예수님 밖에 있었을 때의 상태를 성경은 어두움으로 설명합니다(엡5:8). 어둠은 죄와 허물로 죽어버린 소망없는 진노의 자녀의 영적 상태를 일컫는 표현입니다(엡2:1-3). 그런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의 빛이 비추어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마태가 마4:17에서 "이때부터"라고 때를 나타내는 부사적 표현을 사용한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이는 세례요한의 투옥과 때를 맞춰서 갈리리지역 특별히 가버나움에 거처를 정하신 것이 바로 구약의 말씀(사9:1-2)을 응하게 하는 사건이었다는 지적입니다. 따라서 그때로부터 본격적인 예수님의 메시아적 복음사역이 개시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죄와 사망의 어두움을 쫓는 복음의 빛이 갈릴리의 흑암의 백성들에게 먼저 선포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적 생애는 오직 말씀을 응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시는 고난의 종의 사역(사53:4-6)을 담당하셨습니다. 이로서 주님의 사역의 특징은 우리가 육체의 연약함으로 할 수 없는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대속적 사역으로 나타납니다. 이제 성도는 예수님의 속죄 사역의 공효를 믿고 의지하는 것을 통해 값없이 의롭다라고 여김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성도 됨의 특징 또한 구원의 보증의 영으로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를 넉넉히 이루는 순종의 삶을 통해 확증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우리를 부르신 자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삶을 통해 확인됩니다. 옛 사람의 모습은 사라지고 새 사람의 성품으로 변화되는 것으로 인해 증명됩니다. 곧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으로 사는 삶 말입니다(갈2:20). 이는 우리 자신을 해석된 말씀 앞에 조건없이 기꺼이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안에서 이런 구체적인 전인격적 변화의 조짐과 실질이 감지되며 확인되는지요. 그렇다면 분명히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난 것이 확실합니다. (3)예수님의 사역의 특징 예수님은 당신의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마4:17)라고 선포하십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사역의 총체적 주제는 천국사상인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당신 안에 하나님 나라를 품고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의 본체가 하나님이시기에 말입니다. 우리는 사단의 시험을 오직 말씀으로 물리치시는 메시아적 왕권의 발휘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천상적 권세가 능력으로 역사되고 있음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왕적 통치의 개념으로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 속에서 이미 세상 속에 침노해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이 진행됨에 따라 보다 적나라하게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가 권세있게 발휘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전파하기 위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a. 제자 삼으심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 제자를 부르시는 사역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인 수난과 죽음과 부활, 승천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절정으로서 택자들을 구원하셔서 천국 시민의 법적 지위를 확립하시는 전제적(前提的) 사역이라면, 이후 제자들은 성령을 힘입어 예수님께서 이루신 이 구속의 공효를 구체적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적용시키는 것을 통해 마침내 교회를 세움으로(엡2:20)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가 지속적으로 발휘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으로서의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움으로 예수님께서 이루신 새 언약에 오고 오는 세대의 남은 자들을 동참시킬 사도들과 뭇 제자들을 육성하신 것이 바로 제자 삼으심의 본의(本意)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격적인 갈릴리사역을 시작하시면서 먼저 제자를 삼으시는 일에 관심을 집중하십니다. 이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자신을 통해 완성될 대속적 복음의 능력을 구체적으로 당신의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을 통해 이 땅위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함입니다(마16:18-19, 28:19-20). 예수님은 먼저 12사도 중 특별히 갈릴리 어부 출신의 네 제자를 부르십니다. 물론 예수께서 제자를 부르신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초기 유대지역의 사역을 통해 얼마간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요1:35-51, 3:22). 안드레와 베드로와 빌립은 이때에 이미 제자로 부름을 받은 터였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는 이미 이전에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났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대략 1년 후 이번에는 여기 본문에서 보듯이 예수께서 직접 찾아 오셔서 그들 두 사람을 친히 제자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빌립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마태는 이들 두 사람 뿐 아니라 같은 어부로 생활하고 있는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부르시는 내용도 함께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이들을 향해 한결같이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고 말씀하시며 제자로 삼으십니다. 이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며 주님을 좇게 됩니다. b. 말씀을 통한 계시 복음서 내용의 상당 부분이 예수님의 교훈에 관한 것인데 이는 예수님의 말씀의 중요성이 그가 행하셨던 활동 못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랍비로 간주했고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명칭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랐던 백성들은 당시 유대 랍비들과 예수님간에 최소한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랍비들이나 서기관들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적 권위에 호소하지도 않으셨고 율법을 인용할 때에도 그것을 초월하는 신적 권위를 갖고 계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교훈을 살펴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지만 특별히 고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을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희생제물로서의 죽음으로 설명하십니다. 이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6:53)고 하신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또 "예수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19:30)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이 구속 사역의 성취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죽음이 자발적인 것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기 양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셨고(요10:11), 위에서 허락되지 않았다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해할 권세가 없었습니다(요19:10-11). 셋째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철저히 대속적인 것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막10:45).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등의 말씀이 이를 증거합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사단에 대한 승리로서의 죽음임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결실을 맺는다는 비유를 말씀하신 직후 자신의 죽으심에 관해 언급하시면서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요12:31)고 하셨던 것입니다. 다섯째로, 그의 대속적인 죽음심을 회개하고 믿음을 가진 자에게만 효력을 발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개시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을 전파할 때에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권하셨습니다(막1:14-15). 이 복음은 자신의 죽으심에 집중된 예수님의 사명 전체를 포함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결코 의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회개하는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마9:12-13, 막2:17, 눅5:31-32). c. 예수님의 복음증거와 천국도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는 세례요한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하라"고 대답하십니다(마11:3-5). 이는 약속된 메시아의 오심과 천국의 도래 사실이 예수님의 이적들뿐만 아니라 그의 복음 증거를 통해서도 나타나게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눅16:16의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는 말씀 속에서도 동일한 관점이 발견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기대되었던 바가 복음 증거를 통해 현실로 실현되었다는 지적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들은 자들은 구약의 어떤 선지자들과 의인들보다 월등한 특권을 누리게 된 셈입니다(마13:16-17). 앞에서 언급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마11:5)는 말씀은 메시아에 관한 이사야의 예언인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사61:1)의 구체적 성취입니다. 그리고 마5:3이하와 눅6:20 이하에 수록된 팔복 강화 역시 구약적 배경 하에서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팔복 중 첫 번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해당한다는 사실이 이를 반영해 줍니다. 팔복에 관한 복음은 단지 하나의 약속이거나 구원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 완전한 성취는 장래에 되어지겠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와 임재의 사실에 관한 선포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천국복음은 실제적 권세와 능력이 있는 것이므로 그것은 말씀뿐만이 아니라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사실인 것입니다. 막2:1-12에서 소개하고 있는 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병을 고치시는 사건 속에서 이런 사실이 명백하게 확인됩니다. d. 행위를 통한 계시 예수님의 행위를 통한 계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들과 직접 연관됩니다. 예수님의 이적들은 크게 자연적(自然的) 이적과 신유적(神癒的) 이적으로 구분됩니다. 자연의 이적들 중 가장 유명한 것들로는 물고기를 잡으신 이적(눅5:1-11), 바다의 폭풍을 잠잠케 하신 이적(막4:37-39, 눅8:22-24) 및 오병이어로 오천 명의 군중을 먹이신 이적(마14:15-21, 막6:35-44, 눅9:12-17, 요6:5-13) 등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오병이어의 이적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시는 창조주의 권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별한 중요성을 지닙니다. 이는 본 이적 기사만이 유일하게 사복음서 모두에 수록되었다는 점에 의해서도 확인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신유의 이적 중에는 현재 의술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전혀 고치지 못하는 초자연적 권능에 의한 것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나면서 소경된 자를 고치신 것이나(요9:1-7), 손 마른 자를 고치신 것(마12:9-13, 막3:1-5, 눅6:6-10)이 그러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기도 하셨습니다(마9:18-19, 23-26, 눅7:11-15, 요11;17-44). 한편 우리가 예수님의 이적과 관련해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있습니다. 이는 과연 이러한 이적기사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신유기사를 다루고 있는 부분을 주의해서 살펴보면 치유 받은 이의 믿음의 역할이 종종 강조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눅17:11-19). 특히 예수님의 이적을 표적(表蹟)이라고 칭했던 사실 또한 의미심장합니다(요2:11, 3:2, 6:2, 9:16, 20:30). 결국 예수님의 이적의 주된 목적은 그가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이는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요10:37-38). 물론 예수님께서는 심각한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도우시려는 순수한 동정심의 발로에서도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고 자신의 그리스도 되심을 입증하는 것이야말로 이적의 주된 목적이었음이 분명합니다. e. 예수님의 이적과 천국도래 나아가 예수님의 이적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 나라의 왕적 통치가 능력 있게 발휘되는 것을 통해 이미 현재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세상 가운데 침노해 들어와 천상적 활동을 전개시키고 있음을 증거하는 계시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천국복음 전파와 이적을 행하심이 거듭 함께 언급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돼야 합니다(마4:23, 9:35). 마13:16에서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에서 '봄'은 이적을, '들음'은 복음을 듣는 것을 각각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적들은 메시아적 구원행위로서 종말론적 성격을 갖습니다. 즉 예수님의 이적들은 사단의 권세가 이미 깨뜨려졌으며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도래했음을 입증해 주는 표식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질병을 치유하시거나 여타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종종 '꾸짖으신다'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병으로 기진해 있을 때,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시사' 병이 떠났습니다(눅4:39). 이 꾸짖으신다는 말은 죄와 그에 따른 저주의 결과로 인해 이 세상에 들어온 모든 파괴적인 사단적 세력들을 제어하시는 예수님의 절대적인 왕적 권위를 시사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이적들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를 보여주는 실례라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예수님의 이적적 권능 사이의 필연적 상응성(相應性)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적을 통해 가장 뚜렷이 드러납니다(마9:18-19, 23-25). 복음서 자체에는 이 이적의 구속사적 의의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컬어지는 천국에는 '다시 사망이 없다'는 계21:4의 내용을 고려해 보건대, 죽은자가 다시 살아난 이적이야말로 천국도래로 말미암은 구원의 진수(眞髓)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요컨대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적 그 자체보다는 그 이적을 통해 계시된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그로 말미암는 실제적인 구원에로의 참여에 있습니다. 공생애 초기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찾아다닌다는 말을 들으셨을 때, 예수님께서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1:37-38)고 말씀하신 것도 이런 시각에서 이해돼야 할 줄 압니다. 2)예수님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면서 선포하신 일성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마4:17)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천국이 가까왔다'라는 표현은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그러나 이내 도래하게 될 가까운 미래의 사건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미 현재적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은 이미 예수님의 탄생이 갖는 구속사적인 의미가 제반 구약 언약의 총체적 성취자로 오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증명한다는 점과, 세 번에 걸친 마귀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신 사건을 통해 메시아의 천상적 왕의 권능이 권세 있게 현재적으로 발휘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증거한다는 데서 명백히 확인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본질상 하나님의 본체로서 당신 안에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를 품으시고 세상 역사 가운데 침노해 들어오신 하나님 나라이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으로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가 구속사 진행의 점진적 성격상 이중 구조적으로 현실화 될 것을 가르칩니다. 곧 예수님의 초림으로 말미암는 현재적 하나님 나라와, 그 분의 재림으로 인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그것입니다. 이 두 나라의 도래와 성격을 살펴봅니다. 이는 선지자들의 새 언약이 지향하는 궁극적 성취의 실체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인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새 언약이 옛 언약과 비교해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죄에 대한 영원한 사면(赦免)사상입니다. 죄의 용서와 죄책(罪責)의 면제 말입니다. 그 나라의 현저한 특성은 죄의 근절로 인해 더 이상 죄가 있지도 활동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서 찾아집니다(계21:4).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먼저 죄를 사면해 주시는 사건을 통해서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과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를 증거합니다. 막2:1-12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고, 이런 사실의 증거로 중풍병 마저 치료해 주심으로 자신의 메시아로서의 구속자적 권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 사건은 단순한 치유사역 이상의 구속사적 의미를 갖습니다. 즉 예수께서 중풍병자의 죄가 사함 받았다고 선포하셨을 때, 이는 하나님만이 가지신 죄 사함의 권세를 예수님 자신도 동일하게 가지셨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시사하는 것으로서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동일시 여겨 선포한 계시적 사건입니다. 이렇게 마태는 사실상 본 사건을 통해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 증거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 사건은 예수님의 여타의 치유사건과 내용과 성격, 그리고 질적인 면에서 차원을 달리합니다. 보다 진전된 구속사적 진의를 밝히 드러낸 사건으로 간주됩니다. 아울러 모든 질병의 근본이 원천적으로는 죄로 비롯된 사실도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범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타락이 사망을 비롯한 온갖 질병과 저주를 세상 가운데 초래시켰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죄 사함의 구속사적인 의미는 모든 질병으로부터의 치유와 해방까지를 함의합니다(계21:4). 마태가 8장에서(8:16-17) 치유사건과 축사사건이 갖는 본질적인 의미를 사53:4의 고난의 종의 대속적 사역을 근거로 설명하고 있는 배경이 이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적 속죄사역에는 일체의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질병과 저주로부터의 치유와 자유함이 포함돼 있습니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죄와 질병은 동일한 성격을 띠고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구속사적 승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모든 백성들을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해방시켜 치유시키고 회복시켜서 종말론적 구원에 참여시키는 유일하고도 불변하는 구원의 근거로 작용합니다. 이제 본 사건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곳마다 병에 걸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사역의 소문이 이미 유대지방 전역에 널리 퍼졌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한 중풍병자가 친구들에 의해 침상에 들려서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마가는 본 사건을 소개하면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직접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음으로 지붕을 뜯고 위에서부터 끈으로 달아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막2:4-5). 대단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저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기꺼이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본 사건에서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병을 치료해 주시기 전에 먼저 환자의 죄를 사해 주십니다(마9:2, 막2:5, 눅5:20). 이는 마가가 본 사건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이야말로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 자신'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려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본 사건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 바, 치유가 복음의 수여와 함께 베풀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외적인 경우이며 특별한 상황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치유함을 받는 것이 반드시 구원을 받는 것과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 중풍병자의 치유사건의 경우,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역사를 베푸시는 가운데 인간들을 그러한 불행에로 빠져들게 만들었던 원인으로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분으로 오신 당신의 인격과 사역을 군중들 앞에서 의도적으로 드러내시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가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각종 질병을 고치시는 치유사역을 베푸시는 것은 사실상 예수님의 사역의 총화인 십자가를 지시는 속죄사역의 한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죽으심의 본의(本意)는 당신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 값에 대한 대속물이 되어 주시는 데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구들에 의해 침상에 들려서 온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2:5, 마9:2)고 말씀하십니다. 중풍병을 먼저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의 은혜를 먼저 베푸신 것입니다. 그러자 무리 중에 섞여 있던 일단의 서기관들이 내심 불평을 자아냅니다.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7절)라고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말은 '하나님께 불경스럽게 말하다'란 의미로서 곧 '신성모독'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신다는 선포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신 사실을 공개적으로 증거하는 경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속에 나타난 구속사적 본질과 본의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유대종교 지도자들에 있어서 이 말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귀결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창조자의 전지성(全知性)으로 이내 저들의 심정을 꿰뚫어 보시면서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마9:4)고 꾸짖습니다. 여기서 '악한 생각'이란 저들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바르게 인식하고 있지 못한 데 대한 나무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치유이적과 죄 사함의 진의를 바르게 살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바르게 알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을 책잡아 송사의 구실로 삼으려는 악한 의중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막2:9)고 질문을 던지십니다. 물론 둘 다 어렵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 사함의 역사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으로 인해, 눈으로 즉각 확인할 수 있는 중풍병의 치료가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던지신 예수님의 의중은 이내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 주심으로 동일한 천상적 권능을 발휘해 죄 사함의 역사가 실질로 베풀어 진 사실을 증거 하시려는 데 있습니다. 이는 사실상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신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내려는 저자의 강력한 의지가 담겨진 기술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곧 이어 중풍병 치유사건과 죄 사함의 복음적 사건을 연결시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10절)고 선언하시면서 이내 중풍병자를 향해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11절)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침상에 누워있던 중풍병자가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제 발로 걸어 나갑니다(12절상). 이는 예수님에 대한 서기관들의 불평과 왜곡된 관점을 불식시키는 말씀과 사건으로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왕적 능력과 권세가 적나라하게 발휘되는 모습입니다. 곧 예수님의 치유사역을 통해 죄 사함의 권세마저도 갖고 계신 명실상부한 하나님이신 사실의 확실한 증거 말입니다. 마가는 이런 사실의 뒷받침을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12절하)는 우회적 표현을 통해 예수님의 신적 본성과 하나님으로서의 절대자적 권능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 자신인 사실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각종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병 고침을 받는 것 그 자체가 곧 복음에 접촉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본문에서의 중풍병자의 경우는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본 치유사건의 본의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실 뿐 아니라, 죄까지도 사하시는 본질상 구속주로서 하나님이신 사실을 강력히 증거 하려는 데 마가의 기록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아울러 본 사건은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역으로 인해 죄의 용서와 치유의 역사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와 능력이 지금 예수님을 통해 현재적으로 시행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천상적 왕의 통치와 권능의 방식으로 세상 역사 가운데 침노해 들어왔습니다. 성경은 이를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축사(逐邪)사역을 비난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이는 사단을 멸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왕적 능력과 권세가 현재적으로 발휘되는 결정적인 증거로서 곧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도래한 명백한 증거임을 천명하십니다. 마12:22-30입니다. 무리들이 귀신의 역사로 인해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옵니다. 예수께서 메시아적 권세와 능력으로 그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런 예수님의 메시아적 치유능력을 귀신 왕 바알세불의 역사로 매도합니다(24절). 예수님께서는 저들이 비방하는 귀신축출행위와 사단의 연관성은 논리적 모순임을 지적함으로써 저들의 사악한 시기심을 고발하는 동시에(26절),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는 강한 자의 집의 세간을 늑탈할 수 없음(29절)을 비유로 자신의 메시아적 권세가 지금 사단의 세력을 더 강한 자의 능력으로 제압하고 있음을 명백히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축출하시는 사건과 관련해서 두 가지를 강조하십니다. 먼저 강한 자의 세간을 늑탈하는 더 강한 자의 능력의 원천이 다름 아닌 성령의 역사임을 증거합니다. 누가는 동일한 사건을 기술하면서 '성령을 힘입어'라는 표현을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눅11:20)라고 묘사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의미하는 구약적 표현(출8:19, 시8:3)으로서 결과적으로 동일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처음부터 동참하신 성령께서 치유사역을 주도적으로 수행해 나가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가 가장 극명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다음으로 축사사건이 내포하고 있는 구속사적인 의미는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도래해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마12:28).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불치의 병을 고치시는 사건은 분명히 사단의 왕국이 괴멸되고 있음을 보여주며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의 왕적 권세와 성령의 권능이 현재적으로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한편 하나님 나라는 성경적으로 볼 때 단순한 축복의 장소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가 미치는 전(全)영역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 나라는 구조적으로 이중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곧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으로 인해 이 땅에 실제적이고도 종말론적으로 도래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현재적 하나님 나라, 또는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라고 부르기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훗날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 가시화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해 완성된 형태로 도래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천국은 '이미'(already) 도래했으나 '아직'(not yet)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실현된(현재적)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 자들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제부터 우리 안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분의 천상적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누리는 천국 백성의 신분으로 여기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옛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이미 죽었고 새 사람된 신분의 소유자로서 말입니다(고후5:17, 15, 갈2:20). 이 사실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이 사실을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는 신앙의 본질 속에서 구원받은 천국백성으로서의 거룩성과 영원성이 보장되는 법입니다. 한편 누가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확인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를 확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답하시는 가운데 현재적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실상을 분명히 확인해 주십니다. 눅17:20-21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시기'를 질문해 옵니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이며 시험적인 질문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있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항상 예수님과 매사에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시기'를 묻는 이들의 질문을 통해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가졌던 천국관이 정치적인 메시아의 출현으로 말미암는 다윗 왕국의 재현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는 특별히 제자들의 메시아 왕국관에서도 명백히 확인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으로 인해 물리적이며 가시적인 메시아 왕국이 조만간 실현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리다툼을 위해 경쟁적으로 다툼을 일삼기도 했습니다(마18:1-4, 19:27, 20:20-21).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극구 만류했던 이유 중에 하나도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마16:21-22). 이런 식으로 당시 바리새인들은 천국관에 대해서 이미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선입관을 갖고 있었기에 '시기'만을 강조해서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답변해 주십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저들의 천국관을 교정해 주시려는 의도에서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곧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본 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부분적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본문을 통해 강조하고 계신 하나님 나라는 무엇에 앞서 '불가시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지적이십니다. 눈으로 확인하고 볼 수 있는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나라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천국은 특정한 영역이나 장소 및 위치의 개념을 갖는 제한적인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나라가 바로 '너희 안'에 곧 '우리 안'에 무형적이고 영적으로 존재해서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이런 지적은 위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바로 실현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즉 현재적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가 미치는 곳이면 어디나 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이 말은 어느 특정한 지역이나 위치를 제한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그런 곳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 나라는 과거 역사의 어는 한 시점에서 완전히 이루어졌다거나, 아니면 현재 역사와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그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할 것이 아님을 가리킵니다. 오히려 과거에 이미 임했고 현재적으로도 임하고 있는 중임을 시사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역사 속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실질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한 비유를 다양한 경우를 통해 설명하실 때 특별히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마13:31-33)를 통해 설명하신 것이 이런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증거합니다. 이는 현재적 천국의 역동적인 활동성과 확장성 및 변화성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메시아적 사역과 관련해 일말의 의구심을 품고 있는 세례요한의 질문에 답변하시면서 자신의 치유사역과 복음사역을 한데 묶어서 메시아적 사역의 확실성을 확증시켜 주십니다. 이는 메시아의 도래로 말미암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력히 시사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마11:2-5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개시는 세례요한의 선구자적 사역의 퇴장과 자연스럽게 임무가 교차됩니다(마4:12). 이는 구원의 실체로서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새로운 계시 시대의 도래가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생애 사역을 한참 활발하게 전개시켜 나갈 즈음 옥에 갇힌 세례요한이 일단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제자들 편에 질문을 해 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말입니다. 이런 그의 질문을 단지 문자적으로만 추정한다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메시아적 '존재성'을 의심하는 듯한 인상을 풍깁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수세(水洗)시에 앞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은 바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계시를 보여주시는 가운데 "누구든지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을 알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요1:33).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있기 전까지는 세례요한도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약에 예언 된 참 메시아인지를 명시적으로는 알 수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요1:31-33상). 결국 세례요한은 계시의 말씀을 좇아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고 하나님의 표징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명약관화하게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존재성을 확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마3:13-17). 물론 세례요한에게 나오시는 예수님과의 처음 대면에서 무엇인가 경이(驚異)로운 영적 교감을 감지하고 예수님의 존재성을 어느 정도는 사전인식하고 있었음을 아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마3:13-15). 이런 사실로 보건대,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일말의 심경의 변화가 있었다고 해도 예수님의 메시아적 존재성 자체를 의심해서 제자들을 확인 차 보냈다는 데는 여전히 의심의 여지가 남습니다. 그보다는 세례요한의 선구자적 예비사역에서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사역의 성격을 임박한 심판의 도래라는 긴박성 속에서 증거했음을 감안할 때(마3:7-12), 자신의 현재적 처지와 관련해 메시아적 심판이 지연되는데 대한 불안감에서 나와진 조급함의 처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메시아적 존재성의 문제가 아니라, 임박한 심판을 집행하실 심판주로서 메시아적 '사역'에 관한 문제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단지 추정이 아닌 어느 정도 확신의 근거를 갖고 접근할 수 있습니다. 마11:2입니다. 다시 말해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 이유가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라고 마태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존재성'의 의심 때문이 아니라, 바로 '사역'의 측면에서 세례요한이 당초 기대했던 심판주의 행동이 전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란 사실을 충분히 확인시켜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세례요한의 질문에 답변하시면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4절)고 말씀하심으로 세례요한의 의구심이 예수님 자신에 대한 메시아적 존재성의 문제가 아니고 단지 사역의 측면에서 다소 오해가 있었음을 암시적으로 시사하십니다. 이는 세례요한이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소유했던 동일한 관점의 정치적 메시아관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했음을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회복된 다윗 왕조의 참 다윗 왕으로 오셔서 로마의 압제 하에 있는 유다를 구원하시고 명실공히 세계를 다스릴 메시아 왕국을 실현해 주실 것을 기대해마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그의 사역의 성격 또한 임박한 심판으로 말미암는 긴장감과 긴박성을 띨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이사야서35:5-6과 61:1의 말씀을 전해주시는 것을 통해 우주적 심판에 앞서 고난의 종으로서의 메시아 사역이 선행돼야 함을 알려 주십니다. 아울러 지금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사역의 내용이 다름 아닌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강조하심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정당하게 시행되고 있음을 시사해 주십니다. 나아가 이런 사실은 세례요한으로 하여금 메시아 사역의 이중성을 새롭게 인식케 함으로 정당한 메시아관을 재정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리라 확신합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께서는 각종 치유사역과 복음사역이 활발하게 전파되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가 현재적으로 능력 있게 발휘됨을 증거하십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주권적인 통치가 막힘 없이 시행되고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는 이미 세상 가운데 침노해 들어와 당신의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는 가운데 그 나라를 역사 속에서 점차적으로 확장시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3)새 언약의 제정 예수님의 사역은 점차 절정을 향해 달려갑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어지고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신 이후(마16:16-20)부터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공개적으로 거듭 역설하십니다(마17:12, 22-23, 20:19, 26:12). 이런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어서 일대 변화를 이루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곧 본격적인 십자가의 대속적 사역을 담당할 시기가 임박해 왔음을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생애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제자들과 함께 나누십니다. 이 자리에서 잔을 받으시고 사례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눌 것을 권하시면서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선포하십니다(눅22:18). 이는 유월절 식사와 관련된 내용으로서 16절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하나님 나라에서 유월절이 온전히 성취될 때까지 다시 반복하지 않으실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곧 유월절을 폐하신다는 선언적 의미를 갖습니다. 이런 사실은 지금까지 구원의 예표적 사건으로 계시돼 왔던 유월절 의식이 이제 유월절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안에서 실체화되기 때문입니다(고전5:7). 이런 의미에서 유월절 예식은 폐지되는 동시에 곧 이어 나누시는 만찬을 통해 새로운 성찬식이 제정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찬식을 새 언약이라 부릅니다. 이 부분을 좀더 세밀하게 확인해 봅니다. 지금 예수님은 유월절의 주인으로서 식사에 참여하십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유월절의 주인이라 함은 유월절 예식이 함의하고 있는 구속의 도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화됐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 예식의 자리에서 실체로서 예표를 폐하시고 새롭게 '새 언약'을 제정하십니다(20절). 유월절을 새 언약 곧 성찬식으로 대체하십니다. 새 언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 자기 몸을 친히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까지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 속에서 예표되어져 나온 모든 신학적 원리들을 완성하시는 실체의 자격과 신분에 입각하여 예수님은 '새 언약'을 제정하십니다. 여기서 포도주와 떡은 예수님의 보혈과 육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이 언약은 성립됩니다. 이것이 '새 언약'인 이유는, 지금까지의 구약 역사 속에서 등장했던 모든 언약들을 총체적으로 완성하는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의 피'라는 말은 일찍이 시내산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와 세우신 언약식을 기억케 합니다(출 24:1-11). 이 언약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참 백성인 교회가 세워질 것을 보여주는 모형적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예레미야는 장차 새 언약이 도래할 것을 내다보았습니다(렘 31:31-34). 이런 식으로 지금 예수님께서 새 언약을 제정하시는 것은, 이것이 당신의 죽음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유언이기도 했습니다. 유언이란 그것을 말한 사람이 죽음으로서 비로소 효력을 발생합니다(히 9:16-17). 예수님께서 마침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되자 이 유언은 효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새 언약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교회는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새 언약에 참여합니다. 즉 성도는 성찬에 참여함으로 자신이 은혜 언약에 성립되어 있는 사실을 실질로 맛봅니다. 그러니까 성찬은 은혜 언약에 대한 거룩한 표호(表號)요 인호(印號)일 뿐입니다. 따라서 성례로 말미암아 은혜가 생겨나지는 않으며, 또한 은혜가 성례에 의해서 좌우되지도 않습니다. 표호란 어떤 것을 알려지게 하는 수단입니다. 가령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을 때, 그가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성립되어 있었던 사실이 그렇게 할례를 받음으로 다시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례는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은혜를 알려지게 하고 선언하여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표호입니다. 그것 자체가 구원을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또한 인호란, 그것이 첨부되어 있는 어떤 것의 가치를 확증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가령 대학교를 졸업할 때에 학교 직인이 찍힌 졸업장을 받습니다. 이때 직인은 인호 역할을 합니다. 즉 직인이 졸업장을 받은 사람을 식자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고, 이미 그는 식자(識者)인 것이며, 따라서 학교 당국이 인호로써 그의 자격을 공적으로 선언했던 것입니다. (1)예수께서 새 언약을 수립하시는 것을 통하여 장차 이 언약이 가져올 구원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대속적 구원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새 언약의 주된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 친히 그 몸을 희생 제물로 삼으신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마1:21). 예레미야 선지자에 의해 선포된 새 언약의 주된 강조점이 바로 죄사함의 문제입니다(렘31:34, 50:20). 죄를 영원히 기억치 않으신다는 약속입니다. 영원한 속죄사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레미야의 새 언약은 예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새 언약 안에서 비로소 언약의 본질과 본의를 발견하게 됩니다. (2)특별히 히브리서 기자는 히8장에서 아론의 제사장직을 능가하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측량할 수 없는 우월성을 증거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되시는 은혜의 언약(새 언약)의 현저한 탁월성을 제시하므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우월성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가 첫 언약을 언급할 때, 그는 히브리 민족이 시내산 율법의 통치를 받고 있었으며 레위 제사장들이 율법의 규례를 좇아서 중보자의 직분을 담당하고 있던 사실을 언급합니다. 이에 반해 둘째 언약, 혹은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도입되었고, 제정되었으며, 확립된 것으로 그 분만이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다는 계시적 선언입니다(행4:12). 이에 대한 증거로 히브리서 기자는 렘31:31-34을 인용합니다(히8:8-12).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가 본문에서 아직 미래에 있을 역사적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었다면 그 구절 중 어느 것도 히브리서 기자의 주장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레미야의 새 언약의 진정한 당사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으로 인해 출현하게 될 교회(고전12:12-13, 엡1:23),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새사람으로 재창조(엡2:14-15)되는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갈6:16)에 적용될 것이 확실합니다. (3)왜냐하면 본문에서 새 언약의 당사로 지목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회복된 역사적 이스라엘로 통칭하게 될 경우, 우리는 이미 바벨론 포로로부터 회복된 역사적 이스라엘의 삶 속에서 여전히 시내산 언약에 불순종하는 패역한 저들의 모습을 포로후기 선지자들의 기록을 통해 확인해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은 처음부터 죄의 문제를 온전히 극복함으로 자율적 순종이 보장되는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을 지향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이제 예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새 언약 안에서 바야흐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옛 언약 안에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죄를 아주 없이해 주지 못하던 것을 하나님의 본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 희생제물의 실체로 오셔서 단번에 죽어주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히9:12). 아울러 성령하나님께서 신비로운 공작으로 인해 이 속죄의 공효를 당신의 백성들에게 적용시켜 주심으로 죄의 용서와 영원한 죄책의 심판으로부터 사면 또한 보증해 주십니다(고후1:22). 우리가 율법을 마음 판에 새겨서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음도 바로 이 보혜사 성령님의 내주, 교통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습니다(갈5:16). 육체가 연약해서 할 수 없는 그것을 거듭난 새 인격으로 하여금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게 하심으로 넉넉히 이를 감당케 하시는 것입니다(롬8:3-4). 4)새 언약의 제정과 교회의 출현 다시 한번 확인하거니와 새 언약의 핵심 사상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대속적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의 구체적 내용은 예수님께서 친히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또한 저들을 의롭다고 하시기 위해 부활하신다는 사실 속에서 확인됩니다(롬4:25).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새 언약을 제정하시기 전, 당신의 사역이 막바지에 이르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의도적으로 십자가의 수난사건을 제자들에게 강조해 반복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위함이며 동시에 십자가 사건 후에 사도들의 복음적 사명의 중요성을 각성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입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 사건을 제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발설하신 이유를 살펴봐야 합니다. 이는 발설의 시점을 유의해 살펴봄으로써 본질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1)이때는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에 의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어지고 이어 공식적으로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선언하신 직후입니다(마16:16-21). 이런 사실은 교회의 본격적인 출현과 예수님의 수난과는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의 한결 같은 신앙 고백적 인격의 토대 위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실 텐데(마16:16, 엡2:20), 이는 다름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이 먼저 지불되는 것을 통해 비로소 역사의 전면에 그 천상적 거룩한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는 암시입니다. 후에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에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서 석별의 정을 나누며 교회를 당부하는 과정에서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교회의 순수성과 진정성을 보존케하기 위해 장로들의 교육적 사명의 중요성을 심각히 일깨워 줍니다(행20:17-32). 이때 바울은 교회를 일컬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구속사적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는 교회의 잉태와 출현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대속 사역에 기초하고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2)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지금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결의에 찬 말씀과 예루살렘에서의 수난을 상호 연결시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려는 새 언약의 본질이 다름 아닌 교회공동체를 세상 가운데 공식적으로 출현시키려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레미야의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안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며 동시에 예례미야의 새 언약이 약속하고 있는 이스라엘(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렘31:31)은 다름 아닌 '새 이스라엘'로서 교회공동체를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 막힌 담을 헐고 한 새 사람, 한 새로운 교회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었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중보사역으로만 가능합니다(엡2:11-22). 구약의 속죄제사 제도는 바로 이 사실을 지향하는 그림자로서 처음부터 예표적 사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히10:1, 9:10). (3)그렇습니다. 새 언약의 목표는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교회를 세상 가운데 출현케 하기 위한 불가피한 해산의 고통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성도의 구원은 근본적으로 교회공동체를 이루기 위함이며, 참된 구원은 교회를 바르게 이루는 것을 통해 그 당위성과 진정성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교회에 속해있느냐의 문제는 곧 구원론적인 근거로 작용한다는 종교개혁자들의 지적은 교회의 세속화가 보편화 된 이 시대에 각별히 심사숙고 해봐야 할 명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구원의 꽃이며 열매입니다. 때문에 바른 교회에 속해서 바른 교회를 이뤄야된다는 명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물론 지상의 지역교회는 온전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사단의 공회라 일컬어지는 거짓 교회, 죽은 교회도 존재한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계3:1). 그렇다면 바른 교회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요? 이 문제와 관련해서 종교개혁자들은 부지런히 성경을 연구하고 상고한 끝에 참 된 성경적 교회의 삼대 표지(標識)를 '말씀의 순수한 선포', '성례전의 신실한 시행' 및 '권징의 철저한 집행'에 있음을 천명한 바 있습니다. 오늘날 이 모든 교회적 요소들이 형식만 남아 있고 대부분 본질과 본의가 심히 왜곡돼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일일뿐더러, 과연 이 시대의 교회들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교회로 서 있는지를 심각히 고민해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정녕 우리 중 어느 누구라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는 말씀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심이 성경의 총체적 지식의 체계를 좇은 것이 아닌, 그래서 부분을 붙잡고 자기소견에 좋을 대로의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우리의 수고가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롬10:2-3) 참으로 바른 성경적 교회를 이룬다는 명제는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가히 지상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 설교, 전도, 교육, 봉사, 구제 등 제반 교회적 신앙활동들은 한결 같이 바른 교회를 이루기 위한 방편들로 작용합니다. 이때 보다 중요한 것은 외적 형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본질을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에 대한 총체적 계시관의 재정립을 통해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실제적 삶의 자세 말입니다. (4)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 훈시로 그 실체가 시사됐습니다. 이후 교회는 예수님의 새 언약의 구체적 실행인 죽음과 부활사건을 통해서 잉태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시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하나님의 강림과 신비로운 공작 및 내주, 교통, 적용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세상 가운데 마침내 그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의 소위 성령행전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복음이 실제화 돼, 성령님의 유기적이고 은닉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택자들이 구원을 받으며 이들을 통해 교회가 본격적으로 세워지는 지를 보여주는 결정판입니다. 마16:18에서 약속하신 교회출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을 함축하고 있는 새 언약의 구체적 실현과 시행을 좇아서 이런 식으로 역사 속에서 그 천상적 자태를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천상적 기관입니다. 여기서 교회를 '천상적' 이란 용어로 표현한 것은 그 기원이 영원 전 하나님의 작정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며(엡1:4-6, 딤후1:9, 딛1:2), 그 성격 또한 본질적으로 계시의 말씀에 근거해 천상 지향적인 가치관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6:33, 골3:1-3, 롬12:1-2). 그렇습니다. 예레미야의 새 언약이 처음부터 목표했던 것은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안에서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게 될 교회였습니다. 참으로 교회는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동시에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십니다(엡1:23). 나아가 성령님의 내주, 교통하시는 역사로 말미암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방식입니다. 롬11:33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4.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의 관계 우리는 위에서 예레미야를 위시한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계시된 새 언약이 일차적으로는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시사하고 있으나 보다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안에서 이루어질 새 이스라엘로서 교회의 출현을 전망하고 있음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선지자들의 새 언약 또한 처음부터 여타의 언약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하고 있었던 이중성을 띠고 주어진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최종적으로 성취된 구약 언약의 총화인 '새 언약'의 경우는 어떨까요? 그 동안 구약역사 속에서 언약적 구속사의 점진적 진행과정을 살펴보는 가운데 각각의 언약들간의 상호관계 속에서 확인된 바 있는 언약의 내적 통일성과 구조적 일치성 및 연속성의 원리는 동일하게 예수님의 새 언약 안에서도 발견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확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새 언약은 구약의 제반 언약들의 총화인 선지자들의 새 언약의 실체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예수님의 새 언약 안에서 확인된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이중구조 및 상호관계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 본 주제에 대해서는 이미 '예수님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내용에서 익히 살펴본 바 있습니다. 여기서는 개괄적으로만 언급할 것입니다. 성경이 시사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일반적인 개념은 우리가 흔히 잘못 알고 있듯이 죽어서 가는 천당, 내지는 천국의 장소적 개념이 아닙니다. 물론 원천적으로 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보다 적극적으로 신약의 복음서가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독특한 성격은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생애 속에서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의 행사가 현재적으로 능력 있게 발휘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으며, 귀로 들을 수 있는 실체가 되어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으로 실제화 되었다는 지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재적으로 도래한 이 하나님의 나라를 밭에 감추인 보화와도 같이 찾을 수도 있고, 아주 값진 진주와 같이 살 수도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마13:44-46). 그러나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특징은 천상적 통치권이 이 땅에 보편적으로 역사되는 것이 아니라 제한적으로 역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적극적으로 이 왕권을 수납해 순종함으로 영생에 이르는 가 하면, 누구는 예수님을 거절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고 오히려 심판을 자초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1)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확인할 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현재적으로 도래한 사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신 축사사역에서 가장 극명하게 확인됩니다. 그것은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표지입니다(마12:28, 눅11:20). 예수님께서 이런 사실을 자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실 수 있음은 마귀보다 더 강한 자로 오셔서 귀신의 총수격인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심으로 저를 먼저 결박해 놓으신 사실에 근거합니다(마4:11, 12:29, 요일3:8). 물론 그 외 다른 초자연적 치유사역 또한 구약에 예언 된 메시아적 사역을 보증하는 증거(사35:5-6)로서 메시아의 왕권이 현재적으로 발휘되고 있음을 분명히 증거합니다. 특별히 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마9:1-8, 막2:1-12)은 다른 치유사건과는 달리 그의 죄를 먼저 사해주시고 이를 확증케 하기 위한 방편으로 후에 중풍병을 치유해 주심으로 자신을 구속주로 계시하신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한결 같이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그 분의 메시아성의 확증은 물론, 하나님 나라의 왕적 통치가 권세있게 그 천상적 권능을 발휘하고 있음을 시사함으로 현재적 하나님 나라 도래의 확실성과 사실성을 증거함에 다름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바로 이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속해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으로 그 분의 왕적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누린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삶의 현장 속에서 왕의 통치권을 받아 순종하는 천상적 모습이 구체적으로 확인돼야 합니다. 재창조된 새로운 피조물로서 거듭난 새 인격의 발휘로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구체적인 실천적 행동입니다. 구원의 은혜는 본질적으로 은혜의 수납자로 하여금 시혜자의 뜻에 따르려는 자율적 순종을 촉발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잠시 지적한 대로 이런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역과 이로 인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수납된 것이 아닙니다. 아니 어느 경우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거부되고 배척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은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이런 식의 거부와 배척의 결과에 따른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제약을 받습니다. 부인되기도 합니다.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2)반면 예수님의 제자들과 일부 따르는 무리들에게만은 사정이 다릅니다. 예외입니다. 이들에게는 그 나라가 절대적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을 통해 발휘되는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와 권능이 너무나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뒤로하고 예수님을 붙좇습니다. 기꺼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편입됩니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권세 있게 실현되는 대상이고 통로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통해 현재적으로 도래한 하나님 나라가 담대하게 전파됩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증인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들 가운데 현존하는 실체로 기능합니다. 이들로 인해 하나님 나라(천국)는 작은 겨자씨에서 새 들이 깃들만큼의 큰 나무로 자랄 것이며 세상을 그 나라의 천상적 능력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마13:31-33).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 백성을 모으시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메시아 왕국을 현재적으로 시작하신 것입니다. 제자들로 그 나라의 친 백성을 삼으시고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믿음으로 따르는 제자들에게 붙여진 교회라는 이름은 가견(可見)적 하나님 나라, 또는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설정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려는 시도는 아닙니다. 어쩌면 본질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으나, 현실적이고 현상적으로는 여전히 지상의 지역교회의 모습 속에 참 성도와 거짓 성도가 공존하며, 갖가지 죄의 권세와 역사가 활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사이에 불가분의 관계가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관계를 동일시 할 수 없음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둘 사이에 여전히 불연속성의 긴장과 갈등이 상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하나님 나라의 미래성 : 예수님의 재림으로 성취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도래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교회를 통해 가시화 된 천국 = 통치적 개념)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전부만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 국면만으로 기술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신정적 통치가 비록 예표적이기는 했지만 가시화 됐던 역사적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보다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측면에서 세상 역사의 끝에 비로소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국면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는 '이미'(already) 왔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아직'(not yet) 오지 않은 것으로 말하곤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이란 지적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국면을 말할 때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친히 집행하실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심판을 포함합니다(마13:39-41, 49-50, 눅21;31). 모든 사람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의인은 복락의 세계로 들어가고 악인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날 것입니다. 영벌의 지옥과 영생의 천국의 삶으로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마25:31-46). 우리는 이런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측면을 예수님의 직접적인 언급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1)눅22:14-18입니다. 그 나라는 유월절의 본질이 온전히 성취되는 나라입니다. 본문의 요지는 땅에서의 유월절을 폐지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유월절 식사를 유보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앞에 놓고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통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 유월절 식사는 유월절 규례를 폐지하시는 자리입니다. 지금까지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 예표적으로 계시돼 왔던 구속의 도리가 이제 유월절 양의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고전5:7)의 대속적 죽음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림자인 예표를 폐지하고 실체인 새 언약의 성찬식으로 대체하시는 것입니다. 성찬식의 제정경위가 이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찬식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는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사면해 주시기 위해 기꺼이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후부터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새 언약 안에서만 그 분과 연합돼 죄용서와 구원이 보장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의 폐지를 선포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않으시겠다'(18절)고 다짐하십니다. 16절에서는 같은 내용을 다른 표현을 빌려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본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접근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다시 유월절 식사를 할 것이며, 아울러 포도주도 마실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될 줄 압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이제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으로 인해 유월절 규례는 폐지되고 새 언약이 발휘되겠지만 그것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즉각적인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세상 가운데서는 구원의 역사와 더불어 불의와 불법과 착취와 압제가 공존할 것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의 본질적인 의미가 온전히 실현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라는 촉구의 말씀입니다. 사실 유월절에 근거해 성사된 출애굽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애굽의 압제와 노역과 종살이로부터의 구원과 해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로서 죄로부터의 온전한 자유와 해방 및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은 사실상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때라야 비로소 성취를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 사건을 통해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대목은 새롭게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18절), 일컬어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확실성과 사실성에 대한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치유하시는 사건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축사의 능력이 하나님의 손, 즉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가능했던 사실을 선언하시면서 이를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 사건과 연결시키십니다(눅11:20, 마12:28). 그렇습니다. 귀신을 축사하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시사하셨듯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가장 확실하고 명백하게 증거하는 사례입니다. 이 외에도 죄를 사하시고(막2:1-12), 천국 복음이 전파되며, 기타 초자연적인 메시아적 치유(마11:5)의 능력을 행하심은 한결 같이 예수님의 메시아성의 확증과 이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역사 속에 침노해 들어와 천상적 권세를 발휘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시던 주님께서 이제 공생애 사역의 절정에 즈음해 다시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눅22:18). 사건의 전말을 살펴 보건대, 지금 유월절 식사의 자리에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벙어리 귀신을 내어쫓음으로 이미 현재적 도래가 확인된 하나님 나라(통치권)와는 다른 차원, 다른 성격의 하나님 나라를 가리킴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국면인 미래성 말입니다. 역사의 종말로서 '실현될 하나님 나라' 말입니다. 현재적 하나님 나라는 구속사 진행의 점진적 성격상 속죄사역의 절정에도 불구하고 예비적이고 임시적이며 제한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반면에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는 세상 역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성격을 띠고 도래함으로 최종적이고 완성적이며 최후적 심판의 성격을 띠고 출현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는 죄와 사망이 더 이상 왕노릇 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사도 요한은 자신의 계시록에서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다고 기술합니다. 체질이 근본적으로 갱신된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권세로 인해 본질이 왜곡된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계21:4).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당신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이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심과 아울러 '아직' 실현되지 않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동시에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2)이 뿐만이 아닙니다. 눅17:22-25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인자(人子)의 날로 규정하십니다. 여기서 인자란 구약적 표현으로서(단7:13-14)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오시는 만왕의 왕되신 영광의 주님을 가리킵니다. 사도 요한은 심판의 환상을 통해 인자를 세상 끝 날에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서 추수하는 심판주로 묘사합니다(계14:14-16, 마25:31-33). 따라서 인자의 날이란 그리스도의 날,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 또는 메시아 통치의 시대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심판의 날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로 보건대 인자의 날의 성격은 성도들에게는 구속의 주님을 영광의 주요 만왕의 왕으로 만나는 희락의 날이 되겠지만(마24:30-31, 고전1:8), 불신자들에게는 죄를 판단해 영벌에 처하게 하시는 두려운 심판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마25:41-46). 누가는 인자의 날의 도래를 설명하면서 '번개의 비침'을 비유로 듭니다(눅17:24). 이는 비단 누가뿐만이 아닙니다. 마태의 소위 종말론장이라 일컫는 마24장에서도 인자의 임함을 설명하면서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27절)고 번개의 비침을 예로 듭니다. 여기서 번개의 비침을 통해 인자의 오심을 설명함은 예수님의 재림의 성격을 범우주적 가시성, 즉각성, 그리고 보편성의 원리에 근거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림의 경우와는 근본에서 차이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더 이상 은밀한 중에 오시지 않습니다. 제한된 사람에게만 영광을 받지 않으십니다. 전 우주적으로 오십니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해 애곡하게 될 것입니다(계1:7). 만왕의 왕으로, 영광의 주님으로, 그리고 심판주로 오셔서 세상을 마감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민족들을 그 앞에 모으시고 우편 양과 좌편 염소로 구분하실 것입니다. 우편 양들에게는 천국을 기업으로 상속해 주실 것입니다. 좌편 염소들은 지옥 형벌에 처해질 것입니다(마25:32-33, 41).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컫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최종적으로 완성하시기 위함입니다(계21:1). 이런 식으로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뿐 아니라 동시에 그 나라의 미래적 국면을 동시에 증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교회시대는 '이미' 실현된 현재적 하나님 나라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그래서 지금 오고 있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와 중첩되는 과도기적인 기간 속에 위치해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그 분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교회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능력을 일면 선취적으로 맛보아 체험하면서도 동시에 영적 긴장과 갈등과 대립의 구도 속에서 전투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엡6:12). 3)교회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 이제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는 어떤 관계성을 맺고 있을까요.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본대로 하나님 나라의 보편적인 개념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권의 시행이라는 측면에서 정의한다면 그 나라의 의미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왕으로 그 왕적 권능과 권세를 막힘 없이 발휘하시는 것을 가리킴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은 다른 무엇에 앞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제자들의 공동체적 삶 속에서 가장 현저하고 명백하게 수납되고 확인되며 발휘된 내용들입니다. 한편 교회란 예수님을 주와 하나님으로 믿고 신앙하는 신앙공동체로서(롬10:9), 성령의 신비한 공작과 연합사역으로 인해 예수님을 머리로 각인의 성도들이 지체로 더해진 신앙적 유기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합니다(고전12:13, 엡1:23, 5:30, 골1:24). 그래서 몸의 각 지체들이 머리의 통제하에 다양성을 통해 통일된 행동을 나타내 보이듯이 교회공동체 또한 같은 원리 하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아 적극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그 분의 구속받은 백성들의 신앙적 집합체인 셈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 사이에는 동일한 왕과 동일한 백성의 관계 속에서 왕의 통치권이 가장 권세있게 행사(行使)되는 현장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양자간 상당한 동질성과 불가분의 관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질문하시는 과정에서 베드로가 대표적으로 고백한 이른바 '메시아의 비밀', 또는 '메시아의 자기은닉 사상'(마16:16, 20)을 기초로 교회를 세우실 것을 선포하십니다(18절). 이어서 예수님은 천국열쇠를 교회에게 맡기심으로 천국을 매고 푸는 복음진리의 권한행사를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에게 맡기십니다(19절). 우리는 이상의 내용을 통해 예수님께서 논리적인 사고체계 안에서 교회와 천국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바로 그 사실은 교회와 천국의 두 개념이 매우 밀접하게 관련됐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본문에서 보면 천국열쇠의 효력은 교회설립에 대한 공표로부터 비로소 그 진가가 발휘될 것임을 간파하게 됩니다(18-19절). 다시 말해 바야흐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더불어 드러난 '메시아의 비밀'로 인해 그때부터 천국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통하여 전파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이 그 나라의 이르는 열쇠를 소유하고 그 일을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즉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하나님에 대한 증거자로서, 하나님의 구속적 행위에 대한 중계자(agent)로서의 역할을 이어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세상(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축복으로 이끄는 문을 열거나 닫는 지식의 열쇠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예수님의 사도들에게로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눅11:52). 우리는 이런 사실의 구체적인 실례를 오순절 성령강림 후 베드로의 복음설교를 듣고 하루에 삼 천명이 제자로 더해진 사실(행2:41)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식으로 복음은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합니다(롬1:16). 그리고 이렇게 세상 가운데서 믿음으로 불러 낸 구원받은 무리들의 집합체를 일컬어 한 새로운 사람들의 집합으로서 교회라고 부릅니다(엡2:14-15, 행5:11). 이들이 다름 아닌 천국백성들인 것입니다. 이런 상호관계와 원리 안에서 교회와 천국(하나님 나라)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성과 연속성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 할 수만은 없는 불연속성 내지는 이질성 또한 발견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훨씬 크고 포괄적인 용어일 뿐 아니라 교회에 포함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교회는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가는 과정에 놓여 있기에(엡2:22) 그 자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대변하거나 현시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요소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양자는 비록 분리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성을 맺고 있다할지라도 교회가 곧 하나님 나라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는 곧 교회다라고 단정하기에는 더 깊은 숙고가 필요할 줄 압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서 고백하고 성령님께서 공급하시는 생명과 능력을 힙 입어 신생(新生)한 교회공동체는 하나님 나라를 그것의 궁극적인 목적지로 삼고 현재 진행형으로 달려가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교회는 구속사 진행 선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장 가까운 '근사치'(approximation)로서 존재하며 가장 신뢰할 만한 하나님 나라의 '지방자치기관'(communal)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친 백성들로 구성된 교회공동체 - 그것이 비록 부족과 결핍과 불완전함이 여전하다 할지라도 - 속에서 가장 확실하고 현저하게 그 천상적 통치와 권세를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 인해 혹자는 교회를 일종의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 곧 믿음 안에서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로 구성된 교회의 만수(滿數)가 찰 때에 교회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귀속될 것입니다(롬11:25-26). 그 때에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로, 하나님 나라가 교회로 양자가 통일될 것입니다. 동일시 될 것입니다. 오늘날 지역교회의 성도들이 고난과 긴장과 여러 가지 영적 역경 속에서도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음은 바로 이런 미래적 소망이 우리 앞에 확실히 보장돼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일컬어 종말론적 공동체(an eschatological community)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그 까닭은 교회가 기독론적인 바탕 위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Ⅲ. 결론 이제 본 강론을 맺습니다. 우리는 본 강론을 통해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 됐던 새 언약의 내용들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을 통해 최종적 성취를 보게 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들의 새 언약에 약속돼 있던 이스라엘의 회복 역시 역사적 이스라엘이 아닌 새 이스라엘로서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게 된 교회공동체인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새 언약은 제반 구약언약의 총화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사의 절정임을 간파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새 언약이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몸을 기꺼이 희생 제물로 드린 대속적 사건을 중심주제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눅22:19-20, 마1:21, 렘31:34, 사53:4-6).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 안에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설립하셨습니다(마16:18). 이 교회는 세상 속에서 '이미' 도래한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반영하는 가운데 '아직' 실현되지 않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목적 삼아 오늘도 남은 구속사를 운반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친 백성들로 존재합니다. 교회가 여전히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된다"(렘31:33, 겔36:28, 마1:23, 요1:14, 계21:3, 7절)고 하신 언약의 본질이 마침내 성취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될 것입니다(계21:1).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 **그동안 기도와 성실한 배움으로 동참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부디 거듭 정독하여 공부하시고 새롭게 성경의 총체적 계시관의 안목이 심화되는 기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앎의 본의가 관계의 심화인 사실을 알게 해 주셨기에 더욱 주님과의 깊은 교제와 교통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성도님들의 개인적 삶의 현장 속에서 우리 주님을 왕으로 모시는 통치 받는 백성 된 삶의 모습이 더욱 구체적으로 확인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저 또한 여러 성도님들과 더불어 주님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이 신앙의 경주에 처지지 않도록 함께 열심히 달리고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