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성경구속사 제3강 인류의 초기 역사 속에 계시된 구속사 진행
본문: 창4:1-11:3
“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貫盈) 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5~8)
Ⅰ. 도입
우리는 에덴 동산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 사상과 성격에 대해 지난 창세기 1~2장의 강의를 통해 살펴봤습니다. 실로 ‘하나님 나라 사상’은 성경 전체를 통해 계시된 객관적이고도 총체적인 주제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경의 처음 책인 창세기에서부터 이 하나님 나라 계시는 분명하게 창조의 원리 속에서 드러납니다. 특별히 창세기 1~2장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아담과 하와의 후손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고 하나님은 저들의 하나님이 되심으로 명실공히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왕국을 이루실 언약을 밝히신 계시의 정수입니다.
비록 창세기 3장에서 야기된 인간의 범죄로 인한 타락으로 이런 하나님 나라 계획이 잠시 방해를 받는 듯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 노릇 하는 은혜의 권세는 창세기 3장 6절의 아담과 하와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동시에 창세기 1장 28절의 아담에게 언약적 복으로 주신 문화명령의 본질인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해결책으로서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 언약을 주십니다. 따라서 이후 여자의 후손 언약은 성경 전체의 계시역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셔서 당신의 백성을 삼으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가시적인 기원이 됩니다. 이와 관련해서 여자의 후손 언약은 그 내용 속에 담긴 구속의 성격상 흔히 ‘원시복음’(proto gospel) 또는 ‘최초의 복음’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찾으시는 가운데 당초 창세기 1~2장에서 계시하셨던 신정적(神政的)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시려는 재창조의 사역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오늘부터는 이런 하나님의 구속사가 그 방향성에 있어서 최종적이며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면서 어떻게 세상 역사를 무대로 해서 점진적으로 진행돼 가는지를 성경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소유하게 되는 참된 구원과 바른 신앙의 도리는 바로 이런 성경적 초기 역사로부터 출발하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에 그 뿌리와 기원을 두는 데서 비로소 그 실질이 찾아지기 때문입니다.
Ⅱ. 전개 : 점진적인 하나님의 구속적 계시사역(창세기 4~11장)
이제 창조원리(창 1:28, 2:17)에 근거해 계획되었던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하나님 나라 사상은 인간의 범죄로 인해 구속의 원리(창 3:15)로 바뀝니다. 다시 말해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미래의 구속주를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당신의 백성을 찾으시는 가운데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신정왕국을 세우시려는 구속의 경륜입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임기응변 식으로 취해진 불가피한 조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신 29:29)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계시원리에 근거해 이미 삼위의 하나님에 의해 합의된 천상의 약정(엡 1:4~14; 롬 11:32)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창세기 4장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인을 아들로 주시는 사건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에덴 밖에서의 인간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소개합니다. 그러나 가인의 출생사건은 단순히 아담과 하와의 자연적 출산의 얘기가 아닙니다. 그 본질에 있어서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 언약이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구속사가 세상역사 속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음을 증거 합니다. 이는 이미 앞 강론에서 살펴 본대로 세상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인 사실을 명백하게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인류 초기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역사의 특징
성경의 초기 역사는 보편적 인류역사의 급속한 번성을 소개합니다. 이때 창세기 저자는 이런 일련의 세상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역사 진행이 ‘목표 지향적’이면서도 ‘점진적’인 성격을 띠고 전개됨을 기록합니다. 여기서 ‘목표 지향적’이라 함은 궁극적으로 세상 역사가 역사의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가시적으로 출현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향해 지속적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목표 지향적’인 역사가 ‘점진적’이라는 것은 여자의 후손 언약의 핵심사상인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이 암시적, 은닉적인 데서 명시적이고 구체적인 방향으로, 모형적, 예표적인 것이 실체적이고 본질적인 것으로 점진성을 띠고 발전해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결국 여자의 후손언약의 궁극적 당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구속사 진행의 절정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몇 가지 예를 통해 계시역사의 점진성의 실례를 살펴보겠습니다.
⑴ 여자의 후손(창 3:15)의 경우
당시 아담으로서는 여자의 후손이 정확히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자신들의 죄를 없이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 내용과 방식(구속의 도리)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단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특정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가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실 것에 대해 희미하게 나마 의미적으로 이해하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점진적 계시진행의 특성상 이때에는 계시내용의 구체적 전모가 다만 깊은 베일에 가려진 채 암시적으로만 주어졌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구약적 배경 하에서의 암시적이며 모형적인 계시가 신약의 완성된 복음의 빛 아래서 어떻게 그 구체적인 실체를 조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① 감취었던 약속의 씨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시라”(갈 3:16)“?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엡 3:3~4)“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6~27)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창세기 12장 2~3절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 속에 나타난 후손(씨)의 개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킴으로서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을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이삭의 실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더욱이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는 보다 단도 직입적으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는 말씀을 통해 창세기 3장 15절에 언급된 여자의 후손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확증시키고 있습니다.
② 참 이스라엘의 정체성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갈 3:7)“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
이뿐만이 아닙니다. 바울은 참 이스라엘백성의 정체성을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찾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에 한정시켜 설명합니다. 이런 사실은 아브라함을 머리로 한 육적 이스라엘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요 영적 이스라엘이 참 하나님의 백성 됨을 시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3장 3~6절과 골로새서 1장 26~27절을 통해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함께 새사람(하나님 백성)에 참여하는 논증을 통해 이를 ‘비밀(3~4절)’이라는 단어로 표현함(엡 3:1~6)도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다시 말해 구약계시 속에서는 이방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과 함께 하나님의 지체가 되고, 후사가 되고, 약속에 참여하게 될 것에 대해서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는 지적입니다. 곧 구체적이며 명시적으로는 계시하고 있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③ 구약 계시의 제한성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엡 3:5~6)
바울은 이를 부연 설명하면서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않으셨다’고 구약계시의 제한성을 못박아 설명합니다(엡 3:5).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의 복음 안에서 이 모든 율법적 제약과 구속(拘束)이 해제되고 마침내 화목 된 한 새사람을 재창조하게 된 것입니다(고후 5:17).
⑵ 구약의 제반 의식과 절기 및 제도의 경우
“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다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 9: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 2:19~21)
신약에서는 구약의 의식과 절기 등을 지적하면서 이는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못박습니다. 몸 곧 실체는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골 2:16~17). 이 말의 의미는 실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예표적 성격을 띤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히브리서 기자 또한 동일한 내용들을 설명하면서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라고 그 제반 정결 의식의 한시성을 강조합니다(히 9:10). ① 구약의 유월절 어린양과 속죄제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구속 사역을 예표합니다(요 1:29; 고전 5:7; 히 9:11~14, 10:1, 18).
② 구약의 제반 절기 및 안식년, 면제년, 희년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안에서 사죄의 은총으로 베풀어지는 구원의 기쁨과 이를 만끽하는 참된 안식의 예표입니다(눅 4:17~21, 6:5; 골 2:16~17).
③ 구약의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과 교제와 통치의 가시적 표상으로 임마누엘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요 2:19~21).
2. 초기 역사 속에 나타난 인류의 두 계열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범죄와 죄책의 일환으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납니다(창 3:23~24). 그러나 이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의 배려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죄인으로 영생하는 삶은 가장 끔찍스런 저주와 심판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창 3:22).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심으로 생명나무에로의 접근을 막으시는 것을 통해 죄 사함의 길을 열어 놓으신 셈이 됩니다. 이는 노동의 수고와 죽음의 형벌을 감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여지를 남겨 놓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고 있음을 봅니다.
한편 저들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했던 죄의식으로 인한 수치심과 두려움에서 자신들의 손으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습니다(창 3: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친히 벗기시고 손수 가죽옷(21절)을 지어 입히십니다. 이는 범죄한 아담에게 여전히 부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실제적이고 상징적인 계시사건입니다. 비록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여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 언약 안에서 여전히 부은 바 되고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생명보존과 자기보호는 인간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저들을 지으신 창조주이시며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여전히 강조하신 사건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보호와 보존을 통해서만 인간의 생명이 궁극적으로 보장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선악과의 계시 속에 담긴 생명의 원리와 동질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자의 후손 언약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이들의 범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아담부부에게 베풀어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실로 은혜의 왕 노릇 하는 하나님의 권세는 죄의 권세를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음을 보여주는 실예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왕 노릇 하는 은혜의 권세는 동일하게 당신의 백성을 사망의 권세와 죄의 권세 가운데서 넉넉히 구출하시는 유일한 구원의 수단으로 역사 합니다.
⑴ 가인의 출생(불경건한 계열)
창세기 3장 15절의 언약 속에는 복음의 밝은 빛과 함께 선악간 치열한 투쟁의 역사가 전개될 것이 동시적으로 암시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담의 범죄한 후손은 구속사 진행의 계시적 성격상 불가피하게 여자의 후손 계열과 뱀의 후손의 계열로 나뉘어지며 이 두 계열간에 사생결단의 치열한 투쟁과 반목의 역사가 진행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긴장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가인은 아담 부부가 에덴을 떠나서 낳은 처음 맏아들로 소개됩니다(창 4:1). 그러나 이 말은 가인이 아담에게서 출생한 최초의 자녀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이후 전개되는 일련의 사건정황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 앞을 떠날 즈음에 이미 적잖은 사람들이 생존하고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입니다(창 4:14~17). 이런 기술은 가인 외에 아담과 하와에게는 이미 다른 자녀를 출산한 사실이 있었음을 가리킵니다.
① 우리는 창세기 저자의 이런 기술방식을 통해 성경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중을 기록한 계시적 목적 곧 구속사 의 경륜(economy)에 비상한 관심을 집중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이후 진행될 이스라엘 역사를 포함해서 세상역사에 관해 연대기적 서술이나 보편적 역사 사건에 별반 관심을 쏟지 않고 있음을 봅니다. 설령 세상역사를 소개하는 경우일지라도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을 위해 인간역사가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가를 위해 보조적 수단과 방편적 차원에서 소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처음부터 성경의 역사가 창세 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의 궁극적 성취라는 명백한 의도를 갖고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시사합니다. 세상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인 사실이 인류 초기역사에서부터 이런 방식의 선택적 기술을 통해 분명히 확인됩니다. ② 따라서 성경역사 기록의 초점과 방향성은 오히려 일반 역사를 도구 삼아서 하나님의 구속적 계시역사가 세상 가운데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독자의 관심을 집중시킵니다. 성경 독자들은 이런 사실에 절대적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 말은 성경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속사적 역사의식과 안목을 갖고 세상을 직시하고 해석하며, 이에 근거해서 성경을 연구하고 그 내용과 원리를 신앙의 근간과 생명의 도리로 삼아야 할 것을 절대적으로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가인의 출생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③ 우리는 가인의 출생의 본의를 단순히 아담과 하와를 통한 자연적 출생이라는 일반론적 차원을 넘어서 이런 구속사적 계시 안목을 갖고 해석해야 합니다. 아담은 가인을 낳았을 때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여호와로 인해 득남했음’을 고백합니다(창 4:1). 이는 단순한 자연적이고 생물학적인 득남으로 인한 기쁨의 고백이 아닙니다. 창세기 3장 15절의 언약의 성취를 학수고대하던 끝에 나와진 언약적이며 계시적인 믿음의 고백입니다. ④ 여자의 후손 언약이 가인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진행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나와진 안도의 고백입니다. 다시 말해 아담은 가인으로 하여금 여자의 후손 언약이 구체적으로 성취돼 나갈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껏 부풀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에게 자녀를 허락하심은 여자의 후손 언약을 차착(差錯)없이 성취시키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인 동시에 이는 아담과 그의 후손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음을 보증하는 언약적 계승자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⑵ 가인과 아벨의 제사
아담은 가인에 이어 아벨을 낳습니다(창 4:2). 이제 가인은 농사꾼으로 아벨은 목동으로 성장합니다. 얼마의 세월이 흐른 후에 이들은 각자의 소산으로(가인은 곡식으로, 아벨은 양의 첫 새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이때 아벨의 제사는 열납되었으나 가인의 제사는 거절당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결과를 초래하게 됐을까요? 흔히들 쉽게 해석하듯이 열납의 근거가 피의 유무와 관련된 제물의 차이에서 기인했을까요?
①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의 제사가 열납 된 근거를 믿음으로 드린 사실에 기초해서 해석합니다(히 11:4). 이는 가인의 제사가 믿음으로 드려지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제사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② 이는 범죄한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은혜의 수단으로 주신 여자의 후손언약의 구속적 본의를 철저히 믿고 신뢰하는데서 나오는 구원론적 근거에 의한 신앙적 행동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시는 구속의 경륜이 어떻게 여자의 후손 언약을 통해 진행될 것이며, 이에 근거한 구원의 도리를 생명으로 붙잡는 데서 나와진 내적 믿음의 외적표현이 제사였다는 사실입니다. ‘더 나은 제사’(히 11:4)라는 표현 속에 담긴 의미가 이렇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벨의 제사의 성격을 신약적 배경에서 조명한다면 ‘신령과 진정’(요 4:24)으로 드린 예배에 해당합니다. ③ 그러나 이 일에 가인은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신앙과 생명으로 수납하는 데서 나와진 하나님 중심의 신앙적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아벨과는 반대된 자의적(自意的) 행동의 결과로 드려진 단순한 종교적 심성의 발로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받으심 직한 제사, 곧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신 진리의 체계에 입각해 드리는 구속사적 의미의 제사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근거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해야 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호 4:6, 6:3). 우리의 신앙이 계시 의존적 신앙으로 나타나야 하는 당위성이 이에서 나와집니다. 성경은 제아무리 기독교적 경건과 거룩의 모양을 갖추고 하나님께 열심을 자아낸다 할지라도 성경적 지식의 체계에 근거하지 않는 한은 자기 의를 위한 자기열심에 불과하며 하나님께는 불복종과 불법으로 판정될 뿐임을 심각히 경고하고 있습니다(롬 10:2~3; 마 7:21~23).
④ 따라서 인간의 내적 종교심으로부터 나와진 일체의 신앙적 행동은 그것이 제아무리 기독교적 식양을 갖추고 나타난다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심성(엡 2:1; 렘 17:9) 때문에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성품을 근본적으로 반영해 내지 못한다는 게 성경의 지적입니다(롬 1:21~23).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뿐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의 철저한 다스림을 받는 전제 하에서만 하나님의 성품은 비로소 반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갈 2:20).
⑤ 그렇습니다. 가인의 제사가 거절당하고 아벨의 제사가 열납된 것은 외적 제물의 차이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제물에 담겨진 내적 신앙고백의 유무와 그 믿음의 출처와 성격과 배경에 철저히 관련된 문제입니다. 가인은 단지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타락한 종교심을 부추겨 자의적으로 드렸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제기됩니다. 성경은 이를 악한 행실이라고 판정합니다(요일 3:12). 이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음을 시사합니다. 이사야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이는 ‘보이기 위한 제사’였으며 ‘성전 마당만 밟고 가는’ 형식적 제사 이상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사 1:11~13). 아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순수한 신앙 고백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내다보며 소망가운데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의 제사가 열납된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감찰하십니다. 내용을 중시하십니다. 화려하게 장식된 외적 형식을 거절하십니다. 물론 참된 내용은 참된 경건과 거룩의 형식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이런 예배의 원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요구되는 불변의 법칙입니다(요 4:23~24).
⑶ 가인의 아벨 살해사건
가인은 아벨의 제사만이 열납된 데 앙심을 품고 시기와 질투의 마음을 억제하지 못한 나머지 급기야 아벨을 살해합니다(창 4:8). 이렇게 해서 가인은 인류의 역사상 최초의 살인자라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깁니다. 그러나 이 또한 단순한 형제지간의 반목과 갈등에서 야기된 우연한 살인사건으로만 봐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이 살인 사건이 하나님께 드려진 제사문제와 연관돼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의 생애가 여자의 후손과 관련된 하나님의 언약성취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제사와 예배란 동질성의 성격을 띤 신전(神前)적 신앙행위이며, 죄로부터의 구속을 감사해서 드리는 구원론적 근거에 입각한 신앙적 행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태초의 구속의 경륜에 입각한 구원의 도리를 생명과 신앙의 뿌리로 붙잡는 데서 표현된 예배가 아니면 하나님과는 무관할 뿐 아니라 이를 열납 하실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함을 강조(요 4:24)할 때의 의미가 이렇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의 아벨 살인의 배경은 무엇일까요?
① 먼저 아담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언약의 당사자인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창 3:1~5) 범죄케 함으로써(창 3:6) 이를 무산시키려 했던 사단의 고도의 술책(術策)에서부터 찾아야 합니다. ② 아담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 언약(창 3:15)을 통해서 죄 문제(창 3:6)를 해결함과 동시에 아담에게 약속한 하나님 나라 계획(창 1:28)을 지속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단의 일차 시도는 수포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요 10:28~29)? 하나님께 감히 대적할 자가 누구입니까? 그 분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능가할 자가 누구입니까?
③ 그러나 이 말은 사단이 패했기에 다시는 하나님께 도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단의 속성이 대적하는 자요, 거짓말하는 자요, 참소 하는 자이기에 하나님을 대적해 하나님 나라 계획을 방해하는 일을 자신이 불 못에 들어가기까지(마 25:41; 계 20:10)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시험하는 일도 이런 구속사적 배경 하에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④ 이런 사단이 여자의 후손 언약으로 1차 계획이 실패하자, 2차 계획을 세웁니다. 사단은 1차 때 뱀을 도구로 사용했듯이 이번에는 아담의 처음 자녀인 가인을 도구로 삼습니다. 보다 적극적인 도전입니다. 그리고 아벨의 제사를 열납 하심으로 여자의 후손 언약의 계승자로 암시되고 있는 아벨을 살해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도(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한 하나님 나라 건설)를 또다시 좌절시키고자 재차 시도합니다(요일 3:12).
⑤ 가인의 아벨 살인 사건은 이렇게 에덴에서부터 시작되는 총체적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에 입각해서 해석해야만 바른 성경적 결론에 도달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 건설을 방해하려는 사단의 지속적이고 끈질긴 계략이 이제 가인을 하수인으로 삼아 하나님의 언약의 계승자인 아벨을 살해하게끔 사주했던 것입니다. 이런 기술을 통해 지금 창세기 저자는 뱀의 후손계열이 가인을 통해 계승되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간단(間斷)없는 적대적 관계와 사생결단의 투쟁적 언약의 성취는 아담의 자녀들간에서 이미 그 종말론적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⑥ 아울러 가인의 살인 사건은 아담부부로부터 발생한 죄가 얼마나 급속도로 ‘오염’됐으며(부모의 불순종→자녀의 살인행위로 발전) 또한 실제적으로 ‘권세’를 발휘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후 죄의 심각한 심화현상은 ‘가인의 벌은 칠 배이나 라멕의 벌은 칠십 칠 배’라는 가인의 후손인 라멕의 고백 속에서 극명하게 나타납니다(창 4:24).
이런 의미에서 창세기 4장~11장의 내용은 인류의 초기역사 속에 나타난 불가시적인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을 보여줄 뿐 아니라, 죄악의 급속한 확산과 심화현상으로 말미암는 필연적인 하나님의 심판의 당위성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⑷ 가인의 유리와 자녀출생
하나님은 아벨에 대한 살인의 형벌로 가인을 유랑자로 떠돌게 합니다(창 4:13). 그러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가해질 수도 있는 보복적 살해위협으로부터 가인을 보호하심으로 은혜를 베푸십니다. ‘가인을 해하는 자에게는 벌이 칠 배나 더해 질 것이다’(15절)라는 말씀이 이를 증명합니다. ① 가인은 이후 에덴 동편 놋 땅에 자리를 잡습니다. 여기서 아내를 얻고 첫 자녀를 낳습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에녹이라 부릅니다. ② 곧 이어 가인이 착수한 일은 성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자신을 주변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본능적 행동입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불 신앙적 행동으로 하나님을 자원해서 의지하고 의존하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처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가인을 해하는 자에게는 ‘벌을 칠 배나 받을 것’(15절)에 대해 이미 경고하심으로 아무도 그를 해하지 못할 것에 대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가인은 처음부터 불신앙자이며 이로 인해 사단에 속한 자임을 넉넉히 짐작하게 됩니다.
성(城)은 인간에 의해 형성된 도시문화를 상징합니다. 이는 철저히 인본주의적이며 세속주의적인 문화를 표상 합니다. 하나님 의존적인 삶에서 자의적이고 자주(自主)독립적인 삶으로의 전환을 가리킵니다. 가인은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떠난 불신앙의 모습을 철저히 드러내게 됩니다(유 1:11). 이런 식으로 신본주의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인본주의적 사상은 이후 바벨탑을 쌓는 일로 확대(창 11:1~4)되는 가운데 정면으로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그 본질적인 사단적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③ 이후 창세기 4장을 통해 저자는 가인의 불경건하고 불신앙적 후손들의 계보를 기록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자녀들이 이미 세상 속에 심겨진 사실(마 13:24~30; 요 8:44)을, 5장의 경건한 셋의 자녀와 대비시킴으로 소개합니다.
⑸ 셋의 출생
창세기 저자는 가인의 불경건한 계열의 자손들을 소개하면서 그 말미에 경건한 계열로 아담의 셋째 아들인 ‘셋’의 출생사건을 기록합니다.
① 셋의 계열이 경건한 계열이라는 사실은 ‘아벨을 대신해서 주셨다’(창 4:25)라는 내용과 셋의 아들인 에노스가 출생할 때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26절)는 표현을 통해서 이를 넉넉히 뒷받침합니다. ②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라는 표현은 정당한 내용과 형식을 통해 예배로서의 제사를 드리게 됐음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여호와란 이름은 구속사의 진행과 관련해서 선(先)언약하시고 후(後)성취하시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미하는 용어(출 6:2~8)로 사용됩니다. 이는 앞에서 아벨이 드린 제사의 성격에서 살펴봤듯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여자의 후손언약에 근거해 감사와 소망가운데서 드려진 구원론적 예배로서의 제사를 드리게 됐음을 의미입니다. 이는 그 당시까지는 하나님을 향한 구체적인 예배행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당시의 영적 암매와 패역한 시대적 상황을 엿보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제 또다시 구속사를 집행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때가 도래하게 됩니다.
3. 셋의 계열을 통한 점진적 구속사의 진행(창5장)
창세기 저자는 창세기 5장에서 여자의 후손에 대한 언약의 구속사적 진행이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셋째 아들인 ‘셋’을 통해 진행됨을 소개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구속사적 계시역사에 깊이 개입하고 계심을 암시적으로 가리키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여자의 후손 언약은 이런 방식으로 사단의 간섭과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더 큰 은혜의 왕 노릇 하는 권세를 발휘해서 세상 역사 속에서 당당하게 그 성취를 향한 자태를 드러냅니다.
이때 저자는 이런 하나님의 구속사가 세상역사 속에서 진행되는 사실을 특별히 ‘족보의 기술’을 통해서 성경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족보의 내력을 상세히 기술함으로써 이를 ‘계시적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⑴ 계시적 도구로서 족보의 의미
성경에서 족보는 구속사의 진행에 있어서 계시적 도구로 사용됩니다. 이때 족보 기술(記述)의 구속사적 의미는 첫째, 그 내용에 대한 역사적 사실성의 확증과 보증을 시사할 뿐 아니라, 둘째, 구속사 진행의 새로운 계시시대가 개막되는 신호탄의 기능을 수행하며, 셋째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향한 점진적 구속 계시의 절정을 지향하는 계시적 통로로 작용하기도 합니다(마 1:1~16; 눅 3:23~38). 따라서 족보는 세상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의 전개를 위한 언약 성취의 방편으로서의 계시적 기능과 역할을 수행합니다. 구체적 성경의 실례를 소개합니다. ① 창세기 4장에서 소개된 가인을 통해 나타나는 불경건한 인류의 한 계열을 소개합니다(창 4:17~22).
② 창세기 5장에서는 아담에서 셋으로 연결되는 경건한 인류의 다른 한 계열을 소개함으로 여자의 후손 언약이 본격적으로 세상역사 속에서 시행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창 5:3~32). 창세기 저자는 이런 식으로 셋의 출생과 그를 통한 족보의 기술을 통해 여자의 후손 언약을 기필코 성취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열심을 성경 독자들에게 강력히 부각시킵니다.
③ 창세기 10장에서는 노아의 세 아들들로 인해 생육하고 번성하는 ‘보존 언약’(창 9:1~2)에 근거한 새로운 인류의 기원을 소개합니다. 이는 앞에서 이미 약속하신 바 있는 하나님의 선(先) 언약(창 6:18)과 내용과 성격에서 의미적으로 상통하는 것으로서 창세기 1장 28절의 창조언약의 갱신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노아의 보존언약의 궁극적인 성취 또한 창세기 3장 15절의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속의 전제 하에서만 궁극적인 실현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④ 창세기 11장 10절을 보십시오. 노아의 세 아들 중, 셈으로부터 시작되는 경건한 계열, 즉 여자의 후손의 언약적 계보가 차별화 되어 소개됩니다. 이때 셈의 다섯 아들 중(창 10:22) 셋째인 아르박삿을 통해 셈의 계보가 선택적으로 진행되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속사의 진행은 처음부터(아담→셋→노아→셈→아르박삿 등)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한 선택적 사역에 근거해 시작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인간의 행함이나 공적은 전혀 무관함을 처음부터 철저히 확증시키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위로부터 거저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무상의 은혜일 뿐입니다. 어떤 특정한 행위에 근거한 조건적 보상이나 대가가 아닙니다. 노아를 당대의 의인이요 완전한 자로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한 사실은(창 6:8~9) 그가 먼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의한 선택적인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사실이 전제됐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노아 역시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수밖에 없는 보편적 인류의 성정을 소유한 죄인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 ⑤ 마태복음 1장 1~17절과 누가복음 3장 23~38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에게서 가시적이고 명시적으로 나타난 구체적인 자손언약의 성취가 다윗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최종적으로 성취된 내용의 기록입니다. 이렇게 해서 구속사의 핵심인 여자의 후손 언약은 예수님에게서 성취의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바야흐로 옛 언약이 완성되고 새 언약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⑥ 이런 의미에서 성경에서의 족보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언약성취의 통로’로서의 계시적 역할과 기능을 담당합니다.
⑵ 족보를 통해 계시된 언약적 구속사의 진행(창5장)
창세기 4장은 불경건한 계열로 가인의 후손 족보를 기술하면서 끝 부분(25~26절)은 대조적으로 경건한 계열의 셋의 출생을 언급함으로 양 계열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킵니다. 이는 향후 이미 죽은 아벨을 대신해서 셋의 계열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역사가 진행될 것에 대한 암시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5장은 이런 저자의 의도적인 구도 속에서 기술됩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저자는 ‘여자의 후손 언약’으로서의 구속사의 진행을 아담에서 출발해 셋으로 연결시킵니다(창 5:3). 이는 이미 아벨 대신 주신 자녀라는 아담의 고백(창 4:25)을 통해 그의 출생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를 짐작케 합니다. 그렇습니다. 셋은 아벨을 대신해 아담 이후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될 언약의 계승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② 이렇게 해서 세상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사는 아담에게서 셋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에녹을 거쳐 노아까지 이릅니다(창 5:28~29).
③ 그런데 저자는 구속사의 진행과정을 통해 여자의 후손 계보를 소개하면서 아담에서 노아까지를 10대로 끊어 소개합니다. 성경에서 10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를 의미합니다. 이는 철저히 의도적인 기록방식입니다. 왜냐하면 이후 인류의 역사는 죄의 관영으로 물 심판을 받아 멸망에 처하게 되는 바, 오직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만이 은혜로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창 6:18). 다시 말해 노아 이후 새로운 인류의 신기원의 시대가 열리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④ 여기서 물 심판이 함의하고 있는 구속사적 의미는 죄의 결국은 하나님의 필연적인 심판에 처해진다는 사실의 강조입니다. 아울러 이는 종말론적 심판을 예표하는 계시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도래하게 될 종말의 시대적 상황을 노아의 때와 롯의 때를 실례로 들어 설명함으로 이런 사실을 증명합니다(마 24:37~39; 눅 17:26~30). 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 심판으로부터 노아와 그의 가족을 보존하신 사건은 노아를 통해 이어질 새로운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적 배려인 동시에 창조언약(창 1:28)과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의 지속적인 성취를 위한 하나님의 중단 없는 신실성의 표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 편에서 무조건적이며 일방적으로 맺으신 신적 기원의 특성상, 인간 편에서의 불법과 불순종에 언약적 심판을 내리실 망정 결코 중도에서 언약 자체를 파기하거나 취소할 수 없습니다. ⑥ 창세기 5장 29절은 라멕의 노아를 향한 예언적 고백을 통해 어느 정도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의중을 암시적으로 시사합니다.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⑦ 더하여 우리는 본 계보를 주목하면서 저자가 이를 10대로 마감하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족보의 의미 중, 한 시대가 마감되고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것을 감안한다면 창세기 5장의 족보 내용은 아담을 머리로 해서 시작된 처음 인류가 내용적으로 마감되고, 이제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됨을 알리는 셈이 됩니다. 이후 물 심판으로 인해 인류가 멸망당하는 것으로 이런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4. 노아 언약 : 인류를 위한 보존 언약
창세기 4장에서 11장까지의 인류 초기역사의 구속사적 특징은 한 마디로 죄의 급속한 확산과 관영으로 인한 하나님의 필연적 심판이라는 주제에 모아진다 하겠습니다. 노아 시대는 물 심판을 통해서, 바벨탑 사건 때는 저들을 땅에서 흩으심으로 세상역사에 깊이 개입하시는 가운데 인간의 패역한 죄과에 합당한 책임을 물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기에 처음 인류가 멸망을 당하는 사건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후 노아 시대의 물 심판은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사건과 함께 다가올 현 인류의 죄에 대한 최후 심판의 실례로 성경은 예표합니다(눅 17:26~30).
그러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물 심판 중에서도 노아와 그의 가족을 은혜로 구원하셔서 보존해 주셨습니다(창 6:8~9). 이는 종말론적 최후의 심판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공효 안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은혜로 구원해 주실 것에 대한 예표적 사건이기도 합니다(골 1:13~14; 요 5:24). 이제 물 심판 이후 인류의 보존을 위한 노아 언약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⑴ 죄악이 관영함(창 6장) 성경은 노아 때 물 심판의 이유를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함’에 돌립니다(5~6절). 그리고 이런 급속한 죄의 확산과 심화의 배경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표현되는 경건의 계열이 ‘사람의 딸들’로 묘사된 불경건한 계열과의 통혼관계에서 찾기도 합니다(1~3절).
① 이는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타락한 본성상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적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사 55:8~9).
②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죄란 하나님의 뜻을 고의적이고 적극적으로 거역하는 불순종에서 찾아짐을 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금령법을 어긴 사실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 줍니다(창 2:17, 3:6). 아울러 외적 불순종의 범죄행위는 내적 탐심의 구체적 발로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③ 처음 아담의 범죄는 아들 가인으로 하여금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살인 사건을 유발시킬 정도로 급속한 오염과 왕적 권세를 발휘합니다. 이런 사악한 죄성은 급기야 인간을 자기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후회케 할 정도로 자라서 마침내는 멸망의 심판을 자초하기에 이릅니다(창 6:5~7).
④ 그렇습니다.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이제 자의적으로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도, 알 수도, 스스로 회개하여 구원의 교제를 회복할 수도 없는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력한 존재가 되어 버렸음을 성경은 고발합니다(롬 1:21~32, 3:10~18; 엡 2:1).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없는 이유가 이에서 나와집니다(고전 12:3). 그러므로 인간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엡 2:8~9). ⑵ 물 심판(창 7~8장)
하나님은 40주야에 걸쳐 땅의 샘들을 터뜨리시고 하늘에서 비를 내려 땅을 물로 쓸어버리십니다(창 7:11~12). ① 땅위에 호흡하는 모든 생물이 죽음의 심판에 처해집니다.
② 그러나 방주를 예비케 하심으로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암수 한 쌍 식을 보존시킵니다.
③ 노아와 아내와 세 아들과 세 자부들, 오직 여덟 식구만이 유일한 인류의 남은 자로 하나님의 구원에 은혜를 입습니다.
④ 이렇게 해서 노아 홍수 사건은 ‘죄의 필연적 심판’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은 자의 선택적 구원’이라는 구속사의 두 원리를 오고 오는 세대에 경고와 위로의 메시지로 남기게 됩니다.
⑶ 노아와의 언약 체결(창 9장)
물 심판 후 지상에 인류란 오직 노아의 여덟 식구뿐입니다. 처음 인류가 아담과 하와를 통해 생육하고 번성했듯이 이제 노아를 머리로 한 새로운 인류 또한 이들을 통해서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관련해서 노아와 새롭게 언약을 체결하십니다(창 9:1~2). 그러나 이 언약은 그 내용적 성격상 아담의 창조언약(창 1:28)과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의 재 확증 및 갱신의 의미를 지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홍수 후 노아와 맺으시는 보존언약을 일컬어 ‘내 언약’(창 6:18)이라고 미리 홍수 전에 언급해 주심으로 노아 이전에 이미 아담에게 베푸신 ‘어떤 특정한 언약’과 동질성임을 강조하십니다. 이런 사실은 ‘노아 언약’이 인류의 처음 머리인 아담의 창조언약과 내용적으로나 의미적으로 동일한 연속선상에서 주어진 갱신된 언약임을 시사합니다. 아울러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의 보존과 번성이 가능케 된 사실로 인해 노아 언약을 ‘보존 언약’이라고도 부릅니다.
① 노아의 보존언약이 아담의 창조언약의 재 확증 및 갱신인 사실은 두 언약간의 내용을 기술하는 저자의 표현 방식의 동질성을 통해서 확인됩니다.
② 저자는 노아 언약을 기록하면서 그 성격을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창 9:1상)라고 기술함으로써 아담에게 주신 언약의 성격(창 1:28상)과 의도적으로 일치시킴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노아의 언약은 아담의 언약과 같이 본질적으로 ‘언약적 복’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③ 이 뿐만이 아닙니다. 내용적으로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창 9:1하)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아담언약의 재확인 및 갱신임을 확증시킵니다. 이는 자손을 통해서만이 여자의 후손 언약이 성취될 수 있음을 감안할 때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④ 이렇게 볼 때, 노아 언약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와 방향성도 아담의 창조언약이 그러하듯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의 성취’라는 당초의 주제를 지향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두 언약간에 달라진 것이 있다면 창세기 1장 28절의 창조언약은 아담의 범죄 전에 맺어진 언약인 반면, 창세기 9장 1~2절의 노아 언약은 아담의 범죄 후에 맺어진 언약이라는 사실입니다.
⑤ 그렇지만 두 언약간 보다 두드러진 차이는 언약의 시기로 말미암는 성취의 방식에서 찾아집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1장 28절의 언약은 창세기 2장 17절의 선악과 금령법에 절대 순종하는 창조원리의 방식에 근거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언약인 반면에, 창세기 9장 1~2절의 노아 언약은 아담의 범죄 이후에 맺어진 언약으로서 여자의 후손을 통해 죄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는 구속의 원리 하에서만 성취될 수 있는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⑥ 결국 언약의 최종목표인 하나님 나라의 성취는 여자의 후손언약이 지향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실현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이후 전개되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성격은 자연히 하나님 나라와 여자의 후손과의 관계성에 보다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춰서 진행될 것이 자명합니다.
⑷ 새로운 인류의 번성(창 10장)
노아에게는 세 아들 셈, 함, 야벳이 있습니다(창 6:10, 9:18). 이제 이들을 통해 새로운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은 어떤 불가피한 상황 하에서도 결코 취소되거나 파기될 수 없음을 시사함에 다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성도의 구원의 절대 안전과 보장이 이에 근거하며 하나님의 말씀만이 신앙과 삶에 유일한 절대규범이 되는 이유가 이에서 나와집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말미암는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눅 22:19~20). 노아는 세 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향후 계획을 선지자적 안목을 갖고 예언적 축복을 통해 알려 줍니다(창 9:24~27). ① 저자는 노아의 축복을 통해 ‘셈’과 그의 후손을 향하신 하나님의 각별한 배려와 은혜를 기록합니다(창 9:26). 이는 향후 하나님의 구속사의 진행이 셈의 후손을 통해 진행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입니다. 곧 이어 그의 후손의 생육과 번성이 소개됩니다(창 10:21~31).
② 야벳은 셈에게 부속되어 셈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하게 될 것을 언급합니다(창 9:27). 동일하게 그의 후손의 생육과 번성이 소개됩니다(창 10:2~5).
③ 함은 가나안으로 대표되는 바, 형제들의 종이 될 것을 기록(창 9:25)합니다. 이는 실제로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을 머리로 해서 형성된 이스라엘 민족이 후일 가나안을 정복함으로 그 예언적 내용이 성취됨을 봅니다. 그의 후손의 생육과 번성이 소개됩니다(창 10:6~20).
④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구속사의 계시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어날 ‘제한적이고 예비적인 예언’임을 감안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속의 언약적 계시 안에서 지금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은 이미 무너졌음을 성경은 증언하기 때문입니다(엡 2:11~19). 따라서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은혜로 베푸시는 믿음에 근거해서 나라와 민족과 성별의 구분 없이 누구든지 하나님의 양자로 편입될 수 있습니다(롬 8:15).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그 성취의 절정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⑸ 바벨탑 사건(창 11장)
물 심판 후 노아의 세 아들들로 인해 인류는 괄목할 만한 생육과 번성을 가져옵니다(창 10:32). 이는 인류를 보존하시려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한 성취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내 조상들의 범죄의 전철을 밟게 되는 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신들의 소견에 좋을 대로 행하는 악한 죄 성을 여전히 드러냅니다. 당시 인류가 공조해서 연합적으로 건축한 바벨탑은 이런 하나님에 대한 인간 반역의 극치를 표상 하는 대표적 케이스로 기록됩니다.
① 처음에 이들은 동일한 언어를 사용했습니다(창 11:1). 이들은 인류의 증가로 인해 보다 넓은 지형을 찾아 동방으로 이동했습니다. 드디어 시날 평지를 만나게 됨으로 그곳에 정착할 뜻을 세웁니다. 거기에 성과 대를 쌓자고 공모합니다(창 11:2, 4). 인간의 자주적 통치국가를 세우자는 결의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신들의 의향대로 결정한 사실의 기록 내용입니다. 자신들의 조상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신의 계획과 마음의 소원을 좇아 행함이 하나님의 물 심판을 자초했던 사실(창 6:5~6)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을 텐 데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죄성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할 수 없을 뿐 더러, 더욱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바, 하나님을 향한 이런 적대적 반역을 또 다시 기도하기에 이릅니다.
후에 다니엘서 기자는 바벨론 제국이 시날 땅을 중심으로 건설된 사실을 기록함으로써(단 1:1~2) 바벨탑 건설에 내재된 반신국(反神國)적 사상이 바벨론 제국의 출현을 통해 역사 속에 재현되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시사합니다. 이어서 다니엘서 2장은 느부갓네살 왕의 꿈 내용을 소개하면서 인간통치의 상징으로 묘사된 신상과 신정통치의 상징인 뜨인 돌의 적대적 관계를 통해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에 의해 멸망당할 사단의 세력을 다양한 표상을 통해 설명하는 가운데 큰 성 바벨론의 무너짐으로 묘사함으로 사단의 통치세력의 성격을 구약의 바벨사상에서 차용해 기술하고 있음을 봅니다(계 14:8, 17:1~6, 18:1~3).
② 이때 성은 도시를 의미하며 인간의 자주 독립적인 삶의 특징을 나타내는 바, 하나님과의 의존적인 관계를 스스로 파기하는 행위를 드러냅니다. 가인의 경우에서 이미 이와 같은 사실을 살펴봤습니다(창 4:17). 이는 하나님을 거절하고 불신하는 인간 스스로의 독자적인 삶을 추구하는 행동 양식입니다.
③ 탑은 인간의 자기 영광과 의의 현시를 가리킵니다. 이는 탑을 건축하는 목적이 탑을 하늘에 닿게 해 자신들의 이름을 내려고 한다(창 11:4)는 데서 찾아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영광과 존귀와 찬송이 의도적이고 고의적으로 거부되는 표현(삼상 15:12)입니다. 이들의 의도와 저의가 얼마나 죄악 되고 사악한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창 6:5)입니다.
④ 이렇게 해서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합니다(창 11:4하). 이는 정면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거부하는 파렴치한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것, 곧 땅 곳곳에 흩어져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 것을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통치권은 땅의 구석구석에 충만히 그리고 풍성히 확장돼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인류는 집단적으로 연합해서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대적하는 양상을 띠고 행동합니다.
⑤ 따라서 이후 바벨탑 사건은 그 내용적 성격이 지향하는 바, 성경 전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대항하고 그분의 뜻을 거부하는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의 전형으로 자리잡게 됩니다(계 17:1~6).
⑥ 그러나 이런 인간의 공모는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하심으로 무산됩니다(창 11:7~8). 하나님은 인간 역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십니다. 그래서 이들의 사악한 의도를 깨치십니다. 언어를 혼잡케 하십니다. 자연히 인류는 같은 언어를 따라서 온 지면에 널리 흩어집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적 심판인 동시에 은혜의 배려이기도 합니다. 과연 하나님은 역사의 진행을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섭리하시는 전능하신 주권자이십니다. 세상이 다 하나님께 속한 사실이 분명히 드러납니다(출 19:5).
⑹ 셈의 계열을 은혜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적 계시역사
바벨탑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인류를 온 땅에 고루 흩으십니다. 이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입니다.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당초 하나님께서 세우신 섭리적 역사 진행의 실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과정에서 특별히 노아의 세 아들 중, 셈을 은혜로 선택해 당신의 구속사를 진행시키는 계시의 통로로 삼으십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미 세 아들에 대한 노아의 예언적 축복 속에서 이 사실을 시사한 바 있습니다(창 9:26). 이는 노아의 후손을 통해 새로운 인류의 생육과 번성을 위한 하나님의 본격적인 제2기 구속사가 개시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① 하나님은 노아의 세 아들 중 셈을 택해 홍수 이후 구속사 진행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십니다(창 11:10). 이때에도 세 아들 중 유독 셈이 택정 함을 입음은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은혜는 어떤 인간의 자의적 공로와 열심을 결코 용납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본질상 죄인이며 원수(怨讐)된 자일뿐입니다. 성도의 선택과 구원은 바로 이런 상태에서 성별 된 것을 의미합니다(롬 5:8).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이유가 이에 근거합니다(엡 2:8~9).
② 성도는 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단지 무익한 종의 심정으로 충성을 경주할 뿐입니다(눅 17:10). 성경의 총체적 계시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진행과 성취과정에서 결코 인간의 어떤 자의적 의로움도 허락지 않습니다. 만일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정면으로 대적하는 행위로 판단될 뿐입니다(엡 2:9).
③ 셈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습니다(창 10:22). 노아의 세 아들 중, 셈을 은혜로 택하신 하나님은 동일한 은혜로 셈의 다섯 아들 중, 셋째인 아르박삿을 구속사의 전면에 선택적으로 불러 세우십니다(창 11:10). 이것이 웬 은혜인지요. 평생을 감사함으로 죽도록 충성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이 그분의 은혜를 입은 자의 마땅한 도리일 뿐입니다. 당신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④ 창세기는 셈의 계보를 아르박삿을 통해서 데라의 세 아들 중 첫째인 아브람에게 까지 소개합니다(26절).
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노아에게서 데라까지를 10대(代) 완전수로 마감함으로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10대 대수(창5장)에 의도적으로 일치시킵니다. 이는 노아 이후에 새롭게 시작된 하나님의 구속사의 계시역사가 데라에게서 일단락 되는 가운데, 데라의 맏아들 아브람에게서 보다 진전된 새로운 구속사의 전기를 맞게 될 것을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즉 아담―노아(10대) : ‘셈’ 함 야벳, 노아―데라(10대) : ‘아브람’ 나홀 하란. ⑥ 이렇게 해서 각각 10대씩으로 명시된 족보의 기술(창세기 5장의 제1차, 창세기 11장의 제2차)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은 인류의 초기역사 속에서 비교적 암시적이고 잠재적 방식을 취하는 가운데 비공식적으로 진행돼 나옵니다(창 4~11장).
이후(창12장) 하나님은 아브람을 역사의 전면에 불러내심으로 당신의 본격적인 후반기 구속사 진행을 적극적이며 구체적이고, 명시적이며 공개적으로 세상 역사의 전면에 노출시킵니다. ⑦ 창세기 저자가 아브람의 아비 데라의 계보(창 11:27~32)를 따로 분리해서 기록함이 이런 의도에서입니다. 이는 새로운 족보의 시작을 통한 새로운 계시역사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창세기 12장 1절에서 아브람을 지명해 부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명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됩니다.
⑧ 따라서 창세기 12장 1~3절의 아브람 언약부터는 본격적인 하나님의 구속사의 진행이 아담의 창조언약(창 1:28)→여자의 후손 언약(창 3:15)→노아의 보존 언약(창 9:1~2)과 관련해서 총체적 갱신과 확대, 그리고 발전의 성격을 띠고 적극적으로 세상 역사의 무대 전면에 나타납니다. ⑨ 오늘날 우리에게 임한 성도의 구원이 이 오묘하신 하나님의 초기 구속의 경륜에 깊이 접촉됨을 통해 비로소 이루어진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근본 구속의 경륜의 뿌리로부터 나와진 구원의 도리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아니고서는 참된 구원의 실질을 풍성히 소유해 누리기에는 한계가 있으며 그래서 늘 유아적 수준에 머무를 뿐입니다.
이런 총체적인 구속사의 경륜에 입각한 지식의 체계에 접촉된 신앙고백이 아니라면 그것은 자칫 인간 속에 내재된 보편적 종교심에서 나와진 자의적 숭배 신앙일 수 있습니다. 지적 동의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서 나와진 입술의 고백으로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얼마든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음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마 7:21~23; 롬 10:2~3). 신약의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유대교 장로와 대제사장들을 보십시오. 구약의 많은 거짓 선지자들의 경우를 보십시오(왕상 22:11~12). 이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임을 자처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행위의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나타남을 성경은 고발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에 대한 계시적 본의를 총체적 계시관의 안목으로 통찰하는 일에 심히도 부족과 결핍 및 왜곡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마 23:23)
이 뿐만이 아닙니다. 이에서 더 나아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아 하나님을 도구화하기까지 했습니다(딤후 6:3~5). 이런 사실의 결국은 필연적으로 성경적 바른 신관, 계시관, 복음관, 교회관, 그리고 신앙관의 정립에서 이탈될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오늘도 기독교계의 문제는 여전히 이 부분에 집중돼 나타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롬 10:2~3; 마 15:7~9; 막 7:6~8).
Ⅲ. 결론
우리는 창세기 1~3장을 통해 에덴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 사상을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원리 속에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의 후손을 통해 신정적(神政的)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려는 의중이 담겨져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당초 계획은 사단의 미혹으로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는 것을 통해 좌절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여자의 후손 언약을 중보로 아담에게 주신 창조언약(창 1:28)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을 통해 이후 인류의 초기 역사 속에서 암시적이지만 중단 없이 진행됩니다.
이때 구속사의 초기 진행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특별한 현상이 족보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역사입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계열의 족보를 계시의 도구로 삼아 선택적으로 당신의 백성을 세상 역사의 전면에 불러내심으로 당신의 구속사를 세상역사 속에서 도도히 수행해 나가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루어진 구원이 이런 하나님의 신묘막측하신 태초의 구속의 경륜에 접촉된 데서 나와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바로 깨닫고, 믿음으로 고백하며, 우리의 현재적 삶의 의미와 방향성이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 지를 구속사적 관점으로 해석해 거기에 우리의 삶을 간단없이 드려 나가는 것(마 6:33)으로 우리의 구원은 확인되며 보장됩니다. 참된 성경적 구원의 실질이 이렇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에 연합된 사실 안에서(갈 2:20), 머리되신 그분의 보호와 인도와 통치를 현재적으로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명과 신앙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는 데서, 영생 얻는 구원의 실질에 접촉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에녹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의 실상입니다(창 5:24; 히11:5). 이런 원리 하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서의 영생의 실질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적 삶을 통해 ‘이미’ 여기서부터 예비적으로 선(先)경험되는 것이며, 이의 연장선상에서 주님의 재림으로 도래하는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인 최종적 하나님 나라의 영생의 실질에 참여하게 됩니다. 다음 제 4강에서는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람을 부르셔서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역사 속에서 신실히 성취해 나가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은 바야흐로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함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 역사 하시는 그분의 생생한 섭리의 손길과 절대 주권적인 역사 개입과 진행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이 하나님의 섭리적 간섭하심 속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수납하고 그분의 뜻을 생명의 도리로 받들어 살아가는 일보다 더한 행복과 위로와 평안은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의 확신과 구원을 누리는 신앙적 삶의 기쁨이 이런 사실에 기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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