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성경구속사 제5강 이스라엘 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 (성경의 범위는 출애굽기에서 열왕기상11장까지임) Ⅰ. 도입 우리는 창12-50장까지를 살펴보면서 이제까지 인류의 초기역사를 통해(창4-11장) 비교적 은닉적이고 암시적이며 묵계적으로 진행되던 하나님의 구속사의 전개가 보다 구체적이며 명시적이고 공개적인 성격을 띠고 적극적으로 세상역사의 전면에 부각되는 것을 봅니다. 특별히 창세기 저자는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한 족장들의 언약 속에 집약돼 있는 '하나님 나라' 계시를 일차적으로 자손 언약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과정에 구속사 진행의 초점을 맞춰 기술하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으로서 창세 전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계시의 총화인 하나님 나라를 구속사라는 내용을 통해 전개시켜 나가시는 과정에서 언약을 성취의 도구로 선용하시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천상적 계시의 입안자(立案者)로서 창조자의 절대적 주권 하에서 만물과 만사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서 섭리적으로 간섭하시고 통치해 가시는 것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인류의 보편적인 초기역사(창4-11장) 속에서 오랜 섭리적 작정의 기간동안 묵계적으로만 진행돼 오던 여자의 후손언약은 바야흐로 아브라함에게 이르러 보다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역사의 전면에 부상됩니다. 이런 사실은 이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해 당초 계획하신 여자의 후손언약을 본격적으로 세상역사 속에서 집행해 나가실 것에 대한 당신의 의지를 강력히 표명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아담과 하와 및 이들을 머리로 하는 수많은 인류의 죄를 구속해 주시기 위해 태초에 원시복음으로 주신 여자의 후손 언약의 당사자로 아브라함을 선택적으로 부르셨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그 동안 인류의 보편적인 역사(창4-11장) 속에서 집합적이고 은닉적이며 암시적으로 족보를 통해 진행되던 여자의 후손 구속사는 아브라함에게 이르러 보다 내용적으로 구체화되며 발전된 양상을 보입니다. 나아가 이 사건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역사가 이제 아브라함을 개인적으로 지명해 부르시는 것을 통해 획기적인 계시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향후 하나님의 구속사의 진행은 아브라함의 언약적 후손을 통해 보다 적극적이고 역동적으로 전개될 것을 전망하게 됩니다. 이후 여자의 후손언약의 갱신이며 발전이고 확장의 의미를 띤 아브라함 언약은 여자의 후손으로서 예비적 실체인 이삭을 거쳐 야곱에게로 이어집니다. 이 과정 속에서 처음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로 불러 주셨던 같은 원리가 그의 자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됨을 봅니다. 즉 이스마엘에 앞서 이삭을, 에서에 앞서 야곱을 택정해 주심으로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구속적 은혜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선택의 성격을 띠고 나타남을 저자는 강조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도 이와 동일한 신학적 원리 안에서 무상으로 공급하시는 천상적 선물입니다. 우리의 선행이나 공과에 따른 대가성의 보응(報應)이 아닙니다. 이제 야곱의 칠십인 식구가 애굽에 이주한 사건은 아브라함에게 맹세로 행하신 횃불 언약(창15:13-16)의 예비적 성취의 일환입니다. 이런 사실은 후에 일어나게 될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출애굽 사건을 보증하는 첫 열매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첫 열매의 수확은 오래지 않아 남은 열매 전체의 수확을 보장하는 계약금에 해당됩니다. 앞으로 이들 칠십인 가족은 횃불 언약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실현됨으로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조상으로 한 하나의 단일 민족과 나라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섭리적 작정의 기간(사백 여년)을 애굽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애굽은 아직은 유아의 수준에 지나지 않는 이스라엘을 양육해야 할 보모로서의 막중한 책임과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입니다. 당대 막강한 제국으로서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절대 우위를 확보하고 있는 애굽으로서는 단지 12아들로 구성돼 아직은 대가족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으로 충분히 성장할 수 있도록 양육해야 하는 최적의 요람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 셈입니다. 이런 사실은 애굽이야말로 야곱의 칠십인 식구가 외세의 간섭과 방해 없이 장기간에 걸쳐서 하나의 거대한 민족과 국가를 형성해 가는데 최적의 장소로 예비된 곳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세상역사를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당신의 선하신 구속사적 목적에 도구로 선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애굽제국을 섭리적으로 선용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인 사실과 세상이 다 하나님께 속해 있음(출9:29, 19:5)을 다시 한번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아울러 야곱의 칠십인 가족들이 애굽에 머무는 기간은 다른 한편으로 가나안을 대표하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해 지는 기간과 맞물린 해(창15:16)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관영해진 가나안의 죄를 이스라엘을 대리적 심판자로 삼으셔서 저들을 심판하시는 것을 통해 결국은 가나안 정복을 시도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향후 전개되는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손길은 가나안 족속에 대한 심판과 족장들과 맺은 언약의 성취라는 이중적 의미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방식을 띠고 진행될 것입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신적 언약성취의 일환으로 야곱의 전 가족이 애굽에 이주하는 섭리적 사건에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사용한 요셉의 유언과 죽음을 끝으로 특별히 자손 언약에 관한 구속사 진행의 대장정을 마감합니다. 요셉은 그의 유언에서 미래의 출애굽 사건의 확실성과 당위성을 열조들(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신 언약에 기초해서 당부합니다(창50:24-25). 이런 내용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때를 좇아서 신실히 성취된 사실을 전인격적으로 신앙한 데서부터 나와진 당연한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 역사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실존과 권능을 생생해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평생동안 생명과 신앙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왔습니다(창39:1-6, 9, 21-23, 41:16, 45:5-8, 50:20). 귀로 듣기만 하던 하나님을 눈으로 뵙는 실제적인 신앙에 깊이 접촉됐습니다. 이런 신앙자태는 모든 시대에 걸쳐 성도들이 마땅히 공유해야 할 '계시 의존적'이고 '섭리 의존적'인 여호와 신앙의 본질입니다. Ⅱ. 전개 출애굽기서 저자는 출애굽기 서문에서 애굽에 이주한 칠십인 야곱의 혈족 중 특별히 그의 열 두 아들들로부터 생육하고 번성한 후손들이 출애굽의 당사자들임을 확증시킴으로 출애굽기서의 내용이 창세기 사건의 연속임과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과 맺으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언약이 신실히 성취되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시사합니다(출1:1-7). 아울러 이들의 수효가 '중다하고 강대하여 고센 지역 온 땅에 가득했다'(7절)고 기술함으로써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확실하게 성취됐음을 강력히 증거합니다. 이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강조함과 동시에 우리가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야 할 마땅한 신앙의 근간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사실을 강력히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은 다음 단계로 족장들의 언약 속에 아직은 미해결로 남아 있는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 정복' 및 그 곳에 세워질 '신정왕국'의 건설 또한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성취될 것을 보증하고 있습니다. 이제 창세기를 통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생애를 주도적으로 섭리하셔서 당신의 언약적 구속사를 시종일관하게 진행해 나오신 '하나님의 열심'은 동일하게 이들의 후손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시어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신실히 인도하실 것이 확실합니다. 이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인 성도를 죄로부터 구원하셔서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지나 종말론적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까지 안전히 인도하실 것을 전형적으로 계시하는 예표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적극적인 구속사의 진행이 이스라엘의 전 역사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이며 점진적으로 전개해 나가는지에 관해 살펴보게 됩니다. 이는 특별히 아브라함 언약 속에 총체적으로 계시된 하나님 나라가 예비적이며 예표적으로 성취된 사건의 전말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속의 도리가 무엇이며, 구원을 누리는 삶의 실질이 어떤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세상 열국 앞에 모범적으로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이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셔서 시내산에서 언약식을 통해 약속해 주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제사장 나라로서, 그리고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구속사적 역할과 기능을 최선으로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출19:1-6, 신7:7-8, 벧전2:9). 그러나 이런 구속사 진행의 역사는 계시의 점진성의 원리에 입각해 볼 때, 처음부터 예표적이며 모형적으로 계시된 바, 이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지향해 나감에 다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에덴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를 파괴하고 하나님과의 교제와 안식을 방해했던 죄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 나라는 실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후에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란 주제에서는 새 언약에 근거해서 죄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제시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렘31:32-34, 33:14-15, 겔36:26-28).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예비적으로 성취된 하나님 나라로서 신정왕국을 향한 적극적인 구속사의 전개를 살펴봅니다. 제1장 자손 언약의 성취 역사(창12장-신명기) 아브라함 언약(창12:2-3, 15:12-18, 17:5-8, 22:17-18)은 내용의 성격상 앞의 언약과의 불가분의 연속성을 띠고 있음으로 총체적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생애를 통해서는 특별히 '자손언약'의 성취를 우선적으로 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살펴보게 됩니다. 특별히 창세기 50장까지의 기록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이며 족장들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까지는 적어도 개인적 선택과 약정이라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구속사는 진행됩니다. 그러나 야곱의 열 두 아들들에게 이르러 하나님의 구속사적 언약계시는 개인에서 가족으로 그 언약적 대상이 확장됨을 봅니다. 이것이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단위의 대상으로 비약됩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언약적 대상의 변화는 아브라함 언약의 점진적 성취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과도기적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가 시간의 흐름이라는 세상역사의 틀 속에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1.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역사 : 횃불 언약(창15장)의 예비적 성취 창세기 저자는 15장에 소개된 횃불 언약식의 맹세적 보증을 통해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자손 언약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그의 후손들을 통해 진행될 것인지에 대해 소상히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방의 객이 되어, 종살이 하다가 사대(四代)만에 많은 재물을 얻어 가나안으로 귀환한다는 얘깁니다. 우리는 창46장에서 야곱의 일행이 요셉의 초청으로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이주하는 사건을 봅니다. 표면적으로는 극심한 기근으로 인한 강구책 같이 보이지만, 이 사건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구속사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계시적 사건임을 이미 살펴봤습니다. 바로 아브라함 언약을 성취시키기 위해 기근을 계시적 도구로 사용, 가나안의 야곱 식구를 이방지역인 애굽으로 이주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의 횃불언약은 본격적인 성취의 무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창50장에서 요셉은 자신이 죽거든 해골을 메고 가나안으로 올라갈 것을 유언으로 맹세시킴으로 횃불언약이 먼 미래에 틀림없이 성취될 것을 염두에 둔 언약적 유언을 남깁니다(24-25절). 이제부터 애굽에 이주한 야곱의 후손들을 섭리적으로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출애굽 역사의 진행과정을 살펴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출애굽기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구속사상'으로 모아집니다. 1)이스라엘 자손의 고역(출1장) 출애굽기 기자는 출1장 서문에서 애굽에 이른 야곱의 칠십인 식구와 그들로 인해 생육하고 번성한 후손들에 관해 언급(1-5절)함으로서 출애굽기가 창세기의 연속적인 사건 전개임을 소개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7절)'라고 기술함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 9:1)'는 아담언약과 노아의 보존언약의 예비적 성취를 생각나게 하며, 동시에 '너희 후손이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게 하실 것'(창22:17)에 대한 아브라함 언약 성취의 일환임을 기자는 독자들에게 시사합니다. 이렇게 해서 아담언약과 노아언약의 갱신이며 발전인 아브라함 언약은 세상 역사 속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신실히 최종적 성취를 향해 진행됨을 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1)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납니다(8절). 이는 횃불언약에서 언급한 사 백 년간의 종살이에 대한 근거가 되는 사건입니다. 여기서 새 왕의 출현은 새로운 왕조로의 변환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요셉을 총리로 발탁했던 호의적인 왕조가 축출되고 상대적으로 적대적인 새로운 왕조가 권력을 승계하게 됐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실은 앞으로 고센 땅에 정착해 살고 있는 야곱의 후손들에게는 이만저만한 위협이 아닐 수 없습니다. (2)새 왕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 대해 위험한 세력으로 간주해 성을 쌓는 노역에 투입합니다(10-11절). 이로 인해 이스라엘 민족은 한 순간에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됩니다. (3)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생육하고 번성합니다(12절). 하나님의 섭리적 간섭하심을 저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열악한 환경까지도 극복하는 신적 언약의 지속적 성취에 다름이 아닙니다. (4)마침내 바로 왕은 히브리 산파를 명해 이스라엘 여인이 출산 시, 남자아이면 현장에서 죽이고 여자면 살려두라는 소위 '영아 살해 명령'을 내리기에 이릅니다(15-16절). 이는 사단이 바로 왕을 도구 삼아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을 방해하려는 일례입니다. 마치 가인을 통해 아벨을 살해했던 경우와 방불하게 말입니다. 이는 여자의 후손 언약 속에 이미 예언적으로 계시된 바 있는 상반 된 두 계열간의 적대적 투쟁관계가 여전히 역사 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로 보건대 이스라엘의 남아 살해 음모는 다름 아닌 여자의 후손 계열을 단절시키려는 사단의 괴악한 술책의 일환입니다. 이 일에 지금 바로 왕이 사단의 하수인으로 악용되고 있음을 봅니다. (5)하나님은 산파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대신 바로 왕의 계획을 무산시킵니다(19절). 비록 바로 왕에게는 거짓 보고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를 위한 히브리 산파의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실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에 대한 히브리 산파의 거짓 보고를 하나님 경외로 말미암은 신앙적 행위로 간주하셨기 때문입니다(21절). (6)바로 왕은 이에서 포기치 않습니다. 집요하게 이스라엘을 공격해 옵니다. 사단적 속성의 반영입니다. 이제는 모든 이스라엘의 남아를 하수에 던져 익사시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22절). (7)이런 절대 절명의 위기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적극적인 간섭하심의 손길은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언약적 사랑과 보호와 인도를 통해 당신의 뜻을 성취해 가십니다. (8)이런 섭리적 결과의 일환으로 이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할 지도자 모세의 출생과 보호를 주관하십니다(출2장). 2)모세를 부르심(출3장) 그 동안 애굽의 환경이 바뀝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학대하던 처음 왕은 죽었으나 그들에게 가해지는 고역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들의 탄식과 부르짖음이 하늘에 상달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고통소리를 통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돌아보실 것을 결심하십니다. 물론 이런 설명은 언약의 성격상 하나님의 주도적인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해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종살이를 아브라함에게 주신 횃불 언약에서 사대로 제한해 놓으셨습니다(창15:16). 하나님의 섭리는 정하신 때를 좇아서 진행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고역으로 부르짖었기 때문에 들으신 것이 아니라, 정하신 때가 가까워오기에 저들을 권념하신 것입니다. (1)이때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일개 목동으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출3:1). 바로 왕의 아들의 신분에서 졸지에 일개 평민의 신분으로 전락된 것입니다. 바로 왕에 의해 살인자로 수배됐기에 불가피하게 애굽을 떠날 수밖에 없었으나(출2:11-15), 이런 사실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적 간섭이 작용했음을 봅니다. 다름 아니라 모세는 자기열심과 자기 의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려 했던 것입니다. 자기부인과 포기 없이는 하나님의 참 된 제자의 삶을 살수가 없는 법입니다. 모세에게는 왕의 아들이라는 신분적 자만과 고도의 지적 교만의 마음이 제거돼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온전히 쓰임 받기 위해 적절한 연단이 필요했습니다. (2)이제 때가 찼습니다. 하나님께서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가운데서 그를 부르십니다(출3:4).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전제로 모세의 옛 사람적 자아와 죄악된 삶을 상징하는 신발을 벗기십니다(5절, 수5:15).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역에 합당한 자로 모세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의중이 이런 방식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곧 천상적 거룩성과 현세적 세속성은 공존할 수 없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3)이어서 자신을 이스라엘 열조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십니다(6절). 이는 선(先) 언약과 후(後) 성취를 통해 당신의 영원하신 목적과 뜻을 세상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신 사실을 증거하시는 내용입니다. 이런 사실이 본격적인 출애굽 사건을 시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과 관련해서 출6장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출6:2-9). (4)이런 사실은 이스라엘 열조들에게 맹세로 약정하신 언약들이 바야흐로 성취될 때가 무르익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제 언약의 구체적 성취를 위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해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시기가 다가온 것입니다(8절). (5)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택해서 출애굽 사건에 지도자로 삼으실 것을 통보하십니다(10절). 이렇게 해서 모세는 이스라엘(자손언약 성취)을 출애굽 시키는 일에 지도자로 소명을 받습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해 모세와 연합돼 그 안에서 함께 구원을 받게 됩니다(고전10:1-3). 이런 사실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역사 속에서 집행해 나가시는 데 하나의 신학적 '공식'과 '원리'로 자리잡게 됩니다. a. 자손언약에 이어 땅 언약의 성취를 위한 가나안 정복 때는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인도자로 삼으십니다. 그 안에서 그와 더불어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을 시도합니다. b. 통치권(왕)의 언약 성취를 위해 사무엘 선지자로 하여금 다윗을 신정왕국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어 왕위에 앉힙니다. 그 안에서 이스라엘은 명실공히 하나님의 신정적 나라로서의 면모를 띠게 됩니다. c. 그리고 이 모든 구약언약과 예표적 사건의 실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 곧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 분 안에서 그 분의 부활의 생명에 연합된 모든 성도들은 죄책의 사면을 받고, 값없이 의롭다고 인정을 받으며, 구원의 실질에 참여하게 됩니다. c. 이런 의미에서 모세를 통한 역사적 이스라엘의 구원의 관계는 예수님을 통한 성도의 구원의 관계를 예표하는 모형과 실체의 신학적 상응성의 원리가 작용합니다. (6)모세의 소명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a. 이스라엘을 시내산까지 일차 인도하는 일입니다(12절). b. 시내산에서 언약식을 체결하고 가나안까지 이들을 인도하는 일입니다(8절). (7)이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하십니다(8절). 이는 애굽에서의 종살이의 고통의 삶을 종식시키는 구원의 땅임을 상대적으로 대비시켜 시사하는 표현입니다. 나아가 회복된 에덴을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3)모세의 사명감당(출5-10장)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일로 애굽을 향합니다. 사 십 여년 전 젊은 혈기에서 분출되는 자의적 열심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대신하려 했던 실수를 회고하며 이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 그 분의 열심으로 전신갑주를 입은 채 바로를 향해 거룩한 사역의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는 더 이상 애굽의 막강한 왕자의 신분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미디안 광야의 보잘것없는 일개 목동의 신분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일뿐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며 그 분의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와 소유된 백성의 자격으로 거듭난 자입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부름받은 하나님의 대리인의 자격으로 출애굽의 역사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새로운 구속사의 지평을 여는 계시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사 십 여년의 광야에서의 은둔의 시기는 결코 그에게 잊혀진 시간이 아닙니다. 사라진 시간이 아닙니다. 젊음을 빼앗아간 낭비의 시간은 더더욱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앙적 연단과 훈련의 시간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거듭 태어나기 위한 신앙적 진통과 산고(産苦)의 시간들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때가 찬 구속사의 경륜에 접촉되는 영광에 부름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부름받은 증거로 미디안의 거칠고 황량한 들판을 제멋대로 거닐었던 때와 먼지와 땀에 절어버린 헤어진 신발을 벗어야 했습니다. 자신의 죄악 된 옛 사람의 자아를 벗어야 했습니다.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옛 사람의 행실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새사람을 입어야 했습니다. 새롭고 거룩한 하나님의 막중한 사역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던 옛사람을 과감히 벗지 않고서는 천상의 사역과 이를 감당할 거룩한 삶은 보장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저자는 모세의 신발을 벗기시는 하나님의 의중을 '거룩'이라는 단어를 통해 설명합니다(출3:5).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며 하나님의 사역은 거룩한 사역이기에 이를 감당할 하나님의 사람은 마땅히 거룩하지 않으면 미(未)자격자이며 동시에 무(無)자격자일 뿐입니다. 여기서 거룩의 신학적인 설명은 헌신, 구별 그리고 순결을 의미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서신서에서 신약의 성도를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하면서 동일하게 거룩한 행실을 요구합니다(벧전1:15). 그렇습니다. 성도는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입니다. 죄의 왕노릇하는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의 왕노릇 하는 권세에 붙들린 자들입니다. 따라서 이후로는 성도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兵器)로 죄에게 내어주어서는 안됩니다. 의의 병기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감당해 나가는 일에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려야 할 자가 된 것입니다. 이는 죄에 대하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은 자가 됐으며 그 분의 부활과 함께 하나님께 대해 산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롬6:11-14). 성경은 이를 뒷받침하면서 우리로 그렇게 '여기라'고 선포합니다(11절하). 이는 하나님의 재가와 인준에 근거한 영원한 죄로부터의 사면(赦免)을 의미합니다(롬8:33, 히10:17). 따라서 우리의 육신이 연약해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넉넉히 하십니다. 죄의 권세를 제어할 수 있는 성령의 생명의 법이 우리 안에 내주(內住)하셔서 우리의 새사람의 인격을 주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능력을 늘 염두에 두고 매사에 행동하고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경건을 연습하는 삶의 실질입니다. 이런 결과로 인해 신앙은 성숙되고 말씀의 자립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모세는 바로를 만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보내 줄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이유를 분명히 제시합니다. 즉 광야에서 희생제사를 드리기 위함과 절기를 지키기 위함인 사실을 천명합니다(출3:18, 5:1). 이는 새로운 언약식을 체결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과 사명을 뚜렷하게 확증하는 사건을 의미하며 동시에 이후 연례적인 절기를 지키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축제의 한마당을 펼침으로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며 경배하기 위한 의도의 일환입니다. 바로는 모세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일축해 버립니다. 그리고 이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역을 방해하는 처사로 몰아버립니다.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으로 역사를 쉬게 하느냐 가서 너희의 역사나 하라"(출5:4) (1)일을 미끼삼는 사단의 전략 이때 이스라엘은 바로의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는 일에 동원된 상태입니다(출1:11). 특별히 이들은 벽돌을 만드는 일에 집중적으로 투입돼 노예나 다름없이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애굽의 국방과 안위에 적잖은 타격을 가져올 수 있는 문제이기에 바로의 불편한 심기와 거부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그의 적대적 감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욱 가중된 노역을 부담시킴으로서 모세와의 만남의 기회를 근본적으로 차단시키고자 학대정책을 시도합니다. 출애굽기 저자는 이를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출5:9)고 기록함으로써 바로의 학대와 가중된 노역의 성격을 구속사적 안목으로 설명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비하이며 동시에 적대적 감정의 노출을 의미합니다. 즉 벽돌 굽는 데 소용되는 짚을 스스로 줍게 할 뿐 아니라 벽돌 수효는 종전과 다를 바 없이 만들게 함으로서 잠시도 쉴 여유와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는 결국 모세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려는 처사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계속해서 붙잡아 두려는 심사에서 나와진 계책의 일환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더욱 고역에 시달리게 됐을 뿐 아니라 이런 극단의 상황이 장기화 될 때는 그나마 명맥만 유지해 오던 여호와의 신앙은 점차 뿌리 채 뽑혀지는 위기를 맞게 될 상황에 처해집니다. 지금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중된 일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바쁜 시간의 쫓김 속에 가두어 둠으로서 소기의 현실적 목적을 달성하는 한편, 일체의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관심과 표명을 근본적으로 말살하려는 수법을 사용함으로 이중의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바로의 시도는 사단이 이 시대의 성도를 신앙의 무관심과 해이(解弛)로 몰아가는 수법의 전형적인 한 경우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루가 이십 오 시간이 된다해도 부족한 무한경쟁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간이 돈으로 환산되는 시대에서 촌각(寸刻)을 다투는 생존경쟁은 가히 투쟁을 방불하게 만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공과 행복의 잣대는 자연히 돈으로 환산되며 돈을 버는 일에 모든 삶의 관심이 집중됩니다. 이렇게 해서 돈은 가히 신(神)으로 군림하게 됩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을 지적하는 가운데 두 주인의 정체를 하나님과 재물로 묘사합니다(마6:24). 이는 재물을 의인화 시켜 하나님에 버금가는 인격체로 표현함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재물의 가치와 정체성을 하나님 나라를 선양하며 운반하는 일을 위해 주시는 필요한 방편으로 해석하지 못할 때 많은 사람들은 돈을 목적으로 삼아 살아가게 됩니다. 돈에 예속되게 됩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경계시킵니다. 이는 물질에 노예 된 삶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물질에 종노릇하게 될 때 급기야 온갖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된다고 성경은 경종을 울립니다. 마땅히 섬길 자를 섬기지 못할 때 오는 당연한 귀결입니다. 물질에 대한 성도의 삶의 기준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아는 생활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딤전6:8). 이는 일용할 양식의 다른 표현입니다(마6:11). 이에서 더 주시는 부분이 있다면 이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용하라고 주시는 것임을 깨닫는 지혜가 필요할 줄 압니다. 물질에 대한 절제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는 일에 집중함이 성도의 마땅한 삶의 원칙이며 신앙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2) 여호와 하나님 바로의 가중된 노역과 학대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오히려 모세를 원망하며 저주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출5:21). 이는 하나님을 비난하며 멸시하는 처사에 다름 아닙니다. 모세는 심한 죄절과 낙심과 회의에 빠진 채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왜 결과가 더욱 나쁘게 됐느냐고 항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위로하십니다. 강한 손을 더해 바로를 굴복시킬 것을 확약하십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확약의 표징으로 주신 말씀이 '여호와'란 이름입니다(출6:2). 이 이름에는 이 중의 뜻이 함축돼 있습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시는 절대 자존자란 뜻과 이스라엘 열조와 더불어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반드시 성취시키시는 신실하신 구속주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출애굽기 저자는 '여호와'의 의미를 언약을 성취하시는 구속주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낙심하여 탄원하는 모세를 향해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로 계시하심으로 출애굽 사건이 이스라엘의 열조들에게 행하신 약속들이 그랬듯이 '선(先) 언약과 후(後) 성취'라는 기조(基調) 위에서 반드시 이루어질 것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을 모세에게 주지시키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언약은 출애굽사건을 통해 구체적이고 총체적으로 성취될 아브라함의 횃불언약을 예비적으로 집행해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출애굽의 구출역사를 통해 집중적이고 적극적이며 총체적으로 이루실 시기가 무르익었습니다. 언약을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구원자 하나님의 이름이 가장 적절하고 합당하게 사용될 때가 다가왔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기자가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출6:3),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찌라"(6-7절)고 기록한 내용의 의미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돼 왔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란 하나님의 표현은 특별히 언약을 신실히 성취하시는 구원자 하나님의 사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이름입니다. 지금 출애굽 사건이라는 구속사의 새로운 장(場)을 여는 역사적 순간을 목전에 놓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계시하심으로 출애굽사건의 역사를 어떤 방해와 공작에도 불구하고 틀림없이 시행하시겠다는 당신의 강력한 의사를 표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는 이후 구체적으로 전개되는 열 가지 재앙사건을 통해 그 진위를 확인하게 됩니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동일하게 여호와 하나님이 되십니다. 곧 구속의 주로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의 근거가 언약을 신실히 성취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붙들려 있다는 의미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불변하시고 영원하신 언약으로서의 계시의 말씀에 성도의 신앙이 의존돼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당신을 여호와로 계시하시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을 바로의 학정으로부터 확실하게 구출해 내실 것입니다. 열 가지 재앙은 이런 하나님의 의지가 구체적으로 표출된 사건입니다. (3)열 가지 재앙 모세와 아론은 다시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애굽 행을 시도합니다(출7:1-7). 그리고 본격적으로 바로와 애굽의 술객들 앞에서 하나님의 명하신 이적들을 표징(表徵)으로 나타냅니다. 이는 이후에 애굽 전역에 내려질 하나님의 이적적 재앙들이 단지 초자연적 이적으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표적(表蹟)으로서의 확고부동한 구속사적 목적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에 기록된 이적과 기사는 어디까지나 표적으로서의 계시적 목적을 지향하는 수단과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초자연적 현상이라는 점에 호기심이 발동해 이적 자체를 신앙적 목적으로 삼는 어리석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적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의 발동보다도 표적으로서의 이적사건에 담긴 계시적 본의를 바르게 파악해야 합니다. 이럴 때 이적의 구속사적 의미를 정당하게 해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이적과 기사는 단순한 초자연적 현상이 아닌 계시적 사건인 것입니다. 이는 구속사의 경륜이 세상역사 속에서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특별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를 의도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표현방식의 일환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런 성경적 이적 기사를 구속사 진행에 따른 계시적 사건으로 해석하지 않고 모범적 사건으로 해석해서 이 시대에 문자적이고 현상적으로 재현해 보려는 시도는 어리석기 이를 데 없는 유아적 발상입니다. a. 여기 출애굽기에서 소개되고 있는 열 가지 재앙은 이런 의미에서 계시적 사건이지 모범적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들 열 재앙을 이스라엘의 열조들과의 선(先) 언약에 근거해서 구출해 내시려는 하나님의 언약성취를 위한 수단과 방편으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모세를 통해 애굽 전역에만 제한적으로 주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시려는 구속사적 언약성취의 목적이라는 사실과 결부시켜 해명돼야 합니다. 열 가지 재앙 자체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어 호기심의 발동 차원에서 해석하고 적용시키려 하면 안됩니다. b. 그렇다면 표적으로서 열 가지 재앙에 담긴 구속사적 계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세상이 다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선포이며 지적을 가리킵니다(출19:5). 다시 말해 모든 자연만물의 생명의 근원과 통치의 주권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뿐만 아니라 특별히 바로와 애굽의 전 지역에 웅변적으로 고(告)하는 표적으로서의 이적기사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만이 오직 유일한 창조자이시며 전능자이시며 천지의 주재자와 역사의 주관자가 되심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적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표적적(表蹟的)인 이유가 성립됩니다. c. 지금 애굽은 전형적인 흑암의 세력을 대변하는 사단세력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문화의 전형(典型)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바로는 이런 구속사적 배경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사단의 하수인으로 악용되고 있습니다. 바로는 애굽에서 가히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온 세상의 통치자를 자처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숭배하고 있는 온갖 피조물의 형상과 자연을 생명의 공급원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참 생명의 근원이 무엇이며 그 생명을 주관하는 참 신(神)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사단의 미혹하는 역사에 사로잡혀 인생의 본분이 무엇이며 인생의 참 주인이 누구인지를 전혀 분별하지 못하는 깊은 영적 암매에 빠져있는 상황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하심에 근거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요구했을 때 바로가 모세를 향해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5:2)고 한 말의 배경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자신을 만물의 생명의 근원이시며 유일하신 참 신과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통치자이신 사실을 보여주셔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바로의 강퍅한 마음이 돌아설 리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간단히 보낼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d. 이런 사실은 또 다른 측면에서 오랜 세월의 흐름과 혹독한 학정에 시달린 나머지 막연하고 불안하며 불확실한 미래를 염려한 나머지 조상들로부터 계승되어온 여호와 신앙관에 아슬아슬하게 접촉돼 있는 이스라엘에게도 언약에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과 신지식의 회복을 위한 반사적 이익도 전혀 배제할 수 없습니다(출6:9). 이런 직간접적인 계시적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지금 모세를 통해 초자연적 재앙을 바로와 애굽을 향해 내리려 하십니다. 따라서 지금 애굽에 가해지는 재앙의 성격은 단순한 하나님의 권능과 전능하심을 보여주는 일반적인 경우가 아닙니다. 표적으로서의 합목적(合目的)적 계시사건의 일환인 것입니다. e. 따라서 이 시대에는 완성된 계시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당신의 뜻을 나타내십니다. 우리의 신앙적 성격이 계시 의존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이 시대에 성도들이 말씀을 부지런히 상고하고 연구해서 말씀 안에서 자라가야 함을 성경이 강조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 근거해서 나와집니다. 신앙의 성숙은 진리의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이에 따른 순종력의 발휘로 말미암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총화입니다. 부족과 결핍이 없는 완성된 계시의 최종판입니다(딤후3:15-17, 히1:1-2, 계22:18-19). 성경의 자충족성의 원리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는 이 시대에 하나님은 성경 이외의 다른 방법과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계시하지 않으심을 의미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적과 꿈과 이상 같은 현상적(現象的)인 내용은 이 시대에 하나님의 계시전달 수단이 더 이상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말세에 사단은 이와 같은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 할 수만 있으면 성도들을 미혹하기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성경은 증언하며 경계시키고 있습니다(마24:24, 살후2:9-12). f.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이적과 기사는 표적입니다. 계시전달의 수단입니다. 복음의 목적이 아닙니다. 때문에 종교적 현상을 신앙의 내용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계시만이 신앙의 내용이며 목적이고 본질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g. 물론 그렇다고 완성된 성경계시 시대인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이적기사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예외적인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인 경우에 하나님의 뜻은 오직 완성된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분별하는 것이 정당한 원리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완성된 성경 이외의 다른 매체를 교회 속에 객관적인 하나님의 계시의 방편으로 주시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개인적인 현상적 경험은 어디까지 개인의 영적 유익을 위해 적용시킬 문제입니다. 개인의 체험이 교회적 계시로 수납될 수 없다는 얘깁니다. 이는 성경이 자증하는 성경에 대한 유일한 객관적 계시성(딤후3:16-17, 히1:1)을 스스로 부인하는 경우가 되기 때문입니다. h. 그런 의미에서 교회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항상 성경을 통해서만 전달될 뿐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성도들을 향해 한결같이 말씀 안에서 자라갈 것을 권면합니다. 말씀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고 거듭 강조합니다(딤후3:16-17). 사도 바울이 여러 현상적 은사와 경험들을 월등하게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깨달은 말씀에 보다 큰 신앙적 가치와 목회적 비중을 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그는 실제로 깨달은 다섯 마디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고백합니다(고전14:18-19). i. 에베소 교회에 목사와 교사의 은사를 주신 이유도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기 위함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엡4:11-12). 성경은 사도와 선지자들의 가르침으로 교회의 기초가 놓이고(엡2:20) 점진적으로 성장해 갈수록 말씀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더해 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고 설명합니다. 신앙은 신앙의 연조(年條)가 깊어 갈수록 자라간다는 말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의 변화가 지속적으로 일어난다는 지적입니다. 현실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영적 세계에서도 이 같은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를 가능케 하는 전제가 바로 말씀으로서의 성경적 계시에 대한 깊은 인식과 이해의 정도입니다. 이는 믿음 안에서 말씀을 양식으로 삼아 순종해 간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벧전2:2). 믿음의 뿌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기초함을 성경은 증언합니다(롬10:17). 이는 진리에 이르는 지식에 착념 함이 없이는 신앙의 성숙과 말씀의 자립은 기대할 수 없음을 지적함에 다름 아닙니다. j. 이렇게 될 때 신앙의 초보단계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지엽적인 영적 요소들이 점차 극복되어지고 더 깊고 본질적인 복음의 내용들에 대한 관심에 신앙적 초점이 모아지는 관심의 전이(轉移)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상태를 일컬어 바울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표현합니다(고전13:11). 히브리서 기자도 동일한 주제로 말하는 가운데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5:12)라고 안타깝게 지적합니다. 계속해서 그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라고 권면하면서 완전한데 나아갈 것을 촉구합니다(히6:1-3). 고린도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머물러 있는 자들을 일컬어 육신에 속한 자라고 부릅니다(고전3:1-3). k. 그렇습니다. 모세를 통해 주시는 열 가지 재앙은 바로를 비롯한 전 애굽지역과 세상 만민을 향해 진정한 만물의 통치자와 역사의 주관자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표적적 기사로서 계시적 사건입니다(수2:10-11). 이 재앙들은 점진적으로 그 강도와 영향력을 확장해 나갑니다. 바로의 적대적이고 강퍅한 마음의 문을 하나님께서는 재앙의 강도를 높여 가시는 것을 통해 점진적으로 열어 가십니다. 바로는 단번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끈질기게 타협과 절충을 통해 협상을 시도합니다. (4)타협을 제의하는 바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과 관련해 사흘 길 여정을 요청합니다. 이는 가나안까지의 긴 여정의 연장선상에서 일차적으로 시내산에서의 언약식과 이를 보증하는 희생제사를 염두에 둔 요구사항입니다(출19:4-6, 24:1-8). 지금 바로는 모세를 통해 내리시는 네 번째 무수한 파리재앙의 피해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출8:24). 드디어 바로가 견디지 못하고 제안을 해 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을 그대로 보내준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a. 첫 번째 타협안은 애굽 땅에서 희생제사를 드리라는 제안입니다(출8:25). 이는 하나님의 '사흘 길' 제의를 정면에서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일에 있어서 말씀에 대한 가감이나 타협 또는 양보나 절충은 어떤 명분과 이유에도 불구하고 에덴에서부터 늘 그래왔듯이 사단적 발상이며 미혹입니다. 모세는 애굽인들의 동물 희생제사에 대한 거부와 혐오감을 이유로 바로의 제의를 거절합니다. 아울러 애굽지역 안에서의 제사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됨을 강력히 지적합니다. 출애굽기 기자는 이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하나이다"(27절)라고 기록함으로써 이런 사실을 분명히 제시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바로의 제안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요청에 의해 기꺼이 보내려는 심정이 아닙니다. 타협이며 절충과 기만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에서 거역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실제로 예배행위가 이루어질 수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바로의 제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명분 없는 신앙과 예배행위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무교회주의적 신앙태도 말입니다. 마음으로 믿으면 됐지 무슨 기독교적 형식과 내용과 절차가 필요하냐고 고집하고 주장하는 자칭 그리스도인 내지는 명목상의 교인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신 성경의 계시적 진리체계를 고의로 거부하는 불신앙적 행위에 다름 아닙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올바른 성경적 신앙관에 접촉되지도 않은 자들입니다. 지적 그리스도인들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도 분깃도 없는 자들일 뿐입니다. 지식인과 소위 현자(賢者)라고 일컬음을 받는 계층 중에서 이런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 적잖이 발견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b. 모세의 강력한 항의와 거절에 바로는 두 번째 절충안을 제의합니다.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는 얘깁니다(28절). 이는 광야에서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기는 하되 사흘 길까지 갈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는 타협안입니다. 이 또한 승낙인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언제라도 뒤쫓아 올만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속셈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의 두 번째 제안은 신앙의 적당주의와 혼합주의를 부추키는 처사입니다.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에서 적당히 떨어져 있음으로 해서 언제라도 필요하면 세속적 즐거움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독교적 신앙을 포기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하나님 편에 서 있는 경우도 아닙니다. 사흘 길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바 두 주인을 섬기는 신앙(마6:24), 그래서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이라고 정의합니다(계3:15). 문제는 이런 신앙태도에 대한 주님의 반응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형식적이고 혼합주의적 신앙자세에 대해 엄히 책망하시는 가운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신앙의 실질을 회복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십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토해 내치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 c. 바로의 세 번째 타협안은 남자들만 가라는 내용입니다(출10:11). 그러나 사실 이 제안은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남은 가족들을 볼모로 다시 잡아두려는 속셈을 드러낸 고도의 책략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세 번에 걸쳐 제안한 바로의 제의가 철저히 자신의 이해관계를 전제로 제시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개인적 이기주의와 집단적 이기주의의 성격이 철저히 반(反) 하나님적인 동시에 사단적인 사실을 드러냄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다면 남정네만 다녀오라는 바로의 제안 속에 담긴 의미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적어도 이스라엘의 희생제사라는 입장에서만 보면 신앙의 편의주의(便宜主義)적 발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흘 길을 아녀자(兒女子)와 노인과 많은 가축들을 이끌고 가야하는 여정은 그리 만만한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대표성을 띠고 일부만 가서 제사를 드리면 될 것이 아닌가 하는 편의적(便宜的) 발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도 많은 함정과 위법적 요소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민족단위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시내산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 전체와 언약식을 체결하실 것입니다(출19:1-8, 24:1-8). 어느 누구 한사람도 이 언약에서 제외된다면 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구속사의 계시진행에 있어서 하나님의 언약은 족장들을 상대로 해서 개인적으로 체결되었지만 이제 자손 언약의 성취로 인해 민족으로 형성된 후에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백성전체가 언약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출24:8). 따라서 언약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이후 매사에 공동체적 책임과 의무 하에서 통일된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소수 내지는 한 사람의 불순종은 백성전체의 공동체적 불순종으로 판정 받게 될 것입니다(고라의 반역, 가데스 바네아의 불순종, 아간의 범죄 등). 여기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묶어주는 요소는 육신적 혈통에 앞서 신적 언약(言約)인 것입니다. 신 구약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선택적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언약 안에서 베풀어졌음이 성경의 증언입니다(요1:12-13).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언약의 원형은 엡1:4-6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신 은혜언약의 신실한 성취를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타락 전 아담에게 베푸신 언약(창1:28)이나, 범죄 후 아담에게 주신 여자의 후손언약(창3:15)은 창세 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은혜언약의 구체적 적용의 일환으로 주신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남자뿐 아니라 전 백성이 사흘 길 여정에 한 몸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선민(選民)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구원을 개인적으로 받는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교회라고 하는 주님의 몸에 지체로 더해지는 '연합'을 통해 우리의 구원은 지속적으로 보장받게 됨이 이런 원리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를 신앙의 어머니라고 표현했습니다. 요람 말입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아무도 우리의 구원을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교회만을 구원의 유일한 기관으로 세상에 계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교회에게만 천국열쇠를 하사하신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마16:18-19, 18:15-19). 이는 주께서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참 교회인 우주적 보편교회에 속한 자만이 참 성도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공동체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따라서 우주적 보편의 교회에 속하는 방식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우리의 구원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으로서 바른 교회를 이루는 일에 모든 신앙적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아시아의 일 곱 교회를 향해 주께서 성령을 통해 말씀하시는 바의 내용이 이런 사실에 근거한 경고성의 발언이십니다(계2-3장). 따라서 지상의 지역교회는 끊임없이 개혁과 갱신을 거듭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지불식간에 변질되고 타락합니다. 성경의 총체적 계시관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자의적 숭배신앙으로 전락됩니다. 이는 성경역사와 교회역사의 증언입니다. 교회와 구원의 문제는 이렇게 불가분의 밀접한 생명적 관계로 맺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횃불언약에서도 사대만에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큰 민족공동체를 이루는 가운데 애굽을 나올 것에 대해 이미 선 언약하고 계심에 유의해야 합니다(창15:13-14). 이런 의미에서 남자들만 나가라는 바로의 제안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본에서부터 거역하는 적대적이고 반역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의 현장에서 이런 편의주의적 발상과 이기주의적 신앙태도가 너무나 스스럼없이 거부감마저 느끼지 않은 채 자행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제기됩니다. 아니 나아가 습관적으로 행하고 있는 나머지 문제의 심각성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심한 영적 불감증에 걸려있는 실정입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면 자신의 현실적 이해관계에 얽매이게 되는 순간 하나님의 일을 쉽게 양보하고 타협하고 절충하는 일에 거의 아무런 거리낌없이 행동한다는 사실입니다. 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이런 행동이 습관화되고 체질화되면 고쳐지기는커녕 신앙의 고질적(痼疾的) 병폐로 작용하게 됩니다. 어떤 말씀의 자극도 순간의 감동을 받는 것 같지만 이내 그 영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미 편의주의적 사고에 깊이 중독이 돼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서면 또다시 지금까지 그렇게 행해왔던 자기의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곤 합니다. 철저히 기독교 종교인으로 화석화(化石化)되는 것입니다. 사단이 주님을 시험했을 때 바로 이 편의주의적 방식으로 접근해 왔습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 없이 영광의 자리에 오르라는 유혹 말입니다(마4:8-9). 고난의 복음대신 소망과 희망의 복음만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은 죽음이라는 고난을 통해 부활이라는 영광의 생명에 이르게 돼 있습니다. 순례자의 고달픈 여정을 경험하지 않고는 천상의 '신의 도성'(히11:10)에 이를 수 없음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이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에 익숙해 있지 않습니다. 아니 싫어합니다. 빠르고 편리하고 편안함에 깊이 중독돼 있습니다. 이런 세속적 습관이 신앙생활의 영역에서조차 여과(濾過)되지 않고 절제(節制)됨이 없이 일방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실정이 작금(昨今)의 실상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부단히 구현해 내야하는 세상에 존재해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독특한 기관이며 신앙공동체로서 새로운 사회입니다(엡2:14-22).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와 인도와 철저한 간섭을 받는 것을 통해서만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세상 속에서 뚜렷이 현시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원리에서 교회의 변질과 세속화는 신앙의 성격이 말씀의 본의에서 떠나 점차 편의주의적 성향을 띠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이는 결국 말씀을 경히 여기는데서 나와지는 자의적 숭배신앙에 다름 아닙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의 제안을 거절함으로 바로 궁에서 쫓겨납니다(출10:11하). 이와 때를 같이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메뚜기 재앙을 애굽 전역에 내립니다. 성경은 이 재앙의 피해를 설명하면서 이런 메뚜기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메뚜기 재앙으로 인해 애굽 전역에는 푸른 채소와 나무는 찾아볼 수 없었다고 출애굽기 기자는 재앙의 심각성과 피해의 엄청남을 소개합니다(14-15절). 이후에 하나님은 흑암의 재앙을 삼일 동안 애굽에 시행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지경에는 광명을 허락하셔서 애굽의 흑암의 재앙이 이스라엘에게는 역사하지 못하게 막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각종 재앙들이 이스라엘을 피해 애굽에만 미치게 하시는 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와 능력과 통치의 위엄을 만인에게 보이셨습니다. 특별히 애굽의 바로가 이스라엘을 보내는 일과 관련해서 이런 초자연적 재앙을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바로는 점점 궁지에 몰립니다. 그러나 쉽게 단념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주께서 재림하시는 순간까지 성도를 미혹하고 시험하며 핍박하는 자로 그의 부정적이고 악의적인 사명을 감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불과 유황 못에 영원히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계20:10). 그러나 이 모든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주님은 우리의 안위를 돌보시며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마28:20).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미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쥐고 계신 만왕의 왕으로 그 왕적 권세를 지금 세상 속에서 발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마28:18). 성도의 왕같은 제사장의 직분은 지금 예수님의 왕적 권세에 연합돼 함께 그 영광에 동참해 왕노릇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으로 여기서부터 그 나라의 실질을 선취(先取)적으로 소유한 자들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위로가 이에 있습니다. 성도는 이 약속의 말씀을 생명과 신앙으로 붙잡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d. 급기야 바로는 네 번째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남녀노소 모두가 가서 희생제사를 드리되 양과 소는 남겨두라는 제안입니다(출10:24). 이번 제안은 얼핏 보면 모두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바로가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희생제사를 훼방하는 처사입니다. 제물 없는 제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바로는 사람은 가되 우양(牛羊)은 남겨두라는 것을 통해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앙의 형식주의를 가리킴에 다름이 아닙니다. 중심으로 예배드림이 없이 습관적으로 형식에 따라 드리는 외식주의(外飾主義)적 신앙행태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유대교의 특징을 바로 외식주의의 표본으로 고발합니다.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힐난(詰難)하십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행위라고 정죄 하십니다. 본말이 전도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신앙상태를 준엄하게 꾸짖고 계십니다(마23:23-24). 오늘 우리도 이런 형식적이고 외향위주의 가식적(假飾的) 신앙주의의 위험에 노출돼 있음이 사실입니다. 신앙을 삶의 궁극적인 관심과 목적으로 삼지 못하고 말씀을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신앙하지 못하는 데서 이런 형식적이고 외식적(外飾的)인 신앙이 난무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영적 암매와 신앙적 형식주의가 만연한 시대에서도 여전히 당신의 신실한 남은 자를 찾으십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지 시험해 보고 자신을 확증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고후13:5). 모세는 바로의 마지막 제안도 과감히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호리(豪釐)라도 양보할 수 없음을 천명합니다(출10:25-26). 그렇습니다. 과연 우리의 신앙이 누구를 의식하며 무엇에 근거해야 하는지를 시사하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성도는 말씀을 가감(加減)없이 받드는 것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백성 된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보증 받을 수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이유로 인해서도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있는 하등의 권리가 없습니다. 순종만이 신앙적 삶의 최대의 미덕입니다. 4)유월절과 출애굽사건(출12장) 아홉 가지의 재앙에도 불구하고 바로의 마음은 돌 같이 굳어진 채 좀처럼 이스라엘을 보낼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급기야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재앙을 고려하십니다. 장자살해 재앙입니다. 애굽 전역에 내린 장자의 죽음이라는 대 재앙은 급기야 바로 왕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을 어쩔 수 없이 허락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애굽의 신들과 바로 왕까지도 압도하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만천하에 드러낸 계시적 사건입니다(수2:10). 아울러 하나님의 언약은 틀림없이 성취된다는 확신을 신앙과 생명으로 붙들게 하시려는 의도가 담긴 사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전지역의 장자들의 죽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적으로 구원하실 대비책을 마련해 주십니다. 이는 '피를 볼 때 하나님께서 그 집을 넘어가시겠다'(출12:13, 23)는 내용입니다. (1)하나님은 미리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년 된 흠 없는 수양을 준비시키십니다. (2)양의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구워서 무교병과 쓴나물과 함께 먹을 것을 명하십니다. (3)하나님께서 애굽 전역의 장자를 죽이실 때에 피를 보면 넘어가실 것을 알려 주십니다. (4)이때 피는 이스라엘을 죽음에서 구원하는 표적이 됩니다(13, 23절). 양의 고기는 보양식(補陽食)의 기능을 담당합니다. (5)따라서 이후 유월절 예식은 모세의 율법 하에서 제정된 제사제도의 사실상의 기원이 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원리를 예표하는 계시적 사건으로 해석하기에 이릅니다(고전5:7). (6)그날 밤 애굽의 전역은 장자를 잃은 슬픔에 호곡(號哭)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들 중에는 바로의 장자도 포함됐습니다. (7)마침내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허락합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많은 물품을 아울러 취해 나오게 됩니다(35-36절). (8)이는 아브라함에게 맹세적 보증으로 약정하신 횃불언약식 내용의 구체적 성취임을 확인하게 됩니다(창15:13-16). a.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으로 인해 이스라엘 후손은 애굽에서 종살이합니다(출1:11). b. 모세를 지도자로 삼아 출애굽 사건을 집행하십니다. 출애굽기서 기자는 이스라엘의 애굽 거주기간을 사백 삼십 년이라고 기술합니다(출12:40-41). 이는 사대(四代)에 해당되는 세월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때가 찰 때에 호리 만큼의 차착(差錯)도 없이 성취됨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섭리적 작정의 기간이 이룰 때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 c. 출애굽 당시 장정만 육십 만에 해당합니다(37절). 이들 중에는 중다한 잡족이 동행하고 있음을 기자는 서술합니다(38절). 따라서 출애굽 한 총수(總數)는 대략적으로 2-3백만으로 추정합니다. d. 출애굽 할 때 많은 재물(은, 금, 패물, 의복)을 얻어 나옵니다(35-36절). 이들 물품들은 그 동안의 노역의 대가인 동시에 광야 생활과 성막을 지을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재료들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앞날을 내다보시고 성막 제작에 필요한 물품을 애굽에서 사전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e. 저자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컬어 '여호와의 군대'(41절)라고 묘사합니다. 이는 출애굽 사건이 갖는 어떤 분명한 목적을 암시적으로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다름 아닌 가나안 정복사건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가나안 정복을 위해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전쟁을 수행해야 할 막중한 책임과 사명을 띠고 애굽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보다 궁극적인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를 위해서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신약시대의 교회가 사단의 세력과 정면 대치하고 있는 영적 상태(엡6:12) 하에서 불가피하게 전투하는 신앙공동체로 존재하고 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5)홍해도하 사건(출14장) 모세의 인도하에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지시를 좇아서 지중해 연안 블레셋 지경이 아닌 남쪽 홍해의 길을 선택합니다(출13:17). 출애굽기서 저자는 이런 하나님의 의중을 기술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에 직면하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 것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차원에서의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기술합니다. 홍해도하 후 저들의 끊임없는 불평과 불만, 원망과 시비의 불신의 태도를 볼진대 하나님의 선택은 과연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출애굽 당시 모세는 요셉의 해골을 취해 나옵니다(19절). 이는 요셉의 유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된 사실을 의미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언약이 신실히 성취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주야간에 저들 앞에서 인도하십니다(21-22절). 이런 사실은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에 대한 가시적이고 상징적인 표징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홍해 앞 진퇴유곡(進退維谷)의 장소로 인도하십니다. 저자는 이스라엘의 처지를 마치 광야 한 가운데 꼼짝없이 갇힌 형국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출14:1-3). 그러나 이런 처사는 철저히 하나님의 의도적인 계획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저자는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곧 '뒤쫓아 올 바로의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애굽사람들에게 여호와인 줄을 알게 하시기 위한 사전계획의 일환'이라고 기록합니다(4절). 이제 홍해도하 사건에 내포된 몇 가지 깊은 하나님의 뜻을 살펴봅니다. (1)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광야생활이라는 환경의 열악함에서 비롯될 수 있는 애굽에 대한 일말의 미련을 잠재울 수 있는 빌미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2)아울러 만일의 경우 뒤늦은 후회로 추격해 올 수 있는 바로의 군대로부터 안전한 구원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3)따라서 홍해도하 사건은 출애굽 구원사건의 절정의 의미를 갖습니다. 다시 말해 뒤쫓던 바로와 그의 군대가 남김없이 수장(水葬)되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의 구원이 철저히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확신케 하는 결정적인 보증의 사건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이로 인해 본 사건은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우리의 의지적 행위와는 무관하게 오직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을 뿐입니다. (4)더하여 홍해도하 사건이 갖는 구속사적 의의는 향후 가나안 정복을 통해 구원의 완성으로서 신정적 왕국을 건설할 때까지의 전과정이 철저히 믿음에 근거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실제적 구원의 의미를 예표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 및 홍해도하 사건은 구원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에서의 하나님 나라 건설에 궁극적인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진행과정은 오직 믿음으로만 그 성취가 가능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에는 언약의 수혜자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율적 순종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a. 그렇습니다. 홍해도하 사건은 믿음의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b. 본 사건은 출애굽 구원사건의 절정으로서 구원을 가시적이고 상징적으로 계시해 줍니다. 고린도서 기자는 본 사건을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속해 다 함께 세례를 받은 것으로 재해석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거듭남의 확증 말입니다. c. 따라서 이후부터 이스라엘은 애굽에서의 옛 사람적 행실을 벗고 새사람으로서의 신국백성의 삶을 적극적으로 추구해 나가야 할 막중한 책임과 의무가 주어집니다. 곧 이어 이루어질 시내산 언약식을 통해 율법의 하사가 주는 의미가 이렇습니다. 6)시내산 도착 및 언약식 준비(출19장)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삼 개월이 될 즈음 시내산에 도착합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언약식을 준비시키십니다. 이는 이미 바로와의 출애굽 협상 과정에서 출애굽의 일차적 목적이 시내산에서의 여호와께 예배드림(출3:12, 18, 5:1)이라는 제안 속에서 확인된 바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출애굽의 구속사건을 먼저 상기시키십니다(출19:4). 이는 이후 언약으로 주신 모든 율법 준수의 당위성으로 작용합니다(출20:1-2). 다시 말해 율법의 본래적 기능은 그것이 비록 조건적인 단서가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은혜 속에 담긴 자율적 순종을 관장하는 보호적 장치의 차원에서 주신 것이란 지적입니다(갈3:19, 21). 몽학선생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 말입니다(갈3:24-25). 때문에 율법에 불순종할 경우 해당 조항에 따라 적법한 형벌이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조건적 행위언약(모세언약)에 앞서 주어진 본래적 은혜언약(아브라함 언약)은 취소되지 않습니다(갈3:17). 이로 인해 불순종의 결과로 받게 되는 형벌은 언약적 징계 내지는 언약적 심판으로 설명됩니다. 이는 불순종으로 인해 징계와 심판이 가해질지라도 어디까지나 회개를 촉구하는 언약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적 차원에서의 책망이지 결코 언약이 취소되거나 무효화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바벨론 제국에 의한 남 유다의 멸망과 칠십 년 후에 포로귀환이라는 심판과 회복의 이중 구조적 예언(렘25:8-11, 29:10-14) 속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2)하나님의 소유가 됩니다(5절). (3)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됩니다(6절상). (4)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6절하). 그러나 이는 언약적 율법 준수 여부에 종속됩니다. 따라서 율법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이 적극적으로 촉구됨을 봅니다. 만일의 경우 그렇지 못할 때 언약은 취소되지 않더라도 불순종에 상응하는 언약적 심판이 저들을 책망하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이를 장로들에게 고합니다. 온 백성들이 이를 준행할 것을 다짐합니다(7-8절). 이런 언약식 준비는 이후 24장에서 구체적으로 행해질 것에 대한 예비적 조치입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은 명실공히 열방 중에서 택하여 불러 세우신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라는 사실에 대한 선언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향후 이스라엘은 열국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부여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실질이 어떤 것이며, 구원받은 신국백성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실천적 행동으로 줘야할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런 일련의 요구와 책임은 율법으로 명문화되어 수여되는 바, 그 법적 성격상 순종하는 경우에는 복으로 주어지는 반면, 불순종의 경우는 언약적 징계의 형식으로 주어질 것을 특징으로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 경우 하나님과의 백성의 관계가 취소되거나 파기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해 출애굽함으로써 애굽으로부터 해방되는 구속의 은혜를 약속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율법에 대한 불순종은 언약적 심판으로 인해 단지 교제의 단절과 이로 인한 화목이 깨진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수여는 결코 구원의 조건이나 의의 전달수단으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발전시켜 나가게 하기 위한 성화의 방편으로 수여 된 것입니다. 십계명의 수여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출20:1-2=구속의 원리)에 기초해서 주어진 이유가 이에 있으며, 시내산에서의 언약과 언약식이 출애굽 사건을 전제로 체결됨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는 나아가 레위기에서 제사 제도와 성결 의식이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이유로 확장됩니다. 이스라엘은 제사와 성결 의식을 통해 죄 문제를 해결 받고 온갖 부정과 더러움으로부터 정결함을 되찾음으로 하나님과 단절 될 수 있는 교제를 회복하게 됩니다. 이 또한 출애굽 구원사건에 이은 지속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배려이며 부성애적 관심의 표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7)십계명 수여(출20장) 십계명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일체의 율법의 총화(總和)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꼭 집고 넘어갈 문제가 있습니다. 십계명을 위시해서 이에 따른 세부 세칙으로서의 율례와 계명은 결코 구원이나 의의 수단으로 수여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이미 십계명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 애굽으로부터 구속받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마땅히 지켜 행할 행동 규칙과 지침으로 주신 것입니다. (1)이런 이유로 해서 이후 이스라엘은 십계명과 세부 시행 세칙들을 엄격히 준수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만천하에 드러내야 되며 하나님 나라의 신정적 통치의 실질이 어떠함을 현시함으로 열국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 나라로서의 책임과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세상 가운데 현시함에 있어서 은혜로 말미암는 '계시의 도구'로 부름 받았다고 이스라엘의 선택받은 의미를 부연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신7:6-8). (2)또 하나 기억 할 것은 일체의 율법은 가나안에 실현될 신정적 왕국을 염두에 두고 수여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가나안이 언약의 땅으로 내정돼 있음을 전제할 때 당연히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다시 말해 가나안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 나라의 왕적 통치가 가장 이상적으로 실현되는 일에 일생에 걸쳐 모든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신정왕국으로서 명실상부한 제사장 나라로서의 확고부동한 정체성의 확립 말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하나님의 근본 구원의 목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3)이제 이런 사실을 보다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감당케 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주신 것이 율법으로서 곧 모세 언약(시내산 언약)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와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통치가 가장 권세있게 시행되는 것을 통해 확인되는 바, 하나님 나라의 이상적인 행동규범과 의의 기준으로서 율법에 순종한다는 사실은 바로 하나님 나라로서의 통치적 개념이 가장 구체적으로 현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4)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율법 준수와 관련해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모세 언약이 외부적으로 조건적 성격을 띠고 행위언약의 방식으로 나타날지라도 그 내적 본의는 아브라함의 은혜언약과의 연계 속에서 마땅히 요구되는 자율적 순종의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일방적으로 강요된 법적 요구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자발적인 순종을 관장하는 보호적 기능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율법의 본래적 기능을 바로 이해한 나머지 율법의 성격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蒙學)선생의 차원에서 해명하고 있는 것입니다(갈3:24-25). 말하자면 주인의 아들이 법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을 때까지 한시적으로 책임을 맡고 있는 가정교사의 역할 말입니다(갈4:1-5). (5)이런 사실로 인해 율법을 수여하신 본래적 목적과 기능과 성격을 점진적 계시의 관점에서 해석해야지 단순히 제한적으로만 접근해서 유대교가 범했던 행위로 말미암는 의와 구원의 방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사실상 이스라엘의 역사상 율법이 정상적인 순종의 방식으로 시행되던 시기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통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신정적 통치는 찬연(燦然)히 꽃을 피우지만 이 또한 잠정적 계시의 구현이었지 궁극적인 것은 되지 못한 사실을 봅니다. (6)이로 보건대 시내산 언약은 본질상 처음부터 자체 속에서 이미 새 언약을 지향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새 언약' 안에서만 시내산 언약으로서 율법에 대한 순기능(順機能)적 진정한 순종이 가능하게 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런 사실과 관련해서 신약의 기자들은 한결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님의 내주하시는 역사를 통해 비로소 죄의 권세를 넉넉히 이길 수 있음을 선포합니다. 특별히 로마서 기자는 이런 사실을 설명하면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롬8:3-4)고 기술합니다. 따라서 율법의 본래적 기능과 역할은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된 '새 언약'(렘31:31-34, 겔36:26-28) 안에서 비로소 그 진정한 본의가 정당하게 해명되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후에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의 강의에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7)십계명은 내용적 성격상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첫째에서 넷째까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언급하고 있으며, 다섯째에서 열째까지는 사람과의 관계를 다룹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계명 :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3절). a. 이는 정당한 신지식을 통해 이스라엘의 신관을 바르게 교정해 주시기 위한 의도에서 주신 내용입니다. 정당한 신앙의 대상에 대한 인식의 문제 말입니다. b. 출애굽 당시 이들은 철저히 애굽의 우상 문화에 젖어 있는 실정입니다. c. 족장들에 의해 계승된 언약-성취에 근거한 여호와 신앙은 수 백년이 지난 지금 결코 이들의 신앙과 생명의 관건으로 작용하지 못했습니다. d. 이들은 단지 하나님의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거대한 노예집단 이상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현실이 그러했습니다. e. 이런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족장들에게 주셨던 천지의 주재가 되시며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유일 신관의 확립과 언약에 근거한 신앙적 정립이었습니다. f. 가나안 정복이라는 막중한 시대적 사명을 앞에 놓고 가나안의 수많은 우상들과 차별화 된 오직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관의 정립이 시급한 과제였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참 된 신앙관의 정립과 신앙적 삶은 올바른 신관의 확립이 전제될 때만 비로소 가능함을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관의 정체성이 혼합주의적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절대적으로 바른 성경적 계시관에 근거한 신관의 정립이 확립되지 못한 까닭입니다. 제2계명 : "손으로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에 절하거나 섬기지 말라"(4-6절). a. 이는 제 일 계명에 언급된 유일 신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적 시사입니다. b. 하나님은 여러 신(神) 중에 하나가 아니기에 우상을 섬기듯 형상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지적입니다. 따라서 만일의 경우 하나님의 형상화를 시도한다면 이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우상과 동일시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행위는 처음부터 여호와 신앙을 우상 숭배적 무속신앙으로 전락시키는 무서운 범죄 행위가 성립됩니다. c. 신약의 저자는 이와 관련해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것을 요구합니다(요4:24). 이는 바른 신관과 계시관에 입각한 하나님의 전(全)구속의 경륜에 깊이 접촉 된데서 나와지는 예배행위를 가리킵니다. d.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에 있어서 일체의 성물이나 외적 형식에 필요 이상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서 나옵니다. 내용 없는 형식은 단지 종교적 치장일 뿐이며 필연적으로 우상 숭배적 신앙에로 나아가기 마련입니다. (가)출애굽기 32장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아론을 채근해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신앙하는 범죄를 저지릅니다(1-6절). (나)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관의 결핍과 부족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타락한 종교심의 영향을 받아 미신적인 자의적 숭배신앙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다)이런 종교적 행위가 아무리 기독교적인 모습으로 치장했다 하더라도 근본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지식으로부터 나와진 것이 아니기에 결국은 불법과 불복종으로 간주됩니다(마7:21-23, 롬10:2-3). 우리의 신앙과 섬기는 교회가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며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라)이로 보건대 한 시대를 풍미하고 있는 절대 다수가 소유하고 추구하는 보편적 신앙의 내용과 방향성은 교회역사와 성경 역사의 관점에서 살펴 볼 때 그것이 하나님의 열심을 가장한 인간의 열심일 수 있는 확율이 대단히 높다는 사실입니다. 근본적으로 죄성의 문제 때문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종교가 그랬습니다(왕상12:25-33). -예수님 당시 유대교가 그랬습니다(마23장). -중세의 로마교회가 그랬습니다. 오늘 이 시대라고 결코 예외일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벌써 5세기 가까이 이르고 있습니다. 이는 역사의 증언이며 성경의 교훈입니다. 때문에 이 시대의 개신교회 및 신앙의 보편적 특성을 성경으로 재조명해서 진단해야 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제3계명 :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7절). a. 이는 어떤 이유로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폄하(貶下)돼서는 안 된다는 경종입니다. b. 대개 이런 경우는 첫째와 둘째 계명을 바르게 인식해서 준수하지 못하는데서 나와지는 필연적 결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성경적 계시관에 바르게 접촉돼 섬기게 될 때, 하나님의 이름은 상대적으로 영광과 존귀를 받게 됨을 암시적으로 시사합니다. c. 이로 인해 성경적 구속사관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를 신앙의 근거와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신앙적 삶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영광 돌리는 최선의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제4계명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8절). a. 안식일 준수가 네 번째로 주어짐은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해서(일 계명), 거기에 걸맞게 하나님을 섬기고(이 계명), 범사에 하나님을 높이며 인정하는 삶(삼 계명)을 살아가는 것을 통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안식을 소유한 자로서 천상적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이 아닙니다. b. 따라서 진정한 안식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가나안 정복과 땅의 분배를 통해 비로소 그 실질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레25:1-12). (가)오늘 날 성도는 이런 의미에서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자로 성경은 해석합니다(눅6:5). (나)성도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완성 안에서 이미 죄 문제를 해결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참된 안식의 의미는 죄 문제가 해결되는 구속의 원리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인간의 타락전 에덴에서의 안식은 창조 원리에 입각한 것이었습니다(창2:1-3).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이 원리는 깨졌습니다. 하나님은 이후 여자의 후손 언약(창3:15)을 통해 구속의 원리를 통한 재창조의 사역 안에서 안식의 회복을 보증하셨습니다. -십계명에서의 안식일 준수가 출애굽의 구속 사건을 원리적 배경으로 삼아 요구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출20:1-2). -신명기서에서 출애굽 이 세대에게 시내산 율법의 갱신을 강조하는 모세의 설교 속에서도 안식의 의미를 출애굽 사건에 기초하는 이유가 이에서 나와집니다(신5:15). -이런 의미에서 오늘 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안식을 선취적이고 예비적으로 소유해서 누리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재림은 성도를 종말론적 안식의 실질로 인도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미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현재적 안식에 참여함이 없이는 종말론적 미래의 안식에 참여도 보장될 수 없습니다. 구원과 영생의 개념도 동일한 원리 안에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십계명 중 다섯 번째에서 열번 째까지의 내용은 대인관계에 대한 법령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자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올바른 처신이 필요함을 강조함에 다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강령을 설명하시면서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같은 심정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심으로 율법의 총화로서 십계명의 핵심사상을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관계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언급하신 바 있습니다(마22:37-40). 나아가 이는 하나님의 소유된 거룩한 백성과 제사장 나라로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과의 사회 문화 종교적 관계에 있어서도 철저한 차별화 될 것을 요구하는 강령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에서 명실공히 하나님의 왕적 통치를 받는 신정국가로서의 천상적 가치관을 뚜렷이 현시할 책임이 주어집니다. 오늘 날 신약의 성도들의 경우에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a. 마태는 이와 관련해서 마음과 몸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것과 b. 동일한 원리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것을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소개합니다(마22:37-40). c. 이로 보건대 십계명은 구약에서와 같이 동일하게 신약 성도들에게도 마땅히 행할 신앙적 행동지침임을 확인하게 됩니다(마5:17). 그러나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준수할 의무는 더 이상 신약의 성도들에게 요구되지 않고 있습니다(눅6:5).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구약의 율법에 명시된 제반 제도와 절기와 각종 의식들은 예표로서의 계시적 도구의 역할을 마치고 이제 실체화됐기 때문입니다(골2:16-17, 히9:10). 따라서 신약의 성도는 더 이상 구약의 안식일 준수 명령에 의무적으로 종속돼 있지 않습니다. d. 반면에 신약의 성도는 대속적 사죄의 은총을 통해 진정한 구원의 안식을 허락하신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안식후 첫 날인 주일을 감사의 예배일로 정해 지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보편화돼 있는 소위 주일성수의 개념은 먼저 베푸신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는 자율적 순종의 예배행위이지 율법적 개념의 강요된 법적 요구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경우가 이를 증거합니다(행20:7, 고전16:2). 마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새 언약(눅22:14-20) 안에서 유월절 예식이 폐해지고 성찬식이 새롭게 제정되듯이, 안식일 개념 또한 동일한 원리 하에서 실체화되고 주일 예배의 개념이 새롭게 등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구속사 진행의 특성상 대체의 개념보다는 갱신과 발전 및 확장의 의미로 이해함이 타당할 줄 압니다. 8)시내산 언약식 체결(출24장) 모세는 시내산에서 받은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록합니다. 백성들은 이를 지켜 행할 것을 엄숙히 고백합니다. 모세는 소를 잡아 피를 제단과 백성을 향해 뿌림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의 고백을 인을 쳐 확증시킵니다(1-9절). 이렇게 해서 출19장에서 준비된 언약식은 24장에서 정식으로 체결됩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구속사를 운반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열방 앞에 등장합니다. 이를 '시내산 언약' 또는 '모세 언약'이라고도 부릅니다. 따라서 시내산 언약의 중심 사상은 모든 언약의 본질이 그랬듯이 이제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곧 왕이 되신다는 사실'에 모아집니다(출19:5-6, 창1:28, 17:7-8, 레26:12, 삼하7:14, 렘31:33, 겔36:28, 마1:22-23, 요1:14, 계21:3). 나아가 이런 특별한 언약적 관계는 이후부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정체성을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신정적 통치를 만방에 현시해야 할 막중한 책임과 의무를 요구합니다. 이런 사실로 보건대 시내산 언약의 중심 사상은 앞서 맺으신 아브라함 언약의 갱신이며 보다 구체적인 발전인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시내산 언약은 기존의 다른 언약에 비해 몇 가지 진전된 특징이 있습니다. (1)우선 언약의 내용이 문서로 기록됐다는 사실입니다(7절). 지금까지의 언약은 구두언약에 근거했습니다. 따라서 모세언약은 성문화된 언약인 셈입니다. 이는 모세 언약을 통해 이제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새로운 계시시대가 열렸음을 시사합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라는 신정적 나라가 세상 가운데 그 모습을 정식으로 드러냈다는 사실입니다. (2)언약의 내용이 피로 인(印)쳐졌다는 사실입니다(8절). 이는 하나님의 공식적인 인준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라도 결코 취소될 수 없음을 재확인하는 절차입니다. 그만큼 언약의 비중이나 역할이 중차대 함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이후 시내산 언약의 준수여부는 곧 하나님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의 흥망성쇠와 밀접히 연관돼 있음을 봅니다(출19:5-6). (3)앞으로 이스라엘은 이 시내산 언약(율법적 언약)에 근거해 명실 공히 하나님의 선민으로 세상 가운데 현시 되며 철저한 순종의 삶을 요구받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스라엘은 이후 진행되는 구약역사 속에서 한번도 시내산 언약을 정당하게 순종한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남북으로 갈라져서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BC722)에, 남 유다가 바벨론 제국(BC586)에 멸망당한 사건이 이런 사실을 총체적으로 증명합니다. (4)따라서 시내산 언약은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이미 자체 속에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케 하신 '새 언약'에 대한 암시를 내포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역사적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언약과 모세 언약, 그리고 이후 갱신된 다윗 언약에서 계시되고 있는 궁극적이고 종말론적인 신정왕국이 처음부터 아니었음을 시사합니다. 언약의 이중 구조적 성격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처음부터 은혜 가운데 '계시의 도구'로 선용됐다는 지적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5)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상황에서는 구속사의 점진적 진행이라는 측면에서 종전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자손언약(창12:2-3, 15:13-17)이 바야흐로 시내산 언약을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의 진면목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가 시내산 언약의 구속사적 성격을 말하면서 아브라함 언약에 이어 보다 진전된 새로운 계시시대의 서막이라는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6)이후부터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진행은 자손 언약에 이어 '가나안 정복'이라는 땅 언약의 성취를 향해 달려갈 것입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가나안 정복에 앞서 이스라엘은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거듭나기 위해 많은 훈련과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애굽에서 길들여진 이방생활의 잔재들을 말끔히 씻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세율법을 주신 일차적 목적이 이에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앞으로 시내광야를 거쳐서 가나안 지경까지의 여정은 다양한 경험과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지식의 습득과 이로 인해 바른 여호와 신앙관을 정립하는 결정적인 훈육의 기간이 될 것입니다. (7)이때 가나안 정복은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대리적 심판(창15:16)이 집행되는 성격을 띠고 수행됨으로 하나님의 성전(holy war)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을 여호와의 군대 장관(수5:14),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군대(출12:41)라고 부름이 이를 증거합니다. 광야 노정에서 두 번에 걸쳐 실시한 인구조사(민1:1-3, 26:1-2)의 명분이 이 십 세 이상의 '싸움에 나갈 자'를 분류하려는 데 있음도 가나안 정복을 염두에 둔 대비책의 일환임을 저자는 시사합니다. 9)성막 제작(출25장) 출24장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언약식을 체결하신 하나님은 곧 이어서 모세를 통해 성막에 관한 세밀한 식양을 제시하십니다(출25:8-9). 이때 성막을 제작해야 하는 목적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시기 위함임을 알려주십니다(8절). 다시 말해 언약식 이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진중에 친히 임재하셔서 동행하시며 보호하시고 통치하신다는 임마누엘의 가시적 표상으로 성막을 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막 제작의 계시 속에는 언약식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 된 이스라엘을 왕 되신 하나님께서 철저히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가운데 왕적 권세로 저들을 다스려 나가심으로 가나안 정복은 물론 하나님의 신정적 통치의 실질이 어떠함을 열방 가운데 현시 하시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담겨있음을 시사 받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후 이스라엘의 신앙적 삶의 정체성이 철저히 성막 중심의 삶의 방식으로 나타나야 할 것을 시사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는 곧 예배중심의 삶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성막 제도의 중심사상이 제사제도로 표출되는 것을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성막의 제작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십니다. (2)성막의 모든 설계와 식양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대로 따라야 합니다. a. 이는 성막제작은 물론 그 안에서 행해지는 제반 규례들도 율법의 지시하는 요구에 절대적으로 순응해야함을 더불어 시사합니다. b. 이런 사실은 여호와 신앙이란 철저히 하나님께서 내신 진리의 체계를 좇아 섬겨야 함을 강력히 주지시킴에 다름이 아닙니다. c. 인간의 종교심은 본성의 타락으로 인해 결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할 수 없습니다(롬1:21-23). 아울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에 이를 수도 없습니다(롬3:10-12, 20, 28). 오늘날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가 이에서 나와집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서 바르게 알고 믿고 섬기는 일에 오직 유일한 규범이며 지침입니다. 신지식의 보고(寶庫)입니다. d. 때문에 성도의 신앙이 아무리 외적으로 그럴 듯 해 보일지라도 그 실질이 성경의 진리의 체계에서 벗어난다면 이는 자의적 숭배신앙일 뿐, 하나님과는 무관하며 나아가 불법과 불복종으로 간주된다고 성경은 경계시킵니다(마7:21-23, 롬10:2-3). (3)성막의 역사(役事)가 마쳐진 후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 가운데 충만히 임재함을 '구름이 회막을 덮었다'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출40:33-35).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시적이고 표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4)이후 성막을 덮은 영광의 구름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행을 주도적으로 인도합니다(36-38). 이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 및 인도와 교제, 다스림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로 이스라엘의 여정에 깊이 개입해 계시다는 사실의 확증 말입니다. a. 오늘 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롬8:9)이신 성령님의 내주 및 교통하시는 사역을 통해 동일한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와 인도와 다스림을 받습니다. 하나님과 영으로 교통하게 됩니다. b. 이런 의미에서 구약의 성막 또는 성전계시에 내포된 임마누엘 사상은 임마누엘의 실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마1:23) 안에서 양자간 신학적 상응성을 찾게 됩니다. 이는 구약의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화됨을 예표적으로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요1:14, 2:19-22). (가)따라서 이 시대에 성막이나 성전은 더 이상 가시적 형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성전의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셨기 때문입니다(요2:19-21). (다)따라서 성전 건축이라는 용어나 교회를 구약의 성전에 빗대어 부르는 일은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점진적 계시관에 근거해 볼 때 합당치 않습니다. (라)이런 사실은 구약시대 성전 안에서 행해지던 일체의 제도나 절기 및 의식들도 이 시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시사합니다(골2:16-17, 히9:10, 갈4:10-11). (마)아울러 신약시대 백성들의 신앙적 삶의 성격 또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해 우리 안에 임마누엘화 된 것과 다름없기에 동일하게 예배적이어야 함을 증거합니다(롬12:1). 10)금송아지 우상숭배 사건(출32장) 출25장 이후 성막에 관련된 제반 식양과 세부 규례를 기록하던 저자는 32장에 이르러 갑자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을 선동해 황금 송아지 우상을 제작한 사건을 소개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식 속에 여전히 애굽에서의 이교도적 생활이 깊이 잠재돼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황금 송아지 사건은 시내산 언약식을 백성들이 스스로 파기한 셈입니다. 이런 사실은 곧 이어 하나님께서 친히 두 돌판에 새겨 주신 10계명 증거판을 모세가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는 사건을 통해 가시적이며 상징적으로 확인됩니다(출32:15-19). 그렇습니다. 본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이 비록 시내산 언약식을 통해 순종을 담보로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구속사 진행의 새로운 계시시대를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율적으로 율법에 순종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암시적으로 시사하는 사건기록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보다 본질적으로 이 사건은 시내산 언약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가나안 땅에서의 신정적 왕국의 건설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인 역사적 이스라엘이 아닌 새 언약 안에서 계시된 참 이스라엘 곧 영적 이스라엘을 통해 실현될 것임을 조심스럽게 전망하게 합니다(갈3:29, 3:7). 이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새롭게 두 돌판을 준비케 하시고 중복해서 10계명의 내용을 새겨주시는 언약갱신을 통해 시내산 언약의 유효성을 재확인해 주십니다(출34:1-9). 2. 이스라엘의 거룩성 보존(레위기) 레위기의 중심 사상은 거룩성입니다(레11:44). 이는 하나님의 속성을 현시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 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반영시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해 거대한 '민족단위'로 형성됩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출애굽 역사를 통해 해방, 곧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피 뿌림을 보증으로 언약식을 체결하십니다. 이는 이후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불가분리의 관계성의 불변을 상징과 실질로 가리킵니다. 아울러 이 언약식은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성립되는 새 언약식의 예표로서의 의미를 띠기도 합니다. 때문에 향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뚜렷이 현시하기 위해 언약식을 통해 확약한 시내산 율법을 신앙과 생명으로 여겨 준수할 막중한 책임이 주어집니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은혜에는 자체 속에 수혜자의 책임으로서 자율적 순종이 내포돼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은혜는 택자들에게 불가항력적으로 부은바 됨과 동시에, 자체 속에 자율적 순종을 관장하는 기능이 동시적으로 발휘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야고보 사도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믿음과 행위를 동일한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말입니다(약2:17, 22, 롬1:5, 16:26). 그렇습니다. 은혜의 믿음은 자율적 순종을 수반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증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레위기서에는 이스라엘의 거룩성의 지속적인 유지와 발전을 위해 모세 율법의 세부사항들을 소상히 기록합니다. 무엇보다도 성막을 중심으로 시행되는 제사 및 정결 규례에 우선적인 강조점을 두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구원의 감격을 함께 기뻐하며 누리는 공동체적 의식의 함양과 고취를 위해 각종 절기 규례를 소상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사를 통한 거룩성의 회복과 보존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한 구원의 감격을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첩경으로 작용합니다. (1)다섯 가지(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제사제도 중 속죄제나 속건제는 하나님의 율법에 명시된 어떤 계명을 어겼을 때 이를 속(贖)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①이때 속죄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범죄행위에 대한 속죄를 위함이며(레4:13-21) ②속건제는 대인 또는 대물에 대한 금령을 어겼을 때의 속죄를 위해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레5:15-19). 여기에는 일정한 금액의 배상이 뒤따릅니다. (2)일년에 정해진 날(7월 10일) 대 제사장에 의해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위해 드리는 속죄제도가 있는 바, 이를 대 속죄일(레16:34, 25:9)이라 부릅니다. ①대 제사장인 아론이 먼저 자신과 자신의 권속들의 죄를 속죄 받습니다(레16:6). ②이어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위한 속죄제사를 드립니다(레16:7-22). a. 이때 두 마리 수 염소를 제물로 구별해 놓습니다. b. 그리고 두 염소에 대해 제비를 뽑아서 한 마리는 여호와의 속죄제를 위해,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scape goat)을 위해 따로 구별합니다(레16:8). 여기서 아사셀 염소를 특별히 신학적 용어로 속죄양 또는 희생양이라고 부릅니다. c. 한 마리는 이스라엘 전체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속죄제로 드립니다. d. 나머지 한 마리에게는 대 제사장이 안수함으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와 불의를 전가시킵니다. 그리고 이 염소를 광야 무인지경으로 데려다가 놓아줍니다. 이는 속죄제를 통해 이스라엘의 죄가 온전히 사면됐음을 가시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와 같은 구약의 제사제도를 예표와 그림자로 설명하면서, 그 속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속죄와 대속의 실체를 시사합니다(히9:11-14). (3)제사제도 외에도 여러 가지 불결하고 부정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성결케 하는 정결법을 제정해 주셨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거룩성을 보존시키기 위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명실공히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내적 외적인 순결을 유지할 뿐 아니라 이런 결과로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화목과 교제가 보장을 받게 됩니다. (4)반면에 이런 제반 규정들이 외식적으로 시행된다거나 아예 불순종으로 나타날 때 시내산 언약에 명시(출19:5-8, 24:4) 된 대로 해당된 심판에 처해집니다. 우리는 이것을 '언약적 심판'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언약적이라 함은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와 사랑이 내포돼 있음을 전제하는 표현으로 심판의 목적이 형벌에 있는 것이 아니고 회개를 통한 회복에 있음을 시사합니다(렘25:7-14, 29:10). 아주 벌하시지 않으시고 다시 구원하시는 교정의 의미로 말입니다. (5)따라서 후에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고 포로로 잡혀가는 일련의 역사적 현실은 모두가 시내산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공의가 언약적 심판의 방식으로 집행된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멸하시지 않으시고 70년 포로생활을 마친 후에 다시 고토로 돌아오게 하심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회복의 손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스1:1-4). 우리는 선지자들의 경고와 예언 속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신4:25-31, 왕상11:9-11, 사1:10-17). (6)이스라엘에게 주신 절기준수 규례는 출애굽의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공동체적으로 공유하면서 이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거국적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특별히 레23-25장은 이스라엘이 해마다 지켜야 할 제반 절기들에 대한 규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 주간마다 지켜야 하는 안식일 규례를 시작으로 유월절(무교절), 칠칠절(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및 초막절이 있습니다. 이 중 속죄일 제사와 나팔절은 하루만 지킵니다. 나머지 유월절이 포함된 무교절과 칠칠절, 그리고 초말절 등 세 절기는 7일간 계속됩니다. 특별히 이들 세 절기는 이스라엘의 3대 절기로 불려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 절기 때에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반드시 정하신 장소(성소)로 나와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소유된 언약백성으로서의 공동체의식을 지속적으로 고취시키기 위함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신앙고백을 이끌어내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때 그냥 빈손으로 나와서는 안되고 반드시 자기가 거둔 수확물을 예물로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신26:1-11). ①하나님께 드리는 수확물과 관련해서 본문에서는 특별히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2절)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②여기서 '내게 주신 토지'라는 말속에는 구속사적 의미가 함축돼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③그러나 이 때의 구원의 의미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 정착하기 된 일까지 포함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입니다. ④그러므로 지금 예배자가 가지고 나온 소산물은 단순한 수확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증거이며 열매입니다. 따라서 이 절기들은 단순히 인간적인 즐거움을 만끽하는 축제가 아닙니다. 여호와 앞에서 여호와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서 기쁨으로 드리는 종교적 축제입니다. ⑤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절기는 백성들로 하여금 구원을 지속적으로 누리고 보존해 나가게 해주는 수단이며 제도적 장치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절기에 담겨진 참된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절기에 담긴 구속사적 내용에 자신을 부단히 적용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명실공히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과 제사장 나라로서의 공동체적 의식을 더욱 함양시켜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7)나아가 이스라엘은 매 절기를 성회로 지켜야 합니다. 성회란 이 날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않으면서 제반 제사 규례들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제사 규례들은 하루만 지키는 성회가 있는가 하면, 며칠씩 지키는 성회도 있습니다. 모든 절기의 기초를 이루는 안식일은 매 주간마다 반복되기 때문에 절기에 포함시키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날에 모이는 성회의 규례는 기타 모든 절기를 지키는 기초가 됩니다. (8)그리고 해마다 되풀이되는 이스라엘의 절기는 다시금 매 칠 년마다 지켜야 하는 안식년과 면제년, 매 오십 년마다 지켜야 하는 희년으로 확대됩니다. ①안식년 제도(레25:1-7). a. 안식년의 특징은 매 칠 년마다 땅을 쉬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종교적인 의미 때문입니다. 땅의 진정한 소유주가 하나님인 사실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입니다. b. 아울러 안식년 준수는 보다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은 안식년을 지켜 땅을 쉬게 함으로 저들을 향하신 여호와의 사랑을 대신 행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소출을 거두지 않음으로 그것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 되게 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저들을 배려해야 합니다. 획기적이고 구체적인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c. 그러므로 신명기서에서는 안식년을 면제년(year of remission)으로도 부릅니다(신15:1-2). 무엇을 면제하는가 하면 돌려 받아야 할 빚을 면제하고, 집에서 부리는 종들을 놓아줍니다. d. 따라서 매 칠 년이 이르면 이스라엘은 농사를 쉼으로 안식년을 지키고, 이웃의 빚을 탕감해주고 종들을 자유케 함으로 면제년을 지켜야 합니다. 여기서 이웃이란 이스라엘 동족을 가리킵니다. 면제년의 적용은 이방인과는 무관합니다. e. 그러면 이스라엘은 왜 이렇게 7년마다 종을 놓아주어야 하는지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구원의 은혜와 감격과 기쁨이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상실되는 일이 결코 일어나서는 아니 되겠기 때문입니다. f. 그렇습니다. 구원은 개인적으로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적으로 소유해 누리는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식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상으로 갱신된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시내산 언약 안에서 항상 민족적으로 존재합니다. 때문에 개인의 실수와 범죄는 백성전체로 확대됩니다. 공동의 책임으로 돌아갑니다. 한 몸으로 연합돼 있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교회비밀이 이에 있습니다.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지체로 연합돼 유기적인 생명공동체로 존재합니다. 때문에 상호 불가분리의 밀접한 관계성을 맺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개인주의가 묵인될 수 없음이 이런 공동체적 원리 때문입니다. g.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피차 결합돼 있는 면제년과 안식년 제도를 내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그것은 곧 자기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사실을 자증하는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백성들이 함께 더불어 자유자가 되었기에 동족의 자유를 속박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면제년을 명령하실 때 과거 애굽에서 종살이했던 일과 그런 노예상태에서 구원받아 지금 자유를 누리게 됐음을 기억하라고 강조하셨던 것입니다(신15:15). h.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누리는 자유는 하나님께서 족장들과 맺으신 언약에 근거해서 은혜로 베푸신 구원사역의 열매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의 은혜에 빚진 자들로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간에 누가 누구를 지속적으로 속박할 권리가 없습니다. 구원은 공유돼야 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7년 면제년의 해에는 지난 6년 동안에 불가피하게 일어났던 구원을 잃게 한 요인들이 제거되고 본래 하나님께서 베푸셨던 구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박탈당했던 구원이 회복돼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다름 아닌 만민 중에 은혜로 택하여 구원받은 언약백성임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②희년 제도(레25:8-55). a. 희년(禧年)은 7년마다 지키는 안식년 혹은 면제년을 7번 지킨 다음 해인, 매 50년째 해에 지키는 절기입니다(레25:6-12). 희년은 50년째 되는 해 속죄일에 전국에서 일제히 나팔을 불면서 시작합니다. b. 희년의 특징은 면제년에 빚의 탕감과 종살이로부터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에 더해 땅을 원주인에게 되돌려 준다는 데 있습니다. (가)가나안 정복 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게 균등하게 땅을 분배해 주셨습니다. (나)그러나 사람이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일로 인해 빚을 지기도 하고, 종살이를 하기도 하며, 때로는 불가피하게 땅을 팔아야 할 경우도 생깁니다. (다)그런데 이런 불가피한 일들이 중도에서 원상태로 회복됨이 없이 무한정 지속된다고 가정할 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출애굽의 구원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시절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묘막측하신 구원이 무색해 집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경제적인 불평등과 불균형으로 인해 상실되거나 빼앗길 수 없습니다. (라)희년은 만일의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제반 사항들을 사전에 차단해 원상 회복시키려는 제도적 장치입니다. 구원의 지속적인 보장을 위해서 말입니다. c. 이런 식으로 희년 제도는 이스라엘의 어느 누구도 다시는 애굽에서와 같은 종의 상태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지속적으로 보장해 줍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분배받은 땅은 여전히 원주인의 것으로 보존되며, 처음에 누렸던 자유도 계속 보장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피차 사랑으로 연합돼 있는 언약공동체가 경제원리나 인간의 세속적인 탐심으로 인해 형제간 구원을 상실하게 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영속적입니다. 중도에서 무효화되거나 취소될 수 없습니다. 빼앗길 수도 없습니다(요10:28-29, 롬8:38-39). 한 번 구원은 영원히 보장돼야 합니다. 성도의 견인교리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d. 이런 원리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돼야 하는 불변의 법칙입니다. 갈라디아서 기자가 구제의 우선 대상이 '믿음의 가정들'이야 한다고 지적하는 내용(갈6:9-10)도 구원의 공동체적 소유와 누림이라는 절기의 본래적 성격을 추구하는 일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일차적 목적은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는 것으로 나타나야 함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빈부(貧富)간 유무상통했던 사건을 기억합니다(행2:44-45, 4:32-37). 이는 구약의 희년 제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예비적 성취를 이룬 것을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입니다.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사역이 곧 구약의 희년 제도를 실체화시키는 사건으로 기록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에 예언된 희년의 사역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시는 것을 통해 확인됩니다(눅4:16-21, 사61:1-2). e.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그들의 역사 속에서 안식년이나 면제년, 그리고 희년을 제대로 지켜 본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훗날 남 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역대서 기자는 기술하기를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70년을 지냈다"(대하36:21)고 묘사하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비단 안식년과 면제년, 그리고 희년 뿐만 아니라 기타 다른 율법들도 얼마나 무시됐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표현 방식입니다. 사실상 이들 안식년과 면제년, 그리고 희년 제도는 율법의 근본 정신인 '하나님 경외와 이웃 사랑'(마22:37-40, 롬13:10)을 자체 속에 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f.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해 마침내 땅의 소유권에 대한 권리회복을 집행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심판에 의해 이스라엘은 쫓겨났고 땅은 비로소 쉼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하나님의 땅은 안식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g. 이렇게 구약의 제반 절기준수에는 구원을 공동체적으로 누리는 진정한 의미의 안식의 개념이 예표돼 있습니다. 이제 신약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안에서 참 된 하나님의 창조적 안식과 구원의 안식을 동시적으로 누리고 있는 셈입니다. 이들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는 통치의 개념으로 능력있게 발휘됩니다. 성경은 이를 현재적 하나님 나라로 부릅니다. 바리새인들에 의해 제기된 안식일 논쟁에 대해 예수님께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눅6:1-5)이라고 답변하시는 배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예비적으로 성취된 안식의 구속사적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이미 도래된 사실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3. 이스라엘의 반역 및 광야 유랑생활(민수기) 이스라엘은 출애굽 한 후에 시내산에 도착해 일년 가까이 지냅니다. 민수기는 출애굽 한 후부터 제2년 2월 1일 즉 시내산을 떠난 날로부터 요단 동편 모압 광야에 도달하기까지 약 38년 동안 광야에서 방랑(放浪) 생활한 사실의 기록입니다. 이는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심판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을 고취시키고자 하시는 계시적 사건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나안은 오직 믿음으로만 입성과 정복이 가능한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의 성전(聖戰)을 수행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군대의 자격으로 가나안 정복에 나서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의 군대로서 오직 군대장관 되시는 여호와의 명령에 죽고 살아야 할 위치에 있는 자들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순종은 최고의 무기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가데스 바네아 정탐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은 다시 한번 총체적인 불순종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38년간 광야를 유리 방황하는 가운데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출애굽 1세대가 모두 죽는 엄청난 언약적 심판의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1)가데서 바네아 반역사건(민13-14장) (1)출애굽 1세대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이며 부성애적인 간섭과 보호와 인도하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언약식 체결에 의한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백성으로서 절대 순종의 삶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사에 불신과 불평과 이로 인한 반역을 일삼는 가운데 급기야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심판을 자초하기에 이릅니다. a. 민13-14장에 기록된 가데스 바네아 사건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심판이 구체적으로 시행된 가장 극명한 사건기록입니다. b. 모세는 12지파에서 한 명씩을 뽑아서 12명을 가나안 정복에 앞서 정탐꾼으로 보냅니다. 그러나 현지정탐 후 결과보고는 크게 둘로 나뉩니다. 첫째, 부정적인 측면의 보고자 10정탐꾼은 적진정찰의 결과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고합니다. 전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것을 부추깁니다. 지금 이들은 가나안 정복이 하나님의 성전(聖戰)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생명과 신앙으로 붙드는 가운데 하나님의 대리전쟁을 수행해야 할 여호와의 군대로 존재하고 있음을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단지 사람의 소견을 앞세워 하나님의 뜻에 거역할 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며 동시에 불순종입니다. 시내산 언약을 정면에서 거부하는 반역적 처사입니다. 둘째, 구속사적인 측면의 보고자 반면에 갈렙과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현실을 직시합니다. 언약에 근거한 구속사적 관점에서 현실을 해석합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불러내신 구원의 목적이 가나안 정복과 거기에 하나님의 신정적 나라를 세우는 일임을 분명히 직시합니다. 그래서 동일한 상황을 정반대의 시각에서 접근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승리를 보장해 주실 것을 확실히 믿고 의지합니다. 그래서 가나안 진군을 촉구합니다. 우리는 이들의 신앙적 관점을 통해 여호와 신앙의 성격이 철저히 계시 의존적이고 섭리 의존적으로 나타나야 함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적 언약입니다. 그것은 궁극적 성취를 전제합니다. 어떤 환경도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을 변경시키거나 무효화시킬 수 없습니다. 사단의 세력까지도 말입니다. 성도들이 말씀을 생명처럼 붙들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구체적인 신뢰의 표명이기 때문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족장들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의 약속들이 출애굽의 계시적 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것을 이미 경험했습니다.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시는 유월절 사건과 바로와 그의 군대를 수장시키시는 홍해도하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족장들과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과 전능성을 이미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자손언약 성취의 연장선상에서 필연적으로 실현될 가나안 땅 언약의 성취를 믿음으로 전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와 신앙의 본질이 이렇습니다. 언약의 말씀을 생명의 철칙으로 삼아 적극 붙좇는 삶의 자세 말입니다. c. 그러나 이미 믿음을 상실한 이스라엘 회중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 가운데 애굽에로의 귀환을 강력히 요구합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를 향해서는 돌로 쳐죽이려고까지 합니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임재 하십니다(민14:10). 이는 하나님께서 당시 긴박한 역사의 현장에 신속하게 친히 개입하고 계심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2)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회중을 향해 준엄한 언약적 심판을 선고하십니다. 곧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이십 세 이상 계수함을 받은 자, 곧 하나님을 원망한 전 이스라엘 회중이 결단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선포하십니다(민14:29-30). 저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후 이스라엘 회중의 광야생활은 이런 식으로 언약적 심판의 일환으로 시작됩니다(34-35절). (3)본 가데스 바네아 사건을 통해 민수기 저자는 오직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철저히 믿고 의지하는 적극적인 순종의 삶을 통해서만 가나안 정복은 성취될 수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후에 언약궤를 앞세우고 범람하는 요단강을 도하하는 사건이 이런 사실을 극명하게 예시해 줍니다(수3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정복 후 구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전 역사의 성격이 시종 불순종으로 일관된 사실을 봅니다. 이는 율법 앞에서 인간은 철저히 정죄 당하는 연약한 자들로서 율법의 본래적 기능이 새 언약 안에 계시된 메시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갈3:23-25).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말입니다(롬3:21-22). 이런 사실로 인해 언약의 내적 통일성과 연속성이라는 원리 하에서 옛 언약으로서 시내산 언약은 자연스럽게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 된 새 언약을 처음부터 암묵적으로 지향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4)그렇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 한결 같은 성경의 증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 그 분을 섬기며, 그 분의 종말론적 나라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하게 요구되는 최선의 영적 덕목입니다. 신약의 히브리서 기자는 천상의 도성(都城)을 향한 바람직한 신앙의 여정을 기술하면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가 계신 것과 또한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賞)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히11:6). 물론 여기서 상이란 문맥상 세속적 의미가 아닌 영적이고 본질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할 줄 압니다. 곧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인 하나님 나라를 실질로 소유하는 것 말입니다(10, 16절). 그렇습니다.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을 성도의 궁극적인 기업으로서 산 소망이며 최고의 상급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벧전1:4). (5)민수기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반역과 범죄행위는 타락한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이 얼마나 적대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롬3:10-18, 1:21-23). 저자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만이 우리의 구원은 보장됨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민수기서는 이를 통해 율법 속에 감춰진 복음의 절대 필요성을 은연중 성경 독자들에게 시사합니다. 2)불뱀과 놋뱀 사건(민21:4-9) 민21장은 이스라엘 민족이 가데스 바네아 반역 사건(민13-14장) 이후 출애굽 제 40년 중반에 이르러 단순한 광야 유랑의 단계를 벗어나 구체적인 가나안 정복 사역을 도모하기 위해 외곽지역을 먼저 평정코자 요단 서편 땅을 정복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중 본 장은 특별히 출애굽 2세대로 구성된 이스라엘 자손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출발하여 모압 광야 비스가 산 근경까지 진군하는 도중 전후로 요단 동편 지역 가운데서 주요 지역 세 군데를 점령하여 가나안 정복 전쟁의 교두보를 마련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중 본문에 수록된 놋뱀 사건은 행군도중 노선 선택에 대한 불만으로 일어난 불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저자는 본 사건의 기록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으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을 통해서만 궁극적 구원이 보장됨을 시사합니다. 다시 말해 가나안 정복은 시종일관 오직 믿음에 근거해서만 실현 가능함을 강력히 제시합니다. 한편 사도 요한은 본문의 놋뱀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 무상의 은혜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에 대한 예표로 설명합니다(요3:14-15). (1)이스라엘은 당시 에돔과 아모리 관할의 전략적 요충지인 소위 '왕의 대로'를 우회해 멀리 돌아가는 것에 심한 불평과 불만을 토로합니다(민21:4). (2)더하여 이스라엘은 만나를 박한 식물이라 하여 정색(正色)하여 불만을 표시합니다. 만나는 광야생활 내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육체의 보존을 위해 친히 공급하신 하늘양식입니다. 이는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께 의존돼 있음을 시사하는 계시적 사건으로서 사도 요한은 만나 사건을 영생하는 생명의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설명합니다(요6:32-35). (3)한편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는 자들을 물어 죽게 하십니다. 언약적 심판입니다. (4)즉각적으로 이스라엘은 회개합니다.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한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잘못을 시인합니다. 그리고 용서를 구합니다. 이에 모세가 중보적 탄원을 드립니다. (5)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치유책을 마련해 주십니다. a.놋으로 불뱀의 형상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라고 명하십니다. b. 물린 자마다 놋뱀을 보면 살 것에 대해 약속해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길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는 말씀입니다(요3:16, 11:25-26, 14:6, 행4:12). 그렇습니다. 성도의 거듭남은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벧전1:23). c.모세가 즉시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아 놓습니다. 모두가 멀리서도 다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d. 불뱀에게 물린 자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본즉 즉시 치유돼 생명을 보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는 불신하여 쳐다보지 않고 다른 방도를 구하는 자들은 한결 같이 죽게 되었다는 사실이 암묵적으로 시사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받을 수 있는 아무런 이름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며 진리이고 생명이 되십니다. 사도 요한은 직접적으로 본 불뱀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사건에 연결시켜서 믿음으로 받는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 (6)이런 방식으로 저자는 구원의 목적으로서 가나안 정복과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을 통해서만 궁극적 성취가 가능함을 지속적으로 강조합니다. 성도가 말씀을 신앙과 생명의 철칙으로 삼아 붙좇아야 함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7)그러나 안타까운 일은 본 사건 속에 담긴 구속사적 본의(本意)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내 퇴색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려는 인간의 타락한 죄성의 발로 때문입니다. a.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을 치유케 한 것은 놋뱀 자체가 아닙니다. '놋뱀을 보면 살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을 담보로 말씀이 효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 말입니다. b.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믿음의 본질이 말씀에서 이탈해 보이는 형상을 섬기는 우상숭배적 신앙으로 변질돼 버렸습니다. 곧 놋뱀을 숭배했다는 사실입니다. 타락한 죄의 본성 때문입니다. 로마서 기자가 이를 잘 대변해 줍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우리는 이미 이런 사실을 출애굽 1세대가 저지른 황금 송아지 우상 숭배 사건을 통해 확인한 바 있습니다(출32:1-6).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형상숭배 사건 말입니다. c. 열왕기서 기자가 놋뱀에 대한 형상숭배 사건을 동일하게 고발합니다. 이때는 남 유다 왕국의 히스기야 왕이 통치하던 시대였습니다. 히스기야가 특단의 종교개혁을 시도합니다. "........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놋 조각)이라 일컬었더라."(왕상18:4) 이때는 민수기 불뱀 사건 이후 약 700여 년쯤 되는 시점입니다. d. 그렇습니다. 성도의 신앙이 말씀의 본의에 입각해 끊임없이 반추되고 개혁되지 않으면 타락한 인간의 본성상 필연적으로 본질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연약성입니다. 이스라엘은 놋뱀 사건 속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의 본의를 이내 망각하고 보이는 형상만을 타락한 종교심을 부추겨서 자의적 열심으로 섬겨왔던 것입니다. 이는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결정적으로 빠질 수 있는 왜곡된 신앙적 함정입니다. 신앙의 도구화와 신앙의 기복화 현상 말입니다. e. 하나님께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로 주셨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를 먼저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의 구원은 우리의 가장 우선적인 필요를 채우신 사건입니다. 영벌의 죄책으로부터 영생의 구원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의 다른 필요도 채워주실 것에 대한 보증적 사건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롬8:32, 빌4:19). 그러기에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의 신앙적 내용과 성격과 방향성은 총체적 입장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마6:33). f. 그렇습니다. 올바른 성경적 신앙관은 하나님을 목적 삼는데 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그 분의 영광을 추구하는 일에 모든 신앙적 관심을 기울이는 자세 말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일차적 목적이 사람의 현세적 행복과 안일, 그리고 세속적 성공을 지향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때, 성경은 이를 우상 숭배적 신앙이라고 규정합니다(골3:5). 거기에는 인간의 탐심이 왕노릇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위한 인본주의적 신앙관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결코 수종자가 아니십니다. 따라서 인간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목적으로 작용할 수 없습니다. 이는 인간의 현실적인 필요를 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신앙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인간의 유익이 신앙의 목적이 되는 곳에 여호와의 신앙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g.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은 말씀에 근거한 여호와 신앙을 형상화시켜 사람의 유익을 위한 인본주의적 신앙으로 변질시켜 버렸습니다(왕상12:25-33). 이런 의미에서 개혁은 방법의 모색이나 제도적 개선이 아닙니다. 말씀의 본의적 회복일 뿐입니다. 말씀의 본질로 돌아가는 자기부인의 자세 말입니다. (4)시내산 언약의 갱신(신명기:출애굽 2세대를 위한 모세의 설교) 민수기서에 기술된 광야 38년의 생활은 출애굽 1세대에게 불순종과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심판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이제 가나안 정복은 자연히 출애굽 2세대에게 바톤이 넘겨집니다. 이를 위해 모세는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출해 여기 가나안 동편 모압 땅까지 인도해 오셨는지 그 경위를 세 편의 유언적 고별설교를 통해 설명합니다. 그리하여 출애굽 1세대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구원역사를 회고하며 동시에 미래 역사를 조망하는 가운데 율법의 의미를 새롭게 갱신시켜 강론함으로써 출애굽 2세대에게 여호와 신앙의 위대한 유산을 남기고자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정복은 시내산 언약을 통해 계시된 아브라함 언약의 절정이었기 때문입니다. ①첫 번째 설교 신1-4:43까지는 출애굽 1세대와 관련된 지난 40년의 역사를 회고합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이론이나 관념이 아닌 실제의 역사적 사건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생존과 절대 주권적 섭리역사를 강력히 시사함에 다름 아니며 나아가 창조자이시며 구원자가 되시는 여호와 신앙의 당위성을 강력히 고취시키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그 정체성과 거룩한 사명을 고취시키기 위해 주신 율법에 대한 순종의 여부는 복과 화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주지시킴으로 적극적인 순종의 결단을 촉구하고자 했습니다. 이로 인해 동일한 실수와 실패를 예방할 뿐 아니라 자율적 순종을 통해 보다 성숙된 여호와 신앙관을 확립케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②두 번째 설교 신4:44-26:19까지는 시내산 율법을 종류별로 분류해 재 언급함으로써 출애굽 2세대를 향해 시내산 율법의 갱신을 시도합니다. 처음 설교에서는 여호와 신앙의 당위성과 필연성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강론한 바, 2차 설교에서는 시내산 율법의 재해석을 통해 순종의 구체적 내용과 이로 인한 바른 신앙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밝힙니다. 이는 출애굽 1세대가 이를 어김으로 경험한 실패를 되풀이해서는 안되며, 더욱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의 당위성과 정체성 및 거룩성을 유지할 것에 대한 강한 요구가 담긴 메시지입니다. 이런 식으로 출애굽 2세대는 1세대와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언약적 연속성과 내적 통일성에서 동일한 접촉점을 찾게 됩니다. 따라서 시내산 언약식의 내용은 이런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출애굽 2세대에게 재확인돼 갱신되며 그 계시적 의미가 보다 구체적으로 확장됩니다. ③세 번째 설교 신27-34장까지는 모세가 자신의 생애가 마친 후에 전개될 미래에 대해 선지자적인 계시안목을 갖고 경고와 예언의 성격을 담은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저자는 세 번째 설교를 통해 특별히 출애굽 1세대를 대상으로 주신 시내산 언약이 이제 모압 동편에서 출애굽 2세대에게 이르러 재확인되는 것으로 인해 이를 모압 평지언약으로 갱신되었음을 우회적으로 기술합니다.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이게 명하사 모압 땅에서 또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이 이러하니라."(신29:1) 따라서 본 설교는 신명기서 전체의 결론적인 내용인 동시에 모세 오경 전체의 결론적 성격이 부각됩니다. 특별히 신29:22-28에서 30:1-10까지에는 불순종과 이방신을 섬기는 결과로 임할 언약적 심판으로 이방의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언적으로 경고합니다. 그러나 열조에게 행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아주 버리지는 않으시고 저들을 다시 고토로 귀환시킬 것에 대해 예언합니다. 불순종의 죄는 응분의 대가를 받아야 하지만 은혜언약의 본래적 유효성은 결코 무효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④모세의 사명 완료 세 편의 고별 설교를 끝으로 모세의 사명은 완료됩니다. 출애굽의 위대한 영도자이며 모세 오경의 저자인 모세의 죽음으로 아브라함 언약에 있어서 자손언약의 성취라는 구속사 진행의 한 계시시대가 마감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이어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우심으로 출애굽 2세대를 통해 땅 언약의 성취라는 새로운 계시시대의 구속사를 집행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내산 언약은 이제 신명기서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재확인된 모압언약(신29:1)을 통해 갱신되고 확장되는 의미를 갖습니다. 제 2 장 땅 언약의 성취 역사(여호수아서) 모세는 신명기의 고별사를 끝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왔던 구속사 진행의 대 사역을 마감합니다.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가나안 전 지경을 바라보는 것으로 그의 생명을 이 땅에서 거두어 가십니다(신34:1-7). 여호수아서는 이런 모세의 죽음과 때를 같이 하여 여호수아를 차기 지도자로 삼아 2세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성전(聖戰)을 수행케 하는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해서 모세의 인도로 말미암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 자손언약을 성취하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가나안 정복을 통해 땅 언약을 성취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역사와 관련해서 두 가지 언약적 당위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가나안 땅의 분배 근거 첫째로 가나안 땅을 정복해 분배함이 아브라함 언약의 맹세적 보증으로 주신 횃불언약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창15:13-16상). 다시 말해 아브라함 언약 성취의 일환임을 의미합니다. 가나안 정복의 구속사적 성격을 총체적으로 표상하는 요단강 도하 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1)먼저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격려하시고 위로하시며 강권하십니다(수1:1-9). (2)이스라엘 열조에게 행하신 모든 약속을 지켜 행하실 것을 확증해 주십니다. 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언약을 상기시키는 내용입니다. (3)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적 순종에 불충하면 응분의 대가가 지불될 것을 경고하심으로 여전히 시내산 언약에 따른 순종의 요구가 동일하게 적용됨을 봅니다(7-8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언약은 수혜자로 하여금 자율적 순종을 촉구하는 것을 통해 은혜의 은혜 됨을 더하는 성격이 담겨 있음을 봅니다. (4)이는 1세대에게 적용된 동일한 원리에 근거해서 2세대를 인도하실 것에 대한 확약인 동시에 경고성 발언이기도 합니다. (5)이스라엘은 요단 강을 홍해에서 그랬듯이 맨 땅같이 건넙니다(수3:14-16). 그러나 두 사건 사이에는 도하(渡河) 순서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①홍해도하 때에는 먼저 길을 내고 건너게 하셨습니다(출14:16). 출애굽 초기 단계에서 여호와 신앙에 대해 거의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유아적으로 다루셨습니다. ②그러나 요단강 도하 때에는 사정이 다릅니다. 38년간의 광야 생활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을 만한 많은 증거를 실제적으로 보고 듣고 경험한 상태였습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비록 저들의 신앙여정에 여전히 실수와 실패의 요소들이 반복될지라도 결코 출애굽 당시 1세대가 소유했었던 유아적인 믿음의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성숙했습니다. ③그래서 때마침 강둑을 넘칠 정도의 물이 흐르는 요단강을 직접 도하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믿음을 보시기 위함입니다. 이로 인해 요단강 도하 사건은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될 가나안 정복사건이 오직 믿음으로만 승리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실제적이고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음을 계시합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싸우시는 성전(聖戰)의 의미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곧 이어 수행하게 되는 전쟁 역사상 전대미문의 여리고성 함락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6)요단강을 마른땅같이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즉각 가나안 정복사역에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십니다. 도중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나게 하십니다. 곧 하나님의 현현 하심입니다. 그 분은 여호수아로 하여금 신발을 벗게 합니다(수5:15). 이는 여호수아의 사역이 모세의 사역의 연장이며 언약적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동일한 연장선상에 놓여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의 성과 왕과 용사들을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셨다고 말씀해 주십니다(수6:2). 구체적 전략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는 승리가 이미 보장돼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말씀을 좇아 여리고 성을 하루에 한 번씩 육일 동안 여섯 번 돕니다. 제 칠일에는 일곱 번 돌고 외침으로 간단히 점령합니다(6장). 말씀이 현실화됩니다. 여리고 성 함락의 구속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가나안 정복역사는 하나님의 성전(聖戰)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군대장관이 되셔서 직접 전쟁을 수행하십니다. ②때문에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폭적이고 절대적인 신뢰의 믿음을 발휘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승리에 동참하게 됩니다. ③이런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며 아울러 생명적 활동을 전개시켜 나가는 근본 원리가 됨을 결정적으로 시사합니다. ④따라서 믿음의 승리로 기록된 여리고 성의 함락은 오직 믿음의 방식을 통해서만 가능한 가나안 정복역사의 계시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이런 성전(聖戰)의 방식으로만 가나안은 정복돼야 했습니다. (7)여호수아서 기자는 이런 하나님의 적극적인 간섭하심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해 가면서 땅을 분배받았을 뿐 아니라, 일부 남은 지역은 도면상에서 분배함으로 사실상 가나안에 대한 땅 언약이 예비적으로 성취됐음을 시사합니다(수21:43-45). ①저자는 이스라엘 열조에게 주시겠다던 온 땅을 다 주신 것을 설명합니다(43절). ②저자는 여호와께서 그들 사방에 '안식'을 주셨다고 설명해 이를 뒷받침합니다(44절).이는 이미 신명기서를 통해 출애굽 2세대들에게 확약한 바 있는 내용입니다(신12:8-10). 다시 말해 시내산 언약이 가나안 정복사역을 통해 예비적이기는 하지만 가시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후에 열왕기서 기자는 다윗과 솔로몬의 신정적 통치하에서 안식의 구속사적 의미가 보다 구체적으로 실현됐음을 강조해서 기술합니다(왕상4:24-25, 5:4). 이런 설명은 당시 통일 이스라엘 왕조가 누리고 있는 국가적 평안과 안식의 도래가 철저히 시내산 언약과 아브라함 언약의 구체적 성취와 밀접히 연관돼 있음을 암시적으로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사실상 안식사상은 창조이래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으로 곧 구속사의 절정인 하나님 나라 사상과 밀접히 연관돼 있습니다(창2:1-3, 눅6:5, 계21:4). 이런 의미에서 당시 열왕기서 기자는 사실상 다윗과 솔로몬 치하에서 통일 이스라엘의 왕조가 신정적 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가장 극명하게 현시하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저자는 모든 하나님의 선한 일(약속)들이 하나같이 성취됐음을 기록합니다(45절). ④이는 비록 일부가 도면상으로 분배됐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성취됐음에 다름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은 신적 신실하심에 기초하기에 식언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사실은 다윗과 솔로몬 통치 때에 사실로 판명됩니다. 위로 단에서부터 아래 브엘세바까지를 포함한 가나안 전 지역이 통일 이스라엘의 점령지에 예속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왕적 치세의 극치가 이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 전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왕상4:20-21). 2. 가나안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가나안 족속의 죄의 관영(貫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아브라함의 횃불언약에서는 이를 아모리 족속의 '죄의 관영'이란 표현으로 묘사합니다(창15:16). 성경에서 죄의 관영이라는 관용어적 표현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곤 합니다. 노아 시대에 죄로 말미암는 시대적 상황이 그랬습니다(창6:5-7).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을 고발할 때도 그랬습니다(창18:20-21). 신약의 복음서 기자들은 한결같이 이 시대의 종말론적 심판을 예견하면서 동일하게 노아 및 롯의 때와 방불할 것에 대해 기술합니다(눅17:26-30, 마24:37-39). 이는 결국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죄의 관영이 하나님의 심판을 필연적으로 자초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1)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의 구속사적 성격은 한편으로는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인 동시에, (2)동시에 다른 한편은 모리 족속으로 대변되는 가나안 족속의 죄가 관영하기를 기다려 심판하시기 위한 의도가 내포돼 있다는 말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관영한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적 집행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의 정황적 근거를 사사기에서 엿보게됩니다. ①삿1:1-7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도면상으로 남겨진 가나안 땅에 대한 정복역사 기록의 초반부가 소개됩니다. 유다와 시므온이 연합해 가나안 정벌에 나섭니다. ②이때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이라는 왕을 잡아 수족의 엄지를 끊는 기사가 나옵니다(6절). ③아도니 베섹은 이 사건을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끔직한 범죄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적 심판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과거에 칠 십인 왕을 잡아 수족의 엄지를 자르고 그들로 자신의 상(床) 아래서 짐승처럼 먹을 것을 줍도록 행한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7절). ④이는 가나안 족속들의 죄가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척도입니다. 아울러 가나안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당위성을 설명함에 다름 아닙니다. ⑤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관영한 가나안 족속의 죄를 징계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가나안 정복의 성전(聖戰)을 감당하게 됩니다. (3)이제 그 시기가 도래한 것입니다(출12:40-41).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인도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단행하셨으며 이제 가나안 정복의 나팔이 울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상의 사실을 통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역사와 관련된 두 가지 구속사적 의의, 곧 아브라함 언약으로서 '땅 언약 성취'와 '심판의 당위성'의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제 3 장 통치권(왕) 언약의 성취(삿-왕상11장, 역대기) 우리는 창12장에서 아브람을 부르신 이후 그와 맺으신 소위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 그동안 초기 인류역사 속에서 비교적 암시적이고 암묵적으로만 진행되던 하나님의 구속사 가 본격적으로 세상 역사 가운데 가시화 되는 가운데 공식적으로 표명된 사실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나아가 그 내용적 성격 또한 신적 언약의 특성상 앞에서 주신 아담의 창조언약, 여자의 후손언약, 그리고 노아의 보존언약 등과 상호 밀접히 연관돼 있음을 살펴봤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 언약의 총체적 주제는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이며 이는 특별히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손을 통해 이루어 질 것임을 확약하신 바 있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를 보다 확증시켜 주시기 위해 중도에서 맹세적 보증의 일환으로 횃불 언약식을 체결해 주십니다(창15장). 우리는 본 횃불 언약식의 내용을 좇아서 430년간 종살이하던 야곱의 12아들의 후손들이 거대한 민족을 이루는 가운데 출애굽 사건을 통해 자손언약 성취의 절정을 이루는 모습을 봅니다. 한편 여호수아서를 통해서는 출애굽 2세들로 하여금 예비적이며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가나안 땅 정복에 대한 언약이 사실상 실현되고 있음을 살펴봤습니다. 따라서 이제 아브라함 언약에 있어서 남은 부분은 통치권 언약으로서 열왕의 약속입니다. 신정적 왕국으로서 통일 이스라엘을 지향하고 있는 사사기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점진적으로 왕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사시대는 본격적인 이스라엘의 왕정을 향한 과도기적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1. 왕의 필요성 대두(사사기) 사사기 저자는 사사시대의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서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삿17:6, 18:1, 19:1, 21:25)고 기술합니다. 이는 왕이 없는 시대의 기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없다는 사실로 인해 야기되는 영적 타락상을 고발하는 기사내용입니다. 곧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신정적 왕 말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사사기서는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해 곧 가시화 될 명실상부한 신정적 왕국의 왕의 출현과 필요성(necessity)을 학수고대하는 과도기적 시대에 관한 얘기로 일관됩니다. 이어서 룻기서에서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의 이름이 비록 암시적이기는 하지만 유다의 후손인 베레스와 보아스 및 이새의 계보를 통해 구체적으로 제시(presentation)됩니다(룻4:18-22). 사무엘서에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의 실제적 출현(appearance)과 등극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에 합한 왕의 선택과 실패를 먼저 소개함으로 신정적 왕의 출현에 대한 극적 효과를 더한층 높입니다. 이런 성경내용과 편집상의 상호 관계성 속에서 사사기의 구속사적 의의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의 출현을 그토록 간절히 소망하는 저자의 심정을 엿보게 됩니다. (1)사사(judge)는 구속자,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은 약340년 (BC1390-1050)가량의 영적 암흑기에 빠집니다. (2)사사기는 이 기간 동안에 일어난 이스라엘의 영적 부패와 타락상을 범죄-심판-회개-구원이라는 순환적 패턴을 통해 기술합니다. (3)사사기 저자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 17:6, 18:1, 19:1)"고 사사시대의 영적 상태를 고발합니다. (4)이에 대한 구체적 사례를 삿17-21장 속에 소개한 두 가지 사건기록을 통해 증명합니다. 곧 미가의 개인 가정을 통해 당시 이스라엘의 보편화된 혼합주의적 종교적 타락상을 고발합니다(17-18장). 다음으로는 레위인의 축첩생활과 그녀의 죽음이 이스라엘 동족간 내분으로 비화되는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의 사회 윤리적 타락상을 고발합니다(19-21장). (5)사사기 저자는 이런 방식의 기술을 통해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로서 왕의 필요성이 적극적으로 요청됨을 상대적으로 역설합니다. 다시 말해 사사시대는 향후 아브라함의 언약과 시내산 언약에 근거해 실현될 신정왕국으로 가는 길목으로서의 과도기적 기간임을 암시합니다. 2. 왕의 시사(룻기) 룻기서의 내용적 주제가 무엇에 집중할는지를 예민한 독자는 이미 파악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왕에 대한 시사입니다. 누가 시내산 언약에 대한 율법준수 사상을 회복시켜서 자기소견에 좋을 대로 행하는 극단의 개인주의를 평정해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의 구체적 성취인 신정왕국의 명실상부한 왕으로 현시 될 것인가를 제시함이 룻기서의 저작의도입니다. 룻기서는 사사기에 이어 이스라엘에 정작 필요한 왕이 누구인지를 언급함에 있어서, 여자의 후손 언약이 구속사 전개를 통해 어떻게 진전돼 나왔는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때 저자가 사용하는 도구가 족보입니다. 우리는 이미 족보가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요긴한 계시적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창세기를 통해 충분히 살핀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족보가 갖는 의의는 첫째로 역사적 사실성에 대한 확증입니다. 둘째는 새로운 계시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구속사 진행에 있어 계시의 점진성의 제시입니다. 이런 족보의 계시적 기능에 따르면 이제 아브라함 언약의 최종 성취인 이스라엘의 왕은 유다의 계열(창49:10)에서 나오게 되는 바, 다윗에게 그 구속사적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1)그렇습니다. 룻기서 저자는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품으신 이스라엘의 명실상부한 왕으로 지목(룻4:22)합니다. (2)그의 족보의 기원을 의도적으로 베레스(룻4:18), 곧 유다와 며느리 다말 사이에 이루어진 '계대 혼인법'에 연결시킵니다(창38장). (3)이는 오벳이 동일한 원리인 수혼법(신25:5-6)에 근거해 보아스와 룻 사이에서 태어난 사실을 염두에 둔 의도된 '신학적 상응성의 원칙'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4)이렇게 해서 사사기에서 대두된 왕의 절대 필요성은 이제 룻기서에서 보다 발전된 계시로 제시되는 가운데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왕적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3. 왕의 출현 및 등극 그리고 신정적 통치(사무엘서) 사무엘 상(上)은 사무엘의 등장과 그로 말미암은 사울 왕의 통치를 다룹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자손언약의 성취가 모세의 인도를 통해 진행됨을 보았습니다. 동일한 원리로 가나안 땅의 정복역사는 여호수아를 통해 이루어 졌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남은 언약인 통치권자로서 왕 언약 성취는 사무엘이라는 선지자를 먼저 준비시킴으로 시작됩니다(삼상1-3장) 사무엘 상은 이런 의미에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사사시대와 룻 시대의 영적 부패와 타락의 암흑시대를 거쳐 명실공히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신앙 공동체로서 신정적 왕국을 향한 본격적인 전환의 역사를 다룹니다. 물론 사무엘서가 추구하는 왕정정치는 이방의 전제 군주로서 왕의 제도가 아닌 신정적 군주제를 말합니다. 이 점에서 사울 왕은 실패의 거울(삼상13:13, 15:23, 16:1상)이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으로서 다윗(삼상13:14, 16:1하)의 위상이 이상적인 신정체제의 왕으로 부각됩니다. 1)왕정에서의 선지자 직분의 공식적 출현 사무엘서 기자는 이스라엘이 사사시대의 과도기적 혼란기를 지나 본격적인 왕정으로 전환되는 것과 때를 같이 해서 선지자 직분의 등장을 소개합니다. 이는 왕정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될 수 있는 인간적 부조리와 불합리성의 문제점을 미연에 방지해 명실공히 신정왕국으로서의 왕정제도를 보다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용케 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주신 직분입니다. 사무엘서에서 선지자직분에 대한 강력한 시사는 왕정의 가시적 출현과 더불어 선지직이 공적으로 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는 점입니다. (1)이스라엘의 선지자 직분은 모세로부터 유래합니다(신18:15-18). 선지자로서의 기능적 역할은 멀리 아브라함에게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갑니다(창20:7). 그러나 시내산 언약에 선지직의 실제적 토대를 두고 있는 만큼 이스라엘의 선지자에게는 시내산 언약의 의미를 후세대들에게 전하고 해석할 책임이 맡겨져 있는 것입니다(신18:19-22). (2)사무엘서에서 우리는 선지직이 하나의 직분으로서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가며 또한 제도화되어 이스라엘의 정치무대의 중요한 한 부분을 담당하게 되었음을 목도하게 됩니다. 선지직의 이러한 변화는 "지금 선지자라 하는 자를 옛적에는 선견자라 일컬었더라"(삼상9:9)는 말 속에서 잘 드러납니다. (3)특별히 사무엘에 대한 이스라엘의 소망을 수록한 기사(삼상1-3장)가운데 강조점은 그가 향후 수행해야만 했던 선지자 직무에 집중됩니다.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 알았더라."(삼상3:20) (4)그러나 사무엘에게 맡겨진 선지직의 직무수행은 하나님에 의해 사울을 왕으로 지목해 기름 붓게 되는 삼상9-10장에 이르러 비로소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선지자 직분이 중요한 정치적 실체로 등장한 것은 사울의 피택사건과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습니다. 결국 기존의 한 직분(선지직)에 대한 새로운 강조는 새로 생겨난 정치적 직분(왕직)을 견제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입니다. 신정왕국의 경호원으로서의 역할 말입니다. (5)그래서 사사시대에는 사사의 관장 하에 있었던 전쟁에서의 통솔권이나 정치적 결단은 왕에게로 넘겨집니다(삼상8장). 결국 왕정의 개시로 인해 중요한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으니 곧 모세의 통합적 영도력은 이스라엘의 왕정 하에서 왕직과 선지직으로 이원화되기에 이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직은 신탁에 의한 영적 업무를 관장하는 반면, 왕직은 속성상 행정적 직분이므로 이스라엘이 정상적인 신정적 왕권을 발휘하는 한에는 선지직은 사실상 왕직보다 우위를 점유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다윗과 아합에게서 이런 사실의 양 극단이 극명히 대비돼 기술됩니다. 2)왕직과 선지자직의 상호 관계성 이스라엘에 잠재돼 있는 불충을 제재하기 위한 목적에서 그리고 왕직을 선의적으로 견제하기 위한 보호적 기능으로서 이스라엘의 왕정에로의 체제변화와 발맞춰서 선지직에 대한 배려가 신속히 강화되기에 이릅니다. W. J. Dumbrell(Covenant and Creation:언약과 창조, 크리스챤 서적, 1999년)은 신정제도하에서 선지직의 대두 배경을 다음과 같이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해 설명합니다. (1)왕직에는 언약관계의 지속을 방해하는 위협요소가 내재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위협요소는 뒤이은 이스라엘의 왕정사(王政史)를 통해 충분히 현실화돼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 왕직에 내재하였던 위협은 사사시대에 만연했던 개인주의로 말미암은 폐단과는 정반대의 양상을 띠며 나타나게 됩니다. 즉 왕정시대에는 무모한 중앙집권 내지는 지나치게 까다로운 규칙에 의해 일을 처리하는 관료정치의 폐단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2)나아가 더욱 곤란한 점은 왕들이 치밀한 외교관계 구축을 통해 외부적 역경들을 물리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친선 외교관계는 특별히 종교적 타협과 절충을 수반하기 일쑤였으며, 그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신뢰하라는 율법의 첫 계명과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서 제반 사회 문화적 규례를 준수하라는 명령에 대한 직접적인 거역으로 작용하기에 족했던 것입니다. ①이런 사유로 인해 이스라엘의 신정적 왕정사에서 왕직과 선지직은 상호 불가피한 충돌을 배제할 수가 없게 됩니다. ②특히 선지직 강화의 추세는 왕권을 견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왕정의 경호원의 자격과 신분으로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신정적 역사 속에서 왕권의 남용을 계속적으로 꾸짖는 입장을 취했던 것이 또한 사실입니다. ③이런 의미에서 사실상 선지직 자체는 종교적 직분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정치적 직분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선지자직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왕권이 직접적으로 행사되는 나라에서는 가장 최고의 위치에 있는 직분임에 틀림없습니다. 3)왕직과 선지직 간의 갈등의 실례 우리는 위에서 왕정제도의 본격적 시행과 더불어 더 한층 강화된 선지직 출현의 배경에 대해 살펴본 바 있습니다. 특별히 선지직이 신탁에 근거해 왕정의 경호원의 자격으로 신정정치에 깊이 관여하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왕직과의 마찰과 갈등 및 대립구도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기 왕정사에서 사울 왕과 사무엘 선지자의 관계는 이런 양자간의 직임상 야기되는 첨예한 갈등과 대립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구체적 실례입니다. (1)사무엘 선지자는 백성들의 강력한 요구(삼상8:20)와 하나님의 재가(삼상8:21-22)에 따라 베냐민 지파 소속의 사울을 기름 부어 왕으로 내정합니다(삼상10:1). (2)사울이 비록 사무엘의 기름 부음으로 왕의 자리에 정식으로 올랐으나 그의 선발과 그의 왕적 권세의 발휘는 하나님의 기준과 마음에 크게 부합되지 못합니다. (3)사실상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지명하신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의 소견에 따라 선출된 왕의 처사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반(反)하는 지를 이스라엘로 하여금 깨닫게 하셔서 철저히 하나님만을 신뢰케 하시기 위한 교육적 차원에서 행해진 결과입니다. 이런 사실이 블레셋과의 전투과정에서 여실히 증명됩니다(삼상13장). ①사울이 왕으로 즉위한지 이년 째 되던 해에 블레셋과의 한판 전투를 위해 삼천의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는 과정에서 전 이스라엘을 길갈로 소집합니다(삼상13:4). ②이에 대응하기 위해 블레셋이 막강한 마병의 군사력을 앞세워 이스라엘에 맞서 나옵니다(삼상13:5).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사기충천한 위풍에 압도당해 혼비백산합니다(삼상13:6-7). ③사울은 초조한 나머지 신탁을 묻기 위한 출전제사를 사무엘을 배제한 채 형식적으로 집행해 버립니다(삼상13:8-9). 첫째, 번제가 끝날 즈음에 사무엘이 도착해 사울의 경솔한 처사를 나무랍니다. 둘째, 사울은 백성의 흩어짐과 사무엘의 도착지연 및 블레셋의 위협을 빙자해 자신의 제사집행이 불가피했음을 변명합니다(11-12절). 이 과정에서 일체 자기과오에 대해 실토하지 않음을 봅니다. 급박한 상황만을 앞세워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기에 급급합니다. 셋째,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의 처사를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단죄해 버립니다. 여기서 '명령'이라 함은 율법에 명시적으로 규정한 어떤 특별한 경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왕정의 특성상 영적인 일은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신탁을 접수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처리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급하다는 이유 때문에 정당한 순서와 절차를 무시했던 것입니다. 넷째, 이런 식으로 사울은 이 부분에 있어서 월권을 한 셈이 됩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번 불순종의 사건으로 인해 사울 왕의 왕권이 박탈당해 다른 사람에게 이양될 것이라는 예언의 사실입니다(14절).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전12:13)인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긍휼 없는 제사란 형식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순종하는 마음의 제사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④하여튼 본 번제 사건에서 사무엘의 모습은 일면 독단적으로 비쳐지기까지 합니다. 이런 사실은 이스라엘의 장래를 결정짓는 궁극적인 결단에 있어서 선지직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주장을 반영합니다. ⑤따라서 본 사건에서 사무엘의 주장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탁을 맡은 선지자에 의해 관장되고 통할(統轄)되는 나라이므로 사울은 다만 이차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을 뿐임을 우회적으로 시사합니다. (4)이런 사실로 인해 사울 왕의 자의적(自意的) 번제 사건은 왕권의 남용에 대한 사무엘의 신랄한 지적과 함께 이스라엘의 왕직과 선지직 간의 갈등의 면모를 예시(豫示)적으로 시사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는 두 직무사이에서 야기되는 첨예한 긴장과 대립구도를 이후 삼상 15장에 기술된 아말렉 진멸 명령과 사울의 제한적 순종 사건을 통해 극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아말렉 사건은 하나님의 마음이 사울을 떠나는 결정적인 사건의 계기로 작용합니다. ①사무엘은 사울에게 여호와의 기름부음에 의해 왕으로 피택 됐음을 전제로 각별한 순종을 촉구합니다(삼상15:1).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수혜자의 심령 속에 자율적 순종을 유발시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②그 내용인즉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아말렉(출17:8-16)을 철저히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들은 이스라엘의 피곤(신25:17-19)을 틈타 하나님의 군대를 대적하는 사단의 세력을 암시적으로 시사합니다. 이때 아말렉과의 싸움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과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께서는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실 것을 맹세로 보증하시며 가나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될 때 이들을 도륙해 천하에서 그 이름을 제해 버릴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제 그 명령을 수행할 적절한 시기가 도래한 것입니다. a. 진멸 대상에는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유아까지도 포함됩니다. b.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포함한 아말렉의 모든 소유가 포함됩니다. ③그러나 정작 사울은 아말렉의 왕 아각과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양과 모든 좋은 것을 임의대로 남깁니다. 이는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행동으로서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와 방불합니다. ④이에 더하여 사울은 갈멜에다 기념비까지 세웁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함입니다(삼상15:12). 그러나 이런 그의 행위는 전쟁의 승리가 주께 있음(삼상17:47)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처사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영광으로 도적질하는 망령된 행실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사실을 후회하신다는 표현을 통해 사울을 외면하십니다. 사무엘이 사울의 행위를 책망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변명하기에 급급합니다. 백성의 탓으로만 돌립니다(15, 21절). ⑤이때 사무엘은 저 유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므로 사실상 더 이상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인정치 않습니다. 아니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다른 사람을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이미 내정하셨음을 통보합니다(삼상15:28).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邪術)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邪神)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2-23). 4)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의 등장 사울이 비록 하나님의 재가에 따라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피택 됐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상 사람의 소견에 좋을 대로의 뜻을 따라(삼상8:20)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왕위에 올랐기에 결국은 퇴출당하는 신세로 전락됩니다. 사사건건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한 이유와 변명을 앞세워 거역하는 사울의 불순종의 태도는 이런 보다 근원적인 배경을 염두에 두고 해석돼야 할 줄 압니다. 사무엘서 기자는 이런 사실의 기록을 통해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방식으로 진행돼야 함을 성경 독자들에게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1)다윗을 기름 부어 차기 왕으로 내정하심 다윗을 기름부어 차기 왕으로 내정하십니다. 아말렉 사건을 마무리짓고 사무엘은 라마로 돌아가 죽는 날까지 사울을 대면치 않습니다. 이제 사무엘서 저자의 관심은 온통 사울을 뒤이어 이스라엘의 차기 왕위에 오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에게 집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중 하나를 사울을 이어 차기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삼상16:1). ①얼마의 기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다시 부르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역을 맡기십니다. ②사역의 내용인즉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 중 한 사람을 택해 기름을 부으라는 지시입니다. 당시 이새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막내였습니다. 이들 중 한사람을 사울을 대신해 차기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③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의 선택 기준을 말씀해 주십니다.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고 권하십니다. 이는 사울을 지칭하는 표현으로서 이미 사울은 버린 바 된 자임을 암시적으로 강력히 시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같이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해 주십니다(7절, 히4:12, 살전2:4). ④이 기준에 의해 이새의 일곱 아들이 모두 사무엘을 대면했으나 부적격자로 판정 받습니다. 이새는 막내가 있음을 알립니다. 양치는 목동이라고 소개합니다. 사무엘은 막내를 데려 오라고 권합니다. ⑤하나님께서 다윗을 지명해 주십니다.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하십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자(삼상16:13) 그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을 받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로서의 언약적 왕, 곧 신정적 왕으로 택정함을 입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⑥그러나 이 처음 기름 부음의 사건과 관련해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일이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아직은 그의 때가 온전히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역사는 언제나 정하신 작정의 때를 좇아서 집행되는 것이 성경의 한결 같은 진술입니다(창17:1, 41:1, 출12:40-41, 갈4:4, 단9:1-2). 다윗이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왕으로 등극하기까지 모두 세 번에 걸쳐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두 번째 기름 부음은 사울이 죽은 후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에 의해서입니다(삼하2:4). 이때 다윗은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공식적으로 유다 지파의 왕으로 추대를 받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장로에 의해서 기름 부음을 받음으로 명실공히 공식적으로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삼하5:3). 이런 사실은 이미 구속사 진행의 초기 역사 속에서 야곱의 예언적 축복 속에서 암시된 바 있습니다(창49:10). 가나안 정복역사 속에서 보다 구체화돼 계시됩니다(삿1:1-2). (2)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 다윗이 사무엘에 의해 처음 기름 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으로 내정을 받은 직후부터 다윗은 강한 성령의 감동을 입게 됩니다. 저자는 이런 사실을 "그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삼상16:13)고 표현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저자는 14절에서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대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했다"고 기술하므로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선택하신 사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은 23절에서 '악신이 사울을 괴롭힐 때 다윗이 수금을 타자 악신이 떠나고 기분이 상쾌해졌다'는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명백히 재확인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의 처음 기름 부음과 이로 인해 여호와의 신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내용을 기록한 삼상16장에 뒤이어, 곧바로 삼상17장에서 소개되고 있는 다윗과 골리앗의 한판 싸움의 기사는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한 계시적 의미가 간직돼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곧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으로서 암시적이기는 하지만 '공개적'으로 이스라엘 앞에 선보이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미 버리셨다는 사실을 계시하시는 효과도 동시적으로 수반합니다. 이런 사실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개선장군의 모습으로 돌아올 때 이스라엘 여인들이 각 성에서 나와 군대무리를 환영하면서 이르기를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18:7)라고 외치는 환호 속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이 사건은 이후 사울이 다윗을 반목한 나머지 살해동기를 부여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합니다(8절). 이제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을 살펴봅니다. ①블레셋이 이스라엘에 싸움을 걸어옵니다(삼상17:1). 엘라 골짜기를 가운데 두고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대치국면에 들어갑니다. ②블레셋 진지에서 골리앗이라는 기골이 장대한 장수가 나와 이스라엘을 조롱합니다. 사울과 온 이스라엘 군대가 크게 놀라 전의(戰意)마저 상실할 지경에 이릅니다(4-11절). ③마침 다윗의 세 형들이 이 전쟁에 출전중이라, 아비 이새가 다윗으로 하여금 형들의 안부를 확인할 겸 얼마간의 음식물을 들려서 전쟁터로 보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손길이 다윗의 걸음을 전쟁터로 이끄심을 봅니다. 골리앗과의 한 판 승부를 위해서 말입니다. 진정 성도의 전(全)생애가 하나님의 주권적 장중에 붙들린 바 돼 그 분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인도와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섭리 의존적인 삶의 자세(창45:5-8, 단3:7-8)야말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여호와 신앙의 백미라 하겠습니다. ④전쟁터에 도착한 다윗이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목격하며 블레셋과 골리앗을 향해 거룩한 분노와 강한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을 모욕하겠느냐"(삼상17:26)라는 말속에서 이런 사실이 확연히 확인됩니다. ⑤다윗은 자원해 골리앗과 싸울 것을 요청합니다. 사울과의 면담의 자리에서 다윗은 양들을 맹수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했던 사실들을 예로 들면서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골리앗을 넉넉히 헤칠 수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물론 그의 말속에는 이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깊이 관여해 오셨음을 인정하는 신앙적 고백이 담겨 있음을 간파해야 할 줄 압니다. ⑥드디어 사울의 최종 재가를 얻어 다윗은 단지 물 맷돌만을 들고 블레셋의 용사 골리앗과 맞서서 바야흐로 한판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이때 다윗은 전쟁이 여호와께 있음을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자신에게 붙이실 것을 확신합니다. 신앙적 확신입니다. 그래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과의 싸움에 나서는 것임을 공개적으로 증거합니다. 첫째, 외적으로는 가당치도 않는 불리한 싸움입니다. 둘째, 그러나 결과는 다윗이 골리앗을 물 맷돌 한방으로 죽이고 목을 자름으로 승리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하신 결과입니다. 다윗의 확신대로 하나님께서 골리앗을 다윗에게 붙이신 결과입니다. 넷째, 이는 단순한 전쟁의 승리가 아닙니다. 절대 승리가 불가능한 열세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과 간섭하심의 결과로 얻게된 신앙적 승리입니다. 사울의 불신앙과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절대 의존적인 신앙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경우입니다. 이런 식으로 지금 저자는 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이들의 신앙을 극적으로 대비시킴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이 다윗을 차기 왕으로 절대 신임하고 계심을 객관적으로 확증하려는 데 있습니다. 다섯째, 그렇습니다. 본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이미 앞에서부터 진행돼 나온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공개적이며 공식적으로 드러나게 된 계시적 사건임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실은 사울의 군대가 블레셋과의 전투를 승리로 장식한 후 금의환향하는 데서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⑦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는 사울의 병사를 맞으며 각 성에서 나온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환영하며 노래합니다. 이 노래의 내용이 심상치 않습니다. 저들은 함께 창화(唱和)하며 이르기를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삼상17:7)라고 외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을 향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저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그 분의 마음에 합한 왕이 다윗임을 공개적으로 천명(闡明)하시는 계시적 의미를 갖습니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이 적극적으로 다윗의 걸음을 인도하심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성도의 전(全)생애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 하에서 그 분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서 선하게 인도와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롬8:28). 성도가 범사에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잠3:6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성도의 미래적 생애는 그 분의 거룩하신 뜻 안에서 이미 승리가 보장된 종말론적 삶의 의미를 갖습니다. 후에 사울은 다시 한번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삼상31:1)에서 세 아들과 함께 비참히 죽임을 당합니다. 사울은 적의 화살을 맞고 심한 상처를 입은 나머지 스스로 자결함으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합니다(삼상31:1-6). 이렇게 해서 사울의 시대는 끝나고 다윗으로 말미암는 통일 이스라엘의 신정적 왕국의 계시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됩니다. (3)다윗 왕의 정식 취임과 신정왕국의 개시 사무엘 하(下)의 기록은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의 왕적 행적을 기록합니다. 그는 아브라함 언약 중 통치권 언약의 예비적 당사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스라엘의 언약적 왕(삼상16:1하, 13, 삼하2:4, 5:3-5)입니다. 따라서 다윗에게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의 전 지경을 온전히 정복해 외세로부터 진정한 안식을 보장해야 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군사적 사명까지도 부여받은 셈입니다. 특히 그의 신정적 정치체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왕적 통치를 대행한다는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따라서 이제 이스라엘은 명실공히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해 신정왕국으로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시내산 언약에 근거해 적극적으로 율법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 거룩한 백성과 제사장 나라로서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현시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본격적으로 주어지게 된 셈입니다(출19:5-6, 신30:16).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신정국가로서의 정체성은 시내산 언약의 순종여부에 철저히 의존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17:18-20) 이런 의미에서 사무엘서 하(下)의 내용은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으로 정식 즉위해 신정적 왕으로 통치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삼하 전체를 장식하고 있는 각종 전쟁과 내란의 기사는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의 전투적 특성과 아울러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때까지 지속될 사단과의 긴장, 갈등, 투쟁의 역사를 집약적으로 표출시킵니다. 이는 여자의 후손 계열과 뱀의 후손 계열의 상호 적대적 투쟁에 대한 창세기 기자의 예언적 선포(창3:15)의 극명한 실례이기도 합니다. 오늘 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구속 사역의 완성으로 이 땅에 이미 침노해 들어온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 방식인 교회를 일컬음에 있어서 진리의 기둥과 터요, 전투적 교회(엡6:12-13)라고 함이 동일한 원리에서 표현된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많은 인간적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정적(神政的) 통치를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로서의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드러내는 일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인물로 기록됩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은 다윗이 기초를 놓은 신정 왕국을 보다 공고히 구축하는 가운데 실제로 열방 가운데 현시함으로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감당하는 일에 동일하게 기여한 계시적 인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솔로몬은 구속사 진행과정에 있어서 신정적 왕국인 이스라엘을 파괴로 이끄는 일에도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불가사의 한 인물로 주목받기도 합니다. ①다윗의 처음 기름부음은 은밀한 중에 비공식적으로 거행됩니다(삼상16:1, 13). 그러나 골리앗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끈 후에는 보다 공개적인 석상에서 그의 기름부음이 거행됩니다(삼하2:4). 곧 유다지파의 왕으로 말입니다. 나아가 세 번째 기름부음은 국가적 차원에서 거행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모여서 다윗과 언약을 세우고 그에게 기름을 부어 명실상부한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책봉합니다(삼하5:3-5).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역사는 늘 때와 환경과 사람을 도구로 삼아 진행되는 것이 성경의 일반적인 진술입니다. 이로 인해 성도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약1:2-4, 히10:36). 이런 의미에서 성도에게 요구되는 인내는 단순히 기질적 인내가 아닙니다. 신앙적 인내입니다. 계시 의존적이고 섭리 의존적인 종말론적 인내 말입니다. ②이제 이스라엘의 왕은 율법에 명시된 대로 시내산 언약에 충실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주어집니다(신17:18-19). 백성의 머리로서 율법에 대한 왕의 순종은 곧 백성의 순종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반면 왕의 불순종과 타락은 자연히 백성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쳐서 온 나라를 타락과 범죄로 이끄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게 됩니다. 아합왕 시대에 이런 사실의 극명한 실례를 보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로서 신정적 통치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시내산 언약에 근거한 철저한 순종, 곧 공의의 시행입니다(암5:24). ③이를 위해 온갖 불의함과 불법적 요소가 제거돼야 합니다. ④따라서 죄악의 요소가 사라지고 공의와 공법이 하수같이 폭넓게 시행됩니다. 이로 인해 대내외적으로 정치, 군사적 평화가 정착돼 국가적 안식이 보장됩니다(신12:9-12, 왕상4:25). ⑤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영광이 열방에 현시됩니다. 제사장 나라로서 중보적 역할과 기능을 극대화시키게 됩니다(왕상4:21, 24, 10:1-10). 5) 다윗 언약(삼하7:11-17) 무엇보다도 신정왕국으로 다윗 통치에 있어서 중요한 구속사적 계시사건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주신 '다윗 언약'입니다(삼하7:11-17). 이 다윗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의 갱신 및 발전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 언약은 통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효력을 발생하지 못합니다. 왕의 불순종으로 인해 급기야 나라가 솔로몬 대에 이르러 남북으로 분열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마침내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BC722)에, 남 유다는 바벨론(BC586)에 각각 멸망당합니다. 따라서 다윗 언약 속에 순종을 담보로 보장된 다윗 왕국의 영원성과 영속성은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이런 사실은 다윗 언약이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신정왕국이 역사적 이스라엘이 아닌 사실을 여실히 증명합니다. 다윗 언약의 이중 구조성 말입니다. 다시 말해 다윗 언약은 처음부터 현실적이며 미래 지향적인 종말론적 성취의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얘깁니다. 따라서 남북으로 분열된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왕국의 경호자들로 불러 세우신 선지자들을 통해 종말론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케 하십니다. 이렇게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 예언 속에 담긴 종말론적 새 이스라엘의 회복이야말로 참 다윗 왕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메시아 왕국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렘23:5-8, 33:14-18, 사9:6-7, 11:1-10, 겔37:24-28). 이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내용을 담고 있는 언약이 곧 새 언약의 중심사상입니다(렘31:31-34, 겔11:19-20, 36:26-28, 37:21-28). 이 나라는 죄가 더 이상 왕적 권세를 발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죄가 온전히 용서함 받는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 때에는 하나님의 새 영을 당신의 백성들의 심령 속에 부어주시며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새 마음을 주심으로 율법이 백성들의 마음 판에 새겨져 온전한 순종의 삶이 풍성히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다윗 언약의 갱신으로서 새 언약의 내용은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라는 제 6 강론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이제 다윗 언약의 구체적 내용(삼하7:11-17)을 살펴봅니다. 한 때 블레셋에 빼앗겼던 언약궤가 여러 경로를 거쳐 마침내 다윗성, 곧 예루살렘 성으로 옮겨집니다(삼하6:16-17). 이런 사실은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의 표상인 점을 감안 할 때, 다윗이 명실공히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신정왕국으로서 이스라엘의 왕적 정통성의 반열에 굳게 서 있음을 다시 한번 확증해 주심에 다름 아닙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정복케 하셔서 다윗 왕으로 하여금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해주십니다(삼하7:1). 이는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 나라가 다윗의 통치하에서 그 면모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속에 약속된 가나안에서의 '평안과 안식'이 마침내 실현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저자는 다윗이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로서 성전건축에 강한 집착과 의욕을 보이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기술합니다(삼하7:2). 나단 선지자가 이 일에 적극 동의합니다(3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만류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집'을 세워주실 것에 대해 확증해 주십니다(11절). 다윗에게 진정한 평안을 약속해 주십니다. 이런 일련의 내용을 의미적으로 소위 다윗 언약이라고 부릅니다(11-17절). (1)11절에서 '다윗의 집'이란 다윗이 거처할 궁궐(宮闕)이 아닙니다. 다윗의 보좌로서 왕조(dynasty)를 가리킵니다. 이는 다윗 왕조의 영원한 계승과 지속을 의미합니다. (2)다윗의 자손을 통해 다윗의 나라를 견고케 세우실 것에 대해 약속해 주십니다(12절). (3)다윗의 자손은 하나님을 위해 집(성전)을 세울 것이며 하나님은 그 나라 위(왕조)를 영원히 견고케 하실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13절). 이 약속의 일차적 성취는 솔로몬에게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참 다윗의 후손이 아닙니다. 그 나라는 분열되고 왕권은 도전을 받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여기서도 다윗 자손이 이중적으로 예언되고 있음을 봅니다. 따라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진정한 후손이시며 동시에 참 다윗 왕이 되십니다(마1:1, 눅1:32-33). 그의 나라는 영원히 그 국권이 쇠하지 않을 것입니다(단2:44). (4)다윗 언약에도 자율적 순종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인한 심판적 징계는 할망정 그 나라와 왕위는 영원히 보장해 주실 것을 굳게 약속해 주십니다(15-16절). (5)여기 다윗 언약의 궁극적인 목적도 다윗의 자손으로 말미암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본질은 하나님이 저들의 아비(하나님)가 되고 저들은 하나님의 아들(백성)이 되는 관계성의 종말론적 성취를 가리킵니다(14절). 이런 언약의 핵심사상은 이후 새 언약을 통해 보다 구체화되며(렘31:33, 겔11:20, 36:28, 37:23),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을 통해 그 성취의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계21:3). 이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으로 우리들 가운데서 실현된 임마누엘(마1:23)의 궁극적 성취를 의미합니다. 6) 다윗 언약의 예비적 성취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의 통치말년에 시내산 언약에 대한 적극적인 불순종으로 인해 남북으로 분열되는 비극을 맛보게 됩니다(왕상11:9-13, 신4:25-31).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줄 모르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방을 들어 심판의 채찍으로 삼습니다. 급기야 남북이 공히 이방의 강대국에 의해 침략을 받습니다. 이때 북 이스라엘은 아주 멸망하지만 남 유다는 다윗 언약에 근거해서 아주 멸망당하지 않고(삼하7:14하-15) 섭리적 작정의 기간이 지나자 다시 회복됩니다. (1)북 이스라엘 왕조는 앗수르에 의해 BC722년에 멸망됩니다(왕하17:1-8). ①이후 이스라엘 왕조는 역사 속에서 사라집니다. ②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디아스포라로서 곳곳에 흩어져 후에 남은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동참하게 됩니다(남 유다의 포로 귀환시). (2)남 유다 왕조는 바벨론에 의해 BC586년에 침략을 당합니다(왕하25:1-12). 그러나 북 이스라엘 왕조같이 아주 멸망하지 않습니다. 다윗 언약 안에서 그의 왕조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손길이 유효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삼하7:15). ①느부갓네살 왕의 3차에 걸친 침략으로 마침내 남 유다도 멸망당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다니엘서는 1차 바벨론 침략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②그러나 포로기한은 선지자들의 예언에 의해 70년으로 한정됩니다(렘25:8-14). 기한이 차면 고토로의 귀환을 약속합니다(겔37:21). ③결국 70년의 기한이 찼을 때 이들은 다시 고토 예루살렘으로 귀환합니다(사44:28, 스1:1-5). ④이는 다윗 언약을 신실히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적 간섭의 결과입니다. ⑤그러나 회복된 역사적 이스라엘 속에서 다윗 왕조의 계승은 더 이상 가시적으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때가 차매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보를 좇아 예수님께서 참 다윗 왕으로 역사 속에 출현하십니다(1:1-16, 눅1:31-33). 이는 앞서 언급한 다윗 언약의 이중적 구조 속에서 종말론적 계시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 셈입니다. ⑥결국 예수님은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의 갱신이며 발전인 다윗 언약의 궁극적 성취자로, 새 언약의 당사자(눅22:19-20)로, 그리고 보다 근원적으로는 여자의 후손 언약의 최종 구속자로 마침에 이 땅에 오시게 된 것입니다(눅3:23-38, 갈4:4 눅1:23-33). (4)통일 이스라엘(다윗과 솔로몬) 역사 속에서 성취된 하나님 나라 4. 통일 이스라엘(다윗과 솔로몬) 역사 속에서 성취된 하나님 나라 일찍이 사사기 저자는 사사시대의 영적 타락과 부패와 혼란을 막고 하나님의 공의를 시행할 사사의 원형으로 이스라엘에 왕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습니다(삿17:6, 18:1, 19:1, 21:25). 룻기서 기자는 이런 당시의 영적 암흑과 사회적 부패와 타락을 해결할 방책으로 사사기 저자가 시사한 이스라엘의 신정적 왕,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신 왕이 바로 다윗임을 그의 족보기록을 통해서 암시적으로 제시합니다(룻4:22). 그렇습니다. 이미 창세기 저자는 야곱의 열 두 아들들에게 행한 예언적 축복의 내용(창49:10)속에서 유다의 계열을 통해 여자의 후손 계보가 진행 될 것과, 이 과정에서 유다의 후손들이 구속사 진행에 주역들로서 하나님 나라를 표상하는 신정왕국으로서 이스라엘의 왕위를 계승할 것을 시사한 바 있습니다. 1)사울이 초대 왕으로 왕위에 등극함(삼상10:1). (1)그러나 사울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 아닙니다. (2)백성들의 요구에 부응한 왕으로 시험적이고 예비적으로 오른 왕에 지나지 않습니다(삼상8:20, 신17:14-15).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이방 족속들 위에 군림하는 인간적 왕을 부러워했습니다. 백성을 대신해서 전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줄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측면에서의 왕을 원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왕권의 통치적 특성이 신정적 체제 속에서 찾아져야 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3)그러나 이는 이미 이런 사역을 담당하고 계신 이스라엘의 참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불신하는 결과에서 나와진 빗나간 소원인 것입니다. (4)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잘못된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십니다(시106:13-15, 민11:33-35). 따라서 이때 응답은 부정적인 의미로 곧 징계이며 심판의 일환입니다. 사울 왕의 경우도 동일한 원리에서 해석돼야 할 줄 압니다. (5)따라서 사울 왕의 폐위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의 사역을 주도적으로 주관해 가심을 극명히 제시하는 실례입니다. 2)다윗의 왕위 등극(삼하5:1-5)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입니다(삼상:13:14, 행13:22). 다윗은 유다의 후손으로 이미 전(全) 구속사의 경륜 속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 언약적 왕으로 이미 계시돼 나옴을 봅니다(창49:10, 룻4:22). (1)다윗의 왕위는 사울의 뒤를 잇습니다. 그러나 이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두신 바의 성취일 뿐입니다. (2)저자는 사무엘 하(下)의 기록을 통해 하나님께서 다윗의 생애를 철저히 간섭하심으로 그를 대리적 통치자로 삼아 친히 다스리시는 신정왕국의 모습을 극명히 소개합니다. ①비록 다윗의 통치내용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 사무엘 하(下)의 기사 중 다윗의 파렴치한 범죄행위(삼하11:2-4)와 무고한 살인, 이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로 다윗 가정에 근친 상간과 피를 부르는 형제간의 투쟁과 반역의 암울한 얘기가 기록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역사적 사실에 초점 맞춤) ②역대기 상(上)의 다윗 통치의 기록은 철저히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삼하에 소개된 다윗의 생애에 나타났던 어두운 부분을 과감히 삭제시키고 오히려 다윗의 치적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왕적 통치의 구체적 실현에 기록의 초점을 맞춥니다(구속사적 전개에 초점 맞춤). ③하나님께서 다윗 왕의 성전 건축을 만류하시면서 그 이유를 피를 많이 흘린 사실, 다시 말해 평생 전쟁을 수행한 사실을 지적하십니다(대상22:8, 28:3). 이는 다윗의 구속사적 사명이 전쟁수행을 통해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에서 약속하신 가나안 지경의 정복을 온전히 성취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진정한 구원의 평화와 안식을 정착시키는 일에 집중돼 있기 때문입니다(삼하7:8-11). ④대신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의 거하실 전을 건축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10절). 그 이유는 다윗의 정복사역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전 가나안 지경에 진정한 평안과 안정의 기틀이 마련됐기 때문입니다(왕상4:20-21).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솔로몬을 평강의 사람으로 부르시며 그를 통해 이스라엘 사면에 진정한 평강을 약속하신 데서도 확인됩니다(대상22:9). a. 이런 지적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와 교제를 예표적으로 상징하는 성전 건축이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시사하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유동적 성막에서 완전한 고정적 성전으로 대체되는 계시적 사건을 통해서 말입니다. b. 이런 의미에서 성전건축은 예비적이기는 하지만 가시적 신정왕국의 현시를 증거하는 실제적 효과를 나타내는 셈이 됩니다.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에 약속된 하나님 나라가 바야흐로 다윗 언약의 예비적 성취를 통해 실현의 절정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과 평강은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 실현을 가리키는 언약적 표현입니다(신12:8-10, 수21:43-45, 눅6:5, 계21:4). 3)다윗의 유언(왕상2:1-9) 다윗이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로서 신정적 왕직의 소임을 다하고 마침내 열조에게로 돌아갑니다(왕상3:10). 그는 시내산 언약(신17:18-19, 29:9)에 근거해 유언을 남깁니다(왕상2:1-9). 이는 신정왕국으로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철저히 시내산 언약의 순종여부에 결부돼 있음을 강력히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출19:5-6, 신30:16). (1)시내산 언약의 철저한 준수를 당부 ①모세의 율법 곧 시내산 언약의 내용을 순전히 준수할 것을 당부합니다. ②순종을 담보로 솔로몬의 사역이 형통하게 될 것을 확인시킵니다. ③언약적 순종을 전제로 다윗의 왕위가 계속 보존될 것을 확인시킵니다. a. 이 말에는 불순종 할 때는 하나님의 언약적 징계와 심판이 임할 것에 대한 준엄한 경고가 내포돼 있습니다. b. 그럼에도 아주 폐하지는 않으십니다.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 언약의 주권적 은혜성이 언약의 궁극적 실현성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남북으로 분열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그대로 실현됩니다. 북 이스라엘은 아주 멸망하지만 남 유다는 다윗 언약에 근거해 70년의 언약적 징계를 마친 후 다시 고토로 귀환합니다. (2)철저한 공의와 공법의 시행을 당부 이는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 통치되는 이스라엘이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신정적 왕국임을 강력히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일체의 불의와 불법은 철저히 응징돼야 합니다. 죄가 역사하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의 구속사적 성격이 구체적으로 강조되는 대목입니다. ①다윗의 군대 장관인 요압을 하나님의 공의에 대항한 자로 여겨 합당한 절차를 통해 처리할 것을 당부합니다(왕상2:5). 이는 다윗의 왕조가 하나님의 왕적 통치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요압은 불의한 피를 흘린 자로 평가됩니다(삼하3:27, 18:6-15, 20:10). 이는 하나님의 공의에 적극적으로 대적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②다윗을 저주한 사울의 집 족속인 게라의 아들 시므이를 정당한 절차를 밟아 응징할 것을 당부합니다(왕상2:8-9). 이는 시므이가 사울의 집 족속으로서 다윗의 왕 됨에 적극 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삼하16:5-8). 이는 다윗을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처사로서 신정왕국의 통치를 거역하는 대역죄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의 소행을 하나님의 손길에 맡깁니다. ③반면에 바실래의 아들들을 선대할 것을 당부합니다(왕상2:7). 바실래는 다윗 왕이 한 때 유리방황 할 때 정성껏 공궤한 늙은 거부입니다(삼하19:31-38). 이 또한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적 시행의 일환입니다. 4)다윗 유언의 동기와 배경 이상의 내용은 솔로몬에게 남긴 다윗의 유언의 핵심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왜 다윗은 이런 내용을 유언으로까지 남기며 솔로몬에게 유언의 집행에 대해 신신 당부를 하게 됐을까요? (1)지금 다윗은 자신의 왕위가 사람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왕적 통치를 적극 시행하고 있음을 직시합니다. (2)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을 통해 약속된 이스라엘의 신정적 통치권이 다윗 언약에 근거해 자신 안에서 권세있게 집행되고 있음을 구속사적 통찰력으로 정확히 해석합니다. 이는 보다 포괄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에서 에덴에서부터 계시된 하나님 나라가 이제 이스라엘의 다윗 통치역사 속에서 예비적이기는 하지만 가시적이고 실제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총체적으로 계시하는 것입니다. (3)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가장 구체적으로 현시하는 특징은 죄와 불의를 엄격히 다스리는 하나님의 공법과 공의가 하수같이 흘러 넘치는 것을 통해 그 성격을 확인하게 됩니다(암5:24). (4)지금 다윗 왕조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신정적 통치가 가장 능력 있게 시행되는 것으로 계시되고 있는 바, 일체의 불의와 불법이 묵인될 수 없는 상황입니다. (5)이런 상황에서 요압과 시므이의 경우는 불의를 제거하는 차원에서, 바실래의 아들들은 의를 선양시키는 차원에서 각각 응분의 대가를 지불 받는 것입니다. (6)하나님 나라의 성격은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특징지어 집니다(롬14:17). 이는 죄와 불법과 온갖 부정적인 요소들이 더 이상 활동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계21:4-5). 5)솔로몬의 다윗 왕위 계승(왕상2:11) 다윗은 모든 유언을 마치고 열조에게로 돌아갑니다(10절). 40년간을 통치했던 그의 구속사적 생애는 이렇게 마감됩니다. 다윗 언약에 근거해 차기 왕에 솔로몬이 취임합니다(왕상2:12). 이제 하나님은 솔로몬 치하에서 공의와 공법을 차별없이 시행케 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로서 신정적 통치를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현시 하십니다. 다윗 왕의 치하에서 아직 잔존했던 일부 불의함들이 철저히 제거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 통치의 상징인 성전 건축이 비로소 완성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전 건축은 이미 다윗에 의해 준비돼 왔습니다(대상28:1-3). (1)솔로몬은 즉위 초기에 다윗의 4째 아들인 아도니아를 죽입니다(왕상2:25). ①이는 아도니아가 다윗의 노년에 봉양하던 수넴 여인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고 밧세바에게 요구했기 때문입니다(왕상2:17). ②이런 요구의 배경에는 다윗을 봉양하던 아비삭을 취함으로 자신의 위상을 다윗과 동등시하려는 야심찬 의도가 숨어 있는 바, 바로 다윗의 위를 넘보려는 야욕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교활한 술책임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23-24절). ③솔로몬은 이런 간교한 행위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에 입각한 신정적 왕국을 세워 나가는 일에 정면으로 위배됨을 직시하고 즉시 그를 처단합니다(25절). (2)다윗의 재위시 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을 쫓아내고 그의 제사장 직분을 파면합니다(27절). 이는 그가 아도니아와 결탁해 다윗의 위를 차지하려는 모의에 가담했기 때문입니다(왕상1:7). 하나님의 나라를 표상하는 솔로몬의 신정적 체제하에서는 일체의 불의와 불법은 마땅히 제거되고 공법과 정의에 근거해서만이 통치되는 나라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①이는 실로에서 엘리 제사장에게 하신 말씀의 구체적 성취이기도 합니다(삼상2:31-36). 이렇게 해서 대 제사장 아론의 네 아들(출6:23)중 나답과 아비후는 여호와께 다른 불을 드림으로 즉사하고(레10:1-2), 이다말의 자손은 엘리를 거쳐 아비아달에 이르나 아도니아의 모의에 가담한 역모 죄로 솔로몬 때 파직됩니다. 이후 이다말의 자손은 제사장 직분에서 영원히 제외됩니다. ②대신 사독을 제사장에 임명합니다(왕상2:35). 이는 삼상2:35의 '예비적 성취'입니다. 본문에서 '충실한 제사장'이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아울러 사독이 솔로몬 치하에서 제사장으로 임명된 것은 아론의 셋째 아들인 엘르아살(출6:23)의 자손 비느하스에 대한 하나님의 '평화의 언약'에 대한 신실한 성취의 일환입니다(민25:10-13). ③이후 제사장은 엘르아살 계열을 통해 계승됩니다. (3)이 뿐만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다윗의 유언을 좇아 요압을 처단합니다(왕상2:32-34). 요압도 아도니아와 결탁해 다윗을 대적했기 때문입니다(왕상1:7) (4)계속해서 다윗이 경계시킨 시므이를 죽입니다(왕상2:43-46). 이렇게 해서 다윗의 신정통치하에서 하나님의 공의적 통치에 저촉됐던 장애 요소들이 솔로몬 치하에서 일소됩니다. 열왕기 저자는 이런 일련의 조치와 관련해서 '이에' 나라가 솔로몬의 손에 견고하여지니라(46절)라고 기술함으로 이것이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처사였음을 시사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두드러진 성격은 말씀에 적극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곧 진리에 대한 지식의 체계를 생명의 법칙으로 붙들고 살아가는 데서 그 나라의 통치는 권세있게 발휘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된 정체성이 이런 사실로 인해 확증됩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누리는 천상적 삶은 이미 여기서부터 종말론적 그 나라의 실질을 선취적으로 맛보아 체험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마12:28, 눅17:20-21).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여기서부터 현재적으로 임한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누리는 영적 삶을 가리킵니다. 만일 여기서부터 이미 소유해 누리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라면 죽어서도 그 나라는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이중적 구조로 설명하고 있기에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모든 성도의 종말론적 부활의 첫 열매로서 성도는 이미 예수님의 첫째 부활에 이미 참여해 그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들로 존재합니다. 이런 사실이 전제돼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성도의 종말론적 부활이 또한 보장되는 것입니다(고전15:51-52, 살전4:16-18). 6)하나님 나라의 예비적 성취(왕상4-10장) 솔로몬은 즉위 초기에 다윗의 재위 시 하나님 나라를 방해했던 잔재 요소들을 신속히 제거시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신정적 왕국을 보다 온전한 모습으로 현시하려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열심이 이런 방식으로 솔로몬의 통치 초기역사 속에서 밝히 계시됩니다. 이렇게 해서 솔로몬 통치 초기역사는 명실공히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가장 '이상적'으로 구체화시키는 계시기간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상적이란 표현은 완전하다거나 온전한 것을 의미하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됨이 없이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는 처음부터 예시(豫示)적이고 예표(豫表)적인 성격을 띠고 출발한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 계시의 도구로 사용된 이스라엘은 그들의 역사 진행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통치의 실상이 어떤 것이며, 구원의 도리와 구원을 누리는 성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열방에 현시 함으로 열국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막중한 책임이 주어졌던 것입니다(출19:5-6). 지금 솔로몬 치하에서 이런 제사장 나라의 역할과 기능이 최고도로 발휘되는 가운데 하나님의 신정왕국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그리고 다윗 언약이 동시적으로 성취되는 이상적인 시기를 맞고 있는 셈입니다. 그 구체적 실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1)솔로몬은 즉위 즉시 기브온에서 산당에서 일 천 번제를 드립니다(왕상3:4). 이는 일반적으로 잘못 알고 있듯이 축복을 위한 기원제가 아닙니다. 이미 영육(靈肉)간에 풍성한 복을 주셨기 때문에 드리는 감사제의 성격을 띱니다. (2)꿈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으십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무지와 무력함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뭇 백성을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합니다(6-9절). 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영적 도구로서 이는 신정적 통치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으뜸가는 수단입니다. (3)하나님께서 이를 기쁘게 여기시며 만족해 하십니다. 자신의 부귀영화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가상(嘉尙)했기 때문입니다(10-12절). 참 된 구원의 생명을 소유한 자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참 된 기도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삶의 자세는 시공을 떠나서 구원받은 성도들의 한결 같은 신앙자세이며 신앙의 본질이기도 합니다(마6:33). (4)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십니다(왕상3:9-12). 그리고 구하지 않은 부와 영광까지도 더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는 항상 그랬듯이 수혜자의 자율적 순종을 요구합니다(14절). ①열왕기서 저자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를 구체적으로 확증시키기 위해 이내 재판기사가 담긴 내용을 소개합니다. 두 여인을 대상으로 한 아기의 어머니를 가려내는 재판 사건입니다(왕상3:16-28). 본 재판과정에서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가 구체적으로 발휘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솔로몬에게 성취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②다른 한편 본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신정적 통치가 솔로몬의 지혜를 통해 권세있게 시행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경우이기도 합니다. 7)내각의 재편성(왕상4:1-19). (1)다윗의 통치체제가 가나안 정복과 통일을 위해 군사적 내각제 위주로 편성됩니다(삼하8:16, 20:23) (2)반면에 솔로몬 내각의 특징은 제사장(왕상4:2)과 행정관(3절)의 이름이 서두에 기술되고 있음을 고려할 때, 평화적이며 외교적인 측면을 강화시킨 신정적 내각을 위한 의도적인 조치임을 간파하게 됩니다. 8)약속의 땅 가나안에 찾아온 안식(왕상4:2-25)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거의 전 지경에 안식이 찾아옵니다(왕상4:20-25). (1)저자는 솔로몬 당시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게 됨을 기술합니다(20절). 이는 솔로몬의 통치하에서 아브라함 언약이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강조해 시사하는 표현입니다(창13:14-16, 22:17-18). (2)가나안 전 지경과 인근 지역까지를 관할함으로 정기적으로 조공을 받습니다(왕상4:21-24). (3)단(북)에서 브엘세바(남)까지 일체의 외침의 위협에서 벗어나 번영과 안식을 누립니다. 열왕기 저자는 이때의 상황적 특징을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라고 표현합니다(25절). ①이는 후에 미가 선지자가 미래에 이루어질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전망하면서 그 나라는 철저히 모든 전쟁의 위험과 가능성이 사라진 나라임을 바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미4:4). ②이런 묵시적 표현은 솔로몬 치하에서 당시 누리고 있는 안식이 곧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안식을 선취적으로 누리고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③그렇습니다. 지금 솔로몬의 통치는 하나님 나라를 가장 극명하게 예시(豫示)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 시내산 언약, 그리고 다윗 언약의 구체적 성취의 일환입니다. 9)성전과 왕궁의 건축(왕상6-9장). (1)이는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예표적으로 상징하는 것으로 명실상부한 하나님 나라의 현시를 시사하는 계시사건입니다. (2)성전은 성막의 발전된 계시로서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뿐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전은 성막의 예비적 실체로 작용합니다. 유동적인 것이 고정적인 것으로 바뀝니다. 이스라엘을 사방의 위험으로부터 먼저 안식하게 하시고(다윗의 사명) 하나님께서 성전을 건축케 하심으로 이제 안식하십니다(솔로몬의 사명). 이때 하나님의 안식은 성전 완공을 통한 언약의 온전한 성취에 근거합니다. 이는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성취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안식은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측면이기 때문입니다. (3)솔로몬은 7년에 걸친 성전 건축을 끝낸 후, 이어서 13년 동안은 왕궁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성전과 왕궁 건축으로 보낸 20년은 솔로몬 치세에서 중요한 기간이었습니다. 10)열국을 향해 제사장 나라의 직분을 감당함(왕상4:29-5:18, 10-11장) (1)주변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신정적 통치의 결과입니다(왕상4;21). (2)두로의 히람 왕과 화친의 약조를 맺습니다(왕상5:12). (3)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큰 지혜를 주셨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이스라엘 왕국이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실현하고 있음을 온 세상에 보여줍니다. 그 결과 세계 만민들이 와서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게 되었습니다(왕상 4:29-34) (4)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하나 오히려 솔로몬에게 압도당합니다. 그리고 솔로몬에게 지혜롭고 의로운 통치를 가능케 하신 하나님을 송축합니다(왕상10:1-10). (5)이는 이스라엘이 열방을 향해 제사장 나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만방에 높이 현시하는 구체적 실례입니다. (6)동시에 저자는 스바 여왕을 열국의 대표자로 삼아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화로우심을 찬송케 함으로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인정하고 증거 하는 일에 도구로 사용됨을 시사합니다. Ⅲ.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아브라함 언약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어떻게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전개되는지를 하나님 나라의 삼 요소인 '자손'과 '땅' 그리고 '통치권'의 순서를 좇아 살펴봤습니다. 결국 아브라함 언약은 시내산 언약과 다윗 언약을 통해 갱신과 발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다윗과 솔로몬의 양대(兩代)를 거치는 초기 통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총체적 성취를 봅니다(왕상4:20-25). 이런 의미에서 구약의 신적 언약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향해 상호 밀접한 구속사적 관계성과 연속성을 띠고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솔로몬의 통치에는 분명히 하나님 나라의 신정적 통치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바, 하나님 나라를 이상적이고 모범적으로 구현함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전히 어떤 것이 결핍돼 있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라는 '존재양식'은 분명히 거기 있으나 아직 '최종적 완성'은 아님을 봅니다. 솔로몬의 통치에는 여전히 불의와 불법한 요소가 동시적으로 공존하고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왕상3:1-3, 11:1-8). 분명히 솔로몬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불가사의한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영광의 완성자인 동시에 몰락의 건축자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언약이 솔로몬에게서 성취된 동시에 그에게서 상실됩니다. 이는 표면적으로 보면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언약이 제약을 받음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는 방해를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데 누구의 방해를 받으십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어떤 외부적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해 최종적 성취를 반드시 이끌어 내십니다. 다만 솔로몬의 실패는 그가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 언약이 암시하고 있는 사실상의 언약적 계승자가 아니었음을 시사합니다. 최종 당사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신약의 빛 안에서 진정한 의미의 다윗의 자손이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신 사실을 확증하게 됩니다(마1:1, 눅1:32-33). 이런 의미에서 구약의 제반 언약들이 한결 같이 지향하고 있는 신정왕국으로서 통일 이스라엘은 어디까지나 예시(豫示)적이며 예표(豫表)적인 경우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에 이어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계시를 지속적으로 상고해야 함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통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계시된 신정왕국이 분명히 하나님 나라의 속성과 구조를 나름대로 예시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 나라의 실체를 보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제 6 강론을 통해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서 비로소 보다 구체화된 하나님 나라 계시의 실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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