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에 대하여 독자가 알아야 할 간단한 지침(1) by J. B. Jordan trans. J. W. Shon 비록 계시록이 이 책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에게 복이 주어진다고 말할지라도(1:3)1), 이 책은 또한 종종 혼란에 빠지게 하곤 합니다. 어떤 독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수들을 이기시고, 당신의 성도들을 변호하시는 모습을 보고 감격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것들에 대해서는 - 글쎄, 누가 알 수 있을까요? 계시록은 교회 안에서 항상 그리고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계시록은 역사 속에서 많은 다른 사건들을 예언하는 것으로서 해석되어져 왔습니다. 당연히 이런 해석들은 모두 상호 모순되는데, 이런 상호 모순은 많은 신자들로 하여금 계시록이란 불가사의 안에 신비로 포장된 수수께끼이며, 또 이 책을 이해하려는 여러 가지 시도는 시간의 낭비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계시록에는 그 책이 언제 기록되었으며, 직접적으로 무엇에 관한 책인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매우 분명한 측면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 책에 있는 특별한 예언들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책이 어떻게 모든 세대에게 계속해서 적용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계시록이란 어떤 책입니까? 그 단서는 바로 이것입니다. 즉 계시록에서 천사들이 창조물에게 최종적인 심판을 가져오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심판 당하고 있는 그 창조물이 첫 창조물 곧 옛 창조물임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 책은 AD 70년에 있었던 성전과 예루살렘의 최종적인 파멸 이전에 기록되었음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성경에서 “천사(angel)”로 번역된 말은 “사자(messenger)”를 의미하고, 또 종종 인간을 언급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교회의 “사자들(angels)”은 그들의 교회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교회의 목사들(pastors)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에 나오는 그 나머지 사자(angel)는 영적인 천사들(spirit angels)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옛 창조는 천사가 다스리는 반면에, 새 창조는 구속받은 인류가 다스린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면을 아끼기 위하여, 또 이 글은 성경공부로 의도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일일이 성경구절을 기록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그 구절들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고전6:32)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 구절에서 새 창조의 끝에는 우리가 천사를 심판하지 천사가 우리를 심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정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옛 창조에 대하여는, 히 2:23), 행 7:534)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갈 3:195)을 살펴본 다음, 갈 4:1-76)을 읽어보십시오. 이런 성경구절들은 옛 창조에서 우리는 자녀로, 천사들은 우리의 후견인과 청지기(tutor)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대 후견인과 청지기(chief tutor)는 원래 루시퍼(Lucifer)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에덴 동산에서 자기의 소명에 배반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인류(humanity)를 성숙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주의 사자(Angel of the Lord)로 출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두 번째 아담이었기 전에, 그는 두 번째 루시퍼였습니다. 옛 창조 전체 걸쳐서, 우리는 주의 사자와 그의 영적인 천사들(spirit angels)이 인류를 다스리고 심판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천사들을 다스리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셨고 그와 연합하여 우리도 또한 천사들을 다스립니다. 계시록에서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이러합니다. 즉 천사들이 심판을 집행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가 맡은 세상을 심판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은 새 창조의 세상일 수 없고, 옛 창조의 세상이어야 합니다. 새 창조는 오순절에 시작되었는데, 그때 승천하시어 보좌에 좌정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로 하여금 민족들(the nations)을 제자 삼을 수 있도록 하시고, 그런 의미에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옛 창조는 그 때 끝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에게 옛 창조에서 새 창조로 이동할 수 있는 일정한 기간을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3:34-38에 따르면, 옛 창조의 모든 죄와 범죄는 마감되어야 하고, AD 70 년에 일어날 예루살렘 멸망으로써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 일은 오순절 후 40 년이 지나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예수님을 거부하였다고 옛 창조를 바로 심판할리가 없습니다. 율법 곧 하나님의 율법은 두 증인의 증거를 요구하였습니다. 두 번째 증인은 성령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를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거스리는 것)은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2:107), 행7:518), 행 28:25-279)). 수많은 유대인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성령이 오신 후에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진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습니다(살전 2:14-16)10). 새 창조의 도래와 옛 창조의 끝이 중첩되는 시기 동안 이삭과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집 안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곧 추방되어야 했습니다(갈 4:21-31). 이제 이러한 점들을 감안하면서 우리는 계시록에서 포괄하는 시대는 비록 계시록이 그 시대의 마지막 사건들을 집중적으로 다루지만, 근본적으로 사도행전과 서신서들과 동일한 시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약성경의 나머지 기록이 말하는대로 계시록을 해석할 수 있고 해석해야지, 계시록이 그보다 더 늦은 사건에 대한 것으로 추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계시록을 사도행전과 서신서들과 연결시키는 것은 계시록에 있는 상징들을 훨씬 더 쉽게 해석하도록 해 줍니다. 옛 창조의 최종적인 멸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인 입증(public vindication)입니다. 전 생애를 걸쳐서 예수님은 거듭 거듭 배교한 유대인들과 전체 옛 세상 위에 곧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또한 가끔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부활도 예언하셨지만 그렇게 자주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당신께서 누구이시며 무슨 일을 하시었는지를 사적인 입증(private vindication)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다만 예수께서 몇몇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원수의 도성 예루살렘의 멸망은 당신의 공적인 입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예언들을 성취한 예루살렘 파멸은 예수님 당신께서 참 선지자요, 마지막이고 가장 위대한 선지자이심을 확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이 예루살렘 파멸은 예수님이 정말로 승천하셔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되셨다는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이와 같이, 옛 창조의 파멸은 성경신학에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합니다. 이 옛 창조의 파멸은 단순한 소탕작업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루신 예수님의 위대한 공적이고 역사적인 입증입니다. 이 사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예루살렘 멸망의 중요성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들은 왜 이 사건에 복음서가 그렇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를 깨닫지 못하고, 또 왜 예루살렘 멸망이 계시록의 주된 관심사인지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계시록을 그냥 “예수 그리스도의 입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학문적인 복음주의 학자 한 사람은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N.T. Wright, Jesus and Victory of God, Christian Origins and the Question of God, Volume 2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6]. 비록 Wright가 계시록을 다루지는 않을지라도, 그는 예수님이 당신의 주장을 공적으로 입증하는 사건으로서 예루살렘 멸망을 반복하여 예언하셨음을 복음서로부터 전체적으로 논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곧 학계에서도 성경신학의 이 주요한 면을 다루기 시작할 것입니다.) 계시록의 저자 자유주의 학자들과 또한 많은 복음주의 학자들까지도 계시록의 저자를 다룰 때,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했다는데서 출발하고, 이 “요한”이 세베대의 아들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를 토론합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은 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의 저자는 분명히 예수님 당신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1)11). 성경은 세 가지 기록 방식으로 우리에게 제시됩니다. 첫 번째는 성경의 많은 부분들은 단순히 하나님(주의 사자)께서 사람들에게 구술하여 받아 쓰게 하시고,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록하도록 들은 바를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거의 대부분, 민수기의 많은 부분, 선지서들(이사야, 예레미야, 등등)의 대부분이 이 방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성경의 많은 부분들이 하나님의 영감(Divine inspiration)하에 기록되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의 이름 혹은 익명으로 기록하는 사람들의 사고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창세기, 사사기, 다윗과 아삽의 시편들 등과 같은 책들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성경의 일부분은 환상의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그 다음으로 그들은 영감하에 기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에스겔의 마지막 부분, 스가랴의 대부분, 계시록이 이런 방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물론, 계시록2-3장은 예수께서 요한에게 구술하여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계시록의 문체가 요한복음이나 요한서신과 다르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요한은 계시록의 인간 저자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은 요한의 문체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계시록의 저자로써 다른 “요한” 즉 다른 문패를 가진 어떤 사람을 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계시록의 언어(Language) 나는 영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은 “상징(Symbol)”으로 기록되었습니다(1:1, “하나님이 그 종 요한에게 그 천사를 보내어 그것을 지시하신 것이라12)”). 상징은 영어나 러시아어처럼 하나의 언어(a language)입니다. 계시록이 상징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성경을 안팎으로 속속들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러시아어를 배우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이 먼저 할 일은 키릴 자모의(Cyrillic) 알바벳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여러분은 그 알파벳으로 기록한 다양한 러시아어 단어들을 배울 것입니다. 곧바로 여러분은 그 단어들로 구성된 아주 간단한 문장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 후에, 여러분은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러시어로 꿈까지 꾸게 될 것이고, 그때 여러분은 정말로 러시아어를 알 것입니다. 상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상징 언어는 세상의 창조에 대한 참된 기사인 창 1장에서 시작하지만 창1장은 나중에 상징으로 사용되는 근본적인 범주를 우리에게 제공해 줍니다. 큰 상징 단락들은 출애굽기의 이분의 일, 레위기 전부, 민수기의 많은 부분, 역대상의 많은 부분, 아가서, 에스겔, 다니엘, 스가랴이고, 성경의 나머지 더 짧은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제단”, “성전”, “촛대”, “부정(不淨)”, “피”, “토기”, “황소, 양, 염소, 반구, 비둘기” 등의 단어들과 친근하게 됨으로 상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이 상징들이 어떻게 레위기에서 제사의식 혹은 성막의 구조와 기구의 위치와 같은 이른바 “문장”의 형식으로 결합되는지를 압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어떻게 이른바 이 문장들이 더 큰 진술, 상징들로 기록된 전체 에세이를 형성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레위기10장부터 레위기16장까지 진전, 혹은 에스겔40장부터 에스겔48장까지의 진전과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상징들에 친근해져서 상징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에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 중에 하나는 상징에 있어서 과정입니다. 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이미 이 언어를 알 것이라고 전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레위기와 에스겔에 완전히 정통할 것이라는 전제하셨습니다. 우리는 희생제사를 드리는데 사용되는 동물들을 압니다. 우리는 솔로몬의 성전 안을 걸어가면서 그것을 하나 하나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나와 같은 사람은 계시록을 강의하는데 4년의 시간을 보냈고, 그 내용을 매달의 essayletter로 출판했습니다. 계시록이 상징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20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언어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계시록의 깊이를 이해하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나는 상징을 배우기 위해서 여러 해를 헌신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Biblical Horizons의 도서목록을 보신다면, 여러분은 이 주제에 대한 기본적인 소개서(Through New Eyes: Developing a Biblcal View of the World)뿐만 아니라 많은 특별한 연구서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연구들은 나로 하여금 계시록을 이해하는데 좋은 입장에 있게 했습니다. 나는 내가 계시록을 완전히 이해한 것처럼 공언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내가 수년동안 연구한 결과들을 여러분에게 제시하려고 합니다. 당연히, 나는 이 간략한 연구서에서 계시록의 깊이를 측량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이 연구서에서 많은 해석들을 제안하려고 해도 논의하고 증거할 공간을 가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연구서는 단지 개론에 불과하고, 더 공부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나의 테이프강의에서 더 깊이 있는 해석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계시록의 청중 계시록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쓰여진 것이 아니라 교회들에게 쓰여졌습니다(1:4). 이 사실은 새 창조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쓰여졌음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계시록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쓰여졌는데, 이 교회들은 배교한 유대주의자들과 로마의 박해자들에 의해서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 일곱 교회들 각각은 도시에 살고 있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에 성전이 있었던 것, 그리고 로마 제국(the “oikumene," 혹은 Commonwealth)이라는 더 큰 도시에 예루살렘(유대인들)이 있었던 것과 상응합니다. 예수님은 이 교회들 각각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의 선행을 칭찬하고 그들의 죄에 대해 심판으로 위협하셨습니다. 그 다음으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교훈할 목적으로 제시해 주십니다.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에 대한 심판과 연관된 여덟 번째 편지를 제시해 주십니다. 이 여덟 번째 편지(인봉된 일곱 책)는 새 창조의 교회 일곱에게 교훈할 목적으로 주시고,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교훈할 목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계시록은 결과적으로 성전과 예루살렘의 파멸을 가져온 유대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의 전쟁을 다룬 것이 아니라 계시록은 복음전파, 신실함, 순교, 확증되는 성도들의 입증을 다루고 있습니다. 계시록은 교회들에게 선언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교회가 그 사실을 깨달든지 못 깨달든지 간에, 문화가 그 사실을 믿든 안 믿든지 간에 어떤 문화의 한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회복과 축복을 향한 첫 발걸음이며, 아울러 그런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됩니다.13)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실함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대적들을 회심시키시든지 아니면 파멸시켜 버리시든지 둘 중의 한 가지 방법으로 원수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들과 평화롭게 되게 하십니다. 사도행전의 전반(全般)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대적은 유대인들과 유대주의자들이었는데, 이들은 계시록에서도 교회의 대적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거짓사도들,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Balaamites), 니골라당, 사단의 회, 큰 음녀 바벨론이라고 불립니다. 우리는 항상 사도행전에서 로마가 교회를 보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에서는 가까운 미래에 이른바 짐승인 로마가 교회를 대적하게 될 것임을 말씀합니다. 계시록은 사도행전의 역사를 옛 창조의 끝에까지 확장합니다 계시록에 대하여 독자가 알아야 할 간단한 지침(2) by J. B. Jordan trans. J. W. Shon 계시록의 문학적 구조 상징 언어가 사용되는 이유는 강화 언어(discourse language)로는 쉽게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상징은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막과 성전은 a)우주, b)사회 공동체, c) 개별적 인간, d)완전한 사람인 메시야를 동시에 상징합니다. 이와 같이, 제단은 a) 거룩한 산을 축소한 것, b)하나님 백성 전체, c) 인간의 인격 (human person), d) 예수님을 동시에 상징합니다. 동일한 방식으로, 상징적 기사들(Symbolic narratives)도 한 가지 측면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계시록은 여러 음(音)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계시록을 생각하면, 계시록에는 여러 가지 멜로디가 동시에 울려 퍼지고 있지만 완전한 조화와 상호작용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계시록은 레위기 23 장에 나오는 연중 절기 순서를 따르는데, 이는 창조의 일곱 날에 근거해 있습니다. 안식일- 빛 (주의 날)- 계 1장 유월절- 궁창 백성의 설립- 계 2-3장 첫 열매- 식물- 계 4-5장 오순절- 발광체들- 책, 계6-7장(율법은 오순절에 주어졌다.) 나팔- 하나님께로 백성의 무리를 소집함- 계 8-15장 대접- 사람- 속죄의 날, 계16-19장 장막절- 큰 안식일 - 계 20-22장 이제 우리가 이 상징주의(symbolism)와 연관하여 계시록을 개관하는 일은 긴 시간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개관을 사용할 것입니다. 이 개관은 절기의 개관보다 훨씬 더 “표면적”입니다. 1. 일곱 교회의 서언, 1장 2. 일곱 교회, 2-3장 3. 인봉된 책의 서언, 4-5장 4.인봉된 책, 6-7장 5. 나팔들, 8-12장 6. 나팔들의 결언, 13-15장 7. 대접들, 16장 8. 대접들의 결언, 17-22장 이 구조는 교차 대칭적이고,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님에게서 영광스럽게 된 신부에게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요한을 만나러 땅으로 내려가시다 2. 일곱 교회 3.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다 4.일곱 인 5.일곱 나팔 6.교회가 하늘로 올라가다(12-15장) 7. 일곱 대접 8. 교회가 땅으로 내려가다 (21장) 세 번째로, 계시록 전체가 교차 대칭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A. 요한과 예수님 1장 B. 교회들 2-3장 C. 하늘의 보좌 4-5장 D. 말들 6:1-8 (첫 네 가지 인) E. 제단 아래 성도들 6:9-11 (다섯째 인) F. 심판의 시작 6:12-17 (여섯째 인) G. 땅에 인 맞은 성도들 7장 H. 일곱 나팔 등장 8:1-2 I. 오순절 시대의 시작 8:3-5 J. 식물들 8:7 K. 이방인들 8:8-9 L. 음료 8:10-11 M. 하늘들 8:11-12 N. 거짓의 군대 9:1-11 O. 성도들의 군대 9:12-11:6 P. 대학살 11:7-13 Q. 용 12장 Q' 바다 짐승 13:1-10 P' 대학살 13:15 O' 성도들의 군대 14:1-3 N' 거짓없는 군대 14:4-5 M' 하늘들 14:6-7 L' 음료 14:8 K' 이방인들 14:9-13 J' 식물들 14:14-16 I' 오순절 시대의 끝 14:18 H' 일곱 대접 등장 15:1 G' 하늘의 성도들 15:2-4 F' 심판의 재시작 15:5-18:24 E' 하늘의 성도들 19:1-10 D' 말들 19:11-21 C' 하늘의 보좌/들 20장 B' 교회 21:1-22:5 A' 요한과 예수님 22:6-21 이 개관들 각각은 계시록을 읽는 길, 곧 계시록을 정확하게 읽는 길입니다. 우리가 바로 알게 되겠지만, 또한 계시록에 나오는 연속되는 사건들을 구조화하는 다른 길도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글이 의도하는 바대로 이 글을 공부 지침서로 사용하여 이 개관들 각각과 연관을 지어서 계시록을 읽는데 시간을 보낸다면, 가능한 한 구조와 흐름을 훨씬 더 많이 음미할 것입니다. 계시록의 기본적인 상징들 우리가 계시록을 읽기 전에, 우리가 가는데 시간을 단축시켜 줄 수 있는 그 길로 가기는데 알아야 할 한 가지 다른 우선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특정한 근본적인 상징들을 정의하는 것입니다. 땅(The earth): “땅(earth)”이 “지면(land)”보다 더 좋은 번역인데, 그 이유는 이것이 거룩한 땅의 백성들, 즉 유대인들과 유대주의자들에 대한 언급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사회(Jewry)가 파괴된 이후에는 “땅(earth)”이 모든 인류를 의미합니다(21-22장). 바다(The sea): 땅이 유대인들에 대한 언급인 것처럼, 바다는 이방세계(the Gentile world)에 대한 언급입니다. 이 상징주의는 창2장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에덴 밖의 땅은 (에덴에서 발원하는) 강들에 의해서 물을 공급받습니다(요나서의 상징주의와 비교해 보시오; 삼하22:4-5; 시65:7-8; 사5:30; 17:12-13; 57:20; 렘6:23; 겔27:25-36; 단7:2-3). 인류(Mankind): 계시록에서 “사람들(men)”은 유대인을 의미합니다. 이방인을 말할 때, 계시록은 항상 “방언(tongues), 족속(tribes), 나라(nations), 백성(peoples)”이라는 사중적인 목록을 사용하고, 혹은 약간 변형시켜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또한 21-22장에서의 “사람들(men)”은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을 의미합니다. 이 사중적 목록은 다음의 순서대로 네 가지 유형의 문명(civilization)을 말합니다. 방언 - 족장시대, 바벨의 언어 혼란 후 족속 - 모세시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이 족속(지파)으로 모여 생활할 때 나라 - 왕국시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이 나라로 모여 생활할 때, 백성 - 제국시대(Oikumenical age),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이 큰 제국 안에서 한백성으로 생활할 때 매매(Buying and selling): 계시록에서의 경제적인 상거래(Economic transactions)는 예배적 상거래(liturgical transactions)를 상징합니다. 이는 계시록 3:18에 근거합니다. 짐승의 표를 받기를 거부한 자들이 매매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을 때, 그것은 그들이 회당과 성전에서 출교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계18 장에서 땅의 상고들(merchants)은 성전과 회당에서 예배했던 자들입니다. (복음서과 사도행전, 서신서 등에서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과 회당과 성전에서 추방당할 위험이 반복된 것과 비교하시오). 물론 우리가 모든 상징들을 이 개관에서 다룰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계속 진행하면서 다른 상징들을 잠시 살펴볼 것입니다. 계시록의 상징주의를 훨씬 더 자세히 다루기 위해서는나의 논문, [무대 배경: 계시록의 지도(Behind the Scenes: Orientation in the Book of Revelation), Biblical Horizon에 구입할 수 있음)]를 보십시오. 이런 것들을 기억하면서, 이제 우리는 계시록 자체의 읽기로 돌아갑시다. 예수님: 평가의 기준(Jesus: the Standard of Measurement) 계시록은 성취의 때가 가까움(1:3; 22:10)과 온 “땅”이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심(coming in the clouds, 1:7)을 볼(see, perceive, understand) 것이라고 거듭 말합니다. 단7:13에서 암시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오심은 결코 땅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가심을 의미합니다. 즉, 계시록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왕국을 어떻게 시작하셨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요한은 자신이 “주의 날에 성령 안에(in Spirit on the Lord’s day, 1:10)” 있었다고 말합니다. 성령(the Spirit)의 영역(sphere)은 예배의 영역입니다. 성령으로 모인 총회가 매주일 주의 날에 하나님 앞에 성령 안에 함께 옵니다. 계시록 전체가 다 예배 중에 그리고 예배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배에로의) 부름(1장), 죄의 고백(2-3장), 왕국과 사죄의 선포(4-5장), 성경봉독(책과 나팔), 봉독에 근거한 설교(10:8-11), 성례의 나눔(대접과 혼인잔치), 복음을 가지고 밖으로 나감(22장의 강, 22:17의 성령과 신부의 부르심) 등이 그런 것입니다. 계시록은 예배의 전쟁(liturgical warfare)에 관한 것입니다. 이 책에서 사건들이 진행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의 기도와 충성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계1;12-20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시고(1:12-20), 그 기준으로써 바벨론과 짐승들도 평가됩니다. 예수께서는 계1:14-16에서 일곱 가지의 특징들을 지니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을 배치해보면 교차대칭 구조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곱 특징들은 일곱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며, 아울러 전체로써 계시록을 마련해 주기도 합니다. 머리 - 1장, 예수님 눈들 - 2-3장, 교회를 평가하다 발들 - 4-5장, 보좌로 가기에 적합하다 음성 - 6-7장, 그 책 손들 - 8-15장, 환란 중의 교회를 유지하다 입 - 16-19장, 원수를 심판하다(19:15) 얼굴-해 - 20-22장, 교회의 영화 위협받는 일곱교회 (2-3장) 일곱 교회에 대해 사용된 상징은 옛 창조 역사의 일곱 시대로부터 취한 것입니다.. 2:7 (에덴) 2:10 (요셉) 2:14 (광야) 2:20 (왕국) 3:2 (심판과 포로) 3:7 (회복) 3:16 (예수님 당대의 배교) 어느 교회가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교회입니까? 여러분은 이 성경 역사의 특정한 시대에서 특별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일곱 편지들은 계시록 (전체의 진행과정)을 미리 보여줍니다. 일곱 교회의 원수는 에베소(2:6)에서 묘사되고 있는 니골라당(백성-정복자들, 유대주의자들) 곧 거짓사도들입니다. 서머나의 유대인-유대주의자들은 6-12장에서 주요한 부분을 형성합니다. 13장과 버가모에서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 (발락과 발람)가 나옵니다. 두아디라에서는 음녀 이세벨(17장)이 나오고,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18장)이 사데를 위협합니다. 성도들의 군대의 승리(19장)가 빌라델비아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것인지 안 들어갈 것인지의 선택이 라오디게아(3:20) 앞에 놓여 있습니다. 또 이 일곱 편지들도 교차 대칭적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와 라오디게아는 방종에 빠져 있었습니다. 서머나와 빌라델비아는 둘 다 신실하였으나, 한교회는 작고 핍박받는 반면에, 다른 교회는 능력이 있고 유력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즉 충성은 자동적으로 번영이나 핍박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간에 위치한 세 교회는 어떤 발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버가모에는 소수의 악한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쫓아내어야 합니다. 두아디라에서는 악인들이 의인들만큼 강한 세력을 쥐고 있어서 전쟁을 치루어야 합니다. 사데에서는 악한 자들이 의인들의 수효를 능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도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버가모가 교회 안의 죄악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두아디라 교회와 같이 될 것이요,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사데와 같이 된다는 경고입니다. 이로써 주님께서는 일곱 교회 전체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주시고 계십니다. 즉 “너희는 어떤 자들을 추방하라!”는 것입니다. 그 메시지는 교회 권징이 실행되어야 하되 가차없이 실행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친히 오시어 이 일을 수행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 그리고 그것은 바람직한 결과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러한 경고 후에, 이제 예수님께서 오시어 죄를 정화하셔야 한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교회에 보여주시는 장면으로 진행됩니다. 그것은 일곱 인으로 인봉된 책 안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의미할 것인데, 이 책은 여덟 번째 교회인 바벨론에 보내진 여덟 번째 편지입니다. 위협받는 일곱교회 (4-5장) 4-5장은 우리에게 단7:9-13에서 예언된 사건들을 더욱 자세히 보여줍니다. 첫번째로,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 계신 장면이 보게 됩니다. 성부 하나님은 레위의 돌인 녹보석(emerald) 무지개에 감싸여져 있고, 녹보석은 레위의 돌입니다. 그러나 레위인들은 24명의 천사장들인데, 이들은 대상24-25장에 따르면, 성전에서 섬기는 레위인의 족장(Chief Levites)과 대제사장들을 24반차에 대한 하늘의 모형입니다. 보좌에서 더 가까운 주위에는 하늘의 예배를 인도하는 네 생물(그룹:cherubim)이 있습니다(4:6). 우리는 4:10에서 이 24천사장이 하나님께 엎드려 예배하고, 자신의 면류관을 하나님 앞에 던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계시록 전체의 드라마를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각각의 천사장이 이 책에서 정확하게 24가지의 행동을 하는 것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천사장은 자기 차례에 따라 보좌 앞으로 나아와 옛 창조를 다스리던 자신의 면류관을 벗습니다. 그리고는 옛 창조에 대한 마지막 심판을 행하기 위해서 나아갑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이 면류관 모듬(pile)을 취하는데,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스리는 자들(co-rulers)로서 천사장들을 대신하여 하늘로 들어갑니다(20:4). 첫 번째 천사장이 인봉된 책을 들고 나아오는데, 이는 왕국의 책으로 지금까지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왕국이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인봉된 책을 받아 다스릴만한 어떤 아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죽임을 당하시어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신 어린 양의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책을 취하시고, 모든 피조물들은 기뻐합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찬양하였는데, 이제는 악기들을 가지고 노래합니다. 이 책은 정말로 큰 두루마리였습니다. 이 책은 가장자리를 따라 일곱 개의 거대한 인으로써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곱 개의 인마다 그 위에는 그림이 새겨져 있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그 왕국이 도래하는 것을 가로 막고 있었으며, 이 책이 열리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인봉을 떼시자 옛 아담의 창조가 장악하고 있던 것들이 풀려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이 책이 나팔에서 말하고 심판의 대접에서 그것을 실행하는 것을 선언하시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부분 다음부터 22:5까지가 이 책, 즉 여덟 번째 편지의 내용이 됩니다. 이 편지는 만일 일곱 교회가 제 모습을 지니지 않으면 그들에게 심판이 임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 대하여 독자가 알아야 할 간단한 지침(3) 왕국의 개봉 (6:1-8:5) 인(印)들, 나팔들, 대접(大楪)들이 각각 동일한 배경 위에서의 동일한 사건에 대한 반복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렇지 않습니다. 인(印)들은 그 책을 엽니다. 나팔들은 그 책의 내용들을 선포합니다. 대접들은 그 내용들을 적용합니다. 역사적으로 인(印)들은 AD30년에 왕국의 시작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팔들은 오순절부터 AD 70 년 직전인 그 시대의 마지막까지에 있었던 사건에 관한 것입니다. 대접들은 마지막 끝의 사건들에 관한 것입니다. 물론 그 왕국은 시작과 중간과 마지막에 모두 동일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음으로 인들과 나팔들과 대접들 사이에 많은 병행되는 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반복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는 계시록에서 제시하고 있는 분명한 순서를 완전히 허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즉 그 순서는 진전이지 반복이 아닙니다. 이제 인을 떼는 것은 왕국의 개봉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인들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첫 번째 네 가지 인들은 네 마리의 말과 네 그룹으로 불리는 네 명의 말 탄 자들을 풀어놓습니다. 사자는 복음의 정복인 흰 말을 오라하고, 송아지는 사람들 사이의 다툼인 붉은 말을 오라하고, 사람은 성례전 능력인 검은 말을 오라하고, 독수리는 최종적인 심판인 청황색 말을 오라합니다. 여기서 네 마리의 말들은 교회이며, 그 탄 자들은 예수님이십니다. 스가랴 2:6과 6:1-5을 보시면, 거기에서는 말들이 교회임을 나타내고, 그 교회는 예수님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말의 색깔은 이스라엘 지파들을 상징하는 보석들의 색깔에서 나온 것입니다. 말들의 순서는 복음전파와 정복의 순서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왕으로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흰색은 신부를 상징하는 지파인 납달리의 색깔입니다. 다음은 다툼을 나타내는 붉은 말이 따라옵니다. 붉은 색은 전쟁에서 지도하는 지파인 유다의 색깔입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다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예언하셨던 일종의 다툼인데 곧 어미가 딸과 다투고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다투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이르면 어느 사회에서나 경험하는 다툼입니다. 그리고 계시록이 특별히 다루는 시기에 유대인과 이방인 신자들이 체험하였던 다툼입니다. 셋째 말인 검은 말은 기근과 관계가 있는 듯하나, 이는 경제적 기근인 보통 음식의 기근이 아닙니다. 언급된 세 가지 음식은 성경에서 말하는 성례전을 위한 음식으로서 곡식, 포도주, 감람유(약 5:14)입니다. 떡(bread)은 아침에 먹는 시작(alpha)의 음식이요, 포도주는 일이 끝났을 때 마시는 마지막(omega) 음식입니다. 떡은 제사장적이고 포도주는 왕적입니다. 떡은 옛 창조에 초점이 있는데, 사람이 제사장이었으나 아직 온전히 왕이 못된 때를 나타내고(예수님이 아직 승천하지 아니하였기에), 반면에 포도주는 새 창조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는데,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안식일의 안식을 주도할 때를 나타냅니다. 검은 말은 옛 질서가 차츰차츰 굶주려 감을 묘사하고, 반면에 새 질서의 은사들은 보호를 받고 보전됩니다. 7:3과 비교하십시오. 검은 색은 참된 떡 굽는자이며 술맡은 관원(true baker and cupbearer)인 요셉의 색깔입니다(창 40; 41:48-48; 44:2,5).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요셉의 보석은 호마노(onyx,출 28:9, 20)인데, 이것은 검은 색과 흰색, 짙은 색과 옅은 색으로 번갈아 줄무늬를 이룬 얼룩진 색깔로서 포도주와 떡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말은 검은 색인데, 포도주가 보호받기 때문입니다. 청황색 말(Green Horse)은 레위인의 색깔인데, 레위인들은 성막과 성전을 지키는 사람들로서, 제단이나 성소에 부적절하게 접근하는 자들을 죽이려고 창으로써 무장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이 말(horse)이 실제적이고 육신적 다툼을 일으킨다고 나는 믿는데, 곧 옛 질서에 눌러 앉기를 원하는 자들과 새 질서로 바꾸려는 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마지막 폭력적인 다툼의 발발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AD 60 연대 후반에 유대 사회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리고 그 왕국이 새로운 백성들에게 임할 때마다 이런 다툼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나라들에게 그 왕국을 가져오도록 하는 사건들의 연속이고, 대위임 명령을 성취하는 순서입니다. 대위임령은 AD 30년 이전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아직 왕국이 봉인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대위임령은 시작되어서 역사의 종말에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다섯째 인을 떼어질 때 우리는 제단 아래 있는 성도들을 봅니다. 이는 분향단으로서 궁창 하늘(the firmament heavens)에서 지극히 높은 하늘(the highest heaven)을 연결하는 사닥다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전(sanctuary) 안에 있는 성소(The Holy Place)는 궁창 하늘을 상징하고, 반면에 지성소(Holy of Holies)는 지극히 높은 하늘을 상징하고, 분향단은 바로 그 지극히 높은 하늘 “아래”에 있습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옛 창조에서 죽은 성도들이 죽으면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지극히 높은 하늘에 올라가시지 않으셨으므로, 그들도 역시 올라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날이 올 때까지 “아브라함의 품”, “낙원”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완전한 승천을 가로막고 있던 인이 떼어지고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가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얼마 동안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들은 순교자들의 최종적인 수확, 즉 옛 창조의 최종적인 수확이 끝날 때까지는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이 마지막 집단의 증인/순교자가 봉인되어 7장에 따로 보존되었다가 14 장에서 순교 당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과 모든 옛 창조의 성도들이 17-18에서 바벨론의 파멸로 복수를 당합니다. 그 후에 20장에서 그들 모두는 예수님과 함께 보좌에 오릅니다. (히11:40과 비교하십시오). 여섯째 인은 옛 창조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에 대한 제한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즉시로 옛 창조는 끝에 이르기 시작했습니다. 즉 땅은 갈라지고, 별은 떨어지며, 달은 하나님의 하늘 눈 앞에 성도의 피를 드러내며 모든 사람들은 어린양의 진노를 급하게 피합니다. 그러나 이 심판이 시작되자마자 곧 보류되었으니, 말하자면 심판이 공중에 떠버린 셈입니다. 심판은 사람들 위에 금방 떨어지려 하는데, 무엇인가 일어나기까지는 잠시 얼어붙은 것입니다. 마치 옛 창조의 성도들이 잠시 기다려야 하듯이 옛 창조를 최종적으로 내리는 심판도 얼마 동안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심판이 16장에서 대접 재앙으로 다시 계속됩니다. 그동안 옛 창조의 백성들은 회개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최종적인 기회를 제공받았습니다. 7장에서는 여섯째 인이 계속되고, 심판이 왜 멈추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네 천사장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마에 인을 치기위하여 나아옵니다(창 3:19; 출 28:36; 겔 9:4). 인침을 받은 백성들은 144,000 명의 회심한 유대인으로 구성되며, 상징적으로 배교한 단 지파를 제외하고(삿17-18) 각 지파에서 12,000명이 나왔습니다. 이 신실한 유대인들은 배교한 유대인들에 의해서 계14 장에서 학살당할 것입니다. 여섯째 인의 세 번째 환상은 수많은 이방인 신자들을 보여주는데, 이들 역시 AD 60년대 후반에 이어 닥칠 대환난에서 학살당할 것입니다. 이들은 짐승 곧 로마제국 안에 있는 네로와 그의 대리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보좌 앞은 그들이 죽을 때 가도록 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14:13). 많은 이스라엘 백성의 무리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수많은 회심한 이방인과 회심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중다한 잡족”을 이루어 함께 출애굽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꼭 같은 일이 이제 옛 창조에서 새 창조로 탈출(exodus)할 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계시록은 바로 AD 30년 - AD 70 년 사이의 40 년의 “광야” 기간에서 일어났습니다. 일곱째 인이 떼어질 때, 하늘에서 노래가 반시(半時) 동안 멈추었습니다. 계 15장에서 성도들의 순교 후에 이 역사의 기간이 지나갔을 때 그 노래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노래가 멈춤으로 나팔소리가 다시 들리게 됩니다. 예전적으로 말하자면 설교가 들리도록 하기 위해 찬양이 멈춘 것입니다. 일곱째 인은 지금 불과 같이 내리 쏟아 부어지시는 성령님을 거스리고 있었습니다. 8장 5절에서 쏟아붓는 불은 진노와 같은 것을 쏟는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진노의 의미라기보다는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으로부터 나온 불의 혀를 가리킵니다(단 7:10과 계 4:5을 비교하라). 성령님은 “다른 천사”에 의하여 부어집니다. 이 천사는 24천사장 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들의 우두머리로서 주의 천사,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제 두루마리는 열리고, 복음선포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경고의 나팔 (8:6-11:18) 우리는 24천사장 중 일곱 천사장이 더 앞으로 나서는 것을 봅니다. 각 천사장은 선포할 말씀 곧 울려 퍼질 나팔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경고인데 그 이유는 각각의 경우에 전체의 3분의 1만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이 중에서 많은 경우가 마치 장자와 군대가 전멸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애굽에 경고하셨던 재앙들과 같습니다. 첫째 나팔은 땅 즉 유대인에 대하여 울려 퍼집니다. 둘째 나팔은 바다 즉 이방인들에 대하여 울려 퍼집니다. 셋째 나팔은 즉 성전에(창2:10-14;겔 47) 대해 언급하는 물샘(8:10)에 대하여 울려 퍼집니다. 쓴 물은 부패된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독성이 많은 교리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성전에 두신 물두멍의 깨끗한 물과 대조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또한 계시록에 나타나는 사단의 일곱 이름 중 첫째 이름 곧 유독한 식물인 쑥(wormwood)을 발견합니다. 사단은 성전에 보좌를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넷째 나팔은 해, 달, 별에 대항하여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 넷째 나팔은 창조시의 넷째 날과 연관이 있다는 것과 이에 비추어 다른 것들을 다른 날에 연관시킬 수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하늘의 천체들은 통치자와 다스리는 자들을 상징합니다(창 1:4-18). 예수님은 이제 왕이시요, 모든 다른 통치자들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마지막 세 나팔들은 모두 땅인 유대인들에 대한 화(禍)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아직까지 사도행전에 머물러 있는데, 이때는 로마인들이 아직 유대인들과 유대주의자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할 때입니다. 다섯째 나팔은 사단과 그의 귀신들린 군사의 무리인 유대인과 유대주의자들을 지옥 구덩이에서 풀어주고 있습니다. 율법과 행위에 의한 구원을 전파함으로써 그들은 다섯 달 동안 즉 오순절부터 나팔절까지 사람들(유대인)을 괴롭힙니다. 그들의 악한 교리는 택한 자를 괴롭히지는 않지만, 이 택한 자들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압니다. 사단에게는 두 가지의 이름 즉 아바돈(Abadon)과 아볼루온(Apollyon)이라는 이름이 주어집니다. 여섯째 나팔 역시 여섯째 인처럼 3개의 환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들 환상 하나 하나는 모두 교회에 대한 것입니다. 2만만(200,000,000)의 천사들로 이루어진 군대는 원수와 전투하여 그들을 회심시킴으로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서” 교회라는 말을 타고 유다의 사자의 입으로 내뿜는 성령의 불로써 그들의 육신을 죽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교회라는 말을 탑니다. [이것은 AD 60년대에 유대인에 대한 로마의 원정과는 이 두 환상이 전연 관계가 없음을 밝힙니다. 이는 세상과 싸우는 교회의 영적 전투로 보아야 합니다] 여섯째 나팔의 둘째 환상은 요한 자신이 이 군대의 일원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요한은 그 책의 일부인 큰 책에서 취한 작은 책을 전파하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이 작은 책은 그 “다른 천사” 즉 예수님 자신에 의하여 요한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이 작은 책의 내용은 일곱 우뢰인데, 이것을 요한이 기록하기 시작하였으나, 기록하지 말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 대신에 이 일곱 우뢰는 계시록의 계속되는 부분에서 “큰 음성” 사건으로 계시될 것입니다. 여섯째 나팔의 셋째 환상은 두 증인에 관한 것인데,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에게 선포하는 144,000명의 신실한 자들의 상징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어두움을 비추는 성령의 힘찬 (감람유로 채워진) 등대인데, 이는 스가랴 4 장에서 가지고 온 이미지입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와 같습니다(11:5-6). 애굽에서의 모세와 엘리야처럼, 소돔을 방문한 두 천사와 같이 유대인을 대항하는 두 증인의 증거를 그들이 형성합니다. 그들의 증언의 능력 때문에, 무저갱(9:1-11)으로부터 짐승은 잠시 동안 지옥(pit)에 던져졌지만 결국 다시 밖으로 나와서 그들은 죽임을 당합니다(17: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11:8). 2:20에서 이세벨을 언급한 것과는 다르게, 이것은 바벨론에 대한 첫 언급입니다. 무엇이 바벨론입니까? 하늘에까지 닿으려는 거짓 종교의 중심지(창11 장)가 되려고 하는 원래의 성과 대(city-and tower)입니다. 바벨론은 음녀, 곧 거짓 신부와 딸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현대 대부분의 계시록 주석가들이 자주 말하는 것과 같이, 바벨론이 로마나 세속적인 권세가 아니라 거짓 교회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가장 명백하게 말하면, 바벨론은 예루살렘이고, 좀 폭넓게 말하자면, 로마제국에 흩어져 있는 예루살렘의 추종자들인 유대인들과 유대주의자들입니다. 바벨이 대(tower)가 있는 도성인 것 같이 예루살렘도 “하늘에 도달할” 대의 역할을 하는 성전이 있는 도성입니다. 사악한 유대인들과 유대주의자들은 증인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합니다. 에스더 9:19절에서 원수의 죽음 후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행한 것처럼, 이렇게 그들은 서로에게 선물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증인들의 죽음을 보고, 많은 자들이 회심하였습니다(11:13). 이 사건 즉 증인들의 학살은 계14장에서 144,000명의 성도들의 학살에 대응합니다. 우리가 잠시 12-15장에 이르는 나팔들의 “결미(postlude)”를 살펴보았지만 이제 다른 각도로 이 동일한 시기의 역사를 다시 살펴볼 것입니다. 일곱 나팔이 울려 퍼질 때, 모든 피조물은 예수님의 왕국이 나타나서 영원히 지속되도록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옛 창조의 마지막 사건은 지나가고, 남은 것은 진노의 대접으로 망가진 것들을 정돈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 대하여 독자가 알아야 할 간단한 지침(4) 나팔 시대의 역사 (11:19-15:4) 일곱 나팔들은 오순절과 옛 창조의 최종적인 심판 [예루살렘 멸망] 사이의 기간에 일어났던 사건의 주제와 특징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2-15장에 전개되는 나팔의 속편은, 사도행전 및 서신서, 그리고 사도행전의 끝을 따르는 부분의 장면들 배후에서 작용하는 영적 실체들과 투쟁들을 드러내는 그 시대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자의 자손(씨)인 예수님의 성육하심과 승귀로 시작합니다.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으로 오심을 가로막았습니다. 즉 가인으로 하여금 아벨을 죽이게 하였고,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을 타락하게 했고, 아달랴를 통하여 다윗의 계보를 끊어버리려 하고, 헤롯을 충동하여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그 일을 성사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어, 하늘에서 천사장 미가엘로서 사단(마지막 네 가지 이름이 여기에 계시됨 - 용, 뱀, 마귀, 사단)을 쫓아내셨습니다. 사단은 땅으로 쫓겨나 땅에서 쑥으로서 성전에 자기의 거처를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잠시 뿐이었습니다. 사단은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여자를 핍박하려고 도모하였습니다. 이 사건들은 행 3-7장에 기록된 사건들이고, 이 단락은 스데반 집사가 돌을 맞아 순교함으로써 끝을 맺습니다. 여자는 광야로 도망하였는데, 이것은 우리가 성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달아나는 것을 말하는 행8장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와 수년간의 평온의 기간을 지난 후에(행 9:31), 쑥은 그 쓴 물, 즉 거짓 유대주의 교리로 퍼부어 여자를 오염시키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일으켜 사단과 유대주의자들을 물리치시는 반면에, 땅(유대인들)은 사단의 거짓 교리에 흠씬 취하였습니다. 사단은 두 종류의 전술(핍박과 오염)을 사용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다시 핍박으로 선회하여 이번에는 유대인이 아닌 신자들 즉 “여자의 후손의 남은 자”들을 공격하였습니다. 사단은 이를 위해 바다 즉 로마의 이방 바다의 모래 위에일어서서, 바다짐승을 일으켰습니다. 짐승은 다니엘 7 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원래 바다의 짐승(들)을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는 자이며 보호하는 자로, 땅의 네 그룹-인도자로 세우셨습니다. 네 짐승들이 있었는데 그들 사이에 일곱 머리를 가지고 있어서, 결국은 한 짐승이었습니다. 각 시대마다 짐승은 악하게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항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짐승을 제거하시고 새 짐승이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느브갓네살과 그의 계승자들은 유대인에게 호의를 베풀었으나, 벨드사살이 하나님을 멸시하였을 때, 하나님은 고레스를 일으키셨습니다. 바사인들이 유대인들을 보호하기를 멈추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알렉산더를 세우셨습니다. 이와같이 역사를 이어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것들은 다음과 같은 짐승들과 머리들입니다. 짐승 1 머리 1 바벨론 짐승 2 머리 2 바사(Persia) 짐승 3 머리 3 그리스의 알렉산더 짐승 3 머리 4 그리스 애굽 (남방의 왕, 단11 장) 짐승 3 머리 5 그리스 수리아 (북방의 왕, 단11 장) 짐승 3 머리 6 헬라의 로마 (Hellenistic Rome) 짐승 4 머리 7 로마제국 우리는 로마도 그리스의 한 도시 국가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로마제국의 언어도 그리스어였습니다. 신약도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역대 황제들이 원래의 로마 질서를 부패시켰으며 결국 그 로마를 넘어뜨렸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여전히 헬라의 로마시대이며, 로마는 교회를 보호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네로가 즉위하였을 때, 처음에는 그가 열심히 로마를 변화시키고자 하였습니다. AD 64년에 도성은 불탔고,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비난하였습니다. 이것은 옛 로마의 끝이고 넷째 짐승이요 일곱째 머리인 새 로마의 완전한 출현입니다. 그것은 계시록 13 장에 사단이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것이 사망의 상처인데 이로 인하여 로마는 회복됩니다. 그것은 여섯째 머리를 죽이고, 일곱째 머리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인도자였던 짐승은 마지막에 악하게 되어 이방인들 중에 신실한 자들을 공격합니다(13:7). 반면에 유대인들은 그 짐승에게 경배합니다. 이제 여러분이 어떤 유대인에게 그가 가이사에게 경배할 것인지를 묻는다면, 그렇게 묻는다고 그는 여러분을 죽이려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선택을 할 입장에 이르면, 그들은 “가이사 외에 우리에게는 왕이 없다”고 외쳤을 것입니다. 그들의 속 중심에는 예수님을 거역하면서 권세를 숭배하였는데 이는 곧 그들이 가이사에게 경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윤리적-영적 왕국이 아닌 정치적 왕국을 원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제국이 로마 제국을 대체하기를 원했습니다. (계13장을 읽을 때, 땅(earth)은 유대인(land)을 의미함). 계시록은 역사의 배후에 있는 영적 실체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 실체는그들이 비록 가이사를 미워할지라도 그를 경배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두번째 짐승 곧 땅짐승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분명히 유대인(땅)짐승인데, 이는 또한 거짓 선지자라고 불리웁니다. (그리고 살후2장에서는 불법의 사람이라고 불리웁니다.) 그 짐승은 두 뿔을 가지고 있으며 바다짐승을 닮았습니다. 이 두 뿔은 헤롯과 대제사장들입니다. 헤롯 가문(Herods)이 팔레스틴에 있는 로마의 셈족(에돔) 종들인 것은 사실입니다. 또 헤롯 왕가가 대제사장들을 임명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 13:13절에서 우리는 거짓 선지자인 땅의 짐승이 하늘에서 땅에 불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뒤로 가서는 갈멜산의 엘리야를 가리키며, 문맥상으로는 그와 맞먹는 모조로서 거짓 오순절이며 8:5의 모조입니다. 매우 중요한 점은 그것이 또한 성막과 성전이 완공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제단에 보내신 불의 모조라는 것입니다(레 9:24; 대하 7:1). 행2장의 오순절의 불은 예수님께서 새 성전인 교회를 조직하셨다(constitute)는 표적이었습니다. 13:14절에서 가리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헤롯 성전의 완공이라고 믿는데, 이 성전은 하나님의 쉐키나 영광이 아니라 쑥을 받들고 있는 사악한 가짜 성전입니다. 그 성전은 AD64년에 완공되었고, 같은 해에 로마가 불타고 새로운 로마가 건설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악한 유대인들은 성전의 완공을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는 표적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로마를 배반하도록 부추겼고, 이는 곧 그들을 멸망으로 이끌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이전에 결코 없었던 기독교인을 핍박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이제 그들은 기독교인들을 사악한 배교자라고 마침내 절대적으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기독교인들은 신13장의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헤롯 성전의 완공은 거짓 오순절의 열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 결과로 신자들, 두 증인, 144,000명의 핍팍과 순교로 이어졌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바다짐승의 우상을 세우고, 짐승우상에 경배하지 않는 자들은 죽임을 당해야한다고 명령하였습니다. 짐승우상을 경배하는 것은 사고파는 것을 상징하고, 짐승의 표를 손과 이마에 (찍도록) 요청받았습니다. 짐승우상은 완공된 성전이었습니다. 마치 참성전이 그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왕국을 나타내는 외형적인 상징인 것처럼, 거짓 성전은 그 안에 있는 쑥의 왕국을 나타내는 외형적인 우상입니다. 우리는 이 거짓예배가 우상숭배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계시록에서 참 예배는 그 책 및 작은 책,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및 예수님의 증거에 신실한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거짓예배는 형상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회의 역사는 2계명을 위반하여 우상숭배로 떨어지려는 유혹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짐승의 숫자입니다. 이 짐승의 숫자는 사람의 숫자 즉 인간의 수입니다. 계시록에서는 언제나 “사람”은 “유대인”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짐승의 숫자는 유대인의 수입니다. 이는 왕상10:14에서 나오는데,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솔로몬의 타락 (신 17; 왕상 10:14)을 다루는 열왕기에서의 그 기록이 시작됩니다. 신17장의 율법은 왕이 금과 여자와 말을 더 늘이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는데, 왕상10:14에서는 솔로몬이 이 세 가지를 다 범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계시록에서는 그 “땅”(land)의 종교지도자들을 임금(kings), 곧 “땅의 임금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및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배교는 솔로몬의 죄악과 연결됩니다. 마치 솔로몬의 사후에 북쪽의 지파들이 반역했을 때, 솔로몬이 자기 나라를 잃어버린 것처럼, 땅의 짐승도 역시 예루살렘의 파괴로 자기 나라를 영원히 잃을 것입니다. 주의: 666은 네로 황제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666은 유대인의 숫자이며, 그리고 유대인들의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거짓된 솔로몬의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바다짐승은 성부 하나님의 모조이고, 거짓 선지자는 성자 하나님의 모조입니다. 마치 아들이 아버지의 말씀과 수인 것처럼, (유대) 땅의 짐승도 바다짐승의 이름이요 숫자입니다. 바다의 짐승은 이방인이며, 그의 숫자는 유대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경의 세 대적은 배교자(창3장), 형제를 살인한 자(창4장), 이방 여인을 꾀는 자(창6장)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들은 배교한 유대 종교지도자들, 에돔의 살인자(에서의 후손들), 이방인들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산헤드린, 에돔인(이두메인) 헤롯, 그리고 로마인 빌라도에 의해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바울 역시 이 세 그룹에 의해 심문을 받았습니다. 내가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헤롯가문(the Herods)이 성경의 예언의 일부임을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다의 짐승은 이방인 대적이며, 땅의 짐승은 일차적으로 그의 동류로서 대제사장과 함께 헤롯가문의 대적이고, 짐승의 우상은 유대인 대적입니다. 계14장에서 우리는 땅의 짐승의 명령에 의한 대량학살을 기술하고 있음을 봅니다. 14:1절에는 144,000이 예수님과 함께 시온산 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15:2을 보면 그들은 하늘에 있습니다. 얼마 동안은 그들이 순교를 당해왔습니다. 이 무리의 사람들은 새 창조의 처음 익은 열매로서 추수된 자로 밝혀집니다(14:4).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들은 옛 창조의 추수를 완성합니다. 이 장에는 6명의 천사들이 나옵니다. 4명은 24천사장들에 속한 자들이며, 나머지 둘은 주의 천사인 “다른 천사”입니다. 1. 천사로서 예수님, 14:6 2. 천사장, 14:8 3. 천사장, 14:9 4. 사람으로서 예수님, 14:14 5. 천사장, 14:15 6. 천사장, 14:17 7. 천사로서 예수님, 14:18 (8:1-5) 먼저 예수님은 복음, 좋은 소식을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전파십니다. 그 기쁜 소식은 심판의 시간이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대환란 즉 성도의 학살로 시작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벨론의 멸망으로 계속될 것이며,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멸망으로 끝날 것입니다. (주의: 대환란은 예루살렘 포위와 멸망 중에 유대인들이 받는 고난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손에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과 순교입니다.) 한 천사장이 예수님을 따라서 선언하기를, 예수님이 방금 선언한 심판을 자세히 부연하면서 바벨론은 망할 것이라고 합니다(14:8). 그리고 나서 다른 천사장이 선언하기를, 교회를 거역하고 사악한 성전과 타협하는 자들은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보좌 바로 앞에서 지옥을 말하고 있음을 유의하십시오. 죄인들은 하나님을 무엇보다도 더 미워합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가장 큰 형벌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영원히 참아 내도록하는 것입니다(14:11). 12절은 이 무서운 경고가 성도들이 환란을 인내하도록 돕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로 하여금 유대주의자와 함께 가도록 유혹하겠지만, 이 무서운 경고가 그들을 인내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13절에서 우리는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제 아브라함의 품에 더 이상 갈 필요가 없고, 하늘이 열리도록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마지막 순교가 하늘의 문이 열리도록 인도할 것이요, 15:2에서 보는 대로 모든 성도가 그리로 들어갈 것입니다. 14 장에서 일곱 사람의 중앙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데, 그는 곡식을 거두려고 서 있습니다. 한 천사장이 나와서 그분에게 그렇게 하도록 권합니다. 그가 낫을 대어 곡식이 거두어집니다. 그리고 나서 또 다른 천사장이 포도를 거두려고 나타납니다. 8:1-5의 다른 천사인 예수님이 그를 불러 포도를 거두라고 하셨고, 그는 그렇게 합니다. 이제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상징인데, 예수님 개인뿐만 아니라 그의 온 몸인 교회의 상징입니다. 신학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교회를 Totus Christus, 전체 그리스도(the Whole Christ)라고 합니다. 곡식과 포도의 추수는 성도의 타작 즉 순교자의 마지막 학살입니다. 이것은 악한 자들의 심판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또 우리가 그것을 나누어서 곡식은 성도이고, 포도는 죄인들이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떡과 포도주를 그렇게 나누는 것은 성경의 모든 가르침과도 맞지 아니하며, 또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포도를 거두는 것이 곧 악한 자들을 심판하는 추수라고 말하려는 이유는 포도를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포도가 하나님의 진노에 의하여 틀에 밟힌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포도로 생산되어진 포도주가 하나님의 진노를 전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다음 설명에서 분명합니다. 포도에서 나온 피가 그 땅을 온전히 뒤덮어 채운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경에서 피가 보복을 외치고 있습니다. 땅을 뒤덮고 있는 피는 하나님의 보복을 부르짖습니다. 피는 하나님의 진노를 외치고, 그것은 대접을 쏟아 붓는 것에 즉시 이어집니다. 피는 성도의 피인데, 이는 하나님의 진노로 그 복수가 갚아집니다(창4:10; 출1:22 + 7:20 + 12:23; 민35:9-34; 신21:1-9) 포도들이 성 밖에서 짓밟힙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성밖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으로서, 성도들이 보여 지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히13;11-14과 비교하세요. 이 마지막 학살은 바벨론의 파멸을 인치는 것입니다. 15:1에 세 번째 큰 표적이 나타납니다(12:1,3). 즉 마지막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장들이 더 나타납니다. 이 재앙들은 성도들을 학살한 것에 대한 보응으로 내리치는 재앙들입니다. 그 동안 성도들은 아브라함의 품에서 가장 높은 하늘로 옮겨서 하늘 성소의 문 앞에 있는 유리 바다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서 있습니다. (이것은 창1:6-8에 있는 궁창 하늘 위에 세워진 바다입니다. 참고 출 24:10; 겔1:22; 계4:6). 그러나 성도들은 아직 성소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계시록에 대하여 독자가 알아야 할 간단한 지침(5) 최종적 심판의 대접들 (15:5-16:21) 대접 단락이 15:5에서 시작됩니다. 다시 우리는 일곱 천사장들이 나오는 것을 봅니다. 네 그룹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대접들을 일곱 천사장들에게 줍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하늘 궁전에 가득차서 아무도 그리로 들어갈 수 없게 됩니다. 이 시점에 24 천사장들은 모두 떠나고, 그들의 보좌는 비워졌으나, 성도들은 아직 보좌를 차지하러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천사장은 18:21에 기록된 대로 행하나, 그는 이 사건 이전에, 아마도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들과 함께 그의 보좌를 떠났음에 틀림없습니다.) 나팔에서처럼 처음 네 대접들은 유대인, 이방인, 성전, 통치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대접을 땅에 쏟아 부을 때(16:1), 초점은 유대인에게 모아집니다. 그러나 바벨론에 대한 심판은 동시에 전체 옛 창조에 대한 심판입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이 옛 창조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나팔처럼, 일곱 대접은 최후 심판의 일곱 가지 특성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반면에 그 속편(17-22장; 17:1; 21:9)은 상징적인 형식으로 실제 일어난 사건의 역사적인 이야기를 제공합니다. 첫째 대접은 “사람들”에 대한 것인데, 이들은 왕이신 예수님에게 복종하는 대신에 권세와 정치의 원리인 가이사를 숭배하는 자, 곧 배교한 유대인들입니다. 둘째 대접은 바다에 대한 것이며, 바다를 완전히 죽입니다. 이방인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이기에, 필자는 계시록 21:1에서 다루는 것보다도 여기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방인은 오직택함을 입은 제사장 나라 (히브리인- 이스라엘인- 유대인)와 대조되어 존재합니다. 교회는 새로운 택하신 백성이요, 새로운 제사장 나라입니다. AD 70 년에 옛 택하신 백성이 제거됨으로써 어떤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게 되었습니다. 인종적으로, 문화적으로는 유대인과 헬라인과 로마인인 사람들이 AD 70년 이후에 존재하지만, 이 사람들은 옛 창조에서 자신들이 가졌던 특별한 소명을 이제 더 이상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은 더 이상 특수한 보호자 짐승이 아니며, 유대인들은 더 이상 제사장 나라가 아닙니다. AD 70 년 이후에는 남아있는 모든 자들은 단지 신자들과 불신자들입니다. 셋째 대접은 성전과 쓴물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 점을 놓치지 않도록, 16:6은 이런 심판이 다가온다는 것을 다시 언급하는데, 이는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복수로서의 심판이며, 아벨로부터 144,000명에 이르는 모든 순교자에 대한 형벌(마23:35)로서의 심판입니다. 6:10에서 “어느 때까지이니까?” 라고 하던 제단 아래 성도들이 이제 16:7에서 “아멘” 이라고 말합니다. 넷째 대접은 통치자와 다스리는 자들에 관한 것입니다. 해가 (태움이) 정지되지 아니하고, 더 활발하여져서 더욱 잔인하게 됩니다. 잔인한 통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형벌입니다. 여기서는 유대인을 다스리는 로마의 통치가 점점 잔인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대접은 유대인에서 짐승으로 이동합니다. 필자는 이것이 네로 말년에 일어난 로마의 혼란과 세 황제 시대(AD 68-69)의 혼란을 암시한다고 믿습니다. 여기에서 불경건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즉 이방인들입니다. 여섯째 대접은 아마겟돈(HarMagedon) 전쟁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 “Har”는 “산”을 의미하며, “Maged”는 “절기의 총회(Festival Assembly)”를 의미합니다. 절기의 총회로 모이는 산에서의 전쟁은 시내산에서, 시온산에서, 교회에서의 전쟁입니다. 실제의 전투는 계시록 19 장에서 묘사된 대로, 거기,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서, 전투는 진행되고 그 전투에서 짐승이 파멸당합니다. 우리는 시내산 기슭에서의 아말렉과의 전투를 기억하게 됩니다(출 17). 두 진영의 군대가 함께 나아옵니다. 첫째는 해 돋는 데로부터 오는 왕들의 군대입니다. 이 군대는 성도들의 군대인데, 그 대장은 해 돋는 데로부터 오신 천사인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7:2). 유프라테스강은 말라서 이 군대들이 거룩한 땅으로 들어 올 수 있습니다. 두 번째의 군대는 세 개구리의 군대입니다. 이 세 개구리들은 성령의 모조인데, 모조 하나님(용), 모조 성부(바다 짐승), 모조 성자(거짓 선지자)에게서 나옵니다. 그들은 교회와 싸우기 위해 로마 제국(Roman Oikumene)의 지도자들을 모읍니다. 17장은 이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영적으로 표현하자면, 사단은 왕국에 대항하기 위해 악한 로마인과 악한 유대인들을 함께 모았습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오히려 예루살렘을 파괴하기로 결심합니다(17:3, 7, 14, 16). 그 다음 절기 총회로 모이는 산에서의 전투에서 예수님과 그의 백성들은 그 짐승을 멸망시킵니다(19:19). 그리고 나서 일곱째 대접이 쏟아지고, 6:12-17의 사건들이 다시 재현되기 시작합니다. 40년 전에 멈추었던 이 심판은 이제 완성됩니다. 바벨론과 이방인의 영역은 무너지고, 오직 하나님의 도성만이 남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계시록이 나타난 역사의 배후에 있는 진정한 영적 실체들을 말해주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유념해야 합니다. 인간의 도성들은 땅 위에 여전히 남아 있으며, 악한 정부도 역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은 AD 70 년에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옛 창조의 힘으로 사단의 충만한 능력에 의해 움직이던 영적인 권세인 모든 인간적인 제국들은 무너졌고, 그 존재가 끝났습니다. 바벨론에 대한 심판 (17-18장) 바벨론은 중심적으로 예루살렘이지만, 그 상징은 그 도성 이상의 것을 포함합니다. 옛 창조의 제사장 백성들의 중심인 바벨론-예루살렘은 전체 거룩한 땅과 어디에 있든지 간에 모든 유대인들 및 유대주의 자들에게까지 확장됩니다. 음녀 바벨론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으며, 곧 열방의 물바다 위에 앉아 있습니다(17:1, 15). 그와 동시에 그 음녀는 짐승 위에 앉아 있는데, 이 짐승은 하나님이 세우셨으나 사단이 타락하게 한 인도자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두 상징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가장하는데, 이는 짐승이 하나님이 되고자 추구하고, 거짓 선지자가 하나님이 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벨론도 하나님이 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이것은 이들 권력들이 결국에는 서로 대적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물들 위에 홍수에 좌정하십니다(창1:2; 시29:2, 10). 하나님은 하늘의 인도자들인 그룹 위에 (언약궤 위에, 그리고 겔1장에서처럼) 좌정하십니다. 음녀도 또한 광야에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교회인 경건한 여자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그 여자는 사악한 유대주의 교리에 의해서 공격을 받으면서 광야에 있었습니다(12:14). 필자는 음녀가 광야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고 음녀는 믿지 않는 유대인일 뿐만 아니라, 유대주의자들 즉 가짜 교회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음녀는 출애굽 후에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인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았으나 그 구원을 거역하였습니다. 한편, 신실한 자들은 계시록에 나오는 신부의 경우와 같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대제사장의 이마에는 “야웨께 성결”이라는 금장식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가짜 대제사장인 음녀는 이마에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썼는데(17:5), 이는 야웨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그의 배교한 신부이며, 거룩하지 아니하고 가증하였습니다. 이 음녀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해 있었습니다. 이전에 땅에 뿌려진 성도들의 피가 하나님의 복수를 부르짖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배교자들이 일종의 반-성례전으로써 그들 안에 있는 피가 그들의 가장 깊은 곳에서 심판을 부르짖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자가 앉아 있는 짐승은 붉은 용(사단)과 바다의 짐승(로마, 그는 그 하수인들인 헤롯왕가의 사람들을 통하여 지지받고 있음)의 결합체입니다. 그러나 그 궁극적인 권세는 무저갱에서 나온 짐승인 용입니다(9:1, 2, 11). 이 무저갱 짐승은 교회를 대항하여 유대인과 유대주의자들을 인도한 적(9:1-11; 12:15)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사도들에 의해 패배했을 때는 이 무저갱 짐승은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조금 후에 11:7과 13:15-17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그 짐승은 교회를 향한 마지막 공격을 하기 위하여 무저갱으로부터 돌아올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멸망할 것입니다. 먼저 그의 바다짐승과 거짓 선지자 대리인들이 멸망하고(19:20), 그 다음 사단 자신이 멸망당할 것입니다(20:10). 이 진술은 계시록이 기록한 연대를 말해줍니다. AD 64년에, 로마에 있는 네로에 의한 공격전에, 팔레스틴에서 헤롯 성전을 완공되었을 때에 유대인에 의한 공격전에 계시록이 기록되었습니다. 계시록은 바울이 유대주의자들을 패배시킨 이후에 기록 되었으며, 이것은 사도행전 끝에서 AD 60-62년경에 일어난 “분명하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희미하다”는 것은 아직도 계2-3장의 일곱 교회에 있는 ‘거짓 사도들’과 ‘발람주의자들’ [사람을 먹는 자들]과 ‘니골라당’ [사람을 이기는 자들]이 여전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17:9절에 더 많은 상징들이 나옵니다. 일곱 머리는 역시 일곱 산들인데, 음녀가 앉아 있는 짐승 왕국들입니다. (이들은 로마의 일곱 언덕도 아니고, 일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예루살렘의 일곱 언덕도 아닙니다.) 산들/ 머리들은 차례대로 왕으로 존재하는데, 이들은 제국을 의인화한 것이요 또한 제국의 머리입니다. 다섯은 망했습니다(바벨론, 바사, 알렉산더, 헬라 애굽, 헬라 수리아). 하나는 현존합니다(헬라의 로마, 아직 교회를 보호하고 있음). 하나는 임하려 합니다(사단적인 로마 제국이 AD 64 년에). 일곱째 머리는 또한 여덟째 머리입니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단7장에 있습니다. 작은 뿔이 일곱째 머리에 있습니다. 그는 열 뿔 중에 세 뿔을 뽑아내는데, 이 열 뿔은 우리가 살펴볼 것인데, 열 명의 로마 황제들을 가리킵니다. 그는 헤롯 왕가인데, 팔레스틴에서 로마를 위하여 다스렸으며, 그 당시 한 동안 세 로마 황제의 전권을 가졌습니다. 로마의 세 황제는 그 권세를 세 명의 헤롯 왕가의 왕들에게 주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 대왕에게 티베리우스 : 요한과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 안디파스에게 글라우디우스 : 야곱을 죽인 헤롯 아그립바 1 세에게 열 뿔은 열 왕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일곱째 머리 위에 있는데, 이는 로마제국이 AD64년에 헬라로마를 누르고 승리자로 등장하기 전 한 세기 동안에 로마 제국이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쥴리어스 시져(가이사) 아우구스투스 시져(가이사) 티베리우스 시져(디베료 가이사) 가이우스 시져(갈리굴라 가이사) 글라디우스 시져 (가이사) 네로 시져 (가이사)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안 베스파시안이 AD 69년에 보좌에 올랐고, AD 70년에 바다짐승은 끝났습니다. 집합적으로 하나의 제국짐승의 권세로 취급된 이들 열 뿔은 음녀에 대항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로마인들이 제국 내에서 특별한 특권을 인정함으로써 유대인을 지지했습니다. 실로 이것이 왜 그들이 교회를 초기부터 보호하였는지에 대한 이유인데, 이는 그들이 교회를 유대인의 한 종파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AD 64년의 거짓 오순절 이후에, 유대인들이 한 나라로서 반항하였을 때, 로마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 18장은 예루살렘-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환희와 비탄에 대한 묘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루살렘을 떠나도록 지시를 받았습니다(마24:15이하와 비교하라). 그 후에 세번의 애통이 예언되었습니다. 첫째는 그 땅의 왕들, 종교 지도자들의 애통입니다. 둘째는 정규적인 예배자들인 땅의 상고들의 애통입니다. 열거된 상품들은 성막(출 25: 4-7)과 성전(대상 28-29)을 짓기 위하여 수집된 품목과 일치합니다). 이들 품목들과 연관된 매매는 13:17과 연관이 있고 예배행위와 관계가 있습니다. 셋째는 유대인들을 지지했던 이방인 “뱃사람들” 의 애통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배반한 유대주의에 들어온 자들입니다. 그들에 관한 4중의 목록이 나오는데 다른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지파, 방언, 나라, 백성”과 같은 항목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도들은 바벨론의 멸망의 예언을 기뻐하라고 합니다. 21절에서 24천사장중에서 마지막 천사장이 극적으로 물 속에 돌을 세게 집어던지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 가운데로 흩어지는 의도를 드러냅니다. 총괄하는 24절에서 이 모든 것은 남편 하나님이 그의 살해된 신부(교회)에 대한 복수를 갚았기에 일어났다고 다시 한 번 설명합니다. 아마겟돈 전쟁 (19장) 19장에서 우리는 성부와 함께 하늘에서 기뻐하는 성도들을 보게 됩니다. 역사의 큰 잔치가 이제야말로 진정으로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물론 이 큰 잔치는 오순절에 시작되었지만, 이제 아브라함의 집에서 이스마엘이 쫓겨나는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계속될 때에, 절기 총회로 모이는 산 (아마겟돈)의 전쟁이 일어납니다. 교회는 새로운 역사로 접어들면서, 열방을 정복하는데 이제 공적으로 인정받은 예수님을 따릅니다. 유대민족을 정복하는 것은 대 위임명령(“먼저 유대인에게”)을 수행하는 첫 번째요 결정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이제 만국은 바다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시작으로 하여 복음으로 정복되어야 합니다. 열방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칼로써 살해될 것인데, 이 칼은 왕국의 설교입니다. 바벨론이 파괴될 때, 생존하였던 땅의 남은 왕들은 바다의 짐승, 거짓 선지자(헤롯가의 왕들과 대제사장들)와 함께 멸망당하여 역사에서 제거됩니다. 계시록에 대하여 독자가 알아야 할 간단한 지침(6) 천년왕국 (20장) 이 모든 사건들 후, AD 70 년에, 천년왕국이 시작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때부터 AD 70 년까지가 1,000년임을 성경 연대기 연구가 보여 줍니다. 이것이 첫 번째 천년왕국이고, 더 위대한 천년왕국의 그림자였습니다. 문자적인 것이 상징적인 것을 예시합니다. 즉 천년왕국의 상징은 첫 번째 천년왕국의 실제 천 년에 기인합니다. [솔로몬의 666배교는 그 1000년간의 첫번째 왕국을 마감하는 666배교의 전조가 되었음을 주목하세요.] 천년왕국의 시초에, 사단은 무저갱으로 던져집니다. 이것은 그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더 이상 만국을 미혹하여 그들이 왕국을 가로막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더 이상 13:1에서 하였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결박되었습니다. 반면에 높아진(ascended) 성도들은 하나님의 궁궐-성전으로 옮겨져 천사장들이 물러난 보좌에 앉아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립니다. 이 충만한 높아짐은 부활로서 묘사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개인적인 구원은 첫째 부활이고, 그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과 같습니다. 세례 역시 첫째 부활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계시록 20장에서 첫째 부활이라 함은 하늘에서 다스리기 위한 높아짐 (ascension)을 말합니다. 나머지 죽은 자들은 마지막 날(the Last Day)까지 일어나지 않습니다. 계시록 14:13에 비춰 볼 때, 필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죽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기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며, 따라서 땅에서 죽을 때 첫째 부활에 동참하게 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악한 자들을 가리키며,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다만 불못에 던지우기 위하여, 마지막 날에 육체를 다시 받아입을 것입니다. 7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40년에 시작된 천년은 그의 두 번째 오심때까지 계속되지 않을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천년이후의 짧은 기간 중에 사단은 무저갱으로부터 다시 한 번 풀려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만국들, 곡과 마곡(방백과 백성들, 겔 38-39 장)을 미혹하여 교회를 공격할 것입니다(7절 이하). 그러나 이 최종적인 공격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과 최후의 심판에 의해 그 기간이 단축될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그 성전에 충만하실 때, 아무도 그곳에 남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모든 하늘과 땅에 충만하시고, 그들은 “달아날” 것입니다. 그 때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의 행적에 따라 심판을 받든지,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주목할 점. 사단이 풀려났을 때, 그가 땅의 네 모퉁이의 열방을 미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20:8). 필자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심판이 필요하다고 보실 때에 사단이 특정한 나라를 특정한 시간에 미혹하도록 풀어주시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우리 세기에는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가 그러한 미혹 아래 있었던 이전의 기독교 국가들의 좋은 실례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열방을 모두 미혹하기 위하여 사단이 풀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 (21:1-22:5) 21-22장의 마지막 환상은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환상입니다. 이것을 천년 이후에 오는 것으로, 우리는 이것을 최후의 심판 이후의 것들에 대한 묘사로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도성의 문은 열려 있고, 회심한 자들이 들어오고 있고 성령과 신부는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21:24; 22:17). (그리고 례23장에서는 장막절을 다루는 두 곳이 있는데, 이는 천년과 새 예루살렘에 상응합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새로운 것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통치에 관한 것입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에서 도래하였는데, 이는 그 사람(a Man)이 마침내 하늘 보좌에 하나님과 함께 앉으셨기 때문이고, 오순절에도 새 하늘과 새 땅이 왔는데, 이는 성령이 마침내 그 충만한 권세로 이 땅 위에 오셨기(released)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그 첫 단계일 뿐입니다. 새 하늘의 충만함은 성도들이 하늘의 보좌에 계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할 때 도래하였으며, 새 땅의 충만함은 사단이 땅에서 제거되었을 때 도래하였으며, 그리고 더 이상 어떤 (거룩한)땅도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떤 바다도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신부가 절기 총회로 모이는 산에서 전쟁을 할 때 형성되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19:7-9).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함으로써 새 예루살렘이 준비되었다고(21:2) 말할 때도 역시 동일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교회는 오순절에 완전히 형성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순절에 교회가 교회로서 완전히 처음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40여년에 걸쳐서 몇 가지 교회를 이루기 위한 작업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 일을 수행하는 것은 교회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의무였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성경을 완성해야 했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유대인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새로운 몸으로 조직했어야 했는데, 바울 서신이 보여 주는 데로 이는 시간이 걸리고 어려운 일들이 포함된 과정입니다. 이것이 완성되었을 때, 첫 열매 교회는 예루살렘 문 밖에서 순교함으로(14:20) 교회의 주님과 함께하는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신부는 완전히 준비되었고, 형성되었습니다. “첫째는 유대인에게”라는 기간이 비로소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은 AD 70년 후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제자가 된 만국의 모습인데, 이들은 대 위임명령이 온 땅위에서 성취될 때 점차적으로 교회 안으로 들어온 자들입니다(21:24).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신부를 압제하는 대적들을 쳐부수고 그들에게서 얻은 전리품으로 자신의 성소를 건축하십니다. 그래서 성막은 출애굽의 전리품으로 건축되었고, 다윗이 불레셋과 전쟁하여 얻은 전리품으로 성전을 지었고, 에스겔 40-48장에 나오는 환상 중의 도성-성전 (City-Temple) (회복 언약 시대를 상징하는)은 곡과 마곡(겔 38-39 장; 에스더서)을 상대로 싸운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건축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새 예루살렘 역시 18:12-13절에 열거된 바벨론에게서 획득한 전리품으로 건축되었습니다. 첫 번째 두 성소 즉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은 실제로 건축되었습니다. 두 번째 두 성소 즉 에스겔의 회복된 성전과 새 예루살렘은 너무나 영광스러워서 물리적으로 건축될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문자적으로 성전-도성인데, 이는 마치 옛 시대의 물질적인 성막과 성전이 드러내었듯이 동일한 방법으로 영적인 실체를 나타냅니다. 새 예루살렘은 거룩한 산을 상징하는 거대한 피라미드의 형태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 꼭대기는 궁창을 거쳐서 바로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꿰뚫고 있습니다. 높은 벽이 문들에서 시중들고 있는 천사들 (아마도 목회자들)과 함께 새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교 당하신 모퉁이 머릿돌이신 예수님과 함께 순교당한 12 사도들의 기초석 위에 그 도성이 건축됩니다. 진주 문들은 이방 바다에서 나오는 반면에, 그 돌들은 이스라엘의 지파들의 보석인데, 12사도로 변형된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새로 온전히 형성된 교회는 이전의 유대인과 이전의 이방인들이 함께 하나의 새로운 몸으로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도성은 성전이고 성전이 바로 도성입니다. 이것은 교회와 국가의 구분이 없어진 것을 의미하지 않고, 교회는 국가가 되어야 할 모든 것의 소우주(축소판: microcosm)임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회개한 나라들 앞에 도달하며 대 위임명령에 따라 그들을 제자로 삼습니다. 지독한 쑥물은 사라지고 없으며, 생명을 주는 물의 흐름인 성령이 온 세상에 새 생명을 가져오면서,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흐릅니다. 마지막으로 죽은 성도들이 하늘에서 천사장들이 앉아 있던 보좌에 앉아서 다스리는 것과 같이, 땅 위에 살아 있는 성도들도 역시 세상을 제자로 삼으면서 영원히 다스립니다(22:5). 마지막 참고사항 (22:6-21) 환상들은 끝났습니다. 요한은 일곱 교회들에게 이 일들이 속히 임할 것을 상기시킵니다. 그들은 시험 당하고, 시련을 받을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입증되신 것과 같이, 그들은 굳게 서서 예수님이 속히 그들을 입증해 주실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일 그들(우리들도)이 굳게 서지 못한다면, 지금 열려있는 책의 내용이 바벨론과 짐승에게 임했듯이, 그들(과 우리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 설교는 축도로써 끝납니다(2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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