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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구속사 제4강 족장들의 언약 속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

by 【고동엽】 2021. 10. 21.

제목: 성경구속사 제4강 족장들의 언약 속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 (창세기 12-50장을 정독하신 후 공부 요망)

 

 

Ⅰ. 도입

우리는 지난 강의를 통해 초기 인류의 보편적인 역사(창4-11장)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구속사의 진행을 살펴봤습니다. 이 시대의 구속사 진행의 특징은 급속한 죄의 관영에도 불구하고 창3:15의 여자의 후손 언약이 하나님의 은닉적인 섭리의 손길을 통해 주권적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족보를 언약 성취의 수단으로 선용하십니다. 이런 과정에서 아담으로부터 기인된 원죄의 영향력은 아들 가인으로 하여금 동생 아벨을 살해함으로 인류 역사상 첫 살인자라는 오명을 남기게 됩니다. 이렇게 죄는 급속한 전염성과 막강한 권세를 발휘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타락시켜 갔습니다. 창6장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함을 보시고 급기야 손수 지으신 인간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죄는 그 법적 성격상 형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음을 봅니다. 노아와 일곱 식구는 이런 심판의 와중에서도 언약을 신실히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배려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선택적 은총이 부어지는 계시적 사건입니다. 아울러 여자의 후손 언약이 어떤 경우에라도 파기되거나 취소될 수 없는 성취의 당위성과 확실성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노아에게 부속돼 그의 일곱 가족이 구원을 받는 것을 보면서 아담의 불순종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 된 것을 장차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을 확실히 전망하게 됩니다(롬5:18-19). 이것이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선악간에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표적으로 대신하는 신학적 원리 말입니다. 홍수심판 후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다시 언약하심으로(창9:1-2)새로운 인류의 생육과 번성을 약속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노아 언약을 일명 '보존언약'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노아 언약은 내용적으로나 성격적으로나 아담에게 복으로 주신 창조언약의 그것과(창1:28) 동질의 것임을 통해 아담 언약의 재확인이며 갱신된 것임을 간파하게 됩니다. 이는 다른 말로 홍수심판 후에도 아담 언약의 갱신으로 주신 여자의 후손 언약이 지속적으로 유효하게 진행될 것에 대한 확증과 보증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차이점은 아담의 창조언약은 아담의 범죄 전에 주신 것에 반해 노아의 보존언약은 아담의 범죄 후에 주신 것으로 언약성취의 방법에 있어서 불가피하게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여자의 후손언약의 선(先)성취 안에서만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신정적 왕국은 도래할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신적 기원이라는 특성상 주권성과, 은혜성과, 실현성을 자체 안에 간직하고 있기에 어떤 경우라도 결코 무효화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이 성도의 신앙의 근간이 되며 나아가 영생하는 생명의 준거(準據)로 작용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서 나와집니다. 따라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은 철저히 하나님께서 내신 계시에 의존하는 것으로서 그 진정한 정체성이 확인됩니다. 창세기 저자는 홍수심판 후 노아의 세 아들 중 첫째인 셈의 계열을 통해 계승된 여자의 후손 족보(창11:10)를 데라의 세 아들 중 첫째인 아브라함에게 연결시킴으로 새로운 구속사의 계시시대가 아브람을 통해 열릴 것을 독자들에게 암시적으로 시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창세기 12장은 하나님의 전 성경적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획기적인 선을 긋는 전환의 분수령입니다. 아브람을 역사의 전면에 공식적으로 지명해 부르시고 그에게 은혜로 맺어주신 소위 아브라함 언약(창12:1-3)의 내용 속에서 이와 같은 사실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봅니다. Ⅱ. 전개 1)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창12:1-3) 창12장은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구속사적 계시를 집행시켜 나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있어서 새로운 계시의 장이 열리는 분수령입니다. 처음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된 인류의 기원은 이후 창세기 4장으로부터 그 후손이 출생함으로 해서 본격적인 인류의 생육과 번성이 시작됩니다. 이후 11장까지의 역사진행은 주로 보편적인 인류역사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어서 근간으로 작용할 여자의 후손언약 진행 역시 구체적이고 공개적이며 명시적이기보다는 민족적 차원에서 암시적이며 은닉적으로 진행됨을 봅니다. 그러기에 여자의 후손언약의 성취적 흐름을 담고 있는 족보에 계시된 저자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면 창11장까지의 기록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계시의 진행을 파악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제 이런 식으로 암암리에 은닉적으로 진행되던 하나님의 섭리적 구속사는 창12장에 들어와 획기적인 전환의 국면을 맞습니다. 곧 계시의 공개성과 아울러 개인을 향한 구체적 적용이 그것입니다. 이제까지 은밀한 중에 소리 없이 진행되던 하나님 나라 계시의 비밀이 급기야 공개적이며 구체적으로 특정한 인물을 통해 세상 가운데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을 일컬어 '아브라함의 소명' 곧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을 부쳐서 설명합니다. (1)아브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창12:1) 아브람은 노아의 십대손인 데라의 세 아들 중 첫째 아들입니다. 창세기 저자는 홍수 심판 전, 아담의 계보를 노아까지 십대로 맞춥니다. 홍수 후 새로운 인류의 생육과 번성은 노아의 세 아들 중 첫째인 셈으로부터 개시됩니다. 이 과정을 소개하면서 저자는 동일한 기법으로 노아에서 셈을 거처 데라까지를 의도적으로 십대로 끊어 맞춥니다. 이후 새로운 구속사의 전기를 맞는 창12장에서 저자는 데라의 세 아들 중 첫째인 아브람을 후반기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의 당사자로 역사의 전면에 부르심을 소개합니다. 이런 식으로 홍수 전, 후에 나타난 동일한 계시 진행의 구도 속에서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로 소명을 받은 아브람을 통해 새로운 신 기원적 하나님의 구속사의 장이 펼쳐집니다. 이는 창3:15의 여자의 후손 언약 속에 담긴 하나님 나라 사상이 보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갱신되고 진전된 모습으로 언약적 구속사의 전면에 나타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로 인해 구속의 원리에 입각해 재 가동된 하나님의 재창조의 열심은 보다 역동적으로 성취의 절정을 향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듭니다. 이런 사실은 지금까지 비교적 은닉적으로만 계시하셨던 하나님 자신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키셔서 아브람을 공개적으로 부르시사 그에게 구체적으로 당신의 뜻을 알리시는 사건을 통해 밝히 드러납니다. (2)아브람이 소명 받은 내용(창12:1하)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시며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하나님 나라 사상을 보다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제시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현현하셨는지에 대해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이 사실에 대해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의 지시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맺기에 앞서 먼저 아브람으로 하여금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날 것을 요구하십니다(창12:1상). 대신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창12:1하). 창세기 저자는 이런 기술을 통해서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가 마땅히 취할 신앙적 도리가 무엇인지를 독자들에게 은연중에 전달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신앙하고 섬긴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습관화됐고 체질화 된 세상 지향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삶의 관계를 철저히 청산하라는 엄중한 명령입니다. 곧 옛 사람적 삶의 방식을 포기하라는 얘깁니다(떠나라). 대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삼아 인생의 방향과 목적과 가치관에 일대 전환이 있어야 함을 강력히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곧 새 사람적 삶의 가치관을 철저히 추구하라는 것입니다(가라). 우리는 이 부분에서 특별히 '떠남과 감'의 삶의 원리를 철저히 강구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이를 신약적 관점에서 재해석한다면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표현입니다(엡4:22-24).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는 권면입니다(골3: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인해 우리의 영적 정체성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별한 신분과 '하나님 나라'라는 천상적 소속에 편입됐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유로 인해 우리의 신분과 소속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 나라인 사실은 이후 우리의 언행심사 속에서 끊임없이 세상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요소들이 부인될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새 사람적 가치관과 성품들이 지속적으로 확인되며 체질화되는 데서 찾아집니다. 모세가 출애굽의 사역을 감당하기 전 하나님의 소명을 받을 때에도 그는 떨기나무의 불꽃으로 상징된 하나님의 현현하심 앞에서 자신의 신발을 벗어야 했습니다(출3:4-5). 이는 이후 모세가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사역의 거룩성에 근거해서 자기 중심적인 세속적 삶에 대한 즉각적이고 철저한 포기를 의미함에 다름이 아닙니다. 신약의 서신서 기자는 성도의 삶이 세상 가운데서 구습을 좇았던 옛사람을 벗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하심으로 지으심을 받은 자답게 새사람을 입을 것을 강력히 요청합니다(엡4:22-24). 이는 옷을 벗고 입는 것으로 성도의 변화된 신분과 행동의 철저한 차별화를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도 제자도를 가르치시는 가운데 자기부인을 으뜸으로 강조하십니다(마16:24). 이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신앙하는 일에 옛사람의 자의적 발상과 행동이 얼마나 해악이 되는지를 단적으로 지적하는 내용입니다(마16:21-23, 렘17:9). 그렇습니다. 오직 총체적 성경 계시관에 근거해서 나와진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적 행동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히11:6). (3)아브라함 언약의 내용(창12:1-3, 17:2-8, 22:17-18). 하나님은 창2-3에서 아브람에게 복으로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 내용은 첫째로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내용입니다. 둘째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아브람을 통해 열왕이 나올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람의 씨로 하여금 모든 족속들의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볼 때 언약적 성격상 하나님 나라 사상의 삼 요소인 땅과 민족과 왕의 통치권을 그대로 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아브람 언약은 멀리 아담의 창조언약에서 시작해 이의 갱신인 여자의 후손 언약과, 홍수 후에 인류의 보존을 위해 주신 노아 언약의 재확인 및 이의 보다 진전된 구체적 언약인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저자는 이런 내용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이 세상 역사 속에서 점진적이고 명시적으로 구체화되고 발전됨을 독자들에게 시사합니다. 아담의 창조언약이나 여자의 후손언약, 그리고 노아의 보존언약은 그 자체 속에 하나님 나라 사상을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그 내용상 집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이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 아직은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삼 요소가 누구를 통해 어떻게 진행될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아브람 언약 속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요소가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명시됨을 통해 앞에 주어진 약속이 한층 더 구체화된 사실을 봅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의 발전을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점진적 계시의 특징은 암시적이고 잠재적인데서 명시적이고 구체적인 방향으로 내용과 성격이 발전되고 진전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 구체적 실상을 살펴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보편적이고 집합적인 성격을 띤 자손언약(창1:28, 9:1-2)은 아브람 언약 안에서 아브람의 후손, 곧 그의 씨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룰 것과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창12:2-3, 22:17-18). 다시 말해 일반적인 인간의 생육과 번성은 자연적 증가의 원리에 의해 번창해 가지만 아브람의 후손과 그를 통해 나타날 민족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과 섭리와 보호하심 속에서 그의 의도하심을 따라 그의 계획하심 속에서 비로소 출현하게 된다는 지적입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결혼할 당시 이미 출산할 수 없는 불임여인이라는 사실(창11:30)이 이런 계시적 배경을 더욱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창조자로서의 신적 개입과 간섭만이 불가능을 가능케 함으로써 언약의 지속적인 성취를 유도하게 될 것입니다. '땅을 정복하라'고 암시적으로 주신 공간과 위치와 장소적 언약은 아브람 언약 안에서 '가나안 지경'으로 지목돼 가시적으로 명시됨을 봅니다(창12:5-7, 13:14-15, 15:18-21). 그렇습니다. 구속사 진행의 점진적 계시성에 비추어 볼 때 가나안은 점진적 계시의 초보단계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예비적이며 예표적인 장소로 기능합니다. '바다, 공중, 땅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왕적 통치권의 언약은 아브람의 후손에게서 '열왕'이 좇아 나올 것에 대해 약속함으로 신정적 왕권의 성취를 구체적으로 보장합니다(창17:6). 그러나 역사적 이스라엘의 열왕과 저들의 왕조(王朝) 또한 영속적이지 못한 것으로 판명됨으로써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열왕의 이면 속에 감추어진 종말론적 왕의 실체를 지향하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는 이상의 사실들을 통해 처음 아담과 노아 언약 안에서 암시적이고 묵계적이며 집합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났던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아브람에게 이르러 보다 구체적이고 가시적이며 개인적으로 전환되고 발전된 내용을 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후 아브람 언약은 구약의 이스라엘의 전(全)역사를 통해 점진적이고 구체적이며 명시적으로 진행되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경륜에 있어서 늘 제반 언약의 기초와 근간으로 기능하게 됨을 봅니다. 2)아브람 언약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창12:4-20) 하나님의 소명과 언약을 받은 아브람은 아내와 일행을 인솔해 하란을 떠납니다(창12:4). 이때만 해도 아브람은 오직 말씀을 좇아 하란을 떠났을 뿐, 자신들의 여정이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신약의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람의 여정을 해석하면서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믿음으로 길을 떠났다고 기록합니다(히11:8).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와 은혜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가 임했을 때, 하나님의 백성이 취할 도리가 어떠해야 함을 아브람의 경우를 들어 창세기 저자는 성경 독자들에게 시사합니다. 따라서 이를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1)가나안 땅 도착(창12:5-9) 하란을 떠난 아브람 일행은 하나님의 인도를 좇아 무사히 가나안 땅에 도착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들의 가나안 도착이 하나님의 주도적인 섭리와 간섭과 인도함의 결과임을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5절)'라는 표현을 통해 시사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가나안을 목표 삼아 아브람 일행을 인도하셨다는 지적입니다. 처음 그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정착할 당시 아브람은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즉각적인 순종의 믿음을 발휘해 말씀을 좇아 나섰습니다. 선택적 은혜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역사의 손길이 아브람을 우상숭배의 가문(수24:2)과 도시로부터 구출해 하나님의 구속사를 운반하는 계시의 수납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성도의 반열에 오른 우리의 우리 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에 기인할 뿐입니다. 우리의 공리적 행위의 대가로 지불된 보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익한 종의 심정으로 복음의 평생 빚진 자의 심정으로 감사해서 일생 종노릇 할 뿐입니다. 아브람 일행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세겜에 머무를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현현하십니다. 그리고 이 땅 곧 가나안을 아브람 후손에게 주실 것을 재차 확인하십니다. 아브람은 이를 믿음으로 받고 이에 대한 응답으로 단을 쌓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아브람이 벧엘에서 단을 쌓고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린 사건을 통해 예배의 진정한 의미와 본질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예배란 하나님을 향해 기원(祈願)적이며 기복(祈福)적인 차원에서 드려지는 지성감천주의적 신앙행위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베푸신 선(先)은혜의 사실에 감사함으로 드리는 보답(報答)과 보은(報恩)의 행위인 것입니다. 아벨의 제사에 담긴 내용이 그랬습니다(창4:4). 홍수심판 후 노아가 번제로 드린 제사의 성격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드려졌습니다(창8:20). 심판으로부터 은혜로 구원해 주신 사실에 대한 감사의 보답으로 말입니다. 신약의 교회시대에 무상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마땅히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의 본질 또한 동일한 원리 하에서 드려져야 한다고 신약의 기자들은 한결 같이 진술합니다(요4:23-24, 롬12:1). 이렇게 해서 아브람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 안에서 자신의 삶이 차착(差錯)없이 경영되어 나가는 것을 확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전 우주적 구속의 경륜에 자신의 생애가 철저하게 접촉돼 이끌림을 받고 있음을 믿음으로 수납하게 됩니다. 이것이 계시 의존적 신앙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앙의 근거로 삼고 생명의 법칙으로 삼아서 어떤 열악한 환경가운데서도 인내하면서 요동치 않고 시종일관하게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자세 말입니다. 오늘날 성도의 참 된 신앙의 정체성이 이런 데서 찾아집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선(先) 언약 - 후(後) 성취'의 방식으로 아브람의 생애를 섭리적으로 주관하시는 것을 통해 아브람의 믿음을 점진적으로 성숙시켜 나가십니다. 아울러 아브람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어김없이 성취되는 것을 확인하며 범사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섭리 의존적 신앙으로 자라갑니다. 아브람은 이런 실질적인 신앙 경험을 통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지식(神知識)과 신관(神觀)에 더욱 깊이 접촉되게 됩니다. (2)아브람의 애굽피신(창12:10-20) 가나안 땅에 기근이 찾아옵니다. 아브람과 일행은 기근을 피해 남방에 있는 애굽으로 피신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의 처사입니다. 더욱이 아브람은 미모의 아내 사래로 인해 자신의 신변의 안전을 염려한 나머지 누이라고 속이는 치졸한 불신의 행동을 저지릅니다. 한 순간에 믿음이 추락하는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어느 때 실족할 지 모르는 것이 우리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 안에 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고전15:10). 그렇습니다. 성도의 신앙은 항상 점진적인 상향곡선만을 그릴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여정 속에 도사리고 있는 예측할 수 없는 여러 가지 환경적인 요인으로 해서 늘 일정한 믿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만은 없습니다. 등락이 있고 굴곡이 있게 마련입니다. 성경 속의 여러 믿음의 선진들의 생애 속에서도 얼마든지 이런 연약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담이 그랬습니다. 노아, 롯, 모세, 다윗과 솔로몬, 베드로 등등 그들도 우리네와 성정이 같은 자들로서 특별히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쩌면 성도의 신앙적 실패는 철저하게 우리의 무지와 무능, 연약과 부족을 절감하게 함으로써 자기를 부인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의 도우심을 구하는 대로 나아가게 하는 최선의 교육적 효과로 작용하곤 했습니다. 아브람의 경우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브람은 처음에 여호와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계시 의존적인 믿음을 가진 채 고향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직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을 발휘해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방향을 좇아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감사함으로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까지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이후의 가나안의 삶의 여정도 언약을 신실하게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을 통해 철저히 간섭하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해 주실 것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식언치 않으시고 일구이언(一口二言)하는 분이 아니시기에 말입니다(민23:19). 아브람 일행은 가나안 중심부인 세겜과 벧엘 지경으로 들어온 후에 거기에서 단을 쌓고는 점점 남방으로 이주해 갔습니다. 얼마의 기간이 흘렀는지 성경은 그의 가나안 이주 후의 기간에 대해 침묵합니다. 그러던 차에 가나안 지경에 기근이 찾아옵니다. 이런 경우를 오늘에 비유한다면 성도의 신앙생활에 예기치 않던 핍박이나 시련, 또는 혹독한 시험이 찾아온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잠잠히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의지함이 승리의 비결입니다(시121:1-3, 146:1-5). 언약적 징계의 수단으로 주어지지 않는 한에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고난과 시련은 연단의 의미가 있습니다. 영적 성숙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주시는 훈육적인 목적이 담겨 있기가 십상입니다. 아브람 일행을 가나안까지 선히 인도하신 하나님이시라면 그 이후의 아브람의 생애를 당신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지속적으로 주관하시는 가운데 남은 약속도 성취시켜 주실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 가운데서 부르신 자들에게는 모든 일을 합력해 선을 이루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적 방식이기 때문입니다(롬8:28). 아브람은 이 점에 유의했어야 했습니다. 환경에 매이지 말고 환경을 주장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을 발휘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 아브람은 실패했습니다. 인내와 믿음으로 기근의 고난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을 지는 몰라도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으로 잠잠히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급기야 아브람은 기근을 피해 애굽 행을 결의합니다. 시련 앞에서 영적인 분별력과 통찰력을 잃은 채, 단지 육신의 소욕을 좇아서 하나님의 처소인 가나안에 남기를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처소(가나안)에서 잠시 고난받기를 세상(애굽)에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어야 했습니다. 여호와 중심의 신앙의 본질이 이런 것입니다. 옛 사람에 대해서는 철저히 죽고 새 사람의 인격과 품성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성도들입니다. 이제부터는 천상의 도성을 향해 나그네와 행인의 심정과 신분으로 순례자의 길을 걷는 것이 성도의 남은 지상적 삶의 성격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일이 일방통행 식으로 인간의 현세적 행복과 안녕, 세속적 소원성취와 성공추구를 위해 수단과 방편으로 작용하게 될 때,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은 공허한 자기위안의 변명 밖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신앙적 고난을 인내로 감수할 때 이는 영적 성숙의 척도로 작용한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약1:2-4). 아브람의 영적 침체와 실패는 단지 가나안을 등진 것만이 아닙니다. 애굽의 바로 왕 앞에서 아내 사래로 인해 야기될 수도 있는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아내를 여동생으로 가장시킨 데서 그의 추락된 믿음의 한계를 보게 됩니다. 아브람 일행이 애굽에 도착하자 염려했던 대로 바로의 대신들이 사래를 애굽 왕 바로에게로 인도합니다. 바로는 사래를 후처로 삼고자 합니다(19절). 일대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바로가 사래를 아내로 맞이한다면 아브람에게 주신 자손 언약의 실현은 취소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파기의 위경에 처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이 일에 개입하십니다. 바로와 그 집에 재앙을 내리십니다(창12:17). 어떤 재앙인지는 성경이 침묵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임한 재앙이 사래의 연고로 말미암은 것임을 아는 것으로 미루어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이 있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래는 결코 바로의 아내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래는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신 신적 기원의 언약이 성취돼야 하는 언약의 통로로 이미 예정되었기 때문입니다(창12:2, 17:15-19, 21:1-2). 그러기에 만일 사래가 바로의 아내가 될 경우 그것은 아브람 언약의 파기를 의미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신적 언약의 특성상 이런 일은 절대 불가능한 처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서둘러 바로의 일에 개입하신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사래는 어떤 방식으로라도 바로의 손에서 안전하게 구출돼야 합니다. 아브람의 씨를 잉태해야 하는 아브람 언약의 동반자(창17:15-16)이기 때문입니다. 바로는 이 일로 아브람을 불러 크게 책망합니다. 그러나 단지 책망으로 끝납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왕을 기만한 죄로 죽음까지라도 감수해야 할 판입니다. 그런데 바로 왕은 책망으로만 그치고 즉시 애굽을 떠날 것을 종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래의 일로 바로에게 내린 재앙이 너무나 크고 두려웠기 때문입니다(창12:17). 이때 사래를 아내로 맞아드리려는 일과 관련해 사례물(謝禮物)로 주었던 수많은 가축들과 노비와 은금을 함께 보냅니다.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련의 사건 진행을 통해 이 일에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로 깊이 개입하고 계심을 쉽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적극적인 간섭하심이 없었다면 사태의 정황으로 보아 이 일이 그렇게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 속에 담긴 구속사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은 아브람의 거짓되고 불신앙적 행동에 대해 바로의 책망을 통해 부끄럼을 당하게 하심으로 징계하십니다. 죄는 용서받을 수 있으나 죄 값은 지불해야 함이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입니다. 둘째, 아브람의 신앙적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계시해 주십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만일 바로가 사래를 아내로 맞이했다면 아브람의 언약의 성취는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래가 아이를 갖는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아브람의 자손인지의 여부를 확인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 따라서 아브람 일행을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개입과 간섭하심으로 바로 왕의 집에 재앙을 내리시는 가운데 바로의 손에서 무사히 구출하신 사건은 아브람에게 주신 언약을 신실히 성취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확인됩니다. 넷째, 이런 사실은 아브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을 더욱 확고부동하게 붙잡고 의지해야 한다는 여호와 신앙의 당위성과 믿음의 상승 효과를 갖게 하는데 유효하게 작용했습니다. 때문에 본 사건은 아브람의 영적 실패보다는 언약을 신실히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의 부성애적 사랑에 계시의 초점이 맞춰져야 합니다. 다섯째, 동시에 당시 대 제국인 애굽의 바로 왕까지도 임의대로 주관하심으로 천지의 주재가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지식과 보다 온전한 신관에 접촉되는 기회로 작용하기에 이릅니다. 세상역사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식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기계시서로 성경을 주심은 하나님을 알고 믿되 성경에 계시된 지식의 체계를 좇아서 하나님을 정당하게 인식해 신앙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배려의 일환입니다(딤후3:15-17, 요5:39, 롬10:2-3 요삼4). 이는 타락한 인간의 종교심의 발로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나름대로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신앙은 인간의 거짓되고 부패한 본성상 자의적 숭배 신앙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바, 필연적으로 우상숭배에 접촉될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바르고도 깊은 신지식의 여부는 참되고 성숙한 성경적 신앙을 가늠하는 척도로 기능합니다. 3) 롯과의 결별을 간섭하시는 하나님(창13장)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과 인도하심으로 마침내 아브람 일행은 바로의 손에서 안전히 구출돼 가나안에로의 귀환 길에 오릅니다(창13:1).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 벧엘에 이릅니다. 이 곳은 하란에서 출발해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동일한 장소이기도 합니다(창12:6-8). 창세기 저자는 아브람 일행이 애굽에서 올라와 벧엘에 이르렀을 때도 그전과 동일하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기술합니다(창13:3-4). 이는 영적 침체와 불신앙에 빠졌던 아브람의 믿음이 새롭게 회복됐음을 의미함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람의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열심은 마침내 아브람 일행을 약속의 땅 가나안에로 다시금 인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과 도리로 삼아 절대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열악한 상황과 환경을 넉넉히 극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이 때를 좇아 성취되는 것과 관련해서 성도에게 인내가 요구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믿음의 인내는 하나님의 뜻의 궁극적 성취를 맛보아 체험하는 척도로 작용합니다. (1)아브람과 롯의 결별(창13:1-13) 애굽에서 돌아온 아브람과 롯 일행은 중다한 가축과 소유의 넉넉함으로 인해 목자들 간에 잦은 불화가 야기됩니다. 한 지역에 동거하기에는 허락된 땅이 비좁았습니다. 거기에 더해 가나안 원주민과도 이웃해 살아야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됐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한 제안을 내어놓습니다. 목자들 간에 다투게 말고 서로의 편의를 위해 헤어지자는 제안입니다. 이때 우선권을 롯에게 양보합니다. 저자는 이런 사실을 "네가 좌 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 하면 내가 좌 하겠노라"는 아브람의 설명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은 이런 아브람의 제안이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단순한 호의나 배려차원의 아량(雅量)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을 적극적으로 신뢰한 데서 나와진 구속사적인 결단이며 믿음의 확신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람은 지금 자신의 전(全)생애가 '아브람 언약'에 근거해서 철저히 하나님의 인도와 통치를 섭리적으로 받고 있음을 전인격적으로 수납해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더욱 구체적으로 확증시켜 준 사건이 다름 아닌 바로 왕으로부터의 구출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종전까지의 하나님에 대한 아브람의 신지식을 배가시켜줬을 뿐 아니라 계시 의존적이고 섭리 의존적인 신앙관을 나름대로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사건인 것입니다. 따라서 설령 롯이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적합한 땅을 선점(先占)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초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의 지경을 차질 없이 주실 것에 대한 믿음의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진전된 믿음의 분별이며 성숙한 계시적 안목인지요. 이렇게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영적 연약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를 선용하시는 가운데 그의 믿음을 보다 성숙되고 견고하게 인도해 가심을 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은 구원에 대한 성도의 견인교리를 지속적으로 보증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합니다. 성도의 위로와 소망이 이에 있습니다. 이 크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찬양합니다. 마침내 롯은 현실적인 필요를 좇아서 요단의 넓은 들판을 택합니다. 후에는 소돔과 고모라 지역까지 확대시키며 거주지경을 넓혀갑니다. 저자는 창13:13에서 당시 소돔사람들의 이미 죄악에 깊이 빠져 있었음을 고발하는 것을 통해 롯의 결국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은연중 암시합니다. (2)롯과의 결별의 당위성 창세기 저자는 롯과 그 일행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음을 기록합니다(창13:14). 이는 롯과의 결별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실은 처음부터 아브람 언약의 전제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야 하는 것"(창12:1)에서 그 정당성이 찾아집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을 때부터 아브람은 가족들과의 관계까지도 극복해야 했습니다. 신약에서 복음서 기자들은 한결 같이 제자도를 언급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주님을 온전히 섬기기 위해서라면 가족간의 관계마저도 극복해야 할 것에 대해 당부합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람 언약 속에 담긴 하나님의 요구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의 부친 데라는 도중에 하란에서 생을 마쳤으며, 이제 롯 마저도 아브람의 곁을 떠남으로 명실공히 하나님의 언약이 막힘 없이 아브람을 통해 진행될 수 있는 필요충분 조건이 성숙된 것입니다. (3)아브람 언약의 재확인(창13:14-18) 창세기 저자는 롯이 아브람 곁을 떠난 것과 때를 같이 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사건을 대비적으로 기록합니다(창13:14). 이는 이 사건에 하나님께서 깊이 개입하셨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롯은 처음부터 아브람 언약의 정당한 수혜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이미 회복된 영적 통찰력으로 예상했던 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향해 가나안 지경을 동서남북으로 둘러 보이시면서 보이는 땅을 아브람과 그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실 것임을 재확인하십니다(15절). 후에 창1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땅 언약의 내용을 보다 세밀하게 확인해 주십니다. 곧 남으로는 애굽 강에서부터 북으로는 큰 강 유브라데까지로 보다 구체화시켜 명시해 주십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이 지경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들의 이름까지 거명해 주심으로 땅 언약부분을 갱신해 주십니다(창15:18-21). 이런 사실은 창12:2-3을 통해 주신 아브람 언약의 재확인인 동시에 보다 진전된 내용으로의 갱신이며 발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의 성격을 '점진적'이라고 설명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언약적 계시의 내용과 의미에 있어서 보다 명확해지며 구체화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브람은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 드립니다. 이는 구원받은 언약백성으로서 성도의 전 생애가 예배적 삶으로 특징지어져야 함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롬12:1). 4)가나안 정착과 아브람의 전투(창14장) 아브람은 애굽에서 나온 후 이내 롯 일행과 헤어집니다(창13장). 롯은 많은 가축의 사육의 필요성을 좇아서 가나안 남방의 요단 들과 소돔지역을 거처로 삼아 정착합니다. 롯이 떠난 후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현현하십니다. 그리고 가나안 일경을 아브람의 자손에게 줄 것을 재차 확증시키십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들을 통해서 얼마나 하나님의 부성애 적인 열심이 아브람의 생애를 언약에 근거해서 적극적으로 간섭해 가시는지를 생생히 목격하게 됩니다. 이런 내용을 통해 오늘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동일하게 언약 안에서 시종일관하게 통치하시며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섭리적으로 간섭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성도의 삶이 환경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절대 안전하게 보장됨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성경에서 염려와 근심과 불안을 떨쳐 버리라고 권고하시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서 나와집니다. 때문에 성경적 믿음은 억지와 강요가 아닙니다. 믿을만한 증거를 먼저 주시고 믿기를 요청하심이 성경적 접근방식입니다. 무조건적이 아닙니다. 순리적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합리적이기도 합니다. (1)가나안 전쟁 아브람이 가나안에 정착한 당시의 주변 정세는 그리 평화롭지가 않았습니다. 북방의 강대국이 가나안의 연약한 현지 족속들을 지배하며 조공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때 마침 가나안 남방의 5개 족속 왕들이 연합해 저항을 시도합니다. 이런 결과로 북방의 4개 강대국이 연합해 가나안 남방의 5개 왕들에 대한 진압에 나섭니다. 이런 와중에 롯이 사로잡혀 갑니다. 아브람이 이 소식을 듣고 이들을 쫓습니다. (2)롯을 구출한 아브람 아브람은 사병 318인을 대동하고 가나안 북쪽 단까지 저들을 뒤쫓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창세기 저자는 아브람이 가나안에 정착해 이미 어느 정도의 세력을 확보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언약성취의 일환으로 아브람 일행의 가나안 땅 정착이 부분적이나마 실현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사실 표면상으로만 비교한다면 이 전투는 무모하기 그지없는 전투입니다. 잘 훈련된 4개국 연합군과 일개 사병(私兵) 318명과의 전쟁은 가당치도 않은 전력의 비교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이 이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은 단순히 조카 롯에 대한 연민의 정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브람은 이미 애굽 왕 바로로부터 자신을 건지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음으로 간직하고 있는 터였습니다. 자신의 생애가 이미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간섭과 인도와 다스림을 받고 있음을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철저히 의지하는 가운데 담대히 저들을 뒤쫓을 수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아브람 일행은 야음을 틈타 저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해 전투를 승리로 이끕니다. 롯을 비롯해서 약탈당한 재물과 잡혀간 많은 부녀와 인민을 구출해 옵니다. (3)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 전쟁에 승리한 수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이라는 하나님의 제사장을 만납니다. 그를 통해 이번 전투의 승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확인 받게 됩니다. 아브람의 믿음은 한껏 고조됩니다. 그리고 전쟁을 승리로 이끄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을 통해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는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로 왔음을 인정하는 헌상의 의식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과 간섭하심이 자신과 늘 함께 함을 확인할 때마다 아브람의 신앙과 계시적 통찰력은 더욱 성숙해 갑니다. 이런 사실이 소돔 왕의 전리품을 감사의 사례물로 받지 않고 기꺼이 거절하는 내용을 통해서도 명확히 확인됩니다(창14:23). 그렇습니다. 만물과 만사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의 창조자적 주권과 섭리를 떠나 스스로 존재하며 활동하는 피조물은 있을 수 없음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심지어 미물 같은 참새 한 마리의 죽음까지도 하나님께서 좌우하십니다(마10:29). 오늘 우리에게 이런 섭리적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의 손길을 믿음으로 수납하는 곳에서 여호와 중심의 신앙은 깊이 뿌리 내리게 됩니다. 실로 애굽 왕 바로의 손길에서 구출해 주신 사건과 가나안 북방 4개국 연합군을 섬멸한 사건은 아브람으로 하여금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신실성과 전능성을 전폭적으로 신뢰케 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어쩌면 그 동안 귀로 듣기만 하던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뵙는 듯 한 살아있는 신앙에 접촉된 경우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욥42:5). 지금까지 아브람의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성숙된 믿음의 경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육체의 연약한 한계를 벗지 못하는 한 성도의 신앙자세는 점진적이며 동시에 기복(起伏)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5)횃불 언약식(창15장) 저자는 창15장을 기록하면서 아브람에게 현현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우리가 15장의 도입부분을 읽으면서 언뜻 주목하게 되는 대목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곧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신 부분 말입니다(1절). 특별히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방패'와 '상급'이 되신다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에서 방패는 전쟁과 관련된 용어이며 상급은 약속과 관련된 용어임을 문맥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무언가에 두려워하고 있으며 동시에 염려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시고 이렇게 아브람을 위로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무엇을 염려하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그를 안정시키며 위로하시는 것일까요? 먼저 아브람의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지금 아브람이 무엇인가에 두려워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 이렇게 위로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방패라는 단어와 관련해 추정해 볼 때 전쟁에 대한 일말의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전쟁에 대한 염려와 불안에서일까요? 이는 다름 아닌 가나안 북방 4개국 연합군에 대한 두려움일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저들을 아브람의 손에 붙이신 연고로 대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서 평상심을 되찾은 아브람의 심정 한구석에서 저들의 재침략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이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은 내적 감정의 변화에 따라서 그리고 외적인 상황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얼마든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성도의 신앙은 우리의 육체적 연약상 이렇게 내적이며 외적인 요인에 따라서 얼마든지 기복(起伏)적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전쟁의 재발에 대한 두려움과 연약함에 빠져있는 아브람을 격려하시고 위로하시기 위해 주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위로의 하나님으로서 치료의 하나님으로서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자애스러운 부성애적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셔서 눈동자와도 같이 돌보아 주신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온갖 위경(危境)과 사냥꾼의 올무에서 넉넉히 건지신다는 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앞으로도 한결 같이 환난 중에 피할 우리의 반석이시며 요새이시며 방패와 산성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시18:1-2). 다음으로 살펴볼 부분은 아브람의 '상급'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내용입니다. 아브람은 비록 가나안에 정착함으로써 땅 언약이 자신에게서 부분적으로나마 성취되고 있음을 신앙으로 고백하면서도 그의 보다 큰 관심은 자손언약의 성취에 집중돼 있음을 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이런 자신의 심경을 토로합니다. 자신은 늙고 아내 사래는 불임녀임으로 자연적인 방법으로는 출산의 길이 이미 막힌 것을 전제하고 아브람은 자신의 충복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아달라고 호소하기에 이릅니다(2-3절). 믿음의 눈이 아닌 이성적인 눈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판단하는 내용입니다. 아브람은 상급이 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이를 상속자와 결부시킵니다. 자신은 사래에게서 자손을 얻을 수 없으니 대신 가신(家臣)인 몸 종 다메섹의 엘리에셀을 언약의 계승자로 삼아달라는 탄원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단호히 아브람의 제의를 거절하십니다(4절상). 대신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로 언약의 자손을 삼겠다고 확약해 주십니다(4절하). 이는 아브람의 친자식이 아브람 언약의 계승자가 될 것에 대한 약속의 재천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의 성취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를 '하늘의 뭇별 같이 많게 될 것'을 비유로 삼아 확증시켜 주십니다(5절). 이때 아브람은 이 말씀을 신앙으로 수납합니다. 지금까지의 일말의 염려를 말끔히 불식시켜 버립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라고 여겨 주십니다(6절). 그렇다면 방금 전까지도 자손 언약의 성취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몸종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아달라고 탄원했던 아브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인 믿음의 반응을 보일 수가 있었을까요? 이는 다름 아닌 자신에게 이미 예비적으로 이루어진 땅 언약에 대한 성취의 확신으로부터 나와진 반응입니다. 다시 말해 땅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 자손 언약도 동일하게 주셨는데, 땅 언약이 이미 선취적으로 자신에게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자손 언약도 분명히 성취되지 않겠느냐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의의 근거가 됨은 본질적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동일한 결과에 도달하는 바,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컫는 것이 이런 신학적 상응성의 원리에서 나와진 결론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땅 언약에 대한 확실한 보증을 요구합니다(8절). 이는 불신의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절대적이고 적극적인 신뢰의 표식이 됩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끼리 사랑의 징표로 같은 모양과 색깔의 커플링 반지를 만들어 끼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이의 응답으로 '횃불 언약식'을 체결해 주십니다(9-17절). 이는 언약의 성격상 이미 맺으신 아브람 언약을 신실히 성취하실 것에 대한 일종의 맹세적 의미가 담긴 의식입니다. 쪼갠 짐승의 사이를 타는 횃불이 지나가게 하시는 상징적 방법을 통해 자신의 약속을 계약체결의 방식으로 날인해 주신 것입니다. 이제 땅 언약의 성취는 불가피합니다. 만일 성취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쪼갠 짐승같이 죽으셔야 할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있을 수 없는 일을 근거로 언약의 필연적 성취를 보증해 주신 것입니다. 횃불 언약식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브람 후손이 이방의 객이 될 것입니다. 아브람 후손은 사 백년 동안 종살이를 할 것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그 나라를 징계하실 것입니다. 아브람 후손은 사 백년 후에 큰 재물을 갖고 나오게 될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 날을 보지 못하고 장수하다가 편안히 장사될 것입니다. 아브람 후손은 결국 사 백년 후에 가나안으로 다시 귀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의 진행은 다른 한편 아모리 족속의 죄악의 관영함에 때를 맞추어 집행하게 될 것입니다. 이상이 횃불 언약식을 통해 주신 언약의 세부 내용입니다. 이 언약의 구체적 성취는 후에 요셉의 생애를 통해 극적으로 진행됨을 보게 됩니다. 한편 아모리 족속의 죄의 관영함의 때와 아브람 후손의 가나안 귀환의 때를 의도적으로 일치시키는 상관관계가 무엇인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 언약에서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횃불 언약식에서 나타난 내용을 보면 가나안에로의 귀환시기가 아모리 족속으로 대표되는 가나안의 죄가 관영한 때와 일치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창15:16).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죄의 관영'이 가져오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성경 신학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죄의 형벌로서 심판'입니다. 노아 시대의 보편적인 사회적 특징이 죄의 관영함으로 설명됩니다(창6:5). 소돔과 고모라의 특징 또한 죄악이 심히 중대함으로 묘사됩니다(창18:20). 그리고 이런 결과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함을 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즉 아브람 후손의 가나안 귀환을 아모리 족속의 죄의 관영함의 때에 맞춘 것은 가나안을 대표하는 아모리 족속의 관영한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자의 자격으로 아브람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삿1:4-7). 이런 사실은 아브람의 후손이 가나안의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선용돼 가나안을 징벌하는 정당성을 부여받는 동시에 아브람 언약의 성취로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되는 명분도 취하게 됩니다. 6) 이스마엘 출생(창16장) 이때쯤 아브라함 부부는 하란을 떠나 온지 거의 십 여 년 가까이 돼 가는 즈음입니다. 다시 말해 자손언약의 성취를 십 년 가까이 기다려 왔던 것입니다. 땅 언약의 성취가 부분적으로 자신들의 생애를 통해 성취되는 것을 체험하며 더욱 자손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간절해 졌습니다. 아브람이 자신의 충복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겠다고 하나님께 하소연했던 배경이 이에서 나와집니다. 이에 하나님은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를 통해 언약의 자손을 주시겠다고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사래는 처음부터 불임녀였습니다(창11:30). 때문에 사래는 하나님의 자손언약의 성취가 자신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간파했습니다. 지극히 자연적이고 상식적인 결론입니다. 그러나 자손에 대한 열망은 그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의 손길을 기다리기보다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을 통해 자식을 얻기를 갈망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을 앞지른 전형적인 실례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자주 이런 경우가 발생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지만 하나님의 고유하신 방식을 취하심을 그 특징으로 삼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스스로 주도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결코 스스로 자랑할 수 없음이 이에 근거합니다. 성도는 사역의 주체가 아닙니다. 그의 생애가 도구로 선용될 뿐입니다. 사래는 아브람을 권해서 여종 하갈을 취할 것을 강권합니다(2절상). 그러나 사래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다고 생각지 않았음에 틀림없습니다(2절하). 사래는 자신이 태생적으로 불임녀였기에 이런 방법을 통해 자식을 얻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풍습은 이런 행위가 전혀 부도덕한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로 언약의 후손을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창15:4) 아브람과 사래는 같은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이 일에 합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은 '아브람의 몸에서 날 자'라는 말을 오해했습니다. 아브람의 자녀이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아브람과 사래 부부를 통해 날 자'라는 의미였습니다(창17:16, 19, 21, 18:14, 21:1-2). 실로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과 경험을 뛰어 넘어 행동하십니다. 당신의 고유한 방식으로 구속사를 집행해 나가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에 말입니다. 성도의 신앙 생활에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이 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과 환경을 선용해 하나님의 뜻을 우리 안에서 성취해 가십니다(롬8:28). 성도의 총체적 삶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섭리적으로 통치와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신앙으로 고백하고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은 극대화되어 나타납니다. 참된 구원받은 삶의 실질이 이런 방식으로 표출됩니다. 이런 자들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는 능력있게 현시 될 것입니다. 7)아브람의 개명(改名)과 할례식(창17장) 아브람의 나이가 구십 구 세가 됩니다. 아브람을 하란에서 부르시고 언약의 머리로 삼으신지 거의 25년이 다가 옵니다. 명년이면 일 백세, 정확히 25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저자의 기록을 통해서 아브람이 백 세 되던 해에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얻게 됨을 미리 보아 알고 있습니다(창21:1-5). 이런 의미에서 창17장은 이삭이 출생하기 일년 전의 시점으로서 자연히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의미 있는 장이 됨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삭의 잉태와 출생을 암시하는 중요한 언약적 계시의 내용을 본 장에서 집중적으로 기록함으로 하나님의 자손언약 성취의 때가 가까웠음을 의도적으로 시사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99세 때, 즉 이삭을 주시기 일 년 전에 아브람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계시하시면서 완전히 행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십니다(창17:1).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현현하심은 그 자체에 특별한 목적이 내재돼 있음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는 사건의 성격상 바야흐로 이삭의 출생이 임박해 있음을 암시적으로 알리시는 신호입니다. 다시 말해 불임녀인 사래일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게 될 때 넉넉히 아들을 낳을 수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때문에 언약의 말씀을 믿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라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자손언약의 성취를 보다 확신시켜 주시기 위해 이번에는 아브람을 '아브라함', 곧 '열국의 아비'란 의미가 담긴 이름으로 개명해 주시기까지 하십니다(5절). 이는 아브람의 씨를 통해서 많은 나라와 민족이 나올 것에 대한 확약임에 다름 아닙니다. 아울러 사래의 이름도 사래에서 '사라', 곧 '열국의 어미'란 이름으로 개명해 주십니다(15절). 이는 자손언약이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를 통해 성취될 것에 대한 추인(追認)으로서 아브람 언약을 성취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 담긴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장면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과 사라는 개명된 이름에 걸맞게 그의 후손의 생육과 번성을 통해 열국의 아비와 어미가 될 것이며 이런 미래적 언약의 성취를 위해 이들 부부에게 곧 자녀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암시적 표현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개명(改名)은 자연히 언약 갱신의 단계로 넘어갑니다(6-8절). 아울러 본 절의 갱신된 언약 속에서는 자손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과 열왕이 출현할 것에 대해서도 확약해 주십니다. 이는 처음부터 확인한 바 아브라함 언약의 구속사적 본질이 하나님 나라의 실현임을 총체적으로 증거 함에 다름 아닙니다. 나아가 아브라함 언약의 성격이 '영원한 언약'이 될 것임을 확증시켜 주십니다. 이런 사실은 아브라함 언약의 궁극적 성취가 역사적 이스라엘의 한계를 지나쳐 종말론적으로 이루질 것에 대한 언약의 이중 구조성을 시사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신적 언약은 미래적이며 종말론적 성취의 이중성을 띠고 역사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바르게 해석하고 정당하게 적용하는 데 여간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하여튼 우리는 이곳의 갱신된 아브라함 언약을 통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신다'는 하나님 언약의 핵심사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아브라함 후손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보다 발전된 언약적 계시의 내용 말입니다(8절). 이는 성경에 계시 된 신적 언약 속에 담긴 동질성과 연속성을 감안할 때,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언약식을 체결하실 것을 미리 내다보시며 주신 말씀과 맥을 같이 합니다(출19:5-6). 결국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되는 사건의 종말론적 성취를 의미합니다(렘31:33, 겔36:28, 37:23, 계21:3). 이런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적으로 성취된 임마누엘 사상의 최종적 실현과 성취에 합일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마1:21-23). 성도의 신앙의 궁극적 목적이 이를 위함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8:33). 이렇게 해서 후에 역사적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선민으로 편입되는 은혜의 보장을 받게 됩니다. 성도가 은혜로 받은 구원의 성격이 이렇습니다.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의 개념이 이런 데서 나와집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이들 부부에게 결정적인 언약적 계시를 수여하십니다. 곧 자녀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명년 이맘 때 그것도 불임녀인 사라를 통해서 말입니다(창17:16, 19, 21). 25년간 기다렸던, 그래서 이 일로 인해 실수도 여러 차례 범했던 그 약속의 자녀를 드디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이름까지도 미리 작명(作名)해 주십니다. '이삭'이라고 말입니다. 이는 신적 기원에 의해 태어날 계시적 인물이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이삭은 아브라함의 언약 성취의 계승자이며 아울러 여자의 후손 언약을 성취할 구속사 진행의 '거룩한 통로'가 될 자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신적 기원에 근거해 출생한 자녀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중차대한 사역을 담당하는 자들로 지명되고 있습니다. 이삭에 이어 야곱 또한 하나님의 섭리적 간섭하심으로 차남이 장자 된 언약의 계승자입니다. 그의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개명된 내용의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직접적인 머리가 됩니다. 세례 요한의 이름을 태어나기도 전에 주신 의미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해 미리 보내심을 받은 선구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또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언약(창3:15)과 관련 된 구속사적 인물의 총화이시며 동시에 당사자이십니다. 마리아는 천사를 통해 아기 예수님의 수태 고지를 받는 가운데 예수라는 이름을 동시에 접수합니다(눅1:30-31).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란 의미입니다(마1:21). 하나님은 일방적이고 선택적인 은혜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이제 아브라함에게 언약적 표징으로 할례를 행할 것으로 요구하십니다(창17:9-14). 이는 포경수술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 된 표를 몸에 지니는 실제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할례를 받은 자는 이후의 삶을 철저히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과 자각을 가지고 살아갈 책임이 주어집니다. 율법을 주신 이유도 원리적으로 동일합니다. 율법은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 된 이스라엘이 세상 열국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 된 정체성을 드러내고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과의 각별한 교제를 정상적으로 유지하게 하는 유일무이의 행동규범이며 자율적 순종을 촉구하는 보호적 장치입니다(은혜의 복음 안에서 믿음과 행함의 불가분리의 관계성의 원리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할례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어기게 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깨지고 결과적으로 언약적 징계가 뒤따릅니다. 언약적 징계로부터의 회복을 위해 모세 언약은 제사제도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지속적인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정상적인 교제와 관계유지를 위해서 말입니다. 신약의 기자는 할례를 육적 몸을 벗는 것으로 해석함으로 옛 사람과의 관계 단절 및 새 사람으로의 전인격적 전향을 뜻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징표인 세례(침례)로 연결시킵니다(골2:11-12). 아브람과 일행은 하나님의 명을 좇아서 할례를 실시합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람과 가신들 또한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자신들의 몸에 지니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의 외적 표식으로 받는 그리스도인의 신약적 세례는 단순한 종교적 성례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흔적을 자신의 몸에 간직하고 옛 사람과의 모든 관계를 철저히 청산한 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인생의 최고의 목표로 삼아 전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 사람의 삶을 살아가야 할 자로 거듭난 자임을 공증하는 예식입니다. 이런 신학적 원리 속에서 바울의 갈2:20의 고백이 나와진 것입니다. 곧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란 성령의 내주와 간섭하심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삶을 의미하며 이는 동시에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섭리 의존적인 믿음 안에서의 삶을 가리킵니다. 8) 사라를 찾아오신 하나님(18장) 지금까지 하나님의 현현하심은 주로 아브라함과 대면을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창세기 저자는 기록합니다. 그런데 본 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동시적으로 찾으시며 특별히 사라와의 면담을 요청하심을 봅니다. 사라의 불임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염려와 불신을 말끔히 씻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부성애적 자애스러운 심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마치 어린 자녀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부분을 인내와 사랑의 심정을 갖고 자초지종을 설명해 이해시키려는 부모의 자상한 심정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그 분은 죄에 대해서는 준엄하시지만 동시에 자신의 아들을 희생해 우리를 구원하실 정도로 사랑이 풍성하신 분입니다. 바로 육신의 아버지에게서 발견되는 그림자적 이중의 성품을 통해 하나님의 부성애 적인 실제적 속성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본 장에서 하나님께서도 사라에게 자녀의 잉태 소식을 전하시기를 기뻐하심을 봅니다. 그래서 사전에 준비시키시려는 깊은 배려의 마음을 읽게 됩니다. 사라의 태를 일찍이 닫으심도(창16:2, 11:30) 바로 이때를 위함임을 알리어, 하나님의 구속사의 진행이 오직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방식을 통해서만 성취됨을 알리어 철저히 하나님만을 신뢰케 하시려는 깊은 의도에서 나와진 처사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사라에게 자녀가 있을 것을 말하심으로 장막 뒤에 있는 사라에게 간접적으로 이 소식을 전합니다(10절). 사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한 나머지 겸연쩍어 하면서 믿기 어려움을 웃음으로 대신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적 연약함이 이런 데서 찾아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인간적인 경험과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데 이미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라의 심정을 환히 읽고 계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장막을 떠나시면서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14절)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라의 잉태는 필연적이며 동시에 신적 기원에 근거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직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을 발휘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착념하라는 권면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날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언약을 신실히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이심에 다름이 아닙니다. 성도의 구원의 삶이 절대 안전한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아니시기에 식언치 않으십니다. 일구이언하지 않으십니다. 그 분의 말씀은 생명의 원천이며 동시에 존재의 근원이 됩니다. 9)이삭의 출생(창21장) 창세기 19장(소돔과 고모라 사건)과 20장(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은 언약 안의 백성과 언약 밖의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극명한 양극단을 보여줍니다. 어떤 면에서는 언약 안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함이 언약 밖의 백성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징계의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그와 반대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생각은 정녕 사람의 생각과 다름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그랄의 왕 아비멜렉으로부터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하는 의도로 또다시 아내 사라를 누이라 속이는 죄를 하나님 앞에 저지릅니다(창20:2). 목축업을 하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남방의 그랄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음은 아마도 가축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이 지금 그에게서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으로 해서 그의 생애 중 최고조의 믿음의 수준과 영적 단계에 올라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짓으로 아비멜렉을 속임은 한 순간에 그들의 믿음이 추락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 주시지 않는 한, 스스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실로 착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해 그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진행해 나가시는 것이지, 결코 인간의 노력이나 도움이 하나님의 사역에 직접적으로 일조를 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성도의 세상에서의 신앙적 삶은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인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행17:28). 언약 백성으로서의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러한 엄청난 실수와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히려 아비멜렉의 가족의 태를 닫으심으로 사라의 순결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일말의 의혹을 사전에 차단시키심을 보게 됩니다(창20:17-18). 이 아비멜렉 사건에 하나님은 깊이 개입하시어 문제를 손수 풀어 가십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과거 애굽에서 그랬듯이(창12장) 많은 재물과 소유를 얻게 되고 아울러 그랄 지역 안에서 동거하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절대적인 개입과 간섭하심의 결과였습니다. 아비멜렉의 입장에서는 여간 불공평한 처사가 아닌 듯 싶었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편에 서서 그의 구속사를 집행시켜 나가시는 주권적 섭리를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아비멜렉 가정의 태를 열어 주심으로 언약 밖의 백성들에게도 일반은총 속에서 그들의 삶을 영위하도록 은혜를 베푸심을 봅니다. 이것은 나중에 이스마엘을 복 주시는 하나님의 배려하심을 통해서 보다 잘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지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그분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어 둘 사이에 막힌 담이 헐어져 버린 것입니다(엡2:14, 갈3:28-29). 이런 하나님의 전(全)구속사적인 경륜 속에서 창세기 21장은 창세기 전장을 통해서 가장 감동적이고 극적인 장면 중 한 부분을 소개합니다. 그것은 노령의 아브라함과 불임녀인 사라가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25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을 거쳐서 이제 잉태와 생산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저들의 몸을 통해서 마침내 언약의 첫 열매로서 이삭을 출산하게 된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신실하심'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은 그 근본과 동기를 철저히 하나님 자신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신 열심과 당신의 절대적 주권에 기초하고 있음을 드러내심에 다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호와이신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이 말의 핵심은 하나님은 언약하시고 그것을 신실하게 성취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의 거대한 민족으로 형성되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 출애굽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계시하심으로 이 말이 담고 있는 구속사적 의미를 밝히십니다(출6:2-9). 이제 처음 아브라함 언약(창12:1-3)과 아담에게 주신 여자의 후손 언약(창3:15)의 사실상 첫 자손(씨)인 이삭의 출생이 갖는 구속사적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비멜렉 사건으로 그 가족의 태를 닫으시는 비상 조치를 취하시게 됐습니다. 이것은 범상한 일이 아닙니다. 만일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다면 그 후에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인해 사라가 이삭을 낳게 되었다 해도 이삭을 약속의 자녀가 아닌 아비멜렉의 아들로 간주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만일의 사태를 고려해서 사라의 순결성을 보존하기 위해 사전에 아비멜렉과 그의 아내와 여종들의 태를 닫으셨던 것입니다(창20:17-18). 약속의 자녀들의 삶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인해 그 분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섭리되어지는 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한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성도의 실수와 실패까지도 선용하십니다. 약속의 자녀들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절대 안전하게 보장됨이 이런 이유에 기인합니다. 그 분은 절대로 당신의 자녀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방패와 상급이 되신다고(창15:1) 말씀하심으로 동일하게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같은 원리를 적용시켜 주고 계십니다. 이제 시련과 연단과 훈련의 시기가 다 지났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시기가 무르익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경륜을 세상 가운데서 펼쳐 나가실 때, 일정한 법칙을 좇아서 섭리해 가십니다. 그 분의 기뻐하시는 뜻 대로란 말은 임기응변 식이고 즉흥적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영원하신 목적에 따라 미리 예정하신 계획 대로란 뜻입니다. 그러기에 그 분의 섭리 진행은 한치의 오차나 실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일이 완벽하며 완전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진행의 제일 원칙은 '정해진 때와 시간'을 통해서 언약을 진행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인간 편에서 아무리 바쁘고 서두른다해도 하나님은 인간의 형편에 좌우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은 만물과 만사의 진행을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미리 정하시고, 역사 속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스스로 받으시며 인간의 세속 역사를 친히 주도해 가십니다. 그러기에 세상 역사의 의미는 인간 역사가 아니라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속사란 이유가 이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 진행의 현장이 세상이라는 의미에서 세상 역사는 구속사의 모태가 됩니다. 아기가 잉태되고 자라다가 출산하면 모태는 그 사명을 다한 것이 되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구속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최종적 완성과 성취에 이르는 날 인간 역사와 인간 통치의 세상은 그 대단원의 막을 영원히 내리게 될 것입니다(단2:34-35). 지금 이러한 인간 역사의 종말을 향해서 시간은 숨가쁜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영광을 실제로 목격할 날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시대에 오늘날의 성도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와 가치관이 과연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에 접촉돼 있음을 확인하며, 그 최종적 성취인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운반해 가는 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요. 이 하나님의 구속사적 역사 의식과 통찰력을 가지고 우리의 현실을 해석하고 거기에 맞추어 우리의 생애를 드려 살아감이 성도의 신앙적 삶의 본질이며 구원의 실제적 내용이 되고 있는지를 알고있는 것인지요. 성경은 이를 가리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마6:33). 성도의 신분과 소속을 성경의 계시적 안목을 가지고 정확하게 분별해서 거기에 걸 맞는 자로서의 삶을 부단히 살아가지 않는다면 구원의 참된 의미는 사실상 상실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성도의 지상적 삶의 내용이 성경적인 원리와 원칙에 비추어 해석되지 않는데서 자연 발생적으로 인간의 부패한 내적 종교심에서 발로된 자의적 숭배신앙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는 불법한 신앙으로 이미 판명된 사례입니다(마7:21-23, 왕상12:25-33). 이제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성취의 시기가 마침내 도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적 경륜의 때가 찬 것입니다. 25년이란 세월의 흐름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성취될 최적의 시기에 이른 것입니다. 25년의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은 막연히 시간이 낭비된 그런 무의미한 세월의 기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대적 경륜과 밀접하게 관련된 '정해 놓으신 때와 시한'인 것입니다. 다니엘 기자는 그의 다니엘 서에서 이런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과 연관해 작정하신 특별한 섭리적 기간을 가리키는 의미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단7:25, 12:7)라는 상징적 용법을 사용합니다. 단7:25에서 이 기간은 '작은 뿔'을 통하여 성도들을 연단시키는 하나님의 섭리의 시기임을 보여줍니다. 단12:7에서는 다니엘이 자기에게 계시된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성취되는 때를 알기 위해서 일정 기간을 기다려야 하는 '기다림의 기간'과 관련하여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은 하나님의 작정 안에 속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많은 구약적 표현법을 그의 요한 계시록에 인용하면서 동일하게 이런 특별한 용법을 발전시켜 사용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가 한 번 나타나고(계12:14), 계속해서 사흘 반이 두 번(11:9-11), 42달이 두 번((11:2, 13:5), 1260일이 두 번(11:3, 12:6)에 걸쳐서 사용됨을 봅니다. 이들 표현들을 종합해 보면 모두 '3.5'라고 하는 '상징'을 원리로 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이 3.5의 원리가 응용적으로 확대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개념의 도입으로 확대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작정하신 섭리적 기간을 표현합니다. 이제 창세기 저자는 이런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의 때가 이르러 이삭을 주실 시기가 다가 왔음을 가리키는 의도로 '말씀대로'와 '기한에 미쳐'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일을 철저히 주도하시며 이끄심을 강조합니다(창21:1-2). 그렇습니다. 역사의 진행은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의 절대 주권자이십니다(단4:17, 롬13:1-2, 출19:5). 그 분의 주권을 피해서 스스로 독립적으로 경영되는 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잠3:6). 그래서 성경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롬11:36).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만물(萬物)과 만사(萬事)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마10:29). 그런 의미에서 이삭의 출생은 하나님의 말씀인 언약에 기초합니다. '말씀대로'의 의미가 이런 것입니다. 바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셨던 약속대로 그렇게 '일년' 후(창17:19-22, 18:10-15)에와 '25년' 후에(창12:4, 창21:5) 어김없이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를 보게 됐다는 말입니다. 이삭의 출생은 이런 의미에서 단순히 한 노부부의 늦둥이로서의 의미를 훨씬 뛰어넘는 섭리적 사건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신적 간섭함이 연관돼 있는 계시적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75세 때 이미 자손 언약을 받았습니다(창12:1-3). 이제 100세가 되면서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신실히 이행하신 것입니다. 그 동안 아브라함 언약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재확인되며 갱신되며 구체화되어지는 절차를 밟아왔습니다. 이런 상황가운데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여러 번 불신앙과 실패와 죄악 된 일에 빠지고 연루되는 부끄러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러한 연약함과 무관하게 아브라함과 주변의 상황을 주관하시는 가운데 결국 아브라함 언약을 성취하시기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바라보면서 몇 가지 사실을 유의하게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의 언약 백성을 버리지 않고 철저히 보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저들의 부족과 연약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언약은 결코 취소되거나 파기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내용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사는 오직 하나님 당신의 선하신 뜻을 좇아서 진행됨을 봅니다. 이것이 성도에게는 한없는 은혜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성의 문제입니다. 이는 언약의 필연적 성취와 연관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어떤 상황과 환경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결코 방해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맙니다. 그러기에 약속의 말씀에 근거한 성도의 구원(벧전1:23)은 영원히 안전합니다. 이 내용이 성도의 견인(牽引) 교리입니다. 왜냐하면 신적 언약은 자체 속에 주권성과 은혜성과 실현성이라는 언약의 절대 불변적 특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역사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시다' 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 속에서 우리가 간과(看過)해서는 안 될 부분이 바로 이 점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서 몇 가지 세상 나라들과 관련된 중요한 사건들을 만나보게 됩니다. 아브람과 사래의 안전한 보호를 위해 애굽 왕 바로를 섭리하신 사건을 기억합니다(창12장). 가나안 북방 4개국 연합군과의 싸움을 아브람의 승리로 이끄신 사건을 기억합니다(창14장). 가나안 남방의 그랄 왕 아비멜렉의 손에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보호하신 사건을 기억합니다(창20장). 이상의 사건들은 단순한 세속적 경험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적 성취의 주권이 아브라함 개인의 삶 뿐 만이 아니라 이방의 열국까지도 미치고 있음을 깨닫게 함으로서 세상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풍성한 신지식을 제공하고 있는 계시적 사건인 것입니다. 이런 경험적 사건들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신지식(神知識)과 이로 인한 신관(神觀)은 더욱 확고부동한 자리를 잡아가게 됩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바로 이 역사의 주관자 되신 하나님이 나의 주가 되시며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에 확고한 믿음을 고백할 수만 있다면 성도의 신앙 생활 중에 염려하지 말라는 성경의 깊은 의미를 보다 바르고 온전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 나라의 왕을 아버지로 모신 아들에게는 염려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주 만물을 지으신 천지의 주재가 되시는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의 신앙관(信仰觀)을 새롭게 조명해 볼 필요가 있는 줄 압니다(롬8:14-1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하늘의 기업을 이을 후사로, 지체로, 약속의 자녀로 그 분 안에서 아신 바가 된 자녀들인 것입니다(엡2:6, 3:6, 갈4:9, 히12:22-23). 나아가 어느 악한 피조물도 심지어 사단조차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빼앗지 못합니다(롬8:38-39). 성도의 삶과 구원은 절대 안전한 하나님의 언약과 보호 속에 보존돼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염려는 불신이며 범죄행위인 것입니다. 이제 이삭의 출생이 갖는 구속사의 의미를 잠깐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여자의 후손 언약이 세상 가운데서 어떻게 진행되어 갈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방향성의 시사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자의 후손언약의 첫 열매인 동시에 아브라함 언약의 첫 씨(자손)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이삭의 성장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생애는 점차로 언약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반면 이삭이 구속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 언약의 첫 열매인 사실로 인해 이후 야곱의 열 두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역사적 이스라엘 백성을 출생시키는 중보자적 신분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어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 백성(갈6:16)이 되게 하시는 중보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죽은 것과 방불한 사라의 몸에서 이삭이 출생했음은 도저히 여인 혼자서는 아이를 가질 수도, 낳을 수도 없는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한 예수 그리스도를 또한 예표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여자의 후손 언약에 의한 신적 기원에 따른 예언적 잉태와 출생이 이를 뒤받침 합니다. 또한 이삭과 예수 그리스도는 잉태 전에 이미 이름을 사전에 고지 받았다는 사실과(창17:19, 마1:18-21) 이로 인해 신적 기원에 의한 출생임을 통해서도 예표와 실체의 신학적 상응성(theological correspondence)을 띠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바울은 아브라함 언약 속에 담겨진 '씨'와 '자손'을 신약적 복음의 조명 하에서 오실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함으로(갈3:16) 이삭을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 언약의 첫 열매로 출생한 이삭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구약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典型)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좇아서 태어났습니다. 약속하신 기한에 이르러 출생했습니다. 이는 철저히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와 당신의 의지를 따라서 되어진 일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에 다름이 아닙니다. 이삭의 출생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개입과 무조건적인 호의가 작용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진정한 개념입니다. 대가없이 무상으로 지불되는 하나님 측의 일방적 관심과 애정과 사랑의 표현 말입니다. 에베소 기자가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비유해서 설명하는 배경이 이에서 나와진 것입니다(엡2:8). 하나님은 이렇게 먼저 당신의 언약 백성들에게 일방적인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오직 자신만을 섬기며 자원해서 순종할 것을 요구하십니다(출20:1-3, 골3:1-3).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곳에 자연 발생적으로 믿음이 생겨나게 되고, 믿음이 있는 곳에는 항상 자율적 순종의 삶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기독교 신앙의 원리입니다. 아울러 이방의 타종교와의 차이점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성경적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십니다. 그러나 이교도적 신앙의 주체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신에 대한 신앙의 내용과 성격이 사람 중심으로 향하게 될 때 성경은 이를 우상숭배라고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에서 신의 존재와 역할이란 단지 인간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수종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골3:5). 신이 인간을 위한 도구로 전락되는 곳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성경이 계시하는 창조자와 구원자의 자리에 머물러 계실 수 없게 됩니다. 곧 하나님의 우상화 작업이 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이 우상화되는 곳에 더 이상 성경적 기독교는 존립할 수 없게 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빠졌던 종교적 함정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섬긴다고 했으나 그 신앙의 실질은 가나안의 바알을 숭배하는 신앙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곧 자신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했을 뿐, 저들의 심령 속에 도무지 하나님을 향한 정당한 인식과 경외하는 신실함이 없었습니다(호6:6). 하나님은 이런 거짓되고 왜곡된 우리의 형식화된 신앙을 차마 보실 수 없어서 견디기 어렵다고 탄식하십니다(사1:11-13).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되면 믿음과 순종의 삶이 뒤따르는 바, 옛 자아는 점차 죽게 되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사람의 자아가 발동하게 됩니다. 곧 성령으로 거듭난 새 생명의 인격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에 연합된 영생하는 생명력의 발휘인 것입니다. 이제 성도가 육체가운데 산다는 것의 의미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분여받아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이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라고 정의합니다(갈2:20). 이런 의미에서 영생의 삶이란 곧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을 의미하며 이는 단순히 몸이 죽지 않는 무한정의 기간으로서의 생명의 연장을 가리키기보다는 하나님을 모신 자의 기쁨을 만끽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변화된 질적 삶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성경적 영생의 삶이란 '이미 여기서' 현재적으로 맛보아 체험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의 실질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죽어서 가는 하늘 나라의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 이미 체험하는 것으로서의 영생을 소유하지 못했다면 죽어서 가는 하늘 나라의 영생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적 영생의 삶은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의 영생의 실질과 같은 연속선상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요17:3의 말씀이 담고 있는 영생의 의미가 이런 것입니다. 여기서 '앎'의 의미가 가리키는 내용은 인간의 지 정 의의 전인적인 총체적 반응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곧 지식과 믿음과 순종의 불가분리의 관계성을 가리킴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영생은 믿음과 동질인 바, 현재적 경험 그 자체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하심에 근거해서 아브라함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첫 열매로 이삭을 '씨'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여자의 후손 언약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그 첫 열매를 맺게 된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집니다. 실로 장구한 세월의 흐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진 언약성취 사건인 것입니다. 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 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하나의 큰 계시적 교훈을 시사합니다. 곧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섭리진행은 그것이 비록 오랜 침묵 속에서 단절되고 파기된 것 같이 여겨지는 상황 속에서도 결코 잊혀지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정하신 경륜이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과 관련해서 성도의 인내가 필요한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생애를 기록하는 가운데 특별히 그들의 실패한 내용을 솔직하게 기술하고 있는 창세기 저자의 의중이 이런 것입니다. 저들의 실패를 거울 삼을 때, 오늘의 성도는 보다 진지하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인내로 참고 기다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런 의미에서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지침서가 되기도 합니다(딤후3:16-17). 한편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삶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신적 언약에 근거해서 철저히 그 분의 장중에 붙들려 다스림과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극명한 실례가 곧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 오늘의 성도들에게 주고자 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의도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일체의 염려를 주께 맡기고 그 분의 선하심을 믿음으로 구해야 하는 근거가 이에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구속의 경륜에 입각한 진리의 체계를 생명과 신앙의 근거와 도리로 삼고 살아가야 할 이유 또한 이에서 나와진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계시(啓示) 의존적(依存的) 신앙의 실상입니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평생동안 한결같은 마음과 믿음으로 기다려 오던 시므온과 안나 선지자의 경우가 이에 해당됩니다(눅2:25, 36). 이들에게 기다림의 시간은 저들의 신앙의 순수성과 진정성을 시험하는 성격이 담겨 있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그의 오심과 연관시켜서 인자가 올 때에 과연 믿음을 보겠느냐고 다소 부정적인 입장에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눅18:8). 이는 믿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말씀에 입각한 바른 신앙의 소유자들이 많지 않다는 우회적 발언이십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은 많은데 정작 하나님의 뜻대로 섬기는 자들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씀입니다(마7:21-23). 오늘 우리는 새로운 천년을 맞고 있습니다. 주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지 거의 2000년의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실 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믿음의 신실성은 어느 때 보다도 심각한 시험과 도전에 직면해 있음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님의 약속의 말씀은 결코 거짓되거나 파기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 분의 작정하신 섭리적 시기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방종과 태만과 나태가 아닌 근신과 절제와 경계와 오래 참고 기다리는 지혜로운 마음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신 '자손약속'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면서까지, 때가 차매 어김없이 성취된 사실을 오늘 우리에게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곧 언약을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계시사건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신실성은 오늘도 동일하게 남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경륜을 현재라는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진행해 나가시는 결정적인 근거와 동기와 원동력이 됩니다. 우리가 영적 경계를 게을리 하거나 조금이라도 늦출 수 없음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속사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으며 성도는 이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언약의 당사자들로 여전히 참여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감이 곧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 속에서 운반해 가는 자들로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이며,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를 선양하며 건설하는 삶, 다시 말해 성경적인 바른 교회를 이루는 삶과 동일한 의미를 갖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 방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언약의 첫 열매로 25년만에 이삭을 주심은 하나님의 전(全)구속사의 경륜이 결코 중단되지 않음에 대한 결정적인 시사이며, 마땅히 정한 목적지에 이를 것임을 확증시켜 주는 단서로 작용합니다. 동일한 원리로 지금도 하나님의 남은 구속사는 진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때가 찰 때 주님의 재림은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임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신앙과 생명으로 붙들어야 하는 이유가 이에 근거합니다. 문제는 어떤 상황하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지지하는 변치 않는 성도의 신앙 자세입니다. 주님을 향한 끊임없는 소망의 마음입니다. 분명하고 확실한 구속사적 역사의식의 확립입니다. 이런 영적 태도야말로 언약 성취의 때와 상관없이 우리의 믿음을 시종일관하게 오실 주님을 향해 고정시켜주는 동인이 되게 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당신이 친히 은혜로 맺어주신 아브라함 언약의 말씀을 좇아 이삭을 아브라함 언약의 차기 계승자로 때를 맞추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자의 후손 언약은 마침내 아브라함을 통해 이삭에게로 넘어가는 계시적 통로를 마련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일련의 사건 진행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구속사의 집행이 철저히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섭리적으로 간섭돼 나감을 극명하게 봅니다. 10) 아브라함의 시험(창22장) 창세기 21장의 이삭의 출생사건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 언약(창12:1-3)의 첫 열매이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여자의 후손 언약(창3:15)의 구체적 결실이기도 합니다. 이 사건을 기록함에 있어서 창세기 저자는 무엇보다도 언약을 신실히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적극적으로 소개함으로써 성경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생명과 신앙의 근거로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 곧 여호와 신앙의 핵심사항임을 강력히 호소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내신 계시를 오직 의존해야 하는 이유가 이에서 나와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제되지 않거나 그 말씀에 의존하지 않는 한에는 기독교 신앙은 어떤 형식을 통해서라도 결코 성립될 수 없음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딤후3:15-17, 요20:30-31, 창2:17). 교회를 일컬어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부르는 이유 또한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입니다(딤전3:15). 진리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의 올바른 해석과 이해와 이에 따른 적극적인 순종력의 발휘는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이삭의 출생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을 충만히 계시함으로서 언약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을 시종일관(始終一貫)하게 발휘할 것을 촉구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언약의 형식을 통해 먼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언약을 피조 세계의 역사 속에서 주권적으로 섭리해 가십니다. 정하신 때와 시한이 차면 신실히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성도는 이런 일련의 사실들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구속사의 진행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성경적 경험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변할 수 없고,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 믿음과 자율적 순종의 행위를 요구하게 됩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25년(창12:4, 17:1, 21, 21:1-3)만에 자신의 '씨'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사건을 현실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상식적인 차원에서 기대했었던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가 전혀 뜻밖의 방식을 통해서 성취된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던 노령의 아브라함과 불임녀인 사라의 태를 통해 약속의 자녀로 이삭이 출생한 것입니다. 실로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분은 당신의 고유한 방법을 통해서 친히 행하신 약속을 이루시는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분이심을 언약 백성들로 하여금 신앙하게 하시는 분임을 본 사건을 통해서 확실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기독교 신앙관이 계시 의존적이고 동시에 섭리 의존적인 토대 위에 성립돼야 하는 이유가 이에 근거합니다. 실로 하나님의 말씀은 만물의 창조의 원인이며 그 생명을 보존케 하는 원동력입니다(요1:1-4, 히4:12). 따라서 이삭의 출생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대한 믿음을 고도의 수준의 경지에 이르게 한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이는 오래 참으심으로 보이시는 하나님의 부성애적 배려이며 하나님의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적극적 열심의 결실이기도 합니다. 곧 당신의 언약 자손들에게만 베푸시는 하나님의 불변의 사랑이요 은혜의 실질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삭의 출생을 경험하는 가운데 비로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 그 분의 마음에 합한 수준의 신앙적 깊은 경지에 이르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간섭하심이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음을 받는 수준에까지 올려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우리 됨의 배경에는 이런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어떤 경우라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자애스런 부성애적 사랑과 언약적 통치가 동일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신앙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할 줄 압니다. 이렇게 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오늘 나의 창조자 하나님 , 나의 구원자 하나님 , 그리고 생존하시고 현존하시는 영원하신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으로 믿고 섬길 수가 있게 됩니다. 성도의 지상적 존재 의미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으로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야 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를 당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좇아서 섭리적 간섭을 통해 신실히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 말입니까? 창22장의 이삭의 번제요구 사건은 그의 출생의 경이로움과 더불어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못 불가사의하기까지 합니다. 25년만에 주신 언약의 계승자인 이삭을, 그것도 이제는 십 대의 소년으로 자란 즈음에 불살라 번제물로 바치라니 말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는 하나님의 계획의 일환임을 본 장 서두에 이미 밝힙니다(1절). 그렇습니다. 성도의 삶에서 때때로 다가오는 예기치 못한 환난과 고난은 언약적 채찍일 수도 있겠으나 동시에 성도의 믿음을 연단해 성숙시키려는 하나님의 긍정적이고 의도적인 시험(God's test, not temtation)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라도 결국 성도에게는 신앙의 유익으로 작용할 뿐입니다. 범사에 감사할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시험적 요구 속에는 단순한 시험 이상의 구속사적 의미가 담겨 있음을 간파해야 할 줄 압니다. 다시 말해 이삭의 번제 사건에는 내용 속에서 원리적으로 발견되듯이 '여자의 후손언약'(창3:15)이라는 원시복음을 통해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포함해서 인류의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주실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보다 구체적이고 가시적이며 예표적으로 계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하나님 이삭의 출생 후 십 여 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삭은 이제 어엿한 소년으로 자랐습니다. 이 때까지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진행이나 하나님의 현현하심에 대해 일체 침묵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구속사의 사역을 중단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정한 섭리적 기간'이 의미 있게 지나는 시기란 말입니다. 다니엘 저자는 이런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특별한 '섭리적 작정의 기간'을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용법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단7:25입니다. 여기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기간은 곧 하나님이 작은 뿔(8절)로 상징된 사단의 세력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일정한 기간동안 시련과 핍박 가운데 넣으심으로 연단하고 시험하시는 '섭리적 작정의 기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섭리적 기간이 찼을 때 하나님은 작은 뿔의 권세를 꺾으시고 그를 멸망시킬 것이며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승리가 주어짐을 소개합니다(26-27절). 이런 방식으로 수년의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의 기간이 지난 후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기쁨과 경외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실로 여러 해 만에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만남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때의 하나님의 방문은 여느 때의 그것과는 성격이 달랐습니다. 새로운 계시나 약속의 전달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한 현현이셨습니다. 그것은 청천 하늘에 날 벼락 같은 말씀을 주시기 위한 의도적인 방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하나님께 바치라는 내용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삭을 일컬어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언급하심으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의 존재가 어떤 가치를 의미하는 지를 의도적으로 부각시켜 설명하십니다. 이렇게 말하심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그의 생명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하나님께서 누구보다 잘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삭은 당시 백 열 살은 족히 넘었을 노령의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의 희망이며 생명 그 자체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살아 있어야 할 오직 한가지 존재 의미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의 신분이라기 보다는 아브라함의 분신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신의 생명과 방불한 이삭을 이제 와서 달라고 요구하십니다. 그것도 죽여서 번제로 불살라 바치라는 것입니다. 가장 비극적이고 처참한 모습으로 세상에서 데려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하나님의 요구는 하나님의 성품에 비추어 볼 때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노아 언약을 통해서도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 것과(창9:4-7), 사람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하는 인신제사(人身祭祀)를 적극적으로 금지할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바 있습니다(신12:31, 18:10). 이런 내용을 통해 보더라도 여기 하나님의 요구는 본래적인 것이 아닌 의도적 시험 이상의 '어떤 특별한 목적이 담긴 계시적 요청'인 사실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던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의 요구 앞에서 그 처음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여기에 더해 이 하나님의 돌발적(?)이고 강권적이며 결코 회피할 수 없는 강력한 명령 앞에서 선택과 결정을 내려야 할 시간적 여유는 단 하루 밤에 불과했습니다. 나아가 아브라함은 그렇다 치고, 아내 사라의 심경은 어떠했을까요? 그러나 창세기 저자는 이 부분에서 아브라함이나 사라의 인간적 고뇌와 번민, 영적 회의와 갈등의 문제를 다루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명령에 대한 이들 부부의 심리적이고 영적인 부정적 반응이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의 신앙적 순종의 결단만을 설명합니다. 이는 아울러 사라의 무언의 동의를 함축하고 있는 바에 다름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서 창세기 저자가 의도하고 있는 바가 무엇이며, 어디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지에 관심의 초점을 맞춰야 하겠습니다. 이는 구원의 은혜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신앙하며 섬기는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 권위와 최고의 규범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 적극적이고 자원하는 실천적 행동이 뒤따라야 함을 웅변으로 보여주는 실례(實例)이며 예증(例證)적인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 본 장에서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번제요구(창22:1-3)는 '일차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혜(창15:6)에 대한 아브라함의 자율적 순종의 여부를 확인하시려는 의도성이 내포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근원적으로 창조와 생명의 근본이 된다는 사실을 통해서 모든 성도가 마땅히 좇아야 할 궁극적인 관심이며 지고의 가치입니다. 아울러 창세기 저자는 성경의 역사가 철저히 하나님의 구속사에 초점을 맞춰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심리적 상태와 변화에 대해 기록하는 일에 의도적으로 지면을 아끼는 것을 통해서 저자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요구 앞에 일언반구(一言半句)의 이의(異意)도 없이 기꺼이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신앙적 결단을 소개함으로써 오늘날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의 신앙적 자태가 어떠해야 함을 구체적 사례(事例)를 통해 보여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2)시험 속에 담긴 하나님의 본의 우리가 먼저 분명히 알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은 넘어지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성도의 신앙을 연단하여 정금같이 나오게 하기 위한 성숙의 기회인 것입니다(욥23:10, 약1:2-4). 이런 의미에서 시편 기자는 고난이 오히려 유익이 된다는 사실과 이로 인해 주의 율례(하나님의 법도와 뜻)를 더욱 깊이 배울 기회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시119:71). 신앙의 여정에서 고난과 시련은 성도가 마땅히 경험하는 필요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세상 임금인 사단이 관장하는 세상 속에 나그네와 행인의 신분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던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본의적 내용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위에서 아브라함의 시험 속에 담긴 표면적 성격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수혜자에게 요구하시는 자율적 순종의 차원에서 확인한 바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지적하고 있는 소위 '믿음의 행함' 말입니다. 따라서 이 때의 행함은 믿음의 진위성을 가늠하는 잣대로 작용합니다.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적극적인 순종의 행위를 통해서 이런 하나님의 일차적인 요구에 지혜롭게 대처했습니다. 시험에 승리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 시험 속에 내재된 보다 본질적인 의도하심에 대해 살펴봅니다. 이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받으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삭은 필연적으로 죽어야 되며 이삭의 죽음은 스스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을 파기하신 결과가 될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언약의 상호 불가분의 연속적 특성상 여자의 후손언약을 비롯한 일체의 언약들이 결국은 동반해서 취소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때문에 이런 경우의 가능성은 근원적으로 절대 불가능합니다. 신적 언약의 주권성과 은혜성과 실현성의 특성상, 그리고 창조자 하나님의 절대 불변의 속성상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우리는 처음부터 이삭의 번제 사건은 보다 본질적인 구속사적 의미가 담겨진 계시적 사건임을 암시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삭은 번제물로 죽음에 처해지지도 않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번제에 담긴 구속사적 계시의 비밀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삭의 번제사건을 통해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암시적으로 내재된 하나님의 구원방식을 가시적이고 예표적으로 계시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인류의 죄책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고 은혜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은 '약속의 자녀'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만이 실현 가능하다라는 복음의 비밀 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일찍이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해 인류 앞에 암시적으로 계시하셨던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는 이삭의 번제사건을 통해 보다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예표적 사건으로 아브라함에게 제시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아브라함은 이런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계시 의존적이고 섭리 의존적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율적이고 필연적인 순종의 마음을 좇아서 이삭을 앞세워 모리아 산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이삭이 번제물로 바쳐지기 직전 다급히(창22:11) 아브라함을 만류하시고 이삭을 대신해 수양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을 통해 비로소 시험 속에 담긴 구속의 본의와 구원의 방식에 대해 하나님의 심중을 헤아리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들 이삭을 통해 여자의 후손의 실체로 오실 종말론적 구속주를 보다 구체적으로 앙망하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서 이삭은 사실상 대속물로서의 어린양과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동시적으로 예표하는 여자의 후손의 예비적 당사자로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대신해 수양을 번제로 드린 후 그 땅(모리아 산)이름을 '여호와 이레'(창22:14)라고 불렀다고 창세기 저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이삭을 대신해 수양을 준비해 주셨다는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의미적으로 이삭은 죽은 것이나 방불합니다. 때문에 이삭의 생존은 사실상 죽음에서 부활한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런 본질적인 구속사적 관점을 통해 이삭은 종말론적 구속주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곳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다는 내용 속에 담긴 본의가 이렇습니다. 이런 계시적 통찰력에 근거해서 이제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여자의 후손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아브라함의 이런 계시적 안목을 확증해 주십니다. 요8:56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번제 사건을 통해 미래의 구세주를 믿음 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신앙고백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계시 의존적 신앙의 실질이 이런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의 체계와 신학적 원리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의 중심을 헤아릴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의 발휘 말입니다. 따라서 모리아 산의 이삭의 번제 사건에 담긴 구속사적인 의미는 신약의 갈보리 산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사건과 밀접한 신학적 상응성(相應性)을 갖게 되는 바, 가히 '구약의 갈보리'라 일컫기도 합니다. (3)시험을 승리로 이끈 배경과 그 결과 이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런 믿음의 결단을 내리게 한 동인(動因)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어떻게 청천병력 같은 하나님의 갑작스런 강력한 요구에 순순히 응답할 수 있었는지요. 그것은 불변하는 신실한 언약의 말씀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의 능력 말입니다. . 그 내용인 즉 이렇습니다. 이삭은 25년만에 주신 언약의 자손이요 약속의 첫 열매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자손 언약이 어떤 경위를 통해 성취됐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삭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 난 부활의 생명이나 다름없습니다. 생명의 잉태에 관련해서는 죽은 것이나 방불한 불임과 노년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간섭으로 태어난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초자연적 출생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이 모든 계시적 사건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우선하여 약속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이런 신적 기원에 따른 초자연적 사건은 진행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우연히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모든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갈 뿐입니다(롬11:36). 이런 이유로 해서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이 지속적으로 성취되어 나갈 유일한 언약적 통로로 작용합니다. 이 말은 이삭이 아니고서는 달리 하나님의 남은 약속이 성취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창3:15의 여자의 후손 언약도 명분을 잃고 무효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근본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에 식언(食言)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기에 후회가 없으십니다(민23:19). 하나님의 언약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체결됐을 뿐만 아니라(창15:17),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신 까닭에(창22:15-18) 어떤 예기치 않은 상황이 일어난다 해도 결코 취소될 수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제반의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이삭의 죽음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설령 죽는다 해도 언약성취의 필연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삭은 기필코 살아나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언약은 이삭의 죽음으로 취소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사라와 더불어 밤을 지새며 묵상과 상고 끝에 내린 최종적 결론입니다(창22:3). 곧 하나님의 계시를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신뢰하는 신앙에 근거한 결단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의 타당성을 뒷받침 해 주는 내용이 5절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같이 간 사환들에게 모리아 산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기다릴 것을 요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아이와 함께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린다 해도 다시 살려 주실 것을 계시적 믿음의 안목으로 내다 봤습니다. 아니 어떤 식으로라도 이삭의 생명은 보존될 것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언약에 신실하심이 결코 이삭을 죽음 가운데 묻어두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속에 담긴 구속의 경륜을 꿰뚫어 보는 심오한 영적인 통찰력과 구속사를 해석하는 역사적 안목이 한껏 발휘되는 대목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상황을 신약의 복음의 빛 아래서 해석하면서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음이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11:18-19)라고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향한 계시 의존적인 신앙관에 깊이 접촉돼 있었던 관계로 만일의 경우 이삭의 부활까지도 내다보는 구속사적 안목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크게 권고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의 불변성을 신뢰했습니다. 이로 인해 아브라함 언약이 지속적으로 이삭을 통해 진행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자신의 과거의 실패를 거울 삼아 영적 위기를 고도의 경지에 이르는 신앙적 성숙의 기회로 승화시켜 나갔습니다. 이런 사실은 이삭이 번제로 드릴 어린양이 어디 있느냐고 물을 때, 아브라함의 답변을 통해서 극명하게 확인됩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들아 번제 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8절). 물론 이 말은 하나님이 실제로 이삭대신 어린양을 미리 준비해 주실 것을 아브라함이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어린 이삭을 위로하며 격려하기 위한 우회적 답변이었을 뿐입니다. 다음 순간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하여 번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아들을 내려찍으려 했습니다. 이삭은 이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순간입니다. 바로 그 찰나의 순간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막으셨습니다. 황급히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그의 손을 붙잡으셨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때의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긴박했는지를 설명하면서 두 번에 걸쳐 아브라함의 이름을 호명한 사실을 기록합니다(11절).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애매히 고난받는 것을 방관하지 않습니다. 기어이 그 대가를 갚아 주십니다. 성도가 범사에 하나님의 얼굴의 도우심을 잠잠히 바라야 할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눈동자같이 돌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위로가 이에 있습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에 통과했습니다. 그의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으며, 누구를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지를 확인하셨습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백세에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아들 이삭을 얻었지만 그는 그 사건이 의미하는 바의 계시적 본질을 철저히 붙잡고 있었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첫 열매이며 동시에 차기 언약의 계승자인 사실을 구속사적 안목으로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이삭은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포기될 수 없는 하나님의 차기 언약의 당사자요 유일한 언약적 통로가 됨을 신앙적 통찰력으로 분별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삭이 죽는다 해도 다시 살리셔서 지속적으로 언약을 계승해 주실 것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순전한 믿음으로 의뢰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손길이 그의 신앙적 전인격을 섭리적으로 간섭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브라함의 전폭적인 신뢰와 순종의 믿음을 만족해 하셨습니다. 이에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 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이런 표현은 아브라함의 중심을 모르셔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만족하심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는 묘사일 뿐입니다. 곧 이어 하나님께서는 한 수양을 준비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수양으로 이삭을 대신해 번제로 드립니다(창22:13). 이런 사실을 통해 아브라함은 이삭의 번제 사건 속에 담긴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의 본의를 비로소 밝히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요구는 단지 믿음의 진위여부만을 가늠해 보려는 단순한 시험의 수준이 아니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하나님의 오묘하신 구속의 본의를 밝히 드러내시려는 계시적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이제 이삭을 대신해 손수 예비하신 한 수양을 번제로 받으심으로 구체적이고 가시적으로 확증시켜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계시 의존적이고 섭리 의존적인 구속사적 신앙관에 깊이 접촉된 사실로 인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시험을 넉넉히 감당했습니다. 나아가 시험 속에 담긴 구속의 도리, 곧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범죄한 인류를 구원하실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시사받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과 구속사적 계시안목은 한층 더 심화되고 확장되는 일대 전환의 국면을 맞게 됩니다. 매사에 철저히 천상적이며 영적인 관점으로의 전환 말입니다. 즉 이삭으로 말미암는 아브라함 언약의 궁극적 성취는 이삭의 실체이며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인 구속주의 대속적 사역으로 말미암을 것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나아가 이삭으로 인해 천하 만민이 받게 될 복(창22:18, 12:2-3)의 성격 또한 가나안이라는 지상의 제한적 땅에 국한되는 물질적인 축복이 아닌,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천상적 복 곧 죄로부터의 구원인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천상의 하나님 나라를 영원히 기업으로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런 내용을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 언약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성령의 감동으로 밝히 해명하는 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히11:8-16입니다. 본 절에서 저자는 아브라함이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약속의 땅에 거한 삶의 성격을 '장막생활'(9절)에 비교합니다. 일시적 나그네와 행인의 삶이란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정의되는 이유를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곧 천상의 도성을 바라봤기 때문'이라고 기술합니다(10절).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식으로 장막과 천상의 도성을 대비시키는 가운데 성경 독자들로 하여금 아브라함 언약의 본질을 모형과 실체를 사용해서 설명합니다. 지상의 일시적인 삶과 천상의 영원한 삶의 대비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 앞에서 언약의 현재성에 연연하기보다는 언약의 본질을 파악하는 구속사적 통찰력과 분별력을 한껏 발휘함으로써 믿음의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보다 본질적으로는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하기에 이릅니다. 따라서 이후 아브라함의 남은 생애 속에서 구속사적 계시안목은 비약적인 발전과 더불어 고도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적 승리를 만족해하시며 하나님은 재차 나타나십니다(창22:15). 기쁨과 만족의 현현이십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이름에 맹세하심으로(16절) 아브라함 언약성취의 사실성과 확실성을 굳게 보증해 주십니다(16절). 이때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17절)는 표현을 부가시킴으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적대적 대결구도는 결국 이삭의 실체로 오시는 여자의 후손의 종말론적 승리로 마감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아브라함의 시험사건을 일단락 시킨 후(창22:19) 사라의 사망기사를 소개하는 창23장 사이에 짧은 기사내용을 삽입시킴으로 장차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의 출생기사를 소개합니다. 이는 앞으로의 창세기 기록 내용과 방향성이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에게로 옮겨 갈 것에 대한 기자의 사전 암시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아브라함의 시대는 지나가고 바야흐로 이삭의 계시시대가 도래한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사는 세상역사 속에서 섭리적 작정의 때를 좇아 차착(差錯)없이 종말론적 성취를 향해 달려갑니다. 11) 사라의 죽음(창23장) 사라의 죽음을 통해 저자가 독자들에게 주지하고자 하는 바는 헤브론에 있는 사라의 매장지로 헷 족속 에브론의 소유인 막벨라 밭을 굳이 은 사백 세겔을 주고 사서 아브라함 소유 매장지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이는 아직은 나그네 신분으로 우거하는 아브라함 일행에게 명실상부한 아브라함의 법적 소유가 되는 의미가 있을 뿐 만 아니라, 후일에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하면서 가나안을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땅임을 확증하는 '근거'와 '물증'과 '표적'이 되게 하려는 계시적 차원에서 이뤄진 처사입니다. 먼 미래에 성취될 일을 구속사적 안목을 갖고 현실을 해석하는 가운데 취해진 계시적 결행인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무상으로 주겠다는 것을 극구 거절하며 합당한 값을 지불합니다(16절). 매장지의 위치와 범위를 정확하게 명시됩니다(17절). 여러 헷 족속 사람들을 이 계약의 증인으로 삼습니다(18절). 저자는 20절에서 다시 한번 이 계약이 정당한 절차를 밟아 합당하게 이루어졌음을 '헷 족속의 공증'을 통해 확인함으로 일체의 가능성 있는 오해의 소지를 불식시킵니다. 후에 아브라함 또한 사라와 함께 막벨라 굴에 장사됩니다(창25:7-10). 창세기 저자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11절)고 기술함으로 본격적인 이삭의 계시시대가 열렸음을 시사합니다. 12) 이삭의 결혼(창24장) 및 언약 체결(창26:2-5) 창세기 저자는 이삭이 아내인 리브가를 맞아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많은 지면을 할애해 소개함으로써 아브라함 언약의 계승자인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독자들에게 전달합니다. 당신의 언약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에 오늘도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보호와 관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은 우리의 현재적 환경과 상황의 어떠함을 뛰어넘어 얼마나 큰 위로와 소망과 기쁨으로 다가오는지요. 이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아낌없이 드립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삭의 생애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시킴으로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의 모형과 예표로 설명합니다(갈3:16).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중보사역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참 이스라엘(갈3:29)이 출생한 것을 이삭의 대속적 중보(모리아 산의 번제 사건: 창22장)의 결과로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태동된 것과 원리적으로 연결시킴으로 신학적 상응성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여자의 후손언약의 성취는 아브라함 언약을 중심으로 보다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진행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삭의 출생은 아브라함 언약의 중보적 씨이며 여자의 후손언약의 예비적 성취의 성격을 때는 계시적 인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현현하시어 언약을 체결해 주십니다(창26:3-5). 내용적으로는 아브라함 언약의 재확인이며 갱신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삭은 아브라함 언약의 계승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나갑니다. 이삭언약의 내용은 자손언약, 가나안 땅에 대한 언약, 그리고 이삭의 자손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겠다는 내용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적 성격은 아브라함 언약의 재확인이며 갱신입니다. 당연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 언약의 계승자로 출생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삭언약이 지향하는 총체적이며 궁극적인 목표는 아브라함 언약이 그랬듯이 하나님 나라에 모아집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에 입각해서 처음 창조원리에 근거한 에덴의 아담언약(창1:28)이 죄로 인해 구속의 원리에 입각한 여자의 후손언약(창3:15)으로 갱신됨을 봅니다. 이후 언약의 계승자들과 맺게되는 제반의 언약들은 한결 같이 앞의 언약들과 불가피하게 연관돼 동질성과 연속성을 띠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갱신, 발전되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삭의 아내 리브가 또한 불임녀입니다(창25:21).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경우와 방불합니다(창11:30). 그러나 때가 차매 리브가의 태를 여셔서 쌍둥이를 주심으로 리브가의 생애 또한 사라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적 간섭 하에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자손들의 생애는 한결 같이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려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섭리적으로 인도와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 때문에 모든 일을 합력해 선을 이루십니다. 따라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때 주께서 성도의 길을 선히 경영해 가십니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야 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서 나옵니다. 13)야곱의 선택적 출생 및 성장(창25-27장) 이삭의 아내인 리브가 역시 처음에는 불임녀였습니다(21절). 그녀는 이삭과 결혼 후 20년 만에 쌍둥이 두 아들을 낳습니다(20절, 26절). 저자는 이삭의 자녀 출생의 경위를 아브라함의 경우와 의도적으로 유사하게 소개함으로 이삭의 생애가 아브라함의 차기 언약의 계승자로서 하나님의 동일한 인도와 다스림을 받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암시합니다. 다시 말해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잉태와 출산 역시 다분히 신적 기원에 의한 것임을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를 재현시킴으로 시사합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친족입니다(창22:20-23). 이는 셈족의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와진 처사입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처음부터 불임녀입니다(21절). 20년만에 자녀를 출산하게 됩니다(20절, 26절). 두 아들을 낳습니다(24-26절). 둘째가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를 입어 언약의 계승자가 됩니다(23절).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세상 역사 속에서 찾으실 때 선택적으로 부르십니다. 이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라고 합니다. 주권은 창조주로서의 고유한 왕적 권한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유한하고 제한적 존재로서 무한하시고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의 실체를 다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엡1:5, 롬9:11 18). 쌍둥이 중에 동생 야곱을 언약의 당사자로 택하시고 형 에서를 외면하시는 처사는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들의 경우를 들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교리를 전개해 나갑니다(롬9:10-13). 성도가 하나님의 이 주권적 선택의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에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자랑할 것이 없게 됩니다(엡2:8-9). 따라서 하나님의 선택적 구속의 은혜 앞에서 그것의 타당성 여부를 논하기보다는 값없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오직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돌림이 성도의 마땅한 도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엡2:8-9). 이런 이유로 은혜는 수혜자에게 자율적 순종을 요구합니다. 이때의 순종은 은혜를 더욱 은혜 되게 하는 일에 더욱 효과적으로 기여하게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런 경우를 일컬어 행함이 믿음을 온전케 한다고 설파합니다(약2:22). 여기서 보듯이 하나님의 주권은 창조자로서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이며 그 분만이 발휘하실 수 있는 창조주의 절대 특권과 권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 단지 자원하여 순응하며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의 실질을 누리게 됩니다. 탕자의 비유의 본의가 이런 것입니다. 아버지 곁을 떠나는 순간부터 그것은 행복이 아닌 불행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아버지 집을 향해 인생의 방향을 돌리는 순간부터 그의 삶은 절대 보장됩니다. 아버지의 보호 안에서 이전 것은 지나고 새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자신의 삶을 경영하는 것이 바로 죄'라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창조의 원리상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과의 의존적 관계를 통해서 가장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뿐 아니라, 자신의 행복과 존재의미를 만끽할 수 있음이 성경이 제시하는 생명적 원리입니다. 처음 아담이 피조물로서 이런 하나님과의 의존적 관계를 포기하고 독자적인 관계로 홀로 서고자 할 때 창조의 면류관으로서의 영광을 잃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떠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절된 것입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겠다'는 하나님의 예언적 언약(23절)은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파는 것을 통해서(31-33절), 노령의 이삭이 야곱을 에서로 오인해 축복하는 내용을 통해(창27:27-30) 현실로 나타납니다. 이후 하나님의 섭리적 손길은 출생적 예언을 좇아서 야곱의 생애를 철저히 주관하시는 가운데 당신의 언약을 신실히 수행해 나가심을 저자는 기록합니다. 이후 야곱에 관한 기록이 아브라함에 버금갈 정도로 많은 분량을 차지합니다. 이는 그만큼 야곱의 생애가 하나님의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 갖는 의미가 큼을 시사함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인 조상이 되는 반면에, 야곱은 그의 열 두 아들로 형성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사실상의 실제적 조상으로 자리 매김 되기 때문입니다. 14)벧엘 언약을 통해 야곱의 생애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창28-35장)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아비 야곱의 고향인 밧단아람, 즉 하란에 있는 외가로 도피성 여정 길에 오릅니다(창28:1-5). 언제 돌아 올 수 있을지 그야말로 기약 없이 먼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의 여정에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동행하고 있음을 야곱은 미처 깨닫지 못합니다. 그의 저급한 신지식은 하나님의 편재성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유아적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족속들의 제한적 신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저자는 시사합니다(창28:16). (1)벧엘 언약(창28:12-16) 야곱은 하란으로 가던 중 벧엘에서 유숙하게 됩니다(11절, 19절). 그곳에서 하나님을 이상 중에 만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야곱에게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비 이삭의 하나님이심을 알리십니다. 이는 이삭의 아들인 야곱이 곧 이삭의 약속의 후계자로서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통로가 됨을 확증시키는 광경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야곱을 공식적으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언약의 승계자로 인준하시고 야곱에게 언약을 주십니다. 이를 일명 '벧엘 언약'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벧엘 언약 또한 아브라함 언약의 재확인이며 갱신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위에서 언약간의 상호 연계성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벧엘 언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야곱이 누워있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언약입니다(13절). 땅의 모든 족속이 야곱과 야곱의 자손으로 인해 복을 받겠다는 언약입니다(14절). 야곱의 여정 길에 하나님께서 동행하시겠다는 언약입니다(15절상). 때가 되면 야곱을 가나안 땅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언약입니다(15절하). 이로 인해 하나님의 벧엘 언약은 지금까지의 야곱의 신관과 여호와 신앙에 일대 전환을 가져온 계기가 됩니다. 창세기 저자는 벧엘에 나타나신 하나님에게 야곱이 고백한 내용을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시킵니다(16절). 야곱은 여호와 하나님의 편재성에 놀랍니다. 벧엘에 나타나신 하나님에 대해 야곱은 이상히 여깁니다. 그의 신관은 가나안적 신지식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가나안적 신관이란 특정 지역에만 제한적으로 역사 하는 신 개념을 의미합니다. 이런 까닭에 가나안에는 각 족속별로 각기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으로 신앙의 형태가 나타납니다. 야곱은 이런 가나안의 신관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을 이런 저급한 수준에서 여타의 우상들과 동일하게 생각했습니다. (2)야곱의 하란 생활 및 가나안 귀향(창29-31장)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과의 극적 만남을 간직한 채, 일로 밧단아람으로 향해 마침내 하란에 당도합니다. 그곳에서 야곱은 어미 리브가의 오라비인 외삼촌 라반과 상봉합니다(창29:13). 야곱은 라반의 일을 도우면서 20년을 한결같이 외삼촌을 위해 가사를 돕는 일에 전념합니다. 야곱은 외삼촌 집에서 일하면서 그의 두 딸 레아와 라헬, 그리고 이들의 시녀인 실바와 빌하를 아내로 맞아 열 두 아들과 딸들(창46:7)을 낳습니다. 그러나 구속사 진행 과정에서 디나(창34:1)만을 거명(擧名)해 기록함으로 창세기 저자는 성경의 역사가 하나님의 구속사를 중심으로 기록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성경 독자들에게 시사합니다. 후에 하란을 떠나 가나안 귀향 길에 오른 야곱이 세겜에 수년을 안주하고 있을 때(창33:18-20), 딸 디나의 성폭행 사건을 통해서 야곱의 벧엘 행을 간섭하시게 됩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라반 그리고 라반의 아들들 사이에 재물로 인해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기회로 야곱의 가나안 귀환을 촉구하십니다(창31:1-3). 야곱은 라반과 합의하에 많은 재물과 육축과 노비와 함께 네 아내와 자녀들을 대동하고 일로 가나안 귀향 길에 오릅니다(창32:1). (3)얍복강 사건과 야곱의 개명(창32장) 하란을 떠나 가나안을 향해 내려오던 야곱 일행은 요단 강의 동쪽 지류인 간헐천 얍복강 가에 이릅니다(창32:22-23). 일행을 앞서 보내고 야곱은 홀로 남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을 하던 끝에 환도뼈가 탈골됩니다. 이 사건 후로 야곱은 절름발이 신세가 됩니다. 이런 사실은 이후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자의적으로 활동하는 데 많은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것을 시사합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의 자기 중심적인 신앙에서 이제부터는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아니 될 여호와 중심의 신앙에로의 일대 대 전환의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 따라서 이 사건은 야곱의 생애에 있어서 처음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건 이후 그의 생애에 있어서 다시 한번의 믿음의 도약을 마련하는 계기로 작용합니다.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 사건에 맞먹는 신앙성숙의 전기를 가져온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을 계기로 야곱은 지금까지의 이기적이고 기만적이며 기회주의적인 자기중심적 삶을 청산하고 철저히 하나님 의존적인 신앙으로 전향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환도뼈를 위골시킨 천사를 야곱은 하나님으로 인정합니다(30절). 하나님은 이곳에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개명(改名)해 주십니다(28절). 그러나 아직 이스라엘로 호명(呼名)하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후에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신정적 국가를 의미하는 바, 야곱을 통해 지금까지는 개인적으로 진행되던 구속사의 흐름이 바야흐로 집합적이고 민족적인 계시의 시대로 전환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입니다. (4)벧엘 언약의 갱신(창35:9-15) 얍복강 사건 이후 야곱 일행은 숙곳에서 잠시 머무릅니다(창33:17). 이들은 이내 요단강을 건너 서편 세겜에 정착해 장막을 칩니다. 이곳에서 야곱 일행은 수년을 지냅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원하심에 반하는 처사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벧엘로 가기를 원하십니다(창35:1). 야곱의 지체를 책망하시며 벧엘로의 진행을 재촉(창35:1)하시려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야곱의 딸 디나의 성폭행 사건(창34:1-2)을 통해서 현실화됩니다. 악한 것까지라도 합력하여 선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역사의 일환입니다. 마침내 야곱 일행이 벧엘에 도착합니다(창35:9). 하나님은 이곳에서 처음 벧엘 언약을 재확인시키시며 갱신하십니다(창35:10-12).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십니다(10절). 이는 야곱 이후에 새로운 구속사의 계시시대가 개시됨을 알리는 신호입니다(개인에서 민족의 개념으로의 전환). 많은 국민이 나올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11절상). 왕들이 나올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11절하).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12절). 이상은 처음 벧엘 언약의 재 확증인 동시에 갱신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는 아브라함 언약이 종말론적으로 지향하는 바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고 있음에 다름 아닙니다. 이제 아브라함에서 이삭에게로, 이삭에서 야곱에게로 이어진 '개인위주의 선택적 계시 역사'는 야곱 이후부터는 요셉을 중심으로 그의 열 두 아들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부르시는 계시역사'로 구속사의 성격과 방향성이 전환됩니다. 이스라엘로 개명된 야곱의 새 이름에 담긴 구속사적 계시의 의미가 이렇습니다. 15)요셉의 생애를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역사(창37-50) 하나님은 야곱의 11번째 아들인 요셉을 야곱 이후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계시의 도구로 특별히 선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생애를 통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모든 언약을 집약해서 진행해 나가시는 가운데 특별히 자손 언약의 성취인 이스라엘 민족형성의 초석을 놓는 일에 당신의 구속사 진행을 집중시키십니다. (1)요셉을 구속사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창37장) 창37장부터는 갱신된 야곱의 벧엘 언약(창35:10-12)과 아브라함의 횃불언약(창15:13-16)의 성취를 향해 요셉의 생애를 적극적으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구속사적 섭리역사가 기록됩니다. 이때 저자는 요셉의 생애를 주로 언급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야곱의 약전(전기)이라고 소개합니다(2절). 이는 비록 아들 요셉이 이후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그의 존재는 아직 살아있는 아비 야곱의 영향력 하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꿈을 통해 그의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계시하십니다(6-9절). 형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곡식 단을 둘러서 절을 하는 꿈 내용입니다(7절).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요셉에게 절을 하는 꿈 내용입니다(9절). 요셉은 이상의 꿈 내용을 형들에게 얘기함으로 부모와 형들이 자신을 섬길 것에 대해 은연중 시사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런 요셉의 얘기에 형들은 더욱 요셉을 미워하는 동기부여로 작용했으나 '야곱은 그 말을 마음에 두었다'고 기술합니다(창37:11). 이런 사실은 야곱이 요셉의 꿈 내용을 구속사적 안목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주신 벧엘 언약이 이제 요셉을 언약의 통로로 삼아 지속적으로 진행될 것임을 감지하고 있었다는 지적입니다. 야곱은 이미 자신의 지나온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벧엘 언약이 신실히 성취돼 왔음을 절실히 확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에 암매한 요셉의 형들은 단지 육신적인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급기야 요셉을 미디안 상인에게 팔아버립니다. 그리고는 요셉이 짐승에게 잡혀 먹혔다고 거짓으로 야곱에게 고합니다. 상인들은 요셉을 애굽 왕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아버립니다(36절). 시편 기자는 이런 경위를 구속사적 통찰력으로 해명하는 가운데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한 사람이 종으로 팔렸도다"(시105:17)라고 요셉의 애굽 행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적 간섭하심의 결과로 해석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성도의 전 생애가 동일한 원리가운데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섭리적 통치와 인도를 받고 있습니다(욥23:10). 성도의 생애는 하나님의 아신 바 된 생의 의미를 띱니다. 이는 성도의 일거수 일투족이 철저히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이루시는 일에 깊이 연루돼 선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실의 확신은 우리를 모든 위경에서 넉넉히 구원하시며 인내케 하시는 하나님의 천상적 능력으로 작용하기에 충분합니다. (2)요셉의 애굽생활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창39장) 창38장은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와 며느리 다말과의 불륜에 대한 기록내용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의 흐름상 창38장은 창37장과 39장 사이에 '의도적으로 삽입된 장'인 것을 앞 뒤 문맥을 통해 쉽게 간파하게 됩니다. 이는 앞으로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 유다의 독특한 위치를 사전에 성경 독자들에게 암시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적인 편집방식입니다(창49:10, 룻4:18). 하나님은 요셉과 동행하시며 그의 하는 일에 복을 내리십니다. 창세기 저자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라는 표현으로 요셉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기술합니다. 이제 요셉의 생애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계시의 도구로 이미 선용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 왕의 시위대장인 보디발의 종으로 팔립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으로 하여금 보디발의 은혜를 입게 하사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게 하십니다.(4절). 요셉을 인해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십니다(5절). 무고히 옥에 갇히나 전옥(典獄)에게 은혜를 입게 하심으로 옥중 사무를 요셉에게 맡깁니다(21-23절). 범사에 요셉의 일을 형통케 하십니다(23절). 이는 요셉이 야곱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사는 세상 역사를 섭리의 무대로 해서 진행됩니다. 세상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가 되는 이유가 이에서 나와집니다. 우리가 세상역사의 본질을 하나님의 계시적 안목으로 해석해야 함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성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전 구속사의 경륜에 접촉된 자로 하나님의 구속의 통치를 받고 있음을 늘 신앙고백하며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는 실제적 삶을 통해 비로소 구원받은 자로서 확증받게 됩니다. 구원의 실질이 이런 것입니다. (3)요셉의 꿈 해석 사건(창40장) 보디발의 가정총무로서 요셉은 일체의 애굽 왕실의 법도와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체득하는 기회를 갖습니다. 이는 후에 요셉을 총리로 선용하셔서 하나님의 구속사적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치밀한 사전조치의 성격을 띱니다. 이런 와중에 보디발의 아내가 젊고 성실하고 준수한 요셉을 유혹합니다. 요셉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요"(창39:9)라는 말로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이는 요셉의 생애가 철저히 하나님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인식하고 명실상부한 신전(神前) 의식의 구속사적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음을 반증하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자신의 계획이 무산되자 요셉을 무고죄로 고소해 급기야 요셉은 궁중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요셉의 무고죄를 오히려 선용하셔서 가정총무의 단계에서 애굽의 총리의 단계로 한 발작 가까이 나아가게 하시는 절호의 기회로 삼으십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가정총무의 직무를 통해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배우게 하시고 이제 좀 더 애굽 왕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하시기 위한 일환책으로 보디발의 아내의 애증(愛憎)을 선용하신 결과가 성립됩니다. 잠16:4입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이런 사실의 확인은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전옥(典獄)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창39:21),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22절),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다"(23절) 등등의 내용을 통해 명백히 증명됩니다. 이런 사실로 보건대, 참으로 성도의 생애가 갖는 구속사적 삶의 특징은 현실적인 열악한 상황과 환경을 극복해 모든 일을 합력 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롬8:28). 이런 사실의 절대 인식의 터 위에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태도야말로 다름 아닌 섭리 의존적 신앙의 정수(精髓)라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옥중에 있는 요셉의 삶을 선히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요셉이 갇혀 있는 감옥에 어느 날 바로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이 투옥됩니다(1-3절). 요셉이 이들을 수종듭니다(4절). 어느 날 이들이 동시에 꿈을 꿉니다(8절상). 그러나 해석을 할 수 없어 고민합니다. 요셉이 이 얘기를 듣고 꿈을 해석해 줍니다(8절하). 이때 하나님께서 요셉의 해석을 간섭하십니다. 해석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앞으로 삼일 후에 복직이 된다는 내용입니다(13절). 반면 떡 맡은 관원장은 앞으로 삼일 후에 처형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19절). 그런데 삼일 후는 다름 아닌 바로 왕의 생일입니다.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의 해몽대로 전직(前職)을 회복합니다. 반면 떡 맡은 관원장은 처형을 당합니다. 모든 것이 요셉의 꿈 해석대로 진행됩니다.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의 손길이 이 일에 깊이 개입되고 있음을 문맥상 쉽게 간파하게 됩니다. 지금 하나님의 섭리역사가 요셉을 통해 은밀한 중에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출감을 확신하고 요셉은 자신의 사면을 미리 부탁합니다(14-15). 그러나 창세기 저자는 '술 맡은 관원장이 출감 후에 요셉의 일을 잊었다(23절)'라고 기록함으로 이 일에 하나님이 개입해 막고 계심을 시시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간섭하십니다. 비록 하나님의 섭리에 특정 인물을 도구로 선용하시지만 사람의 뜻에 의해 하나님의 일이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지금 요셉의 생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바, 하나님의 구속사가 사람에 주관에 의해 임의로 좌우될 수 없음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요셉으로 하여금 만 이년을 더 옥중 생활을 했다는 저자의 기록을 통해 확인됩니다(창41:1). 맞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의 시기가 충분히 이를 때까지 요셉은 감옥에 더 있어야만 합니다. 지금 요셉은 꿈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에 연속적으로 접촉돼 있음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저자는 이런 사실을 통해 요셉이 바야흐로 바로의 꿈을 해석해야 할 자로 부름 받게 될 것을 독자들로 하여금 예견케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은 곧 사실로 현실화됩니다. 우리는 이런 일련의 상황전개를 통해 다음의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첫째, 역사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극명한 실상을 봅니다. 둘째, 이런 하나님께서 당신의 장중에 우리의 생애를 섭리적으로 붙드시고 동일한 원리 하에서 우리의 남은 삶을 간섭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셋째, 따라서 오늘도 세상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안목을 갖고 현실을 해석하는 가운데 우리의 남은 생을 하나님의 나라를 선양하며 운반함으로 그 뜻을 받들어 섬기는 일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아서 살아가야 된다는 사실입니다(마6:33). (4)요셉의 바로 왕 꿈 해석(창41장) 요셉의 생애는 하나님의 언약적 섭리의 장중에 붙들린 바 된 삶입니다. 그가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계승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이 이를 증거합니다(창37:1-2, 39:1-2). 요셉은 지금 하나님의 구속사의 경륜에 깊이 접촉된 사실에 근거해서 자신의 생애가 섭리적으로 경영되고 있음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의 억울한 투옥사건에 대해 일체의 변호나 항변을 철저히 자제하는 것을 통해 이런 그의 심중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지금 창세기 저자는 요셉의 경우를 통해 여호와 신앙의 실질이 어떤 것인지를 성경 독자들에게 구체적으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성숙한 신앙적 자태가 이런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성경적 신앙태도란 하나님의 구속사의 경륜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진행됨을 계시적 안목으로 통찰해서 거기에 자신의 생애를 적극적으로 의탁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소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실질이 이런 것입니다. 이런 신앙인의 모습 속에서는 일체의 환경적 요인이 그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한 성도의 삶의 여정 속에서 경험되는 제반 사건이 그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과 뜻 가운데서 진행되고 있다는 신앙 고백적 삶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 내가 경험하는 환경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나를 인도하시는 최선의 상황임을 믿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단3:18)의 신앙의 정체성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제 바로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 된지 만 이년이 지나갑니다(창41:1). 이때까지 요셉은 감옥에 더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의 때가 찰 때까지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련의 상황전개를 통해 신앙의 본질은 철저히 계시 의존적이고 섭리 의존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나야 됨을 확인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본의는 하나님을 도구 삼아 사람의 뜻과 사람의 유익을 이루어 보려는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의 선하신 목적이 우리의 생애를 통해 온전히 성취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은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이루어 질 섭리적 기간이 찰 때까지 만 이년을 더 옥중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던 것입니다. 비록 요셉 자신은 술 맡은 관원장의 도움을 힘입어 보다 일찍이 출감되기를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참으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잠16:9). 요셉의 경우를 바라보며 일의 결국이 주님의 의지의 여부에 종속돼 있음을 새삼 실감하며 확인하게 됩니다. 바로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 된지 만 이년 후에 바로 왕이 기이한 꿈을 꾸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제까지의 일련의 상황전개를 통해 바로의 꿈이 일상적인 평범한 꿈이 아님을 감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요셉의 생애와 관련해서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꿈을 계시의 방편으로 삼아서 하나님의 구속사를 전개시켜 나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로의 꿈은 계시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예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왕이 꾼 꿈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바로가 하수 가에 서서 본즉 살진 일곱 암소가 갈밭에서 풀을 뜯고 있습니다. 그때 파리한 암소 일곱이 올라와 살진 암소 일곱을 순식간에 먹어 버립니다. 이에 잠시 잠에서 깬 바로는 이내 다시 잠이 들어 또 한 꿈을 꿉니다. 이번에는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고 그 후에 약하고 마른 일곱 이삭이 나와서 처음 이삭을 삼켜 버립니다. 꿈에서 깬 바로는 심상치 않은 꿈으로 인해 번민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더욱 바로의 마음을 괴롭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어찌 사람이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이때 창세기 저자는 술 맡은 관원장을 등장시킵니다(창41:9). 그로 하여금 요셉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잊었던 추억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이 년전 그가 출감시 "요셉을 기억하지 않고 잊었더라"(창40:23)고 기록한 저자의 표현 속에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간섭이 작용하고 있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로부터 만 이년 후, 이제 하나님의 작정의 기간이 찼을 때 하나님은 술 맡은 관원장의 기억력을 회복시켜 주셔서 히브리 청년 요셉을 생각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은 한 사람의 마음을 좌우하실 수 있습니다. 선하게도 하시고 때로는 악하고 강퍅하게도 하십니다. 당신의 영원하신 목적과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해 사람의 마음을 기뻐하시는 뜻대로 간섭하십니다(롬9:18). 지금 요셉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구속사를 집행해 나가시는 섭리과정에서 바로는 물론 그의 술 맡은 관원장까지도 계시의 도구로 선용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주권적으로 간섭해 가실 때, 때와 사람과 환경을 섭리의 도구로 선용하십니다. 우리는 이를 섭리의 삼 요소라 부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바로에게 추천하고 왕은 즉시 요셉을 대령시킬 것을 명령합니다(14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적 열심의 손길이 신속히 일을 진행시키심을 눈으로 환히 보는 듯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신 때를 좇아서 언약을 성취시키시며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역사를 섭리해 가십니다. 이런 사실의 인식의 터 위에서 범사에 하나님을 전심을 다해 믿고 의지하는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 곧 섭리 의존적 신앙관이 정립됩니다. 왕을 알현한 요셉은 꿈의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을 먼저 알립니다(16절). 지금 자신의 생애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있음에 대한 신앙적 고백입니다. 바로는 요셉에게 꿈의 내용을 알려 줍니다(17-24절). 요셉이 이를 해석합니다(25-32). 첫째, 바로의 꿈은 향후 하나님의 하실 일에 대한 계시적 의미가 담긴 내용입니다. 둘째, 애굽 온 땅에 앞으로 칠 년 풍년과 칠 년 흉년이 찾아올 것입니다(29-30절). 셋째, 나중 기근이 너무 심해 앞의 풍년을 기억조차 할 수 없게 될 것을 고합니다(31절). (5)요셉은 꿈 해석에 이어 대비책까지도 제시합니다(33-36절). 첫째,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발탁해 애굽의 치리자로 삼을 것(33절)과 둘째, 여러 관리를 두어 칠 년 풍년 동안에 애굽 땅의 소출의 오 분의 일을 거두어들이고(34절) 셋째, 모든 곡물을 바로의 관장 하에 두어 각 성에 적치한 후(35절) 넷째, 그 후 칠 년 흉년이 올 때 이를 풀어 양식을 삼게 할 것을 알려 줍니다(36절). 창세기 저자는 이런 일련의 상황 전개를 통해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등극시켜 당신의 구속사를 진행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하고 적극적인 의지의 표명을 독자들에게 제시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와 신하들이 요셉의 꿈 해석과 대안에 만족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왕은 요셉을 전격적으로 애굽의 총리로 발탁합니다(37-43). 아울러 바로 왕은 즉각 자신의 모든 애굽의 통치권을 요셉에게 양도합니다. 나아가 애굽의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합니다. 요셉을 확실하게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심중에서 나와진 처사입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은 하루아침에 죄인에서 일약 애굽의 총리로 그 신분이 수직 상승합니다. 이 모든 일의 과정 속에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깊이 작용하고 있음을 이보다 어찌 더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요셉이 애굽의 총리에 오른 사건은 앞으로 가나안의 아비 야곱과 그 일행이 애굽(이방)으로 이주하게 됨으로서 야곱의 벧엘언약(창35:9-12)과 아브라함의 횃불언약(창15:13-16)이 구체적으로 성취 될 것에 대한 구속사의 큰 전기가 마련된 셈입니다. 여자의 후손 언약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구속사를 기필코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게 됩니다(사9:7). 이 하나님의 열심에 오늘 날 성도가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은 당신의 구속사가 이 땅에서 온전히 성취돼 당신의 백성인 마지막 한 사람이 구원의 반열에 오를 때까지 결코 중단되지 않을 것입니다(룻3:18, 빌1:6, 롬11:25-26). 쉼 없이 진행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결코 잊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잊으실 수가 없습니다. 요셉은 이미 선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아비 야곱의 언약의 계승자로서 그의 삶은 철저히 언약 성취의 통로로 선용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로 이런 동일한 원리로 인해 오늘날 성도의 생애는 하나님의 이미 아신 바 된 자들로서(갈4:8-9) 그 분의 절대적인 간섭과 보호와 인도하심 속에 놓여 있습니다. 성도가 모든 경우에 있어서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당위성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성도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질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성도의 견인(堅忍) 교리라고 부릅니다. (6)기근과 해후(창42-45장) 요셉이 애굽의 총리에 등극할 때 그의 나이가 삼 십 세였다고 저자는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 지금 당대의 대 제국 애굽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세상 역사의 주관자(단4:17, 25)이시며 세상이 그 분께 속해 있음(출19:5)이 지극히 지당한 말씀입니다. 이후 애굽 전역에는 하나님의 꿈 해석대로 먼저 칠 년 풍년이 찾아옵니다(47절). 이때 요셉은 각 성에 곡물을 저축해 앞으로 올 기근에 대비합니다(48절). 곧 이어 애굽 전역에 기근이 찾아옵니다. 저자는 이 기근이 애굽 뿐 아니라 인근 전역에 걸쳐 방대한 지역에 임하고 있음(창41:57)을 시사함으로써 가나안의 야곱과의 연결을 시도합니다. 다시 말해 저자는 애굽을 포함 인근 전역에 걸친 극심한 기근이 단순히 자연의 재해로 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을 위한 계시적 사건임을 독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전달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애굽의 기근의 의미가 하나님의 주도적인 섭리의 일환으로 임할 계시적 사건임을 요셉의 꿈을 해석하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짐작한 바 있습니다(창41:16). 이런 저자의 의도는 현실로 나타납니다. 창세기 저자는 애굽의 가뭄이 가나안 지경까지 확대되고 있음을 통해(창42:1) 거의 20년간 헤어졌던 가나안의 야곱과 그 일행을 애굽의 요셉과 합류시키시는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을 시도합니다. 이는 다른 의미에서 야곱의 벧엘 언약과 아브라함의 횃불 언약의 성취가 구체적으로 시작되고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가나안의 야곱은 요셉의 형들을 채근해 애굽에서 양식을 사 올 것을 명합니다(창42:1-2). 요셉은 형들이 양식을 사러 애굽을 찾아와 자기 앞에 꿇어 절하는 형들과 대면합니다(6절). 요셉은 형들을 알아 봤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지 못합니다(7절). 이때 요셉은 과거에 형들에게 말했던 꿈 생각을 떠올립니다(창37:5-7).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꿈을 계시의 수단으로 삼아 당신의 미래의 계획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로는 그것이 어떻게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될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점진적이다라는 말의 의미가 이렇습니다. 세상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될 때 당시로는 불분명해서 그 본의를 밝히 확인 할 수 없던 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적으로 구체화되고 명시화되며 현실화되는 계시의 성격에서부터 연유된 표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경우는 다릅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사는 예비적으로 이미 성취됐습니다. 아울러 성경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유일한 표적과 규범으로 확증됐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구약의 계시 전달의 방식은 유효하지 않습니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지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성취된 구속의 도리가 적용되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의 전(全) 구속사의 경륜 속에서 여자의 후손 언약으로 말미암는 대속적 사역은 이제 완성됐습니다. 다만 그 공효의 효과적인 적용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세상 중에서 불러내 자녀 삼으시고, 이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성취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세상 가운데서 확장시켜 나가는 일만이 남은 셈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구속사는 이 남은 부분의 종말론적 완성을 위해 먼저 구원받은 당신의 백성들의 삶을 선용하십니다. 우리의 존재 의미와 삶의 방향성을 여기에 고정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구원의 실질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 천국백성의 삶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정의하시는 배경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남은 구속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공효의 적용'과 이로 인한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이라는 큰 두 개의 계시의 구도 속에서 진행됨을 봅니다. 요셉은 아비 야곱과 친동생 베냐민의 안부를 확인 후에(창42:13) 형들을 두 차례에 걸쳐 선의적으로 시험합니다(창42:25, 44:1). 이는 그 동안 형들의 인격과 신앙에 어떤 변화가 있었으며 형제들 상호간의 관계는 어떠한지를 살피고자 한 깊은 배려에서 나와진 처사입니다. 결과는 예전 어릴 때의 그들이 아니었음이 확인됩니다. 형제간의 우애와 희생적 사랑을 확인하게 됩니다. 요셉은 이런 저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과의 만남에 아무런 지장이나 문제가 없음을 확인합니다. 마침내 요셉은 자신의 신분을 형들 앞에 밝힙니다(창45:1). 실로 22년만의 상봉의 자리입니다. 형들의 놀라움과 두려움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안심시킵니다. 그리고 과거의 사건을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역사 안목을 갖고 해석합니다(창45:5-8). 이 과정에서 요셉은 형들의 과거 행위를 오늘의 기근에서 야곱의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한 발 앞서 보낸 하나님의 섭리적 간섭의 손길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시편 기자도 이에 동의합니다(시105:17-19). 실로 현실을 하나님의 역사 안목으로 통찰하는 탁월한 계시적 분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성도로 하여금 현실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런 성경의 총체적 계시관에 접촉되기를 원하십니다. 형들에 대한 요셉의 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투철한 '계시 의존적 신앙'과 전폭적인 '섭리 의존적 신앙'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참된 성경적 신앙의 본질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전 구속사의 경륜에 접촉됨을 통해서 비로소 성립하게 됩니다. 요셉은 형들을 재촉해 가나안의 아비 야곱과 가족들과 모든 소유를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 올 것을 종용합니다. 실로 한 사람으로 인해 그에게 부속된 여러 사람이 구원을 받는 속죄와 대속의 원리가(롬6:18-19), 한 사람 요셉으로 말미암아 야곱의 전 가족들이 애굽 이주 사건을 통해 기근으로부터 구원받는 사건 속에서 극명하게 예시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게 부속돼 죄로부터 구원받는 성도의 구원의 원리를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요셉의 생애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생애에 대한 신학적 상응성을 찾게 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연유됩니다. 야곱은 요셉의 생존 소식과 애굽의 총리가 된 사실을 확인하고 기력을 되찾아 애굽 행을 결행합니다(창45:28, 46:1). 바야흐로 하나님의 구속사 전개에 있어서 아브라함 언약성취의 맹세적 보증으로 주신 횃불언약(창15:12-17)이 오랜 정지(整地)작업 끝에 구체적 성취를 향해 본격적으로 가동(稼動)되는 역사적 순간인 셈입니다. (7)야곱 일행의 애굽이주(창46-48) 애굽과 인근 전역에 걸친 극심한 가뭄과 이로 인한 기근은 가나안의 야곱 가족들이 식량을 찾아 애굽으로 이주하는 필연적 당위성을 제공합니다. 그 결과로 요셉은 실로 이십 여 년만에 그리던 형제들과 해후하게 됩니다. 이는 자연재해로서의 기근이 단순한 우발적 사건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를 집행하시는 계시적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만일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지 않았음을 가정할 때, 그 결과를 추론해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요셉이 애굽의 총리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면 요셉의 형들은 단지 식량만을 구입해서 가나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야곱의 가족들 또한 애굽이주의 구체적 명분을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요셉이 애굽의 총리라는 사실이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이주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당시 애굽 전역에 걸쳐 찾아온 기근은 우연한 자연재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시는 필연적인 계시적 사건인 셈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실로 세상 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계시사이며 언약사이고, 나아가 구속사인 사실을 다시 한번 확증하게 됩니다. 현실을 해석할 때 구속사적 통찰력의 필요성이 요구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저자는 야곱의 애굽 행을 기록하면서 '이스라엘'이라는 그의 개명(改名)된 이름을 사용합니다(창46:1).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호칭으로서 이제 바야흐로 야곱의 애굽 행이 하나님의 주도적인 구속사 진행의 일환으로 전개되는 것임을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야곱의 갱신된 벧엘 언약(창35:10-12)과 아브라함의 횃불 언약(창15:13-16)이 보다 구체적으로 진전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형성이라는 보다 궁극적인 자손언약의 성취를 향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적인 섭리역사에 근거해 요셉을 애굽총리로 삼으시고 애굽 일대에 극심한 기근을 초래케 하심으로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큰 전기가 될 야곱 일행의 애굽 이주의 기초를 놓으십니다. 이는 앞서 맺으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언약을 신실히 수행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인 것입니다. 실로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현장이요 무대임이 여실히 증명됩니다. 사실상 세상 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임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따라서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와의 관계에서 태아를 품은 모태에 비교됩니다. 상호 보완적이고 의존적인 관계 말입니다. 야곱은 가나안을 떠나기 전 브엘세바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창46:1). 하나님 의존적 신앙의 현시입니다. 야곱의 현재적 믿음의 실상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척도입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철저히 하나님의 손길만을 구하는 성숙한 믿음의 경지에 서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애굽 행을 승낙하십니다(2-3절). 그리고 이에 더해 추가적인 언약을 주십니다. 이는 벧엘 언약의 재확인이며 갱신이고 발전입니다. 첫째,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3절). 둘째, 하나님의 애굽 동행을 약속하십니다(4절상). 셋째, 가나안의 귀환을 약속하십니다(4절중). 넷째, 요셉이 야곱의 임종을 지켜볼 것을 약속하십니다(4절하). 이런 하나님의 추가적인 약속의 보증은 물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벧엘 언약에 근거한 언약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멀리 애굽을 향해 떠나는 야곱의 심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횃불 언약이 이런 식으로 성취의 실마리를 풀어 갈 줄은 아무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지금 하나님의 언약적 계시에 이끌리어 애굽을 향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말씀을 신앙의 근거와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과 그 성취에 본질적인 근거를 둡니다(롬10:2-3, 딤후3:15-17, 딤전2:4, 딤후2:15, 요삼4).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에 무지하거나 결핍된 상황에서 성경적인 바른 신앙을 기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계시 의존적 신앙으로 나타나야 할 것을 강력히 성경은 요청합니다. 롬10:17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사람은 얼마든지 본성에 잠재된 내적 종교심의 발로에 의해 하나님을 신앙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심성을 거짓되고 부패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성경의 판정입니다(렘17:9, 엡2:1). 바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나와진 인간의 종교심으로는 하나님을 바로 알 수도, 신앙할 수도, 섬길 수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롬1:21-23). 성경은 이런 필연적 결과를 부패하고 타락한 죄성으로 돌립니다(사59:1-2). 따라서 성경의 총체적 계시에 바르게 접촉되지 않은데서 나와진 어떤 형태의 신앙도 필연적으로 우상 숭배적 신앙으로 전락될 위험에 항상 노출돼 있게 마련입니다.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신의 필요성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탐심을 위해 신을 도구화시킬 때 이를 우상 숭배로 간주합니다(골3:5).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산에서 언약식을 체결하시는 과정에서 십계명을 하사하시면서 당신을 가나안의 우상들과 차별화 시키시는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이에 있습니다(출20:1-6). 때문에 성도가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하는 당위성은 우리에게 먼저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사실에 근거해 감심으로 하나님을 우리의 주와 왕으로 모시는 자발적이며 목적적인 신앙행위입니다. 단순히 인간의 현세적 행복과 안위를 위해 하나님을 수종자로 삼는 종교적이며 이기적인 목적의 산물이 아닙니다. 야곱 일행의 애굽 행에는 야곱과 그의 열 두 아들을 포함한 전 가족이 동행합니다. 한 사람의 예외도 허락지 않습니다. 모두가 애굽 행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잃어버린 모든 자, 곧 이방인의 충만한 수(롬11:25)와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26절)가 남김없이 포함됩니다. 한 사람도 제외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의 은혜에 동참합니다(요6:39). 창세기 저자가 야곱의 애굽 행과 관련해서 야곱의 열 두 아들(요셉과 그의 두 아들을 포함)과 그의 아들, 딸, 손자, 손녀들, 전 가족을 총 망라해 족보를 통해 소개한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창46:8-27). 하나님의 언약이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들의 총 수를 칠 십 명으로 기록합니다(창46:27, 출1:1-5). 성경에서 7이라는 숫자를 완전과 성취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진 대, 이는 모든 야곱의 식구들이 빠짐없이 애굽 행에 참여했으며 이는 철저히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이루어진 사실을 드러냄에 다름이 아닙니다. 야곱이 애굽의 고센 땅에 도착해 그곳에 정착합니다. 요셉과 감동적인 해후의 기쁨을 교환합니다(창46:28-29). 실로 극적인 상봉의 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온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제 야곱 일행은 애굽의 중심부에서 비교적 격리된 변방 고센 땅에 정착해 당대 최고의 제국인 애굽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인 비호아래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백성과 나라로 형성돼 갈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 일행이 애굽 땅 고센에 정착한 사건은 하나님의 주도면밀하신 섭리적 손길이 철저히 저들의 걸음을 시종일관 인도하신 사실에 대한 구체적 정황입니다. 요셉의 안내로 야곱이 바로 왕을 알현합니다. 정식으로 애굽의 고센에 거주를 허락 받습니다(창47:9-11). 이후 본격적으로 야곱 일행의 애굽 생활이 시작됩니다. 십 칠 년의 세월을 애굽에서 보냅니다. 저자는 이때의 상황을 '고센 땅에서 산업을 얻고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27절)'고 기록합니다. 이런 저자의 표현 속에는 지금 야곱의 후손들의 중다함이 다분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언약의 성취가 진행되고 있을 뿐 아니라, 멀리 노아 언약과 아담 언약에까지 연결시키고 있음에 다름이 아닙니다. 이런 표현을 통해 저자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언약이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종말론적 목적을 향해 동일 선상에서 연계돼 연속성을 띠고 진행됨을 의도적으로 시사합니다. 이제 야곱의 임종이 다가 옵니다(창47:29).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좇아(창46:4하) 요셉을 불러 유언을 당부합니다. 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창47:29-3). 첫째, 야곱을 애굽에 장사하지 말라(29절). 이 또한 언약에 근거한 당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야곱의 기업은 오직 가나안 땅일 뿐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유언을 '언약적 유언'이라 부릅니다. 둘째, 야곱의 시신을 가나안 선영(헤브론 막벨라 굴)에 장사해 줄 것을 당부합니다(30절). 셋째, 이상의 유언을 확인시키기 위해 요셉의 맹세를 요구합니다(31절). 우리는 야곱의 유언을 통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을 신실하게 신앙의 근간으로 삼았으며 동시에 생명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왔는지를 극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 날 성도가 이런 구약의 언약 백성들의 신앙적 유산을 전수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 앞에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동일하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들 신앙의 정체성이야말로 한결 같이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은 자'들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일 후 야곱은 요셉에게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벧엘 언약(창28:13-14, 35:10-12)을 상기시킵니다(창48:3-4). 그리고 요셉이 애굽에서 낳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하며 야곱의 아들로 편입시킵니다(5절). 이후 요셉 지파는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로 양분돼 대체됩니다(수16:1-4). (8)야곱과 요셉의 죽음(창49-50) 야곱은 자신의 생을 마감하기 전 열 두 아들을 불러놓고 개인별로 장래 일에 대한 예언적 축복을 해 줍니다(창49:1). 이 과정에서 야곱은 특별히 넷째인 유다에게 의미심장한 축복을 내립니다. 유다가 형제간의 찬송이 될 것을 약속합니다(7절). 홀( )로 상징되는 왕권이 유다에게 주어질 것을 약속합니다(10절상). 메시아의 통치권이 유다에게서 나올 것에 대해 약속합니다(10절하). 야곱이 열 두 아들에 대한 축복을 마친 후 다시 한번 그들 앞에서 자신의 시신을 헤브론의 막벨라 굴에 선조와 함께 장사지내 줄 것을 재차 당부합니다. 야곱은 이 과정에서 선영의 정확한 위치와 장소를 언급합니다.(29-30절상). 매입한 경위를 소상히 언급합니다(30절하).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의 아내인 레아도 그곳에 묻힌 사실을 강조합니다(31-32절). 이는 그 땅이 마땅히 돌아갈 언약의 땅임을 강조함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래서 훗날 야곱의 아들들의 후손이 애굽을 떠나야만 하는 근거와 명분을 확증시키는 의도적 발언인 것입니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열조에게로 돌아갑니다(33절). 야곱의 장례는 애굽의 국장급으로 성대하게 치뤄집니다(창50:1-9). 이어 장례행렬이 애굽을 출발해 가나안에 도착, 야곱의 유언을 좇아 헤브론의 막벨라 밭에 있는 선영에 열조와 함께 장사됩니다(12-13절). 여러 해 후에 요셉도 나이 많아 형제들에게 언약적 유언을 남깁니다(24절). 하나님께서 야곱의 후손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실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가나안 땅으로 귀환케 하실 것이다. 그때에 요셉의 해골을 메고 가나안 땅에 장사지낼 것을 당부하며 이를 맹세시킵니다(25절). 먼 훗날 출애굽한 2세대들이 가나안을 정복해 차지하게 될 때, 요셉의 뼈를 야곱이 세겜에서 하몰의 자손에게 은 일 백 개를 주고 산 땅(창33:19)에 장사지냅니다(수24:32). 창세기 저자는 요셉의 유언을 통해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언약을 충실히 지키며 생명으로 붙잡는데서 성립됨을 강조합니다. 자신의 '해골을 메고 올라가라'는 말속에는 먼 훗날 반드시 하나님의 언약은 성취될 것과 그때에는 당연히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가나안 행을 결행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강한 믿음과 확신이 담긴 의지의 표명이기도 합니다. Ⅲ. 결론 야곱과 요셉의 죽음은 단순한 한 개인의 죽음 이상의 의미를 간직합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소위 족장시대라는 구속사의 한 경륜의 한 시대를 마감하는 계시적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야곱의 후손은 열 두 아들들로 인해 형성되는 지파적 개념에 근거한 민족과 국가의 형식을 띠고 새롭게 출현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상황전개를 통해 세상 역사 속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의 점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일반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성취되는 현장의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으로 이 구속사가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때, 왕적 통치의 개념으로 역사하던 현재적 하나님 나라(마12:28, 눅17:20-21)는 그 영광스런 모습을 가시적으로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계1:7, 행1:11, 마24:30). 이제 야곱의 개명된 이름으로 호칭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의 사 백년 이상의 계시적 침묵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는 이스라엘 열조에게 주신 언약적 계시가 중단되거나 일시적으로 정체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새로운 구속사의 지평을 열기 위한 다른 측면에서의 하나님의 섭리역사가 진행된다는 뜻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출생과 효과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 세상역사에 깊이 개입하시는 것을 통해 말라기 선지자 이후 하나님의 구속사가 표면적으로는 거의 사 백 여년 이상 일시적으로 중단된 것 같이 보여지는 것과 같은 이치로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출애굽기 2장의 모세 출생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모세를 출애굽 사건의 지도자로 택하셔서 준비하시기까지(섭리적 작정기간) 이스라엘은 중다(衆多)한 민족으로 형성돼야 할 뿐 아니라, 애굽의 종과 노예로서 때가 차기까지 고난 중에 지내야만 했습니다. 이 또한 언약의 성취내용이기 때문입니다(창15:13-16). 우리는 출애굽기서를 열면서 창세기의 이스라엘 열조에게 주신 언약, 특히 자손언약의 실상이 어떻게 중단 없이 애굽에서 진행돼 왔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살피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서가 상호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아울러 시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은 세상 역사를 성취진행의 현장과 무대로 삼고 때를 좇아서 한 치의 차착(差錯)도 없이 진행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언약적 열심이 오늘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언약백성으로 인(印)쳐 주시는데 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역사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섭리적으로 주관하시는 이런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오묘하신(신29:29) 구속의 경륜을 보다 풍성히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믿음은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흔들리거나 쇠퇴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남은 구속사를 운반하는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정체성을 뚜렷이 현시해 가게 될 것입니다. 이 크신 일을 이루시는 우리 하나님(행2:11)을 찬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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