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니엘서 2장의 신상을 통해 주신 꿈의 해석과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가르침과 사역의 내용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는 나아가 성경의 총체적 계시와 그 방향성이 곧 ‘하나님 나라 사상’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동일한 주제 하에 연속되는 일련의 본 강의를 통해 이 하나님 나라가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근간으로 해서 성취의 절정을 이루며 구속사의 총체적 경륜이 어떻게 세상 역사 속에서 창세 이후부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을 향해 전개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을 총체적 관점에서 바르게 해석하는 일 뿐 아니라, 바른 성경적 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정립할 수 있는 근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강의를 통해 에덴 동산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 사상에 관해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봄으로 처음 창조의 원리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의중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에 귀결됨을 재차 확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후 성경의 계시역사는 하나님 나라 건설과 그 최종적 완성을 향해 구속사라는 독특한 역사의 옷을 입고 세상 역사의 전면에 등장합니다(창 3:15). 이런 상호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되고 성취되는 현장과 무대로서의 계시적 의미를 간직할 뿐 아니라, 세상 역사의 본질이 곧 하나님의 구속사임을 밝힙니다. 이 일련의 진행 과정에서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만물과 만사를 창세 전에 세우신 그 분의 선하신 뜻과 작정 가운데서 보존하시고 관리하시며 통치해 가십니다. 우리는 이를 일컬어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 역사라고 부릅니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이 바로 처음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중심으로 진행됨을 봅니다. 그곳에서 나타난 계시의 핵심 내용과 사상이 곧 하나님 나라임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사상과 관련해서 또 한가지 잊지 말아야 될 일이 에덴에서 발견되는 바, 곧 사단의 집요한 방해 공작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구속사는 하나님 나라를 세상 역사 속에서 건설해 가는 가운데 초기 과정에서부터 끊임없는 사단과의 긴장과 갈등과 투쟁을 불러일으킵니다.
오늘날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인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전투하는 교회로서의 성격(엡 6:12∼13)을 띠고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이에서 나와집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런 사실의 근원을 인간타락의 근원적 배경 속에서 설명하면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지속적인 전투와 투쟁의 불가피성(창 3:15)’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현실을 하나님의 구속사적 안목을 가지고 직시해야 할 당위성이 이에서 찾아집니다.
성경은 세상의 체계와 사상과 시대적 풍조를 말할 때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닌 세상 곧 마귀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증언합니다(요일 2:15∼16). 성도는 비록 세상 가운데 살고 있지만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우리의 소속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미 세상 가운데 침노해 들어온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자들로 존재하고 있음을 잠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와 관련해서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적극적인 순종의 삶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 된 자들임을 지속적으로 확증할 것을 강력히 요청합니다(갈 1:10).
그렇습니다. 진리에 대한 정당한 체계적 인식의 전제 하에서만 바른 신앙, 바른 교회, 바른 목회의 실질이 보장될 뿐입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 4절).”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Ⅱ. 전 개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 영원하신 작정과 목적을 따라 천지로 대표되는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십니다(창 1:1). 이는 하나님의 마음의 깊은 곳에 품으셨던 영원하신 목적을 본격적으로 이루시기 위한 무대가 일차적으로 마련됐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피조물들을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주권적으로 창조하시는 가운데, 마지막 피조물로 아담과 하와를 당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십니다. 그리고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을 이들에게 위임하고자 다짐하십니다. 이는 다른 피조물과 비교해서 특별한 존재로 사람을 창조하셨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를 다른 피조물들과 확연히 구별시켜 설명하고 있는 ‘형상과 모양’이라는 표현(창 1:26) 속에서 이런 하나님의 차별화 된 심정을 극명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형상과 모양’이란 표현은 다른 피조물들에게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그래서 아담과 하와의 인격 속에만 특별히 내재 된 하나님의 공유(共有)적 속성을 총체적으로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을 아담과 하와에게만 반영시키는 것을 통해 이들을 창조의 면류관으로 삼아 주실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하나님을 알고 믿고 섬길 수 있는 유일한 인격적 교제의 대상으로 삼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에게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권이 맡겨진 사건도 이런 사실의 전제 속에서 해석돼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전 우주적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자평(自評)하시면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창 1:31)고 만족을 표명하십니다. 이는 지으신 만물의 존재와 상태가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작정하신 영원하신 목적을 세상 가운데서 집행하기 위한 현장과 무대로서 완벽하게 조성됐음을 알리는 만족감의 표현이십니다. 이는 달리 인간의 타락 전 처음 에덴이 그 자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가장 완벽하고 강력하게 표상하고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가 제 2 강론의 주제를 ‘에덴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로 선정한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1. 타락 전 에덴에 계시 된 하나님의 나라
창세기 1장에서 저자는 거시적(巨視的) 계시안목으로 전(全)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내용과 순서를 소상하게 소개합니다. 반면 창세기 2장에서는 미시적(微視的) 계시안목으로 창조의 면류관인 인간의 창조 내력을 보다 세밀하게 기록함으로써 인간 창조에 담긴 하나님의 각별한 관심과 배려를 조명합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의 창조와 이들의 혼인 속에 담긴 계시의 비밀은 신약에서 바울의 논증에 의해 밝혀진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출현한 교회와의 비밀스러운 관계(엡 5:31∼32) 속에서 그 구속사적 실상을 드러냅니다. 이보다 앞서 호세아 선지자는 그의 예언서에서 하나님과 장차 회복될 이스라엘의 관계를 ‘하나님의 장가들기’(호 2:19)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남편으로, 이스라엘을 신부로 묘사하며 신약의 실체적 관계를 예표적으로 계시(호 2:14∼20)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가 아담과 하와의 창조의 내력과 부부의 과정을 별도 지면에 소상히 소개하며 독자의 관심을 유도함은 이들이 단순한 창조의 면류관으로서의 존재 이상 이런 하나님의 구속사적 의미가 내포돼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최초의 가정으로서 아담과 하와의 창조와 부부 됨의 연합 속에 담긴 구속사적 계시에 관한 하나님의 각별하신 애정과 관심의 표명입니다.
후에 이런 구속사적 계시의 점진적 진행과 발전은 결국 신약시대의 지역교회공동체를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으로 표현하기에 이릅니다(눅 17:20∼21; 빌 3:20).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세상 속에 침노해 들어온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통치(마 12:28; 막 2:1∼12)가 가장 권세 있게 천상적 능력을 발휘하는 유일한 기관으로서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담과 하와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최초의 가정은 이미 그 자체로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계시적 방편으로 현시 되고 있습니다.
이제 본 강론과 관련해 타락 전 에덴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의 주제에 대해 몇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 보면서 그 실상을 규명해 보겠습니다.
⑴ 창조언약(창 1:28) 속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모든 피조물 중 유일의 인격적 교제의 대상으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차별화 된 표현은 이들의 창조과정 속에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는 설명 속에서 그 본래적 의미의 절정을 이룹니다. 다시 말해 이들이 생령체(living bei-ng)로 창조됐기에 하나님의 공유(共有)적 속성을 반영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과의 특별한 영적 교제관계를 누릴 수 있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신약은 생령체로서의 아담의 존재를 산 영(living soul, 고전 15:45)으로 표현함으로 무죄(無罪)한 아담과 하와의 영적 상태가 하나님과 막힘 없는 교제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만물의 영장(靈長)으로 지음 받았음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는 만물에 대한 절대 주권적 통치권을 위임하심으로 이들을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권자로 삼아 주십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권한을 대행한다니 참으로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당신의 대리권자로 임명하시는 과정에서 이를 보증하기 위해 수여하신 위촉장의 내용이 다름 아닌 창세기 1장 28절의 내용입니다. 비록 위임의 내용이 구두로 전달됐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결코 파기될 수 없는 불변의 절대적 가치와 집행력을 갖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인준(認准)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본문의 내용이 복으로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의미상 약속과 동질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비록 전면에 아담이 통치권자로 나서고는 있으나 실권은 여전히 하나님께 귀속돼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청지기의 신분으로 만물의 통치권을 대행할 뿐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대리적 통치권의 시행을 통해 창세기 1장 28절의 약속 속에 담긴 당신의 본래적 목적을 이루신다는 관점 말입니다. 이 계시적 관점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이후 성경 전체를 관통해 진행되는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를 정당하게 해석하는 척도로 작용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신 창세기 1장 28절의 약속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이 약속이 가리키는 궁극적 실체가 하나님 나라인 사실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나라의 개념 속에는 이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백성’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살아갈 장소로서 ‘땅’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들을 선의적으로 구속(拘束)하고 다스릴 ‘통치권’의 발휘가 요구됩니다. 우리는 이를 일컬어 ‘나라의 3요소’라 부릅니다.
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을 좇아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복의 형식을 빌어 언약을 맺으십니다. 이 복의 언약이 다름 아닌 창세기 1장 28절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굳이 복으로 주신 내용을 언약(言約)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언어적 동질성은 물론 그 궁극적 성취가 하나님의 의지에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1장 28절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향한 주권적인 행동을 통해서 비로소 성취될 수 있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이 철저히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기에 본문의 내용은 때가 찰 때 그 최종적 성취가 이미 보장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28절의 언약은 내용상 쌍무(雙務)적이 아닙니다. 편무(偏務)언약의 성격을 띱니다. 이는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아담에게 베푸신 은혜언약의 성격을 내포합니다. 우리는 이 언약적 복의 성격을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적 통치권을 아담에게 대리적으로 위임하신 것으로 신학적으로 소위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제 아담 부부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만물을 그분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다스리고 관리하고 보존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본 문화명령의 내용을 세밀하게 음미해 보면 보다 본질적인 어떤 심오한 사상에 접촉하게 됩니다.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 사상입니다. 그 구체적 해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② 하나님께서 아담부부에게 주신 복으로서의 언약의 내용(창 1:28)을 분석해 보면, 첫째,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이들 부부를 통해 주실 수많은 ‘자손’을 가리키고 있음을 봅니다. 둘째, 땅을 정복하라는 내용입니다. 이는 내용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듯이 아담의 수많은 자손들이 거주할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십니다. 그러나 이 땅의 확보는 정복의 방식을 통해 얻게 되는 바 투쟁의 결과로 주어질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셋째,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하십니다. 이는 만물에 대한 왕으로서의 ‘통치권’의 약속을 가리킵니다. 창조자로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대리적 통치권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향후 이스라엘의 역사를 비롯해 열방의 왕들이 본질에서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왕적 권한을 대행하는 자들로 존재하고 있음을 시사 받게 됩니다(롬 13:1; 벧전 2:13∼14). ③ 이상의 사실을 통해서 아담 부부에게 위임해 주신 언약적 복의 내용(창 1:28)은 결과적으로 ‘자손’과 ‘땅’과 ‘왕적 통치권’에 대한 약속의 보장으로서 곧 ‘나라’를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의 후손들을 통해 ‘어떤 특정한 한 나라’를 궁극적으로 세워서 다스리게 하시겠다는 신탁(神託)의 약속 말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을 일방적으로 맺으신 주체가 하나님이신 사실을 감안할 때,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인 사실을 간파하게 됩니다. ④ 때문에 아담에게 주신 언약적 복(창 1:28)의 구체적 내용은 모든 창조의 면류관으로서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만물을 하나님을 대리해서 다스리게 하시는 것이 최종적 목적이 아닙니다. 보다 본질적으로 이들의 후손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시는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
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 담긴 계시적 언약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들에게 주신 복으로서의 언약의 내용 속에 담긴 ‘나라의 삼 요소’가 이를 객관적으로 증명합니다. 결국 창세기 1장 28절의 문화명령 속에 담긴 언약의 실체는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 사상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문화’의 성경적 의미란 하나님의 뜻의 궁극적 성취를 위해 집중되는 인간의 제반 창의적이며 창조적인 활동으로서 그 중심내용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날 인류의 문화활동은 궁극적 목적을 인간의 행복과 세속적 삶의 질을 높이는 일에 집중돼 있음으로 해서 본래적 성격과 방향에서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음이 현실입니다. 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자연이 마구잡이로 훼손되고, 이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되며, 각종 산업의 무계획한 추진은 온갖 공해를 유발시킴으로 오히려 인간의 생명을 극도로 위협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인간의 타락한 죄성으로 말미암음입니다. 로마서 기자가 이를 잘 증언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하나 우준 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이 말씀이 지적하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는 유일한 영적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인격을 소유한 교제의 대상으로 지음 받았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후 아담의 삶은 총체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분으로 즐거워하는 신앙적 삶을 유지 보존 발전시켜 나가는 데 최선을 경주해야 할 책임적 존재(전 12:13; 고전 10:31)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사단의 미혹에 빠져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죄인으로 전락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 금령 법을 어긴 것입니다(창 2:17; 3:1∼6). 불순종의 근원인 욕심이 죄로 성립 돼 마침내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는 단절을 넘어서 원수지간으로 전락합니다. 인간의 최대의 비극은 이들의 범죄 안에서 모든 인류가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생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과 이로 인해 하나님과 영원한 단절의 관계에 놓여졌습니다. 성경은 이를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기술함으로써 죄의 기원과 영향 및 비극적 결과를 소상히 밝힙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원죄라 부릅니다. 이후부터 죄인 된 인간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전인격은 하나님을 향해 항상 적대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자원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다거나, 감사한다거나, 하나님의 선을 행한다거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예배적 삶을 살아가는 데 전적으로 무능한 자로 타락해 버립니다. 위에서 로마서 기자가 지적하는 말씀(롬 1:21∼23)의 진의가 이렇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뒷부분에서 더욱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하여튼 이런 식으로 아담은 하나님의 대리통치권자로서 고도의 영화로운 신분에서 한 순간에 하나님과 원수 된 비참한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합니다. 이들은 더 이상 최초의 신탁언약(창 1:28)의 수혜자로서 하나님의 신정왕국을 이룰 자격을 상실해 버립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다루는 문제는 아담의 타락 전 얘기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의 언약의 내용 속에 담긴 본의(本意)를 통해 하나님 나라 사상에 대해 살펴보는 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모든 창조물에 대한 대리적 통치권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의 후손을 통해 세상 가운데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시는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아담에게 복으로 주신 언약의 본질이 이를 명백히 증명합니다. 곧 자손과 땅과 왕적 통치권 말입니다.
⑤ 우리는 이상의 일련의 논증을 통해 ‘에덴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 하에서 특별히 창세기 1장 28절의 은혜언약 속에 담겨진 하나님 나라 사상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이는 창조사역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이 다름 아닌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계 21:1∼3)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처음부터 지향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제 1강(총론)에서 이미 살펴봤듯이 세상역사의 본질이 구속사인 것으로 인해 그 최후적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마침내 실현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인 사실과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계시의 총화는 하나님 나라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이 되시고 우리가 그의 백성이 돼 다스림을 받게 되는 신정왕국으로서 임마누엘의 궁극적 성취 말입니다(계 21:3). 하나님의 구속사는 이 사실의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오늘도 세상역사 속에서 만물과 만사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섭리적으로 주관해 가시는 가운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됩니다. ⑵ 에덴의 구조적 특징 속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
우리는 에덴동산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 사상을 처음 아담에게 주신 복으로서의 언약(창 1:28)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타락 전 에덴동산을 형성하고 있는 외부적이며 가시적인 구성요소들을 통해 이를 재확인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작업에 몰두하는 것은 위에서 이미 확인했듯이 에덴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 사상을 규명하는 것을 통해 성경의 총체적 계시역사가 명실상부하게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고 있음을 확증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앙관의 본질이 하나님 나라를 선양하고 운반하며 건설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될 것과, 이를 위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것을 생명처럼 받들어 신앙해야 함을 강조하려는 데 있습니다. ① 에덴 동산에는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만물의 영장이며 동시에 모든 창조의 면류관으로서 범죄하기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심히 만족해하시며 그 결과 안식하실 수 있었던 장소로서 에덴동산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하나님의 친 백성들’이었습니다. ② 이들에게 에덴동산은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저들만의 유일한 삶의 처소인 바 곧 ‘땅’을 의미합니다. 이는 나라의 삼 요소 중 국토 내지는 영토에 해당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범죄 하게 될 때(6절), 하나님께서는 즉시 죽음의 형벌을 죄책의 대가로 선언하시고(19절) 이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시는 것을 통해(23절) 에덴을 죄의 세력에서 보호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도 에덴은 명실공히 아담의 기업으로서 땅, 곧 하나님 나라 그 자체를 대표적으로 표상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③ 마지막으로 나라의 삼 요소 중 왕적 통치권이 남았습니다. 에덴동산은 현실적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피조물의 통치권이 주어졌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위임된 대리적 통치권으로서 그 실체는 여전히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의존돼 있을 뿐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친히 왕의 실체로 존재하셔서 통치하심은 창세기 2장 16∼17절의 선악과에 내재된 금령법을 통해 친히 말씀하고 계신 사실로 확인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 분의 백성들이 말씀에 순종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통치적 개념 속에서 그 나라의 본질적 특성이 가장 극명하게 표출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말씀의 권세가 능력 있게 시행되는 사실에서 찾아집니다. 지금 선악과는 이런 원리에 근거해서 자체 안에 내재 된 금령법으로 인해 하나님을 대신하는 통치권의 표상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이는 실제적으로 아담과 하와를 선의적으로 구속해서 자율적인 순종을 유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권을 정당하게 집행하시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은혜의 은혜 됨은 수혜자(受惠者)가 시혜자(施惠者)에게 자원해서 순종하는 방식을 통해 비로소 그 본질이 드러나게 됩니다(롬 11:32). 이런 의미에서 은혜는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 속에는 나름대로의 집행적 요소로서 순종이 요구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출 20:1∼17; 골 3:1∼3). ④ 이런 사실로 인해 에덴동산은 외적인 구성 요소로 볼 때, 나라의 삼 요소인 ‘백성과 땅과 왕적 통치권’이 분명히 존재해서 시행되는 곳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아울러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아 경영되는 것으로 인해 곧 ‘하나님 나라’를 뚜렷이 현시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아담에게 복으로 베푸신 창세기 1장 28절의 문화 명령적 은혜언약을 통해서, 그리고 에덴에 실존하고 있는 가시적인 구성요소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 계시되고 있음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⑶ 에덴의 성격적 특징 속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
이번에는 에덴동산에 내재돼 있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적 성격을 통해 에덴에 계시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살펴봅니다. 신약의 로마서 14장은 신앙공동체로서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도들간의 크고 작은 판단과 비난의 행동에 대해 경계시키면서 서로의 연약함을 담당하며 짐 지는 가운데 하나됨을 위해 서로 힘쓸 것을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내적인 것이 외적으로 표출되는 것을 통해서 그 진정성이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철저히 성령의 통치와 지배를 받는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곧 의와 평강과 희락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롬 14:17). 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어떻게 행동하느냐보다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서 그 나라의 정체성이 보다 풍성히 현시 됨을 증거 합니다. 여기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된 사실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교제가 온전히 회복된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곧 타락 전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통해 누렸던 바로 그 영적 상태 말입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내용적 속성이 세상의 관점과는 전혀 다른 것을 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분별기준은 주로 외부적으로 드러난 사실을 통해 사물을 판단하는 것이 보편적 현상입니다. 반면에 하나님 나라의 경우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내면과 본질적 속성을 통해 그 나라의 진정성을 분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외모보다는 마음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분(살전 2:4; 히 4:12; 롬 8:27)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결국 바른 신앙의 도리란 말씀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총체적 뜻과 계획으로서의 성경적 본의를 정당하게 추구하는 것에서 찾아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내용적 성격을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설명하는 로마서 기자의 관점을 통해 우리는 이들 하나님 나라의 특징적 성격들이 죄가 유입되기 전 에덴 동산에서도 동일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서에서 지적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내적 성향들이 에덴동산에 내재된 성격을 통해서도 동일하게 찾아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에덴동산이 처음 창조 때부터 천상적 하나님 나라를 예시적으로나마 나름대로 계시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 나라의 표상입니다. 적어도 죄가 침노해 들어오기 전까지 에덴의 모습은 천국의 모습과 성격을 가장 근접하게 표출해 내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로서 새 하늘과 새 땅의 구속사적 성격을 처음 에덴의 회복(계 22:1∼2)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이유가 이에 근거합니다. 이제 로마서 기자가 설명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특징지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에덴동산을 통해 이 둘 사이의 내용적 유사점을 살펴봅니다. ① 아담과 하와를 포함한 에덴동산에 존재하고 활동하는 일체의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상호 ‘조화와 균형과 질서 유지’를 통해 상호간의 화목과 교제를 막힘 없이 이루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충만히 현시 합니다. ‘보시기에 좋으셨다’라는 표현 속에서 이런 사실이 강력히 뒷받침됩니다.
② 그 중에서도 창조주 하나님과 창조의 면류관으로서 피조자 아담과의 ‘정상적인 관계유지’와 이로 인한 ‘교제의 자유로움’이 하나님 나라의 평강과 화목의 특성을 극명하게 계시합니다. ③ 아담과 하와의 ‘무죄상태’는 하나님의 공의가 적극적이고 권세 있게 에덴 동산에서 시행되고 있음을 반영합니다.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규정짓는 가장 강력하고 우선적인 내적 증거로 작용합니다.
④ 하나님의 ‘만족하심’(창 1:31)과 이로 인한 ‘하나님의 안식’(창 2:1∼2)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만족‘은 하나님의 ’안식‘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전제조건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순서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만족과 안식의 개념은 상호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만족하심이 없는 곳에 하나님의 진정한 안식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사람과의 화목의 관계가 깨지고 이로 인한 불화는 급기야 온 피조물에까지 파급된 사실(창 3:17; 롬 8:19∼20)은 하나님의 만족하심이 곧 안식과 연결돼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계시하고 있음을 결정적으로 시사합니다.
이곳 에덴에서의 하나님의 만족하심은 지으신 만물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데서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이는 일체의 피조물들이 하나님께서 당초 의도하신 영원하신 목적을 따라 차착(差錯)없이 창조되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경우에도 사전 계획된 설계에 따라 의도한 대로 특정한 물건이 만들어져 가동될 때, 말할 수 없는 보람과 만족과 성취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를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적용시켜 신인동형동성(神人同形同性)의 원리 하에서 접근해 볼 수 있습니다. 곧 천지의 주재(主宰)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만물이 당신의 계획과 의도대로 창조된 것을 보시면서 그 기쁨과 만족이 얼마나 크셨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만족은 하나님의 안식과 밀접히 연결되어 하나님 나라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덴에서의 하나님의 안식하심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가장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반영해 내는 경우라 하겠습니다.
여기 에덴에서의 창조적 안식의 개념은 만물이 철저히 하나님께 의존된 가운데 그 기뻐하시는 뜻대로 경영되고 섭리된다는 데서 찾아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안식은 단순히 문자적으로 쉬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안식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대로 만물이 처음 창조의 원리를 좇아 섭리적으로 통치되는 곳에서 실현가능하며 안식의 본래적 의미 또한 이에서 찾아집니다. 처음 에덴동산의 내적, 외적인 상태와 성격이 이랬습니다. 이때는 아직 인간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뜻이 방해받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상태 하에서 하나님은 진정한 천상적 안식을 만끽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때 하나님께서 취하신 안식을 이상의 배경적 설명 하에서 ‘창조적 안식’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상의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 본 에덴의 내적 특성들이 로마서 기자가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그 특징적인 측면에서 상호 유기적인 관련성을 깊이 맺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는 에덴동산이 신약의 복음의 빛 하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모형적이고 예표적으로 계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2. 타락 후 언약의 갱신 및 재(再) 확인
지금까지 타락 전 에덴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창세기 1장 28절의 문화 명령적 복의 언약 속에 담긴 내용을 통해 보다 집중적으로 살펴봤습니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 에덴동산은 그 자체로서 내용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하나님 나라를 가장 이상적으로 현시 하는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3장으로 넘어오면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 참담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창조자이시며 생명의 공급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적대적인 반역사건이 그것입니다. 가장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화롭게 하며 오직 그분만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을 통해 즐거워해야 할 창조의 면류관인 아담과 하와가 정작 창조주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나아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권마저 위임받아 최고의 특권을 누렸던 이들이 사단의 미혹에 빠져 자신의 실질적 통치권자이신 하나님을 한 순간에 배도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 누려왔던 신령한 복이요 상급인 하나님과의 일체의 화목의 교제는 한 순간에 단절됩니다. 창조언약(창 1:28)은 파기될 위기에 처해집니다. 돌연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대변되는 하나님 나라의 안식적 요소도 사라집니다. 에덴동산에는 일순간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긴장과 반목과 불신이 팽배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부정적 요소들의 결국인 죽음이 불순종에 대한 형벌로 선언됩니다(창 3:19). 에덴동산은 더 이상 종전의 하나님 나라를 표상 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사라져 버립니다. 피조물간의 화목과 조화와 균형과 질서도 일순간에 깨져버립니다. 대신 상호 갈등과 충돌, 불신과 저항이 찾아옵니다(창 3:17∼18). 급기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생명의 요람인 에덴으로부터 추방됩니다(창 3:23∼24). 하나님 나라는 죄가 역사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의만이 시행되는 곳으로 죄 자체가 없는 곳(계 21:4)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에덴에는 창조 초기역사 속에서 일순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이로서 마감될 뿐인가요? 채 시작도 제대로 못한 상황에서 모든 계획을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요.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의 은혜언약(창 1:28)은 그 자체 속에 신적 기원으로 말미암는 ‘주권성’의 성격이 내재돼 있습니다. 수혜자의 행위와는 무관하게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호의적 성격으로 인해 ‘자비성’이 담겨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은혜언약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에 근거해서 주시는 것으로 ‘실현성’의 성격이 포함돼 있습니다. 따라서 한 번 맺으신 은혜언약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결코 취소되거나 포기될 수 없습니다. 은혜언약의 은혜 됨이 이런 원리에 근거해 시종일관하게 보장됩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온전히 성취됩니다. 이제 아담과 하와는 죄와 죽음의 저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서 다시 화목할 수 있는 길을 보장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들의 반역적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오히려 보다 적극적으로 언약을 갱신하는 것을 통해 여전히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런 사실이 소위 원시복음(proto gospel)인 ‘여자의 후손’(창 3:15)에 대한 언약 속에서 재확인됩니다. 이는 창조의 근본 원리가 창세 전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해 계획되고 작정되었기 때문입니다(엡 1:3∼6). 이 말은 인간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개입과 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심(창 3:15)은 돌발적인 상황에 불가피하게 대처하는 임기응변이나 일시적 미봉책으로서의 비상강구책이 아니란 뜻입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죄책의 문제를 해결하시려는 하나님의 신속한 대응책 속에는 보다 깊은 계시적 내막이 숨겨 있음을 창세기 저자는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봅니다. ⑴ 선악과 금령법(창 2:17)이 갖는 계시적 의미
하나님은 처음 우주와 만물을 지으시고 각별히 아담과 하와를 당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하셔서 이들을 에덴동산이라는 특정한 장소에 살게 하십니다. 이는 천지 상간의 모든 피조물들 중에 이들을 유일하게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자들로 지으셨음을 의미합니다. 곧 하나님의 영원하신 창세 전 목적을 이들을 통해 이루시려는 언약의 당사자들로 말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에덴동산에 우리의 시선을 끌기에 족한 두 그루의 나무가 동산 중앙에 심겨져 있음을 의도적으로 강조해 밝힙니다(창 2:9). 이른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우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이 나무를 편의상 선악과라 부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동산의 모든 실과는 먹는 것을 허락하시면서 유독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고 제한하십니다(창 2:16∼17). 게다가 먹으면 죽을 것에 대해 경고까지 덧붙이십니다. 그렇다면 소위 이 선악과 금령법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① 우리는 먼저 선악과 금령법의 내용이 어떠하든지 아담의 범죄 전의 에덴은 내용적으로나 구조적으로 처음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표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비록 선악과 속에 담긴 금령법이 조건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해도 궁극적으로 인간의 유익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내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② 그렇다면 선악과 금령법에 담긴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담과 하와의 순종을 관장하기 위해 보호적 장치로 주신 일종의 법적 제도입니다. 그러나 강요된 것이 아닌 자율적 순종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권을 위임해 주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양하고 운반하며 건설해야 할 막중한 사명이 은혜언약의 방식으로 주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창 1:28). 창세기 1장 28절의 내용이 은혜언약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푸신 복의 형식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보상이나 대가성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2장 17절의 선악과 금령법에 명시된 집행적 요구는 불가피하게 창세기 1장 28절의 은혜언약과의 관련 속에서 그 진정한 계시적 본의가 확인됩니다. 곧 은혜 속에 담긴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순종의 요구 말입니다. 신약의 야고보 사도는 이를 믿음의 행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약 2:22). 그래서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과 구원은 필연적으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향해 적극적인 자율적 순종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한결 같은 증언입니다(출 20:1∼17; 골 3:1∼3; 엡 4:1∼3; 롬 12:1∼2; 약 2:17, 26). 복음적 순종의 행위와 율법적 순종의 행위의 극한 차이가 이에서 나옵니다. 복음의 행위는 구원의 은혜가 먼저 베풀어져 거듭난 인격이 감사함으로 행하는 자율적이며 당위적인 순종의 성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적 행위는 행위 자체를 통해 구원에 이르려는 것이기에 영원히 죄인으로만 정죄 당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롬 3:20, 28)입니다.
③ 따라서 선악과 금령법이 요구하는 순종에는 몇 가지 분명한 계시가 포함돼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의 마땅히 요구되는 자발적 순종입니다.
둘째, 이 순종의 요구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자 아담과의 분명한 한계를 구분 짓는 결정적인 기준과 잣대로 작용합니다. 소위 ‘네 자신을 알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다시 말해 비록 아담이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의 신분과 특권을 누리는 특별한 존재로 지음 받았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의존적인 피조물로 존재하고 있음을 자각해 자행자지(自行自止)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생령체의 생명은 선악과 금령법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의존해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만 비로소 보장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선악과 금령법이 창세기 1장 28절의 언약을 최종적으로 이루시기 위해 아담 편에서 행할 바 자율적 순종의 계시적 방편으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악과 금령법은 아담을 율법적으로 구속하기 위해 강제성을 띠고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율적 순종을 통해 이미 주신 은혜언약을 충성스럽게 감당케 하기 위한 보호적 기능수단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계속해서 선악과 금령법에 나타난 집행적 순종을 자원하는 심정으로 지켜 나감으로 하나님과 보다 깊은 교제의 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나아가 현재보다 더욱 고도의 의의 수준에 이르는 것을 통해 마침내 영생을 보상으로 받는 단계에까지도 나아갈 수 있습니다. 생명나무에 내포된 계시의 의미가 이런 사실을 증거 합니다(계 2:7). 그렇게 될 때 창세기 1장 28절의 문화명령 속에 담긴 계시의 실체로서 하나님 나라는 마침내 성취돼 ‘하나님은 아담과 그의 자손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임마누엘 사상은 온전히 실현될 것입니다(창 17:8; 출 6:7, 19:5∼6; 렘 31:33; 겔 36:28; 요 14:16∼17; 고전 3:16; 계 21:3). 곧 하나님의 창세 전 영원하신 목적이 최종적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선악과 금령법에 담긴 계시적 의미가 이렇습니다. 넘어지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더욱 세워주기 위해서 입니다. 은혜가 은혜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④ 이쯤해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금령법을 순종하는 문제와 관련해 별도로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당시에는 비록 무죄자(無罪者)의 신분으로 지음 받았으나 죄와 절대 무관한 완전자(完全者)의 신분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금령법의 준수여부에 따라 무죄자가 범법자로 바뀔 수 있는 개연성을 근본적으로 불식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범죄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개연성의 추론적 사실로 인해 일부에서는 범죄 전 인류의 조상으로서 아담과 하와를 신학적으로 ‘시험적 존재’(probational being), 내지는 임시적 존재(temporary being)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순종과 불순종의 양면을 동시적으로 소유한 자 말입니다.
결국 이들이 사단의 미혹에 빠져 선악과의 금령법을 어기고 죄인으로 전락되는 것을 통해 이 사실은 상당히 설득력을 가진다고 보겠습니다. 물론 아담을 시험적 존재로 추론하는 관점은 동시에 선악과 금령법에 담긴 본래의 계시적 성격을 시험적 사건으로 보는 입장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선악과 사건은 자체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계시의 이중 구조적 특징상 처음부터 선의의 시험적 성격을 띤 채 주어졌다고 보는 시각 말입니다. 여기서 선악과 금령법을 ‘시험적 사건’으로, 아담과 하와를 ‘시험적 존재’로 해석한다고 할 때, 이를 ‘선의적 시험’이라는 전제 하에 접근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시험은 본래적으로 인간의 유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주시는 호의적이며 보호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창 22:13; 욥 42:5; 약 1:13). 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적어도 표면적으로 창세기 1장 28절의 아담에게 주신 문화 명령적 언약 속에 담긴 하나님 나라 사상은 창세기 2장 17절의 선악과 금령법의 요구를 온전하고 적극적으로 충족시키는 전제 하에서만 그 실현성이 가능해 진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결국 창세기 1장 28절의 창조언약과 창세기 2장 17절의 선악과 금령법의 아담언약(행위언약)은 상호의존적이며 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불가분(不可分) 연합되고 연대 관계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⑵ 뱀의 미혹 속(창 3:1∼5)에 담긴 계시적 의미
창세기 저자는 3장에서 갑작스럽게 인간을 유혹하는 뱀의 기사를 다룹니다(1절). 이는 처음부터 뱀으로 상징된 사단(계 20:1∼2)이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단은 천상에서부터 하나님의 왕권에 도전한 배역한 천사의 우두머리로서(유6) 처음 하나님의 창조사역에서부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공중 권세 잡은 자(엡 2:2)로, 세상 임금(요 12:31)으로 불려집니다. 사단에 대한 이런 다양한 표현은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가시적으로 완성되는 날까지 성도들이 대적해서 싸워야 할 하나님의 원수임을 의미합니다. 이런 전제 하에서 뱀을 통해 하와를 미혹하는 사단의 시험 속에 담긴 계시적 의미를 살펴봅니다.
① 뱀은 여인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1절)라고 질문함으로써 하나님 말씀의 중심요지를 피해 갑니다. 이는 말씀의 왜곡 뿐 아니라 하나님을 무정하고 무심한 분으로 만들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경외와 경배와 감사와 찬양의 마음을 포기케 하려는 악의적인 처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장 16절에서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을 것을 일반은총으로 이미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사단의 이런 거짓 증거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모독하는 적대적 행위이며 동시에 망령된 행실입니다.
오늘날도 사단은 하나님 말씀을 왜곡시키며 성도를 미혹합니다. 성경말씀을 왜곡시킴으로 성도를 미혹하는 일은 에덴동산의 시험사건 이후 사단의 가장 고전적인 수법 중 하나입니다. 성경이 거짓 선지자와 사도와 교사를 경계시키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들의 아비는 마귀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때문에 바른 신앙은 말씀에 대한 바른 인식의 터 위에서 비로소 정상적으로 성립되기 마련입니다(롬 10:2∼3, 17). 그런 의미에서 바른 신앙의 정체성은 외적 거룩성과 특별한 기독교적 종교행위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외부적 경건과 행위적 열심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내부적 요인(要因)인 말씀에 대한 정당한 인식이 전제돼야 합니다. 정당한 지식의 체계를 좇지 않는 한 열심을 내는 만큼 그 정도에 비례해 더욱 타락해 갈 뿐입니다. 사이비적 유사기독교 신앙에 깊이 접촉될 뿐입니다. 이것의 정체(正體)가 갈라디아서에서 지적하는 다른 복음입니다(갈 1:8∼9). 때문에 이런 신앙자세는 불법적(마 7:21∼23), 불복종(롬 10:2∼3)으로 정죄 당할 뿐입니다.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② 이어서 뱀은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4절)고 감히 말합니다. 이는 거짓 증거일 뿐 아니라 말씀을 변개시켜 거짓 증거를 따르게 함으로써 불순종을 조장하는 적대적 행동입니다. 아울러 이는 말씀을 의도적으로 가감하는 배역 행위입니다. ‘결코’라는 표현 속에서 이런 뱀의 간교(奸巧)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자들이 하나님 앞을 떠나 영영한 불 못에 들어갈 것을 시사합니다(계 22:18∼19). 이는 성경에 대한 자의적 해석과 편의적 적용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 지를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거짓 선생과 이들을 따르는 무리들이 함께 지옥에 떨어질 뿐입니다.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과 적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는 참 된 신앙과 교회를 이루는 척도이기 때문입니다.
③ 4절에서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강력한 제안 속에는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의존하는 길만이 지속적인 생명보존의 길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적대적 사상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서도 스스로 살 수 있다는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사상을 심어주는 악랄한 부추김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독립적으로 살 수 있다는 인본주의 사상 말입니다.
이런 사상은 전도서 기자가 술회(述懷)한 사람의 본분과 도리(전 12:13)를 정면에서 거부하는 도전적인 발상이며 발언입니다. 성경은 욕심에서 비롯되는 일체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하고 대적하는 불신앙적이고 사단적인 사상으로 판정해 이를 정죄합니다(창 3:5; 마 16:21∼23). 이후 인간의 타락한 불순종의 역사는 바벨탑을 쌓는 일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을 대적하는 집단 이기주의의 모습으로 극명하게 나타납니다(창 11:1∼9). 이 사건을 계기로 성경역사 속에서 바벨은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제반 인간의 통치적 권세와 온갖 세속적인 사상을 대변하는 사단적 세력을 총체적으로 표상하게 됩니다(계 14:8, 16:19, 17:1∼6, 18:1∼2, 10, 21; 단 1:1). ④ 사단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선악을 스스로 분별할 수 있는 전지(全知)한 지존(至尊)의 자리에 이를 수 있음을 강력히 제안합니다. 이는 인간에게 내재된 명예욕을 부추김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할 것을 촉구하는 가장 강력하고도 공격적인 시험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험 속에는 자기의 실패를 인간을 통해 대리적으로 이루게 함으로 자신의 야욕을 성취하려는 고도의 전략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상은 바로 이 부분에서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경쟁의 상대로 삼아 도전하기에 이릅니다. 인류의 최대의 비극이 여기서 비롯됩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불신하고 배반하는 행위가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 사건을 통해 죄의 근원인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불순종의 원인이 하나님과 같이 지존자(至尊者)가 되고자하는 인간의 내재적 욕망의 발로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약 1:14∼15). 개인주의의 중심에 지존사상이 자리잡고 있음으로 해서 극단의 이기주의가 반(反)하나님적이고 반(反)성경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이유가 이런 원리에서 나와집니다.
⑶ 아담과 하와의 범죄(창 3:6)의 결과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시험에 넘어짐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면류관이며 만물에 대한 대리적 통치자의 자리에서 일순간에 실족해 죄인으로 전락해 버린 사실을 기억합니다. 이런 비참한 상태를 신학적으로는 인간의 전적타락과 부패와 무능이라고 표현합니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사실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진술합니다.
①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가져다 준 최초의 결과는 이들의 의식에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입니다. 타락 전에는 결코 의식하거나 인식할 수 없었던 자신의 벌거벗은 수치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된 인식은 전에는 결코 부끄럽게 여긴 적이 없었던 자신들의 벌거벗은 몸을 수치심 때문에 가려야 하는 변화를 유발시켰습니다. 이런 사실은 이후 하나님과 인간관계에 있어서까지 전반에 걸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급기야 이들은 동산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낯을 피해 숨어야 하는 비참한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는 계시원리에 의해서 말입니다. 죄는 속성상 숨기에 급급합니다. 타락한 인격이 이를 부추깁니다. 인식이 정상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②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범죄 함에도 불구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에덴을 찾아오십니다(9절). 그리고 아담을 찾으십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벗었음을 이유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음을 실토합니다(10절). 이는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사실을 고백하는 사건입니다. 창세기 저자는 본 사건의 아담의 고백을 통해서 범죄한 인류는 필연적으로 하나님과의 일체의 인격적 교제와 화목의 관계가 단절될 수밖에 없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합니다(사 59:1∼2). 그렇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사이를 내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훼방합니다. 그래서 범죄한 인간은 진리를 깨달을 수 없고, 하나님을 찾지도 못하며, 선을 행하지 못할 뿐 아니라(롬 3:11∼12), 그 생각이 허망해지고 마음이 어두워져 결국은 우상숭배로 빠지고 맙니다(롬 1:21∼23).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지고 교제가 단절됐기 때문입니다.
③ 하나님께서는 범죄의 사실과 내용을 추궁(追窮)하십니다(11절). 이에 아담은 자신의 범죄의 책임을 적극적으로 하와에게 돌리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기에 이릅니다(12절). ‘하나님이 주신 여자’라는 표현 속에서 이런 사실이 발견됩니다. 이는 범죄한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죄에 대한 책임회피와 책임전가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는 범죄한 아담의 비겁한 모습을 통해 그의 심령 속에서 이미 내재해 권세를 발휘하고 있는 죄성과 죄의 왕 노릇 하는 권세를 봅니다(롬 5:21상). 죄는 이런 왕적 권세로 신속히 세력을 확장시키며 더 많은 사람을 죄의 종노릇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런 죄의 신속한 오염과 막강한 권세를 창세기 4장에 기록된 아담의 아들인 가인이 동생 아벨을 시기질투로 인해 살인하는 사건을 통해 극명하게 확인됩니다. 하나님의 책임추궁에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범죄의 책임을 전가시킴으로 상호 불신과 반목과 갈등의 골이 깊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관계를 단절시키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더욱 적극적으로 관계를 악화시킵니다. 결과적으로 피차에 원수 되게 합니다.
④ 이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뱀의 미혹에 기인한 것을 확인하시고 그 책임을 물어 저주를 내리십니다. 나아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에 적대적 원수관계가 형성돼 향후 치열한 투쟁의 역사가 전개될 것을 예언하십니다(창 3:15). 그러나 그 결국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으로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죄를 유발시킨 장본인 사단을 향한 종말론적 심판의 선언이자 죄를 혐오하시고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뒤이어 이 부분을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구원방식이라는 복음적 관점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이는 창세기 3장 15절의 내용 속에는 여자의 후손을 통해 아담과 하와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더하여 구원을 베푸시려는 복음의 메시지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본문에 언급된 별개의 ‘두 후손’을 특별한 개인에게만 단수적으로 국한시켜서 적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이 개인적으로만 제한시켜 지지할 것을 어디에서도 요구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수적이고 집합적 개념으로서 향후 구속사의 진행 속에 출현하게 될 적대관계의 ‘두 계열’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이후 전개되는 구속사 진행의 절정 속에서 불가피하게 예수 그리스도와 사단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구속사적 계시관점에서 본문(창 3:15)을 ‘여자의 후손언약’으로 구분해 ‘원시복음’(proto gospel)이라 부릅니다.
결국 이런 일련의 사건 진행(창1∼3장)을 볼 때, 창세기 3장 15절에 나타난 최초의 복음 메시지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창 2:17, 3:6)를 해결해 주실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창세기 1장 28절의 언약(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을 성취하시려는 의도에서 주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은 이런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전 우주적 구속의 경륜을 구속사적 계시안목으로 통찰하면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복음의 메시지는 이후 전개될 성경역사가 구속사(救贖史)인 사실과, 세상 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인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명해 주는 결정적인 증거본문으로 작용합니다. 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하와에게 여전히 잉태와 해산의 은혜를 보장해 주십니다. 즉시 이들의 생명을 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구원을 약속해 주십니다(창 3:15). 이는 비록 죄로 인해 사망이 저들에게서 왕 노릇 하는 권세로 역사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당초 언약(창 1:28)이 지속적으로 발효(發效)된다는 객관적인 증거입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는 물론 후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상급이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여인의 해산의 수고를 통해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범죄사건 이후 진행되는 구속사의 내용은 오직 이 사실에 집중돼 전개됩니다.
대신 여인의 출산에는 고통이 가중되는 ‘수고’가 형벌로 선포됩니다(16절). 이는 죄에 가담한 여인에게 그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법정적 선고입니다. 그러나 수고가 더해진 해산의 결과로 태의 열매를 주심은, 수고가 형벌인 동시에 은혜인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마치 십자가 사건이 죄에 대한 공의적 심판과 은혜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사건을 동시적으로 계시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⑥ 인간이 수고해야 땅은 식물을 공급합니다(17절하). 범죄 전 동산관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실질로 누리는 상급이며 적극적인 교제와 교통의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범죄 후 수고해야 하는 노동은 형벌의 일환입니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어 인간의 수고를 더하게 합니다. 로마서 기자는 창세기의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고 있다’(롬 8:22)고 성도의 종말론적 구원과 관련해서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의 면류관인 아담과 하와가 죄인으로 전락됐을 때, 모든 피조물들이 동반저주를 받아 애매히 형벌아래 놓였다는 것입니다. ⑦ 범죄 전 동산관리로서 노동은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과 교제의 한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범죄 후 노동은 수고가 가중 된 저주와 형벌의 의미로 인간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앞 서 여인에게 주어진 해산의 수고가 ‘고통을 통한 출산의 기쁨’을 보장하듯이 아담의 수고는 ‘땀흘리는 것을 통해 생산의 기쁨’을 보장받습니다. 결국 심판의 일환으로 더해진 수고는 두 사람에게 형벌과 은혜의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범죄행위에 대해 때리기만 하시는 것(심판)이 아니라, 싸매어 주심(용서와 구원)으로 치료 책도 강구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은혜의 은혜 됨의 본질이 이에서 찾아집니다.
⑧ 선악과 금령법은 조건적으로 주신 행위언약입니다. 언약 자체 안에 응분의 대가를 요구하는 율법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석하게도 우리의 조상은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연합된 영생의 생명보다는 하나님과 분리된 죽음을 자초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죽음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의 단절’이라는 방식으로 찾아옵니다(창 3:10; 사 59:1∼2; 엡 2:1).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은 몸을 나뭇잎으로 가린 채, 찾아오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숨을 수밖에 없었음이 이를 단적으로 증거 합니다(창 3:8∼10). 이를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과 전적무능력(total inability)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지정의의 전인격이 죄로 인해 타락하고 마비돼 스스로 하나님과의 일체의 관계를 예전처럼 정상적으로 유지하는데 절대 불가능하다는 지적입니다. 성경은 이런 인간의 비극적인 상태를 묘사하면서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1∼12)라고 기술합니다.
그렇다고 이 말의 의미가 인간의 지정의의 전인격적 요소가 아주 말살됐다거나 전혀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지적은 아닙니다. 여전히 사람은 전인적 존재로서 지정의는 부단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다만 죄로 인해 오염되고 부패해져서 본래의 천부적 기능을 정상적으로 수행하는 데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는 이런 사실을 특별히 인간의 심령 속에 내재된 종교성의 왜곡된 발휘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 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본문의 설명을 보면 분명 인간의 내면에 종교성이 활동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로 인해 오염되고 마비돼 마땅히 창조주를 향해 정당하게 발휘돼야 할 신앙심이 우상숭배의 신앙으로 왜곡되게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이런 사실은 자연히 외부적 절대 타자로서 구원자를 소망하는 대로 인류의 관심을 유도하게 됩니다.
⑷ 여자의 후손 언약(창 3:15) 속에 담긴 계시적 의미
창세기 3장 15절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방식입니다. 본문을 최초의 복음, 곧 원시복음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직접적인 내용은 여자인 하와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끊임없는 긴장과 대립 및 적대적 투쟁의 역사가 진행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의미는 범죄한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언약을 주신 배경은 창세기 2장 17절의 선악과 금령법을 창세기 3장 6절에서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미혹으로 인해 어긴 것에 대한 치유책으로 주신 하나님의 본격적인 은혜언약이란 사실입니다.
우리는 본 언약 속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가 어떻게 창세기 1장 28절의 창조언약을 중심으로 계시된 ‘하나님 나라 사상’에 대한 재확인이요 갱신이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① 창세기 1장 28절을 통해 아담에게 주신 문화 명령적 언약은 그 구조적 내용과 성격상 본질적으로 ‘하나님 나라’라는 종말론적 목표를 지향하고 있음을 이미 살펴봤습니다(백성과 땅과 왕적 통치권).
② 이러한 사실은 당시 에덴동산이 구조적으로나 성격적으로 이미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자체적으로 표상하고 있다는 데서 더욱 확증됩니다. 이런 사실 또한 위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
③ 이런 일련의 사실들을 통해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의 주인공으로서,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권자로서, 그 분의 선하신 뜻과 목적을 따라 에덴동산을 하나님 나라로 선양하고 운반하며 확장시켜 나가야 하는 일에 막중한 사명을 담당해야 할 최고의 책임 있는 당사자들로 존재합니다.
④ 뱀으로 표상 되는 사단이 그의 지혜와 지식을 통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습니다. 곧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건설(창 1:28)은 그 자체로서 사단왕국의 철저한 파멸과 종말을 초래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뱀이 아담과 하와를 미혹의 대상으로 삼은 배경에는 이런 하나님의 종말론적 계시역사에 대해 사단이 누구보다도 그 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상의 왕권 도전에 이미 실패했던 사단은 이제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무산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당시로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언약의 유일한 당사자이며 성취의 통로였기에 말입니다.
⑤ 그런데 뱀이 일차적 목표로 삼은 것은 아담이 아니라 여자인 하와입니다. 우리는 뱀이 여자인 하와를 미혹의 일차적 대상으로 삼았다는 데서 그의 교활한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선악과 금령법은 아담에게 주신 것으로 확인됩니다(창 2:15∼17). 그때까지 하와는 아직 지음을 받지 않은 시점입니다(창 2:18). 따라서 하와는 후에 아담을 통해서 선악과 금령법에 대해 들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이는 그만큼 간접적으로 들은 사실로 인해 이를 순종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 아담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 있습니다. 이런 추론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아니 사실이 그렇습니다. 사단이 얼마나 간교합니까. 이런 내막을 이미 간파한 사단인지라 보다 손쉽게 접근해서 미혹할 수 있는 하와를 일차적 시험의 표적으로 삼은 것입니다. ⑥ 마침내 사단은 뱀을 통해 하와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합니다. 하와 또한 별다른 거부감 없이 뱀과의 대화가 이루어짐을 봅니다. 이런 정황(情況)을 통해 위에서 이미 살펴본 대로 에덴동산은 그 자체로 온갖 피조물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상호간의 막힘 없는 초자연적인 교제가 가능한 하나님 나라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1장 28절을 통해 아담에게 부여하신 창조자의 대리적 통치권이 전 피조물들에게 자연스럽고도 권세 있게 시행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특별히 창세기 2장 19절에서 아담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 중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짐승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을 통해서 그의 창조의 면류관으로서의 탁월한 지혜와 대리적 통치권 발휘의 절정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피명명자(被命名者)가 명명자(命名者)의 권세 하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과거 대가족제도나 왕정시대의 군신관계 속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⑦ 이런 천상적 통치의 질서와 조화 속에서 하와와 뱀은 자연스러운 만남의 장이 마련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의 뱀의 본래적 영특한 지혜가 교활하고 속이고 참소하는 악한 사단의 품성으로 악용돼 버렸다는 사실입니다(창 3:1). 이후 역사 속에서 뱀은 사단과 마귀를 지칭하는 표상으로 사용됩니다(계 20:1∼3). 마침내 사단은 결코 회개할 수 없는 사악한 본성상 뱀을 도구 삼아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인 선악과 금령법의 내용과 취지를 본질에서부터 왜곡시킴으로 하와를 미혹합니다.
⑧ 이때 사단이 하와를 미혹하기 위해 결정적으로 표적 삼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녀의 심령 깊숙한 곳에 내재된 욕심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심령 속에 내재된 자존심을 충동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함이 없이도 스스로 독립된 존재로서 지존(至尊)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명예욕에 대한 충동 말입니다.
이미 사단의 미혹의 덫에 걸려버린 하와에게 선악과는 더 이상 금단의 열매가 아니었습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런 욕망의 열매로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해서 선악과를 멀리하기에는 너무도 가까이 서 있는 매력적인 실과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더욱 하나님과 동등한 제 2의 지존자와 선악을 분별하는 판단자 곧 심판자가 될 수 있다(창 3:5)는 달콤한 유혹은 잠재된 자존심을 너무나 자극했던 것입니다.
⑨ 마침내 하와는 금단의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사단의 미혹에 빠집니다. 그리고 여자의 머리인 아담을 설득시켜 자신의 범죄에 불러들입니다. 이 비극적이고 배도적인 범죄사건으로 인해 이들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죄인으로 낙인찍히는 원죄사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죄로 말미암는 인류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처음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무죄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하지 못했음이 이런 사실에서 확인됩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영생하는 완전한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처음 존재론적 상태가 ‘시험적’이라는 견해가 이런 데서 나와진 설명입니다. 사단은 이들을 미혹해 범죄 하게 만듦으로써 자신이 천상의 영원세계에서 이루지 못한 염원(유 6; 벧후 2:4)을 인간을 통해 이뤄보고자 재 시도를 꾀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사실은 저들을 마귀의 종으로 삼아 하나님 나라 건설 계획을 무산시키려는 사단의 계략이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입니다.
이제 아담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만물의 통치자의 영광스러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명분을 잃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언약 당사자의 신분도 잃었습니다. 이들은 탐욕으로 인해 한 순간에 타락하여 죄인과 마귀의 종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이는 졸지에 하나님과 상종할 수 없는 영원한 원수지간이 됐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창 1:28)은 파기되고 하나님 나라 건설 계획마저도 무산 될 위기에 처해 버립니다. 일순간 에덴은 첨예한 대립과 긴장과 적대적 분위기가 고조됩니다. 하나님 나라와 공존할 수 없는 죄의 세력이 에덴에 침입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죄는 상극입니다. ‘사망이 다시는 없다’고 표현하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고려하면(계 21:4) 하나님 나라는 죄의 세력이 더 이상 역사 할 수 없는 곳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망은 죄에 대한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타락 전 에덴은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를 ‘표상’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종말론적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모형과 예표로서 말입니다(계 22:1∼2).
죄가 유입된 에덴 동산에 일대 긴장이 감돕니다. 지금 하나님의 전(全)우주적 창조역사가 중단될 일대 위기에 처했습니다. 언약의 수혜자이며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고사하고 범죄자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하수인으로 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한편 죄는 그 법정적 성격상 형벌을 요구합니다. 지금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 금령법에 불순종한 사실로 인해 응분의 법적 제재를 받아야 할 상황입니다. 곧 죽음의 형벌 말입니다(롬5:12, 6:23). 따라서 만일 이런 성경적 원리를 좇아서 죄에 대한 형벌이 주어진다면 아담은 물론 그 안에서 전 인류는 하나 같이 사망에 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될 때 창세기 1장 28절에 언약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실현은 요원할 뿐입니다. 언약의 당사자들이 하나님과 원수관계로 전락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대로 하나님의 창조역사는 시작과 더불어 중단돼야만 할 것인가?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로서 창조자이시며 하나님의 은혜언약은 어떤 경우에도 결코 변개될 수 없습니다. 이런 급박한 상황 하에서 창세기 3장 6절의 선악과 금령법을 어긴 결과로 주어진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창세기 1장 28절의 문화명령을 통해 주신 하나님 나라의 언약을 동시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극적인 해결방안이 바로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언약인 것입니다. 본 언약은 위에서 잠시 살펴 본대로 향후 구속사의 점진적 진행 속에서 여자의 계열과 뱀의 계열간에 일어날 사생결단의 치열한 투쟁의 역사를 전망케 하는 예언적 언약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의 후손언약’이 갖는 계시적 의미가 무엇일까요? 어떤 의도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긴박하고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본 언약을 체결해 주셨을까요.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 언약에 담긴 계시적 의미는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님을 즉각적으로 분별하게 됩니다. 해결을 위한 언약간의 상호관계(창 1:28―창 3:6―창 3:15)는 이렇습니다. 먼저 창세기 3장 6절의 금령법을 어긴 죄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여자의 후손 언약은 이미 앞에서 살펴 본대로 자체 안에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는 복음적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여자의 후손은 이후 진행되는 구속사의 전개 속에서 단순히 특정한 한 개인만을 제한적으로 지칭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의 계열을 복수적 개념으로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속사적 언약의 점진적 실현에 따라 언약의 실체가 가시화되면서 급기야 여자의 후손언약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으로 성취됩니다.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의 언약’ 속에 계시된 자손(창 13:15, 17:8, 22:18; 행 3:25∼26; 갈 3:16)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켜 증거 하는 배경이 이렇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갈라디아서 4장 4∼5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라고 기술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 사역 안에서 죄인 된 당신의 백성들을 찾으셔서, 사면(赦免)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심으로 구원해 주신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해서 첫 사람 아담 안에서 모두가 죄인 된 것을,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고전 15:45)의 전적 순종(롬 5:18∼19)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롬 4:25, 6:18∼19; 고후 5:14). 이런 방식으로 여자의 후손언약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최초의 복음입니다. 이때 이런 하나님의 해결책(창 3:15)은 임기응변 식이나 즉흥적인 비상 강구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2장 17절의 조건적 선악과 금령법 보다 앞서 창세기 1장 28절을 통해 아담에게 주신 문화 명령적 언약 속에 담긴 ‘하나님 나라사상’에 관한 언약이 은혜로 먼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1장 28절의 언약은 하나님 편에서 아담과 하와를 향해 일방적으로 맺으신 편무적 계약으로서 은혜언약의 성격을 자체 속에 담고 있기에 이후 어떤 경우의 조건적 언약에 불순종했다 할지라도 대가는 마땅히 지불해야 하겠지만 그로 인해 아주 멸망당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모름지기 자법(子法)은 모법(母法)에 종속되어야 하고, 각론(各論)은 총론(總論)에 부속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 28절의 명제적 은혜언약 하에서 창세기 2장 17절의 조건적 행위언약은 모법인 창세기 1장 28절을 근원적으로 취소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 28절의 언약의 내용을 보다 효과적으로 실현시키는 일과 관련해서 선악과 금령법(창 2:17)은 상호 밀접하게 보완적 관계를 맺고 있기에 이를 어길 경우는 마땅히 그 대가를 어떤 식으로라도 지불해야만 합니다. 언약적 심판과 징계의 차원에서 말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창 3:15) 언약은 성경이 증거 하는 메시아 언약의 원초적 근거로서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의 문제(창 3:6)를 대속적 속죄원리에 입각해서 해결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아담 언약(창 1:28)의 효력을 지속적으로 유효케 하는 최선책으로 작용합니다. 로마서 기자는 이런 신묘막측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구속사적 관점으로 통찰하는 가운데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 앞에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2∼33)
⑸ 창세기 3장 15절을 통한 하나님 나라 언약갱신의 의미
이상의 언약간 상호의존적이며 보완적인 원리를 통해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은 아담의 죄의 문제(창 3:6)를 유일하게 해결하는 동시에 문화 명령적 창조언약(창 1:28)의 실체인 하나님 나라 건설을 지속적으로 가능케 함으로써, 창세기 1장 28절 속에 담긴 언약성취의 성격을 당초 ‘창조적 원리’에서 ‘구속의 원리’로 갱신하는 의미를 가집니다.
① 아담은 하나님 나라를 성취해야 할 언약의 당사자로서 죄의 문제는 심각한 장애요소로 등장합니다. 이는 죄 문제를 해결함이 없이는 아담의 후손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완성은 그 실현가능성이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② 따라서 아담이 무죄한 상태에서 ‘창조언약’(창 1:28)을 통해 이루려고 한 하나님 나라의 계획은 이제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말미암는 ‘구속언약’으로 바뀌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경우 하나님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이라는 궁극적 목표에는 결코 달라질 것이 없기에 사실상 언약의 갱신일 뿐이지 근본적으로 언약의 변경은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 문제가 선결되는 것을 통해서만 진정한 하나님 나라 언약은 성취될 수 있다는 관점입니다. ③ 이렇게 해서 창조언약(창 1:28)으로서 아담언약은 구속의 도리인 여자의 후손 언약 안에서 재확인되며 새롭게 갱신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경우라도 죄가 존재할 수도, 활동할 수도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④ 이와 관련해서 당초 ‘창조적 안식’의 의미도 여자의 후손언약 안에서 ‘구속적 안식’의 의미로 갱신된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2장 1∼3절의 하나님의 안식은 무죄한 상태에서 가능했던 ‘창조원리’에 근거한 안식의 개념입니다. 따라서 이때의 안식의 성격은 만물과 만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창조되었고, 이로 인해 당초 의도하신 대로 질서와 조화와 균형을 이룸으로 하나님과 정당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안식 그 자체가 곧 하나님 나라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담의 범죄로 인해 깨져 버립니다. 대신 반목과 불화와 긴장과 대립이 찾아 들게 됩니다. 죄 문제의 해결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의미의 안식은 회복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종전 ‘창조원리’에 의한 안식개념은 이제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속의 원리’ 안에서만 진정한 안식의 회복이 보장될 따름입니다. 이 사실은 훗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신정왕국의 백성 된 정체성을 보증하는 기준으로 받은 율법의 십계명 속에서 발견됩니다. 출애굽기 20장 3∼17절의 십계명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십계명의 준수의 근거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출애굽 구원사건에 두고 있습니다. 신명기서에서도 율법의 갱신을 통해 출애굽 2세들에게 동일하게 이런 사실을 반복적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신 5:15). 그러나 구원의 절정은 가나안 정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결국 십계명의 제4계명 안식일 준수는 가나안 정복사건을 통한 구원의 궁극적 성취 안에서 진정한 의미가 찾아짐을 시사합니다. 동시에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 안에서 비로소 참된 안식의 실질을 맛보게 됨을 예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을 비벼먹는 것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눅 6:5)고 응수하신 말씀의 배경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상의 가나안은 회복될 에덴과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계시적 모형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히브리서 기자는 복음의 빛 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히 11:10, 16). 이상의 사실을 통해서 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안에서만(여자의 후손언약의 궁극적 성취) 재창조 사역으로서 에덴의 실체인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진정한 안식의 회복이 동시적으로 충족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Ⅲ. 결 론
우리는 다니엘서 2장의 신상을 통해 주신 꿈의 해석과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가르침과 사역의 내용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는 나아가 성경의 총체적 계시와 그 방향성이 곧 ‘하나님 나라 사상’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동일한 주제 하에 연속되는 일련의 본 강의를 통해 이 하나님 나라가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근간으로 해서 성취의 절정을 이루며 구속사의 총체적 경륜이 어떻게 세상 역사 속에서 창세 이후부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을 향해 전개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을 총체적 관점에서 바르게 해석하는 일 뿐 아니라, 바른 성경적 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정립할 수 있는 근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강의를 통해 에덴 동산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 사상에 관해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봄으로 처음 창조의 원리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의중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에 귀결됨을 재차 확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후 성경의 계시역사는 하나님 나라 건설과 그 최종적 완성을 향해 구속사라는 독특한 역사의 옷을 입고 세상 역사의 전면에 등장합니다(창 3:15). 이런 상호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되고 성취되는 현장과 무대로서의 계시적 의미를 간직할 뿐 아니라, 세상 역사의 본질이 곧 하나님의 구속사임을 밝힙니다. 이 일련의 진행 과정에서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만물과 만사를 창세 전에 세우신 그 분의 선하신 뜻과 작정 가운데서 보존하시고 관리하시며 통치해 가십니다. 우리는 이를 일컬어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 역사라고 부릅니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이 바로 처음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중심으로 진행됨을 봅니다. 그곳에서 나타난 계시의 핵심 내용과 사상이 곧 하나님 나라임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사상과 관련해서 또 한가지 잊지 말아야 될 일이 에덴에서 발견되는 바, 곧 사단의 집요한 방해 공작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구속사는 하나님 나라를 세상 역사 속에서 건설해 가는 가운데 초기 과정에서부터 끊임없는 사단과의 긴장과 갈등과 투쟁을 불러일으킵니다.
오늘날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인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전투하는 교회로서의 성격(엡 6:12∼13)을 띠고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이에서 나와집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런 사실의 근원을 인간타락의 근원적 배경 속에서 설명하면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지속적인 전투와 투쟁의 불가피성(창 3:15)’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현실을 하나님의 구속사적 안목을 가지고 직시해야 할 당위성이 이에서 찾아집니다.
성경은 세상의 체계와 사상과 시대적 풍조를 말할 때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닌 세상 곧 마귀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증언합니다(요일 2:15∼16). 성도는 비록 세상 가운데 살고 있지만 우리의 신분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우리의 소속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미 세상 가운데 침노해 들어온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자들로 존재하고 있음을 잠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와 관련해서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적극적인 순종의 삶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 된 자들임을 지속적으로 확증할 것을 강력히 요청합니다(갈 1:10).
그렇습니다. 진리에 대한 정당한 체계적 인식의 전제 하에서만 바른 신앙, 바른 교회, 바른 목회의 실질이 보장될 뿐입니다.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 4절).”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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