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시편 찬송 서문과 칼빈의 찬송 신학 (I)-1542년 서문을 중심으로 김헌수 (대전: 성은교회 목사)
제네바 시편 찬송 서문 (I)
존 칼빈 (제네바: 1542년)1)
신실한 신자라면 누구나 가까운 데에 있는 교회에서 성찬에 참여하고 주일이나 다른 날에 교회 모임에 참석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돌려 드리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이고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이 모두 거기에서 말하고 행하는 것을 알고 이해하여서 유익을 얻고 세움을 입는 것도 마땅하고 사리에 맞는 일입니다.
성신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였을 때 지켜야 할 규칙을 제정하여 주셨는데, 그것은 보거나 관람하면서 세상 사람을 즐겁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분의 백성이 모두 거기에서 유익을 얻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증언하고 명령하는 것처럼(고전 14:26),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것은 서로를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의도가 아니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그렇게 명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제정하신 모든 것을 배워서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내용을 전혀 모르면서도 기도회나 예배에 참석하였으니까 경건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건한 감정은 죽은 것이거나 야만스러운 것이 아니라 성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생기가 넘치는 움직임입니다. 성신께서 우리의 마음을 진정으로 감화시키고 우리의 이해력을 깨우쳐 주셔서 나온 경건함입니다. 사람이 그 의미를 몰라도 눈에 보이는 것으로 (그의 신앙과 교회가) 세워질 수 있다면, 바울 사도는 알 수 없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그렇게 엄격하게 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가르침이 없으면 세움도 없다’는 이 논리도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교회에서 사용되는 우리 주님의 거룩한 규례를 존중하기를 참으로 원한다면, 먼저 규례의 내용과 의미와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야 규례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고 따라서 바르게 규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교회의 신령한 모임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으로 주님께서 명하신 것은 그분의 말씀의 강설, 공적(公的)이고 엄숙한 기도, 성례의 시행, 이 세 가지입니다. 말씀의 강설에 대하여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서는 이야기하지 않겠고, 다른 두 가지에 대하여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상적인 언어로 드리는 기도
기도에 대하여서 말씀드리자면, 성신께서는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일상적인 언어로 기도를 드리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셨습니다. 사도는 알 수 없는 말로 드린 기도에 대하여서 사람이 ‘아멘’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4:16). 기도는 회중 전체의 이름으로 회중을 위하여서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사람이 모두 참여해야 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교우들이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를 교회에 도입한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러한 관행은 부당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도 아니라는 괴상한 논리로 이의를 제기하거나 궤변을 늘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주장을 하려면,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반대가 되는 것, 말하자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에 하나님께서 동의할 것처럼 보인다고 가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정면으로 어기고 그러한 반역을 마치 거룩하고 칭송할 만한 것인 것처럼 자랑하고 옹호하는 것은 하나님을 매우 멸시하는 일인 것입니다.……(성례에 대한 부분은 생략함)
우리는 성찬 예식문과 혼인 예식문,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기도문과 찬송도 함께 묶어 이 책을 출판합니다.……
찬송으로 드리는 기도
공적인 기도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말로만 하는 기도와 찬송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최근에 비로소 고안된 것이 아닙니다.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이것은 교회가 처음 섰을 때부터 행하였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입으로 하는 기도뿐 아니라 찬송으로 드리는 기도에 대하여서 가르칩니다.
음악에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불붙게 하는 힘이 있어서 우리가 더 간절하고 열렬하게 하나님을 부르고 찬송하도록 하는 것을 우리는 실제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선생의 말처럼, 노래가 경박하거나 경솔해지지 않고 장중하고 위엄이 있도록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식탁에서나 집에서 사람을 즐겁게 하려고 부르는 노래와 교회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부르는 시편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예식문에 대하여서 바르게 판단하기를 소원하는 사람은, 우리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책이 교회를 세우는 것만을 지향함을 보고서 이것은 거룩하고 순수한 책이라고 생각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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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2년에 두 번째 시편 찬송이 “기도의 예식서와 회중 찬송”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시편 찬송에는 클레멍 마로(Clement Marot)와 칼빈이 운율을 붙인 시편 찬송 35곡과 함께 세례와 성찬 예식문, 그리고 몇몇 기도문이 들어 있었다. 시편 찬송에 교회 예식서와 신앙고백서가 함께 묶여서 나오기 시작한 것인데, 칼빈은 “독자들에게”라는 제목의 서문에서 ‘예배와 성례와 시편 찬송’ 등에 대하여서 간략히 소개하였다. 이 서문은 찬송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잘 담고 있으므로 전문을 자세히 읽어 보고 또한 칼빈의 『시편 주석』 서문과 비교하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펴볼 칼빈의 “시편 찬송 서문”은 1543년 6월 10일에 출간된 세 번째 시편 찬송에서 온전한 형태로 나온다. 그런데 1543년의 서문은 1542년 서문에 음악에 대한 부분을 더 첨가한 것이다.2) 이번에는 1542년에 출간된 서문을 살펴보고 다음 호에서는 1543년에 첨가된 부분을 살펴보려 한다.
세 가지 목적 - 시편 찬송의 서문(1542)과 『시편 주석』의 서문(1557)
칼빈의 시편 찬송의 서문은 “신실한 신자라면 누구나 가까운 데에 있는 교회에서 성찬에 참여하고 주일이나 다른 날에 교회 모임에 참석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돌려 드리는 것이 가장 필요한 일이고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이 모두 거기에서 말하고 행하는 것을 알고 이해하여서 유익을 얻고 세움을 입는 것도 마땅하고 사리에 맞는 일”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여기에서 ‘신실한 신자’, ‘하나님께 영광’, ‘교회적으로 세움을 입는 것’을 언급하였다. 첫 문장에 나오는 이 세 가지는 칼빈이 쓴 시편 찬송 서문의 핵심 용어이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칼빈이 1557년에 쓴 『시편 주석』 서문에서 시편의 효용에 대하여 이야기한 데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3)칼빈을 따르면, 첫째, 시편은 ‘영혼의 모든 부분의 해부’로서 거울처럼 우리의 영혼을 보여 주고 우리의 감정을 하나님께 드러내도록 한다. 둘째, 시편은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무오(無誤)한 법칙을 제시한다. 시편은 하나님께 간구하여서 구원을 얻은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미의 제사에 대하여 가르치는 책이다. 셋째, 시편은 우리의 삶이 거룩함과 경건과 의를 따라서 형성되도록 가르치는데, 무엇보다도 ‘십자가를 지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4)
우리는 여기에서 시편 찬송의 목적을 첫째, 신실한 신자가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 둘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셋째, 신자와 교회가 거룩하게 세워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은 서로 연결된 것이지만, 편의상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
첫째, 시편 찬송은 신실한 신자에게 기쁨을 주고 그의 믿음을 강화시킨다. 칼빈은 『시편 주석』 서문에서 시편이 ‘영혼의 모든 부분의 해부’라고 말하였다. 시편에 기록된 감정은 거울처럼 우리의 영혼을 보여 주고, 사람의 감정 가운데서 시편에 묘사되지 않은 감정은 없다고 하였다.
나는 이 책을 ‘영혼의 모든 부분의 해부’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 의식하는 감정 가운데서, 마치 거울로 보는 것처럼, 이 책에 묘사되지 않은 것은 없다. 달리 표현하면, 성신께서는 우리의 슬픔, 비탄, 두려움, 의심, 소망, 염려, 당황, 한 마디로 줄이면 사람들이 내어놓기 싫어하는 매우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모두 드러내신다.5)
우리는 너무 기뻐도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것인가를 모르고 매우 슬프거나 좌절감을 느낄 때에도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한다. 우리의 그러한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편의 말씀을 주셔서 우리의 영혼의 상태를 보여 주시고, 그 시편의 말씀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그리스도 안에서 열어 주셨다. 우리는 시편이 가르쳐 주는 대로 기도를 드리면서 하늘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사람 앞에서는 고백하기 부끄러운 죄와 연약성도 시인의 말로 하나님께 내어 놓을 수 있다. 1562년에 완성된 제네바 시편 찬송에는 주제별 색인과 각각의 상황에 대한 목록이 있어서 핍박의 시기나 절망의 때나 죄의 유혹이 있을 때에 부를 시편들을 예시하여 두었다.6) 신실한 성도들에게 시편을 주신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서 그렇게 편집한 것이다.
그런데 시편의 말씀으로 자기의 감정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은 아무런 여과 없이 자기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시편이 영혼의 해부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시편으로 자기의 영혼이 해부되도록 하면서 그 말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자기의 은밀한 죄를 고백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자기의 마음을 쏟을 수 없다. 시편은 믿음의 학교에서 우리의 내면을 하나님께 쏟아 내도록 우리를 훈련시킨다.7)시편 찬송을 부르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간 회중은 찬송과 함께 주님의 구원하심과 영광과 거룩함에 참여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에 동참한다. 그러한 기쁨은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온 것이고 성신께서 주신 것이다.8)
하나님께 영광
둘째, 칼빈은 시편 찬송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1537년의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대한 규정”에서도 나오는 말이다.
시편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 올릴 수 있고, 우리의 마음을 그분의 이름의 영광을 부르고 높이려는 열망으로도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무엇이 부족하여서 우리가 무엇을 덧보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의 사역을 인정하고 그것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삼위 하나님께서 구원의 일을 이루시면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으로 그분의 구원을 찬송하면서 삼위의 영광에 참여한다. 회중이 함께 찬송하는 것은 단순히 자기들의 감정을 표출하거나 나누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부된 감정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고, 거기에서 맛본 구원을 찬송하는 것이다. 그러한 구원을 찬송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회중 찬송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시편 주석』 서문에서는 시편 찬송의 둘째 목적을 이렇게 말하였다. “시편은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무오한 법칙을 제시한다. 찬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귀중하게 보시고 받으시는 향기로운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없고 또한 하나님을 찬송하는 말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릴 무오한 법칙’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 150편의 시편으로 주님을 찬송하면서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마련해 두신 것이다.
시편 찬송을 ‘감사의 제사’로 보는 것은 정교한 찬송을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로마 교회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시편 찬송은 구원을 받기 위한 선행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찬미의 제사이다. 찬송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히 13:15),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러한 찬송은 자기의 선행을 강조하는 로마 교회에서는 도무지 드릴 수 없는 내용이다. 시편처럼 바르게 하나님을 찬송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책은 없다.
거룩한 삶
셋째, 시편 찬송을 부르면 교회가 거룩하여진다. 회중이 함께 모여서 장엄함과 위엄이 있는 곡조로 찬송하면 거기에서 교회 안에 거룩한 정서가 형성되고, 하늘에 속한 영광과 능력을 맛본다(참조. 히 6:4-5). 특히 시편 찬송은 자기의 죄와 그리스도의 속죄와 순종의 요구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것은 회중의 윤리적인 행동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마음으로 깨닫고 입으로 부르면 우리의 성품과 행동에서도 큰 차이가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으로 찬송하면서 하나님과 언약의 교제를 나누고 천상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속한 육신적인 기쁨은 멀리한다. 외적으로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진정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성신으로 영감된 가사를 장엄한 곡조와 함께 부르면 우리의 영혼의 숨은 것이 드러나서 정결케 된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죄가 억제되고, 우리가 시편을 암송하여서 부를 때에 그 감정이 제2의 천성이 되어서 죄악적인 본성을 누르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한다.9)
『시편 주석』 서문에서 시편은 거룩함과 경건과 의를 따라서 우리의 삶이 형성되도록 가르치는데, 무엇보다도 ‘십자가를 지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고 하였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우리의 순종의 진정한 증거이다. 십자가를 짐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을 따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그분의 뜻을 따라서 우리를 사용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린다. 그리하면 우리의 본성에는 가장 쓰고 가혹한 곤경이라도 달콤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 어려움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10) 고난을 통하여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영원한 구원을 알아 간다. 우리는 시편에서 천상의 교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
찬송을 부르면서 천상의 기쁨에 참여하고 성품이 바뀌는 그러한 변화는 개인적일 뿐 아니라 공동체적이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장엄함과 위엄이 있는 곡조로 찬송할 때에 교회 전체가 그렇게 변모해 간다. 교회 전체가 그 가사의 내용을 알고 부를 때에 교회가 함께 굳게 세워져 간다. 말씀에 의하여서 교회가 세워지고 그 안에서 각 개인도 함께 세움을 입는다. 하나님께서 마치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분의 말씀을 우리의 입술에 담아 두셨기 때문에 우리는 시편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 마음과 입으로 부르는 그 말씀 때문에 회중의 믿음이 더 강화된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일으키신 성신께서는 회중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찬송을 드릴 때에 그 말씀을 사용하여서 회중의 믿음을 굳게 하신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라고 하면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였다(골 3:16).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찬송하는 것은 곧 말씀으로 피차를 격려하는 것을 가리킨다. 칼빈의 표현을 따르면, “모두가 공개적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한 입으로 찬송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신앙의 고백을 받게 되고, 또한 그 모범을 따라서 함께 거기에 동참하도록 권유와 자극을 받게 되는 것이다.”11)
요약 - 삼중적 지식과 두 가지 지식
칼빈이 이야기한 시편 찬송의 세 가지 목적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문에서 이야기하는 삼중적인 지식과 같다.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깨닫고 ‘감사의 삶’을 사는 것이 시편의 내용이다. 칼빈의 『시편 주석』의 말로 표현하면 “이 책에는 [시편에는] 영원한 구원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12)
『시편 주석』에서 이야기한 세 가지 목적을 『기독교 강요』와 비교하는 것도 유익하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의 첫 페이지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람을 아는 지식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고, 어느 것에서 시작하여도 다른 지식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는 편의상 그 책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부터 시작하였지만, 『시편 주석』에서는 사람을 아는 지식에서부터 시작하여서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는 것을 논하고 그것을 교회의 삶에서 신자의 믿음이 강화되는 것으로 요약하였다. 두 책은 접근 방법에서 상호 보완이 되기 때문에 함께 읽을 필요가 있다.13)
사람을 아는 지식과 사람의 감정의 문제가 칼빈에게 매우 중요한 주제였는데, 이것은 그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칼빈이 시편을 ‘영혼의 해부학’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개인적인 경험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던 칼빈이지만, 『시편 주석』의 서문에서는 자기의 회심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우상 숭배를 하고 어두운 가운데 살았던 사람을 주님의 성신께서 ‘갑작스런 회심’을 하게 하여서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고백하였다. 칼빈은 그렇게 자기의 아픈 것과 부끄러운 것을 시편 말씀을 의지하여서 내어 놓고 하나님께 나아갔고 찬송을 부르면서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을 살았다. 그는 개인적으로 120:7과 69:4의 말씀으로 시편의 세계를 이해하였다고 하였다.14)
칼빈은 시편의 말씀이 거울처럼 영혼의 내면을 보여 준다고 생각하였을 뿐 아니라 시편의 저자인 다윗이 또한 거울로서 신자의 삶을 비추어 준다고 생각하였다. 신앙 때문에 모국에서 쫓겨나서 평생 망명자로 살았던 칼빈은 사울에게 쫓겨난 다윗에게서 자기의 모습과 피난민 성도들의 모습을 발견하였다.15) 칼빈은 시편을 그렇게 친숙히 이해하였기 때문에 시편을 곡조로 부르는 일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것이다.
찬송과 기도와 말씀
시편 찬송 서문에서 칼빈은 두 가지 종류의 기도가 있는데 하나는 말로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찬송으로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시편 72:20의 마지막 문장은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니라”고 되어 있다. 시편 자체가 곧 기도라고 가르친다. 시편을 그냥 낭독하거나 성경의 교훈을 토대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기도이고, 시편을 운율에 맞추어서 다시 번역하고 곡조를 붙이면 ‘찬송으로 드리는 기도’가 된다. 제네바에서는 목사가 담당하는 ‘목회 기도’가 있고, 회중이 시편 찬송으로 화답하는 ‘곡조가 있는 기도’가 있었다. 목사의 기도에 뒤이어 부르거나 강설에 뒤이어 부르는 시편은 ‘응답송’으로서의 성격을 지녔다.16)
칼빈이 시편 찬송과 기도를 붙여서 가르쳤기 때문에 우리는 칼빈이 기도에 대하여서 가르친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래야 시편 찬송에 대한 그의 말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3권 20장에서 “기도: 믿음의 중요한 활동, 그리고 기도로써 얻는 일상적인 유익”이라는 제목으로 기도에 대하여서 길게 가르치는데 34절부터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대한 간략한 강해로 그 주제를 마친다. 그런데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대한 강해를 시작하기 전에 31-33절에서는 시편 찬송에 대하여서 가르친다. 칼빈의 생각에는 시편 찬송이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에 버금가는 기도였던 것이다.
칼빈은 기도를 믿음의 중요한 활동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기도를 사람의 공로나 행위로 생각하는 로마 교회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기도는 자기의 소원을 정성스럽게 아뢰는 행위가 아니라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서 성신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기도는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기도는 믿음의 중요한 활동이어서 믿음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기도하는 사람은 또한 자기의 믿음이 강화된다.17)
기도를 믿음의 중요한 활동으로 가르치는 데에서 기도와 말씀의 관계를 살펴보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말씀에 의하여서 생기고, 또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맛보면서 우리의 믿음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셨고 그와 더불어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기도를 드린다. 이방인의 기도는 자기들의 소원을 구하는 것이지만 성경의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고, 그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나온다. 칼빈은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시작되고 틀을 갖추게 되며 말씀이 우리의 기도를 지배한다고 하였다.
시편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에 사용하라고 주신 말씀이다. 따라서 시편의 말씀으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그 기도가 바로 자기에게 응답되는 것을 경험한다. 말씀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하며 하나님 자신의 말씀에 참여”한다.18)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를 드린 사람은 그 말씀으로 자기의 내면이 해부되도록 내어 드리고 또한 자기의 현실도 그 말씀으로 해석하면서 기도를 드린다. 그렇게 기도를 드린 사람은 자기 자신의 문제나 자기의 환경에 갇혀 있지 않고 하늘을 향하여 마음을 들고서 하나님을 찬송한다. 기도는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신자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곡조가 있는 기도인 시편 찬송도 그렇다.19)
“마음을 들라” - 미사와의 차이점
1542년 서문은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이 모두 거기에서 말하고 행하는 것을 알고 이해하여서 유익을 얻고 세움을 입는 것도 마땅하고 사리에 맞는 일”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말은 라틴어로 진행되는 미사와 라틴어 찬송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중세에서는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 찬송하고 회중은 그저 감상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개혁자들이 미사를 개혁하면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신으로 성찬의 자리에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마음을 들라’고 권면하면서 성찬을 거행하였다. 개혁자들은 찬송을 부를 때에도 알 수 없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입에 담아 주시는 말로 찬송하고 ‘우리의 마음을 들고서’ 하나님을 찬송할 것을 가르쳤다. 이처럼 칼빈의 성례관과 음악관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20) 우리는 알고서 성찬에 참여하고 그 내용을 알고서 찬송을 부른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높이 들고 주님을 진정으로 찬송한다. 이러한 찬송은 미신적인 태도로 미사에 참여하거나 찬송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제네바 시편 찬송 서문과 칼빈의 찬송 신학 (II) - 1543년 서문을 중심으로
제네바 시편 찬송 서문 (II)
존 칼빈 (제네바: 1543년 6월 10일)
더 넓은 범위에서 부르는 시편
노래를 부르는 일은 [예배에서만이 아니라] 더 넓은 범위에서 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나 일터에서도 노래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우리의 마음을 그분께 들어 올리게 하는 자극물이, 말하자면 오르간이 될 수 있고, 그분의 능력과 선하심과 지혜와 공의를 묵상할 때에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게 합니다.
이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절실한 일입니다. 첫째, 성신께서 성경 말씀으로 그렇게 세심하게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라고 권고하시고 우리가 그것을 참된 목적으로 여기고 온통 그것만을 기뻐하도록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신께서는 우리에게 헛된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뿌리 깊게 있음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어리석고 악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온갖 수단들을 추구하라고 유혹하면서 이끌고 갑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와는 정반대로 육신과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하여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그렇게 강력하게 권고하신 신령한 기쁨을 우리가 충족히 누리도록 또한 방법들을 제시하여 주십니다.
재창조의 기쁨을 주는 음악
사람을 재창조하거나 사람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것들 중에서 음악이 으뜸이고, 혹은 가장 중요한 것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음악은 그러한 목적으로 사용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음악은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주신 것이므로 우리가 음악을 손상시키거나 오염시켜서 스스로를 정죄하는 데에 떨어질까 두려워하고 그릇되게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합니다. 이것 이외에 달리 더 고려할 것이 없다면 이제 음악을 적절히 사용하고 정직한 일에 사용하면 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음악으로 말미암아 고삐가 풀려서 방탕하게 되거나 나약하게 되어서 무분별한 즐거움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야 하며, 음악이 음란함이나 난잡함의 수단이 되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사탄적 독약도 되는 음악
그러나 고려할 점이 더 있습니다. 음악처럼 사람의 도덕심을 이 방향이나 저 방향으로 돌리거나 굽힐 수 있는 것은 세상에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플라톤이 현명하게 지적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음악이 사람의 도덕성을 이리저리로 돌릴 수 있는 신비한 능력, 거의 믿을 수 없을 만한 능력을 갖고 있음을 실제로 우리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음악이 우리에게 유익을 끼치고 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더욱 부지런히 규제하려고 합니다. 그러한 이유에서 고대 교회의 박사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부도덕하고 방탕한 노래에 빠져 있다고 종종 불평하였습니다. 그러한 노래가 세상을 타락시키는 치명적이고 사탄적인 독약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타당합니다.
이제 음악에 대하여 말하자면, 음악에는 두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가사 혹은 주제와 내용이고, 둘째는 노래와 가락입니다. 바울 사도가 가르친 것처럼, 모든 악한 말은 선한 행실을 부패시킨다는 것이 사실입니다(고전 15:33). 그런데 그 말에 가락을 붙이면 더 강력하게 마음을 뚫고 들어옵니다. 포도주가 깔때기를 타고서 미끄러지듯 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독소와 부패는 가락을 타고서 마음의 깊숙한 곳까지 스며드는 것입니다.
왜 시편을 택하는가?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여야겠습니까? 우리는 단정할 뿐 아니라 거룩한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그러한 노래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그분의 행하신 일을 묵상하도록 박차(拍車)와 같이 우리를 격려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높이고 영광을 돌리도록 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선생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노래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진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철저히 살펴보고 이곳저곳을 찾아보더라도 다윗의 시편보다 그 목적에 더 부합하고 합당한 노래는 찾을 수 없습니다. 시편은 성신께서 다윗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만들어 주신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친히 그분의 영광을 노래라도 하시는 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에 그 시편들을 두셨음을 우리는 시편을 부를 때 확신합니다. 따라서 크리소스토무스는 남자와 여자와 어린아이들에게도 시편을 익숙하게 부를 것을 권고하였는데, 이것은 시편이 일종의 묵상이 되어서 천사와 교제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해하고 부르는 시편
끝으로, 바울 사도가 신령한 노래는 마음으로만 부를 수 있다고 말한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엡 5:19; 골 3:16). 그러나 마음은 이해를 요구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선생이 말한 것처럼, 바로 이 점에서 사람의 노래는 새의 노래와 다릅니다. 홍방울새나 나이팅게일이나 앵무새도 노래를 잘 부릅니다. 그렇지만 그 새들은 알지 못하고서 부르는 것입니다. 내용을 알고서 부른다는 것이 사람에게 주신 독특한 선물입니다. 내용을 알고 난 다음에 마음과 감정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찬송하려면 찬송을 암기하고 있어야 하고, 그렇게 될 때에만 마음과 감정도 움직여서 찬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지금까지 말한 다른 이유는 차치하고 오직 이 이유 때문에라도 자기의 구원과 이웃의 유익과 관계하여서 하나님을 존귀하게 즐거워하고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려는 교우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이 책은 가치가 있고 칭송을 받아 마땅하므로 본인이 굳이 이 책을 높이 추천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다음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부분적으로 헛되고 경박하며 부분적으로 어리석고 둔하며 부분적으로 상스럽고 천박하며 따라서 악하고 해로운 노래를 지금까지 불렀는데, 이제부터는 그 노래들 대신에 선한 왕인 다윗과 함께 거룩한 천상의 찬송을 부르는 데에 익숙하여지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선율에 대하여서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그 내용에 적합한 장중함과 위엄이 있도록 조절하고 또한 교회에서 부르기에 적합하도록 조절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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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설>
칼빈은 1542년에 시편 찬송 서문을 썼고, 1543년에 증보하였다. 이번에는 1543년에 증보된 부분을 살펴보려 한다.1) 증보된 부분에서 칼빈은 시편 찬송의 음악적인 면을 다루었고, 여기에 칼빈의 음악관의 핵심이 담겨 있다. 칼빈은 음악이 사람의 구원과 기쁨을 위하여서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보았다. 이 고귀한 선물을 잘 이해하고 사용하면 큰 유익이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사탄적 독약’이 된다고 하였다.
더 넓은 범위에서 부르는 시편
“노래를 부르는 일은 [예배에서만이 아니라] 더 넓은 범위에서 할 수 있습니다”는 말로 1543년에 첨가한 부분이 시작한다. 그런데 1542년 서문의 마지막 문단은 “식탁에서나 집에서 사람을 즐겁게 하려고 부르는 노래와 교회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부르는 시편과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는 말로 끝난다. 얼른 보면 1542년의 서문은 교회에서 사용하는 음악과 일상생활에서 부르는 음악을 구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543년에 첨가한 부분에서는 “더 넓은 범위”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하여서 그 구분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교회의 음악과 일상생활의 음악을 대립적으로 놓는 것이 아니라 동심원적으로 놓고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얻은 기쁨을 “더 넓은 범위”인 가정과 일터에서도 노래로 표현할 수 있다고 역설한 것이다.2)
칼빈은 “더 넓은 범위”라는 말을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체험한 신령한 기쁨이 생활로 퍼져 나간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는데, 제네바 시편에 운율을 붙이기 시작한 마로(Marot)도 같은 정신으로 이런 시를 지었다.3)
나의 사랑하는 여인들이여,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경배를 받으시는 황금시대가 전진하고 있다,
이 거룩한 노래를 부름으로써.
나의 사랑하는 여인들이여,
그대들은 새 시대가 오는 것을 목도(目睹)하는 복된 여인들!
일꾼은 일터에서, 마부는 마차에서, 장인(匠人)은 자기 가게에서
시편과 성가(聖歌, canticle)를 불러
노동의 수고를 가볍게 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양 치는 소년과 소녀도
돌로 박자를 맞추면서
창조주의 거룩한 이름을 노래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칼빈과 마로는 모두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할 날을 소망하였고, 그들이 새로 지어서 부르기 시작한 시편 찬송이 그러한 시대의 서막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당시에는 음탕한 노래들이 많이 있었는데, 시편 찬송으로 재창조의 기쁨을 맛보면서 ‘사탄적 독소’가 있는 노래가 모두 제거되기를 소망하였다.
재창조의 기쁨을 주는 음악
더 넓은 범위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리는 것은 또한 사람에게 ‘구원의 복’을 안겨 준다. 칼빈은 “사람을 재창조하거나 사람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것들 중에서 음악이 으뜸이고, 혹은 가장 중요한 것들 가운데 하나”라고 하였다. ‘재창조’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가리키기 때문에 음악이 ‘재창조’한다는 말은 분명히 어폐가 있는 말처럼 들린다. 우리는 음악을 여가로 생각하기 때문에 ‘재창조’로 옮긴 ‘리크리에이션’(recreation)을 ‘여가를 즐긴다’는 뜻으로 옮기기도 한다.4) 그렇지만 스메일릭(J. Smelik)과 반데르 플루흐(S. Vander Ploeg)가 바르게 지적한 것처럼, 여기에서 칼빈이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음악이 아니라 시편 찬송이다.5) 칼빈이 『시편 주석』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영혼의 해부’인 시편은 우리의 숨은 죄를 드러내고 주님의 구원을 맛보게 한다.6) 단순하지만 깊이가 있는 곡조와 함께 부르는 시편 찬송은 우리의 속마음을 주님께 토하게 하고 거기에서 진정한 ‘기쁨’을 맛보게 한다. 예배에서 강설의 말씀을 들을 때에 구원의 진리를 깨우치고 참된 기쁨을 맛보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시편 말씀을 곡조에 맞추어서 부르는 것도 재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일이다. 구약의 성도들이 시편을 부르면서 얻은 구원의 기쁨을 우리도 누리는 것이다.
문맥을 살펴보아도 ‘리크리에이션’을 ‘재창조’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다음 문장에서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고, 이어서 “음악은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주신 것이므로 우리가 음악을 손상시키거나 오염시켜서 스스로를 정죄하는 데에 떨어질까 두려워하고 그릇되게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합니다”는 말이 나온다. 음악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정죄한다고 하여서 ‘정죄’와 대비되는 ‘구원’을 지적하였다. 서문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자기의 구원과 이웃의 유익’과 관계하여서 하나님을 존귀하게 즐거워하고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려는 교우들”에게 시편 찬송을 강력히 추천하였다. 칼빈에게 음악, 특히 시편 찬송은 자기의 구원과 이웃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 사람을 재창조하고 참된 기쁨을 안겨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사탄적 독약’도 되는 음악
음악이 사람을 재창조하고 진정한 기쁨을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은 사람의 책임을 강조한다. 칼빈은 악인에게도 음악을 선물로 주신 사실을 지적하는데(참조. 창 4:21)7) 그것을 놓고서 음악이 “일반 은총”에 속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칼빈은 음악이 중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어느 방향으로 사용하는가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음악은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기쁨을 위하여서 사용하라고 주신 선물이다.8) 하나님의 선물을 바르게 사용하면 구원의 기쁨을 더 풍성히 맛볼 것이지만, 그것을 무시하면 음악이 “음란함이나 난잡함의 수단”이 되고, 심지어 ‘사탄적 독약’도 된다.
칼빈이 고대 교부들을 인용하면서 그렇게 강한 말을 한 것은 제네바의 상황을 생각하면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제네바 시는 유곽(遊廓)과 성적인 방종으로 유명한 도시였고, ‘소돔’이라고 불렸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음악이 구원을 이루는 데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악으로 말미암아 고삐가 풀려서 방탕하게 되거나 나약하게 되어서 무분별한 즐거움에 빠지고 음악이 음란함이나 난잡함의 수단이 되는 것을 목도하였다. 그들의 노래는 “부분적으로 헛되고 경박하며 부분적으로 어리석고 둔하며 부분적으로 상스럽고 천박하며 따라서 악하고 해로운 노래”이었다. 부도덕한 말이 선한 행실을 부패시키는데, 그 말에 가락을 붙여서 노래를 부르면 음탕한 일을 행하는 데에 더 담대하여진다. 칼빈이 보기에는 “포도주가 깔때기를 타고서 미끄러지듯 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독소와 부패는 가락을 타고서 마음의 깊숙한 곳까지 스며드는 것”이었다.
왜 시편을 택하는가?
하나님의 선물인 음악이 구원이 아니라 정죄를 이루고 있는 현실에서 칼빈은 ‘새 노래’를 제시하였다. 대안이 없이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시편 찬송을 그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찬송을 드릴 때에는 자기의 감정과 기분을 아무렇게나 아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이 원칙으로 볼 때에 시편은 성신께서 다윗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만들어 주신 노래이기 때문에 이보다 더 합당한 노래를 찾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 시편의 말씀을 오늘도 그의 자녀의 입에 두시고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친히 그분의 영광을 노래라도 하시는 듯이” 이 노래를 가르쳐 주신다. 따라서 시편을 부를 때에 우리는 천상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시편은 “육신과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하여서 인도”하고 “그분이 그렇게 강력하게 권고하신 신령한 기쁨을 우리가 충족히 누리도록 또한 방법들을 제시”한다. 따라서 칼빈의 말처럼 “철저히 살펴보고 이곳저곳을 찾아보더라도 다윗의 시편보다 그 목적에 더 부합하고 합당한 노래는 찾을 수 없다.”
시편의 가사 - 운율을 붙인 시
칼빈은 노래가 ‘가사와 곡조’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명제를 따라서 시편의 가사와 곡조에 대하여서 논한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가사와 곡조 사이의 관계에 주의를 기울였고, 곡조보다는 가사가 더 영혼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였다.9) 칼빈도 가사의 문제를 더 길고 중요하게 다루었다.
칼빈은 찬송의 가사를 시편으로만 국한하지 않고 성경의 다른 구절도 포함시켰지만 기본적으로는 시편을 기초로 하였다. 그런데 제네바 시편은 시편 본문을 ‘운율’에 맞추어서 다시 쓴 것이다. 따라서 어떤 단어는 빠지기도 하고 어느 경우는 말을 첨가하기도 하였다. 개혁가들은 ‘오직 성경’을 주장하였지만 시편을 부를 때에는 ‘운율을 붙인 가사’를 사용하였다. 이것이 라틴어 가사를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부르는 그레고리오 성가(Gregorian Chant)와 크게 다른 점인데, 바로 여기에 시편 찬송의 ‘급진성’과 ‘현실성’이 있다. 로마 교회와 달리 회중이 모두 부르도록 한다는 점에서 시편 찬송은 매우 급진적인 일이었다. 동시에 회중이 쉽게 부를 수 있도록 운율을 붙인 시를 사용한 점에서는 매우 현실적인 조치였다.10)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운율을 붙인 시편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였고, 그 사실에 대하여서 설명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 그들이 부르는 시편 찬송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에 넣어 주신 것이라고 생생하게 생각하였다.11) 운율을 붙인 마로(Marot)나 베자(Beza)는 원문을 강조하는 인문주의의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이고 그러한 정신으로 원문에 충실하게 시편을 재번역하였다.12) 그들의 번역은 목사 회의의 공인을 거쳐서 발표한 뒤에 회중이 부르도록 하였다. 운율에 맞추어서 재번역하였지만 그 내용을 철저히 검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종교개혁 당시에 제네바는 작은 도시였고, 주위에 있는 다른 큰 도시들에서도 시편을 만들어서 부르고 있었다. 1562년에 제네바 시편 책이 완성되었는데, 이미 한 세대 전에 출판된 시편 찬송들이 있었다.13)그러나 제네바 시편 찬송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가사의 번역이 정확하고 운율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시편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근거하여서 마로와 베자가 운율 작업을 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14)
시편의 곡조 - 교회 선법(旋法)
시편의 가사는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것보다 더 좋은 말을 찾을 수 없다. 문제는 어떤 곡조로 부르느냐에 있다. 시편에는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4편), “관악에 맞춘 노래”(5편), “스미닛(제8음)에 맞춘 노래”(6편) 등 가락을 표시하는 말들이 나오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가사는 보존하여서 주셨지만, 히브리 사람들이 부르던 곡조는 보존하여 주시지 않았다. 따라서 시편 ‘곡조’의 영감(靈感)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시편을 부르는 곡조는 다양하기 때문에 한 가지 전통만을 절대화할 수는 없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하고서 곡조에 대한 칼빈의 주장을 살펴보겠다.
칼빈은 “선율에 대하여서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그 내용에 적합한 장중함과 위엄이 있도록 조절하고 또한 교회에서 부르기에 적합하도록 조절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두 가지 원칙을 표명하였다. 첫째,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장중하고 위엄이 있는 곡조를 만드는 것이고, 둘째는 회중의 가창 실력에 맞게 작곡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원칙은 그 당시에 사용하던 민요풍의 시편 찬송이나 중세 말의 그레고리오 시편 찬송과 다른 점이다.
첫째, 칼빈은 가사의 내용에 적합한 ‘장중함과 위엄을 전달할 수 있는 곡조’를 택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기독교 강요』에서는 “단지 귀에만 즐겁고 감미로워서 교회의 위엄에 손상을 주는 노래들”은 거부하였다.15) 서정적이거나 낭만적인 것을 피하였을 뿐 아니라 화려한 음악적 기교를 사용하는 곡조도 금하였다. 그것은 곡조에 빠져서 말씀의 영적인 의미에 집중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칼빈은 흥겨운 곡으로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은 이교적이라고 말하고, 시편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칼빈은 장엄하고 위엄이 있는 곡조를 주장하였는데, 그 말은 천천히 부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부른다는 뜻이다.16)제네바 시편은 리듬이 독특하다. 이분음표로만 된 것이 아니라 사분음표와 이분음표로 배합이 되고, 당김음도 많이 사용하여서 음악에 활력을 넣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제네바 시편 찬송을 들은 후에 “제네바 춤곡”(the Geneval jigs)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17)
“그 내용에 적합한 장중함과 위엄을 전달할 수 있는 곡조”라는 표현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곡조보다는 그 내용이다. 제네바 시편에서 선율은 가사에 비해 철저히 보조적인 역할에 머문다. 당김음을 사용하여서 활기차게 부르는 부분도 말씀의 내용이 그렇기 때문에 활발하게 표현한 것이다. 가사에 종속적인 선율은 변화가 그렇게 심하지 않고 극적인 긴장감이 있는 표현을 자제한다.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알리려고 그렇게 작곡한 것이다.
칼빈은 ‘새 노래’를 가사뿐 아니라 곡조까지도 새로운 것으로 이해하고 새로운 곡을 창작하도록 격려하였다.18)루터는 찬송 개혁을 추구하였지만 많은 경우에 기존의 곡조를 사용하고 가사만 바꾸는 방식을 택하였다. 또한 민요풍의 시편 찬송들이 이미 출간되어 있었다. 1524-25년부터 민요 가락에 맞추어 부르던 시편이 1533년에 스위스 뇌샤텔(Neuchâtel)에서 출간되었고, 네덜란드에서는 1540년에 사우터르리데켄스(Souterliedekens)가 출판되었다.19)그러나 칼빈은 그러한 방식을 택하지 않고 시편의 내용을 담을 새로운 곡을 작곡하도록 격려하였다. 말하자면 곡조에서도 ‘거룩한 음악’(musica sacra)을 추구한 것이다.20)
칼빈은 가사에 적합한 곡조를 ‘교회 선법’(church mode)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교회 선법은 그리스어에서 나온 이름을 갖는다. 도리아, 프리기아, 리디아, 이오니아 등의 이름은 그 지역 사람들이 특별한 선율을 사용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르네상스 이후에 장조와 단조가 정착하였지만 교회 선법에서는 더 다양한 음계(scale)를 사용한다. 따라서 장조와 단조보다도 더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근대 음악의 한계를 느낀 작곡가들, 예를 들면 드뷔시, 시벨리우스, 프로코피에프와 같은 작곡가나 심지어 비틀즈나 재즈 그룹도 교회 선법을 많이 사용한다. 교회 선법에서는 화음보다는 음조(音調, tonality)를 살려서 표현한다. 예를 들면, 비장함과 애통함을 원초적으로 표현하는 도리아 선법은 참회의 시편에서 자주 사용되었다.21)
그리스 이름을 가지고 있는 ‘교회 선법’은 중세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히브리 사람들은 시편을 노래로 불렀는데, 그리스 인과 접촉하면서 그 가락을 그리스 사람들의 선법으로 표현하였다. 교회 선법과 그리스 선법의 관계, 그리스 선법과 히브리 노래의 관계에 대하여서 학자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지만, 어떤 학자들은 솔로몬의 성전기의 가락에까지 소급할 수 있는 시편 가락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22) 하나님께서 곡조를 영감시켜서 전해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곡조에 대하여서 경직된 태도를 지닐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교회 선법에 표현된 역사적 무게를 바르게 아는 것은 필요할 것이다.
칼빈은 이처럼 한편으로는 그 당시의 세속적인 음악을 피하고 로마 교회와 관련된 예배 형식을 피하려고 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중세를 이어온 ‘교회 선법’의 전통을 이어서 발전시키려고 하였다.23) 그레고리오 성가는 대중음악과는 다르지만, 귀족적이고 화려하기 때문에 훈련을 받지 못한 회중이 함께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그레고리오 성가 중의 어떤 곡은 ‘타계적(他界的) 성격’이 매우 강하다. 마치 절간에서 염불하는 소리를 듣는 것과 비슷한 것도 있다. 제네바 시편은 교회 선법을 차용하였지만 ‘타계적 성격’은 따르지 않았고, 회중들이 부를 수 있도록 단순하게 만들어서 내놓았다.24) 음의 변화가 크지 않고 계단식으로 오르내리는 것이 많아서 사람들이 부르기 쉽다. 귀족적이지도 않으면서 단순하고 위엄이 있는 노래를 작곡하도록 한 것이다.
제네바 시편이 교회 선법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교회 선법의 이름뿐 아니라 가사 전달을 중요하게 여기는 데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운율을 붙인 시편 찬송은 ‘음절 구조’(syllabical structure)로 되어 있다. 예를 들면 ‘네 음절 - 다섯 음절’과 같은 식으로 되어서 가사를 명확히 표현할 수 있었다. 본문을 정확히 부르도록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찬트’(chant)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런데 음절 구조를 악보로 표현하여서 하나씩 분명히 부르게 한 점에서는 제네바 시편이 그레고리오 성가보다 더 뛰어난 점이 있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성경의 본문을 그대로 반복하고 호흡이 길기 때문에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야 제대로 부를 수 있지만, 제네바 시편은 각운(脚韻)을 맞추어 다시 번역하고 회중이 쉽게 부를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제네바 시편은 가사의 명확한 전달을 위하여서 단음으로 불렀다. 가사와 곡조가 조화를 이루면서 부를 때에 이것은 단지 책을 읽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청중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단순한 멜로디는 음악적으로도 뛰어났다. 다성부(多聲部)로 작곡하는 일이 그 당시부터 시작되었고, 특히 오르겐 반주자들의 노력으로 사성부(四聲部)의 곡들이 많이 작곡되었다.
귀머거리와 벙어리 시대에 시편 찬송을 부르는 것
듣는 것과 말하는 것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시편 찬송도 먼저 듣는 것이 있어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시편의 강설을 들어야 하고, 그 내용을 표현할 수 있는 가락을 들어야 거기에 마음을 담아서 부를 수 있다. 이 점에서 보면 16세기 제네바 사람들은 예배에서 귀머거리고 벙어리였다. 예배가 라틴어로 진행되니까 그 뜻을 알 수 없는 귀머거리였고, 높은 수준의 그레고리오 성가는 따라 부를 수도 없는 벙어리였다. 그러한 시대에 개혁자들은 성경을 해명하고 번역하여서 회중에게 돌려주고, 찬송도 성가대에게서 회중에게로 돌려주었다. 번역한 성경에 단순하면서도 장엄한 운율을 붙여서 회중이 성신으로 깨닫고 마음에서부터 부르도록 하였다. 강설과 찬송으로 예배가 개혁되기 시작한 것이다.
시편 찬송의 작시(作詩)와 작곡뿐 아니라 계속적인 가창에도 칼빈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계속 시편을 주해하고 설교함으로써 사람들이 이해하고 노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교회와 학교에서도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계속 부르게 하였다. 즉 예배에서만 시편 찬송을 부르게 한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에서도 시편을 부르도록 한 것이다. 제네바 학당에서는 11-12시까지 한 시간 동안 학생들이 시편 찬송을 배우고, 교회에서도 25주일에 시편 150편을 다 부를 수 있도록 순서를 만들어서 시행하였다. 세속적인 노래가 모두 없어지고 시편 찬송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될 날을 소망하면서 그렇게 시작한 것이다.25)
오늘날은 또 다른 의미에서 귀머거리이고 벙어리 시대가 되었다. 기계음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교회 선법의 곡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어졌다. 또한 좋은 음향 기기로 녹음된 소리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음향적인 완벽함을 구현한 것만 듣고, 다른 것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청소년들은 이어폰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만을 들으면서 자기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이어폰을 과다하게 사용하여서 약청이나 난청이 된 경우도 적지 않다. 교회의 예배 음악에 관한 한, 우리도 모두 귀머거리요 벙어리 세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서는 음란한 뮤직 비디오가 사람의 시선도 잡아간다. 귀머거리이고 벙어리일 뿐 아니라 장님이 된 셈이다. 이러한 세대에서 교회 선법을 따른 음악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에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은 계속되고 있다. 어린양의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늘의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곳에 이르러서 주님을 찬송한다(계 14:1-3). 바르게 예배를 드린 그들은 ‘더 넓은 범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일상생활에서도 찬송과 함께 구원의 기쁨을 맛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공허하면 “포도주가 깔때기를 타고서 미끄러지듯 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독소와 부패는 가락을 타고서 마음의 깊숙한 곳까지 스며드는 것”이다. 그러한 데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 안에 주님의 말씀이 충만히 거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가르치면서 주님을 찬양하여야 한다(엡 5:19; 골 3:16). 주님께서 알려 주신 말씀을 이해하고서 바른 곡조로 시편 찬송을 부르면 구원의 은혜가 깔때기를 타고 우리 마음으로 흘러 들어갈 것이다. 시편 찬송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26) 귀머거리와 벙어리를 고쳐 주시는 구원의 말씀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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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42년과 1543년의 서문과 번역에 대한 서지학적인 사항은 앞글을 참조하시오. “제네바 시편 찬송 서문과 칼빈의 찬송 신학 (I) - 1542년 서문을 중심으로”, 「성약출판소식」 71 (2009), 7-14.
1542년 서문은 1,305개 단어를 사용하였고 1543년에 917개 단어를 첨가하여서 출판하였다. 두 서문의 차이에 대한 지적은 다음 논문을 따랐다. Charles Garside, Jr., “Calvin"s Preface to the Psalter: A Re-Appraisal”, 569-71.
2) J. D. Witvliet, “The Spirituality of the Psalter: Metrical Psalms in Liturgy and Life in Calvin’s Geneva”, Calvin Theological Journal 32 (1997), 297.
3) Marot, Oeuvres complètes, 2:308-9. A. Cabaniss, “The Background of Metrical Psalmody”, Calvin Theological Journal 20 (1985), 201에서 재인용.
4) 프랑스어 원문에는 ‘재창조’를 뜻하는 ‘recréer’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여가’를 뜻하는 ‘récrée’와 구별된다. P. Pidoux (편), Les Psaumes en Vers Français avec Leurs Mélodies (Librairie Droz S.A., 1986), 50. 영어로는 ‘recreation’이라고 옮기기 때문에 ‘여가’인지 ‘재창조’인지가 불분명하다. 제네바 시편 찬송의 서문을 다룬 한국어 자료들은 예외 없이 “인간을 즐겁게 하는 것” 혹은 “사람의 심신을 일신시키는 것” 등으로 옮겼다. 박희석, “칼빈과 음악”, 『신학지남』 70 (2003), 92; 강경림, “「제네바 시편 성가집」에 나타난 칼빈의 음악관”, 『대신대학교 논문집』 14 (1994), 149.
5) J. Smelik, “Music is Created for the Church”, Reformed Music Journal 3 (1991). http://spindleworks.com/library/smelik/Music_Is_Created_For_The%20_Church.html, 1-2; S. Vander Ploeg, “Church and Music”, http://www.spindleworks.com/library/vanderploeg/ChurchAndMusic.html, 5-6.
6) J. Calvin, “The Author’s Preface”, xxxvii.
7) J. Calvin, Commentaries on the Book of GenesisI (Eerdmans, 1979), 218-19.
8) J. Smelik, “Die Theologie der Musik bei Johannes Calvin als Hintergrund des Genfer Psalters”, 65-67.
9) C. Garside, “Calvin’s Preface to the Psalter: A Re-Appraisal”, 575-77.
10) E. R. Brink, “A Reformed Approach to Psalmody: the Legacy of the Genevan Psalter”, The Hymn: A Journal of Congregational Song56 (2005), 16. www.calvin.edu/worship/lit_arts/psalms_hymns/reformed_psalmody.php, 1.
11) J. D. Witvliet, “The Spirituality of the Psalter: Metrical Psalms in Liturgy and Life in Calvin’s Geneva”, 284.
12) 마로의 운율 시편은 히브리어에서 직접 작업한 것은 아니고 부서(Bucer)의 시편 번역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원문에 충실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C. Reuben, “C. Marot: Poet of the Reformation”, Reformation and Renaissance Review3 (2000), 86, 108-9.
원문을 충실히 운율에 맞게 옮겼다는 것은 루터 교회의 전통과 크게 대비되는 점이다. 루터의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시편 46편에 근거한 것이다. 그렇지만 루터의 찬송을 보면 시편을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자기의 형편에서 개인적인 생각을 표현한 가사를 지었다. 이것은 엄격한 의미로 볼 때에 ‘시편 찬송’이라기보다는 ‘찬송가’이다.
13) 스위스의 바젤에서는 1523년에 독일어 시편 찬송이 출간되었고, 성 갈렌(St. Gallen)에서는 1533년, 독일의 콘스탄츠(Konstanz)에서는 1540년에 출간된 3판 찬송집이 있고, 스트라스부르에서도 1541년에 찬송집이 출판되었다. 1537년에는 야콥 다흐서(Jakob Dachser)가 시편 전곡에 리듬을 붙인 아우크스부르크 시편 책(Augsburg Psalter)이 출판되었다. W. Blankenburg, “Church Music in Reformed Europe”, 513-15.
14) W. van ’t Spijker, “Der kirchengeschichtliche Kontext des Genfer Psalters”, in Der Genfer Psalter und seine Rezeption in Deutschland, der Schweiz und den Niederlanden 16.-18. Jahrhundert, E. Grunewald 외 편 (Max Niemeyer Verlag, 2004), 59-60.
15) 『기독교 강요』, 3권 20장 32절.
16) J. Smelik, “Music is Created for the Church”, 1-2.
17) J. D. Witvliet, “The Spirituality of the Psalter: Metrical Psalms in Liturgy and Life in Calvin’s Geneva”, 287.
W. S. Pratt의 연구를 따르면 제네바 시편에는 당김음이 40회 사용되었다. The Music of the French Psalter of 1562(New York: AMS Press, 1966[1939]), 45.
18) J. Calvin,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IV, trans. by J. Anderson (Eerdmans, 1949), 48, 69.
19) Walter Blankenburg, “Church Music in Reformed Europe”, 521. R. Faber, “The First Psalters in Dutch Reformed Churches”, Clarion 52 (2003), 113.
20) C. Garside, “Some Attitudes of the Major Reformers Toward the Role of Music in the Liturgy”, McCormick Quarterly 21 (1967), 163-64; Blankenburg, “Church Music in Reformed Europe”, 517.
제네바 시편이 그 당시의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에 대하여서는 상당한 논쟁이 있다. 음악의 파급력을 생각할 때에 철저한 단절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주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민요와 비슷한 것은 지극히 부분적이고 소수이다. J. D. Witvliet, “The Spirituality of the Psalter: Metrical Psalms in Liturgy and Life in Calvin"s Geneva”,286.
21) E. R. Brink, “A Reformed Approach to Psalmody: the Legacy of the Genevan Psalter”, The Hymn: A Journal of Congregational Song. www.calvin.edu/worship/lit_arts/psalms_hymns/reformed_psalmody.php, 2.
한편으로 치우친 면이 있지만 교회 선법이 표현하는 감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글로는 스트렁크 (편), 『서양 음악사 원전』 (서울대학교 서양음악연구소, 2002), 362-66을 참조하시오.
22) K. Deddens, “The Origin of Our Psalm Melodies”, 108-9; E. Werner, “The Origin of Psalmody”, 343-45.
23) 시편 129편은 베네딕트 수도회의 아침 찬송의 멜로디를 그대로 가져왔고, 그레고리오 성가와 부분적으로 같은 것을 합하면 50곡이 넘는다. 그래서 로마 교회에서는 제네바가 그들의 찬송을 ‘훔쳐 갔다’고까지 말하였다. J. D. Witvliet, “The Spirituality of the Psalter: Metrical Psalms in Liturgy and Life in Calvin’s Geneva”, 287.
24) J. D. Witvliet, “The Spirituality of the Psalter: Metrical Psalms in Liturgy and Life in Calvin’s Geneva”, 287-88.
25) C. Garside, “Origin of Calvin’s Theology of Music”, 24-25, 28.
26) Vander Ploeg, S., “Church and Music”,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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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문의 원문은 Ioannis Calvini Opera Selecta II, ed. by P. Barth and W. Niesel (1952), 12-18. 이 글의 번역은 다음의 영역본들을 참조하였음. F. Lewis Battles, “John Calvin, The Form of Prayers and Songs of the Church, 1542. Letter to the Reader”, Calvin Theological Journal 15 (1980), 160-65; O. Strunk ed., Source Readings in Music History (Norton &Company, 1950), 345-348; D. Boyd, “Calvin"s Preface to the French Metrical Psalms”, Evangelical Quarterly 22 (1950), 249-54; 번역자 미상의 “Calvin"s Preface to the Psalter” in http://spindleworks.com/library/calvin/calvinpsalterpreface.html. 작은 제목은 원문에 없는 것이나 Spindleworks에 실린 글을 참고하여서 넣은 것임.
2) 1542년의 서문과 1543년 서문에 대한 정보는 C. Garside, Jr, “Calvin"s Preface to the Psalter: A Re-Appraisal”, The Musical Quarterly, 37 (1951), 566-77에 의존함. 특히 569-70 참조.
3) 칼빈의 『시편 주석』이 비교적 칼빈의 말년에 속하는 1557년에 출간되었지만 칼빈의 시편 강해는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칼빈은 1549년부터 1554년까지 거의 매 주일 시편을 설교해서 150편을 다 가르쳤다. 1552-55년까지 학교에서 시편을 강의하기 시작하였고, 이 강의가 1557년에 출간된 『시편 주석』의 원고가 되었다. 칼빈이 1555년에 이르러서야 안정을 찾았음을 생각하면, 격동의 시기에 시편을 강해하였음을 알 수 있다. 1555-59년에는 매주 금요일에 모이는 목사와 장로 모임에서 칼빈은 계속하여 시편을 강해하였다. 칼빈이 이처럼 여러 차례에 걸쳐서 시편을 강설하거나 강해한 것이 1539년에 시작하여서 1562년에 완성된 “제네바 시편 찬송”이 정착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H. J. Selderhuis, "Singende Asylanten: Calvins Theologie der Psalmen", in Der Genfer Psalter und seine Rezeption in Deutschland, der Schweiz und den Niederlanden 16.-18. Jahrhundert,E. Grunewald 외 편 (Max Niemeyer Verlag, 2004), 81-82; James A. De Jong, “‘An Anatomy of All Parts of the Soul’: Insights into Calvin"s Spirituality from His Psalms Commentary”, in Calvinus Sacrae Seripturae Professor, ed., W. H. Neuser (Eerdmans, 1994), 1; T. H. L. Parker, Calvin"s Old Testament Commentaries(Edinburgh, 1993), 15, 29-31
4) J. Calvin, “The Author"s Preface”,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I, trans. by J. Anderson (Eerdmans, 1949), xxxvii.
5) J. Calvin, “The Author"s Preface”, xxxvii.
6) R. Faber, “John Calvin on Psalms and Hymns in Public Worship”, Clarion 51 (2002), 388.
7) J. T. VanderWilt, “John Calvin"s Theology of Liturgical Songs”, Christian Scholar"s Review 25 (1995), 69-70.
8) J. Calvin, “The Author"s Preface”, xxxviii-ix.
9) J. T. VanderWilt, “John Calvin"s Theology of Liturgical Songs”, 76-77.
10) J. Calvin, “The Author"s Preface”, xxxix.
11) J. Calvin, 『기독교 강요』, 3권 20장 31절. 원광연 역, 중권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475쪽.
12) J. Calvin, “The Author"s Preface”, xxxix.
13) 아펠도른 신학대학교의 교회사 교수인 셀더르하위스는 두 책의 관계를 이렇게 말하였다. “따라서 이 책은 - 『시편 주석』은 『기독교 강요』의 실제적인 해설서이다. 『기독교 강요』에서 조직적으로 제시한 성경적 교리가 모두 『시편 주석』에서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H. J. Selderhuis, "Singende Asylanten: Calvins Theologie der Psalmen", 94-95.
14) J. Calvin, “The Author"s Preface”, xlviii.
15) H. J. Selderhuis, David, Calvijn dn ik: Ervaren geloof in de Psalmen (De Vuurbaak, 1995).
16) C. W. Baird, The Presbyterian Liturgies: Historical Sketches(M. W. Dodd, 1855), 28-29.
17) I. John Hesselink, “Introduction”, in John Calvin on Prayer (Westminster/John Knox Press, 2006), 12-13.
18) 페일스,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보복』(개혁 신앙 강좌 2; 성약출판사, 2003), 32-33쪽.
19) J. Smelik, “Die Theologie der Musik bei Johannes Calvin als Hintergrund des Genfer Psalters”, in Der Genfer Psalter und seine Rezeption in Deutschland, der Schweiz und den Niederlanden 16.-18. Jahrhundert, E. Grunewald 외 편 (Max Niemeyer Verlag, 2004), 64.
20) J. T. VanderWilt, “John Calvin"s Theology of Liturgical Songs”,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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