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기 잘못을 시인하면 그것으로 다인가?
신자라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합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뜻을 알고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알았다면, 알게 된 그 사실이 내게 기쁨만 되겠습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고, 또 사람인 내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 뜻에 일치되면 대단히 기쁘지만, 하나님의 뜻이 내 뜻과 같지 않으면 ‘글쎄,……?’ 하면서 한 발짝 거리를 두기 쉽습니다. 그런 예들이 성경에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을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도 그랬습니다. 요나 선지자도 그랬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에 내 생각을 일치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생각이나 말로는 항상 그래야겠다고 하지만, 실천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때가 많은 것이 우리입니다. 물론 우리의 전범(典範)이 되는 분들도 있습니다. 나사렛의 동정녀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위험을 인식하면서도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고 완전히 자신을 헌상하였습니다. 요셉도 천사가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고 했을 때 순종했습니다.
그렇지 못한 한 예를 사울 왕에게서 봅니다. 사무엘상 24장에는 엔게디 황무지에서 숨어 있던 다윗이 사울 왕과 조우(遭遇)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이 거기에 피해 있다는 보고를 듣고 사울 왕은 3천의 군사를 몰고 잡으러 갔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잡으러 온다는 사실을 미리 알지 못했던 듯합니다. 알았다면 그일라에서 그랬듯이 멀리 도망하여 피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수하들과 함께 한 동굴 속에 숨어들었습니다.
마침 사울 왕은 뒤를 보려고 가까이 있는 동굴로 홀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 다윗이 숨어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기 볼일이 급하므로 거기에 집중할 때, 다윗은 사울의 겉옷 자락을 베어냈습니다. 물론 긴장하며 사울의 동태를 살피던 다윗의 수하들은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여호와께서 내리신 기회입니다’ 하면서 사울의 생명을 취하라고 하였습니다(24:4).
물론 속삭이듯 말하며 표정과 눈짓으로, 또는 다 잡은 기회를 놓칠까 봐 애타고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권하고 또 권했을 것입니다. 그때의 에너지는 폭발할 듯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무리의 강력한 요구를 물리쳤습니다. 사울이 볼일을 마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동굴을 떠났을 때, 두 번 다시 오기 어려운 그 기회는 사라졌습니다.
다윗도 잠시 후 사울의 뒤를 따라 동굴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앞서 가는 사울을 불러 세웠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잡기 위해 군사를 몰아왔다 해도, 그때 그 장소에서 다윗의 목소리를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깜짝 놀라며 돌아섰을 것입니다. 이때 다윗은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을 절대로 해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으며 ‘이에 대해 여호와께서 왕과 나 사이에 판단하실 것이라’ 하면서, 그 증거로 동굴 안에서 베어 낸 옷자락을 들어 보였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의 말을 듣고 그 손에 들린 자신의 옷자락을 보고서는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면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의롭고 자신은 악하다는 것을 시인하였습니다. 그다음에는 다윗이 반드시 이스라엘 왕이 될 것을 자기가 알고 확신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에게 부탁하기를 왕이 된 뒤에 자기 후손을 끊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아비의 집에서 멸하지 아니할 것을 맹세해 달라 하였습니다. 이에 다윗은 순순히 맹세를 해 주었습니다.
다윗이 맹세한 것은 사울의 부탁 때문만이 아니라, 예전에도 요나단의 부탁에 따라 거듭 맹세한 적이 있었기에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이 맹세하고 언약한 일은 사무엘상 23장에도 나오고 20장에도 나옵니다.
다윗이 사울의 자기 생명을 찾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황무지 수풀에 있었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거하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삼상 23:15-18)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으로 들어오니라. (삼상 20:42; 참조. 20:12-17)
사울이 안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자신은 악인이고 다윗은 의롭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시 동안이지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둘째는 다윗이 반드시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실 것임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이 당시는 다윗 자신이 기름 부음을 받은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확신한 때도 아니고, 그리고 이처럼 도망 다니는 것은 훗날을 도모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그저 까닭 없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나 백성들은 사울처럼 다윗이 왕이 되리라고 확신하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사울이 어떻게 알고 확신했겠습니까? 그것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그 같은 여호와의 말씀을 똑똑히 전했고, 또 여호와의 신이 다윗과 함께하시는 것을 분명히 보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울은 하나님의 뜻도 알았고 자신의 죄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다는 것’이 사울에게 무슨 힘이 되었습니까? 또한 다윗은 의롭고 자신은 악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눈물을 흘리며 죄를 회개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을지라도, 그것이 사울에게 무슨 유익이 되었습니까? 물론 당장에는 사울이 군대를 거두어 돌아갔으니까, 다윗에게는 그것으로 한 고비를 넘긴 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에게는 아무 유익도 되지 못하였습니다.
사울은 이전에도 자기 잘못을 시인하기도 했고,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장차 어떻게 하실 것에 대해서도 똑똑히 들어 알았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되 갈은 말을 두 번씩이나 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 하셨는데 사울 왕은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습니다. 이때 사울은 자기 잘못을 처음에는 백성 탓으로 돌렸다가(20-21절) 나중에는 자기 잘못이라고 시인하였습니다. 사무엘에게 자기 죄를 사해 달라 하였습니다(25절). 이때 사무엘은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23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26절에 다시 한번 그대로 반복됩니다. 그런 다음에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28절)라는 말도 하여, 하나님께서 장차 어떻게 하실 것임을 분명히 알게 했습니다.
이렇게 사울은 자기 잘못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알았다는 것, 자기 죄를 알고 시인했다는 것이 사울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자꾸 더 악화되고 악화되어서 악신의 지배를 받는 자리까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신자들은 자기의 잘못과 부족을 모릅니까? 때때로 자기 죄를 시인하고 용서도 구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참된 회개는 무엇인지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배운 후에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할 것입니다.
제88문: 사람의 진정한 회개는 무엇입니까?
답: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옛사람이 죽었습니까? 그리고 새사람으로 다시 살고 있습니까? 이 88문과 함께 89문과 90문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장차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다 모릅니까?(살전 5:1-4)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행 1:11)
주께서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31-33)
이 말씀을 믿고 확신한 자처럼 살고 계십니까? 사울은 3천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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