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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계시록 구속사 개괄

by 【고동엽】 2021. 10. 21.

요한 계시록 구속사 개괄

(바른 해석을 위한 오리엔테이션)

 

요한계시록은 창 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의 종말론적 성취과정을 구약에 배경을둔 다양한상징과 환상들을 동원해묵시문학(apocalyptic literature)적 기법으로 기록한 내용입니다. 곧 여자의 후손언약을 시발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구속사가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건을 통해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전 과정을 묵시(黙示)적 기법으로 담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된 교회는 새 예루살렘 환상을 통해 종말론적 완성에 이르게 되며 그 성취 안에서 온갖 천상적 축복을 향유하게 됩니다. 마침내 언약적 구속사는 완성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로 결합됩니다. 처음 에덴의 계시를 통해 계획하셨던 하나님 나라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예루살렘 교회환상을 통해 최종적으로 실현된 것입니다.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으로 폄하해 주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믿음만이 아닌 행함을 동반해야 한다는 야고보 사도의 관점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해 진다는 사실에 근거해 참 된 구원의 믿음(은혜)은 이에 수반되는 마땅한 행함이 뒷받침 돼야함을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약 2:12). 본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입장과 결코 상치되지 않습니다. 바울 또한 부단히 믿음에 합당한 순종의 삶을 살아갈 것을 그의 서신서 도처에서 강력히 촉구합니다(롬 6:1-2, 12-14절, 12:1-2, 갈 5:16, 엡 4:1-3, 22-24절, 5:1-10, 골 3:1-10). 이로 보건대 두 사도들은 한결 같이 바른 믿음은 바른 행동을 수반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공히 견지합니다. 이는 믿음 없는 행함도, 행함 없는 믿음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단지 논리 전개에 있어서 강조점이 달랐을 뿐입니다.

 

칼빈도 동일한 관점은 아니지만 유일하게 요한계시록 주석을 쓰지 않았습니다. 중세 교회가 요한계시록을 신비주의적으로 해석한 나머지 기독인들을 우민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라는 관점입니다. 심지어 루터나 쯔빙글리 같은 종교개혁자들조차도 요한계시록의 정경성에 일말의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는 얘깁니다. 따라서 칼빈의 경우 문제의 소지가 있는 책을 애써 주석함으로 굳이 혼란을 가중시킬 필요를 찾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역사는 요한계시록을 다양한 경로를 통해 분석하고 진단한 결과 분명한 정경(Cannon), 곧 하나님의 자기계시서의 일부로 확증해 기독교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공인하게 되었습니다(AD 376).

 

오늘날 요한계시록은 안타깝게도 다양한 이단의 온상으로 기능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만큼 요한계시록에 대한 일관되고 통일된 해석을 내 놓기가 어렵다보니 저마다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나머지 다양한 해석이 난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성경 66권의 마지막 책으로서 새 예루살렘 및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일컬어지는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를 최종 목표로 삼아 현존하는 교회들의 영적 상황과 상태를 총체적으로 진단해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 요한계시록에 대한 주해가 결코 난공불락의 영역만은 아님을 확인하게 됩니다. 성경역사인 계시사의 본질이 구속사이며, 구속사를 푸는 열쇠가 언약이고, 구속사의 궁극적인 목표가 신정왕국인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에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요한계시록 또한 언약적 구속사의 종말론적 성취라는 맥락 속에서 충분히 해석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다시 말해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구속사역을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다양한 상징과 모형 및 제반 언약을 통해 계시해 오다가 마침내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으로 말미암는 주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성취된 구속사역의 완성이란 관점을 통해서 말입니다.

 

이처럼 요한 계시록은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는 구속사역의 성취 안에서 재림으로 인한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를 적극 보증합니다. 반면에 그 날이 도래하기까지의 과도기적 기간인 현재 교회역사 속에서 초림으로 패배한 사단의 잔존 세력과의 한시적인 충돌과 이로 인한 긴장과 반목과 핍박은 불가피함을 역설합니다. 그러기에 이미 성취된 어린양의 구속사역의 승리는 구속사의 종말론적 성취를 보증하기에 전투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과도기적인 지상의 교회는 미래의 완승을 확신하면서 믿음의 인내로 현실을 넉넉히 극복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본 요한계시록 구속사 강해서를 준비함에 있어서 이 분야를 위해 다년간 깊은 연구와 학문적 업적을 쌓은 고매한 신앙 선배들의 도움을 받았음을 천명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들의 학문적 노고와 연구업적들이 없었다면 본 강해서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참고한 도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호크마 종합주석, 윌리암 헨드릭슨의 요한계시록 주석/종말론, 안토니 A. 후크마의 종말론, 메릴 C. 테니의 요한계시록 해석, 그레엄 골드워디의 복음과 요한계시록, 유도순의 요한계시록 파노라마, 이순태의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필찬의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장수민의 요한계시록 강론집 등입니다.

 

1. 강의 목표

 

① 요한계시록 구속사 강의는 현재 1년 과정으로 진행되고 있는 ‘구속사와 하나님 나라’ 강론의 최종 완결판의 성격을 띱니다. 따라서 두 강론을 연속적으로 수강하는 것을 통해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지’(WBS)를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바르게 정립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결국 성경을 시종일관하게 관통하는 구속사관에 바르게 접촉될 것입니다. 바른 해석은 바른 믿음과 바른 신앙관 정립의 척도로 기능합니다. 여호와 중심의 신앙관의 정체성이 계시의존적인 신앙이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체계화된 지식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으면 인간은 타락한 본성상 필연적으로 자의적 숭배신앙에 접촉돼 불법적인 우상숭배로 전락한다는 것이 성경의 준엄한 경고입니다(롬 1:21-23, 10:2-3, 마 7:21-23, 골 2:23).

 

② 요한계시록을 성경계시역사의 본질인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으로 해석함으로 성경해석의 일관성과 통일성을 견지하게 돼 결과적으로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와 신정왕국인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를 시청각적으로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③ 요한계시록 구속사 강론을 통해 초공간성(현세와 하늘)과 초시간성(현재와 미래)으로 존재하는 교회의 이중성을 확인함으로 환경과 상황을 극복하는 본질적인 신앙관확립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지금 땅에서 ‘전투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고난 중에 존재할지라도 본질에서 이미 승리하는 하늘의 교회로 존재하고 있음을 확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게 된다”(롬 8:18)는 로마서 기자의 고백은 단순히 교리차원을 넘어 실질(reality)로 성도들의 삶 속에 각인돼 능력으로 역사될 것을 확신합니다.

 

④ 하늘 보좌가 우주만물의 통치의 중심이 된다(계 4-5장)는 사실을 통해 세상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 되심을 다양한 묵시적인 표현을 통해 생생하게 목격하게 됨으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섭리의존적인 신앙관을 확립하게 될 것입니다. 섭리의존적인 신앙관의 구체적인 실행이야말로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 16:33)고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선포 안에서 넉넉히 세상을 이기는 천상적 능력의 생생한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이라고 사도 요한은 동일한 맥락 속에서 증거합니다(요일 5:4). 곧 계시의존 사색신앙관 말입니다.

 

2. 요한계시록의 기록 배경과 목적

 

요한계시록은 ‘고난의 시기를 위한 예언문’이란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AD 81-96)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의 황제 도미티안의 황제숭배 사상에 맞서 죽음까지 담보하며 신앙의 절개와 믿음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혹독한 핍박과 시련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와중에 사도 요한도 도미티안의 기독교 박해정책의 피해자로 급기야 밧모섬에 유배를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기독교 내부적으로는 본문의 일곱 교회에게 주신 편지에서도 발견되듯이 교회 내에서도 급격한 신앙의 퇴조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 자연히 신앙의 1세대가 떠나가고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된 죄성의 발로와 권세는 주님을 향한 신앙의 순수성과 열정 및 처음 사랑을 점차 잊게 했습니다. 나아가 이교적인 우상숭배적 신앙과 거짓 교훈이 점차 교회 내부로 잠식해 들어와 교회를 타락시켰습니다. 이런 식의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자연히 1세기 초대교회 속에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부인하는 형식적인 신앙관이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대내외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처한 당시 교회적 형편을 직시하고 사도 요한은 침체와 침륜에 빠져있는 교회공동체의 영성회복과 신앙회복은 물론, 위로와 격려와 경계를 위해 불가피하게 본서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극한 배도와 시험의 위기에 직면했던 초대교회 공동체에게 다양한 묵시와 상징으로 묘사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사역과 승리는 성도들로 하여금 현실을 넉넉히 이기게 하는 천상적 능력으로 충분히 작용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도 요한은 다양한 묵시적 묘사와 표현을 구약적 배경 속에서 채용함으로 구약에 익숙한 초대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를 한층 촉진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3. 요한계시록의 주제

 

① 구약의 제반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인자되신 예수님은 당신의 친 백성들의 구속을 위해 어린양으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은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소유하신 만왕의 왕으로 역사하십니다.

 

② 부활하신 예수님은 초림의 구속사역의 승리에 근거해 여전히 당신의 몸 된 교회와 세우신 종들을 돌보시며 칭찬과 위로와 책망과 권면을 통해 거룩한 교회를 이루시고자 현재적이며 미래적으로 역사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인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드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묵시적 묘사가 이런 사실을 상징적으로 입증해 줍니다.

 

③ 땅의 지역교회는 본질상 하늘에 속한 천상적 교회(초공간성)와 종말론적인 승리의 교회(초시간성)와의 삼각구도 속에서 이미 종말론적인 예배와 안식과 총체적인 신령한 복에 동참하고 있음을 확실하게 각인시켜 줍니다.

 

④ 예수님의 초림으로 말미암는 구속사역의 원천적 승리는 사단의 현존 세력들과의 영적 싸움과 재림으로 말미암는 종말론적 승리를 확실하게 보증합니다. 전투적 교회의 성격을 띤 지역교회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및 위로와 능력과 확신이 이런 사실에 기초합니다.

 

⑤ 지역교회들이 사단의 세력과 불신자들과 죄로 오염된 피조물들에게 가해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각종 재앙들의 영향권에서 아주 배제될 수는 없을지라도, 어린양의 구속사역의 승리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철저히 보호와 구원을 보장받습니다.

 

⑥ 예수님의 초림으로 말미암는 구속사역의 승리는 재림으로 인한 종말론적 사역의 최후 승리를 보증해 줍니다. 이로 인해 창세 전 삼위 하나님의 협약으로 약정된 ‘하나님의 큰 일’로서 구속의 경륜은 새 하늘과 새 땅 및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표상을 통해 최종적으로 성취와 완성을 보게 됩니다. 마침내 에덴은 회복됩니다. 언약의 핵심사상인 임마누엘 사상이 완성됩니다. 곧 교회와 하나님 나라가 종말론적 성취에 이르게 됩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일 됩니다(엡 1:10).

 

⑦ 이상의 사실에 근거해 요한계시록의 중심주제는 단연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에 집중됩니다. 다시 말해 우주 역사 속에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어떻게 존재해 왔으며(과거),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으며(현재), 장차 어떻게 존재하게 될 것인지(미래)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합니다. 한 마디로 지역교회는 지상(땅)에 존재하지만(2-3장의 일곱 교회)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와 인도를 받는 가운데 동시에 하늘에 존재해(4-5장의 하늘의 교회) 완전한 승리를 쟁취했음을 강조합니다. 이는 땅의 교회가 이미 하늘에 존재해서 종말론적인 제반 축복(계 21-22장)들을 누리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땅의 전투하는 교회는 본질상 하늘의 승리하는 교회로서의 속성을 동시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4. 객관적인 해석을 위한 요한계시록의 구문과 구조분석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다양한 묵시와 상징과 비유적인 표현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사건기록에 있어서도 연대기적인 기술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때론 점진적이면서도 동시에 중첩되는 병행법을 사용합니다. 언어적인 병행을 통해 이런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4장 이후에 전개되는 다양한 묵시적 사건들에 대한 해석에 일치된 공통분모를 쉽게 찾지 못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들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석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닙니다. 해석할 수 없는 성경을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 주실 리 없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시종일관하게 진행해 나오는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과 하나님 나라 사상에 근거해 접근하게 될 때, 의외로 요한 계시록의 본의에 쉽게 접촉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접근 방식입니다. 단어 하나하나에 집착해서 해당 사건이 전체적으로 의미하는 메시지가 무엇인 지를 놓치지만 않는다면 구속사의 전(全) 경륜 속에서 넉넉히 요한계시록의 본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약적 구속사의 진행과 하나님 나라 사상과의 함수 관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선결돼야 할 줄 압니다. 이런 관점에서 ‘구속사와 하나님 나라’ 강론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됩니다.

 

이를테면 창세기 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에 근거해 맺어 주신 아브라함 언약(창 12:1-3)은 일차적으로 다윗과 솔로몬 통치의 통일 이스라엘왕국 속에서 모형적인 성취를 가져옵니다(왕상 4:20-25, 미 4:4, 슥 3:10). 이후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되자 왕정의 경호원들인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배도와 불순종을 신랄하게 책망하면서 회개와 순종을 촉구하는 한편 구원과 회복을 약속합니다. 이것이 선지자들이 예언한 새 언약 사상의 중심 내용입니다(렘 31:31-34, 겔 37:21-28). 곧 다윗의 위를 이을 메시아를 보내서 무너진 다윗왕조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 말입니다.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안에서 마침내 성취의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마 1:1, 눅 1:31-33, 19:20, 히 10:15-18). 한편 예수님의 초림으로 말미암는 구속사역의 승리가 구약언약의 총화인 새 언약의 구체적인 성취(이미)임에도 불구하고 구속사의 전(全) 경륜 속에서 예비적인 성취의 성격을 띠는 것은 재림으로 말미암는 구속사의 종말론적 완성(아직)을 여전히 남겨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관점을 고려할 때,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전투하는 교회의 정체성을 띤 지역교회가 당면한 영적 싸움의 현실을 구약적 배경을 채용해 묵시와 상징적 표현을 통해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함에 있어서 묵시적 표현의 상당한 부분을 구약적인 배경에서 채용하게 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계시록의 총체적인 주제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론적 승리가 구약의 제반 언약과 모형적 계시들이 지향하고 있는 종말론적 성취와 본질에서 신학적 상응성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으로 인해 궁극적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구속사의 경륜은 그 예표적이며 모형적인 성취가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미 성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래지향적인 부분을 남겨 놓게 되는데, 이 남은 구속사의 경륜이 다름 아닌 요한계시록을 통해 구약적인 묵시적 표상들을 인용하는 가운데 종말의 성취를 향해 전개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백마 타신 승리자와 왕의 신분(계 19:11)으로 당신의 교회를 온갖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 주심으로 종말론적인 승리와 안식에로 이끌어 주십니다. 묵시적 표현기법의 특징이 서사(敍事)적 기술과 초시간성및 초공간성, 그리고 익명성에 있음을 감안한다면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의 특징적 요소를 골고루 갖춘 명실상부한 교본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이상의 사실들을 고려해 본서의 내용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다 객관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계시록 자체가 자증하는 특징적인 구문과 구조적인 분석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① 요한계시록에는 동일한 표현의 언어적 병행이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이를테면본서 전체의 흐름 속에서 내용과 성격에 따른 본문구분 차원에서 “성령에 감동하여”(I was in the Spirit, 엔 프뉴마티)란 표현을 네 군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계 1:10, 4:2, 17:3, 21:10). 이상의 네 곳에서 언급된 동일한 언어적 병행구는 그 자체로 계시록 전체의 내용을 성격상 크게 네 등분으로 구분하는 동아리 환상군을 이루고 있습니다. 첫째 환상군은 계 1:10에서 시작되며 계시록 1-3장의 초입부분에 위치해 있으면서 아시아(땅)의 7곱 교회들에게 각각의 메시지를 전달하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양한 모습을 묵시와 상징적 묘사를 통해 기술합니다. 둘째 환상군은 계 4:2에 소개됩니다. 사도 요한은 4-5장을 통해 하늘 문이 열리고 영광의 광채와 광휘로 가득 찬 하늘 보좌와 일찍 죽임을 당했던 어린양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후 16장까지 이어지는 세 종류(인/나팔/대접)의 일곱 재앙의 심판 환상이 점진적인 병행을 이루며 뒤따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셋째 환상군은 계 17:3에 소개됩니다. 장소는 광야입니다.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계 17:1-21:8까지의 세 번째 환상군에서 사도 요한은 사단세력의 총화인 음녀 바벨론의 멸망에 근거해 이후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짐승과 거짓선지자 및 사단과 불신자들의 종말론적 심판을 상호 연계시켜 기술합니다(계 19:11-20:15). 한편 세 번째 환상군과 높은 산으로 이끄셔서 보여주신 계 21:9-22:5까지 진행되는 네 번째 환상군(계 21:10)은 사실상 두 번째 환상군에서 보여주신 세 종류의 일곱 재앙들의 결과로 말미암는 이중적 결론의 성격을 띱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환상군의 중심을 이루면서 4-5장의 하늘 보좌로부터 발원된 세 종류의 일곱 재앙은 16장까지로 일단락이 될지라도, 계속해서 악의 총화인 바벨론의 멸망(계 17:1-19:10)에 근거해 두 짐승과 사단을 포함한 악의 추종자들이 총체적인 심판과 멸망을 받기 때문입니다(계 19:11-20:15). 따라서 두 번째 환상군에 속한 세 종류의 재앙은 음녀 바벨론의 멸망과 짐승의 멸망 및 불신자들의 최후의 심판 내용을 기술하고 있는 세 번째 환상군과 유기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반면 세 번째 환상군을 통해 계시된 사단을 비롯한 악의 세력의 종말론적 심판과 멸망기사는 자연스럽게 네 번째 환상군에 속한 어린양과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표상된 그의 신부의 종말론적 승리를 보증해 줍니다. 이 과정에서 최후의 심판기사(계 19:11-20:15)가 바벨론 멸망사건(계 17:1-19:10)을 보충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기사(계 21:1-8)는 어린양의 신부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출현을 보충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② 계시록 4-5장에 소개된 천상적 환상에 근거를 둔 세 종류의 일곱 재앙 시리즈는 마지막 일곱 대접 재앙 시리즈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이 과정에서 심판과 재앙을 설명하는 묵시적 표현(번개, 뇌성, 음성, 번개, 우박, 지진 등)들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당시 애굽 지역에만 제한적으로 내린 재앙(출 9:18)과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시내산에 회집했을 때 하나님의 현현(출 19:16)을 반영하는 구약의 언어적 표현들입니다. 4-5장의 하늘 보좌 환상을 통해 종말론적 심판의 징후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앞으로 일어날 우주적 심판이 이미 하늘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함의합니다. 이는 종말론적 심판의 기원이 하나님의 보좌에서 결정되고 발원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종말적 심판과 관련해 하늘 보좌와 세 종류의 다른 일곱 재앙이 주어질 때 나타난 언어적 표현의 반복과 병행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먼저 하늘 보좌에서는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납니다”(계 4:5). 인(印)재앙 시에는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납니다”(계 8:5). 나팔재앙 시에는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보입니다”(계 11:19). 대접재앙 시에는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전대미문의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계 16:18).

 

세 종류의 일곱 재앙들은 내용적으로 4 + 3의 동일한 구조를 띠면서 각각 종말론적 심판을 향해 점진적인 병행을 이루며 진행됩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세 종류의 재앙들이 연속되는 사건기록은 아닙니다(계 6:12<8:12<16:8-9의 시간 비교). 오히려 같은 종류의 재앙과정을 각기 다른 관점과 각도에서 묘사하고 있다는 성격이 강합니다. 마치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각기 다른 측면에서 기술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 15:1은 대접심판을 ‘마지막 재앙’이라고 규정합니다. 이런 이유로 계16:5에서는 11:17처럼 하나님을 지칭할 때 관용구처럼 사용했던 ‘장차 오실 이’(계 1:4, 8절)를 생략합니다. 왜냐하면 대접심판으로 자연계와 악의 세력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재앙적 심판은 일단락되기 때문입니다(백보좌의 심판만 남게 됨). 따라서 상대적으로 일곱 인과 일곱 나팔재앙 시리즈에서는 심판의 주요 대상이 자연계와 사람에게 집중되었다면, 대접심판 시리즈에서는 자연과 사람뿐만이 아니라 ‘공기’(계 16:17) 곧 사단의 좌소(엡 2:2)를 포함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대접심판이 인(印)과 나팔심판 시리즈에 비해 좀 더 심판의 최종성에 집중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접심판은 ‘마지막 재앙’입니다.

 

③ 두 번째 환상군(계 4:1-16:21)을 해석하는 데 특별히 유의해야 할 부분이 삽화(揷畵)적 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일반적으로 삽입(揷入)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본 환상군에 소개된 삽입 환상들은 7장에 인 맞은 144,000명 환상, 10장에 작은 책을 가진 천사와 11장에 소개된 두 증인 환상, 12장에 해를 입은 여인과 용 환상, 13장에 두 짐승 환상, 14장에 하늘 보좌 앞에 서 있는 144,000명의 환상 등입니다.

 

첫째, 여섯째(계 6:12) 인과 일곱째(계 8:1) 인 사이에 위치한 7장에 언급된 인침을 받은 144,000명에 관한 기사입니다. 이는 새 이스라엘로서 창세 이후 재림 때까지 지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곧 교회원들의 총화를 나타내는 완전수와 충만수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숫자입니다. 사도요한은 이들이 구약의 이스라엘 12지파에서 나온 자들임을 언급함으로 민수기서(민 1:19-46)에서 계수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를 신약적 관점에서 재구성함으로 교회론적이고 기독론적으로 재해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각 지파의 수를 공히 12,000명으로 통일시키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수를 144,000명으로 합산한 것은 다분히 요한의 의도된 처사임을 추정하게 됩니다.

 

본 인침 사건기록의 배경은 에스겔 9:4-6을 근거로 합니다. 본문에서 이마에 표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해 철저히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런 표현은 물리적인 관점보다는 영적이고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해석해야 할 줄 압니다. 따라서 계 7장의 땅에서 인 맞은 144,000명과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하늘에 속한 큰 무리에 대한 삽입사건은 계 6:17의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주어진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 6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진노의 인(印) 재앙으로부터 누가 피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말입니다. 결국 본 삽입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준엄한 인 재앙과 심판 가운데서도(6장) 하나님의 백성들은 철저히 보호와 인도와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확증시켜 줍니다(7장).

 

둘째, 여섯째(계 9:13) 나팔과 일곱째 나팔(계 11:15) 사이에 위치한 10-11장에는 펴 놓인 작은 책을 가진 천사와 두 증인의 환상이 삽입구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나팔 재앙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선지자적 증거의 사명을 감당할 것을 가리킵니다. 계 9:20-21은 나팔재앙(13-19절)들이 사람들의 회개를 이끌어 내지 못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계 11:13은 두 증인(10장의 요한을 포함 교회의 선지적 증거사역을 상징적으로 대표함)의 순교적 증거사역을 통해 사람들의 회개를 이끌어 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10장의 작은 책 삽입환상은 9:20-21의 말씀과 직접적으로 결부된 내용입니다. 재앙으로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도 듣든지 아니 듣든지 복음(펼쳐진 작은 책)을 전하는 것이 성도의 도리이며 교회의 사명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반면 11장은 두 증인으로 표상된 교회를 통해 10:11에서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위임되 사명을 수행하는 내용입니다. 그 결과 11:13절에서 일부 회개하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 10-11장의 두 삽입환상은 8-9장의 나팔재앙으로 고통과 심판당하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교회의 선지적 증거사역을 통해 부단히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하겠습니다.

 

세 번째 삽입환상군은 12장에 해를 입은 한 여자와 붉은 용의 환상, 13장에 용(사단)의 하수인인 두 짐승의 출현환상, 그리고 14장에 하늘 보좌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는 144,000명의 환상 등입니다. 이상의 세 삽입환상군은 11:14-15의 일곱째 인 나팔재앙과 15:1에서 선포되는 마지막 대접재앙 사이에 삽입돼 있으면서 7장과 10-11장의 삽입환상들과 본질상 불가분의 연관성을 맺고 있는 가운데, 14장에 소개되고 있는 천상의 교회를 통해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를 보충설명 해 줍니다. 결국 12장에서 아이로 묘사된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승천은 붉은 용 사단을 패배케 하는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합니다(20장에서 무저갱에 갇힘). 13장의 삽입환상을 통해 패배한 용(12장)은 하수인인 두 짐승에게 권세를 주어 핍박과 고난 및 이적과 기사로 교회를 대적하며 미혹합니다. 이 과정에서 두 짐승을 좇는 수많은 추종자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두 짐승은 자신의 추종자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 환난과 핍박과 미혹의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 다름 아닌 14:1-5에 소개된 하늘에 속한 144,000명의 삽입환상 기사입니다. 마치 6:17의 질문에 7:1-4(땅의 144,000명)이 답변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14장의 144,000명과 7장의 144,000명이 의미하는 상징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14장의 144,000은 천상적 교회를 상징하는 내용으로 7장에 소개된 땅의 144,000명과 하늘에 속한 셀 수 없이 많은 큰 무리를 하나로 병합한 총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이중성(땅과 하늘)을 본질상 하나의 관점에서 통합해 설명함으로써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를 강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결국 이상의 구문 분석적 논증은 요한계시록의 내용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구조적인 개요를 도출하게 됩니다.

<범례 1>

*서론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계 1:1-8)

제 1 환상군 -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적 사역(계 1:9-3:22)

제 2 환상군 -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늘 보좌의 절대주권(계 4:1-16:21)

*7인 재앙(6:1-8:5) - 삽입환상(7장)

*7나팔 재앙(8:6-11:19) - 삽입환상(10-11장, 12-14장)

*7대접 재앙(15:1-16:21)

제 3 환상군 - 음녀 바벨론의 멸망과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계 17:1-21:8)

*바벨론 멸망(17:1-19:10) <--- 최후의 심판(19:11-20:15, 보충설명)

제 4 환상군 - 어린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의 출현(계 21:9-22:5)

*새 하늘과 새 땅(21:1-8) : 보충설명

*결론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6-21)

 

<범례 2> 17:1-19:10(바벨론 멸망) <----- 보충설명

19:11-20:15(최후의심판)

서론(1-3장)-본론(4-16장)-이중적 결론 : 19:11-21:8 - 에필로그(22:6-21)

21:1-8(새 하늘/새 땅)

21:9-22:5(새 예루살렘의 출현) <---- 보충설명

④ 무저갱에 일천년 동안 결박당한 용(사단)에 대한 상징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계 20:1-3). 무저갱은 사단과 그의 하수인들인 악의 세력들이 불못(지옥)에 던져지기 전에 한시적으로 머무는 장소의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본문에서 결박당한 용의 상태가 완전결박이냐 아니면 제한적인 영향력의 발휘를 의미하느냐를 놓고 열띤 신학적 논쟁을 해왔습니다. 아직도 공통적인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본문은 용으로 묘사된 사단이 천사에 의해 쇠사슬로 결박당한 채 무저갱이란 감옥에 일천년 동안 감금당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더욱이 무저갱은 열쇠로 굳게 잠가 인봉한 상태이기에 천년이 차기까지는 다시 나오거나 활동할 수 없다고 강조해 기술합니다(20:3). 그러다가 천년이 차면 잠간 놓임을 받아 성도를 미혹하려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에 처해져 불못에 영영히 던져질 것을 설명합니다(20:7-10). 본문의 설명을 분석해 보면 용은 쇠사슬로 묶여진 상태로 무저갱에 갇혀있을 뿐만 아니라, 무저갱은 열쇠로 잠겨진 채 그 위에 인으로 철저히 봉해진 상태임을 강조해 설명합니다. 이런 표상이 의미하는 것은 영향력의 제한과 약화 및 감소로 해석하기보다는 완전결박으로 인한 사단의 무활동으로 보는 것이 보다 설득력 있는 해석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천년이 차면 잠간 놓임을 받고 땅의 불신자들을 규합해 성도를 미혹하고자 마지막 안간 힘을 쓰지만 이내 영원한 불못에 던져진다는 표현은 적어도 무저갱에 갇혀 있는 동안은 제한적인 영향력조차도 행사할 수 없음을 강력히 시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단의 결박의 시점은 예수님의 탄생-죽음-부활-승천과 관련된 초림사역의 전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계 12:5, 7-9, 마 4:1-11, 12:29, 눅10:17-18). 그런 의미에서 계 12장에 소개된 하늘에서의 사단의 축출사건은 계 20의 용의 무저갱 감금사건과 유기적으로 연계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직후에 발생한 사건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장의 차이는 용의 축출장면입니다. 12장에서는 하늘로부터 땅으로, 20장에서는 땅에서 무저갱으로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두 장을 연결하면 20장에서 용이 결박당해 무저갱에 갇힌 것은, 그가 땅으로 축출당하여(12:5, 7-9절) 교회를 핍박하려던 시점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결국 사도 요한은 계 20장에서 사단의 전적인 무활동을 통해 교회의 절대 안전과 보호를 강조한 반면, 12장에서는 ‘뱀의 낯을 피하여’란 표현을 사용해 동일하게 사단의 세력들로부터 교회의 안전을 강조합니다. 이를 도표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계시록 12장 계시록 20장
주 제 교회의 보호와 양육 사단의 무활동 = 교회의 보호/안전
방 법 여자(교회)가 광야로 도망 결박된 용의 무저갱 감금
장 소 광야 무저갱
기 간 1,260일(한 때, 두 때, 반 때) 일천년

 

위의 도표에서 보면, 교회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한다고 기술하고 있는 계 20:6에 언급된 천년의 기간이, 계시록 12장에서 교회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의 기간인 1,260일 또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기간과 동일한 시기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일천년이 문자적 천년이 아닌 상징적인 숫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의 전 기간을 뜻하는 것임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무천년설(Amillennialism)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사단의 완전결박으로 인한 무활동 기간인 현 교회시대에 여전히 사단의 활동과 미혹의 역사를 경계시키는 성경의 내용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벧전 5:8, 엡 4:27, 6:11, 고후 2:11, 11:14-15).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완성과 승리로 사단은 이미 무저갱에 완전결박을 당했습니다. 천년이 차기까지 사단의 활동은 불가능합니다. 쇠사슬로 결박당한 채 무저갱에 갇혀 자물쇠로 잠그고 인으로 봉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징이 의미하는 바는 사단의 완전결박과 무활동을 표상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천년이 찬 후에 ‘반드시 잠간’ 놓임을 받아 교회를 향한 미혹과 핍박을 재시도 하게 될 것이라는 추가적인 설명이 이런 사실을 더욱 확증시켜 줍니다. 그러나 이 일마저도 무위로 끝나버리고 오히려 불못에 처해 멸망당할 뿐입니다(계 20:3후, 7-10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단의 활동에 대한 내용은 다름 아닌 ‘사단적 영향력의 행사’를 의미합니다. 비록 사단은 철저히 결박된 채 이미 감금당했을지라도 그의 영향력은 사단의 추종자와 하수인들을 통해 여전히 현재적으로 시행되고 있다는 관점 말입니다.

 

이 부분에 관해 계 13장이 조명의 빛을 비춰줍니다. 계 13:1-4의 내용입니다. 본문에서 한 짐승이 바다에서 나옵니다. 바다는 사단의 총사령부를 상징적으로 지칭합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환상은 단 7:1-8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다니엘서에는 네 짐승이 등장합니다만 사도 요한은 계 13장에서 이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상징을 통해 통합적으로 설명합니다. 이 짐승은 다니엘서에서나 계시록에서 동일하게 말세(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사이)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적 정치세력으로 묘사합니다. 이 짐승이 어떻게 적그리스도적인 막강한 정체세력을 얻게 되었는지의 배경설명이 계 13:1-4에 기술돼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단은 주님의 구속사역의 완성으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게 되자(창 3:15, 요 19:30, 마 28:18), 무저갱에 갇히기 직전 땅으로 쫓김을 당해(계 12:7-9) 바로 자신의 본부가 위치해 있는 ‘바다 모래 위’(계 12:17)로 찾아와 짐승에게 자신의 보좌와 권세와 능력을 양도해 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단은 일등 추종자인 짐승을 통해 여전히 현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 본질상 자신의 투쟁적인 역사를 대행시켜 나가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에 더해 땅에서 올라온 또 다른 짐승이 종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바다에서 올라 온 짐승을 보좌하는 가운데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적인 짐승을 경배하도록 촉구합니다. 이 짐승들이 사단을 대신해 사람들을 미혹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기간이 42달 동안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기간을 설명하면서 짐승이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계 13:5)고 묘사함으로 이 핍박조차도 하나님의 절대주권 하에서 허락된 사건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합니다. 이로 보건대 사단을 비롯해 모든 악의 세력들조차도 본질상 하나님의 구속사를 전개시켜 나가는 일에 필요에 따라 적재적소에서 도구로 사용될 뿐입니다(잠 16:4).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 돌아갈 뿐입니다(롬 11:36).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따른 은혜의 은혜 됨을 전심으로 깨달아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기 위함입니다(엡 1:4-6, 롬 11;32, 전 12:13).

 

⑤ 계 21:9-22:5에 소개된 새 예루살렘 환상에 관한 내용입니다. 흔히 본문의 새 예루살렘에 관한 상징을 천국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대한 간증을 할 때마다 의레 본문의 내용을 근거로 삼아 얘기하곤 합니다. 천국에는 모든 집들과 길조차도 각종 보석으로 치장돼 있어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휘황찬란한 곳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성도들이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저택 같은 근사한 집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때에 단골 메뉴처럼 제시되는 증거 본문이 요한 14:1-3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예비해 놓으신 하늘의 처소 말입니다. 그러나 계시록의 본문은 천국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새 예루살렘의 상징과 영광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의 최종 승리와 축복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계 21:2, 10절).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성취 될 교회의 영광의 내용 말입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건물로서의 성전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이 성전의 실체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계 21:22). 일찍이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일컬어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19-21). 예수님께서는 자신 안에서 손으로 지은 성전을 무효화시키고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성전의 실질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임재(임마누엘)를 이 땅 위에 충만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본 새 예루살렘 환상에서 보듯이 성전의 실체가 되셔서 자신 뿐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와 완전한 연합을 이루십니다. 계 21:3에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신다”고 하신 의미가 이런 원리를 뒷받침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와 연합은 성사되었고(21:2-3),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새롭게 된 새 하늘과 새 땅, 곧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연결됩니다(계 21:1). 이는 에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첫 창조의 원리를 의도적으로 반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5일 동안 아담과 하와(최초의 교회)가 거처할 수 있는 창조적 환경을 먼저 만들어 놓고, 후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했듯이, 본문(계 21:1-5)에서도 우주를 먼저 새롭게 하고 새 예루살렘인 하나님의 교회가 등장하는 것을 봅니다. 이는 사도 요한이 창세기의 내용을 상당히 의식하면서 기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마치 요한복음 1-3장의 구조적 성격(태초/혼인/구원)이 창세기 1-3장의 패턴(창조/결혼/구속)을 의식하며 구성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상호 유기적 관련성은 새 창조를 통해 첫 창조에 담겼던 당초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이 온전히 성취되어야 한다는 요한의 해박한 구속사적 관점이 표명된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런 구속사의 점진적인 진행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사역으로 이미 실현되었고 재림을 통해 완성될 것입니다. 이런 신묘막측하신 하나님의 구속경륜과 관련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3-36).

 

구약역사 속에서 일찍이 하나님과 사람(교회)이 하나로 연합돼 하나님 나라를 이룬 적이 있었습니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 에덴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이 연합은 이내 깨져버렸습니다. 이런 단절은 창 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해 다시 회복이 보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마침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최종완성은 아닙니다. 이제 계시록의 본 새 예루살렘 환상을 통해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회의 종말론적 연합이 최종적으로 완성을 보게 된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루었도다’라고 말씀하시는 의미가 이렇습니다(계 21:6).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창조로 말미암아 시작하신 것을 친히 끝을 맺으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인 것입니다. 이상의 새 예루살렘과 에덴과 성전 계시 간의 불가분의 함수관계는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를 함의합니다. 다시 말해 하늘에서 내려오는 완성된 새 예루살렘의 교회 상징을 통해 에덴동산과 성전의 궁극적 실체가 회복되고 완성되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는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가 마침내 성취의 절정을 이루었음을 시사합니다. 이로 보건대 구속사의 핵심은 교회임이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단서가 다름 아닌 보석 모티브(동기/원인)를 통한 분석입니다. 계 21:19-20에 언급된 새 예루살렘 성은 각종 보석으로 단장되었습니다. 이는 총체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속성과 영광의 광채의 적극적인 반영과 투영을 의미합니다. 이는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본질상 하나님의 영광을 현시하는 하나님 나라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새 예루살렘이란 교회상징을 통해 이런 사실이 구체적으로 확인됩니다. 이제 보석 모티브를 통해 새 예루살렘 성(계 21:19-20, 교회)과 구약의 성전(출 28:17-20, 대제사장 에봇), 그리고 에덴동산 사이에 내포된 구속사적 함수관계를 살펴봅니다. 이상의 세 본문들을 통해 구속사를 구성하고 있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각종 보석들을 상호 비교해 보면 이들 사이에 깊이 연관된 유기적인 상응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보석 모티브를 통해 새 예루살렘과 성전과 에덴동산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구속사의 진행에 있어서 핵심적으로 기대해 왔던 성전과 에덴의 실체가 새 예루살렘 상징의 실체인 새 하늘과 새 땅의 교회공동체를 통해 완전하게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위의 세 요소들이 보석 모티브를 통해 서로의 개념과 본질과 성격을 공유하면서 상호 유기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증거합니다. 곧 거룩한 성 예루살렘 상징을 통한 완성된 교회의 실체(언약사상의 궁극적 성취, 계 21:3) 속에서 실낙원이 복낙원으로 회복되고(계 22:1-5) 임마누엘의 성전계시는 궁극적으로 실현된다(계 21:22)는 사실 말입니다.

 

⑥ 요한계시록 해석과 관련해 새 예루살렘 모티브에 대한 구문 분석적 고찰의 중요성의 강조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말미암아 우주만물이 새로워 질 때, 새 창조의 질서를 누리게 되는 최대의 수혜자는 새 예루살렘으로 상징된 종말론적 교회입니다(계 21-22장). 이런 계시록 내용 구성의 포괄적인 맥락 속에서 새 예루살렘(승리한 교회) 모티브는 계시록 해석에 중요한 주제로 등장합니다. 계시록 전체에서 새 예루살렘 모티브는 모두 다섯 번에 걸쳐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3:12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으로 언급됩니다. 본문의 빌라델비아 교회는 다른 교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책망의 요소가 크게 지적되지 않은 칭찬받았던 교회입니다. 주님께서는 본 절을 통해 영적 승리자에게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하나님의 새 이름을 주시겠다고 종말론적 약속을 해 주십니다(3:12). 이는 영적 전투의 승리자는 새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종말론적 교회에 소속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될 것을 확실하게 보증하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땅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하늘의 교회에 소속되는 교회의 이중 구조적 특성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두 번째는 11:2입니다. 본문에서 새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으로 묘사됩니다. 계 11장은 10장과 더불어 8-9장에서 시행되는 7나팔 재앙과 관련해 주신 삽입환상의 내용입니다. 10-11장의 중심 주제는 세상이 하나님의 재앙으로 심판에 처해질 때(8-9장의 나팔재앙) 교회의 선지적 증거사명에 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쓴’ 복음의 이중적 사명을 감당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계 10:9, 겔 2:8-3:1-3). 곧 구원과 심판, 핍박과 보호적 차원에서 말입니다.

 

계 11:2에서는 교회가 지상에서 이방인(사단의 세력)들에 의해 핍박과 박해를 받게 될망정 철저하게 보호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성전측량 환상을 통해 보여줍니다. 11:1-2입니다. “....하나님이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새 예루살렘 표상)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본문의 성전박해와 핍박환상은 구약적 배경을 채용해 신약 교회가 겪는 종말론적 환란상황을 묵시적으로 표현한 내용입니다. 이때 성전 안마당과 성전 밖의 마당을 구분해 보호와 핍박의 이중성을 설명합니다. 성전 안은 참된 교회의 영역을, 성전 밖은 이방인의 영역, 곧 적진을 상징합니다.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라는 것은 철저한 보호를 암시합니다. 이는 스가랴서의 반영으로 슥 1:16에서는 예루살렘을 ‘먹줄로 치는 것’으로 기술합니다. 곧 바벨론 점령으로부터 회복된 예루살렘 성 사방을 먹줄로 둘러침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철저히 보호를 받게 된다는 영적 진리를 시사해 줍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이런 스가랴서의 환상을 인용하면서 교회가 환란 중에 핍박에 노출될지라도 철저히 보호와 안전을 보장받게 됨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계 11:3에서 ‘두 증인’의 파송과 선지적 사명 감당에 앞서 성전측량 환상을 먼저 보여주시는 의도가 이렇습니다. 교회는 모진 핍박과 환란 중에도 철저히 하나님의 보호와 안전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확증시켜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물론 이 말은 교회는 전혀 핍박과 무관하다거나 환란과 순교로부터 적극 배제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계시록은 이런 사실을 기정사실화 함). 설령 사단과의 적대적이고 투쟁적인 관계상(창 3:15) 환란과 핍박과 순교가 불가피할지라도 어린양의 승리 안에서 종말론적으로 철저히 구원이 보장됨으로 최후의 승자(새 예루살렘 상징)가 된다는 미래지향적인 관점 말입니다.

 

세 번째는 19:7-9입니다. 본문에서 새 예루살렘이나 거룩한 성이란 표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어린양의 아내가 예비됐다’와 ‘어린양의 혼인잔치’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19장의 주제는 단연 하나님의 통치에 집중됩니다(19:6하). 19장은 신약성경에서 처음으로 할렐루야란 찬송이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승리의 장면이 연출됩니다. 16장에 소개된 마지막 일곱 대접재앙으로 사단의 세력을 총체적으로 집약해 상징하고 있는 음녀 바벨론이 17-18장에 걸쳐서 철저히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17:14에 언급된 어린양과 바벨론 세력과의 전쟁예고와, 18장의 바벨론의 멸망기사는 본질에서 19:11이하의 백마 탄 자의 싸움과 중복(overlap)되는 장면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19장에서는 백마 탄 자의 상징을 통해 악의 두 축인 두 짐승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마무리됩니다. 마침내 저들은 영원한 불못에 던져집니다(19:11-21). 20장에서는 “용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의 최후의 멸망을 보여줍니다. 이로 보건대 17-20장의 환상을 통해 기술된 사단 세력들의 총체적인 멸망기사는 16장의 마지막 대접재앙의 결과(15:1)에 종속돼, 멸망의 내용을 좀 더 세분화시켜 해석해 줍니다. 전체와 부분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말입니다.

이상의 사실에 근거해 요한계시록의 주제를 다시 한번 요약하자면 어린양의 구속 과 교회의 종말론적 완성입니다. 계 1장에서 일곱 별을 붙드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분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은, 2-3장의 일곱 교회들을 향해 ‘이기라’고 강력히 권고하십니다(2:7, 11절, 17절, 26절, 3:5, 12절, 21절). 4-20장까지는 하늘의 천사들과 흰 세마포를 입은 군대를 대동하시고 군대장관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사단의 세력들과 다양한 모양의 ‘아마겟돈’ 전쟁을 수행하심으로 최후의 승리를 이끄십니다. 어린양의 승리는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의 원천으로 작용합니다. 새 예루살렘 표상이 이를 확증해 줍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본 19:7-9에서 발견되는 새 예루살렘 모티브인 ‘어린양의 아내와 혼인잔치’에 대해 살펴봅니다. 어린양의 아내란 표현은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이들과 혼인기약이 이르렀다는 것은 예수님과 교회와의 종말론적 연합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이제 음녀 바벨론의 멸망(17-18장)은 사단의 패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질에서 주님의 승리를 보장합니다. 이로 인해 19장이 열리면서 이내 성도를 상징하는 허다한 천상의 무리들의 할렐루야 합창소리, 곧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과 공정성을 찬송하는 장엄한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바야흐로 어린양과 그의 신부 교회와의 혼인, 곧 연합이 실현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의 강림으로 교회가운데 여전히 임재하시며 통치하셨던 주님은 사단의 세력들이 원천적으로 진멸된 상태에서 마침내 천상적인 연합이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21장에서는 이를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창조질서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된 새 예루살렘의 표상을 통해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성전의 중심사상과 언약의 핵심사상인 임마누엘 신학의 최종 완성,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상 말입니다(2-3절). 이처럼 어린양과 신부의 상징적 결합을 통한 교회(새 예루살렘) 모티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뿐만 아니라 만물을 통일되게 하는 일에도 결정적인 동기부여로 기능하게 됩니다. 아담의 범죄는 피조물의 타락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지만 둘째 아담 안에서 교회의 회복은 만물의 회복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롬 8:19-21).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혼인기약에 이른 어린양의 신부는 이내 백마 탄 자의 싸움에 흰 세마포를 입은 하늘의 군대로 동원되는 것을 봅니다(19:11-14). 이는 교회 정체성의 이중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대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롬 8:17)는 관점 말입니다. 지상의 교회는 예수님의 초림사역을 통해 이미 주님과의 혼인잔치에 동참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온전한 완성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 과도기적인 기간에 지상의 교회는 사단의 세력들과의 불가피한 투쟁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백마 탄 자와 일단의 흰 옷을 입은 무리(교회)들이 여전히 짐승의 세력들과의 전쟁을 불사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네 번째는 계 20:9입니다. 본문에서 새 예루살렘 모티브는 “성도들의 진(陣)과 사랑하시는 성”으로 표현됩니다. 본문은 천년동안 무저갱에 감금당했던 용, 곧 마귀 사단이 잠간 풀려나 만국을 미혹하는 사건을 배경으로 삼습니다. 그렇지만 성도를 멸망시키지는 못합니다. 대신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포위할 뿐입니다. 본문에서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은 21:2과 10절에서 언급된 거룩한 새 예루살렘 성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문맥 속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사단의 최후의 공격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손은 오히려 사단과 그의 세력들을 단숨에 심판해 버립니다. 교회는 일체의 위경으로부터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고 있음을 시사하는 광경입니다.

 

다섯 번째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입니다(21:2, 10절). 이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승리의 절정에 이른 종말론적 교회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하늘 보좌로부터 내려온 새 예루살렘 안에서 이제 하나님과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연합을 이루십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사건이 다름 아닌 계 21:3의 말씀입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본문은 신구약에 나타난 제반 언약의 종말론적 성취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초 에덴에서 계획하셨던 임마누엘의 궁극적 성취인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된 새 예루살렘 상징을 통해 완벽하게 구현하신 셈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루었도다’라고 선포하시며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고 단정적으로 선언하셨던 것입니다(계 21:6).

 

이상 다섯 번에 걸쳐 강조된 새 예루살렘 모티브의 성격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계시록을 기록함에 있어서 교회는 사도 요한의 구속사관에 있어서 주요 관심사로 등장합니다. 바로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바 된 주님의 몸이요, 창세전 하나님의 구속경륜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는 새 예루살렘 표상을 통해 이중 구조를 띠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곧 하늘에 존재하며 동시에 땅에서는 사단의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전투하는 교회의 모습을 띠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결국은 주 안에서 승리입니다. 요 16:33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계 11:15입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⑦ 사도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함에 있어서 왜 구약적 배경에 근거한 다양한 상징과 묵시적 표현을 집중적으로 채용했는가의 문제입니다. 한 마디로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와 완성을 구약의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배경 속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고 있는 포로기 전후의 선지자들의 새 언약(렘 31:31-34, 겔 36:24-28, 37:21-28)의 성취라는 궁극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포로기 전후의 대/소 선지자들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함에 있어서 다양한 상징과 묵시적 기법을 동원해 설명했습니다(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스가랴 등).

 

그러나 선지자들의 새 언약 속에 약속되었던 이스라엘의 회복, 곧 신 다윗왕조의 재건은 불발로 끝납니다. 이런 결과가 의미하는 바는, 선지자들의 새 언약은 보다 진전된 미래지향적인 성취를 전망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전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총체적으로 함의하고 있는 예수님의 새 언약의 성취를 통해 마침내 성취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마 1:1, 눅 1:31-33, 22:14-20, 히 10:14-18). 다시 말해 구약의 이스라엘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사역을 통해 새 이스라엘로 등장한 교회공동체의 출현 안에서 마침내 실현되었고(갈 3:7, 29절), 이제 재림으로 이루어질 최종 완성만을 남겨 놓고 있다는 관점입니다.

따라서 사도요한은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해 사용되었던 선지자들의 다양한 상징과 묵시적 기법을 이스라엘의 실체인 신약의 교회공동체의 종말론적 완성이란 목표에 초점을 맞춰서 적극 재활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사도요한은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와 완성을 구약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궁극적 성취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구약의 선지자들이 사용했던 상징과 묵시적 요소들은 교회의 종말론적인 회복과 성취를 설명하기 위해 동일한 원리 속에서 방편적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5. 요한계시록에 약속된 7가지 복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면서 7가지 축복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그것은 한결 같이 영적인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비록 불가시적일지라도 실제적이며 영속적이고 영원한 것으로 인해 본질적인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잠시 소유했다가 사라질 현세적이며 물질적인 축복의 내용들이 아닙니다. 현세지향적인 요소들과 관련된 복은 실제로 참 된 의미의 복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제아무리 현재의 삶을 부요하고 윤택하게 해 주며 미래를 보장해 준다고 할지라도 한시적인 것으로 인해 궁극적인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시락 밥에 물마시고 팔베개를 베고 잠을 청할지라도 참 된 행복과 즐거움이 거기에 있다’는 풍유가락이나, 비록 ‘초가삼간이 작고 보잘것없을지라도 임금의 궁궐보다 더 부요하다’는 노랫말은 애써 자신의 빈곤한 처지를 합리화시키려는 작위적인 처사가 아닙니다. 부유한 가운데서도 다툼과 불화가 있을 수 있고, 가난한 중에도 웃음과 즐거움과 행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현세적인 축복의 요소들은 그 자체로 복의 절대적인 가치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마 16:26). 온 천하가 목숨보다 중요할 수 없기에 매사에 목숨의 보존이 우선돼야 한다는 관점입니다. 이는 신앙을 사욕의 수단으로 삼아 위선과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비유적인 말씀입니다(마 16:1-3). 본문에서 ‘온 천하’란 인간이 지상의 전 생애를 통해 추구하는 온갖 복의 총화일 수 있습니다. 설령 온 천하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막강한 권세를 업고 권좌에 올랐을지라도 정작 죽음이 찾아오면 그 모든 영광은 일순간에 사라지고 부귀영화의 삶은 일장춘몽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면 복중의 복이요 복의 본질이란 다름 아닌 목숨의 영원한 보장, 곧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죽음을 극복하는 영생의 삶의 보장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요 5:24, 시 133:3). 이처럼 온 천하는 목숨을 위해 존재하는 방편일 뿐, 목숨이 온 천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구속사가 성취되는 현장으로 수단과 방편적 기능을 수행합니다. 현세적 축복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영속적입니다. 성도는 현재는 보이지 않으나 믿음으로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고후 4:18). 더구나 세상에 속한 것은 본질상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요 사단에 속한 것으로 성경은 선언합니다(요일 2:15-17). 그런 의미에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 된 복을 소유해 누린다는 것은 복의 본질인 생명의 문제를 보장받음으로 죽음과 심판과 지옥의 형벌로부터 해방돼 천상적 구원의 기쁨을 여기서부터 앞서 만끽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서 제시하고 있는 7가지 복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첫째,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1:3). 둘째,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4:13). 셋째,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16:15). 넷째,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19:9). 다섯째,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거룩하도다”(20:6). 여섯째,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하더라”(22:7). 일곱째,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22:14).

 

① 첫 번째 복은 계시록의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천명합니다(계 1:3). 본문에서 계시록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것이 복이 되는 이유는 다른 무엇에 앞서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집행될 최후의 심판으로부터 제외돼 궁극적인 구원의 완성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관점은 행함의 구원을 지지하는 발언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선(先) 구원의 은혜를 입었기에, 후(後) 순종하는 삶을 통한 종말론적인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관점입니다(약 2:22, 요 5:28-29).

 

나아가 이런 종말론적 구원의 날이 ‘반드시 그리고 속히 될 일’이기 때문에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속히’라는 표현은 시간적으로 빨리라는 의미라기보다 앞의 ‘반드시’라는 부사적 용어와 더불어 ‘될 일’에 대한 성취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용법입니다. 우리는 계시록에 예언된 말씀들이 ‘반드시 그리고 속히 될 일’들로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으로 성취될 것을 확신합니다. 이는 구속사의 진행과정에서 구약에 배경을 두었던 각종 예언과 약속과 모형적 계시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는 구속사역을 통해 철저하게 성취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무엇보다 본질상 구속사의 발원(發源)이랄 수 있는 창 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 공생애 사역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사실은, 재림을 통해 남은 구속사의 경륜이 완벽하게 성취될 것에 대한 보증으로 기능하기에 충분합니다. 이런 일련의 보증적 사건들이 다양한 상징과 묵시적인 표현들을 통해 계시록 안에 수록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은 아무런 노력과 수고와 대가 없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언의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와 깨달음으로 말미암는 전인적이고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제아무리 복된 내용이라 할지라도 우리와 무관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림의 떡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런 사실들을 철저하게 주지해서 본 계시록의 말씀들을 집중해 읽고 듣고 지켜 행함으로 약속의 복을 우리의 것으로 소유할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본 계시록의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때가 가깝다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계시록의 예언의 말씀과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이 동시적으로 성취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또 다른 관점에서 구원의 종말론적 완성을 가리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반드시 성취될 것에 대한 확증의 표현입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정해진 작정의 시간을 좇아 세상 역사 속에서 당신의 뜻을 틀림없이 성취시키십니다. 성경의 과거 역사가 이를 확고하게 증명해 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실현될까요.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에 대해 침묵합니다. 다만 다양한 징조를 통해 간접적으로 시사합니다. 사실상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으로 인한 초림사역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역사 속에 침노해 들어와 종말론적 성취를 향해 진행되고 있음을 성경은 명백히 시사합니다(마 12:28, 눅 17:20-21). 이런 관점에서 초림은 종말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입니다(히 1:2, 약 5:3, 딤후 3:1-5, 4:1-4, 고전 10:11, 마 24-25장). 말하자면 오늘의 교회시대는 언제라도 주님께서 재림하실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충족된 상태의 시대임을 시사합니다. 돌발적으로 오실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마 24:36-44). 성도들이 늘 말씀 안에 깨어서 기도하며 근신하는 삶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연유합니다.

 

다음으로 주님의 재림이 갖는 특징은 영광과 위엄으로 가득 찬 왕적인 재림입니다.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표현 속에 이런 사실이 내포돼 있습니다. 이는 단 7:13 말씀의 채용입니다. 다니엘은 그의 환상 중에 인자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내려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나라를 인수받아 존귀와 영광을 받는 모습을 봅니다. 여기서 인자의 재림과 관련해 나타나는 구름은 다름 아닌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영광과 위엄과 권세를 포괄적으로 상징한다고 하겠습니다. 어린양이 ‘유다지파의 사자’의 신분으로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창 49:9, 계 5:5). 구약의 성전계시와 관련해 성막과 성전을 덮었던 구름 또한 하나님의 영광의 반영으로 설명되곤 했습니다(출 40:34-35, 왕상 8:11).

 

이 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은 인격적인 재림입니다. 이를 가견(可見, visible))적인 재림 또는 육체적인 재림이라고도 부릅니다(마 24:30, 행 1:11, 살후 1:10). 각인의 눈이 그의 오심을 볼 것이며,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라고 요한은 재림의 모습을 기술합니다(계 1;7).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공개적으로 오심을 뜻합니다. 초림 때에는 은밀한 중에 비공식적으로 소수의 무리들에게만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재림 시는 다릅니다. 만왕의 왕으로 오십니다. 새롭게 갱신된 새 창조(계 21:1)의 질서 속에서 만국의 만백성이 그의 오심을 동시적으로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재림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구속사의 종말론적 완성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의 경륜을 최종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함입니다. 이는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완성을 통한 교회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며 불신자들에게는 심판과 지옥의 형벌을 집행하시는 의미를 가집니다. 요 5:27-29입니다.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계 20: 11-15에서는 최후의 심판 광경을 좀 더 근접해서 설명해 줍니다. 악인의 결국은 불못이며 생명책에 기록된 의인 곧 성도들은 구원의 실질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기업으로 소유하게 됩니다. 계 21-22장에서 새 예루살렘의 상징과 환상을 통해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와 천상적 축복을 향유하는 내용을 다양한 묵시적인 표현을 통해 기술하고 있음이 이런 사실을 결정적으로 뒷받침 해 줍니다.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창 1-2장의 에덴의 종말론적 회복(계 22:1-5) 및 성전계시의 완성(계 21:3, 22절)과 맥을 같이 합니다. 성도의 ‘믿음의 역사와 소망의 인내와 사랑의 수고’가 이런 종말론적 보장에 근거해 절실히 요구됩니다. 현재의 고난이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마치면서 결론적으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계 22:7)고 거듭 강조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기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종말론적 축복의 수여가 적극 보장돼 있기 때문입니다(계 21:5-7).

 

② 두 번째 복은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다”(계 14:13)는 선언입니다. 인간이 한번 죽는 것은 필연적입니다(히 9:27). 그러나 주님 안에서의 죽음과 주님 밖의 죽음은 하늘과 땅만큼의 극단적인 차별을 가져옵니다. 전자는 영생이요 후자는 영벌에 처해진다고 성경이 증언합니다(마 25:46). 기독교 신앙의 역설이 이에 있습니다. 성도에게 죽음은 본질상 구원의 완성에 참여하는 것이며, 영생과 부활의 생명을 실질로 소유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성도의 죽음은 부활을 실질로 경험하는 절호의 기회로 기능합니다. 따라서 죽음은 영생과 부활의 생명에 연합되는 관문입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이 모든 영적 상급과 복을 이미 소유한 자들입니다. 사망을 향해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담대히 외칠 수 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구속 안에서 사망의 쏘는 것, 곧 죄와 율법이 극복되었기 때문입니다(고전 15:55-58). 성도의 수고가 헛되지 않은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효와 보혜사 성령님의 내주 및 충만의 역사하심이 이 모든 육신의 연약함을 넉넉히 이기게 합니다.

 

본문은 주 안에서 죽는 자의 복을 설명하면서 “수고를 그치고 쉬기 때문”이라고 기술합니다. 여기서 쉰다는 의미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안식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무슨 수고를 마치고 안식을 취한다는 것일까요. 계 14:4에서는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총수를144,000명이란 상징적인 숫자로 표기합니다. 이들의 이마에는 어린양과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임을 시사합니다. 4절에는 이들의 차별화된 삶의 태도를 설명하면서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들이요,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구속받은 처음 익은 열매들이며, 동시에 그 입에 거짓말과 흠이 없는 자’들이라고 소개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통해 이들의 수고란 것이 첫째,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롬 12:2), 말씀에 순종하며 적극 진리를 좇는 삶(요삼 4절), 사단의 미혹과 핍박에 대처해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인내로 참고 견디는 삶을 일관되게 추구했음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한 마디로 모든 핍박과 고난과 미혹에도 굴하지 않고 온갖 손해와 희생과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시종 진리 안에서 복음의 선한 싸움을 싸운 자들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들의 죽음은 이런 모든 종류의 지상의 수고와 희생과 애통과 아픔 및 눈물을 일순간에 끝내게 합니다(계 21:4). 죽음으로 처음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립니다. 상대적으로 주 안에서 구원의 완성을 통해 주시는 천상의 기쁨과 위로와 평강과 영생의 안식이 복과 상급으로 보장됩니다. 딤후 4:7-8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주 안에서 성도의 죽음이 참 된 복이 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③ 세 번째 복은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되다”고 했습니다(계 16:15). 본문의 말씀은 12절에서 여섯째 천사가 유브라데 강에 대접을 쏟음으로 시작되는 소위 아마겟돈 전쟁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아마겟돈의 보다 정확한 히브리어 음역을 번역하면 ‘므깃도 산’이란 뜻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므깃도(아마겟돈)는 종종 격렬했던 전쟁터로 이용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격전지의 대명사로 불리곤 했습니다(왕하 9:27, 23:29=대하 35:22). 그러나 여섯째 천사가 대접을 쏟음으로 발생하게 되는 본 아마겟돈 전쟁사건은 환상인 사실로 인해 그 안에 담긴 영적진리를 발견해야지 문자적인 전쟁기사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묵시(黙示)를 현실(reality)로 오해할 때 저자의 본의는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마겟돈 전쟁환상 사건에 담긴 영적 본의는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거짓 선지자들의 사술(邪術)과 교훈을 경계하고 미혹당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계 16:13을 보면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새끼 양으로 위장한 거짓선지자(땅에서 올라온 짐승, 13:11)의 입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요한은 이를 총체적으로 귀신의 영이라고 규명합니다. 귀신의 영이 용과 짐승과 거짓선지자의 입에서 나온다는 표현은 귀신의 영의 실체가 사단적인 ‘말’ 곧 거짓교훈과 깊이 관련돼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진리와 함께 역사하시듯이 사단의 세력도 거짓 진리로 미혹함을 가리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와 유사한 사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 시대에 거짓말하는 영이 아합의 어용선지자들의 입에 들어가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거짓 예언케 해 줍니다(왕상 22:19-23).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믿고 승리감에 도취돼 출전한 아합은 도리어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거짓 영의 미혹을 받은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종말에는 많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큰 표적과 기사를 통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게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마 24:24). 사도 바울역시 악한 자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게 될 것을 경고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 영의 역사를 허락하셔서 진리에 대한 반응 여부를 확인함으로 스스로 멸망과 심판을 받게 하십니다(살후 2:9-12, 롬 1:28-32).

 

이상의 사실로 인해 아마겟돈 전쟁환상은 사단의 세력을 반영하고 있는 귀신의 영이 악의 삼두체제로부터 비롯된 거짓 가르침으로 만국을 미혹해서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기 위해 대규모적인 공세를 취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묵시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길지 않습니다(계 11:9, 20:3하). 왜냐하면 주님께서 도적같이 나타나셔서 악의 세력을 진멸하시기 때문입니다(계 16:15상, 17-19, 19:11, 20:7-10).

 

이런 사실에 근거해 성경에서 아마겟돈 전쟁이라 함은 악의 세력이 큰 권세와 능력으로 대적해 올지라도 하나님의 더 크신 능력과 권세로 마침내 패배시키시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신다는 영적 진리를 교훈해 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역사상 가장 큰 아마겟돈 전쟁은 갈보리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이미 성취된 셈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승리는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 속에 예언된 뱀의 후손(사단)의 머리가 여자의 후손(예수 그리스도)으로 인해 결정적으로 치명상을 당해 본질상 패배한 것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성취는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사단을 패배시킨 사건(계 5:5)으로서 구속사의 남은 과정 속에서 일어나게 될 제반 마귀의 세력들과의 영적 전투를 승리로 장식할 것에 대한 대전제와 보증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29, 눅 11:21-22)고 하신 말씀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줍니다.

 

그러므로 아마겟돈 전쟁은 이미 갈보리에서 발발(勃發)했고, 이제도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장차 종말론적으로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어떤 성격을 띤 아마겟돈 전쟁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 안에서 최후의 승리가 이미 보장돼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1-37). 이 넉넉한 이김은 오직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이상 여섯 번째 대접재앙과 관련된 아마겟돈 전쟁의 위기 속에서 본문의 세 번째 복이 성도들에게 삽입구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본문은 마 24:42-44과도 병행을 이룹니다. 따라서 ‘깨어서, 옷을 벌거벗지 말고, 부끄러움을 보이지 말라’는 것은 이처럼 종말의 시대에, 마귀의 궤계에 직면한 현 위기의 상황을 직시하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신갑주를 입음으로 사단의 유혹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가운데 끝까지 충성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권면의 말씀인 것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 안에서 교회의 승리 또한 철저하게 보장돼 있기 때문입니다.

 

④ 네 번째 복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의 복”(계 19:9)에 관한 약속입니다. 본문에서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란 어린양의 신부를 가리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공동체를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입니다(엡 5:31-32, 계 21:9). 그렇다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는 것이 왜 복이 되는 것일까요. 본 혼인잔치 기사는 계 17-18장에 걸쳐 기술되고 있는 음녀 바벨론의 멸망이라는 상징적 환상사건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본문에서 어린양과 성도들과의 혼인잔치 환상은 사단의 총체적인 세력을 상징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음녀 바벨론의 멸망에 바로 뒤이어 기술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어린양과 신부된 교회와의 혼인잔치 비유는 사단의 세력이 총체적으로 패배한 사실에 근거해 하늘의 진정한 평안과 안식이 도래했으며, 이로 인해 언약의 핵심사상인 임마누엘의 최종완성, 곧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일치와 연합의 사건이 마침내 실현되었음을 선언하는 의미를 가집니다(계 21:3, 22절). 결과적으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신부로 등장하는 승리하는 교회공동체는 하나님의 전 구속사의 경륜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상징된 주인공 신부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21:2, 9-10절). 하나님은 이들의 눈물을 씻겨 주실 것이며, 죄로 비롯된 사망과 애통과 아픔과 각종 질고는 사라질 것입니다.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가 만물을 새롭게 하심으로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기 때문입니다(21:4-5). 혼인잔치 비유 속에 담긴 영적 본의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한편 혼인잔치에로의 초대가 끝난 직후 본문기사는 백마 탄 자의 출현과 사단의 세력들과의 전투장면을 재차 기술합니다(19:11-21). 이는 17-18장에서 소개된 사단세력의 총체적인 멸망기사를 좀 더 미시적인 관점에서 구체화시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이로 보건대 어린양의 혼인잔치 사건도 본질상 이중 구조적으로 구성돼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이중성을 띠고서 말입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갈보리 구속사역의 성취의 결과로 이 땅 위에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돼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시사합니다(고전 3:16, 고전 12:13, 엡 5:30-32). 그러므로 지상에 교회의 출현은 그 자체로 이미 주님과의 혼인잔치가 영적인 관점에서 현재적으로 실현되었음을 의미합니다(눅 6:5, 마 12:6-8). 그러나 아직 최종 완성은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에 근거한 미래적인 성취의 시기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까지 지상의 교회는 여전히 사단의 잔존세력들과의 적대적인 투쟁의 관계가 불가피합니다. 계 19장에서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뒤이어 성도들이 백마 탄자와 한 편을 이루는 가운데 사단의 세력들과의 전투에 임하는 장면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미래의 혼인잔치 또한 안전하게 보장돼 있습니다(롬 8:37-39).

 

이러므로 어린양과의 혼인잔치는 신부된 교회공동체에게 복중의 복이요 상급 중의 상급으로 기능합니다. 지상의 교회가 전투하는 교회의 성격을 띠고 고난 중에도 기뻐하고 환란과 핍박 중에도 믿음으로 인내하며 감사할 수 있음은 종말론적 혼인잔치가 오늘도 여전히 교회 앞에 큰 확신과 소망과 바람으로 보장돼 있기 때문입니다.

 

⑤ 다섯 번째 복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보장된 복입니다(계 20:6).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 누리는 복의 내용을 알아보기 전에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먼저 살펴봅니다. 20:4에서 이들의 정체를 밝혀줍니다. 이들은 어린양의 보혈의 공로로 구속함을 받고 하늘의 보좌에 앉힌바 돼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을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행사하는 자들로 묘사됩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이들은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해 목 베임을 당한 순교자들의 영혼과,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않고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믿음의 정절을 지킨 자들로 설명합니다. 한 마디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 순교한 자들로 하늘 보좌에 앉힌바 된 자들입니다. 본질에서 이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입니다. 곧 교회공동체를 총체적으로 대변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들은 하늘에 거하는 자들로 제한됩니다. 이들이 살아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한다고 설명합니다. 불신자들은 이 무리들로부터 제외됩니다. 한편 본문은 계 5:9하-10의 말씀과 병행을 이룹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소유된 백성으로 거듭나 인침을 받은 순간부터 이미 땅에서 왕 노릇하는 자들로 존재한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계 5:9하-10, 벧전 2:9). 그런 의미에서 땅의 교회는 동시에 하늘에 존재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계시록의 관점입니다. 따라서 계 20: 4, 6절에서 왕과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는 것은 예수님의 초림사역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므로 계 1:6, 4:4, 5:10에 나타난 교회의 왕 노릇과 20: 4,6절의 왕 노릇은 사실상 동일한 상태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이 왕 노릇하는 천년의 기간은 사단이 결박당해 무저갱에 갇혀있는 기간과 동일한 기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곧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사이의 전 기간 말입니다. 이런 관점은 본문 속에 언급된 천년기간의 성격이 삽입구식으로 처리되어 문자적 천년이 아닌 상징적 표현임이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다시 말해 계 20:1-3에 언급된 용의 무저갱 감금시점부터 7-10절까지의 잠시 놓임과 이내 불못에 던져지는 기간까지의 전 기간을 가리키고 있다는 관점 말입니다. 동시에 이 기간은 표현은 다르지만 교회가 광야에서 양육과 보호를 받는 한 때, 두 때, 반 때(12:14) 및 1 260일(12:6), 두 짐승에 의해 교회가 핍박당하는 42달(13:5)의 표현과도 본질상 동일한 기간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같은 기간을 내용의 성격의 따라 달리 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 살아있는 땅의 성도들(계 5:9하-10, 엡 2:1, 4-6절)과 죽어서 이미 하늘 보좌에 앉힌바 된 자들 공히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관점은 본문의 천년기간이 문자적 천년이 아닌 상징적 표현임을 분명하게 확인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계 20:1-3에 언급된 용의 무저갱 감금시점부터 7-10절까지의 잠시 놓임과 이내 불못에 던져지는 기간까지의 전 기간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 누리는 복의 실질은 무엇일까요. 계 20:6 본문에서 살펴봅니다. 첫째로 이들은 둘째 사망과 무관합니다. 계 20:14에 의하면 불못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모든 불신자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더불어 심판을 받아 들어갈 형벌의 장소, 곧 지옥의 다른 용어입니다(마 25:31-33). 성경은 이 불못에 들어갈 자들을 사단과 두 짐승과 그의 졸개들 및 불신자들로 제한시켜 기술합니다(계 20:10, 20:20, 20:15, 마 25:41). 무저갱은 사단이 한시적으로 거처하는 형벌의 장소로서 감옥의 성격을 띠지만(계 20:1-3) 불못은 영벌의 장소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고 있는 하늘과 땅의 성도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진 자들로 심판에서 제외됩니다(요 5:24, 계 20:15).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영벌로부터 영생에로 옮겨진 사실이야말로 복 중의 복이요 상급 중의 상급이 아니겠는지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온 인류가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날에 비로소 구원의 진가와 능력을 온전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합니다. 제사장은 구약의 배경 속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중보하는 자들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국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제사장의 신분으로 존재했습니다. 동일한 원리 속에서 신약의 성도들은 복음을 방편삼아 하나님의 택자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에 중보적 사명을 감당하는 제사장의 신분으로 존재합니다. 성도의 복음증거가 단순히 책임과 의무의 범주를 넘어 영적 본성의 발로로 기능해야 함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런 이유로 복음증거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당위입니다. 셋째로 천년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합니다. 성도의 왕 노릇은 제사장 직분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된 자들로 예수님의 삼직(왕/제사장/선지자)수행과 불가피하게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직임의 내용상 제사장의 직분이 상대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된 것이라면 왕적 직분은 세상과 보다 깊이 연관돼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성격은 말씀에 적극 순종하는 것을 통해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신분과 자격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요 16:33, 벧전 2:9).

 

⑥ 여섯 번째 복은 계시록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에게 약속된 복입니다(계 22:7). 여섯 번째의 복은 본질상 첫 번째 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표현에 있어서 여섯 번째 복에서는 첫 번째 약속한 복의 내용 중 ‘읽는 자와 듣는 자들’이란 용어가 생략되었을 뿐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요. 계시록의 내용을 처음 회람용의 편지형식으로 받아 읽을 때는, 읽고 듣고 지키는 순서를 좇아 강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초림과 재림사이에 나타날 종말의 계시의 전모가 밝혀진 후인 계 22:7의 시점에서는, 읽고 듣는 것에 비해 지켜 행하는 일이 상대적으로 강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따라서 사도요한은 1장에서 22장까지의 내용을 통해 초림과 재림 사이에 어떤 사건이 발생하게 될 것인지를 소상하게 밝힌 후, 새롭게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심정으로 동일한 복의 내용을 ‘행함’에 무게를 실어서 재차 강조한 셈입니다. 당시 다양한 신앙적 위험과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던 일곱 교회들은 계시록을 회람하면서 자신들을 냉철하게 성찰하며 회개하는 가운데 더욱 강하고 담대하게 믿음의 정절과 신앙의 순결을 지키고자 굳게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결심과 각오는 복으로 약속된 보상을 받기에 필요충분하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교회 성도들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니 더욱 절실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은 구원의 완성입니다(히 11:6). 그것은 사실상 계시록에서 약속하고 있는 일체의 복의 본질이며 실체이기도 합니다. 이제 그만큼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습니다(롬 13:11).

 

⑦ 마지막 일곱 째 복은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복입니다(계 22:14). 이들에게 약속된 복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생명나무에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상 동일한 상태를 다른 관점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곧 영생을 얻게 될 것이며 하늘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런 특권을 얻을 수 있는 자들일까요.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자들입니다(계 7:14).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된 성도들입니다. 계시록에서 이들을 희고 깨끗한 세마포(두루마기) 옷을 입은 자들로 종종 묘사하는 것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향유하는 자들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본문(계 22:14)에서 두루마기는 흰 옷(7:9, 13절)과 깨끗한 세마포(19:8, 14절) 등의 용어와 동의어로 쓰입니다. 그러면 ‘두루마기를 빤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성도의 옳은 행실을 가리킵니다(19:8).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온갖 박해와 시련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정절을 굳게 지키며,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전심으로 좇았던 충성된 삶의 내용을 총칭합니다(계 14:4, 요 5:28-29, 13:10상). 무익한 종의 심정을 시종일관 견지하면서 말입니다(눅 17:17).

 

이상 요한계시록에서 약속한 일곱 가지 영적 복에 관해 살펴봤습니다. 각각의 복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표현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을지라도 본질상 구원, 영생,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기업에 참여, 왕적 통치에 동참, 심판에서 제외 등 천상적 삶의 상태와 깊이 연관돼 있는 것으로 집약됩니다. 그러나 이상의 복의 내용들은 단지 새 하늘과 새 땅이란 새로운 창조질서 속에서만 누릴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복으로만 한정돼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성도들의 경우, 비록 온전치는 않을지라도 본질상 이미 도래한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의 통치 속에서 위에서 언급한 복들을 현재적으로 소유해 누리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상).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람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6). 그런 의미에서 지상의 교회는 이미 천상의 복을 현재적으로 소유해 누리고 있을 뿐 아니라, 미래에 보다 완성된 복의 실질을 보장받은 자들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계시록이 약속하고 있는 복의 전모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전(全) 성경 계시사 속에서 진행되어져 나온 언약적 구속사의 진전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기점으로 종말론적인 목표를 향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 것인지를 구약에 소개된 다양한 상징과 묵시적 용법들을 채용하며서 기술합니다. 특별히 사도요한이 구약의 다양한 묵시적 내용들을 상당부분 인용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승리로 말미암는 교회공동체의 최후의 승리와 완성을 역사적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회복의 연장선상에서 재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요한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해 포로기 전후 선지자들에 의해 사용된 다양한 상징과 묵시적 기법을 그대로 반영시키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름 아닌 새 예루살렘 상징을 통해 묘사되고 있는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와 완성에 초점을 맞춰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초림으로 말미암는 교회의 출현은 미래지향적인 교회승리의 확실한 보증이며 전제로 기능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의 전 내용을 통해 죽임을 당한 어린양과 어린양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은 흰 옷 입은 허다한 무리들이 천상환상의 도처에서 언급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요한계시록의 핵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안에서 교회의 종말론적 승리에 성도들의 시선을 집중시킴으로 하나님의 구속사가 마침내 성취의 절정을 맞게 된다는 우주적 경륜의 완성에 모든 초점이 모아진다고 하겠습니다. 다른 많은 하부 주제들은 모두 이 중심주제에 종속돼 있을 뿐입니다. 이 ‘크신 일’(행 2:11)을 이루신 ‘하나님의 열심’(사 9:7)을 찬양하며 경배 드립니다.

 

빌 1:6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롬 8:18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33-34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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