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연구 I.어휘의 문제 공관복음에는 ‘하나님 나라(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the Kingdom of God)’와 ‘하늘나라(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the Kingdom of Heaven)'라는 두 어휘가 함께 사용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두 어휘의 공통어인 ‘나라(βασιλεια)’를 살펴본 후에 이 두 어휘의 차이점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A.‘나라(βασιλεια)’ 이 단어는 ‘하나님 나라’에 관해 해석하는데 매우 중요한 논점이다. 그러므로 언어학적인 출발에서 이 단어를 고찰해야 한다. 신약성서에서 ‘나라’라는 단어의 우선적인 의미는 ‘왕국’이나‘백성’보다 ‘통치’의 개념이다 1).최근에 이 주제에 대하여 비평 학자들에 의하여 많은 관심이 모여졌으며, βασιλεια 의 뜻으로 ‘왕국’ 혹은 ‘백성’보다 ‘왕의 능력,권세’란 개념이 더 기본적이라는데 실제적인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일반적인 언어 사용에서 보통 왕국, 나라로 번역되는 βασιλεια 라는 말은 모든 다른 용례보다 먼저 왕의 성격, 지위 등을 지칭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왕에 관한 말이므로 우리는 먼저 그의 위엄,그의 권세를 말한다.”1) 이 추상적 의미는 아마도 우리 주께서 그의 가르침에서 사용하셨던 아람어 말쿠트(malkuth)에서도 발견된다. 최근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달만의 판단을 확증한다.“구약 성서와 유대 문헌에서 말쿠트가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는 언제나 왕적 통치를 의미하며, 그것이 왕이 다스리는 영토를 의미한 것처럼 결코 그 나라를 의미하지 않는다는데 추호의 의심도 있을 수 없다.”2) 바실레이아의 이 추상적 의미에 대한 몇개의 실례가 신약성서에서 발견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백성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곧 나타날 것으로 생각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바실레이아를 받기 위해서 먼 나라로 갔다가 돌아온 한 귀인의 비유를 말씀하셨다.여기서 바실레이아는 영토나 백성이 아니며, 그 백성에 대하여 주어진 영토에서 왕으로 통치할 권세임이 명백하다.(눅 12:19) 이와 동일한 용법이 계시록 17:12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바실레이아라는 단어의 이 정의는 복음서에서 ‘하나님 나라’의 뜻을 위한 출발점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나 바실레이아가 나오는 모든 곳에 ‘통치, 왕권, 주권’을 대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왜냐하면 때로는 추상적인 의미를 초월하여 이 단어가 사용되기 때문이다. 정상적으로 왕적 권세는 그 백성을 포함하며 어떤 영역이나 영토로 표현된다. 바실레이아의 의미의 정상적인 확장은 세속적 영역과 종교적 영역에 있어 모두 신약성서에서 발견된다.3)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주기도문을 가르치실 때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에다 연결시키는 것을 보게된다.4) 이와같은 연구에서 우리는 ‘나라’의 단어가 우선적으로는 주권을 뜻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으며, 이 주권에서 의미가 확장되어 다스리는 영토를 포함한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주권자의 의도가 ‘나라’라는 단어에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알아야 한다. B.‘하나님 나라’와 ‘하늘 나라(천국)’ 이 두 어휘의 사용을 공관복음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 어휘가 마태복음에는 4번, 마가복음에는 16번, 누가복음에는 32번이 사용되고 있는 반면에5) ‘하늘 나라’ 어휘는 마태복음에 30번이 사용될 뿐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5) 마태복음 4장 17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선포하심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마가복음 1장 15절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마태복음 10장 6절,7절에서는 예수님께서는 12제자에게 ‘천국’에 대하여 가르치고 계시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누가복음 6장 20절에는 예수님께서 12제자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계시며, 마태복음 13장에는 ‘하늘 나라’의 비밀을 비유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나, 누가복음 8장 11절과 마가복음 4장 11절에서는 마태복음과 동일한 비유를 ‘하나님 나라’로 표현하고 있다.5) 이와같이 각 복음서에서 어휘가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복음서 저자들이 두 어휘에 대한 개념과 이해가 없었기 때문인가? 이와같은 의문점을 가지고 이 두 어휘에 대한 의미의 차이점을 발견하고자 하는 많은 연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저자들에게 있어서는 두 어휘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분명함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 증거로 마태복음에 사용된 ‘하나님 나라’의 어휘가 ‘하늘 나라’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아서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9장 23절,24절을 예로 살펴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 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 라’에 들어 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 ‘천국’과 ‘하나님 나라’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 ‘천국’과 ‘하나님 나라’의 의미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왜 복음서 저자들은 편협된 어휘로 복음서를 저술하였을까? 이와같은 의문점은 복음서를 저술하게 된 동기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쉽게 이해된다. 복음서는 기록되기 이전에 Kerygma를 내용으로 한 것을 이어서 저술되었다.5) 그러므로 복음서를 읽거나 듣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하기 위한 목적이 복음서에는 있다. 때문에 복음서가 읽혀지거나 보는 사람들에게 좀 더 친숙한 표현과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복음서가 기록되기 이전에 흩어진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각기 독특한 복음의 내용을 전하고 있었다는 사실5)도 다른 어휘를 사용하게 하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마태가 ‘하나님 나라’의 어휘 보다는 ‘하늘 나라’라는 어휘를 사용한 이유는 그의 복음서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저술되었으며5), 복음서 저자들 중 가장 유대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의 표현은 히브리어의 ‘말쿧 샤마임(malkuth shamaim)’을 문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사용하기를 회피하는 고정된 유대식 언어사용과 관련이 있다5).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사용하기를 회피하는 간단한 방법 중 하나로 하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또한 마태가 ‘하늘 나라’ 어휘를 사용한 것은 마태 자신이 유대적인 사람이기에 ‘하나님 나라’ 대신에 습관적으로 ‘하늘 나라’를 사용한 것이다6)라고 말하기도 한다. 마가나 누가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의 복음서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저술된 것7)이기에 오히려 유대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적인 ‘하나님 나라’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8). 심지어 누가가 ‘그 나라’라고만 기록하였을 때도 이는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9). 그러나 유대교적 표현으로는 이와같은 용법을 찿아볼 수 없다. 유대교에서는 단독적으로 사용되는 나라는 당시의 통치권을 가진 로마제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0). 이상에서 우리는 이 두 어휘의 차이점은 의미의 차이가 아니라 당시의 성서를 기록한 사람의 출신이나, 그 복음서를 누구에게 보낸 것인가?가 어휘의 선택을 가져왔음을 보게 되었다. II.‘하나님 나라’ 사상의 역사적 변천과정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은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이다.(마4:17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선포 뒤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 곳인지에 대하여 본질이나 존재를 증명하는 설명이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11).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 사상에 매우 친숙하고 있었음을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이와같은 선포에 대하여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내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요단강 사방에서 나아오고 있었다12). 그러나 후에 예수님께서 점차적으로 비유를 통하여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특징을 설명하시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유대인들에게는 친숙한 사상이지만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와는 의미에 있어서 상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어떻게 변천하여 욌는지를 역사적인 흐름에 맞추어 살펴보기로 하자. A.구약시대의 ‘하나님 나라’ 고대 근동의 종교의 일반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신들의 신을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고 찬양하는 것이었다.13) 그러므로 전쟁은 부족간의 전쟁인 동시에 부족 신의 세력 싸움으로 그들은 이해 하였다.이스라엘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구약성서 가운데 ‘하나님 나라’라는 어휘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약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어휘가 내포하고 있는 사상의 뿌리는 구약성서에서 출발하며, 구약성서 전체의 흐름이다.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상은 구약성서의 신적 계시와 신앙의 대망 가운데 숨겨져 있다14). 때문에 구약성서 가운데서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모든 선지자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이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있기에 구약성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스리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15). 이와같은 ‘하나님 나라’의 사상의 출발점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사실에 근거할 수 있으나 좀 더 구체적인 출발점은 히 브리 종교사상에 있어서 실현 되었던 신정정치의 이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른 신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심과15)동시에 지상의 왕국을 다스리시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16) 이와같은 사상이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 여러 세기를 지나는 동안에 발전하게 되었다17).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여호와의 계약을 알리어 주었으며(출19:5), 사사 기드온은 여호와만이 유일하게 이스라엘을 지배하실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자신에게 주어지는 통치권을 거절 하였으며(삿8:23), 사무엘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와 같이 강한 왕정정치를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이 사울을 왕으로 세웠을 때, 하나님께서는 친히‘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려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고 말씀하셨다.(삼상 8:7 ; 12:12) 이와같이 구약성서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나 ‘하늘나라’라는 어휘가 구약성서 가운데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피한 것과 같이 하나님을 주어로 사용하는 문장도 피하였기 때문이다18). 둘째는 이스라엘이 신정왕국이라는 사상이 구약성서 전체에 깔려 있기에 굳이 이 어휘들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19). 대신에 자주 사용하는 어휘는 말락야웨(Malak YHWH )인데 이는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낸다. 이 통치는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심 (출 15:18, 민 23:21, 신 33:5, 사 43:15 )은 물론이요, 온 세상의 통치자이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 왕하 19:15, 사 6:5, 렘 46:18, 시 29:10 ; 99:1- 4 ) 이와같은 사상은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 가운데서 많은 갈등을 가져오면서 변천하게 된다. 이스라엘에 아직 왕이 있지 아니하고 청동기 시대에 있을 때 인접 국가인 불레셋은 강한 왕권과 함께 철기 문명을 가지고 있어 강한 군사력을 앞장세워 이스라엘을 자주 침략하자, 이스라엘은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당시의 선지자인 사무엘에게 강한 중앙 집권 체제인 왕정을 요구하게 되었고 사무엘은 자연히 군사적 승리로 인하여 인기가 많은 사울을 왕으로 등극 시켰다. 그러나 사울의 왕권은 과도기적인 왕권 이었으며, 다음으로 이어지는 다윗 왕조에 가서야 비로서 이스라엘의 군주체제가 확립된다. 다윗은 자신의 왕조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통치 사상을 국가의 부흥과 연결을 지었다.20) 이와같은 변천된 하나님 나라의 사상은 이스라엘이 찬란한 영광을 누릴 때에는 이와같은 사상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지나 바벨론이나 그밖의 강대국에게 이스라엘이 속국이 되었을 때 그들의 왕이신 하나님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와 함께 하나님의 통치가 강대국의 압박 밑에서도 유효한 것인가? 라는 물음이 나오게 되었다. 이와같은 갈등 가운데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래의 ‘하나님 나라’ 소망이 싹텄다. 이스라엘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미래에는 왕권을 가지고 오셔서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강대국을 물리치시고 자유를 주신다는 소망을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었다. ( 사 24:23 ; 33:22 ; 52:7 , 습 3:15, 슥14:9 ) 미래에 오는 그 나라는 이 땅위의 역사 가운데 한 지역을 배경으로 하여 ‘다윗의 후손에 의하여 성취될 것이다’라고 예언자들은 선포하였다20). 그러나 다윗의 후손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목도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 가운데 다시금 그 나라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망이 점차로 사라지게 되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묵시문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B.묵시문학의 ‘하나님 나라’ 구약시대에는 ‘하나님 나라’나 ‘하늘 나라’의 어휘가 없으나 신약시대에는 이 어휘들이 아무런 거부감이 없이 친밀하게 사용되고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은 이 어휘들이 신약시대와 구약시대의 중간기인 묵시문학 시기에 정립된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21). 포로기 이후에는 예언활동이 점차로 사라진다. 그 뒤를 이어서 묵시문학이 새롭게 등장한다. 이 묵시문학은 구약시대의 예언과 상이한 점이 많으나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왕이시다라는 사상은 지속적으로 계승하고 있다22). 구약시대에서 이스라엘이 정치적, 종교적 상황이 어려움 가운데 있었지만 언젠가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 강한 힘을 소유한 절대적인 왕이 등장하여 현실에 처해 있는 정치적, 종교적 어려움들을 해결하여 하나님을 마음놓고 섬길 수 있는 나라를 이룩한다고 하는 것이 유대인의 바람이며 ,또한 그와같은 믿음을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살펴 보았다. 그러나 현실의 역사 가운데 이와같은 소망이 사라지자 예언자들의 외침은 호소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 사상도 바뀌게 되었다. 즉 ‘하나님 나라’가 자신들의 민족 가운데 왕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자를 통하여 임한다고 하는 생각에서 현실의 역사를 포기한 역사 밖에서 강권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게 되었던 것이다23). 그러므로 다윗의 왕국이 지상의 팔레스틴 지역에서 회복 되리라는 종래의 사상을 바꾸어 장차 앞으로 올 ‘하나님 나라’는 초자연적인 특성을 가지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행하시는 일이기에 현실의 역사적 발전이 아니라 갑자기 이 현실 가운데로 임하는 것이기에 현실 세계는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같은 사상의 변화는 이전까지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강대국인 바벨론이나 이집트를 이 세대 속에서 이스라엘의 적이라고 간주하여 그들과 현실적인 투쟁을 행하던 것을 중단하게 하였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강대국이 적이 아니라 강대국들을 주관하는 사단이 적이라고 판단하였고 이를 물리치는 것은 현실적인 투쟁이 아니라 영적인 투쟁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24). 이와같은 묵시문학에서의 ‘하나님 나라’ 사상의 변천은 현실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하였다. 즉 현실은 악의 세력에 의하여 지배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묵시문학가들은 현실에 희망을 가질 수가 없으며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건설 하기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25). 이와같은 사상이 묵시문학 전체에 일관되이 흐르며 기록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약시대의 사상을 전통적으로 그대로 담아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과 다윗의 집이 다시금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작품도 있다26).또한 이 세상에 마지막 세대의 메시야가 통치한 후에 초역사적인 메시야가 나타나 새로운 천상의 세계가 된다고 하는 과도기적인 사상을 지닌 작품도 있다27). 그러나 이와같은 형태의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고 있으나 묵시문학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어떤 인간의 노력도 결코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28). 하나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계획 아래에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묵시문학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묵시문학은 이스라엘 민족이 암울한 역사의 현실 속에 있을 때 미래에 대한 밝은 소망을 주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와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C.예수님 시대의 ‘하나님 나라’. 예수님이 출생할 때의 팔레스틴 지역은 매우 혼란을 겪고 있었던 곳이였다. 당시의 강대국 로마는 급기야 팔레스틴까지 그 영역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고수하고 있던 팔레스틴 지역은 쉽게 헬라의 문화에 동화되지 아니하였다. 물론 외형적인 건축물 등은 헬라화 되어 갔지만 내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의식과 가정제도에서는 자신들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여기에 로마의 융화정책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28)헬라문화가 사유재산 제도를 기본으로 하는 개인주의적인 문화인 반면에 팔레스틴 지역의 문화는 공납제 생활양식 (a tributary model of production)의 문화로 촌락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같이 상이한 문화의 양식 가운데 이 지역을 통치하는 사람은 많은 갈등을 하여야 하였다. 무조건적으로 헬라문화를 이식하고자 하였던 통치자와 전통을 지키려는 유대인들 사이의 충돌이 빈번히 발생하는 사례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기원전 2 세기 초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무리한 개혁을 단행하다가 마카베오 형제와 그의 후계자들이 단합하여 민란을 일으킨 것이다. 또한 때로는 팔레스틴 지역의 문화를 잘 이해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의 유대인들로 부터 합법성을 인정 받는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헤로데이다. 그는 무력과 공포로 통치를 하여 부를 축적하는 한편, 큰 성전을 건축하였기에 유대인들로 부터 어느 정도 합법성을 인정받았다. 이와같은 혼란의 시기에 유대인 안에서도 이 혼란에 대처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그 첫째가 엣센파 이다.이들의 지대한 관심사는 성전 정화에 있었다. 이들은 부당한 사제직에 의하여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단정하고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민족적 생활과 성전 생활을 떠나 공동체 생활을 하며, 기도와 성서 연구에 치중하였다. 이와같은 생활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준비라고 이들은 생각 하였다. 다음은 사두개파 사람들로 이들은 로마와의 타협을 모색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로마에서 파견하는 관리들의 행정적인 조처들을 인정하고 지지하였다. 이들이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는 현실 세상으로 오는 것이며,현실의 이스라엘을 통한 도래였다. 다음은 바리새파 사람들로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백성들을 가르치면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고 있었다29). 이와같이 이 시대의 유대인들은 구약적 배경의 ‘하나님 나라’의 사상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30) . 묵시문학적 입장에서는 초자연적인 인물을 통하여 인간역사 가운데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것이었다31). 즉, 현실의 역사를 종식 시키고 전혀 다른 차원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유대인에게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야에 매우 큰 관심과 희망을 표시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현실의 역사를 종식 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선하여 현실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일으키기를 유대인들은 원하고 있었다32). 이 시대에는 이와같은 두 개의 사상이 양립되어 있었으며 사상적인 정리가 되지 않은 혼란의 시기였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이 두 가지를 모두 기대하는 모습을 보게된다. 전자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요 7:26-27에 ,후자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마 2:5 ; 21:9 ; 22:4 ,요 7:40 - 42 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의 환호성으로 “다가오는 우리 조상,다윗의 나라에 복이 있도다.” (막 11: 10) 고 외친 사실과 유대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기에 조롱의 어구로 십자가 위의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한 사실은 당시의 유대인들은 후자의 모습을 더 많이 기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상의 변천을 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보았다. 이를 종합하면 ‘하나님 나라’의 사상은 이스라엘이 왕정이 시작되기 이전인 신정정치 시대까지 거슬려 올라간다. 이때는 ‘하나님 나라’라는 사상 보다는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이 더욱 강조되었던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 통치는 어느 한 국가만을 그 영역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을 영역으로 하는 것에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통치가 왕정으로 넘어오면서 이 사상이 이스라엘 국가의 이념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렇게 바뀐 사상은 계속하여 전통적인 사상으로 후세에 전달되었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강성함을 기대하게 하였다. 그러나 다윗 왕조의 몰락은 이와같은 ‘하나님 나라’사상에 일대의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것은 세상의 인간의 힘에 의하여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새롭게 인식된 것이다. 묵시문학에서는 이와같은 상황 속에서 다른 방법의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국가적인 도래가 아니라, 개인적인 의로 말미암아 참여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도 국가적인 구원이 아니라 개인의 의에 의한 것임을 밝히 말하고 있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통치가 우주적임을 밝히는 것이다. 묵시문학에서는 이방인의 구원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33) 이와같은 사상의 변화는 이스라엘의 민족의 개념을 바꾸었다. 예수님 시대에는 정치적, 종교적,경제적인 혼란기와 함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상도 혼란을 거듭하고 있던 시기였다. 전통적인 국가의 이념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가 하면 묵시 문학에서 새롭게 등장한 개인적인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무리들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III.‘하나님 나라’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견해들을 종합하면 종말론적인 견해와 비종말론적인 견해로 나누어진다. 오리겐( Origen )과 어거스틴( Agustine )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비종말론적인 해석을 내린 학자들이다. 특히 어거스틴은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 하여 교회를 ‘신의 도성( City of God )’으로 여겼으며, 천년왕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세상에 들어왔으며 진행하고 있는 과정이므로 더 이상의 아무런 미래적 성취를 기대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34). 이와같은 어거스틴의 주장은 개혁주의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 되었다. 이들에게 있어서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구속받은 성도들의 각자의 마음 속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역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현재적인 실제였으며 전적으로 종교적인 의미에 해당되는 것이다35). 근대 이전까지는 이와같은 견해가 지지를 받았으나 근대에 오면서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고 다시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견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근대의 비종말론적인 견해는 알버트 리츨 ( Albert Ritschle )로 부터 시작하고 있다. 리츨은 ‘하나님 나라’는 구약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창안한 사상으로 복음의 사랑의 법을 실행 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는 윤리-종교적 공동체 ( Ethical- Religious )로 이해하고 있다. 이 공동체는 이미 세상 가운데 있으며 사람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내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강한 힘에 의한 외부적인 도래가 아니며 이 세대의 종말도 아니며 이미 이 세상 가운데 온 것을 사람들의 사랑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다36)라고 리츨은 말하고 있다. 이와같은 주장은 하르낙 ( Harnack )에게 영향을 주었다. 하르낙은 그의 저서 ‘기독교는 무엇인가 ? ( What is christianity ) ' 에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며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되며 영혼의 무한한 가치를 인식 시키어 사랑의 윤리적 교훈을 인식하는 순수한 예언 신앙으로 이해 하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인류의 모든 사람이 함께 알 수 있게 임하는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각 개인이 우선적으로 체험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해 하였다37). 불트만 ( Bultmann )은 성서 가운데서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에 의하여 창조된 신화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 하면서 그 중에 ‘하나님 나라’도 포함 된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현실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라고 이해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나라’는 외부로 부터 사람들의 역사 안으로 들어 오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 의 요청이라고 이해 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요청이 올 때 결단함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38). 이에 반하여 종말론적인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나타났다. 기독교 역사의 처음 2 세기 동안 교부들 사이에서는 ‘하나님 나라’는 전적으로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G.E.Ladd 는 “전형적인 종말론적 문구가 디다케 (διδακη)39) 에서 발견 되는데 그곳에 -주여, 당신의 교회를 기억하사 사면으로 부터 당신을 위하여 예비하신 당신의 나라로 거룩함 가운데 불러 모으소서 -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불러 모으소서의 기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아후에 경험될 미래적 축복임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한다40). 또한 요하네스 바이스 (Johannes Weiss)는 리츨이 주장하는 ‘하나님 나라’는 윤리-종교적 공동체’라는 사상을 반박 하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창안한 사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유대의 묵시문학적 배경을 갖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없다고 전제 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종말을 뜻하기에 이는 전적으로 미래적인 사건이요, 종말론적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어서 아직까지 이 세상에 종말이 오지 않았으므로 아직 하나님의 나라는 현실 세계에 도래하지 않았다고 말한다41). 그는 1892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책자를 통하여 “....그 나라에 대한 예수의 견해는 유대인들의 계시사상와 같으며, 유대인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이 말한 ‘하나님 나라’ 둘 모두는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다42)”고 주장하였다. 한편 종말론적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알버트 슈바이처 ( Albert Schweitzer )는 바이스가 연구한 예수님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예수의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 하고자 하였다. 그는 예수의 행동을 살펴보면 예수에게 항상 종말론적인 미래를 바라보면서 살아온 행동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43).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거대한 종말론적 파국의 발단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와같은 양쪽의 주장이 팽팽한 가운데 이를 종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도드 ( C.H.Dodd )는 그의 저서 「왕국의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세상에 도래하였다는 전제하에 예수님의 비유와 말씀을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인정 여부와는 상관없이 현재적 사실로 선포되어 졌음을 보게 되며, 그 종말은 미래에서 현실로, 대망에서 경험의 영역으로 옮겨 왔다고 그는 주장한다44). 그는 또한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인격을 통하여 현실의 세계로 들어옴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앞으로의 세대 속으로도 예수의 인격을 통하여 들어갈 것이라는 실현된 종말론 ( Realized Eschatology )를 주장한다45). 예레미아스 ( J.Jeremias )는 예수의 사역 안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실현 되었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그 실현은 완성된 실현이 아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이 소유할 보좌와 권세의 ‘하나님 나라’가 있다. 그러므로 현실 세계 안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는 실현 과정에 있는 나라이다46). ( Eschatology in process of Realigation ) . 이것이 그의 주장이다. 브루스 M 메츠거 ( Bruce M. Metzer )는 “....본질상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이 통치는 주권적인 하나님과 각 개인의 인격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이냐 ? 미래적이냐 ? 하는 질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이유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두 가지 모두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인정하도록 촉구하시는 동시에 또한 사람의 강팍한 마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주권이 보편적이고도 완전한 수용이 더 이상 방해받지 않게 될 새 시대를 소망하도록 인도하신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고 주장한다47). 콘첼만 ( Hans Conzelmann )은 ‘하나님 나라’가 현실세계에 임한 것으로 완성이 되고 끝났다고 한다면 이미 회개의 기회도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닌가 ? 하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임박 하였으나 표징들은 이미 현실세계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48). 글로그는 「신약성경에서의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서 “....βασιλεια는 항상 추상적인 의미의 통치를 포함하고 있으며, 결코 왕국이나 백성들로 구체화 되지 않는다....”49)고 주장하면서 미래의 통치가 현실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 보면 비종말론적인 해석과 종말론적인 해석, 그리고 이 두 해석을 종합하는 해석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지금까지의 개인적인 구원과 미래가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을 부인하는 견해도 생겨났다. 이 견해는 현재의 사회질서를 이상적인 사회 질서로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며 가난, 질병, 노사관계, 사회적 불평등, 인종관계 등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이다50).그러나 이 견해는 현실의 입장과 문제만을 바라보았기에 예수님께서 의도하시는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있다. IV.공관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공관복음 안에서 ‘나라(βασιλεια)’의 의미가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가리키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탐구한다는 것은 구약성서 전체가 하나님의 통치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매우 방대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직접적으로 ‘하나님 나라’ 나 ‘하늘 나라( 천국 )’로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부분들을 뽑아서 그 의미와 본질, 특히 현실적인 ‘하나님 나라’와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공관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어휘는 거의 대부분이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사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주시 하여야 한다. 마태복음에서는 세례요한의 선포 (3:2),제자들의 복음선포(10:7) 그리고 제자들의 자리다툼의 사건을 설명함(18:1)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사용되고 있으며 마가복음은 아리마대 요셉의 인물됨을 묘사하는 장면 (15:43)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사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와같은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제자들의 해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심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직접 사용하신 이 어휘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비유로 가르치실 때, 또는 교훈과 선포 하실 때, 이적과 함께 복음을 전하심을 나타낼 때로 구분되어진다. A.‘하나님 나라’와 비유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는 숨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초월적인 것이다. 왜냐하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숨어있는 ‘하나님 나라’는 묵시문학에서 말하는 오는 세대안에 숨어있기에 현실세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실 속에서 통치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가 숨어있는 것이다51). 예수님께서 비유라는 가르침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성격, 그리고 도래의 메세지를 선포한 것은 매우 적절한 방법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창안하신 교수법은 아니라 히브리적 전승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히브리어의 마살(masal)이 이 단어에 해당한다. 로버트 슈타인(Robert H. Stain )에 의하면 이 단어는 구약에서 일반적으로 잠언, 풍자 또는 야유, 수수께끼, 알레고리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고 한다.52) 이와같이 전통을 가지고 있는 교수법을 사용함으로 듣는 사람들이 친근감을 가지고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또한 이 교수법은 당시의 랍비들도 교의의 해명이나 성구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었던 교수법이었다. 때문에 대중들에게 더욱 친숙하게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가르칠 수 있었다. 비유의 교수법은 가장 평범하고 친밀한 배경을 통하여 하나의 진리에 대한 촉구를 하는 것이기에 바로 결단과 대답을 할 수 있게 하였다53). 그러나 단지 이와같은 이유만에서 예수님의 비유가 사용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비유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메세지를 예증하고 나타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과 인격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예수님의 메세지를 반대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메세지를 은폐시키려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단순히 은폐만이 아니라 죄 용서의 초대로 부터 제외 되었기에 그 자체가 하나의 심판임을 뜻한다. 또한 예수님의 비유는 논쟁 가운데서 행하여 진 것으로 이는 상대방에게 도전을 하는 행위인 것이다.54) 이와같은 예수님의 비유는 랍비들이 사용하였던 비유와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랍비들의 비유가 독립된 하나의 교훈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비유는 그것과 함께 그 자체가 메세지라는 것이다55).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유를 문자 뒤에 숨겨진 의미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깊게 탐구하는 이른바 알레고리 ( Allegory )적 해석은 오히려 예수님의 비유의 참된 의미를 알게 하는데 방해가 되었다56). 그러면 ‘하나님 나라’ 어휘가 사용되고 있는 비유들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1. 씨 뿌리는 비유 ( 마 13:11, 막 4:11, 눅 8:10 ) 이 비유는 공관복음 모두에 기록되어 있는 비유이다. 또한 이 비유가 가지는 중요성은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하면 능히 다른 비유도 깨달을 수 없는 가장 기초적인 비유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가 기록된 뒤에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 ”묻는 제자들에게 비유를 통하여 은밀히 숨어있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는 사람만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공관복음 모두는 기록하고 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무엇인가 ? 대부분의 경우 이 비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4가지의 밭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예레미아스는 “이 비유의 핵심은 헛수고로 보이는 씨 뿌리는 자의 행위가 마지막에 ( 종말론적으로 )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는 하나님의 충만을 암시하는 것으로 바꾸어져야 한다57).”고 말하면서 이와같은 하나님의 충만은 사람들의 이해를 넘어서서 다가오는 것으로 보고있다. 윌리암 레인 ( William Lain )도 예레미아스의 견해에 찬동을 표하면서 “이 비유의 핵심은 4가지의 토양이 아니라 농부의 파종 행위에 있다58)."고 말한다. 이는 땅에 씨를 뿌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의 현장에 돌입하여 왔다는 것을 알려주며 또한 하나님의 충만으로 결실할 때가 있음을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힘에 의하여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 하시어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중심적 관심사는 하나님께서 행동 하신다는 것에 있다. 이 비유의 시작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쌔....”( 마 13:3-4 )이다. 씨를 뿌리는 자의 행위가 그 어떤 것에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자신의 행동을 행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엄청난 큰 재난 후에 강압적으로 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기에 이와같이 전하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도래를 용납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이 바로 씨를 뿌리는 농부의 행위인 것이다59). 이 비유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시행 된다는 것이다. 2.겨자씨 비유( 마 13:31, 막 4:30, 눅 13:18 )와 누룩의 비유( 마 13:33, 눅 13:20 ) 이 두 비유는 우리에게 같은 근본 진리를 전해주고 있다. “천국은 마치 ... 겨자씨 한 알 같으니 ....” “천국은 마치 ... 누룩과 같으니라.” 스테인 ( Stein )은 이 비유들에 대하여 “서구적 개념으로 성장의 비유를 보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헤겔의 철학적 사고로 보면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진화론적 발달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질 때 까지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확산 되어야 하는 것이 서구의 사상으로는 타당한 것 같으나 이 세계가 경험한 여러가지 전쟁들과 불일치, 부조화 등은 ‘하나님 나라’의 진화론적 발달과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비유는 오히려 동양적 사고에서 이해 하여야 한다60)."고 말한다. 이 비유의 촛점은 처음과 나중의 대비이다. 미비한 출발에 비하여 결과는 엄청나다.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큰 영광후의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는 차이가 심하다. 미비하게 도래하여 세리와 창기, 가난한 자, 눈 먼 자에게 있는 ‘하나님 나라’를 유대인들은 볼 수 없었다. 3.밀과 가라지 비유.( 마 13:24 ) 이 비유는 불현듯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잘 설명하고 있다. “....천국은 ...뿌린 사람과 같으니 ....” 한때 이 비유는 촛점을 벗어나 추수하는 밭이 세상인가 ? 아니면 교회인가 ? 하는 해석으로 많은 논쟁이 있었으나 대부분은 세상이라고 결론을 내린다61). 이 비유는 두 가지의 씨앗과 성장이 하나의 밭에 있는 것과 후에는 이것이 분리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분리를 몹시 갈망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로마의 멸망은 열심당원에게는 분리로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천국 선포는 이와같은 분리가 없이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 하는 것이기에 유대인들은 예수를 비난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심판이 이미 이 세상 가운데 임하였다. 그 심판은 마지막 날에 확연한 분리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 분리는 추수꾼들의 할 일이다.”하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도래 하였으나 인간의 세계는 아직 와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 분리는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며 현재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는 영광 가운데 밝히 드러날 것이다62). 4.그물비유. ( 마 13:47 ) 이 비유의 촛점은 그물 안에 있는 물고기의 종류와 후에 가려내는 행위에 촛점을 두어야 한다. “또 천국은 ...그물과 같으니 ....” 옛날의 주석가들은 이 그물을 교회로 여기고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선인과 악인을 함께 있게 하시지만 종말에 가서 가려내시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당시에 교회라는 것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에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비유에서 이와같은 의미를 가지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적합하지가 않다. 이 비유는 앞서 살펴 본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 비슷하나 한 가지의 요소를 더 가지고 있다. 그것은 종말론적 심판이 있기까지는 이 사회안에 악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63). 이미 그물이 드리워 졌으나 물고기들이 그물안에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 나라’도 예기치 못하게 임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5.감추인 보화와 귀한 진주의 비유.( 마 13:44, 45 ) 이 두 비유는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비유이다. 이 비유들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그 어떤 것 보다 먼저 소유햐야 하는 귀중함을 알려주고 있다. “천국은 ...보화와 같으니 ....” “천국은 ... 장사와 같으니 ....” 이 비유에 대하여 예레미아스는 “기뻐서 행하는 헌신에 촛점이 있다64).” 고 말한다. 그들이 모든 것을 팔아 밭과 진주를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기뻤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한다. 한편, 미헬리스는 발견에 중요점을 두고 잇다. 예상치 못하던 때에 귀한 것이 제공 되었기에 “모든 것을 팔아”를 강조하고 있다고 말한다65). 도드 ( C.H.Dodd )는 이 비유를 해석하기를 “예수는 자신의 사역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보았다. 이 근본적인 진리를 마음에 새긴다면, 천국은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이며, 또한 지나가는 소리처럼 들리는 ‘나를 따르라’는 소리에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나 진주 장사같이 귀를 기울인다면 당신은 즉각적으로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66)."고 말한다. 이 비유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나 미래성이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다. 오히려 ‘천국’을 소유하는 사람들이 행한 행동의 결과를 말하고 있는 비유이다. 6.스스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 ( 막 4:26 ) 이 비유는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이 비유의 강조점을 찿는 것은 그리 쉽지않다. ”....하나님의 나라는 ...뿌림과 같으니 ....“ 이 비유에 대한 해석으로 C.H.Dodd는 3가지로 나누어 말한다. 첫째는 ‘하나님 나라’는 씨와 같이 내적에서부터 시작되는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격 전체가 발전으로 변형할 때 까지 지속 되는 것아요, 둘째는 ‘하나님 나라’는 전체의 성장 과정으로 하나님이 공급해 주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목적을 점차로 이루는 것이며, 마지막은 ‘하나님 나라’는 수확과 같이 종말론적인 사건이 있으며 절대적인 하나님의 개입이 필수요건이라고 그는 주장한다67). 그러나 이와같은 해석은 그릇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 비유의 강조점은 뿌리는 행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도래 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행위로 세상에 도래한 것과 같이 마찬가지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도 사람들의 선택 여부에 관계없이 도래할 것이다. 7.자비롭지 못한 신하의 비유. ( 마 18:23 ) 이 비유는 다른 비유들 보다 쉽게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찿을 수 있게 한다. “....천국은...임금과 같으니 ....” 이 비유를 리네만 ( Eta Linnemann )은 정의의 명령 안에 자비가 포함되어 있는 자비의 법령으로 해석하고 있다68). 그에게는 이제 자비가 하나의 법령이 된 이상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는 없게 되었다. 법령에서 벗어나는 것은 용서를 받을 수 없다. 자비의 법령을 어긴 사람은 책임을 회피할 수도 없다.그 사람의 태만을 지적 받을 수밖에 없다. 이 비유에 나타난 신하는 누구에게나 지탄을 받는다. 이 비유에서의 핵심은 하나님께 자비와 은혜를 받아 용서를 받은 사람은 이웃을 용서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8.포도원 농부의 비유 ( 마 20:1 ) 왜 포도원 주인은 하루에 몇 차례씩 사람을 구하러 갔는가?에 촛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포도원에 시급한 일이 발생하였다고 이야기를 하나 이 비유의 핵심은 끝 부분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천국은 마치 ...집 주인과 같으니 ....” 스테인에게 있어서 이 비유는 예수님 당시의 상황과 분리 시켜서 해석하는 것은 타당치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스테인은 주인의 처사에 대하여 불평을 하고 있는 처음 포도원에 온 농부들과 주인과의 관계가 비유의 촛점으로 여기며, 여기서 불평하는 농부들을 유대인으로 보아 가난한 자들에게 그리고 버림받은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희생 당하시는 예수님을 반대하고 있는 모습을 비유로 말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68). 또 예레미아스는 예수님의 이 비유는 자신들의 지식이나 권위를 앞세워 사랑이 없으며 무자비하게 이웃을 비난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그들의 상태를 지적해 주시려는 예수님의 의도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고 있다.69) 끝 부분의 선언인 “나중된 자가 처음되고 처음된 자가 나중된다.”는 바로 예수님 시대에 살고 있었던 자들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가 버림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도래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9.혼인잔치의 비유.( 마 22:2, 눅 14:15 )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동시에 기록된 이 비유는 서로 다른 상이점을 또한 내포하고 있다. “천국은 마치 ...어떤 임금과 같으니 ....” “....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 이 상이점에 대하여 C.H.Dodd는 복음서 저자들이 서로다른 전승을 추구하기에 같은 이야기 가운데서도 다른점이 나타나며 다소의 사상이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비유의 공통적인 것은 초대받은 손님들이 잔치에서 제외되고 그 대신 하층민들이 어떻게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지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70).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앞으로 도래할 좋은 시대의 행복에 대한 전통적인 상징으로 여기게 하였다. 마태와 누가가 서로 다른 전승을 따르고 있다는 증거는 첫째로 잔치를 배설한 사람의 신분이 서로 다르며, 둘째로 그 잔치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가? 에서 차이를 보이며 마지막으로 사람을 불러 모으기 위하여 사람들을 내어 보내는데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간 곳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가 유대인이 대상이었기에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택하신 민족들을 불러 모으시는 잔치 자리라고 여기는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기록하였고, 누가는 전적으로 이방인을 위하여 성서를 기록 하였기에 잔치 자리에 참여할 사람을 불러 모으기 위해 멀리 길과 산울가까지 사람을 보냈다고 하는 전승을 따르고 있다. 10.열 처녀의 비유. ( 마 25:1 ) 이 비유의 촛점은 미련한 다섯 처녀가 과연 구원을 받았을까 ? 하는 것이 아니다. “....천국은 마치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 이 비유에 대하여 Dodd는 “마태는 이야기의 교훈으로써 친근한 격언을 후반부에 첨가하고 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태에 있어서 이 비유는 인자의 장차 나타나심에 대하여 준비를 하도록 경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인 것이다71)." 이 비유에서는 준비하지 못한 미련함과 준비하는 지혜로움을 대조 시키면서 이것이 결국 혼인잔치에 참여함과 참여치 못함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비유에서의 준비는 예수님의 사역의 실제 과정에서 성장을 위한 준비를 지적한다. ‘하나님 나라’는 미련함과 지혜로움이 밝히 드러나는 순간이 있음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이 비유는 그렇기에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고 있다. 11.달란트의 비유. ( 마 25:14, 눅 19:11 ) 이 비유의 장면 가운데 반전이 되는 부분이 나타난다. 자신의 사려깊음과 올바른 판단을 대견하게 생각하던 종의 자신만만함이 주인으로 부터 아주 심한 책망과 함께 벌을 받아야만 하는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이 비유는 사람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과의 차이가 있음을 지적하는 동시에, 평상시에 자신에 대하여 자만심을 가진 자들이 결국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소유를 맡긴 주인이 돌아와서 반드시 회계할 날이 있다. 주인이 돌아오는 것은 소유를 맡은 종들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주인의 소유가 현실 가운데 맡겨진 것을 함께 알려주고 있는 비유이기도 하다. 12.무화과 나무의 비유.( 눅 21:31 ) 마지막 날에 어떠한 일들이 이 세상 가운데 일어날 것인가 를 말씀하신 후에 이 비유를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 나라’가 결코 전혀 인식하지 못하게 갑자기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대 속의 일과 연관되어 징조가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혹자는 무화과 나무가 이스라엘의 국화(國花)라 하여 이스라엘의 국가적 역사와 이 비유를 연관하여 종말을 예견하나, 이는 비유의 특징인 가장 친밀하고 일상적인 것을 가지고 하나의 진리를 밝히고 있다는 것을 망각 하였기에 이와같은 오류에 빠진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 비유를 통해서 인간의 역사의 진행은 결코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는 것을 보여 주면서 종말론적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또한 가르쳐 주고 있다. 13.양과 염소의 비유.( 마 25:32) 이 말씀은 마태복음 25장의 천국 비유 가운데 마지막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 곧 미래성과 연결되는 것을 보여주시기를 원하는 것이다. 양과 염소는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선한 짐승과 악한 짐승의 대표적 동물이었다. 이 비유에서 순전하다고 생각한 양이 누구인가?를 예수님께서는 밝히 보여 주고 있다. 양은 당시의 유대인들의 생각과 같이 하나님으로 부터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모세 이후로 당시까지 전해오는 전통과 규례를 잘 지키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하게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양으로 택함을 입는다는 것이다. 이와함께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메시야는 유대인들이 기대한 것과 같이 영광과 권세 가운데 임한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전혀 기대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 세상에 임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같은 비유 속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현실과 미래가 관련이 있음과 동시에 이미 이 땅위에 도래 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다시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포함하고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의 어휘가 사용되고 있는 비유를 살펴 보았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마태복음 13장은 하나님 나라 비유로 이루어져 있는데, 항상 ‘하나님 나라’를 사람이나 물건에 비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에서는 행위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비유를 전개한다는 특이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이유는 마태는 예수님의 초림이 이미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여겼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이와같이 보게 된 이유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야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가지고 오시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가 도래함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가나 누가는 예수님의 선포 행위로 ‘하나님 나라’가 도래 하였다고 보고 있다. 예수님의 선포 행위는 곧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통치로의 초대이기에 초대에 응하든지 응하지 않던지는 불문에 붙이고 초대된 상태를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보기에 행위에 관심을 두고 비유를 기록하고 있다. 비유를 통해서 본 공관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그 시대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나라’가 현실 속에 이미 들어와 있으며, 또한 종말론적 사건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현실 속에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인간이 추구하는 유토피아 ( Utopia )적인 확장으로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의 세력과 함께 있으며, 때로는 악의 세력이 득세하는 현상이 현실 세계에 나타나기 까지한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현실 세계에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며 종말론적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지 않게 되는 것이 쉽기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특성 그리고 현재성과 미래성 모두를 말씀하셨다. B.‘하나님 나라’와 교훈.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당시에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던 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는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에로의 초청이었으며 선포는 종말론적인 메세지이지 묵시문학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72).예수님의 모든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다. 여기서는 공관복음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어휘가 직접 사용되고 있는 교훈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현실성,미래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예수의선포 ( 마 4:1ㅇ7, 막 1:15, 눅 4:43 ), 세례요한의 선포(마 3:2 ),파송된 자들의 선포 ( 마 10:7 )와 ‘하나님 나라’. 예수님의 교훈을 요약하면 바로 예수님의 선포라고 말할 수 있겠다. 예수님의 선포나 세례요한의 선포가 그 내용에서는 일치하는 것 같이 보이나 실제적으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것 만이 아니라 이미 출현하고 있다고 친히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구절에서 나타난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으로 임할 것을 의미하는 한편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데, 회개는 객관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주관적이며 개인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경험하는 길임을 알려 주고 있다. 2.산상수훈과 ‘하나님 나라’.( 마 5:-7: ) 이 부분에서 ‘하나님 나라’ 어휘가 집중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 ( 마 5:3, 눅 6:20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 마 5:10 ), 지극히 작은 계명이라도 행하며 가르치는 자 ( 마5:19 ), 바리새인의 의 보다 더 의로운 자 ( 마5:20 ),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 마 7:21 )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며 큰 자라고 일컫음을 받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여러가지로 차이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 부분의 공통점은 ‘하나님 나라’는 현실 세계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오는 것을 대망하며 준비함으로 성취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와같은 교훈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특성이 무엇인가를 밝히 보여주고 있다. 3.어린 아이와 ‘하나님 나라’. ( 마 19:14, 막 10:14, 눅 18:16 ) 이 교훈은 뒤에 이어서 나오는 교훈인 부자와 ‘하나님 나라’ ( 마 19:23, 막 10:23, 눅 18:18 )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공관복음 모두가 이 두 교훈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서로 다른 전승을 따르며, 서로의 복음서를 읽는 대상이 다르며, 서로의 상황이 다른 공관복음이 왜 이 부분에서는 일치를 이루고 있을까?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부자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에서 예수님은 부자는 재물이 많기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물질이 많으면 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가? 물질이 많은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조건이 된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이와같은 논리라면 이 현실의 세계는 발전과 풍요로움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게 살아 배고픔의 상태로 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되지 않겠는가? 이와같은 물음에 대한 답은 위에 있는 어린 아이와 ‘하나님 나라’의 교훈에서 해결된다. 공관복음서 저자들이 이 두 개의 교훈을 대조하여 어린 아이와 부자를 서로 대조하고 있다.여기서 부자와 어린 아이는 외견상의 부자와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와 대조하기에 적절한 단어는 어른이며 부자와 대조하기에 적절한 단어는 거지이기 때문이다. 부자와 어린 아이를 대조하는 것은 사람의 내면 세계를 대조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내면적 특성에 대하여 교훈하고자 하는 것이 기록된 저자의 의도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예수님께서 교훈하시고자 하시는 것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여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이 없이는 그 도래를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나라로 오신 예수님을 의지하여야만 갈 수 있는 것이다. 이 교훈은 또한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도래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73). 이와함께 ‘하나님 나라’는 영접하는 자만이 갈 수 있다고 하는 교훈에서 영접하는 행위는 바로현실 세계 가운데에서 행하여야 하는 현재적인 행동인 것이다. 이 행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며 앞으로 종말론적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에도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이다. 이와같은 예수님의 교훈은 바로 메세지로 그 메세지 가운데 이미 ‘하나님 나라’는 도래한 것이다. 4.세례요한과 ‘하나님 나라’. ( 마 11:11, 눅 7:28 ) 이 교훈을 통하여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 나라’가 현실 세계에 왔음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 교훈은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당신이 오리라고 예언된 메시야 입니까 ?”질문을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행한 일들 가운데 이미 메시야의 통치가 일어나고 있으며 예언자들의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말한 후에 세례요한과 하나님 나라의 사람과 비교하여 교훈하신다. ‘하나님 나라’는 객관적으로 이미 세상 가운데 들어왔다. 이제부터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육신의 여자가 낳은 가장 큰 사람인 세례요한 보다도 큰 자가 된다. 5.바리새인의 물음과 ‘하나님 나라’. ( 눅 17:20 ) ‘하나님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하고 묻는 바리새인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며 또한 여기있다, 저기있다고 지역을 가리킬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너희의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답변하고 계신다. 바리새인은 구약적 배경과 묵시문학적 배경 아래서 하나님 나라를 묻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현실 세계 가운데 한 지역을 택하여 건설한 후에 점차로 그 영역을 넓혀가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바로 그 한 지역이 자신들의 영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은 장소적인 ‘하나님 나라’가 아니며, 가시적인 건설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며, 오히려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왕권을 의미하는데 βασιλεια 가 공간적인 영역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이 교훈을 통하여 분명히 나타난다. 그 통치는 사람의 마음 속을 주관하기에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는 이 세대에 임한다. 예수님은 이미 이와같은 왕권의 통치가 세상 사람들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선언하신다. 6.세상의 일과 ‘하나님 나라’. ( 눅 9:60 - 62 )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이 아버지의 장사(葬事)를 지낸 후에 따르기를 원하였으나 예수님은 단호히 이를 거절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가족과의 작별을 요청하는 사람에게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말씀하신다. 이 교훈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절대성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여러가지 일과 함께 그 중의 하나로 취급 되어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 나라’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다. 그러기에 생명을 소유하는 일과 이 생명을 전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일 보다 귀중하고 긴박한 일임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신다. 7.유월절과 ‘하나님 나라’. ( 막 14:23, 눅 22:16,18 )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까지 포도나무 열매를 마시지 않으며, 유월절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세상 속에 온전히 이루어졌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릇된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가 단지 개인에 의한 주관적 성취의 성격만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은 이와같은 선언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나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너희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까지 유월절 식사를 하지 말아라’고 말씀하셔야 한다. 그러기에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선언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 종말론적으로 객관적으로 임하는 성격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의 어휘가 예수님의 교훈과 함께 사용된 부분들을 살펴 보았다. 여기에서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은 비유에서 나타난 것과 동일하게 현재성과 미래성 모두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 나라’는 그 어느 것 보다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과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임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와같이 임한 ‘하나님 나라’는 구약시대의 예언의 성취이며, 이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을 통하여 이 세대에 지속적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C. ‘하나님 나라’와 이적.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말씀과 비유를 통하여 이미 ‘하나님 나라’가 이 세대 가운데 임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살펴 보았다. 이제 이와같은 비유와 말씀들이 사실로 증명되는 것이 이적이다. ‘하나님 나라’의 어휘가 이적과 함께 사용되고 있는 부분은 유일하게 한 곳뿐이다. ( 마 12:28, 눅 11:20 ; 이 둘은 하나의 동일한 사건이다. ) 이 부분을 통하여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적이 ‘하나님 나라’의 이적이며 하나님의 통치하심이라고 인식하고 계셨다74). 예수님의 이적은 여러가지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마귀를 쫓아내며, 문둥병자를 깨끗케하며, 폭풍과 성난 물결을 잔잔케 하셨으며, 바다 위를 걸으셨으며,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는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이시다. 이와같은 이적은 과학적 사고양식을 가진 현대인에게는 과연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유발하고 있지만 당시의 사람들이나 초대 교회의 교임들에게는 전혀 문제 될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이적의 가능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 낸다는 사실에 대하여 바리새인들이 거짓이라고 몰아 부친 것이 아니라 누구의 권능으로 이와같은 일을 행하느냐 ? 가 관심의 촛점이였으며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이 귀신을 쫓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계셨다. ( 마 12:27 ) 이적은 자연과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이요, 하나님의 주권 행사로 초대 교회는 받아 들이고 있었으며, 또한 예수님의 이적은 예수님이 곧 메시야 이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겼다75). 누가복음은 실제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낸 사건과 연결하여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 반면에, 마가복음 3장 20절 부터 30절까지에서 단순히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으로 기록하고 있다. Otto Betz는 “예수님의 귀신축출 현상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징조( proxy )로서의 행동이다76) ."고 이해 하였다. 한편, 이적 행위가 복음의 선포행위와 병행으로 나타나고 있는 곳은 세례요한이 사람들을 보내 예수님이 오실 메시야인가?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을 때와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제자들이 해야할 일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한는 것과 이적을 함께 행하라고 명하실 때이다. 이와같은 것은 구약의 예언이 성취됨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구약성서 사 35:5 -6; 61: 1 를 인용하는 장면까지도 나타난다. 예수님은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에 대하여 단순한 두려움이나 놀라움을 느끼는 것을 기대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오히려 이와같은 감정적 반응 보다는 이적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 세대 안에 임하는 것을 보아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을 바라고 계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적은 비유나 교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의 초대이다. 예수님의 이적을 경험한 사람은 비유나 교훈을 듣고 즉각적인 결단을 내린 것과 같이 결단을 하여야 한다. 이와같은 예수님의 행적은 바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선포하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와 동일한 메세지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은 도성을 향하여 책망하시는 부분에서도 잘 알 수 있다.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 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 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 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 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 까지 낮아 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 더라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 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 11:21 참고 눅10:13 )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예수님의 이적 뒤에 숨어있는 비밀을 보게된다. 그것은 이적을 행하시고 난 뒤에 누가 이적을 베풀었는지 말하는 것을 금하시거나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돌려 보내시는 것에서 나타난다. 왜 어느 사람에게는 가서 이적이 발생한 것을 보이며 증거하라고 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어떤 사람에게는 증거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시는가? 예수님의 이적이 하나님 나라로의 초대라면 모든 사람들을 따르라고 하며, 또한 가서 이적이 일어난 것을 증거하라고 해야 맞지 않는가? 이와같은 것에 의문을 가진 브레데 ( William Wrede )는 ‘메시야의 비밀’77) 이라고 명명한다. 이 메시야 비밀을 초대교회나 마가의 창작으로 브레데는 규정을 하고 있으나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처음부터 왕의 통치를 가지고 행동하시기에 그 규정은 그릇된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행하신 이중적인 행동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예수님이 악령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금지 시킨 것은 악령들의 말이 인격적인 고백이 아니라는 것과 예수님이 자신의 실체를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각 사람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밝혀져야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78) .또한 치유의 이적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것을 금지 시킨 것은 그들이 아직 이적에 포함되어 있는 메세지를 깨닫지 못하고 이적 자체에 대한 경이로움만 보고 매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인격을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금지시켰다79) . 또한 아직까지 ‘하나님 나라’를 자신들의 영토에서 화려한 영광과 함께 도래할 것을 기대하고 있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적 메세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에 침묵을 명하신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의 어휘가 이적과 함께 사용된 부분을 살펴 보면서 이적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이적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위에 실현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표시인 동시에 사람들로 하여금 이적을 경험하여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초대의 메세지이다. 초대의 메세지가 전해 졌다는 것은 이미 객관적인 ‘하나님 나라’가 도래 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그의 행위를 통하여 사람들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추구하셨다. 이 만남은 곧 ‘하나님 나라’의 주관적인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적을 통해서도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이 이것이기에 이적은 우리를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으로 인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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