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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강해

by 【고동엽】 2021. 10. 7.

사도신경 강해

Ⅰ. 서론

1. 사도 신경의 기원

사도신경은 8세기에 이르러서야 오늘날의 형태와 똑 같은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400년 경 루피누스는 그의 저서 [사도신경 주석]에서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세계로 흩어지기 전에 한 자리에 모여서 그들이 서로 다른 메시지를 전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짧은 요강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마태복음 28:19를 확장시킨 형태로 되어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관한 교회의 신앙을 이 신조는 정의하고 있으며, 사도 신경은 모든 선교를 위한 설교의 기초가 되는 신앙의 근본적인 사항에 관한 교회의 신념을 선포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 틀림없다. 이 사도신경은 3세기 초반의 터툴리안의 저작물에서도 나타난다. 로마 교회에서는 기원 100년 경 이미 세례를 줄 때에 사용했던 고백문에서 사도신경의 신조와 같은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2. 신조의 필요성

신조는 첫째, 신앙을 정의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가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표명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규범과 모범과 표준을 제공해 주기 위해서 필요하다. 이단들로부터 신도들을 보호하고, 자신의 신앙과 사상을 검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셋째, 교육과 설교의 자료를 제공해 주기 위해 필요하다. 설교자가 활동할 수 있는 범위를 한정해 주며, 그가 만나게 되는 인간 상황의 모든 사건에 대하여 적용하여야 할 계시된 원리들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어떤 신조도 완전할 수는 없으며, 궁극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조는 그것이 작성된 시대의 언어와 사상적인 범주 안에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3. 내가 믿사오니

사도신경에서의 "내가 믿사오니"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가르치신 바가 사실이라는 확신에 대해서 자기의 전 생활을 내어 맡기는 결단이요, 고백이다. 하나님께서 죽은 이삭을 살려서라도 약속을 지키실 것을 믿고 이삭을 번제로 드린 아브라함처럼, 또한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경외함으로 방주를 만든 노아와 같이 하나님께 서 가르치신 진리를 확신하고 그 진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믿음이다. 신앙 고백은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처음 영접할 때 하는 일회적인 고백으로 종교적인 회심의 고백이다. 다른 하나는 매일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하루의 삶을 맡기며 하나님과의 친교를 확인하는 반복적인 고백이다. 사도신경의 "내가 믿는다"는 말은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우리의 삶과 신앙 생활의 근거이다.

Ⅱ. 사도신경 강해

사도신경은 마태복음 28:19에서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한 우리의 신앙 고백이다.

1. 하나님

1)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창 1:1; 사 45:12; 출 3:14,15; 출 6:3)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관념적인 신이 아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의 신이다. 창조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창조라는 말이 세 번 사용되었다. 첫 번째는 1:1에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다. 최초에 창조된 땅의 상태는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 둘째 창조라는 말이 움직이는 동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이는 움직이는 생명체를 창조할 때 사용되었다. 이는 생명의 창조는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말해 준다. 생명은 반드시 생명으로부터 나옵니다. 이것이 생명의 법칙입니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모든 생명이 창조되었다. 셋째, 창조라는 말은 인간을 창조할 때 사용되었다. 인간의 창조는 일반 생명의 창조와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영적인 존재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존재의 근원이시다. 우리의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생명의 청지기에 불과하다. 잠시 이 땅에서 관리하다가 다시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1:16에서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었으며,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주를 주관하시고,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주관하시고, 영혼을 가진 우리 인간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2,3)."라고 고백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피조물과 구별된 분이시요, 피조계에 속하지 아니한 창조주이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 그러므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2) 아버지를 믿사오며 (신 32:6; 삼하 7:14; 시 68:5; 사 63:16; 64:8; 말 2:10; 마 5:16, 45, 48; 6:6-8; 10:29; 롬 8:14; 히 12:5-8; )

신명기 32:6에는 "그는 너를 얻으신 너희 아버지가 아니시냐?"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하 7:14에는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라는 말씀이 있으며, 로마서 8:14에서도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그의 능력에 있어서는 하나님이시고, 그의 사랑에 있어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다."고 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을 표현함에 있어서 그것을 대신할 다른 칭호가 없다. 히브리서 12:5-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아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아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양육하시며 보호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육신의 아버지는 그 자녀를 사랑하는데 있어서 한계가 있다. 아버지도 근본적으로 연약하고 자기중심적인 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 사랑은 완전하고, 영원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2. 예수 그리스도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And in Jesus Christ his only (begotten) Son our Lord; who was conceived by th Holy Ghost, born of the Virgin Mary;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Hades, spirit-world]; the third day he rose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at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h and the dead.

1)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요 3:16-18; 요일 4:9; 요 1:14)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요한복음에 4번 사용되고 요한일서에 한 번 나온다(요일 4:9).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고 했다. 외아들이라는 말은 유일성(only)과 독특성(unique)을 나타내는 말이다. 외아들이라는 말은 출생이나 기원을 의미하기보다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요 5:20)" 또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을 가리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셨다(마 3:17) 이를 볼 때 외아들이라는 말은 곧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곧 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사랑하는 관계임을 말해 준다. 동시에 본질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한 것과 같이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한 본질을 가지신 분이심을 말해 준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고백했을 때 기뻐하시고,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축복하셨다(마 16:16).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는 곧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시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뜻이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서 예수님의 사역의 세 가지 직분을 말한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을 세울 때 그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 이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실 직분에 대한 암시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면에서 완전한 선지자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하늘에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신 영원한 제사장이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영원토록 왕노릇하시는 만왕의 왕이다. 주시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는 주님이시다는 고백은 초대 교회 신자들의 신앙고백이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님이시며, 구속의 주님이시다.

2)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마 1:18-25; 눅 1:26-38; 사 7:14)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who was conceived by th Holy Ghost, born of the Virgin Mary).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남녀의 성적인 관계를 통해서 태어나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성령께서 잉태케 하셨다는 뜻이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이 되신 기적의 사건이다. 동정녀란 결혼하지 않은 여자, 남자를 전혀 알지 못하는 처녀를 말한다. 그러므로 이는 생물학적인 자연법의 테두리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인간 상식 밖의 일을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이 동정녀에게 탄생하신 것은 첫째,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참 인간으로 오셨음을 말해 준다. 우리와 동일하게 어린아이로 태어나서 어른으로 성장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다. 둘째로 예수님이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말해 준다. 곧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시며, 동시에 죄가 없으신 거룩한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시고, 예수님이 죄 없으신 인간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대신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반드시 성령으로 잉태되어야 하고, 사람의 아들도 이 땅에 탄생하셔야 되었다.

3)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마 27장; 막 15장, 눅 23장; 요 18-19장)

예수님은 아무 죄 없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십자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사형방법이었다. 십자가 형벌은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 처형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참수형을 당했다. 다만 노예나 반역자나 살인 강도 등 흉악범들에게만 처형할 수 있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눅 23:14,15; 요 18:28; 19:4,6). 그러나 빌라도는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무죄한 자에게 가장 중한 십자가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법적으로 재판관인 빌라도의 책임이다. 그러면 죄 없으신 예수님이 그토록 잔인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외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기까지 버려 두셨는가? 이는 인간들이 받아야 할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시도록 하신 것이다. 성경은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으신 것은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대신 받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갈 3:13).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철저히 벌하셔야 했다. 죄를 처벌하지 않고 인간을 용서하신다면 하나님은 불의한 분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하시고 철저히 징계하셨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다.

예수님은 또 장사되셨다. 예수님은 무덤에 묻히셨다. 장사되었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거짓이 아니라 확실히 죽으셨음을 증거해 준다. 뿐만 아니라 헬라어 원본에는 음부에 내려 가셨다는 말이 있습니다. 음부란 죽은 영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에베소 4:8-10에는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 즉 땅 아래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다. 빌립보서 2:9-11에도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했다. 베드로 전서 3:18-20에도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이처럼 예수님은 지옥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영들에게, 구약에 수없이 예언된 예수님의 탄생, 십자가, 부활, 메시야의 예언이 성취된 사실을 선포하셨다. 이는 구약 시대에 죽은 사람들에게까지 언약의 성취가 증거되었음을 뜻한다.

4)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어(마 28장; 막 16장; 눅 24장; 요 20장)

예수님은 장사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은 예수님이 죄 없이 죽임을 당하셨으며,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음을 증거해 준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로 부활하셨다(고전 15:20). 예수님의 부활은 나사로의 부활과는 차원이 다른 부활이다. 나사로의 부활은 다시 죽을 몸으로, 죽기 전의 몸으로 부활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다시 죽지 아니할 몸으로 영생의 부활로 부활하셨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도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부활한다는 보증이 되는 사건이다(고전 15:23). 부활은 초자연적인 사건이다. 옛 생명의 연장도 아니고 발전도 아니다. 옛 생명이 완전히 죽은 다음에 나오는 생명의 역사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후에는 반드시 부활이 있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말해 준다.

5)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막 16:19-20; 눅 24:50-53; 행 1:9-11; 딤전 3:16; 요 20:17; 엡 4:8-10; 히 4:14)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시고, 승천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이 역사적인 사건인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도, 승천도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면 하늘에 오르셨다고 했는데 하늘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늘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늘(sky)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heavens)이다. 스카이는 공간적 의미에서 하늘을 가리키고, 해븐즈는 차원적인 의미에서의 하늘을 가리킨다. heavens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며 활동하시는 보이지 않는 영역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다는 사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음을 말해 준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주적 사건이었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가 되심을 말해 준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신다.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거룩한 대제사장으로서 직분을 감당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그의 육체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나오는 모든 자들의 죄를 담당하시고, 중보자가 되어 주신다. 또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는 말은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신 왕이 되심을 말해 준다(계 1:5; 5:11,12; 엡 1:21; 빌 2:9-11). 특히 사도신경에는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했다. 그만큼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역사의 주관자로서 살아 계신다. 예수님은 원수로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행 2:35-36). 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심으로 성령을 보내셨다. 예수님의 승천의 사건은 우리 모든 신자들이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보증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집에 우리가 거할 처소를 예비하시고 다시 와서 우리를 데려 간다고 약속하셨다.

6)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마 24:30; 25:31; 행 1:11; 계 22:7,12,20)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심을 믿는다. 예수님의 재림은 모든 인류의 마지막 때이며, 만물의 마지막 때이다(벧후 3:8,9). 예수님의 재림은 신구약에 1518번이나 약속되었으며,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에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셨으며, 사도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하고 대답했다. 그때에 예수님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셨다. 그래서 죽기까지 죄인들을 섬겨 주시고, 모든 인류의 죄를 십자가에 짊어지셨다. 그러나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다시 오시는 그날에는 심판장으로 오신다. 그날에 산 자와 죽은 자, 다시 말하면 그때까지 살아 있는 사람이나, 그전에 죽은 사람이나 모두 심판하러 오신다. 성경은 세상 끝 날 곧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심판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다(시 96:13; 전 3:17; 마 11:22; 25:31-46; 계 20:11-14). 그날에는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신다(마 25:31-46; 계 20:13).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고 예수님 앞에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우리 모든 인간들 앞에는 죽음과 심판이 있다. 사도신경은 우리 주가 재림하실 때 심판이 있음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의 결론으로 삼고 있다.

Ⅲ. 성령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해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1) "성령을 믿사오며"

성령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그리스도를 잉태케 하셨고, 이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게 하셨다(눅 1:35).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그를 메시야라 하셨다(마 5:16; 막 1:10; 행 10:38). 성령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그의 전 지상 사역을 수행하게 하셨고(마 12:28; 눅 4:14; 요 1:32)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시키셨다(고전 15:45). 초대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역사한 동일한 성령께서 창조시에 수면에 운행하셨고(창 1:2),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으며, 백성의 왕들에게 기름을 부으셨고, 믿는 자들에게 기도의 영감을 불어넣으셨다고 확신하였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이미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던 동일한 성령께서 마지막 때의 선물로서 부은 바 되었다고 경험하였고 이해했으며 선포했다(행 2:1-21). 신약은 오순절 때 주어진 성령께서 교회의 생명의 근원이시며, 복음의 설교를 통하여 신앙을 일깨워주시며, 세례를 통하여 새 지체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합체시킨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신앙의 불을 당시기고(고전 12:3), 신자와 공동체의 삶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은사들을 공급하신다. 성령은 기도를 불러일으키고(롬 8:15-16), 하나님의 자녀들을 자유를 불러일으킨다(롬 8:12-16). 성령은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보혜사이시다(요 14:16). 마지막 때에 바로 이 성령께서 전 창조의 세계를 하나님의 영광 중 완성시키실 것이다(계2:17). 사도적 교회는 구약에 나타난 성령에 대한 증거를 이런 식으로 수용하면서 신앙의 빛에 비추어 역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는 하나의 비인격적인 능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로고스를 한 인격이신 분으로 이해하면서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 역시 하나의 신적인 인격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구원의 경세(the economy of salvation)에 참여하시는 하나님의 신적 위격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시 33:6; 겔 37:1-4; 롬 1:3-5,8:14-17).

성령은 삼위 하나님 가운데 제 3위로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수께서 객관적으로 이루어 놓은 구원을 예수님을 믿는 사람 각자의 구원이 되도록 적용하는 역할을 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성령은 어떤 영적인 힘이나 감화력이 아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다를 바 없이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활동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 "이와 같이 우리 성령도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2:11)" 이와 같이 성령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인격적인 존재이다. 요한복음 14:16에 보면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했다. 그분은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그것을 확신시켜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신다.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는 것이다(요 16:8).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 16:9-11). 그리고 성령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자비와 인내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갈 5:22). 성령께서는 복음의 선포와 성례전들의 축하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을 창조하시고 지탱하시고 계신다. 성령께서는 풍요롭고 다양한 은사들을 베풀어주신다. 이 같은 은사들은 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사회 봉사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 은사들에는 가르침, 예언, 치유, 기적, 방언 및 영 분별(고전 12:4-11; 27-20) 같은 것들이 있다. 이 모든 은사들은 공동체의 공동선을 위하여 개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인데(고전 12:7), 이런 은사들이 바르게만 사용되면 우리들이 하나의 세례에 의해서 부름 받은 바 하나의 몸의 통일성을 강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엡 4:4,5).

2)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우리는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을 믿는다. 거룩한 공회란 세상과 구별된 보편적인 교회라는 말이다. 우주적 보편적 교회이다. 고대 사회의 종교는 장벽을 세우는 것이었다. 로마와 헬라의 공식적인 종교는 모두 국가 종교였다. 그들의 신들이 하는 일은 다른 모든 나라들과 대립하는 그들의 나라의 국가적인 이익을 돌봐주어야 하는 일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종교는 국수주의적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장벽이 없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구분이 없었다(골 3:11). 교회란 에클레시아라는 말로서 구약 성서에서 이스라엘의 회중을 가리킨다. 곧 교회란 하나님의 메시지를 기다리는 백성들의 모임이다. 둘째로 헬라적인 배경으로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초대와 명령을 받아들인 사람들로 구성된 모임이다. 신약 성경은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교회라 한다. 교회(church)라는 말은 쿠리아콘(kuriakon)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주님께 속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원래의 본질적인 면에서 볼 대 주님께 속한다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사귐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라는 말을 흔히 건물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고 있다. 신약 성서에는 그러한 용법이 한 번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서로간에 충성과 헌신을 맹세한 사람들을 의미하였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패거리를 뜻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라는 뜻이다. 제자라는 호칭이다.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신자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를 통해서 형제애와 새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는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성도란 "거룩한 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에서 벗어난 죄를 씻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성도는 교회 공동체의 유기적인 연합 활동과 교제를 통하여 서로 배우고 격려를 받는다. 사도행전 2:42에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라는 말씀과 같이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서로 가르침을 받는 유익을 얻는다. 성도의 교제 중 가장 거룩하고 신비한 교제는 바로 성만찬이다. 이 예식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의 자녀와 교회 공동체가 세상에서 성별된 단체임을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성찬 예식을 통하여 멸망의 사람과 하나님의 자녀를 구분하는 성별 예식으로 삼으셨다. 성만찬은 성도 교제의 극치이다. 왜냐하면 이 성만찬 예식을 통하여 인종과 문화와 역사를 초월하여 온 세계의 교회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친교를 말한다. 성도의 교제의 내용은 말씀을 나누는 말씀의 교제, 같이 모여 기도하는 기도의 교제, 같이 모여 찬양하는 찬양의 교제, 물질을 나누는 봉사의 교제,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 주는 권면의 교제, 간증을 나누는 간증의 교제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마 5:24 형제간에 불편한 관계에 있는 경우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라"는 명령을 주셨다.

3)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죄를 사해 주시는 것과' 라고 했는데 사실은 '죄를 사함 받는 것과' 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우리 신자들은 죄를 사함 받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다. 예레미야 31:34에 의하면 "내가 그들의 죄를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하셨다. 시편 103:12에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멀리 옮기셨다고 했다. 요한일서 1:9에는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죄 사함을 받았지만 매일의 삶 속에서 또 많은 죄를 짓고 산다.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 죄를 자백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자백함과 동시에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 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야 한다.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히 4:16)"이라고 하였다.

4)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우리 사도 신경에는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고 했는데 이는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는다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곧 우리 몸의 부활을 믿는 것이다. 고전 15:13에서는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였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였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은 우리 모든 신자들의 몸의 부활의 보증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했다. 요 11:25에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40에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살리리라"고 하셨다. 초대 교회의 메시지의 핵심은 부활의 복음이었다. 고전 15:54에는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 했다. 사도들도 몸의 부활을 주장했고, 썩을 몸과 죽을 몸이 썩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하게 되는 신령한 몸으로 육체가 반드시 변화될 것을 믿었다.

5)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아멘

영생이란 무엇인가?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영생이란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안다는 말은 인격적인 깊은 사귐을 통해서 인격적인 만남으로 아는 것이다. 곧 사랑의 관계성을 의미한다. 우리 하나님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다. 영생하시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고, 친교를 하게 되면 우리는 자연히 영생을 누리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이니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곧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에 우리는 영생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5:24에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다. 영생이란 무작정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이다. 영생하는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와 바른 관계성을 맺고, 유지하는 것이 영생이다. 이 관계성은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지금이나, 육신을 벗고 신령한 몸을 입은 이후나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이다.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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